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

 

1494. 19절,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Verse 19. Why saidst thou, She is my sister? And I might have taken her to me for a woman. And now behold thy wife; take her and go.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그때 그는 자기가 지성적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게 없었음을, Why saidst thou, She is my sister?” signifies that he then knew no otherwise than that he had intellectual truth;

 

※ 즉, 자기에게는 오직 지성적 진리만 있는 줄 알았다는 의미입니다. 여기 자기는 어린 시절 주님입니다. 그리고 참고로, 지성적 진리(知的, intellectual truth, 포츠 역, 1888-1902)를 최근 쿠퍼 역에서는 직관적 진리(intuitive truth)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를 데려다가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그는 그래서 천적인 것하고만 결합해야 하는 진리를 하마터면 욕보일 뻔했다는 것, and I might have taken her to me for a woman” signifies that so he might have done violence to the truth that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 여기 ‘천적인 것’(what is celestial)이란 쿠퍼 역에 의하면 ‘천국 퀄러티’(a heavenly quality), 즉, 쿠퍼는 이 진리를 세상이 아닌, 천국에 어울리는 진리라고 보았습니다. 참고로, 여기 아브람은 어린 시절 주님 및 남편으로서의 선을,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남편인 선과 함께 하는, 아내로서의 진리를 의미하며, 그래서 이 진리는 아주 특별한 진리, 곧 선이신 주님하고만 있어야 하는 그런 진리인데, 어린 시절 주님은 그 사실을 천진난만하게 모르신 것입니다 ^^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진리는 천적인 것하고만 결합해야 함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now behold thy wife; take her and go” signifies that truth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1495.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Why saidst thou, She is my sister?

 

이 표현이, 그때 그는 자기가 지성적 진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말고는 아는 게 없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누이’의 의미가 지성적 진리인 것과, 또 아브람이 그렇게 (13절을 보면 분명한 것처럼) 말한 사실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것은 진리의 천적인 것이 욕을 당하고 해를 입는 대신 보호를 받고 보전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he then knew no otherwise than that he had intellectual trut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sister” as being intellectual truth; and also from the fact that Abram had said so (as is evident from verse 13), which was done to the end that the celestial might not suffer any violence, but might be saved.

 

※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마7:6) 말씀처럼 세상 지식과 학문이 천적인 것을 중간 연결고리들 없이 바로 접하게 되면 비록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런 불상사가 일어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어린 시절, 주님이 기억-지식들을 배우셨을 때, 주님은 그저 아시기를, 이 지식들은 오직 지성적 인간을 위해서만 있는 줄, 즉, 이 지식들을 가지고 있으면 바로 진리를 깨달을 수 있는 줄 아셨다는 것과, 그러나 나중에 밝혀지기를, 그게 아니고 지식들은 그로 하여금 천적인 것들을 얻게 하려고 존재한다는 것과, 그래서 천적인 것들이 해를 입지 않고 대신 보호받을 수 있도록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From all this it is evident that when the Lord as a child learned memory-knowledges, he first of all knew no otherwise than that those knowledges were solely for the sake of the intellectual man, that is, in order that he might get to know truths from them; but it was afterwards disclosed that they had existed in order that he might attain to celestial things; and this took place to prevent celestial things from suffering violence, and in order that they might be saved.

 

※ 우리 역시 처음엔 세상 학문과 지식이 풍성하면 바로 무슨 경지에 이른 듯하여 천국의 비밀과 신에 대하여 다 알게 될 것 같지만, 그러나 시간이 흘러 철이 들고 정신을 차리게 되면 그게 아니고, 세상 학문과 지식은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향하게 하려고, 그래서 한 단계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내게 주어진 것이라는, 실상을 깨닫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르면서 바로 천국에 대한 지식에 뛰어들게 되면 결과적으로는 불행해지기 때문에,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여 우리로부터 아케이나를 분리, 보호하시는 것은, 마치 유대인으로부터 아케이나를 철저히 봉하신 이유가 그들이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아케이나를 접하게 되면 반드시 신성모독으로 멸망할 것을 아셨기 때문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교육을 받는 동안 어떤 진보, 나아감이 있는데요, 먼저 기억-지식에서 이성적 진리(rational truth)로, 이성적 진리에서 지성적 진리(intellectual truth)로, 지성석 진리에서 이윽고 천저 진리(天的, celestial truth)의 순이며, 이 천적 진리가 여기서 말하는 ‘아내’인 것입니다. When man is being instructed, there is a progression from memory-knowledges to rational truths; further, to intellectual truths; and finally, to celestial truths, which are here signified by the “wife.

 

※ 포츠 역 ‘기억-지식’(memory-knowledge)을 쿠퍼 역에서는 ‘사실’(fact)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 ‘이성적’으로 번역한 ‘rational’은 역자마다 번역이 다양한, 즉 번역이 쉽지 않은 표현입니다. 사전에는 ‘합리적인’, ‘이성적인’으로 나와 있습니다. 저는 ‘이성적인’(理性)으로 번역하겠습니다.

 

이 진행에서 만일 지성적 진리가 중간 매체 역할을 하지 않고 기억-지식과 이성적 진리에서 바로 천적 진리로 가게 되면, 천적 진리는 욕을 당하게 되는데요, 중간 연결 매체인 지성적 진리가 없으면 천적 진리와, 기억-지식을 써서 얻어지는 이성적 진리 간 연결고리가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If the progression is made from memory-knowledges and rational truths to celestial truths without intellectual truths as media, the celestial suffers violence, because there can be no connection of rational truths—which are obtained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with celestial truths, except by means of intellectual truths, which are the media.

 

※ 그래서 제가 지인들께 무슨 사전 준비나 친절한 설명 없이 바로 아케이나를 말씀드리면 다들 어리둥절 못 알아들으시고, 경계하시거나 반감을 품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즉, 아케이나 입장에서는 욕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복음서 주님의 여러 비유들처럼 사람들 눈높이에 맞춰 사례를 들어가며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해야 합니다. 공용복 선생이 이런 걸 참 잘하셨습니다.

 

천적 진리가 무엇인지, 지성적 진리가 무엇인지는 곧 아시게 됩니다. What celestial truths are, and what intellectual truths are, will be seen presently.

 

[2]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아실 수 있도록, 질서(order)라는 것에 관해 뭔가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That it may be known how these things stand, something shall be said respecting order.

 

질서란, 천적인 것이 영적인 것 안으로 흘러들어 그것을 그 자체에 맞추는 것이며, 그렇게 이번에는 영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 안으로, 이성적인 것은 기억-지식 안으로 흘러들어 각각 그 자체에 맞추는 것입니다. The order is for the celestial to inflow into the spiritual and adapt it to itself; for the spiritual thus to inflow into the rational and adapt it to itself; and for the rational thus to inflow into the memory-knowledge and adapt it to itself.

 

※ ‘그것을 그 자체에 맞추다’, 즉, ‘영적인 것으로 하여금 그 본래의 목적에 맞추게 하다’, 다시 말해서, 영적인 것 안으로 천적인 것이 흘러들어갈 때 일어나는 변화를 말하는 것으로, 영적인 것 본래의 목적, 곧, 영적인 것의 순기능인 주님께 나아가는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감당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식으로, 차례대로 영적인 것이 이성적인 것 안으로, 이성적인 것이 기억-지식 안으로 흘러들어 갈 때 저마다 그 본래의 역할과 기능을 회복하게 되어 올바른 쓰임새들이 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질서’의 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아주 어린 시절 막 배움을 시작했을 때는, 그때도 질서는 동일하지만, 그러나 보이기는 정반대인 것처럼, 즉, 먼저 기억-지식에서 이성적인 걸로, 이성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그렇게 해서 최종 천적인 것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But when a man is being instructed in his earliest childhood, the order is indeed the same, but it appears otherwise, namely, that he advances from memory-knowledges to rational things, from these to spiritual things, and so at last to celestial things.

 

그렇게 보이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가장 내적인 천적인 것을 향한 어떤 길이 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it so appears is that a way must thus be opened to celestial things, which are the inmost.

 

모든 가르침은 단순히 어떤 길을 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이 열릴 때, 같은 말이지만, 그릇들이 열릴 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질서대로 그 안으로 흘러들어 가는 것이 있는데, 천적, 영적인 것에서 오는 이성적인 것이, 그리고 이 이성적인 것에는 천적, 영적인 것이, 그리고 이 천적, 영적인 것에는 천적인 것이 차례대로 흘러들어 옵니다. All instruction is simply an opening of the way; and as the way is opened, or what is the same, as the vessels are opened, there thus flow in, as before said, in their order, rational things that are from celestial spiritual things; into these flow the celestial spiritual things; and into these, celestial things.

 

이들 천적, 영적인 것은 지속적으로 자신을 주고 있으며, 또 앞으로 열릴 그릇들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고 형성합니다. 이런 사실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요, 그들 안에서 보면 기억-지식과 이성적인 것은 죽은 상태라는 사실과, 그러면서도 그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들 안으로 흘러들어 온 내적 생명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Thes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are continually presenting themselves, and are also preparing and forming for themselves the vessels which are being opened; which may also be seen from the fact that in themselves the memory-knowledge and rational are dead, and that it is from the inflowing interior life that they seem to be alive.

 

※ 우리가 더 이상 세상 지식과 인간 이성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대신 자유롭게 영적, 천적 사고를 할 수 있다면, 그 상태가 바로 세상 지식과 인간 이성이 힘을 다한, 더 이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죽은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 실제로 우리의 사후(死後), 우리가 세상에서 습득한 모든 지식과 경험은 휴면상태에 들어가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며, 위와 같은 일이 사후에는 이렇게 구현됩니다. 세상 지식과 경험, 겉 사람의 이성은 그 역할과 기능을 다 하였으므로 이제는 쓸데가 없어져 따로 보관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사고와 판단력에 있어 누구에게나 두드러지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This can become manifest to anyone from the thought, and the faculty of judgment.

 

※ 위 문장은 아래 단락 [3]에 포함되어야 할 듯...

 

[3] 이런 것들 안에 모든 예술과 과학의 심오한 아케이나가 감추어져 있으며,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그 만분의 일도 탐구 불가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꼭 성인들만의 일도 아닙니다. 어린아이들한테도 해당되며, 그 모든 사고와 거기서 나오는 모든 언어표현도 그들로 가득가득합니다. (이것은 사람은, 심지어 가장 위대한 학자라 할지라도 못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안의 천적, 영적인 것들이 이 모든 것을 향해 나오며, 흘러들고, 만들지 않는 한, 도저히 해당되지 않을 것입니다. In these lie hidden all the arcana of analytical art and science, which are so many that they can never explored even as to the tenthousandth part; and this not with the adult man only, but also with children, whose every thought and derivative expression of speech is most full of them (although man, even the most learned, is not aware of this), and this could not possibly be the case unless the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within were coming forth, flowing in, and producing all these things.

 

※ 즉 이 세상 모든 일에 하늘로부터 천적, 영적 흐름이 있어 겉으로 보이는 이 모든 일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성, 지성은 물론, 만물의 생장 등 모든 일상 활동의 배경에는 이런 천적, 영적 배경이 있다는 말입니다.

2021-10-22(D6)-매일예배(2217, AC.1494-1495, 창12,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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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ASC6cud4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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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90. 18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Verse 18. And Pharaoh called Abram,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주께서 생각에 잠기셨음을,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그것이 그를 슬프게 하였음을,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천적인 것과 결합하려는 진리 말고 다른 그 어떤 진리도 가질 필요가 없었음을 그가 알고 있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Pharaoh called Abram”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signifies that it grieved him;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signifies seeing that he knew that he ought not to have any other truth than that which would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1491.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And Pharaoh called Abram.

 

이 표현이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음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바로’(Pharaoh)의 의미가 기억-지식이라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기억-지식 자체, 즉, 기억-지식의 일들을 일컬어, 이 지식은 주님이 어린 시절에 습득하신 것인데, 여기서 ‘바로’라 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말을 거는 건 기억-지식입니다. 즉, 그 지식을 통해서 그렇게 말을 거시는 분은 여호와이시지요. The memory-knowledge itself, that is, the matters of memory-knowledge, which the Lord acquired when a child, are here called “Pharaoh”; thus it is that knowledge itself which thus addresses the Lord, that is, it is Jehovah who does so by means of that knowledge.

 

※ 지식이 말을 건다는 건, 그 지식이 생각났다, 기억이 났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바로라는 지식이 기억이 나 생각에 잠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표현의 의미는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다라는 것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se things signify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정신적 관찰, 곧 생각에 잠기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식, 즉, 바로라고 하는 지식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Mental observation comes by means of memory-knowledge, thus by means of Pharaoh, by whom, as before said, this knowledge is signified.

 

 

1492.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이 표현을 보고, ‘아, 주님이 그걸 생각하고 무척 슬퍼하셨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이 표현 전반에 실린 분(忿)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볼 때 분명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큰 슬픔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it grieved him is also evident from the very indignation in which this is said: the grief itself is thus expressed.

 

속뜻이라는 게 이런 겁니다. 어펙션(affection) 자체는 말 속에 숨어 겉으로는 안 보이지만 사실은 말을 구성하는 것이지요. 겉 글자로 되어 있는 단어들은 속뜻을 아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The internal sense is such that the affection itself that lies hidden in the words is what constitutes it; the words of the letter are not attended to, but are as if they had no existence.

 

이 말 속 어펙션은 말하자면, 기억-지식의 분(忿)이요, 주님의 큰 슬픔입니다. 이 슬픔은, 주님이 어린 시절 즐거움과 큰 기쁨으로 배우셨던 그 기억-지식들과 이젠 이별해야 한다,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그런 슬픔입니다. The affection in these words is the indignation as it were of the memory-knowledge, and the Lord’s grief; and in fact grief from this, that the memory-knowledges which he had learned with pleasure and delight should be thus destroyed.

 

이 경우는 다음과 같은 건데요, 아이들이 뭘 좋아하길래 그 부모들이 보니 너무 위험해 보여 아이들에게서 그걸 빼앗을 때, 그때 아이들이 느끼는 큰 슬픔 같은 그런 것입니다. The case herein is like that of little children who when they love something their parents see to be hurtful to them, and it is taken away from them, are thereby grieved.

 

※ 어린 시절에 배운 세상 지식 하나 단절한다는 게, 헤어진다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슬퍼하시나 싶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많이 사랑하지 않았으면 헤어질 때도 별로 서운하지 않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무덤덤함은 사실은 우리의 냉정함을, 우리가 처음 무엇을 배울 때, 우리는, 주님과 달리 우리는 무슨 그리 큰 고마움도, 기쁨도, 반가움도 없이 그저 태어났으니까 산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으니 등교한다, 수업시간이 되었으니 교실에 앉아 있다... 등과 같은 수동적 삶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린 시절에도 확실히 다르셨습니다. 여느 어린이들은 우리와 같이 저랬다면 주님은 비록 세상 지식, 바로와 애굽을 배우실지라도 그 지식으로 지성을 접하고, 그 지성으로 영적, 천적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아셨기에 정말 소중히 여기시고 정성을 다해 배우셨음을, 세상 학문과 지식에 대하여도 주님은 정말 기뻐하고 사랑하셨음을 오늘 본문에서 보면서, 나는 어땠나, 나는 그동안 무슨 공부를 할 때 어떤 태도로 임했나를 돌이키게 됩니다.

 

비록 세상 학문이라 하더라도 그걸 통해 영적, 천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성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선용(善用)을 통한 주님의 질서와 순서 가운데 머무를 수만 있다면, 그래서 세상 학문과 지식이 그 쓰임새를 다하고 마침내 헤어질 때가 오더라도 냉냉함과 무덤덤함 대신 오늘 본문 주님처럼 저렇게 큰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슬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에 잠겨 봅니다.

 

무엇 또는 누구와 헤어질 때, 평소 많이 사랑하였으면 크게 슬퍼할 것이요, 적게 사랑하였으면 덤덤할 것입니다. 사람은 헤어질 때 모습을 보고 그는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493. 그를 네 아내라고 That she was thy wife.

 

이것이 상징하는 건, 그는 천적인 것과 결합했어야 할 진리 아닌 다른 진리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은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과 결합해야 하는 진리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위 12절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at he ought to have no other truth than that which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wife” as being the truth that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concerning which above, at verse 12).

 

여기서는 주님이 지성을 향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지혜를 향해 나아가신 순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성에 대하여 지혜 자체가 되신 것처럼 인성에 대하여도 지혜 자체가 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There is here described the order in which the Lord advanced to intelligence, and thus to wisdom; so that, as he was wisdom itself as to his Divine essence, so he should become wisdom itself as to his human essenc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8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속뜻)

주님은 이제 세상 학문과 헤어지실 때가 되어 깊이 생각에 잠기셨고 많이 슬퍼하셨다. 주님의 천적 진리를 향한 여정에 더 이상 세상 지식은 함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이제 우리는 어른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성장, 성숙한 어른이면, 우리는 천국과 주님을 향하는데 별 도움 안되는 것들하고는 마땅히 결별해야 합니다. 주님과 결합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하면서 스마트폰과 인터넷, 유튜브와 세상 뉴스는 또 붙들고 놓지 않는 사람... 본인도 참 괴롭겠지만 타인 보기에도 참 민망한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2021-10-20(D4)-매일예배(2216, AC.1490-1493, 창12,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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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e7MTCObb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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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90. 18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Verse 18. And Pharaoh called Abram,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주께서 생각에 잠기셨다는 뜻입니다.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그것이 주님을 슬프게 하였음을 의미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천적인 것과 결합하려는 진리 말고 다른 그 어떤 진리도 가질 필요가 없음을 주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다. And Pharaoh called Abram”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signifies that it grieved him;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signifies seeing that he knew that he ought not to have any other truth than that which would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1491.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And Pharaoh called Abram.

 

이 표현이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음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바로’(Pharaoh)의 의미가 기억-지식이라는 걸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기억-지식 자체, 즉, 기억-지식의 일들을 일컬어, 주님 어린 시절 습득하신 것인데, 여기서 ‘바로’라 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말을 거는 것은 기억-지식 자체입니다. 즉, 그 지식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 분은 여호와이시지요. The memory-knowledge itself, that is, the matters of memory-knowledge, which the Lord acquired when a child, are here called “Pharaoh”; thus it is that knowledge itself which thus addresses the Lord, that is, it is Jehovah who does so by means of that knowledge.

 

※ 지식이 말을 건다는 건, 그 지식이 생각났다, 기억이 났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바로라는 지식이 기억나 생각에 잠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표현의 의미는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다라는 것이지요. Hence it is evident that these things signify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정신적 관찰, 곧 생각에 잠기는 것은 지식, 즉, 바로라고 하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지식을 의미하는 바로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Mental observation comes by means of memory-knowledge, thus by means of Pharaoh, by whom, as before said, this knowledge is signified.

 

2021-10-19(D3)-매일예배(2215, AC.1490-1491, 창12,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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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eCX88Jd_4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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