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속 사람’(internal man)은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앞으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중요한 개념입니다. 처음에는 ‘겉으로 보이는 나’와 ‘마음속의 나’ 정도로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그보다 훨씬 깊은 인간의 영적 구조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지나치게 복잡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단순히 ‘몸은 겉 사람이고 마음은 속 사람’이라고만 이해해 두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에서 스베덴보리가 속 사람을 처음 언급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인간의 구조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사람에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듯이 말씀에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외적인 것이 내적인 생명과 분리되면 몸만 남은 것과 같듯이, 말씀도 그 내적인 생명과 분리하여 문자만 보면 ‘영혼 없는 몸’과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에서는 우선 ‘인간에게 내적인 차원과 외적인 차원이 있다’는 기본적인 구별만 붙잡아도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속 사람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속 사람을 단순히 ‘남에게 보이지 않는 내 마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화를 낼 수도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보이지 않는 생각이라고 해서 모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욕망과 계산, 기억과 상상, 세상적인 판단 역시 몸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사람 안에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다고 해서 곧 영적인 의미의 속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중요한 구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보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에 더 가깝습니다. 인간은 자연계에 살면서 감각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비교하고, 추론하며, 자연적인 필요와 목적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외적 또는 자연적 차원과 깊이 관계됩니다. 반면 인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천국의 질서에 따라 자연적인 삶을 바라보고 이끌 수 있는 더 내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속 사람’에 접근하는 더 정확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 역시 단순히 육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몸은 물론 인간의 가장 외적인 부분에 속하지만, 스베덴보리가 AC 전체에서 말하는 ‘겉 사람’ 또는 ‘외적 인간’은 흔히 자연적인 마음과 그에 속한 애정과 사고까지 포함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사용하는 지식, 기억, 감각에 기초한 사고, 자연적인 욕구와 관심 등이 이 외적 차원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속 사람=마음, 겉 사람=몸’이라는 이분법으로 이해하면 뒤의 AC를 읽으면서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영적 차원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속 사람 안에는 언제나 선한 생각만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은 거듭나기 전에는 자신의 내적 질서가 제대로 열려 있지 않으며, 자연적인 욕망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삶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적인 것을 열고 질서 있게 하시며, 그곳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점차 외적인 삶에까지 내려가도록 이끄십니다.
여기서 ‘유입’이라는 개념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님께서 속 사람이라는 한 지점에 직접 생명을 넣으시고 그것이 겉 사람으로 흘러간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그려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에 여러 내적·외적 단계와 질서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생명과 질서는 근원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의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삶에 이른다’는 기본 방향만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겉으로 나쁜 행동 몇 가지를 고쳤다고 해서 곧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평판 때문에 정직할 수도 있고, 처벌이 두려워 악을 피할 수도 있으며, 자기 이익을 위해 친절하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행동만 보면 선해 보이지만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의지와 이해가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겉 사람은 중요하지 않고 속 사람만 중요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남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속에서 선을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악을 행한다면 아직 질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겉으로 선하게 행동하면서 속에서는 오직 자기 이익만을 사랑하는 것도 온전한 질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질서 있게 하실 때, 사람이 내적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선과 진리가 자연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도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어느 날 자기 속 깊은 곳에서 완전히 새로워진 다음 그 변화가 자동으로 밖으로 퍼져 나간다는 단순한 과정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자연적인 삶에서 자신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여 피하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외적인 삶의 선택과 훈련도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사용하여 사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함께 질서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에는 ‘안에서 밖으로’라는 질서가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말씀을 배우고 행하는 외적인 과정도 그 질서를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속 사람’을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중심’(inmost)과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가장 깊은 것, 내적 인간, 합리적 차원, 자연적 차원 등을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속 사람=인간의 가장 깊은 지점’이라고 고정하면 이후 그의 인간론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AC.3에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세부 구조를 미리 모두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연적인 외적 차원보다 더 내적인 영적 차원이 있으며 인간은 그 내적인 것을 통하여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별은 사후의 인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그때 처음 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지상에서 살 때부터 본질적으로 영이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그 영적 인간에게서 물질적인 몸이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겉 사람은 모두 없어지고 속 사람만 남는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몸은 벗지만, 사람에게는 사후에도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질서가 있으며, 기억과 사고와 애정도 지속됩니다. 지상에서 형성된 삶의 성질이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이렇게 말해도 좋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행동보다 더 깊은 곳이 있어. 주님께서는 우리가 겉으로 착한 척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선한 것을 사랑하고 진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셔. 그리고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우리의 말과 행동에도 나타나도록 이끌어 주셔.’ 이것은 속 사람의 모든 구조를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속 사람 = 남에게 숨긴 생각’이라는 오해를 피하면서 거듭남의 방향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AC.3으로 돌아가면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말씀에 비유했는지가 좀 더 분명해집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가 자연계에서 읽고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주어진 외적 형태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외적인 것이 내적인 생명을 표현하도록 창조된 것처럼 말씀의 문자도 그 안의 내적인 것을 담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속 사람’을 이해하는 핵심은 ‘내 마음속에 숨겨진 진짜 나’를 찾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자연적인 삶 전체를 새로운 질서 안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따로 움직이지 않고, 내적으로 사랑하고 인정하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겉 사람과 속 사람'
AC.3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겉 글자만 보겠다는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기독교 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과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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