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20(D5)-매일예배(2495, 눅11,37-42),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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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s95W5lrf6xM

 

 

잔과 대접의 겉’, ‘안에 있는 것’,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의 속뜻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눅11:37-42)

 

 

사람에게는 내적, 영적인 것(an internal spiritual)과 외적, 자연적인 것(an external natural)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내적인 것은 천국과, 외적인 것은 세상과 결합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사람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걸 통해(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하는 그 어떤 일이든 그는 천국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through heaven from the Lord)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걸로만(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자아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따르게 됩니다. (AE.794:3) And as man has an internal spiritual and an external natural, and the internal is conjoined with heaven and the external with the world, it follows that whatever man does 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he does from heaven, that is, through heaven from the Lord; but anything that a man does 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this he does from self. (AE.794:3)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계13:5)

 

 

오늘 말씀에서도 주님은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릇의 겉보다는 속을 깨끗하게 하라고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본문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분문 37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어느 바리새인이 주님께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자 주님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말씀에서 ‘바리새인’은 위선자를 뜻하는데요,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고, 내적으로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율법이나 규례들은 철저히 지켰지만, 그 속에 담겨있는 영적 의미, 곧 그 정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바리새인’ 하면 겉으로만 거룩해 보일 뿐 내적으로는 악하고, 심지어 교활하기까지 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개중에는 주님에게 관심을 보이는 바리새인들도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 주님을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말씀에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적으로 ‘마시는 것’은 진리를 배우는 걸 의미하고, ‘음식을 먹는 것’은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바리새인이 주님과 함께 식사하기를 원하는 것은 위선자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배우고, 선을 행하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이 진리를 배우려고만 할 뿐 그대로 사는 데는 그다지 뜻이 없거나 관심이 없는데요, 바로 그런 사람들이 위선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위선자라 할지라도 만일 그가 진리를 배우기 원하면 밀어내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떤 사람이든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록 바리새인이지만 그의 청을 받아들여 그의 집으로 가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을 때, 주님께서는 식사하기 전 손을 씻는 유대의 전통을 지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자 38절에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라고 말합니다. 이 ‘손을 씻는 것’과 관련하여 출애굽기 30장 17절 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7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8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19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20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니라 21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출30:17-21)

 

주님께서 제사장들에게 회막에 들어갈 때에 수족을 씻도록 명령하신 까닭은, 손과 발을 씻는 것은 그들에게 있는 악을 씻어내는 것을 뜻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뜻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채, 식전에 손 씻는 것을 전통으로 만들어 마치 율법처럼 지켰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위생 때문에라도 손을 씻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즉 물리적으로 손을 씻는 것은 주님에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주님께 나아올 때 먼저 자신의 악 씻어내기를, 즉 ‘아, 내 안에 악이 있으니 이대로는 주님을 뵈옵지 못하겠다...’ 하며, 먼저 회개의 시간을 갖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말씀에는 주님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손 씻는 문제로 갈등하는 모습이 여러 번 나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교리에는 관심이 없고, 교회의 외관이나 세련된 예배 의식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크고 화려한 교회에 다니는 것을 항상 긍지로 여깁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손을 씻지 않는다고 주님을 이상하게 여기는 바리새인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을 아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39절 말씀입니다.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을 음식을 담는 잔과 대접에 비유하시면서 ‘겉은 깨끗이 하나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하십니다.

 

여기서 ‘’과 ‘대접’이 무엇일까요? 잔과 대접은 사람의 겉 사람을 뜻합니다. 겉 사람을 그릇에 비유하신 것은, 속 사람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진리를 받는 그릇이 겉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릇의 겉만 깨끗하고 속에는 악이 가득하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속 사람으로부터 하지 않고, 겉 사람으로부터만 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럴 경우, 겉으로는 선하고 진실한 것처럼 행동하지만 목적이나 의도는 항상 이기적이며 악합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은 모두 인간의 자아로부터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우리는 어느 공직자의 수려한 외모와 세련된 언변 뒤에 숨겨진 불순하고 파렴치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그릇의 겉만 깨끗하고 속은 불결한 위선자들입니다.

 

※ 2019년, 20년 상간 온 나라를 뒤흔들었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41절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는 것은 이웃을 구제할 때 겉 사람으로만 하면 안 되고, 속 사람과 함께, 즉 속 사람으로부터 받은 걸 가지고 겉 사람을 통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속 사람으로부터 하는 행동이라야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계시록 해설’(Apocalypse Explained) 794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에게는 내적, 영적인 것(an internal spiritual)과 외적, 자연적인 것(an external natural)이 있습니다. 여기서 이 내적인 것은 천국과, 외적인 것은 세상과 결합되어 있는데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사람이 내적인 것으로부터 외적인 걸 통해(from that internal through the external) 하는 그 어떤 일이든 그는 천국으로부터, 즉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해(through heaven from the Lord)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내적인 것 없이 외적인 걸로만(by the external without the internal) 하는 건 그게 무엇이든 자아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뒤따르게 됩니다. (AE.794)

 

여기서 내적, 영적이라고 하는 것은 속 사람을, 외적, 자연적이라는 것은 겉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매일같이 깨끗해지기 위해서는 자아의 생각을 따르면 안 되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주님의 생각을 따라야만 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정말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끝으로 주님은 위선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주님 당시 유대의 성직자들은 박하와 운향과 같은 값비싼 향품을 가지고 십일조를 드렸고, 그런 식으로 자신의 경건함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화(禍)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 ‘정의와 하나님의 사랑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그들의 십일조가 속 사람으로부터 드리는 것이 아니라 겉 사람으로부터 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드리는 예배는 무엇보다도 속 사람으로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또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적인 예배와 외적인 예배를 함께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새 교회분들 중에는 내적인 것만 중시하여 간혹 외적인 걸 소홀히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배와 성찬에 참여하는 것, 각자의 능력에 맞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 이웃을 구제하는 것 등이 모두 외적인 예배입니다. 내적 예배는 외적인 예배를 통해 완성됩니다. 그러므로 외적인 예배를 드릴 때는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드리면 안 되고, 주님과 이웃을 위해, 진리와 선 그 자체를 위해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외적이며, 동시에 내적인 예배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8610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적인 것은 외적인 것과 결합하고 상응을 통해 가장 마지막 최종적인 것과 결합합니다. 그때 첫 번째 진리는 마지막 진리 안에서 힘을 얻는데, 그 이유는 첫 번째 진리가 마지막 진리 안에 있고, 마지막 진리를 통해 실행되기 때문입니다. (AC.8610) For interior things are conjoined with exterior and finally with the last or ultimate by means of correspondences; then the truth which is first has strength in that which is last, because it is in this and acts by means of it. (AC.8610)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가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한 사람은 이쪽에서, 한 사람은 저쪽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출17:12)

 

※ 여기서 ‘모세’는 주님을 표상합니다.

 

여기서 내적인 것, 곧 내적 진리 또는 첫 번째 진리는 주님에게서 직접 나오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오한 진리(the truth Divine)를 뜻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반면에 외적인 진리, 또는 마지막 진리는 글자로 기록된 성경의 말씀입니다. 아무리 심오한 진리라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어야 진정한 진리이며 능력의 진리입니다. 그 진리가 인간을 거듭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모든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과 함께 있어야 하며, 그래야 완전하고 힘이 있다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주님은 위선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위선자가 어떤 사람입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속 사람으로부터 하지 않고, 겉 사람으로부터만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주님 말씀에 의하면, ‘화 있을진저’, 곧 모든 재앙과 액화가 따를 것이라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겉 사람으로부터 하는 모든 행동에는 언제나 이기적 욕심이 깔려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지옥을 향한 문, 곧 지옥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오직 겉 사람으로부터만 말하고 행동하는 위선자들은 환난 중에 화를 면할 수가 없습니다.

 

어려울수록 인간의 힘에 의지하지 마시고, 속 사람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주님의 지혜를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시험을 이길 힘을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또한 시험으로 고통받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사5:16)

 

아멘

 

원본

2020-03-2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20(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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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8(D3)-매일예배(2494, 눅11,29-36),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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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VBFeMhcl_o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의 속뜻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30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33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눅11:29-36)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그의 머릿속 마음 상태를 반영한다는 사실, 예를 들어, 마음이 쓰임새의 삶을 사랑하여(in the love of uses) 뭔가를 하고 싶어 하면, 몸은 자기의 모든 지체들, 곧 손, 발, 입 등을 가지고(by means of its members) 결국 그걸 해내고자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게 과연 그런 것은,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은 무슨 중심 원리로서(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their principles) 머릿속에 있고, 거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들은 몸 안에 있는데요, 이것은 마치 의지는 행위 안에 있고, 사고는 말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행위를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TCR.403:2) Who does not also comprehend that all the works that a man does with his body are done according to the state of his mind in the head; and if the mind is in the love of uses, the body by means of its members accomplishes them? And this is so, because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their principles are in the head, and in their derivatives in the body, as the will is in deeds, and the thought in speech, (TCR.403:2)

 

 

※ 아래 에피소드는 원본에 나오는 서울 새 교회 에피소드이지만 저 역시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어 그대로 옮깁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어떤 큰 교회에 다니는 부부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이 새 교회와 기성교회가 다른 점이 무엇이냐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 차이점을 말씀드렸지요. 첫째는, 하나님을 믿기만 해서는 구원받을 수 없고, 믿고 행해야 한다 했고, 둘째는,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는 겉뜻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기록되었지만 속뜻으로는 바로 하나님 자신이신데 다만 우리 눈에 보이게 육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 즉 기록된 겉 글자의 뜻 안에는 영적 의미, 즉 속뜻이 담겨 있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와 영적 의미, 즉 겉뜻과 속뜻을 함께 알아야 한다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부인 되시는 분이 제 말을 조목조목 비판했습니다. 그분은 본인이 다니는 교회에서 신학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것은 각자의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에, 논쟁을 할 일은 아니라 말씀드리며, 대화를 마친 적이 있습니다.

 

주님 당시에도 주님과 제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주님의 가르침이 유대교회의 교리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유대교회 사람들은 모세의 율법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장로의 전통이라는 생활 규범을 만들어 그것을 율법보다 더 소중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 그것은 사람의 법이지 하나님의 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태복음 15장에서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3절) 하시며, 그들을 꾸짖으셨지요. 어느 시대에나 이렇게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라면서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것은 마치 주님에게 당신이 메시아라는 표적이 어디 있느냐? 라고 하면서 표적을 요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람의 전통을 지키면서 표적을 요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절 말씀입니다.

 

29무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주님은 그동안 유대인들에게 수없이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눈먼 자를 보게 하셨고, 귀먹은 자를 듣게 하셨습니다. 중풍 병자를 고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주님이 메시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새로운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애초에 진리에 뜻이 없는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악한 세대’라 하시고,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하셨을까요?

 

요나는 타락한 도시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키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절하고 도망치다가 결국 니느웨 성으로 돌아가 그곳 사람들을 구한 선지자입니다. 요나가 그렇게 니느웨로 다시 돌아가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를 고래의 배 속에 가두어 사흘 밤과 낮을 지내게 하십니다. 요나가 고래 배 속에서 머무는 사흘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세상에서 주님이 당하신 지독한 시험을 표상합니다. 주님이 그렇게 혹독한 시험을 견디신 이유는 인류에게 세상의 행복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복을 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유대인들은 하늘의 복을 원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 하시고, 또 30절에서는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 됨과 같이 인자도 이 세대에 그러하리라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이 행하신 모든 기적은 세상 영광을 위한 기적이 아니고, 하늘의 영광을 위한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또 31절과 3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1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거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32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거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솔로몬으로부터 지혜를 얻고자 찾아온 시바의 여왕이나 요나의 예언을 듣고 회개한 니느웨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구원을 얻은 이방인들입니다. 왜냐하면 솔로몬 왕이나 요나는 모두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밖의 이방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구원을 얻을까요? 계시록 해설 351번 글 2번 항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통해 내려오며, 중심이 되는 빛으로부터 주위의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교회 밖의 이방인들에게까지 이른다.

 

그러니까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거처 내려오는 진리의 빛은 처음에는 교회로 내려오고, 다음에는 교회를 중심으로 그 외연(外延)을 이루는 수많은 종교의 교리 안으로 흘러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와 연결이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열왕기상 11장에서는 ‘왕은 후궁이 칠백 명이요 첩이 삼백 명이라’(3절)는 식으로 표현합니다.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을 단순히 솔로몬 왕이 타락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은 이방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 종교의 교리 안에 있는 진리를 통해 주님과 결합할 수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왜냐하면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솔로몬 왕은 주님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도 이렇게 진리를 사랑하는데 정작 주님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진리를 대적하고 모독한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남방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를 정죄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희미한 진리의 빛 안에 있는 이방인들도 구원을 받는데, 가장 밝은 빛 안에 있으면서도 그 빛을 받아들이지 못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진리를 대적하고, 진리의 표적만을 요구했을까요?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망하지 않고, 오직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관련하여 ‘참된 기독교’(True Christian Religion) 403번 글 2번 항에는

 

사람이 몸으로 하는 모든 것은 그의 머릿속 마음 상태를 반영한다는 사실, 예를 들어, 마음이 쓰임새의 삶을 사랑하여 뭔가를 하고 싶어 하면, 몸은 자기의 모든 지체들, 곧 손, 발, 입 등을 가지고 결국 그걸 해내고자 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이게 과연 그런 것은,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은 무슨 중심 원리로서 머릿속에 있고, 거기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들은 몸 안에 있는데요, 이것은 마치 의지는 행위 안에 있고, 사고는 말에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즉 그의 행위를 보면 그의 마음을 알 수 있고, 그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지요.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상태에 따라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과 애정이 영향을 받으며, 그것에 따라 말과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35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 36네 온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으면 등불의 빛이 너를 비출 때와 같이 온전히 밝으리라 하시니라

 

34절에서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말씀하신 것은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몸은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뜻하고, 눈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온전하다면 말이나 행실도 바르고 온전할 것이며, 반대로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잘못되면 그가 하는 말이나 행실도 잘못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진리를 제대로 알고 실천했던 사람들은 진리에 대한 이해력, 곧 진리를 이해하는 능력이 변하지 않도록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나갔던 귀신이 자기보다 더 나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처럼 이전보다 영적으로 더 나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마태복음 6장 23절에서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라고도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당시나 요즈음이나 진리 안에 있다 자부하면서도 정작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고, 영의 눈이 닫혀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눈이 닫힌 사람은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믿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며, 참된 진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4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진실을 왜곡하면서도 잘못인 줄을 모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속이면서도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의 눈이 어두워지면 주변과 사회 전체에 해악을 끼칩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영의 눈이 어두워 주변과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대로 영의 눈이 밝은 사람은 스스로 진리를 자랑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을 진리로 인도합니다. 주님께서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 속에나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말씀하신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진리를 자랑하지 않아도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말이나 행동을 통해 진리가 드러나도록 하십니다. 그 진리를 통해 많은 사람이 참된 진리가 있는 교회로 올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드는 일에 참여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에 의해 진리가 ‘등경 위에 올려놓아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나타나는 선과 진리가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힘을 얻기 위해서 항상 주님을 붙드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는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지 않으며, 그래야 언제나 바르고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미7:8)

 

아멘

 

원본

2020-02-2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8(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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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6(D1)-주일예배(2493, 눅11,24-28), '물 없는 곳, 청소되고 수리되었다, 악한 귀신 일곱, 당신을 밴 태, 당신을 먹인 젖의 속뜻'.pdf
0.39MB

https://youtu.be/2Cjvo55u5Ok

 

 

‘물 없는 곳’,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악한 귀신 일곱’, ‘당신을 밴 태, 당신을 먹인 젖’의 속뜻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25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28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11:24-28)

 

 

영적 자유(Spiritual freedom)라는 것은 영생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옵니다. 악을 죄로 여겨 그걸 의도하지 않으며,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야만 이 사랑과 그 기쁨을 맛보며 경험하게 됩니다. (DP.73:6) Spiritual freedom is from love of eternal life. Into this love and its enjoyment only he comes who regards evils as sins and therefore does not will them, and who also looks to the Lord. (DP.73:6)

 

 

사람들은 보통 자기한테서 일어나는 일상 모든 일을 자기가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실상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전적으로 자기와 함께 있는 영들의 영향 아래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천국의 비밀’(Arcana Coelestia) 2887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람한테는 악한 영들(evil spirits)과 천사들이 늘 함께 와있습니다. 악한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하고, 그리고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하고 커뮤니케이션합니다. 만일 사람한테서 이들 악한 영들과 천사들을 떼어내면(to be taken away), 사람은 순식간에 그 의도하는 능력과 생각하는 능력(willing and thinking)을, 그 결과 생명이라는 것을 잃어버리게(be devoid of)됩니다. (AC.2887) With man there are evil spirits constantly, and also angels; by the spirits he communicates with the hells, and by the angels with the heavens. If these spirits and angels were to be taken away from him, he would in a moment be devoid of willing and thinking, thus of life. (AC.2887)

 

이런 사실은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인류에게 새롭게 오픈하신 영적 실상입니다. 이런 실상을 알고 인류가 더 이상 속지 않기를 원하셨기 때문인데요, 즉 자기 안에서 악과 거짓 관련, 지옥의 기운이 시작될 때, 얼른 ‘이건 내가 하는 게 아니야. 내 안의 악한 영들이 하는 거야!’라고 하며, 거기서 한발 물러나 그런 기운에 발 담그지 않고, 대신 반대로 천사들을 통해 선과 진리 관련, 천국의 인도를 받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사람은 아무런 힘이 없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각자의 행위에 따라 사후에 천국도 가고, 지옥도 가는 것일까요? 아무 힘이 없는데도 왜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까요?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선택의 자유를 통해 항상 자기와 함께 있는 천사들의 손을 잡았던 사람은, 그래서 그 내면이 천국에 합당하게 준비된 사람은 사후에 천사들과 함께 천국에 들어갑니다. 반대로 천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대신 항상 악령의 손을 잡았던 사람은, 그래서 그 내면이 지옥에 어울리게 된 사람은 악한 영들에게 끌려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지옥의 영들은 기를 쓰고 사람들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인데요, 그들은 특히 오늘날은 세상 사랑과 자아 사랑에 푹 빠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에게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 속삭입니다. 그리고 한술 더 떠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계명에 따라 살 수 없으며, 그러니 계명대로 살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고 교묘하게 설득합니다. 그때 세상에 대한 집념이 강한 사람들은 그들의 논리에 쉽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체어리티(charity, 仁愛)의 신앙, 곧 사랑 실천을 강조하는 신앙을 ‘행위 신앙’, 행위를 강조하는 신앙이라 하며 거부합니다. 바로 그들이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말 못하게 하는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도 주님에 의해 구원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시험을 통해 겸손하여져서 이제는 이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때로는 시험을 허용하십니다. 질병이나 사업의 실패, 각종 사고나 사람들에게 버림받음 같은 시험들을 허용하십니다. 시험을 거치면서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은 실제상황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 곧 평소 입만 살았지 실제상황에서는 악과 거짓을 이길 힘이 전혀 없음을 깨닫습니다. 또 세상 것들은 잠깐 있다 사라지는 뜬구름 같은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그렇게 높았던 마음이 낮아질 때, 이제 그는 주님의 인도를 받아 체어리티의 신앙 가운데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때가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이 주님에 의해 쫓겨나는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그들은 체어리티의 신앙이 자신의 신앙이라 분명하게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귀신은 그동안 그가 이런 고백을 하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지옥과의 싸움이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체어리티의 교리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유혹을 이겨내야 하기 때문인데요, 그런데 자신의 지성을 믿는 사람, 또는 스스로 의지가 강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 자부심이 잘 없어지질 않습니다. 그럴 경우, 지옥의 영들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진리가 아니라 자꾸 자신의 진리와 선, 곧 자기가 옳다 여기는 것으로 싸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오랫동안 세상 즐거움에 깊이 빠졌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예전 버릇을 완전히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싸움이 시작되면 마음 한쪽은 주님의 계명을 따르려 하는데, 다른 한쪽은 자꾸 세상으로 달려갑니다. 그러다 보면 싸움에서 질 때가 많고, 거듭남은 계속 뒷걸음질 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런 상태에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이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못할 때, 나갔던 귀신이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 24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4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더러운 귀신은 신앙인들의 마음속에 숨어 체어리티의 신앙을 반대하던 영입니다. 주님이 그를 쫓아내시자 귀신은 쉴 곳을 찾아 ‘물 없는 곳으로 다녔다’고 합니다. 물 없는 곳은 어떤 곳입니까? 물 없는 곳은 진리는 없고, 거짓과 악만 있는 곳입니다. 물은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귀신들, 즉 지옥의 악령들은 바로 그런 곳에 삽니다. 그래서 물 없는 곳을 찾아다녔으나 마땅한 곳을 찾지 못했고, 그래서 이 귀신은 처음 나온 집, 곧 그 사람한테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25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25절에서는 이 귀신이 전에 살았던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청소되어 아무것도 없는 것은 청결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물이 없는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하면, 신앙인들에게 진리는 없고, 악과 거짓만 가득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들이 그런 상태에 있는 이유는, 비록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아직 주님보다는 자신을 신뢰하는 마음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또 세상 정욕을 좇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 마음속에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는 없고, 여전히 자아에서 비롯된 진리와 정욕만 있습니다. 그런 상태가 바로 집이 청소되어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귀신은 이제 다른 귀신들과 함께 거기에 들어가 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것을 26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6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귀신이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산다’ 했습니다. 여기서 ‘일곱’은 완전한 상태를 말합니다. 완전한 상태란 어떤 것입니까? 지옥의 영들이 그 사람에게 있는 선과 진리를 모두 파괴해 버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인의 내면을 귀신이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한 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회개하고 죄를 짓고, 회개하고 다시 죄짓기를 반복할 때, 점점 더 악한 귀신이 들어와 선과 진리를 남기지 않고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않는 신앙인들은 영적으로 점점 나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말씀을 드리다 보니 마치 제 얘기를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네요...

 

27이 말씀을 하실 때에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음성을 높여 이르되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하니

 

주님께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진리를 전파하실 때, 무리 중에서 한 여자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얼핏 들으면 이 말은 주님을 낳은 마리아를 찬양하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우리처럼 하늘과 땅으로부터 찬송의 대상이 되면 안 됩니다. 이 피조세계에서 찬송의 유일한 대상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주님은 비록 마리아의 몸을 빌어 세상에 오시기는 했지만, 사시는 동안 마리아에게서 받은 인간(人性, human), 곧 유전악의 속성을 가진 인성을 모두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받은 신성한 인간(Divine Human), 신적 인성으로 갈아입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주님은 마리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무리 중의 여인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요? 체어리티의 삶이 있는 신앙을 찬송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은 체어리티의 교리를 통해 각 사람에게 태어나시며, 체어리티의 삶을 통해 성장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잉태하는 태’는 체어리티의 교리를 뜻하고, ‘주님을 먹이는 젖’은 사랑, 또는 체어리티의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던 것입니다. 여인의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 화답하시듯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28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체어리티의 교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는 체어리티의 교리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하는 자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어 새 교회, 새 예루살렘 교회가 가진 체어리티의 신앙 가운데로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체어리티의 교리를 잘 이해한다 하더라도 실제로 지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선은 실행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체어리티의 교리 안에 있으면서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지 못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해 줍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주님께서 지옥의 영들을 쫓아내시면 그걸 우리가 다시 불러들이는 그런 악순환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나갔던 영들이 돌아올 때마다 우리 안에 있는 선과 진리는 조금씩 파괴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모든 진리와 선들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는 스스로 강한 자라고 생각하는 버릇, 자신을 믿는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천사들의 손을 잡고,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악을 죄로 알고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Divine Providence) 73번 글을 보면, ‘영적 자유라는 것은 영생을 사랑하는 태도에서 옵니다. 악을 죄로 여겨 그걸 의도하지 않으며, 동시에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라야만 이 사랑과 그 기쁨을 맛보며 경험하게 됩니다.’라고 했습니다. 자유의지를 키우지 못하면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더라도 체어리티의 삶을 살기가 어렵습니다. 다니엘 4장 16절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고 하였습니다. 일곱 때를 지나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일곱 귀신의 지배를 받는 것이고, 우리 안에 선과 진리가 완전히 파괴되고 없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두려운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신 자유를 가지고 매 순간 나쁜 영들을 거절해야, 즉 내게 와있는 악한 영들이 하는 악하고 거짓된 생각들과 나를 분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악하고 어두운 생각은 내가 하는 게 아니야!’라면서 말이지요. 그 대신, 천사들의 손을 잡고, 즉 주님이 천사들을 통해 주시는 천국의 밝고 환한 생각들을 받아들여 체어리티의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2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요14:2-3)

 

아멘

 

원본

2020-02-09(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6(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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