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7 심화

1,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 무엇인가?

 

AC.57의 첫 문장은 처음 읽으면 꽤 낯섭니다. ‘ 맺는 채소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이다. 진리는 참이면 참인 것이지, 왜 스베덴보리는 진리에 굳이 쓰임을 지향한다는 말을 붙였을까요?

 

먼저 영어 표현을 그대로 보면 every truth which regards use입니다. 여기서 regards는 단순히 관찰한다는 뜻보다 향한다’, ‘목적으로 삼는다’, ‘관련되어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라는 번역은 진리가 어떤 목적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을 살린 표현입니다.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여기서 쓰임이 현대적인 의미의 실용성과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 진리가 당장 돈이 되는가?’,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는가?’, ‘생활에 바로 써먹을  있는가?라는 뜻의 usefulness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쓰임은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어떤 것이 선한 목적을 섬기며,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 안에서 다른 것의 유익을 위해 기능하는가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진리가 쓰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진리가 단지 머릿속에 저장되거나 지적 만족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삶을 섬기는 방향을 가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안다고 해봅시다. 그 문장을 정확하게 설명하고 원어까지 분석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의 목적이 다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 진리는 결국 실제로 이웃을 선하게 대하고, 무엇이 그 이웃에게 참된 선인지 분별하며, 그 선을 위해 행동하는 삶을 향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진리  즉시 행동이라는 단순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진리는 먼저 생각을 바로잡고, 어떤 진리는 오랜 시간 사람의 판단을 형성하며, 어떤 진리는 시험 가운데서 비로소 깊이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쓰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모든 진리가 듣자마자 곧바로 눈에 보이는 행동 하나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행동만 하면 진리가 쓰임을 이룬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잘못된 생각에서 매우 열심히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선한 의도라고 생각하면서 실제로는 이웃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진리가 함께 중요하다는 원리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지만, 선 또한 진리에 의해 올바른 방향을 받아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57의 표현은 앞의 AC.44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이해가 말씀을 듣고 의지가 그것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은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사람 안에 들어와 삶과 결합하는 방향을 가집니다.

 

그러나 쓰임은 단지 내가 무엇인가 좋은 일을 했다는 개별 행동보다 넓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술 전체에서는 인간의 직무, 관계, 사회생활, 천국의 질서까지 모두 쓰임과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각 존재가 전체를 위해 어떤 선한 기능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AC.57 한 문장에서 쓰임의 전체 교리를 모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맺는 채소가 단순한 추상적 진리가 아니라 쓰임을 바라보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맺는 채소일까요? 현재 심화에서는 채소가 빨리 자라고 낮게 자라므로 초기의 진리’, 나무는 오래 살고 깊이 뿌리내리므로 성숙한 이라고 설명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AC.57은 이런 자연적 특징들을 근거로 해설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채소 = 초보 단계’, ‘나무 = 성숙 단계라는 고정표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대응은  맺는 채소 =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 ‘열매 맺는 나무 = 신앙의 입니다. 그 이상은 문맥에서 충분한 근거가 있을 때만 더 나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씨가 다른 생명을 낳는다는 자연적 특징은 이해를 도울 수 있지만, 이번 글에서는 씨 자체의 상응을 독립적으로 풀지 않습니다. ‘ 맺는 채소라는 전체 표현이 진리를 뜻한다고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러면 쓰임을 향하지 않는 진리도 있을까요? 이 질문은 조금 구별해서 보아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참된 진리는 본래 선한 질서를 섬기는 방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 진리를 자기 지식과 우월감, 논쟁과 지배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 문제는 진리 자체보다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인간의 상태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말씀의 진리를 많이 알면서도 그것을 다른 사람을 정죄하거나 자기의 우월함을 드러내는 데 사용한다면, 지식으로는 진리를 가지고 있어도 그 진리가 그의 삶 안에서 본래의 선한 쓰임을 이루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반대로 아주 많은 교리를 알지 못해도 자신이 아는 진리를 성실하게 삶에 적용하여 이웃의 선을 섬기는 사람은 그 진리가 쓰임을 향하도록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조심해야 합니다. ‘쓰임이라고 하면 언제나 남에게 눈에 띄는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쓰임은 자녀를 돌보는 것일 수도 있고, 정직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정확하게 판단하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해를 끼치지 않는 것처럼 겉으로 작아 보이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쓰임의 규모가 아니라 선한 목적을 섬기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쓰임을 중요하게 여긴다고 해서 모두가 큰 종교적 사역이나 특별한 봉사를 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쓰임은 사람의 자기 공로를 세우는 방식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나는 이런 쓰임을 하고 있으므로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한다면 쓰임의 외형은 유지하면서도 그 중심은 자기 사랑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AC.57의 문맥에서 영적 음식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가 쓰임을 향하고 그 쓰임이 실제 선으로 나타나는 것의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받아들이고 행하지만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이것이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를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진리는 삶을 향합니다. 그러나 그 삶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어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사람 안에서 선한 목적과 결합하여 실제 쓰임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아는  사는 을 서로 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식을 경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무엇을 믿고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아는 것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진리가 쓰임을 지향한다는 말은 이론은 필요 없고 행동만 중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른 행동을 위해 바른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진리가 진리답게 살아 있으려면 선한 목적과 쓰임을 향해야 합니다.

 

따라서 AC.57의 표현을 가장 간단하게 풀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란 자기 안에서 끝나는 진리가 아니라 선한 삶과 선한 목적을 섬기도록 주어진 진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맺는 채소가 영적 인간의 음식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영적 인간은 단지 많은 사실과 교리를 축적하는 것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를 선한 쓰임을 향하도록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AC.57을 읽으며 나는 얼마나 많은 진리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은 내가 아는 진리가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자기 지식과 자기 확증을 향하는가, 아니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선과 이웃의 유익을 향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AC.57, 창1:29, ‘씨 맺는 채소’, ‘열매 맺는 나무’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창1:29) AC.57 ‘씨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는 쓰임을 지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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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1:29)

 

AC.57

맺는 채소(herb bearing seed)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이고, 열매 맺는 나무(tree in which is fruit) 신앙의 선입니다. 열매(fruit) 주님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seed producing fruit) 주님께서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나무가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라고 하는 것입니다. 천적 음식을 나무의 열매로 부른다는 사실은, 다음 장에서 천적 인간을 다룰 분명히 드러납니다. 점을 확인하기 위해 여기서는 에스겔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만 인용합니다. Theherb bearing seedis every truth which regards use; thetree in which is fruitis the good of faith; “fruitis what the Lord gives to the celestial man, butseed producing fruitis what he gives to the spiritual man; and therefore it is said, thetree yielding seed, to you it shall be for food. That celestial food is called fruit from a tree, is evident from the following chapter, where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In confirmation of this we will here cite only these words of the Lord from Ezekiel: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열매를 맺으리니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열매는 먹을 만하고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47:12)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th up every tree of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2).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 성소(sanctuary)이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과 자비를 뜻합니다. 열매(fruit) 그들에게 음식이 지혜이고, (leaf) 쓰임을 위한 지성입니다. 쓰임을 (medicine)이라 합니다. 반면 영적인 음식을 (herb)이라 한다는 점은 시편에서도 분명합니다. Waters issuing out of the sanctuary,signify the life and mercy of the Lord, who is thesanctuary. Fruitis wisdom, which shall be food for them; theleafis intelligence, which shall be for their use, and this use is calledmedicine. But that spiritual food is calledherb,appears from David: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1, 2) My shepherd, I shall not want; thou makest me to lie down in pastures of herb (Ps. 23:12).

 

해설

AC.57은 바로 앞 AC.56에서 예고한 영적 인간의 음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AC.56에서는 천적 인간에게 천적 음식이 있고, 영적 인간에게 영적 음식이 있으며, 자연적 인간에게 자연적 음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현재 창1의 문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있으므로, 1:29 맺는 채소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그의 음식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57은 이 두 표현이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를 밝힙니다.

 

첫 번째는 맺는 채소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라고 합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쓰임을 지향한다는 표현입니다. 단순히 참된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실제 쓰임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곧바로 진리를 배운 행동으로 옮기면 채소가 된다는 단계 공식으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AC.57채소의 자연적인 성장 특성을 하나하나 분석하지 않습니다. 채소가 빨리 자란다거나 부드럽다거나 낮게 자란다는 특징을 가지고 영적 인간의 성질을 만들어 내지도 않습니다. 직접 말하는 것은 맺는 채소 =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입니다.

 

쓰임이라는 말은 스베덴보리의 저술에서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다만 이번 AC.57에서 쓰임의 전체 교리를 펼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진리가 자기 자신 안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위한 진리라는 정도를 우선 붙들면 좋습니다. 다시 말해, 진리는 단지 아는 데 머무르기보다 삶과 선한 용도를 향합니다.

 

이 점은 라는 표현과도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 언제나 진리라는 고정된 등식을 여기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문장에서 맺는 채소전체를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먼저 그 전체 표현을 그대로 받는 것이 안전합니다.

 

두 번째는 열매 맺는 나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신앙의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현재 해설처럼 영적 인간은 아직 선의 가능성만 가지고 있고 천적 인간이 되어야 비로소 선에 이른다고 읽지 않는 것입니다. ‘열매 맺는 나무자체가 이미 신앙의 이라고 직접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이라는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조금 어렵습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신앙이 행동으로 바뀐 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이번 문맥에서는 신앙과 선이 서로 분리되지 않은 상태, 곧 신앙에 속한 선이라고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이후 AC에서 이 표현은 더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열매열매를 맺게 하는 를 구별합니다. ‘열매는 주님께서 천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고, ‘열매를 맺게 하는 는 주님께서 영적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창1:29에서는 가진 나무가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영적 인간 = 씨만 가진 미완성 상태’, ‘천적 인간 = 열매까지 도달한 완성 상태라고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57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음식이 서로 다르게 표현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앞의 AC.51-53에서 보았듯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은 서로 구별되는 질서를 가지며, 그것을 모든 사람이 거치는 단순한 승급 단계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음식이 왜 나무의 열매라고 불리는지는 다음 장, 곧 창2에서 천적 인간을 다룰 때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편집상 중요한 신호입니다. 지금 여기서 천적 인간의 열매와 음식에 관한 모든 교리를 미리 완성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음 장의 몫은 다음 장에 남겨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지금 분명합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열매를 맺게 하는 가 음식으로 주어지고, 천적 인간에게는 열매가 음식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구별 자체가 이번 글의 중요한 중심입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겔47:12를 인용합니다.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 때문에 강 좌우의 나무들이 열매를 맺고, 그 열매는 음식이 되며 잎은 약재료가 됩니다. AC.57은 이 구절을 매우 구체적으로 풉니다. ‘성소에서 나오는 은 성소이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과 자비를 뜻하고, ‘열매는 그들에게 음식이 될 지혜이며, ‘은 쓰임을 위한 지성이고, 그 쓰임을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성소가 주님이라는 점도 중요합니다. 생명과 자비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다는 앞의 AC들의 흐름이 계속됩니다. 열매와 잎이 자라는 근원도 성소에서 흘러나오는 물, 곧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과 자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강은 항상 흐르는 진리’, ‘나무는 안정된 영적 구조’, ‘달마다 열매는 끊임없는 영적 갱신’, ‘잎이 시들지 않음은 이해가 이상 어두워지지 않음과 같이 겔47:12의 모든 세부를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57이 직접 해설해 주는 부분만 붙드는 편이 좋습니다. = 주님에게서 나오는 생명과 자비, 열매 = 지혜, = 쓰임을 위한 지성, 그 쓰임 = 약입니다.

 

여기서 지혜지성이 함께 등장하는 것도 눈에 띕니다. 열매는 지혜이고 잎은 지성입니다. 그렇다고 곧바로 지혜 = 삶이 진리’, ‘지성 = 아직 삶이 되지 않은 이해라고 고정적으로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7은 그런 대비를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두 표현이 서로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열매는 음식이 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56의 주제와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천적 음식이 있으며, 여기에서는 그 천적 음식이 열매라고 불리는 것을 겔47:12로 확인합니다. 다시 말해, 이번 인용의 직접 목적은 천적 음식이 열매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다음 스베덴보리는 영적 음식이 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시23:1-2를 인용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라는 말씀입니다. AC.57이 이 시편을 인용하는 직접 목적은 매우 단순합니다. 영적 음식이 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시23 전체의 목자, 물가, 누움, 평안까지 이번 AC에서 모두 속뜻으로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다른 AC나 스베덴보리의 다른 설명에서는 그런 표현들도 각각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57이 여기서 실제로 입증하려는 것은 영적 음식은 풀이라고 불린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앞의 AC.56에서 왜 맺는 채소열매 맺는 나무가 영적 인간의 음식이라고 했는지를 더욱 분명하게 해 줍니다. 영적 인간에게 음식으로 주어지는 것은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와 신앙의 선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맺는 채소 가진 열매 맺는 나무라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란 도대체 무엇인가? 진리는 참이면 참인 것이지 왜 반드시 쓰임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것은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고, 앞으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use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문제이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다루겠습니다.

 

다만 지금 메인에서 확실히 해둘 것은 쓰임이 단순한 효율이나 실용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진리가 당장 돈이 되는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가라는 의미의 실용성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문맥에서 쓰임은 선한 목적과 삶을 섬기는 것과 관계됩니다. 따라서 진리가 쓰임을 지향한다는 것은 진리가 자기 과시나 지적 소유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선한 생명을 섬기는 방향을 가진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앞의 AC.44와도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이해가 말씀을 듣고 의지는 그것을 행한다고 했습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으면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한다고 했습니다. AC.57쓰임을 지향하는 진리도 그런 큰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사람의 이해 안에 고립되어 있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연결 역시 진리를 알았다 행동했다 = 쓰임을 이뤘다는 단순 공식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쓰임은 단순한 행위 하나보다 더 넓은 개념입니다. 지금 AC.57에서는 그 전체 교리를 다루지 않으므로, ‘진리가 선한 목적과 삶을 향한다는 기본 방향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열매를 높고 낮음의 가치표처럼 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57은 영적 음식은 풀, 천적 음식은 열매라고 구별합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인간 상태에 맞는 음식의 차이입니다. 풀은 열매보다 열등하므로 빨리 버려야 하고, 영적 인간은 천적 인간이 될 때까지 미완성이라는 결론은 본문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 인간에게 가 주어진다는 것을 그에게는 아직 실제 선이 없다는 뜻으로 읽어서도 안 됩니다. 같은 첫 문장에서 열매 맺는 나무를 이미 신앙의 이라고 했습니다. 영적 인간은 단지 진리의 가능성만 가진 존재가 아니라 신앙의 선을 가지고 있으며, 다만 그의 음식은 가진 나무라는 방식으로 묘사됩니다.

 

AC.57은 결국 음식의 차이를 통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서로 다른 질서를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와 신앙의 선이 음식이며, 그것들은 씨를 가진 채소와 나무로 표현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열매가 음식이며, 그것은 지혜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음식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47:12에서 물은 성소이신 주님에게서 나옵니다. 그 물이 생명과 자비를 뜻합니다. 이 점은 AC.57 전체를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영적 음식이든 천적 음식이든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자기 자신에게 공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고, 인간에게 주어지는 진리와 선과 지혜 역시 그 생명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AC.57의 핵심을 풀에서 열매로 성장한다고 정리하기보다 이렇게 기억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 맺는 채소는 쓰임을 지향하는 진리이고, ‘열매 맺는 나무는 신앙의 선입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천적 인간에게는 열매가 주어집니다. 열매는 지혜이며, 풀은 영적 음식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생명과 자비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심화

1.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 무엇인가?

 

AC.57, 심화 1,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란 무엇인가?

AC.57.심화1.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란 무엇인가? AC.57의 첫 문장은 처음 읽으면 꽤 낯섭니다. ‘씨 맺는 채소는 쓰임을 지향하는 모든 진리이다.’ 진리는 참이면 참인 것이지, 왜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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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8, 창1:30, 자연적 인간의 음식 : 들짐승과 새에게 주어진 풀 (AC.58-59)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거리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to every fowl of the he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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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6, 창1:29,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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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6 심화

1.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한다 것은 무슨 뜻인가?

 

AC.56에는 비슷한 문장이 세 번 반복됩니다.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천적 음식이라고 하고,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영적 음식이라고 합니다. 자연적 인간도 자연적인 것들로 기뻐하며 그것들이 그의 삶에 속하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삶과 일치한다는 말이 조금 막연합니다. 단순히 내가 좋아하는 것은 모두 내 삶과 일치한다는 뜻일까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면 자연적 인간이고, 말씀 읽기를 좋아하면 영적 인간이며, 남을 돕는 것을 좋아하면 천적 인간이라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순하게 읽어서는 곤란합니다.

 

먼저 AC.56이 직접 말하는 것부터 붙들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각각의 인간이 자기 삶과 일치하는 것들로 기뻐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치 때문에 그것들을 음식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여기서 기쁨은 음식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이라는 말도 단순히 하루 동안 무엇을 많이 하느냐는 뜻으로 좁힐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업 때문에 하루 종일 숫자를 보고, 어떤 사람은 집안일을 하고, 어떤 사람은 설교를 준비합니다. 그런 외적인 활동 자체만으로 그 사람의 천적·영적·자연적 삶을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AC.56이 말하는 삶은 그 사람에게 속하며 그와 일치하는 생명의 성질과 관계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이해하는 데 깊은 기쁨을 느낀다고 해봅시다. 이것은 영적인 기쁨을 설명하는 하나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공부가 재미있다는 감정 하나만으로 그 사람이 영적 인간이라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지식을 좋아하는 것 자체는 자연적 차원의 기억 지식에 대한 즐거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도우면서 기뻐한다고 해서 그 기쁨을 곧바로 천적 기쁨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칭찬받는 것이 좋아서 도울 수도 있고, 자기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느끼고 싶어서 도울 수도 있으며, 실제로 이웃의 선을 사랑하여 도울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 같은 행동이라도 그것이 어떤 삶에서 나오는지는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엇을   기분이 좋은가?만 묻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AC.56의 표현에서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이 그의 삶과 일치하는가?입니다. 기쁨은 그 일치에서 나옵니다. 어떤 것이 그 사람의 생명과 어울리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음식이라는 비유와도 잘 맞습니다. 자연적인 음식도 몸이 받아들여 자기 생명을 유지하는 데 사용합니다. AC.56에서 영적인 것들을 음식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것들이 단순히 사람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과 일치하여 그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불편하게 느끼는 진리는  삶과 일치하지 않으니 나에게 음식이 아니다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은 자기 악을 드러내는 진리 앞에서 불편함과 저항을 느낄 수 있습니다. 진리는 때때로 우리가 현재 사랑하고 있는 것과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순간적인 편안함이나 불편함을 AC.56 일치와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특히 중요합니다. 현재 심화에서는 정직하게 사는 사람은 정직이 중요하다는 말을 들으면 편안하고, 속이는  익숙한 사람은 불편해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해를 돕는 예로는 가능하지만 항상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정직하게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자기의 실제 부정직을 지적받으면 아플 수 있고, 부정직한 사람도 정직에 관한 아름다운 설교를 듣고 감동할 수 있습니다. 순간적인 감정과 삶의 실제 성질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AC.56 기뻐한다를 심리 테스트처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말씀 읽기가 좋으니 영적 인간이다’, ‘나는 봉사가 즐거우니 천적 인간이다’, ‘나는 공부가 좋으니 자연적 인간이다와 같은 판정은 이 글이 의도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표현은 우리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의미가 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장기간에 걸쳐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양식으로 삼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좋은 질문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반복해서 찾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받아들일 때 내 삶이 살아난다고 느끼는가, 무엇을 위해 시간과 마음을 사용하는가 하는 질문은 자기 삶의 방향을 살피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의 목적은 자기에게 나는 영적 인간이다’, ‘나는 아직 자연적 인간이다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으로 내 생명을 채우고 있는지를 주님 앞에서 살피는 데 있습니다.

 

자연적인 기쁨도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기뻐하고,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을 즐거워하고, 공부와 일에서 성취를 느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것을 모두 버려야 영적 인간이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6은 자연적인 것들을 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연적 인간의 음식이 자연적인 것들이며 주로 기억 지식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뿐입니다.

 

따라서 천적·영적·자연적 기쁨을 서로 경쟁하는 세 종류의 감정처럼 볼 필요도 없습니다. 한 사람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 여러 차원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AC.56이 각각의 인간에게 그의 삶과 일치하는 음식이 있다고 구별한다는 점입니다.

 

앞의 AC.51-53에서 보았듯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도 단순히 초급자와 고급자의 차이로만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거듭나면 자연적인 기쁨  영적인 기쁨  천적인 기쁨 순으로 바뀐다 AC.56을 단계표로 만드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글에서 그런 시간 순서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C.56의 문장을 그대로 기억하는 편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은 천적인 것들로 기뻐한다.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영적 인간은 영적인 것들로 기뻐한다. 그것들이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음식과 기쁨과 삶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이후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사후세계에서 사람의 사랑과 기쁨을 설명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으로 사랑하는가와 무엇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는 서로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더 넓은 교리를 AC.56 한 문장 안에 모두 집어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AC.56에서 그의 삶과 일치하기 때문에 기뻐한다는 말은 단순히  기분에 맞아서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그 사람에게 속한 삶의 성질과 어울리기 때문에 그것이 그의 기쁨이 되고, 그래서 그의 음식이라고 불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으며 가장 좋은 질문은 나는 천적 인간인가, 영적 인간인가, 자연적 인간인가?가 아니라 어쩌면 이것일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삶의 음식으로 삼고 있는가? 그리고 그 질문 역시 자기 판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가 실제로 내 삶의 양식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한 질문이어야 할 것입니다.

 

 

 

AC.56, 창1:29, 영적 인간의 음식 : 무엇으로 기뻐하고 무엇을 양식으로 삼는가 (AC.56-57)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And God said, Behold, I give you every herb bearing seed which is upon the fa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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