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1:31)

 

AC.60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하는 이유는, 앞선 상태들을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This state is calledvery good,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해설

AC.60은 창1: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 가운데 특히 심히 좋았더라에 주목합니다. 앞선 창조의 날들에도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섯째 날에는 처음으로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여기에서만 심히라는 말이 더해지는지를 사람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에서 설명합니다.

 

AC.60의 대답은 매우 간결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적인 것들천적인 것들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 자체입니다. AC는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왜 말씀에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라고 하고 이 상태에서는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는지 그 속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설의 중심도 언제나 창1:31의 이 말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좋았더라심히 좋았더라의 차이는 단순히 앞의 것들도 좋았지만 마지막 것은 조금 더 좋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AC.60은 그 차이를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앞선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아직 이렇게 하나를 이루는 상태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제 여섯째 상태에서는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그렇다고 앞선 상태의 신앙이나 선과 진리가 살아 있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들에서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를 말했습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 이전의 상태를 아직 죽어 있는 상태’, 여섯째 날을 비로소 생명이 처음 생긴 상태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0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하나가 입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고 사랑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이것이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표현이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신앙과 사랑을 단순히 머리와 가슴’, 또는 아는 것과 행동하는 정도로만 축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다음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영적이라 하고,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60은 그 다음 설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을 열어 줍니다. 여기서는 우선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며, 이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결혼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다고 하지 않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하나 됨은 어느 한쪽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결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다만 이번 한 문장만 가지고 결혼의 전체 교리를 펼칠 필요는 없습니다. 선과 진리의 결혼, 천상의 결혼, 의지와 이해의 결합 등은 AC 전체에서 계속 깊어지는 주제입니다. AC.60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다라는 직접적인 설명까지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인 천적인 을 곧바로 서로 경쟁하는 높고 낮은 두 단계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문장에서는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즉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둘의 분리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그렇다고 영적천적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이라는 표현 자체가 둘의 구별을 전제로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이면서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천적인지는 바로 다음 AC.61이 설명하므로, 여기에서 미리 지나치게 세분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도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그가 아는 것과 그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그가 참된 것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룬다는 말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60의 문장을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예이지, 이 한 가지 예가 결혼의 전체 뜻을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사랑을 단순한 감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믿는 내용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낀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의지와 삶에 깊이 관계됩니다. 다만 이 부분 역시 이어지는 AC들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단순히 교리 내용을 많이 아는 것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와 이해에 관계하지만, AC.60에서 말하는 상태는 그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을 서로 독립된 두 종교적 능력처럼 생각하기보다,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1: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라는 말씀도 해설의 중심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습니다.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고 이제 나는 충분히 거듭났고 심히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심히 좋았더라를 인간의 영적 자기평가 기준으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나는 여섯째 인간인가?라고 자신의 영적 등급을 판정하는 것이 이 말씀의 목적은 아닙니다. AC는 창조의 날들을 통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자기 영적 수준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현재의 여섯째 상태를 거듭남의 최종 완성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1의 여섯째 날이 매우 높은 상태이고 심히 좋았더라고 불리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에는 일곱째 날이 이어지고, AC.62부터는 일곱째 날과 천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따라서 AC.60심히 좋았더라를 가볍게 낮출 필요도 없지만, 뒤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의 몫까지 여기에 미리 가져와 모든 거듭남의 최종 완성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글이 말하는 만큼만 충분히 말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이고 이번에는 심히 좋았더라일까요? AC.60의 답은 끝까지 단순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사람에게 진리가 있고 신앙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씀은 심히 좋았더라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1: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합니다. 창조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속뜻에서 진행되는 거듭남 역시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새로운 창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AC.60을 읽을 때 가장 마지막에 남아야 할 말도 인간의 성취보다 말씀의 선언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AC.60은 바로 이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안에,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밝힙니다.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무엇인가?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에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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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창1:31, '영적과 천적 : 이해의 신앙과 의지의 사랑이라는 인간 구조의 두 축'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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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창1:30, ‘모든 푸른 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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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AC.59 후반부에는 처음 AC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수년 동안 육신 안에 있으면서 저 세상의 영들과 교류했으며, 가장 악한 영들과도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때로는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먼저 정말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59 자체만 놓고 보면 대답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비유나 상징적인 이야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경험의 역사적 사실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스베덴보리 자신은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구별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어도 저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그는 이것을 실제 영계 경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AC.59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이야기를 여기에서 하는가?입니다. 이 경험담 바로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시면 사람이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수천의 영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는데도 머리카락 하나 해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신의 영적 능력에서 찾지 않고 주님의 보호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는 수천의 악령과 싸워 이길 정도로 대단한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읽으면 본문의 중심이 뒤집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자기의 강함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다는 표현을 읽을 때에도 성경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보호를 말하면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AC.59이 여기서 그 성경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상응을 논증하는 것은 아니므로, 억지로 별도의 성경 해석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한국어 독자에게는 주님의 보호를 표현하는 익숙한 성경적 언어와 자연스럽게 울림을 이루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수천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인 숫자로 바꾸어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실제로 매우 많은 영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 숫자를 가지고 영계의 집단 규모나 구조를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글의 중심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특별한 경험이 허용되었을까요? AC.59은 여기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류에게 영계의 비밀을 밝히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다고 이번 한 글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술들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영계가 열렸으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AC.59의 이 특정 경험이 왜 허용되었는지는 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또 이 경험을 모든 신앙인의 표준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AC.59은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영들을 눈으로 보고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오랜 경험을 통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의 특별한 경험과 모든 사람의 경험을 동일하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이 강렬한 사람이 더 높은 신앙인이라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AC.59의 강조점은 얼마나 많이 보고 들었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말을 존중해서 읽는다면 영과 영계를 전부 인간 심리의 비유로 환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의 세계와 그곳의 영들을 실제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저술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무엇을 실제라고 주장하는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모든 불안이나 나쁜 생각,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곧바로 악한 영의 공격이라고 판정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AC.59은 그런 진단법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늘 마음이 갑자기 불안하니 악한 영이 가까이 왔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으니 어떤 영이 내게 넣은 것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AC.59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적용입니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는 신체적·심리적·환경적 요인도 있으므로 특정 느낌만으로 영적 원인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 경험담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 가장 먼저 AC.59 자체가 말하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극심한 영적 적대 가운데서도 주님의 보호 때문에 자신이 해를 입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독자에게 특별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라고 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듭남의 전투와 그 가운데 있는 주님의 보호에 대한 증언입니다.

 

여기서도 AC보다 앞에 있는 것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놀라운 영계 경험에 마음을 빼앗겨 그의 체험 자체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AC의 역할은 독자의 관심을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해설하고 있는 말씀과 그 말씀의 주님께 돌려보내는 데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AC.59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목적도 나를 보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보호를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해도 생명과 안전의 근원은 자기에게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한 번의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독자에게 모든 것을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주제들은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의심 없는 신앙을 갖게 할 만큼 충분히 가르칠 수 없으므로 세부 사항들을 뒤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같은 태도로 읽으면 좋겠습니다. ‘수천의 영들이라는 놀라운 한 문장만 떼어 내어 영계의 전체 구조를 만들거나 스베덴보리의 특별함을 강조하기보다, AC 전체를 계속 따라가며 그가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중심은 수천의 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아닙니다. 그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신 주님입니다.

 

그래서 AC.59의 이 매우 특이한 경험담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은 스베덴보리가 얼마나 놀라운 영적 세계를 보았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가  경험을 통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사람을 매 순간 보호하시는 주님입니다.

 

 

 

AC.59, 창1:30, 거듭남의 전투 : 악한 영들의 공격과 주님의 보호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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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에서 처음 읽는 사람을 가장 놀라게 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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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1.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에서 처음 읽는 사람을 가장 놀라게 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신다면 그 안의 욕정과 거짓을 빨리 없애 주시면 될 것 같은데, 오히려 그것들이 한순간에 제거되지 않으며 악한 영들까지 오랫동안 그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된다고 합니다. 도대체 왜 그러실까요?

 

먼저 AC.59 자체가 제시하는 이유를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욕정들이 지배권을 가지고 있으며, 인간 전체가 욕정들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한순간에 제거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인간 전체를 파괴하는 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지금까지 획득해 온 생명이 바로 그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자체가 악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욕정과 거짓이 인간에게 꼭 필요한 좋은 것이므로 보존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거듭나기 전 그 사람이 실제로 살아오면서 자기 것으로 획득한 생명의 상태입니다.

 

사람은 오랫동안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그 사랑에 따라 생각하고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 가운데 악한 욕정이 지배해 왔다면 욕정과 거기에서 나온 거짓은 몸에 묻은 먼지처럼 간단히 털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실제 삶과 깊이 얽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것을 한순간에 제거하여 사람 자체를 무너뜨리는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악을 그대로 인정하거나 정당화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AC.59의 방향은 분명히 개혁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악한 영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됩니다’.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은 허락하신다 뜻하신다입니다. 악한 영들의 악은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악을 행하라고 명령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악한 영들은 자기 성질에 따라 사람의 욕정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작용이 마지막 결과를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AC.59은 그렇게 자극된 욕정들이 수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느슨해지고, 마침내 주님에 의해 선을 향해 기울어질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주어는 결국 주님입니다. 악한 영들이 욕정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영들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을 개혁하시고 선을 향해 이끄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그렇다면 왜 욕정을 자극하게 하시는가, 자극된 욕정이 왜 느슨해지는가 하는 질문이 남습니다. 그러나 AC.59은 그 세부적인 과정을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빈칸을 너무 빨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욕정이 드러나야 사람이 자유롭게 선택할  있기 때문이다’, ‘악이 나타나지 않으면 선을 자기 것으로 선택할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 그럴듯하지만, 그것은 적어도 AC.59이 이 자리에서 직접 설명하는 내용은 아닙니다. 인간의 자유와 시험에 관한 다른 AC들을 충분히 살펴본 뒤 더 정확하게 연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데까지 가면 충분합니다. 악과 거짓은 사람의 획득된 생명에 깊이 얽혀 있기 때문에 한순간에 제거되지 않습니다. 악한 영들이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고, 그 욕정들은 여러 방식으로 느슨해지며, 마침내 주님께서 그것들을 선을 향해 기울이십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도 피해야 합니다. ‘악이 즉시 없어지지 않는다면 굳이 악과 싸울 필요가 없는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AC.59의 주제 자체가 전투입니다. 악이 즉시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은 악을 용납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이 실제 전투를 포함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 이전의 욕정이 다시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해서 곧 나는 전혀 거듭나지 않았구나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59의 설명대로라면 거듭남의 과정 자체에 옛 생명과의 전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대로  욕정도 주님께서 아직 남겨 두신 것이니 괜찮다며 합리화해서도 안 됩니다. 욕정은 여전히 선과 진리에 반대되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그것을 선하다고 인정하신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입니다.

 

또 이 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너무 쉽게 적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주님도 악을 당장 없애지 않으시니 다른 사람의 잘못도 그냥 두어야 한다는 목회 원칙이나 교육 원칙이 AC.59에서 곧바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신적 섭리의 방식과 인간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은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AC.59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한 인간을 얼마나 깊이 아시면서 거듭나게 하시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람에게 얽혀 있는 악과 거짓을 단순히 잘라 내는 대상으로만 보지 않으시고,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마침내 선을 향해 이끄십니다.

 

그리고 악한 영들의 악한 의도조차 주님의 다스림 밖으로 벗어나 마지막 결과를 결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선과 진리를 미워하지만, 그들의 미움이 주님의 목적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AC.59에서 악한 영들이 허락된다는 놀라운 말을 읽을 때 악한 영들에게 시선을 빼앗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의 중심은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작용 가운데서도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 사람의 옛 생명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마침내 선을 향해 이끄시는 주님이 중심입니다.

 

 

 

AC.59 심화 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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