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1.심화

1. 형상 모양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AC.51의 첫 문장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영적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  닮음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묻게 됩니다. ‘형상과 모양이 도대체 어떻게 다른 것인가? 형상은 조금 닮은 것이고 모양은 완전히 닮은 것이라는 뜻인가?

 

먼저 AC.51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글은 형상 모양이 같지 않다고 분명히 구별합니다.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하고, 창세기 1장은 영적 인간을,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합니다. 따라서 두 말이 단순히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해 반복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해석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형상은 70퍼센트 닮은 상태이고 모양은 100퍼센트 닮은 상태처럼 정도의 차이로만 이해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는 단순한 성숙도의 숫자 차이보다 더 깊습니다. AC가 앞으로 진행되면서 그는 두 인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 신앙과 사랑의 관계, 양심과 퍼셉션 등의 차이를 점차 설명합니다.

 

AC.51에서 가장 먼저 주어진 단서는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이라는 표현입니다. 즉 형상에는 분명 원형을 따르고 닮는 관계가 있지만, 그것이 곧 모양 자체와 동일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차이를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에 대응시킵니다.

 

이것을 앞의 AC.48과 연결하면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여섯째 상태에 이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형상은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나 단순히 진리를 머리로만 아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형상은 아직 미완성이고 모양만 완성이다라고 단순화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영적 인간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참된 거듭남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형상이라는 말 자체를 결함이나 실패의 의미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아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닮음 동일함이 아닙니다. 인간은 아무리 높은 천적 상태에 있어도 생명의 근원이 되지 않습니다. AC.39 이후 반복해서 본 것처럼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모양 역시 피조물이 창조주와 본질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핵심적인 차이는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해서는 AC.51보다 뒤의 설명들이 더 많은 빛을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속해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구별하며, 영적 인간은 진리와 신앙을 통해 선으로 인도되고, 천적 인간은 사랑과 선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성질을 가진 것으로 설명합니다. 특히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를 설명할 때 퍼셉션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영적 인간은 머리로 살고 천적 인간은 가슴으로 산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도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행동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고 천적 인간에게만 사랑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이는 사랑의 유무보다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어떤 질서와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결합되는가에 더 깊이 관계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영적 인간이 계속 거듭나면 결국 천적 인간이 되는가? 현재 AC.51만으로 그렇게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영적 인간과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을 구별하지만, 모든 개인의 거듭남을 영적 단계 졸업  천적 단계 진입이라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의 이후 저술에서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가 서로 구별되어 지속적으로 설명됩니다. 따라서 영적 천적을 단순한 초급과 고급의 관계로만 생각하면 그의 전체 체계를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한편 창세기 1장과 2장의 연속된 설명 안에서는 분명 더 내적인 상태가 이어지는 흐름도 있습니다. 이 두 측면을 모두 고려해야 하므로 AC.51 한 문장만으로 모든 영적 인간은 결국 천적 인간이 된다거나 그 반대를 확정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왜 AC.51은 영적 인간을 빛의 아들 친구’, 천적 인간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까요? 이 호칭들은 두 상태의 차이를 보여 주는 성경적 증거로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것들을 곧바로 친구보다 자녀가  단계 높은 신분이라는 인간관계의 서열로 바꾸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AC.51의 직접적인 목적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에게 서로 다른 호칭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빛의 아들이라는 표현에는 영적 인간과 진리의 빛 사이의 관계가 드러납니다. 반면 하나님의 자녀에 관해 인용된 요1:13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성질을 이해하는 단서가 될 수 있지만, AC.51은 이 한 글에서 그 차이를 모두 체계화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설명을 기다리면서 이 구별을 열어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형상 모양을 가장 안전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둘 다 주님을 닮는 인간의 영적 상태를 가리키지만 동일한 상태는 아닙니다. ‘형상은 영적 인간에게, ‘모양은 천적 인간에게 해당하며,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전자와 구별되는 더 내적인 성질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단순히 미완성  완성’, ‘낮은 단계  높은 단계’, ‘친구  아들이라는 하나의 서열표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AC를 계속 읽으면서 이 차이는 점점 더 구체적으로 드러날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 태고교회의 퍼셉션, 그리고 이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의지와 이해의 질서를 살펴보면 AC.51의 짧은 구별이 왜 중요한지 더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이렇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며,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이다. 형상은 모양 자체는 아니지만 모양을 따른다. 둘은 모두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의 상태이지만, 스베덴보리는  둘의 내적 성질을 분명히 구별한다. 이것이 AC.51이 앞으로의 긴 설명을 위해 놓아 두는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AC.51, 창1:26, ‘형상’과 ‘모양’ :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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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1

형상(image) 대해 말하자면, 형상은 닮음(likeness) 자체가 아니라 닮음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라고 말합니다. 영적 인간은 형상(image)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likeness), 닮음(similitude)입니다. 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음 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룹니다. 형상(image) 영적 인간을 주님은 빛의 아들(son of light)이라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As regards theimage,an image is not a likeness, but is according to the likeness; it is therefore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The spiritual man is animage,and the celestial man alikeness,or similitude. In this chapter the spiritual man is treated of; in the following, the celestial. The spiritual man, who is animage,is called by the Lord ason of light,as in John: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12:35, 36) He that walketh in the darkness knoweth not whither he goeth. While ye have the light, believe in the light, that ye may be sons of light (John 12:3536).

 

또한 친구(friend)라고도 하십니다. He is called also afriend”:

 

14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 15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아버지께 들은 것을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15:14, 15) Ye are my friends if ye do whatsoever I command you (John 15:1415).

 

그러나 모양(likeness), 닮음인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son of God) 하십니다. 요한복음입니다. But the celestial man, who is alikeness,is called ason of God,in John:

 

12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4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자들이니라 (1:12, 13) As many as received him, to them gave he the power to become sons of God, even to them that believe on his name; who were born not of bloods,4 nor of the will of the flesh, nor of the will of man, but of God (John 1:1213).

 

4, 헬라어는 ξ αμάτων입니다. 아래 AC.374 [3] 단락을 보세요. [편집자] The Greek is ex haimat¯on. See below, at n. 374[3]. [Reviser]

 

해설

AC.51은 창1:26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는 표현에서 형상모양을 구별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두 말을 거의 같은 뜻의 반복처럼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첫 문장에서부터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이라고 말하고, 곧바로 영적 인간은 형상’, 천적 인간은 모양’, 곧 닮음이라고 구별합니다.

 

처음 읽으면 형상이 모양 자체는 아니지만 모양을 따른다는 말이 상당히 난해합니다. 여기서 너무 빨리 형상은 닮아 가는 과정이고 모양은 완성된 상태라는 식으로 공식을 만들어 버리기보다, 우선 AC.51이 직접 제시하는 구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입니다. 형상은 모양과 동일하지 않지만 모양을 따릅니다. 그리고 이 차이는 창세기 1장과 2장의 주제 차이와도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 곧 창세기 1장에서는 영적 인간을 다루고, ‘다음 ’, 곧 창세기 2장에서는 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창1과 창2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안내입니다. 창세기 2장을 단순히 창세기 1장의 자연계 창조 이야기를 다른 순서로 다시 기록한 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AC의 속뜻에서는 서로 다른 인간 상태를 다루는 것으로 읽는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사람이 영적 인간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51영적 인간은 형상이다라는 말은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주장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을 따라 설명해 온 거듭남이 영적 인간, 형상에 이르는 데까지 온 것입니다. 반면 모양인 천적 인간은 다음 장에서 다루겠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것을 곧바로 영적 인간은 미완성 단계이고 천적 인간은 완성 단계다’, 또는 모든 영적 인간은 계속 거듭나면 반드시 천적 인간으로 승급한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1은 그런 체계를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으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더 자세히 설명할 것이므로, 지금은 그가 제시하는 형상모양의 구별을 먼저 받아들이는 편이 안전합니다.

 

이어서 AC.51은 매우 흥미롭게도 이 두 인간을 복음서의 서로 다른 호칭과 연결합니다. 먼저 형상인 영적 인간은 주님께서 빛의 아들이라고 부르신다고 하면서 요12:35-36을 인용합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이 인용의 직접적인 목적은 요한복음의 어둠에 관한 모든 상응을 자세히 해설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영적 인간이 빛의 아들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이 말씀을 인용합니다.

 

앞의 창조 과정과 연결하면 이 표현이 낯설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의 거듭남에서 빛과 광명체는 이미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AC.51은 여기서 빛의 아들이라는 말을 근거로 영적 인간의 모든 심리적 특성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빛의 아들은 아직 의식적으로 선택하고 분별해야 하는 단계다’, ‘빛이 주어질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사라진다는 등의 구체적인 영적 법칙을 이 인용에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형상인 영적 인간을 주님께서 빛의 아들이라 부르신다는 연결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을 또한 친구라고 한다면서 요15:14-15을 인용합니다.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나의 친구라.이 말씀 역시 AC.51에서는 영적 인간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다는 근거로 사용됩니다. 물론 본문 자체에서 주님은 친구와 종을 구별하시고, 친구에게 아버지께 들은 것을 알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AC.51은 여기서 = 외적 순종, 친구 = 내적 일치라는 완성된 상응 체계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친구이기 때문에 아직 아들은 아니며, 주님의 뜻을 이해하지만 완전히 하나가 되지는 않은 상태라고 단계화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AC.51은 영적 인간을 빛의 아들친구라는 두 표현으로 가리키고, 이어 천적 인간을 다른 표현과 연결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그 호칭들 사이의 모든 관계를 이 짧은 글에서 계급이나 단계처럼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반면 모양’, 곧 닮음인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한다면서 요1:12-13을 인용합니다. ‘영접하는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자들이니라.AC.51에서 이 구절을 가져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천적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현재 해설처럼 자녀란 아버지의 뜻이 자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살아 있는 존재이고, 사랑의 근원이 완전히 바뀐 상태라고 자세한 거듭남 메커니즘을 만들어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1:13하나님께로부터 자들이라는 표현이 천적 인간과 연결된다는 사실 자체가 지금은 중요합니다. 그 상태의 내적 성질은 다음 창세기 2장과 이후 AC에서 훨씬 더 자세히 펼쳐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구별하는 것일까요? AC.51의 첫 문장은 분명히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 차이를 여기서 충분히 해설하지는 않습니다.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이라는 짧은 표현만 줍니다. 그러므로 처음 읽는 독자가 둘이 도대체 얼마나 다른 것인가?’, ‘형상은 닮고 모양은 많이 닮았다는 뜻인가?’, ‘영적 인간이 나중에 천적 인간이 된다는 뜻인가?라고 궁금해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이 문제는 AC.51 자체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면서 이후의 영적·천적 구별을 계속 읽는 데도 필요하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서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형상이라고 해서 가치 없는 불완전한 복제품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영적 인간을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는 거듭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형상은 아직 영적 생명이 시작되지 않은 낮은 상태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모양을 인간이 하나님과 동일해지는 상태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49-50에서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주님의 형상이나 모양이 된다는 것은 인간이 신적인 존재가 되거나 주님과 본질적으로 동일해진다는 뜻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주님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존재입니다.

 

이 점에서 AC.51은 앞의 세 글과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48에서는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고, AC.49에서는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고 했습니다. AC.50에서는 사람의 생명과 거듭남의 실제 주체 역시 주님 한 분임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AC.51은 그 주님의 형상모양사이에도 구별이 있음을 밝히면서, 창세기 1장의 영적 인간에서 창세기 2장의 천적 인간으로 시선을 옮길 준비를 합니다.

 

따라서 AC.51의 중심을 형상에서 모양으로 올라가는 거듭남의 단계라고 너무 빨리 정리하기보다는, 먼저 스베덴보리가 의도적으로 구별한 두 인간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영적 인간은 형상이며 빛의 아들’, ‘친구라고 불립니다. 천적 인간은 모양’, 곧 닮음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립니다. 창세기 1장은 전자를, 창세기 2장은 후자를 다룹니다. 그리고 형상은 모양 자체는 아니지만 모양을 따릅니다. 이 짧은 구별이 앞으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이 됩니다.

 

심화

1. 형상 모양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AC.51, 심화 1, ‘형상’과 ‘모양’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AC.51.심화1. ‘형상’과 ‘모양’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 AC.51의 첫 문장은 간단해 보이면서도 상당히 어렵습니다. ‘형상은 모양 자체가 아니라 모양에 따른 것이다.’ 그리고 곧이어 ‘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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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창1:26, ‘다스림의 방향 전환 : 이해에서 사랑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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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창1:26, ‘우리'의 의미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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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심화

1.  영과  천사 누구이며,  둘씩 있는가?

 

AC.50을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 사람마다 적어도  영과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몇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 영은 악한 영을 말하는가?’, ‘ 천사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호천사인가?’, ‘거듭난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이 없어지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하필 둘씩인가?

 

AC.50 자체에서는 이 모든 질문을 상세히 풀어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뒤쪽으로 가면 스베덴보리가 같은 문제를 다시 다루며 훨씬 구체적인 설명을 합니다. 따라서 이번 심화에서는 AC.50이 직접 말하는 것과 뒤의 AC에서 보충되는 내용을 구별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AC.50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영과  천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며,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한다고 합니다. 이어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그와 함께 있다고 하고, 거듭난 상태에서는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설명합니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AC.50 영들은 천사들과 대비되어 영들의 세계와 사람을 연결하는 존재들이며, 거듭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는 영들은 악한 영들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AC.5848-5849에서 훨씬 명시적으로 다시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에게 계속해서 천사들과 영들이 있으며, ‘천사들은 천국에서, 영들은 지옥에서 온다고 말하고, 모든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다시 설명합니다. 그리고 두 영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옥과 소통하게 하고, 두 천사는 천국과 소통하게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AC.50  을 단순히 선악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적인 영 둘이라고 이해하는 것보다는, 뒤의 설명까지 함께 볼 때 지옥 쪽과의 소통을 담당하는 영들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고 사람 옆에 지옥에서 올라온 악한  둘과 천국의 천사 둘이 몸으로 서서  따라다닌다는 식으로 자연계의 공간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함께 있음은 영적 결합과 소통의 문제입니다. 그가 실제 영계의 공간과 가까움에 관해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별도의 큰 주제이므로, AC.50 함께 있다를 자연계의 몇 미터 거리처럼 상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거듭난 사람에게는 악한 영들이 완전히 없어지고 천사들만 남는가? AC.50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2]에서는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는다고 하며, [3]에서는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린다고 합니다.  AC.50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천사와 악한 영의 존재 여부라기보다 어느 쪽의 작용이 지배적인가 하는 상태의 차이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만으로 거듭난 뒤에도 정확히 같은 영들이 같은 방식으로 계속 머문다거나 악한 영들은 일정 거리 밖으로 물러난다는 세부까지 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둘인가?라는 질문으로 가 보겠습니다. 이것은 AC.50에는 답이 없지만, 뒤의 AC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설명합니다. AC.5977-5978에서는 인간에게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이 있으며, 천국에는 이에 대응하는 두 종류의 천사들이 있고 지옥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의 영들이 있기 때문에 둘이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천사 가운데 한 종류는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 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 의지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사람의 사랑과 목적, 따라서 선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고, 이해에 작용하는 천사들은 신앙과 원리, 따라서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계됩니다. 그는 앞의 천사들을 천적 천사, 뒤의 천사들을 영적 천사라고 부릅니다.

 

지옥 쪽에도 이에 반대되는 두 종류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한 종류는 의지에 속한 것들에 작용하고, 다른 종류는 이해에 속한 것들에 작용합니다. 따라서  영과  천사라는 숫자는 단순히 네 명이라는 기이한 숫자 정보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본 기능에 대응하는 영적 소통의 질서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사람 안의 모든 생각 하나에는 이해 담당 천사  ’, 모든 애정 하나에는 의지 담당 천사  이 기계적으로 붙어 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것은 인간의 두 기본 기능과 천국·지옥의 두 종류 사이의 상응 관계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조직도나 신경회로처럼 지나치게 세밀한 기계 구조로 바꾸면 오히려 그의 설명을 왜곡할 수 있습니다.

 

  천사와  영이 있으므로  마음속에서 좋은 생각 하나와 나쁜 생각 하나가 항상 동시에 들려온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도 안 됩니다. AC.50과 뒤의 관련 글들은 인간이 천국과 지옥 양쪽과 소통한다는 큰 구조를 설명하지만, 개별적인 생각과 느낌 하나하나를 우리가 어느 영의 직접 발언으로 판별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식의 영적 존재 판별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것은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점은 인간의 책임 문제에서도 중요합니다. ‘악한 생각은 악한 영에게서 왔으니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악을 남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이 유입되는가만이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AC.50에서는 그 자유의 전체 메커니즘까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더 자세히 들어갈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 영들이 영향을 주므로 인간에게 책임이 없다는 결론은 피해야 합니다.

 

그러면 두 천사와 두 영은 각각 독립적으로 자기 힘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존재일까요? 이것 역시 AC.50이 단호하게 막습니다. 천사들은 사역자들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입니다. 천사들도 자기들에게 어떤 능력도 없고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힘으로 일한다고 고백한다고 합니다. 지옥 쪽의 영들이 작용하는 경우에도 인간의 존재와 생명 전체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AC.50  영과  천사를 읽는 중심은 신비한 호위 존재 넷에 대한 호기심이 아닙니다. 인간이 스스로 고립되어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 천국과 지옥이라는 영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고,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역시 그 영적 질서 안에서 작용하며, 그 모든 것 위에서 주님 한 분이 섭리 가운데 사람의 생명을 보존하고 거듭남을 이루신다는 것이 더 중요한 핵심입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AC.50은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있다고 말하며, 뒤의 AC.5848-5849는 두 영을 지옥과의 소통, 두 천사를 천국과의 소통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AC.5977-5978은 그들이 왜 둘씩인지에 대해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에 각각 대응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영과  천사는 임의적인 숫자가 아니라 인간의 의지와 이해, 그리고 천국과 지옥과의 영적 소통이라는 더 큰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AC.50, 창1:26, ‘우리의 형상대로’ : 천사와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는 주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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