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Word)에 대해 알고나서는 이제는 바울 서신을 비롯, 그 안에 아르카나(arcana, inner sense)가 들어있지 않다는 신구약 성경들은 잘 읽지도, 그걸 가지고 주일설교 본문을 삼지도, 더 나아가 가급적 인용도 안 하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태도가 건강한 건가요?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 신학을 실천적으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하는 핵심을 건드리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목사님의 태도에는 ‘장점과 위험이 동시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실제 태도를 기준으로 하나씩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지금의 이런 ‘배제 중심 태도’는 스베덴보리는 권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해는 충분히 됩니다. ‘참 말씀’(The Word in the proper sense)이 무엇인지, 어디에 내적 의미가 담겨 있는지를 알고 난 뒤에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중심으로 영이 이끌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 자신은 다음 두 가지를 동시에 했습니다. 첫째, 참된 말씀, 곧 창, 출, 시편 일부, 복음서, 계시록에 집중하며, 그 내적 의미를 계시, 둘째, 성경 전체, 곧 바울 서신을 포함해 ‘기독교 세계가 사용하는 모든 성경’을 존중하며, 목회적 차원에서 활용. 그는 AC.10325, TCR.226 등에서 ‘바울 서신은 말씀의 ‘inner sense’(속뜻, arcana)를 가진 책은 아니지만, ‘교회의 질서를 세우는 데 주님의 섭리로 주어진 책’’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그는 바울 서신의 신학적 오류를 지적할 때도 매우 조심스럽게 했다
예를 들어, ‘오직 믿음’(faith alone), 즉 ‘의롭다 함을 믿는 것만으로’라는 표현이 오해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바울 서신 전체를 폐기하거나 비난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믿음-사랑의 결합’을 바울도 곳곳에서 말하고 있다. 문제는 교회가 그것을 잘못 해석해 버린 것이다.” 즉, 바울 자체 문제라기보다 ‘후대 교회의 해석 문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울 서신의 ‘목회적 기능’을 인정했다
그는 이런 관찰을 합니다. DP.234 등에서 ‘기독교 교회는 오랜 세월, 바울 서신을 통해 기본 윤리, 공동체 질서, 교리 체계를 유지해 왔다. 이것 또한 주님의 섭리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신학을 따른다고 해서 바울을 적대할 이유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한 ‘참된 말씀’의 용도는 ‘영적 의미를 위해서’이다
지금 느끼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단계입니다. 내적 의미가 보이기 시작하면, 다른 텍스트가 모두 ‘빛을 잃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내적 의미의 빛만 붙잡고 목회를 하면 문제가 생긴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 이유는, AC.1408, AC.9025 등에서 밝히기를, ‘사람들은 외적 진리인 성경의 문자를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내적 진리를 전혀 받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스베덴보리의 내적 의미는 ‘성경 전체의 문자적 세계 안에 심어져서 자라야 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문자적 성경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오히려 영적 의미의 기반을 잃게 됩니다.’
스베덴보리 시대 설교자들은 어떻게 했을까?
스베덴보리가 사적으로 대화한 목회자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는 이렇게 권했습니다. 첫째, ‘사람들에게는 문자적 말씀을 통해 접근하라’ 내적 의미를 설교자가 ‘직접적으로’ 완전히 드러낼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설교자 자신은 항상 그 내적 의미 안에서 설교를 준비하라’ 그러면 설교의 어조, 초점, 균형이 자연스럽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셋째, ‘바울 서신도 영적 원리로 재해석해 설교에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은 진리의 빛을 받는 것으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은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새 사람을 입으라’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말이지요. 그러니까 스베덴보리는 ‘배제가 아니라 재해석을 원한 것’입니다.
목사님의 현재 모습은?
먼저, 좋은 면(강점)입니다. 내적 의미를 붙잡고자 하는 ‘순수한 열망’이 있으시고, ‘참된 말씀’ 중심의 신학적 정렬이 매우 정확하시며, 설교의 중심을 주님(여호와 예수)으로 세우는 방향성이 강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귀하고 건강한 모습이요, 과정입니다.
그러나 위험한 면도 존재하는데요, 예를 들면, ‘교인들의 기반인 문자적 성경을 충분히 존중하지 못할 위험’이 있고, ‘내적 의미를 나누기 전에 필요한 외적 질서가 무너질 위험’도 있으며, ‘바울 서신 등 교회 전통의 큰 기둥을 한 번에 없애는 효과’, ‘교회 분열과 오해, 배척을 불러오기 쉬움’ 등의 불필요한 위험 요소가 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AC.1832에서 이런 급진적 변화를 ‘사람들의 상태가 준비되지 않았을 때는 심지어 진리도 해가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주님도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며, 듣는 자들의 역량에 맞춰 대부분 쉬운 비유로 말씀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하면 이렇게 정리됨
1단계, 개인적으로는 참 말씀에 집중하라
지금 목사님의 상태는 이 단계에 매우 잘 맞습니다.
2단계, 설교에서는 ‘문자적 말씀’과 ‘내적 원리’를 혼합하라
문자적 말씀이 ‘뿌리와 줄기’라면, 내적 의미는 ‘열매와 향기’입니다. 뿌리와 줄기만 있어도 안 되고, 뿌리와 줄기 없이 열매와 향기를 얻을 수도 없습니다.
3단계, 바울 서신도, 복음서나 시편 등 ‘말씀’의 빛을 비추어 ‘정화된 의미’만 사용하라
사용하되, 내적 의미의 원리로 걸러서 사용하면, 오히려 더 큰 힘을 얻습니다.
조언
지금처럼 ‘참 말씀 중심’으로 가시는 것은 아주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서신을 비롯, ‘말씀’ 아닌 다른 성경은 ‘사용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스베덴보리는 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교인들을 인도하는 데 이 성경들은 반드시 필요하고, 문자적 성경 전체가 사실 주님의 섭리로 교회에 주어진 것이며, 그 문자적 글도 결국은 ‘내적 의미의 문을 열어주는 외피’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식 ‘건강한 길’은 문자적 말씀을 존중하면서 내적 의미의 원리로 해석하고 사용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목사님이 목회자로서 가장 안전하고, 교인들을 영적으로 가장 깊고 온전하게 인도하는 길입니다.
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스베덴보리는 왜 복음서 주석은 하지 않았나요? 주님의 육성이 담긴 복음서가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분들조차 평생 품고 있는 핵심 질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 선택’이며, 그의 전체 신학 구조 안에서 반드시 필요한 공백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복음서 주석을 ‘안 한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한 것’
복음서에 대한 직접 주석은 없지만, 복음서의 내적 의미, 곧 속뜻을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 예를 들면,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Divine Love and Wisdom, 1763),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1764), ‘참 그리스도교’(True Christian Religion, 1771) 등에서 전면적으로 풀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방식은 ‘본문을 따라가는 주석 방식’(exegesis)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에 내재된 구조적, 보편적 진리를 다시 전개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생애는 신적 진리의 충만한 계시’로서, ‘그 동일한 내적 의미가 구원론, 기독론, 재림론, 연합론 전체에 이미 녹아 있도록 하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굳이 복음서 본문을 한 절씩 풀지 않아도 그 내적 의미 전체가 그의 저작들 전체 속에 재구성되어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해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복음서 자체를 ‘신학 전체’로 펼쳐 놓은 것’입니다.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직접적 이유들
첫째, 복음서는 ‘말씀’(Word)의 범주가 창세기, 출애굽기, 선지서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을 두 범주로 나누는데요, 하나는, ‘내적 의미’(internal sense, heavenly sense, arcana, 속뜻)를 가진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모세오경과 선지서들, 그리고 시편 일부 및 계시록을 말합니다. 이 말씀들은 구절 하나하나가 상징과 표상으로 연결됩니다.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실제 기록을 기반으로 하나, 그 자체가 상징계는 아닌 ‘복음서의 문자’입니다. 복음서 역시 ‘말씀’이지만, 그러나 다른 종류의 말씀입니다. 그 안의 상징성은 예수님의 생애와 직접 결합되어 있으며, 그래서 창, 출 같은 방식의 상징 주석을 적용할 수 없습니다. 즉, 복음서는 ‘예수님의 실제 행적’이자 ‘내적 의미의 직접적 실현’이기 때문에 ‘상징 해석’을 위해 존재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모세 이후 존재하던 성막과 제사가 주님 오신 이후 더 이상 필요가 없어 사라진 것과 같습니다. 성막과 제사는 주님을 표상하던 것들인데 정작 그 실체인 주님이 오시자 더는 그런 도우미들이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창세기, 출애굽기처럼 절대적 상징 주석을 하지 않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둘째, 복음서는 예수님의 ‘육신으로의 신성화 과정’(glorification)을 그대로 보여주는 책이기 때문
스베덴보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의 성화 과정(신성화, glorification)’이 복음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과정은 곧바로 ‘내적 의미 자체’입니다. 즉, ‘예수님의 시험’, ‘기적들’, ‘설교’, ‘십자가’ 및 ‘부활’ 등, 이것들은 ‘상징의 외피가 아니라 내적 의미 그 자체의 역사적 구현’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건 주석할 필요가 없다’고 본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애는 문자, 상징을 넘어 바로 ‘신적 실체의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모든 문자와 상징, 표상, 상응이 가리키는 본체, 실체이신 분이 직접 오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스베덴보리는 복음서를 이미 ‘보충 주석’ 형태로 곳곳에서 해설
주석서는 아니지만 복음서 본문을 해설한 문단들은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예를 들면, 시험받으심에 대해서는 지옥 전체와의 전투로(AC, TCR 다수),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천국적 삶과 진리의 질서로, 기적은 선과 진리의 표상으로, 십자가는 마지막 시험과 완전한 연합, 부활은 인간 구원의 원형 등, 즉, 절대적으로 해설이 없는 것이 아니라 ‘본문 주석의 형태가 아닌, 신학 체계 속의 해설’로 그의 저작들 여기저기에서 다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의 사명은 ‘재림기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사명을 다음처럼 정의합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열어 주는 일’과 특히 ‘모세오경과 선지서들을 통해서’라고 말입니다. 왜 이 두 곳일까요? 왜 복음서는 아닐까요?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미 복음서 속에서 ‘자신을 직접 계시하심’
복음서는 그 문자 의미 자체가 ‘신성의 직접 계시’이므로 ‘상징을 벗기기 위한 해설’(exegesis)이 필수적이지 않습니다.
둘째, 그러나 창세기, 출애굽기는 상징과 표상으로 감추어져 있어 재림 시기에야 드러낼 수 있는 구조
창세기의 아담, 노아, 아브라함, 출애굽기의 애굽, 홍해, 시내산 등 이 모든 것이 인간 영적 발전의 ‘내적 단계’이므로, 재림 때 완전히 드러내야 했습니다. 즉, 창세기, 출애굽기, 계시록은 재림을 위해 봉인된 책들이지만, ‘복음서는 이미 드러난 계시의 핵심’이라는, 이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셋째, ‘복음서 주석은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내는 것’
스베덴보리는 복음서의 핵심을 이렇게 보았습니다. ‘산상수훈’은 천국의 삶, ‘사랑, 자비, 용서, 겸손’은 천국의 질서, ‘십자가’는 인간 구원의 전체 과정, ‘부활’은 삶의 변형, 변모 등, 따라서 그는 말합니다. “사람이 복음서를 ‘해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복음서는 지성의 책이 아니라, 생명의 책이다.” 그는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는 대신, 그 복음서의 내적 의미를 ‘삶의 길’(way of life)로서 제시했습니다.
요약
스베덴보리가 복음서를 주석하지 않은 이유는, 첫째, 복음서는 상징적 기록이 아니라, 신적 인간의 직접 계시이기 때문에, 둘째, 내적 의미는 이미 전체 신학에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셋째, 주석의 대상은 ‘봉인된 말씀’인 창, 출, 계인 반면, 복음서는 그 자체로 개방된 말씀, 넷째, 복음서는 지식이 아니라 삶의 실천이 목적이기 때문에, 다섯째, 그의 사명 자체가 복음서 주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 개방’이었기 때문에
참고로, 스베덴보리의 수십 권에 달하는 저작들은 전부 약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AC는 ‘천계비의’(天界秘義, Arcana Coelestia, 1749-1756, 라틴)의 약어이고, HH는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CL은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의 약어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는 18세기 스웨덴의 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의 대표적인 저작입니다. 제목을 직역하면 ‘하늘의비밀들’, 또는 ‘천국의아르카나’ 정도가 됩니다. 여기서 ‘아르카나’(arcana)는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은 깊고 감추어진 것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제목으로 말하고자 한 것은, 우리가 성경의 문자를 읽을 때에는 쉽게 볼 수 없지만 그 안에는 주님과 천국,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깊은 내용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이 책은 모두 여덟 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저작이며, 스베덴보리가 1749년부터 1756년까지 라틴어로 익명 출판했습니다. 전체 글 번호는 AC.1부터 AC.10837까지 이어집니다. 내용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차례로 따라가면서 각 절과 주요 표현의 속뜻을 밝히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주석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본문 사이사이에 천국과 지옥, 영들의 세계, 인간의 사후 상태, 천사들의 삶, 영적 유입, 자유, 섭리, 신앙과 체어리티, 거듭남 등 스베덴보리 신학의 중요한 주제들이 광범위하게 다루어집니다. 그래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주석서이면서 동시에 스베덴보리의 신학과 영적 세계관을 가장 방대하고 체계적으로 보여 주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이해하는 데 가장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보통 성경을 읽으면서 그 안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 인물, 교훈, 명령 등을 이해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무가치한 껍데기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적 의미는 그 안의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외적 형식이며 기초입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말씀의 문자가 전부는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 문자 안에는 인간의 내면 상태와 거듭남의 과정, 교회와 천국의 질서,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과 주님의 구원 역사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감추어진 하늘의 비밀들을 그는 ‘아르카나’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기 시작하면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던 성경 이야기가 전혀 다른 깊이에서 열리기 시작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 장을 하나님께서 우주와 지구와 생명체를 창조하신 이야기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문자 안에서 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는 ‘거듭남’의 과정을 읽습니다. ‘빛이있으라’는 말씀부터 여섯 날에 걸쳐 창조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혼돈과 어둠 가운데 있던 인간 안에 주님의 빛이 들어오고, 선과 진리가 질서를 이루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을 이렇게 읽기 시작하면 ‘창조’는 더 이상 먼 옛날에 한 번 일어난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지금도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새창조’의 이야기가 됩니다.
이러한 독법을 가능하게 하는 중요한 원리가 ‘상응’(correspondence)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자연계와 영계는 서로 무관하게 존재하는 두 세계가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들은 그 배후의 영적인 것들과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러한 관계를 ‘상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등장하는 빛과 어둠, 물과 땅, 나무와 열매, 산과 강, 해와 달과 별, 동물과 식물 같은 것들은 단지 자연계의 사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문맥에 따라 영적인 실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빛은 진리와 관련되고, 물은 진리에 속한 것들과 관련되며, 땅은 사람이나 교회의 외적·자연적 측면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어떤사물은언제나하나의의미만가진다’는 식의 고정된 상징표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의미는 말씀 전체의 문맥과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읽는 사람은 적잖이 당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담’은 단순히 한 개인의 이름에 머물지 않고 태고교회와 그 교회의 상태를 나타내며, 에덴동산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지혜 가운데 살던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뱀 역시 단순히 한 동물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감각적인 부분과 그것이 내적 질서에서 벗어날 때 일어나는 문제를 나타냅니다. 노아와 홍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의 이야기, 애굽과 광야, 모세와 출애굽 역시 문자에서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지만,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변화, 그리고 가장 깊게는 주님에 관한 내용으로 이어집니다.
처음에는 이러한 해석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왜아담이교회인가?’, ‘왜물이진리와관계되는가?’, ‘왜애굽이나광야가인간내면의상태를나타내는가?’라는 질문이 생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계속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각 단어에 그때그때 임의로 의미를 붙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의 표현이 창세기에서 출애굽기로, 다시 선지서와 시편과 복음서로 이어지면서 비슷한 영적 질서 안에서 사용되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표상’은 바로 이러한 말씀 전체의 연결 속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 책에서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주제는 ‘거듭남’입니다. 사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어떤 교리를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면서 실제로 내면이 변화되고, 삶의 중심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바뀌어 가야 합니다. 그는 이 과정을 ‘거듭남’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은 한순간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인간 안에는 오랜 세월 형성된 욕망과 습관, 잘못된 생각과 자기중심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들을 한꺼번에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시고,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조금씩 질서를 바꾸어 가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발견하고, 시험과 싸움을 거치며, 배운 진리를 실제 삶에서 행하려 할 때 조금씩 새로운 의지와 새로운 이해가 형성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단순한 종교적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생각과 행동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형성되는 긴 과정입니다.
이 과정에서 ‘속사람’과 ‘겉사람’의 관계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여기서 속 사람을 단순히 ‘보이지않는마음’, 겉 사람을 ‘겉으로보이는행동’이라고 이해해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겉 사람은 자연계의 삶과 직접 관계하는 인간의 외적·자연적 차원이며,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더 내적인 차원입니다. 거듭남은 이 둘이 서로 단절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을 통해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 질서 있게 나타나도록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은 일상생활과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속에서 받아들인 것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진리가 선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직 완전한 생명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하며,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 전체에서 반복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사랑하며, 그 사랑에서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는가가 중요합니다. 결국 신앙은 삶을 위한 것이며, 진리는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다 보면 ‘영적’(spiritual)과 ‘천적’(celestial)이라는 표현도 매우 자주 만나게 됩니다. 처음에는 두 단어가 비슷해 보여 혼란스럽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둘을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일반적으로 영적인 것은 진리와 신앙, 이해와 관계되고, 천적인 것은 선과 사랑, 의지와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단순한 공식으로 고정해서는 안 되며 문맥에 따라 세심하게 읽어야 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거듭남 과정의 서로 다른 상태를 설명하고, 어떤 곳에서는 교회의 서로 다른 특성을 설명하며, 또 어떤 곳에서는 천국의 서로 다른 질서와 천사들의 특성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별을 조금씩 익혀 가는 것도 AC를 읽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이 책에는 인간의 사후 삶과 영계에 관한 내용도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영적 시야가 열려 오랜 기간 천사들과 영들을 만나고 대화할 수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사람이 죽은 뒤에도 인간으로서의 삶을 계속하며, 자신의 지배적인 사랑과 내적 상태가 점차 드러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천국과 지옥은 단순히 죽은 뒤 외부에서 배정받는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삶을 이루었는가와 깊이 관계된 상태입니다.
이러한 내용 때문에 스베덴보리를 단순히 ‘사후세계를많이본신비가’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실제로 읽어 보면 그의 관심의 중심이 신기한 영계 체험 자체에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천사와 영들에 관한 설명 역시 결국 ‘그렇다면인간은지금이세상에서어떻게살아야하는가?’라는 문제로 돌아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지금의 삶과 단절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형성한 사랑과 삶의 방향은 사후에도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영계에 관한 설명은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배경이 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자유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선으로 이끄시지만 강제로 선하게 만들지는 않으십니다. 강제로 행한 것은 인간 자신의 삶으로 뿌리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상태에 있어야 하며, 주님께서는 그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끊임없이 선으로 이끄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인간 혼자 이루는 자기수련도 아니고, 인간의 자유와 참여가 전혀 필요 없는 일방적인 변화도 아닙니다. 모든 선과 진리와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은 그것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인간 이해는 매우 실제적입니다. 인간 안에 악과 거짓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것 때문에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가장 깊은 상태를 아시며, 그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이끄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인간에게 아직 불완전한 동기와 생각이 남아 있는 것조차 허용하시면서, 그것들을 더 나은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완벽한 사람이 갑자기 되는 사건이라기보다, 주님의 섭리 안에서 평생 계속되는 변화의 과정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에서 무엇보다 중심에 계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 책은 인간의 심리나 영적 성장만을 설명하는 책이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 천국의 질서를 보여 주지만, 더 깊이 들어갈수록 모든 것은 주님과 연결됩니다. 특히 가장 깊은 의미에서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자신의 인성을 영화롭게 하시고, 지옥을 이기시며, 인류를 구원하신 역사가 펼쳐집니다. 인간의 거듭남이 가능한 것도 주님께서 먼저 그 길을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다는 것은 문자적 의미를 버리고 그 뒤에 숨어 있는 ‘비밀암호’를 찾아내는 일이 아닙니다. 문자와 속뜻은 서로 경쟁하는 두 의미가 아닙니다. 문자는 속뜻을 담고 있으며, 속뜻은 문자를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상응을 통해 연결되듯, 말씀의 문자와 그 안의 영적·천적 의미도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그래서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말씀을 읽는 방식도 설명합니다. 인간이 말씀의 문자에서 사람 이름과 장소, 역사적 사건을 읽을 때 천사들은 그것들과 상응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지각한다고 합니다. 인간과 천사가 서로 다른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같은 말씀을 서로 다른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말씀은 자연계와 천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말씀을 거룩하게 읽을 때, 비록 그 속뜻을 모두 알지 못하더라도 그 말씀을 통해 천국과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이 점은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는 태도와도 관계됩니다. 이 책을 읽는 목적이 모든 상응을 암기하고, 모든 속뜻을 지식으로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들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말씀을 통해 자기 상태를 비추어 보고,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을 실제 삶에서 선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식은 삶을 위해 존재하고, 진리는 선을 위해 존재합니다.
물론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쉬운 책이 아닙니다. 1만 개가 넘는 글 번호에 걸쳐 같은 개념이 반복되면서 조금씩 깊어지고, 하나의 성경 표현을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다른 성경 구절이 인용됩니다. ‘상응’, ‘표상’, ‘리메인스’, ‘퍼셉션’, ‘인플럭스’, ‘proprium’, ‘영적인간’, ‘천적인간’, ‘속사람’, ‘겉사람’ 등 처음 접하면 낯선 개념들도 계속 등장합니다. 한두 번 읽어서 전체 구조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서두르지 않고 계속 읽다 보면 처음에는 서로 흩어져 있던 개념들이 점차 하나의 큰 그림 안에서 연결되기 시작합니다. 창세기의 창조와 에덴, 타락과 홍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요셉과 애굽, 그리고 출애굽과 광야의 여정이 서로 떨어진 이야기들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영적 역사를 이루는 하나의 거대한 흐름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의 중심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끊임없이 구원과 거듭남으로 이끌고 계신다는 하나의 주제가 점차 선명해집니다.
제가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번역하고 해설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원문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만으로는 처음 접하는 독자가 그 깊은 흐름을 따라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번역에 이어 해설을 붙이고, 필요한 경우에는 별도의 심화를 통해 개념과 성경 인용, 관련 AC의 문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합니다. 특히 한 글 번호를 그 자체로 고립시켜 이해하기보다 AC전체의 흐름과 연결하여 읽고,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개념들이 서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피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이 작업에서는 ChatGPT의 도움도 받고 있습니다. 번역 표현을 비교하고, 긴 문장의 구조를 분석하며, 관련 개념을 정리하고, 제가 이해한 내용을 여러 각도에서 다시 검토하는 대화의 도구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이어지는 파일들에는 ‘번역,해설및심화withChatGPT’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ChatGPT자체가 어떤 영적 권위를 가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원문과 말씀, 그리고 AC전체의 문맥을 더 세밀하게 살피기 위한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독자가 말씀과 본문을 직접 살피면서 판단해야 합니다.
이 소개 역시 독자에게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강요하기 위해 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안에우리가지금까지보지못했던더깊은질서가있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직접 읽어 보도록 초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모든 설명에 동의할 필요도 없고, 모든 개념을 한꺼번에 이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익숙한 성경 본문을 잠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그 안에서 인간의 내면과 거듭남, 천국의 질서와 주님의 역사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긴 여정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결국 ‘이것이무슨뜻인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말씀이내삶에서어떻게살아지는가?’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진리는 선을 위한 것이며,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속뜻을 아무리 많이 알고 천국의 질서를 아무리 자세히 이해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더욱 주님께 향하게 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게 하지 않는다면 그 지식은 아직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라는 제목의 ‘아르카나’는 감추어진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감추어져 있다는 것은 영원히 알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삶을 돌아보고, 주님께 빛을 구하며 오래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익숙했던 한 구절이 전혀 새롭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단순히옛사람들의이야기가아니구나.이것이교회만의이야기도아니구나.이것은지금내안에서일어나고있는일이구나.그리고그안에서주님께서일하고계시는구나.’ 바로 그 순간, 감추어져 있던 것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 첫걸음으로 창세기 1장, AC.1-66부터 시작합니다. 창1에서는 ‘혼돈하고공허하며흑암이깊음위에’ 있던 인간이 어떻게 주님의 새 창조를 거쳐 하나님의 형상으로 세워져 가는지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여섯 날의 과정과 창1만의 여러 주제들은 다음 ‘창1,AC.1-66번역,해설및심화withChatGPT소개’에서 따로 살펴보겠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선 하나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 성경에 전혀 다른 이야기를 억지로 덧붙이는 책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문자 안에 처음부터 감추어져 있다고 본 하늘의 질서, 곧 주님과 천국과 교회와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를 하나씩 열어 보이려 한 책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