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3마지막에는 처음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하늘,곧천적낙원으로인도되는데,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다루겠습니다.’지금까지 창세기1장을 한 사람의 거듭남의 과정으로 읽어 왔는데,그 사람이 죽었다는 말도 없는데 갑자기‘하늘’로 인도된다고 하니 자연스럽게‘이것이사후천국에들어간다는뜻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먼저 가장 중요한 단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뒤에 붙인 말입니다. ‘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다루겠습니다.’따라서AC.63만 가지고‘하늘,천적낙원’의 뜻을 모두 확정하려 하기보다,이것이 다음 장의 일곱째 날 설명으로 넘어가는 연결 문장이라는 사실을 먼저 보는 것이 좋습니다.
문맥상 이 사람이 여기서 육체적으로 죽었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여섯 상태를 말했고,AC.63은 여섯째 날 끝에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고 전투가 그치며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그러므로 이어지는‘하늘,곧천적낙원으로인도된다’는 말 역시 지금까지 설명해 온 거듭남의 연속선상에서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곧바로‘하늘은장소가아니라오직마음의상태라는뜻이다’라고 결론 내려도 될까요?그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스베덴보리는 실제 사후의 천국도 분명히 말합니다.따라서 이번 표현 하나를 근거로‘천국은장소가아니고인간내면의상태일뿐이다’라고 하면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를 지나치게 축소하게 됩니다.
반대로‘하늘로인도된다’는 말이 있으니 이 사람이 여기서 죽어 실제 사후 천국으로 들어간다고 읽는 것도 현재의 문맥과 맞지 않습니다.지금 설명되는 것은 창조의 여섯 날에 대응하는 인간의 거듭남이고,스베덴보리는 그 다음 상태를 다음 장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현 단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하늘,곧천적낙원’이 여섯째 날 이후에 이어지는 거듭남의 상태와 관계된다는 것입니다.그것이 정확히 어떤 상태이며 왜‘하늘’과‘천적낙원’이라고 불리는지는 창2와 이어지는AC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밝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AC.63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에게 일종의 예고편과 같습니다.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창조가 이제 새로운 상태로 넘어갑니다.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치고,악한 영들이 떠나며 선한 영들이 대신하고,사람은‘하늘,곧천적낙원’으로 인도됩니다.그리고 스베덴보리는 바로 거기서 멈추며‘다음장에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여기서 멈추는 것이 좋겠습니다.물론AC전체를 이미 알고 있다면 일곱째 날,천적 인간,안식,천상의 사람의 상태 등을 미리 연결할 수 있습니다.그러나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따라 설명하는 순서를 그대로 경험하게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창세기1장이 끝났으니 이제 창세기2장의 말씀 자체가 먼저 나오고,그 말씀을AC가 어떻게 여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과AC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도 중요합니다.AC.63의 마지막 한마디를 가지고 다음 장의 의미를 우리가 먼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먼저 창2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속뜻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설명하는지 따라가는 것입니다.AC는 말씀보다 앞서 독자를 끌고 가는 책이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것을 밝히는 해설이어야 합니다.
따라서‘살아있는사람이어떻게하늘로인도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현재 단계의 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이것은 사망 장면을 묘사하는 문장이 아니라 거듭남의 여섯째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는 문맥에 있습니다.그러나‘하늘,곧천적낙원’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스베덴보리 자신이‘다음장에서’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우리도 그 설명을 기다리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1:31)
AC.63
그동안주님은계속해서인간을위하여악과거짓에맞서싸우시며,여러싸움을통해그를진리와선안에굳게세우십니다.이싸움의시간은곧주님께서역사하시는시간이며,그래서예언자들가운데서는거듭난인간을하나님의손가락의일(theworkofthefingersofGod)이라고도부릅니다.그리고사랑이주된원리가되어작용하기전까지주님은쉬지않으십니다.일이이만큼진전되어신앙이사랑과결합하게되면,그상태를‘심히좋았더라’(verygood)라고합니다.이는그때에주님께서그를자신의모양으로움직이시기때문입니다.여섯째날의끝에서악한영들은떠나가고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하며,인간은하늘,곧천적낙원으로인도되는데,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다루겠습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 “very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해설
AC.63은 창1:31의 ‘하나님이지으신그모든것을보시니보시기에심히좋았더라’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전투에서 실제로 누가 일하고 계셨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바로 앞 AC.62는 사람이 ‘조금씩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63은 그 과정의 이면에서 ‘주님은계속해서인간을위하여악과거짓에맞서싸우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거듭남을 인간 자신의 영적 성취 과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전투가 있고 그가 그 전투를 실제로 겪지만, 그를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고 그 전투들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이것은 AC.59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지만, 그것들을 선을 향해 기울이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심지어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사람은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이제 그 흐름을 ‘전투의시간은주님께서일하시는시간’이라고 압축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시험과 전투를 겪는다는 것과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전투를 겪지만, 그 전투 가운데 그를 붙드시고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능력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시간은주님께서일하시는시간’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실패, 질병, 갈등을 곧바로 ‘지금주님께서특별한영적전투를하고계신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63의 문맥은 거듭남 가운데 악과 거짓에 맞서는 전투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모든 인생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만능 공식으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남의 전투 가운데 주님께서 사람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계속 일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에게는 싸움으로 경험되는 그 시간이 동시에 주님께서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손가락의일’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손가락’이라는 단어 자체를 가지고 곧바로 ‘가장미세하고정교한섭리’를 뜻한다고 별도의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AC.63이 이 표현을 사용하는 문맥의 핵심은 ‘일’의 주체입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손가락의일’입니다. 거듭남이 인간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라는 앞 문장을 다시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으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이주된원리가되어작용하기전까지’ 쉬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랑이주된원리가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많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61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고,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은 이해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것은 의지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3은 그 사랑이 ‘주된원리’로 작용할 때까지 주님께서 쉬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원문 자체가 이어서 ‘그때전투가그친다’고 하므로, 사랑이 주가 되는 것과 전투가 그치는 것이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사랑이주가되면모든선한행동이아무노력없이자동으로흘러나온다’거나 ‘그뒤로는내적갈등이나시험이전혀존재하지않는다’고까지 확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이 여섯째 날의 거듭남의 전투가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 그친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이후의 모든 영적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속되는지는 뒤의 설명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 상태를 ‘심히좋았더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AC.60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60에서는 앞선 상태들이 ‘좋았더라’였던 것과 달리 이 상태가 ‘심히좋았더라’인 이유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같은 사실을 다시 말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 더 덧붙입니다. ‘그때에주님께서그를자신의모양으로움직이시기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사람을움직이신다’고 하면 마치 사람이 자기 의지와 자유를 잃고 주님께 조종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AC.63의 문맥에서 그런 뜻으로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앞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고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한다고 했고,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그 사람의 생명에서 주된 것이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정확히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움직이신다’를 곧 강제나 조종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정도로 충분하겠습니다.
여기서 ‘자신의모양’이라는 표현도 앞의 ‘하나님의형상’과 연결됩니다. AC.62는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고, AC.63은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선해져서 주님 없이도 잘 살아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람 안에서 점점 더 생명의 중심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여전히 ‘그를’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주님과 인간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거듭난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매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악한영들은떠나가고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한다’는 것입니다. AC.59에서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면, 처음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러면이제악한영들과의관계가완전히끊어진다는뜻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본문 이해에 직접 필요한 것이므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원문이 말하는 사실을 그대로 붙들면 됩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악한영들은여전히똑같이주변에있지만영향력만약해진다’는 식으로 바꾸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영들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충분한 근거와 함께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하늘,곧천적낙원으로인도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즉시 ‘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다루겠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도 여기서 너무 빨리 답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늘’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사후에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는 뜻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무조건 ‘살아있는동안마음속에형성되는천국상태일뿐’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선 이 표현이 창2의 일곱째 날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의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은 앞 AC.62에서 우리가 일곱째 상태에 관한 질문을 서둘러 완성하지 않은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AC.63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며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칩니다.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하며, 사람은 하늘 또는 천적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그 ‘천적낙원’이 정확히 무엇이며 일곱째 상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다음 장이 설명할 몫입니다. AC가 스스로 ‘다음장에서’라고 한 것을 우리가 이번 해설에서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63의 중심은 인간이 얼마나 열심히 싸워 높은 상태에 도달했느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입니다. 주님이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십니다. 주님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다음 상태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창1:31의 ‘하나님이지으신그모든것을보시니보시기에심히좋았더라’라는 말씀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주어 역시 ‘하나님’입니다. AC.60-63은 ‘심히좋았더라’의 속뜻을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하여 밝혔지만, 그 모든 과정의 주체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지으신’ 것입니다. AC.63은 여섯째 날의 마지막에서 바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강하게 밝혀 줍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손가락의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