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perception)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퍼셉션이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내적 감각으로서, 어떤 것이 그 상황, 그 순간에서 참인지, 그리고 선인지를 분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에는 매우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퍼셉션은 천사들에게서는 매우 완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무엇이 참이고 선인지,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며, 무엇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알게 합니다. 또한 그들은 어떤 사람이 다가오기만 해도, 그리고 그의 생각 가운데 단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차립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없고, 대신 양심(conscience)이 있습니다. 죽어 있는 인간에게는 양심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며,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더더욱 알지 못합니다. At this day it is unknown what perception is. It is a certain internal sensation, from the Lord alone, as to whether a thing is true and good; and it was very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perception is so perfect with the angels, that by it they are aware and have knowledge of what is true and good; of what is from the Lord, and what from themselves; and also of the quality of anyone who comes to them, merely from his approach, and from a single one of his ideas. The spiritual man has no perception, but has conscience. A dead man has not even conscience; and very many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and still less what perception is.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에서 반복해서 등장해 온 핵심 개념, 곧 ‘퍼셉션(perception)을 정면으로 정의하는 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단호하게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이는 안내 부족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 상태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진단입니다.

 

퍼셉션은 감정도 아니고, 직관도 아니며, 추론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각입니다. 이 감각은 어떤 것이 그 상황에서 참인지, 어떤 것이 그 순간 선한지를 ‘즉각적으로 분별’하게 합니다. 논증이나 판단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퍼셉션은 느끼는 것에 가깝지만, 그 느낌은 감정이 아니라 자명한 인식이므로, 따로 설명하거나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이 퍼셉션이 삶의 기본 감각이었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지를 배우지 않았고, 무엇이 선한지를 토론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천적 인간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이 다루는 인간은, 계율이나 교리 이전의 인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퍼셉션이 천사들한테서는 더욱 완전하다고 말합니다. 천사들은 퍼셉션을 통해 참과 선을 알 뿐만 아니라, 그 근원이 어디인지를 압니다. 즉,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것인지를 즉시 구별합니다. 이는 인간에게 매우 낯선 능력입니다. 우리는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이 어디서 왔는지를 거의 묻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천사들은 누군가가 다가오기만 해도, 그리고 그 사람의 생각 가운데 단 하나만으로도, 그의 성품(quality)을 알아차립니다. 이는 정보 수집이나 관찰의 결과가 아니라, ‘퍼셉션의 자연스러운 작용’입니다. 생명이 생명을 알아보는 방식입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인간 상태를 세 단계로 나누어 대비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있습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은 없고, 대신 양심이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구분입니다. 양심은 퍼셉션의 대체물이 아닙니다. 양심은 교리와 가르침을 통해 형성된 ‘내적 규범’입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알려 주지만, 즉각적이지 않고, 때로는 갈등과 고통을 동반합니다.

 

반면 퍼셉션은 갈등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분별이 아니라 ‘인식’입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에게는 싸움이 없고, 영적 인간에게는 싸움이 있습니다. 양심은 영적 인간에게 반드시 필요한 장치이지만, 퍼셉션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죽어 있는 인간’을 언급합니다. 죽어 있는 인간에게는 양심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이는 도덕적 비난이 아니라, 상태에 대한 진술입니다. 그는 외적 규범이나 사회적 압력에 의해 행동할 수는 있지만, 내적으로는 선과 진리를 살아 있는 것으로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양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퍼셉션은 더더욱 모른다고 말합니다. 이는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현실 진단’입니다. 창세기 2장을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장은 우리가 이미 잃어버린 감각을 전제로 쓰여졌기 때문입니다.

 

AC.104는 이렇게 말합니다. 퍼셉션은 잃어버린 신비가 아니라, 인간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생명의 감각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직접 알지 못하지만, 말씀은 여전히 그 감각의 자리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에’(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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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창2:9,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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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2:9)

 

AC.103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이유는, 이 글이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이 다루어질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엇을 주제로 다루느냐에 따라, 그에 대응하여 사용되는 술어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rees” 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이 짧은 문장은, 지금까지 읽어 온 모든 상응 해설에 ‘해석 원칙의 열쇠’를 쥐여 주는 매우 중요한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상응이 고정된 사전처럼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같은 ‘나무’라는 표현이라도,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어떤 인간 상태가 논의되고 있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핵심 문장은 이것입니다. ‘주제(subject)의 성격에 따라 술어(predicate)의 성격이 달라진다.’

 

지금 창세기 2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과 퍼셉션의 상태로 사는 인간입니다. 따라서 이 장에서 등장하는 ‘나무’는 지식이나 교리가 아니라, ‘직접적인 인식, 곧 퍼셉션’을 의미하게 됩니다.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나무라는 상징 때문이 아니라, ‘천적 인간이라는 주제’ 때문입니다.

 

반대로, 만일 같은 ‘나무’라는 말이 영적 인간을 다루는 문맥에서 등장한다면, 그 의미는 달라집니다. 영적 인간에게 중심적인 것은 퍼셉션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 곧 이해와 교리입니다. 그래서 그 경우의 ‘나무’는 지식, 교리, 혹은 기억 지식과 연결된 의미를 띠게 됩니다. 상응은 대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결정’됩니다.

 

이 원칙은 성경 해석 전반에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특정 단어 하나를 떼어 놓고 ‘항상 이것은 이것이다’라고 말하는 방식은, 스베덴보리적 해석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묻습니다. ‘지금 여기서 말씀이 다루고 있는 인간의 상태는 무엇인가?’

 

이렇게 보면, AC.102에서 설명된 ‘나무는 퍼셉션’이라는 해석도 절대적 정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천적 인간을 전제로 할 때에만’ 성립하는 정의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창세기 2장은 특별합니다. 이 장은 역사나 교리의 설명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본래적인 상태에 있을 때의 내적 구조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또한, 왜 창세기 1장과 2장이 같은 창조 이야기를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주제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1장은 영적 인간의 형성과 질서를, 2장은 천적 인간의 생명과 퍼셉션을 다룹니다. 그래서 같은 자연적 표현이 전혀 다른 깊이와 결을 띱니다.

 

AC.103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응은 단어에 붙어 있는 꼬리표가 아니라, 말씀이 바라보고 있는 ‘인간 상태 전체에 의해 살아나는 의미’라고 말입니다. 이 원칙을 붙들고 있을 때, 창세기의 상징들은 더 이상 혼란이 아니라 질서가 됩니다.

 

 

 

AC.102, 창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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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2:9)

 

AC.102

 

나무(a tree)는 퍼셉션(perception)을 의미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a tree desirable to behold)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the perception of truth), ‘먹기에 좋은 나무(a tree good for food)는 선에 대한 퍼셉션(the perception of good)을 의미합니다.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는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그저 기억 지식에서 나올 뿐인 신앙(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을 의미합니다. A “tree” signifies perception; a “tree desirable to behold,” the perception of truth; a “tree good for food,” the perception of good; the “tree of live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이 글은 창세기 2장의 상징 언어가 어디까지 정밀하게 인간의 내적 구조를 가리키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핵심적인 설명입니다. 흔히 우리는 에덴동산의 나무들을 도덕적 시험 장치로만 이해해 왔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나무들을 ‘인간 안에 존재하는 인식과 생명 방식’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동산은 지성이었고, 이제 그 동산 안의 나무들은 퍼셉션 자체입니다.

 

먼저 ‘나무’가 퍼셉션을 의미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퍼셉션은 지식이나 추론이 아니라, 선과 진리를 직접 알아차리는 내적 감각입니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두고 위로 자라 열매를 맺습니다. 이처럼 퍼셉션은 사랑이라는 토양에서 뿌리를 내리고, 이해와 삶의 열매로 자라납니다. 그래서 동산의 중심 요소는 길이나 건물이 아니라, 나무입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는 설명은, 진리가 먼저 ‘보이는 것’으로 다가온다는 점을 드러냅니다. 진리는 이해의 차원에서 빛처럼 인식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진리는 분석 결과가 아니라, 보자마자 ‘, 이것이구나’ 하고 알아차려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반면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먹는다는 것은 자기 생명 안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선은 단순히 옳다고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이루는 양분’입니다. 그래서 선에 대한 퍼셉션은 이해보다 더 깊은 차원, 곧 의지와 사랑의 차원에 속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선은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입니다.

 

이제 중심에 놓인 ‘생명나무’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사랑과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순서입니다. 신앙이 먼저가 아니라, 사랑이 먼저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생명나무(the tree of lives)입니다. 복수형 ‘생명들(lives)은, 이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의 차원들을 포함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생명의 중심은 이 나무입니다.

 

이에 대비되는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입니다. 이것은 선과 악 자체를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지식의 출처’가 문제입니다. 이 나무는 감각적인 것, 곧 그저 기억 지식에서 나올 뿐인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는 외적 경험과 정보, 추론에 근거한 신앙입니다. 그것은 영적 인간에게는 필요하지만, 천적 인간에게 중심이 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결정적인 대비가 드러납니다. ‘생명나무’는 위에서 아래로, 주님 → 사랑 → 신앙의 질서로 흘러옵니다. 반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아래에서 위로, 감각 → 기억 지식 → 판단이라는 질서를 따릅니다. 문제는 지식 자체가 아니라, ‘그 지식이 생명의 중심 자리를 차지할 때’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단순히 “이 나무는 좋고, 저 나무는 나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모든 퍼셉션이 사랑에서 나오지만, 만일 사람이 감각과 기억 지식을 생명의 근원으로 삼기 시작하면, 그는 질서를 거꾸로 세우게 된다고 말입니다.

 

AC.102는 이렇게 창세기 2장의 나무들을 인간 내면의 지도처럼 펼쳐 보입니다. 에덴동산의 중심에는 사랑에서 나온 생명의 퍼셉션이 있고, 그 주변에는 진리와 선의 다양한 퍼셉션들이 자라고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보느냐가 아니라, ‘어디에서 보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보고, 그 사랑이 그의 모든 퍼셉션을 살립니다.

 

 

 

AC.103, 창2:9,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 여기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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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1, 창2:8, 겔43:1-2로 본 '동쪽은 주님'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 ‘동쪽’이 주님을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에스겔에 이르기를, That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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