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라는 말이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보존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에녹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그는 태고교회에서 퍼셉션의 대상이었던 것들을 교리로 정리하였는데, 그 교회의 시대에는 그러한 일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퍼셉션으로 아는 것과 교리로 배우는 것은 매우 다른 일이기 때문입니다. 퍼셉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식화된 교리로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그 규칙이 거의 예술 수준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굳이 그런 걸로 생각하는 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는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바르게 생각하는 능력이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학문적 잔재에 매달리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경우와 같습니다. 퍼셉션으로 배우는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선과 진리를 내적인 길로 알게 하시지만, 교리로 배우는 이들에게는 외적인 길, 곧 육체적 감각의 길을 통해 지식이 주어집니다. 이 둘의 차이는 빛과 어둠의 차이와 같습니다. 또한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은 묘사 자체를 허용하지 않을 만큼 그러한데, 이는 상태와 상황에 따라 모든 미세하고 개별적인 것들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태고교회의 퍼셉션 능력이 장차 사라질 것이고, 그 이후에는 인류가 선과 진리를 교리를 통해, 곧 어둠을 통해 빛으로 나아가며 배우게 될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여기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God took him)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보존되었음을 뜻합니다. As to the words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signifying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the case with Enoch, as already said, is that he reduced to doctrine what in the most ancient church had been a matter of perception, and which in the time of that church was not allowable; for to know by perception is a very different thing from learning by doctrine. They who are in perception have no need to learn by formulated doctrine that which they know already. For example: he who knows how to think well, has no occasion to be taught to think by any rules of art, for in this way his faculty of thinking well would be impaired, as is the case with those who stick fast in scholastic dust. To those who learn by perception, the Lord grants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by an inward way; but to those who learn from doctrine, knowledge is given by an external way, or that of the bodily senses; and the difference is like that between light and darkness. Consider also that the perceptions of the celestial man are such as to admit of no description, for they enter into the most minute and particular things, with all variety according to states and circumstances.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perceptive facul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ould perish, and that afterwards mankind would learn by doctrines what is true and good, or by darkness would come to light, it is here said that “God took him,” that is, preserved the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를 가리켜 왜 ‘사라졌지만 보존되었다’고 말하는지를 가장 깊이 있게 설명해 줍니다. 핵심은 퍼셉션과 교리의 ‘질적 차이’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에서는 선과 진리를 퍼셉션으로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교리로 정식화하는 일이 오히려 부적절했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인식으로 알고 있는 것을 규칙과 문장으로 묶어 두는 것은, 생명을 틀에 가두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매우 실제적인 예로 설명합니다. 바르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어떤 규칙을 가지고 생각하는, 그러니까 그 규칙이 거의 예술 수준이라 하더라도 말이지요, 굳이 그런 걸로 생각하는 법을 따로 배울 필요가 없다는 비유가 그렇습니다. 이미 살아 있는 사고능력을 지닌 사람에게 규칙을 강요하면, 그 능력은 오히려 경직되고 약해집니다. 이는 퍼셉션의 영역에서 교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정확히 보여 주는 비유예요.

 

퍼셉션으로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앎은 ‘내적인 길’을 통해 옵니다. 주님께서 직접 선과 진리를 비추어 주시는 방식이지요. 반면 교리를 통해 배우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앎은 ‘외적인 길’, 곧 감각과 언어와 개념을 통해 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둘의 차이를 빛과 어둠의 차이에 비유합니다. 빛은 사물을 곧바로 보게 하지만, 어둠에서는 더듬어 가며 배워야 하기 때문이에요.

 

특히 주목할 점은, 천적인 사람의 퍼셉션에 대해 ‘묘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 그래서 태고교회의 시대에는 교리가 필요하지 않았고, 오히려 허용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AC.521 해설 중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라는 게 무엇인지?

위 521 해설 중 ‘퍼셉션은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상태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극히 미세하고 개별적인 인식이기 때문에, 언어로 고정해 설명하는 순간 이미 그 본질을 놓치게 됩니다.’라는

bygrace.kr

 

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미리 보셨다’고 말합니다. 퍼셉션의 능력이 장차 사라질 것이고, 그 이후의 인류는 더 이상 내적인 빛으로 즉각 알지 못하고, 교리를 통해 배우며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가게 될 것을 예견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예견 때문에, 에녹의 교회에서 정리된 교리는 버려지지 않고 보존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이 교리가 인간의 판단이나 역사적 우연에 맡겨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 안에 보관되었다’는 뜻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지만, 그 교리는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안전하게 간직됩니다. 이는 교회의 생명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꾸어 이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교회가 교리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교리는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사라진 시대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일수록, 교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결국 AC.521은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이해하도록 이끕니다. 퍼셉션이 살아 있던 시대에는 필요 없었지만, 퍼셉션이 사라질 시대를 대비해 주님께서 미리 마련하신 교리의 그릇이라고 말입니다. 에녹은 사라졌으되, 그가 남긴 교리는 후대를 위해 살아남았습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라는 말은, 상실의 언어가 아니라 ‘섭리와 준비의 언어’입니다.

 

 

 

AC.522, 창5:23-24, ‘에녹’(Enoch)이라는 사람들의 퍼셉션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2 ‘에녹’(Enoch)이라 하는 이들에게서 나타난 퍼셉션의

bygrace.kr

 

AC.520, 창5:23-24,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AC.520-522)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And all the days of Enoch were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창5:23, 24)

 

AC.520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라는 표현은 그 기간이 매우 짧았음(few)을 의미합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walking with God)라는 표현은 앞에서와 같이 신앙에 관한 교리(doctrine concerning faith)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라는 표현은 그 교리가 후대의 쓰임새를 위하여 보존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all the days of Enoch being three hundred sixty and five years” is signified that they were few. By his “walking with God” is signified, as above, doctrine concerning faith. By “he was no more, for God took him” is signified the preservation of that doctrine for the use of posterity.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지닌 독특한 성격을 아주 압축적으로 정리해 줍니다. 먼저 ‘삼백육십오’(365)라는 숫자는 장수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에녹의 교회가 차지한 ‘기간과 영향력이 길지 않았음’을 가리킵니다. 즉, 에녹의 교회는 태고교회의 긴 흐름 속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짧은 기간이었습니다.

 

※ 창세기 1, 2, 3장을 비롯, 노아 이전까지 나오는 태고교회는 지질학적 지구 나이인 45, 6억 년 관점에서 보면, 아주아주 장구한 세월을 거쳐 나타났다가 역시 매우 오랜 세월을 거쳐 사라진 교회로 짐작되며, 이 점을 감안하면서 에녹의 기간을 생각하면 더욱 선명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이 짧았다고 해서 의미마저 작았던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양이 아니라 ‘기능’에 주목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오래 지속되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내용을 ‘교리의 형태로 보존하기 위해 잠시 존재’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기간이 짧았다’는 말은 실패나 미완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목적에 정확히 맞는 짧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다시 한번 강조되듯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표현은 신앙에 관한 교리를 뜻합니다. 에녹의 교회는 사랑의 삶을 직접 사는 교회라기보다, 그 사랑과 퍼셉션에서 나왔던 진리들을 ‘정리하고 가르치는 교회’였습니다. 이 교리는 이후의 교회들이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분별하는 기준으로 쓰이게 됩니다.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사라짐처럼 들리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소멸이 아니라 ‘전환’입니다. 에녹의 교회는 더 이상 역사 속에서 독립된 교회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교리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것을 ‘데려가셨다’는 말로 표현되듯이, 주님의 섭리 안에서 안전하게 보존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데려가셨다’는 표현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인간의 선택이나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의도적인 보존’을 뜻합니다. 퍼셉션이 점점 약화되고, 교회가 외적인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 속에서, 주님께서는 장차 올 교회들을 위해 필요한 교리를 따로 떼어 보관하신 것입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교회의 역할이 항상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어떤 교회는 오래 지속되며 많은 열매를 맺는 역할을 맡고, 어떤 교회는 짧게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다음 시대를 위한 ‘결정적인 씨앗’을 남기는 역할을 맡습니다. 에녹의 교회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개인의 신앙 여정에서도 이 원리는 그대로 적용될 수 있어요. 어떤 시기에 우리는 많은 활동과 성취를 경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기가 진리와 신앙의 핵심을 정리하고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라면, 혹시 그 시간이 짧았어도 그 짧음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 단계를 준비하는 데 꼭 필요한 시간이 됩니다.

 

결국 AC.520은 에녹의 교회를 이렇게 규정합니다. 짧게 존재했지만, 신앙의 교리를 보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교회. 역사 속에서는 사라졌지만, 후대의 쓰임새를 위해 주님께서 직접 간직하신 교회. 이 점을 붙들 때,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라는 이 말은 상실의 언어가 아니라, ‘보존과 은혜의 언어’로 들리게 됩니다.

 

 

 

AC.521, 창5:23-24,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23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3, 24) AC.521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

bygrace.kr

 

AC.519, 창5:22,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od)의 속뜻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22)

 

AC.519

 

그 당시에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이 되었던 것들로부터 교리를 구성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는 그러한 교리가 규범, 곧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알기 위한 규범으로 쓰이게 하려고 그런 건데, 이 일을 한 사람들을 가리켜 ‘에녹’(Enoch)이라 하며, 이것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였다’(and Enoch walked with God)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구성한 교리를 또한 그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에녹’이라는 이름의 뜻이 ‘가르치다’(instruct)라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또한 이는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의 의미와, 그가 ‘여호와가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였다’(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라고 하는 사실에서도 분명해집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가르치고, 또 살아가는 것을 뜻하지만,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walk with Jehovah)은 사랑의 삶(life)을 사는 것, 곧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무엇을 하든 그 동기가 ‘사랑하기 때문에’라는 것이지요. ‘동행하다’(walk)라는 말은 살아가는 걸 의미하는 상용 표현으로, ‘율법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law), ‘규례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statutes), ‘진리 안에서 살아가다’(walk in the truth)와 같은 표현이 그러합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은 본래 길과 관련된 말로서, 진리와 관련되며, 따라서 신앙이나 신앙의 교리와 관련됩니다. 성경에서 ‘동행하다’(walking)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다음의 말씀들에서 어느 정도 분명해집니다. There were some at that time who framed doctrines from the things that had been matters of perception in the most ancient and succeeding churches, in order that such doctrine might serve as a rule whereby to know what was good and true: such persons were called “Enoch.” This is what is signified by the words, “and Enoch walked with God”; and so did they call that doctrine; which is likewise signified by the name “Enoch,” which means to “instruct.”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 expression to “walk,” and from the fact that he is said to have “walked with God,” not “with Jehovah”; to “walk with God” is to teach an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faith, but to “walk with Jehovah” is to live the life of love. To “walk” is a customary form of speaking that signifies to live, as to “walk in the law,” to “walk in the statutes,” to “walk in the truth.” To “walk” has reference properly to a way, which has relation to truth, consequently to faith, or the doctrine of faith. What is signified in the Word by “walking,” may in some measure appear from the following passages.

 

[2] 미가에서는 In Micah: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6:8) He hath showed thee, O man, what is good, and what doth Jehovah require of thee, but to do judgment and the love of mercy, and to humble thyself by walking with thy God? (Micah 6:8)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walk with God)은 여기서 말씀하신 것들을 따라 사는 걸 뜻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하나님과’(with God)라고 되어 있고, 에녹에 대해서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from with God)라는 의미를 지닌 다른 말이 쓰여, 그 표현이 다소 중의적으로 사용됩니다. 시편에서는 where to “walk with God” signifies to live according to the things here indicated; here, however, it is said “with God,” while of Enoch another word is used which signifies also “from with God,” so that the expression is ambiguous. In David:

 

주께서 나로 하나님 앞, 생명의 빛에 다니게 하시려고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지 아니하셨나이까 (시56:13) Thou hast delivered my feet from impulsion, that I may walk before God in the light of the living, (Ps. 56:13)

 

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하나님 앞에 다니는 것’(walk before God)은 신앙의 진리 안에서 동행하는 것을 뜻하며, 이것이 곧 ‘생명의 빛’(light of the living)입니다. 이와 같이 이사야에서는 where to “walk before God” is to walk in the truth of faith, which is the “light of the living.” In like manner in Isaiah: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9:2) The people that walk in darkness see a great light. (Isa. 9:1)

 

라고 말합니다. 또 주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So the Lord says by Moses: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 (레26:12) I will walk in the midst, and will be your God, and ye shall be my people, (Lev. 26:12)

 

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는 율법의 교리에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signifying that they should live according to the doctrine of the law.

 

[3]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그들이 사랑하며 섬기며 뒤따르며 구하며 경배하던 해와 달과 하늘의 뭇별 아래에서 펼쳐지게 하리니 (렘8:2) They shall spread them before the sun, and the moon, and to the armies of the heavens, whom they have loved, and whom they have served, and after whom they have walked, and whom they have sought, (Jer. 8:2)

 

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는 사랑의 것들과 신앙의 것들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사랑의 것들은 ‘사랑하며’(loving)와 ‘섬기며’(serving)로 표현되고, 신앙의 것들은 ‘뒤따르며’(walking)와 ‘구하며’(seeking)로 표현됩니다. 모든 예언서에서는 모든 표현이 정확하게 사용되며, 어느 한 용어도 다른 용어를 대신하여 쓰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에서 ‘여호와와 동행하다’(walk with Jehovah) 또는 ‘여호와 앞에서 행하다’(before Jehovah)라는 것은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where a manifest distinction is made between the things of love, and those of faith; the things of love being expressed by “loving” and “serving”; and those of faith by “walking” and “seeking.” In all the prophetical writings every expression is used with accuracy, nor is one term ever used in the place of another. But to “walk with Jehovah,” or “before Jehovah,” signifies, in the Word, to live the life of love.

 

 

해설

 

이 글은 ‘에녹’의 교회가 왜 태고교회 흐름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에녹의 교회는 퍼셉션 그 자체로 살아가던 교회가 아니라, ‘퍼셉션의 내용으로부터 교리를 구성하여 보존하려 했던 교회’였습니다. 퍼셉션이 점차 약화되면서,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즉각적으로 알 수 없게 되자, 그것을 대신할 규범이 필요해졌고, 그 결과 교리가 형성된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교리를 단순한 인간적 산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는 주님의 섭리 안에서 허락된 보존의 방식이었습니다. 에녹이라 불린 사람들은, 이전 교회들에서 살아 있던 퍼셉션의 내용을 붙잡아, 그것을 가르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녹’(Enoch)이라는 이름 자체가 ‘가르치다’(instruct)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분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와 ‘여호와와 동행하다’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신앙의 교리에 따라 살고 가르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여호와와 동행하는 것은 사랑의 삶, 곧 쓰임새의 삶을 직접 사는 것을 뜻합니다. 이 구분은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는 교회의 중심이 퍼셉션과 사랑의 삶에서 교리와 신앙의 삶으로 이동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표시입니다.

 

‘동행하다’(walk)라는 표현 자체도 이 변화를 잘 드러냅니다. 동행은 길과 관련된 말이며, 길은 진리와 연결됩니다. 그래서 말씀에서 ‘동행하다’는 주로 신앙과 교리, 진리의 길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예언서의 구절들을 통해, 이 표현이 얼마나 일관되고 정확하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랑과 관련된 표현과, 신앙과 관련된 표현이 결코 뒤섞여 쓰이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강조됩니다.

 

설교자의 관점으로 보면, 이 글은 오늘날 교회의 현실을 깊이 비추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감정적 친밀감이나 개인적 체험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에녹의 교회가 보여 주는 동행은, ‘교리를 통해 신앙의 방향을 유지하는 삶’입니다. 이는 살아 있는 퍼셉션이 약해진 시대에, 신앙을 지키는 매우 현실적인 방식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교리의 한계도 암시합니다. 교리는 생명을 대신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 그릇이 될 수는 있습니다. 에녹의 교회는 바로 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퍼셉션이 직접 작동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지만, 그 진리들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교리라는 형태로 다음 시대에 전해지도록 준비한 것입니다.

 

결국 AC.519는 에녹의 교회를 ‘보존의 교회’, ‘가르침의 교회’로 규정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말은, 신앙의 교리를 따라 살고 그것을 가르친다는 뜻이며, 이는 퍼셉션이 약화된 시대 속에서도 주님께서 교회의 생명을 이어 가시는 섭리의 한 방식이었습니다. 이 글은 교회 역사뿐 아니라, 오늘 우리의 신앙이 어디에 서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드는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창5:22, AC.518-519 심화

 

1. ‘왜 퍼셉션으로 알던 것을 굳이 교리로 만들고 보존해야 했는가?’

 

 

창5:22, AC.518-519 심화 1. ‘왜 퍼셉션으로 알던 것을 굳이 교리로 만들고 보존해야 했는가?’

1. ‘왜 퍼셉션으로 알던 것을 굳이 교리로 만들고 보존해야 했는가?’ AC.519에서 에녹 교회의 사람들이 한 일은 매우 특별합니다. 그들은 태고교회와 그 뒤를 이은 교회들에서 ‘퍼셉션의 대상

bygrace.kr

 

 

 

 

 

AC.518, 창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C.518-519)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Enoch walked with God after he begat Methuselah three hundred years, and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22) AC.518 ‘하나님과 동행하며’(walk with G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