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27(D1)-주일예배(2501, 눅12,35-40),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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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6qJdAJUEes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눅12:35-40)

 

 

영적 생명이 없는 자연적 생명은 자체로 잠든 것이지만,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연적 생명은 깨어있는 것이다. 영적 생명이 있는 자연적 생명은 사람이 각자의 빛 안에서 진리를 깨닫고 그것에 따른 삶을 살 때 얻을 수 있다. Natural life, considered in itself, or without spiritual life, is nothing else but sleep; but natural life, in which there is spiritual life, is watchfulness; and this cannot be acquired otherwise than by truths, which are in their own light and in their own day, when man is in the life according to them. (AR.158)

 

 

마태복음 26장에는 주님께서 십자가의 시험을 앞두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들어가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시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결국 완벽하게 이기실 것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제자들에게 내가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깨어있자 하셨을까요? 십자가의 고통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십자가를 지기까지 유대인들로부터 받을 폭행과 모욕이 두려워서였을까요? 물론 그러한 두려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세상에 계실 때 주님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육신을 입으신 인간이기도 하셨으니까요. 주님도 보통의 인간들처럼 죽음에 대한 공포를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겟세마네 동산 마지막 기도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이신 주님이 당신 안의 여호와를 향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고민이 육신의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의 시험은 주님 자신의 싸움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 개개인의 시험에서 주님이 그들과 함께 싸우시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죽게 되었다고 하신 것은 주님 자신이 죽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시험 가운데서 죽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시험이 올 때 인간은 주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수단으로 스스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그를 위해 싸우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싸워보려고도 않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시험이 오더라도 담대히 맞서 싸울 수 있고 그때 주님이 그 싸움에 관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시험 가운데서 넘어질 때 그렇게 죽을 것 같은 아픔을 느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내가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 하신 것은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에서 비롯한 연민과 안타까움의 표현입니다. 제자들에게 깨어있으라 당부하신 주님께서 본문 3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허리는 무슨 뜻일까요? 고대의 사람들은 부부의 사랑이 허리에서 나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허리의 영적 의미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등불은 진리 또는 믿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라는 것은 주님을 믿고 또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입으로만 주님을 믿고 행동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며 아무런 힘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이라야 악을 밀어내고 선을 가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하시는 것은 깨어있으라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36절에서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여기서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혼인집은 세상 혼인집이 아니라 영적인 혼인집인 천국을 의미합니다. 천국은 선과 진리 또는 믿음과 사랑의 결혼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볼 때,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오는 것은 주님이 천국을 통해 각 사람에게 오시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문을 두드리신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주님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리와 선의 유입(influx)을 뜻합니다. 주님은 선과 진리를 가르쳐 주시기 위해 항상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지만 정작 우리는 그 문을 열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야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하고 진실한 것이 흘러들어오고 지옥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 문을 열어드리는 것일까요? 그것에 대해 37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7 주인이 와서 깨어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깨어있는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그래야 마음을 열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깨어있는 것’에 대해 계시록 해설 187:3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깨어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깨어있어 주님으로부터 영적 생명을 받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진리에 속한 지혜와 지성의 빛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영적 생명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진리에 관한 한 캄캄한 어둠 속에 있다. 그러므로 전자는 깨어있는 것이고 후자는 잠자는 것이다.

 

주님은 깨어있는 사람에게 오시며, 그때 허리에 띠를 두르고 그들에게 하늘의 양식을 먹여주십니다. 말씀에서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는 것은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38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말씀에서 숫자 3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 과정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이 이경에나 삼경에 오시는 것은, 주님은 개인의 영적 상태를 처음부터 끝까지 주시하시면서 깨어있을 때 가르치신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깨어있는 종들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 여기 이경, 삼경하는 ‘경’(更)은 일몰부터 일출을 저녁 7시부터 두 시간씩 다섯으로 나눠 부르는 것으로, 각각 초경, 이경, 삼경... 식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경은 저녁 7시부터 밤 9시, 이경은 밤 9시부터 밤 11시, 삼경은 밤 11부터 새벽 1시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해 항상 깨어있기란 쉽지 않습니다. 보통은 졸기도 하고 깊은 잠에 빠지기도 하지요. 신앙인들이 잠잘 때 주님은 수시로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깨어있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는 동안 세 번 내려오셔서 제자들이 깨어있는지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깊이 잠든 것을 보시고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며 안타까워하셨지요.

 

주님은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시는데 오래도록 잠에서 깨어나지 못할 때 신앙인들에게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지옥의 영들에 의해 그동안 가지고 있던 선한 것, 진실한 것들이 파괴됩니다. 말씀에는 그것을 도둑이 들어 집을 뚫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도둑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우리는 잠만 잡니다. 그래서 본문 39절과 40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주님은 지옥의 도둑들이 언제 닥칠지 잘 아십니다. 그럼에도 말씀에는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하십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뭘까요? 주님은 계속 문을 두드리시는데 사람들은 아무 준비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맞으려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 준비란 어떤 것입니까?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순진과 겸손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문을 열어도 여는 것이 아닙니다. 순진과 겸손의 정도가 주님이 원하시는 만큼 될 때 주님과 인간 사이 접점이 생기고 교류가 일어납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그렇고 오늘 말씀에서도 그렇고 제자들에게 늘 깨어있으라 하셨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을 잃지 않고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하고, 한 편으로는 죄를 고백하고 악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말씀을 읽기보다 세상 소식과 재미에 빠져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허물을 먼저 보는 신앙인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깨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 주님으로부터 순진과 겸손을 비롯, 모든 종류의 선의와 근면, 순결한 부부 사랑이 흘러들어옵니다. 반대로 잠들어 있을 때는 자기를 높이는 마음과 미움과 나태와 온갖 종류의 정욕이 지옥으로부터 흘러들어옵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반성을 하는데도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실수를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니 하물며 세상사에만 관심을 두고 자아의 욕심대로만 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간이 지나도 아무런 영적 변화가 없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대한 처음 사랑과 이웃에 대한 순수한 정을 잃게 됩니다. 말씀에서는 그것을 도둑이 집을 뚫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우리의 그런 문제들에 대해 두 번 말씀하셨습니다. 한번은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일을 하든 속 사람으로부터 해야 하는데 겉 사람이 이런 속 사람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 그들의 눈이 피곤하다 하셨습니다. 눈은 영적인 지성, 또는 분별력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눈이 피곤하다는 것은 영적인 분별력이 없다는 말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없는 사람은 자기는 옳은 일을 한다 하는데 그것이 남에게는 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을 하고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깨어있음으로 해서 해결될 수 있습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하고 아는 만큼 행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때 우리의 영적 지성이 밝아지고, 겉 사람이 속 사람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3:3)

 

아멘

 

 

 

원본

2020-07-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2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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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8-20(D1)-주일예배(2500, 눅12,22-34),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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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6ExJ3jyOPZc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2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3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24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25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26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27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29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2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눅12:22-34)

 

 

주님의 섭리(Providence) 가운데 있는 만큼 그는 평안하며, 또한 신앙의 선에서 오는 평안 가운데 있는 만큼 그는 주님의 신성하신 섭리(the Divine Providence)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또한 아셔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주님의 신성하신 섭리(the Divine Providence of the Lord)는 일반적으로나 특별히, 아니 가장 작은 것 안에도 있으며, 그러면서도 영원한 것에 관한 것임을 알고 믿습니다. (AC.8478:4) Be it known also that insofar as anyone is in the stream of Providence, so far he is in a state of peace; also that insofar as anyone is in a state of peace from the good of faith, so far he is in the Divine Providence. These alone know and believe that the Divine Providence of the Lord is in everything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is in the most minute things of all, and that the Divine Providence regards what is eternal.

 

 

출애굽기 16장은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 생활 사십 년 동안 일용할 양식으로 먹이신 만나에 관한 장입니다.

 

1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엘림에서 떠나 엘림과 시내 산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니 애굽에서 나온 후 둘째 달 십오일이라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4 그 때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5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

6 모세와 아론이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저녁이 되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음을 알 것이요

7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이기에 너희가 우리에게 대하여 원망하느냐

8 모세가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가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9 모세가 또 아론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기를 여호와께 가까이 나아오라 여호와께서 너희의 원망함을 들으셨느니라 하라

10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매 그들이 광야를 바라보니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 속에 나타나더라

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2 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 하시니라

13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주위에 있더니

14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 같이 가는 것이 있는지라

15 이스라엘 자손이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서로 이르되 이것이 무엇이냐 하니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

16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너희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이것을 거둘지니 곧 너희 사람 수효대로 한 사람에 한 오멜씩 거두되 각 사람이 그의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거둘지니라 하셨느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더라

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20 그들이 모세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21 무리가 아침마다 각 사람은 먹을 만큼만 거두었고 햇볕이 뜨겁게 쬐면 그것이 스러졌더라

22 여섯째 날에는 각 사람이 갑절의 식물 곧 하나에 두 오멜씩 거둔지라 회중의 모든 지도자가 와서 모세에게 알리매

23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내일은 휴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안식일이라 너희가 구울 것은 굽고 삶을 것은 삶고 그 나머지는 다 너희를 위하여 아침까지 간수하라

24 그들이 모세의 명령대로 아침까지 간수하였으나 냄새도 나지 아니하고 벌레도 생기지 아니한지라

25 모세가 이르되 오늘은 그것을 먹으라 오늘은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오늘은 너희가 들에서 그것을 얻지 못하리라

26 엿새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일곱째 날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 일곱째 날에 백성 중 어떤 사람들이 거두러 나갔다가 얻지 못하니라

2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어느 때까지 너희가 내 계명과 내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려느냐

29 볼지어다 여호와가 너희에게 안식일을 줌으로 여섯째 날에는 이틀 양식을 너희에게 주는 것이니 너희는 각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아무도 그의 처소에서 나오지 말지니라

30 그러므로 백성이 일곱째 날에 안식하니라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 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이더라

 

아멘, 여기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는 오늘 본문에 비추어 한 가지 질문을 한다면 바로 이것인데요, 주님은 왜 만나를 그날 먹을 만큼만 거두라고 하신 걸까요? 만나를 미리 거둬 쌓아두는 것은 주님의 섭리를 믿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다음은 주님의 섭리에 대한, 스베덴보리를 통해 알려주신 주님의 가르침 중 하나인데요, 바로 스베덴보리 저,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세 번째 주제인 ‘주님의 신성하신 섭리는 범사에 무한하고 영원한 것을 바라보신다(In All That It Does the Lord’s Divine Providence Looks to What Is Infinite and Eternal)입니다. 즉 우리의 일상 범사 모든 일이 사실은 주님의 신성하신 섭리 가운데 있으며, 비록 우리는 모르고 무심코 살고 있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의 무한하고 영원한 결과를 주님은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섭리의 법칙을 사람들에게는 비밀로 하시고 말입니다. 이 사실, 이 명제를 깊이 붙들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결코 아주 사소해 보이는 것 하나까지도 함부로 아무렇게나 선택하거나 하지 않고, 대신 범사에 주님을 인정하는 가운데 참된 믿음으로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러한 주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에게는 주님으로부터 끊어지지 않고 만나가 흘러들어옵니다. 그러니 필요 이상으로 만나를 거둬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주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는 오직 주님만이 선이고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믿을 때, 주님과의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주님으로부터 받은 모든 선과 진리들이 자아에서 나오는 악하고 거짓된 것들에 의해 더럽혀지는데요, 그것이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일용할 만큼만 만나를 거두라 하시고요, 기도할 때에도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기도하라 가르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주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내용입니다. 22절입니다.

 

22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여기서 목숨과 몸은 사람의 진정한 생명인 영적인 생명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염려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염려한다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은,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주님이 주시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욕심을 낸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에게 주어진 몫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은 주어진 몫에 만족하지 않고, 늘 더 좋은 것,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진리를 깨우치면 그것을 가지고 자신을 돌아보고 잘못된 점을 고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러기보다는 자신의 머리에 쌓아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진리는 머리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적극 활용, 영적 생명인 의지와 사랑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진리가 실천된 게 선이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생명이 될 때, 기억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말과 행동을 통해 진리가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삶으로 옮기면서, 한편으로는 새로운 깨달음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진리의 깨달음이 없다고 조바심을 내거나, 많은 지식을 쌓아두려 하는 것은 좋지 않은데요, 주님은 각자의 믿음에 따라 필요한 만큼만 진리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신 것은 바로 그런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24절 말씀입니다.

 

24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말씀에서 까마귀는 보통 거짓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앞에서 말한,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믿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스스로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거짓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믿는 마음만이 존재하며, 능력이 있는 마음입니다. 즉 전자는 허상이지만, 후자는 실체라는 말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믿는 것이 현실적으로 능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아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거짓이며, 진리 앞에서 발붙일 수 없습니다. 모든 거짓은 어둠과 같아서 진실이 없는 곳에 잠시 나타났다가 진실의 빛이 비치면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그럼에도 거짓이 스스로 존재하며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주님이 그것을 허락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까마귀를 기르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거짓은 주님이 허락하실 때만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왜 거짓이 존재하도록 허용하실까요? 인간의 거듭남을 위해서입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시험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때 시험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자아와 세상으로부터 오는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하신 것입니다. 그 말씀은 ‘거짓을 허용하시는 것은 너희 인간을 위해서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까마귀를 기르시는 것은 인간의 거듭남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까마귀에 대해 말씀하시더니 이번에는 백합꽃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27절과 28절의 말씀입니다.

 

27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28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말씀에서 백합화는 신앙의 진리를 뜻합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 밝혀 주시는 내적 진리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진실합니다. 솔로몬의 옷이 아무리 아름답고 화려하다 하나 내적 진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습니다. 내적 진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아름답고 진실하며 깊이가 있습니다. 말씀에는 왜 그렇게 고귀한 진리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에 비유했을까요? 여기서 백합화는 앞에서 말한 만나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신앙의 진리이며 선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은 일용할 만큼만 만나를 거두고 다음 날까지 남겨두면 안 된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은 지금 이 백합화에도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백합화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이라 한 것은 일용할 만큼만 거둔 진리는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내일까지 쌓아두기만 하는 진리는 들풀과 같이 생명 없는 지식에 불과해지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백합화에 대해 오늘은 존재하지만 내일은 아궁이에 던져진다 하신 것입니다. 아궁이에 던져진다는 것은 내일까지 쌓아두는 진리는 생명 없는 지식에 불과하므로 지옥에 던져진다는 뜻입니다. 세상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쌓아두기만 하려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을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절로 31절입니다.

 

29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30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31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님은 영적인 것이든 세상 것이든 각자의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염려를 한다면 주님의 섭리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 먹을 것이 부족하거나 입을 것이 마땅치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마음의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삶 전체를 놓고 보면 그런 고통은 잠시뿐이고, 주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앞이 안 보이고 마치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았을 때도 마지막에는 주님께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주님의 나라를 구하라’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우선순위의 문제, 주객이 전도되는 문제인데요, 세상 사는 동안에는 의식주를 위한 것이나 그 밖에 재물이나 적당한 지위가 필요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목적이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적은 어디까지나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어야 하며, 그러한 물질들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를 구할 때 주님께서는 영적인 것과 더불어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함께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것에 늘 감사하면서 주님과 이웃을 위해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시면서 매일 먹을 만큼만 거두라 하셨습니다. 오늘도 내일도 만나를 내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내일 일을 걱정하였고, 그래서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고 서둘러 여러 날 먹을 만나를 한꺼번에 쌓아두었습니다. 그랬더니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부패해 버렸습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늘 내일 일을 걱정합니다.

 

※ 다다음 주인 9월 3일, 9월 첫 주는 저희 한결같은교회 창립 10주년 되는 날입니다. 참고로 오늘 예배는 이 거실에서 2,500번째 드리는 예배입니다. 10년 전인 2013년 9월 1일 주일, 집 이 거실에서 저와 아내, 그리고 큰애 우석이, 이렇게 세 사람이 모여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작은애 준석이는 군입대를 하여 함께할 수 없었지요. 이 자리에선 잠시 경제적인 부분, 생활 면에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목회의 동기가 그러면 안 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처음 몇 해 동안은 생활이 문제이기도 하여 전도를 비롯, 어떻게 하면 경제적으로 최소한의 자립, 곧 십일조 하는 가정이 열 가정만 있어도... 하는 고민이 많았고, 그래서 이런저런 무슨 전도세미나다 부흥세미나다 하는 데를 많이 쫓아다녔고, 또 목회와 더불어 잠시 부업도 하는 등 좀 기웃거리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그 모든 시도 가운데 주님은 그런 곁눈질을 기뻐하지 아니하셨고, 오히려 점점 더 영의 일과 영성, 그리고 천국 사모함의 마음을 주셔서 갈수록 영적 체험과 수도원, 그리고 현재는 스베덴보리에 전념케 하셨습니다. 스베덴보리에 전념한다는 것은 주님이 그를 통해 알리신 일련의 계시를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는 일을 말합니다. 이 모든 지난 10년 세월 동안 그러나 주님은 참 많은, 소위 까마귀들을 통해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공급, 저희로 굶지 않게, 오히려 배부르게 하셨고, 있어도 없어도, 부하고 빈해도 그저 덤덤, 천사들처럼 모든 걸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가장 기뻐하는 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참고로, 이스라엘 백성이 사십 년 동안 아침마다 일용할 양식으로 만나를 거두러 나갔던 것처럼 지난 세월 한결같이 저희의 만나를 위해 수고한 저희 사모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이 모든 일들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인 ‘천국의 비밀’ 8478번 글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음식이나 의복을 걱정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람이 자신을 위해 미리 대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에 반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일 일을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몫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믿는 것이고, 천국의 것들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이 세상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땅끝에서부터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 당신의 교회를 섬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현실에 대해 지나친 걱정을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늘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몫에 만족하며,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진하게 믿고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눅12:33)

 

아멘

 

 

 

원본

2020-07-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8-2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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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이것이 말씀의 속뜻, 즉 겉 글자의 뜻으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말씀의 생명 그 자체(its veriest life)입니다. 그런데 이 아르카나(arcana, 秘義, 말씀에 담긴, 주님이 숨겨놓으신 의미)는 너무나 엄청나 이 정도의 볼륨들 가지고는 그 속에 담긴 것을 도저히 다 담아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서는 아주 조금만 제시하는데요,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도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게 거듭남이며, 거듭남이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천사들이 말씀을 지각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인데요, 그들은 글자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심지어 어떤 단어 하면 탁 떠오르는 의미조차 전혀 모릅니다. 나라, 도시, 강과 인물 등, 말씀 내 역사, 예언 쪽에 매우 자주 등장하는 이런 것들 역시 더더욱 모릅니다. 그들은 오직 그 단어들과 이름들의 의미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낙원의 아담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를 지각합니다. 물론, 그 교회 자체가 아니라 그 교회가 가졌던 주님 신앙(the faith in the Lord)을 지각하는 것이지요. 노아 하면 그들은 태고교회의 후손들과 함께 살아남아 아브람의 때까지 계속되었던 교회를 지각합니다. 아브라함 하면 천사들은 결코 아브라함 개인이 아닌, 그가 표상한 어떤 구원 신앙(a saving faith)을 지각하는 등 말이지요. 천사들은 이렇게 단어들과 이름들하고는 완전 별개인 영적, 천적인 것들을 지각합니다. This then is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its veriest life, which does not at all appear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But so many are its arcana that volumes would not suffice for the unfolding of them. A very few only are here set forth, and those such as may confirm the fact that regeneration is here treated of, and that this proceeds from the external man to the internal. It is thus that the angels perceive the Word. They know nothing at all of what is in the letter, not even the proximate meaning of a single word; still less do they know the names of the countries, cities, rivers, and persons, that occur so frequently in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They have an idea only of the things signified by the words and the names. Thus by Adam in paradise they perceive the most ancient church, yet not that church, but the faith in the Lord of that church. By Noah they perceive the church that remained with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at continued to the time of Abram. By Abraham they by no means perceive that individual, but a saving faith, which he represented; and so on. Thus they perceiv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entirely apart from the words and names.  

 

 

AC.65

제가 말씀(the Word)을 읽고 있을 때, 어떤 사람들이 천국 뜰 첫 번째 입구로 옮겨져 거기서 저와 대화를 나누었는데요, 그들은 말하길, 자기들은 그 안에 있는 무슨 단어나 글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지만, 대신 그 가장 가까운 속뜻이 뭔지는 이해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너무도 아름답고, 그런 일련의 순서로 자기들을 깊이 감동, 감명케 한다고, 그것은 영광이라고 가슴 벅차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Certain ones were taken up to the first entrance court of heaven, when I was reading the Word, and from there conversed with me. They said they could not there understand one whit of any word or letter therein, but only what was signified in the nearest interior sense, which they declared to be so beautiful, in such order of sequence, and so affecting them, that they called it glory.  

 

 

AC.66

말씀(the Word)에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 번째 스타일은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다음과 같았는데요, 그들은 어떤 지상에 속한, 세속적인 것들을 언급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 천적인 것들을 생각하면서 하는 그런 것이었지요. 그들은 이만하면 그 영적, 천적인 의미를 충분히 띠겠다 싶은 것들(representatives)을 가지고 언급했을 뿐 아니라, 또한 거기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위해 스토리 텔링 같은 일종의 그럴듯한 역사 시리즈로도 만들었는데요, 이런 식의 표현 방식으로 그들은 정말 최고 수준의 즐거움을 누렸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예언이 바로 이런 스타일입니다. There are in the Word, in general, four different styles. The first is that of the most ancient church. Their mode of expression was such that when they mentioned terrestrial and worldly things they thought of the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which these represented. They therefore not only expressed themselves by representatives, but also formed these into a kind of historical series, in order to give them more life;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very highest degree. This is the style of which Hannah prophesied, saying: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의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삼상2:3) Speak what is high! high! Let what is ancient come out of your mouth. (1 Sam. 2:3)

 

※ 위 우리말 개역개정 번역은 사실 많이 빗나간 번역입니다. 병행 본문(영어)을 보니 너무나 다르지요? 태고교회, 고대교회 같은 이런 배경, 즉 아르카나를 전혀 모르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런 표상(表象, representatives)을 시편에서는,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Dark sayings of old)이라고 했습니다. Such representatives are called in David, “Dark sayings of old” (Ps. 78:2–4).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시78:2-4)

 

창조, 에덴동산 등 아브람의 때까지 내려오는 이들 자세한 내용들을 모세는 태고교회의 후손들로부터 얻었습니다. These particulars concerning the creation, the garden of Eden, etc., down to the time of Abram, Moses had from the descendants of the most ancient church.  

 

[2] 두 번째 스타일은 역사적 기술이며, 아브람의 때부터 이어진 모세의 책들에서, 그리고 여호수아, 사사 시대, 사무엘, 열왕기의 책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책에서는 역사적 사실들이 글자의 뜻 그대로입니다. 즉 실제 역사 그대로 기록된 것입니다. 하지만 일반적이든, 특별하게든 속뜻으로는 아주 다른 것들이 그 안에 들어 있는데요, 그것은 주님의 신성하신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음이며,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순서대로 보시게 됩니다. 세 번째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인데, 이것은 태고교회 시절 아주 높은 존경을 받았던 스타일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스타일은 그러나 계속 연결되어 태고 스타일 같은 역사적 형태로 남지를 못하고 그만 끊어져, 이제는 속뜻, 곧 그 안에 가장 깊은 아르카나(arcana, 秘義)가 있어 아름답게 연결된 순서로 이어지며, 겉 사람과 속 사람, 교회의 여러 다양한 상태들, 천국 그 자체, 그리고 주님을 향한 가장 내적 의미와도 관련되는, 이런 속뜻을 제외하고는 이제는 거의 이해할 수조차 없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스타일은 다윗의 시편 스타일입니다. 이 스타일은 예언적 스타일과 상용어 스타일 간 중간 스타일입니다. 주님은 이 스타일에서 속뜻으로는 왕으로서의 다윗의 인격을 통해 다루어지십니다. The second style is historical, which is found in the books of Moses from the time of Abram onward, and in those of Joshua, Judges, Samuel, and Kings. In these books the historical facts are just as they appear in the sense of the letter; and yet they all contain, in both general and particular, quite other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of which, by the Lord’s Divine mercy, in their order in the following pages. The third style is the prophetical one, which was born of that which was so highly venerate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style, however, is not in connected and historical form like the most ancient style, but is broken, and is scarcely ever intelligible except in the internal sense, wherein are deepest arcana, which follow in beautiful connected order, and relate to the external and the internal man; to the many states of the church; to heaven itself; and in the inmost sense to the Lord. The fourth style is that of the psalms of David, which is intermediate between the prophetical style and that of common speech. The Lord is there treated of in the internal sense, under the person of David as a king.

 

※ 이렇게 해서 창세기 1장을 마칩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진행됩니다. 즉 본문 주석 앞뒤로 어떤 아르카나가 곁들여져 말씀을 읽는 우리의 이해를 깊게, 아주 넓고 깊게 열어 줄 것입니다.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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