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사람(internal man)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앞으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중요한 개념입니다. 처음에는 겉으로 보이는  마음속의  정도로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그보다 훨씬 깊은 인간의 영적 구조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지나치게 복잡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단순히 몸은  사람이고 마음은  사람이라고만 이해해 두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에서 스베덴보리가 속 사람을 처음 언급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인간의 구조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사람에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듯이 말씀에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외적인 것이 내적인 생명과 분리되면 몸만 남은 것과 같듯이, 말씀도 그 내적인 생명과 분리하여 문자만 보면 영혼 없는 과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에서는 우선 인간에게 내적인 차원과 외적인 차원이 있다는 기본적인 구별만 붙잡아도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속 사람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속 사람을 단순히 남에게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화를 낼 수도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보이지 않는 생각이라고 해서 모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욕망과 계산, 기억과 상상, 세상적인 판단 역시 몸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사람 안에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다고 해서 곧 영적인 의미의 속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중요한 구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보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에 더 가깝습니다. 인간은 자연계에 살면서 감각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비교하고, 추론하며, 자연적인 필요와 목적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외적 또는 자연적 차원과 깊이 관계됩니다. 반면 인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천국의 질서에 따라 자연적인 삶을 바라보고 이끌 수 있는 더 내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사람에 접근하는 더 정확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 역시 단순히 육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몸은 물론 인간의 가장 외적인 부분에 속하지만, 스베덴보리가 AC 전체에서 말하는  사람 또는 외적 인간은 흔히 자연적인 마음과 그에 속한 애정과 사고까지 포함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사용하는 지식, 기억, 감각에 기초한 사고, 자연적인 욕구와 관심 등이 이 외적 차원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사람=마음,  사람=이라는 이분법으로 이해하면 뒤의 AC를 읽으면서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영적 차원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람 안에는 언제나 선한 생각만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은 거듭나기 전에는 자신의 내적 질서가 제대로 열려 있지 않으며, 자연적인 욕망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삶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적인 것을 열고 질서 있게 하시며, 그곳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점차 외적인 삶에까지 내려가도록 이끄십니다.

 

여기서 유입이라는 개념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님께서  사람이라는  지점에 직접 생명을 넣으시고 그것이  사람으로 흘러간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그려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에 여러 내적·외적 단계와 질서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생명과 질서는 근원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의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삶에 이른다는 기본 방향만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겉으로 나쁜 행동 몇 가지를 고쳤다고 해서 곧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평판 때문에 정직할 수도 있고, 처벌이 두려워 악을 피할 수도 있으며, 자기 이익을 위해 친절하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행동만 보면 선해 보이지만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의지와 이해가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겉 사람은 중요하지 않고 속 사람만 중요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남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속에서 선을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악을 행한다면 아직 질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겉으로 선하게 행동하면서 속에서는 오직 자기 이익만을 사랑하는 것도 온전한 질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질서 있게 하실 때, 사람이 내적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선과 진리가 자연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도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어느 날 자기 속 깊은 곳에서 완전히 새로워진 다음 그 변화가 자동으로 밖으로 퍼져 나간다는 단순한 과정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자연적인 삶에서 자신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여 피하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외적인 삶의 선택과 훈련도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사용하여 사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함께 질서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에는 안에서 밖으로라는 질서가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말씀을 배우고 행하는 외적인 과정도 그 질서를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을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중심(inmost)과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가장 깊은 것, 내적 인간, 합리적 차원, 자연적 차원 등을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사람=인간의 가장 깊은 지점이라고 고정하면 이후 그의 인간론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AC.3에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세부 구조를 미리 모두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연적인 외적 차원보다 더 내적인 영적 차원이 있으며 인간은 그 내적인 것을 통하여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별은 사후의 인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그때 처음 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지상에서 살 때부터 본질적으로 영이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그 영적 인간에게서 물질적인 몸이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사람은 모두 없어지고  사람만 남는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몸은 벗지만, 사람에게는 사후에도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질서가 있으며, 기억과 사고와 애정도 지속됩니다. 지상에서 형성된 삶의 성질이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이렇게 말해도 좋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행동보다  깊은 곳이 있어. 주님께서는 우리가 겉으로 착한 척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선한 것을 사랑하고 진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셔. 그리고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우리의 말과 행동에도 나타나도록 이끌어 주셔. 이것은 속 사람의 모든 구조를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 = 남에게 숨긴 생각이라는 오해를 피하면서 거듭남의 방향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AC.3으로 돌아가면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말씀에 비유했는지가 좀 더 분명해집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가 자연계에서 읽고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주어진 외적 형태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외적인 것이 내적인 생명을 표현하도록 창조된 것처럼 말씀의 문자도 그 안의 내적인 것을 담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핵심은  마음속에 숨겨진 진짜 를 찾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자연적인 삶 전체를 새로운 질서 안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따로 움직이지 않고, 내적으로 사랑하고 인정하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겉 사람과 속 사람'

AC.3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겉 글자만 보겠다는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기독교 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과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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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라는 표현은 AC.2의 가장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뿐 아니라, 뒤에서 계속 만나게 될 인간과 주님, 천국과 거듭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명’, ‘ 생각’, ‘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느끼고,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며, 내가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생명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이며,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생명을 가지고 계시다가 그 일부를 떼어 인간에게 나누어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주님에게서 독립된 작은 생명 하나를 자기 안에 소유하고 있는 존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와 다릅니다. 인간은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고, 인간은 그 생명의 수용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을 아무 의지도 없는 그릇이나 기계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것처럼느끼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선택한다고 경험합니다. 자기 것처럼의 상태가 있어야 인간에게 자유가 있을 수 있고, 자유가 있어야 선을 받아들이고 악을 거절하는 일이 사람 자신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을 단지 움직여지는 도구로만 느낀다면 사랑도 신앙도 거듭남도 자유로운 인간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가르침과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가르침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가야 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자기 것처럼 받아 생각하고 의도하고 행동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 뒤에는 내가 했다고 자랑하지 않고 모든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수 있으며, 동시에 악을 행하고서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책임을 돌릴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어려운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는가?생명 자체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악은 주님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이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뒤틀고 변질시킬 때 악과 거짓이 나타납니다. 햇빛 자체는 깨끗하지만 그것이 통과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따라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다만 이 비유에서도 햇빛을 주님 자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고, ‘근원에서 오는 것은 선하지만 수용하는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만 이해하면 됩니다.

 

이제 다시 AC.2로 돌아오면 왜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갑자기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말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의 직접적인 관심은 인간의 생명론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말씀에는 생명이 있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바로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생명은 종이와 잉크에 어떤 신비한 힘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사람을 영적으로 살게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말씀 안에 있는 신적 진리와 선이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주님을 향하며, 주님께서 그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질서 있게 하실 때 말씀이 그의 삶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알고 외우는 것과 그 말씀이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듭남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이미 가지고 있던 자연적 생명을 조금 개선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고 강제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선을 행하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모든 과정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그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의 실제 삶이 됩니다.

 

이제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라는 말을 처음보다 조금 다르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창조의 과거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존재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진리를 이해하며,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수용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지를 바로 알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AC.2가 말하는 말씀의 생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말씀은 우리를 말씀 자체에 붙잡아 두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 말씀 안에서 주님을 향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갈 때, 말씀의 생명은 단지 책 안에 있는 교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열리기 시작합니다.

 

 

 

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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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단순한 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Arcana Co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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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큰 줄거리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지만 세부 표현들은 그것을 꾸며 주는 문학적 요소에 불과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말씀은 전체로서뿐 아니라 그 안의 개별적인 것들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품고 있다고 봅니다.

 

전체적으로라는 말은 말씀 전체나 한 책, 한 장, 하나의 이야기처럼 비교적 큰 단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앞으로 창세기 1장을 해설하면서 스베덴보리는 그 장 전체를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에 관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개별적으로라는 말이 붙으면서 이야기가 훨씬 깊어집니다. 창세기 1장의 전체 줄거리만 거듭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 저녁과 아침,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 해와 달과 별, 동물과 사람 등 각각의 표현도 그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AC.2에서는 이것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여 가장 작은 세부적인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하나에 이르기까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어느 부분은 신적이고 어느 부분은 단순한 부수적 기록이라고 나눌 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를 보여 줍니다. 역사처럼 보이는 부분, 족보처럼 보이는 부분, 반복되는 이름과 숫자, 장소와 방향 같은 세부까지도 말씀 안에서는 전체의 내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든 단어에 하나씩 고정된 비밀 암호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단어 하나를 떼어 놓고 임의의 영적 의미를 붙이는 방식이 아닙니다. 각각의 표현은 그것이 놓여 있는 문맥과 다른 표현들과의 관계, 그리고 말씀 전체의 내적 질서 안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같은 자연적 대상도 문맥에 따라 그 상응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며, 하나의 절을 이해하기 위해 앞뒤의 여러 절과 관련된 수많은 표현을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의 진짜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전체개별이 서로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체의 내적 의미가 개별 표현들을 통해 펼쳐지고, 개별 표현들은 서로 연결되어 전체의 의미를 이룹니다. 창세기 1장이 전체적으로 거듭남을 말한다면, 그 안의 각각의 날과 창조물과 순서도 서로 무관하게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질서 안에서 연결됩니다.

 

그리고 AC.2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하는지를 밝힙니다. 그 중심은 인간의 거듭남 자체도, 천국 자체도, 교회 자체도 아닙니다. ‘생명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말은 단순히 성경의 모든 부분에 의미가 있다는 주장보다 더 깊습니다. 말씀의 모든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모든 연결의 가장 깊은 중심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원리를 알고 나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왜 그렇게 세밀한 책인지도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이름 하나, 숫자 하나, 방향 하나, 반복되는 말 하나까지 오래 붙드는 것은 세부에 집착해서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그 세부 역시 말씀에 속하며, 따라서 전체의 내적 생명에서 떨어져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앞으로 AC를 읽는 하나의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큰 줄거리를 보면서 작은 표현을 놓치지 않고, 작은 표현을 살피면서 전체의 흐름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갈수록 결국 말씀 전체와 그 모든 세부가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AC.2가 이 짧은 표현 안에 담고 있는 중요한 뜻입니다.

 

 

 

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이라는 표현은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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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다'

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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