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9.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위 심화 1의 세 번째 단계인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단계,  진리가 삶의 성품이 되며, 선한 행동이 열매처럼 자연스럽게 나오는 단계에서도 여전히 생명 없는(inanimate) 상태일 수가 있나요?

 

AC.29을 읽다 보면 조금 이상한 대목을 만나게 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연한 ’이 돋고, ‘ 맺는 채소’가 나오며, 마침내 ‘ 가진 열매 맺는 나무’까지 등장합니다. 단순히 진리를 아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열매’까지 맺는 단계라면 상당히 깊은 거듭남에 들어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것을 아직 ‘생명 없는 것들(inanimate things)이라고 부릅니다. 어떻게 열매를 맺고 있는데도 ‘생명 없는’ 상태일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AC.29에서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기준으로 ‘생명’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생명 없는’이라는 표현은 식물이 자연계에서 생물인가 무생물인가를 말하는 생물학적 구분이 아닙니다. 또한 이 단계의 사람에게 선도 진리도 전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아 무엇인가가 돋아나고 자라며 열매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을 사람이 아직 어떻게 여기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오는 ’이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오지만, 사람은 아직 이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 때문에 이 단계는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전의 준비 상태입니다. 따라서 ‘열매가 있느냐 없느냐’만으로 생명의 유무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겉으로 선한 열매가 나타나고 있어도, 사람이 그 선의 생명을 여전히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있다면 AC.29의 의미에서는 아직 다음 단계의 생명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전에는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을 반드시 되갚아 주었는데, 말씀을 배우고 회개하면서 이제는 보복하지 않으려고 애쓴다고 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겨우 분노를 억제하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험담도 삼가고, 마침내 상대방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실제로 도와줄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열매’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전에는 없던 선한 행동이 실제 삶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여전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많이 변했다. 예전 같으면 절대 이렇게 하지 않았을 텐데 내가 이제는 사람까지 도와주었다.’ 이것이 반드시 노골적인 교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거듭남의 초기에는 사람이 자기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한다고 느끼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실제로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선의 근원까지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바로 이 상태에서부터 이끌어, 나중에는 자기가 행하는 모든 참된 선의 생명과 능력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AC.29의 ‘생명 없는’ 상태를 ‘가짜 ’, ‘쓸모없는 ’, 혹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단계는 거듭남에서 반드시 필요한 준비 과정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에게 먼저 선과 진리에 관한 것을 배우게 하시고, 그것에 따라 실제로 행동하게 하시며, 그 과정 가운데 점차 그 선과 진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깨닫게 하십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이러한 준비가 실제 삶에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 가진 열매 맺는 나무’라는 표현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열매가 있다는 것은 선과 진리가 단지 기억 속의 지식으로 머물지 않고 실제 삶에서 무엇인가를 내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선을 행하면서도 여전히 그 선을 자기 것으로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나무’는 셋째 날 안에서는 매우 발전한 모습이지만, 전체 거듭남의 여섯 상태를 놓고 보면 여전히 다음 단계의 생명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이 점은 ‘내가 선을 행하는가?’와 ‘ 선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가 서로 다른 질문임을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질문에서는 셋째 날에도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악한 행동을 멈추고 선한 일을 시작하며 진리에 따라 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두 번째 질문에서는 아직 더 깊은 변화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자기 안의 선과 진리를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고,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오는 것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는 사람이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에게서 오니 나는 아무것도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거듭남의 질서가 아닙니다. 사람은 실제로 선택하고 싸우고 행해야 합니다. 다만 점차 깊어지는 거듭남 속에서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능력으로 이렇게 하고 있으며, 자체의 생명은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라는 인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셋째 날의 ‘생명 없음’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죽은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향하여 준비되고 있는 상태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은 이미 뿌려졌고, 연한 것이 돋았으며, 씨를 맺고, 마침내 열매까지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아직 그 모든 것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참으로 인정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것을 ‘생명 없는 것들’이라고 하고, 다음에 비로소 ‘살아 있는 것들’이 등장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보면 ‘열매를 맺는데도 생명 없는가?’라는 역설은 오히려 AC.29의 핵심을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거듭남은 단지 ‘나쁜 행동이 좋은 행동으로 바뀌는 ’만이 아닙니다. 더 깊은 곳에서는 선의 근원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주님에게 있던 그 근원을 사람이 인정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여기지만, 주님께서 사람을 더 깊이 이끄실수록 그는 자기 안의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셋째 날의 ‘ 가진 열매 맺는 나무’는 결코 하찮은 단계가 아닙니다. 실제 열매가 나타나는 귀중한 회개의 상태입니다. 다만 그 열매를 바라보며 ‘이것은 나의 선이다’라고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가능하게 한 씨앗과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알아 가야 합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셋째 날의 준비는 다음 단계의 ‘참된 신앙의 생명’을 향하여 열리기 시작합니다.

 

 

 

AC.29, 심화 3, 왜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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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심화

1. 연한 , 맺는 채소, 가진 열매 맺는 나무 실제

 

AC.29 tender herb’, herb yielding seed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에 대한 실제 예를 들어주세요. 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개인에 있어 어떤 게 tender herb이고, 어떤 게 herb yielding seed인지, 그리고 어떤 모습이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인지 말이지요.

 

AC.29의 ‘연한 (tender herb), ‘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 ‘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는 실제 거듭남 가운데 있는 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나타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세 표현을 통하여 셋째 날에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처음 싹트고 점차 자라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다만 한 가지를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 단계는 아직 거듭남이 완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AC.29은 이때 나타나는 것들을 아직 ‘생명 없는 것들’이라고 부르며, 이 사람은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실제 예도 완성된 천적·영적 인간의 모습이라기보다, 회개 가운데 선과 진리가 처음 삶으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 직장에서 자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동료를 몹시 싫어합니다. 상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면 며칠 동안 분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의 흠을 말하면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거나 읽는 가운데 ‘나는 사람이 잘못한 것만 보고 있는데, 안의 미움은 과연 옳은가?’ 하는 생각이 처음 생깁니다. 전에는 상대의 잘못만 보였는데 이제 처음으로 자기 안의 악을 조금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처음 돋아나는 것이 ‘연한 ’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아직 매우 약합니다. 그날은 ‘미워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 상대가 다시 자기를 자극하면 곧 화가 납니다. 그래도 이전과 다른 것이 하나 생겼습니다. 전에는 자기 분노를 당연하게 여겼지만 이제는 ‘내가 사람을 이렇게 미워하는 것이 옳은가?’라는 진리가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행동 전체를 바꿀 만큼 강하지 않고, 그 진리가 자기 삶을 지배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신 씨앗으로부터 이전에는 없던 무엇인가가 연한 싹처럼 돋아난 것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은 말씀을 더 배우고 자신의 상태도 조금씩 살펴봅니다. 단지 ‘미워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실제 상황에서 자기 분노를 억제하려고 합니다. 상대방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을 때 말을 멈추어 보기도 하고, 상대에게 일부러 차갑게 대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올 때 평소처럼 대하려고 애쓰기도 합니다. 실패할 때도 많지만 이제 진리가 단순히 머릿속에 머물지 않고 실제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이런 상태를 ‘ 맺는 채소’에 비유해 볼 수 있습니다. 처음의 연한 풀보다 한 단계 더 진행된 것입니다. 선과 진리가 조금 더 형태를 갖추고, 사람의 실제 삶 속에서 쓰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내가 많이 변했다’, ‘나는 이제 사람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얼마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분노를 참은 자기 모습을 보면서 스스로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선한 행동이 나타난다고 해서 아직 그 선의 근원이 자기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는 상태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더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람의 행동에는 이전보다 분명한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에는 상대가 잘못하면 즉시 보복하거나 험담했지만 이제는 그것을 멈추는 일이 많아집니다. 상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필요한 도움을 줄 수도 있고,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이라도 공정하게 대하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속에서 미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미움이 행동 전체를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진리가 실제 선한 행동이라는 ‘열매’를 맺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을 ‘ 가진 열매 맺는 나무’의 한 실제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 사람이 이제 자연스럽게 선을 행하므로 이미 참된 신앙의 생명에 들어갔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은 오히려 이 단계에서도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를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셋째 날의 식물들은 아직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선한 열매가 실제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마음 깊이 인정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다음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 교회에서의 봉사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설교를 듣다가 ‘나도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나 아직 실제 행동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을 ‘연한 ’과 같은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실제로 시간을 내어 누군가를 돕고, 자기 편의를 조금 포기하면서 봉사하기 시작합니다. 선에 관한 진리가 행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 맺는 채소’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선한 행동이 일회적인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생활 가운데 반복되어 실제 유익을 만들어 낸다면 ‘열매 맺는 나무’와 같은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동기는 아직 혼합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기쁠 수도 있고, ‘나는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만족이 있을 수도 있으며, 자기가 선한 일을 했다는 생각을 붙들 수도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불완전한 상태 때문에 시작된 선을 모두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계속 이끄시면서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점차 깨닫게 하십니다. 이것이 앞의 AC.25에서 살펴본 ‘꺾지 않고 굽히시는’ 주님의 거듭남의 방식과도 연결됩니다.

 

따라서 ‘연한 맺는 채소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단순히 ‘좋은 생각진리 이해완성된 선한 성품’이라는 세 단계로 고정해서는 안 됩니다. AC.29의 중심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아 사람 안에서 처음 연약한 것이 돋아나고, 그것이 점차 더 유용한 것이 되며, 마침내 실제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아직 셋째 날, 곧 ‘회개의 상태’ 안에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거듭남을 이해하는 데 큰 위로가 됩니다. 자기 안에 겨우 ‘연한 ’ 같은 변화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악을 오늘 처음 악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미 중요한 변화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직 자주 실패하더라도 진리에 따라 실제 행동하려고 애쓰기 시작했다면 그 연한 것이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삶에서 실제 선한 열매가 나타나기 시작한다면 주님께서 그 사람을 더 깊은 단계로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모든 과정에서 사람은 한 가지를 배워 가야 합니다. ‘’인 사람이 씨앗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은 씨앗을 받아 싹을 내고 열매를 맺지만, 천적 씨앗 자체는 주님에게서 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가 이렇게 선해졌다’는 데 머물지 않고, 자기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그 더 깊은 생명을 향하여 자라고 있는 거듭남의 첫 열매들입니다.

 

 

 

AC.29, 심화 2, 열매를 맺는데도 왜 아직 ‘생명 없는’ 상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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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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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돌아온 탕자 비유에서도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둘째를 보살필 수 있었을 것 같은데도 그리 하지 않은 이유 역시 아래 SC.49와 같은 걸로 봐도 되나요?

 

네, 큰 틀에서는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다만 이 비유는 단순히 ‘섭리를 기다리셨다’는 설명을 넘어서, ‘회개와 신앙의 본질적 구조’를 드러내는 장면이기 때문에, 그 이유를 한 걸음 더 깊이 이해하시는 것이 훨씬 유익합니다.

 

먼저 누가복음 15장의 이 비유에서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단순한 무관심이나 방치가 아니라, ‘사랑의 방식이 강제가 아니라 자유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은밀히 사람을 보내 아들의 삶을 관리하거나 도왔다면, 아들은 여전히 자기 욕망 속에서 살면서도 고통을 충분히 자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이야기에서는 ‘이에 스스로 돌이켜(15:17)라는 결정적 전환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외부의 도움으로 만들어진 변화가 아니라, ‘내면에서 일어난 자발적 각성’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핵심입니다.

 

스베덴보리적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거듭남은 반드시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주님은 언제나 선을 주시고 이끄시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도록, 즉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개입하여 억지로 끌어당기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탕자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은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이 너무 깊어서, 아들이 진짜로 돌아오도록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요셉 이야기에서 말씀드린 ‘재회보다 먼저 변화’라는 질서와 정확히 같은 결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고통의 역할입니다. 탕자는 돼지 치는 자리까지 내려가고, 배를 채우지 못하는 궁핍을 겪습니다. 이 과정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아버지가 뒤에서 계속 돌봐주었다면, 그는 ‘멀리 떠난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어느 정도 편안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회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즉, 아버지가 개입하지 않은 것은 방치가 아니라, ‘회개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요셉 이야기에서 형제들이 기근을 겪도록 허락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 이야기에는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요셉 이야기에서는 ‘섭리의 역사’가 중심이라면, 탕자 비유에서는 ‘아버지의 마음’이 더 전면에 드러납니다. 아버지는 보내지 않지만, 대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가’ 맞이합니다. 즉, ‘기다림과 환대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보내지 않는 것은 사랑의 부재가 아니라, 돌아올 때 완전히 받아주기 위한 준비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개입하고 싶고, 도와주고 싶고, 문제를 빨리 해결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때로 우리 생각과 다르게 나타납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 살아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돌아오도록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도와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깊은 방식으로 돕고 계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탕자의 아버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이유도 요셉 이야기와 같은 맥락, 곧 ‘변화를 먼저 이루시는 주님의 질서’로 이해하셔도 좋습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덧붙이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기다림은 차가운 방관이 아니라,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된 사랑의 기다림’이라는 점입니다.

 

 

 

SC.51, 스베덴보리가 사람을 만났던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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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49, ‘요셉이 사사로이 가나안 혈육들을 챙기지 않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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