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하였는데, 이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없음을 뜻하며, 이것은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the principal of faith)이기 때문인데,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있습니다. 불꽃은 열과 빛의 본질적인 것으로, 열과 빛은 불꽃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리된 상태의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빛에 비유할 있습니다. 실제로 빛은 있지만 그것은 겨울의 빛이며,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해설

 

AC.365는 창4:7의 마지막 말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매우 선명하게 결론짓습니다. 앞의 AC.361에서는 이 말씀이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개괄했고,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먼저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에 해당하는 Unto thee is his desire를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밀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신앙과 경쟁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가르치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삶으로 행하게 합니다. 둘은 한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는 가인이 그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상태로 읽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근본적인 질서 전도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 자체가 필요 없다고 처음부터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인정하되 그것을 신앙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신앙을 첫째로 세우고, 사랑과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질서에 어긋난다(contrary to order)고 단언합니다.

 

질서가 무엇인지는 앞의 글들을 통해 이미 드러났습니다.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습니다. AC.362에서는 체어리티를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는 사랑 체어리티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첫째가 되려 하면 그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AC.365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은 조금 부족한 신앙이다라거나 불완전한 신앙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아니다(it is not fai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주도할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정체성이 단순히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섬기는 진리라야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the principal of faith)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principal을 단순히 중요한 요소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부가되는 여러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도 신앙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의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이름은 신앙일 수 있어도 그 안에 신앙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설명을 스베덴보리는 아주 아름다운 자연의 비유로 풀어냅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있습니다.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옵니다. 여기서 불꽃은 근원이며, 열과 빛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꽃에서 열을 떼어내고 빛만 남긴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밝아 보일 수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은 사라집니다.

 

이 비유에서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빛이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이해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빛이 살아 있는 빛이 되려면 불꽃의 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곧 진리를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상태에도 실제로 빛은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아무런 진리도 없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알 수도 있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매우 논리적인 신학 체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빛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빛에 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the light of winter)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가인의 신앙을 설명하는 데 대단히 적절합니다. 겨울에도 태양은 빛납니다. 사물을 볼 수도 있고 길을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습니다. 땅은 얼어 있고 나무는 굳어 있으며 씨앗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8-349와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죽은 행위였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는 죽은 예배였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왜 그것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겨울의 으로 보여 줍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지식과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행위에도 생명이 없고 예배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이 비유를 조금 더 깊이 보면 빛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겨울의 문제는 빛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이 없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나 진리, 교리를 낮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본래의 생명을 되찾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면 겨울의 빛은 생명을 살리는 빛이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고,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며, 아는 것이 삶과 결합될 때 신앙은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도 사랑만 있으면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와 함께 있습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진리는 선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AC.362의 이단에 관한 설명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참된 것을 질서 밖으로 끌어내어 첫째 자리에 놓자, 그 진리 자체가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빛을 붙잡았지만, 불꽃에서 떼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그 빛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밝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추운 겨울의 빛이 되어 갔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교리를 공부하고, AC를 읽고, 상응과 속뜻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 때문에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고 낮추며,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밝아 보여도 그것은 겨울의 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고 대충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이 진리를 배우되 진리가 나를 어떻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끄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는 목적도 AC에 관한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삶에서 더 선한 쓰임을 행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진리의 빛에는 체어리티의 열이 함께 있게 됩니다.

 

이제 AC.361-365 전체를 돌아보면 흐름이 아주 선명해졌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확증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체어리티가 주도하는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마음의 문 앞에 있게 되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악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의 문제는 결국 신앙이냐 체어리티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 위에 서려고 할 때 둘의 결합은 깨집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깨지면 신앙은 불꽃에서 떨어져 나온 겨울의 빛처럼 되어, 결국 그 안의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AC.365의 겨울빛 비유는 창4의 가인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빛이 있는가?만 물어서는 안 됩니다. ‘ 빛에 열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진리가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따뜻함으로 살아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는 빛이라야 살아 있는 신앙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 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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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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