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3, ‘만 입이 내게 있으면’, 68, ‘오 하나님 우리의 창조주시니입니다.

 

오늘은 1 여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24절로 26, AC 글 번호로는 46번에서 50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26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4-26)

 

이 본문을

 

사람을 향한 창조, 형상으로 나아가는 여섯째 날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46, 창1:24-25, ‘짐승'(beasts), 사람의 애정(affections)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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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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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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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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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창1:26, ‘우리'의 의미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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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주일예배라는 특별한 사정으로 다 다루지 못한 부분들도 돌아가셔서 꼭 몇 번씩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신앙 반석, 그 주춧돌이 깊이, 그리고 아주 견고하게 놓아져 가는 느낌을 받게 되실 겁니다. 오늘 설교 원고 중에 수많은 보석 같은 비밀들이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거듭남’이며, 놀라운 사실은 이 수십 장 원고가 정말 다양한 각도로 이 거듭남을 비추고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이 AC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의 시간은 그 순간순간이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순도 100%의 설교이며, 우리의 눈, 특히 심령을 맑고 밝게 하는 시간이 될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3-29(D1)

 

2644, 6, 창1.6, 2026-03-29(D1)-주일예배(창1,24-26, AC.46-50), ‘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 (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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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4/05, 창1:26-31, AC.51-66, 부활절), '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 (3), 주님의 부활로 본 창1'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4, ‘왕 되신 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161, ‘할렐루야 우리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1 일곱 번째, 창1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26절로 31절,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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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3/22, 창1:14-25, AC.30-45),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2, ‘만유의 주 앞에’와, 찬67,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입니다. 오늘은 창1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4절로 25절, AC 글 번호로는 30번에서 45번입니다.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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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0

태고교회는 주의 형상(image of the Lord)이라는 말로 표현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천사들과 영들에 의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마다 적어도 영과 천사가 함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과 소통하는 것이지요. 영계를 통한 소통과, 천국을 통한 소통, 그리고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전혀 없는 구조입니다. 사람의 생명은 결합에 전적으로 달려 있어서, 만일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난다면 그는 즉시 사라지고 것입니다. 그러니까 존재 자체를 유지할 수가 없게 된다는 말입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understood by theimage of the Lordmore than can be expressed. Man is altogether ignorant that he is governed of the Lord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that with everyone there are at least two spirits, and two angels. By spirits ma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angels with heaven. Without communication by means of spirits with the world of spirits, and by means of angels with heaven, and thus through heaven with the Lord, man could not live at all; his life entirely depends on this conjunction, so that if the spirits and angels were to withdraw, he would instantly perish.

 

[2] 사람은 거듭나기 전과 후에 있어 다스림을 받는 방식이 전혀 다릅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사람을 강하게 지배합니다. 이때에도 여전히 천사들은 함께 있으나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다만 사람이 가장 극단적인 악으로 떨어지지만 않도록 막아 주며, 실제로 그의 욕정을 통해 어떤 선으로 굽히고, 감각의 오류를 통해 진리로 굽힐 뿐입니다. 이때 사람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해 영계와는 소통하지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이 지배를 겨우 막고 있는 상태이므로, 천국과의 소통은 매우 미약합니다. While man is unregenerate he is governed quite otherwise than when regenerated. While unregenerate there are evil spirits with him, who so domineer over him that the angels, though present, are scarcely able to do anything more than merely guide him so that he may not plunge into the lowest evil, and bend him to some goodin fact bend him to good by means of his own cupidities, and to truth by means of the fallacies of the senses. He then has communication with the world of spirits through the spirits who are with him, but not so much with heaven, because evil spirits rule, and the angels only avert their rule.

 

[3] 그러나 사람이 거듭나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제는 천사들이 주도적으로 다스리며, 사람에게 모든 선과 진리를 불어넣고,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혐오를 일으키게 합니다. 물론 천사들이 이끌기는 하지만, 그것은 봉사의 방식일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분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천사들과 영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이러한 이유로 여기에서는 먼저 복수형으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Let us make man in our image)라고 하고, 곧이어 단수형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그를 창조하셨다(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라고 합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일하시지만, 다스림과 창조의 주체는 오직 주님 분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주님께서도 점을 이사야에서 분명히 밝히십니다. But when the man is regenerate, the angels rule, and inspire him with all goods and truths, and with fear and horror of evils and falsities. The angels indeed lead, but only as ministers, for it is the Lord alone who governs man through angels and spirits. And as this is done through the ministry of angels, it is here first said, in the plural number,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nd yet because the Lord alone governs and disposes, it is said in the following verse, in the singular number, “God created him in his own image. This the Lord also plainly declares in Isaiah: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없이 땅을 펼쳤고 (44:24) Thus saith Jehovah thy redeemer, and he that formed thee from the womb, I Jehovah make all things, stretching forth the heavens alone, spreading abroad the earth by myself (Isa. 44:24).

 

천사들 자신도 자신들에게는 어떤 능력도 없으며, 오직 주님한테서 나오는 그분의 힘으로만 자기들은 일한다고 고백합니다. The angels moreover themselves confess that there is no power in them, but that they act from the Lord alone.

 

해설

AC.50은 바로 앞의 AC.49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주제를 뜻밖의 방향으로 깊게 들어갑니다. AC.49에서는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이 참으로 사람의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50은 태고교회 사람들이 주의 형상이라는 말에서 우리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이해했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인간의 생명과 영계·천국의 연결, 그리고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다스리시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합니다.

 

첫 문장부터 현대 독자에게는 매우 낯선 내용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신이 주님에 의해 천사들과 영들을 통하여 다스림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며, 모든 사람에게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고 합니다. 영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의 세계와 소통하고, 천사들을 통해 천국과 소통하며,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결합이 없으면 사람은 전혀 살 수 없으며, 영들과 천사들이 물러나면 즉시 소멸할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천사들과 영들이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는 뜻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50의 문장 자체가 연결의 최종점을 주님에게 둡니다. 사람은 영들의 세계 및 천국과 연결되어 있고 그리하여 천국을 통해 주님과연결됩니다. 따라서 천사나 영이 생명의 독립적인 근원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이 주님과의 결합에 의존한다는 것이 중심입니다. 앞의 AC.39-43에서도 이미 모든 참된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점이 반복해서 설명되었습니다.

 

사람마다 적어도 영과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 역시 처음 접하면 여러 질문을 낳습니다. ‘그렇다면 옆에 명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따라다닌다는 뜻인가?’, ‘ 영은 모두 악한 영인가?’, ‘ 하필 둘씩인가?하는 질문입니다. AC.50 자체는 그 모든 세부를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후 AC.5848-5849에서도 사람에게 두 영과 두 천사가 있어 각각 지옥과 천국과의 소통을 이루게 한다고 다시 말하며, AC.5977-5978에서는 왜 둘씩인지를 인간의 의지와 이해라는 두 기능 및 이에 상응하는 천국과 지옥의 두 종류와 연결하여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이 문제는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AC.50의 직접적인 관심은 숫자 자체보다 사람의 상태에 따라 이 영적 다스림의 양상이 어떻게 달라지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거듭나기 전과 거듭난 전혀 다르게 다스림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부터 [2][3]이 서로 대조됩니다.

 

거듭나지 않은 상태에서는 악한 영들이 사람과 함께 있으며 그들이 강하게 지배한다고 합니다. 천사들도 여전히 함께 있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이 가장 낮은 악으로 빠지지 않도록 돌이키고, 그를 어떤 선과 진리 쪽으로 굽히는 정도라고 설명합니다. 이때 사람은 함께 있는 영들을 통해 영들의 세계와는 소통하지만, 악한 영들이 지배하고 천사들은 그 지배를 막고 있기 때문에 천국과의 소통은 그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특히 눈에 띄는 문장이 있습니다. 천사들은 거듭나지 않은 사람을 그의 욕정을 통해 어떤 선으로’, ‘감각의 오류를 통해 진리로굽힌다고 합니다. 이것을 욕정과 감각의 오류가 사실은 좋은 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50이 말하는 것은 사람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현재 상태에 있을 때 천사들이 그 사람에게 없는 높은 상태를 억지로 전제하여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처해 있는 상태 안에서 극단적인 악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며 어떤 선과 진리 쪽으로 돌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한 문장만으로 욕정을 선한 에너지로 바꾸면 된다는 일반적인 거듭남 방법론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영들이 지배한다는 말을 사람에게 아무런 자유나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 악한 생각과 행동은 사실 악한 영들이 것이니 나는 책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를 AC.50은 제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와 천국·지옥 사이의 평형, 그리고 유입된 것을 사람이 어떻게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가는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훨씬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AC.50은 지금 그 전체 메커니즘을 설명하려는 글이 아니라 거듭나기 전과 후에 주님의 다스림이 사람에게 어떻게 다르게 나타나는지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3]에서는 상황이 바뀝니다. 사람이 거듭나면 천사들이 다스리고, 사람에게 모든 선과 진리를 불어넣으며 악과 거짓에 대해서는 두려움과 혐오를 일으키게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천사가 선과 진리를 만들어 주는 존재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다음 문장에서 천사들이 인도하기는 하지만 오직 사역자들로서 그렇게 할 뿐이며, 실제로 사람을 다스리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라고 분명하게 선을 긋습니다.

 

이 한 문장이 AC.50 전체를 읽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앞에서는 영과 천사들의 작용을 매우 강하게 말하지만, 그들을 독립된 주체로 세우지 않습니다. 천사들은 사역자이고, 주님께서 천사들과 영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십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수많은 중간 존재가 있어서 하나님은 간접적으로만 사람에게 접근하신다는 구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강조점은 오히려 그 모든 사역 가운데 실제로 다스리고 배열하시는 분은 주님 한 분뿐이라는 데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창1:26의 매우 유명한 질문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형상대로 내가 사람을 만들자가 아니라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라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실까요? AC.50은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먼저 복수형으로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고 한 것이며, 그러나 실제로 다스리고 배열하시는 분은 주님 한 분뿐이기 때문에 바로 다음 절에서는 단수형으로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AC.50에서 스베덴보리가 창1:26우리를 어떻게 이해하는지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여기서 우리를 여러 신들의 회의로 보지 않고, 주님과 그분을 섬기는 천사들의 사역이라는 관계 속에서 읽습니다. 그러나 창조와 거듭남의 실제 주체는 천사들이 아니라 주님 한 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사44:24을 인용합니다.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없이 땅을 펼쳤고.이 구절을 가져오는 직접 목적은 매우 분명합니다. ‘우리라는 복수형이 천사들도 창조의 공동 주체라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홀로 만물을 지으셨으며, 스베덴보리도 이어서 주님만이 다스리고 배열하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사44:24의 하늘과 땅 각각의 세부 속뜻을 여기서 추가로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이 인용은 무엇보다 주님 홀로라는 논증을 뒷받침합니다.

 

마지막 문장도 같은 균형을 확인합니다. 천사들 자신도 자기들에게는 아무 능력이 없으며 오직 주님에게서 오는 힘으로만 일한다고 고백한다는 것입니다. AC.50은 천사들의 역할을 매우 크게 말하면서도 동시에 천사들에게 어떤 독립된 능력도 돌리지 않습니다. 사람은 천사와 영들을 통해 영계와 천국에 연결되어 있지만, 생명의 근원도, 다스림의 근원도, 창조와 거듭남의 주체도 주님 한 분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현재 해설처럼 하나님의 형상 = 주님의 통치가 막힘없이 흐르는 상태라고 하나의 공식으로 정의하기보다 AC.50이 말하는 만큼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주의 형상이라는 말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것을 이해했다고 한 뒤, 그들이 알고 있던 인간의 영적 연결과 주님의 다스림을 하나의 예로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에게서는 천사들이 사역하고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창1:26우리의 형상대로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AC.50하나님의 형상이 단순히 사람의 외모가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동시에 이것을 단순히 인간의 도덕적 성품 몇 가지로도 축소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참된 영적 생명 전체가 주님에게 의존하고, 주님께서 천국과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시며 거듭나게 하신다는 더 큰 질서 안에서 형상을 바라봅니다. 다만 형상과 모양의 더 정확한 구별은 다음 AC.51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어지므로, 그 설명까지 여기서 미리 당겨 올 필요는 없습니다.

 

AC.50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이 가장 눈에 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글이 정말 강조하는 것은 명의 보이지 않는 존재가 사람 곁에 있다는 신기한 정보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기에게서 독립적으로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며, 그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주님과의 결합에 달려 있다는 것, 그리고 천사들과 영들의 모든 사역 배후에서 실제로 다스리고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주님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수형 우리뒤에 곧바로 단수형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하셨다가 이어집니다. 많은 사역자가 있어도 창조와 거듭남의 주체는 한 분이십니다.

 

심화

1. 영과 천사 누구이며, 둘씩 있는가?

 

AC.50, 심화 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심화1. ‘두 영과 두 천사’는 누구이며, 왜 둘씩 있는가? AC.50을 처음 읽으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문장 가운데 하나가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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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창1:26, ‘형상에서 모양으로 : 빛의 아들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나아가는 거듭남의 길’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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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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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뒤 곧바로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합니다. 무엇을 그렇게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며, 왜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우리가 대신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 AC.49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독자들이 감당할  없기 때문’, ‘신비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 ‘섭리적으로 감추어 두셨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확정한다면 그것은 AC.49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우리의 추론이 됩니다.

 

이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스베덴보리에게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문제에 관하여 여기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말할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는 그것을 AC.49에서는 아직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의도적으로 유보했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이상을 이 한 문장만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아무 의미 없는 편집상의 메모라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설명하려는 본문의 중심에 필요한 만큼 말하고, 다른 주제는 뒤로 남겨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AC.49의 중심은 태고교회의 현현 방식 자체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왜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문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직후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이어집니다. 따라서 AC.49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태고교회와 주님의 교통에 관한 모든 세부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태고교회의 사람 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자연계의 대화 장면처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주님께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그 현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각되었는지,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했는지, 얼마나 자주 그러했는지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영적 눈으로 보았다’, ‘내적 시야가 열렸다와 같은 세부를 AC.49의 설명인 것처럼 덧붙이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영계 경험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및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의 얼굴과 얼굴 교통이 정확히 같은 방식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서로 관련하여 연구할 수 있는 주제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 가장 안전한 답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주제에는  말할 것이 많이 있지만, 지금  자리에서는 그것을 다루지 않겠다.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그가 직접 밝히지 않았으므로 열린 채로 두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 독법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유보가 AC.49의 중심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놀라운 영적 경험 자체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짧게 언급하고 곧바로 더 중요한 문제,  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로 돌아갑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고, 자기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이라고 했습니다. AC.49에서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을 때에도 좋은 원칙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완성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한 문장을 만났다고 해서 관련 교리를 모두 끌어와 그 빈칸을 채우기보다, ‘지금  글이 말하는 만큼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읽으면 AC의 긴 흐름 속에서 어떤 주제가 처음에는 짧게 언급되고 이후 점차 자세해지는 과정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는 신비한 비밀을 암시하므로 우리가 그 내용을 추측해야 한다는 초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고 경계를 그은 문장입니다. 그 경계를 존중하면서 AC.49가 지금 밝히는 핵심, 곧 주님이 최고의 뜻에서 유일한 사람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는 데 집중하는 것이 이 문장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AC.49, 심화 2, ‘렘4:23, 25’

AC.49.심화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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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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