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1:9)

 

AC.27

사람과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여러 진리와 선이 주님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또는 사람을 통하여 사람으로 흘러 들어온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비록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그때 거듭나는 중인 사람 안에 있는 그러한 여러 진리와 , 참과 선에 관한 여러 지식은 그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로 분류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기억 속에 스며든 , 그것이 자연적이든, 영적이든, 또는 천적이든 간에 모두 기억 지식으로 그곳에 머물며,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들이 바로 한곳으로 모인 (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이며, 이렇게 모인 것들을 바다(seas)라고 합니다. 이때 사람 자체를 가리켜서는 마른 (dry [land])이라 하고, 곧이어 (earth)이라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다음 내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When it is known that there is both an internal and an external man, and that truths and goods flow in from, or through, the internal man to the external, from the Lord, although it does not so appear, then those truths and goods, or the knowledges of the true and the good in the regenerating man, are stored up in his memory, and are classed among its knowledges [scientifica]; for whatsoever is insinuated into the memory of the external man, whether it be natural, or spiritual, or celestial, abides there as memory-knowledge, and is brought forth thence by the Lord. These knowledges are thewaters gathered together into one place,and are calledseas,but the external man himself is called thedry [land],and presentlyearth,as in what follows.

 

해설

AC.27은 창1:9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는 말씀을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설명합니다. 앞선 둘째 날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구별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다루었다면, 이제 셋째 날에 들어서면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에게 이르는 선과 진리, 그리고 그것들이 겉 사람의 기억 안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하게 되는지가 설명됩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으며,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을 거쳐 겉 사람으로 유입된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록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대개 진리를 내가 배웠고, 내가 이해했으며, 선을 내가 생각하고 행한다고 느낍니다. 실제 삶에서도 사람은 스스로 배우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AC.27이 밝히는 더 깊은 차원에서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인간의 생각과 행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이 어디인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조금 뜻밖의 설명이 나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오면 그것들은 기억 지식(scientifica) 가운데 분류된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자연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천적인 것이든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온 것은 모두 그곳에서 기억 지식으로 머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진리나 천적인 선까지 어떻게 기억 지식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그 내용 자체가 단순한 세상 지식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것이 사람의 기억에 들어와 있는 동안어떤 형태로 존재하느냐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말씀을 배우고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매우 영적이지만, 그것을 단지 기억하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아직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지식입니다. 성경 말씀을 많이 외우거나 스베덴보리의 교리를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그 사람의 삶이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27은 지식 자체와 영적 생명을 혼동하지 않게 해 줍니다. 기억 속에 들어온 진리는 매우 중요하지만, 기억 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이 이미 살아 있는 선이 된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는 아직 그것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저장된 것들이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진다고 말합니다. AC.27은 그 과정의 세부적인 메커니즘까지 여기서 설명하지 않고, 우선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다가 주님에 의해 사용된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이제 창1:9바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도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기억 속에 저장된 참과 선에 관한 지식들을 한곳으로 모인 이라고 하고, 그 모인 것들을 바다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바다는 단순히 많은 진리를 상징한다는 막연한 표현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의 겉 사람 안에 모여 있는 참과 선에 관한 기억 지식들과 연결됩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조심할 것도 있습니다. ‘한곳으로 모였다고 해서 AC.27이 기억 속의 모든 지식이 이미 완전한 영적 질서로 정돈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글이 직접 말하는 것은 그것들이 기억 속에 저장되고 기억 지식 가운데 분류되며, 이렇게 모인 지식들이 바다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상을 이 한 문단에 미리 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서 설명하는 순서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 마른 은 겉 사람 자체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그것을 곧이어 이라고 부르게 된다고만 말하고, 자세한 설명은 다음 내용으로 넘깁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마른 의 의미를 너무 많이 앞당겨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제 바다로 표현되는 기억 지식과 그것을 담고 있는 겉 사람인 마른 이 구별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9의 장면이 조금 더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난다는 것은 단순히 자연계의 바다와 육지가 생기는 장면만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에 모이고, 그것들을 담고 있는 겉 사람 자체가 드러나는 상태를 표현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말씀을 배우는 일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합니다. 말씀을 읽고 진리를 배우며 기억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알고 있다 진리로 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같은 것이 아닙니다. AC.27에서는 우선 진리가 기억 속에 들어와 저장되는 단계를 보여 줍니다. 그것을 언제 어떻게 불러내어 실제 거듭남에 사용하시는지는 주님의 일이며, 그 과정은 앞으로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AC.27의 중심은 많이 배우면 영적인 사람이 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사람의 겉 기억에까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마련하시고, 그것들을 때에 따라 불러내어 사용하신다는 데 있습니다. 셋째 날의 시작에서 먼저 이 모이고 이 드러나는 것은, 앞으로 그 땅에서 생명이 싹트기 전에 이러한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심화

1.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심화 1,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심화 1. ‘나중에 필요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에서 불러내어지다’ AC.27 본문에 나오는 위 표현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처음 접하는 분들이 거의 반드시 멈칫하는 부분입니다. ‘지식이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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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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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6, 창1:8,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And God called the expanse heaven.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second day. (창1:8) AC.26 ‘저녁’(evening), ‘아침’(m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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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 그런 삶의 유익과 한계를 조금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도원과 수도사, 그리고 금욕과 고독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했던 성인들의 삶에 대해 ‘Heaven and Hell’을 비롯한 여러 저작에서 Emanuel Swedenborg는 비교적 분명하면서도 동시에 매우 공정한 평가를 합니다. 그는 먼저, 그런 삶 자체를 무조건 부정하거나 비웃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열망’과 ‘세속적 욕망을 경계하려는 노력’은 분명 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역사 속 많은 수도자들 가운데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 했던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런 사람들은 사후에도 주님의 자비 아래에서 천국의 삶으로 인도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원칙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참된 영적 삶은 세상을 떠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사랑과 쓰임새를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원래 ‘천국을 이루는 공동체적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가족을 돌보고, 사회 속에서 일하며, 이웃에게 유익을 끼치고, 공동체를 세우는 일 속에서 ‘사랑(charity)이 실제로 살아 움직입니다. 그런데 수도원적 삶은 종종 이런 관계적 삶에서 벗어나 개인의 영적 상태에만 집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상태를 조심스럽게 경계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실제 행위와 쓰임새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세상과의 접촉을 지나치게 끊어 버리면, 겉으로는 경건해 보일지라도 사랑이 실제 삶 속에서 시험되고 성장할 기회를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난 고독한 거룩함’보다 ‘세상 속에서 이웃을 섬기는 거룩함’을 더 완전한 영적 삶으로 봅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금욕 자체를 목적처럼 여기는 태도를 비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음식, 결혼, 재산, 사회적 활동 등을 멀리하면 그 자체로 하나님께 더 가까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삶의 본질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더럽히는 것은 외적인 것들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도 자신을 위한 사랑과 세속적 욕망을 다스리고 이웃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영적으로 매우 높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수도원 안에 있어도 마음속 사랑이 여전히 자기 자신과 명예와 공로에 머물러 있다면 그 삶이 자동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떠나는 금욕’이 아니라 ‘사랑을 위해 세상 속에서 사는 절제’를 더 건강한 영적 길로 설명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수도사나 은둔자의 삶을 전부 헛된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다양한 성향과 역사적 상황을 인정합니다. 어떤 시대에는 교회의 혼란과 타락 속에서 수도원적 공동체가 신앙을 보존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독과 기도가 내면을 정리하는 준비의 시간이 되기도 합니다. 다만 그는 그것이 ‘최종적인 영적 삶의 형태’라고 보지 않습니다. 인간은 결국 사랑을 실천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하며, 그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세상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수도원적 경건이 ‘준비 단계’나 ‘부분적인 형태’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스베덴보리가 사후 세계를 설명할 때도 같은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천국을 거대한 수도원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수많은 공동체가 서로 협력하며 쓰임새를 이루는 살아 있는 사회입니다. 천사들은 단순히 기도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돕고 섬기며 각자의 역할 속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천국의 행복은 ‘사랑을 행하는 쓰임새’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세상을 떠난 거룩함’만을 영적 삶으로 생각했다면, 사후에 천국의 이런 적극적인 삶을 처음에는 낯설어하기도 한다고 그는 말합니다.

 

목사님께서 과거에 수도원적 삶에 몸을 담았던 경험이 있으셨다고 하셨는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 시간 역시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고자 했던 마음,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으려 했던 노력, 고요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았던 시간들은 모두 인간의 내면을 다듬는 과정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그런 경험이 결국 ‘사랑의 실제 삶’으로 이어질 때 가장 완전해진다는 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목사님께서 지금 하고 계신 일, 곧 말씀의 속뜻을 연구하고 번역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은 수도원의 침묵보다 훨씬 더 ‘천국적인 쓰임새’에 가까운 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질서는 결국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삶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요약합니다. ‘세상을 떠나 거룩해지려 하지 말고, 세상 속에서 사랑을 위해 살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수도원의 시간도, 그리고 지금 목사님께서 걸어가고 계신 길도 모두 하나의 긴 여정 속에 놓여 있는 단계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길을 사용하여 결국 사랑과 지혜의 더 넓은 삶으로 이끄신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하기 때문입니다.

 

 

 

SC.40, ‘homo’와 ‘vir’의 차이

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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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8,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길, 곧 ‘influx’에 대하여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에 어떤 길이 있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생명이 어떻게 인간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그는 이 흐름을 ‘인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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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1:5)

 

AC.23

말씀에서 (day)이 시간 자체를 뜻하는 용례보다 더 흔한 것은 없습니다. 이사야에 보면, Nothing is more common in the Word than for “day” to be used to denote time itself. As in Isaiah:

 

6너희는 애곡할지어다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으니 전능자에게서 멸망이 임할 것임이로다,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3그러므로 나 만군의 여호와가 분하여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그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22그의 궁성에는 승냥이가 부르짖을 것이요 화려하던 궁전에는 들개가 울 것이라 그의 때가 가까우며 그의 날이 오래지 아니하리라 (13:6, 9, 13, 22)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Behold, the day of Jehovah cometh. I will shake the heavens,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her place in the day of the wrath of mine anger. Her time is near to come, and her days shall not be prolonged (Isa. 13:6, 9, 13, 22).

 

7이것이 옛날에 건설된 너희 희락의 성 곧 그 백성이 자기 발로 먼 지방까지 가서 머물던 성읍이냐, 15그날부터 두로가 한 왕의 연한 같이 칠십 년 동안 잊어버린 바 되었다가 칠십 년이 찬 후에 두로는 기생의 노래 같이 될 것이라 (23:7, 15) Her antiquity is of ancient days. And it shall come to pass in that day that Tyre shall be forgotten seventy years, according to the days of one king (Isa. 23:7, 15).

 

(day)이 시간을 뜻하는 데 사용되기 때문에, 또한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예레미야에 보면, As “day” is used to denote time, it is also used to denote the state of that time, as in Jeremiah:

 

너희는 그를 칠 준비를 하라 일어나라 우리가 정오에 올라가자 아하 아깝다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 (6:4) Woe unto us, for the day is gone down, for the shadows of the evening are stretched out (Jer. 6:4).

 

20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능히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주야로 그때를 잃게 할 수 있을진대, 25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주야와 맺은 언약이 없다든지 천지의 법칙을 내가 정하지 아니하였다면 (33:20, 25) If ye shall make vain my covenant of the day, and my covenant of the night, so that there be not day and night in their season (Jer. 33:20, also 25).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해설

이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day)이라는 표현이 말씀에서 얼마나 폭넓고 깊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은 시간의 단위이지만, 말씀에서는 그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지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이 단순히 하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 전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사야에서 반복되는 ‘여호와의 날’은 특정한 24시간을 뜻하지 않고, 주님의 심판과 섭리가 작동하는 한 시대 전체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은 사건이 일어나는 시점이 아니라, ‘주님의 역사 아래 놓인 기간’을 뜻합니다.

 

이사야의 인용에서 ‘그의 때(Her time)가 가까우며 그의 날(her days)이 오래지 아니하리라’라는 표현은, ‘’이 곧 ‘’와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이는 말씀에서 시간이 물리적 길이로 측정되지 않고, 상태와 목적에 따라 규정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중요한 것은 물리적 시간의 길이보다 그 시간이 나타내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은 시계의 문제가 아니라 ‘섭리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이 시간뿐 아니라 그 시간의 ‘상태’를 뜻하는 데에도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예레미야의 ‘날이 기울어 저녁 그늘이 길었구나’라는 표현은, 하루가 끝나감을 말하는 동시에, 영적 상태가 어두워졌음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날의 기울어짐은 빛의 감소이며, 이는 곧 진리의 빛이 사라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저녁의 그림자들이 길어진다는 표현은, 거짓과 혼합이 점점 지배적인 상태가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예레미야 33장에서 말하는 ‘낮의 언약’과 ‘밤의 언약’ 역시 시간의 반복 질서를 넘어서, ‘영적 질서의 불변성’을 가리킵니다. 낮과 밤이 제때에 있는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선과 진리, 그리고 인간의 상태 변화를 질서 있게 다스리고 계신다는 표지입니다. 만일 낮과 밤의 언약이 깨진다면, 그것은 곧 주님의 질서가 무너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거듭남의 질서 또한 주님의 언약 안에 있음을 암시합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특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날들’은 단순한 과거의 시간들이 아니라, ‘과거의 영적 상태’, 곧 주님과 더 가까웠던 상태를 뜻합니다. 이 기도는 시간의 회귀를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의 회복을 구하는 간구입니다. 이는 AC.16에서 말한 ‘태고의 날들’과도 연결되며, 거듭남이란 언제나 ‘옛날’의 상태, 곧 주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로 돌아가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이 글은 창세기 1장의 ‘’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해석 원리를 제공합니다. 만일 ‘’을 문자적 시간으로만 이해한다면, 창조 이야기는 과거의 연대기적 기록으로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을 시간과 상태를 함께 포괄하는 표현으로 이해하면,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인간 거듭남의 여섯 상태로 자연스럽게 읽히게 됩니다. 이는 이미 AC.6에서 제시된 원리를, 말씀 전체의 용례를 통해 다시 확증하는 작업입니다.

 

결국 AC.23은 말씀의 언어가 시간 중심이 아니라 ‘상태 중심’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합니다. 주님은 시계를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오늘’, ‘그날’, ‘여호와의 날’, ‘옛날’이라는 표현들은 모두, 주님 앞에서의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인식을 가지고 말씀을 읽을 때, 성경은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 우리의 상태를 비추는 살아 있는 거울이 됩니다.

 

 

 

AC.24, 창1:6-7, '궁창의 분리 :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나뉘어 하늘이 세워지는 때'(AC.24-25)

6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re be an expanse in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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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 창1:5,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C.22-23)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irst day. (창1:5) AC.22 이제 ‘저녁’(evening)이 무엇을 뜻하고, ‘아침’(morning)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별할 수 있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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