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4(D3)-매일예배(2488, 눅10,38-42), '마르다에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신 말씀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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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KmAyCZKouuU

 

 

마르다에게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하신 말씀의 속뜻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40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41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10:38-42)

 

 

교회 교세가 너무도 미약, 어떻게 하면 교회를 성장시키고, 부흥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마음이 복잡할 때는 계시록 12장, 아들을 낳는 여인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위안을 얻곤 합니다. 계시록 12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6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계12:5-6)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아들을 낳은 여자’는 새 교회, 곧 주님 오셔서 새롭게 시작하실 새 예루살렘 교회, 인류의 다섯 번째가 될, 그리고 더 이상은 없는 마지막 영원한 교회를 뜻합니다. 그리고 ‘아들’은 그 교회의 교리를 뜻합니다. 이 새 교회는 기존 교회의 마지막 때 세워집니다. 즉 기존의 교회들이 믿음과 삶의 행위를 분리시켜서 완전히 타락했을 때, 주님께서는 그 교회들의 문을 닫으시고, 새 교회를 세우십니다. 늘 그러셨습니다. 인류의 교회사를 보면, 지금이 네 번째 교회 시대인데, 앞 모든 교회 시대마다 늘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 새 교회, 그러나 이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하실 교회를 말씀에서는 ‘여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자가 낳는 ‘아들’은 주님이 새 교회를 통해 밝히시는 새로운 교리이며 말씀입니다.

 

새 교회 교리가 처음 나타날 때, 기존 교회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그들을 지탱하고 있던 교리가, 그리고 지금은 ‘오직 믿음’의 교리가 한 번에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새 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마치 주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주님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새 교회가 기존 교회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는 것을 말씀에서는 ‘여자가 광야로 피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초목이 자라지 않는 황폐한 땅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리도 없고, 사랑도 없는 교회들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런 광야 한 가운데 이 새 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시험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스베덴보리에 의하면, 그런 이유로 해서 처음에는 새 교회 진리를 믿는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다고 합니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새 교회의 진리를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만 명 중 하나도 쉽지 않다고 하지요. 그러다가 주님의 때가 이르면 빠르게 부흥이 된다고 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여자가 천이백육십일 동안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양육을 받는 천이백육십일은 새 교회가 열악한 상태에서 차츰 부흥이 되는 기간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말씀의 의미를 통해서 우리는 새 교회가 처음에 얼마나 열악한지, 그리고 시험이 얼마나 많은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려울 때마다 저는 이 말씀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새 교회는 주님께서 지켜 주시는 특별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무너지지 않으며, 때가 되면 크게 부흥할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주께서 예비하신 천이백육십일 동안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 손 놓고 그냥 주님이 이루어주시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 보겠습니다. 본문 38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38그들이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가셨는데 그곳에서 마르다라는 여인을 만나셨다는 겁니다.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마음속에 교회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닙을 자기 집에 영접했습니다. ‘’은 사람의 의지를 나타내기도 하구요, 여기서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선한 마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마르다가 주님을 집으로 모시는 것’은 그가 주님으로 표상되는 새 교회 진리를 선한 마음 가운데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속에 선한 것이 없는 사람은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끌어당겨 하나가 되고자 하는, 하나로 결합하려고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선한 마르다는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참 진리이신 분이라는 것을 대번에 알아봤습니다.

 

주님을 받아들였을 때, 마르다의 믿음의 상태는 어땠을까요? 주님께서 마을로 들어가셨다는 사실로부터 마르다의 믿음이 어떤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마을’은 신앙의 외적인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면, 예배 의식이나 교회의 제도 같은 것이 바로 마을입니다. 마을과 비교되는 것으로 좀 더 큰 성읍이 있지요. ‘성읍’은 신앙의 내적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니까 교리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읍이 중심에 있고, 마을은 그 바깥쪽에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르다의 신앙은 외적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가 성읍에 살지 않고, 마을에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신앙과 외적 신앙은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한 마디로, 내적 신앙은 진리를 알면 바로 삶으로 옮기는 신앙입니다. 반면, 외적 신앙은 입으로는 믿음을 고백하는데 삶으로는 옮기지 않는 신앙입니다. 따라서 마르다의 믿음은 후자의 신앙입니다. 39절에는 마르다와 비교되는 그의 동생 마리아가 등장하는데, 그에 대해 말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마르다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주님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주님의 발은, 주님은 진리이신 분 아닙니까? 그리고 발은 가장 낮은 곳에 있지요? 그래서 ‘주님의 발’은 말씀의 문자적인 뜻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발치에 마리아가 앉아있는 것'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로부터 내적 진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입니다. 또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고 했는데, ‘듣는 것’은 말씀에 순종하는 뜻이지요? 그렇게 보면, 마리아의 신앙이 언니 마르다보다는 더 내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동안, 언니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할 준비를 하느라 마음이 바쁩니다. 그런 동생이 언니 마르다의 눈에는 한가로워 보이기만 합니다. 심지어 야속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주님께 나아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40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게 무슨 말일까요? 교회에서나 직장에서 눈에 띄는 일을 하기를 좋아하고, 혼자 바쁜 사람들이 있지요.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것이 선이고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장이 많아지고, 자기가 한 일을 인정받지 못할 때는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지금 마르다가 그런 상태입니다. 마르다는 마리아가 주님에게서 물러나 자기 일 돕기를 원합니다. 마르다처럼 외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마리아 같은 내적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눈치 없이 이기적이며,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 앞에서 자기 신앙이 마리아의 신앙보다 옳다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마르다의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1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주님께서는 마르다가 불필요한 일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는구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의 예배 의식이나 교회의 제도, 또 선교, 전도 활동 등은 교회의 재정과 역량에 맞게 가능한 한 단순한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것이 과연 주님을 위한 일인지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만일 그러한 모든 일들이 목회자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일이거나, 또는 교인들의 자부심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면 그만두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숨은 동기로 하는 일들은 모두 외적인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을 위한 일인지를 먼저 생각하시고, 그것에 따라서 일의 경중과 순서를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2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주님은 마리아가 지금 선한 일을 하고 있으니 그 일을 빼앗지 말라 하십니다. 그 일을 그만두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글 성경에는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영어 성경의 번역은 다릅니다. ‘한 가지 일로 족하니라’ 이렇게만 되어 있습니다. ‘한 가지 일’이라고 하니 정말 한 가지 일만 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기가 쉬운데 그게 아니고요, 여기서 ‘하나’는 속뜻으로 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한 가지 일로 족하다’는 것은 선한 일만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번잡하게 여러 가지,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또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여러 가지 하는 일 중에는 선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겁니다. 그 목적이 선하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왜 선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순수하게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닐 경우, 순수하게 교회를 위하는 일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어떤 좀 불순한 목적이 들어 있을 경우에는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닌 게 되겠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마리아가 선한 편을 택했으니 그것을 빼앗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나 직장에서나 겉으로 표 나는 일이 있고, 표가 나지 않더라도 꼭 필요한 일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든 표가 나는 일을 하려고 하고요, 심지어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내용이 없고 보여주기식의 일을 할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런 것은 선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도 아닙니다. 주님은 어느 곳에서나 표가 나든지 말든지 꼭 필요한 일만을 묵묵히 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을 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하는 일은 쓰임새에 충실한 일입니다. 천국은 쓰임새의 나라요, 천국 모든 구성원은 모두 이 쓰임새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마르다는 외적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행하기보다는 주님을 대접하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동생 마리아가 이 바쁜 와중에 한가로이 주님 말씀이나 듣고 앉아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주님은 한 가지 일에 족하라고 충고하십니다. 한 가지 일은 앞에 말씀드린 대로 선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마르다와 달리 동생 마리아는 어땠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선하게 보시고, 그가 선한 편을 택했으니 빼앗지 말라 언니 마르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대접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구요, 말씀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삶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런 예배를 받기를 원하십니다. 교회 건물이 하늘을 찌르고, 수천 명의 성가대가 찬양을 하더라도, 교인들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외적인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외적인 것 안에는 반드시 내적인 것이 함께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 새 교회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주님의 때가 오기를 기다려야만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새 교회의 미래가 머지않아 눈부시게 펼쳐질 날이 올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눅10:42)

 

아멘

 

원본

2019-11-10(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4(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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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02(D1)-주일예배(2487, 눅10,25-37),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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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B4PkXIFGcE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눅10:25-37)

 

 

이웃 사랑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그를 이웃으로 만드는 덕목, 즉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AC.5028)

 

 

어떤 율법교사가 주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자 주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되물으셨고, 이에 율법교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자, 주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교사는 율법에 적힌 대로 줄줄 암송은 했지만, 사실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했다는 사실과, 비록 지금 자기 앞에 계신 분이 뉘신지를 몰랐다 하더라도 자기가 지금 암송한 이 말씀을 참으로 이해하는 사람이었다면 감히 이런 식, 곧 상대방을 시험하는 용도로 말씀을 이용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이기적 동기 없이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선과 진리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이지요.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의 비밀’ 5028번 글에는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서 그를 이웃으로 만드는 덕목, 즉 선과 진리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은 선과 진리를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그 사람 안에 계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지요. 선과 진리는 주님의 신성이요, 곧 주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심지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하신 주님 말씀을 지킬 수 있으려면 반드시 이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실제로는 정말 쳐다보기도 싫은 사람, 정말 상종하기도 싫은 사람이 있지요.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라신 이 주님 말씀을 지키려면 그 사람 자체보다는 그 사람 안에 계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법, 곧 그 사람 안에도 주님이 허락하신 주님의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법을 꼭 익혀야 합니다. 그 사람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계시는 주님에 대해 예의를 갖추기 위한 것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나의 감정과 상처보다도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 크고 중요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이유는, 마음, 즉 하트(heart)는 사랑을 뜻하고, 목숨, 즉 소울(soul)은 믿음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사랑할 때는 반드시 사랑과 믿음이, 신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말과 행동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믿음은 말로 나타나고, 사랑은 행동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성경의 모든 구절들 안에는 선과 진리, 사랑과 믿음 간 결합이 있으며, 그래서 오늘 본문에도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29절에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주님께 묻습니다. 자기를 옳게 보이려 한다는 것은 영어로는 저스티파이(justify)인데,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또는 변명한다는 뜻입니다. 평소에 어떤 행동을 했기에 율법교사는 지금 변명을 하는 걸까요? 유대인들처럼 세속적인 사람들은 자기에게 이로운 사람만 이웃으로 인정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의 가족이나 몸 담고 있는 직장, 사회 또는 자신의 나라만을 이웃으로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웃 사랑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율법교사는 주님과 대화하는 중에 문득 자신의 이웃 사랑이 잘못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변명을 하듯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말을 듣고, 주님께서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29km 떨어진 성읍입니다. 기록에는 주님 당시 예루살렘과 여리고를 왕래하는 사람이 꽤 많았다 합니다. 지리적으로 예루살렘은 해발 800m 고지에 있고, 여리고는 지중해 수면보다 250m나 아래에 있었습니다. 즉 여리고에서 보면 예루살렘은 천 미터 고지인 셈이고, 그렇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꽤 가파른 내리막길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강도가 수시로 출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이 길은 영적으로는, 즉 속뜻으로는, 예루살렘은 교회의 교리를 뜻하고, 여리고는 삶의 선한 행위를 뜻합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은 속 사람을 통해 흘러들어온 교회의 진리가 겉 사람의 삶 속에 뿌리내리는 험난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강도를 만났다 했는데, 강도는 겉 사람 안에 진리가 뿌리내릴 때까지 방해하고 저항하는 수많은 악과 거짓들이며, 지옥의 유혹들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러한 악과 거짓의 유혹에 넘어간다면 그는 지옥을 향한 가파른 길로 굴러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을 모두 빼앗겨버릴 것입니다. 누구에게? 바로 지옥의 영들에게 빼앗깁니다. 그것이 강도에게 옷이 벗겨지고 매를 맞는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이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마침 그곳에 제사장이 나타났습니다. 제사장은 그를 보고도 못 본 척하고 그냥 자기 갈 길을 갔습니다. 다음에는 레위인이 도착했는데 그 역시 그를 피해 지나갔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앞에서 말한 율법교사처럼 유대교회, 유대 사회에서는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며, 그러므로 진리를 많이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 척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면 속뜻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지도자들이며, 오늘날로 말하면, 종교적 지위와 신분을 이용하여 세속적 삶을 추구하는 종교 지도자들, 특히 교회 리더십들입니다. 그들은 믿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오직 믿음’의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거짓 목자들입니다. 백번 양보, 비록 악의는 없었을지라도 한쪽만 강조, 본의 아니게 신앙과 체어리티 간 하나 됨을 느슨 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함으로써 성도들로 하여금 ‘뭐, 그래도 나는 믿음이 있으니까 구원받을 수 있을꺼야’라는 잘못된 확신 가운데 머무르게 한, 그렇게 함으로써 실제로는 속 사람의 준비에 소홀하게 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천국은 속 사람의 상태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곳인데, 잘못된 교리를 확신, 그렇게 성도를 가르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 짧은 지상생활 동안 정말 중요한 결정적 준비를 다 놓치며 살게 한 책임 말입니다. 성경 모든 구절이 선과 진리의 결혼, 또는 믿음과 사랑의 결합을 가르치는데, 거짓 목자들은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분리하고, 믿음과 사랑을 분리해 왔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야말로 신앙인들에게서 진리를 빼앗는 강도이며, 죽어가는 사람을 못 본 척 피해 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인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은 우리 신앙인들의 마음속에도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생각할 때가 있는데, 바로 그 마음이 제사장이며 레위인입니다. 우리 내면에 제사장과 레위인이 있으면, 주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막힙니다. 그래서 자신이 영적으로 죽어가더라도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식으로 제사장과 레위인은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하지 않고, 피하여 지나갔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못 본 척 지나갈 때, 죽어가는 사람을 일으켜 세운 사람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혐오하고 업신여겼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잘들 아시듯 역사적 어떤 사건 때문인데, 나중에 따로 기회 되면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이 사마리안인은 모두 우리 신앙인들 안에 있는 마음들입니다. 전자는 진리를 잘 안다 하면서도 실천하지는 않는 마음이고, 후자는 겸손한 태도로 아는 만큼 진리를 실천하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사마리아인과 같은 마음이 있을 때는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으로 병들었다 판단되면, 가지고 있던 모든 진리와 선을 동원해서 병을 고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는데, 본문에서는 그것을,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여기 기름과 포도주는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기름’은 선이고, ‘포도주’는 진리를 뜻합니다. 또 ‘자기 짐승’은 영적 지성, 즉 진리에 대한 이해력이나 분별력을 뜻합니다. 영적 지성이 있어야 자기가 어떤 영적 질병을 앓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인은 죽어가는 자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주막’은 주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입니다. 주막에 가면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있지 않습니까? 먹을 것과 마실 것은 영적으로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뜻합니다. 주막은 주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주막으로 환자를 데리고 가는 것은, 한편으로는 영적 지성을 통해 병을 스스로 치유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주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물으셨습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 질문에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답했고, 그러자 주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심으로써 이 에피소드는 일단락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의 모습이 이 율법교사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율법교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스스로 진리를 많이 안다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입으로는 영생을 위해 산다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세상의 영화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진리를 선택하기보다 자아가 원하는 쪽을 선택하면서도 주님 앞에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영생을 얻으려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진리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사랑, 즉 행함이 중요하다 말씀하십니다. 율법교사는 어쩌면 이웃 사랑을 이미 실천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좋아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변명하듯 주님께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물은 것이며, 주님께서는 비유를 들어 ‘이 셋 중 자비를 베푼 선한 사마리아인이 네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다’ 대답하신 것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에서는 누구나 힘없는 사마리아인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을 더 사랑합니다. 또한 사마리아인처럼 겸손하고 따뜻한 사람이 되기보다 제사장이나 레위인 같이 높은 사람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우리 안에 있고, 동시에 이웃들의 마음속에도 있는 진리와 선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선한 사마리아인을 지지, 사랑해야 하고, 우리 자신도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7:12)

 

아멘

 

원본

2019-10-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2(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2. 성찬 원고

성찬.pdf
0.13MB

 

 

3. 축도 원고

2023-07-02(D1)-주일예배.축도.성찬.pdf
0.20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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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9(D5)-매일예배(2486, 눅10,21-24),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주님'.pdf
0.37MB

https://youtu.be/UfHW4I_21HQ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주님

 

 

21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2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23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시되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눅10:21-24)

 

 

일반적으로 학식이 있는 사람보다 단순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더 분명하게 이해하는 까닭은 학식이 있는 사람들은 진리를 배울 때 지식을 통해 배우려고 하며, 그렇게 해서 내적 통찰력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내적 통찰력이 파괴될 때, 그들은 모든 것을 천국의 빛을 통해 보지 않고, 세상의 빛으로 본다. 왜냐하면 지식은 세상의 빛 안에 있으며, 그러므로 그것이 천국의 빛에 의해 비춤을 받지 않으면 암흑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AC.4760:4)

 

 

창세기 32장에는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말씀에서 야곱은 두려움 반, 설렘 반으로 형 에서에게 보낼 선물들을 챙기고, 두 아내와 여종들과 아들들을 데리고 얍복나루를 건넙니다. 야곱이 뒤에 홀로 남아있는데 문득 어떤 사람이 나타나 둘 사이에 씨름이 벌어졌습니다. 야곱이 얼마나 지독하게 대들었는지 허벅지 관절이 빠졌는데도 씨름이 계속되었습니다. 새벽 무렵이 되자 그 사람이 야곱에게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말씀에는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단순히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 고향으로 가는 중에 하나님으로 짐작되는 분을 만나 밤새 씨름을 하여 이겼다는 뜻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영적으로 이 말씀은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당하셨던 시험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의미로는 야곱으로 표상되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게 된 배경에 대한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전혀 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그들 가운데 교회를 세우신 이유는, 그들이 누구보다도 여호와의 축복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주님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라는 축복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적, 세속적 축복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한 가지 장점이 있었는데, 그들이 말씀의 외적인 것을 철저히 지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 가운데 교회를 세우시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따라서 유대교회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는 아니고, 단지 교회를 표상(表象)하는 교회일 뿐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유대인들의 내면에는 교회를 이룰만한 영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주님에 대한 믿음이라든가 사랑 같은 것이 그들에게는 전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유대교회가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가 아니었다면 그런 교회에서 어떻게 거룩한 예배를 드릴 수 있으며, 또한 그러한 예배를 통해 어떻게 주님과 인간이 서로 소통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대답을 출애굽기 28장 42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출28:42)

 

여호와께서는 제사장들에게 속바지를 만들어 입혀 그들의 하체를 가리게 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체’는 유대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불결한 욕망들을 나타내고, ‘속바지를 입히는 것’은 그러한 욕망들이 예배의 행위 가운데로 흘러 들어오지 못하도록 말씀의 외적 의미를 통해 막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속바지를 입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극히 세속적이고 감각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내면에는 말할 수 없이 불순한 욕망들이 들끓고 있었습니다. 만약 그러한 욕망들이 예배 행위 가운데 흘러 들어온다면 예배가 더럽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예배 중에 그들의 내면을 닫으시고, 불결한 것들이 흘러나오지 않도록 차단하셨습니다.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속바지를 입혀 하체를 가리게 하라는 것은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표상의 교회인 유대교회 가운데로 임재하셨고, 그들의 예배를 통해 인류 전체와 소통하실 수 있었습니다.

 

유대교회가 진정한 교회가 아니고 교회의 표상인 것처럼 신앙인들 가운데도 내면에 교회가 있는 사람이 있고, 교회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전자는 믿음과 삶의 행위가 일치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믿음만 있고 삶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칠십 인의 제자들이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했을 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주님은 가끔 믿음만 있고 삶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구원 사역을 맡기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라도 한 사람이라도 더 주님께 돌아오도록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을 맡아 한다 해서 모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과 삶의 행위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주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입으로만 주님을 믿고 삶의 행위로는 못하는 걸까요? 오늘 본문 21절은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21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하십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어린아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이 왜 주님께 기쁜 일일까요? 그 이유는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와 어린아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우리 마음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늘 한결같지 않다는 겁니다. 어느 때는 교만하여 스스로 지혜롭다 여기고, 어느 때는 어린아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이 됩니다. 전자의 상태일 때는 시험이 오면 여지없이 무너집니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와 주님께 매달리면 성령이 다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그런 방법으로 조금씩 주님의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그러니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시는 것이 주님에게나 인간에게나 모두 기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실 때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성령이 주시는 기쁨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자 하는 새로운 의지입니다. 성령이 주시는 감사는 모든 선한 것을 오직 주님께 돌리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아버지께 감사하신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본질적으로 사랑을 동반한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임재하실 때는 기쁨과 감사가 있고, 또한 진리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 있습니다. 성령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말씀의 진리 속으로 한 치도 들어갈 수 없으며, 시험 가운데서 능히 이길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오직 주님의 것임을 인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이 주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옵니다. 그것에 대해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2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여기서 ‘아버지’는 선 자체이신 주님을 뜻하고, ‘아들’은 선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이신 주님을 뜻합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아버지’는 주님 안에 계신 신성 자체이시고, ‘아들’은 신성에서 비롯한 거룩한 인간이신 예수님을 뜻합니다. 진리가 선의 형상인 것처럼, 거룩한 인간이신 주님 역시 신성의 형상이십니다. 이와 같은 진리는 이제껏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셔서 지옥을 이기시고 거룩한 인간이 되셨을 때,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인성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당신의 인성까지 거룩하게 만드시고,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인간은 신성 자체로부터 나오는 무한한 사랑과 지혜를 이해할 수 없으며, 그러므로 거룩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나오는 성령이야말로 인간이 만날 수 있는 가장 완전하신 주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진리에 대해 이사야서 30장 26절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일곱 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으리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마치 주님이 달라지신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변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입장에서 주님을 이해하는 깊이가 달라졌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를 받은 자가 아니면 주님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즉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면 주님을 바로 이해할 수 없으며, 진리에 따라 살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24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여기서 ‘너희가 보는 바’는 부활하신 주님이 밝혀주시는 새 교회 신앙, 새 예루살렘 교회 신앙, 곧 진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너희가 듣는 바’는 그 신앙에 따른 삶을 뜻합니다. 모든 시대의 선지자들이 그것을 원했지만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마지막 교회와 함께하시는 성령을 통해서만 그것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시대에 태어난 것은 대단히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신앙인들의 책임이 무겁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을 믿고 따랐던 사람들은 학식이 많은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단순하고 순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같은 어부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천국의 빛을 보내주셔서 진리를 통찰할 힘을 주셨습니다. 반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상적으로는 많이 배운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지혜보다 자신의 지혜를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인간의 지식을 내세움으로써 스스로 내적 통찰력을 저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리이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에게는 오실 수 없으시며, 반대로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사람에게는 오십니다. 마태복음 21장 15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 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어린이들을 보고 노하여 (마21:15)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치는 어린이들을 보고 제사장들이 노(怒)했다고 합니다. 순진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주님에 대한 고백과 찬송에 대해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노(怒)한 것입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시편 8편 2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8:2)

 

어떻게 하면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함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야만 합니다. 성령의 힘으로 세상의 거짓을 분별할 수 있고, 우리 안에 있는 악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의 힘으로 온갖 지옥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성령이 임할 때 순진한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11:8)

 

어떤 지옥의 독사들도 순진한 사람들을 해칠 수 없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영이 그들을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오는 순진함이 오늘 이 말씀에 마음으로 아멘하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45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6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7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요7:45-49)

 

아멘

 

원본

2019-10-1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6-29(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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