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79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사람은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5)

 

해설

AC.79는 앞의 에덴동산에 관한 개요를 매우 중요한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AC.77에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안의 나무들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78에서는 동산의 강이 지혜이고, 거기서 갈라지는 네 강이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며, 이 모든 것이 지혜에서, 그리고 그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9는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과 무관한 외부의 어떤 아름다운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천적 인간 자신이 그러한 동산입니다. 그의 지성,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모두 주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 있을 때 그 인간이 바로 에덴동산으로 묘사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AC.79의 핵심은 그다음 문장에 있습니다. ‘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천적 인간이 동산이라고 했지만 그 동산의 소유자는 천적 인간이 아닙니다. 그의 안에 있는 사랑도, 신앙도, 퍼셉션도, 지혜도, 선과 진리도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천국적인 것들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누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를 주시고 그것들을 실제 자신의 삶 안에서 누리도록 하십니다. 인간은 사랑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근원까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그것들을 받는 자이지 그 생명과 선과 지혜의 원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라고 해서 인간이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행하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인간이 실제로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가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되, 그것의 근원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AC.79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에 담긴 중요한 질서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누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갖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거나 선을 행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충분히 받아 누리되 이것은 나에게서 나온 나의 것이다라고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9는 앞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할 proprium의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proprium은 문자 그대로 인간 자신의 것, 곧 인간이 자기에게 속한다고 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타락한 인간의 proprium은 자기에게 생명과 선과 지혜가 있는 것처럼 여기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려는 방향과 연결됩니다. AC.79는 아직 그 전체 교리를 펼치지는 않지만, 에덴의 질서를 설명하면서 이미 그 문제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인 까닭은 그가 자기 안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선과 진리와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동산은 그의 안에 있으면서도 그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동산입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받을수록 더욱 살아 있는 인간이 되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더욱 인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의 이라는 말을 단순한 소유권의 비유로만 읽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지성과 사랑을 외적으로 소유하고 계신다는 뜻이라기보다, 인간 안의 모든 참된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76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었던 것과도 연결됩니다.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면, 그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는 선과 진리와 지혜 역시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AC.78의 마지막 문장과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거기서는 네 강으로 묘사된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고, 그 지혜는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79에서 동산은 주님의 이라고 하는 것은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원리가 아닙니다. 이미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설명한 뒤, 그 질서를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도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자기 이성으로 만들어 내어 자기 것으로 확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퍼셉션하는 사람입니다. AC.77의 나무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던 것도 이런 질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면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받는 퍼셉션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니 나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AC.79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그것들을 누리는 을 허락하셨다는 표현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제 자신의 삶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사용합니다. 사랑하고, 배우고, 분별하고, 선을 행하며, 쓰임을 살아갑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삶 안에서 실제로 살아 내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따라서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책임이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로와 근원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이후 여러 저작에서 거듭남과 자유를 설명할 때 반복해서 나타나는 중요한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AC.79라는 개요에서 그 후대의 교리 전체를 미리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창2:15의 속뜻을 읽기 위한 기본 원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누리도록 허락받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알면 창2:15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씀도 단순한 농사 명령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다만 경작하며 지키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당 절의 상세 해설에서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9에서는 우선 동산이 주님의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기본 질서를 세우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특히 동산을 경작한다는 말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과 지혜를 생산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AC.79의 핵심과 정반대가 됩니다. 동산 자체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맡겨진 활동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입니다. 인간은 근원이 아니라 받는 자이며, 동시에 받은 것을 살아 내는 자입니다.

 

이 원리는 앞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명령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해집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의 감각과 이성을 근원으로 삼으려 할 때, 에덴의 질서는 흔들리게 됩니다. AC.79는 아직 그 타락을 다루지 않지만, 타락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을 미리 세워 놓습니다.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이 질서를 인정하는 것이 에덴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에덴의 행복은 단순히 모든 것을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과 지혜를 누리고,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과 진리를 받는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덜 인간적인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그것을 자기 삶 안에서 자유롭게 누릴 때 인간은 참으로 살아 있게 됩니다. 반대로 인간이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에게 돌릴수록 본래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AC.73부터의 개요를 함께 놓으면 이 흐름은 더욱 분명합니다.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되고,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의 지식과 이성, 생명,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차례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AC.79는 그 모든 것을 인간이 어떤 태도로 받아야 하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누릴 수 있지만 그의 독립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은 앞으로 에덴의 상실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에덴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에서 추방되는 것보다 훨씬 깊은 문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천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창2 후반과 창3에서 차례로 밝혀질 것이므로 지금은 미리 상세하게 전개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9에서 우선 붙들 것은 매우 명료합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가 에덴인 까닭은 그 안의 모든 것이 그의 독립적인 소유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질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 퍼셉션과 지혜를 자유롭게 누립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AC.79는 에덴동산의 가장 깊은 질서 가운데 하나를 보여 줍니다. ‘누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자신의 삶 안에서 충분히 받아 누리면서도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이 주님의 동산으로 살아가는 질서이며, 이후 말씀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기울기 시작할 때 무엇이 무너지게 되는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79)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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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갈래 -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갈라져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cognitio)입니다.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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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강이 갈라져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cognitio)입니다.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합니다. 셋째는 이성이고, 넷째는 기억지식(scientia)인데,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합니다. 모든 것은 지혜에서 나오며,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 (10-14) Wisdom is meant by the river in the garden. From thence were four rivers, the first of which is good and truth; the second i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 These are of the internal man. The third is reason, and the fourth is memory-knowledge [scientia],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All are from wisdom, and this is from love and faith in the Lord (verses 1014).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땅을 둘렀으며 12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0-14)

 

해설

AC.78은 창2:10-14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강과 네 갈래 강의 속뜻을 개요로 보여 줍니다. AC.77에서 천적 인간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동산의 나무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8에서는 그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지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강에서 네 강이 갈라져 나오는 모습으로 천적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질서를 이루는지가 묘사됩니다.

 

먼저 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한다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바로 앞 AC.77에서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그 동산을 적시며 흘러나오는 강은 지혜입니다. 여기서도 강이라는 자연물의 성질을 보고 우리가 임의로 물이 흐르므로 지혜도 흐른다는 식의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AC.78은 직접 = 지혜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우선 그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강은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2:10에서는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AC.78은 이 네 강을 차례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로 설명합니다. 첫째와 둘째는 속 사람에게 속하고, 셋째와 넷째는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따라서 네 강은 단순히 고대 세계의 네 지리적 수계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 안에 있는 내적·외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첫째 강은 선과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아직 창2:11의 비손이라는 이름과 그 주변의 금, 베델리엄, 호마노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개요이므로 첫째 강이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큰 대응 관계만 제시합니다. 이 선과 진리가 속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강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cognitio)입니다. 여기서 원문의 cognitio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Pottsknowledge라고 옮겼지만 스베덴보리는 뒤의 넷째 강에 사용하는 scientia와 다른 라틴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한국어에서도 둘을 모두 지식이라고 해 버리면 스베덴보리가 개요에서 세운 구별이 흐려집니다.

 

이번 번역에서는 그래서 cognitio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 다시 말해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을 아는 것과 관련됩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cognitio의 전체적인 전문용어 체계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AC에서 이 단어가 반복해서 사용되는 문맥을 보면서 그 의미 범위를 더 정확하게 잡아야 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둘째 강의 cognitio와 넷째 강의 scientia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첫째와 둘째를 묶어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한다고 합니다. 즉 선과 진리,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이 속 사람과 관련됩니다. 여기서도 사람이라는 말을 단순히 인간의 깊은 심리나 무의식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은 인간의 영적 구조와 거듭남을 이해하는 중요한 틀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을 향하여 열릴 수 있는 인간의 내적인 부분이며, 겉 사람은 자연계와 감각적인 삶을 향하여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속 사람은 선하고 겉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78의 네 강 자체가 그런 오해를 막아 줍니다. 셋째와 넷째 강, 곧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 역시 하나의 지혜에서 나옵니다. 문제는 겉 사람 자체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조화를 이루고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자연적 삶에서 섬길 때, 이성과 기억지식도 온전한 쓰임을 갖습니다.

 

셋째 강은 이성입니다. 이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성을 속 사람에 속한 선과 진리보다 열등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성은 인간이 자연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분별하며 이해하는 데 중요한 능력입니다. 다만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이성이 스스로 최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과 질서 있게 연결됩니다.

 

넷째 강은 기억지식(scientia)입니다. ‘scientia역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 매우 주의해야 하는 용어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과학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감각과 경험, 학습 등을 통하여 기억 안에 받아들인 지식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기억지식이라고 옮기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연적·외적 차원의 앎이라는 성격을 비교적 잘 살릴 수 있습니다.

 

AC.75에서 이미 천적 인간의 scientificum et rationale’, 곧 지식과 이성이 언급되었습니다. AC.78에서는 이제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그 위치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AC.75에서 우리가 지식과 이성을 너무 빨리 천적 인간의 내적인 인식 구조라고 규정하지 않았던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AC.78에 이르러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들을 겉 사람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네 강 모두가 어디에서 나오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모든 것은 지혜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첫째의 선과 진리, 둘째의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 셋째의 이성, 넷째의 기억지식이 서로 완전히 독립된 네 능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지혜에서 나와 속 사람과 겉 사람에 각각 질서 있게 자리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단계 더 근원으로 올라갑니다. ‘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AC.78 전체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마지막 문장입니다. 네 강의 근원은 지혜이고, 그 지혜의 근원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지혜는 인간 자신의 뛰어난 지능이나 많은 지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이 질서 있게 흘러나옵니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억지식을 많이 쌓아서 이성이 생기고, 이성을 충분히 발전시키면 선과 진리에 이르며, 결국 사랑과 신앙에 도달한다는 식의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구조가 아닙니다. AC.78이 제시하는 천적 질서는 반대 방향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로부터 속 사람의 선과 진리와 그것들에 관한 앎이 나오며, 또한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도 질서를 얻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 지식과 이성을 무가치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번호에서 이성과 기억지식도 에덴의 하나의 강에서 갈라져 나온 네 강 가운데 포함됩니다. 그것들이 올바른 근원과 질서 안에 있을 때에는 천적 인간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여기고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때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창2와 창3에서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고자 하고, 자기의 감각과 기억지식과 이성을 최종적인 판단자로 삼으려 할 때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78은 아직 그 타락을 다루는 번호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타락 이전의 올바른 천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 근원에 있고, 거기서 지혜가 나오며, 그 지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이 질서 있게 나옵니다.

 

이것을 바로 앞 AC.77과 함께 읽으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AC.77에서는 생명나무가 사랑이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78에서는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신앙은 에덴동산 안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서로 무관한 원리가 아닙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 전체가 그것들로부터 나옵니다.

 

다만 여기서도 사랑과 신앙을 완전히 동등한 두 출발점이라고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사랑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신앙이 그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과 AC 전체를 통해 더 정교하게 드러납니다. AC.78의 표현은 우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문장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강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조로 읽는 것은 에덴동산의 지리적 묘사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열어 줍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라는 네 강을 고대 지도에서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말씀은 이 강들을 통해 천적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어떻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까지 질서 있게 펼쳐지는지를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각각의 강 이름과 지역을 이번 개요에서 미리 상세히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첫째 강이 왜 선과 진리인지, 둘째 강이 왜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인지, 셋째와 넷째가 왜 이성과 기억지식인지에 대한 세부적인 근거는 창2:10-14의 상세 해설에서 다루어질 것입니다. AC.78에서는 네 강 전체의 구조를 먼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구조를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속 사람에게 속하고, 셋째와 넷째는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그러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두 개의 서로 끊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모두 하나의 지혜에서 나오며, 그 지혜는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 안에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하나의 근원 아래 질서를 이룹니다.

 

이 점에서 AC.78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개요 번호입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겉 사람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과 기억지식을 버리고 순수하게 내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로 연결되어,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까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많이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영적이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어디에서 출발하며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자기 지성과 기억지식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되면 질서가 거꾸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 아래 놓일 때 이성과 기억지식은 인간의 자연적 삶에서 매우 중요한 쓰임을 담당합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서 공부보다 사랑이 중요하다’, ‘이성보다 신앙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단순한 양자택일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78이 보여 주는 것은 어느 하나를 버리는 구조가 아니라 모두가 올바른 근원과 질서 안에 놓이는 구조입니다.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속 사람뿐 아니라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까지 질서 있게 합니다.

 

AC.73부터의 개요를 함께 놓으면 이제 천적 인간의 모습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일곱째 날이며, 그의 지식과 이성이 묘사되고,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며, 그의 지성은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동산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있고,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사랑과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지혜이며, 그 지혜로부터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 모든 흐름의 가장 깊은 근원에 있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입니다. 이것이 AC.78의 마지막 문장이면서 동시에 전체 번호를 묶는 핵심입니다. 천적 인간의 선과 진리, 그것들에 관한 앎, 이성과 기억지식은 서로 흩어진 능력들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하나의 지혜 안에서 질서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AC.78에서 에덴의 강과 네 강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 지리의 수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이 보여 주는 영적 질서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에서 속 사람의 선과 진리와 그에 관한 앎이 나오며,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도 나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 전체가 하나의 지혜 아래 질서를 이루는 것, 이것이 에덴의 강과 네 갈래 강을 통해 묘사되는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입니다. (AC.78)

 

 

 

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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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과 두 나무 - 천적 인간의 지성과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AC.77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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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신앙을 의미합니다. (8-9)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8, 9)

 

해설

AC.77은 창2:1-17 개요 가운데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한층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이 초목과 채소로 묘사되었고,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밝힙니다. 그것이 바로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입니다. 그리고 그 동산 안의 여러 나무는 천적 인간의 퍼셉션을,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먼저 에덴동산이 천적 인간의 지성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에덴동산을 최초의 두 사람이 살았던 아름다운 낙원으로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2의 속뜻에서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합니다. AC.77에서는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그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덴은 단순한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지성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그렇다고 에덴’, ‘동산’, ‘동쪽각각의 상응을 지금 모두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AC.77은 개요이기 때문입니다. 왜 에덴이 지성과 관계되는지, 왜 그 동산이 동쪽에 있다고 하는지, 동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의 창2:8 상세 해설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하는 큰 대응 관계, 천적 인간의 지성=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을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이어서 동산 안의 나무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보기에 좋은 나무들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하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퍼셉션은 창2의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단지 외부에서 배운 규칙이나 논증을 통해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퍼셉션을 통해 그것을 지각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의 나무들은 단순히 천적 인간이 알고 있는 여러 지식의 목록이 아니라 그의 지성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묘사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좋은 먹기에 좋은 을 구별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후자는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그러나 본다 = 진리’, ‘먹는다 = 이라는 상응의 세부적인 근거를 AC.77에서 우리가 임의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뒤의 상세 해설에서 스베덴보리가 그 의미를 어떻게 풀어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이 두 종류의 나무가 천적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을 각각 나타낸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특히 여기서 퍼셉션을 일반적인 직감이나 느낌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왠지 이것이 맞는 같다고 느끼는 심리적 직관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퍼셉션은 태고교회와 천적 인간의 매우 독특한 내적 상태와 관련된 개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이며,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나 주관적 확신과는 구별됩니다.

 

이 점은 앞으로 에덴 이야기를 읽는 데 중요합니다.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의 지성이라고 할 때, 그 지성은 단순히 논리적 추론 능력이 뛰어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동산의 나무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과 퍼셉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특별한 두 나무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결하게 사랑은 생명나무로, 신앙은 지식의 나무로 의미된다고 합니다. 이 대응은 창2와 창3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먼저 생명나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랑을 단순한 인간적 감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문맥은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천적 인간에게 중심이 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천적 인간의 참된 생명이 사랑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로 앞 AC.76에서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었다는 점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다른 하나인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점은 특히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은 우리가 고정해 온 용어대로 faith입니다. 따라서 이 나무를 단순히 지식’, ‘학문’, ‘이성또는 인간의 지적 능력자체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77은 분명히 그것이 신앙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생명나무는 좋은 나무이고 지식의 나무는 나쁜 나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창4에서도 계속 살펴보았듯 문제는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첫째가 되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2에서도 이 질서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이 중심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점에서 AC.77의 두 나무는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생명나무가 사랑이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이라면, 핵심 문제는 단순히 어떤 나무의 열매를 먹었는가?라는 외적인 사건에만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인간 안에서 어떤 질서에 놓여 있는가라는 훨씬 깊은 문제가 말씀의 속뜻에 들어 있습니다. 다만 이 문제는 창2:16-17과 창3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펼쳐지므로 AC.77에서 미리 모든 결론을 끌어오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히 tree of knowledge [scientiae]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Pottsknowledge라고 번역하면서 라틴어 scientiae를 함께 표시합니다. 이 단어를 현대적인 의미의 과학이나 학문적 지식으로 읽으면 본문의 뜻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어 체계에서 scientia와 관련된 표현은 기억에 받아들인 앎이나 지식과 연결되며, 여기서는 그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지식의 나무라는 명칭만 보고 지식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AC.75AC.77을 비교하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합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지식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지식과 이성과 신앙이 사랑이라는 중심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진리와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반면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의 선이 중심이며,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와 신앙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사랑이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이라는 AC.77의 짧은 설명은 천적 인간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를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나무를 서로 적대적인 두 원리로 만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랑과 신앙은 본래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고, 인간이 신앙에 속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알고 판단하려 할 때입니다. 바로 이 문제가 뒤의 에덴 이야기와 창3에서 점차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이라는 표현과 생명나무의 사랑을 연결하여 동쪽은 주님이므로 에덴동산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지성이다라고 지금 곧바로 완성된 상응 체계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방향이 뒤의 상세 해설과 연결될 수 있더라도, AC.77은 아직 각 요소의 세부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번 개요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대응 관계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AC.77은 앞의 개요들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73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창2의 주제라고 했습니다.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고 했고,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을,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AC.77에서는 그의 지성과 그 지성 안의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그리고 사랑과 신앙을 보여 줍니다. 개요가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점점 더 구체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기억할 것은 에덴동산 = 천적 인간의 지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에덴은 단순히 잃어버린 옛 낙원의 지리적 장소를 찾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주님에 의해 거듭난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 동산 안에 있는 아름다운 나무들은 그의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그 중심에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중요한 것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모든 것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AC.76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주님께서 불어넣으시는 생명의 숨으로 묘사되었다면, AC.77의 에덴동산 역시 그 생명을 받은 인간 안에 형성된 지성의 상태입니다. 인간이 자기 지혜로 에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서 그의 내면이 에덴동산으로 묘사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7의 핵심은 여러 상응을 따로 외우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있고, 그의 지성은 에덴동산으로 묘사되며, 그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있고, 사랑과 신앙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앞으로 창2와 창3에서 인간의 내적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고 또 어떻게 무너지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기초가 됩니다.

 

AC.77은 따라서 에덴동산 이야기를 읽는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을,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을 나타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붙들고 있으면 이후 에덴의 이야기는 단순한 고대의 정원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 퍼셉션과 인간의 지혜에 관한 깊은 말씀으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AC.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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