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5에서 특히 눈에 띄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가장가까운내적의미’(the nearest interior sense)입니다.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간 이들은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하지 못하고‘오직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만을 이해했다고 합니다.그렇다면 왜 그냥‘내적의미’라고 하지 않고‘가장가까운’이라고 했을까요?이 말은 말씀 안에 여러 층의 내적 의미가 있다는 뜻일까요?
먼저AC.65가 직접 말하는 범위부터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이 글은‘가장가까운내적의미’가 정확히 몇 번째 층이며 그보다 더 안쪽에 어떤 의미들이 몇 단계로 존재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 이 표현 하나만 가지고‘문자적의미→영적의미→천적의미’라는 완성된 층위표를 만들고,AC.65의 사람들이 그 가운데 정확히 어느 단계에 있었다고 확정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가는 설명입니다.
그러나‘가장가까운’이라는 말이 아무 의미 없이 붙은 것도 아닙니다.적어도 이 표현은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를 말씀의 문자와의 관계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즉 스베덴보리는 단순히‘내적의미’라고 하지 않고‘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고 구체적으로 말합니다.그러므로 말씀의 내적 의미에 더 깊은 차원이나 질서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하는 표현인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앞AC.64에서도 천사들은 말씀의 말과 이름에서 완전히 떠나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했습니다.따라서AC.64-65를 함께 보면 말씀의 문자적 의미와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구별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그러나 그 내적 의미 안의 세부적인 층위와 서로의 관계는 스베덴보리가 그것을 직접 설명하는 다른 본문들을 함께 보아야 정확합니다.
이 점은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보여 줍니다.스베덴보리의 한 단어가 더 큰 교리를 암시한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우리가 그 교리 전체를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가까운’이라는 말을 발견하면‘아,그렇다면내적의미에도더깊은질서가있을수있겠구나’하고 기억해 두고,뒤에서 스베덴보리가 그 질서를 직접 설명할 때 연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이 지각한 것은 문자 자체가 아니라‘가장가까운내적의미’였을까요?AC.65가 직접 알려 주는 것은 그 결과입니다.그 의미는 너무 아름다웠고,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했으며,그들을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즉 이번 글의 초점은 그 의미가 내적 의미의 몇 번째 층인가를 분류하는 데 있기보다,문자에서 드러나지 않는 그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 것이었는가에 있습니다.
특히‘연속의질서’라는 표현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됩니다.내적 의미는 단어마다 임의의 상징 하나를 붙여 놓은 사전처럼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서로 이어지는 질서 가운데 지각됩니다.창세기1장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것도 좋은 예가 됩니다.빛,궁창,식물,광명체,생물,사람이라는 각각의 표현이 따로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연속된 흐름 안에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가장가까운내적의미’를 단순히‘문자바로밑에숨어있는첫번째암호’처럼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내적 의미는 비밀 암호를 해독하듯 단어 하나를 다른 단어 하나로 바꾸는 작업보다 훨씬 깊습니다.AC.65의 표현대로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를 가지고 천사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의미입니다.
또 이것을 인간이 노력하면 곧 천사처럼 직접 지각할 수 있는 어떤 단계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AC.65는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무엇을 이해했는지를 말하는 것이지,독자에게‘가장가까운내적의미를직접지각하는훈련법’을 가르치는 글이 아닙니다.우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의 문자를 읽고,AC를 통하여 스베덴보리가 밝힌다고 주장하는 속뜻을 배우며,그 말씀을 삶에서 받아들입니다.천사적 지각 자체를 재현하려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는 표현 때문에 말씀의 문자를 낮추어서도 안 됩니다. ‘가장가까운내적의미’는 바로‘무엇의’내적 의미인가 하면 말씀의 내적 의미입니다.문자와 아무 관계 없이 따로 존재하는 영적 지식이 아닙니다.인간에게 주어진 말씀의 문자 안에 이러한 깊이가 있다는 것이AC.65의 놀라운 주장입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는 표현은 말씀의 문자와 구별되는 내적 의미 가운데 문자에 가장 가까운 어떤 의미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지만,AC.65는 그보다 더 깊은 의미들의 수나 정확한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그 문제는 관련 본문에서 더 분명해질 때까지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오히려AC.65가 우리에게 먼저 보여 주려는 것은 그 내적 의미의‘위치’보다 그‘성질’입니다.그것은 아름답고,완전한 연속의 질서를 가지며,천사들을 깊이 감동시키는 것이어서 그들이‘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이 한 장면만으로도 스베덴보리가 왜 바로 앞AC.64에서 속뜻을‘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불렀는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말씀을읽고있을때,어떤이들이하늘의첫입구뜰까지들려올라갔고,그곳에서저와대화를나누었습니다.그들은그곳에서는말씀속의어떤단어나글자도전혀이해할수없고,오직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만을이해할수있다고말했습니다.그리고그내적의미가너무도아름답고,연속의질서가너무도완전하며,그들을너무도깊이감동시켜서,그들은그것을‘영광’(glory)이라고불렀다고하였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해설
AC.65는 바로 앞 AC.64와 함께 읽어야 가장 잘 이해됩니다.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 천사들은 말씀의 문자와 이름이 아니라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65에서는 이제 그 설명을 하나의 경험으로 이어 갑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이들이 ‘하늘의첫입구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곳에서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말씀의 어떤 단어나 글자도 이해할 수 없었고, 오직 ‘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만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자신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에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먼저 이 글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실제 영적 경험으로 제시하는 기록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5는 비유를 만들어 ‘천사라면아마이렇게말씀을읽을것이다’라고 상상하는 글이 아닙니다. 저자는 자신이 말씀을 읽고 있을 때 실제로 어떤 이들이 하늘의 첫 입구 뜰까지 들려 올라갔고 그들과 대화했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이 글을 해설할 때에는 한편으로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실제 경험으로 제시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독자에게도 반드시 같은 경험이 일어나야 한다거나 우리가 그 영적 경험의 세부 구조를 본문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설명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늘의첫입구뜰’이라는 표현도 그런 경우입니다. 처음 읽으면 ‘천국의어느층인가?첫째천국보다더낮은곳인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5는 여기서 천국의 지도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 ‘비교적낮은단계의하늘영역’이라고 확정하기보다, 본문 그대로 ‘하늘의첫입구뜰’이라고 두고 이 경험의 핵심에 집중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곳에 들려 올라간 이들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속의 ‘어떤단어나글자도전혀이해할수없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AC.64에서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와 역사적 이름을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것을 지각한다고 했던 설명과 직접 이어집니다. 그러나 여기서 ‘천사에게는단어가전혀없고오직추상적인의미만있다’는 일반적인 언어 이론까지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65가 직접 말하는 것은 그들이 그곳에서 스베덴보리가 읽고 있던 말씀의 단어나 글자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가까운내적의미에서뜻하는것’을 이해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는 표현은 특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문자바로안쪽의영적의미이며그보다더깊은곳에는천적의미가있다’는 식으로 층위를 확정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작과 뒤의 설명들을 함께 보면 말씀의 여러 의미에 관한 더 풍부한 교리가 나오지만, AC.65자체는 여기서 그 구조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원문이 말하는 그대로 ‘가장가까운내적의미’라고 두고, 그 의미조차 천사들에게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게 지각되었는지를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표현 자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초보 독자에게도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므로 별도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각한 내적 의미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연속의질서’입니다. 특히 ‘insuchorderofsequence’라는 표현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가 서로 관계없는 상징들의 모음처럼 지각된 것이 아니라 어떤 연속적인 질서 가운데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창1을 읽으면서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빛에서 궁창으로, 식물에서 광명체로, 생물에서 사람으로 이어지는 설명은 각 단어의 뜻을 하나씩 풀어 놓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흐름을 이루었습니다. 다만 이 창1의 사례는 AC.65의 ‘연속의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좋은 예이지, 이 한 구절만으로 말씀의 모든 내적 의미가 어떤 구조로 연결되는지를 다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의미는 또한 그들을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도 먼저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AC.65는 그들이 왜 ‘glory’라는 단어를 사용했는지에 관한 상응론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광은언제나신적진리가사랑과결합되어나타나는상태이므로여기서도정확히그것을뜻한다’고 이번 한 문장에 완성된 정의를 가져오기보다, 그들이 말씀의 내적 의미의 아름다움과 완전한 연속의 질서에 깊이 감동되어 그것을 ‘영광’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부터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영광’을 단순히 ‘정말아름다웠다’ 정도의 감탄사로 축소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이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한 것은 바로 ‘말씀의내적의미’였습니다. 따라서 적어도 이 문맥에서 ‘영광’은 말씀의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 안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고 감동적인 것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강한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영광’이라는 말이 어떤 속뜻을 갖는지는 그 표현을 직접 해설하는 관련 AC에서 충분히 살펴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AC.65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것은 이 일이 ‘제가말씀을읽고있을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에서 말씀을 읽고 있었고, 그와 대화한 이들은 하늘의 첫 입구 뜰에서 그 말씀의 단어나 글자가 아니라 가장 가까운 내적 의미에서 뜻하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이 장면은 AC.64에서 말한 인간의 문자와 천사적 지각 사이의 관계를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곧바로 ‘사람이성경을읽을때마다반드시특정천사들이동시에그내적의미를읽는다’는 식으로 모든 세부 작동 방식을 AC.65하나에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는 동안 이러한 경험을 했다고 증언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은 말씀의 문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질문으로도 이어집니다. ‘천사들은단어나글자를이해하지않는다니,그렇다면인간에게도단어와문법과원어는별로중요하지않은것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결론은 AC.65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하는 방식과 자연계의 인간이 말씀을 읽는 방식은 같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은 실제로 단어와 문장으로 주어져 있으며, 우리는 그 문자를 통해 말씀을 읽습니다. 따라서 천사들이 문자에서 떠난 의미를 지각한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문자를 소홀히 하라는 명령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말씀의 문자를 더욱 신중하게 대해야 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읽는 바로 그 말씀 안에 천사들이 지각하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이기 때문입니다.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대신, 주님께서 말씀을 문자로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두셨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원어 연구나 정확한 번역도 그 자체로 속뜻은 아니지만 말씀의 문자를 정확하게 읽기 위한 귀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또 AC.65를 읽고 ‘나도천사들처럼말씀의내적의미를직접보고싶다’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 자체는 독자에게 그런 경험을 추구하라고 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가 경험한 영적 개방과 우리가 말씀을 읽다가 깊은 깨달음이나 감동을 얻는 일을 곧 같은 종류의 경험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말씀을 읽다가 깊이 감동받고 삶이 변화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을 곧 AC.65의 ‘하늘의첫입구뜰’에서 이루어진 경험과 동일시할 근거는 이번 글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특별한 경험은 특별한 경험대로 존중하고, 우리의 말씀 읽기는 말씀 읽기대로 주님 앞에서 충실하게 이어 가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AC.65는 독자의 관심을 신비 체험 자체보다 ‘말씀’으로 돌립니다. 이 경험에서 놀라운 것은 어떤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거기서 만난 것이 말씀의 내적 의미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 아름답고, 연속의 질서가 너무 완전하며, 그들을 너무 깊이 감동시켜 ‘영광’이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이 가리키는 중심도 결국 스베덴보리가 아니라 말씀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의 목적이 독자로 하여금 ‘나도스베덴보리처럼영계를보고싶다’는 데 머물게 한다면 중심이 옮겨진 것입니다. AC.65가 보여 주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매일 읽을 수 있는 말씀 안에, 인간의 눈에는 문자로 보이지만 천사들에게는 아름답고 완전한 질서 가운데 지각되어 ‘영광’이라 불리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AC가 중요하다면 바로 그 말씀의 깊이를 열어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도 말씀과 AC의 순서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읽었기 때문에 이 경험이 일어났고, 그들이 지각한 것도 말씀의 내적 의미였습니다. AC.65는 새로운 영적 체험을 말씀 위에 올려놓는 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내적 의미가 천사적 지각에서 얼마나 아름답고 질서 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짧은 글은 AC.64의 설명을 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인간에게는 말씀의 단어와 글자가 있고, 그 안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의미가 있으며, 그 의미의 아름다움과 연속의 질서는 그들에게 ‘영광’이라 불릴 만큼 깊은 것이었습니다.
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성경’이라는 말보다‘theWord’,곧‘말씀’이라는 표현을 매우 자주 사용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경건한 표현일까요,아니면 스베덴보리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진 용어일까요?
AC.64자체에서는 분명히‘theinternalsenseoftheWord’,곧‘말씀의속뜻’을 말합니다.그리고 그 속뜻을‘말씀의가장참된생명’이라고 합니다.이어서 천사들이‘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지를 설명합니다.따라서 적어도 이번 문맥에서‘theWord’는 단순히 책의 일반 명칭을 말하는 것 이상으로,문자 안에 속뜻을 가지고 천사들에게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되는 신적 계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말‘성경’과‘말씀’은 실제 교회생활에서는 상당히 겹쳐 사용됩니다. ‘성경을읽는다’와‘말씀을읽는다’가 같은 행동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습니다.그러므로‘성경’이라는 말은 낮고‘말씀’이라는 말만 영적이라고 구별할 필요는 없습니다.중요한 것은 한국어 단어 자체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스베덴보리가‘theWord’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문맥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로 가면‘말씀’의 범위에 관한 별도의 설명이 나오고,우리가 흔히‘성경66권’이라고 부르는 범위와 그의 엄밀한 의미의‘theWord’가 어떻게 관계되는가 하는 문제도 생깁니다.이것은 실제로 중요한 주제입니다.그러나AC.64한 문장만 가지고 그 전체 정경론을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속뜻이있는책에는주님의생명이있지만다른성경책에는주님의생명이없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그렇게 말하면 마치 성경 안에 신적인 책과 비신적인 책이 단순히 둘로 갈리고,후자는 영적으로 가치가 없는 것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정경과 속뜻에 관하여 무엇을 말하는지는 관련 본문들을 직접 모아서 따로 다루어야 정확합니다.
이번AC.64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스베덴보리가 여기서‘말씀’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문자적 의미에서 드러나지 않는 속뜻이 있으며,천사들은 그 말씀을 문자와 이름으로 지각하지 않고 그것들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합니다.따라서‘theWord’는 이 글에서 속뜻과 천사의 지각을 함께 품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용어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가AC를 읽는 태도에도 중요합니다. ‘말씀의속뜻’이라고 할 때 중심 명사는‘속뜻’만이 아니라‘말씀’입니다.속뜻이 말씀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입니다.아르카나 역시AC가 말씀 밖에서 새로 만들어 내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밝혀진다고 주장하는 아르카나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theWord’를 우리말로‘말씀’이라고 옮기는 것은 자연스럽고 의미도 잘 살아납니다.한국 교회에서‘말씀’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와 성경을 가리키는 익숙하고 권위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다만 이것을 근거로 일상적인‘성경’이라는 표현을 피해야 한다거나 잘못된 표현이라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AC와 성경의 관계를 뒤집지 않는 것입니다.AC.64가‘말씀의속뜻’을 설명한다고 해서AC가 말씀보다 높은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스베덴보리의 주장은 자신이 말씀 밖에 새로운 계시 체계를 세웠다는 것이 아니라,바로 그 말씀 안에 문자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왜성경이아니라말씀이라고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스베덴보리가‘theWord’라고 할 때 그는 단순한 종교 문헌의 명칭보다,주님에게서 온 계시이며 그 문자 안에 내적 의미를 가진 말씀이라는 성격을 강조합니다.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럽게‘말씀’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그 정확한 범위와 어떤 성경책들이 스베덴보리의 엄밀한 의미에서‘말씀’에 속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도의 관련 본문을 충분히 확인하여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독법에서는 한 가지를 더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말씀’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마다AC를 높이기 위해 성경을 낮추는 것이 아니라,오히려AC가 끊임없이 독자를 말씀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AC.64가 말하는 속뜻도,아르카나도,천사들의 지각도 모두‘말씀’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바로말씀의속뜻(theinternalsenseoftheWord)이며,말씀의가장참된생명입니다.이는문자적의미에서는전혀드러나지않습니다.그안에담긴아르카나는너무나많아서,그것들을모두풀어내려면수많은책으로도충분하지않을것입니다.여기에서는다만극히일부만제시되었는데,그것도이말씀이거듭남을다루고있으며,그거듭남이겉사람(theexternalman)에서속사람(theinternalman)으로나아간다는사실을확인해주는것들뿐입니다. 천사들은말씀을이렇게지각합니다.그들은문자속에있는것들,심지어단어하나의가까운의미조차도전혀알지못합니다.하물며말씀의역사서와예언서에매우자주등장하는나라,성읍,강,사람의이름들은더더욱알지못합니다.그들은오직그말들과이름들이의미하는것들만을관념으로가집니다. 그래서낙원에있는아담을통해그들은태고교회를지각하지만,그교회자체가아니라그교회의주님에대한신앙을지각합니다.노아를통해서는태고교회의후손들에게남아아브람시대까지계속된교회를지각합니다.아브라함을통해서는그개인을전혀지각하지않고,그가표상한구원하는신앙을지각합니다.이와같이천사들은말과이름에서완전히떠나영적이고천적인것들을지각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해설
AC.64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에 대한 해설을 마친 자리에서, 스베덴보리가 지금까지 자신이 무엇을 설명해 왔는지를 한 걸음 물러서서 밝히는 글입니다. 그는 이것을 ‘말씀의속뜻’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말씀의 ‘가장참된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1장을 읽으면 문자적으로는 천지와 빛, 궁창과 물, 식물과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그리고 사람의 창조가 나옵니다. 그런데 AC.6부터 AC.63까지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 안에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이 들어 있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AC.64는 이제 바로 그것이 말씀의 속뜻이며, 그 속뜻은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문자적의미에서는전혀드러나지않는다’는 말을 ‘문자적의미는중요하지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은 말씀을 버리고 그 밖에서 만들어 낸 별도의 영적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그 말씀 안에 있는 뜻입니다. 창1의 빛, 물, 식물, 해와 달과 별, 생물과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들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담긴 속뜻도 밝혀집니다. 따라서 AC를 읽으면서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문자는낮고속뜻은높으니이제문자는필요없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말씀의 문자 안에 우리가 처음에는 알지 못했던 깊은 뜻이 있다는 것이 AC.64의 출발점입니다. 특히 우리의 독법에서는 언제나 말씀 자체가 먼저이고 AC는 그 말씀 안에 담긴 속뜻을 밝혀 주는 해설이라는 순서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안의 아르카나가 너무 많아 수많은 책으로도 충분히 펼쳐 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창1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제시한 것은 그 가운데 ‘극히일부’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의 설명이 창세기 1장의 모든 속뜻을 다 밝혔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을 알려 줍니다. 그가 특별히 골라 제시한 것은 ‘이말씀이거듭남을다루고있으며,그거듭남이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나아간다는사실’을 확인해 주는 아르카나들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거듭남에관한여섯단계’라고 이해했다고 해서 그 말씀의 내적 내용 전체를 다 파악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64자신이 지금까지 제시한 것은 극히 일부라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듭남이겉사람에서속사람으로나아간다’는 표현도 그대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 이른다는 질서도 여러 차례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AC.64의 이 문장은 지금 그것을 설명하는 문장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창1의 여섯 날에 나타난 거듭남의 진행이 ‘fromtheexternalmantotheinternal’, 곧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이 두 표현을 성급히 하나가 틀리고 하나가 맞는 것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에게서 생명이 유입되는 질서와, 사람이 거듭남을 경험하며 외적인 것에서 내적인 것으로 인도되는 진행을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이후 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더 자세히 설명할 때 점차 분명해질 것입니다.
AC.64의 두 번째 큰 주제는 천사들이 말씀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말씀의 문자에 있는 것들을 알지 못하며, 심지어 단어 하나의 가까운 의미조차 알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역사서와 예언서에 등장하는 나라와 성읍, 강과 사람의 이름도 알지 못하고, 오직 그 말들과 이름들이 의미하는 것들을 지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천사들이 성경의 역사에 무지하다는 일반적인 지식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에게 그 말씀이 어떻게 지각되는지를 설명하는 문맥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 예가 아담과 노아와 아브라함입니다. 천사들은 낙원의 아담을 통해 태고교회를 지각하지만 거기에서도 태고교회라는 역사적 교회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그 교회의 ‘주님에대한신앙’을 지각합니다. 노아를 통해서는 태고교회의 후손들에게 남아 아브람 시대까지 계속된 교회를 지각하고,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을 지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표상한 ‘구원하는신앙’을 지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통해 말씀의 고유명사들이 천사에게 단순한 역사적 이름으로 머무르지 않고 그 이름들이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으로 지각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아담도노아도아브라함도실제인물이아니었다’는 결론을 끌어내서는 안 됩니다. AC.64의 관심은 그 인물들의 역사성 여부를 논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할 때 ‘아브라함’이라는 개인에게 머무르지 않고 그가 표상하는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속뜻을 인정하는 것과 문자에 기록된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구별이 특히 중요합니다.
또 ‘천사들은말과이름에서완전히떠나영적이고천적인것을지각한다’는 말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사람 이름과 사건을 무시해야 한다는 지침으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연계에서 문자로 주어진 말씀을 읽습니다. 천사의 지각 방식과 인간의 말씀 읽기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64가 보여 주는 놀라운 점은 우리가 자연계에서 같은 말씀을 읽는 동안 그 말씀에는 천사들이 지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뜻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은 인간과 천국을 잇는 방식으로 주어져 있다는 더 큰 주제의 입구가 여기서 열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AC.64는 ‘성경이야기를이제역사로읽지말고상징으로만읽으라’는 선언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훨씬 깊습니다. 말씀에는 인간이 문자만 보아서는 알 수 없는 속뜻이 있으며, 그 속뜻이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천사들은 바로 그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합니다. 인간에게는 아담, 노아, 아브라함이라는 이름과 이야기가 보이지만, 천사에게는 그 이름들이 의미하는 교회와 신앙에 관한 것이 지각됩니다. 자연계의 문자와 천국의 지각이 하나의 말씀 안에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속뜻’은 인간이 본문을 읽다가 자유롭게 떠올리는 영적 감상과도 구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을 읽으며 ‘나는아브라함처럼용감하게살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유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AC가 말하는 속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AC.64에서 아브라함은 그가 표상하는 ‘구원하는신앙’과 연결됩니다. 속뜻은 독자의 주관적인 연상이나 감동이 아니라 말씀의 말과 이름들이 실제로 의미하고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에 관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르카나’라는 말도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 안에 우리가 문자만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수많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재미있는 비밀 지식을 많이 안다는 뜻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1에서 밝혀진 거듭남의 질서처럼 말씀 안에 감추어져 있는 깊은 내용들을 가리킵니다. ‘아르카나’와 ‘속뜻’이 정확히 같은 말인지, 서로 어떻게 구별되는지는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생길 질문은 ‘그렇다면AC가말하는‘말씀’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경 66권 전체와 정확히 같은 범위인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중요한 질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theWord’라는 말을 상당히 엄밀한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문제를 잘못 설명하면 ‘어떤성경책에는주님의생명이있고다른성경책에는없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할 위험이 있으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충분히 구별하여 살펴보겠습니다.
AC.64를 읽고 나면 지금까지의 창1해설도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첫째 날의 빛부터 여섯째 날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따라온 것은 단순히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에 임의로 붙인 영적 비유가 아니라, 그가 ‘말씀의속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를 설명하면서 천사들의 말씀 지각을 제시합니다. 천사들은 인간이 보는 문자와 이름에 머무르지 않고 그 말과 이름이 의미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설명의 출발점과 돌아갈 곳은 여전히 말씀입니다. AC를 많이 읽을수록 성경의 문자가 시시해지고 AC의 설명만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간다면 오히려 순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AC.64가 말하는 아르카나는 말씀 밖에 있는 비밀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아르카나이고, 속뜻 역시 말씀의 속뜻입니다. 따라서 AC의 역할은 말씀을 대신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가 읽고 있던 바로 그 말씀 안에 얼마나 깊은 생명이 들어 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AC.64의 첫 문장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이것이바로말씀의속뜻이며,말씀의가장참된생명입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 신앙과 사랑에 관한 영적이고 천적인 세계가 열립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 준 것조차 그 헤아릴 수 없는 아르카나 가운데 ‘극히일부’라고 말합니다. AC.64는 그래서 창1해설의 결론인 동시에, 앞으로 우리가 말씀과 AC를 어떤 관계로 읽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중요한 출발점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