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6에는 비슷한 문장이 세 번 반복됩니다.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천적음식’이라고 하고,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영적음식’이라고 합니다.자연적 인간도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에 속하기 때문에‘음식’이라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삶과일치한다’는 말이 조금 막연합니다.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내 삶과 일치한다는 뜻일까요?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면 자연적 인간이고,말씀 읽기를 좋아하면 영적 인간이며,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면 천적 인간이라는 뜻일까요?그렇게 단순하게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먼저AC.56이 직접 말하는 것부터 붙들어야 합니다.스베덴보리는 각각의 인간이 자기 삶과 일치하는 것들로‘기뻐한다’고 합니다.그리고 바로 그 일치 때문에 그것들을‘음식’이라고 부릅니다.따라서 여기서 기쁨은 음식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삶’이라는 말도 단순히 하루 동안 무엇을 많이 하느냐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어떤 사람은 직업 때문에 하루 종일 숫자를 보고,어떤 사람은 집안일을 하고,어떤 사람은 설교를 준비합니다.그런 외적인 활동 자체만으로 그 사람의 천적·영적·자연적 삶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AC.56이 말하는 삶은 그 사람에게 속하며 그와 일치하는 생명의 성질과 관계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데 깊은 기쁨을 느낀다고 해봅시다.이것은 영적인 기쁨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성경공부가재미있다’는 감정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영적 인간이라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지식을 좋아하는 것 자체는 자연적 차원의 기억 지식에 대한 즐거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도우면서 기뻐한다고 해서 그 기쁨을 곧바로 천적 기쁨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사람은 칭찬받는 것이 좋아서 도울 수도 있고,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느끼고 싶어서 도울 수도 있으며,실제로 이웃의 선을 사랑하여 도울 수도 있습니다.외적으로 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이 어떤 삶에서 나오는지는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무엇을할때기분이좋은가?’만 묻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AC.56의 표현에서 더 중요한 것은‘무엇이그의삶과일치하는가?’입니다.기쁨은 그 일치에서 나옵니다.어떤 것이 그 사람의 생명과 어울리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음식이라는 비유와도 잘 맞습니다.자연적인 음식도 몸이 받아들여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데 사용합니다.AC.56에서 영적인 것들을‘음식’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것들이 단순히 사람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과 일치하여 그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내가불편하게느끼는진리는내삶과일치하지않으니나에게음식이아니다’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기 악을 드러내는 진리 앞에서 불편함과 저항을 느낄 수 있습니다.진리는 때때로 우리가 현재 사랑하고 있는 것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순간적인 편안함이나 불편함을AC.56의‘일치’와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특히 중요합니다.현재 심화에서는‘정직하게사는사람은정직이중요하다는말을들으면편안하고,속이는데익숙한사람은불편해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이해를 돕는 예로는 가능하지만 항상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정직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자기의 실제 부정직을 지적받으면 아플 수 있고,부정직한 사람도 정직에 관한 아름다운 설교를 듣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순간적인 감정과 삶의 실제 성질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AC.56의‘기뻐한다’를 심리 테스트처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말씀읽기가좋으니영적인간이다’, ‘나는봉사가즐거우니천적인간이다’, ‘나는공부가좋으니자연적인간이다’와 같은 판정은 이 글이 의도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우리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의미가 없을까요?그렇지는 않습니다.오히려 장기간에 걸쳐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양식으로 삼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내가 반복해서 찾는 것은 무엇인가,무엇을 받아들일 때 내 삶이 살아난다고 느끼는가,무엇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사용하는가 하는 질문은 자기 삶의 방향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의 목적은 자기에게‘나는영적인간이다’, ‘나는아직자연적인간이다’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오히려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으로 내 생명을 채우고 있는지를 주님 앞에서 살피는 데 있습니다.
자연적인 기쁨도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좋은 음식을 먹고 기뻐하고,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공부와 일에서 성취를 느끼며,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을 모두 버려야 영적 인간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AC.56은 자연적인 것들을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자연적인 것들이며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뿐입니다.
따라서 천적·영적·자연적 기쁨을 서로 경쟁하는 세 종류의 감정처럼 볼 필요도 없습니다.한 사람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여러 차원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중요한 것은AC.56이 각각의 인간에게‘그의삶과일치하는’음식이 있다고 구별한다는 점입니다.
앞의AC.51-53에서 보았듯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도 단순히 초급자와 고급자의 차이로만 볼 수 없습니다.따라서‘거듭나면자연적인기쁨→영적인기쁨→천적인기쁨순으로바뀐다’고AC.56을 단계표로 만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스베덴보리는 이번 글에서 그런 시간 순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AC.56의 문장을 그대로 기억하는 편이 좋습니다. ‘천적인간은천적인것들로기뻐한다.그것들이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이다.영적인간은영적인것들로기뻐한다.그것들이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이다.’음식과 기쁨과 삶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사후세계에서 사람의 사랑과 기쁨을 설명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사람이 무엇을 참으로 사랑하는가와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는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다만 그 더 넓은 교리를AC.56한 문장 안에 모두 집어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AC.56에서‘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에기뻐한다’는 말은 단순히‘내기분에맞아서좋다’는 뜻이 아닙니다.어떤 것이 그 사람에게 속한 삶의 성질과 어울리기 때문에 그것이 그의 기쁨이 되고,그래서 그의‘음식’이라고 불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며 가장 좋은 질문은‘나는천적인간인가,영적인간인가,자연적인간인가?’가 아니라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나는무엇을내삶의음식으로삼고있는가?’그리고 그 질문 역시 자기 판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의 양식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한 질문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of all the earth, and every tree in which is fruit; the 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창1:29)
AC.56
천적인간은오직천적인것들로기뻐하는데,이것들은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에이르기를‘천적음식’(celestialfood)이라합니다.영적인간은영적인것들로기뻐하며,이것들역시그의삶과일치하므로이르기를‘영적음식’(spiritualfood)이라합니다.자연적인간도마찬가지로자연적인것들로기뻐하는데,이것들은그의삶에속하므로이르기를‘음식’(food),곧‘먹을거리’라하며,주로기억지식으로이루어져있습니다.여기서는영적인간을다루고있기때문에,그의영적음식을표상으로설명하고있습니다.곧‘씨맺는채소’(herbbearingseed)와‘열매맺는나무’(treeinwhichisfruit)로묘사되며,이것들은일반적으로‘씨가진나무’(treeyieldingseed)라합니다.그의자연적음식은다음절에서설명됩니다. The celestial man is delighted with celestial things alone, which being in agreement with his life are called celestial food.The spiritual man is delighted with spiritual things, and as these are in agreement with his life they are called spiritual food.The natural man in like manner is delighted with natural things, which, being of his life, are called food, and consist chiefly of memory-knowledges.As the spiritual man is here treated of, his spiritual food is described by representatives, as by the “herbbearingseed,” and by the “treeinwhichisfruit,” which are called, in general, the “treeyieldingseed.”His natural food is described in the following verse.
해설
AC.56은 창1:29의 ‘먹을거리’를 설명하면서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있고, 영적 인간에게는 영적 음식이 있으며,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연적 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음식은 육체가 먹는 자연적인 음식이 아니라 각각의 인간이 무엇으로 기뻐하며, 무엇이 그의 삶과 일치하는가를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의 음식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천적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오직천적인것들로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천적인 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천적음식’이라고 부릅니다. 이어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영적음식’이라고 합니다. 자연적 인간 역시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고, 그것들이 그의 삶에 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하며, 그것은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의할 것은 천적·영적·자연적 인간을 단순히 ‘높음→중간→낮음’이라는 세 칸짜리 단계표로 읽지 않는 것입니다. AC.56의 직접적인 관심은 세 부류의 서열을 정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각각의 삶에는 그 삶과 일치하여 기쁨을 주는 것이 있고, 그래서 그것을 ‘음식’이라고 부른다는 점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기뻐하는것’을 음식이라고 부를까요? AC.56은 음식의 상응에 대한 전체 교리를 여기서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문장 자체에서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천적인 것들은 천적 인간의 ‘삶과일치’하고, 영적인 것들은 영적 인간의 ‘삶과일치’하며, 자연적인 것들은 자연적 인간의 ‘삶에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여기서 음식은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정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에 맞으며 그가 기쁨을 얻는 것과 관계됩니다.
이것은 ‘사람이무엇을좋아하느냐만보면그사람의영적수준을정확히판정할수있다’는 간단한 진단법을 주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동시에 여러 종류의 기쁨이 있고, 자연적인 기쁨 자체가 악한 것도 아닙니다. AC.56의 요점은 훨씬 제한적입니다. 천적·영적·자연적 인간에게 각각 그 삶과 일치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이 그들에게 음식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이 ‘천적인것들로기뻐한다’고 할 때에도 이를 곧바로 ‘사랑자체만으로기뻐하며더이상진리의매개가필요없다’고 풀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AC.51-53에서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설명을 보았지만, AC.56은 여기서 천적 음식의 세부 성질을 정의하지 않습니다. 그저 천적 인간은 자기 삶과 일치하는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말합니다.
영적 인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한다고 해서 ‘아직사랑에도달하지못하고진리만먹는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48에서 영적 인간은 이미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번 글의 ‘영적음식’을 사랑과 분리된 진리나 교리 지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음식’과 단순한 ‘정보’를 구별하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영적인 사실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의 영적 음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6은 음식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그것이 ‘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식의 보유량보다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삶 안에 있으며 무엇으로 기뻐하는지가 이번 표현의 중심에 더 가깝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경우에는 스베덴보리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다. 그의 음식은 자연적인 것들이며 ‘주로기억지식으로이루어져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억 지식은 앞의 AC.40에서도 만났습니다. 외부에서 배우고 기억에 저장하는 지식들입니다. 이런 지식 자체를 낮거나 악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삶에 속하는 중요한 재료이며, 이후 영적인 것들이 받아들여지는 데에도 쓰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자연적음식=세상적성공과쾌락’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AC.56보다 좁습니다. 본문이 직접 예로 드는 것은 오히려 기억 지식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자연적 차원에 속하는 것들로 기뻐하며, 그 음식은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선하게 사용되는지 악하게 사용되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며, AC.56은 여기서 그것을 논하지 않습니다.
이번 글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여기서는영적인간을다루고있기때문에’입니다. 창1의 현재 문맥이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므로, 창1:29에 나오는 음식도 영적 인간의 음식으로 해석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이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라는 표상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서둘러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의 세부 속뜻을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AC.56은 아직 그것들을 각각 무엇이라고 해석하지 않고, 영적 인간의 음식이 이 두 가지 표상으로 묘사된다고만 합니다. 바로 다음 AC.57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두 표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므로 그 해석은 다음 글의 몫으로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풀은생명이있지만오래지속되지않는상태’, ‘나무는더안정되었지만아직천적사랑에는이르지못한상태’, ‘씨는앞으로더높은생명으로발전할잠재력’이라고 이번 글에서 미리 정리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런 설명은 AC.56의 직접 내용이 아니며, 다음 AC.57이 실제로 말하는 해석과도 어긋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를 일반적으로 ‘씨가진나무’라고 부른다고 덧붙입니다. 이 표현 역시 이번 글에서 별도의 성장 단계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들이 영적 인간에게 주어진 영적 음식을 표상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창1:29의 ‘내가너희에게주노니너희의먹을거리가되리라’는 말은 단순히 최초 인간에게 채식을 명령하는 구절을 넘어,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에게 주어지는 음식에 관한 말씀으로 읽힙니다. 다만 AC.56은 이 한 문장에서 음식의 모든 상응을 완성하지 않습니다. 천적·영적·자연적 음식의 차이를 간단히 제시하고, 현재 문맥에서 영적 인간의 음식이 무엇으로 표상되는지를 밝히는 데 그칩니다.
여기서 ‘주신다’는 표현도 눈여겨볼 수 있지만, 이번 AC가 그 단어의 속뜻을 따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앞의 AC.39이후의 큰 흐름을 기억하면,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원리는 그대로 유지됩니다. 영적 음식 역시 인간이 자기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생명의 근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6에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가장 흥미로운 표현은 아마 ‘그의삶과일치하기때문에’일 것입니다. ‘내삶과일치하는것이음식이고,그래서그것으로기뻐한다는것은구체적으로무슨뜻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이번 문장의 표현을 넘어 사람의 기쁨과 삶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는 좋은 질문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다만 여기서부터 곧바로 ‘내가무엇에서기뻐하는지만보면내가자연적인간인지영적인간인지천적인간인지알수있다’고 자기 진단을 시작할 필요는 없습니다. 순간적인 즐거움 하나와 한 사람의 삶 전체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AC.56이 말하는 것은 각각의 인간에게 그의 ‘삶과일치하는’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기쁨은 한순간의 감정이라기보다 삶의 성질과 관계하여 읽는 편이 안전합니다.
또 자연적인 것에서 기뻐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로 자연적 인간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영적 인간도 자연계에서 살며 음식, 휴식, 학문, 가족, 일과 같은 자연적인 선을 기쁘게 누릴 수 있습니다. AC.56의 구별을 ‘무엇을조금이라도즐기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그 사람의 삶에 속하고 그 삶과 일치하는가의 문제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AC.56의 핵심을 ‘천적인간은사랑을먹고,영적인간은진리를먹고,자연적인간은지식을먹는다’는 세 문장으로만 압축하면 너무 단순해집니다. 어느 정도 기억을 돕는 표현은 될 수 있지만, 본문이 강조하는 ‘삶과일치함’이라는 중요한 조건이 빠지기 때문입니다.
또 ‘거듭남이란먹는음식이자연적음식에서영적음식으로,다시천적음식으로바뀌는과정’이라고 정리하는 것도 AC.56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갑니다. 특히 앞에서 보았듯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관계를 모든 사람이 차례로 통과하는 하나의 직선 단계표로만 보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6은 훨씬 단순하면서도 깊은 사실을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그의 삶과 일치하여 그가 기뻐하는 것들이 있고, 말씀은 그것을 ‘음식’이라는 언어로 표현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영적 인간에게는 영적 음식이, 자연적 인간에게는 자연적 음식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창1에서 다루는 것은 영적 인간이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씨맺는채소’와 ‘열매맺는나무’가 그의 영적 음식으로 제시됩니다.
그 두 음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바로 다음 AC.57에서 밝혀집니다. 따라서 AC.56은 그 해석을 미리 완성하기보다 ‘사람에게도영적인음식이있으며,그음식은그의삶과일치하여그를기쁘게하는것’이라는 기본 원리를 붙들고 다음 글로 넘어가게 하는 짧은 연결 글로 읽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And God blessed them, and God said unto them, Be fruitful, and multiply, and replenish the earth, and subdue it; and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every liv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창1:28)
AC.55
태고의사람들은이해와의지,곧신앙과사랑의결합을결혼이라했기때문에,그결혼에서생겨나는선의모든것은‘생육’(fruitfulness)이라했고,진리의모든것은‘번성’(multiplications)이라했습니다.그래서예언자들가운데서도이런표현들이사용되는데요,예를들어에스겔입니다. As the most ancient people called the conjunction of the understanding and the will, or of faith and love, a marriage, everything of good produced from that marriage they called “fruitfulness,” and everything of truth, “multiplications.”Hence they are so called in the prophets, as for instance in Ezekiel:
여기서‘사람’(man)은이스라엘이라하는영적인간을뜻하고,‘전지위’(ancienttimes)는태고교회를,‘처음’(beginnings)은홍수이후의고대교회를뜻합니다.이본문에서진리에속한‘수가많음’(multiplication)이먼저언급되고,선에속한‘번성’(fruitfulness, 앞에서는multiplications을‘번성’으로번역, 서로다른영어를같은한글단어로번역한바람에헷갈릴수있으니주의해야)이그다음에언급되는이유는,이미거듭난사람이아니라이제거듭나게될사람을다루고있기때문입니다. By “man” is here meant the spiritual man who is called Israel; by “ancienttimes,” the most ancient church; by “beginnings,”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The reason why “multiplication,” which is of truth, is first mentioned, and “fruitfulness,” which is of good, afterwards, is that the passage treats of one who is to become regenerated, and not of one who is already regenerated.
[2] 이해가의지와결합하거나,신앙이사랑과결합할때,주님께서는그사람을‘결혼한땅’(amarriedland)이라하십니다.이사야입니다. When the understanding is united with the will, or faith with love, the man is called by the Lord “amarriedland,” as in Isaiah:
이결합에서나오는진리의열매들을‘아들’(sons)이라하고,선의열매들을‘딸’(daughters)이라하는데,이는말씀전반에서매우자주나타나는표현입니다. The fruits thence issuing, which are of truth, are called “sons,” and those which are of good are called “daughters,” and this very frequently in the Word.
[3] 땅이‘가득차게된다’(replenished)는것은진리와선이많아진다는뜻입니다.주님께서사람에게복을주시고말씀하실때,곧그에게역사하실때,선과진리는헤아릴수없이증가합니다.주님께서마태복음에서이렇게말씀하신것처럼말입니다. The earth is “replenished,” or filled, when there are many truths and goods; for when the Lord blesses and speaks to man, that is, works upon him, there is an immense increase of good and truth, as the Lord says in Matthew:
‘겨자씨한알’(grainofmustardseed)은사람이영적인간이되기전의선을뜻하는데,그것이‘모든씨가운데가장작다’(theleastofallseeds)고들하는이유는,그가자기가하는선을자기한테서난거라여기기때문입니다.자기한테서나는건실상악밖에없는데도말입니다.그러나아직거듭남의상태중에있기때문에,그안에는선이있습니다.비록그것이가장작은선,보잘것없어보이는선일지라도말입니다. A “grainofmustardseed” is man’s good before he becomes spiritual, which is “theleastofallseeds,” because he thinks that he does good of himself, and what is of himself is nothing but evil.But as he is in a state of regeneration, there is something of good in him, but it is the least of all.
[4] 마침내신앙이사랑과결합하면그것은크게자라‘풀’(herb)이되고,결합이완성되면‘나무’(tree)가됩니다.그리고이나무의가지에‘공중의새들’(birdsoftheheavens),곧진리들,지적인것들이깃드는데(buildtheirnestsinitsbranches),이가지들은기억지식(memory-knowledges)입니다.사람이영적인간일때,그리고영적인간이되어가는동안에는전투상태에있기때문에,‘땅을정복하라,모든생물을다스리라’(subduetheearthandhavedominion)는말씀이덧붙여집니다. At length as faith is joined with love it grows larger, and becomes an “herb”; and lastly, when the conjunction is completed, it becomes a “tree,” and then the “birdsoftheheavens” (in this passage also denoting truths, or things intellectual) “buildtheirnestsinitsbranches,” which are memory-knowledges.When man is spiritual, as well as during the time of his becoming spiritual, he is in a state of combat, and therefore it is said, “subduetheearthandhavedominion.”
해설
AC.55는 앞의 AC.54에서 설명한 ‘결혼’에서 무엇이 나오는지를 다룹니다. AC.54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은 영적 인간 안의 이해를 남자, 의지를 여자라 했고, 이 둘이 하나로 작동할 때 그것을 결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AC.55에서는 그 결혼을 이해와 의지의 결합, 또는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고 다시 말하면서, 그 결합에서 산출되는 선과 진리를 창1:28의 ‘생육하고번성하라’와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의 사람들이 이 결혼에서 생겨나는 선에 속한 모든 것을 ‘생육’(fruitfulness)이라 하고, 진리에 속한 모든 것을 ‘번성’ 또는 ‘증가’(multiplications)라고 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육=질,번성=양’과 같은 일반적인 구별이 아닙니다. AC.55가 직접 제시하는 대응은 선과 진리입니다. 결혼에서 선이 산출되는 것을 생육이라 하고, 진리가 산출되는 것을 번성이라 한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AC.43과도 연결됩니다. 거기에서도 ‘생육하다’는 사랑에 속한 것들에, ‘번성하다’는 신앙에 속한 것들에 적용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5는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이미 제시된 생육과 번성의 의미를 이제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혼’과 연결하여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결혼에서선과진리가나온다’는 표현도 자연적인 출산을 그대로 영적인 과정에 옮겨 놓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을 결혼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 결합에서 산출되는 것들도 결혼에서 생겨나는 열매의 언어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결합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선과 진리를 산출하는 살아 있는 결합으로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보여 주기 위해 먼저 겔36:11-12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사람’은 이스라엘이라 불리는 영적 인간을 뜻하고, ‘전지위’는 태고교회를, ‘처음’은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를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그리고 특히 ‘증가’(multiplication)가 먼저 나오고 ‘생육’(fruitfulness)이 뒤에 나오는 순서에 주목합니다.
왜 진리에 속한 증가가 먼저이고 선에 속한 생육이 뒤에 나올까요? AC.55의 답은 분명합니다. 이 구절이 ‘이미거듭난사람’이 아니라 ‘거듭나게될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AC.52-53에서도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사랑에 속한 것이 뒤따른다는 설명을 보았습니다. 여기에서도 그 질서와 연결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거듭남의모든초기단계에서는반드시지식의양이먼저늘어나고나중에선이들어온다’는 세밀한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55가 직접 밝히는 것은 겔36의 이 문맥에서 진리에 속한 증가가 먼저 언급되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순서에 의미가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 한 문장을 모든 사람의 거듭남에 대한 획일적인 시간표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사62:4에서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거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할 때 사람을 주님께서 ‘결혼한땅’이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네땅을쁄라라하리니’,곧 ‘결혼한땅’이라고 부르는 말씀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땅은언제나인간을뜻한다’고 고정적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5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결합한 상태가 말씀에서 ‘결혼한땅’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이 인용은 앞의 AC.54에서 시작된 ‘결혼’이라는 주제를 이어 줍니다.
그 결합에서 나오는 열매들 가운데 진리에 속한 것은 ‘아들’, 선에 속한 것은 ‘딸’이라고 한다는 설명도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말씀 전반에서 매우 자주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우선 AC.55가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아들=진리에속한열매’, ‘딸=선에속한열매’입니다. 이를 곧바로 현실의 남성과 여성의 성질에 대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54에서 교회가 선에 대한 애정 때문에 ‘딸’, ‘처녀’, ‘아내’라고 불린다고 했던 설명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말씀에서 가족과 결혼의 언어는 단순히 자연적인 혈연관계를 넘어 인간 안의 선과 진리 및 그 결합과 산출을 표현하는 데 사용됩니다. 다만 각각의 표현이 등장할 때에는 그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무엇을 뜻한다고 설명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다음 창1:28의 ‘땅에충만하라’가 설명됩니다. 땅이 ‘가득차는것’은 진리와 선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말씀하신다는 것은 곧 그에게 역사하시는 것이며, 그때 선과 진리는 헤아릴 수 없이 증가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생육과 번성의 주체를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증가의 근원은 주님의 복과 역사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이후 계속 이어진 원리와도 일치합니다. 사람에게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가 있다면 그것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3에서도 주님에게서 생명을 가진 것은 생육하고 번성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55에서는 같은 원리가 ‘땅에충만하라’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실 때 사람 안의 선과 진리가 풍성해집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13:31-32의 겨자씨 비유를 인용합니다. 여기서 특히 주의할 것은 AC.55가 겨자씨를 무엇이라고 해석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겨자씨한알’을 ‘사람이영적인간이되기전의선’이라고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곧바로 ‘처음주어진작은진리’라고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왜 그 선이 ‘모든씨가운데가장작은것’일까요? 사람은 그때 자신이 선을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람이 거듭남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는 어떤 선이 있으며,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가장작은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대목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상당히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서나오는것은악밖에없다면,어떻게그사람안에선이있을수있는가?’ 하는 질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선의 근원과 사람이 그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는 상태를 구별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행한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 가운데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그 안에서 시작되고 있습니다. 앞의 AC.39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 것처럼 생각하도록 허용된다는 설명과 함께 읽으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워집니다.
그 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에 따라 그것이 자라 ‘풀’이 되고, 마지막으로 그 결합이 완성되면 ‘나무’가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AC.55가 직접 제시한 진행입니다. 처음에는 매우 작은 선으로 표현된 겨자씨가 있고,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면서 자라 풀이 되며, 그 결합이 완성될 때 나무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씨=진리’, ‘풀=삶으로나타나기시작한진리’, ‘나무=완전히안정된영적구조’라는 별도의 단계표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이번 문맥에서 겨자씨는 스베덴보리가 명시적으로 ‘선’이라고 했습니다. ‘풀’에 대해서도 AC.55는 식물 자체의 성질을 하나하나 영적인 특징과 대응시키지 않습니다. 풀이 부드럽고 잘 흔들린다는 자연적 특징에서 겸손이나 유연성을 끌어내는 것은 흥미로운 묵상이 될 수는 있지만 AC.55의 해설로 제시할 근거는 없습니다.
나무가 되었을 때 ‘공중의새들’이 그 가지에 깃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새들이 진리들 또는 지적인 것들을 뜻하고, 가지들은 기억 지식이라고 직접 설명합니다. 따라서 작은 선에서 시작된 것이 신앙과 사랑의 결합 가운데 성장하면서, 마침내 진리와 지적인 것들이 기억 지식이라는 가지에 깃들 수 있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이것을 보면 AC.55에서 지식과 기억 지식은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닙니다. 앞의 AC.40에서도 기억 지식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으로 살아 있게 되는가가 중요했습니다. 여기에서도 기억 지식은 나무의 ‘가지’가 되어 진리와 지적인 것들이 깃드는 자리가 됩니다. 문제는 지식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생명과 결합하여 어떤 질서 안에 놓이는가입니다.
마지막 문장은 새로운 주제를 엽니다. ‘사람이영적인간일때, 그리고영적인간이되어가는동안에는전투상태에있기때문에, ‘땅을정복하라,모든생물을다스리라’는 말씀이 덧붙여진다.’ 여기서 창1:28의 ‘정복하라’와 ‘다스리라’가 거듭남의 전투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정복하고다스린다’는 말을 자연계나 다른 사람에 대한 지배욕의 정당화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55의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의 전투 상태와 관계됩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전투의 대상과 방식, 시험의 전체 구조를 세세하게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직접 밝히는 것은 영적 인간에게 전투가 있으며, 그 때문에 ‘정복하라’와 ‘다스리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이 전투를 단순히 ‘아직천적인간이되지못했기때문에생기는싸움’이라고 정리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AC.55의 직접 표현은 ‘영적인간일때’와 ‘영적인간이되어가는동안’ 전투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의 관계는 이후 AC가 더 설명하도록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AC.55전체를 다시 보면 하나의 흐름이 보입니다. 먼저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라는 ‘결혼’이 있습니다. 그 결혼에서 선과 진리가 산출되어 ‘생육’과 ‘번성’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역사하실 때 그 선과 진리는 크게 증가하여 ‘땅에충만’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은 그 과정에서 전투를 겪기 때문에 ‘땅을정복하고다스리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창1:28의 ‘생육하고번성하여땅에충만하라’는 속뜻에서 단순히 무엇인가가 많아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의 결합 안에서 선과 진리를 산출하고 풍성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풍성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성취가 아니라 주님께서 복을 주시고 말씀하실 때, 곧 사람 안에 역사하실 때 이루어지는 증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