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에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에 창1:31의 상태가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 이것을 단순히 ‘신앙 = 아는 것’, ‘사랑 = 행동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입니다. 처음 이해하기에는 편리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의미를 너무 좁게 만들 수 있습니다.
신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어떤 성경 구절을 기억하거나 어떤 교리를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곧 신앙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에는 진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관계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 그것을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진리에 따라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들과 관계된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외우고 있다는 것은 기억 지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님의 말씀임을 인정하고,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비추는 진리로 받아들이며, 실제 상황에서 무엇이 옳은지를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면 신앙에 속한 것과 더 깊이 관계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 역시 단순한 감정이나 행동 하나와 같지 않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좋아하며 목적으로 삼는가 하는 의지의 생명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실제 삶에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실제로 이웃의 선을 원하고, 그 사람에게 무엇이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며, 가능한 범위에서 그 선을 행하려 한다면 사랑에 속한 것이 삶에 나타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알면 신앙, 행동하면 사랑’이라는 공식은 피해야 합니다. 사람은 사랑 없이도 많은 종교적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칭찬을 받기 위해 선행할 수도 있고, 자기 의를 드러내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행동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행동의 내적 사랑이 무엇인지 곧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신앙 역시 단순히 머리에만 있는 정보가 아닙니다. AC.60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은 결국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살아 있는 신앙을 단순한 지식 저장소처럼 생각하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들 =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관계된 것들’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조금 더 안전합니다.
바로 다음 AC.61은 이 문제를 한 걸음 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영적’이라고 하고,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 속하는 모든 것을 ‘천적’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AC.60의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다음 글의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을 이해하는 준비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영적’과 ‘천적’의 전체 차이를 미리 다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는 순서대로 설명하고 있으므로 다음 글이 말할 몫은 다음 글에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60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진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을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전혀 다른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 거짓을 통해 이익을 얻고 싶어 할 수도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계속 복수하기를 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가 알고 인정하는 진리와 그가 실제로 사랑하고 원하는 것은 아직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AC.60이 ‘심히 좋았더라’라고 부르는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따라서 사람이 참되다고 인정하는 것과 그가 사랑하고 원하는 것이 서로 결합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알던 것을 이제 실천한다’는 정도로만 이해하면 조금 부족합니다. 실천은 물론 중요하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결합은 더 안쪽의 의지와 이해에 관계됩니다. 무엇이 참인지 인정하는 이해와 무엇이 선한지 사랑하는 의지가 서로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AC.60은 이 결합을 단순한 협력이라고 하지 않고 ‘결혼’이라고 부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 하나를 이룹니다.
이 대목은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단지 ‘이 사람은 이제 성경을 많이 안다’고 보시고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것도 아니고, 단지 ‘좋은 행동을 많이 한다’고 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AC.60의 설명에 따르면 그 깊은 이유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가 서로 분리된 채 각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결합된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가지고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내적 상태를 쉽게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매우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는 우리가 완전히 알 수 없고, 많은 선행을 하는 사람의 가장 깊은 동기도 겉으로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이 설명은 ‘누가 여섯째 날 인간인가’를 분류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 거듭남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보여 주는 말씀의 속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결합을 인간 자신의 작품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창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시작합니다. ‘심히 좋았더라’고 평가받는 상태도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의 결과입니다.
속뜻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자기 힘으로 생명 있게 만들고 사랑과 결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가운데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따라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을 가장 간단하게 구별한다면, 전자는 진리와 그것을 인정하고 이해하는 데 관계된 것들이고, 후자는 선과 그것을 원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관계된 것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60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그 구별 자체보다 그 다음입니다. 이 둘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하나 됨 때문에 말씀은 앞선 날들의 ‘좋았더라’를 넘어 여섯째 날에 이르러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합니다.
AC.60, 창1:31, ‘심히 좋았더라’(AC.60-63)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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