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9 심화

1. 아직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데  회개의 상태인가?

 

AC.9에서 세 번째 상태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보면 이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 선들을 아직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직 선의 근원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을 왜 벌써 회개의 상태에 있다고 하는 것일까요?

 

먼저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AC.9 회개 내가 행하는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이미 충분히 깨달은 상태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세 번째 상태의 사람은 아직 자기가 행하는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바로 그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그 선들을 여전히 생기가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AC.9 회개의 상태를 설명하면서 사람이 이제 자기 선은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고 말하면 순서가 조금 뒤바뀝니다. 그 깨달음이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면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긴다 AC.9의 설명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회개일까요? 이 질문에는 AC.9이 바로 이어서 말하는 사람의 실제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을 하며,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들을 행합니다. 즉 이전 상태와 달리 이제 실제 삶에서 선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회개를 단순히  죄를 짓고 몹시 후회하는 감정으로만 생각하면 AC.9의 표현이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에는 삶의 방향을 악에서 선으로 돌리는 실제적인 변화가 포함됩니다. 사람이 이전과 같은 삶에 그대로 머물면서 마음속으로 미안하다고 느끼는 것만이 회개의 전부는 아닙니다.

 

AC.9에서 바로 그 변화가 나타납니다. 사람은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말하기 시작하고, 체어리티의 행위들과 같은 선을 실제로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이미 영적으로 완성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실제적인 선의 방향으로 삶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렇게 보면 회개 아직 생기 없는 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회개의 상태에 들어가 실제로 선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아직 그 선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삶의 방향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선의 근원에 대한 인식은 아직 온전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거듭남이 한순간에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연속적인 상태의 변화라는 AC.6의 설명과도 잘 맞습니다. 첫째 상태에서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첫째에서 둘째로, 둘째에서 셋째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세 번째 상태인 회개 역시 완성된 영적 인간의 상태일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이것이 AC.9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사람은 아직 불완전한 상태에서도 회개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선이 어디에서 오는지 완전히 알게 된 다음에야 선한 삶을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배우고, 돌이키고, 말하고, 행하면서 거듭남의 다음 상태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그래도 아직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회개하기  아닌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AC.9은 바로 그런 불완전한 상태를 세 번째 상태로 제시합니다. 사람은 실제 선을 행하기 시작했지만,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 생기 없다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이 단계의 회개와 선한 행위가 모두 거짓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여전히 선들이라고 부릅니다. 다만 사람이 그 선들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아직 참된 생명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극단으로 가기 쉽습니다. 하나는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하니  선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선한 일을 하고 있으니 이미 영적으로 충분히 살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AC.9은 어느 쪽도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 선이 나타났지만 아직 생기가 없는, 거듭남 도중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회개는 무엇에 대한 회개일까요? AC.9 한 단락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목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기 공로를 죄로 깨닫고 회개하는 이라고 특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것은 회개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새로운 방향, 곧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하기 시작하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AC.9 회개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극적인 회심 장면을 상상할 필요도 없습니다. 눈물이나 강렬한 죄책감이 있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방향에 실제 변화가 나타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회개는 감정을 포함할 수 있지만 감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시에 여기서 일반적인 회개론 전체를 AC.9 한 문장 안에 넣을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다른 곳에서 회개를 어떻게 더 자세히 설명하는지는 별도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AC.9에서 우리의 우선 과제는 이 세 번째 상태가 왜 회개의 상태라고 불리는지를 이 문맥 안에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두 번째 상태까지는 주님의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고 리메인스가 드러나는 준비가 이루어졌다면, 세 번째 상태에서는 이제 그 내적인 변화가 말과 행위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합니다. 회개가 실제 삶의 방향 전환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변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여전히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하며 그 선을 자기 자신에게 귀속시킵니다. 그래서 그 선은 아직 생기 없는 것으로 불립니다. 앞으로의 거듭남에서는 이 선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는지가 더 분명해져야 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9 회개의 상태는 비약이 아니라 오히려 거듭남의 연속성을 잘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회개했다고 해서 사람이 단번에 자기중심성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며, 선의 근원을 완전히 깨닫는 것도 아닙니다. 돌이킴이 시작되고 실제 선이 나타나면서도 여전히 자기에게 속한 것이 섞여 있는 상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9에서 회개란 완성된 회개라기보다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에서 나타나는 실제적인 돌이킴의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람은 속 사람으로부터 경건하게 말하고 체어리티의 선들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 그 선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 선에는 참된 생명이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회개할 정도로 무슨  죄를 지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회개를 주로  잘못을 저지른  크게 뉘우치는 사건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깁니다. AC.9에서 중요한 것은 죄의 크기가 아니라 삶의 방향입니다. 사람이 이전 상태에서 벗어나 선을 향하여 실제로 말하고 행하기 시작하는 것, 그러나 아직 그 선의 참된 근원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이 미완성의 전환이 여기서 말하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AC.9, 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AC.9.심화 2.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 체어리티(charity)를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이 영어 ‘charity’를 우리말로 옮기기가 참 그런 게, 우리말 어떤 하나의 표현으로 옮기는 순간, 그것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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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 창1 개요, '세 번째 상태'

AC.9 세 번째 상태는 회개(repentance)의 상태로서, 이때 사람은 속 사람(internal man)으로부터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말과, 체어리티(charity)의 행위들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여전히 생기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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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 심화

1. 시험, 불행, 슬픔을 통해 사람의 것들이 잠잠해지는가?

AC.8에는 조금 마음에 걸리는 문장이 나옵니다. ‘오늘날 상태는 시험, 불행, 또는 슬픔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를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기 때문입니다.그렇다면 왜 하필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어야 할까요? 그리고 실제로 주변을 보면 큰 고난을 겪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잘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AC.8이 말하지 않는 것부터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을 겪어야 거듭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고난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많이 거듭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원문 자체가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니라 없이는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예외의 가능성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문장의 중심을 사람에게 얼마나 고난이 필요한가?에 두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그 고난 가운데 무엇이 일어난다고 말하는가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시험과 불행과 슬픔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자체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몸은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하고, 세상 역시 사람이 자신의 삶과 쓰임을 수행하는 자리입니다. AC.8의 관심은 몸이나 세상을 버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두 번째 상태에서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평소에는 이 구별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계에서 몸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며 세상의 여러 관계와 일 가운데 살아갑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 계획하는 것, 의지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삶의 전면에 놓입니다. 그런데 시험이나 불행이나 슬픔은 사람이 의지하고 있던 자연적 조건들이 언제나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합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병들 수 있고, 계획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수 있으며,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 자체가 사람을 영적으로 만든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전까지 강하게 활동하던 몸과 세상에 속한 관심들이 그러한 상황에서는 이전과 똑같은 힘으로 작용하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그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된다고 표현하는 것은 바로 이 문맥입니다. 실제로 몸과 세상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겉 사람이 파괴되는 것도 아닙니다. ‘마치죽은 것처럼 된다는 표현은 그것들의 활동이 잠잠해지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AC.8에서 이것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목적은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구별되는 데 있습니다.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면서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의 구별이 나타나고, 그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저장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꺼내시기 위해 사람에게 고난을 보내신다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AC.8은 각각의 불행이 왜 발생했는지를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다면 주님께서 그의 사람을 꺾으려고 병을 주셨다고 해석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면 리메인스를 드러내기 위해 이런 일을 당하게 하셨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 글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AC.8이 설명하는 것은 고난의 개별적인 원인이 아니라, 거듭남의 이 상태에서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그 결과 이전에는 잘 구별되지 않던 주님의 것과 사람 자신의 것이 구별되는 상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질문의 후반부, ‘그런 고난 없이도 거듭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도 자연스럽게 답할 수 있습니다. AC.8 자체가 이미 그런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거의 없다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예외의 이유를 굳이 만들어 낼 필요가 없습니다. ‘ 사람은 어린 시절 리메인스가 특별히 많아서 그렇다’, ‘이미 양심이 형성되어 있어서 그렇다’, 또는 겉으로는 몰라도 반드시 숨은 고난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AC.8은 왜 어떤 사람에게는 이 상태가 시험과 불행과 슬픔 없이도 가능한지 그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지 않은 예외의 이유를 우리가 채워 넣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모든 사람의 고난을 영적으로 해석하는 체계를 만들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에 주님의 섭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우리가 외부에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더구나 같은 고난을 겪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같은 영적 결과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AC.8 역시 시험, 불행, 슬픔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주체는 고난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고난 그 자체를 거룩하게 여기거나 일부러 고난을 찾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불행을 겪지 않았으니 아직 제대로 거듭나지 못한 것인가?라고 걱정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나는 많은 고난을 겪었으니 영적으로 많이 성장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할 근거도 없습니다. AC.8이 우리에게 주는 기준은 고난의 양이 아닙니다.

 

오히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두 번째 상태의 본질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하고 참되다고 여기는 것이 정말 나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살아간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는지, 이것이 거듭남의 방향과 관련됩니다.

 

이렇게 보면 시험과 불행과 슬픔의 의미도 조금 달라집니다. 그것들은 주님께서 사람을 괴롭히기 위해 반드시 보내셔야 하는 거듭남의 필수 과정이 아닙니다. AC.8오늘날이 두 번째 상태가 그러한 것들 없이 존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고 관찰하면서, 그 이유를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그 가운데 잠잠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고난을 만났을 때 주님께서 이것을 보내셨을까?라고 모든 원인을 해석하려 하기보다, 그 상황 가운데 내가 절대적인 것으로 붙들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주님께 속한 것과 자신에게 속한 것을 나는 구별하고 있는가?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편이 AC.8의 취지에 더 가깝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고난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누군가 불행을 겪는 것을 보고 사람은 사람이 너무 강해서 주님께서 꺾고 계시는 것이다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AC.8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해석하는 도구가 아니라,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 자신의 내적 질서를 이해하도록 주어진 설명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시험과 불행과 슬픔이 중요한 이유는 고통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AC.8의 표현대로라면, 그것들을 통해 몸과 세상에 속한 것들이 잠잠해지고 마치 죽은 것처럼 되면서, 속 사람에 속한 것들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구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속 사람 안에는 주님께서 거듭남을 위하여 보존해 두신 리메인스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AC.8의 중심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구별되어야 한다입니다. 고난은 그 구별과 관련하여 자주 나타나는 하나의 상황이며, 거듭남의 생명과 능력은 고난 자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에게서 옵니다.

 

 

 

AC.8, 창1 개요, '두 번째 상태'

AC.8 두 번째 상태는 주님께 속한 것들과 사람에게 고유한 것들이 서로 구별되는 때입니다. 주님께 속한 것들은 말씀에서 ‘리메인스’(remains)라고 하는 건데, 여기서는 특별히 유아기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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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심화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에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처음 이 표현을 읽으면 영계에 여러 종류의 영적 존재가 있다는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다 보면 이 짧은 표현이 상당히 넓은 세계를 가리키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계는 모든 존재가 똑같은 모습과 상태로 살아가는 하나의 균일한 세계가 아닙니다. 사람의 사랑과 신앙, 생각과 삶이 서로 다르듯 사후에도 그 차이가 드러나며, 그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상태와 공동체가 나타납니다.

 

먼저 (spirit)이라는 말 자체를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라고 할 때 언제나 한 종류의 존재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문맥에 따라 이 말은 물질적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넓게 가리킬 수도 있고, 천사와 구별하여 아직 영들의 세계에 있는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으며, 선한 영이나 악한 영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AC에서 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아직 천사가 되지 못한 중간 단계의 존재라고 고정해서 읽으면 문맥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람은 죽어서 처음 영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본질적으로 영적 존재이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그 물질적인 몸이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 후 사람은 영적 세계에서 자신의 영적 몸을 가지고 계속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죽은 사람이 영이 된다는 말은 일상적인 설명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엄밀하게는 물질적인 몸을 벗은 인간이 영적 세계에서 영으로서의 자기 생명을 계속 살아간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 처음 들어가는 곳과 관련하여 스베덴보리가 중요하게 설명하는 것이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입니다. 이것은 천국과 지옥 사이의 중간 상태이자 중간 영역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사람이 반드시 똑같은 기간 동안 머물면서 일정한 과정을 밟는 일종의 대기실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마다 지상에서 형성된 내적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사후에 겉과 속이 일치하게 되는 과정도 서로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곳에서 사람이 지상생활 중 외적인 이유로 감추거나 조절했던 것들이 벗겨지면서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에 따른 실제 상태가 점차 분명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들의 세계에는 매우 다양한 영들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을 향하여 준비되는 사람도 있고 지옥을 향하여 가는 사람도 있으며,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외적인 것을 벗어 실제 내면이 드러나는 과정에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영계의 생물학적 종을 분류하듯 몇 가지 종류로 나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의 사랑과 애정, 신앙과 사고, 삶의 목적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기 때문에 영들의 상태도 다양하다는 뜻에 더 가깝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선한 영들 악한 영들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히 두 종류의 종족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을 영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그가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 선과 진리를 기뻐하는 애정이 삶의 중심을 이룬 사람과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며 악과 거짓을 기뻐하는 사람은 사후에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게 됩니다. 영계에서는 이러한 내적인 차이가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여기에서 천사에 대해서도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사는 인간과 전혀 다른 종류로 처음부터 창조된 존재가 아닙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모두 한때 자연계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람이 죽으면 영이 되고, 일정한 과정을 마치면 영이라는 종에서 천사라는 종으로 변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천사는 천국에 들어가 천국의 사랑과 질서 가운데 살아가는 인간 영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편이 더 좋습니다. 마찬가지로 지옥의 악령이나 마귀도 처음부터 별도의 종족으로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에서 인간으로 살았던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영계를 이해할 때 인간, , 천사를 서로 완전히 다른 세 종류의 존재로 나누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한 인간의 생명은 자연계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을 통하여 연속됩니다.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은 인간으로 살아가고, 죽음 이후에는 그 몸을 벗고 영적 세계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의 공동체와 결합하게 됩니다. 인간의 인격과 삶이 죽음으로 끊어지고 전혀 다른 존재가 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영계에는 그렇게 많은 공동체가 있을까요?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핵심은 사랑입니다. 천국에서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선을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은 무한히 다양하게 받아들여지며, 각 사람은 자신에게 고유한 애정과 쓰임을 가집니다. 비슷한 사랑과 쓰임을 가진 천사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함께 하나의 천국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다양성은 천국의 질서에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질서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악한 영들의 경우에도 다양성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은 수많은 형태로 나타나며,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과 욕망 역시 다양합니다. 따라서 지옥 역시 하나의 똑같은 악으로 이루어진 균일한 집단이 아닙니다. 서로 비슷한 악과 거짓을 사랑하는 자들이 그 성질에 따라 결합합니다. 결국 영계에서 누구와 함께 있게 되는가는 외부에서 임의로 배치되는 문제라기보다 그 사람이 실제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와 깊이 관계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지옥을 단순한 장소만으로 설명하지 않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천국과 지옥에는 실제로 장소와 환경처럼 경험되는 질서가 있지만, 그 외적인 환경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서로 맞는 사람들은 서로 가까워지고, 맞지 않는 사람들은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영적 세계에서의 거리 가까움 역시 자연계의 물리적 거리와 똑같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상태의 유사성과 차이가 외적으로도 나타납니다.

 

AC를 읽다 보면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는 영들에 관한 표현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어떤 영들은 다른 영들을 가르치거나 돕고, 어떤 영들은 인간의 특정한 기억이나 애정과 관련되어 나타나며, 어떤 영들은 악한 욕망과 거짓을 자극하려 합니다. 또 여러 행성의 영들에 관한 기록이나 인간 몸의 기관들과 상응하는 영적 공동체들에 관한 기록처럼 오늘의 독자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내용도 등장합니다. 따라서 AC.5 여러 종류의 영들은 이후 펼쳐질 방대한 영계 기록을 미리 예고하는 표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영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입니다. 그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이 유입되는 것과 악과 거짓에 속한 것이 영향을 미치는 과정에서 영적 세계와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 영이  머릿속에 생각을 넣으므로 나는  생각에 책임이 없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여러 유입 가운데서 자신에게 오는 것을 자기 것처럼 느끼며,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할 것인가를 자유와 이성 안에서 선택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의 유입에 관한 가르침은 인간의 책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중요한 책임을 전제합니다. 선한 생각이 떠올랐다고 그것을 자기 공로로 돌릴 수 없고, 악한 충동이 일어났다고 악한 영이 시켰다며 책임을 넘길 수도 없습니다.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자기 안에 일어나는 것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여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며,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바로 이런 실제적인 선택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또한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지금 어떤 종류의 영이 나에게 붙어 있는가를 알아내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에게 특별한 영계 교통이 허락되었다는 것과 모든 사람이 영들과 직접 대화하거나 그들을 식별해야 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영적 현상을 추적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배우고, 자신의 악을 살피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여 그것을 피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5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는 말은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한 표현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들의 다양성은 인간의 내적 삶이 얼마나 실제적이며, 지상에서 형성되는 사랑과 삶이 죽음 이후에도 얼마나 중요하게 이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이 어떤 외적인 이름을 가졌는가보다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영계의 존재들을 몇 개의 고정된 종류로 분류하여 외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의 삶에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한 사랑과 애정과 사고의 상태가 있고, 영적 세계에서는 그러한 내적인 차이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며, 서로 비슷한 상태의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5에서 스베덴보리가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영계에는 여러 종족이 있다는 뜻으로 읽기보다 사후에도 인간의 고유한 삶과 사랑의 성질이 계속되며,  차이에 따라 영적 세계에는 헤아릴  없이 다양한 상태와 공동체와 질서가 존재한다는 방향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AC 전체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되묻게 될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는가?보다 더 깊은 질문,  나는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AC.5, 서문,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린 영계의 증언

AC.5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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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심화 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심화 1.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러니까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제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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