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3(D5)-매일예배(2492, 눅11,14-23), '말 못하게 하다, 강한 자, 더 강한 자,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의 속뜻'.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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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jMWf5bNsT4

 

 

 

말 못하게 하다, 강한 자, 더 강한 자,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의 속뜻

 

 

14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15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17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18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19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20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23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눅11:14-23)

 

 

‘육정’(肉情, the will of the flesh)과 ‘사람의 뜻’(the will of man)(요1:13)은 떼어놓는 것(what disjoin)인 반면,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결합하는 것(what conjoin)이며, 그래서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sons of God)이라, 그분의 ‘자손’(seed)이라 하셨는데, 그것은 이들에게 천국을 주시겠다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AC.1608:2) For the will of the flesh and the will of man are what disjoin; but love and the derivative faith are what conjoin; therefore they in whom are love and the derivative faith, are they who are born of God. And because they are born of God, they are called “sons of God,” and are his “seed,” to whom is given the heavenly kingdom. (AC.1608:2)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바울은 4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13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고후11:4, 13)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바울 시대에도 이단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그들의 말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교리가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은 그것을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이며,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복음에 대해 잘못 가르치기는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류 교회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삼위일체를 말하면서 속으로는 아버지 하나님 따로, 아들 하나님 따로, 성령 하나님 따로 이렇게 세 분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 전부터 계셨던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비록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사실은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이른바 대속과 믿음만의 신앙을 만들어 내어 이 역시 비록 그럴 의도는 없었을지라도 실제로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시어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신 것은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가 아닌,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서입니다. 대속(代贖)이란 대신하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를 통해 주님이 밝히신 바에 따르면, 구원받는 것,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무슨 표를 받거나 라이센스를 취득하는 게 아니라 단지 그 입국 요건만 충족되면 누구에게나 오픈되어 있는 그런 것입니다. 그 입국 요건이란 다름 아닌, 당사자의 속 사람, 곧 영의 상태가 천국 상태이면 되는 것입니다. 영계는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기 때문인데, 어떤 사람의 사후 영의 상태가 천국에 맞으면 천국으로, 지옥에 맞으면 지옥으로 배정되는, 그런 시스템인 것이지요. 중요한 건, 각 사람의 영, 곧 속 사람의 상태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과 결정의 영역이지 이걸 누가 대신, 곧 주님이라도 대신 해주실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구원 문제에 있어 주님이 해주실 수 있는 범위는 사람의 능력을 벗어나는 배경, 즉 선악 간 본인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自由)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즉 주님 오시기 전까지는 이 세상 삶이 지옥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면 그걸 주님이 오셔서 바로잡아 주셨고, ‘자, 그동안은 태생적으로 어려웠지만 이제는 전적으로 네 결정과 선택에 달렸으니 잘 해보렴. 내가 네 평생 네 곁에서 끝까지 도와주마...’ 하시는 것이지요. 이 정도가 ‘대속’과 ‘구속’에 대한 짤막한 설명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여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은 방금 말씀드린 ‘자유’와 ‘구속’에 대한 보충 설명입니다. 구속이란 인류가 그동안 잃어버렸던 영적 자유를 되찾는 일입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 인간의 영적 상태는 애굽의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유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를 부정하고 주님을 선택할 자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직접 세상에 오셔서 부활하심으로 해서 지옥을 완전히 이기시고, 지옥에 눌려있던 인간들을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자유의 회복이며, 인간의 구속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주어진 선택의 자유를 통해 스스로 하는 것처럼, 즉 자신의 의지로 자아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스스로 하듯, 즉 자기 의지로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시는 주님이 하시는 것을 믿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복음 15장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열매는 선한 삶의 행위를 뜻합니다. 바로 이것이 주님께서 복음서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주님이 가르치시지 않은 진리, 즉 ‘대속’의 복음과 ‘오직 믿음’의 교리를 전하고, 또 그렇게 믿는 이유가 뭘까요? 그들의 내면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인 체어리티(charity, 仁愛, 이웃 사랑)의 신앙을 가로막는 지옥의 영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옥의 영들은 사람들의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통해 우리 마음속으로 흘러 들어와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마음대로 지배합니다. 그러므로 자아와 세상에 대한 입장과 주관, 집착과 신념이 강한 사람일수록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오늘 본문은 주님께서 그런 상태에 있는 신앙인들을 구원하신다는 내용입니다. 본문 1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4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주님이 말을 못 하는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셨다고 합니다. ‘말을 못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주님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이 참된 신앙임을 인정 못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진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없는 까닭은, 그동안 그의 안에 있는 지옥의 영들이 진리를 방해했기 때문인데, 만약 그가 주님 앞에 진심으로 겸손해진다면, 그리고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면, 주님은 그에게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 주십니다. 그리고 그때 그는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이시고, 아들은 그 사랑으로부터 빛나는 진리시라는 것과,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 아니라 한 분이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뿐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도 인정하게 됩니다. 그것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에게서 풀려나 비로소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한다는 것’은 주님이 한 분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체어리티를 동반한 신앙이 온전한 신앙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주님에 대해, 그리고 체어리티의 신앙에 대해 고백할 때, 잘못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체어리티의 신앙을 이단 신앙이라고 비난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이라는 근거가 무엇이냐 증거를 요구합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을 15절과 16절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5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16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주님이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냈을 때, 주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알세불이란 ‘높은 거처의 주인’이란 뜻으로 자세한 건 인터넷에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어떤 사람인가 하면, 누군가 체어리티의 신앙을 고백할 때, 그것은 지옥의 바알세불로부터 오는 신앙, 즉 이단 신앙이라고 공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주님을 시험하여 하늘의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늘의 표적을 구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체어리티의 신앙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신앙이라는 근거를 대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마태복음 12장에서

 

3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40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속에 있으리라 (마12:39-40)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는 것은, 주님이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해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더 믿는 사람들은 주님께서 아무리 큰 기적을 보여 주시더라도 체어리티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기적을 보여 주시지 않고,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 하신 것입니다. 요나가 사흘 밤낮을 물고기 배 속에 있었던 것은 주님이 모진 시험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것을 표상하는데요,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도 체어리티의 신앙을 가지고 지옥의 시험을 견디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때 그런 우리의 신앙이 하늘로부터 오는 신앙이며, 구원 신앙이라는 것이 저절로 증명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18절에서 또 말씀하십니다.

 

18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까닭은, 체어리티의 신앙은 바알세불의 신앙이 아니라 지옥의 바알세불과 맞서 싸우는 신앙임을 분명히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바알세불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은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체어리티의 신앙을 공격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바알세불의 신앙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아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서 21절과 22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1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22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이 말씀에서는 인간의 자아를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강한 자’는 바로 인간의 자아를 뜻합니다. 그리고 ‘무장’은 자아에서 나오는 선과 진리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강한 자가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킨다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진리와 선을 가지고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믿는 것입니다. 가끔 자신의 판단력과 의지만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으며, 심지어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다 믿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은 겉으로만 선하게 보일 뿐 본질에 있어서는 악하고 거짓된 것이며, 그렇기에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22절에서는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킨다’고 하는 것입니다.

 

더 강한 자’는 지옥의 영들을 뜻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도움 없이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할 때, 지옥의 영들이 와서 우리를 꼼짝 못 하게 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인간에게서 나오는 선이나 진리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도움 없이 인간 혼자서는 어떻게 해도 지옥의 영을 이길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지옥의 영들에 의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마저 모두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그가 믿던 무장과 재물을 모두 빼앗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23절에서 주님께서는

 

23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즉 ‘나와 함께해야 한다’ 하시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를 반대하는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또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가 된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헤치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은 자기 자신을 믿지 말고 주님만 믿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자기 혼자 하려고 하면 안 되고, 반드시 주님과 함께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있는 귀신을 쫓아낼 수 있고, 체어리티의 신앙 안에 견실하게 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주님과 함께하지 않고 혼자 하려고 하는 걸까요?

 

주님과 함께하는 길은 나를 버리는 길이며, 나를 희생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지름길을 두고 멀리 돌아가게 하시더라도 순종하며 따라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자꾸 멀리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하는 길이야말로 의로운 길이고, 구원의 길, 진정한 지름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그 길로 가야 합니다.

 

주님은 또 당신과 함께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모으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과 화합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셋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주님과 함께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을 흩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파당을 지어 사람들을 흩어지게 합니다. 한 분 주님을 세 하나님으로 나눕니다. 신앙에서 체어리티를 분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님과 함께해야 하고, 모든 것을 모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고, 흔들림 없이 체어리티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만들어주십니다. 주님의 그러하신 은혜가 오늘 이 메시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35:6)

 

아멘

 

 

원본

2020-01-2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3(D5)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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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11(D3)-매일예배(2491, 눅11,5-13), '구하는 자에게 성령, 곧 거룩한 진리와 생명을 주시는 주님'.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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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0kUthMEABng

 

 

구하는 자에게 성령, 곧 거룩한 진리와 생명을 주시는 주님

 

 

5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11:5-13)

 

 

성령을 주시는 것은 신성한 진리로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생명을 주시는 것을 뜻한다. 그 생명은 총명과 지혜의 생명이다. (AC.9818:24, 출28:3 주석 중) In Luke: If ye, being evil, know how to give good things to your children; how much more shall the Father who is in heaven give the Holy Spirit to them that ask him? (Luke 11:13); “to give the Holy Spirit” denotes to enlighten with Divine truth, and to endow with the life thence derived, which is the life of intelligence and wisdom. (AC.9818:24)

 

 

사람이 진리를 배우는 방법은 보통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성으로 진리를 추론(推論), 경험의 지식을 통해 진실을 검증하는 방법이고요, 다른 하나는 추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바로 지각(知覺)하는 방법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책을 통해 진리를 배울 때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주님으로부터 진리의 영감을 받아 깨달음을 얻을 때의 방법입니다. 그때는 마치 전등에 불이 켜지듯 불시에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것을 논어에서는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는 기쁨, 즉 ‘멀리 있는 친구가 불현듯이 찾아오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역시 친구가 찾아오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본문 5, 6절입니다.

 

5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우리가 여행을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일정을 짜고 그에 따라 예산을 세우고 필요한 물품들을 배정합니다. 마찬가지로 거듭남의 여정에서도 선과 진리 같은 영적 자산들을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잘 배분해 사용합니다. 그런데 거듭남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가끔 선과 진리의 균형이 깨질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선은 많은데 진리가 부족하거나, 진리는 많은데 선이 부족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여행하는 친구가 찾아와 먹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를 나타냅니다. 즉 진리는 있는데 선이 없는 상태입니다. 자신에게 진리만 있고 선이 없다고 느껴질 때는 언제입니까? 이웃의 장점보다는 단점이 많이 보일 때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진정한 회개가 어려울 때입니다. 그때 우리는 자기 안에 선이나 사랑이 없음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럴 때는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저에게 선이 없으니 선을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히 선을 구하는데요,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 밤중에 친구를 찾아가 떡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은 선이 없는 때를, 그리고 ‘’은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선이 없는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 선을 구할 때 주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실까요? 7, 8절입니다.

 

7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진리만 있고 선이 없을 때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연결하는 내면의 문이 닫힙니다. 그래서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들이 겉 사람 안으로 흘러들어올 수 없고, 그러므로 거듭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문이 닫혀있는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떡을 받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고 했습니다. ‘침실’은 속 사람을 나타내고, ‘아이들’은 속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주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주님으로부터 선을 얻을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그가...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하십니다.

 

여기서 주님의 친구는 진리 안에 있는 사람, 즉 진리를 이해하고 믿는 우리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선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진리를 믿기는 하는데 주님으로부터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로부터 믿기 때문입니다. 자아로부터 주님을 믿는 사람은 진리를 믿으면서도 주님의 나라에는 뜻이 없고, 세상의 권세와 부귀에만 뜻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믿음으로는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없고, 주님으로부터 선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친구에게는 주지 아니할지라도 간청하는 사람에게 요구대로 선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9, 10절에서는,

 

9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주님께 ‘구하는 자, 찾는 자, 문을 두드리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무조건 주님 앞에 나아가 ‘주님! 저에게 사랑이 없으니 사랑을 주십시오’하는 사람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아에서 나오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으로 선을 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가운데 있는 사람에 대해 ‘계시록 해설’ 815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은 주님의 나라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은 어떤 것을 구한다면 그의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 아니다. (AE.815)

 

주님은 우리가 세상 사는 동안 무엇이 필요한지를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것을 구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필요한 만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은 주님의 나라와 주님의 의입니다. 그것을 구할 때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안에 있는 것이고, 주님 앞에 간청하는 자, 문을 두드리는 자가 됩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 안에 있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계시록 해설’ 815번 글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당신으로부터 오는 믿음을 산을 바다에 던지는 능력에 비유하셨다. 왜냐하면 산은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뜻하고, 바다는 지옥을 뜻하기 때문이다. (AE.815)

 

주님으로부터 오는 믿음이라야 주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막는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으로부터 신성한 생명이 우리에게로 흘러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11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알을 달라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천국의 비밀’ 9818번 글에서는 ‘성령을 주시는 것은 신성한 진리로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생명을 주시는 것을 뜻한다. 그 생명은 총명과 지혜의 생명이다. (AC.9818:24)’라며, 눅11:13 말씀을 풀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주님께 구하는 모든 기도의 목적은 궁극적으로는 주님의 성령을 받기 위한 것입니다. 성령은 모든 어둠을 흩어버리는 깨달음의 빛이며 지혜의 영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종류의 악과 거짓을 몰아내는 신성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생명으로 인하여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 생명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거룩한 것을 원하게 하시고 구하게 하시며 그것을 이루도록 하십니다. 성령의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 축원합니다.

 

 

2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21:21-22)

 

아멘

 

원본

2020-01-1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11(D3)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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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7-09(D1)-주일예배(2490, 눅11,1-4), '주기도문의 속뜻'.pdf
0.37MB

https://youtu.be/AnACqmb8kus

 

 

주기도문의 속뜻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눅11:1-4)

 

 

천사들의 말이,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God the Father)을 생각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그는 보이지 않기(invisible) 때문이다. 우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 안에 계신 그분을 생각한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그분이 보이시기(visible) 때문이다. 신적 인성 안에 계시는 그분을 당신은 그리스도(Christ)라 하고, 우리는 주님(the Lord)이라고 한다. (AR.839.6) we do not then think of God the Father, because he is invisible; but we think of him in his Divine human, because in this he is visible; and in this he is called by you Christ, but by us the Lord; (AR.839.6)

 

 

오늘은 주기도문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하루에도 여러 번 기도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취침 전에 또 한 번, 그리고 식사 때마다 등 최소한 이렇게 여러 번 기도합니다. 그러다 보면 가끔은 형식적인 기도가 될 때도 있지요. 그러나 가정에 우환이 생겼거나 자녀들이 시험을 볼 때, 또는 직장 승진심사가 있거나 할 때는 마음을 모아 정성껏 기도합니다. 아마 거기에 인생이 달렸다, 모든 게 걸렸다 생각하기 때문이겠죠. ‘천국의 비밀’ 8179번 글에는 ‘기도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가 꼭 이루어질 것이라 기대하지는 말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의도와 다르면 주님은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욕심과 욕정으로 인한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이 정작 회개는 안 하고, ‘주님! 이 시험의 고통에서 나를 구하소서’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시험의 목적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 시험이 중단되면 그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기회를 놓치게 되고,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면 그는 결국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험의 목적이 온전히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시험이 시작되어 끝날 때까지 전 과정을 사람이 스스로 하는 것처럼, 즉 자기 힘으로 견디고 이겨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내와 자기와의 싸움이 전제되지 않은 기도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 자신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기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어떤 경우든 ‘하나님 아버지, 저희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기도해야 합니까? 이와 관련, ‘천국의 비밀’ 2535번 글은 ‘기도는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며, 기도하는 내용을 내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기도하면서 자기가 기도하는 것을 내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좀 더 주님 뜻에 가까운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래서 오늘은 주기도문의 의미, 그 속뜻에 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본문 1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1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주님의 제자들이 주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세례요한은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의 영적인 뜻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letter sense)를 나타냅니다. 세례요한이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나타내는 이유는,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먼저 배우고, 그것을 통해 주님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이며, 곧 세례자 요한(John the Baptist)입니다. 요한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배우는 기도를 말합니다.

 

말씀에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이 여러 곳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은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 하시고, 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하십니다. 이러한 말씀 안에는 모두 내적인 의미(internal sense)가 들어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온전한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문자의 뜻 그대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요한의 제자들입니다. 반면에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주님의 제자들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가르치는 기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그 내적 의미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르침을 구하는 상대인 주님은 문자적인 의미와 내적 의미가 함께 있는 말씀(The Word)이시며, 말씀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주님에 대해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하더라’(요1:27)고 말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자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주님은 먼저 ‘아버지여’로 시작하십니다. 기도를 하려면 당연히 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대상은 인간을 창조하신 영원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버지라 부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구약의 하나님입니까, 아니면 인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조차도 그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들은 모두 구약의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을 따로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한 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그러므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의 진리에 위배되는 일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가 믿어야 하는 아버지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생물학적인 부자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한 분 하나님의 두 가지 본질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는 사랑 자체이시고, 존재 자체이시며, 신성 자체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뜻하고, 아들은 사랑의 열기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빛이시고, 존재의 드러남이시며, 신성에서 비롯한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에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10:30) 말씀하시고, 또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요17:21), 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9)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버지라고 불러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두 번째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는 그의 겉모습뿐만 아니라 내면의 모습(quality)을 함께 떠올리며 부릅니다. 그것처럼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주님의 겉모습인 인성과 그 내면에 있는 신성을 함께 부르는 것입니다. 내면에 신성(神性)을 담고 있는 주님의 인성(人性)을 우리는 신적 인성(Divine Human)이라고 합니다. 즉 거룩한 인간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의 이름은 바로 신적 인성을 뜻합니다. 주님께서 신성과 함께 인성을 가지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주님의 신성은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볼 수도 없고 인식할 수도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사랑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성을 입으시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세상에 오실 때 입으셨던 그 인성은 아직은 거룩한 인성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인성 안에는 마리아로부터 받은 유전적 악이 그대로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진 시험을 통해 마리아로부터 받은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받은 새로운 인성으로 갈아입으셔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인간이 거듭나는 과정에서 타고난 자아를 벗고 주님으로부터 새로운 자아를 받는 것과 유사한 일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마리아의 인성을 벗으시고 여호와로부터 새로운 인성을 입으셨을 때, 비로소 주님의 인성은 당신 안의 신성과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의 신적 인성을 우리는 거룩하게 되신 주님, 또는 영화롭게 되신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처럼 주님이 우리 마음에 처음 오실 때는 완전한 주님이 아니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처음 진리를 받아들일 때는 완전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진리는 개인의 자아를 통과하는 순간 조금씩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빛이 물을 통과할 때 굴절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왜곡된 진리는 사람이 영적으로 거듭남에 따라 점차 완전한 진리로 변합니다.

 

그와 관련해 ‘계시록의 속뜻’ 935번 글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님은 사람에게 있는 진리의 질(質, quality)에 따라 그에게 인애(仁愛, charity)와 선을 만들어 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개인에게 있는 진리의 특성에 따라 인애와 선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각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이 균형 있게 성장하고 서로 결합하는 것, 이것이 진리가 완전해지는 것이고 우리 안에서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거룩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그런 뜻입니다. 왜냐하면 진리와 결합한 선이 바로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나라가 임하시오며’입니다. 신앙인들이 영적으로 거듭날수록 우리 마음은 점점 천국으로 변합니다. 그것이 주님의 나라가 각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하여야 합니다.

 

3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네 번째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양식은 육신의 양식이 아닙니다. 영혼의 양식인 선과 진리이며 사랑과 지혜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고, 거듭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선을 지나치게 욕심(?)내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말씀을 공부하면서 가끔 드는 생각은, 성경 전체의 내적, 외적 의미를 체계적으로 정리,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을 읽을 때마다 구약과 신약의 수많은 말씀이 서로 연결되면서 진리의 깨달음이 폭죽처럼 터질 것입니다. 그러나 출애굽기 16장에는 ‘일용할 양식을 매일 거둘 것이며 아침까지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침까지 만나를 두는 것’은 진리와 선을 주님이 주시는 대로 받지 않고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만나에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 먹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진리의 세계는 무한해서 인간의 작은 머리로는 담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그때그때 필요한 진리들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항상 주님께 마음을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것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다섯 번째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일만 달란트 빚을 탕감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옥에 가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 주인이 어떻게 하였습니까? 크게 화를 내며,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옥졸들에게 넘겼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을 불쌍히 여기기를 바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까맣게 잊고, 이웃에게 모질게 대할 때가 참 많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구절을 보면,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기 위한 매우 중요한 요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하기 위해 늘 노력해야 하고, 그것이 잘 안되면 주님 앞에 용서의 능력을 구하셔야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으면 주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입니다. 시험을 통해 우리는 자기 안에 있는 악을 볼 수 있고,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시험에 들지 않기를 구하라’ 하십니다. 시험이 없으면 영적으로 변화될 수가 없는데 왜 주님은 그렇게 말씀하실까요? 시험이 없는 상태, 즉 완전히 거듭난 후의 상태를 목표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라는 이 기도는 완전한 거듭남, 또는 영적 안식의 상태를 소망하는 기도이며, 동시에 그것을 위해 당면한 시험들을 견디고 이겨나가겠다고 하는 결단의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동안 주기도문을 매일 외우면서도 우리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내적인 의미를 통해 이 간결하고 아름다운 기도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기도의 시작은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입니다. 그것은 신적 인성이신 주님이 영화롭게 되신 것처럼 우리 안에 있는 진리 역시 완전하고 순수한 진리가 되기를 염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기도의 목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입니다. 이것은 목적을 위한 수단을 구하는 기도입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주님으로부터 진리와 선을 받아야 하고요, 또한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받으려면 먼저 이웃의 잘못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입니다. 그것은 시험이 없는 상태 즉 완전한 거듭남을 소망하면서 당면한 시험들을 이겨나가겠다는 결단의 기도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 안에는 구원의 목적과 수단에 대한 염원 및 인간의 결단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기도 안에 있는 모든 구절이 다 소중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씀이 저의 마음을 때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앞에 큰 죄인입니다. 주님으로부터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않은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반성하게 됩니다. 이웃의 잘못을 진심으로 용서할 때, 막혔던 혈관이 뻥 뚫리는 것과 같은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용서와 화해와 치유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 축원합니다.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마6:33-34)

 

아멘

 

 

 

 

원본

2019-12-0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7-09(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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