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9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뒤 곧바로‘이에대해서는드릴말씀이많지만,아직은때가아닙니다’라고 합니다.무엇을 그렇게 많이 말할 수 있다는 것이며,왜 지금은 그때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먼저 가장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우리가 대신 채우지 않는 것입니다.AC.49는‘아직은때가아니다’라고 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독자들이감당할수없기때문’, ‘신비주의에빠질위험이있기때문’, ‘섭리적으로감추어두셨기때문’이라고 이유를 확정한다면 그것은AC.49의 직접 설명이 아니라 우리의 추론이 됩니다.
이 문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첫째,스베덴보리에게는‘태고교회사람들과주님께서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말씀을나누셨고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는 문제에 관하여 여기 기록한 것보다 훨씬 더 말할 내용이 있었다는 것입니다.둘째,그는 그것을AC.49에서는 아직 자세히 다루지 않기로 의도적으로 유보했다는 것입니다.이 두 가지 이상을 이 한 문장만으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문장이 아무 의미 없는 편집상의 메모라는 뜻도 아닙니다.오히려AC를 읽을 때 중요한 독법 하나를 가르쳐 줍니다.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을 한 자리에서 한꺼번에 설명하지 않습니다.지금 설명하려는 본문의 중심에 필요한 만큼 말하고,다른 주제는 뒤로 남겨 두는 경우가 있습니다.AC.49의 중심은 태고교회의 현현 방식 자체를 상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왜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사람’이라고 불렀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실제로 문장의 흐름을 보면 이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고 한 직후‘이러한이유로그들은주님외에는누구도사람이라고부르지않았다’고 이어집니다.따라서AC.49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태고교회와 주님의 교통에 관한 모든 세부가 아니라, ‘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는 사실과 그것이 태고교회의‘사람’이해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라는 말을 우리가 익숙한 자연계의 대화 장면처럼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AC.49는 주님께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분명히 말하지만,그 현현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지각되었는지,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했는지,얼마나 자주 그러했는지는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따라서‘영적눈으로보았다’, ‘내적시야가열렸다’와 같은 세부를AC.49의 설명인 것처럼 덧붙이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을 스베덴보리 자신의 영계 경험과 곧바로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 여러 곳에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 및 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사실이지만,그것만으로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의‘얼굴과얼굴’교통이 정확히 같은 방식이었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서로 관련하여 연구할 수 있는 주제와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면‘아직은때가아니다’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좋을까요?가장 안전한 답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주제에는더말할것이많이있지만,지금이자리에서는그것을다루지않겠다.’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는 그가 직접 밝히지 않았으므로 열린 채로 두는 것입니다.이것은 모르는 것을 억지로 설명하지 않는 독법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이 유보가AC.49의 중심을 더 분명하게 해 줍니다.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놀라운 영적 경험 자체에 독자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 하지 않습니다.그것을 짧게 언급하고 곧바로 더 중요한 문제,곧‘사람’이라는 말의 의미로 돌아갑니다.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오직 주님만을‘사람’이라고 불렀고,자기 안에서도 주님에게서 온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사람의것’이라고 했습니다.AC.49에서 지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AC를 읽을 때에도 좋은 원칙이 됩니다.스베덴보리가 아직 설명하지 않은 것을 우리가 먼저 완성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흥미로운 한 문장을 만났다고 해서 관련 교리를 모두 끌어와 그 빈칸을 채우기보다, ‘지금이글이말하는만큼’을 먼저 정확히 이해하고 다음 설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그렇게 읽으면AC의 긴 흐름 속에서 어떤 주제가 처음에는 짧게 언급되고 이후 점차 자세해지는 과정도 더 잘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드릴말씀이많지만,아직은때가아닙니다’는 신비한 비밀을 암시하므로 우리가 그 내용을 추측해야 한다는 초대가 아닙니다.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스베덴보리 자신이 지금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고 경계를 그은 문장입니다.그 경계를 존중하면서AC.49가 지금 밝히는 핵심,곧 주님이 최고의 뜻에서 유일한‘사람’이시며 인간 안의 참된 사람됨 역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에 있다는 데 집중하는 것이 이 문장을 가장 안전하게 읽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창1:26)
AC.49
태고교회,곧그교회의사람들과주님께서는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말씀을나누셨는데,그때주님은사람의모습으로나타나셨습니다.이에대해서는드릴말씀이많지만,아직은때가아닙니다.이러한이유로,태고교회사람들은주님외에는누구도‘사람’(man)이라는호칭으로부르지않았습니다.그들은주님에게서나온것들만을‘사람’(men)이라고했고,자기자신을그호칭으로부르는일은하지않았습니다.오직자기안에서인식된것들,곧주님에게서왔다고퍼셉션된모든사랑의선과신앙의진리만을‘사람의것’(ofman)이라했습니다.그것들은주님에게서나왔기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 “man” 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 “men,” 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These they said were “ofman,” 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예언서들에서‘사람’(man)과‘인자’(thesonofman)는최고의뜻으로는주님을뜻하고,속뜻으로는지혜와총명을뜻하며,따라서거듭난모든사람을뜻하게됩니다.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 “man” and the “sonofman,” 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As in Jeremiah:
이사야에서‘사람’(man)은속뜻으로는거듭난사람을,최고의뜻으로는유일한사람으로서의주님을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 “man” 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다니엘에게나타나셨을때에는‘인자’(thesonofman),곧사람이라일컬음을받으셨습니다.이는같은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 “sonofman,” 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4] 주님께서는복음서에서도자신을자주‘인자’(thesonofman),곧사람이라하시며,다니엘에서와같이영광가운데오실것을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 “sonofman,” 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여기‘하늘구름’(Thecloudsofheaven)은말씀의문자적의미를뜻하고,‘능력과큰영광’(powerandgreatglory)은말씀의속뜻을뜻합니다.이속뜻은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오직주님과그분의나라만을가리키며,바로여기서속뜻의능력과영광이나옵니다. The “cloudsofheaven” 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andgreatglory” 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는 창1:26의 ‘우리가사람을만들고’에서 이제 ‘사람’이라는 말 자체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영적인간’이며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사람’이라고 하며, 더 근본적으로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AC.49의 대답은 매우 강렬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자기들 자신조차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면인간은사람이아니라는뜻인가?’ 그러나 AC.49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이나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과 태고교회의 영적 인식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사람됨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자기 안에서 ‘사람의것’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AC.49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사랑의모든선’과 ‘신앙의모든진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단순히 사람이 선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들이 ‘주님에게서왔다고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람의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주님에게서나왔기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48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9에서는 같은 원리가 ‘사람됨’에 적용됩니다.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가리키며,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지혜와 총명을 받아 거듭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만이참사람’이라는 말을 인간을 낮추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사람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생명을 만들어 내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갑니다. 따라서 이 말의 초점은 ‘누가인간자격이있는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참된영적생명의근원이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49의 첫 문장에는 또 하나 매우 놀라운 내용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얼굴을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해 ‘많이말할수있지만아직은때가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상상하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과, 바로 이것이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유보 문장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일으키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사람’과 ‘인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사람’과 ‘인자’는 ‘최고의뜻’에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에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모든 성경 인용을 읽는 열쇠입니다.
렘4:23,25에서 예레미야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이 없고 ‘사람이없다’고 말합니다. AC.49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라는 말이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의 속뜻을 지혜와 총명, 따라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사람이없다’는 표현 역시 그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함께 나오는 ‘공중의새가다날아갔다’는 표현도 앞의 AC.40에서 새가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된다고 설명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49는 여기서 예레미야 전체의 황폐 상태를 단계별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세밀하게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45:11-12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땅을만들고그위에사람을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속뜻의 ‘사람’을 거듭난 사람으로, 최고의 뜻의 ‘사람’을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과 연결합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자연계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의 ‘사람’이라는 표현에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겔1:26은 주님께서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보여 주는 직접적인 예로 인용됩니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사람의모양같은’ 형상을 봅니다. AC.49는 이 환상의 보좌나 남보석 등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태고교회사람들에게주님께서사람으로나타나셨다’고 한 것이 예언자들의 환상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최고의 뜻에서 ‘사람’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논증에 사용됩니다.
단7:13-14에서는 그 표현이 ‘인자’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니엘에게 보이신 분이 ‘인자’, 곧 ‘사람’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같은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인자의 왕국과 권세에 관한 모든 세부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자’라는 호칭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인용의 직접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복음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자주 ‘인자’라고 부르셨으며, 마24:30에서는 다니엘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49는 ‘사람’이라는 주제와 함께 말씀의 문자 의미와 속뜻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짧게 엽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구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큰영광’이 말씀의 속뜻을 뜻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오직주님과그분의나라만을가리키기’ 때문이며, 바로 거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AC.49가 직접 말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속뜻을깨닫는순간곧인자의재림이일어난다’는 식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이 확실히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전체적으로나부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심리나 도덕적 교훈을 흥미롭게 찾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사람’ 역시 결국 인간 자신에게서 설명이 완성되지 않고,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형상의 원형이신 주님을 보아야 한다는 방향이 여기서 열립니다.
이 점에서 AC.49는 앞의 AC.48과 다음 글들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49는 곧바로 인간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먼저 주님을 바라봅니다.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 참으로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도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위대함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하는 사람됨과 관계됩니다.
동시에 여기서 ‘거듭난사람만사람이고다른사람은사람이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사람의 사회적 가치나 존엄을 분류하는 글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이 최고의 뜻과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글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스베덴보리의 매우 깊은 인간론을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주장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결국 AC.49가 말하는 ‘사람’의 비밀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 안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소유라고 여기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사람’이라 불렀고, 주님에게서 온 것들만을 ‘사람의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서의 ‘사람’과 ‘인자’, 에스겔과 다니엘의 사람 형상, 복음서의 인자, 그리고 말씀의 구름과 영광까지 이어지는 모든 인용은 결국 이 중심을 향합니다.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의 참된 지혜와 총명과 사람됨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깁니다.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 25)
AC.48
이로부터사람이거듭남의다섯번째상태에있을때가분명해집니다.이때사람은이해에속한신앙의원리로말하며,그로써진리와선안에서자신을확증합니다.그가이때내놓는것들은생명이있는것들이며,그것들을가리켜‘바다의물고기’(fishesofthesea), ‘하늘의새’(fowloftheheavens)라합니다.사람이여섯번째상태에이르면,이해에속한신앙과,거기에서나온의지에속한사랑으로진리들을말하고선한일들을행합니다.그가이때내놓는것을‘생물’(livingsoul), ‘가축’(beast)이라합니다.그리고이때그는신앙으로뿐만아니라사랑으로도행동하기시작하므로, ‘하나님의형상’(imageofGod)이라하는영적인간이됩니다.이것이지금여기서다루는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 “fishesofthesea,” and the “fowloftheheavens.”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 “livingsoul,” and the “beast.”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 “imageofGod,” 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AC.48은 지금까지 이어진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차이를 짧고 분명하게 정리하는 글입니다. 특히 ‘다섯번째상태와여섯번째상태가실제로무엇이다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앞에서는 물고기와 새, 생물과 짐승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 놓고 두 상태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먼저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속한신앙의원리로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신앙으로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이미 ‘생명이있는것들’입니다. 그래서 다섯째 날의 ‘바다의물고기’와 ‘하늘의새’로 표현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를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지 않은 상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48은 이때 산출되는 것들을 분명히 ‘animate’, 곧 생명이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앞의 AC.39에서도 큰 광명체들이 켜진 뒤 사람이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에 와서 처음으로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이 나타나는 중심이 아직 주로 이해에 속한 신앙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이해에속한신앙으로부터,그리고거기에서나온의지에속한사랑으로부터진리를말하고선을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세밀한 변화가 있습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사랑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도 신앙은 그대로 있으며, 거기에 그 신앙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함께합니다.
그래서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의 차이를 단순히 ‘아는단계와행하는단계’라고만 나누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상태의 사람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AC.48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내적인 것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에서 말하며 그로써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처음 읽으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다섯째상태에는사랑이전혀없고여섯째상태에서갑자기사랑이생긴다는뜻인가?’ 그렇게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8은 거듭남 전체에서 사랑이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섯째 상태에서 사람이 ‘사랑으로도행동하기시작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이 글의 초점은 사랑의 최초 존재 여부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신앙과 함께 사랑이 실제 의지에 속한 원리로서 행동의 근원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기존 해설에서처럼 이를 ‘처음에는옳으니까해야한다고애쓰다가나중에는좋아서자연스럽게한다’는 예로 설명하면 어느 정도 감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AC.48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상태에 반드시 심한 억지와 갈등이 있고, 여섯째 상태에 이르면 모든 선행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AC.48이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과 갈등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AC.48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행동의근원’에 관한 변화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이 전면에 나타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과 더불어,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이제신앙으로부터뿐아니라사랑으로부터도행동하기시작한다’고 말합니다. ‘뿐아니라’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의 원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산출되는 것들이 창1:24-25의 ‘생물’과 ‘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앞의 AC.44-46에서 이미 이 짐승들이 의지에 속한 것들, 특히 애정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에서 여섯째 날의 생물과 짐승으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피조물의 종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신앙의 상태에서 의지에 속한 사랑까지 포함하는 상태로 깊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영적인간’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48의 절정입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형상’을 우리가 임의로 ‘하나님과작동방식이같아지는것’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자체가 그 이유를 간단히 제시합니다.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부터뿐아니라사랑으로부터도행동하기시작하기’ 때문에 영적 인간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형상’이라고 해서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여러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신적인 생명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과 사랑이 그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상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AC.47과의 연결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자기에게서인듯’ 산출하며,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8에서는 그 진행 가운데 여섯째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하게 되고, 사람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용어상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AC.48은 이 사람을 ‘영적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AC를 읽다 보면 ‘영적’과 ‘천적’이 서로 구별되는 더 세밀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적인간’이라는 말을 보고 곧바로 이후의 모든 영적·천적 구별을 이 한 문장에 끌어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상태에 이른 거듭난 사람을 ‘영적인간’, ‘하나님의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 창1:26이하에서 ‘형상’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어집니다.
AC.48은 결국 다섯째 상태를 낮추고 여섯째 상태만 참된 것으로 만드는 글이 아닙니다. 다섯째 상태도 이미 살아 있는 거듭남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이해가 진리를 알고 신앙으로 확증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나타나고, 사람은 신앙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는 ‘영적인간’, 곧 ‘하나님의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이 글의 흐름을 ‘신앙에서사랑으로’라고만 표현하기보다는 ‘신앙과사랑이함께삶이되는데로’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다섯째 날에 살아난 이해에 속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에는 의지에 속한 사랑과 함께 하나의 더 온전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창조의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 사이에서 AC.48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