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해서 창1 둘째 날, 곧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를 마칩니다. 이 ‘둘째 날, 두 번째 상태’에 나온 중요한 표현, 개념들은 ‘궁창’, ‘하늘 위의 물’, ‘하늘 아래 물’, ‘속 사람’, ‘겉 사람’, ‘기억 지식’ 및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 등이었습니다. 거듭 지금 다룬 내용들이 다음 단계의 기초가 되는 전개이니, 반드시 이전 학습한 내용들을 반복 복습, 보다 탄탄한 배경지식으로 계속 앞으로 쭉쭉 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지난 8, 9년째 계속 반복, 또 반복하고 있는 이 창세기 1장을, 그러나 할 때마다 점점 더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들과, 그리고 이젠 그런 내용들을 접해도 이해가 되게 하시는 주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오늗도 지난날 배운 것들을 더욱 깊이 알려주시고, 특별히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의 속뜻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이시며,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얼마나 돌보시고, 보살피시며, 끝까지 우리를 책임지시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님이 저희에게 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게 도와주세요. 우리가 타인의 연약함에 정신줄 놓치 않도록 끝까지 빛 비춰 주세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창1:8)
AC.26
‘저녁’(evening),‘아침’(morning),그리고‘날’(day)의의미는위의5절에서이미설명했습니다. The meaning of “evening,” of “morning,” and of “day,” was shown above at verse 5.
해설
AC.26은 매우 짧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8의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이는둘째날이니라’를 다시 길게 해설하지 않고, ‘저녁’(evening), ‘아침’(morning), ‘날’(day)의 의미는 앞의 5절에서 이미 설명했다고만 말합니다. 따라서 이 번호의 역할은 새로운 의미를 추가하는 데 있지 않고, 첫째 날을 해설하면서 이미 세워 놓은 원리가 둘째 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
앞의 AC.22에서 ‘저녁’은 모든 선행 상태, 곧 그늘이나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를 뜻하고, ‘아침’은 그 뒤에 오는 상태, 곧 빛이나 진리와 신앙에 관한 지식의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것은 일반적으로 ‘저녁’, 주님께 속한 것은 ‘아침’이라고 했습니다. 이어 AC.23에서는 ‘날’이 말씀에서 시간 자체를 나타내며, 그로부터 그 시간의 상태도 나타낼 수 있음을 여러 선지서의 용례를 통해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AC.26의 짧은 참조는 바로 앞에서 확정한 이 의미들을 다시 가져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을 읽는 데 중요한 점을 보여 줍니다. 첫째 날에 적용된 ‘저녁’, ‘아침’, ‘날’의 속뜻이 둘째 날에 와서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창1에서 창조의 날들이 이어질 때, 각 날의 구체적인 내용은 달라지지만 ‘저녁’, ‘아침’, ‘날’이라는 표현은 앞에서 설명된 의미를 바탕으로 계속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그 뜻을 다시 설명하지 않고 5절 해설을 가리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특히 AC.26은 바로 앞 AC.24-25와 연결해서 읽으면 자연스럽습니다. 둘째 날에는 궁창이 생기고, 궁창 아래의 물과 위의 물이 구별되며, 궁창을 ‘하늘’이라고 부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고, 사람 안의 것들이 점차 질서 안에 놓이는 거듭남의 상태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의 끝에도 다시 ‘저녁이되고아침이되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둘째 날 역시 단순한 자연계의 하루가 아니라, 앞에서 설명한 ‘저녁’, ‘아침’, ‘날’의 의미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다만 AC.26자체가 ‘모든영적성장은반드시혼란과약화를거쳐야한다’는 새로운 법칙을 제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짧은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하려는 일은 훨씬 단순합니다. 독자가 이미 설명된 용어의 의미를 잊지 않고 계속 적용하도록 앞의 해설을 다시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은 AC를 읽을 때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설명했다’고 할 때에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뜻을 만들어 내기보다, 먼저 그가 가리키는 앞의 설명으로 돌아가 그 의미를 이어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AC.26의 핵심은 ‘재확인’입니다. 둘째 날의 ‘저녁’, ‘아침’, ‘날’도 첫째 날에서 이미 밝혀진 속뜻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각 날은 서로 고립된 장면들이 아니라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이어지며, 같은 표현들은 앞에서 밝혀진 의미를 지니면서 다음 상태로 계속 나아갑니다. AC.26은 짧은 한 문장으로 그 연결을 놓치지 않도록 해 주는 번호입니다. (AC.26해설)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1:6, 7)
AC.25
‘땅을펼치고하늘을편다’(spreadouttheearthandstretchouttheheavens)는표현은사람의거듭남을다룰때선지자들이매우흔히사용하는말입니다.이사야에보면,To “spreadouttheearthandstretchouttheheavens,” is a common form of speaking with the prophets,when treating of the regeneration of man. As in Isaiah:
즉,주님께서는오류들을꺾지않으시고욕정들을끄지않으시며,오히려그것들을참되고선한것으로굽히십니다.그러므로이어서말씀하시기를, that is,he does not break fallacies,nor quench cupidities,but bends them to what is true and good;and therefore it follows:
이와같은뜻을지닌다른구절들은더언급하지않겠습니다.Not to mention other passages to the same purport.
해설
AC.25는 바로 앞 AC.24에서 설명한 ‘궁창’, 곧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을 선지서의 언어를 통해 한 번 더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지자들이 사람의 거듭남을 말할 때 ‘땅을펼치고하늘을편다’는 표현을 매우 흔히 사용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자연계의 하늘과 땅에 관한 설명 자체가 아니라, 창조의 언어가 사람의 재창조, 곧 거듭남을 말하는 데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앞에서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과 연결되었으므로, 하늘과 땅을 새롭게 펴고 펼친다는 표현은 거듭남 가운데 사람의 내적·외적 질서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세워지는 것과 연결됩니다.
첫 번째로 인용되는 사44:24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네구속자요모태에서너를지은’분이라고 하시면서 ‘홀로하늘을폈으며나와함께한자없이땅을펼쳤다’고 말씀하십니다. AC.25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하늘을펴고땅을펼친다’는 선지서의 표현이 사람을 지으시고 구속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구속자’와 ‘지은자’라는 표현이 하늘과 땅을 펴시는 창조의 언어와 함께 놓임으로써, 창조의 언어가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이를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의 ‘주님의단독사역’이라고 단순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거듭나게 하시는 생명과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주님에게서 받은 자유 안에서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응답하고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AC.25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이어지는 사42:3입니다. ‘상한갈대를꺾지아니하며꺼져가는등불을끄지아니하고’라는 말씀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는오류들을꺾지않으시고욕정들을끄지않으시며,오히려그것들을참되고선한것으로굽히신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방식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주님께서는 거듭남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남아 있는 모든 오류와 욕정을 한순간에 강제로 제거하여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드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으십니다. 아직 오류와 욕정이 존재하는 그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도 그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그를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십니다.
여기서 ‘굽히신다’는 말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오류 자체를 조금씩 고쳐 마침내 진리로 만들고, 악한 욕정 자체를 정화하여 마침내 선한 사랑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짓은 진리가 되어야 할 재료가 아니며 악한 사랑은 그대로 천국적 사랑으로 발전하는 씨앗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은 처음에는 오류와 욕정의 영향을 받으면서 생각하고 행동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이끄시면서 점차 거짓에서 진리로, 악한 사랑의 지배에서 선한 사랑의 질서로 방향을 바꾸게 하십니다. AC.24에서 사람이 감각의 착각과 욕정과 같은 자기 자신의 것들에 의해서도 참되고 선한 것들로 이끌리고 굽혀진다고 한 설명이 바로 이 대목과 연결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사42:3다음에 사42:5를 이어 인용합니다. ‘하늘을창조하여펴시고땅과그소산을내시며’라는 표현은 다시 창조의 언어로 돌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AC.25가 여기서 ‘호흡’, ‘영’, ‘소산’각각의 세부 상응을 해설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이 단락에서의 직접적인 논지는 주님의 강림을 말하는 같은 문맥 안에서 ‘꺾지않고끄지않으며굽히심’과 ‘하늘을펴고땅을펼치심’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의 거듭남은 파괴를 통한 새 창조가 아니라,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주님께서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시면서 그의 내적·외적 질서를 새롭게 세우시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상한갈대’와 ‘꺼져가는등불’을 사람 안의 선과 진리에 일대일로 대응시켜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25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이 이미지 전체를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역사 방식입니다. 사람에게 아직 오류와 욕정이 남아 있다고 해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강제로 꺾고 끄는 방식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재 상태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점진성은 인간의 악을 가볍게 여긴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의 자유와 수용 능력을 따라 질서 있게 역사하신다는 뜻입니다.
결국 AC.25가 선지서의 ‘하늘을펴고땅을펼친다’는 표현을 가져오는 이유는 창세기의 창조 언어와 인간의 거듭남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창1에서 하늘과 땅이 질서를 찾아가는 모습은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번에 파괴하고 새것으로 대체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직 혼합되고 불완전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그의 자유 안에서 점차 참되고 선한 것 쪽으로 굽히시며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를 새롭게 세워 가십니다. 이것이 AC.25가 보여 주는 ‘하늘과땅을펴심’과 ‘굽히심’의 거듭남입니다. (AC.25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