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4.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AC.334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에서 ‘폭력을 가한다’는 말은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신앙이나 체어리티는 사람이 아니므로 어떻게 그것들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억누르고 파괴하며, 더 나아가 자기의 악과 거짓을 위해 왜곡하여 사용하는 영적인 폭력을 뜻합니다. 단순히 신앙이 없거나 체어리티가 부족한 상태보다 훨씬 심각한 것입니다.

 

가인 계열의 처음부터 살펴보면 이 차이가 잘 보입니다. 처음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없애 버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인정하고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남아 있었고, 주님께서는 그것이 완전히 파괴되지 않도록 ‘가인의 표’로 보존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리된 신앙이 계속 발전하면서 체어리티는 소멸되고, 교리는 왜곡되고, 거기에서 다시 여러 이단이 생겨났으며, 마침내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AC.334는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이제는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들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전혀 모른다면, 그에게 체어리티가 없다고 할 수는 있어도 그가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했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고, 더 나아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 자체를 비틀어 ‘이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한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이제 그는 단순히 체어리티를 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진리를 자기 악에 복종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폭력을 가한다’는 말에 훨씬 가까운 상태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과 진리를 알고도 거짓으로 바꾸는 것은 다릅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진리를 이용하여 거짓을 진리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말씀을 자기 욕망이나 권력,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고, 신앙의 언어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며, 하나님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높인다면, 신앙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그 안의 진리는 거꾸로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진리가 악을 고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진리를 붙잡아 자기에게 봉사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에 속한 것에 가하는 영적인 폭력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폭력’의 핵심에는 ‘질서를 뒤집는 것’이 있습니다. 본래 진리는 사람의 악을 드러내고 선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진리를 자기 악에 맞추어 바꾸면, 이제 진리가 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악이 진리를 다스리게 됩니다. 본래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해야 하는데, 가인적 질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올라섭니다. 이것이 계속되면 결국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나중에는 신앙 자체도 왜곡됩니다. 처음에는 ‘분리’였던 것이 마지막에는 ‘지배와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4:23의 라멕의 말이 바로 이것을 표상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여기서 사람과 소년을 죽이는 것은 속뜻으로 단순한 살인 사건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파괴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어지는 상세 해설에서 각각의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더 세밀하게 다루게 되겠지만, AC.334의 개요 단계에서는 ‘죽인다’는 것이 곧 교회 안의 선과 진리라는 생명을 잃게 하는 영적인 폭력이라는 큰 그림을 먼저 붙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단순한 악보다 더 심각한 ‘모독’과 연결하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모독은 거룩한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알고 받아들인 사람이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는 데서 문제가 생깁니다. 말씀을 모르면서 악을 행하는 것과 말씀을 붙들고 악을 정당화하는 것은 영적으로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후자의 경우에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 인간의 proprium을 섬기는 수단으로 뒤집혀 버립니다. 거룩한 것을 거룩하지 않은 목적에 끌어다 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34는 이것을 ‘그 모독이 극에 이르렀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을 교회 차원에서 생각하면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체어리티가 약해졌다는 것과, 체어리티를 오히려 신앙에 방해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다릅니다. 어떤 교회에서 진리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교회의 권력이나 명예, 이익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것도 다릅니다. 전자는 쇠약이나 무지일 수 있지만, 후자는 선과 진리에 적극적으로 ‘폭력을 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특히 악을 악이라고 지적해야 할 말씀이 오히려 그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선과 진리의 본래 기능이 완전히 뒤집힌 것입니다.

 

개인에게 적용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을 아직 잘 모르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말씀을 많이 알면서 그것을 자기 합리화에 사용하는 것입니다. AC를 많이 읽고 속뜻을 많이 안다고 하더라도, 그 진리가 자신의 악을 보게 하고 고치게 하는 대신 ‘나는 남들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안다’는 자기 우월감과 자기 사랑을 강화한다면, 진리의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한 것입니다. 진리는 proprium을 낮추기 위해 주어졌는데, proprium이 오히려 진리를 자기 것으로 붙잡아 자신을 높이는 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 역시 아주 미세한 형태에서 시작되는 ‘진리에 대한 폭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을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분리에서 폭력으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떼어 놓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질서의 전도가 계속되자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진리가 왜곡되고, 신앙 자체가 사라지며, 마침내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자기 악과 거짓에 복종시키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바로 이것이 AC.334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표현의 깊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상태가 극에 이르렀을 때, ‘아다와 씰라’로 상징되는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전 교회가 단순히 약해진 정도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안에서는 교회의 생명이 회복되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강제로 꺾어 이전 교회를 되돌리는 대신, 그 종말 가운데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결국 AC.334에서 말하는 ‘폭력’은 한 교회가 왜 종말에 이르고, 새로운 교회가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는 매우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습니다.

 

 

 

AC.334, 창4:23-24, ‘아다와 씰라’라는 새 교회가 일어났을 때의 상황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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