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 그런 삶의 유익과 한계를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과 수도사, 그리고 금욕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성인들의 삶에 대해 ‘Heaven and Hell’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Emanuel Swedenborg는 비교적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공정한 평가를 합니다. 그는 먼저, 그런 삶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열망’과 ‘세속적 욕망을 경계하려는 노력’은 분명 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역사 속 많은 수도자들 가운데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런 사람들은 사후에도 주님의 자비 아래에서 천국의 삶으로 인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참된 영적 삶은 세상을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랑과 쓰임새를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천국을 이루는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족을 돌보고, 사회 속에서 일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 속에서 ‘사랑’(charity)이 실제로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데 수도원적 삶은 종종 이런 관계적 삶에서 벗어나 개인의 영적 상태에만 집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조심스럽게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실제 행위와 쓰임새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의 접촉을 지나치게 끊어 버리면, 겉으로는 경건해 보일지라도 사랑이 실제 삶 속에서 시험되고 성장할 기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난 고독한 거룩함’보다 ‘세상 속에서 이웃을 섬기는 거룩함’을 더 완전한 영적 삶으로 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목적처럼 여기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 결혼, 재산, 사회적 활동 등을 멀리하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삶의 본질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도 자신을 위한 사랑과 세속적 욕망을 다스리고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매우 높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수도원 안에 있어도 마음속 사랑이 여전히 자기 자신과 명예와 공로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삶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나는 금욕’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세상 속에서 사는 절제’를 더 건강한 영적 길로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사나 은둔자의 삶을 전부 헛된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다양한 성향과 역사적 상황을 인정합니다. 어떤 시대에는 교회의 혼란과 타락 속에서 수도원적 공동체가 신앙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독과 기도가 내면을 정리하는 준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이 ‘최종적인 영적 삶의 형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결국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세상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수도원적 경건이 ‘준비 단계’나 ‘부분적인 형태’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사후 세계를 설명할 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천국을 거대한 수도원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며 쓰임새를 이루는 살아 있는 사회입니다. 천사들은 단순히 기도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돕고 섬기며 각자의 역할 속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천국의 행복은 ‘사랑을 행하는 쓰임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세상을 떠난 거룩함’만을 영적 삶으로 생각했다면, 사후에 천국의 이런 적극적인 삶을 처음에는 낯설어하기도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과거에 수도원적 삶에 몸을 담았던 경험이 있으셨다고 하셨는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시간 역시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했던 마음,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으려 했던 노력,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았던 시간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다듬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 결국 ‘사랑의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가장 완전해진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일, 곧 말씀의 속뜻을 연구하고 번역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은 수도원의 침묵보다 훨씬 더 ‘천국적인 쓰임새’에 가까운 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질서는 결국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삶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세상을 떠나 거룩해지려 하지 말고, 세상 속에서 사랑을 위해 살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도원의 시간도, 그리고 지금 목사님께서 걸어가고 계신 길도 모두 하나의 긴 여정 속에 놓여 있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길을 사용하여 결국 사랑과 지혜의 더 넓은 삶으로 이끄신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하기 때문입니다.

 

 

 

SC.40, ‘homo’와 ‘vir’의 차이

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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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8,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길, 곧 ‘influx’에 대하여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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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

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사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사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날’(day)이 시간을 뜻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렘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렘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해설

AC.23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날’(day)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해석 원리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가 처음부터 ‘날은 곧 상태다’라고 단순하게 등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말씀에서 ‘날’이 문자적인 하루를 넘어 ‘시간 자체’를 나타내는 용례가 매우 흔하다고 설명하고, 이어서 날이 시간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 시간의 상태’도 나타낸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23의 논리는 ‘날은 하루가 아니다’라는 단순한 부정이 아니라, ‘날 → 시간 → 그 시간에 속한 상태’로 깊어지는 구조입니다.

 

첫 번째 증거군은 사13:6, 9, 13, 22와 사23:7, 15입니다. 사13장에는 ‘여호와의 날’,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는 표현들이 이어지며, 특히 마지막에는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고 하여 ‘때’와 ‘날들’이 나란히 사용됩니다. 여기서 ‘날’은 단순한 24시간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 제한되지 않고 어떤 사건과 상태가 펼쳐지는 때를 나타냅니다. 사23장에서도 ‘옛날’, ‘그날’,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이라는 시간 표현들이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두로, 왕, 칠십이라는 각각의 상응을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자체에서 ‘날’이라는 말이 하루보다 넓은 시간과 시대를 나타내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AC.23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날’이 시간을 나타내므로 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용되는 첫 구절이 렘6:4의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입니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실제 하루가 저물어 가는 모습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때의 상황과 상태를 함께 담아냅니다. 바로 앞 AC.22에서 ‘저녁’과 ‘아침’이 각각 영적 상태를 나타낸다고 설명한 것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따라서 시간의 표현은 말씀 안에서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렘33:20, 25의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 그리고 ‘주야로 그 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라는 표현도 같은 원리를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도 낮과 밤은 실제 자연의 시간 질서를 배경으로 하지만, 스베덴보리가 AC.23에서 이 구절을 인용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낮과 밤에 ‘그 때’가 있으며 시간의 표현이 그에 속한 상태와 결부되어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 단락에서 곧바로 낮과 밤을 시험과 회복의 모든 교대에 일대일로 대응시키거나, 거듭남의 모든 과정에 대한 별도의 섭리 법칙으로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주제들은 해당 내용을 직접 다루는 다른 AC 문맥에서 살피는 편이 안전합니다.

 

애5:21의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는 ‘날’과 ‘상태’의 관계를 특히 이해하기 쉽게 보여 줍니다. 지나간 달력의 날짜 자체를 다시 가져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날들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그 날들에 속했던 삶과 상태가 새로워지는 것을 뜻합니다. 더구나 바로 앞에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라는 기도가 놓여 있으므로, 여기서 새롭게 되기를 구하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회귀가 아니라 주님께로 돌이켜지는 삶의 회복과 연결됩니다. 다만 AC.23은 여기서 ‘옛적’을 곧바로 태고교회라고 해설하지 않으므로, 이 구절의 직접적인 역할도 ‘날들이 그 날들에 속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 두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보면 AC.23이 왜 AC.22 바로 뒤에 놓이는지도 분명해집니다. AC.22에서는 ‘저녁’과 ‘아침’이 서로 다른 상태를 나타내며,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상태에서 주님께 속한 상태로 나아가는 질서가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AC.23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창1에서 반복되는 ‘날’ 자체가 단순한 시간 단위에 머물지 않고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나타낼 수 있다는 말씀 전체의 용례를 제시합니다. 따라서 창1의 ‘첫째 날’, ‘둘째 날’과 이어지는 날들을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읽는 것은 ‘날’이라는 단어에 임의로 새로운 뜻을 붙인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시간과 상태가 결부되어 표현되는 방식을 따라 읽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AC.23을 근거로 성경에 나오는 모든 ‘날’을 언제나 기계적으로 ‘영적 상태’라고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곳에서는 실제 하루가 중심일 수 있고, 어떤 곳에서는 더 넓은 시간이나 시대가 중심일 수 있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그 시간에 속한 상태가 함께 표현됩니다. 중요한 것은 문맥입니다. AC.23이 보여 주는 것은 ‘날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상태만을 뜻한다’는 상응 사전식 공식이 아니라, 말씀에서 시간의 표현이 그 시간에 속한 상태를 함께 담을 수 있다는 해석 원리입니다.

 

이 원리는 창세기 1장의 전체 구조와 만날 때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AC.6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의 여섯 날을 인간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인 상태라고 이미 제시했습니다. AC.23은 이제 여러 선지서의 용례를 통해 ‘날’이라는 말 자체가 그러한 읽기를 받아들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창1의 날들은 단순히 시계로 계산되는 여섯 개의 시간 단위로만 읽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차례로 새롭게 하시는 거듭남의 상태들로 읽힙니다.

 

결국 AC.23의 핵심은 ‘시간을 버리고 상태만 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에서는 시간과 상태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시간의 이름이 그 시간에 속한 영적 상태를 담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1의 ‘날’을 읽을 때도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가?’라는 질문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 날은 거듭나는 사람의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가?’라고 물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AC.23이 창조의 날들을 거듭남의 날들로 읽도록 열어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AC.23 해설)

 

 

 

AC.24, 창1:6-7(AC.24-25), ‘궁창의 구별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때’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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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창1:5(AC.22-23), ‘저녁에서 아침으로 : 사람의 것에서 주님의 것으로 나아가는 첫 날의 질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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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저녁’은 모든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그늘의 상태, 곧 거짓의 상태이며 신앙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침’은 모든 이후의 상태를 의미하는데, 그것은 빛의 상태, 곧 진리의 상태이며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하지만,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다윗을 통해 하신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What is meant by “evening” and what by “morning” can now be discerned. “Evening” means every preceding state, because it is a state of shade, or of falsity and of no faith; “morning” is every subsequent state, being one of light, or of truth and of the knowledges of faith, “Evening,” in a general sense, signifies all things that are of man’s own; but “morning,” whatever is of the Lord, as is said through David:

 

2여호와의 영이 나를 통하여 말씀하심이여 그의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3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4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삼하23:2-4) The spirit of Jehovah spake in me, and his word was on my tongue; the God of Israel said, the rock of Israel spake to me. He is as the light of the morning, when the sun ariseth, even a morning without clouds, when from brightness, from rain, the tender herb springeth out of the earth (2 Sam. 23:2–4).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며, 그분이 오시는 때는 신앙이 없기 때문에 ‘저녁’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니엘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As it is “evening” when there is no faith, and “morning” when there is faith, therefore the coming of the Lord into the world is called “morning”; and the time when he comes, because then there is no faith, is called “evening,” as in Daniel:

 

14그가 내게 이르되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 26이미 말한 바 주야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니 너는 그 환상을 간직하라 이는 여러 날 후의 일임이라 하더라 (단8:14, 26) The holy one said unto me,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 two thousand and three hundred (Dan. 8:14, 26).

 

※ 여기서 ‘주야’에는 원문의 ‘저녁-아침’(evening-morning)이라는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에서 ‘아침’은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그것은 곧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In like manner “morning” is used in the Word to denote every coming of the Lord; consequently it is an expression of new creation.

 

해설

AC.2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1에서 반복되는 ‘저녁’과 ‘아침’을 단순한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언어로 해석하는 중요한 원리를 제시합니다. ‘저녁’은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며, 그것은 그늘의 상태, 곧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입니다. 반대로 ‘아침’은 이후의 상태로, 빛의 상태, 곧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라는 표현은 단순히 하루가 지나갔다는 뜻을 넘어, 거듭남 가운데 한 상태에서 그 다음 상태로 나아가는 영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AC.20에서 처음 빛이 나타났고 AC.21에서 빛과 어둠이 구별되었다면, AC.22에서는 그 변화의 방향이 ‘저녁에서 아침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대비를 더욱 일반적인 원리로 확장하여 ‘저녁’은 사람 자신의 것에 속한 모든 것을, ‘아침’은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21의 ‘주님께 속한 모든 것은 낮에 비유되고, 사람 자신의 모든 것은 밤에 비유된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사람 자신의 것이란 단순히 인간의 개성이나 자연적인 능력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여기는 proprium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서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인간의 인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나온다고 여기던 질서에서 그것들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질서로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이 원리를 보여 주기 위해 스베덴보리가 먼저 인용하는 말씀이 삼하23:2-4입니다. 여기서 ‘돋는 해의 아침 빛’, ‘구름 없는 아침’,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이라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AC.22에서 이 구절을 인용한 직접적인 이유는 ‘아침’이 빛과 생명이 나타나는 상태를 표현한다는 것을 말씀 자체에서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아침의 빛 아래 새 풀이 돋아나는 모습은 빛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이 나타나는 이미지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만을 근거로 ‘새 풀’을 퍼셉션이나 특정한 영적 기능에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붙드는 중심은 ‘아침’입니다. 아침은 주님께 속한 빛이 나타나는 상태이며, 그 빛 아래 새로운 생명이 시작되는 상태입니다.

 

이어지는 설명에서는 개인의 거듭남을 넘어 주님의 세상 오심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을 때가 ‘아침’이므로,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이라 하고, 그분이 오시는 당시의 상태는 신앙이 없었으므로 ‘저녁’이라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같은 사건을 모순되게 저녁과 아침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기 직전의 상태를 그 근본적인 신앙의 결핍 때문에 ‘저녁’이라 하고, 바로 그 상태 가운데 주님께서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된 것을 ‘아침’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질서는 한 개인의 거듭남뿐 아니라 교회의 황폐와 주님의 오심이라는 더 큰 차원에서도 적용됩니다.

 

이 대목에서 단8:14, 26이 인용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개역개정은 ‘이천삼백 주야까지니’라고 번역하지만, 히브리어 표현에는 ‘저녁’과 ‘아침’이 들어 있으며 Potts 역시 ‘Even unto evening when it becomes morning’이라고 옮겨 AC.22의 논지를 드러냅니다. 더구나 단8의 문맥에서는 성소가 짓밟히고 항상 드리는 제사가 중단되며 진리가 땅에 던져지는 황폐의 상황과, 이후 성소가 정결하게 되는 회복이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단순히 ‘저녁’과 ‘아침’이라는 단어가 우연히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신앙과 거룩한 것들이 황폐해진 상태와 그 뒤의 회복이라는 문맥이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영적 질서를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다만 단8의 ‘이천삼백’을 AC.22에서 별도의 예언 시간표로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기서는 그 숫자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초점은 신앙이 없는 상태가 ‘저녁’이고, 신앙이 있는 상태가 ‘아침’이라는 데 있으며, 이를 통해 주님의 오심을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22에서 단8:14, 26을 읽을 때도 숫자의 계산보다 ‘저녁에서 아침으로’, 곧 황폐한 상태에서 주님의 오심으로 새로운 빛이 시작되는 구조를 붙드는 것이 본문의 논지에 더 충실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AC.22 전체를 하나로 묶어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아침’이 ‘주님의 모든 오심’을 의미하며, 따라서 ‘새로운 창조’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모든 오심’은 주님의 역사적 성육신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제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심으로 이전의 어두운 상태에 빛이 시작되고 새로운 질서가 열리는 모든 경우에 ‘아침’이라는 영적 표현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아침은 새로운 창조의 표현이 됩니다. 창1의 창조가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고 있다는 지금까지의 설명과도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22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는 단순히 어두웠다가 밝아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 자신의 것에서 주님께 속한 것으로, 거짓과 신앙 없음의 상태에서 진리와 신앙의 지식들이 있는 상태로 나아가는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언제나 주님의 오심이 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밤을 아침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오심으로 아침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개인의 거듭남에서도, 교회의 회복에서도 ‘아침’이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는 이유입니다. (AC.22 해설)

 

심화

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 심화 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 심화1. ‘왜 스베덴보리는 단8:14, 26의 저녁과 아침을 인용했는가?’ AC.22를 처음 읽을 때 가장 어리둥절한 부분 가운데 하나가 단8:14, 26의 인용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없을 때가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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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3, 창1:5, ‘날이 뜻하는 시간과 상태 : 거듭남의 날들을 읽는 원리’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AC.23말씀에서 ‘날’(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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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 창1:4-5, ‘빛과 어둠의 분별 : 주님에게서 난 것은 낮, 사람에게서 난 것은 밤’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And God saw the light, that it was good; and God distinguished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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