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1:10)

 

AC.28

말씀에서 (waters)로는 여러 지식(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바다(seas)로는 많은 , 지식의 집합을 의미할 때가 많은데요, 이사야에 보면, It is a very common thing in the Word forwatersto signify knowledges [cognitiones et scientifica], and consequently forseasto signify a collection of knowledges. As in Isaiah:

 

거룩한 모든 곳에서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11:9) The earth shall be full of the knowledge [scientia] of Jehovah, as the waters cover the sea (Isa. 11:9).

 

이사야 다른 지식의 결핍이 다루어지는 곳을 보면, And in the same prophet, where a lack of knowledges [cognitionum et scientificorum] is treated of:

 

5바닷물이 없어지겠고 강이 잦아서 마르겠고 6강들에서는 악취가 나겠고 애굽의 강물은 줄어들고 마르므로 갈대와 부들이 시들겠으며 (19:5, 6) The waters shall fail from the sea, and the river shall be dried up and become utterly dry, and the streams shall recede (Isa. 19:56).

 

학개에서 교회에 대해 말하면서, In Haggai, speaking of a new church:

 

6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7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2:6, 7)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the sea and the dry [land]; and I will shake all nations; and the desire of all nations shall come; and I will fill this house with glory (Hag. 2:67).

 

거듭나는 중인 사람에 대해 스가랴서에서는 And concerning man in the process of regeneration, in Zechariah:

 

7여호와께서 아시는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14:7, 8) There shall be one day, it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but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and it shall be in that day that living waters shall go out from Jerusalem, part of them toward the eastern sea, and part of them toward the hinder sea (Zech. 14:78).

 

시편에도 보면, 황폐해졌다가 거듭나 주님을 경배하게 사람을 묘사하면서, David also, describing a vastated man who is to be regenerated and who will worship the Lord:

 

33여호와는 궁핍한 자의 소리를 들으시며 자기로 말미암아 갇힌 자를 멸시하지 아니하시나니 34천지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바다와 중의 모든 생물도 그리할지로다 (69:33, 34) Jehovah despiseth not his prisoners; let the heavens and the earth praise him, the seas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therein (Ps. 69:3334).

 

(earth) 그릇(recipient) 의미한다는 것이 스가랴를 보면 분명한데, That theearthsignifies a recipient, appears from Zechariah:

 

이스라엘에 관한 여호와의 경고의 말씀이라 여호와 하늘을 펴시며 땅의 터를 세우시며 사람 안에 심령을 지으신 이르시되 (12:1) Jehovah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 of the earth, and formeth the spirit of man in the midst of him (Zech. 12:1).

 

해설

AC.28은 창1: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를 설명하면서, 앞의 AC.27에서 밝혀진 ’, ‘바다’, ‘의 의미가 말씀의 다른 곳에서도 실제로 사용된다는 것을 여러 성경 구절을 통해 보여 줍니다. 핵심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은 여러 지식(cognitiones et scientifica), ‘바다는 그렇게 모인 지식들의 집합을, ‘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그릇을 의미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먼저 물이 지식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28은 그 이유를 이론적으로 길게 설명하기보다 말씀의 실제 용례를 제시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11:9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여기서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한 문장 안에서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말씀들을 근거로 이 지식을 의미하는 것이 말씀에서 매우 흔한 용법이라고 설명합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19:5-6에서는 바닷물이 없어지고’, ‘강이 말라 버리는모습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지식의 결핍이 다루어지는 예로 제시합니다. 물이 지식을 나타낸다면 물이 없어지고 마르는 것은 그에 대응하여 지식이 결핍된 상태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더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지식이 어떻게 사라지는지까지 AC.28이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이 글에서는 우선 물의 있음과 없음지식의 있음과 결핍을 표현하는 말씀의 방식이라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바다는 왜 지식의 집합을 의미할까요? 1:10 자체가 이미 하나의 단서를 줍니다. 흩어져 있던 물들이 모이고, 하나님께서 그 모인 을 바다라고 부르십니다. 따라서 물이 여러 지식을 나타낸다면, 그 물들이 모인 바다는 자연스럽게 여러 지식이 모여 있는 집합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앞의 AC.27에서 거듭나는 사람의 기억 속에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저장되어 기억 지식 가운데 분류된다는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2:6-7, 14:7-8, 69:33-34의 인용도 물과 바다와 땅이 단순한 자연물만을 가리키지 않고 말씀 안에서 영적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다만 AC.28은 이 각각의 구절에 등장하는 모든 표현의 세부적인 상응을 여기서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슥14:8동해서해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이 글에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인용들의 세부 상응을 미리 확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이 구절들을 인용했는지를 따라가는 편이 안전합니다. 바다가 말씀에서 지식과 그 집합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슥14:8생수라는 표현을 보고 그렇다면 살아 있는 지식과 죽은 지식이 따로 있다는 뜻인가?라고 궁금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문제는 스베덴보리의 더 넓은 가르침 안에서 살펴볼 수 있지만, AC.28 자체의 논지는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 물은 우선 지식의 상응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수를 곧바로 생명으로 변화된 지식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이 문단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넘어갑니다.

 

마지막에는 시선이 바다에서 으로 옮겨 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슥12:1을 인용하면서 그릇(recipient)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릇이라는 말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앞의 AC.27에서는 마른 이 겉 사람을 의미한다고 했으므로, 두 글을 함께 읽으면 거듭나는 사람의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을 받아들이는 영역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땅이 그릇이다라는 말은 땅 자체가 지식에 생명을 만들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릇은 받아들이는 것이지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앞의 AC.27에서도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기억 속에 많은 지식이 쌓였다는 사실만으로 그것들이 자동으로 살아 있는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은 중요하지만 지식 자체가 생명의 근원은 아닙니다.

 

이 점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성경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배운다는 것은 분명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많이 안다는 것과 진리로 산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AC.28은 아직 그 다음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먼저 주님께서 거듭남을 이루어 가시는 가운데 지식들이 바다로 표현되고,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겉 사람이 이라는 그릇으로 표현된다는 기본 구조를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28에서 바다을 지나치게 복잡하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물은 여러 지식, 바다는 그 지식들의 집합, 땅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릇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생명의 근원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에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에서 실제로 무엇이 싹트기 시작하는지는 바로 이어지는 창1:11-13AC.29에서 설명됩니다. 스베덴보리가 글을 전개하는 순서대로 따라가면, 지식이 모이는 것과 실제 영적 생명이 나타나는 것을 서로 혼동하지 않으면서 셋째 날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화

1. ‘스베덴보리가 AC 초기부터 여러 인용 구절의 속뜻을 있었던 이유

 

AC.28, 심화 1, ‘스베덴보리가 AC 초기부터 여러 인용 구절의 속뜻을 알 수 있었던 이유’

AC.28.심화1. ‘스베덴보리가 AC 초기부터 여러 인용 구절의 속뜻을 알 수 있었던 이유’ AC.28을 처음 읽으면 한 가지 흥미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 겨우 창세기 1장을 설명하는 AC.28인데,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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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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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7, 창1:9,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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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9)

 

AC.27

사람과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여러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또는 사람을 통하여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비록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그때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그러한 여러 진리와 , 참과 선에 관한 여러 지식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든 , 그것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또는 천적이든 간에 모두 기억 지식으로 그곳에 머물며,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들이 바로 한곳으로 모인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이렇게 모인 것들을 바다(seas)라고 합니다. 이때 사람 자체를 가리켜서는 마른 (dry [land])이라 하고, 곧이어 (earth)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내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and are calledseas,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dry [land],and presentlyearth,as in what follows.

 

해설

AC.27은 창1:9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는 말씀을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설명합니다. 앞선 둘째 날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다루었다면, 이제 셋째 날에 들어서면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이르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하게 되는지가 설명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으며,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으로 유입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록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대개 진리를 내가 배웠고, 내가 이해했으며, 선을 내가 생각하고 행한다고 느낍니다. 실제 삶에서도 사람은 스스로 배우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AC.27이 밝히는 더 깊은 차원에서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조금 뜻밖의 설명이 나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오면 그것들은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 분류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온 것은 모두 그곳에서 기억 지식으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진리나 천적인 선까지 어떻게 기억 지식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그 내용 자체가 단순한 세상 지식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것이 사람의 기억에 들어와 있는 동안어떤 형태로 존재하느냐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을 배우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매우 영적이지만, 그것을 단지 기억하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아직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지식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외우거나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삶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27은 지식 자체와 영적 생명을 혼동하지 않게 해 줍니다. 기억 속에 들어온 진리는 매우 중요하지만, 기억 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이미 살아 있는 선이 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아직 그것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저장된 것들이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말합니다. AC.27은 그 과정의 세부적인 메커니즘까지 여기서 설명하지 않고, 우선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이제 창1:9바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기억 속에 저장된 참과 선에 관한 지식들을 한곳으로 모인 이라고 하고, 그 모인 것들을 바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바다는 단순히 많은 진리를 상징한다는 막연한 표현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의 겉 사람 안에 모여 있는 참과 선에 관한 기억 지식들과 연결됩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조심할 것도 있습니다. ‘한곳으로 모였다고 해서 AC.27이 기억 속의 모든 지식이 이미 완전한 영적 질서로 정돈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그것들이 기억 속에 저장되고 기억 지식 가운데 분류되며, 이렇게 모인 지식들이 바다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을 이 한 문단에 미리 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서 설명하는 순서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 마른 은 겉 사람 자체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것을 곧이어 이라고 부르게 된다고만 말하고, 자세한 설명은 다음 내용으로 넘깁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마른 의 의미를 너무 많이 앞당겨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바다로 표현되는 기억 지식과 그것을 담고 있는 겉 사람인 마른 이 구별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9의 장면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난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계의 바다와 육지가 생기는 장면만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에 모이고, 그것들을 담고 있는 겉 사람 자체가 드러나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배우는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말씀을 읽고 진리를 배우며 기억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알고 있다 진리로 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같은 것이 아닙니다. AC.27에서는 우선 진리가 기억 속에 들어와 저장되는 단계를 보여 줍니다. 그것을 언제 어떻게 불러내어 실제 거듭남에 사용하시는지는 주님의 일이며, 그 과정은 앞으로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AC.27의 중심은 많이 배우면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사람의 겉 기억에까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마련하시고, 그것들을 때에 따라 불러내어 사용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셋째 날의 시작에서 먼저 이 모이고 이 드러나는 것은, 앞으로 그 땅에서 생명이 싹트기 전에 이러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심화

1.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심화 1,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심화 1.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처음 접하는 분들이 거의 반드시 멈칫하는 부분입니다. ‘지식이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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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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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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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 그런 삶의 유익과 한계를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과 수도사, 그리고 금욕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성인들의 삶에 대해 ‘Heaven and Hell’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Emanuel Swedenborg는 비교적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공정한 평가를 합니다. 그는 먼저, 그런 삶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열망’과 ‘세속적 욕망을 경계하려는 노력’은 분명 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역사 속 많은 수도자들 가운데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런 사람들은 사후에도 주님의 자비 아래에서 천국의 삶으로 인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참된 영적 삶은 세상을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랑과 쓰임새를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천국을 이루는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족을 돌보고, 사회 속에서 일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 속에서 ‘사랑(charity)이 실제로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데 수도원적 삶은 종종 이런 관계적 삶에서 벗어나 개인의 영적 상태에만 집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조심스럽게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실제 행위와 쓰임새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의 접촉을 지나치게 끊어 버리면, 겉으로는 경건해 보일지라도 사랑이 실제 삶 속에서 시험되고 성장할 기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난 고독한 거룩함’보다 ‘세상 속에서 이웃을 섬기는 거룩함’을 더 완전한 영적 삶으로 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목적처럼 여기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 결혼, 재산, 사회적 활동 등을 멀리하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삶의 본질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도 자신을 위한 사랑과 세속적 욕망을 다스리고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매우 높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수도원 안에 있어도 마음속 사랑이 여전히 자기 자신과 명예와 공로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삶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나는 금욕’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세상 속에서 사는 절제’를 더 건강한 영적 길로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사나 은둔자의 삶을 전부 헛된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다양한 성향과 역사적 상황을 인정합니다. 어떤 시대에는 교회의 혼란과 타락 속에서 수도원적 공동체가 신앙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독과 기도가 내면을 정리하는 준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이 ‘최종적인 영적 삶의 형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결국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세상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수도원적 경건이 ‘준비 단계’나 ‘부분적인 형태’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사후 세계를 설명할 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천국을 거대한 수도원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며 쓰임새를 이루는 살아 있는 사회입니다. 천사들은 단순히 기도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돕고 섬기며 각자의 역할 속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천국의 행복은 ‘사랑을 행하는 쓰임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세상을 떠난 거룩함’만을 영적 삶으로 생각했다면, 사후에 천국의 이런 적극적인 삶을 처음에는 낯설어하기도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과거에 수도원적 삶에 몸을 담았던 경험이 있으셨다고 하셨는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시간 역시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했던 마음,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으려 했던 노력,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았던 시간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다듬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 결국 ‘사랑의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가장 완전해진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일, 곧 말씀의 속뜻을 연구하고 번역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은 수도원의 침묵보다 훨씬 더 ‘천국적인 쓰임새’에 가까운 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질서는 결국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삶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세상을 떠나 거룩해지려 하지 말고, 세상 속에서 사랑을 위해 살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도원의 시간도, 그리고 지금 목사님께서 걸어가고 계신 길도 모두 하나의 긴 여정 속에 놓여 있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길을 사용하여 결국 사랑과 지혜의 더 넓은 삶으로 이끄신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하기 때문입니다.

 

 

 

SC.40, ‘homo’와 ‘vir’의 차이

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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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8,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길, 곧 ‘influx’에 대하여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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