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9.심화

1. 연한 , 맺는 채소, 가진 열매 맺는 나무 실제

 

AC.29 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에 대한 실제 예를 들어주세요. 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개인에 있어 어떤 게 tender herb이고, 어떤 게 herb yielding seed인지, 그리고 어떤 모습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인지 말이지요.

 

AC.29의 ‘연한 (tender herb), ‘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실제 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표현을 통하여 셋째 날에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처음 싹트고 점차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다만 한 가지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 단계는 아직 거듭남이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AC.29은 이때 나타나는 것들을 아직 ‘생명 없는 것들’이라고 부르며, 이 사람은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실제 예도 완성된 천적·영적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 회개 가운데 선과 진리가 처음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 직장에서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동료를 몹시 싫어합니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며칠 동안 분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흠을 말하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거나 읽는 가운데 ‘나는 사람이 잘못한 것만 보고 있는데, 안의 미움은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처음 생깁니다. 전에는 상대의 잘못만 보였는데 이제 처음으로 자기 안의 악을 조금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처음 돋아나는 것이 ‘연한 ’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아직 매우 약합니다. 그날은 ‘미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상대가 다시 자기를 자극하면 곧 화가 납니다. 그래도 이전과 다른 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전에는 자기 분노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내가 사람을 이렇게 미워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행동 전체를 바꿀 만큼 강하지 않고, 그 진리가 자기 삶을 지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씨앗으로부터 이전에는 없던 무엇인가가 연한 싹처럼 돋아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은 말씀을 더 배우고 자신의 상태도 조금씩 살펴봅니다. 단지 ‘미워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 상황에서 자기 분노를 억제하려고 합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을 때 말을 멈추어 보기도 하고, 상대에게 일부러 차갑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평소처럼 대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실패할 때도 많지만 이제 진리가 단순히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태를 ‘ 맺는 채소’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연한 풀보다 한 단계 더 진행된 것입니다. 선과 진리가 조금 더 형태를 갖추고, 사람의 실제 삶 속에서 쓰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내가 많이 변했다’, ‘나는 이제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분노를 참은 자기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선한 행동이 나타난다고 해서 아직 그 선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의 행동에는 이전보다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상대가 잘못하면 즉시 보복하거나 험담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멈추는 일이 많아집니다. 상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요한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이라도 공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속에서 미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미움이 행동 전체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진리가 실제 선한 행동이라는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한 실제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이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므로 이미 참된 신앙의 생명에 들어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은 오히려 이 단계에서도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셋째 날의 식물들은 아직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선한 열매가 실제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마음 깊이 인정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다음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교회에서의 봉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설교를 듣다가 ‘나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직 실제 행동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을 ‘연한 ’과 같은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실제로 시간을 내어 누군가를 돕고, 자기 편의를 조금 포기하면서 봉사하기 시작합니다. 선에 관한 진리가 행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 맺는 채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선한 행동이 일회적인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생활 가운데 반복되어 실제 유익을 만들어 낸다면 ‘열매 맺는 나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동기는 아직 혼합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도 있고, ‘나는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만족이 있을 수도 있으며, 자기가 선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붙들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불완전한 상태 때문에 시작된 선을 모두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계속 이끄시면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차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앞의 AC.25에서 살펴본 ‘꺾지 않고 굽히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연한 맺는 채소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단순히 ‘좋은 생각진리 이해완성된 선한 성품’이라는 세 단계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의 중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아 사람 안에서 처음 연약한 것이 돋아나고, 그것이 점차 더 유용한 것이 되며, 마침내 실제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아직 셋째 날, 곧 ‘회개의 상태’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큰 위로가 됩니다. 자기 안에 겨우 ‘연한 ’ 같은 변화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악을 오늘 처음 악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미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직 자주 실패하더라도 진리에 따라 실제 행동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면 그 연한 것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에서 실제 선한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더 깊은 단계로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과정에서 사람은 한 가지를 배워 가야 합니다. ‘’인 사람이 씨앗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은 씨앗을 받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지만, 천적 씨앗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이렇게 선해졌다’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그 더 깊은 생명을 향하여 자라고 있는 거듭남의 첫 열매들입니다.

 

 

 

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AC.29.심화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위 심화 1의 세 번째 단계인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 즉 ‘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 선한 행동이 열매처럼 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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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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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둘째를 보살필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그리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아래 SC.49와 같은 걸로 봐도 되나요?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다만 이 비유는 단순히 ‘섭리를 기다리셨다’는 설명을 넘어서, ‘회개와 신앙의 본질적 구조’를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한 걸음 더 깊이 이해하시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15장의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단순한 무관심이나 방치가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 강제가 아니라 자유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아들의 삶을 관리하거나 도왔다면, 아들은 여전히 자기 욕망 속에서 살면서도 고통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에서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15:17)라는 결정적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외부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변화가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난 자발적 각성’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거듭남은 반드시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선을 주시고 이끄시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도록, 즉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개입하여 억지로 끌어당기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너무 깊어서, 아들이 진짜로 돌아오도록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요셉 이야기에서 말씀드린 ‘재회보다 먼저 변화’라는 질서와 정확히 같은 결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고통의 역할입니다. 탕자는 돼지 치는 자리까지 내려가고, 배를 채우지 못하는 궁핍을 겪습니다. 이 과정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뒤에서 계속 돌봐주었다면, 그는 ‘멀리 떠난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회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아버지가 개입하지 않은 것은 방치가 아니라,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 이야기에서 형제들이 기근을 겪도록 허락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이야기에는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에서는 ‘섭리의 역사’가 중심이라면, 탕자 비유에서는 ‘아버지의 마음’이 더 전면에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보내지 않지만, 대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가’ 맞이합니다. 즉, ‘기다림과 환대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보내지 않는 것은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돌아올 때 완전히 받아주기 위한 준비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개입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때로 우리 생각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 살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돌아오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깊은 방식으로 돕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탕자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이유도 요셉 이야기와 같은 맥락, 곧 ‘변화를 먼저 이루시는 주님의 질서’로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기다림은 차가운 방관이 아니라,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된 사랑의 기다림’이라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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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심화

1. ‘스베덴보리가 AC 초기부터 여러 인용 구절의 속뜻을   있었던 이유

 

AC.28을 처음 읽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창세기 1장을 설명하는 AC.28인데,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 말씀의 여러 곳을 자유롭게 오가며 그 구절들을 겉뜻이 아니라 속뜻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해설하면서 그때그때 처음 속뜻을 알아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혹시 글을 쓰는 동안 주님께서 필요한 성경 구절을 하나씩 생각나게 하시고 그 뜻까지 알려 주셨던 것일까요?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글 번호 순서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순서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28이 창세기 주석의 스물여덟 번째 글이라는 사실은 독자인 우리가 설명을 스물여덟 번째 단계까지 읽었다는 뜻이지, 스베덴보리가 그때 비로소 스물여덟 번째 속뜻을 발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그가 이미 열렸다고 말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펼쳐 보이는 저술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자신의 학문적 연구나 추론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곳곳에서 그는 이전에는 누구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말씀의 아르카나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렸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것들을 기록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기 이해를 존중해서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독창적인 상징 해석법을 만들어 성경에 적용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어 보여 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고 있으면 주님께서 곁에서 다음에 인용할 성경 구절을 하나씩 불러 주셨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28은 자신의 집필 과정이 그런 방식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계시와 조명 아래 기록했다는 것과, 매 문장과 인용 구절을 받아쓰기처럼 직접 전달받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그 과정을 세밀하게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AC.28에서 여러 예언서와 시편을 한꺼번에 인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말씀의 속뜻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이해가 있습니다. 속뜻은 창세기에만 따로 존재하는 암호 같은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같은 대상과 표현이 말씀 안에서 같은 영적 실재와 연결되는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을 설명하면서 이사야의 물, 스가랴의 물, 시편의 물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AC.28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여러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한 뒤 사11:9, 19:5-6, 2:6-7, 14:7-8, 69:33-34 등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그리고 이 그릇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슥12:1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구절을 독립적으로 길게 주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성경책에 등장하는 동일하거나 관련된 표현들이 하나의 영적 의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독법을 알려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서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의 여러 구절을 인용할 때, 그것들을 단순한 참고 성구 정도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그 인용들을 통하여 말씀의 한 부분에서 발견되는 영적 의미가 다른 부분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를 계속 읽다 보면 하나의 표현에 대한 설명이 여러 성경책을 가로질러 점점 풍성해지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의 상응을 알면 말씀의 모든 구절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물은 지식이다라는 공식을 외운 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물에 무조건 같은 한 단어를 대입하면 속뜻이 자동으로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과 연결되는 다른 표현들, 다루어지는 주제와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만든 상징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는 영적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주석이 아직 AC.28인데 어떻게 다른 성경의 속뜻까지 알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AC의 글 번호는 스베덴보리가 속뜻을 발견해 간 시간 순서가 아닙니다.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열렸다고 증언하며,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는 그것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를 따라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말씀 전체가 하나의 상응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한 표현을 설명하면서 다른 성경책의 관련 구절들을 함께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순간 주님께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구절을 생각나게 하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답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모든 내적 의미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돌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실제 집필 순간마다 주님의 조명이 어떤 심리적·의식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을 더 정확하게 존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AC.28의 수많은 성경 인용은 오히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한 권의 숨은 뜻만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한 표현을 통하여 말씀의 여러 부분이 어떻게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지를 조금씩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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