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3

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여러 싸움을 통해 그를 진리와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싸움의 시간은 주님께서 역사하시는 시간이며,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서는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 손가락의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리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기 전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게 되면,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very good)라고 합니다. 이는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자리를 대신하며, 인간은 하늘,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 Meanwhile the Lord continually fights for him against evils and falsities, and by combats confirms him in truth and good. The time of combat is the time of the Lords working; and therefore in the prophets the regenerate man is called the work of the fingers of God. Nor does he rest until love acts as principal; then the combat ceases. When the work has so far advanced that faith is conjoined with love, it is calledvery good”; because the Lord then actuates him, as his likeness. At the end of the sixth day the evil spirits depart, and good spirits take their place, and the man is introduced into heaven, or into the celestial paradise; concerning which in the following chapter.

 

해설

AC.63은 창1: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지금까지 진행된 거듭남의 전투에서 실제로 누가 일하고 계셨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바로 앞 AC.62는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AC.63은 그 과정의 이면에서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거듭남을 인간 자신의 영적 성취 과정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전투가 있고 그가 그 전투를 실제로 겪지만, 그를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고 그 전투들을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이것은 AC.59와도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도록 허용되지만, 그것들을 선을 향해 기울이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매 순간, 심지어 매 순간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 보호하지 않으신다면 사람은 즉시 멸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이제 그 흐름을 전투의 시간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라고 압축합니다. 따라서 사람이 시험과 전투를 겪는다는 것과 주님께서 그를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은 서로 반대되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전투를 겪지만, 그 전투 가운데 그를 붙드시고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능력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여기서 전투의 시간은 주님께서 일하시는 시간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겪는 모든 고통, 실패, 질병, 갈등을 곧바로 지금 주님께서 특별한 영적 전투를 하고 계신 증거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AC.63의 문맥은 거듭남 가운데 악과 거짓에 맞서는 전투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을 모든 인생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만능 공식으로 확대하기보다, 거듭남의 전투 가운데 주님께서 사람을 버려 두지 않으시고 계속 일하신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에게는 싸움으로 경험되는 그 시간이 동시에 주님께서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시는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래서 예언자들 가운데 거듭난 인간을 하나님의 손가락의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손가락이라는 단어 자체를 가지고 곧바로 가장 미세하고 정교한 섭리를 뜻한다고 별도의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AC.63이 이 표현을 사용하는 문맥의 핵심은 의 주체입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손으로 자기 자신을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의 입니다. 거듭남이 인간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라는 앞 문장을 다시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으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기 전까지쉬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이라는 감정이 많아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로 앞 AC.60-61에서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가 되고,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것은 이해에,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데 속한 것은 의지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63은 그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할 때까지 주님께서 쉬지 않으신다고 말합니다. 무엇보다 원문 자체가 이어서 그때 전투가 그친다고 하므로, 사랑이 주가 되는 것과 전투가 그치는 것이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사랑이 주가 되면 모든 선한 행동이 아무 노력 없이 자동으로 흘러나온다거나 뒤로는 내적 갈등이나 시험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까지 확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AC.6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이 여섯째 날의 거듭남의 전투가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 그친다는 것입니다. 이 상태가 이후의 모든 영적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지속되는지는 뒤의 설명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일이 이만큼 진전되어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그 상태를 심히 좋았더라라고 합니다. 이것은 AC.60의 설명과 정확히 이어집니다. AC.60에서는 앞선 상태들이 좋았더라였던 것과 달리 이 상태가 심히 좋았더라인 이유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AC.63은 같은 사실을 다시 말하면서 그 이유를 하나 더 덧붙입니다.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움직이신다고 하면 마치 사람이 자기 의지와 자유를 잃고 주님께 조종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AC.63의 문맥에서 그런 뜻으로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앞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고 사랑이 주된 원리로 작용한다고 했고, 그 상태에서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즉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그 사람의 생명에서 주된 것이 된 상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자유와 정확히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이번 글에서는 움직이신다를 곧 강제나 조종이라고 이해하지 않는 정도로 충분하겠습니다.

 

여기서 자신의 모양이라는 표현도 앞의 하나님의 형상과 연결됩니다. AC.62는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했고, AC.63은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목적은 인간이 독립적으로 선해져서 주님 없이도 잘 살아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 사람 안에서 점점 더 생명의 중심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간 자체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은 여전히 그를움직이신다고 합니다. 주님과 인간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거듭난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매우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AC.59에서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면, 처음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러면 이제 악한 영들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다는 뜻인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본문 이해에 직접 필요한 것이므로 심화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메인에서는 원문이 말하는 사실을 그대로 붙들면 됩니다.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악한 영들은 여전히 똑같이 주변에 있지만 영향력만 약해진다는 식으로 바꾸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영들과 인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지 충분한 근거와 함께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하늘, 천적 낙원으로 인도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즉시 이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습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이 마지막 문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도 여기서 너무 빨리 답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늘이라는 말을 보자마자 사후에 죽어서 천국으로 간다는 뜻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되고, 반대로 무조건 살아 있는 동안 마음속에 형성되는 천국 상태일 이라고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다고 했으므로, 우선 이 표현이 창2의 일곱째 날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의 설명을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은 앞 AC.62에서 우리가 일곱째 상태에 관한 질문을 서둘러 완성하지 않은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AC.63에서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며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전투가 그칩니다. 악한 영들이 떠나고 선한 영들이 대신하며, 사람은 하늘 또는 천적 낙원으로 인도됩니다. 그러나 그 천적 낙원이 정확히 무엇이며 일곱째 상태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이제 다음 장이 설명할 몫입니다. AC가 스스로 다음 장에서라고 한 것을 우리가 이번 해설에서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AC.63의 중심은 인간이 얼마나 열심히 싸워 높은 상태에 도달했느냐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입니다. 주님이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십니다. 주님이 전투를 통해 그를 진리와 선 안에 굳게 세우십니다.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할 때까지 주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다음 상태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창1:31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는 말씀에서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주어 역시 하나님입니다. AC.60-63심히 좋았더라의 속뜻을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하여 밝혔지만, 그 모든 과정의 주체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것입니다. AC.63은 여섯째 날의 마지막에서 바로 그 사실을 다시 한번 강하게 밝혀 줍니다. 거듭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가락의 입니다.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 것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1,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63의 ‘그때에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모양으로 움직이신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불편하게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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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 심화 2,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란 무슨 뜻인가? AC.63은 ‘여섯째 날의 끝에서 악한 영들은 떠나가고 선한 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 AC.59에서는 악한 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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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심화 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심화 3,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가? AC.63 마지막에는 처음 읽는 사람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 나옵니다. ‘인간은 하늘, 곧 천적 낙원으로 인도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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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창1, 말씀의 속뜻 :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과 천사들의 지각 (AC.64-66)

AC.64이것이 바로 말씀의 속뜻(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이며, 말씀의 가장 참된 생명입니다. 이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아르카나는 너무나 많아서, 그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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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창1:31, 여섯 날의 거듭남 :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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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2 심화 1,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 하는가?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 여섯 단계로 나뉘며,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여섯째 날에서 끝나지 않고 일곱째 날의 안식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AC를 처음부터 따라온 독자라면 AC.13에서 이미 읽었던 한 문장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번째 상태까지 이르는 이는 적고(few),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scarcely)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AC.13이 말한 것보다 더 많이 말하지 않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적고 일곱 번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을 사실은 누구나 결국 일곱째 상태에 이른다거나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일곱째 상태를 완성한다는 뜻으로 바꾸어 읽을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거의 없다 아무도   없다로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scarcely는 문자 그대로 거의 없다’, ‘좀처럼 없다는 뜻이지 절대로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13이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경우는 존재하지만 매우 드물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구별이 필요합니다. AC.62가 직접 설명하는 것은 여섯 단계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입니다. 일곱째 상태의 성질을 AC.62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AC.62 한 문장만 가지고 여섯째 날은 영적 천국이고 일곱째 날은 천적 천국이다’, 또는 모든 사람은 여섯째 날을 거쳐 일곱째 날의 천적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식의 체계를 만들면 본문보다 앞서가게 됩니다.

 

AC.13으로 돌아가 보면 첫째 상태에서 일곱째 상태까지의 전체 윤곽이 이미 간단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일곱째 상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의 상태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일곱째 상태가 매우 높은 거듭남의 상태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거듭나는 사람에게 반드시 동일한 방식으로 도달되어야 하는 보편적인 마지막 단계인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와 정확히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관련 글들을 더 충분히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점이 중요한 이유는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는 말을 너무 빨리 통계나 운명론으로 바꾸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극소수인가?’, ‘나는 영적 유형으로 태어났으니 애초에 일곱째 상태에는   없는가? 같은 질문이 곧바로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13 AC.62는 사람들을 출생 때부터 두 종류로 분류하는 설명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두 글만으로 누가 처음부터 영적 인간형이고 누가 천적 인간형인가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온순하고 다정한 성격이면 천적 인간이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성격이면 영적 인간이라는 식으로 사람의 자연적 기질을 스베덴보리의 영적 천적에 그대로 대응시켜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AC가 사용하는 용어보다 훨씬 피상적인 구별이 됩니다.

 

그러면 AC.13 거의 없다는 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가장 먼저 거듭남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겠습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과 이어지는 일곱째 상태는 며칠 동안 몇 가지 종교적 체험을 하면 끝나는 과정이 아닙니다. AC.62가 굳이 조금씩 조금씩이라고 말하는 것도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과정이 점진적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낙심의 근거로 삼을 필요도 없습니다. AC.62의 초점은 너는 몇째 날까지   있느냐를 묻는 데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처음 상태에서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창조 가운데 조금씩 조금씩 변화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도 나는 일곱째 상태에 들어갈  있을까?라는 자기 등급 판정보다 지금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거의 없다는 말을 보고 그 상태에 이른 사람을 주변에서 찾아내려 할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여섯째 상태이고 누가 일곱째 상태인지 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AC.13이나 AC.62는 제공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씀은 다른 사람을 분류하기보다 거듭남이 얼마나 깊은 주님의 역사인지를 보게 합니다.

 

무엇보다 창세기 본문의 순서를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말씀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입니다. AC.62 역시 이 여섯째 날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어떻게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지를 말합니다. 일곱째 날은 곧 이어지는 창2:1-3의 말씀에서 본격적으로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단계에서 가장 안전한 결론은 이것입니다. AC.13은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실제로 말합니다. 그 표현을 약화시킬 필요도, ‘아무도 없다고 강화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고 AC.62는 사람이 여섯 창조의 날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말합니다. 이 두 진술을 그대로 붙들고, 일곱째 상태와 천적 인간의 더 깊은 관계는 관련 AC들이 직접 설명할 때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독법은 답을 조금 늦추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AC를 더 정확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체계화하기보다, 말씀과 AC가 열어 주는 순서를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거듭남 자체가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진다고 하듯, 그것을 이해하는 일도 그렇게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AC.62, 창1:31, 여섯 날의 거듭남 : 조금씩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 가는 사람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2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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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1:31)

 

AC.62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은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 여섯 단계로 나눌 있으며, 이것들을 그의 창조의 날들(the days of his creation)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사람이 전혀 인간이라 없는 상태에서 출발하여, 처음에는 겨우 인간이라 만한 어떤 상태가 되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이르러 하나님의 형상(an image of God) 되기 때문입니다. The times and states of mans regeneration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divided into six, and are called the days of his creation; for, by degrees, from being not a man at all, he becomes at first something of one, and so by little and little attains to the sixth day, in which he becomes an image of God.

 

해설

AC.62는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지금까지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읽어 왔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해 주는 글입니다. 말씀에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AC.62는 이 날들을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라고 하며, 그것들을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를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으로 읽어 온 앞의 모든 설명이 여기에서 매우 간결하게 요약되는 셈입니다.

 

먼저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라는 표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을 단순히 여섯 개의 종교적 지식이나 여섯 가지 덕목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거듭나면서 지나가는 상태들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첫째 날에서 여섯째 날까지는 무엇을 여섯 가지 배운다는 목록이라기보다, 주님께서 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AC.62는 이것을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는 이야기이고, AC는 그 말씀의 속뜻 안에서 인간의 거듭남 역시 하나의 창조라고 밝힙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고쳐서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앞에서 계속 살펴본 것처럼 거듭남의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는 말에서도 창조의 주체를 인간 자신에게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어지는 표현은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은 처음에 전혀 인간이라 없는상태에 있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육체적으로 사람이 아니라거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남이라는 문맥에서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AC.49에서도 참 사람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은 주님에게서 받는 만큼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전혀 인간이라 없다는 강한 표현도 그 연장선에서 읽어야 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가는 참된 인간성이라는 관점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다른 사람을 낮추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 사람은 거듭나지 않았으니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은 AC.62의 목적과 전혀 다릅니다. 이 말씀의 속뜻은 다른 사람의 인간 자격을 판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거듭남이 얼마나 근본적인 새 창조인지를 보여 줍니다. 자연적으로 태어난 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AC.62에서 특히 아름다운 표현은 그 다음의 조금씩 조금씩입니다. 사람은 전혀 인간이라 없는상태에서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겨우 인간이라 할 만한 어떤 상태가 되고, 그 뒤 조금씩 조금씩나아가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거듭남이 점진적인 과정이라는 사실을 이보다 간결하게 보여 주는 표현도 드물 것입니다.

 

여기서도 원문이 말하는 만큼 정확하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조금씩 조금씩이라고 했다고 해서 이번 한 문장만으로 거듭남의 모든 세부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단계에서 무엇이 먼저 일어나고, 얼마나 오래 걸리며, 반드시 어떤 후퇴를 몇 번 겪어야 하는지까지 AC.62가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람이 단번에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by degrees’, 곧 단계적으로, ‘by little and little’, 곧 조금씩 조금씩 거기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처음 AC를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거듭남의 상태로 읽는다고 해서 나는 지금 셋째 날인가, 넷째 날인가?를 판정하는 영적 등급표로 사용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2는 사람에게 자기 단계를 측정하라고 하기보다, 거듭남이 주님의 창조이며 단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큰 질서를 보여 줍니다.

 

마침내 여섯째 날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이 표현은 앞의 AC.26부터 이어져 온 창1:26-27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외모가 하나님과 비슷해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사람이 주님에게서 신앙과 사랑,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게 되는 것과 관계됩니다. 특히 AC.51-53형상과 신앙, 이해의 관계를 설명했고, AC.60-61은 신앙에 속한 것들과 사랑에 속한 것들이 하나를 이루는 여섯째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AC.62는 그 흐름을 받아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고 정리합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이 되었다는 것을 곧 거듭남의 모든 것이 최종적으로 끝났다는 뜻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여섯째 날 뒤에 일곱째 날로 이어지고, AC 역시 일곱째 상태를 따로 설명합니다. AC.62가 지금 직접 말하는 것은 여섯째 날에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곱째 날이 무엇이며 여섯째 날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그 내용을 직접 다루는 글에서 살펴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 점을 지키면 그러면 여섯째 날에 완성되었는데 일곱째 날이 필요한가?’, ‘모든 사람이 결국 천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영적 천국에 사람과 천적 천국에 사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가?같은 질문을 이번 한 문장에서 억지로 모두 해결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이런 질문들은 AC 전체를 읽으면서 충분한 근거가 모였을 때 다루어야 할 큰 주제들입니다. AC.62는 그것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 날의 의미를 요약하는 글입니다.

 

일반적으로도, 그리고 개별적으로도라는 표현도 너무 빨리 하나의 도식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적어도 이 표현을 통해 거듭남의 여섯 상태가 단 한 번의 피상적인 변화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인류 전체의 역사에도 정확히 여섯 단계가 있고, 사람의 생애에서도 같은 여섯 단계가 계속 반복된다는 완성된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뒤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표현을 어떻게 펼치는지를 계속 확인하는 편이 좋습니다.

 

AC.62의 핵심은 오히려 아주 단순합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그의 창조의 날들이라고 불립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새 창조 안에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되어 마침내 여섯째 날에 하나님의 형상이 됩니다.

 

이렇게 읽으면 창1:31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라는 말씀도 지금까지의 모든 흐름을 품고 있는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첫째 날의 빛에서 시작하여 여섯째 날의 심히 좋았더라에 이르기까지, AC는 이 창조의 말씀 안에서 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거듭남의 아르카나를 밝혀 왔습니다. 그리고 AC.62는 그 긴 흐름을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말과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로 압축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에서 가장 오래 기억해 둘 표현을 하나 고른다면 조금씩 조금씩이어도 좋겠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단번에 높은 상태에 뛰어오르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해 가시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창조의 목적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욱 크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마침내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데 있습니다.

 

심화

1.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 하는가?

 

AC.62 심화 1. 왜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하는가?

AC.62 심화 1. 왜 일곱째 상태에 이르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하는가? AC.62는 인간의 거듭남에 속한 시간들과 상태들이 여섯 단계로 나뉘며, 사람이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 여섯째 날에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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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3, 창1:31, 주님이 싸우시는 거듭남의 전투 : 신앙과 사랑의 결합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3그동안 주님은 계속해서 인간을 위하여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시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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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1, 창1:31, 영적(靈的, spiritual), 천적(天的, celestial)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창1:31) AC.61 신앙에 관한 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은 영적(靈的, spiritual)이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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