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영접 기도’ 안 하면 구원 못 받나
‘예수님을 영접하려면 이렇게 따라 기도하세요.’ 복음주의 교회에서 전도집회나 개인전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매우 익숙한 장면입니다. ‘주 예수님, 저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습니다. 지금 제 마음에 들어오셔서 저의 구주와 주님이 되어 주십시오.’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흔히 ‘영접 기도’라고 부르는 기도입니다. 이 기도 자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주님을 믿으며 앞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진심으로 고백한다면 그것은 매우 귀한 회심의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기도가 어느 순간 ‘구원이 성립되는 공식적인 절차’처럼 이해될 때 생깁니다. ‘나는 언제 영접 기도를 했으니까 구원받았다’, 혹은 반대로 ‘저 사람은 예수님을 좋아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려고 하지만 영접 기도를 정확하게 한 적이 없으니 아직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주님을 영접한다’는 성경의 깊은 의미가 특정한 문장을 한 번 말하는 행위로 축소될 수 있습니다.
먼저 ‘영접 기도’라는 특정한 기도 형식과 성경이 말하는 ‘주님을 영접함’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오늘날 교회에서 사용하는 형태의 ‘영접 기도문’을 따라 해야 구원받는다는 명령이 없습니다. 물론 ‘영접한다’는 개념 자체는 분명 성경적입니다.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합니다(요1:12). 따라서 주님을 영접하는 것은 구원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영접’은 어떤 정해진 기도문을 낭독했다는 뜻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주님을 믿고 받아들이는 삶 전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계3:20도 영접 기도를 설명할 때 자주 사용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매우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직접적인 대상은 아직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불신자가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이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문을 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히려 ‘한 번 주님을 영접했다고 고백했으니 이제 끝났다’는 생각을 흔듭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주님을 문밖에 세워 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롬10:9의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입술의 고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실한 신앙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특정한 문장을 한 번 말하면 그 순간부터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구원이 법적으로 확정된다는 종교적 공식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를 주로 시인한다’는 것은 단지 ‘주님’이라는 호칭을 입술로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로 그분을 자신의 주로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은 이 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마7:21). 여기서 주님은 고백을 무가치하게 만드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과 삶이 분리될 수 없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입술로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실제 삶에서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regeneration)이 중요한 빛을 줍니다. 거듭남은 어느 날 한 번의 기도로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악을 발견하고 그것을 죄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실제로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내면을 조금씩 새롭게 하십니다. 사람은 점점 자기 ‘프로프리움’(proprium)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상태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로 옮겨 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주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단지 ‘예수님, 제 마음에 들어오십시오’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선과 진리로 오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생각과 주님의 진리가 충돌할 때 주님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내가 원하는 것이 악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버리며, 하기 싫더라도 이웃에게 행해야 할 선을 선택하는 것이 실제 삶에서 주님께 문을 여는 일입니다. ‘나의 생각보다 주님의 진리가 옳습니다. 나의 욕망보다 주님의 선이 더 중요합니다.’ 이렇게 살아가기 시작할 때 ‘영접’은 한순간의 고백에서 삶의 질서로 내려옵니다.
그렇다고 과거의 회심이나 영접 기도를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영접 기도를 드린 바로 그날이 실제로 삶의 방향이 바뀐 중요한 순간일 수 있습니다. 이전까지 주님을 외면하던 사람이 진심으로 회개하며 ‘이제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고 고백했다면 그것은 매우 귀한 시작입니다. 다만 ‘시작’과 ‘완성’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씨앗을 심은 날은 중요하지만 씨앗을 심었다는 사실만으로 열매까지 이미 맺힌 것은 아닙니다. 그 고백이 이후의 삶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오늘날 교회가 사용하는 ‘영접 기도’를 정확하게 따라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그를 외면하신다고 생각할 근거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이것은 ‘그러면 자연계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들어 볼 기회조차 없었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라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만일 특정한 기도문이나 특정한 형태의 언어적 고백이 구원의 절대적인 형식 조건이라면 복음을 접할 기회 자체가 없었던 수많은 사람의 운명이라는 매우 어려운 문제가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모든 구원의 근원이 오직 주님에게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의 구원 역사를 교회의 외적 경계나 인간이 만든 종교적 절차 안에 가두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서 태어나 예수님의 이름을 알지 못했더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종교적·도덕적 빛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양심을 따라 진리를 받아들이려 살아간 사람은 사후에 더 분명한 진리를 배우고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없이도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 오지만, 주님께서 사람에게 다가가시는 길을 우리가 만든 하나의 절차로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영접 기도를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 있습니다. 영접 기도는 신앙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표현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실제 회심의 중요한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을 작동시키는 주문도 아니고, 한 번 발급받으면 이후의 삶과 관계없이 효력이 유지되는 천국 입장권도 아닙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과거 어느 날 영접 기도를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오늘 주님을 영접하며 살고 있는가?’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일 때, 악을 죄이기 때문에 피할 때, 이웃에게 선을 행할 때,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울 때 우리는 실제 삶에서 주님께 문을 엽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일생에 걸쳐 깊어지는 거듭남의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특정한 영접 기도문을 한 번 따라 했느냐에 달린 것이 아니라,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신 주님을 믿고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더 짧게 압축한다면 이것이겠습니다.
‘참된 영접은 한 번의 기도가 아니라 일생에 걸친 거듭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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