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and let them have dominion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over the fowl of the heavens, and over the beast, and over all the earth, and over every creeping thing that creepeth upon the earth. (1:26)

 

AC.49

태고교회, 교회의 사람들과 주님께서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을 나누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이러한 이유로,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 외에는 누구도 사람(man)이라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사람(men)이라고 했고, 자기 자신을 호칭으로 부르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자기 안에서 인식된 것들,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된 모든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만을 사람의 (of man)이라 했습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In the most ancient church, with the members of which the Lord conversed face to face, the Lord appeared as a man; concerning which much might be related, but the time has not yet arrived. On this account they called no onemanbut the Lord himself, and the things which were of him; neither did they call themselvesmen,but only those things in themselvesas all the good of love and all the truth of faithwhich they perceived they had from the Lord. These they said wereof man,because they were of the Lord.

 

[2] 이로부터 예언서들에서 사람(man) 인자(the son of man) 최고의 뜻으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으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하게 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Hence in the prophets, bymanand theson of man,in the supreme sense, is meant the Lord; and in the internal sense, wisdom and intelligence; thus everyone who is regenerate. As in Jeremiah: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날아갔으며 (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사야에서 사람(man) 속뜻으로는 거듭난 사람을, 최고의 뜻으로는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을 뜻합니다. In Isaiah, where, in the internal sense, bymanis meant a regenerate person, and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himself, as the on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아들들과 손으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3] 때문에 주님은 예언자들에게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에스겔입니다. The Lord therefore appeared to the prophets as a man, as in Ezekiel: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모양이 남보석 같고 보좌의 형상 위에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a sapphire stone, the likeness of a throne, and upon the likeness of the throne was the likeness as the appearance of a man above upon it (Ezek. 1:26).

 

다니엘에게 나타나셨을 때에는 인자(the son of man),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으셨습니다. 이는 같은 뜻입니다. And when seen by Daniel he was called theson of man,that is, the man, which is the same thing:

 

13내가 환상 중에 보니 인자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앞으로 인도되매 14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7:13, 14) I saw, and behold, one like the son of man came with the clouds of heaven, and came to the ancient of days, and they brought him near before him; and there was given him dominion, and glory, and a kingdom, that all people, and nations, and languages should serve him. His dominion is an everlasting dominion, which shall not pass away, and his kingdom that which shall not be destroyed (Dan. 7:1314).

 

[4] 주님께서는 복음서에서도 자신을 자주 인자(the son of man), 사람이라 하시며, 다니엘에서와 같이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The Lord also frequently calls himself theson of man,that is, the man, and, as in Daniel, foretells his coming in glory: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4:30) Then shall they see the son of man coming in the clouds of heaven with power and great glory (Matt. 24:30).

 

여기 하늘 구름(The clouds of heaven)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영광(power and great glory) 말씀의 속뜻을 뜻합니다.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며, 바로 여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옵니다. Theclouds of heavenare the literal sense of the Word; “power and great gloryar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which in all things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has reference solely to the Lord and his kingdom; and it is from this that the internal sense derives its power and glory.

 

해설

AC.49는 창1:26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이제 사람이라는 말 자체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앞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에 이른 사람이 영적 인간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를 사람이라고 하며, 더 근본적으로 말씀의 속뜻에서 사람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AC.49의 대답은 매우 강렬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불렀으며, 자기들 자신조차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 읽으면 상당히 당황스러운 말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가?그러나 AC.49가 생물학적 종으로서의 인간이나 인간의 존엄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과 태고교회의 영적 인식에서 사람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켰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참된 사람됨의 근원은 인간 자신의 proprium에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들만을 자기 안에서 사람의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AC.49는 구체적으로 밝힙니다. ‘사랑의 모든 신앙의 모든 진리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단순히 사람이 선을 가지고 있고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왔다고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람의 이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이유를 아주 간단하게 말합니다. ‘그것들은 주님에게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앞의 AC.39-48과도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고 지각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살아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41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에는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9에서는 같은 원리가 사람됨에 적용됩니다. 참된 선과 진리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가리키며, 속뜻에서는 주님에게서 지혜와 총명을 받아 거듭난 사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만이 사람이라는 말을 인간을 낮추는 표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의 참된 사람됨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밝히는 말입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선과 진리와 생명을 만들어 내어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참된 지혜와 총명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갑니다. 따라서 이 말의 초점은 누가 인간 자격이 있는가?를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인간의 참된 영적 생명의 근원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AC.49의 첫 문장에는 또 하나 매우 놀라운 내용이 있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말씀을 나누셨고, 주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에 대해 많이 말할 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가 말하지 않은 내용을 상상하여 채울 필요는 없습니다. 적어도 AC.49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는 것과, 바로 이것이 그들이 오직 주님만을 사람이라고 부른 이유와 연결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짧은 유보 문장은 자연스럽게 궁금증을 일으키므로 별도의 심화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다음부터 스베덴보리는 예언서에서 사람인자가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먼저 매우 중요한 구별을 제시합니다. ‘사람인자최고의 에서는 주님을 뜻하고, ‘속뜻에서는 지혜와 총명을 뜻하며, 따라서 거듭난 모든 사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지는 모든 성경 인용을 읽는 열쇠입니다.

 

4:23,25에서 예레미야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 빛이 없고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AC.49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는 사람이라는 말이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앞에서 사람의 속뜻을 지혜와 총명, 따라서 거듭난 사람이라고 밝혔기 때문에 사람이 없다는 표현 역시 그 문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함께 나오는 공중의 새가 날아갔다는 표현도 앞의 AC.40에서 새가 이성적·지적인 것들과 관계된다고 설명한 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AC.49는 여기서 예레미야 전체의 황폐 상태를 단계별로 해설하지 않으므로 그 이상을 세밀하게 구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45:11-12에서는 여호와께서 내가 땅을 만들고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에서도 속뜻의 사람을 거듭난 사람으로, 최고의 뜻의 사람을 유일한 사람으로서의 주님과 연결합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자연계 인간의 창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의 사람이라는 표현에 그보다 더 깊은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1:26은 주님께서 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를 보여 주는 직접적인 예로 인용됩니다. 에스겔은 보좌 위에 사람의 모양 같은형상을 봅니다. AC.49는 이 환상의 보좌나 남보석 등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앞에서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셨다고 한 것이 예언자들의 환상에서도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 역시 최고의 뜻에서 사람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논증에 사용됩니다.

 

7:13-14에서는 그 표현이 인자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니엘에게 보이신 분이 인자’, 사람이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같은 뜻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도 인자의 왕국과 권세에 관한 모든 세부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인자라는 호칭이 주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인용의 직접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은 복음서로 이어집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을 자주 인자라고 부르셨으며, 24:30에서는 다니엘의 표현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하늘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49사람이라는 주제와 함께 말씀의 문자 의미와 속뜻이라는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를 짧게 엽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 구름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뜻하고, ‘능력과 영광이 말씀의 속뜻을 뜻한다고 직접 밝힙니다. 그리고 그 이유도 설명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 오직 주님과 그분의 나라만을 가리키기때문이며, 바로 거기서 속뜻의 능력과 영광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AC.49가 직접 말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론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속뜻을 깨닫는 순간 인자의 재림이 일어난다는 식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이 확실히 말하는 만큼만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전체적으로나 부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심리나 도덕적 교훈을 흥미롭게 찾아내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향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의 사람역시 결국 인간 자신에게서 설명이 완성되지 않고, 최고의 뜻에서는 주님에게까지 올라갑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인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그 형상의 원형이신 주님을 보아야 한다는 방향이 여기서 열립니다.

 

이 점에서 AC.49는 앞의 AC.48과 다음 글들을 이어 주는 매우 중요한 다리입니다. AC.48에서는 여섯째 상태의 영적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49는 곧바로 인간 자체를 바라보지 않고 먼저 주님을 바라봅니다. 최고의 뜻에서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 안에서 참으로 사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도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위대함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서 성립하는 사람됨과 관계됩니다.

 

동시에 여기서 거듭난 사람만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식의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AC.49는 사람의 사회적 가치나 존엄을 분류하는 글이 아닙니다. ‘사람이라는 말씀의 표현이 최고의 뜻과 속뜻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는 글입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스베덴보리의 매우 깊은 인간론을 오히려 사람을 차별하는 주장으로 오해하게 됩니다.

 

결국 AC.49가 말하는 사람의 비밀은 생명의 근원에 관한 문제입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자기 안의 사랑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자기 소유라고 여기지 않고 주님에게서 온 것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님을 사람이라 불렀고, 주님에게서 온 것들만을 사람의 이라고 했습니다. 예언서의 사람인자’, 에스겔과 다니엘의 사람 형상, 복음서의 인자, 그리고 말씀의 구름과 영광까지 이어지는 모든 인용은 결국 이 중심을 향합니다. 최고의 뜻에서 참 사람은 주님이시며, 인간의 참된 지혜와 총명과 사람됨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서 생깁니다.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심화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첫머리에는 독자의 호기심을 강하게 자극하는 문장이 하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 사람들과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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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0, 창1:26, ‘하나님의 형상 : 주님의 통치가 천사와 영들을 통해 사람 안에 흐르는 상태'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창1:26) AC.50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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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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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24, 25)

 

AC.48

이로부터 사람이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에 있을 때가 분명해집니다. 이때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하며, 그로써 진리와 안에서 자신을 확증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이며, 그것들을 가리켜 바다의 물고기(fishes of the sea), ‘하늘의 (fowl of the heavens) 합니다. 사람이 여섯 번째 상태에 이르면,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들을 말하고 선한 일들을 행합니다. 그가 이때 내놓는 것을 생물(living soul), ‘가축(beast)이라 합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신앙으로뿐만 아니라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하므로,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이라 하는 영적 인간이 됩니다. 이것이 지금 여기서 다루는 주제입니다. Hence then it appears that man is in the fifth state of regeneration when he speaks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belongs to the understanding, and thereby confirms himself in the true and in the good. The things then brought forth by him are animate, and are called thefishes of the sea,and thefowl of the heavens. He is in the sixth state, when from faith, which is of the understanding, and from love thence derived, which is of the will, he speaks truths, and does goods; what he then brings forth being called theliving soul,and thebeast. And as he then begins to act from love, as well as from faith, he becomes a spiritual man, who is called animage of God,which is the subject now treated of.

 

해설

AC.48은 지금까지 이어진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의 차이를 짧고 분명하게 정리하는 글입니다. 특히 다섯 번째 상태와 여섯 번째 상태가 실제로 무엇이 다른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합니다. 앞에서는 물고기와 새, 생물과 짐승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살펴보았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을 한 사람의 거듭남 과정 안에 놓고 두 상태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먼저 다섯 번째 상태에서 사람은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로 말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은 이해에 속합니다. 사람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선인지를 신앙으로 알고 인정하며, 그것을 통해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이때 그에게서 산출되는 것들은 이미 생명이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다섯째 날의 바다의 물고기하늘의 로 표현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섯 번째 상태를 아직 영적으로 살아 있지 않은 상태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AC.48은 이때 산출되는 것들을 분명히 animate’, 곧 생명이 있는 것들이라고 합니다. 앞의 AC.39에서도 큰 광명체들이 켜진 뒤 사람이 비로소 살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여섯 번째 상태에 와서 처음으로 영적 생명이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 상태에도 이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지만, 그 생명이 나타나는 중심이 아직 주로 이해에 속한 신앙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무엇이 달라질까요?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이해에 속한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세밀한 변화가 있습니다. 신앙이 사라지고 사랑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도 신앙은 그대로 있으며, 거기에 그 신앙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함께합니다.

 

그래서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의 차이를 단순히 아는 단계와 행하는 단계라고만 나누는 것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다섯째 상태의 사람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AC.48이 직접 대비하는 것은 그보다 더 내적인 것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의 원리에서 말하며 그로써 자신을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과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처음 읽으면 여기서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섯째 상태에는 사랑이 전혀 없고 여섯째 상태에서 갑자기 사랑이 생긴다는 뜻인가?그렇게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AC.48은 거듭남 전체에서 사랑이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섯째 상태에서 사람이 사랑으로도 행동하기 시작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즉 이 글의 초점은 사랑의 최초 존재 여부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신앙과 함께 사랑이 실제 의지에 속한 원리로서 행동의 근원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기존 해설에서처럼 이를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애쓰다가 나중에는 좋아서 자연스럽게 한다는 예로 설명하면 어느 정도 감을 잡는 데는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AC.48의 정확한 정의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다섯째 상태에 반드시 심한 억지와 갈등이 있고, 여섯째 상태에 이르면 모든 선행이 힘들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고 AC.48이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 시험과 갈등이 언제 어떻게 나타나는가는 별도의 문제입니다.

 

AC.48에서 우리가 확실히 붙들 수 있는 것은 행동의 근원에 관한 변화입니다. 다섯째 상태에서는 이해에 속한 신앙이 전면에 나타납니다. 여섯째 상태에서는 그 신앙과 더불어, 거기에서 나온 의지에 속한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이제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 아니라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의 원리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때 산출되는 것들이 창1:24-25생물짐승으로 표현됩니다. 앞의 AC.44-46에서 이미 이 짐승들이 의지에 속한 것들, 특히 애정과 관계된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다섯째 날의 물고기와 새에서 여섯째 날의 생물과 짐승으로 넘어가는 것은 단순히 피조물의 종류가 바뀌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이해에 속한 신앙의 상태에서 의지에 속한 사랑까지 포함하는 상태로 깊어지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르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AC.48의 절정입니다. 다만 여기서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가 임의로 하나님과 작동 방식이 같아지는 이라고 정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8 자체가 그 이유를 간단히 제시합니다. 사람이 이제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하기때문에 영적 인간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해서 사람이 신적인 존재가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여러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람 안의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이 주님에게서 온다고 반복하여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신적인 생명을 만들어 내어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과 사랑이 그의 이해와 의지 안에서 받아들여져 삶으로 나타나는 상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합니다.

 

여기서 AC.47과의 연결도 중요합니다. 바로 앞에서는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 자기에게서인 산출하며,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이제 AC.48에서는 그 진행 가운데 여섯째 상태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줍니다. 이해에 속한 신앙만이 아니라 거기에서 나온 사랑이 의지에 속하게 되고, 사람은 신앙으로부터뿐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도 행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용어상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AC.48은 이 사람을 영적 인간이라고 부릅니다. 앞으로 AC를 읽다 보면 영적천적이 서로 구별되는 더 세밀한 의미로 사용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영적 인간이라는 말을 보고 곧바로 이후의 모든 영적·천적 구별을 이 한 문장에 끌어와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여섯째 상태에 이른 거듭난 사람을 영적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 창1:26 이하에서 형상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이어집니다.

 

AC.48은 결국 다섯째 상태를 낮추고 여섯째 상태만 참된 것으로 만드는 글이 아닙니다. 다섯째 상태도 이미 살아 있는 거듭남의 단계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은 이해가 진리를 알고 신앙으로 확증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이 의지에 속한 것으로 나타나고, 사람은 신앙뿐 아니라 사랑에서도 진리를 말하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바로 그때 그는 영적 인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불립니다.

 

따라서 이 글의 흐름을 신앙에서 사랑으로라고만 표현하기보다는 신앙과 사랑이 함께 삶이 되는 데로라고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합니다. 다섯째 날에 살아난 이해에 속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섯째 날에는 의지에 속한 사랑과 함께 하나의 더 온전한 삶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이 창조의 다섯째 상태와 여섯째 상태 사이에서 AC.48이 보여 주는 중요한 전환입니다.

 

 

 

AC.49, 창1:26, ‘참 사람은 오직 주님 : 사랑과 진리 안에서만 성립되는 사람됨'(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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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7, 창1:24-25, ‘거듭남의 순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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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심화

3. 셋째 날을 회개의 상태라고 하는가?

 

AC.29 두 번째 단락에,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부분이 좀 어리둥절합니다. 갑자기 repentance가 나오기 때문인데... 이게 어떻게 연결이 되는 건가요?

 

AC.29을 읽다 보면 마지막에 갑자기 등장하는 ‘회개(repentance) 상태’라는 표현이 조금 뜻밖으로 느껴집니다. 앞에서는 ‘연한 ’, ‘ 맺는 채소’, ‘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차례로 나오는 식물의 성장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스베덴보리는 이 셋째 단계를 가리켜 ‘인간 거듭남의 번째 연속 단계이며, 그의 회개의 상태’라고 말합니다. 왜 식물이 자라는 단계가 곧 ‘회개’일까요?

 

이 질문을 풀려면 먼저 창1의 앞선 두 날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첫째 날에는 사람이 자기 안의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처음 알기 시작합니다. 둘째 날에는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구별이 생기고,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여 거듭남을 위한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셋째 날에 이르면 마침내 그 준비된 ‘’에서 무엇인가 실제로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즉 진리가 단지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람의 삶에서 어떤 결과를 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회개’라는 말이 연결됩니다. 회개는 단지 잘못을 슬퍼하거나 죄책감을 느끼는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 비추어 자신의 삶이 잘못되어 있음을 보며, 실제로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진리가 단순한 지식에서 끝나지 않고 삶을 바꾸기 시작할 때 회개가 실제로 나타납니다.

 

셋째 날의 식물들은 바로 이런 변화를 보여 줍니다. ‘연한 ’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이 사람 안에서 처음 돋아나는 매우 연약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 맺는 채소’는 그보다 더 유용한 것이 나타나는 상태이며, ‘ 가진 열매 맺는 나무’는 마침내 실제 열매가 나타나는 상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 표현을 지나치게 세밀한 심리 단계로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처음 실제 결과를 내기 시작한다’는 흐름을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하여 ‘남을 미워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진리를 알고 있었다고 해 보겠습니다. 처음에는 그것이 단지 기억 속의 지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자신이 특정 사람을 오래 미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진리의 빛 속에서 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는 미움을 그대로 두어서는 되겠다’고 생각하며 실제로 험담을 줄이고, 보복하려는 마음을 억제하며, 상대를 조금이라도 공정하게 대하려고 애쓰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때 진리는 단순한 지식에서 실제 삶의 변화로 넘어갑니다. 이런 움직임이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AC.29에서 repentance가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설명한 ‘식물이 돋아나는 ’이 바로 회개의 영적 모습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스베덴보리가 그 단계 전체를 ‘회개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땅이 드러나고 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었으며, 이제 그 씨앗에서 실제 싹과 열매가 나오기 시작합니다. 사람 역시 진리를 배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의 삶을 바꾸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29의 회개는 아직 거듭남의 완성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는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지만, 아직 사람은 그것을 참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셋째 날의 식물들은 열매까지 맺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생명 없는 것들’로 불립니다. 이 회개는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중요한 준비 단계입니다.

 

이 점은 회개와 거듭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회개는 거듭남과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거듭남의 실제 과정 안에 있습니다. 사람이 악을 악으로 보고 그것을 피하려 하며, 진리에 따라 삶을 바꾸려고 할 때 거듭남이 현실의 삶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 번의 결심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계속해서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보게 되고, 그것을 버리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래서 AC.29의 ‘회개의 상태’는 눈물이나 감정의 강도를 말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이전에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이끄는 대로 살았다면, 이제는 진리를 기준으로 자기 삶을 살피고 실제로 고치기 시작합니다. 아직 불완전하고 동기도 혼합되어 있으며 선의 근원을 자기에게 돌리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바로 그 상태에서 사람을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이렇게 보면 셋째 날의 식물과 회개는 서로 아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씨앗이 땅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싹을 내고 자라며 열매를 맺듯이, 진리도 기억 속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변화가 AC.29에서 말하는 ‘회개의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회개를 통하여 사람은 점차 자기 선과 진리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더 깊은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됩니다.

 

 

 

AC.29, 창1:11-13, ‘연한 풀에서 열매 맺는 나무까지 : 회개 안에서 자라나는 거듭남의 셋째 날’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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