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7 심화
1,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란 무엇인가?
AC.57의 첫 문장은 처음 읽으면 꽤 낯섭니다. ‘씨 맺는 채소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이다.’ 진리는 참이면 참인 것이지, 왜 스베덴보리는 진리에 굳이 ‘쓰임을 지향한다’는 말을 붙였을까요?
먼저 영어 표현을 그대로 보면 ‘every truth which regards use’입니다. 여기서 regards는 단순히 ‘관찰한다’는 뜻보다 ‘향한다’, ‘목적으로 삼는다’, ‘관련되어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라는 번역은 진리가 어떤 목적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을 살린 표현입니다.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여기서 ‘쓰임’이 현대적인 의미의 ‘실용성’과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이 진리가 당장 돈이 되는가?’,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는가?’, ‘생활에 바로 써먹을 수 있는가?’라는 뜻의 usefulness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쓰임’은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어떤 것이 선한 목적을 섬기며,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 안에서 다른 것의 유익을 위해 기능하는가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진리가 쓰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진리가 단지 머릿속에 저장되거나 지적 만족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을 섬기는 방향을 가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안다고 해봅시다. 그 문장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원어까지 분석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의 목적이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는 결국 실제로 이웃을 선하게 대하고, 무엇이 그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 분별하며, 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삶을 향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 → 즉시 행동’이라는 단순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진리는 먼저 생각을 바로잡고, 어떤 진리는 오랜 시간 사람의 판단을 형성하며, 어떤 진리는 시험 가운데서 비로소 깊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쓰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모든 진리가 듣자마자 곧바로 눈에 보이는 행동 하나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또 ‘행동만 하면 진리가 쓰임을 이룬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잘못된 생각에서 매우 열심히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선한 의도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이웃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가 함께 중요하다는 원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지만, 선 또한 진리에 의해 올바른 방향을 받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57의 표현은 앞의 AC.44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이해가 말씀을 듣고 의지가 그것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삶과 결합하는 방향을 가집니다.
그러나 ‘쓰임’은 단지 ‘내가 무엇인가 좋은 일을 했다’는 개별 행동보다 넓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는 인간의 직무, 관계, 사회생활, 천국의 질서까지 모두 쓰임과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각 존재가 전체를 위해 어떤 선한 기능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AC.57 한 문장에서 쓰임의 전체 교리를 모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씨 맺는 채소’가 단순한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쓰임을 바라보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씨 맺는 채소’일까요? 현재 심화에서는 채소가 빨리 자라고 낮게 자라므로 ‘초기의 진리’, 나무는 오래 살고 깊이 뿌리내리므로 ‘성숙한 선’이라고 설명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57은 이런 자연적 특징들을 근거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채소 = 초보 단계’, ‘나무 = 성숙 단계’라는 고정표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대응은 ‘씨 맺는 채소 =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 ‘열매 맺는 나무 = 신앙의 선’입니다. 그 이상은 문맥에서 충분한 근거가 있을 때만 더 나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씨’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씨가 다른 생명을 낳는다는 자연적 특징은 이해를 도울 수 있지만, 이번 글에서는 씨 자체의 상응을 독립적으로 풀지 않습니다. ‘씨 맺는 채소’라는 전체 표현이 진리를 뜻한다고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면 ‘쓰임을 향하지 않는 진리’도 있을까요? 이 질문은 조금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참된 진리는 본래 선한 질서를 섬기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진리를 자기 지식과 우월감, 논쟁과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문제는 진리 자체보다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의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면, 지식으로는 진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 진리가 그의 삶 안에서 본래의 선한 쓰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아주 많은 교리를 알지 못해도 자신이 아는 진리를 성실하게 삶에 적용하여 이웃의 선을 섬기는 사람은 그 진리가 쓰임을 향하도록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쓰임’이라고 하면 언제나 남에게 눈에 띄는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쓰임은 자녀를 돌보는 것일 수도 있고, 정직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해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겉으로 작아 보이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쓰임의 규모가 아니라 선한 목적을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쓰임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모두가 큰 종교적 사역이나 특별한 봉사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쓰임은 사람의 자기 공로를 세우는 방식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이런 쓰임을 하고 있으므로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쓰임의 외형은 유지하면서도 그 중심은 자기 사랑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AC.57의 문맥에서 영적 음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쓰임을 향하고 그 쓰임이 실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의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받아들이고 행하지만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이것이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진리는 삶을 향합니다. 그러나 그 삶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어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사람 안에서 선한 목적과 결합하여 실제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아는 것’과 ‘사는 것’을 서로 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아는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리가 쓰임을 지향한다는 말은 ‘이론은 필요 없고 행동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른 행동을 위해 바른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진리답게 살아 있으려면 선한 목적과 쓰임을 향해야 합니다.
따라서 AC.57의 표현을 가장 간단하게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란 자기 안에서 끝나는 진리가 아니라 선한 삶과 선한 목적을 섬기도록 주어진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씨 맺는 채소’가 영적 인간의 음식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영적 인간은 단지 많은 사실과 교리를 축적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선한 쓰임을 향하도록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AC.57을 읽으며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아는 진리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자기 지식과 자기 확증을 향하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과 이웃의 유익을 향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AC.57, 창1:29,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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