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즉시 영의 상태로 깨어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는 순간 어떤 긴 공백 기간이 지나야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곧바로 영적인 삶으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Heaven and Hell’와 ‘Arcana Coelestia’에서 매우 분명하게 설명되는 내용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죽음은 ‘존재의 끝’이 아니라 ‘상태의 변화’입니다. 육체의 기능이 멈추면 인간의 겉 사람 가운데 육체와 관련된 부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속 사람, 곧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도하는 중심은 계속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을 ‘몸이라는 옷을 벗는 것’과 비슷하게 설명하기도 합니다. 몸이라는 외적 도구를 내려놓을 뿐, 사람 자신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뜻입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사람이 숨을 거두면 곧바로 영계에서 깨어납니다.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주변 환경이 너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며,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상황을 깨닫게 된다고 기록합니다.
이 초기 단계에서는 천사들이 새로 온 영을 돌보는 역할을 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매우 따뜻하게 묘사합니다. 천사들이 새로 온 사람에게 평안한 상태를 주고, 두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보호하며, 점차 새로운 상태에 적응하도록 돕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은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태라기보다, 오히려 조용한 전환 과정으로 설명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죽은 후에도 인간의 모습과 성격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갑자기 다른 존재로 변하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방식, 사랑하는 것, 성격의 방향은 계속 이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사람이다’라고 말합니다. 다만 육체 대신 영적 몸, 즉 영체로 살아가게 된다는 점만 다릅니다.
이 영적 몸은 물질적인 몸과는 다르지만, 형태와 기능은 매우 비슷하다고 설명됩니다. 그래서 영계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보고, 이야기하고, 움직이며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의 사람들도 눈, 귀, 얼굴, 손 등 사람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것이 물질이 아니라 더 미세한 영적 실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 직후의 상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보면, 처음에는 사람이 비교적 평온한 상태에 머무른다고 설명됩니다. 그 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속 사람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지상에서 겉으로 숨겨져 있던 생각과 사랑의 방향이 점차 분명해집니다. 이 과정 속에서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존재들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됩니다.
이 점이 스베덴보리 설명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외부에서 강제로 보내지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사랑과 성향이 자연스럽게 끌려가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천국의 삶에 끌리고, 자기 사랑과 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와 비슷한 상태로 향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후 세계는 인간의 내면이 드러나는 세계라고 설명됩니다.
이 모든 설명을 종합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죽음의 그림은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것과 조금 다릅니다. 그는 죽음을 긴 잠이나 무의식의 상태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로운 환경에서 깨어나는 순간으로 설명합니다. 마치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 가는 것처럼, 삶의 형태가 바뀌지만, 존재 자체는 계속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글에서는 죽음이 끝이라는 느낌보다 ‘연속’이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인간의 삶은 지상에서 시작되어 사후 세계로 이어지는 하나의 긴 여정입니다. 육체의 삶은 그 여정의 첫 단계일 뿐이며, 이후의 삶은 그 방향이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단계라고 설명됩니다.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이해할 때 매우 핵심적인 질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계를 보았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 두 가지를 떠올립니다. 하나는 꿈이나 환상 같은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일종의 신비 체험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방식은 그 둘과 조금 다릅니다. 그는 영계를 ‘상상 속에서 본 것’이 아니라 ‘감각이 열려 실제 세계처럼 인식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인간의 감각 구조부터 이해하면 좋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두 가지 인식 차원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자연적 감각입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는 감각입니다. 다른 하나는 영적 감각입니다. 이 감각은 평소에는 닫혀 있지만, 영계와 연결될 때 작동하는 감각입니다. 그는 인간이 본래 이 두 차원과 연결된 존재라고 보았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 두 세계 가운데 자연계만 인식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앞에 있는 물질계만 실제라고 느낍니다. 그러나 영계 역시 실제로 존재하며, 인간은 본래 그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연결이 평소에는 의식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뿐입니다.
그가 말하는 ‘영적 감각이 열린다’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감각이 의식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상상이나 꿈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감각 영역이 열리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계를 볼 때도 몸은 그대로 자연계에 있었고, 동시에 영계의 존재들을 보고 들을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이것을 ‘두 세계에 동시에 깨어 있는 상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물질계보다 덜 실제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영계가 더 근본적인 세계라고 설명합니다. 자연계는 그 세계의 표현이거나 결과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사나 영들을 보았을 때 그것을 흐릿한 환영처럼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보는 것처럼 분명하게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여러 저작들, 특히 ‘Heaven and Hell’에서는 이 점을 여러 번 강조합니다. 그는 천사들과 대화했고, 그들의 사회와 생활을 관찰했으며, 인간이 죽은 후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신비 체험처럼 묘사하지 않고, 관찰 보고처럼 매우 차분하게 기록합니다. 마치 새로운 나라를 여행하고 돌아와 그 나라의 문화와 제도를 설명하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감각은 사실 우리가 완전히 낯선 개념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꿈을 꿀 때, 꿈속에서는 눈을 감고 있어도 장면을 보고 사람들과 이야기합니다. 물론 꿈은 무의식의 활동이지만, 그것은 인간에게 눈, 귀와는 다른, 또 하나의 인식 방식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감각을 꿈과 동일시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에게 자연 감각 외의 다른 인식 능력이 있다는 점을 설명할 때, 이런 비유가 도움이 됩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라디오를 생각해 보십시오. 공기 속에는 많은 전파가 있지만, 라디오 수신기가 켜지기 전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듣지 못합니다. 수신기가 맞춰지면 갑자기 소리가 들립니다. 전파가 그 순간에 생긴 것이 아니라, 원래 존재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감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의식도 이와 비슷하다고 설명합니다. 영계는 항상 존재하지만, 우리의 의식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경험을 ‘새로운 세계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세계를 보게 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라 허락입니다. 그는 반복해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눈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위해 잠시 허락된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태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나처럼 영계를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인간의 삶에서 더 중요한 것은 영계를 보는 능력이 아니라,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강조합니다. 영계를 보는 것은 특별한 사명과 관련된 일이지만, 모든 사람이 살아가야 할 길은 선과 진리를 선택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정리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 감각이 열린다’는 것은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 인간에게 잠재해 있던 또 하나의 인식 차원이 의식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는 자연계와 영계를 동시에 인식하는 상태에서 살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 경험 자체보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질서와 진리를 설명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그가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그가 무엇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했는가’입니다. 그의 목적은 신비 체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신앙, 그리고 성경의 의미를 더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참으로그러하다는사실은주님으로부터가아니고서는아무도알수없습니다.그러므로미리말씀드릴것은,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저는이제수년동안끊임없이,중단됨없이영들과천사들과함께있으면서그들이말하는것을듣고,또저도그들과말할수있도록허락받았다는것입니다.이렇게하여저는지금까지어떤사람에게도알려진적이없고,그의생각속에조차들어온적이없는사후세계의놀라운것들을듣고볼수있었습니다. 저는여러종류의영들에관하여,죽음이후영혼들의상태에관하여,지옥곧불신앙가운데있는자들의비참한상태에관하여,천국곧신앙안에있는자들의복된상태에관하여,그리고특히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신앙의교리에관하여가르침을받았습니다.이러한주제들에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로이어지는글들에서더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 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 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 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 nor into his idea. 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hell, 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 heaven, 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 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 on which subjects,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5는 짧은 서문 AC.1-5의 마지막 글이면서, 앞의 네 글과는 성격이 조금 다릅니다. AC.1-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속뜻이 있으며, 그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고, 문자와 내적 의미의 관계가 인간의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관계와 같으며, 창세기 첫 장들이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이것을어떻게알았는가?’ AC.5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그의 첫 번째 대답입니다.
첫 문장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참으로그러하다는사실은주님으로부터가아니고서는아무도알수없습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관한 지식의 궁극적인 출처를 자기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인간의 지성과 학문적 연구만으로 발견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앞으로 밝히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해석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알게 된 것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따라서 AC.5는 단순한 영계 체험담의 서두라기보다, 앞으로 자신이 말할 것의 출처에 관한 선언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어지는 표현에서도 같은 태도가 나타납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얻었다고 말하기보다 ‘주님의신적자비로말미암아’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경험이 실제적이었다는 매우 강한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그 경험의 원인을 자기 능력이나 공로에 돌리지 않는 태도입니다. ‘주님의신적자비’라는 표현은 이 짧은 AC.5안에서도 처음과 마지막에 사실상 글 전체를 감싸고 있습니다.
‘수년동안끊임없이,중단됨없이’라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어느 날 잠깐 환상을 보았거나 꿈속에서 영적인 광경을 경험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상당한 기간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하며 듣고 말하는 상태가 계속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후 AC에 등장하는 영계에 관한 수많은 기록을 이해할 때에도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단편적인 환상이나 상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그러므로그의모든주장은참이다’라고 결론 내리는 것과 ‘그가무엇을주장하는지를정확히이해하는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AC.5는 독자에게 자신의 경험을 강제로 증명하려는 단락이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자신이 무엇을 근거로 말하는지를 먼저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 읽는 독자는 이 단계에서 그의 영계 경험을 즉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기보다, 우선 ‘저자는자신이이런경험을주님으로부터허락받았다고주장하며이책을쓰고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이해하고 이후의 내용을 따라가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보고 들었다고 하는 내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단순히 ‘천국을보았다’고만 하지 않습니다. ‘여러종류의영들’, ‘죽음이후영혼들의상태’, ‘지옥’, ‘천국’, 그리고 ‘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신앙의교리’를 차례로 열거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AC곳곳에 삽입될 영계 기록들의 주요 주제를 미리 보여 주는 작은 목차와도 같습니다. 실제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속뜻을 해설하는 글 사이사이에 사후세계와 영들, 천국과 지옥, 인간의 영적 구조 등에 관한 기록을 광범위하게 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죽음이후영혼들의상태’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만 떼어 읽으면 인간이 지상에서는 몸을 가진 존재였다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영적인 존재가 되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스베덴보리의 인간론을 따라가면 인간은 지상에서도 본질적으로 영적 존재이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살아간다는 설명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은 인간이 처음 영이 되는 사건이라기보다 물질적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영적 생명을 계속 살아가는 전환입니다. 따라서 AC.5의 ‘soulsafterdeath’는 그 이후의 가르침 전체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옥을 ‘불신앙가운데있는자들의비참한상태’, 천국을 ‘신앙안에있는자들의복된상태’라고 표현한 것도 이후 AC를 읽으면서 점차 깊어질 부분입니다. 여기서 ‘신앙’을 단순히 어떤 교리를 머리로 인정하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의 관계를 계속 설명하며, 사랑과 삶에서 분리된 신앙이 참된 신앙일 수 있는지를 매우 깊이 다룹니다. 따라서 이 짧은 서문의 ‘신앙있는자’와 ‘신앙없는자’를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종교적 소속이나 교리 동의 여부로 미리 고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신앙의교리’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앞으로 제시할 신앙의 교리를 자기 개인의 신학 체계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이 ‘온천국에서인정되고있는’ 교리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매우 큰 주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문장을 과장해서 확대하기보다, 그가 이후 실제로 무엇을 ‘신앙의교리’라고 설명하는지 AC를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5에서는 그 내용을 아직 상세하게 제시하지 않고 앞으로 더 말하겠다고만 예고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AC.5가 말씀의 속뜻에 관한 계시와 영계 경험을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천사들과 교통했다고 해서 ‘천사들에게창세기의속뜻을배워적었다’고 단순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의 첫 문장은 지식의 궁극적 출처를 ‘주님으로부터’라고 밝히고, 이어지는 문장에서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을 통하여 사후세계에 관한 여러 사실을 듣고 보았으며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모든 것을 ‘천사들이스베덴보리에게가르쳐준신학’으로 압축하는 것은 이 단락 자체보다 더 나아간 설명이 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를 읽는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그의 영계 경험을 흥미로운 초자연적 현상 자체로 소비하면 AC의 중심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영계에 관한 모든 기록을 주변적인 장식으로 제거해 버려도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저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기록을 그가 제시하는 전체 질서 안에서 읽는 것입니다. 영계에 관한 지식 역시 결국 주님과 말씀, 천국과 교회, 인간의 거듭남과 영원한 삶을 이해하는 데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AC.5에서 가장 먼저 기억할 말은 ‘영들과천사들’보다 오히려 ‘주님의신적자비’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놀라운 경험을 말하면서도 그 경험의 출처와 허락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앞으로 말하려는 사후세계의 여러 사실과 신앙의 교리 역시 자기 자신을 중심에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알려지고 허락된 것을 전하려는 것으로 제시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5는 하나의 짧지만 잘 짜인 서문을 이룹니다. AC.1은 말씀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AC.2는 그 말씀의 생명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온다고 밝힙니다. AC.3은 문자와 속뜻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합니다. AC.4는 그 원리를 창세기에 적용하여 창세기 1장이 속뜻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AC.5는 ‘그것을어떻게알수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그 지식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자신에게 영적 세계와의 특별한 교통이 허락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제 서문은 끝나고 AC.6부터 창세기 1장의 실제 해설이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조의 여섯 날을 인간의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인 상태로 개관한 뒤, 창1:1부터 말씀의 표현 하나하나를 풀어 갑니다. 따라서 AC.5는 단순히 ‘스베덴보리가영계를보았다’는 놀라운 이야기로 서문을 끝내는 글이 아닙니다. 독자가 이제부터 읽게 될 방대한 해설이 어떤 주장 위에 서 있는지를 밝히고, 그 문턱에서 다시 한번 모든 것의 근원을 ‘주님의신적자비’에 두는 글이라고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