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동엽 목사가 자신을 ‘교회지기’라고 부르며 목회자를 ‘등대지기’에 비유하는 대목입니다. 화려한 강대상 위에서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는 목회자보다 이름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며 생명을 위해 봉사하는 등대지기가 참된 목자의 모습에 더 가깝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이 출발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천국의 질서는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가’보다 ‘어떤 쓰임(use)을 사랑하여 수행하는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자신의 지위나 영광을 위해 일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쓰임을 사랑하고, 그 쓰임을 통해 이웃에게 선이 흘러가기를 기뻐합니다. 그러므로 이름 없이 빛을 비추며 배들의 길을 지키는 ‘등대지기’라는 비유에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 삶의 중요한 한 면이 담겨 있습니다.
더욱 주목할 부분은 이동엽 목사가 과거 자신의 목회적 야망을 돌아보며 ‘그 꿈이 누구의 꿈이었는가?’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는 웅장한 교회를 세우고 수천, 수만 명을 모으며 능력 있게 설교하는 목회자가 되기를 원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꿈’이라기보다 ‘제 자아가 꾸는 꿈’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proprium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그 일을 통해 인정과 명예와 영향력을 얻으려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면서도 내면에서는 자신의 영광을 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큰 교회를 세웠느냐 작은 교회를 섬겼느냐가 아닙니다. ‘누구를 위해 그것을 원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대형 교회를 섬기면서도 주님과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낮출 수 있고, 작은 교회를 섬기면서도 ‘나는 세속적인 대형 교회 목사들과 다르다’는 영적 우월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언제나 외적인 규모보다 그 일을 움직이는 ‘사랑의 방향’을 봅니다.
이 영상의 중심부에서 매우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동엽 목사는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상당히 다른 한 집사님을 만납니다. 그는 전광훈 목사를 강하게 지지하는 보수적 신앙인이었지만, 동시에 이동엽 목사의 설교를 거의 모두 듣고, 그의 구원관과 여러 신앙적 주장에 깊이 공감합니다. 이동엽 목사는 이 만남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사람들을 ‘내 말에 동조하는 사람’과 ‘동조하지 않는 사람’으로 나누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보수주의자가 따로 있고, 진보주의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한 사람’이라는 중요한 통찰에 도달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와 상당히 잘 만납니다. 영계에서 사람의 본질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지상에서 어느 정치적 진영에 속했는가가 아니라 그의 ‘지배적 사랑’입니다. 사람 안에는 수많은 생각과 의견과 지식과 감정이 함께 존재하지만, 그것들을 궁극적으로 하나로 묶는 중심은 그가 무엇을 가장 사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사람 안에도 진실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진보적인 사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대로 어느 쪽에 속하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집단만을 사랑하면서 상대를 멸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 사람은 보수니까 이런 사람’, ‘저 사람은 진보니까 저런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한 인간의 내면을 그의 외적인 의견 몇 가지로 축소하게 됩니다.
이 점에서 이동엽 목사가 경험한 자기반성은 상당히 의미 있습니다. 그는 ‘하나 됨’을 말하면서도 자기 안에 사람을 나누는 마음이 있었다고 인정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도 바로 이런 식으로 진행됩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의 악을 모두 알고 그것을 제거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은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proprium을 조금씩 드러내십니다. ‘나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자신이 사람들을 분류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로 그때 회개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그러므로 이 집사님과의 만남은 단순한 ‘뜻밖의 좋은 만남’이라기보다 이동엽 목사 자신의 내면을 비추어 준 하나의 거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이 영상은 여기서 정치와 신앙의 관계라는 훨씬 어려운 문제로 들어갑니다. 이동엽 목사는 전광훈 목사의 개인적인 애국심이나 정치 활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 곧 기독교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하나님의 일로 동일시하는 것을 문제 삼습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연계의 질서와 시민적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국가, 법률, 직업, 가정, 사회적 책임은 모두 인간이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장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것을 추구하려면 땅의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 역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은 자신의 직업과 시민적 책임을 성실히 수행하면서 그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동엽 목사의 주장에 한 가지 중요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영상 후반에는 ‘기독교인이 세상의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하늘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의 것들을 모두 희생하고 포기하고 내려놓아야 한다’는 방향의 표현이 나옵니다. 이 표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스베덴보리의 관점과는 거리가 생깁니다. 천국을 준비하는 삶은 세상에서 도피하는 삶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자신의 의무를 신실하게 수행하되 그것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도구로 만들지 않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상인은 정직하게 장사하고, 공무원은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며, 정치인은 공공선을 위해 정치하고, 목회자는 영혼의 선을 위해 목회합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의 일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떤 사랑에서 하느냐’입니다.
이 원리는 정치 참여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비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불의한 제도를 바로잡고 약자를 보호하며 공동선을 위해 행동하는 일은 오히려 이웃 사랑의 한 형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동원하거나, 특정 정치적 선택을 곧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거나, 자신과 다른 정치적 선택을 하는 사람을 신앙적으로 열등한 사람으로 규정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그 순간 정치적 확신이 신앙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이 정치적 확신을 섬기기 시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동엽 목사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땅의 나라를 뒤섞지 말라’는 문제의식에는 충분히 귀 기울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서도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단순히 ‘교회와 정치를 섞으면 안 된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무엇이 무엇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섬기면 질서가 바로 서지만,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욕망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정치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니고 애국심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 진영의 승리, 권력, 지배, 증오 같은 자연적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거룩하게 포장할 때 발생합니다. 반대로 정치적 행동이 진실과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고, 그 과정에서도 상대방을 인간으로 존중하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면 정치 역시 하나의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영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정치적 힘과 대조하는 부분도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이동엽 목사는 로마의 압제 아래 있던 예수님이 정치적·군사적 힘으로 로마를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를 지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십자가는 단순히 정치적 비폭력의 모범보다 훨씬 깊은 사건입니다. 주님은 세상 나라를 정복하려 오신 것이 아니라 지옥의 권세와 싸우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시며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다시 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싸움은 사람을 죽이는 싸움이 아니라 악과 거짓을 정복하는 영적 전쟁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를 정치적 승리의 프로그램으로 읽는 것은 복음의 중심을 놓칠 위험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영상에서 말하듯 ‘공산당이 싫으면 그들과 맞서 싸우지 말고 그들의 손에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표현까지 그대로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강조하려는 강한 수사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악에 저항하지 말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선을 보호하기 위해 악을 제어해야 할 때가 있으며, 사회에는 법과 질서와 공적 정의가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악한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에 악을 제어하는 것과, 선과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악을 제어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행동은 비슷해 보여도 내적인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악에 저항하지 않는 것’과 ‘악을 미워하지 않으면서 악을 제어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구약의 전쟁과 진멸을 오늘날 문자 그대로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이동엽 목사의 지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서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성경 해석이 이동엽 목사의 문제의식을 훨씬 더 깊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는 속뜻이 있으며, 특히 구약의 전쟁들은 인간 내면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 전쟁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는 본문을 오늘날 다른 종교인이나 정치적 반대자를 공격하라는 명령으로 옮겨 오는 것은 말씀의 영적 목적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멸해야 할 ‘가나안 족속’은 무엇보다 우리 밖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주님을 대적하는 악과 거짓입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불상을 부수거나 다른 종교의 성소를 훼손하면서 그것을 ‘우상 파괴’라고 부르는 행위에 대한 이동엽 목사의 비판도 훨씬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가장 위험한 우상은 돌이나 나무로 만든 형상 자체보다 인간 안에서 하나님보다 높아진 자기애와 세상 사랑입니다. 밖의 우상을 깨뜨리면서 자기 안의 지배욕과 멸시와 증오를 그대로 품고 있다면 그는 영적으로 우상을 제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종교적 열심이라는 이름 아래 proprium을 강화할 수도 있습니다. 참된 영적 전쟁의 전장은 먼저 자기 자신 안에 있습니다.
다만 영상에서 ‘유대교는 그렇게 할 수 있다’, ‘구약만을 믿는 유대교는 그렇게 투쟁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부분은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 유대교 전체를 구약의 진멸 전쟁과 직접 연결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가 될 수 있고, 특정 민족이나 종교 전체를 하나의 성향으로 묶는 것은 이 영상 앞부분에서 이동엽 목사 자신이 깨달았던 ‘사람을 하나의 범주로 나누지 말자’는 통찰과도 긴장됩니다. 한 사람을 ‘보수’나 ‘진보’라는 한 단어로 규정해서는 안 되듯, 유대교나 이슬람이나 어떤 종교 집단 전체도 몇 가지 역사적 사건이나 극단적 사례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도 앞부분의 깨달음을 끝까지 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또한 ‘기독교 정신은 정말 진보적이다’라는 표현도 그 의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조금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복음은 현대 정치의 ‘진보’나 ‘보수’ 가운데 어느 한쪽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약자를 보호하고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며 억압을 거부하는 면에서는 오늘날 진보적 가치와 만날 수 있고, 개인의 책임과 도덕적 질서, 가정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면에서는 보수적 가치와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선과 진리는 어느 정치 진영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양쪽 모두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 복음에서 가져가 자신의 정치적 정당성을 강화하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보수다’도 위험하지만 ‘기독교는 본래 진보다’ 역시 같은 종류의 환원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영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오히려 정치에 관한 결론보다 그 정치 이야기를 가능하게 만든 ‘만남’ 자체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로 정치적 입장이 다른 두 사람이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았습니다. 집사님은 자신이 존경하는 목사를 비판한 이동엽 목사의 말을 끝까지 들었고, 이동엽 목사도 자신과 다른 정치적 신념을 가진 집사님의 신앙과 삶을 존중했습니다. 두 사람은 상대방에게 ‘당신이 틀렸다’고 말하기 전에 ‘당신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적어도 한 사람은 자기 안의 숨은 판단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체어리티가 진리의 차이를 다루는 방식과 가까운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차이가 있다고 해서 곧 교회가 갈라지는 것은 아니며, 체어리티가 중심에 있다면 서로 다른 교리적 견해 가운데서도 하나 됨이 가능하다는 취지의 가르침을 반복합니다. 이것을 오늘날의 상황에 적용하면 정치적 견해의 일치가 교회의 하나 됨의 조건일 수는 없습니다. ‘나와 같은 후보를 지지해야 형제이고, 나와 같은 정치적 판단을 해야 참된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순간 교회는 체어리티보다 정치적 신념을 더 높은 자리에 올려놓게 됩니다. 반대로 서로 다른 판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방 안에 있는 선을 인정하고 함께 주님을 바라볼 수 있다면 외적인 차이 아래 더 깊은 하나 됨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처음의 ‘등대지기’로 다시 가져오면 영상 전체가 하나의 원을 그립니다. 등대는 바다 위의 모든 배를 자기에게 오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배들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내가 옳으니 나에게로 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빛을 비추어 각각의 배가 안전하게 자기 길을 가도록 돕습니다. 참된 목회도 어쩌면 그렇습니다. 목회자가 사람들을 자기 정치관, 자기 신학적 취향, 자기 영향력 아래 모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빛이 사람들의 길을 비추도록 자신은 한 자리에서 묵묵히 쓰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이 영상을 읽을 때 저는 이동엽 목사의 모든 주장에 그대로 동의하는 것보다, 이 영상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더 깊은 방향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큰 목회’를 꿈꾸던 사람이 ‘교회지기’를 꿈꾸기 시작하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하나의 정치적 범주로 보던 사람이 ‘그냥 한 사람’을 보기 시작하며, 세상의 힘으로 상대를 이기는 신앙에서 십자가의 자기 비움으로 시선을 돌리는 흐름입니다. 아직 몇몇 표현에는 정치적 이분법이 남아 있고, ‘세상에서 벗어남’이나 ‘악에 저항하지 않음’에 대해서는 신학적으로 보완할 부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서 흐르는 방향, 곧 ‘자기를 높이는 데서 쓰임으로, 판단에서 이해로, 지배에서 섬김으로, 외적인 적과의 싸움에서 자기 안의 악과의 싸움으로’ 향하려는 움직임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의 방향과 상당히 깊이 만납니다.
어쩌면 이 영상의 처음에 나온 ‘그 꿈이 누구의 꿈이었는가?’라는 질문이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형 교회를 세우려는 꿈에도 물을 수 있고, 나라를 구하려는 꿈에도 물을 수 있으며, 진보적 사회를 만들려는 꿈에도 물을 수 있고, 심지어 ‘올바른 기독교’를 세우겠다는 꿈에도 물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주님의 뜻을 사랑해서 품은 것인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세상에 관철하고 싶은 proprium의 꿈인가?’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결국 우리를 상대편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돌려세웁니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참된 영적 전쟁과 거듭남이 시작됩니다.
SY.66, 강문호 목사, ‘아토스 수도 자치국’ (20191212)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번 영상은 어떤 수도사의 일화를 중심으로 하기보다, 강문호 목사님이 왜 수도원을 공부하게 되었고, 그 가운데 특히 아토스산 수도 공동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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