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21 심화

1. 빛처럼 보였던 어둠이란 무엇인가? : 실제 사례들

 

AC.21, The darkness means all those things which, before man is conceived and born anew, have appeared like light, because evil has appeared like good, and the false like the true; yet they are darkness, consisting merely of the things proper to man himself, which still remain.에 나오는 빛처럼 보였던이나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곧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것들의 생생한 예, 구체적 사례들을 좀 알려주세요.

 

AC.21의 문장은 사실 매우 현실적인 인간 경험을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빛처럼 보였던 것’이라는 표현은, 사람이 거듭나기 전까지는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이 선하고 옳다고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 사람에게는 어떤 생각과 행동이 매우 옳고 밝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것이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AC.21에서 말하는 ‘빛처럼 보였던 어둠’입니다.

 

첫 번째로 가장 흔한 예는 ‘자기 의로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성실하게 살고, 교회도 잘 다니며, 도덕적으로도 큰 흠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나는 비교적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생각은 그 사람에게는 매우 밝은 빛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더 깊은 자기 성찰을 하게 되면 이런 사실을 발견합니다. 자신이 선하게 살았다고 느꼈던 이유 가운데 상당 부분이 사실은 ‘자기만족과 자기 확신’이었음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는 저 사람들보다 낫다’, ‘나는 그래도 양심적으로 산다’ 같은 생각들이 그 선한 삶 속에 섞여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전에는 그것이 의로운 빛처럼 보였지만, 더 큰 빛 속에서는 그것이 ‘자기 사랑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두 번째 예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선행’입니다. 어떤 사람이 봉사를 많이 하고, 헌신적으로 일합니다. 겉으로 보면 매우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정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이 숨어 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신실한 사람으로 봐주면 좋겠다’, ‘내가 이렇게 헌신하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이런 동기가 완전히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선행의 중심이 될 때 그 선은 사실 ‘자기 자신을 위한 선’이 됩니다. 그런데 당사자는 그것을 선한 일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빛처럼 보이는 어둠’이 됩니다.

 

세 번째 예는 ‘신앙적인 열심 자체가 빛처럼 보이는 경우’입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적으로 매우 열심입니다. 전도도 많이 하고, 교리도 열심히 공부하며, 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합니다. 그런데 그 열심 속에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마음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진리를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런 마음은 매우 미묘해서 본인은 그것을 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신앙의 열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빛 속으로 들어가면, 그것이 사실은 ‘신앙을 통한 자기 확증’일 수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의 과정에서 이런 것들이 하나씩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네 번째 예는 ‘도덕적 분노’입니다. 사람은 때로 불의한 일을 보면 강하게 분노합니다. 이 분노는 겉으로 보면 정의로운 감정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분노 속에는 종종 ‘자기 감정이 상한 것’이 섞여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를 무시했을 때, ‘저 사람은 틀렸다’고 분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정의를 위한 분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생긴 감정일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도 사람에게는 그것이 정의의 빛처럼 보이지만, 더 깊은 빛 속에서는 ‘자기 사랑의 그림자’로 보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 자신에게 고유한 것들’, 즉 ‘proprium’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proprium은 단순히 인간의 개성이나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이 아닌, 인간 자신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이 중심은 대부분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래서 그 안에서 나오는 생각과 판단은 처음에는 매우 자연스럽고 옳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의 선과 진리와는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처음 경험하는 빛이 바로 ‘자기 안에 있던, 그동안 빛처럼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어둠이었다는 사실을 보게 되는 빛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하는 경험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자연스럽고 옳다고 느껴졌다면, 이제는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질문하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자기 생각과 감정이 모두 옳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의 빛이 조금 더 들어오면, 이전에는 옳다고 느꼈던 것들 속에서도 ‘자기중심적 동기’가 섞여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사람은 처음으로 진짜 빛과 이전의 ‘빛처럼 보였던 것’을 구별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과정이 스베덴보리가 AC.21에서 말하는 ‘어둠이 드러나는 단계’입니다.

 

 

 

AC.21, 창1:4-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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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0 심화

1. 자기의 선이 선이 아님을 안다는 것 : 실제 사례들

 

AC.20, But when man is conceived anew, he then begins for the first time to know that his goods are not goods, and also, as he comes more into the light, that the Lord is, and that he is good and truth itself.에 해당하는 구체적 사례를 예를 들어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실제 목회현장에선 이 마저도 정말 쉽지 않은, 정말 보기 힘든 경우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느끼는 어려움은 매우 현실적인 목회 경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AC.20의 문장은 읽으면 간단해 보이지만, 실제 인간 삶에서는 거의 드물게 보이는 변화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이 상태는 갑자기 성인(聖人)이 되는 어떤 극적인 사건이라기보다,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가면서 ‘자기 자신을 다르게 보게 되는 과정’을 가리킵니다. 몇 가지 실제적인 유형을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AC.20의 문장을 다시 보면 두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선이 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시작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이심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두 단계는 사실 하나의 경험 안에서 이어집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될 때, 비로소 참된 선의 근원을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유형은 목회 현장에서 종종 만나는 ‘열심 있는 신앙인의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봉사도 열심히 하고, 헌신도 많이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신앙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사람은 자기 마음속을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봉사를 하면서도 인정받지 못하면 서운해지고,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더 헌신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속에 우월감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때 그는 처음으로 ‘내가 하는 선한 일도 사실은 완전히 순수한 것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에서 말하는 첫 단계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선의 한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실패를 통해 오는 깨달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평생 도덕적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다고 합시다. 그는 자신이 비교적 선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느 사건에서 예상하지 못한 분노나 이기심이 폭발합니다. 그때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자기 사랑이 안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경험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이전에는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내 힘만으로는 참된 선을 이루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험이 조금 더 깊어지면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됩니다. 사람이 자기 선의 한계를 깨달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참된 선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두 번째 깨달음이 나타납니다. 즉 ‘주님이 선과 진리 자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교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 알게 되는 것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예는 ‘용서의 경험’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는 성경 말씀도 알고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교리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마음이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는 점점 깨닫습니다. ‘내가 노력해서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마음을 바꾸어 주셔야 가능한 일이구나.’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기도하게 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전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신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AC.20이 말하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느끼시는 것처럼 이런 변화는 실제로 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완벽한 성인(聖人)의 상태가 아니라 ‘빛이 조금 더 들어온 상태’입니다. 사람이 완전히 자신을 부정하는 단계까지 가는 것은 드물지만, 자기 선의 한계를 조금이라도 보는 순간 이미 거듭남의 과정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빛 속으로 더 들어갈수록’ 이런 깨달음이 깊어진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정도로 시작합니다. 그다음에는 ‘내 선에도 자기 사랑이 섞여 있다’는 것을 봅니다.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선을 행할 때 자연스럽게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이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더 자라면 ‘내 선에도 부족함이 있다’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더 깊어지면 ‘참된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거듭남은 바로 이런 ‘점진적인 빛의 증가’입니다.

 

그래서 AC.20의 문장은 어떤 이상적인 신앙인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조금씩 더 빛 속으로 들어갈 때 나타나는 ‘아주 현실적인 영적 경험의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AC.20, 창1:3,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And God said,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창1:3) AC.20 첫 번째 상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더 높은 어떤 것임을 알기 시작하는 때입니다. 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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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3. 리메인스는 겉의 것들이 황폐해질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가?

 

AC.19 해설에는 사람이 아직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크게 지배되고 있을 때에는 리메인스가 전면에 드러나 활동하기 어렵다는 설명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리메인스로 보존해 두셨다면, 왜 그것을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않으실까요? 왜 겉의 것들이 어느 정도 황폐해질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일까요?

 

먼저 AC.19가 직접 말하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수면을 사람이 살아오면서 배우고 들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 감추어 보존하신 리메인스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것들은 겉의 것들이 황폐해지기 전에는 빛이나 가운데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리메인스가 미리 나오면 즉시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표현은 AC.19의 문장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왜 그것들이 그렇게 보호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하려고 덧붙인 해설이라고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리메인스는 단순히 어린 시절의 좋은 추억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오는 동안 주님께서 그 안에 보존하신 선과 진리에 관계된 모든 것, 특히 순진함과 체어리티,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한 애정과 그것에 관계된 진리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장차 그의 거듭남에 사용하시기 위해 보존하십니다. 그래서 리메인스는 인간의 proprium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왜 곧바로 그것들이 사람의 삶을 지배하게 하지 않으실까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의 겉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참된 것을 알아도 그것을 자기 목적에 맞추어 사용할 수 있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명예나 이익을 앞세울 수 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주님께서 주시는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 돌리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리메인스 자체가 본래부터 불안정하거나 쉽게 썩어 버리는 데 있다기보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낼 사람의 외적 상태가 아직 주님의 질서에 충분히 순응하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하나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겸손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것을 다른 사람보다 더 경건하게 보이거나 인정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겸손을 말하지만 실제 목적은 자기 자신에게 향해 있습니다. 이것은 AC.19가 직접 제시한 사례는 아니지만, 선과 진리가 자기 사랑의 지배 아래에서 어떻게 자기 목적에 이용될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인정하며 그에 따라 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런 점에서 AC.19황폐해짐은 중요합니다. 여기서 황폐는 단순히 인생이 불행해지거나 고난을 많이 겪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맥에서는 사람이 의지하고 있던 겉의 것들이 약해지고, 자기에게서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여겼던 상태가 흔들리면서, 주님께서 안에 보존해 두신 것을 받아들일 여지가 생기는 과정과 관계됩니다. AC.17-19가 묘사하는 혼돈과 공허’, ‘흑암’,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도 바로 거듭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전의 이러한 상태를 보여 줍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신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주님은 사람이 아직 그것을 올바르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선과 진리를 없애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을 보존하시고,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이 주님께로 돌이킬 수 있도록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리메인스는 인간의 현재 모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주님의 자비가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오래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왜곡되거나 오염된다는 표현도 조금 더 조심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리메인스 자체가 밖으로 나오면 더러워진다는 뜻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조차 자기 목적에 맞추어 이해하고 사용하려는 위험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선과 진리를 보존하시고, 겉의 것들이 점차 물러나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될 때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이 점은 리메인스 교리를 매우 따뜻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사람이 아직 주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던 시기에도 주님께서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계셨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훗날 주님께로 돌아설 때 사용하실 수 있도록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을 그의 안에 보존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래전부터 자비로 준비하고 보존해 오신 것들을 사용하시면서 시작됩니다.

 

 

 

AC.19, 창1:2,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창1:2) AC.19 ‘하나님의 영’(spirit of God)이란 주님의 자비를 뜻하며, 이를 가리켜 ‘운행하시니라’(m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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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9, 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심화 2. ‘move와 brood가 나란히 나오는 이유’ AC.19 본문에 ‘By the “spirit of God” is meant the Lord’s mercy, which is said to “move,” or “brood,” as a hen broods over her eggs.’가 나오는데, 여기서 move와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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