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7 심화

1. 속 사람 안을 비출 빛을 좀 앞당겨 켤 수는 없을까?

 

AC.17의 ‘혼돈’, ‘공허’, ‘흑암’을 자신의 삶에 대입해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속 사람이나 거듭남,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해 깊이 알지 못한 채 지낼 수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들을 생각하면 ‘그 사람의 속 사람을 비출 빛을 조금이라도 일찍 켜 줄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영적 생명을 염려하는 데서 나오는 매우 실제적인 질문입니다.

 

먼저 AC.17의 표현을 정확히 붙들 필요가 있습니다. ‘혼돈’은 선이 없는 상태이고, ‘공허’는 진리가 없는 상태이며, ‘흑암’은 주님 신앙과 영적, 천적 삶에 대한 어리석음과 무지를 뜻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어떤 사람이 교회 용어나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모르기 때문에 곧 영적으로 완전히 버려진 상태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주님께서 그 사람의 내면에서 보존하고 준비하시는 것은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후 AC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등장하는 ‘리메인스’가 바로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그의 내면에 보존하십니다. 사랑받고 사랑했던 경험, 순진함,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진실을 기뻐했던 순간처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것들이 사람 자신도 모르는 깊은 곳에 간직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보존하십니다. 훗날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 들어갈 때 주님께서는 이러한 리메인스를 사용하여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여십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신앙 지식의 정도만으로 그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지금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으셨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의 ‘빛을 앞당겨 켜 줄’ 수 있을까요? 엄밀히 말하면 빛 자체를 켜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영적 빛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속 사람을 직접 열 수도 없고, 어떤 진리를 강제로 이해하게 만들 수도 없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파괴하면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진리는 자유 가운데 받아들여져야 그 사람의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좋은 뜻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의 상태를 무시한 채 영적 진리를 밀어 넣으려는 것은 주님의 방법과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의 진리를 전할 수 있고, 상대방이 질문할 때 정직하게 대답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그 사람이 선을 사랑하고 악을 악으로 인식하도록 돕는 삶의 본을 보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한마디 말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고, 한 번 경험한 진실한 사랑이 훗날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중요한 준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 어떤 씨앗이 어디까지 들어갔는지 알 수 없지만,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상태와 자유를 아시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구원은 특정한 신학 용어를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에 따라 양심적으로 살고, 악을 피하며, 자신의 종교 안에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선을 추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사람이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모든 영적 진리를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고 해서 주님의 섭리가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사후에도 사람은 자신의 내적 상태에 따라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일 기회를 갖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의 내적 상태와 영원한 운명을 성급하게 판단할 이유는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결국 모든 사람은 때가 되면 반드시 빛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으로 이끄시고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공급하시지만, 인간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자유가 있습니다. 리메인스가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도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의 섭리를 신뢰하면서도 사람의 선택을 가볍게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빛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그 빛을 향해 돌아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빛을 앞당겨 켜고 싶다’는 마음은 결국 우리의 역할과 주님의 역할을 구별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우리가 할 일은 사람의 내면을 억지로 열어 빛을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진리와 사랑을 가능한 한 순수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가족에게도, 교우에게도, 교회 밖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이 지금 당장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조급해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언젠가 저절로 다 잘될 것이라고 안심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고 선을 행하며, 그 진리가 언제 어떻게 생명이 될지는 주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어쩌면 ‘빛을 조금 일찍 켜 주고 싶다’는 목회자의 마음 자체도 주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중심은 ‘내가 그 사람을 깨우겠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이 사람에게 필요한 때에 필요한 빛을 주실 때, 제가 그 일을 방해하지 않고 쓰임 받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가 되어야 합니다. AC.17의 흑암 다음에는 곧 주님의 역사가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흑암 속에 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우리의 마지막 시선은 그 사람의 어둠이 아니라, 그 어둠 위에서도 이미 일하고 계시는 주님께 향해야 합니다. (AC.17 심화 1)

 

 

 

AC.17, 창1:2(AC.17-19), ‘혼돈과 공허, 흑암의 상태 : 거듭남 이전 인간의 실상’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6 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가 선지서 거의 모든 곳에서 거듭남을 의미한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그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고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단어를 단순한 동의어의 반복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말씀 안에서는 서로 비슷해 보이는 표현도 각각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되며, 스베덴보리는 이 세 동사 역시 거듭남을 서로 다른 측면에서 나타낸다고 봅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AC.16 자체는 그 차이를 여기서 자세히 정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창조는 생명을 처음 넣어 주는 단계, 형성은 그 생명을 질서 있게 만드는 단계, 만듦은 그것을 행동으로 구현하는 마지막 단계’라고 세 동사를 하나의 고정된 순서표로 확정하는 것은 AC.16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이런 설명은 이해를 돕는 비유로는 사용할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AC.16에서 그렇게 정의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먼저 ‘창조하다’는 거듭남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날 때 ‘새로 태어나 생명을 받기’ 때문에 거듭남 자체를 ‘새 창조’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창조’는 자연적 인간이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일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입니다. 실제로 뒤의 AC에서도 ‘창조하다’는 사람이 새로 창조되거나 거듭나는 것과 특별히 연결되어 설명됩니다.

 

‘만들다’ 역시 단순한 물건 제작의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습니다. 뒤의 설명을 보면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나아가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경우 ‘만들다’라는 표현과 연결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만들다’를 단순히 외적인 행동으로 구현하는 단계라고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시작하신 거듭남의 역사가 사람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측면까지 포함한다고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짓다’ 또는 ‘형성하다’(form)도 고유한 뜻을 갖습니다. 이 말은 이미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것이 일정한 형식과 질서를 갖도록 형성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AC.16 한 번호만으로 세부 의미를 완전히 정할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여러 곳에서 ‘형성하다’를 다른 표현들과 구별하여 사용하며, 각 문맥에서 그 속뜻을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가 모두 주님의 거듭남의 역사를 말하지만 서로 같은 뜻은 아니라는 사실을 먼저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43:7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한 사람을 두고 세 동사가 연속하여 사용됩니다. 만일 세 말이 완전히 같은 뜻이라면 이런 반복은 단순한 수사적 장식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에 속뜻의 차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이 세 동사 역시 한 사람의 거듭남을 서로 다른 관점에서 나타낸다고 읽습니다.

 

AC.88에서도 이 원칙은 다시 확인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주님의 ‘일’이 되는 것은 주님께서 그를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이 세 표현이 말씀에서 ‘아주 구별되게’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대목에서도 각 단어를 간단한 세 단계 공식으로 정의하기보다는, 말씀에서 각각 고유한 관념을 전달한다고 강조합니다. 이것이 AC.16을 읽을 때도 가장 안전한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세 동사의 차이를 기억할 때는 ‘첫째는 이것, 둘째는 이것, 셋째는 이것’이라고 너무 빨리 고정하기보다, ‘거듭남은 주님께서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형성하시며, 마침내 온전하게 이루어 가시는 전적인 역사이고, 말씀은 이 한 역사를 여러 고유한 표현으로 구별하여 말한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후 AC에서 이 단어들이 다시 나타날 때마다 그 문맥에서 구체적인 뜻을 확인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한 ‘의미의 차이’가 점차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세 동사가 함께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거듭남의 주체가 주님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하지만, 사람 자신이 스스로를 새 창조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창조하시고, 형성하시고,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AC.16에서 이 세 단어의 차이를 묻는 일은 단순한 어휘 연구가 아니라, 거듭남 전체가 누구의 역사인가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AC.16 심화 1)

 

 

 

AC.16, 창1:1, ‘태초와 거듭남의 시작 : 사람의 새 창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 합니다. 선지자들은 여러 곳에서 이를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4 심화

1. ‘주님’이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AC.14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을 뜻한다고 말하면, 전통적인 삼위일체 교리에 익숙한 독자는 자연스럽게 질문하게 됩니다. ‘그러면 성부와 성령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성령보다 더 높은 분이라는 뜻인가?’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삼위 가운데 한 위격을 다른 두 위격보다 높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신적 삼위일체는 그 한 분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주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삼위일체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영원 전부터 서로 구별되는 세 신적 인격으로 생각하고, 그 셋을 다시 한 하나님이라고 이해하려는 방식입니다. 그는 참된 기독교에는 신적 삼위일체가 있다고 보지만, 그것을 한 분 하나님 밖에 따로 존재하는 세 분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신적 삼위일체는 성육신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구별은 ‘신성 자체’, ‘신적 인간’, ‘발출하는 신성’입니다. 성부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 자체, 곧 모든 것의 근원이신 신성을 가리키며, 성자는 그 신성이 세상에 오셔서 취하시고 영화하신 신적 인간을 가리킵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발출하여 인간과 천사에게 역사하는 신성을 가리킵니다. 이것들은 세 하나님이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 있는 신적 삼위일체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말은 성부를 제외하고 성자만 하나님으로 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며, 주님에게서 성령이 발출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다음 AC.15에서 스베덴보리가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AC.14와 AC.15는 따로 떼기보다 서로 이어서 읽을 때 스베덴보리의 의도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성육신 이전과 이후의 관계도 중요합니다. 신성 자체는 영원부터 계셨지만, 주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인간성을 취하셨고 그 인간성을 영화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외적인 모습이나 임시적인 육체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영화된 인성은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된 ‘신적 인간’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단순히 하나님을 대신하여 권세를 받은 피조된 중개자가 아니라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이십니다.

 

스베덴보리가 때때로 사람의 영혼과 몸과 활동을 비유로 사용하는 것도 이 하나 됨을 이해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에게 영혼과 몸과 그에게서 나오는 활동이 있다고 해서 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성 자체와 신적 인간과 발출하는 신성은 세 하나님이 아닙니다. 다만 이 비유 역시 하나님을 인간과 동일한 구조로 축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삼위가 한 분 안에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도록 돕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14에서 왜 ‘주님’이라는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게 적용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삼위 가운데 ‘성자’라는 한 위격만을 선택하여 높이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오셔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구원을 이루신 분이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성부를 지나쳐 성자에게만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기도와 예배에서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보이지 않는 성부를 따로 생각하고 그분께 나아가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중간 단계처럼 통과하는 구조가 중심이 아닙니다. 주님 자신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까이 오신 분이며, 인간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예배할 수 있도록 자신을 나타내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경배한다는 것은 하나님 가운데 한 분만을 골라 예배한다는 뜻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을 그분이 자신을 나타내신 신적 인간 안에서 예배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14의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선언은 성부와 성령을 밀어내는 선언이 아니라 오히려 신적 삼위일체를 한 분 하나님 안에서 다시 붙드는 선언입니다. 성부는 주님 안의 신성 자체이며, 성자는 그분의 신적 인간이고, 성령은 그분에게서 발출하는 신성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시선은 세 분 사이를 오가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께 향합니다. 그분 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있으며, 그분에게서 모든 신적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인간에게 옵니다. (AC.14 심화 1)

 

 

 

AC.14, 창1, ‘주님은 세상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AC.14이어지는 모든 글에서 ‘주님’이라는 이름은 세상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만을 뜻하며, 다른 이름을 덧붙이지 않고 단지 ‘주님’(the Lord)이라고만 부릅니다. 온 천국 전체에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