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며,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을 행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는데,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선들을 ‘연한 풀’(tender grass), 또한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그리고 나중에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라고 합니다. The third state is that of repentance, in which the man, from his internal man, speaks piously and devoutly, and brings forth goods, like works of charity, but which nevertheless are inanimate, because he thinks they are from himself. These goods are called the “tender grass,” and also the “herb yielding seed,” and afterwards the “tree bearing fruit.”
해설
AC.7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주님의 자비가 첫 번째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AC.8의 두 번째 상태에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기 시작하고,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드러났습니다. 이제 AC.9의 세 번째 상태에 이르면 사람의 말과 행위에 실제적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분명하게 ‘회개의 상태’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회개를 단순히 자신의 잘못을 슬퍼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감정으로만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AC.9에서 회개는 실제 말과 행위의 변화와 함께 나타납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속 사람으로부터’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앞의 AC.8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하는 것들의 구별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세 번째 상태에서는 그 속 사람으로부터 사람의 말과 행위에 어떤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회개는 단순히 외적인 행동 몇 가지를 고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뜻밖의 말이 나옵니다. 사람이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고 실제로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는데도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여전히 생기가 없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AC.9 자체가 곧바로 밝혀 줍니다. ‘그가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가 선한 일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실제로 선을 행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의 근원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세 번째 상태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선한 행위의 유무만으로 그 상태를 판단할 수 없습니다. 같은 선한 행위라도 그것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 하는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AC.9에서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생기 없는’ 선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생기 없다’는 말을 ‘그 행위는 아무 가치도 없다’거나 ‘실제로는 악한 행위다’라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분명히 ‘선들’이라고 부르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아직 그 선의 참된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사람이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이어질 네 번째 상태와 비교하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AC.10에서는 사람이 사랑에 감동되고 신앙으로 밝아지는 상태가 나타납니다. 따라서 AC.9의 세 번째 상태는 거듭남이 이미 완성된 상태가 아니라 그 과정 가운데 있는 상태입니다. 선이 실제로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그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는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의 선들을 창1:11-12에 나오는 식물들로 표현합니다. ‘연한 풀’, ‘씨 맺는 채소’, 그리고 나중에는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AC.9에서는 이 세 식물 각각의 세부적인 상응을 따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연한 풀은 반드시 이것, 씨 맺는 채소는 반드시 저것, 열매 맺는 나무는 또 다른 특정 상태’라고 세밀하게 나누기보다, 이 식물들이 세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선들을 표현한다는 사실을 우선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다만 그 순서 자체는 눈여겨볼 수 있습니다. 연한 풀에서 씨 맺는 채소로, 그리고 열매 맺는 나무로 표현이 이어집니다. 실제 창1 본문에서도 땅에서 식물이 돋아나고 씨를 맺으며 열매를 맺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자연적 창조의 모습을 사용하여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에서 선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AC.9 한 단락만으로 그 각 식물에 세밀한 심리적 단계를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람이 이 단계에서 실제로 행동한다는 사실입니다. AC.7에서는 첫 움직임이 주님의 자비였고, AC.8에서는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드러났습니다. AC.9에서는 사람이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사람 안에서 아무런 응답도 일어나지 않는 수동적인 과정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행동 가운데 아직 하나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선을 행한다고 느끼고, 그 선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상태는 인간의 행동을 부정하는 단계가 아니라, 그 행동의 생명과 근원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아직 온전히 알지 못하는 단계입니다.
이 점 때문에 AC.9의 ‘회개’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회개했다고 해서 사람의 영적 인식이 한순간에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이전과 다른 말을 하고 선한 행위를 시작하면서도, 여전히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돌릴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이러한 불완전한 상태를 지나 더 깊은 질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내가 선을 행했으니 이것은 내 선이다’라는 생각과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므로 선한 행동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모두 AC.9의 질서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실제로 말하고 행합니다. 그러나 그 선의 생명과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상태에서 점차 벗어나야 합니다. 그 다음의 거듭남 상태들이 바로 그 방향을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세 번째 상태의 선을 무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생기 없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선들’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완전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단계를 건너뛰거나 무가치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AC.9에서 가장 중요한 대조는 ‘선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보다 ‘선을 행하지만 그것을 누구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느냐’에 있습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이미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지만, 아직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바로 그 때문에 그 선들은 아직 생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창1의 식물들이 넷째 날의 해와 달보다 먼저 등장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사람에게 선한 말과 행위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사랑과 신앙의 참된 생명이 어떻게 그 안에서 밝혀지는지는 다음 상태에서 더 분명해져야 합니다. AC.9은 그 직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세 번째 상태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람은 회개하여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선을 행하기 시작하지만, 그 선을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선에는 아직 참된 생명이 없다.’ 이것이 AC.9이 말하는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입니다.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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