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7(D3)-매일예배(2485, 눅10,17-20, AE.581.6),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시는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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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5oTplJ6rGpk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시는 주님

 

 

17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10:17-20)

 

마가복음 16장 18절에서 주님은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지옥의 영들이 아무리 교활하고 악의를 가지고 덤벼도 주님이 지키시는 사람들은 해칠 수 없음을 뜻한다. (AE.581:6)

 

지난주에는 진리를 믿지 않고 인간의 지식을 믿는 사람들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전해드리면서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어느 장관의 인사를 예를 들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중에 교인 한 분이 전화를 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수정당 당직자들의 자녀도 문제가 많은데 왜 법무장관 자녀만 가지고 비판을 하느냐, 그것은 중립적인 태도가 아니지 않는가? 라고 하셨습니다.

 

※ 이 설교는 지난 2019년 9월 설교로, 검색을 해보니 당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인사로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때였습니다.

 

생각해 보니 듣는 사람에 따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런 말씀을 드린 것은 정치적인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닙니다, 국민의 절반 이상이 부도덕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사법제도를 개혁하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교리적인 측면에서 설명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잘못이 있으면 우편에 있는 사람이나 좌편에 있는 사람이나 비판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지지하는 쪽의 사람이라고 해서 잘못이 있는데도 잘못이 없는 것처럼 옹호하거나, 또는 다른 쪽 사람의 잘못을 파헤쳐 자기 쪽 사람의 잘못을 희석, 물타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특히 새 교회 분들은 그러면 안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 분들이 모두 세상에 속한 사람이 되지 않고 천국에 속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일이든 자아와 세상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항상 진리의 시각으로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영적인 분별력을 잃지 않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으로부터 우리 마음 가운데로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는 진리의 강이 있습니다. 그 강은 처음에는 큰 물줄기로 흐르다가 점차 수많은 작은 물줄기로 바뀌고, 그렇게 해서 속 사람과 겉 사람, 기억의 미세한 부분에까지 흘러 들어갑니다. 그것은 마치 인체의 혈액이 동맥과 정맥과 미세혈관을 통해 아주 작은 세포 안에까지 흐르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은 그런 방법으로 우리 마음속 미세한 부분에까지 선과 진리를 공급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자아와 세상의 논리로 사물을 바라본다면 혈액에 때가 끼는 것처럼 마음속에 거짓이 쌓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을 진리로 알고 계속 받아들이기 때문인데요, 그렇게 거짓이 쌓이다 보면 그 거짓들로 인해 주님과 연결된 진리의 통로가 막혀버립니다. 어쩌면 최근에 문제가 되고 있는 사람들도 그런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마음속을 흐르는 진리의 강이 막힌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말을 하면서도 그것이 거짓인 줄을 모릅니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도 않습니다. 주님과 연결된 선과 진리의 흐름이 완전히 막혔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항상 진리의 시각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진리의 강이 흐릅니다. 강둑에는 나무가 푸르고 새가 날아다닙니다. 이사야서 58장 11절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58:11) 했습니다. 자아와 세상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시험에 들기 쉽고, 일단 시험에 들면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진리가 없으며,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는 그런 사람들에게 달려드는 지옥의 영을 뱀과 전갈로 비유합니다. 어떻게 하면 뱀과 전갈을 피할 수 있을까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1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17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이르되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여기서 ‘칠십 인’은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라고 각처로 보내셨던 칠십 인의 제자들입니다. 즉 진리를 따라 체어리티(charity)의 삶을 사는, 교회 안의 모든 사람입니다. 그들이 세상에 나갔다 돌아오는 것은 신앙인들의 일상의 삶을 나타냅니다. 즉 세상에 나가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도 하고, 주님에게로 돌아와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하는 그런 삶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뻐하며 돌아왔다’고 합니다. 무엇이 그렇게 기뻤을까요? 진리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것이 기쁘고, 그러한 삶을 통해 새 교회의 진리가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것이 기뻤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쁨에 대해 제자들은 좀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귀신은 신앙인들을 순간순간 괴롭히는 지옥의 유혹을 뜻합니다. 지옥은 신앙인의 삶 곳곳에 교활하고 악의적인 덫을 놓아 그들을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그때 지옥의 유혹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주님의 이름에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주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주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시지도 않고, 귀에 들리게 말씀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때로는 무모해 보입니다. 두 손 놓고 주님을 믿기만 하라는 말인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주님이 우리를 위해 싸워 결국 이기신다는 것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넘어지면 일어서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서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나는 점점 더 낮아지고, 믿음은 점점 더 깊어집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은 한 번에 생기지 않습니다.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자아가 낮아질 대로 낮아져야 그때부터 조금씩 믿음이 생깁니다.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믿을 때, 시험에서 한 번 이길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한 번 이길 때, 두 번 세 번 이길 힘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토록 우리를 괴롭히던 귀신이 마침내 물러갑니다. 그것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의 항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칠십 인의 제자들은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느끼는 기쁨은 지옥의 영들로부터 다시는 해를 당하지 않을 사람들이 느끼는 천국의 평화입니다.

 

18예수께서 이르시되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신앙인들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지옥의 귀신들도 때가 되면 지체하지 않고 물러납니다. 그 모습을 18절에서는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으로 표현 했습니다. 여기서 ‘하늘’은 사탄이 괴롭히는 주님의 교회이며, 또는 내면에 교회가 있는 신앙인들을 뜻합니다. 그래서 19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9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말씀에서 ‘’은 지옥의 영들의 교활함과 악의적인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전갈’은 신앙인들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거짓 논리와 그 능력을 뜻합니다. 전갈의 독에 쏘이면 사람의 몸이 마비되어 꼼짝을 못 한다고 합니다. 그만큼 전갈의 독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전갈은 진리를 왜곡하는 거짓 논리와 그 능력을 뜻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당신의 제자들에게 주시겠다고 합니다. ‘뱀과 전갈을 밟는 능력’은 뭘까요? 지옥의 악의적인 도발과 거짓 논리에 넘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또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은 지옥의 영들에 의해 더 이상 해를 입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온전한 믿음으로 체어리티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어떤 유혹이나 거짓 진리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20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주님께서는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이름이 하늘에 기록될 때 참된 평화가 있다는 뜻입니다. ‘기쁨’은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귀신이 항복하는 영적 상태’와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영적 상태’는 어떻게 다를까요? 대개는 같지만, 그러나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온전한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도 귀신이 항복하는 경우가 간혹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는 온전한 믿음을 갖지 않은 사람, 즉 믿음만 있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는 않는 사람들에게도 때로는 진리를 전하는 일을 맡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마태복음 7장 말씀은 주님의 일을 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7:22-23)

 

때로는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들이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그런 신앙인들에게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라 하시고, ‘내게서 떠나가라’ 하십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신들이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신 것입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이 각자의 생명책인 의지에 기록되는 것입니다. 의지는 곧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이 의지에 새겨질 때, 우리는 비로소 믿음에 따라 기쁨으로 이웃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택하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신 칠십 인의 제자들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신앙인들입니다. 그렇지만 각자의 믿음의 상태가 모두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에 따라 체어리티의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체어리티의 삶을 삽니다. 새 교회에서는 전자의 사람을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고, 후자의 사람을 천적인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또 어떤 경우는 믿음만 있고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진리를 전하는 사명을 그들에게 맡기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면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하셨습니다. 그만큼 진리를 대적하는 거짓 논리가 세상에 만연하다는 뜻입니다. 거짓 논리는 전갈의 독과 같아서 잘못 쏘이면 이성이 마비되고 분별력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의 논리에 휩쓸리지 말고 언제나 진리의 시선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내적인 믿음으로 이름을 하늘에 기록하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20:7)

 

아멘

 

 

원본

2019-09-2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6-27(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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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 (2023/6/26)

 

 

콤펜디움(COMPENDIUM, 叢書)’ 1장 ‘하나님에 관하여’, 오늘은 5강,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입니다.

 

※ ‘콤펜디움(COMPENDIUM, 叢書, Samuel. M. Warren, 1875)’

 

1. 어떤 저자의 모든 저작(Writings)을 한 데 모아놓은 것으로, 여기서는 스베덴보리의 모든 신학적 저작 가운데서 특정 주제별로 그에 해당하는 글들을 선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을 말합니다. 일종의 조직신학 같은 책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2. 이 콤펜디움을 엮은 워렌은 그저 주제별 해당 글들을 선별, 엮기만 했을 뿐 무슨 자의적 해설을 더하거나 섞거나 하지 않았으므로 여전히 원저자는 스베덴보리라 해도 될 듯 합니다.

 

오늘의 메인 본문은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Angelic Wisdom concerning Divine Love and Wisdom, 1763) 1장, ‘창조주’(The Creator) 8강,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에 나오는, 책 전체 글 번호로는 29, 30번 글입니다.

 

29

그 본질에 있어 지혜와 한 몸인 사랑(Love together with wisdom in its very essence)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이 사실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사랑으로 모두를 사랑하시며, 자기 안에 있는 지혜로 모두를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피조 세계(The created universe)역시 그 창조 질서의 측면에서 볼 때(viewed in relation to its order),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너무나도 충만, 그 안 모든 만물(all things in the aggregate)을 일컬어 지혜 그 자체라 할 정도입니다. 셀 수 없이 많은 것들(things limitless)이 그런 질서 가운데 계속 연결되고, 동시에 하나로 합쳐 하나를 이루기 때문인데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단결, 끊임없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그리고 오직 이것 때문입니다. Love together with wisdom in its very essence is in God. This no one can deny; for God loves everyone from love in himself, and leads everyone from wisdom in himself. The created universe, too, viewed in relation to its order, is so full of wisdom coming forth from love that all things in the aggregate may be said to be wisdom itself. For things limitless are in such order, successively and simultaneously, that taken together they make a one. It is from this, and this alone, that they can be held together and continually preserved.

 

30

사람에게 생명(삶)을 위한 두 가지 능력(capacities, abilities)이 생기는 것, 곧 하나를 통해서는 언더스탠딩(understanding, discernment)이, 다른 하나를 통해서는 윌(will, volition)이 생기는 것은 바로 이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Divine essence itself is love and wisdom)’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언더스탠딩을 생기게 하는 능력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지혜의 입류(the influx of wisdom from God)로 말미암는 모든 것이 시작되고, 윌을 생기게 하는 능력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입류(the influx of love from God)로 말미암는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사람이 정말 지혜롭지도, 그리고 올바른 사랑을 하지도 않는다 해서 이 능력들이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 단지 닫힐 뿐인데요, 다만 이 능력들이 닫혀 있는 한은, 비록 언더스탠딩을 여전히 언더스탠딩이라 하고, 윌을 윌이라 하더라도 사실은 더 이상 아닙니다. 언더스탠딩도, 윌도 이 능력들이 정상적으로 작동 중일 때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두 능력이 사라지면 사람의 모든 것(all that is human)은 소멸될 것입니다. 인간(the human)은 사고(thought)를 통해서 생각하고 말하며, 의지(will)를 통해서 의도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윌과 언더스탠딩이 있어 사람입니다. 이 사실로 분명한 건, 주님의 신성(the Divine)은 인간 안에서 이 두 능력, 곧 지혜로울 수 있는 능력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의 가능성이 있음을, 그리고 지혜로움의 가능성이 있음을 저는 많은 경험을 통해 그동안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당장은 할 수 있는 만큼 사랑도, 될 수 있는 만큼 지혜롭지도 않을지라도 말이지요. 이 사실은 앞으로 여러 다른 데서 풍부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It is because the Divine essence itself is love and wisdom that man has two capacities for life; from one of these he has understanding, from the other will. The capacity from which he has understanding derives everything it has from the influx of wisdom from God, and the capacity from which he has will derives everything it has from the influx of love from God. Man’s not being truly wise and not loving rightly does not take away these capacities, but merely closes them up; and so long as they are closed up, although the understanding is still called understanding and the will is called will, they are not such in essence. If these two capacities, therefore, were to be taken away, all that is human would perish; for the human is to think and to speak from thought, and to will and to act from will. From this it is clear that the Divine has its seat in man in these two capacities, the capacity to be wise and the capacity to love (that is, that one may be wise and may love). That in man there is a possibility of loving [and of being wise], even when he is not wise as he might be and does not love as he might, has been made known to me from much experience, and will be abundantly shown elsewhere.

 

2023-06-26(D2)-C.1.5.1,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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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해를 돕기 위해 제가 보태는 몇 가지 설명 및 오늘의 권면입니다.

 

1. ‘피조 세계 역시 그 창조 질서의 측면에서 볼 때,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로 너무나도 충만, 그 안 모든 만물을 일컬어 지혜 그 자체라 할 정도입니다.’ (29번 글에서)

 

다음은 위 문장에 나오는 ‘지혜’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글입니다.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에서 인용했습니다.

 

천국의 총합이 한 사람의 모양(heaven in its whole complex reflects a single man)이라는 것은 지금까지 세상에는 알려지지 않은 신비(an arcanum)이지만, 천국에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과 그에 관련된 세부 사항들을 아는 것이 천사의 지성을 이루는 핵심(the chief thing in the intelligence of the angels there)이다. 천사들이 이 사실을 보편 원리(general principle)로 삼고 있지 않으면, 거기 의존하는 많은 것을 명확히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공동체도 각각 사람 모양을 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천국을 ‘가장 큰 신적 사람(the greatest man and the Divine man)’이라고 부른다. 신적(Divine)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주님의 신성이 천국을 이루기 때문이다. (HH.59)

 

즉 어떤 건물이나 도시 전체 설계에 그 설계자의 모든 지혜가 담겨있듯 천국 역시 그 전체 설계에 주님의 지혜가 온전히 담겨있을 것이므로, 우리가 그 천국의 설계 형태에 주목하면 주님의 지혜에 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말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2.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그런 질서 가운데 계속 연결되고, 동시에 하나로 합쳐 하나를 이루기 때문인데요,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단결, 끊임없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그리고 오직 이것 때문입니다.’ (29번 글에서)

 

이 역시 다음 글들을 통해 그 의미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역시 ‘천국과 지옥’에서 인용했습니다.

 

천국의 형상이 그렇기 때문에, 천국은 주님에 의해 단 한 사람처럼, 즉 한 단위로 다스려진다. 잘 알려진 대로 사람은 전체나 각 세부나 무수히 다양한 부분들로 이루어졌다. 전체는 사지와 기관과 내장들로, 그리고 각 부분은 섬유와 신경과 혈관으로 되어 있어 지체 안에 지체가, 부분 안에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사람은 한 사람으로 움직인다. 이와 같이 천국도 주님의 감찰과 인도하심(the auspices and direction of the Lord)에 따라 하나로 움직이는 것이다. (HH.63)

 

 

사람 안에 있는 많은 부분들이 하나로 움직이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것은 모두 전체의 유익을 위해 뭔가 기여하고, 쓰임새(use) 없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전체는 부분들로 구성되고, 부분은 전체를 이루기 때문에, 전체는 부분을 위한, 부분은 전체를 위한 쓰임새를 수행한다. 그러므로 양쪽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서로를 목적으로 삼으며, 모든 부분이 합동해서 각기 전체와 전체의 유익에 참여하는 형태를 이루어낸다. 그 결과 모든 부분이 하나로 움직이는 것이다.

 

[2] 천국들 간에도 이런 연합(affiliations)이 이루어진다. 천국에서는 모두 그 쓰임새를 따라 같은 형태(form)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공동체에서 쓰임새를 수행하지 않는 자는 이질적이므로 천국에서 추방된다. 쓰임새를 수행한다는 것은 전체의 공동유익을 위해 타인에게 선한 의도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쓰임새를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타인에게 선한 의도로 행하기는 하지만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후자는 모든 것보다 자기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며, 전자는 주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천국에서는 모두가 하나로 움직이는데, 그것은 주님으로 말미암는 것이지, 천사들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주님을 모든 것의 유일한 원천으로 바라보고, 주님 나라를 그 유익을 추구해야 할 사회로 삼기 때문이다. 이것을 주님은 성서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6:33)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것은 주님의 선을 구하는 것(to seek his good)이다.

 

[3] 이 세상에서 자기 조국의 유익을 자기 유익보다, 이웃의 유익을 자기 유익보다 더 사랑한 사람은 내세에서 주님의 나라를 구하고 사랑한다. 거기서는 주님의 나라가 조국이기 때문이다. 또 타인에게 행하는 선을 사랑한 사람들은 내세에서 이웃을 사랑한다. 천국에서는 선이 이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두 ‘가장 큰 사람(the greatest man)’ 안에, 즉 천국에 있다. (HH.64)

 

 

3. 영어 ‘understanding’과 ‘will’을 앞으로는 가급적 소리나는 그대로 ‘언더스탠딩’과 ‘’로 적겠습니다. 이 ‘understanding’에 대한 번역이 참 애매하기 때문인데요, 그냥 ‘이해’라 하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조금 풀어 ‘이해하는 능력’이라 하기도 그렇고... 무슨 ‘이해력’이나 ‘사고력’, ‘이성’이나 ‘생각’ 등... 참 쉽지가 않습니다. 영어 ‘charity’나 ‘affection’ 등과 같은 케이스입니다. ‘will’의 경우는 ‘의지’나 ‘의도’ 등 크게 문제될 건 없지만, 그냥 ‘understanding’과 짝을 맞추기 위해 ‘’로 표기하겠습니다만, 그러나 융통성 있게 하겠습니다.

 

 

4. ‘언더스탠딩도, 윌도 이 능력들이 정상적으로 작동 중일 때만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두 능력이 사라지면 사람의 모든 것은 소멸될 것입니다. 인간은 사고를 통해서 생각하고 말하며, 의지를 통해서 의도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윌과 언더스탠딩이 있어 사람입니다. 이 사실로 분명한 건, 주님의 신성은 인간 안에서 이 두 능력, 곧 지혜로울 수 있는 능력과 사랑할 수 있는 능력 안에 자리를 잡는다는 것입니다.’ (30번 글에서)

 

다음은 위에서 말한 ‘언더스탠딩(understanding)’과 ‘(will)’에 대한 이해를 돕는 글입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문제에 대한 바른 개념이 없는 사람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사람의 모양과 형상으로 배열되고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사람의 외면(man’s outmost nature)을 구성하는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것이 사람을 만든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떠나서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나 그들이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선한 것을 의도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his ability to understand what is true and to will what is good)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의지(willing)와 사고력(understanding)이 바로 사람을 이루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다. 게다가 모든 사람의 특질(quality)은 그의 사고력과 의지의 성질에 의해 결정된다. 또한 사람의 육신은 이 세상에서 사고력과 의지에 봉사하도록 지어진 것이고, 그 두 기능의 명령에 따라 자연계에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몸은 그 자체가 행하는 것이 하나도 없고, 항상 사고력과 의지의 명령에 완전히 복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생각이 입과 혀를 통해 말로 나오고, 사람의 의도가 사지를 통해 행동에 옮겨지는 것이다.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사고력과 의지이지 몸 자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고력과 의지에 속한 것이 사람을 이루며, 내면이 외면에 작용하듯(as what is internal into what is external) 그 두 기능이 육체의 지극히 세부적인 데까지 작용하기 때문에, 영과 육은 같은 형태로 되어 있음이 명백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내적인 인간, 영적인 인간이라 하는 것이다. 천국은 바로 가장 크고 가장 완벽한 사람의 형태이다. (HH.60)

 

여기서는 번역자의 번역을 존중, ‘사고력’과 ‘의지’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오늘 강의의 요약 및 결론은,

 

첫째,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지혜는 천국의 구조와 설계 형태에 반영되어 있으며, 그래서 천국 설계 형태를 아는 것이 주님의 신적 지혜를 아는 첫걸음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주님의 신적 사랑에서 주님의 신적 지혜가 나옵니다. 여기서 주님의 신성의 본질인 선과 진리가 나오며, 또 여기서 사람을 이루는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 곧 윌과 언더스탠딩이 나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인플럭스(influx)로 연결되어 있는데요, 이 인플럭스는 피조 세계 전체와 주님을 연결하는,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어떤 영적 연결이요, 흐름입니다. 이 인플럭스로 주님의 신적 사랑과, 신성을 이루는 선, 그리고 인간의 의지가 한 흐름으로 연결되고, 또 주님의 신적 지혜와, 신성을 이루는 진리, 그리고 인간의 이해하는 능력인 언더스탠딩이 한 흐름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런 흐름과 연결로 인해, 어떤 사람이든지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 될 가능성, 선과 진리의 사람이 될 가능성, 그리고 주님의 사랑과 지혜의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 어느 누구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그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으로 5강, ‘주님의 신적 본질을 이루는 두 키워드는 사랑과 지혜다(The very Divine Essence is Love and Wisdom)’를 마치고, 다음은 6강, ‘주님의 신적 사랑과 주님의 신적 지혜는 실체(實體)이며, 형태를 가진다(Divine love and Divine wisdom are substance and are form)’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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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6-25(D1)-주일예배(2484, 눅10,10-16), '발에 묻은 먼지'.pdf
0.36MB

https://youtu.be/8GdWZbakf3Q

 

2.  축도 원고

2023-06-25(D1)-주일예배.축도.pdf
0.23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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