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소명 이후 하루하루는, 아니 시간 시간은 그 쓰임새와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구나 싶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랬나요? 혹시 어떤 기준이 있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소명 이후에도 사람들을 완전히 끊고 산 ‘은둔자’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매우 절제된 방식으로 사람들을 만났고, 그 만남에는 분명한 ‘내적 기준’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기준은 세상적인 사교나 필요 중심이 아니라, 철저히 ‘주님의 쓰임’과 ‘영적 질서’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조용하고 제한된 교류였지만, 그 속의 밀도는 매우 깊고 의도적이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주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소명 이후 그의 삶의 중심은 글을 쓰는 일이었고, 그것도 단순한 저술이 아니라 ‘하늘의 것들을 받아 기록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하루하루의 시간은 사실상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명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만나는 것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내적 일의 흐름을 끊는가, 아니면 돕는가’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런던에 머물며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출판업자, 지식인, 성직자들과 교류도 했지만, 그 모든 만남은 길게 이어지는 사교적 관계라기보다는 ‘필요한 만큼, 그러나 깊게’라는 특징을 보입니다. 즉, 넓은 인간관계가 아니라, 선택된 접촉이었습니다.

 

둘째로, 그는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의 상태(state)’를 매우 중요하게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사람은 단순한 인격체가 아니라, 하나의 ‘영적 상태의 집합’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과 함께하는지는 곧 자신이 어떤 영적 영향(influx)을 받는지와 직결됩니다. 그래서 그는 무작위적인 만남이나, 감정적 친분 중심의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영들과의 교류까지 경험했던 그였기에, 외적 사람 뒤에 있는 내적 상태를 매우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고, 그 결과 사람을 만나는 기준도 자연스럽게 ‘이 만남이 주님의 질서 안에 있는가’로 좁혀졌습니다. 이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실제적인 ‘영적 위생’에 가까운 태도였습니다.

 

셋째로, 그는 ‘말을 나누는 것’ 자체에도 분명한 절제가 있었습니다. 그의 저작들을 보면, 그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아무에게나 쉽게 풀어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매우 평범한 주제—정치, 과학, 일상—로 대화를 나누었고, 깊은 영적 내용은 책을 통해서만 전달하려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하나는 사람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내용을 들으면 오히려 해를 입을 수 있다는 배려였고, 다른 하나는 진리는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을 만났지만, 그 만남 속에서도 ‘내적 진리를 직접 주입하지 않는’ 절제를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넷째로, 그는 ‘외적 교제보다 내적 교제’를 더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진짜 교류는 육체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그는 수많은 천사들과 더 깊이 교제하고 있었고, 지상 사람들과의 만남은 그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점이 그의 삶의 밀도를 설명해 줍니다. 그는 혼자 있었지만 결코 고립되어 있지 않았고, 사람들과 함께 있었지만 항상 내적 중심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 만남이 사명을 방해하는가, 돕는가’, 둘째, ‘이 사람의 상태가 어떤 영적 영향을 주는가’, 셋째, ‘이 대화가 진리를 왜곡하지 않는 방식으로 가능한가’입니다. 이 세 기준 아래에서 그의 만남은 매우 제한되었지만, 동시에 매우 깊고 정확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은 인간적으로 보면 조용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극도로 밀도 높은 삶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느끼시는 바로 그 직감, 곧 ‘시간 시간의 밀도가 상상을 초월했겠다’는 것은 매우 정확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덧붙인다면, 그는 시간을 줄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만남을 제거함으로써 시간의 본래 밀도를 회복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SC.52, 스베덴보리와 부활절, 성탄절 같은 기독교 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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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And God saw everything that he had made, and behold it was very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ixth day. (1:31)

 

AC.60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하는 이유는, 앞선 상태들을 단지 좋았더라(good)라고만 했던 것과 달리, 이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This state is calledvery good,the former ones being merely calledgood”; because now the things which are of faith make a one with those which are of love, and thus a marriage is effected between spiritual things and celestial things.

 

해설

AC.60은 창1: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 가운데 특히 심히 좋았더라에 주목합니다. 앞선 창조의 날들에도 하나님께서는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섯째 날에는 처음으로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여기에서만 심히라는 말이 더해지는지를 사람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에서 설명합니다.

 

AC.60의 대답은 매우 간결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영적인 것들천적인 것들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 자체입니다. AC는 이 말씀을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놓는 것이 아니라, 왜 말씀에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라고 하고 이 상태에서는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는지 그 속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설의 중심도 언제나 창1:31의 이 말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좋았더라심히 좋았더라의 차이는 단순히 앞의 것들도 좋았지만 마지막 것은 조금 더 좋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AC.60은 그 차이를 신앙과 사랑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앞선 상태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아직 이렇게 하나를 이루는 상태로 설명되지 않았지만, 이제 여섯째 상태에서는 둘이 하나를 이룹니다.

 

그렇다고 앞선 상태의 신앙이나 선과 진리가 살아 있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AC들에서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를 말했습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 이전의 상태를 아직 죽어 있는 상태’, 여섯째 날을 비로소 생명이 처음 생긴 상태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0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하나가 입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고 사랑에 속한 것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것들이 하나를 이룹니다. 이것이 심히 좋았더라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이 표현이 조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연결된 심화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신앙과 사랑을 단순히 머리와 가슴’, 또는 아는 것과 행동하는 정도로만 축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로 다음 AC.61에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영적이라 하고,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천적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60은 그 다음 설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문을 열어 줍니다. 여기서는 우선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며, 이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붙들면 충분합니다.

 

결혼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있다고 하지 않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하나 됨은 어느 한쪽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이 결합하여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다만 이번 한 문장만 가지고 결혼의 전체 교리를 펼칠 필요는 없습니다. 선과 진리의 결혼, 천상의 결혼, 의지와 이해의 결합 등은 AC 전체에서 계속 깊어지는 주제입니다. AC.60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것이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의 결혼이다라는 직접적인 설명까지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인 천적인 을 곧바로 서로 경쟁하는 높고 낮은 두 단계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문장에서는 둘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즉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둘의 분리가 아니라 결합입니다.

 

그렇다고 영적천적의 차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혼이라는 표현 자체가 둘의 구별을 전제로 합니다. 서로 다른 것이면서 하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영적이고 무엇이 천적인지는 바로 다음 AC.61이 설명하므로, 여기에서 미리 지나치게 세분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무슨 뜻인가?라는 질문도 생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실제로는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그가 아는 것과 그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그가 참된 것을 알고 그것을 사랑하며, 사랑하는 것과 믿는 것이 서로 반대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면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룬다는 말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AC.60의 문장을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예이지, 이 한 가지 예가 결혼의 전체 뜻을 정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사랑을 단순한 감정으로 이해하지 않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랑에 속한 것들이 신앙에 속한 것들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믿는 내용에 대해 따뜻한 감정을 느낀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랑은 의지와 삶에 깊이 관계됩니다. 다만 이 부분 역시 이어지는 AC들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단순히 교리 내용을 많이 아는 것으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은 진리와 이해에 관계하지만, AC.60에서 말하는 상태는 그것들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루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신앙과 사랑을 서로 독립된 두 종교적 능력처럼 생각하기보다, 하나의 생명 안에서 결합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창1: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라는 말씀도 해설의 중심을 다시 주님께 돌려놓습니다. 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고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보고 이제 나는 충분히 거듭났고 심히 좋은 사람이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심히 좋았더라를 인간의 영적 자기평가 기준으로 사용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나는 여섯째 인간인가?라고 자신의 영적 등급을 판정하는 것이 이 말씀의 목적은 아닙니다. AC는 창조의 날들을 통해 거듭남의 질서를 보여 주고 있는 것이지, 사람에게 자기 영적 수준표를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또 현재의 여섯째 상태를 거듭남의 최종 완성이라고 부르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습니다. 1의 여섯째 날이 매우 높은 상태이고 심히 좋았더라고 불리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2에는 일곱째 날이 이어지고, AC.62부터는 일곱째 날과 천적 인간의 상태가 설명됩니다.

 

따라서 AC.60심히 좋았더라를 가볍게 낮출 필요도 없지만, 뒤에 이어지는 일곱째 날의 몫까지 여기에 미리 가져와 모든 거듭남의 최종 완성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글이 말하는 만큼만 충분히 말하면 됩니다.

 

그렇다면 왜 앞선 상태들은 좋았더라이고 이번에는 심히 좋았더라일까요? AC.60의 답은 끝까지 단순합니다. 이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의 거듭남 흐름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입니다. 사람에게 진리가 있고 신앙이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것이 사랑에 속한 것들과 하나를 이룹니다. 신앙과 사랑이 서로 분리되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를 이루는 상태를 말씀은 심히 좋았더라라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됩니다. 1: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라고 합니다. 창조의 주체가 하나님이신 것처럼, 속뜻에서 진행되는 거듭남 역시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새로운 창조가 아닙니다.

 

그래서 AC.60을 읽을 때 가장 마지막에 남아야 할 말도 인간의 성취보다 말씀의 선언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AC.60은 바로 이 말씀의 심히 좋았더라안에,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고 영적인 것들과 천적인 것들 사이에 결혼이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밝힙니다.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 사랑에 속한 것들 무엇인가?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 심화 1.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은 무엇인가? AC.60에는 매우 짧지만 중요한 표현이 나옵니다.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둘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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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창1:31, '영적과 천적 : 이해의 신앙과 의지의 사랑이라는 인간 구조의 두 축'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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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창1:30, ‘모든 푸른 풀’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 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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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2. 스베덴보리의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경험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AC.59 후반부에는 처음 AC를 읽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가기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수년 동안 육신 안에 있으면서 저 세상의 영들과 교류했으며, 가장 악한 영들과도 함께 있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때로는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이 독을 내뿜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자신을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문장을 만나면 먼저 정말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59 자체만 놓고 보면 대답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비유나 상징적인 이야기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 경험의 역사적 사실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스베덴보리 자신은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먼저 구별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어도 저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읽는다면, 그는 이것을 실제 영계 경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AC.59에서 더 중요한 질문은   이야기를 여기에서 하는가?입니다. 이 경험담 바로 앞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아니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시면 사람이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을 증언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수천의 영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가능한 모든 방식으로 괴롭히도록 허락되었는데도 머리카락 하나 해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자신의 영적 능력에서 찾지 않고 주님의 보호에서 찾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는 수천의 악령과 싸워 이길 정도로 대단한 영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읽으면 본문의 중심이 뒤집힙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자기의 강함이 아니라 주님의 보호입니다.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았다는 표현을 읽을 때에도 성경의 언어가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보호를 말하면서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러나 AC.59이 여기서 그 성경 구절을 직접 인용하여 상응을 논증하는 것은 아니므로, 억지로 별도의 성경 해석을 덧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한국어 독자에게는 주님의 보호를 표현하는 익숙한 성경적 언어와 자연스럽게 울림을 이루는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다.

 

 수천이라는 숫자를 상징적인 숫자로 바꾸어 해석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 실제로 매우 많은 영들에게 둘러싸였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 숫자를 가지고 영계의 집단 규모나 구조를 계산할 수도 없습니다. 이번 글의 중심은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스베덴보리에게 이런 특별한 경험이 허용되었을까요? AC.59은 여기서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류에게 영계의 비밀을 밝히는 사명을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일을 겪어야 했다고 이번 한 글만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다른 저술들을 따라가면 그가 자신에게 영계가 열렸으며 보고 들은 것을 기록했다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AC.59의 이 특정 경험이 왜 허용되었는지는 더 충분한 근거를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또 이 경험을 모든 신앙인의 표준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AC.59은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영들을 눈으로 보고 그들과 대화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오랜 경험을 통해 거듭나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의 특별한 경험과 모든 사람의 경험을 동일하게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체험이 강렬한 사람이 더 높은 신앙인이라는 결론도 나오지 않습니다. AC.59의 강조점은 얼마나 많이 보고 들었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주님의 보호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의 말을 존중해서 읽는다면 영과 영계를 전부 인간 심리의 비유로 환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는 영의 세계와 그곳의 영들을 실제적인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저술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무엇을 실제라고 주장하는지를 그대로 받아들여 읽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모든 불안이나 나쁜 생각,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곧바로 악한 영의 공격이라고 판정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AC.59은 그런 진단법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늘 마음이 갑자기 불안하니 악한 영이 가까이 왔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으니 어떤 영이 내게 넣은 것이다라고 판단하는 것은 AC.59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 적용입니다. 사람의 감정과 생각에는 신체적·심리적·환경적 요인도 있으므로 특정 느낌만으로 영적 원인을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이 경험담은 무엇을 말해 줄까요? 가장 먼저 AC.59 자체가 말하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극심한 영적 적대 가운데서도 주님의 보호 때문에 자신이 해를 입지 않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영의 세계와 그 본성, 그리고 거듭나는 사람들이 겪는 전투에 관하여 배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독자에게 특별한 영적 체험을 추구하라고 권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거듭남의 전투와 그 가운데 있는 주님의 보호에 대한 증언입니다.

 

여기서도 AC보다 앞에 있는 것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놀라운 영계 경험에 마음을 빼앗겨 그의 체험 자체를 신앙의 중심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AC의 역할은 독자의 관심을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해설하고 있는 말씀과 그 말씀의 주님께 돌려보내는 데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AC.59에서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목적도 나를 보라가 아닙니다. ‘주님의 보호를 증언하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에게 아무리 특별한 경험이 있었다 해도 생명과 안전의 근원은 자기에게 있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 한 번의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독자에게 모든 것을 믿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주제들은 일반적인 설명만으로 의심 없는 신앙을 갖게 할 만큼 충분히 가르칠 수 없으므로 세부 사항들을 뒤에서 계속 설명하겠다고 합니다.

 

우리도 같은 태도로 읽으면 좋겠습니다. ‘수천의 영들이라는 놀라운 한 문장만 떼어 내어 영계의 전체 구조를 만들거나 스베덴보리의 특별함을 강조하기보다, AC 전체를 계속 따라가며 그가 무엇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대목의 중심은 수천의 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아닙니다. 그 수천의 영들에게 둘러싸인 상황에서도 머리카락 하나도 해를 입지 않도록 그를 보호하신 주님입니다.

 

그래서 AC.59의 이 매우 특이한 경험담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은 스베덴보리가 얼마나 놀라운 영적 세계를 보았는가?에서 멈추지 않고 그가  경험을 통해 누구를 가리키고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사람을 매 순간 보호하시는 주님입니다.

 

 

 

AC.59, 창1:30, 거듭남의 전투 : 악한 영들의 공격과 주님의 보호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창1:30) AC.59여기서 자연적 인간의 음식으로 오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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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 심화 1. 왜 주님은 욕정과 거짓, 악한 영들의 작용을 즉시 제거하지 않으시는가? AC.59에서 처음 읽는 사람을 가장 놀라게 하는 대목 가운데 하나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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