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심화

1.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AC.5에서 처음 스베덴보리를 접하는 독자에게 가장 놀라운 문장은 아마 이것일 것입니다. 그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자신이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자신도 그들과 말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는 영계의 존재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영들과 천사들과의 실제적인 교통이 지속적으로 허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이라는 표현입니다. AC 1권이 출판된 것은 1749년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그의 생애 말년에 과거를 회고하면서 쓴 것이 아니라,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처음 세상에 내놓는 바로 그 시점에 이미 수년 동안 그러한 상태가 계속되어 왔다고 밝힌 것입니다. 이후 그의 신학 저술 전체에 방대한 영계 경험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AC.5는 앞으로 이어질 수많은 기록의 매우 이른 시기에 놓인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일회적인 꿈이나 한두 차례의 환시를 경험했다는 주장과는 분명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영들을 보았다고만 하지 않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으며’, 자신도 그들과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끊임없이, 중단됨 없이 계속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적어도 스베덴보리 자신은 자신의 영계 경험을 순간적인 종교적 황홀경이나 특별한 꿈 몇 차례로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에서 일상생활을 계속하면서도 영적 세계의 존재들과 의식적으로 교통할 수 있는 상태가 자신에게 허락되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그렇다면 이것은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 글의 역할은 아닙니다. 반대로 현대인의 경험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처음부터 환각이나 상상이라고 판정하는 것 역시 AC.5를 읽기 전에 이미 결론을 내리는 셈이 됩니다. 이 단계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무엇을 주장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읽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특별한 영적 세계를 상상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허락으로 영들과 천사들과 실제로 교통했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그가 이후 제시하는 방대한 기록과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면서 판단할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삶에는 AC 출판 이전부터 중요한 내적 변화가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1740년대 전반 그는 오랫동안 해 온 자연과학과 철학적 탐구에서 점차 인간의 내면과 영적인 문제로 관심을 옮겨 가고 있었습니다. 이 무렵의 개인 기록 가운데 잘 알려진 것이 흔히  일기라고 불리는 기록입니다. 그 안에는 꿈과 내적 갈등, 자기 성찰과 종교적 경험 등이 나타납니다. 이런 자료들은 훗날 그의 신학 저술이 갑자기 아무런 배경 없이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상당한 내적 전환의 시기가 있었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이 준비 기간의 꿈과 AC.5에서 말하는 지속적인 영계 교통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꿈을 꾸고 강렬한 종교적 경험을 하는 것과, 깨어 있는 상태에서 영들과 천사들의 말을 듣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수년 동안 지속되었다는 AC.5의 주장은 성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영적 전환에는 여러 단계와 경험이 있었던 것으로 보되, 후대에 전해진 유명한 일화 하나를 모든 것의 정확한 시작점으로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소명과 관련하여 자주 언급되는 1745년의 경험도 이런 구별이 필요합니다. 그의 생애를 전하는 여러 자료에서는 1745년을 중요한 전환점으로 다루며, 주님으로부터 말씀의 영적 의미를 밝히는 사명과 관련된 경험이 있었다는 전승도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장소와 구체적인 장면, 무엇을 보았고 어떤 말을 들었는지를 하나의 확정된 역사적 장면처럼 재구성할 때에는 자료의 성격을 구별해야 합니다. AC.5 자체가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해 주는 것은 훨씬 단순합니다. 이 책을 출판할 당시 스베덴보리는 이미 수년 동안 주님의 신적 자비로 영들과 천사들과 지속적으로 교통하는 일이 허락되었다고 증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그 경험을 어떤 목적으로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AC.5는 자신의 특별함을 소개하기 위한 자서전이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1-4에서 그는 말씀 안에 속뜻이 있으며, 창세기 첫 장들이 내적 의미에서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자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을   있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AC.5 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없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따라서 영들과 천사들과의 교통에 관한 증언은 그가 앞으로 말할 영적인 것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를 독자에게 밝히는 문맥 속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라는 표현은 중단됨 없이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게 된 일을 자기 지성의 성취나 특별한 영적 능력으로 돌리지 않습니다. 그에게 그것은 허락된 일이었습니다. AC.5의 문법 자체가 이를 잘 보여 줍니다. 자신이 영계를 열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그러한 일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 경험의 중심에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스베덴보리보다 특별한 목적을 위하여 허락하신 주님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특별한 허락이 필요했을까요? AC.5 자체에서 스베덴보리가 곧이어 열거하는 내용을 보면 그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영들, 죽음 이후 인간의 상태, 지옥, 천국, 그리고 특히 온 천국에서 인정되는 신앙의 교리에 관하여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즉 영계와의 교통은 단순히  세상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과 천국과 지옥의 질서, 그리고 신앙에 속한 것들을 알게 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천사들과 대화했다고 해서 그의 신학 전체를 천사들에게 배운 내용이라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5의 첫 문장에서 그는 이것을 알 수 있는 근원을 주님으로부터라고 명시합니다. 이후 그의 저술에서도 주님과 말씀의 권위는 영이나 천사의 말보다 위에 있습니다. 따라서 영들과 이야기했다는 사실 자체가 진리의 최종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특별한 영계의 경험이 허락된 것 역시 주님께서 말씀과 영적인 질서를 밝히시는 더 큰 목적 안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기록을 앞으로 읽는 데 매우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그가 어떤 영을 만나 그 영이 무엇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그 영의 말이 곧 신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영들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서로 다른 상태에 있으며, 선한 영도 있고 악한 영도 있으며, 알고 있는 것과 모르는 것이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AC.5에서 곧바로 여러 종류의 영들을 언급하는 것도 이러한 영계의 다양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문제는 다음 심화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또한 중단됨 없이라는 말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할 영적 이상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경험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신앙인이 영들을 보고 천사들과 대화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말씀을 읽고 주님을 믿으며 악을 죄로 여겨 피하고 선을 행하는 데 영계의 시각적 경험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영적 현상을 신앙의 목표로 삼으면 현상 자체에 마음을 빼앗길 위험도 있습니다. AC의 중심은 영을 보는 능력을 얻는 데 있지 않고,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알고 그분의 질서 안에서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를 읽을 때에도 중요합니다. 그의 영계 경험이 놀랍기 때문에 그것만 좇아 읽으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거대한 사후세계 체험담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영계 경험이 낯설다는 이유로 그것을 모두 제거하고 성경 해설만 취하려 하면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소명과 저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놓치게 됩니다.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그 경험이 그의 말씀 해설과 인간의 거듭남에 관한 가르침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5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라는 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이한 현상의 지속 기간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앞으로 말하려는 영계의 일들을 추측하거나 상상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자비로 자신에게 보고 듣고 대화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허락되었으며 그 가운데 가르침을 받았다고 증언합니다. 우리는 우선 그 증언을 그가 말한 그대로 정확히 이해한 뒤, 이후 수천 개의 AC 글을 따라가며 그 증언이 실제로 어떤 내용으로 펼쳐지는지를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심화에서 만나게 될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보았다고 하는 영계는 모든 영이 똑같은 상태로 존재하는 단순한 세계가 아닙니다. 인간이 사후에 어떤 상태를 거치며, ‘’, ‘천사’, ‘악한  등의 표현은 어떻게 구별되는지 이해하기 시작하면 AC.5의 짧은 문장이 앞으로 펼쳐질 방대한 영계 기록의 문을 열고 있었다는 사실도 조금씩 보이게 됩니다.

 

 

 

AC.5, 심화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심화 2.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AC.5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여러 종류의 영들’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영들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영적 세계에도 질서와 구분이 있으며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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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이 모든 말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

AC.5 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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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처음 접하면 상징이나 비유와 비슷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은 단순한 문학적 표현 방법이 아닙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관계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 때문에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자연계의 사물과 영적인 의미를 서로 별개의 것으로 생각합니다. 빛은 물리적인 빛이고, 물은 물이며, 나무는 나무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빛과 어둠, 물과 불, 산과 골짜기, 나무와 열매, 씨와 밭, 눈과 귀, 손과 발 같은 자연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영적인 의미를 품고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성경 저자가 자연물을 적절한 비유로 골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세계와 영적인 세계 자체가 서로 관계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여기에서 상응의 중요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상응은 인간이 사후에 임의로 붙인 의미가 아닙니다. 어떤 시인이 빛을 희망의 상징으로 사용하자고 결정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관계는 창조의 질서 안에 근거합니다. 자연적인 것은 그 자체로 독립된 최종 현실이 아니라 더 내적인 원인과 목적이 자연계에서 드러난 결과이자 형식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에는 원인과 결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사이의 질서 있는 관계가 있으며, 이것이 상응의 토대가 됩니다.

 

인간 자신이 상응을 이해하는 가장 가까운 예입니다.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얼굴과 눈빛과 목소리와 행동에 그 사랑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분노하면 표정과 몸짓과 말투가 달라집니다. 얼굴의 근육과 목소리가 사랑이나 분노 그 자체는 아니지만, 내적인 애정이 외적인 몸을 통하여 표현됩니다. 이때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아무 관계 없이 우연히 붙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인 상태가 외적인 형식 안에서 나타납니다. 이것이 상응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용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이 예를 너무 단순하게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 ‘웃는 얼굴 = 사랑이라는 고정된 상응표가 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거짓으로 웃을 수도 있고, 겉으로 감정을 숨길 수도 있습니다. 이 예의 목적은 단지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을 통하여 표현될  있다는 질서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개별적인 외적 모양을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기술이 아니라 영적 원인과 자연적 결과 사이의 질서를 말합니다.

 

이 점에서 인간은 하나의 작은 세계와도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몸과 그 기관들이 영적인 것들과 상응한다고 설명합니다. 눈은 보는 기능 때문에 이해에 속한 것들과 관계되고, 귀는 듣고 받아들이는 기능 때문에 순종과 받아들임에 속한 것들과 관계됩니다. 손과 팔은 힘과 행위에, 발은 보다 자연적이고 외적인 삶의 차원에 관계됩니다. 이것 역시 신체 부위에 임의로 의미를 붙인 것이 아니라, 그 기관의 실제 기능과 영적인 기능 사이에 질서 있는 관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상응은 말씀 해석의 원리가 됩니다. 말씀은 자연적인 인간이 읽을 수 있도록 자연계의 언어와 사물과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연적인 표현들은 영적인 것들과 상응하기 때문에 동시에 영적이고 천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은 단지 태양이나 광명에 관한 말에 머무르지 않고 문맥에 따라 진리와 깨달음에 속한 것을 나타낼 수 있으며, ‘은 진리에 속한 것, ‘열매는 삶에서 나타나는 선에 속한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 진리,  = 진리, 나무 = 지식과 같은 단순한 암호표를 만드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상응은 살아 있는 문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같은 자연물이 말씀의 어느 곳에서는 선한 의미로 사용되고 다른 곳에서는 반대되는 의미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물이 어떤 관계 속에 놓여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하나의 상응을 설명하면서도 성경의 여러 구절을 길게 인용하고 서로 비교합니다.

 

상응에는 또한 층위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것은 영적인 것과 상응하고, 영적인 것은 더 내적인 천적인 것과 관계되며, 궁극적으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서 속뜻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의 숨은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외적인 표현을 통하여 그 안에 있는 영적인 질서를 보고, 그 영적인 질서를 통하여 궁극적으로 주님께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AC.1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가리킨다고 한 것과 연결됩니다.

 

이제 앞에서 살펴본 표상 상응의 차이도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둘은 매우 밀접하지만 같은 말은 아닙니다. ‘상응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의 관계와 질서를 말하고, ‘표상은 그 상응의 관계에 근거하여 자연적인 사람이나 사물이나 사건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 보이는 기능을 말합니다. 따라서 상응이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나타낼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라면, 표상은  자연적인 것이 실제로 무엇을 나타내고 있는가?에 더 가까운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제사와 성막과 성전은 수많은 영적인 것을 표상합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상응입니다. 제단, , , 기름, , 등잔과 같은 자연적인 것들이 영적인 실재와 아무 관계도 없다면 그것들은 단지 인간이 정한 종교적 상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모든 것이 상응의 질서 안에 있기 때문에 말씀과 예배 안에서 영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상응은 인간과 말씀을 넘어 천국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천국은 추상적인 생각만 존재하는 곳이 아닙니다. 천사들에게도 집과 정원, 산과 강, 빛과 색 등 외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영계에서 그러한 외적 환경은 천사들의 내적인 애정과 사고에 상응하여 나타납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내적인 상태와 외적인 환경 사이의 관계가 자연계에서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영계 경험을 통하여 상응을 이해했다고 설명하는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자연계의 모든 것을 보면서 이것은 영적으로 무엇을 뜻할까?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상응의 교리는 일상의 모든 사건을 암호처럼 풀이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특히 어떤 질병이나 사고, 재난을 보고 곧바로 이것은  사람의 어떤 영적 상태를 뜻한다고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상응은 다른 사람의 내면을 추측하거나 현실의 사건을 점치는 도구가 아닙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와 창조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한 원리이지, 개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의적으로 영적 해석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이 점은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상응을 배우기 시작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로운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경험입니다. 자연을 보면서 주님의 질서를 생각하고, 빛을 보면서 진리를, 봄의 새 생명을 보면서 거듭남을 생각하는 것은 아름다운 묵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오늘 비가 왔으므로 주님께서 나에게 특별히 이런 메시지를 보내셨다고 단정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상응은 주님의 질서를 바라보게 하지만 인간의 추측을 계시로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상응을 많이 아는 것 자체가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빛과 물과 나무와 산과 동물의 상응을 수백 가지 알고 있어도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그 지식 자체가 영적 생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상응을 아는 목적은 말씀을 통하여 더 깊이 주님을 알고, 진리를 배우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AC가 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도 상응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입니다.

 

이제 AC.4로 돌아가면 왜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창조와 태고교회에 관한 것을 표상하고 의미하고 포함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가 조금 더 이해됩니다.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이 영적인 것과 아무 관계도 없는 자연물이라면 그러한 해석은 단순한 상상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상응이라는 창조의 질서가 있다면, 자연적인 언어로 기록된 말씀 안에 영적인 의미가 담길 수 있다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입니다.

 

결국 상응은 말씀의 속뜻을 풀기 위한 하나의 해석 기법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으로부터 영적인 세계를 거쳐 자연적인 세계에 이르는 창조의 질서와, 내적인 것이 외적인 것 안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설명하는 스베덴보리 사상의 중요한 원리입니다. 그리고 말씀은 바로 그 상응의 질서에 따라 기록되었기 때문에 자연계의 인간이 읽는 문자 안에서 동시에 천국의 것을 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응을 배운다는 것은 성경에 숨겨진 암호표를 하나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질서 있게 연결되어 있다는 새로운 시선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말씀을 향할 때, 우리는 문자에서 멈추지 않으면서도 문자를 버리지 않고, 그 문자를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거쳐 궁극적으로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향하게 됩니다.

 

 

 

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 마음이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기록된 겉 글자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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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개념이지만, 처음 들으면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핵심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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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말입니다. 처음에는 상징과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표상에는 조금 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아주 쉽게 시작하면, ‘자연적인 어떤 것이 영적인 어떤 것을 눈앞에 나타내 보이는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과 장소, 사물과 행위, 사건 등이 그 자체의 문자적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드러내 보일 때, 그것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AC.4에서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창세기 첫 장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이 내적 의미에서 새로운 창조, 곧 인간의 거듭남을 일반적으로 다루고, 특별히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장에는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거나 의미하거나  안에 포함하지 않는 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은 단지 자연계의 사물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영적 상태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서 표상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징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상징은 사람이 어떤 의미를 정해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가 특정한 모양이나 색을 자기 단체의 상징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그 모양과 의미 사이의 관계에는 인간의 약속이 크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씀에서 말하는 표상은 독자가 마음대로 의미를 정해서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질서가 있으며, 말씀은 그 질서에 따라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형태로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표상은 다음 심화에서 다룰 상응과 연결됩니다. 둘은 매우 가까운 개념이지만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닙니다. 가장 간단하게 구별하면, ‘상응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관계이고, ‘표상은 그 관계에 근거하여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적인 과 영적인 진리 사이에 상응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 빛이 문맥에 따라 진리에 속한 것을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때 빛은 영적인 것을 표상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이것은 무엇의 암호인가?라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을 하나씩 다른 단어로 치환하는 암호 해독처럼 생각하면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는 그것이 놓인 문맥과 말씀 전체의 질서 안에서 살펴야 합니다. 같은 사물이라도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가에 따라 선한 의미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의미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생각하면 표상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단, 제물, , 기름, 제사장의 의복과 여러 의식은 외적으로는 실제 예배의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것들이 그 자체 때문에 거룩했던 것이 아니라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표상했기 때문에 거룩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의식은 눈에 보이는 자연적인 형태이지만, 그것이 표상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입니다.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도 비슷합니다. 그것들은 말씀의 문자에서는 실제 장소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문맥에 따라 주님의 나라와 교회, 천국에 속한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중요한 것은 가나안이라는 장소 자체가  천국이다라는 단순한 등식이 아닙니다. 그 장소가 말씀 안에서 어떤 영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표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도 표상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왕이나 제사장, 족장과 선지자들이 내적 의미에서 어떤 영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품 자체가 반드시 그가 표상하는 영적 실재와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표상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말씀 안에서 한 사람이 어떤 것을 표상한다는 것과 그 사람 자신이 실제로 그러한 내적 상태를 지녔다는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표상의 기능은 표상하는 사람 자신의 인격적 완전성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알면 구약의 여러 인물과 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어떤 왕이나 제사장이 말씀 안에서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그 사람 자신이 반드시 거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외적인 표상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내면과 구별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과 교회의 표상적 질서를 통하여 영적인 것을 나타내실 수 있으며, 그 표상에 참여한 사람 자신의 내적 상태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역사 표상의 관계도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에서 실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적 말씀에서는 실제 인물과 사건이 동시에 내적 의미를 담는 경우를 계속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창세기 초기의 모든 이야기를 먼저 현대적인 의미의 역사적 사건으로 확정한 다음 거기에 표상적 의미를 하나 더 얹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초기 장들의 성격과 이후의 역사적 말씀을 구별하여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해당 본문에 들어가면서 차례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표상은 실제로 있었느냐 아니냐를 결정하기 위한 개념이 아닙니다. 표상의 핵심 질문은 말씀 안에서 이것이 무엇을 나타내는가?입니다. 자연적인 인물과 사물과 사건을 통하여 어떤 영적 실재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표상은 문자적 의미와 속뜻 사이를 이어 주는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그러나 표상을 안다고 해서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표상이 상응에 근거한다면 그 의미는 인간의 상상이나 취향이 아니라 말씀의 질서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표현의 의미를 설명할 때 말씀의 다른 수많은 구절을 함께 제시하고, 같은 표현이 여러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봅니다. 표상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위한 허가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질서를 더 세밀하게 살피도록 요구하는 개념입니다.

 

이제 AC.4의 마지막 문장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들립니다. 창세기 1장의  하나의 표현도 없으며,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창조와 태고교회에 관한 것을 표상하거나 의미하거나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은, 창조 이야기의 몇몇 장면에만 상징적인 교훈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체 이야기와 그 안의 세부가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서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결국 표상은 눈에 보이는 말씀의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 사이에서 나타내 보이는 기능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것이 어떻게 영적인 것을 그렇게 나타낼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더 근본적인 원리가 바로 상응입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했다면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기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나타낼  있는가? 그 질문이 바로 다음 심화 상응으로 이어집니다.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이해하는 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처음 들으면 굉장히 어려운 철학 용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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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AC.1-3의 원리로 본 창1'

AC.4 마음이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기록된 겉 글자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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