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538

 

천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경고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이 첫 번째 입구 뜰, 곧 천사적 영들의 하부 영역(the lower sphere of angelic spirits)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뒤로 나가떨어졌고, 이로써 주님께서 신앙의 애정(the affections of faith)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기 전에는 천국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There were some who sought admission into heaven without knowing what heaven is. They were told that unless they were in the faith of love, to enter heaven would be as dangerous as going into a flame; but still they sought for it. When they arrived at the first entrance court, that is to say, the lower sphere of angelic spirits, they were smitten so hard that they threw themselves headlong back, and in this way were taught how dangerous it is merely to approach heaven until prepared by the Lord to receive the affections of faith.

 

 

해설

 

이 글은 앞선 사례를 한층 더 분명하고 구조적으로 보여 줍니다. AC.537이 개인적 경험의 서술이라면, AC.538은 ‘일반적 질서’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핵심은 하나입니다. 천국은 ‘원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상태가 맞을 때만 접근 가능한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다시 한번 천국에 대한 인간의 오해를 짚습니다. 이들은 천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그저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만을 앞세웁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경고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이는 위협이나 과장이 아니라, 상태의 불일치에서 오는 필연적 결과를 말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들어가기를 고집합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쉽게 영적 질서를 무시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알고자 하지 않거나, 알면서도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지 않은 채, 결과만을 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실제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첫 번째 입구 뜰’은 천국의 문턱에 해당하는 영역입니다. 아직 완전한 천국은 아니지만, 이미 천국의 영향과 질서가 작용하는 영역입니다. 이곳에 이르렀을 때조차, 준비되지 않은 영들은 견디지 못합니다. 그들은 어떤 판단이나 설명 이전에, ‘존재 전체로 충격을 받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지탱하지 못하고 뒤로 나가떨어집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점은, 그들이 벌을 받았다는 표현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공격당하지 않았고, 밀려난 것도 아닙니다. 단지 천국의 상태가 그들의 상태와 맞지 않았을 뿐입니다. 빛이 어둠에 고통이 되듯, 사랑의 애정은 자기중심적 상태에 있는 존재에게는 견딜 수 없는 압력으로 작용합니다.

 

이 경험의 목적은 처벌이 아니라 교육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로써 그들은, 주님께서 신앙의 애정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시키시기 전에는, 천국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 위험하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천국은 ‘도달해야 할 목표’이기 이전에, ‘형성되어야 할 상태’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대목은 신앙 교육의 방향을 매우 명확히 제시합니다. 신앙은 목적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다루는 일입니다. 천국을 말할 때,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를 말하기보다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먼저 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앙은 욕망의 언어로 전락하고 맙니다.

 

AC.538은 천국을 향한 열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열망이 사랑의 신앙으로 형성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해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천국에 대한 가장 안전한 길은, 천국을 먼저 살려는 길입니다. 주님께서 준비시키시는 그 과정 속에 머무는 것이, 천국에 가장 가까운 자리입니다.

 

 

 

AC.539, 창5 뒤,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

AC.539 어떤 영이 있었는데, 그는 육신에 있을 때 간음의 죄를 가볍게 여겼던 자였습니다. 그가 원해서 그는 천국의 첫 문턱(threshold)에 들어가도록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이르자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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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7, 창5 뒤, ‘천국과 천국 기쁨에 관하여 (계속)’ (AC.537-546)

AC.537 어떤 영이 제 왼편에 붙어 저에게 자기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허락을 받아 그에게 대답하기를,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오직 주님께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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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7

 

어떤 영이 제 왼편에 붙어 저에게 자기가 어떻게 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지를 알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허락을 받아 그에게 대답하기를,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오직 주님께 속한 것으로, 사람의 상태가 어떠한지는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오는 많은 이들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있으나, 정작 천국이 무엇인지, 천국의 기쁨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곧 천국은 상호 사랑(mutual love)이며, 천국의 기쁨은 그로부터 나오는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실제 경험을 통해 먼저 그것을 배우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세상에서 막 온 어떤 영이 역시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였는데, 그에게 천국의 성격이 어떠한지를 느끼게 하려고 그의 내면을 열어 천국의 기쁨을 조금 맛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 기쁨을 느끼자마자, 그는 곧 탄식하며 몸부림치기 시작했고, 그 고통 때문에 도저히 살 수 없다며 벗어나게 해 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향해 잠시 열렸던 그의 내면은 다시 닫혔고, 그렇게 해서 그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이 예를 통해, 준비되지 않은 채 조금이라도 천국에 들여보내지는 자들이 얼마나 큰 양심의 고통과 괴로움 속에 놓이게 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A certain spirit attached himself to my left side, and asked me whether I knew how he could get into heaven. I was permitted to tell him that admission into heaven belongs solely to the Lord, who alone knows what a man’s quality is. Very many arrive from the world who make it their sole pursuit to get into heaven, being quite ignorant of what heaven is, and of what heavenly joy is, that heaven is mutual love, and that heavenly joy is the derivative joy. Therefore those who do not know this are first instructed about it by actual experience. For example, there was a certain spirit, newly arrived from the world, who in like manner longed for heaven, and in order that he might perceive what the nature of heaven is, his interiors were opened so that he should feel something of heavenly joy. But as soon as he felt it he began to lament and to writhe, and begged to be delivered, saying that he could not live on account of the anguish; and therefore his interiors were closed toward heaven, and in this way he was restored. From this instance we may see with what pangs of conscience and with what anguish those are tortured who not being prepared for it are admitted even but a little way.

 

 

해설

 

이 글은 천국과 인간의 상태 사이의 관계를 매우 생생하고도 실제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국을 어떤 장소나 보상으로 설명하지 않고, ‘상태’로 설명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는 열망 자체는 매우 흔하지만, 그 열망이 곧 천국에 적합한 상태를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문제를 스베덴보리가 철저히 주님의 영역으로 돌린다는 점입니다. 그는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자격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겸손의 권면이 아니라, 천국이 외적 행위나 바람의 문제가 아니라 ‘내적 성질’, 곧 사랑의 방향과 삶의 상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든, 그 사람의 실제 상태는 주님만이 아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세상에서 온 많은 영들이 천국을 소망하지만, 정작 천국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천국을 고통이 없는 곳, 평안한 곳, 혹은 보상을 받는 곳으로 상상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본질은 상호 사랑이며, 그 기쁨은 그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기쁨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은 누리는 곳이기 전에 ‘사는 방식’입니다.

 

이 점이 분명해지는 것이 바로 이어지는 사례입니다. 천국을 간절히 원하던 한 영에게, 주님께서는 그가 직접 느껴 보도록 그의 내면을 잠시 여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천국의 기쁨이 ‘조금’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조차도 준비되지 않은 상태의 영에게는 기쁨이 아니라 극심한 고통으로 작용합니다.

 

그 영이 느낀 것은 단순한 감정적 불편함이 아니라, 존재 전체를 뒤흔드는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는 그 상태에서는 살 수 없다고 외치며, 벗어나게 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이는 천국의 기쁨이 나쁘거나 폭력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영의 내적 상태가 그 기쁨과 전혀 합치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사랑은 그에게 쉼이 아니라 압박이 되었고, 빛은 위로가 아니라 고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내면은 다시 닫힙니다. 이는 처벌이 아니라 보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과정을 매우 조심스럽게 묘사합니다. 주님께서는 준비되지 않은 이를 억지로 천국에 머물게 하지 않으십니다. 각 존재가 견딜 수 있는 상태 안에 머물도록 하시는 것이 주님의 질서입니다.

 

이 사례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결론을 이끌어 냅니다. 준비되지 않은 채 천국에 가까이 가는 것조차도, 그들에게는 양심의 극심한 고통과 괴로움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는 천국이 도덕적 시험장이거나, 누구든 억지로 적응해야 하는 장소가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천국은 상태가 맞는 이들에게만 기쁨이며,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무게가 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신앙의 목표를 다시 묻게 합니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말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만일 그 말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뜻이거나, 보상을 받고 싶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아직 천국을 아는 신앙이 아닙니다. 천국을 안다는 것은, 상호 사랑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삶을 지금 여기에서 연습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은 죽은 뒤에 들어가는 곳이기 전에, 살아 있을 때 형성되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주님께서 서서히 준비시키시는 것이지, 인간의 욕망이나 결단으로 단번에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AC.537은 천국에 대한 낭만적 상상을 걷어 내고, 천국을 ‘삶의 방향과 성질’로 다시 보게 만드는 매우 중요한 증언입니다.

 

 

 

AC.538, 창5 뒤, ‘천국은 같은 상태여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곳’

AC.538 천국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천국에 들어가려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의 신앙 안에 있지 않다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위험하다고 경고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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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36, 창5:32, ‘퍼셉션’(perception), 사랑의 신앙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천적인 것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창5:32) AC.536 앞선 글들에서 홍수 이전 존재하였던 교회들이 지녔던 퍼셉션에 관하여 많은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날에는 이 ‘퍼셉션’(per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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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2

나는 천국과 천국의 기쁨이 가장 큰 자가 되는 데 있다고 생각하는 영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천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가장 큰 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작은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큰 행복을 누리며, 따라서 가장 큰 자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큰 자가 된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자가 되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 권세 있는 자가 권세를 통하여 추구하고 부자가 재물을 통하여 추구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또한 천국은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하여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 그 사람은 실제로 가장 큰 자가 되기를 열망하고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천국은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며,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쓰임이 되기를 원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떠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하는 것입니다. I have conversed with spirits who supposed heaven and heavenly joy to consist in being the greatest. But they were told that in heaven he is greatest who is least, because he who would be the least has the greatest happiness, and consequently is the greatest, for what is it to be the greatest except to be the most happy? It is this that the powerful seek by power, and the rich by riches. They were told, further, that heaven does not consist in desiring to be the least in order to be the greatest, for in that case the person is really aspiring and wishing to be the greatest; but that heaven consists in this, that from the heart we wish better for others than for ourselves, and desire to be of service to others in order to promote their happiness, and this for no selfish end, but from love.

 

해설

AC.452는 AC.450-451에서 계속되어 온 ‘천국에서의 높고 낮음’이라는 주제를 그 내적 핵심까지 끌고 들어갑니다. AC.450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높은 곳에서 지배하는 것이 천국이라는 공상을 바로잡았고, AC.451에서는 세상의 권세가 영계에서도 계속된다는 생각을 바로잡았습니다. 이제 AC.452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면 천국에서 참으로 큰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대답은 역설적입니다. ‘가장 작은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가장 큰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작아짐’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거나 능력을 일부러 낮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핵심은 자신의 높음과 영광에 관심을 두기보다 다른 사람의 선과 행복을 먼저 바라는 사랑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가장 큼’의 기준 자체가 세상과 달라집니다.

 

특히 ‘가장 큰 자가 된다는 것이 가장 행복한 자가 되는 것 외에 무엇이겠습니까?’라는 문장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권력이나 재물 그 자체를 최종 목적으로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것들을 추구합니다. 권세 있는 사람은 더 큰 권세에서, 부자는 더 많은 재물에서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천국에서는 행복의 근원이 소유와 지배가 아니라 사랑과 쓰임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매우 미묘한 함정이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작은 자가 큰 자가 된다’는 것을 알고서 ‘그렇다면 내가 가장 작은 자가 되어 가장 큰 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겉모습만 낮아졌을 뿐 내적 목적은 전혀 바뀌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가장 큰 자가 되기 위하여 가장 작은 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 역시 천국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겸손조차 자기 높임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천국적 상태는 무엇인가? 본문은 매우 분명하게 말합니다.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보다 더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양의 표현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 자체가 자기에게서 이웃에게로 향하는 상태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고 시기하거나 자신의 위치가 낮아졌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선과 행복 자체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반드시 ‘쓰임’으로 나타납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하여 실제로 그에게 쓰임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떠한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으로부터’라는 마지막 조건입니다. 칭찬받기 위해 돕거나, 인정받기 위해 섬기거나, 훗날 보답받기 위해 선을 행한다면 아직 자기 자신이 목적의 중심에 있습니다. 천국적 쓰임은 상대방의 선을 그 자체로 기뻐하기 때문에 행하는 것입니다.

 

결국 AC.452는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가?’라는 질문 자체를 변화시킵니다. 천국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 가장 큰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이웃의 선과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며 사랑으로 그 행복에 쓰임이 되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다. 이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막9:35)이 가리키는 천국의 질서와도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AC.452 해설)

 

 

 

AC.453, 창5 앞, '천국은 문을 통과해 들어가는 장소가 아니다'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3 어떤 사람들은 천국에 대하여 너무나 거친 개념을 가지고 있어서, 천국은 단지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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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1, 창5 앞, '천국에서는 무엇으로 사람의 높고 낮음이 정해지는가'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AC.451육체로 사는 동안 권세(authority)를 가지고 있었던 어떤 영이 다른 삶에서도 여전히 명령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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