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days), 여섯 시기(periods)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해설

AC.6은 짧은 한 문장이지만, 이어지는 AC.7-13을 읽는 방향을 정해 주는 중요한 개요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을 사람의 거듭남에서 이어지는 여섯 상태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빛과 어둠, 궁창과 물, 땅과 식물, 해와 달과 별, 물고기와 새와 짐승, 그리고 마침내 사람의 창조를 읽을 때에는 그 자연적 대상들이 속뜻에서 사람의 거듭남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 주목할 말은 연속적 상태들(successive states)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을 서로 무관한 여섯 가지 영적 주제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첫째 상태에서 둘째 상태로, 둘째에서 셋째로 이어지며 마침내 여섯째 상태에 이르는 하나의 연속된 거듭남의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앞으로 AC.7-13에서 각각의 상태를 살펴보면 앞의 상태에서 없던 것이 다음 상태에서 나타나고, 사람의 내적 생명이 점차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days)이라고 한 뒤 곧바로 시기(periods)라고 덧붙인 것도 중요합니다. 여기서 을 자연계의 24시간으로만 읽어서는 그가 설명하려는 속뜻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1의 날들은 속뜻에서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거쳐 가는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이 점은 뒤의 AC.23에서 이 상태를 의미한다는 설명과 함께 더욱 분명해집니다.

 

다만 이것을 그러므로 1 자연계의 창조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라는 식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6에서 스베덴보리가 지금 설명하려는 것은 창1에 담긴 속뜻입니다. 문자에는 천지와 빛과 물과 땅과 광명체와 생물과 사람의 창조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 문자 안의 속뜻에서는 사람의 거듭남, 곧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이 때문에 창조거듭남은 이 장의 속뜻에서 깊이 연결됩니다. 거듭남은 이미 완성된 사람이 스스로를 조금 더 개선하는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여섯 상태를 보면 처음의 사람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에서 출발하고, 그 가운데 빛이 나타나며,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하는 것들이 구별되고, 선과 진리가 생겨나고, 마침내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말하고 행하는 상태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창조의 질서가 속뜻에서는 사람 안에 새로운 영적 질서가 형성되는 과정으로 열립니다.

 

여기서 또 하나 놓치지 말아야 할 표현이 전반적으로(in general)입니다. AC.6은 여섯 상태의 세부 내용을 아직 설명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AC.7-13에서 각 상태를 하나씩 개괄하기에 앞서, 이 여섯 날 전체가 무엇을 다루는지를 먼저 알려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한 문장만 가지고 각 상태의 기간이나 개인별 진행 방식까지 자세히 추론하기보다, 우선 여섯 날은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 상태를 나타낸다는 기본 원리를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 원리를 알고 나면 창1의 반복되는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도 단순한 시간 표시와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스베덴보리는 뒤에서 저녁과 아침을 사람의 상태 변화와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창1의 순서를 따라간다는 것은 자연계의 창조 순서를 따라가는 것인 동시에, 속뜻에서는 한 사람이 이전 상태에서 새로운 상태로 옮겨 가는 거듭남의 흐름을 따라가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섯 상태를 인간이 스스로 밟아 올라가는 자기계발의 여섯 단계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장 전체에서 생명과 빛과 선의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 사람이 처음에는 선과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다가 점차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아 가는 것도 중요한 흐름이 됩니다. 따라서 창1의 거듭남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사람이 받아들이면서 새롭게 되어 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AC.6 자체는 아직 인간의 자유와 거듭남에서의 참여 방식을 설명하는 글이 아니므로 여기에서 그 문제를 자세히 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근원과 능력이 주님에게 있다는 것과, 1의 여섯 날이 그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AC.6은 창1의 속뜻을 읽기 위한 첫 번째 안내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첫째 날에는 자연계에서 무엇이 만들어졌는가?라는 질문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사람의 거듭남에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가?라는 질문도 함께 하게 됩니다. 그리고 AC.7부터 그 여섯 상태가 하나씩 펼쳐집니다.

 

첫째 상태는 거듭남 이전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서 시작합니다. 둘째 상태에서는 주님에게 속한 것과 사람 자신의 것 사이의 구별이 시작됩니다. 셋째 상태에서는 회개 가운데 선한 일을 행하기 시작하지만 아직 그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합니다. 넷째 상태에서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 안에서 불붙고, 다섯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자신을 굳게 하며, 여섯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부터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사랑으로부터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이 전체 흐름이 바로 AC.6이 말하는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입니다.

 

그러므로 창1의 여섯 날은 속뜻에서 여섯 개의 서로 떨어진 교훈이 아니라 하나의 거듭남이 진행되는 여섯 연속적 상태입니다. AC.6은 아직 그 상태들을 설명하지 않고 문을 열어 줄 뿐입니다. 이제 AC.7부터 그 첫째 상태가 무엇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AC.7, 창1 개요, '첫 번째 상태'

AC.7 첫 번째 ‘상태’(state)는 앞서는(precede) 상태로서, 유아기에서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에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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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이 모든 말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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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럭스’(influx, 流入)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인플럭스란,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과 사랑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인간 안으로 들어오는 흐름을 뜻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생명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기본 생각입니다.

 

이 흐름의 방향은 항상 ‘위에서 아래로’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으로, 그리고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흐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영적 차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생명은 먼저 이 속 사람에 닿습니다. 그다음, 이 생명이 겉 사람의 마음으로 흘러 들어가 우리의 생각과 의지, 곧 우리의 삶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생각과 의지가 육체의 행동으로 표현됩니다.

 

이 구조를 하나의 그림처럼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마치 태양에서 빛과 열이 내려와 식물에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이 줄기와 잎을 통해 바깥으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태양이 없으면 식물은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태양의 빛은 먼저 식물의 내부 생명에 작용하고, 그다음 잎과 꽃이라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삶도 이와 비슷하다고 설명합니다. 주님이 영적 태양이시며, 그 빛을 먼저 받는 자리가 바로 인간의 속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생각과 의지가 사실은 완전히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선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작용입니다.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 자체를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 점을 설명할 때, ‘주님만이 생명 그 자체이시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인플럭스는 강제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은 항상 인간 안으로 흐르고 있지만, 인간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흐름을 받아들여 선과 진리를 사랑하는 방향으로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고 자기중심적인 방향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때문에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관계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속 사람이 열려 있으면 주님의 생명이 겉 사람으로 잘 흐릅니다. 그러면 사람의 생각과 행동도 점점 더 선과 진리에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속 사람이 닫혀 있으면 그 흐름이 겉 사람으로 내려오지 못합니다. 그 경우 겉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아니라 자기 사랑이나 세상 사랑에서 나온 생각에 의해 움직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바로 이 구조 속에서 설명합니다. 거듭남은 겉 사람이 단순히 도덕적으로 조금 나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속 사람이 열리고, 그 속 사람을 통해 주님의 생명이 겉 사람으로 내려오는 과정입니다. 그 결과 겉 사람의 생각과 습관이 점점 변화됩니다. 그래서 그는 거듭남을 ‘속 사람이 새로워지고, 겉 사람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인간 삶의 많은 현상이 설명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진리를 듣고 마음 깊이 감동을 받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같은 말을 들어도 전혀 움직이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속 사람의 상태에서 찾습니다. 속 사람이 열려 있으면 진리가 들어와 마음을 밝히지만, 속 사람이 닫혀 있으면 같은 진리도 단순한 지식으로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을 단순히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로 설명합니다. 인간이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속 사람이 열리기도 하고 닫히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흐름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 모든 설명을 하나로 묶어 보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는 매우 명확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그 생명은 속 사람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흐릅니다. 마지막으로 겉 사람을 통해 행동과 삶으로 나타납니다. 인간의 자유는 이 흐름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 있습니다.

 

이 지점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여러 표현들이 훨씬 또렷하게 보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주님은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계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바로 속 사람의 중심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인간의 삶은 그 사랑에 따라 형성된다’는 말은 그 생명이 겉 사람을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설명하는 표현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까지 질문해 오신 내용들을 하나로 연결해 보면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 나타납니다. 인간은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고, 주님의 생명은 속 사람을 통해 인간 안으로 흐릅니다. 그리고 죽음은 이 구조 가운데 육체라는 바깥 도구가 벗겨지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은 후에도 여전히 생각하고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설명이 서로 연결된 하나의 구조 안에 들어 있습니다.

 

 

 

SC.39, ‘수도원, 수도사, 성인과 스베덴보리’

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 담았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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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7, ‘인간의 겉 사람 가운데 육체와 관련된 부분’에 대하여

위 SC.29 설명 중 ‘인간은 죽은 후 얼마나 빨리 영이 되는가?’에서 ‘육체의 기능이 멈추면 인간의 겉 사람 가운데 육체와 관련된 부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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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29 설명 중 인간은 죽은 후 얼마나 빨리 영이 되는가?’에서 육체의 기능이 멈추면 인간의 겉 사람 가운데 육체와 관련된 부분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그러면 겉 사람육체와 관련된 부분말고 또 다른 부분들이 있다는 말인가요?

 

목사님께서 짚으신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서 ‘겉 사람’은 단순히 ‘육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겉 사람에는 육체도 포함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겉 사람은 ‘+ 자연적인 마음(자연적 이해와 의지)’을 함께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설명할 때 크게 ‘속 사람’과 ‘겉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속 사람은 영적 차원의 인간이며, 주님과 직접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여기에는 영적 사랑과 영적 이해가 자리합니다. 반면 겉 사람은 자연계와 연결된 인간입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생각, 판단, 기억, 감정, 행동 등이 포함됩니다. 그리고 이 겉 사람의 가장 바깥쪽 도구가 바로 육체입니다.

 

그래서 겉 사람은 크게 두 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연적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입니다. 자연적인 마음에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기억, 지식, 추론, 감정, 상상 같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기억 지식(memory-knowledge)이나 자연적 이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육체가 살아 있을 때, 감각을 통해 계속 자료를 받아들이며 작동합니다.

 

육체가 죽으면 이 구조 가운데 가장 바깥쪽 층, 곧 육체와 감각 기관이 먼저 멈춥니다. 눈, 귀, 신경, 뇌 같은 물질 기관들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상 세계의 빛과 소리를 감지하는 기능은 끝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겉 사람의 ‘자연적인 마음’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마음은 여전히 영적 형태로 남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생각하고 기억하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생각과 기억의 근본 기능은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육체는 단지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였습니다. 죽음은 그 도구가 제거되는 사건일 뿐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왜 사람이 사후 세계에서도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지도 설명됩니다. 사람의 기억, 성격, 사랑의 방향, 생각하는 습관 등이 그대로 이어집니다. 겉 사람의 자연적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더 이상 물질계의 감각을 통해 작동하지 않고, 영계의 환경 속에서 작동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설명할 때 ‘사람은 여전히 사람이다’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는 죽은 후의 인간을 흐릿한 영혼이나 추상적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또렷한 인간으로 존재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마음의 상태가 곧바로 형태와 환경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리하면 이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겉 사람에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와 감각 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마음입니다. 죽을 때 사라지는 것은 육체와 감각 기관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마음은 영적 형태로 계속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은 후에도 생각하고 기억하고 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구조를 조금 더 넓게 보면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는 인간을 세 층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가장 깊은 층은 ‘속 사람’으로서 주님과 연결되는 영적 차원입니다. 그다음은 ‘겉 사람의 마음’으로서 자연적인 생각과 기억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가장 바깥쪽이 ‘육체’입니다. 죽음은 이 세 층 가운데 가장 바깥층이 벗겨지는 사건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질문하신 이 지점은 사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구조 때문에 ‘거듭남’도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육체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에서 시작되어 겉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그는 늘 ‘속 사람이 열리고, 겉 사람이 새롭게 된다’는 방식으로 구원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SC.38,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길, 곧 ‘influx’에 대하여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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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6, ‘인간은 죽은 뒤 거의 즉시 영의 상태로 깨어난다’에 대하여

위 설명들 중 SC.29에 보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죽은 뒤에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즉시 영의 상태로 깨어납니다. 다시 말해 사람이 죽는 순간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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