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1:27)

 

AC.53

여기서 형상(image) 언급되는 이유는, 이해에 속한 신앙을 자기 형상(his image)이라 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을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서 나옵니다. The reason whyimageis here twice mentioned is that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is calledhis image”; whereas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and which in the spiritual man comes after, but in the celestial man precedes, is called theimage of God.

 

해설

AC.53은 매우 짧습니다. 그러나 바로 앞 AC.51-52에서 설명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신앙과 사랑, 이해와 의지의 관계를 창1:27의 문장 자체와 연결하는 중요한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번에 주목하는 것은 형상이라는 말이 한 절 안에서 왜 두 번 반복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1:27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라고 합니다. 영어로도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이라고 하여 image가 두 번 나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같은 뜻을 강조하기 위한 단순한 반복으로 읽기 쉽지만, 스베덴보리는 두 번의 형상을 서로 구별하여 읽습니다.

 

첫 번째 형상’, 자기 형상(His image)이해에 속한 신앙을 가리키고,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의지에 속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것이 AC.53이 직접 말하는 중심입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 자기 형상이라는 우리말 표현입니다. 한국어만 보면 자기가 사람 자신을 가리키는 것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형상은 아직 사람이 자기 이해와 판단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영어 원문은 His image이며 여기서 His는 사람(man)이 아니라 하나님(God)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그분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는 문장입니다. 따라서 첫 번째 자기 형상을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나 proprium과 연결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리키는 표현 안에서 스베덴보리는 첫 번째를 신앙, 두 번째를 사랑과 연결할까요? 바로 앞 AC.51-52의 설명이 배경이 됩니다. AC.51에서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구별했고, AC.52에서는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고 설명했습니다. AC.53은 그 구별을 창1:27의 두 번 반복되는 형상에 적용합니다.

 

첫 번째는 이해에 속한 신앙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보아 온 영적 인간의 질서와 관계됩니다. AC.52에서 영적 인간을 나타내는 창1:26의 순서에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하는 물고기와 새가 먼저 나오고, 의지와 애정에 관계되는 짐승이 뒤에 나왔습니다. 이제 AC.53도 같은 질서를 이어서, 이해에 속한 신앙을 첫 번째 형상과 연결합니다.

 

두 번째는 의지에 속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사랑이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지만,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선다고 합니다. 이 한 문장은 AC.52의 설명을 거의 압축해서 다시 말한 것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앞섭니다.

 

여기서 뒤따른다앞선다는 표현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AC.48에서 이미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을 신앙만 있는 사람’, 천적 인간을 사랑만 있는 사람으로 나누어서는 안 됩니다. 둘의 차이는 신앙과 사랑 가운데 하나가 있고 하나가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둘의 질서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간단하게 영적 인간 = 신앙 사랑’, ‘천적 인간 = 사랑 신앙이라고 적으면 어느 정도 기억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완전한 정의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AC.53이 직접 말하는 것은 사랑이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선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사랑의 관계 전체는 이후 AC에서 더욱 세밀하게 설명됩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첫 번째 자기 형상아직 중심이 사람 쪽에 있는 상태’,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중심이 하나님 쪽으로 옮겨진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AC.53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첫 번째의 자기역시 하나님을 가리키므로,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인간 중심 하나님 중심의 변화로 읽는 것은 본문의 문법과도 맞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번의 형상하나의 형상이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발전하는 단계라고 단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AC.53형상이 둘인가 하나인가를 논하려는 글이 아니라, 두 번 반복된 표현이 각각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가리킨다고 설명하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짧은 문장에서 형상의 완성이라는 별도의 교리를 만들어 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구별을 따라가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다고 신앙과 사랑이 서로 무관하게 떨어져 있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과 사랑으로 함께 행동하는 사람으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AC.54에서는 남자와 여자를 이해와 의지의 결합, 곧 일종의 결혼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53은 신앙과 사랑을 둘로 갈라놓기 위한 글이라기보다, 서로 결합될 두 요소의 질서를 구별하여 보여 주는 글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 점에서 AC.53은 다음 글로 넘어가는 매우 자연스러운 다리이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의지에 속한 사랑을 구별합니다. 이어지는 AC.54에서는 창1:27남자와 여자를 통해 이해와 의지의 결합을 설명합니다. 즉 먼저 둘을 구별하고, 이어 그 둘이 어떻게 하나를 이루는지를 보여 주는 흐름입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이 신앙보다 중요하다는 뜻인가?AC.53만으로 두 가지를 경쟁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어느 하나를 버리고 다른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질서와 결합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섭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결합이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이 앞서므로 진리를 배우거나 신앙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앞의 AC.52에서도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서 짐승 뒤에 새와 물고기가 계속 존재했습니다. 사랑이 앞선다는 것은 이해와 신앙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질서가 다르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에게 신앙이 먼저라고 해서 그의 신앙이 단순한 지식이나 지적 동의라는 뜻도 아닙니다. AC.48에서 이미 그가 신앙과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는 살아 있는 영적 인간임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신앙은 거듭남과 분리된 죽은 지식이 아니라 이해에 속하면서 사랑과 결합되어 가는 신앙입니다.

 

AC.53은 이런 점에서 앞의 여러 글을 단 한 문장에 압축합니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라는 구별이 창1:27의 두 번 반복되는 형상안에 담겨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첫 번째 형상은 이해에 속한 신앙과, 두 번째 하나님의 형상은 의지에 속한 사랑과 관계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영적 인간에게서는 뒤따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앞섭니다.

 

따라서 이번 글의 핵심을 자기 형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발전한다거나 신앙 중심에서 사랑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형상이 완성된다고 정리하기보다, 원문 그대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의지에 속한 사랑이 있으며, 두 번의 형상은 이 둘과 관계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먼저이고 사랑이 뒤따르며,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앞섭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AC.54에서 이 두 요소는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통해 다시 등장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AC.53은 어떤 완성의 종착점이라기보다, 이해와 의지, 신앙과 사랑이 어떻게 구별되고 다시 결합되는지를 보여 주는 다음 아르카나로 들어가는 짧고 중요한 연결점입니다.

 

 

 

AC.54, 창1:27,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창1:27) AC.54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남자와 여자’(male and female)가 속뜻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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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창1:26, ‘순서에 깃든 아르카나’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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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2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비교적 익숙하지만 천적 인간이라는 말은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천적이라고 하면 흔히 서로 잡아먹는 관계의 천적(天敵)을 먼저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번역에서 사용하는 천적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영어 celestial을 옮긴 말로, ‘하늘의’, ‘천국적인’, 더 정확하게는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천적 차원에 속한 성질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celestial spiritual을 매우 자주 구별합니다. 우리말로는 각각 천적 영적이라고 옮깁니다. 둘 다 자연적·세속적인 것과 대비되는 넓은 의미에서는 영적인 것에 속하지만, 스베덴보리의 전문적인 용법에서는 서로 같은 말이 아닙니다. ‘천적은 특히 사랑과 선, 의지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되고, ‘영적은 신앙과 진리, 이해에 속한 것과 깊이 관계됩니다.

 

AC.52는 이 차이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 가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이 나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을 설명하는 시8에서는 짐승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물고기가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라고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는 어느 쪽에는 사랑이 있고 어느 쪽에는 사랑이 없다가 아니라 무엇이 먼저인가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 나타나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 나타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을 머리로만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나 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거듭난 인간이며 AC.48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마찬가지로 천적 인간을 생각이나 진리가 필요 없는 사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AC.52에서 천적 인간을 나타내는 순서에도 새와 물고기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다만 짐승이 먼저입니다. 이것은 이해와 진리가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라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이해에 속한 것들이 그 뒤에 놓이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이 차이는 앞의 AC.51에서도 다른 방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주님의 모양’, 곧 닮음이라고 했습니다. 또 영적 인간은 빛의 아들 친구라고 불리고, 천적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호칭들을 곧바로 높고 낮은 신분표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두 상태의 성질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천적 인간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AC.52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는 사랑으로 선을 행하며’,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의 다스림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한다는 것과 대비됩니다.

 

이 대목을 쉽게 설명하려고 영적 인간은 옳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천적 인간은 좋아서 선을 행한다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어느 정도 방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은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스베덴보리의 정확한 정의로 굳히면 곤란합니다. 영적 인간 역시 사랑으로 행동하며, 천적 인간 역시 진리와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 인간의 차이는 단순히 의무  자발성보다 더 깊은 내적 질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이후 설명까지 넓혀 보면 이 차이는 더욱 분명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선과 사랑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중요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에 따라 형성되는 양심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를 설명할 때는 천적 인간과 퍼셉션이 특별히 중요하게 등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천적 인간은 생각하지 않고 직감으로 안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퍼셉션은 단순한 감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또한 양심이 퍼셉션보다 가치가 낮은 가짜 영적 기능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서로 다른 인간 상태에서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게 하시는 서로 다른 질서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적이라는 말 자체도 여기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어의 천적(天敵)이 아니라 celestial을 번역한 전문 용어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 자체에도 천적 왕국과 영적 왕국의 구별이 있으며,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의 차이가 있습니다. 따라서 천적은 단순히 아주 영적인’, ‘영적보다  단계 높은이라는 정도 표현이 아니라 독특한 성질을 가진 범주입니다.

 

이 때문에 영적 인간이 계속 성장하면 모두 천적 인간이 되는가?라는 질문에도 조심해서 답해야 합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설명에서는 영적 인간 다음에 천적 인간이 등장하므로 하나의 더 깊어지는 흐름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술에서는 영적 천국과 천적 천국, 영적 천사와 천적 천사가 지속적으로 구별됩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영적 단계 졸업  천적 단계로 승급한다는 하나의 직선 과정으로만 설명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두 상태를 완전히 관계없는 두 종류의 인간으로 떼어 놓는 것도 현재 창세기 해설의 흐름을 놓칠 수 있습니다. 1의 거듭남에서 창2의 더 내적인 상태로 이어지는 진행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는 둘은 분명히 구별되지만,  관계의 모든 세부를 하나의 간단한 단계표로 만들지 않는다는 태도가 가장 안전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어느 상태든 생명의 근원은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AC.49-50에서 반복해서 본 것처럼 선과 진리와 생명은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영적 인간이 이해와 신앙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지성으로 거듭나는 것도 아니며, 천적 인간이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해서 자기 사랑에서 선을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닙니다. 두 경우 모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서로 다른 질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AC에서 영적 천적을 만나면 단순히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라고 번역해 읽기보다 먼저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보면 좋습니다. 대체로 영적은 진리·신앙·이해와, ‘천적은 선·사랑·의지와 특별히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기계적인 일대일 사전처럼 적용해서는 안 되고 각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AC.52에서 가장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그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고, 그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거듭난 인간이지만,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질서를 이루는 방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천적이라는 낯선 용어는 바로 그 차이를 보존하기 위해 필요한 말입니다. 앞으로 태고교회, 퍼셉션, 창세기 2,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을 읽어 갈수록 이 구별은 점점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AC.52, 창1:26, ‘다스림의 방향 전환 : 이해에서 사랑으로,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2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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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1:26)

 

AC.52

사람이 영적일 동안에는, 그의 다스림이 사람에서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그러나 사람이 천적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그의 다스림은 사람에서 사람을 향해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시편에서 자신을, 그리고 그분의 모양인 천적 인간을 이렇게 묘사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So long as man is spiritual,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as is here sai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But when he becomes celestial, and does good from love, then his dominion proceeds from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as the Lord, in David, describes himself, and thereby also the celestial man, who is his likeness: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아래 두셨으니 7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8:6-8) Thou madest him to have dominion over the works of thy hands; thou hast put all things under his feet, the flock and all cattle, and also the beasts of the fields,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he fish of the sea, and whatsoever passeth through the paths of the seas (Ps. 8:68).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짐승(beasts) 언급되고, 그다음에 (fowl), 그리고 뒤에 바다의 물고기(fish of the sea) 언급됩니다. 이는 천적 인간이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점에서 그는 영적 인간과 다릅니다.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에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fishes) (fowl) 먼저 언급되고, 그다음에 짐승(beasts) 언급됩니다. Here thereforebeastsare first mentioned, and thenfowl,and afterwards thefish of the sea,because the celestial man proceeds from love, which belongs to the will, differing herein from the spiritual man, in describing whomfishesandfowlare first named, which belong to the understanding, and this to faith; and afterwards mention is made ofbeasts.

 

해설

AC.52는 바로 앞 AC.51에서 제시한 영적 인간은 형상이고, 천적 인간은 모양이다라는 구별을 한 단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이번에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다스림이 어느 방향으로 이루어지는가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해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그 반대로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낯선 표현입니다. 우리는 보통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무조건 겉에서 속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AC.52는 오히려 두 방향을 구별합니다. 사람이 영적일 동안에는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하고, 사람이 천적이 되어 사랑으로 선을 행하게 되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 은 어느 하나가 무조건 옳고 다른 하나가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서로 다른 질서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영적 인간에 대해서는 창1:26의 순서가 그 증거가 됩니다.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여기서는 물고기와 새가 먼저 언급되고 짐승이 뒤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순서를 중요하게 봅니다. 물고기와 새는 이해에 속하며, 따라서 신앙과 관계되고, 짐승은 의지에 속한 것과 관계됩니다. 그러므로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순서는 영적 인간의 질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앞의 AC.40AC.44 이후의 설명을 기억하면 이해하기가 조금 쉬워집니다. 물고기와 새는 기억 지식 및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되었고, 짐승들은 의지와 애정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었습니다. 이제 AC.52에서는 그 각각의 상응을 다시 설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왜 그것들이 그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지를 봅니다. 즉 말씀의 피조물 목록 자체가 영적 인간의 내적 질서를 표현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순서가 반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시8:6-8을 인용합니다. 거기서는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 그다음에 공중의 ’, 마지막에 바다의 물고기가 나옵니다. 1:26에서는 물고기와 새가 짐승보다 먼저였는데, 8에서는 짐승이 먼저이고 새와 물고기가 뒤따릅니다. AC.52가 이 시편을 인용하는 핵심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의지에 속한 사랑에서 출발하기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지와 애정에 관계되는 짐승들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새와 물고기가 나옵니다. 반면 영적 인간을 설명할 때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물고기와 새가 먼저 나오고 짐승이 뒤에 나옵니다. 이처럼 두 성경 구절의 배열 차이를 통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 차이를 읽어 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출발한다는 말을 천적 인간은 진리를 생각하거나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2가 말하는 것은 이해가 없어지거나 진리가 필요 없어지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이 출발점이 되는가 하는 질서의 차이입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도 새와 물고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만 짐승이 먼저 언급되고 그 뒤에 새와 물고기가 옵니다. 따라서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라는 것이지 이해에 속한 것들이 제거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반대로 영적 인간을 사랑 없이 머리로만 신앙생활하는 사람이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앞 AC.48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이 이미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한쪽은 이성만 있고 다른 쪽은 사랑만 있다는 식으로 나눌 수 없습니다. AC.52의 구별은 훨씬 섬세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입니다.

 

이 점은 기존 해설에서처럼 영적 인간은 옳기 때문에 하고, 천적 인간은 좋아서 자연스럽게 한다는 예로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 인간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인간도 사랑으로 선을 행할 수 있으며, 천적 인간이라고 해서 모든 선택에서 아무런 분별도 필요 없이 자동적으로 선을 행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AC.52가 직접 말하는 것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다스림의 방향입니다.

 

그렇다면 다스림은 무엇을 뜻할까요? 1:26에는 사람이 물고기와 새와 짐승과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되어 있습니다. AC.52는 이것을 자연계 동물에 대한 인간의 통치 문제로만 읽지 않고, 지금까지 물고기··짐승이 나타내 온 인간 안의 것들과 연결하여 읽습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다스림은 거듭난 사람 안에서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들이 어떤 질서 아래 놓이는가 하는 문제와 관계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다스림=강압이 아니라 질서라고 한 문장으로 정의한 뒤, 8 아래를 감각·습관·기억·행동까지 모두 통제되는 상태라고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AC.52의 상응이나 아래 둔다의 세부 속뜻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이 시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목하는 것은 짐승 물고기라는 순서입니다. 따라서 인용 구절은 그 목적에 맞게 읽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앞의 AC.47과 흥미로운 연결도 생깁니다. AC.47에서도 스베덴보리는 창1:2425에서 생물들이 언급되는 순서가 달라진 것을 그냥 문체상의 변화로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거기서는 그 순서 변화가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52에서도 다시 단어의 배열이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질서를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단어 하나하나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맥 속 배열과 순서에도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사례입니다.

 

다만 여기서 성경의 모든 단어 순서는 각각 반드시 별도의 상응을 가진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AC.52에서 창1:26과 시8:6-8의 서로 다른 배열을 의도적으로 비교하고, 그것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로 해석한다는 것입니다.

 

AC.51과 함께 읽으면 이 차이는 더 중요해집니다. 앞에서는 영적 인간을 형상’, 천적 인간을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52는 그 차이의 한 측면을 보여 줍니다. 영적 인간의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하고, 천적 인간의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먼저 나타나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곧바로 모든 개인은 먼저 영적 인간이 되었다가 반드시 천적 인간으로 바뀐다는 일직선 단계표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앞 AC.51에서도 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분명히 구별하며, 이후 AC에서도 이 구별은 계속 중요하게 유지됩니다. 창세기 1장에서 2장으로 이어지는 현재의 서술에는 더 내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흐름이 있지만, 그것과 모든 사람의 영적 유형을 하나의 승급 과정으로 보는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AC.52가 천적 인간에 대해 특별히 덧붙이는 표현은 사랑으로 선을 행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의 출발점은 의지에 속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다스림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하고, 그에 따라 말씀의 배열에서도 애정과 의지에 관계되는 짐승들이 먼저 나옵니다. 뒤이어 이해에 관계되는 새와 물고기가 놓입니다.

 

그러므로 이 글의 핵심을 단순히 이해에서 사랑으로 발전한다고만 정리하는 것보다, 두 질서의 방향을 함께 기억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이해와 신앙에 속한 것이 먼저이며 다스림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의지에 속한 사랑이 먼저이며 다스림은 속 사람에서 겉 사람을 향합니다. 1:26과 시8:6-8의 피조물 순서가 바로 그 차이를 보여 줍니다.

 

AC.52는 그래서 아주 짧지만 중요한 글입니다. ‘물고기, , 짐승이라는 익숙한 상응을 다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서를 바꾸어 놓았을 때 인간의 내적 질서까지 달라진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가 앞의 형상모양’,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구별을 한 단계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52, 심화 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52.심화1. ‘영적 인간’, ‘천적 인간’ AC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 ‘영적 인간’이라는 표현은 비교적 익숙하지만 ‘천적 인간’이라는 말은 상당히 낯설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한국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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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 창1:27,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AC.53-54)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And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created he him; male and female created he them. (창1:27) AC.53 여기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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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1, 창1:26, ‘형상’(image), ‘모양’(likeness)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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