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9 심화

1. ‘자비’(mercy)와 ‘은혜’(grace)는 어떻게 다른가?

 

AC.19에서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the Lord’s mercy)를 뜻한다고 말합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표현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반복해서 ‘자비’라는 말을 만나면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더구나 한국어의 ‘자비’가 일상적으로 불교와도 자주 연결되어 사용되기 때문에, 차라리 ‘은혜’라고 번역하면 더 자연스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역에서는 두 말을 임의로 하나로 합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사용한 말을 구별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에서 영어 ‘mercy’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말은 ‘misericordia’입니다. 이것은 긍휼, 자비, 불쌍히 여김과 관련된 말입니다. 따라서 Potts가 이를 ‘mercy’로 옮겼을 때 한국어로 ‘자비’라고 번역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자비’가 반드시 불교적 용어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과 기독교 전통에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mercy’를 ‘자비’라고 하는 것은 다른 종교의 개념을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긍휼하심을 나타내는 기독교적 언어로 읽어야 합니다.

 

반면 ‘grace’는 일반적으로 ‘은혜’라고 번역합니다. 두 말은 서로 매우 가까우며 실제 신앙 언어에서는 겹치는 영역도 많기 때문에 ‘자비는 이것, 은혜는 저것’이라고 완전히 분리된 두 개념처럼 정의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다만 일반적인 뉘앙스에서 ‘mercy’는 비참하고 연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향한 긍휼과 자비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grace’는 값없이 베풀어지는 호의와 은혜의 측면을 보다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돕는 구별이지 두 단어 사이에 넘을 수 없는 교리적 경계가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19에서는 특히 왜 ‘자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지가 본문의 흐름에서 드러납니다. 사람은 아직 혼돈과 공허와 흑암 가운데 있고, ‘깊음’으로 표현되는 욕정과 거짓에 잠겨 있습니다. 아직 빛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에서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의 자비’라고 합니다. 사람이 먼저 선해져서 주님의 관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아직 그런 어두운 상태에 있을 때부터 주님께서 그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감추어 보존하시고 그 위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이런 문맥에서는 ‘자비’라는 말이 AC.19의 장면을 매우 잘 전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작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것도 같은 방향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보고 이해하며 인간의 구원과 거듭남에 관한 것을 알게 되는 근원을 자기 지성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는 표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mercy’를 사용하는 모든 곳을 하나의 간단한 공식으로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각의 문맥에서 그 말이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더 깊이 보면 주님의 자비는 주님의 사랑과 떨어진 별개의 속성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타락하고 연약한 인간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 사랑이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자비와 긍휼의 언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비’를 단순히 불쌍해서 봐주는 감정 정도로 축소해서도 안 됩니다. AC.19에서 주님의 자비는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보존하고, 그것들 위에서 운행하며, 장차 거듭남에 사용하시는 적극적인 신적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어 번역에서는 ‘mercy’를 ‘은혜’로 바꾸어 익숙하게 만들기보다 ‘자비’로 구별하여 두는 편이 좋습니다. 독자에게 처음에는 조금 낯설더라도 AC를 계속 읽으면서 ‘주님의 자비’가 어떤 문맥에서 반복되는지를 경험하면 그 말의 깊이가 점차 드러납니다. ‘grace’가 나오면 ‘은혜’, ‘mercy’가 나오면 ‘자비’라는 기본적인 구별을 유지하되, 둘을 서로 경쟁하는 신학 개념으로 만들지는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19에서 이 차이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그림은 결국 ‘품으심’입니다. 아직 빛이 나타나기도 전에 주님의 자비는 이미 수면 위를 운행하며, 사람 안에 감추어 보존하신 것들을 품고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새 생명을 만들어 내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그를 떠나지 않고 거듭남을 준비하십니다. 이 장면에서 ‘자비’는 단순한 번역어 하나가 아니라 거듭남이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역사임을 보여 주는 중요한 말입니다. (AC.19 심화 1)

 

 

 

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심화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의 Potts 영어에는 ‘하나님의 영’이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그 자비가 ‘move’, 또는 암탉이 알을 품듯 ‘brood’한다고 설명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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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창1:2, ‘수면 위를 품으시는 자비 : 리메인스 위에서 시작되는 거듭남’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mercy)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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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심화

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를 영어로 읽다 보면 오늘날에는 다소 낯선 ‘vastation’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AC.18에서 Potts는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인간의 황폐’라는 대목에 ‘vastation’을 사용합니다. 현대 영어 독자에게는 ‘devastation’이나 ‘desolation’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에, 왜 이런 단어가 사용되었으며 정확히 어떤 의미로 읽어야 하는지가 자연스럽게 문제가 됩니다. 이 경우에는 영어 단어 자체에서 의미를 추측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사용한 라틴어와 AC 안에서의 용례를 함께 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원문에서 중요한 말은 ‘vastatio’입니다. 이것은 황폐하게 함, 비워짐, 황폐 상태와 관련된 말이며, 영어 번역의 ‘vastation’은 이 라틴어를 형태상 매우 가깝게 따라간 번역어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의 일반 영어에서 ‘vastation’이 얼마나 흔한가만 가지고 그 뜻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Potts 번역에서 이 단어를 만날 때는 일상 영어의 자연스러운 표현이라기보다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전문 개념을 가능한 한 일관되게 전달하려는 번역어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vastatio’를 한국어로 무엇이라 해야 할까요?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황폐’가 가장 적절합니다. ‘황폐’는 무언가가 비어 가고 이전의 것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AC의 여러 문맥을 비교적 폭넓게 담을 수 있습니다. 다만 일상 한국어에서 ‘황폐’라고 하면 전쟁으로 도시가 파괴되거나 마음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처럼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를 먼저 떠올릴 수 있으므로, AC에서의 뜻은 반드시 문맥을 통해 이해해야 합니다.

 

AC.18은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출발점을 직접 제공합니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황폐는 단순한 파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이루시는 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처리되고 물러나는 과정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AC.18에서는 ‘깊음이 마르거나 황폐해진다’는 표현과 ‘옛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표현이 서로 연결됩니다.

 

이 때문에 ‘vastatio’를 단순히 ‘고난’이나 ‘시련’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외적으로 큰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AC가 말하는 황폐인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황폐의 과정이 반드시 눈에 띄는 외적 재난의 모습으로만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황폐의 핵심은 외적인 사건의 종류보다 사람의 영적 상태와 관련됩니다. 이전에 의지하던 것, 선과 진리를 방해하던 것, 거짓이라고 깨닫지 못했던 것들이 그 힘을 잃고 사람이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되는 과정입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황폐’를 곧바로 ‘악이 완전히 제거되는 것’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AC.18의 표현은 분명 강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 전체에서 사람의 proprium과 유전적 악이 단순히 소멸하여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가입니다. 주님께서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는 것을 물리치시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심에 따라, 이전에 사람을 지배하던 것이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황폐’는 파괴보다 ‘새 질서를 위한 비움과 준비’라는 방향에서 이해할 때 AC.18의 문맥에 더 잘 맞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vastatio’의 용례를 하나의 간단한 정의로 고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을 개인의 거듭남뿐 아니라 교회의 상태, 진리와 선의 결핍, 시험과 준비 등 여러 문맥에서 사용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vastatio’가 나올 때마다 무조건 ‘악의 지배력이 약화되는 과정’이라고 기계적으로 대입하기보다 그 번호의 문맥에서 무엇이 황폐해지고 있으며 왜 그런 상태가 필요한지를 살펴야 합니다. 한국어 용어는 ‘황폐’로 일관되게 유지하되, 그 구체적인 의미는 각 문맥에서 해설하는 방식이 가장 안전합니다.

 

‘desolation’이나 ‘devastation’과의 관계도 이 관점에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현대 영어에서 이 단어들은 ‘vastation’보다 훨씬 익숙하지만, 단어 하나하나의 현대적 뉘앙스를 가지고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개념을 역으로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Potts가 어떤 특별한 신학적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vastation을 창안하거나 선택했다’고 단정할 근거가 없다면 그런 설명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우리 번역의 최종 기준은 Potts의 영어 단어 자체가 아니라 스베덴보리의 라틴어 원문과 그가 AC 전체에서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번역 원칙도 비교적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라틴어 ‘vastatio’와 Potts의 ‘vastation’은 기본적으로 ‘황폐’라고 번역합니다. 그러나 독자가 ‘완전한 파괴’나 단순한 ‘고난’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있는 곳에서는 해설을 통해 그 문맥의 뜻을 밝혀 줍니다. AC.18에서는 특히 ‘참된 것과 선한 것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 새 사람이 잉태될 준비가 이루어지는 상태’라는 설명이 그 의미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결국 AC.18의 ‘vastatio’는 절망의 단어가 아닙니다. 그 자체만 보면 무너짐과 비어짐을 말하지만, 거듭남의 전체 질서 안에서는 그 뒤에 올 새 생명을 위한 준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깊음이 마르는 것은 그곳에 아무것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이 나게 하기 위해서이고, 옛사람이 죽는 것은 죽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새 사람이 잉태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황폐’라는 말을 만날 때 우리는 무엇이 사라지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빈자리에서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시려 하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AC.18 심화 2)

 

 

 

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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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심화 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 심화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깊음’이 마르고 황폐해져야 하며,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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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심화

1. ‘황폐를 거치면 욕정과 거짓은 정말 없어지는가?’

 

AC.18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기 전에 ‘깊음’이 마르고 황폐해져야 하며, 참된 것을 알고 선한 것에 의해 감동될 수 있으려면 그것들의 유입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설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거듭남이 진행되면 사람 안의 욕정과 거짓이 실제로 없어지는 것인가? 악한 성향이 완전히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인가?’ 실제 삶을 돌아보면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 사람에게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오는 욕망이나 잘못된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 때가 있기 때문에, AC.18의 ‘제거’와 ‘황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가 중요합니다.

 

먼저 AC.18은 인간 안의 모든 악한 성향이 존재론적으로 완전히 소멸한다고 설명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참된 것과 선한 것이 사람에게 들어오는 것을 ‘방해하고 거스르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황폐의 핵심은 사람 안에 있던 모든 악의 흔적이 사라지는가보다, 지금까지 선과 진리의 유입을 가로막고 있던 것들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사람을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 새로운 것을 사람 안에 이루시려면 옛 질서가 주도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이 AC.18 마지막의 ‘옛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죽어야 한다’는 말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죽는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옛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자연적 인간 자체가 없어지거나 사람의 개성과 기억과 감정이 파괴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한 악에 대한 모든 가능성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나’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삶의 질서가 더 이상 절대적인 주인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기 자신에게서 올라오는 욕망과 생각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을 곧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여 따르지 않고 주님의 진리 앞에서 분별하고 거절할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거듭남은 자연적 인간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새로운 질서 아래 두는 일입니다.

 

이 점에서 눅15장의 돌아온 아들을 떠올려 보는 것은 좋은 적용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비유가 AC.18의 ‘황폐’를 직접 해설하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둘 사이에는 구조적으로 생각해 볼 만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작은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가서 자기 뜻대로 살다가 모든 것을 허비하고 궁핍해집니다. 마침내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해도 주는 자가 없는 상태에 이릅니다. 그때 비로소 ‘이에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의 집을 생각합니다. 자기 힘으로 충분히 살 수 있다고 여겼던 이전의 질서가 무너지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갈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아들의 궁핍 자체가 그를 자동적으로 거듭나게 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고난을 당했다고 해서 누구나 주님께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상태에서 사람이 무엇을 보고 어떻게 응답하는가입니다. 그러므로 탕자의 궁핍을 AC.18의 황폐와 비교한다면 ‘고난 = 황폐’라는 공식으로 연결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의지하던 것이 무너지고 이전의 삶의 방식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게 되면서 새로운 방향이 열리는 모습에서 유사성을 찾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제 삶에서 겪는 실패와 상실을 해석할 때도 중요합니다. 질병, 경제적 어려움, 관계의 파탄, 계획의 실패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것을 곧바로 ‘주님께서 나를 황폐하게 하신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8의 황폐는 단순히 외적인 고통의 크기로 판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핵심은 선과 진리의 유입을 방해하던 것이 약화되고, 사람이 이전에 붙들고 있던 거짓과 자기 확신에서 벗어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을 수 있는 상태로 준비되는가에 있습니다. 외적 고난이 그런 과정에 사용될 수도 있지만, 고난 그 자체와 황폐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일까요? 사람은 자기 욕정과 거짓이 자신에게 생명과 행복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하는 동안에는 그것을 쉽게 내려놓지 않습니다. 머리로 진리를 배우는 것과 실제로 그것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여 악을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붙들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보고 그것에서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당연하게 여겼던 욕망이나 생각이 더 이상 생명으로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선과 진리를 방해하는 것으로 보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황폐가 거듭남을 준비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욕정과 거짓이 제거된다’는 말을 ‘나는 거듭났으므로 이제 내 안에는 악한 욕망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은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더 분명히 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보이지 않는가가 아니라 무엇이 지배하는가입니다. 욕정과 거짓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주님의 진리로 분별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과 진리가 삶의 중심을 차지하도록 주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 거듭남의 실제적인 싸움입니다.

 

AC.18의 마지막 표현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옛사람은 새 사람이 잉태되기 전에 반드시 죽어야 한다.’ 아직 ‘새 사람이 완성된다’거나 심지어 ‘태어난다’고 하지 않고 ‘잉태된다’고 합니다. 황폐는 완성이 아니라 준비입니다. 주님께서 새 생명을 시작하실 수 있도록 옛것의 지배가 물러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황폐의 목적은 사람을 빈자리로 남겨 두는 것이 아니라 새 사람이 잉태될 자리를 마련하는 데 있습니다. 깊음을 마르게 하시는 것도 주님이시고, 그 깊은 곳에 길을 내시는 것도 주님이시며, 그 길을 통하여 사람을 새로운 생명으로 이끄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AC.18 심화 1)

 

 

 

AC.18 심화 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18 심화2. ‘황폐’(vastation, vastatio)란 무엇인가? AC를 영어로 읽다 보면 오늘날에는 다소 낯선 ‘vastation’이라는 단어를 만나게 됩니다. AC.18에서 Potts는 ‘선지자들이 자주 말하는 인간의 황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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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8, 창1:2, ‘깊음과 황폐 :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잉태되기까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8‘깊음’(faces of the deep)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욕정(cupidities)과, 그로 말미암는 거짓(fals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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