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8 심화

1. ‘스베덴보리가 AC 초기부터 여러 인용 구절의 속뜻을   있었던 이유

 

AC.28을 처음 읽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창세기 1장을 설명하는 AC.28인데,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학개, 스가랴, 시편 등 말씀의 여러 곳을 자유롭게 오가며 그 구절들을 겉뜻이 아니라 속뜻의 근거로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해설하면서 그때그때 처음 속뜻을 알아 간 것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혹시 글을 쓰는 동안 주님께서 필요한 성경 구절을 하나씩 생각나게 하시고 그 뜻까지 알려 주셨던 것일까요?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의 글 번호 순서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순서를 동일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AC.28이 창세기 주석의 스물여덟 번째 글이라는 사실은 독자인 우리가 설명을 스물여덟 번째 단계까지 읽었다는 뜻이지, 스베덴보리가 그때 비로소 스물여덟 번째 속뜻을 발견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는 그가 이미 열렸다고 말하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에 따라 체계적으로 펼쳐 보이는 저술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자신의 학문적 연구나 추론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곳곳에서 그는 이전에는 누구의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던 말씀의 아르카나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렸다고 말하며, 자신에게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허락된 것들을 기록한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그의 자기 이해를 존중해서 말한다면, 그는 자신이 독창적인 상징 해석법을 만들어 성경에 적용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열어 보여 주신 말씀의 내적 의미를 기록한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스베덴보리가 글을 쓰고 있으면 주님께서 곁에서 다음에 인용할 성경 구절을 하나씩 불러 주셨다는 식으로 구체적인 장면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28은 자신의 집필 과정이 그런 방식이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계시와 조명 아래 기록했다는 것과, 매 문장과 인용 구절을 받아쓰기처럼 직접 전달받았다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그 과정을 세밀하게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AC.28에서 여러 예언서와 시편을 한꺼번에 인용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말씀의 속뜻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매우 중요한 이해가 있습니다. 속뜻은 창세기에만 따로 존재하는 암호 같은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같은 대상과 표현이 말씀 안에서 같은 영적 실재와 연결되는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을 설명하면서 이사야의 물, 스가랴의 물, 시편의 물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것입니다.

 

AC.28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여러 지식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한 뒤 사11:9, 19:5-6, 2:6-7, 14:7-8, 69:33-34 등을 차례로 인용합니다. 그리고 이 그릇을 의미한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슥12:1을 인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구절을 독립적으로 길게 주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성경책에 등장하는 동일하거나 관련된 표현들이 하나의 영적 의미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AC를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독법을 알려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의 어떤 단어를 설명하면서 이사야, 예레미야, 시편, 복음서 등의 여러 구절을 인용할 때, 그것들을 단순한 참고 성구 정도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그 인용들을 통하여 말씀의 한 부분에서 발견되는 영적 의미가 다른 부분과도 연결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AC를 계속 읽다 보면 하나의 표현에 대한 설명이 여러 성경책을 가로질러 점점 풍성해지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다고 하나의 상응을 알면 말씀의 모든 구절을 기계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물은 지식이다라는 공식을 외운 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물에 무조건 같은 한 단어를 대입하면 속뜻이 자동으로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과 연결되는 다른 표현들, 다루어지는 주제와 상태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만든 상징표가 아니라 말씀 전체 안에서 질서 있게 연결되는 영적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주석이 아직 AC.28인데 어떻게 다른 성경의 속뜻까지 알고 있었을까?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할 수 있겠습니다. AC의 글 번호는 스베덴보리가 속뜻을 발견해 간 시간 순서가 아닙니다. 그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열렸다고 증언하며,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는 그것을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순서를 따라 펼쳐 보입니다. 그리고 말씀 전체가 하나의 상응적 질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창세기의 한 표현을 설명하면서 다른 성경책의 관련 구절들을 함께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순간 주님께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구절을 생각나게 하셨는가?라는 질문에는 우리가 아는 것 이상으로 답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모든 내적 의미의 근원을 자기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 돌렸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실제 집필 순간마다 주님의 조명이 어떤 심리적·의식적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경계를 지키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 자신의 증언을 더 정확하게 존중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보면 AC.28의 수많은 성경 인용은 오히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우리는 창세기 한 권의 숨은 뜻만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의 한 표현을 통하여 말씀의 여러 부분이 어떻게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지를 조금씩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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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총리가 된 이후 얼마든지 사람을 보내 사사로이 가나안 아버지를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이유가 있을까요?

 

이 질문은 단순한 가족사 문제가 아니라, ‘요셉 이야기 전체의 영적 구조와 주님의 섭리’를 어떻게 보느냐와 깊이 연결된 질문입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왜 안 그랬을까?’라는 아쉬움이 들지만, 속뜻으로 들어가면, 오히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았구나’ 쪽이 더 중심이 됩니다.

 

먼저 문자적 차원에서 보면, 요셉은 총리가 된 직후 바로 개인적인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애굽 전역을 7년 풍년 동안 조직하고 저장 체계를 만드는 일은 국가적 규모의 사명이었고, 이어지는 7년 흉년은 실제로 수많은 생명이 달린 문제였습니다. 즉 요셉은 단순한 고위 관료가 아니라, ‘열방의 생명을 보존하는 도구’로 세워진 상태였기 때문에, 개인 감정이나 가족 문제를 우선순위에 두기 어려운 위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음만 먹으면 사람을 보내 안부를 확인하는 정도는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섭리적, 영적 이유’입니다. 요셉 이야기의 핵심은 단순한 재회가 아니라, ‘형제들의 변화와 질서의 회복’입니다. 만약 요셉이 먼저 사람을 보내 아버지와 형들을 불러왔다면, 형제들은 여전히 과거의 상태, 그러니까 질투, 거짓, 자기중심성 등에 머물러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에서는 흉년이라는 외적 압박을 통해 형제들이 애굽으로 내려오고, 그 과정 속에서 양심이 깨어나고, 결국 유다가 자신을 내어놓는 자리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즉, ‘외적 재회보다 먼저 내적 변화가 이루어져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순서입니다.

 

이 점에서 요셉은 단순히 감정을 참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섭리의 질서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사사로운 효심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넘어서는 더 큰 질서, 곧 주님의 역사에 자신을 맡긴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는 일부러 아버지를 외면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내가 나설 때가 아니다’라는 더 깊은 인도 속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요셉 이야기에서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오는 것’ 자체가 상징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은 교회의 상태, 애굽은 지식과 외적 질서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이 이동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내적 상태가 외적 삶과 결합되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이 과정은 반드시 주님의 타이밍과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인간이 임의로 앞당길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만약 요셉이 먼저 개입했다면, 이 전체 구조, 즉 ‘진리(요셉)가 선(야곱)과 다시 결합되는 질서’가 흐트러졌을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왜 하나님은 빨리 해결해 주지 않으시는가’를 묻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신 후에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요셉이 아버지를 바로 부르지 않은 것은 냉정함이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사랑, 곧 모두가 살고, 모두가 변화되는 길을 기다리는 사랑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요셉이 사람을 보내지 않은 이유는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큰 섭리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재회보다 먼저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도 묻습니다. ‘지금 당장 해결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이루시는 온전한 질서를 기다릴 것인가?’

 

 

 

SC.50, 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의 경우

눅15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둘째를 보살필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그리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아래 SC.49와 같은 걸로 봐도 되나요?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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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8, ‘자신의 안티들에게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스베덴보리는 자기를 비난하고, 모욕하고, 그리고 멀리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했나요? 혹시 구체적인 에피소드들이 있을까요? 스베덴보리, 곧 에마누엘 스베덴보리의 삶을 보면, 지금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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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 심화

1.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라는 표현은 처음 읽는 독자라면 자연스럽게 멈추게 되는 대목입니다. 사람의 기억 속에 들어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기억해 내는 것까지 주님께서 하나하나 직접 꺼내 주신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인간이 배우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먼저 AC.27이 직접 말하는 범위부터 분명히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글은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으로 유입되고,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온 것들은 그곳에서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 저장되며,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가 AC.27이 직접 밝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 어떤 생각이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그것을 주님께서 직접 꺼내시는 것인지까지 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표현에서 한 가지 중요한 원리는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 필요한 선과 진리는 사람이 한 번 배우고 기억했다고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받아들여 기억 속에 간직하게 된 것들을 이후의 삶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진리를 지금 배우면서도 그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반드시 헛된 것은 아닙니다. 지금은 기억 속의 지식으로만 머물러 있던 것이 훗날 삶의 어떤 상황에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될 수도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하나의 예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래전에 성경 말씀 한 구절을 읽었습니다. 당시에는 별다른 감동 없이 지나갔는데, 여러 해 뒤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그 말씀이 문득 떠오르고, 이전과 전혀 다르게 마음에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 말씀 때문에 자신의 태도를 돌아보거나 어떤 행동을 바꾸게 될 수도 있습니다. AC.27이 바로 이런 구체적인 경우를 예로 들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 속에 저장된 것이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는 말을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는 예입니다.

 

설교나 성경 공부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내용이 어느 순간 다른 말씀과 연결되어 떠오르거나, 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말씀이 어떤 일을 겪은 뒤 새롭게 이해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 역시 모든 경우에 지금 주님께서 기억을 직접 꺼내셨다고 단정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우리의 기억과 지식도 주님의 섭리 밖에 있는 독립된 영역이 아니며,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할은 없어지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실제로 말씀을 읽고, 진리를 배우고, 생각하고, 기억하며, 그것에 따라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에서 사람이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as of oneself) 선을 행하고 진리를 따라야 하면서도, 실제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이심을 인정해야 한다는 원리를 반복해서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불러내신다는 말을 인간의 자유와 활동을 지워 버리는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사람은 창고를 채우고 주님은 그것을 꺼내 쓰신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나누어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배우고 기억하는 능력 자체도 주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사람에게 보존되는 것 가운데에는 그가 의식적으로 공부해서 기억한 것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는 리메인스의 가르침까지 생각하면, 주님의 준비와 보존은 사람이 의식하는 범위보다 훨씬 깊습니다. AC.27에서는 그 모든 문제를 미리 펼치기보다, 우선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간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주님에 의해 필요에 따라 사용된다는 사실에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주님에 의해 불러내어진다는 표현은 인간의 기억 활동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이 배우고 간직한 진리가 단순한 지식으로만 끝나지 않고, 주님의 섭리 안에서 그의 거듭남을 위해 쓰일 수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배운 진리가 오늘 곧바로 삶이 되지 않았다고 해서 낙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진리를 배우고 받아들이며 그것에 따라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언제 어떤 방식으로 더 깊이 사용하실지는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27의 이 짧은 표현은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정반대입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배우고 생각하고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있는 선과 진리의 생명과 그 선한 쓰임의 궁극적인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주님께서 그것을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시는 이 질서 안에서, 기억 속의 지식도 단순한 저장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하나의 수단이 됩니다.

 

 

 

AC.27, 창1:9,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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