결혼은 꼭 해야 하는가 - 결혼의 의무보다 더 깊은 ‘결합’의 질서

 

성경은 결혼을 매우 귀하게 말합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서 주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시고, 남자와 여자가 ‘한 몸’을 이루는 질서를 세우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창2:18)

 

스베덴보리 역시 결혼을 단순히 인간 사회를 유지하거나 자녀를 낳기 위한 제도로 보지 않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결합에는 더 깊은 영적 원형이 있으며, 그것은 ‘선’(good)과 ‘진리’(truth)의 결합이고, 가장 높은 차원에서는 주님과 교회의 결합에 그 근원을 둡니다. 이런 의미에서 결혼은 창조 질서 안에 놓인 매우 깊고 거룩한 결합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결혼이 창조 질서에 속한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성경 자체가 모든 개인에게 결혼을 의무로 부과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9장 12절에서 여러 이유로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음을 말씀하셨고, 바울도 고린도전서 7장에서 독신의 삶을 인정합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마19:12)

 

그러므로 결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하고 귀한 질서이지만, 결혼 여부 자체가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결혼애’(Conjugial Love, 1768)를 통해 보면 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참된 결혼 사랑은 지상에서 일정 기간 함께 사는 법적·사회적 제도에 그치지 않고 영원한 삶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결혼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결혼 사랑의 가능성이 영원히 닫히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을 향한 내적 삶을 살며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면, 사후에도 자신과 내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배우자를 만나 결합할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현세의 미혼은 영원한 독신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반드시 결혼해야 한다’는 압박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자신과 내적으로 맞는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는데도 ‘하나님께서 결혼하라고 하셨으니 누구하고든 결혼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혼의 본질을 오히려 거꾸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혼의 핵심이 두 사람의 참된 결합이라면, 결혼이라는 외적 형식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잘못된 관계를 억지로 결혼이라는 형식 안에 넣는 것이 독신으로 정직하게 살아가는 것보다 더 영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결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특히 ‘혼자가 편하기 때문에’, ‘내 자유를 침해받기 싫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맞추며 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모든 깊은 결합을 거부한다면 그 내면의 동기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결혼 사랑에는 자기중심성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처럼 여기며 두 사람이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질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프로프리움’(proprium)을 지키기 위해 타인과의 결합 자체를 거부하는 독신과, 자신의 형편과 소명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독신은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내적으로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결혼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참된 결혼 사랑 안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법적으로는 부부이면서 서로를 지배하고 이용하고 상처 입히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혼인신고가 두 사람의 영혼을 자동으로 결합시키지는 않습니다. 반면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정결과 책임, 이성에 대한 존중, 다른 사람을 자기 자신처럼 배려하는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더 근본적인 질문은 ‘결혼했는가, 하지 않았는가?’가 아니라 ‘어떤 사랑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중요한 성경적 난제가 따라옵니다. 주님은 부활에 관하여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30)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마22:30)

 

그렇다면 천국에는 결혼이 없다는 뜻일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천국에서 남녀의 결합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지상의 혈통을 이어가기 위한 자연적 혼인과 천국에서 이루어지는 영적 결합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별도로 충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천국에도 결혼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스베덴보리의 결혼관을 이해하는 중요한 다음 단계입니다.

 

결국 ‘결혼을 꼭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습니다. 결혼은 주님께서 세우신 매우 귀한 창조 질서이지만, 모든 사람이 지상에서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결혼 여부가 사람의 구원을 결정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이라는 외적 상태보다 그 사람 안에서 어떤 사랑이 형성되고 있는가입니다. 결혼한 사람에게는 배우자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참된 결합을 이루어 가는 길이 있고,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장차 참된 결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질문을 조금 바꾸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반드시 결혼해야 하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나는 누군가와 참으로 하나 될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결혼의 궁극적인 의미는 단순히 배우자를 ‘얻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랑에서 벗어나 선과 진리가 결합하듯 서로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가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무조건 지상에서 배우자를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결혼 사랑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되어 가는 것’입니다.

 

 

 

SL.2,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 가나’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가는가 - 마지막 행위와 영원한 운명 ‘자살하면 무조건 지옥에 간다’고 단정하는 것은 성경적으로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신중하지 못한 말입니다. 자살은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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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5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a rib was built into a woman)는 말씀에는 누구도 문자로부터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더 많은 것들이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그 가장 깊은 내용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는 그러한 것이며, 말씀의 모든 생명은 여기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이 구절도 그 가장 깊은 내용에서는 천국의 결혼을 바라봅니다. 천국의 결혼은 proprium 안에 존재하는 그러한 성질의 것이며, 이 proprium은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합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인간의 proprium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 결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결합된 모든 지혜와 지성을 소유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하는 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어떠한 것인지는 간단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하지만, 그것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으로밖에는 알지 못한다는 점만 말해 두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곧 변화를 퍼셉션하는 그러한 보편적인 애정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 안에 있는 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도 바로 이 proprium을 의미합니다. The words “a rib was built into a woman” have more things inmostly concealed in them than it is possible for anyone ever to discover from the letter; for the Word of the Lord is such that its inmost contents regard the Lord himself and his kingdom, and from this comes all the life of the Word.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regarded in its inmost contents. The heavenly marriage is of such a nature that it exists in the own, which, when vivified by the Lord,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Man’s own thus vivified has a perception of all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and consequently possesses all wisdom and intelligence conjoined with inexpressible happiness. But the nature of this vivified own, which is called the “bride and wife” of the Lord, cannot be concisely explained. Suffice it therefore to observe that the angels perceive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although when not reflecting on the subject they know no other than that they live from themselves; but there is a general affection of such a nature that at the least departure from the good of love and truth of faith they perceive a change, and consequently they are in the enjoyment of their peace and happiness, which is inexpressible, while they are in their general perception that they live from the Lord. It is this own also that is meant in Jeremiah, where it is said:

 

반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 (렘31:22) Jehovah hath created a new thing in the earth, a woman shall compass a man. (Jer. 31:22)

 

이 구절에서도 천국의 결혼이 의미되며, 여기서 ‘여자’(woman)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합니다. 이 여자에 관하여 ‘둘러싸는 것’(to compass)이라는 표현이 사용되는 까닭은 이 proprium이, 살이 된 갈빗대가 심장을 둘러싸는 것처럼 둘러싸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It is the heavenly marriage that is signified in this passage also, where by a “woman” is meant the own vivified by the Lord, of which woman the expression “to compass” is predicated, because this own is such that it encompasses, as a rib made flesh encompasses the heart.

 

해설

AC.155는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말씀의 속뜻을 지금까지보다 훨씬 깊은 층위로 이끕니다. AC.151에서는 갈빗대가 생명을 얻지 못한 인간의 proprium이고 여자는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라고 했습니다. AC.154에서는 그 자체로서의 인간의 proprium은 악하고 흉측하지만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은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55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은 ‘천국의 결혼’을 바라보고 있다고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말씀의 가장 깊은 내용이 주님 자신과 그분의 나라를 바라보며, 바로 여기에서 말씀의 모든 생명이 나온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졌다’는 말씀을 단순히 인간의 proprium에 관한 심리적 설명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도 이미 속뜻이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가 중심에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는다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주님과 어떤 관계 안에 들어가는가를 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여기서 ‘천국의 결혼’이라고 합니다.

 

그는 천국의 결혼이 proprium 안에 존재하며, 그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을 때 주님의 ‘신부와 아내’(bride and wife)라고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결합이 인간의 proprium을 없애 버린 뒤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됩니다. AC.151에서 갈빗대가 여자로 지어지는 것을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서 더욱 깊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자기 자신이 없는 존재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proprium을 생명 있게 하셔서 주님과 결합할 수 있게 하십니다.

 

이렇게 생명을 얻은 proprium에는 놀라운 성질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모든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 결과 지혜와 지성을 누리고, 거기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결합됩니다. 여기서도 순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와 지성이 인간 자신에게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퍼셉션함으로써 그것들을 누리게 됩니다. 앞에서 계속 강조된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라는 질서가 천국의 결혼 안에서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생명을 얻은 proprium의 성질을 간단히 설명할 수 없다고 명시합니다. 따라서 우리도 여기서 천국의 결혼이나 주님의 신부와 아내에 관한 전체 교리를 미리 끌어와 채울 필요가 없습니다. 대신 스베덴보리는 지금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천사들의 상태 한 가지를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특별히 의식하며 생각하고 있지 않을 때에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압니다. 이 짧은 설명은 AC.140 이후 계속되어 온 문제에 매우 중요한 답을 줍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산다’는 경험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천사들조차 자기 생명을 끊임없이 ‘지금 이 생명은 주님에게서 흘러오고 있다’고 의식적으로 분석하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으로부터 사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장 깊은 상태에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마치 자기 자신의 것인 듯 보이는 proprium’이라는 AC.140의 표현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생명은 실제로 주님으로부터 오지만 인간과 천사는 그것을 참으로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받아 누립니다.

 

그 보편적인 퍼셉션은 단순한 교리 지식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즉시 변화를 퍼셉션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명제를 머리로 암기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생명의 질서 안에서 실제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질서에서 벗어나는 순간 상태의 변화를 느끼며,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보편적인 퍼셉션 안에 있을 때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와 행복을 누립니다. AC.154에서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행복을 퍼셉션한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렘31:22의 ‘여자가 남자를 둘러싸리라’를 인용하여 같은 천국의 결혼을 확증합니다. 여기서 ‘여자’(woman)는 다시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을 의미하고, ‘둘러싸는 것’(to compass)은 살이 된 갈빗대가 심장을 둘러싸듯 이 proprium이 둘러싸는 성질을 가진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신체의 모양을 보고 우리가 임의로 상응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이 현재의 갈빗대와 여자, 심장의 관계 안에서 그 의미를 직접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붙들어야 합니다.

 

결국 AC.155는 지금까지의 proprium 논의를 매우 중요한 지점으로 이끕니다. 그 자체로 죽어 있고 악한 인간의 proprium이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으며, 그 생명을 얻은 proprium이 주님의 ‘신부와 아내’가 되고, 그 안에서 천국의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상태의 천사들은 자기 자신의 생명처럼 자유롭게 살아가면서도 가장 깊은 곳에서는 자기들이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산다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삶의 경험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이 참으로 살아 있게 되는 근원을 밝혀 줍니다. AC.140부터 계속되어 온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과 자기 자신의 것처럼 경험되는 proprium’의 문제가 여기서 상당히 깊고 아름다운 답을 얻습니다. (AC.155)

 

 

 

AC.156, 창2:23, ‘뼈 중의 뼈와 살 중의 살 - 속 사람과 결합한 proprium’ (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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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4, 창2:22, ‘악 자체인 인간의 proprium과 주님에 의해 생명을 얻은 proprium’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창2:22) AC.154악하고 거짓된 것은 무엇이든 인간의 proprium이 아니거나 인간의 proprium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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