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상은 ‘강문호 수도사 이야기 : 채널설립이유’라는 제목으로, 강문호 목사님이 앞으로 자신이 접한 수도사들의 삶과 수도원에 얽힌 이야기들을 한 편씩 소개하겠다는 취지를 밝히는 영상입니다. 공개된 정교회 자료와 예루살렘 교회 관련 자료를 대조해 보면 영상에서 소개하는 첫 인물은 4세기 팔레스타인 수도 전통의 중요한 인물인 성 카리톤(Chariton the Confessor)입니다. 카리톤은 예루살렘으로 가던 길에 강도들에게 붙잡혀 그들의 동굴에 결박된 채 갇혔고, 강도들이 다시 약탈하러 나간 사이 뱀이 포도주 그릇에 독을 남겼으며, 돌아온 강도들이 그 포도주를 마시고 죽었다는 전승이 전해집니다. 카리톤은 살아남은 뒤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및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고, 자신이 구원받은 그 자리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곳에 파란 라브라(Pharan Lavra)가 형성되었고, 그는 뒤에도 두 곳의 라브라를 더 세운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영상에서 ‘이스라엘 최초의 수도원’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조금 넓은 표현이며, 보다 정확하게는 유대 광야의 초기 라브라 수도 전통을 연 매우 중요한 공동체라고 이해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먼저 이 이야기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볼 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기적 자체보다 카리톤의 반응입니다. 강도들이 갑자기 죽고 자신이 살아난 사건은 매우 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전승에서 더 중요한 것은 카리톤이 살아남은 뒤, 그 사건을 자신의 특별함을 증명하는 표징으로 사용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강도들이 모아 둔 재물을 자기 것으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와 수도 공동체를 위해 사용했으며, 자신이 살아남은 장소에서 수행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기적을 자신의 명예로 돌리는 대신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영적 체험의 가치는 그 체험이 얼마나 놀라웠는가에 있지 않고, 그 결과 사람의 사랑과 삶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스베덴보리는 기적이나 초자연적 현상이 그 자체로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사람은 놀라운 일을 보고 잠시 두려워하거나 감동할 수 있지만, 그 감정이 지나간 뒤에도 이전의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적보다 중요한 것은 자유 가운데 받아들인 진리와 그것을 따라 변화된 삶입니다. 카리톤 이야기가 영적으로 의미 있는 이유도 뱀이 독을 풀어 강도들이 죽었다는 기이한 사건 때문이라기보다,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사용했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살아났다’는 놀라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카리톤처럼 강도의 동굴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지 않았더라도 하루하루 생명을 받고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생명을 받아들이는 형식입니다. 생명 자체는 오직 주님에게 있으며, 사람은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합니다. 사람은 그것을 자기 생명처럼 느끼도록 창조되었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는다면 그다음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 생명을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사용할 것인가’가 됩니다.
카리톤이 강도들의 재물을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과 교회 등을 위해 사용했다는 전승도 이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재물 자체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어떤 사랑으로 어떤 쓰임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같은 재물이 자기 안전과 명예와 지배를 확대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강도들에게 재물은 탐욕과 폭력의 목적이었지만, 카리톤에게 넘어온 뒤 그 재물의 쓰임이 바뀌었다는 점은 상징적으로도 흥미롭습니다. 동일한 자연적 재물이 사랑의 방향에 따라 전혀 다른 성격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목사님이 수도사들의 이야기를 ‘사람 같지 않은 사람들의 초인간적인 이야기’처럼 소개하는 부분은 수도 전통에 대한 강한 감탄을 보여 줍니다. 실제로 극단적인 금욕과 고독, 기도와 희생의 삶을 살아간 수도사들의 이야기는 현대인에게 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참된 영성은 사람을 ‘초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 안의 본래 질서가 주님으로부터 회복되어 더욱 참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천사들도 인간과 다른 종류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다가 영계로 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자의 위대함도 인간적인 삶을 초월했다는 데 있지 않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벗어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변화된 만큼에 있습니다.
따라서 수십 년 동안 동굴에서 기도했다는 사실만으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영적으로 높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한 수도자가 사막에서 평생 기도하는 삶과 한 사람이 가정에서 배우자와 자녀를 책임지고, 직장에서 정직하게 일하며,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자기 분노와 이기심을 이겨 가는 삶 가운데 어느 것이 주님 보시기에 더 깊은지는 외적인 형태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것은 장소와 형식이 아니라 지배적인 사랑입니다. 수도원에서 살아도 자신의 proprium을 사랑할 수 있고,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카리톤의 이야기 가운데 오히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사람들이 자신에게 몰려들자 더 깊은 고독을 찾아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전승입니다. 정교회 자료에는 그가 사람들의 칭찬을 피하고 고독을 원하여 더 깊은 광야로 물러났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에게 영적 지도를 구하는 사람들을 거절하지 않았으며, 결국 다른 수도 공동체들도 세웠습니다. 고독을 사랑하면서도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도와 쓰임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참된 고독은 사람을 이웃으로부터 도피시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자신을 비운 뒤, 다시 이웃에게 더 순수한 쓰임을 행하도록 준비시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영상에서 특히 중요한 문장은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취지의 표현입니다. 이 말은 잘 이해하면 매우 아름답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꾸어 말하면,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모든 참된 선과 진리의 근원은 그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람이 진실한 말을 하고 선한 일을 행할 때, 겉으로는 그 사람이 말하고 그 사람이 행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선 자체와 진리 자체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사람은 그것을 받아 자유롭게 행하는 그릇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난다는 것은 그의 말투가 특별하거나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본질적으로는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뒤, 사람들의 시선이 그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주님께 향한다는 뜻이어야 합니다. 설교를 듣고 ‘저 목사님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만 남는 것과 ‘주님은 정말 이런 분이시구나’라는 깨달음이 남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전자는 사람에게 시선이 고정될 수 있지만, 후자는 사람을 통하여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매우 엄중한 영적 문제가 시작됩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말이 어느 순간 ‘사람들이 나에게서 하나님의 특별한 음성을 듣는다’는 자기 인식으로 바뀌면, 그 순간 주님께 돌려져야 할 것이 proprium으로 돌아올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proprium은 세속적 자랑에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영적 체험, 말씀 지식, 기도생활, 목회 성공, 심지어 겸손과 희생까지도 자기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라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습니다’라는 자기 의식이 생길 수 있을 만큼 proprium은 미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소리만 나와야 한다’는 문장을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조금 더 완성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흘러나와야 하지만, 정작 그 사람 자신은 그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때에는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그 선의 근원과 힘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거듭해서 강조하는 중요한 영적 질서입니다.
영상에서 강문호 목사님은 이스라엘의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그곳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 기적의 이야기, 하나님 이야기’를 모았고, 그것을 앞으로 하나씩 소개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작업은 분명 가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랜 기독교 역사 안에서 실제 사람들이 자신의 생명을 어떻게 주님께 돌렸는지를 보는 것은 오늘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이야기’와 ‘하나님 이야기’는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기적이 많이 등장한다고 하나님이 더 많이 드러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특별한 현상은 거의 없어도 한 사람이 수십 년 동안 정직하게 악을 피하고 이웃을 섬겼다면, 그 삶에서 주님의 섭리가 훨씬 깊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에서도 섭리는 대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게 움직입니다. 사람은 극적인 기적에서는 쉽게 하나님의 손길을 찾지만, 평범한 일상의 질서와 자유로운 선택 속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섭리는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아주 미세한 방법으로 그를 선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사들의 기적담을 들을 때에도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났구나’에 머무르기보다, ‘그 일을 통해 이 사람의 사랑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카리톤 이야기도 바로 그렇게 읽는 편이 좋습니다. 독사와 포도주와 강도들의 죽음이라는 극적인 장면이 이야기의 중심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가장 중요한 장면은 그 이후입니다. 그는 살아남았고, 재물을 나누었으며, 자신에게 다시 주어진 생명을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들 때에도 자신의 명성을 붙들기보다 다시 고독을 찾았다고 전해집니다. 적어도 전승이 보여 주려는 이상은 ‘기적을 경험한 특별한 인간’이 아니라, 살아남은 생명을 하나님께 돌려드린 인간입니다. (Orthodox Church in America)
여기에서 수도생활의 본질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은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장소가 아닙니다. 수도복 역시 사람의 내적 상태를 바꾸어 주지 않습니다. 고독과 금식과 기도와 노동은 거듭남을 돕는 외적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수단을 통하여 실제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자라지 않는다면 수도의 외적 형식만 남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수도복을 입지 않고 세상 가운데 살더라도 자신의 악을 죄로 여기며 피하고, 맡겨진 쓰임을 정직하게 감당하며, 자신에게 있는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는 사람이라면 그는 깊은 의미에서 내적 수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영상에서 소개된 수도사 이야기를 ‘초인간적인 사람의 놀라운 일화’로만 받아들이기보다, ‘한 사람의 삶의 중심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라는 관점에서 읽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는 더 잘 맞습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보다 살아남은 뒤 어떻게 살았는지가 중요하고, 수도원을 세웠다는 사실보다 왜 세웠는지가 중요하며, 사람들이 그를 찾아왔다는 사실보다 그 사람들이 그를 통해 누구를 바라보게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결국 이 영상의 가장 좋은 핵심은 ‘하나님의 사람에게서는 하나님의 소리가 나야 한다’는 문장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거기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조건을 덧붙입니다. 그 사람에게서 주님의 소리가 날수록 그 사람 자신은 더욱 뒤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이름이 커지는 만큼 주님의 이름도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영적 질서에서는 사람이 투명해질수록 그를 통하여 주님이 더욱 분명히 보입니다.
따라서 이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성 카리톤의 이야기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그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기적 자체가 아니라, 다시 받은 생명과 재물을 자신의 것으로 움켜쥐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으로 돌렸다는 데 있으며, 참된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 특별함을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통하여 주님의 선과 진리가 드러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상 속 ‘하나님은 아닌데 하나님의 소리만 난다’는 표현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마지막 한 문장을 덧붙인다면 저는 이렇게 쓰고 싶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소리가 나는 사람은 자신에게서 들리는 그 선한 소리의 주인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 위 제목의‘SY’는‘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라는 뜻입니다.
이 영상은 강문호 목사님이 충주봉쇄수도원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시작하면서 전한 첫 인사입니다. 오랫동안 섬기던 교회를 떠나 수도생활에 들어간 뒤, 이전 교회의 성도들에게 영상으로 인사를 전하면서, 후임 목회자와 새로 세워지는 직분자들을 축하하고, 지난 목회를 함께해 준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앞으로 자신이 걸어가려는 새로운 사역의 방향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영상은 어떤 특정한 성경 본문을 강해하는 설교라기보다 한 목회자가 오랜 담임목회를 마치고,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서면서 자신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소망을 밝히는 인사말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먼저 영상에서 인상 깊은 것은 이전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애정과 감사입니다. ‘여러분들은 영상으로나마 제 얼굴을 보는데 저는 여러분을 보지 못해서 너무 안타깝다’는 첫 인사에는 오래 함께했던 공동체를 향한 그리움이 묻어 있습니다. 이어 후임 목회자를 자신보다 훌륭한 목회자로 기대한다고 축복하고, 장로들과 부목사들, 전도사들, 선교회와 교사들, 찬양대와 성도들에게 감사하면서 ‘모두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내가 있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이러한 감사는 귀한 태도입니다. 사람은 홀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나라는 수많은 서로 다른 쓰임들이 하나를 이루는 질서이며, 천국에서도 어느 한 존재가 모든 것을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목회 역시 여러 사람의 기도와 노동과 조언과 봉사가 결합되어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지난 세월을 자신의 업적으로만 기억하지 않고, 함께한 사람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은 천국의 공동체적 질서와도 잘 어울립니다.
후임 목회자를 향해 ‘저보다 훌륭해서 잘되리라고 믿는다’는 취지로 말하는 부분도 의미가 있습니다. 한 시대의 자신의 역할이 끝났음을 인정하고,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은 영적으로도 중요한 일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직분과 역할은 사람이 영원히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어떤 쓰임을 위해 일정 기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자신의 사역을 붙잡기보다 새로운 사람에게 기꺼이 넘기고, 그가 더 잘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적어도 표현된 내용 자체로 보면, 자신의 역할을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의 쓰임으로 이해하려는 방향과 맞닿아 있습니다.
영상의 중심은 이후 자신의 새로운 삶을 소개하는 부분으로 옮겨갑니다. 강 목사님은 이제 한 교회의 담임목회라는 범위를 넘어 수도원과 연결된 새로운 사역을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여러 나라의 수도원들과 네트워크를 만들고, 은퇴한 목회자들이 함께 모여 ‘평생 새벽기도, 평생 연구, 평생 후학들을 가르침, 평생 노동, 그리고 그 노동으로 얻은 것을 통한 평생 선교’를 하며 죽는 날까지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는 비전을 밝힙니다. 여기에는 은퇴를 사역의 종료로 생각하지 않고, 삶의 마지막까지 어떤 쓰임을 계속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쓰임’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게 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천국의 삶은 무위도식하는 삶이 아니라 끊임없는 쓰임의 삶입니다. 천사들도 각자의 사랑과 지혜에 따라 다른 이들에게 유익을 주는 일을 행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단순히 쉬는 삶만을 이상으로 삼기보다, 기도하고 연구하고 가르치고 노동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는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특별히 영상에서 기도와 연구뿐 아니라 ‘노동’을 수도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포함시키고 있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합니다. 영적 삶은 머릿속의 명상이나 종교적 감정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유용한 삶으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쓰임’에서 중요한 것은 그 규모보다 그 내적 목적입니다. 수도원이 몇 개 세워지고, 몇 나라와 연결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하여 실제로 사람 안에 선과 진리가 자라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큰 일을 했다는 이유로 더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충실하게 수행한 사람이 귀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작은 공동체를 섬기는 일이나 한 사람을 돌보는 일도 그 사랑과 쓰임이 참되다면 큰 조직을 세우는 것보다 결코 영적으로 작지 않습니다.
영상에는 ‘봉쇄수도원’이라는 독특한 삶의 방식도 소개됩니다. 일정한 특별한 경우 외에는 수도원 밖으로 나가지 않고, 사람들과의 접촉도 제한하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겠다는 것입니다. 고독과 침묵은 오래된 기독교 수도 전통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분주한 외적 활동에서 물러나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고 기도와 말씀에 집중하는 시간은 분명 유익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때때로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과 활동으로 가득했던 오랜 목회생활을 마친 뒤, 일정 기간 깊은 고독을 선택하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외적으로 세상에서 물러나는 것 자체를 더 높은 영적 상태로 보지는 않습니다. 사람의 거듭남은 대부분 실제 삶의 관계와 책임 가운데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혼자 있을 때에는 자신의 인내와 겸손을 확인하기가 쉽지만, 다른 사람과 부딪히고 의견이 다르며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의 분노와 지배욕,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고독은 거듭남을 돕는 수단이 될 수 있지만, 그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수도원의 문을 닫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사랑이 마음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며, 사람과의 만남을 줄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만나는 사람을 자기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상에서 특히 생각해 볼 부분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 만나야 할 사람이 많아져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사람들만 만나느라 분주하면 너를 만나 주지 않겠다’는 취지의 말씀을 받았다고 소개하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우선 귀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사역의 분주함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신할 수 없다는 자각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끝없이 사람을 만나고 행사를 진행하면서, 정작 자신의 내면은 점점 메말라 갈 수도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인 일로 가득하지만, 내적으로는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역설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활동을 줄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려는 결심에는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개인이 기도 가운데 경험한 어떤 내적 음성이나 생각을 곧바로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확정하는 데에는 신중함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감정에는 여러 근원의 인플럭스가 작용하며, 자연계에 사는 동안 사람은 그 근원을 명확하게 식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강한 내적 감동을 경험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주님의 뜻과 일치하는지는 말씀의 진리, 이성적인 분별, 그리고 그 결과 맺히는 선한 열매를 통해 확인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체험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 체험 자체가 절대적인 권위를 갖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강 목사님은 자신의 사역이 한 교회와 한 나라를 넘어 여러 나라의 수도원으로 확장되고, 더 나아가 ‘땅을 넘어 하늘까지’, ‘이 세상과 저세상까지’ 연결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취지로 말합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영계 교통을 주장한다기보다 자신의 수도 사역을 영원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다는 포부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자연계와 영계의 관계가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은 몸으로는 자연계에 살지만 그의 내면은 이미 영계와 연결되어 있고, 모든 선과 진리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천국을 통하여 흘러옵니다. 따라서 지상의 삶은 영원한 세계와 단절된 삶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연계와 영계를 연결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특별한 수도생활이나 어떤 영적 훈련이 인간에게 두 세계를 연결하는 권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으며, 상응의 질서를 통해 영계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저세상과 연결될 것인가’보다 ‘이미 주님으로부터 흘러오는 선과 진리를 이 세상에서 어떻게 받아 살아낼 것인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영계를 보고 천사들과 대화했지만, 그의 저작에서 영적 삶의 핵심은 영계를 보는 능력이 아니라 악을 죄로 알고 피하며 주님으로부터 선을 행하는 데 있습니다.
영상 전체를 통하여 느껴지는 한 가지 강한 흐름은 ‘남은 생애를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오랜 목회를 마치고도 기도와 연구, 후학 교육과 노동과 선교를 계속하며 죽는 날까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에는 분명 귀한 면이 있습니다. 사람의 노년 역시 주님께서 주신 생명의 한 시기이며, 그때에도 경험과 지혜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삶의 어느 시기도 그 자체로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현재의 조건 안에서 어떤 선한 쓰임을 행하는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수도생활이든 목회든 선교든 모든 외적인 사역에는 하나의 공통된 영적 기준이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 나의 자아가 커지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커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속적 성공을 내려놓고도 종교적 성공을 사랑할 수 있고, 물질적 명예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적 명예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외적인 형식 자체보다 그 안에 흐르는 사랑의 성질을 봅니다. 수도원이라는 장소도, 기도와 연구라는 활동도, 선교라는 이름도 자동으로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한 사랑의 쓰임이 될 때 거룩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 첫 인사 영상은 한 목회자가 자신의 이전 사역을 감사 가운데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단계로 들어가려는 모습을 담은 영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이전 교회를 축복하고, 함께한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자신은 앞으로 고독과 기도, 연구와 교육, 노동과 선교를 결합한 수도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러한 열망을 먼저 존중하면서도, 수도의 본질을 외적인 봉쇄나 활동의 규모에 두지 않습니다. 참된 수도는 사람이 어디에 사느냐보다 그의 마음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에 있으며, 참된 사역은 얼마나 큰 일을 이루느냐보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얼마나 순수하게 이웃의 유익으로 돌리는가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첫 영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담임목회를 마치고 고독과 기도, 연구와 노동, 후학 양성과 선교라는 새로운 쓰임의 삶으로 들어가려는 결심은 귀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참된 수도의 완성은 세상에서 얼마나 멀리 물러났는가가 아니라, 자기 사랑에서 얼마나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위한 쓰임의 사람이 되어 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입니다.
※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2강 1부
‘14만 4천’과 참된 이김의 시작
이번 강의는 찬송과 기도로 시작합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재림하실 구주 예수’, ‘달고 오묘한 그 말씀’, ‘내 진정 사모하는’,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이 차례로 이어집니다. 이 찬송들의 흐름을 가볍게 지나칠 필요는 없습니다. 강사가 앞으로 전개하려는 계시록 해석의 정서적 토대가 이미 여기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 ‘정결’, ‘재림’, ‘주님을 사모함’, ‘십자가를 통한 가까워짐’이 하나의 흐름을 이룹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계시록은 단순히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시간표를 알아내기 위한 책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사람이 주님께 가까워지고 악에서 떠나며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과정을 다루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라는 찬송의 방향은 이후 강의에서 등장하는 ‘이기는 자’라는 주제를 이해하는 데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이긴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어떤 외부 세력을 제압한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보다 자기 안에서 지옥이 붙들고 있는 악과 거짓을 주님의 능력으로 물리치는 것입니다. 계시록의 전쟁은 먼저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입니다. 그러므로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과 ‘주께 더 가까이 가는 사람’은 사실 서로 별개의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의 참된 재림이 말씀의 신적 진리가 인간의 마음 안에 새롭게 임하는 것이라면, 주님께 가까이 가는 삶 자체가 이미 재림을 맞이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기도 가운데 ‘진리의 말씀으로 깨달음을 얻고 주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도록’ 간구하고, ‘영적인 소경’과 ‘영적인 귀머거리’가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대목 역시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의미가 깊습니다. 말씀에서 ‘본다’는 것은 단순한 시각 작용을 넘어 진리를 이해하는 것을, ‘듣는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눈과 귀가 열린다는 것은 신비한 현상을 경험한다는 뜻에 앞서, 말씀의 진리를 알아보고 그것을 삶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의 영적 상태는 그가 얼마나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가보다, 알고 있는 진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행하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이어 강사는 요한계시록 14장 1절부터 5절까지를 읽습니다. 어린양이 시온산에 서 있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있으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보좌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며,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 ‘처음 익은 열매’,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로 묘사됩니다. 여기까지는 강사와 스베덴보리의 관심이 놀랄 만큼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문제는 이제 ‘14만 4천’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서 시작됩니다.
강사는 ‘교회 시대 인 맞은 종’을 14만 4천으로 이해하면서, 실제 역사 속 특정 인물들을 그 14만 4천에 속한 사람으로 지목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조심스럽게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수들은 대체로 자연적 인원수를 세기 위한 숫자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충만함과 질서를 나타냅니다. 특히 ‘12’는 신앙과 사랑에 속한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며, 12×12×1,000인 144,000은 그러한 것들의 충만한 전체를 뜻합니다. 따라서 14만 4천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역사 가운데 정확히 144,000명을 선발하셨다는 명단 개념으로 읽기보다, 주님을 인정하고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충만한 전체를 표상한다고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에 훨씬 가깝습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저 사람은 14만 4천 중 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면 계시록의 상응적 숫자가 자연계의 개인 명단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누가 그 숫자에 속하는지를 사람이 판정하기 시작하면, 계시록의 초점이 ‘나는 어린양을 따르고 있는가?’라는 자기 성찰에서 ‘누가 특별히 선택된 사람인가?’라는 외적 분류로 이동할 위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완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겉으로 극적인 희생과 경건을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행위의 내적 동기까지 인간이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세상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내면이 천국에서는 훨씬 귀하게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강사가 소개하는 인물들의 삶 자체를 가볍게 볼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첫 번째로 소개되는 중국 감옥의 이야기는 매우 아름다운 대목입니다. 강사가 전하는 이야기에서 한 목회자는 살인죄로 수감되어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청년을 돌봅니다. 다른 죄수들과 함께 그의 피와 오물로 얼룩진 얼굴을 씻어 주고, 음식을 먹여 주며, 찬송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자신 역시 몹시 배고픈 상황에서 자기 몫의 만터우를 그 청년에게 내어줍니다. 결국 그 사랑 앞에서 포악했던 청년의 마음이 무너집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는데 왜 나를 이렇게 사랑합니까?’라고 울며 묻습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은 진리에 관한 논쟁보다 진리가 선이 되어 나타난 삶일 때가 많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을 알고 있는 것과, 자신도 굶주리면서 자기 몫의 빵을 내어주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전자는 기억 속에 있는 진리일 수 있지만 후자는 의지와 행위 속으로 들어간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이 바로 이런 곳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진리가 선과 결합될 때 비로소 그 진리는 사람의 생명이 됩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정말 주목할 것은 그 목회자가 ‘14만 4천 중 한 사람인가 아닌가’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몫의 빵을 포기하고 가장 미움받는 사람에게 건네주는 그 순간 무엇이 일어났는가?’입니다. 그 순간 말씀은 교리가 아니라 삶이 되었고,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선을 통하여 다른 한 사람의 굳은 마음이 열렸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열매’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어 강사는 한국의 이세종을 소개하면서 그의 극단적일 만큼 철저한 겸손과 구제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좋은 옷을 입으면 교만해질까 염려하여 허름한 옷을 입고, 상을 차려 먹으면 마음이 높아질까 염려하여 땅바닥에 음식을 놓고 먹었으며, ‘구제는 자기가 쓸 것에서 떼어내어 해야 참 구제’라고 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삶의 태도에는 분명 귀하게 받아들일 부분이 있습니다. 자기 욕망을 절제하고 이웃을 위하여 자기 몫을 기꺼이 포기하려는 태도는 체어리티의 실제적 표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한 가지 섬세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어 취급하거나 가난한 외형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좋은 옷을 입지 않는 것, 땅바닥에서 밥을 먹는 것, 물질을 적게 소유하는 것 자체가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행동을 움직이는 내적 사랑입니다. 극단적인 자기비하 역시 그것이 하나의 종교적 공로의식으로 굳어지면 또 다른 형태의 proprium이 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까지 낮아졌다’는 의식이 오히려 은밀한 자기 의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겸손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악과 거짓뿐이며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마음으로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세종의 삶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주목하는 것은 ‘상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외적 형태 자체보다, 자기 자신보다 이웃을 앞세우려 했던 그 내적 방향입니다. 그 방향이 실제로 주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면, 외적 생활의 특이성보다 훨씬 중요한 영적 가치가 그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적 삶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입니다. 금식, 절제, 가난, 침묵, 철야 자체가 거룩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통하여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과 이웃을 더욱 사랑하게 될 때 그것들이 영적 훈련으로서 의미를 갖습니다.
이 대목까지 살펴보면 강사가 말하는 ‘14만 4천’에는 두 층이 섞여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매우 귀한 층입니다. 즉 자기희생, 겸손, 체어리티, 말씀에 대한 순종, 주님을 끝까지 따르는 삶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시록 14장의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라는 말씀과 잘 어울립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그러한 사람들을 실제 역사 속 특정 개인들과 대응시키고, 그들을 문자 그대로 14만 4천의 구성원이라고 확정하려는 해석입니다. 전자는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지만, 후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응적 의미를 지나치게 자연화한 것으로 보게 됩니다.
오히려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표현 자체가 이것을 잘 보여 줍니다. ‘이마’는 사람의 가장 중심적인 사랑, 곧 그의 의지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이마에 주님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자연적 이마 어딘가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지배하는 사랑이 주님께 속해 있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린양을 따라간다’는 것도 물리적으로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인성을 인정하고 그분의 진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결국 14만 4천의 핵심은 ‘몇 명인가?’보다 ‘어떤 상태인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이번 2강의 첫 부분은 1강 마지막 부분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1강에서 ‘익은 열매’와 ‘이기는 자’를 다루었다면, 이제 2강에서는 그것을 실제 신앙인의 삶을 통해 보여 주려 하고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그 초점을 조금 이동시킵니다. ‘누가 14만 4천인가?’가 아니라 ‘내 안에서 어린양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누가 특별히 선택된 종인가?’보다 ‘나는 오늘 내 proprium을 따라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린양이 인도하시는 곳을 따라가고 있는가?’를 묻습니다.
그렇게 보면 강사가 소개하는 희생과 겸손의 이야기들은 오히려 더 보편적인 의미를 얻게 됩니다. 그것은 몇몇 특별한 종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모든 거듭나는 사람이 걸어야 할 길의 한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자기 빵을 굶주린 사람에게 내어주는 순간, 자기 몫을 줄여 어려운 사람을 돕는 순간, 자기 높아짐을 경계하는 순간,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의 선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는 순간마다 인간 안에서는 작은 의미의 ‘어린양을 따름’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2강 1부에서 가장 소중하게 건질 수 있는 것은 ‘14만 4천 명단’이 아니라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삶’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계시록을 읽으면 숫자는 사람을 제한하지 않고 오히려 의미를 확장합니다. 14만 4천은 소수의 영적 엘리트를 가려내기 위한 숫자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된 천국적 질서를 보여 주는 수가 됩니다. 그리고 그 질서는 먼 미래의 종말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이 자기 사랑을 내려놓고 주님의 진리를 실제 선으로 행할 때 이미 그의 내면에서 시작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강의 첫머리에 불렀던 찬송이 오히려 2강 1부 전체를 가장 단순하고 아름답게 요약하는지도 모릅니다.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계시록의 모든 수와 상징과 환상은 결국 이 한 방향을 위해 존재합니다. 말씀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넘어, 말씀에 의해 변화되어 주님께 더 가까이 가는 사람, 그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바라본 ‘이기는 자’이며, 계시록이 우리에게 보여 주려는 참된 천국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2강2부
대환란의 시간표보다 더 깊은 ‘영적 전쟁’
2강 2부에서 강사는 본격적으로 요한계시록 13장부터 15장까지를 하나의 종말론적 시간표 안에 배치합니다. 강의의 구조는 비교적 명료합니다. 전 3년 반 동안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환경이 조성되고, 후 3년 반에는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본격화되며, 그 기간에 처음 익은 열매가 되지 못한 성도들이 환난과 박해를 통하여 두 번째와 세 번째 ‘익은 열매’로 추수된다는 것입니다. 이어 15장에서는 순교자의 수가 차고, 16장의 일곱 대접 재앙으로 넘어간다고 설명합니다. 강사는 이 전체를 ‘주님께서 익은 열매를 추수하시기 위한 과정’이라는 하나의 큰 틀 안에서 이해합니다.
여기서 먼저 귀하게 볼 것은 강사가 요한계시록을 단순히 세상의 파국을 예언하는 책으로 읽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의 관심은 계속해서 ‘익은 열매’에 있습니다. 대환란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을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한 접점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심판을 하나님의 분노가 폭발하여 사람을 파괴하는 사건으로 보지 않습니다. 심판은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더 이상 뒤섞여 있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들을 분리하고, 새로운 영적 질서를 세우시는 주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강사의 ‘환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익은 열매의 추수가 목적’이라는 강조는, 비록 그 구체적인 종말론적 구조는 상당히 다르지만, 그 중심 의도에서는 주목할 만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두 해석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나타납니다. 강사는 계시록 13장 이후의 사건들을 장차 자연계에서 실제로 일어날 세계적 정치·종교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적그리스도가 등장하고, 세계적인 정치 체제가 형성되며, 종교와 정치가 결합하고, 사람들이 적그리스도를 메시아처럼 추앙하며, 짐승의 표를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생존과 신앙의 중대한 갈림길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 스베덴보리는 요한계시록의 이러한 장면들을 기본적으로 영계에서 일어난 최후의 심판과 교회의 영적 상태에 관한 상응적 계시로 읽습니다. 따라서 ‘짐승’, ‘용’, ‘거짓 선지자’, ‘바벨론’, ‘아마겟돈’ 등을 미래 어느 시점에 등장할 특정 정치가나 국가, 세계정부와 일대일로 대응시키지 않습니다.
이 차이는 단순히 ‘미래주의냐 상징주의냐’ 정도의 차이가 아닙니다. 말씀을 읽는 방향 자체가 달라집니다. 강사의 해석을 따르면 독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미래의 세계정세를 향하게 됩니다. ‘적그리스도는 누구일까?’, ‘세계정부는 언제 등장할까?’, ‘짐승의 표는 어떤 형태일까?’, ‘대환란은 언제 시작될까?’가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 질문은 사람의 내면으로 돌아옵니다. ‘내 안에서 주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가?’, ‘내 지성이 만들어 낸 거짓을 진리처럼 섬기고 있지는 않은가?’, ‘내 신앙은 실제 삶과 결합되어 있는가?’가 훨씬 중요한 질문이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계시록을 단순한 개인 심리의 비유로 축소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록에는 실제로 교회 전체의 거대한 영적 변화와 영계에서의 심판이 담겨 있습니다. 다만 그 사건의 본질이 자연계의 군사전쟁이나 세계정부의 정치적 재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계와 교회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분리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에게 요한계시록은 현실과 무관한 상징집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교회의 가장 깊은 현실을 드러내는 책입니다.
강사는 전 3년 반의 여러 재앙을 통하여 세계가 극심한 혼란에 빠지고,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적그리스도가 마치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처럼 등장한다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너무 큰 혼란과 고통을 겪은 나머지 강력한 지도자를 갈망하게 되고, 결국 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문자 그대로 미래의 특정 정치적 시나리오로 확정하는 데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 안에 담긴 영적 원리는 충분히 생각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은 내적 질서를 잃어버리면 자신을 구원해 줄 외적 힘을 찾기 쉽습니다. 신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과 말씀을 직접 바라보기보다 어떤 강력한 지도자, 종교적 권위, 특별한 체험, 기적, 예언, 조직 또는 교리를 절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처음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도록 돕는 수단이었더라도 어느 순간 그것 자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적그리스도’라는 말은 갑자기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과 가까워집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그리스도’는 특히 주님의 신적 진리와 깊이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의 본질은 단순히 미래에 등장할 한 명의 악한 독재자에게서만 찾을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왜곡하고 그것을 자기 목적에 이용하는 모든 영적 상태에서 찾아야 합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거짓이 거짓의 얼굴을 하고 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처럼 보이는 얼굴을 하고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영적 분별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적 언어를 사용하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가, 아니면 자기 우월감과 지배욕과 공로의식을 강화하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강사는 후 3년 반을 ‘짐승 통치 시대’로 설명하면서 적그리스도가 정치적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는 ‘정교일치’의 세계를 예상합니다. 강의에서는 북한의 지도자 숭배 체제를 하나의 유사한 사례로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더 중요한 것은 특정 국가나 정치체제를 계시록의 짐승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짐승’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짐승은 문맥에 따라 인간의 애정, 특히 자연적 차원의 애정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의 악한 짐승들은 주님에게서 분리된 인간의 자연적 욕망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거짓된 추론이 종교적 권력을 획득한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렇게 읽으면 계시록 13장은 갑자기 매우 가까워집니다. 짐승은 먼 미래 어느 나라에서 나타날 괴물이기 전에, 내 안에서 하나님보다 더 큰 권위를 요구하는 자기 사랑일 수 있습니다. 그 자기 사랑은 혼자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합리화하는 지성이 따라붙습니다. ‘내가 옳다’, ‘나는 특별하다’, ‘내 판단이 하나님의 뜻이다’, ‘나를 반대하는 사람은 진리를 반대하는 것이다’라는 식으로 자기 욕망에 종교적 언어를 입힐 수 있습니다. 욕망과 거짓된 지성이 결합하면 사람 안에 하나의 작은 ‘짐승의 나라’가 형성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특히 경계하는 것은 신앙과 자기 권력의 결합입니다. 신앙은 본래 사람을 낮추어 주님을 바라보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사람을 높여 다른 사람을 지배하게 한다면 무엇인가 크게 뒤집힌 것입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계시를 많이 알고, 종말의 비밀을 많이 안다는 사실 자체는 사람을 천국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한다면 진리가 proprium을 섬기게 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여러 저작에서 끊임없이 경계하는 영적 위험입니다.
강의의 또 하나의 중심축은 ‘두 번째 익은 열매’인 순교자입니다. 강사는 후 3년 반의 적그리스도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키다가 죽임당하는 사람들을 두 번째 익은 열매로 이해합니다. 그리고 순교자의 수가 차면 그들이 천상의 유리 바닷가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후 일곱 대접 재앙을 통하여 그들의 피값이 갚아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도 문자적 순교와 영적 순교를 구별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죽임당함’은 흔히 자연적 육체의 죽음보다 더 깊은 것을 가리킵니다. 진리가 거짓에 의해 억압되고 배척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순교자’는 단순히 종교적 박해로 목숨을 잃은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악과 거짓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 그리고 그 때문에 자기 안의 오래된 욕망과 생각들이 죽는 고통을 감수하는 사람의 영적 상태까지 포함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실 거듭남에는 이러한 ‘죽음’이 반드시 있습니다. 옛 사람이 죽지 않고 새 사람이 태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 뜻을 붙잡고 있으면서 동시에 주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은 자기에게 너무나 익숙했던 어떤 욕망과 생각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때로 실제 죽음처럼 고통스럽습니다. 자존심을 내려놓아야 하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포기해야 하며,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내려놓아야 하고, 자신이 옳다는 만족까지 포기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이 내면에서 일어나는 영적 순교의 한 모습입니다.
따라서 강사가 강조하는 ‘환난을 통하여 익은 열매가 된다’는 사상은, 문자적 대환란의 시간표를 벗겨 내고 보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상당히 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시련 없이 거듭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시험, 곧 temptation은 단순한 생활상의 어려움이 아니라 사람 안의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서 벌어지는 실제적인 영적 전투입니다. 주님은 시험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지만, 지옥이 일으키는 시험을 허용하시고 그것을 이용하여 사람 안의 악을 드러내고 분리시키시며 선과 진리를 더욱 굳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대환란’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찾는다면 먼저 우리 자신의 거듭남 과정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계시록의 모든 대환란을 개인적 심리 과정으로만 환원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은 언제나 우리의 현재 영적 삶에도 적용됩니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후 3년 반이 언제 시작되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험이 찾아왔을 때 내 안에서 무엇이 드러나는가?’입니다. 평소에는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했는데 모욕을 당하자 분노가 폭발할 수 있고, 자신이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손해를 보자 미움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시험은 바로 이런 감추어진 상태를 밖으로 끌어냅니다.
이 점에서 강의가 반복해서 사용하는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매우 의미가 깊습니다. 열매는 하루아침에 익지 않습니다. 씨가 뿌려지고,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오랜 햇빛과 비를 거친 뒤에야 열매가 익습니다. 인간의 거듭남도 그렇습니다. 진리를 처음 아는 것은 씨앗을 받는 단계에 가깝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싹이 트는 과정이며, 실제 생활에서 행하기 시작하는 것은 성장 과정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시험 속에서도 그것을 계속 행하여 마침내 선을 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성품이 될 때 ‘열매가 익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 익은 열매’, ‘두 번째 익은 열매’, ‘세 번째 익은 열매’를 반드시 미래의 세 부류 사람에 대한 문자적 분류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한 사람의 거듭남에도 수많은 성숙의 단계가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단번에 완성시키지 않으십니다. 어떤 악에서는 비교적 빨리 벗어나지만 다른 악에서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어떤 진리는 머리로 금방 이해하지만 그것이 의지와 삶으로 내려오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적 완성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영원히 계속되는 성장입니다.
여기에서 2강 1부에서 살펴본 14만 4천의 의미도 다시 연결됩니다. 강사는 교회 시대의 ‘이긴 자’ 14만 4천이 이미 휴거되어 시온산에서 어린양과 함께 있고, 후 3년 반 동안 다른 익은 열매들이 추수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14만 4천은 정확한 인원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12와 12의 곱에 1,000이 결합된 이 수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충만한 전체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14만 4천이 다 차야 다음 종말 사건이 시작된다’는 식의 시간표보다는, 주님의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의 질서가 충만하게 이루어지는 상태를 보여 주는 상응적 수로 이해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이 차이는 ‘시온산’에서도 나타납니다. 강사는 시온산을 14만 4천이 올라가 있는 ‘삼층천’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시온은 단순히 영계의 특정 지리적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천적 교회를 표상합니다. ‘산’ 자체가 높은 사랑, 특히 주님을 향한 사랑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린양과 함께 시온산에 선다는 것은 ‘천국의 어느 높은 층에 배치되었다’는 공간적 의미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천적 상태 가운데 있다는 뜻이 더 본질적입니다.
이렇게 보면 요한계시록의 공간 언어가 상태의 언어로 바뀝니다. ‘올라간다’는 것은 영적으로 더 높은 사랑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고, ‘내려간다’는 것은 더 외적이고 자연적인 상태로 향하는 것이며, ‘산’은 높은 사랑을, ‘바다’는 가장 외적인 진리와 지식의 차원을 나타냅니다. 영계에는 실제 공간처럼 보이는 것이 있지만,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그 공간은 본질적으로 천사와 영들의 내적 상태에 따라 나타나는 외관입니다. 그러므로 계시록의 지리와 이동을 자연계의 지도처럼 읽으면 그 안에 있는 아르카나를 놓치기 쉽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번 2강 2부에서 가장 크게 갈라지는 지점입니다. 강사는 계시록을 ‘앞으로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려 주는 예언적 시간표로 읽습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계시록을 ‘교회와 인간 안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악과 거짓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시는가’를 보여 주는 영적 계시로 읽습니다. 전자는 독자로 하여금 미래 사건을 주시하게 하고, 후자는 현재 자신의 영적 상태를 살피게 합니다.
그렇다고 강사의 경고를 모두 내려놓을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경고의 방향을 안으로 돌리면 훨씬 깊어집니다. ‘적그리스도를 조심하라’는 말은 ‘내 밖에서 적그리스도가 언제 나타나는지 감시하라’는 말에 머물지 않고, ‘내 안에서 주님의 자리를 대신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라’는 말이 됩니다. ‘짐승의 표를 받지 말라’는 경고도 단순히 미래의 어떤 기술이나 제도적 표식을 두려워하는 데 머물지 않고,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지배 아래 들어가지 않도록 살피라는 영적 경고가 됩니다.
그리고 ‘깨어 있으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종말 관련 뉴스와 세계정세를 끊임없이 관찰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다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의지 안에서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proprium에서 올라오는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미움이 올라올 때 그것을 보고, 교만이 올라올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자기 의가 신앙의 옷을 입고 나타날 때 그것을 분별하며,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거기서 돌아서는 것이 영적 깨어 있음입니다.
이렇게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하여 바라보면 2강 2부의 대환란은 갑자기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의 이야기가 됩니다. 적그리스도도, 짐승도, 환난도, 순교도, 추수도 모두 인간의 영적 삶과 맞닿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는 대환란 전에 휴거될 사람인가?’라는 불안이 아니라, ‘지금 내 안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열매를 맺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으로 돌아오면 강사가 처음부터 계속 강조해 온 ‘익은 열매’라는 표현은 매우 좋은 접점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두려움으로 천국에 데려가시는 분이 아니라 사랑과 진리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입니다. 환난도 심판도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주님의 목적은 언제나 구원이며, 악과 거짓을 제거하시는 것도 그 사람 안에 선과 진리가 자리 잡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2강 2부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것은 복잡한 종말의 시간표 자체보다 그 시간표를 통하여 강사가 끊임없이 강조하려는 한 가지입니다.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여기에 한마디를 더합니다. 그 열매는 미래의 대환란이 와야 비로소 익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누군가를 용서해야 하는 자리에서, 자기 욕망을 내려놓아야 하는 자리에서,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해야 하는 자리에서 이미 익어가고 있습니다. 계시록의 거대한 영적 전쟁은 바로 그 작은 선택들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2강3부
사후의 ‘중간 영역’ : 죽은 뒤에도 연단하여 거룩해지는가, 아니면 이미 형성된 내면이 드러나는가
2강 3부에서는 이번 강의의 제목인 ‘영계의 구조와 실상’에 본격적으로 걸맞은 매우 중요한 문제가 등장합니다. 강사는 앞 시간에서 배운 ‘교회 시대 이긴 자’, ‘익은 열매’, ‘광야 연단’을 다시 확인하면서 하나의 질문을 제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익은 열매’, 곧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하여 정결해진 성도가 된 뒤 천국에 들어가도록 섭리하신다고 한다면, 지상에서 그 연단을 다 마치지 못하고 죽은 수많은 성도들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모든 성도가 지상생활 가운데 충분한 광야 연단을 마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사람은 같은 죄를 반복하기도 하고 원망과 불평을 하기도 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에게 곧바로 일종의 ‘캡슐’을 씌우듯 완전한 존재로 바꾸어 천국에 들이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강사는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구원 섭리에 맞지 않는다고 보면서, 지상에서 마치지 못한 연단과 정결의 과정이 사후 ‘영계의 중간 영역’에서도 계속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대목은 지금까지의 강의 가운데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가장 흥미롭게 만나는 지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강사가 이른바 ‘중간 영역’을 말하고, 사후 모든 사람이 곧바로 최종 천국이나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어떤 영적 영역을 통과한다고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강의 후반에는 스베덴보리의 이름까지 직접 언급하면서, 사후 처음 모든 영혼이 들어가는 중간 상태를 스베덴보리가 ‘제1 상태’라고 설명했다는 취지로 소개합니다. 또한 이 중간 영역을 상·중·하의 상태로 설명하면서 성도는 천국 쪽으로, 불신자는 지옥 쪽으로 점차 이동한다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아,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들의 세계(world of spirits)와 거의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실제로 상당히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가면 두 체계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도 있습니다. 바로 그 차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이번 3부의 핵심이겠습니다.
먼저 공통점부터 충분히 인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사람은 죽는 즉시 최종적인 천국 또는 지옥의 공동체에 바로 정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 후 사람은 영으로 깨어나며, 이른바 ‘영들의 세계’에 들어갑니다. 이곳은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는 중간 상태이자 중간 장소처럼 보이는 영역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에서 몇 가지 상태를 거치며 지상생활 동안 외적 체면과 사회적 역할과 습관 때문에 감추어져 있던 속 사람의 실제 성품이 점차 드러납니다. 선한 사람은 자기와 맞지 않는 외적인 것들이 벗겨지면서 더 자유롭게 자기 선을 따라 살게 되고, 악한 사람 역시 외적인 위선과 억제가 제거되면서 자신이 실제로 사랑했던 악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게 됩니다. 그런 다음 각자는 자기 지배적 사랑과 상응하는 천국 또는 지옥의 공동체로 가게 됩니다. 따라서 ‘죽자마자 판결문 하나 받고 즉시 천국이나 지옥으로 보내진다’는 단순한 그림과 달리, 사후에 중간 상태가 있다는 강사의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설명과 분명히 의미 있는 접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강사는 지상에서 ‘광야 연단’을 충분히 마치지 못한 성도가 사후 중간 영역에서 그 연단을 계속 받고 정결해져 ‘익은 열매’가 된 다음 천국에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나중에는 이를 매우 명시적으로 말하면서, 지상에서 온전히 정결하지 못한 성도는 사후 영계에 들어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정결케 하는 영역’을 반드시 통과하고, 그곳에서 지상에서 미처 마치지 못한 광야 연단을 완성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언뜻 스베덴보리의 영들의 세계와 비슷해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는 정확히 같은 의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가장 중요한 원리 가운데 하나는 사람의 지배적 사랑, 곧 그의 삶의 근본 방향은 지상생활에서 형성된다는 것입니다. 사후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도록 새롭게 거듭나는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상에서 형성한 내면이 점점 더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 차이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강사의 설명대로라면 지상에서 충분한 성화를 이루지 못한 선한 신자가 사후에도 추가적인 연단을 받아 아직 이루지 못한 영적 성숙을 완성하는 그림이 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영들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지배적 사랑을 만들어 내는 학교’라기보다 ‘이미 형성된 지배적 사랑이 외적인 것들로부터 분리되어 드러나는 곳’입니다. 물론 선한 영들은 그곳에서 천사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자신이 지상에서 몰랐던 천국의 진리들을 배우며,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합니다. 특히 선한 이방인이나 단순한 신앙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은 주님과 천국에 관한 진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사후에 갑자기 선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지상생활에서 선을 사랑하는 내적 바탕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후의 가르침은 그 사람의 근본 사랑을 바꾸어 악인을 선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을 사랑하던 사람의 이해를 그 사랑에 맞도록 정돈하고 완성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한 가지 예로 생각하면 조금 분명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를 원했지만 교리적으로는 매우 단순했고, 여러 잘못된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고 합시다. 이런 사람은 사후에 진리를 배우면서 자기의 선한 사랑과 맞지 않던 오류를 기꺼이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후에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선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선과 조화되는 진리를 발견하자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자신과 세상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면서도 지상에서는 사회적 체면 때문에 종교인처럼 살았던 사람이 죽은 후 연단과 교육을 받아 주님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외적인 억제가 제거될수록 오히려 그가 실제로 사랑했던 것이 분명해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사후에는 각자가 자기 사랑대로 된다’고 설명하는 핵심입니다.
따라서 강사가 제기한 질문, 곧 ‘이 땅에서 온전히 정결해지지 못하고 죽은 성도는 어떻게 되는가?’에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답하면 조금 다르게 됩니다. 먼저 ‘온전히 정결해졌다’는 말의 의미부터 조정해야 합니다. 인간은 지상에서 모든 유전적 악과 악한 성향이 완전히 제거되어 더 이상 악의 가능성이 없는 존재가 되어야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실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에게 내버려 두어지면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의 모든 선은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옵니다. 중요한 것은 악한 성향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사람이 그것을 자기 생명으로 사랑했는가, 아니면 그것을 죄로 알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면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을 지배적 사랑으로 형성했는가입니다. 지상에서 완벽한 무죄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기본 방향이 주님 쪽으로 돌아서고, 악을 악으로 거절하는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의 ‘익은 열매가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표현은 의도는 이해하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조금 조심해서 풀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거룩함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하리라’는 말씀을 근거로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하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 문제의식 자체는 귀합니다. 천국은 단순히 예수를 입으로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삶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사람을 외적인 선언 하나로 받아들이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천국은 사람의 사랑과 삶의 상태에 따라 들어가는 곳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거룩함’을 인간 안의 모든 악이 제거된 절대적 완전으로 이해하기보다, 사람이 자기에게서 선이 나오지 않음을 인정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며 악을 죄로 거절하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 구별을 하지 않으면 ‘연단’을 매우 위험하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천국에 가려면 아직 이 죄성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았으니 더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한다’, ‘이 땅에서 충분히 고생하지 못하면 사후에라도 고생해서 완성되어야 한다’는 식의 사고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시험은 고통의 양을 채우는 과정이 아닙니다. 거듭남의 시험은 악과 거짓이 일어나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와 충돌할 때 사람이 자유 가운데 주님의 편을 선택하는 영적 싸움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고생했는가?’가 아니라 ‘그 싸움 속에서 어느 사랑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였는가?’입니다. 평생 많은 고난을 겪어도 악을 더욱 사랑하게 될 수 있고, 비교적 평온한 삶 속에서도 매일 작은 선택을 통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강사는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지나 요단강을 건널 때 법궤를 따라 물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을 정도로 연단된 상태의 모형으로 설명합니다. 이 장면의 기본 직관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판단보다 주님의 말씀을 신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모든 성도가 사후까지 동일한 광야 코스를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는 고정된 영적 교육과정으로 읽기보다, 말씀 속의 광야와 요단과 가나안이 인간의 거듭남에서 일어나는 서로 다른 영적 상태를 표상한다고 봅니다. ‘40’ 역시 문자적 연단 기간이라기보다 시험의 충만한 상태를 나타내며, ‘요단’은 교회와 천국의 선으로 들어가는 경계를 표상하는 식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모형이 자연적 시간표로 바뀌는 순간과 영적 상응으로 읽히는 순간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3부에서 특별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강사가 자신의 체계 안에서 매우 진지한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싼 은혜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가 실제로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단지 예수를 믿었다는 이유 하나로 아무 변화 없이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면 하나님의 공의를 너무 가볍게 만든다는 문제의식입니다. 이것은 충분히 존중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스베덴보리 역시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매우 강하게 비판합니다. 입술의 고백이나 교리적 확신만으로 사람의 지배적 사랑과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그 신앙은 살아 있는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강사의 ‘값싼 은혜’에 대한 경계와 스베덴보리의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에 대한 비판은 깊은 곳에서 만납니다.
다만 그 해결 방식이 다릅니다. 강사는 ‘그러므로 지상에서 연단을 마치지 못하면 사후 중간 영역에서 나머지 연단을 마쳐야 한다’고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러므로 지상생활 동안 자유 가운데 악을 죄로 알고 피하고 선을 행하여 지배적 사랑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나아갑니다. 즉 전자는 사후 연단의 연속성을 강조하고, 후자는 지상생활이 영원한 삶의 근본 방향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장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후 중간 상태는 분명 있지만, 그것은 지상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거듭남을 새롭게 계속하는 두 번째 기회라기보다 지상에서 형성된 것을 밝히 드러내고 정돈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만일 사후에도 결국 충분한 연단을 받아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지상에서의 자유로운 선택이 갖는 엄중함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 사경회의 강사는 전혀 그런 의도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상에서 반드시 거룩해져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강조합니다. 그러나 체계를 논리적으로 끝까지 밀어가면 ‘지상에서 못 끝낸 성화는 사후에 완성된다’는 일종의 사후 성화론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는 이 부분이 다릅니다. 사후에는 사람의 가장 내적인 의지 방향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방향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오늘 내가 악을 죄라고 인정하는가, 오늘 진리를 따라 사는가, 오늘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선택하는가가 내 영원한 생명의 형성에 실제로 참여합니다.
그렇다고 스베덴보리의 영들의 세계가 단순한 대기실인 것도 아닙니다. 상당히 많은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의 첫 상태에서는 지상생활과 비슷한 외적인 삶이 어느 정도 계속되고, 다음 상태에서는 외적인 것들이 벗겨지면서 속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며, 선한 사람들에게는 천국 생활에 필요한 가르침과 준비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강사가 후반부에서 스베덴보리의 ‘제1 상태’를 언급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과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제1 상태’만 떼어내어 자신이 말하는 사후 연단 체계를 곧바로 스베덴보리와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세 상태 전체를 함께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두 번째 상태에서 사람의 내면이 드러난다는 원리와, 세 번째 상태의 교육이 주로 선한 영들에게 천국에 들어갈 준비로 주어진다는 원리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강의에서 말하는 ‘중간 영역의 상층부·중간층·하층부’와 스베덴보리의 영들의 세계를 그대로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것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처음 사후에 모든 영혼이 중간층으로 들어간 뒤 성도는 상층부로, 불신자는 하층부로 움직이며, 아직 연단이 필요한 성도는 그 영역에서 정결의 과정을 거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영들의 세계에는 천국과 가까운 상태와 지옥과 가까운 상태가 있고, 사람들은 자신의 내적 사랑에 따라 서로 다른 사회로 모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의 고정된 3층 교육 시설처럼 보는 것과는 다릅니다. 영계의 공간은 본질적으로 내적 상태의 외관이므로, ‘위·가운데·아래’ 역시 궁극적으로 사랑과 진리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공간적 구조를 지나치게 자연계 건물의 층처럼 이해하면 영계의 본질을 놓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오히려 강사의 ‘중간 영역’ 개념에서 아주 귀하게 살릴 수 있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인간의 영원한 상태는 생각보다 훨씬 정교하고 질서 있게 다루어진다는 직관입니다. 죽자마자 모든 것이 기계적으로 결정되는 단순한 세계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각 사람의 실제 내면을 완전히 드러내시고 그의 자유와 사랑에 정확히 맞는 질서로 인도하십니다. 이 직관은 스베덴보리의 영계 설명과 깊이 만납니다. 누구도 외적인 신앙고백 하나 때문에 천국에 밀어 넣어지거나, 교리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만으로 지옥에 던져지지 않습니다. 각 사람의 내적 사랑과 삶이 충분히 드러나고, 그와 상응하는 곳으로 가게 됩니다. 주님의 심판은 그만큼 정밀하고 공정합니다.
따라서 ‘공의’를 이해하는 방식도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강사는 죄가 남아 있는 사람을 곧바로 천국에 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와 맞지 않는다고 보면서 사후 연단을 요청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하나님의 공의를 ‘모든 죄를 고통으로 갚아야 하는 형벌적 균형’보다 ‘각 사람이 자유롭게 형성한 사랑과 정확히 상응하는 질서로 인도되는 것’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아직 많은 약점과 무지를 가지고 있어도 그의 지배적 사랑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다면, 주님께서는 그에게서 천국과 맞지 않는 외적인 것들을 벗겨 내고 가르치시며 그의 선한 사랑이 자유롭게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것은 죄를 눈감아 주는 값싼 은혜가 아니라, 그의 실제 내적 생명을 정확히 보시는 신적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 점은 우리에게 큰 위로이기도 합니다. ‘나는 아직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완전히 거룩하지 못한데 어떻게 되는가?’라는 불안에 빠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안일해져도 안 됩니다. 질문은 ‘나는 완벽한가?’가 아니라 ‘나는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가?’입니다.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변호하고 사랑하는가, 아니면 주님 앞에서 죄라고 인정하며 싸우는가? 넘어졌을 때 ‘어쩔 수 없는 내 본성이지’라고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다시 일어나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가?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는가, 아니면 자기만 높아지기를 원하는가? 이러한 반복되는 선택들 속에서 지배적 사랑이 형성됩니다.
이 점에서 강사 자신이 ‘이긴 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그렇게 되려면 자기 소유를 모두 포기해야 한다는 생각에 목소리가 작아졌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한 장면은 매우 인간적이고 인상적입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소유를 내려놓을 힘도 주시고, 내려놓은 자리를 더 귀한 것으로 채워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강의의 추상적 체계보다 오히려 더 귀하게 들립니다. ‘이긴 자’라는 높은 단계를 쉽게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자기 안에 아직 놓지 못하는 것이 많음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자기 인식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거듭남의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소유를 다 포기해야 한다’를 외적 소유의 완전한 상실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깊은 포기는 proprium의 포기입니다. 돈을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자기 생명의 중심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고, 아무 재산이 없어도 돈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이긴 자’는 외적으로 아무것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뜻과 자기 공로와 자기 지혜를 주님보다 높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엇을 소유했느냐보다 무엇이 나를 소유하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2강 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지상에서 광야 연단을 다 마치지 못하고 죽은 성도들이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하여, 사후 영계의 ‘중간 영역’에서 지상에서 미처 마치지 못한 정결과 연단을 계속한 뒤 익은 열매가 되어 천국에 들어간다고 설명하는 강사의 견해는 죽음 직후 곧바로 모든 사람이 최종 천국과 지옥으로 배치되는 것이 아니라 중간 상태를 거친다는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영들의 세계’와 매우 흥미로운 접점을 가지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중간 상태를 지상에서 미완성된 거듭남을 사후에 새로 완성하는 제2의 성화 과정으로 보기보다, 지상생활 동안 자유 가운데 형성된 지배적 사랑과 속 사람의 실제 상태가 외적인 것들로부터 벗겨져 드러나고, 선한 영은 이미 가지고 있던 선한 사랑과 조화되는 진리를 배우고 정돈되어 천국에 준비되며, 악한 영은 자신이 실제로 사랑했던 악이 드러나 그와 상응하는 곳으로 향하게 되는 분별과 계시의 상태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번 3부는 어쩌면 이 사경회 전체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해설하는 작업에서 특별히 중요한 지점이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두 체계가 주로 성화, 연단, 종말, 14만 4천, 휴거 같은 주제에서 만나고 갈라졌지만, 이제는 강사가 직접 ‘영계’와 ‘중간 영역’을 설명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영역에 아주 가까이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비슷하다’는 것만으로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특히 중요합니다. 용어가 비슷해도 그 구조와 목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차이를 분명히 하면 강사의 문제의식도 더 잘 살릴 수 있습니다. 강사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와 삶을 대충 처리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로 그 사람의 실제 사랑과 삶이 아무 의미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도 정확히 같은 방향에서 신앙만의 구원을 거부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방식이 ‘사후에 추가 고난을 부과하여 미완성 성화를 완성한다’기보다, 지상에서 인간이 자유롭게 형성한 실제 사랑을 사후에 완전히 드러내시고, 그 사람을 그 사랑과 정확히 상응하는 영원한 질서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상생활은 더욱 귀중해집니다. ‘죽고 나서 나머지 연단을 받으면 되지’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 우리가 자유 가운데 사랑의 방향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오늘 용서하는 것, 오늘 정직을 선택하는 것, 오늘 자기 의를 내려놓는 것, 오늘 말씀을 알고만 있지 않고 행하는 것이 영원과 연결됩니다. 사후의 영들의 세계는 지금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대신 해 주는 곳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며 살아왔는지를 감출 수 없이 보여 주는 곳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계의 구조와 실상’을 공부하는 가장 좋은 목적은 죽은 뒤 어디를 거쳐 어디로 가는지를 지도처럼 외우는 데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곳에서 내 속 사람이 그대로 드러난다면, 나는 지금 어떤 속 사람을 형성하며 살고 있는가?’를 묻는 데 있습니다. 바로 그 질문이 영계에 관한 지식을 호기심에서 거듭남의 진리로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이번 강의는 앞으로 상당히 흥미롭고 중요한 해설이 이어질 것으로 보입니다.
2강4부
중간 영역의 상층부, 중간층, 하층부와 사후의 세 상태 : 놀라운 접점과 결정적인 차이
2강 4부에서는 강사가 앞에서 개괄적으로 제시했던 ‘영계의 중간 영역’을 훨씬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강의 전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강사는 이 중간 영역 때문에 사실상 ‘영계의 구조와 실상’이라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비중을 둡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중간 영역은 ‘심판대가 있는 영역’이며, 다시 ‘상층부’, ‘중간층’, ‘하층부’의 세 부분으로 나뉩니다. 사후 처음에는 모든 영혼이 중간층에 들어오고, 이후 성도는 상층부 쪽으로, 불신자는 하층부 쪽으로 이동하며, 상층부에서는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정결과 연단이, 하층부에서는 지옥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가 이루어진다는 구조입니다. 그리고 강사는 이 설명 가운데 스베덴보리를 직접 거론하면서 사후 처음의 상태를 ‘제1 상태’, 그 다음 선과 악이 분리되는 상태를 ‘제2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강사가 말하는 ‘중간 영역’과 스베덴보리의 ‘영들의 세계’는 상당히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중간 상태가 있다는 것, 죽은 사람이 즉시 최종 천국이나 지옥에 정착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과정을 거친다는 것, 그 과정에서 선에 속한 사람과 악에 속한 사람이 점차 분리된다는 것 등은 실제로 스베덴보리가 ‘천국과 지옥’에서 매우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강의를 처음 듣는 스베덴보리 독자라면 상당히 놀랄 수 있습니다. 일반적인 개신교 설교에서는 거의 듣기 어려운 ‘사후의 중간 상태’를 이곳에서는 상당히 구체적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강사가 스베덴보리의 이름을 숨기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모든 영혼이 사후 처음 들어가는 중간층을 설명하면서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제1 상태라고 했다’고 말하고, 이후 선에 속한 자들과 악에 속한 자들이 분류되는 상태를 ‘사후의 제2 상태’와 연결합니다. 따라서 이번 부분에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외부에서 가져다가 강사의 체계에 억지로 대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강사 자신의 설명 안에 이미 스베덴보리가 하나의 참고 자료로 들어와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세밀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같은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두 체계가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영들의 세계’는 천국도 지옥도 아닙니다. 천국과 지옥 사이에 있으며, 대부분의 사람이 죽은 뒤 처음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사이’라는 말을 자연계의 지리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영계에서 장소는 상태와 상응합니다. 따라서 천국과 지옥 ‘사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사람이 아직 자기의 최종적인 내적 상태에 따라 완전히 천국적 또는 지옥적 공동체에 결합되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사람은 그곳에서 지상에서 입고 있던 외적인 인격이 벗겨지고 속 사람의 실제 사랑이 드러나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세 상태’를 정확하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겉 사람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막 죽은 뒤에는 지상에서의 외적 인격이 상당 부분 남아 있기 때문에 지상에서 알던 모습과 비슷하게 행동합니다. 사회적 예절, 체면, 습관, 말투, 종교적 외형 등이 어느 정도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래서 이 단계에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외적으로 쉽게 구별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속 사람의 상태’입니다. 외적인 억제와 가면이 점차 벗겨지면서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드러납니다. 셋째는 ‘교육의 상태’인데, 이것은 특히 천국을 위해 준비되는 선한 영들에게 해당합니다. 그들은 천국의 진리와 질서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 자신들의 선한 사랑과 조화되는 천국 사회로 인도됩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중간층 → 상층부 또는 하층부’라는 구조와 스베덴보리의 ‘제1 상태 → 제2 상태 → 제3 상태’를 그대로 겹쳐 놓으면 안 됩니다. 하나는 주로 공간적 층위로 설명되고 있고, 다른 하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내적 상태가 변화하고 드러나는 순서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공간적 외관으로 나타나므로 둘 사이에 일정한 유사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1 상태가 중간층이라는 장소이고 제2 상태가 상층부나 하층부라는 장소다’라고 단순히 등식화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지나치게 공간화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 사람이 ‘위로 간다’거나 ‘아래로 간다’는 것은 단순한 수직 이동이 아닙니다. 사랑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과 상응하는 천국 공동체에 가까워지고,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랑과 상응하는 지옥 공동체에 가까워집니다. 그래서 영계의 공간은 내적 상태의 외적 표현입니다. 서로 사랑이 비슷하면 가까이 보이고, 사랑이 다르면 멀리 보입니다. 이것이 자연계 공간과 영계 공간의 근본적인 차이입니다.
강사는 특히 ‘교회 시대 이긴 자’ 14만 4천은 이 중간 영역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이유는 그들이 이미 지상에서 광야 연단을 모두 마치고 ‘익은 열매’가 되었으므로 더 이상 연단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 밖의 모든 성도는 중간 영역의 상층부에서 남은 연단을 받고 정결해져 ‘영적 할례’를 받은 다음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사의 전체 구원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주장입니다. 중간 영역은 그에게 단순히 사후의 대기 장소가 아니라 지상에서 미완성된 성화를 완성하는 곳입니다.
바로 여기서 스베덴보리와 결정적으로 갈라집니다. 앞의 3부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이 점은 이번 4부에서 더욱 분명히 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들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지상에서 덜 거룩해진 만큼 사후에 추가 연단을 받아 거룩함을 채우는 곳’이 아닙니다. 사람의 지배적 사랑은 지상생활에서 형성됩니다. 사후에는 그 근본 방향이 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드러납니다. 악을 지배적으로 사랑한 사람이 영들의 세계의 교육과 연단을 통하여 선을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으로 개조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을 지배적으로 사랑했지만 많은 무지와 오류와 불완전성을 가지고 죽은 사람은 사후에 그것들을 벗고 배우며 천국에 맞게 준비될 수 있습니다.
이 구별은 ‘정결’이라는 말의 의미를 새롭게 보게 합니다. 선한 사람이 사후에 정결하게 된다는 표현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체계와 완전히 낯선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선한 영에게도 천국과 맞지 않는 외적인 것들이 제거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지상생활에서 잘못 배운 생각이나 자연적 습관, 그 사람의 내적 선과 일치하지 않는 외적 요소들이 벗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악한 지배적 사랑 자체를 선한 사랑으로 바꾸는 거듭남과는 다릅니다. 이미 속에 있는 선이 자유롭게 드러날 수 있도록 그것과 맞지 않는 외적인 것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지상에서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정직하게 살았지만 교리적으로는 ‘하나님은 분노하시는 분이며 사람의 죄 때문에 만족하실 때까지 형벌을 요구하신다’는 잘못된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 보겠습니다. 그의 머리에는 잘못된 신학이 있을 수 있지만 마음의 깊은 곳에는 자비와 선을 사랑하는 생명이 형성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사후에 주님의 참된 성품을 배우게 되면 그는 그 잘못된 관념을 기쁘게 버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새로운 진리가 그의 이미 형성된 선한 사랑과 더 잘 맞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후의 교육입니다. 새로운 사랑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선한 사랑에 맞게 이해를 바로잡는 것입니다.
반대로 평생 자기 지배와 명예를 사랑하면서 종교를 그 수단으로 사용한 사람이 죽은 뒤 ‘당신은 잘못 살았으니 이제 여기서 연단받고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라는 교육을 받아 천국적 사랑의 사람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에서는 체면 때문에 겸손하게 행동했을 수도 있지만 외적인 억제가 벗겨지면 오히려 지배욕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제2 상태’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일입니다. 속 사람의 상태가 밖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제2 상태’를 언급하면서 선과 악이 갈라진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우면서도 그 의미를 조금 수정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선과 악이 갈라지는 것은 어떤 외부 심판자가 ‘당신은 이쪽, 당신은 저쪽’이라고 임의로 분류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 사람의 속 사람이 드러나면서 서로 같은 사랑을 가진 사람들끼리 자연스럽게 결합하기 시작합니다. 선은 선을 찾고, 악은 악을 찾습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진리의 빛을 기뻐하고, 거짓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빛을 불편해합니다. 결국 각자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따라 자기 공동체로 갑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마지막 심판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심판은 주님께서 사람의 자유를 무시하고 외부에서 운명을 강제로 정하시는 사건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신적 진리의 빛 가운데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했는지가 완전히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그 빛을 사랑하는 사람은 빛을 향하고, 그 빛을 미워하는 사람은 스스로 그것을 피합니다. 그래서 천국과 지옥은 최종적으로 사랑의 선택과 상응하는 질서입니다.
강사는 이어 ‘상급’에 관한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합니다. 상급은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만 받을 수 있으며, 사후 중간 영역의 상층부에서 연단을 받는 동안에는 상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육체를 입고 살아 있는 시간이 ‘은혜의 시간’, ‘상급을 쌓는 기간’이라고 강조합니다. 심지어 사경회 자리에 앉아 말씀을 듣고 인내하는 것까지 ‘인내의 열매를 맺으며 상급을 쌓는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사후 상층부에서 받는 연단은 오직 정결을 위한 것이므로 거기에는 별도의 상급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에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귀하게 받을 부분과 조금 다르게 보아야 할 부분이 함께 있습니다. 먼저 ‘지상생활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강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자연계에서의 삶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이곳에서 사람이 자유 가운데 선과 악을 선택하고, 그 선택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면서 자신의 영원한 인격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자연계는 영원한 삶의 방향이 형성되는 놀랍도록 중요한 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이 은혜의 시간’이라는 강사의 권면은 충분히 깊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급을 쌓는다’는 표현은 조심해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상급은 사람이 선행을 많이 해 두었다가 사후에 그 공로에 비례하여 받는 일종의 영적 급여가 아닙니다. 선 자체 안에 이미 천국의 기쁨이 들어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웃에게 쓰임이 되는 것 자체가 기쁨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상급의 본질입니다. 따라서 ‘내가 지금 이것을 참으면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을 것이다’라는 자기 공로의 계산이 중심이 되면 오히려 선의 천국적 성격이 훼손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섬세합니다. 주님께서는 분명 말씀에서 ‘상’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천국적 사람은 상을 목적으로 선을 행하지 않습니다.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행합니다. 그리고 그 선을 사랑하는 즐거움 자체가 주님께서 주시는 상이 됩니다. 어머니가 사랑하는 아이를 돌보면서 ‘내가 오늘 세 시간 돌보았으니 세 시간분의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계산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사랑은 행위 자체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천국의 모든 쓰임도 그러합니다.
따라서 사경회 자리에 오래 앉아 말씀을 듣고 인내하는 것도 그 자체로 공로가 쌓인다고 보기보다, 그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삶의 선으로 이어질 때 영원한 의미를 갖는다고 보는 편이 좋겠습니다. 세 시간을 앉아 있어도 마음으로는 계속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자기 의를 키울 수 있고, 짧은 말씀 하나를 듣고 실제로 미워하던 사람을 용서할 수도 있습니다. 천국은 시간의 양을 계산하기보다 그 시간 속에서 형성된 사랑의 질을 봅니다.
이것은 ‘지상에서만 상급이 있다’는 강사의 설명을 더욱 깊게 바꾸어 줍니다. 지상생활이 중요한 이유는 사후에 받을 보상 점수를 축적할 수 있는 유일한 기간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영적인 것이 자연적인 행위로 내려와 실제 삶이 될 수 있는 특별한 조건이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생각과 의도가 실제 행동을 통하여 고정됩니다.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로 자기 시간과 돈을 내어 이웃을 돕는 것은 다릅니다. 용서해야 한다고 아는 것과 실제로 상처 준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행동이 될 때 사람의 의지 안에 더욱 깊게 새겨집니다. 이것이 지상생활의 독특한 중요성입니다.
강사가 말하는 ‘마귀에 의한 연단’도 이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우리가 연단받을 때 나타나는 환경과 조건들의 배후에서 마귀가 역사하며, 하나님께서는 섭리 가운데 그것을 허용하셔서 성도들이 정결해지도록 하신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시험’ 이해와 의외로 상당히 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영적 시험은 지옥의 영들이 사람 안의 악과 거짓을 자극하고 공격하면서 일어나는 실제적인 영적 싸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악을 일으키시는 분이 아니라 그것을 허용하시면서 그 시험을 사람의 거듭남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고난과 불편을 곧바로 마귀가 만들어 낸 ‘연단 프로그램’으로 단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자연계에는 인간의 자유 때문에 생기는 결과도 있고, 자연질서에 따른 사건도 있으며,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에 겪는 고통도 있습니다. 주님의 섭리는 그 모든 것을 다스리시지만 그렇다고 모든 고난의 직접 원인이 지옥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고난을 누가 보냈는가?’를 끝없이 추적하는 것보다,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떤 영적 선택을 하느냐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미움을 선택할 것인가, 주님의 도움으로 악에 악으로 대응하지 않을 것인가가 더 중요합니다.
이번 강의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강사가 ‘영계의 구조’를 매우 공간적으로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천국의 변두리, 교육받는 낙원, 열두 문, 중간 영역의 상층부·중간층·하층부 등이 마치 실제 지리적 지도처럼 제시됩니다. 어떤 입신 체험자의 기록도 이러한 구조를 뒷받침하는 자료로 사용됩니다. 강의에서는 천국의 변두리 안쪽에 ‘교육받는 낙원’이 있고, 수많은 성도들이 그곳에서 하나님 보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교육을 받는다는 설명도 소개합니다.
여기에서 스베덴보리의 영계 설명과 매우 중요한 차이를 다시 확인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의 산과 골짜기, 도시와 집, 길과 문, 정원과 낙원 등을 실제로 보았다고 기록합니다. 따라서 그는 영계를 단순한 추상적 정신세계로 말하지 않습니다. 영계는 그곳에 있는 사람에게 자연계보다 오히려 더 생생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공간적 형상은 내적 상태와 상응하여 나타납니다. 그래서 영계의 지도를 자연계 지도처럼 그려 놓고 ‘여기에서 몇 킬로미터 가면 이곳이고 그 위층에는 이것이 있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영계 체험담을 대할 때 특히 유용한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영계에서 산을 보았다고 해서 ‘천국에는 실제 지질학적 산이 있다’고만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산이 왜 나타났는지, 그 산이 어떤 사랑의 상태와 상응하는지를 봅니다. 문을 보았다면 그 문을 통과한다는 것이 어떤 진리를 통해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는지 살펴봅니다. 흰옷을 보았다면 그것이 어떤 진리를 표상하는지 봅니다. 영계의 형상을 ‘상응’이라는 언어로 읽을 때 체험은 단순한 관광 보고서가 아니라 영적 상태에 관한 계시가 됩니다.
그러므로 강의에서 제시하는 ‘상층부·중간층·하층부’도 그 공간적 배치를 그대로 확정하기보다 그 안에 담긴 영적 직관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 자기의 실제 사랑에 따라 점차 천국 쪽 또는 지옥 쪽으로 분리된다는 직관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와 매우 가깝습니다. 다만 그 이동은 ‘심판관이 선한 사람을 엘리베이터에 태워 위층으로 올리고 악한 사람을 아래층으로 내려보내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같은 것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천국적 사랑은 천국을 향하고, 지옥적 사랑은 지옥을 향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심판’ 자체의 이미지도 달라집니다. 자연적 사고에서는 거대한 법정이 있고 하나님께서 판사석에 앉아 각 사람의 기록을 검토한 다음 ‘천국’ 또는 ‘지옥’이라는 판결을 내리는 장면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는 심판이 훨씬 유기적입니다. 신적 진리의 빛이 비추면 그 사람의 실제 상태가 드러납니다. 그러면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것과 같은 사람들에게 끌리고, 결국 자기에게 가장 자유롭고 행복하게 느껴지는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문제는 악한 사람에게 가장 행복하게 느껴지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아무도 지옥에 던져 넣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과도 연결됩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천국으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천국의 사랑을 미워하는 사람에게 천국은 행복한 곳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서로를 사랑하며 섬기는 천국의 질서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와 같은 사랑을 가진 자들에게 가려고 합니다. 지옥은 주님께서 복수심으로 만들어 놓은 고문실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분리된 사랑들이 자기 질에 따라 모인 상태입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중간 영역의 하층부는 지옥에 들어갈 준비를 하는 장소’라는 표현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렇게 조금 바꾸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사람을 지옥에 적합하도록 악하게 훈련시키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선한 모습이 벗겨지면서 이미 지상에서 형성된 악한 사랑이 완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점점 자기와 같은 악을 사랑하는 영들과 결합하고, 마침내 그에게 맞는 지옥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반대로 선한 사람의 경우도 천국에 ‘합격하기 위한 고통스러운 보충수업’을 받는다고만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의 내적 선과 맞지 않는 거짓과 외적인 습관들이 벗겨지고, 천국의 질서에 관한 진리를 배우면서 자기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선을 더욱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참된 자기 자신이 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 ‘참된 자기’의 선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proprium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연적 인간은 ‘내가 선하다’, ‘내가 진리를 안다’, ‘내가 거룩해졌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천국적 인간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선하지 않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점점 깊이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자기 공로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공로 의식이 줄어듭니다. ‘나는 광야 연단을 이만큼 통과했으니 높은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셨다’가 됩니다.
이것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연단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금식하고, 불편을 견디고, 오랜 시간 말씀을 듣고, 자기 욕망을 절제하는 훈련 자체는 충분히 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매가 ‘나는 이 정도 훈련을 받은 사람’이라는 영적 자부심이라면 그 훈련은 오히려 proprium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그 과정을 통해 자기의 약함을 더 깊이 보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이 줄어들며, 주님의 자비를 더욱 의지하고, 작은 사람에게 더욱 친절해진다면 그 연단은 실제 거듭남의 쓰임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수도적 훈련의 진실성은 고난의 강도보다 그 결과 나타나는 사랑의 질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강사가 강조하는 ‘이 땅에서의 시간이 은혜의 시간’이라는 말은 더욱 깊은 울림을 갖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 동안 중요한 것은 천국의 등급을 높이기 위한 점수를 모으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사랑을 형성하는 시간입니다. 진리를 듣고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고, 악이 올라올 때 그것을 죄로 인정하여 거절할 수 있으며, 선을 알고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 자유를 통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십니다.
2강 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후 모든 영혼이 처음 들어가는 중간 영역을 상층부·중간층·하층부로 구분하고, 중간층을 스베덴보리의 사후 제1 상태와, 이후 선과 악이 분리되는 과정을 제2 상태와 연결하며, 성도는 상층부에서 지상에서 미처 마치지 못한 연단과 정결을 받아 천국으로, 불신자는 하층부에서 지옥을 위한 준비를 거친다고 설명하는 강사의 영계 구조는 죽음 직후 곧바로 최종 천국과 지옥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중간 상태에서 내적 실상이 드러나고 선과 악이 분리된다는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영들의 세계’와 놀라운 접점을 가지지만,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제1·제2·제3 상태는 고정된 공간적 세 층이라기보다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실제 사랑이 드러나고, 선한 영은 그 사랑과 조화되는 진리를 교육받아 천국에 준비되는 영적 상태의 진행이며, 특히 사후의 과정은 지상에서 형성되지 않은 새로운 지배적 사랑을 만들어 내는 제2의 거듭남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사랑을 드러내고 정돈하여 각자가 그 사랑과 상응하는 영원한 공동체로 들어가게 하는 과정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번 4부에서 특히 기억할 만한 것은 어쩌면 ‘위로 가느냐 아래로 가느냐’보다 ‘무엇을 사랑하느냐’일 것입니다. 영계의 구조를 아무리 상세히 알아도 그것만으로 천국에 가까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상층부와 중간층과 하층부의 구조를 정확하게 그릴 수 있어도 자기 안의 미움과 자기 의와 지배욕을 사랑한다면 그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반대로 영계의 구조를 거의 몰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가 아는 진리에 따라 정직하게 살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기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 안에는 이미 천국과 상응하는 것이 형성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계의 구조와 실상’이라는 공부의 가장 깊은 목적은 결국 영계 지도를 그리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나는 죽은 뒤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깊은 질문, 곧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를 우리에게 돌려줍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과 지옥은 죽은 뒤 갑자기 주어지는 낯선 운명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사랑이 영원한 형태로 드러난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을 붙들 때, 강사가 말하는 ‘지금이 은혜의 시간’이라는 권면도 두려움의 언어를 넘어 매우 실제적인 거듭남의 언어가 됩니다.
2강5부
‘교육받는 낙원’과 영적 할례 : 천국은 들어간 뒤에도 배워 가는 나라인가
2강 5부에서는 앞에서 다룬 ‘중간 영역’을 지나 이제 강사가 말하는 ‘교육받는 낙원’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강사의 영계 도표에서는 천국이 삼층 구조로 되어 있고 그 아래에 ‘교육받는 낙원’이 자리합니다. 강사는 이곳을 단순한 대기소로 보는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엄연히 천국에 속한 곳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천국에서 성도들이 받는 상급에는 지혜와 인격, 주택과 환경, 옷과 세마포, 면류관, 사랑 등이 있으며, 1층천보다 2층천, 2층천보다 3층천에 속한 성도들이 더 큰 상급을 받는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천국의 질서를 설명한 뒤 ‘교육받는 낙원’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합니다.
강사의 설명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교육’이라는 개념입니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해서 모든 것을 즉시 다 아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사는 교육받는 낙원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하면서, 특히 사람의 ‘사상’이 바뀌는 데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람이 평생 형성해 온 생각과 관념이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으므로 사후에도 천국적 질서에 맞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볼 때 상당히 귀하게 받을 수 있는 부분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후에 천국으로 준비되는 선한 영들이 교육받는 상태를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제3 상태는 특히 천국에 들어갈 선한 영들의 ‘교육의 상태’입니다. 사람이 선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지상에서 천국의 모든 진리를 정확히 알고 죽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된 교리를 배웠을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종교에 관한 지식이 거의 없었을 수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주님과 천국에 관하여 매우 단순한 관념만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지상에서 양심에 따라 선을 사랑하고 진실하게 살았다면, 사후에는 그 선한 사랑에 맞는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위해 준비되는 사람들에게는 실제 교육이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사상이 바뀌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교육이 길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히 깊은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는 순간 갑자기 전지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가지고 있던 잘못된 관념과 제한된 지식이 단번에 모든 천국적 지혜로 대체되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은 인간의 인격을 소멸시키는 사건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인격이 영적 형태로 계속 살아가는 사건이므로, 사람은 여전히 배우고 이해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앞선 3부와 4부에서 확인한 구별을 유지해야 합니다. ‘배울 수 있다’는 것과 ‘지배적 사랑 자체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교육은 악을 사랑하던 사람을 교육하여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꾸는 과정이 아닙니다. 선을 사랑했으나 진리를 충분히 알지 못했던 사람에게 그 선과 어울리는 진리를 가르치는 과정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후 교육은 새로운 심장을 만드는 교육이라기보다 이미 주님을 향하고 있는 심장에 맞는 눈을 열어 주는 교육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면 ‘천국에서도 배운다’는 말의 의미가 매우 아름다워집니다. 천국은 모든 지식이 정지된 완성품의 세계가 아닙니다. 천사들도 영원히 지혜 안에서 성장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무한하시고, 유한한 피조물인 천사는 그 무한하신 분의 선과 진리를 영원히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완전함은 ‘더 이상 성장할 것이 없음’이라는 정적인 완전함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영원히 더 충만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질서 안에 있다는 동적인 완전함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천국에 대해 갖는 관념을 상당히 바꾸어 놓습니다. 천국을 ‘모든 공부가 끝난 곳’,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는 곳’, ‘그저 영원히 찬송만 하는 곳’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의 천국은 끊임없는 쓰임과 배움과 지혜의 증가가 있는 나라입니다. 다만 그 배움은 지상에서처럼 시험을 통과하여 학위를 얻거나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기 위한 배움이 아닙니다. 더 깊이 사랑하고 더 온전한 쓰임을 이루기 위한 배움입니다. 지혜가 사랑을 섬기고, 진리가 선을 섬기는 교육입니다.
강사는 이 ‘교육받는 낙원’을 어떤 이들은 ‘변두리’라고 표현한다고 소개하면서, 영원한 천국 곧 새 예루살렘 성이 열리면 이 교육받는 낙원은 사라지는 임시적 영역이라고 설명합니다. 강사의 종말론적 체계에서는 구약 시대, 교회 시대, 천년왕국 시대까지 시온산이라는 천국 구조가 유지되다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천국이 시작되면 새 예루살렘 성이 천국의 수도가 되고, 그 이전의 임시적 구조들이 사라집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상당히 다르게 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미래에 건설될 천국의 수도 이름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의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이전 교회의 마지막 심판 후에 세우시는 ‘새 교회’를 표상합니다. 특히 그 교회의 교리, 곧 주님과 말씀과 천국적 삶에 관한 새롭고 참된 이해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은 천국 어딘가에 존재하던 거대한 도시가 지리적으로 이동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적 진리와 교회의 질서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마찬가지로 ‘시온산’도 천국의 수도가 어느 시대에는 시온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새 예루살렘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된다는 식으로 읽지는 않습니다. 말씀에서 ‘시온’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중심으로 하는 천적 교회를, ‘예루살렘’은 주로 진리와 교리의 측면에서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시온과 예루살렘은 영계 지도상의 두 지명이기 전에 서로 다른 영적 의미를 담고 있는 말씀의 표상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계시록의 상응적 형상이 자연계와 같은 지리적 구조로 굳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5부에서 더욱 중요한 내용은 ‘교육받는 낙원 입구’에서 이루어진다고 강사가 설명하는 ‘영혼의 영적 할례’입니다. 강사는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산에서 할례를 받고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을 모형으로 보면서, 모든 성도 역시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영적인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지상에서 이미 ‘익은 열매’가 된 사람은 이 과정을 지상에서 마쳤지만, 그렇지 못한 성도는 중간 영역에서 연단을 받은 뒤 교육받는 낙원 입구에서 영적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할례’라는 성경의 표상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할례의 속뜻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할례는 단순히 육체의 포피를 제거하는 의식이 아니라, 영적으로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더러운 사랑들을 제거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특히 사람의 자연적 사랑 가운데 천국적 사랑과 결합할 수 없는 것을 제거하여 사람이 주님과 결합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사가 할례를 ‘죄성이 제거되는 것’과 연결하는 기본 방향에는 상당히 중요한 영적 직관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할례받는 장소’가 영계의 어느 특정 입구에 실제 시설처럼 존재하고, 그곳을 통과하면서 모든 성도의 죄성이 한꺼번에 제거된다고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적 해석과는 다릅니다. 말씀에서 ‘할례’는 거듭남 전체에서 계속 일어나는 내적 정화의 표상입니다. 사람이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나온 악을 죄로 알고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할 때마다 영적인 할례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할례는 죽은 뒤 어느 장소에서 단 한 번 행해지는 영적 수술이라기보다 지상에서 거듭나는 동안 계속되는 삶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 더 깊습니다.
강사는 교육받는 낙원에는 ‘죄성을 가지고는 들어가지 못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그 입구에서 할례를 받아 죄성이 ‘굴러 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굴러 떨어진다’는 표현은 여호수아의 길갈 사건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악은 사람에게서 어떤 물질을 떼어내듯 완전히 추출되어 사라지는 것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악의 성향은 남아 있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억제하시고 사람이 그 악에서 떠나도록 하십니다. 사람은 영원히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죄성이 완전히 뽑혀 나간다’는 그림은 조심해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일 그것이 ‘이제 이 사람에게서는 악의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이라면 스베덴보리의 인간론과 맞지 않습니다. 천사조차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가 천사인 것은 자기 안에 독립적인 거룩함을 소유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자기의 proprium에서 나오는 악을 주님께서 억제하시도록 허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천국의 겸손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만일 천사가 ‘나는 이제 죄성이 제거되었으므로 본질적으로 거룩한 존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그 생각 자체가 천국적 상태와 어긋납니다. 천국의 천사들은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선하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자연계의 사람보다 훨씬 명료하게 압니다. 그래서 더 높은 천국일수록 자기 공로가 커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주님 앞에서 더욱 낮추는 상태가 깊어집니다.
강의에서는 이 영적 할례를 설명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어떤 경험을 ‘집게로 뽑아내는 경험’과 연결하고, 이사야의 경우에는 ‘불로 태워 버리는 경험’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특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강의 원문이 실제로 그렇게 스베덴보리를 인용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인용이 스베덴보리 자신의 교리를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다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이번 해설의 자료에서 확인되는 것은 ‘강사가 그렇게 소개한다’는 사실까지입니다. 따라서 그 표현 자체를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정식 교리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스베덴보리의 보다 일관된 거듭남 교리와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악의 제거를 말할 때 핵심은 ‘제거(removal)’가 곧 ‘소멸(annihilation)’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은 주님에 의해 분리되고 억제되어 사람이 그것에 지배받지 않도록 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분노와 싸워 이전보다 훨씬 온유해졌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분노의 가능성 자체가 그의 존재에서 완전히 삭제된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선 가운데 붙드시기 때문에 그 악이 지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도 모든 생명과 선은 끊임없이 주님에게서 흘러들어와야 합니다.
이 관점에서 ‘영적 할례’는 훨씬 깊은 의미를 얻습니다. 할례란 ‘악한 부분을 떼어내어 이제 나는 깨끗한 사람이 되었다’는 자기 완성의 사건이 아니라, ‘내 proprium에서 나오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결합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것을 주님의 도움으로 계속 거절하는 것입니다. 할례의 칼은 자기 공로를 만들어 내는 칼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잘라 내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진리는 때로 우리에게 아프게 작용합니다. 내가 옳다고 믿어 온 것을 부정하게 하고, 내가 정당하다고 여긴 분노를 죄라고 보여 주며, 내가 경건이라고 생각했던 것 속에 숨어 있던 자기 의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교육’과 ‘할례’가 서로 연결됩니다. 참된 천국적 교육은 지식만 늘리는 교육이 아닙니다. 진리를 배우면서 자기 안의 거짓과 악을 보게 되는 교육입니다. 말씀을 많이 배울수록 자기 자신이 더 대단해 보인다면 그 교육은 목적을 잃은 것입니다. 반대로 말씀을 알아 갈수록 자기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의 자비가 더 크게 느껴지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마음이 줄어든다면 진리가 실제로 사람을 정결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의 ‘교육받는 낙원’이라는 표현을 지상생활에도 적용해 볼 수 있게 합니다. 사실 교회와 수도공동체와 사경회 자체가 하나의 ‘교육받는 낙원’과 같은 쓰임을 할 수 있습니다. 완성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말씀을 배우면서 자기 안의 잘못된 생각과 사랑을 발견하고 고쳐 가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교육의 양이 아니라 그 교육이 사람을 어디로 이끄느냐입니다. 진리의 교육은 사람을 자기 확신으로 굳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더 열리게 해야 합니다.
특히 시흥영성수련원의 이 강의가 단순한 신학 강의가 아니라 수도적 연단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부분은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강사는 ‘사상이 바뀌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거듭남에서도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오랫동안 옳다고 믿어 온 것을 쉽게 내려놓지 못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을수록 오히려 자기 종교적 관념이 proprium과 강하게 결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단순히 새로운 정보를 더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잘못된 질서를 흔드시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교육받는 낙원’과 스베덴보리의 사후 교육 사이의 깊은 접점이 보입니다. 천국적 교육의 목적은 ‘더 많이 아는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선에 맞는 진리를 가진 사람’을 만드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체어리티를 사랑했지만 진리를 충분히 몰랐던 사람은 사후에 진리를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그 진리가 자기가 이미 사랑하던 선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진리를 많이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자기 사랑과 지배욕에 이용한 사람에게는 지식의 양 자체가 천국의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왜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을 그렇게 강조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진리는 선을 향해야 하고, 신앙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교육의 최종 목적은 머릿속의 진리와 의지 속의 선이 결합하는 것입니다. 이 결합이 이루어질 때 사람 안에 실제 교회가 세워집니다.
강사의 천국 구조에서는 상급이 천국의 층과 연결됩니다. 1층천보다 2층천, 2층천보다 3층천이 더 큰 상급을 받으며, 옷의 밝기와 영광 등에서도 그 차이가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분명합니다. 모든 천사가 같은 지혜와 같은 사랑의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며, 천국에는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에 해당하는 구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 사회의 1등·2등·3등과 같은 서열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천국의 차이는 ‘누가 더 높은 대우를 받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사랑과 쓰임의 종류와 깊이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각 천사는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와 쓰임 안에서 완전한 행복을 느낍니다. 낮은 천국의 천사가 높은 천국의 천사를 보면서 ‘나는 왜 저 사람보다 상급이 적은가?’ 하고 시기하지 않습니다. 그런 비교와 시기 자체가 천국의 사랑과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각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선과 쓰임을 기뻐하고 다른 사람의 더 큰 선도 함께 기뻐합니다.
따라서 ‘더 밝은 세마포 옷’을 더 많은 공로를 쌓은 사람에게 주는 훈장처럼 이해하기보다, 말씀에서 ‘옷’이 진리를 표상한다는 상응을 생각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사람의 옷이 그 몸을 둘러싸듯 진리는 선을 둘러싸고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영계에서 천사의 옷이 밝고 아름답다는 것은 그 천사가 받아들이는 진리가 그의 선한 사랑과 얼마나 조화되어 있는지를 나타내는 외적 형상입니다. 천국의 외적 아름다움은 내적 상태의 상응입니다.
이것은 집과 환경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에게 집이 있고 놀랍도록 아름다운 환경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을 지상에서 선행을 많이 한 사람에게 더 비싼 부동산을 보상으로 주는 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천사의 집과 환경은 그 사람의 내적 선과 진리, 그리고 그가 속한 공동체의 상태와 상응하여 나타납니다. 그래서 천국의 모든 외적 아름다움은 안에서부터 나옵니다. 사랑이 아름답기 때문에 환경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의 ‘상급’도 새롭게 이해됩니다. 상급은 외부에서 덧붙여 주어지는 보너스가 아니라 선 자체 안에 있는 행복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쓰임이 되는 기쁨,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는 기쁨,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기쁨이 곧 천국의 상입니다. 그래서 가장 높은 천사는 가장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의 선을 받아 가장 기쁘게 다른 사람에게 쓰임이 되는 존재입니다.
이 관점은 ‘이긴 자’라는 사경회의 핵심 개념도 다시 비추어 줍니다. 이긴 자는 천국의 높은 층과 큰 상급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맞서 주님의 힘으로 싸워 선과 진리가 지배하도록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마지막 열매는 ‘내가 이겼다’는 자랑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기셨다’는 고백입니다.
2강 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천국의 삼층 구조 아래에 ‘교육받는 낙원’이 있으며, 지상에서 미처 정결해지지 못한 성도들이 중간 영역의 연단을 거쳐 그 입구에서 영적 할례를 받아 죄성을 제거한 뒤 그곳에서 천국적 사상과 삶을 교육받고 마침내 천국의 각 층으로 들어간다고 설명하는 강사의 체계는, 선한 영들이 사후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교육을 실제로 받는다는 점과 할례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속한 악의 제거를 표상한다는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설명과 매우 의미 있는 접점을 가지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사후 교육을 악한 지배적 사랑을 선한 사랑으로 새로 바꾸는 제2의 거듭남으로 보기보다 지상에서 이미 형성된 선한 사랑과 조화되지 않는 무지와 오류를 벗기고 그 사랑에 맞는 진리를 가르치는 과정으로 이해하며, 영적 할례 역시 영계의 특정 입구에서 죄성을 물질처럼 한꺼번에 떼어내는 사건이라기보다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proprium에서 나오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악을 주님의 진리로 분별하여 죄로 알고 거절하는 내적 정화의 아르카나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번 5부에서 가장 깊이 남길 만한 것은 ‘천국에서도 배운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이것은 생각할수록 아름다운 진리입니다.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모든 성장이 끝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이라는 무한한 선과 진리를 향한 영원한 성장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것입니다. 천사도 오늘보다 내일 더 지혜로워질 수 있고, 더 깊은 사랑과 더 아름다운 쓰임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하신 주님을 영원히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지상생활도 하나의 긴 ‘교육받는 낙원’을 준비하는 시간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읽고 하나를 깨닫는 것, 그 진리 때문에 자기 생각 하나를 내려놓는 것, 오래된 미움을 하나 포기하는 것, 다른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는 것, ‘내가 옳다’보다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묻게 되는 것, 이 모든 것이 천국의 교육과 같은 방향을 향합니다. 진리는 우리를 다른 사람보다 높은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 주어집니다.
그래서 천국의 교육을 생각하며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죽은 뒤 어디에서 무엇을 배우게 될까?’만은 아닐 것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나는 지금 주님께 배우기 쉬운 사람이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자기 생각을 끝까지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밝은 진리가 와도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잘못 알고 있다면 고쳐 주십시오’라고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는 오늘의 자연계에서도 이미 천국의 교육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깊은 의미의 ‘영적 할례’일 것입니다. 내 지식과 내 판단과 내 의를 붙잡은 proprium의 껍질이 조금씩 벗겨지고,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자유롭게 결합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2강6부
‘자기 옷을 빠는 다섯 가지 조건’ : 보혈, 연단, 성령, 말씀, 그리고 순종
2강 6부에서는 앞에서 다룬 ‘영적 할례’와 ‘교육받는 낙원’의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들어가,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정결해지는가를 다룹니다. 강사는 계시록의 ‘옷’, ‘흰옷’, ‘세마포’, ‘두루마기’를 설명하면서 특히 ‘자기 옷’을 사람의 ‘행실’, 곧 ‘생활 인격’과 연결합니다. 자기 옷이 더럽다는 것은 죄성의 지배를 받아 부끄러운 행실이 나타나는 것이며,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 옷이 깨끗하게 빨려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자기 옷을 빠는 다섯 가지 조건’으로 ‘어린양의 피 곧 보혈’, ‘연단받을 수 있는 환경’, ‘맑은 물 곧 성령’, ‘빛에 대한 말씀’, ‘순종하는 의지’를 제시합니다. 강사는 이 다섯 가지 가운데 앞의 네 가지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마지막 ‘순종하는 의지’는 사람이 직접 응답해야 하는 것이라고 특별히 강조합니다.
이번 부분은 지금까지 2강을 해설하면서 만난 내용 가운데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상당히 깊이 만나는 대목입니다. 물론 ‘보혈’, ‘연단’, ‘성령’, ‘말씀’, ‘순종’이라는 다섯 항목을 스베덴보리가 동일한 체계로 정식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다섯 가지가 함께 있어야 사람의 실제 삶이 정결해진다는 강사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와 상당히 가까운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순종하는 의지’를 강조하는 대목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감동받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실제로 행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강사가 말하는 ‘자기 옷’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계시록 16장의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와 계시록 22장의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를 연결하면서, 이 옷과 두루마기를 사람의 행실과 생활 인격으로 풀이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매우 가까우면서도 약간의 정리가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옷’은 기본적으로 진리를 표상합니다. 몸이 옷을 입듯 선은 진리를 통하여 외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사들의 옷도 그들이 지닌 진리의 상태와 상응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삶과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 진리가 실제 행실 가운데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강사가 옷을 ‘생활 인격’과 연결하는 것은 전혀 동떨어진 해석은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의 ‘옷’은 그 사람의 속에 있는 사랑이 밖으로 표현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속에 있는 사랑이 몸이라면, 그것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가 옷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떤 진리를 알고 있는가도 중요하지만, 그 진리가 그의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빈 옷이 되고, 진리 없는 사랑은 방향을 잃을 수 있습니다. 천국적 삶에서는 선과 진리가 결합되어야 합니다.
강사가 첫 번째 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은 ‘어린양의 피’, 곧 ‘보혈’입니다. 그는 계시록 7장의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를 근거로 아무리 인간이 노력해도 보혈의 은총이 없으면 자기 옷을 빨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앙에서 이것은 매우 익숙한 언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인간의 죄를 씻는다는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피’의 상응을 살펴봅니다. 말씀에서 주님의 ‘피’는 단지 갈보리에서 흘러나온 물질적 혈액 자체에만 머물지 않고,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 특히 인간을 구원하고 거듭나게 하는 신적 진리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는다’는 것은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들여 자신의 거짓과 악을 깨닫고, 그 진리에 따라 삶을 정결하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약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이루신 주님의 구속이 오늘 사람 안에서 어떻게 실제 거듭남의 능력이 되는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혈로 씻는다’는 것을 단순히 ‘예수님의 피가 내 죄를 덮어 주므로 나는 이제 깨끗하다고 간주된다’는 법정적 선언에만 머물게 하면, 오히려 이번 강사가 강조하는 내용과도 맞지 않습니다. 강사 자신도 보혈 하나만 말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연단과 성령과 말씀과 순종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구속은 인간의 실제 삶을 변화시키는 구속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조건은 ‘연단받을 수 있는 환경’입니다. 강사는 사람이 말씀에 순종하려 할 때 마귀의 방해와 송사가 일어나며, 그것이 실제 연단의 환경이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사람이 인내하며 말씀을 지키는 과정에서 정결해진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스베덴보리의 ‘시험’ 교리와 상당히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단순히 진리를 배우는 과정이 아닙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그 진리와 반대되는 악과 거짓이 일어나 충돌하게 되고, 이때 영적 시험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험의 목적입니다. 시험은 주님께서 사람을 괴롭혀 죄값을 치르게 하시는 과정이 아닙니다. 사람 안에 숨어 있던 악과 거짓이 드러나고, 사람이 자유 가운데 어느 편을 선택하는지가 실제로 결정되는 과정입니다. 평소에는 ‘나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나를 모욕했을 때 그 사랑이 실제인지 시험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고 있는 것과 실제로 원수를 만났을 때 복수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시험은 머릿속 진리가 의지와 삶의 진리가 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연단의 환경 자체를 찾아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일부러 고난을 만들거나 자신을 괴롭혀야 더 거룩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일상의 삶이 이미 충분한 시험의 장입니다. 가족관계, 교회생활, 직장생활, 돈, 명예, 인정받고 싶은 마음, 억울한 일, 질병과 실패, 다른 사람과의 충돌 속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가 실제로 시험됩니다. 중요한 것은 고난의 크기가 아니라 그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하느냐입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의 ‘연단’ 강조는 매우 귀한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을 단지 예배에 참석하고 교리를 동의하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실제 삶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말씀을 지키는 과정으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연단을 많이 받을수록 높은 성도가 된다’는 식으로 고난 자체를 영적 가치로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면 좋겠습니다. 고난이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주님의 진리를 붙들고 악을 거절하는 자유로운 선택을 통하여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세 번째 조건은 ‘맑은 물’, 곧 성령입니다. 강사는 성령의 감동과 깨달음이 있어야 자신의 더러움을 알 수 있고 씻을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역시 상응의 관점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말씀에서 ‘물’은 일반적으로 진리를 표상합니다. 특히 사람을 씻고 정결하게 하는 물은 인간의 외적 삶을 깨끗하게 하는 신앙의 진리와 연결됩니다. 세례의 물 역시 이러한 정결과 거듭남을 표상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성령’을 성부·성자와 구별되는 별개의 신적 인격이 사람 안에 들어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성, 곧 주님의 신적 진리와 신적 작용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맑은 물로 씻는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가 사람의 지성과 삶으로 흘러들어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분별하게 하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게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강사의 세 번째 조건과 네 번째 조건인 ‘빛에 대한 말씀’이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강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모르면 ‘익은 열매’가 될 수 없으며, 진리를 알아야 자신이 진리의 울타리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사람이 말씀을 모르면서 자기 방식대로 살면 그 울타리를 벗어나고도 자기가 벗어난 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적은 매우 중요합니다.
선한 의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 욕망을 선이라고 착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녀만 사랑하면서 ‘나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고, 자기 교회만 사랑하면서 ‘나는 교회를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만 친절하면서 ‘나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의 진리가 필요합니다. 진리는 우리의 사랑을 비추어 그것이 정말 천국적 사랑인지 아니면 자기애가 사랑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인지 분별하게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에게 지성과 의지가 함께 거듭나야 하는 이유입니다. 의지만 있고 진리가 없으면 맹목적인 열심이 될 수 있고, 진리만 있고 의지가 없으면 죽은 지식이 됩니다. 진리는 사람에게 길을 보여 주고, 선은 그 길을 걷게 합니다. 결국 진리와 선이 결합되어야 사람 안에 천국적 생명이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말하는 ‘빛에 대한 말씀’은 ‘성경 지식을 많이 축적하라’는 뜻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말씀은 자기 자신을 비추는 빛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찾아내는 탐조등이 아니라 먼저 내 안의 악과 거짓을 드러내는 등불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많이 읽었는데 다른 사람의 허물만 더 잘 보이기 시작한다면 그 말씀은 아직 자기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입니다. 반대로 말씀 한 구절 때문에 자기 안의 오래된 미움 하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님 앞에서 내려놓게 된다면 그 말씀은 실제로 빛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섯 번째가 ‘순종하는 의지’입니다. 이번 6부의 중심은 사실 여기에 있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강사는 앞의 네 가지는 모두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지만, 이 마지막 것은 ‘내가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순종’이며, 진리의 말씀에 순종해야 정결해지고 익은 열매가 되어 온전한 사랑에 이른다고 강조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와 놀랄 만큼 가까운 핵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거듭날 때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거절하고 선을 행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그러나 동시에 실제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모든 힘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거듭남이 왜곡됩니다.
‘주님이 다 하시니까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인간의 자유와 책임이 사라집니다. 반대로 ‘내가 결단하고 노력해서 거룩해진다’고 하면 자기 공로가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처럼 행동하되, 그 행동할 능력과 의지와 진리와 선이 모두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as if of self’, 곧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의 원리입니다.
강사가 ‘앞의 네 가지는 주님께서 주시지만 순종은 내가 해야 한다’고 말하는 부분도 바로 이 균형 안에서 이해하면 더욱 깊어집니다. 엄밀히 말하면 순종할 수 있는 의지와 힘조차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것으로 느껴지도록 주어집니다. 그래야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대신 악을 거절해 버리시지 않습니다. 진리를 보여 주시고, 선을 향한 애정을 주시고, 싸울 힘을 주시지만, 그 순간 ‘아니오, 나는 이것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악을 거절하는 것은 사람이 자유 가운데 해야 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주님과 인간의 협력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이것을 서로 50퍼센트씩 담당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생명도 힘도 진리도 선도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것을 강제로 사람 안에 넣지 않으시고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응답하도록 하십니다. 인간의 몫은 독립적인 능력을 보태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자유 가운데 실행하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알면 ‘순종’도 강압적인 복종과 달라집니다. 천국적 순종은 자기 생각을 없애고 지도자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를 이해하고 그것이 선임을 보아 자유롭게 행하는 것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노예처럼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롭게 순종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뜻과 자기의 새 의지가 점점 하나가 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해야 하니까’ 원수를 용서하지만, 나중에는 실제로 용서하기를 원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말씀에 그렇게 쓰였으니까’ 선을 행하지만, 나중에는 선을 행하는 것 자체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이것이 진리가 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입니다.
강사는 이 다섯 요소가 반복되는 가운데 사람이 잘못하고 범죄하여 부끄러운 행실이 나타나더라도 다시 자기 옷을 빨고, 그러한 과정이 거듭되면서 점진적으로 자아가 깨어지고 정결해져 마침내 ‘익은 열매’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점진적으로’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거듭남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아주 깊이 만납니다. 사람은 한 번의 회심이나 강렬한 체험으로 완전히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거듭남은 일생 동안 계속됩니다. 어떤 악이 드러나고, 진리로 그것을 보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여 싸우고,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며, 조금씩 그 악의 지배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하나의 층이 정리되면 더 깊은 층의 악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나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나는 이제 꽤 거룩해졌다’고 느끼기보다 오히려 자기 안에 주님의 자비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더 깊이 알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만 여기에서 강사가 사용하는 ‘자아가 깨어진다’는 표현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세밀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인격 자체가 파괴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개별성과 자유를 없애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거듭날수록 사람은 더 온전한 개인이 됩니다. 깨어져야 하는 것은 ‘내게서 선이 나온다’, ‘내 판단이 곧 진리다’,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proprium의 지배입니다. 거듭남은 ‘나’의 소멸이 아니라 proprium의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어 강사는 이렇게 정결해진 뒤 받는 ‘세마포’를 ‘옳은 행실에 대한 상급’으로 설명하고, 천국에서는 모두가 같은 세마포를 입는 것이 아니라 상급에 따라 빛의 밝기와 모양도 다르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매우 강한 표현으로 ‘천국은 공평한 나라가 아니라 철저히 차별이 되어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는 강사의 의도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지상에서 어떻게 살았든 천국에서 똑같은 상태와 똑같은 영광을 받는 것은 아니며, 각 사람의 삶에 따른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이 기본 취지는 스베덴보리에게도 분명히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천국 역시 획일적인 평등사회가 아닙니다. 천사마다 사랑과 지혜의 정도가 다르고, 공동체마다 선의 종류와 쓰임이 다르며, 세 천국 사이에도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천사들의 옷과 집과 환경의 아름다움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차별’이라고 부르면 천국의 본질을 오해하기 쉽습니다. 자연계에서 ‘차별’은 흔히 우열과 특권, 불공정과 비교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는 오히려 완전한 질서와 조화가 있다고 표현하는 편이 적절합니다.
천국에서 높은 천사가 낮은 천사보다 ‘더 귀한 신분’이어서 더 좋은 옷을 지급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내적 사랑과 지혜가 더 깊기 때문에 그것과 상응하는 더 밝은 옷과 환경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낮은 천국의 천사는 그것을 시기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자기 상태에서 주님에게서 받을 수 있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작은 잔과 큰 잔이 모두 가득 차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용량은 다르지만 어느 쪽도 비어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말하는 ‘세마포의 밝기’도 훨씬 아름답게 이해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사의 옷은 그 천사가 지닌 진리와 상응합니다. 그러므로 밝은 옷은 단순한 상급의 훈장이 아니라 내면의 진리가 밖으로 나타난 형상입니다. 계시록 19장에서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성도들의 의로운 행실과 연결하는 것도, 삶 속에서 실현된 진리가 영계에서는 그에 상응하는 옷으로 나타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실과 옷이 서로 무관한 것이 아니라 내적 상태와 외적 형상이 상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급’ 역시 외부에서 덧붙여지는 보너스보다 내적 상태의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선을 사랑한 사람에게 더 큰 선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생기고, 진리를 사랑한 사람에게 더 깊은 지혜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생깁니다. 그 사랑과 지혜 자체가 천국의 행복입니다. 천국에서 주어지는 아름다운 옷과 집과 환경은 그 행복과 상응하는 외적 형상입니다. 이것이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을 공로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입니다.
이번 6부에서 특히 귀하게 보이는 것은 강사가 ‘정결’을 단순한 신분 변화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보혈을 믿었다는 한 번의 고백만으로 끝내지 않고, 연단받는 환경과 성령의 깨우침과 말씀의 빛과 인간의 순종이 함께 작용하여 실제 생활 인격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처음부터 강조해 온 ‘삶’의 영성과 연결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이 강의를 무조건 비판하기보다 상당히 깊이 경청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특히 ‘말씀을 알고 순종한다’는 두 요소가 함께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지성에 들어온 다음 의지로 들어가고, 마침내 행위가 되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다’라고 알아서 행하지만, 계속 행하다 보면 그 진리가 새로운 의지와 결합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선을 행하는 것이 의무를 넘어 기쁨이 됩니다. 그때 진리는 단지 기억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안에 있게 됩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강사의 ‘자기 옷을 빠는 다섯 가지 조건’은 상당히 좋은 거듭남의 그림으로 다시 읽을 수 있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주님에게서 오는 구속의 신적 진리이고, ‘연단받을 수 있는 환경’은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시험되는 자리이며, ‘맑은 물’은 우리를 비추고 깨끗하게 하는 주님의 신적 작용이고, ‘빛에 대한 말씀’은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밝혀 주는 진리이며, ‘순종하는 의지’는 그 진리를 자유롭게 삶으로 옮기는 인간의 응답입니다. 이 모든 것의 중심에는 주님이 계시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이 실제로 요구됩니다.
2강 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자기 옷 곧 생활 인격을 깨끗하게 빠는 데에는 어린양의 피, 연단받을 환경, 맑은 물인 성령, 빛에 대한 말씀, 순종하는 의지가 모두 필요하며 특히 앞의 네 가지는 주님께서 주시지만 마지막 순종은 사람이 직접 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강사의 설명은, 말씀의 ‘옷’을 보다 정확하게는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로 이해하고 ‘어린양의 피’를 주님의 구속적 신적 진리로 이해해야 한다는 차이는 있지만, 사람이 주님에게서 모든 진리와 선과 능력을 받으면서도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악을 거절하고 진리를 행해야 하며, 그 반복되는 시험과 순종을 통하여 진리가 선과 결합되어 실제 생명이 된다는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교리와 매우 깊은 접점을 갖습니다.’
그리고 이번 6부에서 가장 오래 붙들 만한 것은 아마 다섯 번째, ‘순종하는 의지’일 것입니다. 보혈도 주님께서 주십니다. 말씀도 주님께서 주십니다.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빛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시험 가운데 싸울 힘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침범하여 대신 순종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악이 눈앞에 왔을 때 그것을 거절하고,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하는 그 작은 문은 사람이 자기 손으로 열어야 합니다. 물론 그 손을 움직일 생명과 힘조차 주님에게서 옵니다.
바로 여기에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절묘한 균형이 있습니다. 우리는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승리를 자기 것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순종을 자기 공로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자기 옷을 빨아야 합니다. 그러나 물도, 빛도, 씻을 능력도, 마침내 깨끗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할 일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모든 것을 주시고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삶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자기 옷을 빤다’는 계시록의 표현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인격을 버리고 다른 사람으로 갈아입히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날마다 입고 살아온 바로 그 ‘옷’, 곧 생각하고 말하고 선택하고 행동해 온 삶을 주님의 진리로 씻어 가십니다. 분노하던 사람이 조금씩 온유해지고, 자기만 생각하던 사람이 이웃을 돌아보기 시작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의 쓰임을 기뻐하고, ‘내가 옳다’를 붙잡던 사람이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묻게 됩니다. 이것이 옷이 희어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옷이 희어질수록 사람은 자기의 흰옷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옷을 씻게 하신 ‘어린양’을 더욱 바라보게 됩니다.
2강7부
사데 교회의 흰옷, 유월절과 할례 : 정결은 ‘한 번 씻음’인가, 평생의 거듭남인가
2강 7부에서는 앞에서 다룬 ‘자기 옷을 빠는 다섯 가지 조건’에서 자연스럽게 ‘흰옷을 입는다’는 문제로 넘어갑니다. 강사는 먼저 요한계시록 3장의 사데 교회를 들어, 사데 교회의 사자는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책망을 받았지만 그 교회 안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었으며,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는 약속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라는 말씀을 붙들면서, 흰옷은 지상에서 광야 연단을 마치고 정결해진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표지라고 해석합니다. 여기서부터 강의는 다시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유월절, 광야, 가나안 입구의 할례를 하나의 연속된 ‘모형적 진리’로 연결해 갑니다.
먼저 사데 교회에 관한 강사의 강조는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한 교회의 전체적인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그 안의 모든 사람이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전체적으로 ‘죽은’ 상태라는 심각한 책망을 받지만, 그 가운데에도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한 교회론적 원리를 보여 줍니다. 교회의 외적인 상태와 그 교회에 속한 각 개인의 내적 상태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한 교단이나 교회가 심각하게 부패했더라도 그 안에는 진실하게 주님을 사랑하며 선하게 살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매우 건전한 교리를 가진 교회 안에도 자기애와 세상 사랑을 지배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조직의 간판보다 각 사람의 내적 사랑을 보십니다.
그래서 사데 교회의 ‘몇 명’이라는 표현은 특별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의 평균 상태에 개인을 묻어 버리지 않으십니다. 겉으로는 모두 같은 예배에 참석하고 같은 설교를 듣고 같은 교단에 속해 있어도, 각 사람이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사랑으로 살아가는지는 다릅니다. 이것은 앞서 씨 뿌리는 비유에서 같은 씨가 서로 다른 밭에 떨어졌던 것과도 연결됩니다. 신적 진리는 같아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다릅니다. 따라서 교회의 개혁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듭남이 결정적입니다.
강사는 이 ‘흰옷’을 유월절의 어린양의 피와 연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고 죽음의 사자가 넘어갔다는 사건을 예수님의 보혈 은총의 모형으로 읽습니다. 그리고 이어 광야에서 말씀을 지키는 연단을 받고, 가나안 땅 입구인 길갈에서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과정을 ‘영적 할례를 받고 흰옷을 입는 성도의 모형’으로 설명합니다. 실제 강의에서는 광야 과정을 마친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너 길갈에서 할례받은 일을 ‘흰옷 입은 성도에 대한 모형’으로 직접 연결합니다. 강사의 전체 구조는 분명합니다. ‘유월절의 피-광야 연단-할례-흰옷-가나안’입니다. 보혈로 구원받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광야에서 죄성과 정욕이 깨어지고 마침내 영적 할례를 받아 정결해진 뒤 천국을 표상하는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 구조에서 가장 귀하게 받을 것은 구원을 ‘출애굽 한 번’으로 끝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애굽에서 나왔다고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유월절은 시작이었고 광야가 이어졌습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매우 깊이 만납니다. 사람이 처음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에서 돌아서기로 결단하는 것은 거듭남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이전에 형성된 자기애와 악한 습관, 거짓된 사고방식이 한순간에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가운데 시험이 오고, 그 시험을 통하여 사람 안에 숨어 있던 악이 드러납니다. 그 악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면서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출애굽 이후의 광야는 바로 이런 과정과 깊이 상응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강사가 제시하는 이 연속 구조를 그대로 기계적인 구원의 단계표로 고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동일한 자연적 사건이 같은 순서와 횟수로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광야, 요단, 할례, 가나안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은 보편적인 영적 상태와 질서를 표상합니다.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시작, 진리와 악이 충돌하는 시험, 자연적 삶과 영적 삶의 경계, 자기애에 속한 것을 제거하는 정화, 선과 진리가 더 안정적으로 결합하는 상태가 인간의 거듭남 안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외적 모습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내적 질서에는 상응이 있습니다.
여기서 ‘흰옷’의 의미를 조금 더 정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흰옷을 ‘이긴 자가 되었다는 증표’, 또는 정결해졌다는 표지로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옷’은 기본적으로 진리를 표상하고, ‘흰색’은 진리의 순수함과 빛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흠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그의 선한 사랑과 조화를 이루고 그 사람의 삶을 둘러싸고 표현하게 된 상태를 뜻한다고 보는 편이 더 깊습니다.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진리가 실제로 그의 사랑과 행실을 표현하는 ‘옷’이 되어야 합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만일 흰옷을 ‘내가 이제 죄성이 제거되어 완전해졌다는 증명서’로 생각한다면 영적 위험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인간은 지상에서 어느 순간 ‘이제 나는 더 이상 악의 가능성이 없는 정결한 인간이다’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난 사람도 proprium에서 나오는 악의 가능성을 계속 가지고 있으며, 주님의 보호와 유입 없이는 한순간도 선 가운데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흰옷을 입었다는 가장 천국적인 표지는 ‘나는 이제 깨끗하다’는 자기 확신이 아니라, 자기 안의 모든 진리와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더 깊은 인정일 것입니다.
이것은 사데 교회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라는 말씀에도 적용됩니다. 옷을 더럽히지 않는다는 것은 자연계의 도덕적 무결점만 뜻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악한 사랑에 종속시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은 참된 진리를 알고도 그것을 자기 이익과 명예와 지배욕을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옷에 자기애의 더러움을 묻히는 것입니다. 설교가 주님께 사람을 이끄는 대신 설교자 자신의 권위를 높이는 수단이 될 수 있고, 성경 지식이 회개를 일으키는 대신 남을 판단하는 무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겉으로는 ‘옷’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더럽혀진 것입니다.
따라서 ‘흰옷을 입는다’는 문제는 신학적 지식과 실제 삶의 결합을 묻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는 나를 더 겸손하게 만드는가, 더 교만하게 만드는가? 주님의 말씀을 많이 알수록 사람을 더 사랑하게 되는가, 더 쉽게 정죄하게 되는가? 영계에 관한 지식을 많이 알수록 주님을 더 의지하게 되는가, ‘나는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특별의식이 커지는가? 이런 질문들이 ‘옷의 색’을 보여 줍니다. 진리가 주님의 선과 결합하면 밝아지고, proprium과 결합하면 흐려집니다.
강사는 이어 아브라함의 연단을 길게 다루며 그가 약 24년의 연단 과정을 마친 뒤 할례에 이르렀다고 설명합니다. 아브라함의 삶에서 하나님을 믿고 떠나는 것만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이 아니라, 여러 시험을 거치며 자기 소유와 자기 판단을 내려놓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브라함의 과정과 이스라엘의 광야를 모두 동일한 ‘연단의 원리’로 읽습니다. 강사는 여기서 매우 강하게 ‘익은 열매가 되는 길은 연단받는 길밖에 없다’고 강조하며, 은사나 안수 한 번, 항상 기분 좋은 성령 충만 상태만으로 정결해지는 길은 없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상당히 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영적 성장을 어떤 한 번의 특별한 체험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점 때문입니다. 특정 집회에서 강한 은혜를 받거나, 안수를 받고 쓰러지거나, 특별한 방언이나 환상을 경험했다고 해서 인간의 오래된 자기애가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거듭남은 삶의 과정입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이 점을 매우 강조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배우고, 실제 삶에서 행하고, 시험 가운데 악과 싸우며, 그렇게 반복하면서 점차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특별한 체험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거듭남 자체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다만 강사가 ‘연단받는 길밖에 없다’고 표현할 때에도 한 가지 균형을 붙여야 합니다. 고난 자체가 성화의 원인은 아닙니다. 많이 고생한 사람이 반드시 더 거룩한 것도 아닙니다. 고난 가운데 무엇이 일어났는가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고난을 통하여 더 겸손해질 수도 있지만 더 완고해질 수도 있고, 더 사랑하게 될 수도 있지만 더 원망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연단의 본질은 고통의 양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진리를 선택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직접 보내어 인간을 괴롭히시는 분이 아니시며, 허용된 어려움과 지옥의 시험까지도 거듭남을 위하여 굽혀 사용하십니다.
강사는 이 원리를 매우 현실적인 언어로 가져옵니다. 가정도 광야이고, 직장도 광야이며, 군대도 광야이고, 교회도 광야라고 합니다. 심지어 ‘왜 그렇게 원수 같은 인간을 만나게 되는가?’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그런 인간관계까지 연단의 환경으로 봅니다. 이 대목은 일상생활을 거듭남의 자리로 본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습니다. 신앙의 진실성은 수도원이나 사경회에서만 검증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거듭남이라는 관점에서도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특별한 영적 공간에서만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정에서 배우자를 대하는 태도, 직장에서 책임을 감당하는 태도, 돈을 사용하는 방식,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을 대하는 반응 속에서 진리가 실제 의지와 결합합니다. ‘나는 원수를 사랑한다’는 신앙은 원수가 없을 때 검증되지 않습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비로소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다만 ‘저 사람이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시키려고 붙여 놓으신 사람이다’라고 너무 쉽게 규정하는 것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상대방을 하나의 ‘연단 도구’로만 바라볼 위험이 있습니다. 상대방 역시 주님 앞에 한 인격이며 자신의 자유와 삶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떤 갈등은 상대의 잘못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고, 어떤 갈등은 내 잘못 때문에 일어나며, 많은 경우 서로의 미성숙이 함께 작용합니다. 주님의 섭리는 그 모든 상황을 이용하여 우리를 선으로 이끄실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갈등의 직접적인 원인을 ‘하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려고 만드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허용의 섭리’가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주님은 악을 만들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와 자연계의 질서 속에서 생기는 악과 고통을 허용하시며, 허용된 것을 가능한 한 영원한 선을 위하여 굽혀 사용하십니다. 따라서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에 대해 언제나 원인을 정확히 안다고 생각하기보다, ‘이 상황에서도 주님께서는 내가 더 선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하실 수 있다’고 믿는 편이 더 안전합니다.
강사는 교회의 갈등과 분열까지도 연단의 배경으로 이야기합니다. 교회에는 ‘별 사람이 다 있고’, 목회자들도 싸우고 교파도 나뉘며 여러 일이 일어나는데, 그런 환경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식은 실제 교회생활을 지나치게 이상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실적입니다. 교회는 이미 완성된 천사들의 집단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모든 분쟁과 부조리까지 ‘연단시켜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라고 일반화하는 데에는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의 죄와 학대와 부정은 분명 회개하고 고쳐야 할 대상입니다. 어떤 일을 ‘연단’이라고 부른다는 이유로 불의를 그대로 감수하거나 피해자에게 참으라고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는 악을 악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진리와 함께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선하게 사용하실 수 있지만 그 때문에 악 자체가 선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별은 수도적 순종을 이해할 때에도 중요합니다. 누군가 나를 힘들게 할 때 무조건 ‘하나님께서 보내신 연단이니 참아야 한다’고만 생각하면 부당한 권력관계까지 영적으로 정당화될 위험이 있습니다. 참된 자기부인은 악을 용납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복수심과 자기애를 거절하면서도 진리에 따라 필요한 말을 하고 필요한 경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주님께 순종한다는 것은 인간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강사의 표현을 조금 더 깊이 받아들이면, ‘가정도 광야이고 직장도 광야이고 교회도 광야’라는 말은 장소에 대한 말이라기보다 우리 내면의 상태에 대한 말이 됩니다. 어디에 있든 자기애와 진리가 충돌하는 곳이 광야가 될 수 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갔다고 광야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선택해야 하는 순간마다 광야가 열립니다. 반대로 수도원 안에서도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이 잘 돌아간다면 아직 깊은 광야가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말하는 ‘가나안’의 의미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가나안 땅을 천국의 모형이며 ‘생명과를 먹는 땅’이라고 설명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젖과 꿀 역시 자연적인 농산물보다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합니다. 이 부분은 상응을 향하려는 중요한 직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 가나안의 지리적 풍요만으로 말씀 전체를 이해할 수 없으며,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와 교회를 표상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가나안 땅은 매우 중요한 표상입니다. 가장 깊게는 주님의 나라, 천국, 교회, 그리고 개인에게서는 거듭난 사람의 천국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갔다=거듭남 완전 종료’라고 단순화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뒤에도 수많은 전쟁을 계속했다는 사실이 의미심장합니다. 영적으로도 사람이 어느 정도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모든 싸움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내적인 악과 거짓을 대상으로 새로운 전투가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흰옷을 입었다’는 말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흰옷은 거듭남이 완전히 종결되어 더 이상 주님의 보호가 필요 없는 상태의 증서가 아니라,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사람의 삶을 밝게 표현하는 천국적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도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지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한번 얻은 천국적 상태를 독립적인 자기 소유로 만들어 영원히 유지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모든 순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긴 자’의 본질 역시 한 번 이겼으므로 다시는 싸울 일이 없는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힘을 의지하여 악을 거절하는 삶의 방향이 형성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도 악한 생각이 올라올 수 있고 시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악을 ‘나의 선’이라고 합리화하지 않고, 주님의 진리를 기준으로 그것을 거절합니다. 이 방향이 그의 지배적인 생명이 됩니다.
이 점에서는 사데 교회의 흰옷과 강사가 말하는 ‘광야 연단’이 매우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옷이 희어지는 것은 시험이 사라진다는 뜻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진리를 더럽히지 않는 법을 배워 가는 것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정직하고, 모욕을 받아도 복수하지 않으며, 인정받지 못해도 쓰임을 계속하고, 잘못했을 때 자기 체면보다 진리를 높여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입니다. 이런 선택들이 누적되면서 사람의 진리가 점점 그의 선한 사랑과 결합합니다.
강사가 성령 충만의 상태를 ‘늘 높게 유지되는 직선’보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파도처럼 설명하면서, 침체되고 범죄하기도 하지만 다시 회개하고 돌이키는 가운데 정결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부분도 주목할 만합니다. 표현은 상당히 구어적이지만, 거듭남을 비현실적인 완전주의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은 성장 과정에서 넘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졌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 뒤 무엇을 하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도 사람은 여러 번 상태가 오르내립니다. 빛이 밝은 상태가 있고 어두운 상태가 있으며, 주님의 임재를 가깝게 느끼는 때도 있고 자연적 인간이 강하게 일어나는 때도 있습니다. 이 변화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상태의 교대 속에서 사람은 자기 힘이 아니라 주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만일 늘 똑같이 강렬한 영적 감동만 지속된다면 사람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죄를 지어야 보혈로 씻음을 받고 정결해질 수 있다’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죄는 거듭남의 재료가 아니라 거절되어야 할 악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실패까지 사용하여 더 깊은 겸손과 자기 인식을 주실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죄 자체가 필요하거나 유익한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바울의 표현처럼, 넘어졌을 때 은혜가 일하지만 넘어지는 것을 영적 성장의 필수 수단으로 만들지는 않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영적 할례’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강사는 이스라엘이 길갈에서 할례받고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을 흰옷 입은 성도의 모형으로 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할례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속한 부정한 사랑을 제거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그렇다면 할례의 핵심은 ‘고난을 충분히 받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무엇을 잘라 내는가에 있습니다. 자기 의, 지배욕, 자기 공로, 탐욕, 복수심처럼 주님과의 결합을 방해하는 사랑을 진리로 분별하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외적인 고행과 내적인 할례의 차이를 분명하게 해 줍니다. 힘든 생활을 오래 견뎠지만 자기 의는 그대로일 수 있습니다. 재산을 포기했지만 영적 우월감은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많은 모욕을 받았지만 그 사람들을 마음속에서 계속 미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적 광야는 많이 걸었지만 잘라 내야 할 내적 ‘포피’는 그대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평범한 가정과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매일 자기애를 발견하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는 사람은 실제로 영적 할례를 받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점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을 해설할 때 특히 소중한 균형이 됩니다. 연단을 강조하는 전통의 강점은 신앙을 안일하게 만들지 않는 데 있습니다. ‘예수 믿었으니 끝났다’가 아니라 실제로 자기 욕망과 싸우고, 말씀에 순종하고, 삶이 변화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귀합니다. 그러나 그 연단이 외적인 고난의 양이나 수행의 강도로 측정되기 시작하면 본질이 흐려질 수 있습니다. 연단의 진짜 열매는 더 많은 고통을 견딘 기록이 아니라 더 적은 자기애, 더 깊은 겸손, 더 넓은 체어리티, 더 기쁜 쓰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기준으로 흰옷도 볼 수 있습니다. 흰옷은 자기 수행의 훈장이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어려운 광야를 지나 흰옷을 받을 자격을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그 흰옷에 자기 공로의 얼룩이 묻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천국적 흰옷의 빛은 인간 자신의 빛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비치는 빛입니다. 그러므로 그 옷이 밝을수록 입은 사람은 오히려 자기 빛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2강 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데 교회의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명’과 ‘이기는 자는 흰옷을 입을 것’이라는 말씀을 출애굽의 유월절 어린양의 피, 광야의 연단, 길갈에서의 할례, 가나안 입성과 연결하여, 보혈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광야 연단을 통하여 죄성과 정욕이 깨어지고 영적 할례를 받아 마침내 흰옷 입은 익은 열매가 된다고 설명하는 강사의 모형적 해석은 구원을 단순한 한 번의 고백이나 체험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삶의 정결과 순종으로 이어지게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힘을 갖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흰옷을 인간의 죄성이 완전히 소멸했다는 완덕의 증표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선한 사랑과 결합하여 순수하게 삶을 표현하는 상태로, 할례를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속한 악을 진리로 분별하여 죄로 알고 거절하는 내적 정화로, 광야 연단을 고난의 양을 채우는 과정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함으로써 지배적 사랑이 새롭게 질서화되는 평생의 거듭남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이번 7부에서 특별히 마음에 남는 것은 사데 교회의 ‘몇 명’입니다. 교회 전체가 죽어 가는 상태에서도 주님은 그 몇 명을 아십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위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매우 엄중한 말씀입니다. 사람은 ‘우리 교회가 바른 교회이니 나는 괜찮다’고 할 수 없고, 반대로 ‘우리 교회가 문제가 많으니 나는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은 각자의 옷을 보십니다. 공동체의 평균으로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도 겸손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문제가 많은 교회나 신앙 전통 안에도 주님께서 귀하게 보시는 ‘몇 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진실하게 말씀을 따라 살고,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선을 행하며, 자기 악과 조용히 싸우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단이나 전통 전체를 한 번에 판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말씀과 교리는 분별하되 사람의 내면은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 ‘몇 명’의 특징은 자신들이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조용한 표현입니다. 거대한 능력이나 특별한 계시나 유명한 사역이 아닙니다. 그저 주님께 받은 진리를 자기애와 거짓으로 더럽히지 않고 살아간 것입니다. 어쩌면 영적 성숙의 가장 깊은 모습은 이렇게 화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정직하고, 말해야 할 때 진실을 말하고, 억울해도 악으로 갚지 않으며, 자기에게서 나온 선을 자기 공로로 붙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흰옷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수여되는 영적 훈장이라기보다 오늘의 작은 선택들 속에서 준비되는 옷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화를 참는 한 번의 선택, 오늘 거짓을 거절하는 한 번의 선택, 오늘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한 번의 선택, 오늘 다른 사람의 선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한 번의 선택이 진리를 삶으로 만듭니다. 물론 그 선과 힘은 모두 주님에게서 옵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행합니다.
그래서 ‘흰옷 입은 이긴 자’의 가장 깊은 고백은 아마 ‘나는 광야를 다 통과했다’가 아닐 것입니다. ‘주님께서 제 광야를 지나게 하셨습니다’일 것입니다. ‘나는 내 옷을 희게 만들었다’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제 더러움을 보여 주었고, 주님께서 싸울 힘을 주셨으며, 제가 그 힘을 받아 악을 거절하도록 붙들어 주셨습니다’일 것입니다. 그때 유월절의 어린양, 광야, 할례, 흰옷, 가나안은 서로 떨어진 여러 단계가 아니라 하나의 거듭남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주는 말씀의 그림으로 모입니다. 그리고 그 전체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이십니다.
2강8부
에베소 교회의 ‘생명나무의 과실’ : 생명과를 ‘먹는다’는 것은 주님의 생명을 소유하는 것인가, 선과 사랑을 받아 사는 것인가
2강 8부에서는 식사 후 다시 시작된 강의가 요한계시록 2장의 에베소 교회로 돌아갑니다. 강사는 에베소 교회에 주어진 약속 가운데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는 말씀을 특별히 붙들고, 지금까지 반복해서 사용해 온 ‘생명과’, ‘이긴 자’, ‘익은 열매’, ‘광야 연단’, ‘가나안’이라는 주제들을 하나의 선으로 연결합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는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나무의 과실인 ‘생명과’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또는 하나님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생명과를 먹는다는 것은 광야 연단을 통하여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 안에 ‘내주합일’되는 높은 영적 상태와 연결됩니다. 강사는 동시에 천국에는 계시록에 묘사된 것처럼 실제로 생명과가 열리는 나무가 있다는 입신 체험자들의 설명도 받아들이므로, ‘생명과’를 한편으로는 실제 천국의 과실로,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타내는 영적 의미로 함께 이해합니다.
여기에는 먼저 귀하게 받을 부분이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께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강사는 요한복음 14장 6절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를 근거로 생명나무가 예수님을 나타내며, 그 과실은 주님의 생명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생명나무는 매우 깊게 주님과 연결됩니다. 창세기 에덴의 생명나무도, 계시록 새 예루살렘의 생명나무도 서로 전혀 다른 두 나무가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말씀의 아르카나 안에 있습니다. 생명의 원천은 오직 주님이시며, 인간에게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실제로는 순간마다 주님에게서 생명이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다’는 말씀의 중심에 인간의 영적 성취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생명과’의 의미를 조금 더 정확하게 열어 줍니다. 말씀에서 ‘나무’는 지각과 인식, 특히 사랑과 신앙에서 자라나는 교회의 생명을 표상할 수 있고, ‘열매’는 그 나무에서 실제로 나온 선, 곧 삶으로 나타난 사랑의 선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어떤 영적 물질을 섭취하여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새로운 실체가 인간의 영 안에 들어오는 장면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을 받아 자기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고 보는 편이 더 깊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말씀에서 단순히 입으로 섭취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무엇을 자기 안에 받아들여 자기 생명과 결합시키는 것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그것을 사랑하고 행하여 자기 삶의 실제 생명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강사가 사용하는 ‘하나님의 생명이 내주합일된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합니다. 앞에서 ‘신인합일’이라는 표현도 살펴보았듯이,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이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자체가 인간에게 이전되어 인간의 소유가 되거나 인간이 신적 존재로 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원천은 영원히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영원히 생명을 받아들이는 수용체입니다. 아무리 높은 천사도 자기 안에 독립적인 신적 생명을 소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사일수록 자기 생명이 주님에게서 계속 유입된다는 사실을 더욱 명료하게 압니다. 그러므로 ‘생명과를 먹는다’를 스베덴보리의 언어로 옮긴다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선을 더욱 충만하게 받아 그 선으로 살아간다’는 표현이 가장 안전하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에베소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그에게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겠다’는 약속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이긴 자’가 광야 연단을 마치고 죄성의 문제가 해결되어 특별한 생명의 상태에 도달한 성도, 특히 ‘교회 시대 이긴 자’ 14만 4천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반복되는 ‘이기는 자’는 특정한 영적 엘리트 계층의 호칭이라기보다, 자기 안에서 주님의 진리와 반대되는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이겨 가는 모든 사람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무엇보다 ‘이김’의 실제 주체는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을 거절해야 하지만, 실제로 악과 지옥을 이기시는 능력은 오직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 점은 생명과의 의미와도 정확히 맞물립니다. 이겨서 생명을 상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것을 방해하는 악과 거짓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은 처음부터 끊임없이 인간에게 유입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애와 세상 사랑, 거짓과 악한 욕망이 그것을 왜곡하고 가로막습니다.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따라 악을 죄로 인정하고 거절할 때, 이전부터 유입되고 있던 주님의 선을 더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김’과 ‘생명과를 먹음’은 보상과 보상의 관계라기보다 정화와 수용의 관계입니다.
강사는 이어 성경에 ‘낙원’이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에덴 낙원, 영계에 있는 천상 낙원, 장차 이 땅에 이루어질 천년왕국이라는 지상 낙원, 그리고 천년왕국과 백보좌 심판 이후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의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서로 구별합니다. 그리고 현재 영계에 있는 하나님의 낙원을 천국 그 자체라고 설명하며, ‘낙원에서 대기하다가 천국으로 들어간다’는 식으로 천국과 낙원을 완전히 별개의 장소처럼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강사의 전체 종말론에서는 이 여러 낙원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시대별로 전개되는 공간적 단계들과 결합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낙원’은 먼저 천국의 상태와 그 상태에서 나타나는 실제 영적 환경을 의미합니다. 영계에는 실제로 정원과 나무와 꽃과 열매가 보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천사들에게 자연계보다도 생생한 현실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천사들의 내적 선과 지혜에 상응하여 나타납니다. 따라서 낙원의 나무와 과실을 자연계 식물학의 연장처럼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 외적 아름다움은 안에 있는 천국적 사랑과 지혜의 외적 형상입니다. 천국의 정원이 아름다운 까닭은 천사의 내적 상태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천국에는 실제 생명과가 열리는 나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을 곧바로 전부 부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영계에서 실제 나무와 과실을 보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그 나무가 왜 존재하는가?’입니다. 영계의 나무는 자연계처럼 독립적인 물질적 식물이 먼저 존재하고 그 뒤에 영적 의미가 덧붙는 것이 아니라, 천국적 상태의 상응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생명나무를 보고 과실을 먹는 일이 있다면 그 외적 행위 자체가 사람에게 신적 생명을 주는 마법적 수단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무와 과실은 그 사람이 이미 주님에게서 받아들이고 있는 선과 생명의 상태를 상응하여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영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영계에는 형상이 실제로 있습니다. 그러나 형상보다 상태가 먼저입니다. 자연계에서는 장소에 가면 상태가 바뀔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상태가 바뀌면 장소도 바뀌어 보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생명나무도 ‘어디에 있는가?’보다 ‘어떤 상태에서 그것이 나타나는가?’가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계시록의 생명나무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과 그 선에서 나오는 지혜와 기쁨의 충만함을 보여 주는 천국적 형상입니다.
강사는 다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의 역사를 끌어옵니다. 아브라함에게서 ‘믿음으로 은총을 받아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정결하게 되어 생명과를 먹는 천국, 곧 가나안에 들어가는 구원의 길’이 모형적으로 시작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이어 야곱 가족이 기근을 피해 애굽으로 내려가 430년 동안 큰 민족으로 불어나고, 모세를 통해 출애굽하여 광야의 말씀 훈련을 받은 뒤 가나안에 들어가는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구원 설계도로 해석합니다. 이 사경회의 ‘모형적 진리’가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개인 성도의 구원과 성화의 단계로 읽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스베덴보리와 매우 큰 접점이 있습니다. 사실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가 인간의 거듭남을 표상한다는 점 자체는 스베덴보리에게 대단히 핵심적인 말씀 해석입니다. 애굽, 출애굽, 광야, 요단, 가나안은 단순한 옛 민족의 역사가 아니라 주님께서 인간을 어떻게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 상태로 인도하시는지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우리 영혼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이 사경회의 기본 직관은 놀라울 만큼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와 가까운 면이 있습니다. 다만 앞에서도 반복해서 보았듯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각 자연적 사건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반복되어야 하는 고정된 단계표로 만들기보다 그 사건 안에 있는 보편적인 영적 상태와 질서를 봅니다.
예를 들어 강사는 애굽에 430년 동안 머문 목적을 가나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데 필요한 ‘국민의 수’를 채우기 위한 섭리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문자적 역사에 대한 강사의 설명입니다. 그러나 상응에서는 ‘애굽’ 자체가 기억 지식과 자연적 학습의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처음 거듭날 때에는 자연적 지식과 말씀에 관한 외적 지식을 많이 습득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중에 영적인 것을 위한 그릇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그 지식의 상태에서 나와야 합니다. 지식이 신앙과 사랑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지, 지식 자체가 인간을 지배하는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출애굽은 단지 죄악 세상에서 탈출하는 사건보다 훨씬 더 정교한 거듭남의 전환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강사가 가장 강하게 강조하는 것은 역시 ‘광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훈련’을 받았으며, 사람은 반드시 연단을 통해 정결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를 한 번도 짓지 않고 늘 행복하고 성령 충만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익은 열매가 되는 길은 없다’, ‘은사나 안수기도 한 번으로 익은 열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익은 열매가 되는 길은 연단받는 길밖에 없다’고 매우 강하게 강조합니다. 이 대목은 강사의 수도적 영성과 성화론의 중심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영적 성숙은 값싼 지름길로 얻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말씀에 순종하면서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이 드러나고 깨어지는 긴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강조의 중심은 귀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거듭남에는 시험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기만 하고 실제로 그 진리와 반대되는 욕망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 진리는 아직 그의 생명이 되었는지 드러나지 않습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큰 경제적 이익을 포기해야 할 때 정직을 선택할 수 있는가, ‘원수를 사랑하라’를 알지만 실제로 나를 모욕한 사람의 선을 원할 수 있는가,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를 알지만 사람들에게 칭찬받았을 때 자기 공로를 내려놓을 수 있는가가 실제 시험입니다. 그때 진리는 기억에서 의지로 내려갑니다.
그러나 ‘연단을 받아야 정결해진다’는 말을 ‘고난을 받아야 죄값을 치를 수 있다’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시험은 일종의 영적 형벌이나 고난의 할당량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고통을 가하여 악을 태워 없애시는 분이 아닙니다. 시험은 지옥에서 유입되는 악과 거짓이 사람 안의 리메인스와 진리를 공격할 때 일어나는 영적 전투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악을 일으키지 않으시지만 허용하시고, 인간이 자유 가운데 주님을 향하도록 보호하시며 싸우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고통의 양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주님의 진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늘 성령 충만하면 정결해지는 것이 아니다. 충만했다가 침체되고, 잘못하고, 회개하며 다시 일어나는 과정 가운데 정결해진다’고 말하는 부분은 다소 과감한 구어적 표현이지만 중요한 현실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남은 감정적으로 늘 고양되어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을 가깝게 느끼는 상태도 있고 멀게 느끼는 상태도 있으며, 밝은 이해가 있는 때도 있고 어두운 시험의 때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상태의 교대를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질서로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늘 같은 강도의 영적 위로만 주신다면 인간은 그 상태를 자기 소유로 착각할 수도 있고, 자기 안의 더 깊은 악이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여기에서도 ‘범죄해야 정결해질 수 있다’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강사의 ‘죄를 안 짓는데 보혈이 왜 필요하냐’는 표현은 그리스도의 은혜 없이는 누구도 자기 힘으로 깨끗해질 수 없다는 강조로 이해해야지, 죄를 짓는 일이 정결을 위해 필요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죄는 거듭남의 수단이 아니라 거절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우리가 넘어졌을 때 주님께서 그 실패까지 사용하여 더 깊은 겸손과 자기 인식을 주실 수 있지만, 그렇다고 넘어짐 자체가 선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섭리가 악에서 선을 이끌어 내신다고 해서 악 자체가 선이 되지는 않습니다.
강사는 광야를 가정과 직장, 군대와 교회까지 확대합니다. ‘왜 그렇게 원수 같은 인간을 만나느냐’고 물으면서 바로 그런 인간관계들이 연단을 위한 섭리라고 설명하고, 교회에 갈등과 분열이 있는 것도 성도들을 연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작전’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합니다. 여기에는 매우 실제적인 영성의 통찰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경회에서만 거듭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관계,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 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 내 계획을 방해하는 사람을 대하는 자리에서 자기 안의 실제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정도 광야이고 직장도 광야’라는 표현은 매우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반드시 한 가지 안전장치를 두어야 합니다. 모든 갈등과 불의와 학대를 ‘하나님께서 나를 연단하려고 보내신 것’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악을 만들어 내지 않으십니다. 인간의 자유에서 발생한 악을 허용하시고 그것까지 선을 위해 사용하시는 것이 ‘허용의 섭리’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명백한 악을 행한다면 그 악을 악이라고 말하고 필요한 경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피해자에게 ‘당신의 광야니까 참고 견뎌라’고 요구하는 것은 천국적 자기부인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는 악을 막고 이웃을 보호하는 진리도 포함됩니다. 자기 복수심을 버리는 것과 악에 무방비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차이는 교회의 분쟁을 보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강사는 교파가 나뉘고 목회자들이 다투는 것까지 ‘연단시켜 주자는 섭리’라고 표현하지만, 이것을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교회를 싸우게 하셨다’고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교회의 분열과 지배욕과 자기 의는 인간의 악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악을 사용하여 각 사람의 내면을 드러내실 수는 있습니다. 갈등이 일어나면 내가 진리를 정말 사랑하는지, 아니면 내 편이 이기기를 원하는지가 드러나고, 교회보다 주님을 사랑하는지 조직의 명예를 더 사랑하는지도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의미에서는 교회의 혼란조차 거듭남을 위한 쓰임으로 주님께서 굽혀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강사는 가나안을 ‘천국의 모형’이면서 ‘생명과를 먹는 땅’으로 이해하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 역시 가나안의 실제 농업적 풍요보다 하나님의 생명과 생명수의 영적 의미를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는 강사가 문자에서 속뜻으로 들어가려는 시도가 매우 분명합니다. 가나안의 ‘젖과 꿀’을 자연적 젖과 꿀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영적인 생명과 연결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을 더욱 정밀하게 열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젖’은 선에서 나오는 진리, 특히 영적 양육에 필요한 진리를 표상하며, ‘꿀’은 자연적 차원에서 느끼는 선의 즐거움과 기쁨을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단지 추상적인 ‘생명수’를 말하기보다 선과 진리가 풍성하고 그 선에서 천국적 즐거움이 흘러나오는 교회와 천국의 상태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가나안 자체도 그렇습니다. 강사는 ‘생명과를 먹은 성도들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지만, 스베덴보리에게 가나안은 천국만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와 사람 안에 형성되는 천국적 질서를 포괄적으로 표상합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도 가나안 족속과 계속 싸워야 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가나안 입성이 ‘모든 죄성이 완전히 제거되어 더 이상 영적 싸움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면 이후의 가나안 전쟁을 설명하기 어려워집니다. 오히려 가나안에 들어간 후에는 더 내적인 악과 거짓을 대상으로 한 싸움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은 어느 한 단계에서 완전히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내적인 층으로 계속 깊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과를 먹은 이긴 자’도 완성된 독립적 신성을 소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이 그의 삶에서 지배적이 되어 가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도 계속 주님이 필요하고, 계속 진리가 필요하며, 계속 주님의 보호가 필요합니다. 천사조차 영원히 그렇습니다. 천국의 상태는 ‘나는 이제 생명을 얻었으므로 스스로 산다’가 아니라 ‘나는 오직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산다’는 사실을 가장 기쁘게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천국을 사모하면서도 ‘나는 아직 익은 열매가 되지 못했으니 당장 갈 수 없다’고 자신의 상태를 낮추어 말하는 장면도 눈에 들어옵니다. 그의 단계론 전체와 별개로 이 말에는 일종의 자기 경계가 있습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높은 영적 상태를 쉽게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이 강의의 장점을 보여 줍니다. ‘이긴 자’를 가르친다고 곧 자기 자신을 이긴 자로 선언하지 않고, 자신 역시 아직 광야를 걷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영적 단계론이 위험해지는 순간은 지도자가 자신의 체계를 이용하여 자기를 최상위 단계에 놓을 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자기 고백은 귀하게 들을 수 있습니다.
다만 ‘나는 아직 익지 않았으니 천국에 바로 갈 수 없다’는 두려움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조금 다르게 풀어 줄 수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은 지상에서 절대적인 완전성을 달성했느냐가 아닙니다. 지배적 사랑의 방향이 어디인가입니다. 사람에게 아직 많은 약점과 무지가 있고 반복해서 넘어지는 부분이 있어도, 그가 그 악을 선이라고 사랑하지 않고 죄라고 인정하며 주님의 도움으로 거절하고, 주님과 이웃의 선을 사랑하는 새로운 의지가 중심에 형성되어 있다면 그는 천국을 향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의 약점보다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느 방향으로 자유롭게 돌아서고 있는지를 보십니다.
이 차이는 성화를 부담스러운 영적 성취 경쟁에서 구해 줍니다. ‘나는 언제 완전히 익을까?’, ‘나는 언제 생명과를 먹는 단계가 될까?’, ‘나는 14만 4천 수준인가?’를 끊임없이 측정하기보다, ‘오늘 내게 보여 주신 악 하나를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고 있는가?’, ‘오늘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하고 있는가?’, ‘오늘 다른 사람에게 선한 쓰임이 되고 있는가?’를 물으면 됩니다. 거듭남은 자신의 영적 등급을 계산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 오늘의 선을 행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2강 8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게 하겠다는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아 내주합일하는 상태와 연결하고, 아브라함과 출애굽 이스라엘의 역사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뒤 광야 연단을 거쳐 정결해져 마침내 생명과를 먹는 천국 곧 가나안에 들어가는 하나의 모형적 구원 과정으로 읽는 강사의 설명은, 생명의 원천이 주님이며 신앙은 반드시 실제 성화와 삶의 변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영적 힘을 갖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생명과를 신적 생명이라는 어떤 실체가 인간 안으로 들어와 독립적으로 소유되는 것으로 보기보다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되는 사랑의 선을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 자기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먹음’을 그 선을 의지와 삶에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광야를 고난의 양을 채워 완덕을 획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자기애와 거짓을 죄로 알고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여 진리와 선이 결합되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이해할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깊이 열립니다.’
이번 8부에서 가장 깊게 붙들 만한 것은 결국 ‘생명과를 누가 먹는가?’보다 ‘생명은 누구에게서 오는가?’라는 질문일 것입니다. 강사는 생명나무가 예수님이며 생명과는 그리스도의 생명이라고 말합니다. 이 출발점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끝까지 밀고 가면 인간은 생명을 획득하여 자기 것으로 보관하는 존재가 아니라 매 순간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존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생명과를 먹었다고 해서 이후에는 주님 없이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난 것이 아님을 더 깊이 알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높은 ‘이긴 자’의 의식은 ‘나는 생명과를 먹었다’가 아니라 ‘주님만이 생명이십니다’일 것입니다. 가장 깊은 신인합일도 ‘내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왔으므로 이제 나는 특별한 존재다’가 아니라 ‘내게서 나오는 선은 하나도 없고, 모든 선과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라는 고백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이 고백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높은 단계에 두기 어려워지고, 오히려 주님께 더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명나무의 열매가 ‘열매’라는 사실도 중요합니다. 나무의 생명은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의 생명을 정말 받아들였다면 그 증거는 영적 단계에 대한 자기 확신보다 삶에서 나타나는 선일 것입니다. 전보다 더 용서하고, 더 정직하고, 더 오래 참으며,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고,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며, 맡겨진 쓰임을 더 기쁘게 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나무에서 열매가 맺히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에베소 교회에 주어진 약속은 먼 천국에서 어느 날 특별한 과일 하나를 먹게 된다는 약속을 넘어 오늘부터 시작되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선을 받아 사랑으로 행할 때마다 우리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조금씩 맛봅니다. 자기애를 선택하면 선악과의 오래된 길로 돌아가지만, 주님의 선을 선택하면 생명나무 쪽으로 향합니다. 에덴에서 잃어버린 생명나무가 계시록 마지막에 다시 나타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성경 전체의 이야기는 인간이 스스로 선악의 주인이 되려 했던 proprium의 질서에서 돌아서서, 다시 주님만이 생명의 원천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가는 질서로 회복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2강9부
천국의 세 층과 주님 사랑, 이웃 사랑 : 천국의 높이는 ‘장소’보다 사랑의 깊이다
2강 9부에서는 강의의 초점이 다시 ‘천국의 구조’ 그 자체로 옮겨갑니다. 강사는 천국을 1층천·2층천·3층천으로 구분하면서, 그 차이를 단순한 공간적 높이보다 사랑의 성격과 연결합니다. 특히 ‘천국은 사랑으로 충만한 나라’이며, 그 사랑은 크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 3층천은 주님 사랑이 특별히 뜨거운 성도들이 사는 곳이고, 2층천은 이웃 사랑이 특별히 강한 성도들이 사는 곳입니다. 이를 설명하면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예로 들어, 마리아는 주님 앞에 앉아 말씀 듣는 것을 가장 귀하게 여겼으므로 주님 사랑의 성격을, 마르다는 손님을 대접하는 일에 힘썼으므로 이웃 사랑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나타낸 사람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1층천 안에서도 주님 사랑이 강한 지역과 이웃 사랑이 강한 지역이 구별된다고 합니다. 이 대목은 지금까지의 2강 가운데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와 매우 가까이 접근하는 부분이면서도, 동시에 몇 가지 중요한 차이를 정밀하게 구별해야 하는 대목입니다.
먼저 ‘천국은 사랑으로 충만한 나라’라는 강사의 출발점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거의 그대로 받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을 천국 되게 하는 본질은 장소도, 화려한 환경도, 지식도 아니며 사랑입니다. 더 정확하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랑하는 상태입니다. 천국의 모든 지혜와 기쁨과 질서와 아름다움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 역시 천국의 가장 근본적인 사랑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강사가 천국의 세 층을 설명하면서 사랑을 중심에 둔 것은 매우 중요한 영적 직관입니다. 천국의 높낮이는 궁극적으로 ‘누가 더 높은 건물에 사느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와 깊이의 사랑 가운데 있느냐의 차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세 층은 정확히 말하면 천적 천국,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의 세 천국이며, 단순히 ‘주님 사랑이 많은 사람=3층, 이웃 사랑이 많은 사람=2층’이라는 한 가지 축만으로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가장 높은 천적 천국의 천사들은 주님 사랑의 선에서 진리를 퍼셉션하고, 둘째 영적 천국의 천사들은 체어리티의 선에서 진리를 받아들이며, 가장 낮은 천국의 천사들은 보다 외적이고 자연적인 방식으로 선과 진리를 살아갑니다. 따라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경쟁하는 두 사랑이 아니라, 한 주님의 사랑이 서로 다른 천국적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강사가 마리아와 마르다를 각각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대표처럼 연결하는 대목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강사의 설명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됩니다. 마리아는 주님 곁에 머물러 말씀을 듣는 것을, 마르다는 섬기는 일을 더 앞세웁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둘을 서로 대립하거나 서열화하기보다 하나의 천국적 삶 안에서 결합되어야 할 두 면으로 보는 것이 더 좋겠습니다. 참된 주님 사랑은 반드시 이웃 사랑으로 흘러나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의 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참된 주님 사랑이 될 수 없고, 참된 이웃 사랑 역시 궁극적으로는 이웃 안에 있는 주님의 선을 사랑하는 것이므로 주님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마리아적 사랑이 마르다적 쓰임으로 흘러가야 하고, 마르다적 섬김은 마리아적 주님 사랑에서 생명을 받아야 합니다. 어느 하나만 독립적으로 존재하면 천국적 완전성이 되지 못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사랑은 쓰임을 사랑한다’고 끊임없이 말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실제 쓰임으로 흘러나가지 않으면 아직 열매가 완성된 것이 아니며, 이웃을 위한 쓰임이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떠나 자기 공로와 인정욕을 섬기면 그 쓰임 역시 천국적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강사는 이어 천국 전체를 흐르는 ‘하나님의 빛과 생명수’를 설명합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천국은 ‘주님의 빛과 생명수로 되어 있으며’, 생명수는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빛과 생명수가 3층천과 2층천을 통과하여 아래 천국으로 흘러내리면서 주님 사랑이 강한 지역과 이웃 사랑이 강한 지역을 형성한다고 설명합니다. 동시에 이 빛과 생명수가 어느 일부에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국 전체에 질서 있게 흘러간다고 강조합니다. 이 부분은 상응이라는 관점에서 매우 풍성하게 열릴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빛은 실제 빛이면서 동시에 신적 진리입니다. 천사들이 사물을 보고 이해하는 빛은 자연계 태양의 빛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진리의 빛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열은 주님에게서 오는 신적 사랑에 상응합니다. 따라서 천국이 빛과 생명으로 충만하다는 강사의 표현은 단순한 시적 비유가 아니라 영계의 실제 질서와 매우 가까운 내용입니다. 다만 ‘생명수’를 별개의 성령이라는 어떤 영적 액체가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생명이 천국의 각 공동체와 천사들에게 그들의 받아들임의 상태에 따라 유입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설명에 더 가깝습니다. 모든 천국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지만, 각 천국과 각 공동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방식과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천국적 상태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강사가 ‘3층천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이 태양처럼 보이고, 2층천 성도들에게는 달처럼 보인다’고 설명하는 대목은 특별히 흥미롭습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천국 설명과 놀라울 만큼 가까우면서도 바로잡아야 할 부분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주님께서 신적 사랑 때문에 태양으로 나타나시며, 그 태양에서 천국의 빛과 열이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가장 높은 천국에서는 주님이 태양처럼 보이고 둘째 천국에서는 같은 주님이 달처럼 보인다는 식으로 단순하게 구분하는 것은 조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께서 천적 천국에는 태양으로, 영적 천국에는 달처럼 나타나신다는 표현이 있지만, 이것은 주님이 실제로 서로 다른 천체로 바뀌신다는 뜻이 아니라 천사들이 신적 사랑과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천적 천사들은 주님의 사랑을 보다 직접적으로 받아들이고, 영적 천사들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진리를 통하여 받아들이므로 그 외관이 다릅니다. 중요한 것은 ‘태양을 보는 천사가 더 높은 등급이라 더 좋은 하나님을 보고, 달을 보는 천사는 그보다 낮은 하나님을 본다’는 식의 차등적 하나님 관념이 아닙니다. 한 분 주님이 각자의 수용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천국을 이해하는 핵심 원리인 ‘수용에 따른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주님의 사랑과 진리는 무한하고 동일하지만 천사는 유한합니다. 따라서 각자는 자기 상태에 따라 그것을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자연계의 햇빛도 하나지만 수정과 유리와 물과 흙에 따라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차이는 태양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형체에 있습니다. 이 원리를 알면 천국의 세 층을 ‘하나님이 차등 지급하는 세 단계의 천국’으로 이해하는 대신,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진리를 서로 다른 깊이와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세 보편적 천국 상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편애로 만들어진 계급사회가 아니라 사랑의 상응에 따른 완전한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강사는 또한 천국의 상급과 위치를 연결하여 ‘주님에 대한 사랑이 강할수록 하나님 보좌에 가까워진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자연적 언어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과 더 가까운 천국 상태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보좌에 가까워진다’는 말을 자연계 궁전에서 왕에게 가까운 좌석을 차지하는 식으로 이해하면 천국을 인간 사회의 위계질서처럼 생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과의 가까움은 공간적 거리가 아니라 사랑의 가까움입니다. 주님과 사랑이 비슷할수록 ‘가깝고’, 반대되는 사랑일수록 ‘멀리’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가장 높은 상태는 가장 높은 신분을 얻은 상태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을 가장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상급’도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더 높은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더 많은 재산이나 명예를 보상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더 깊은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더 깊은 천국적 행복이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적 상태가 아름다운 옷, 집, 정원, 빛과 같은 외적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천국의 외관은 상급의 보너스가 아니라 내적 상태의 상응입니다. 이것은 앞서 흰옷과 세마포를 해설하면서 본 원리와 같습니다. 옷의 밝음이 공로의 훈장인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의 진리가 얼마나 순수하게 선과 결합되어 있는지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강사가 천국을 ‘주님 사랑의 천국’과 ‘이웃 사랑의 천국’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는 매우 의미 있는 출발점이면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한 단계 더 정교하게 열립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서로 다른 두 상품 중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의 차이는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도 아닙니다. 모두 사랑 안에 있습니다. 다만 가장 높은 천적 천국에서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직접적으로 받아 그 선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국에서는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연적 천국에서는 그 선과 진리가 보다 외적인 삶과 쓰임으로 구현됩니다. 같은 한 생명이 내적에서 외적으로 질서 있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하나님의 빛과 생명수가 천국에 골고루 질서 있게 흘러내린다’고 한 말은 오히려 매우 좋은 접점이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 전체는 하나의 ‘가장 큰 사람’, 곧 그랜드 맨(Maximus Homo)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가장 높은 천국과 가장 낮은 천국이 서로 독립된 세 나라가 아니라 하나의 주님의 몸과 같은 질서를 이룹니다. 높은 천국에서 오는 것이 낮은 천국에 전달되고, 각 공동체는 서로 다른 쓰임을 수행하면서 전체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위가 아래보다 귀하고 아래가 열등하여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머리가 손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고 손이 불필요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천국의 질서는 서열적 경쟁이 아니라 유기적 상응입니다.
이 원리를 교회 공동체에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과 기도 가운데 주님을 사랑하는 정서가 특별히 깊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병든 사람을 돌보고 어려운 사람을 섬기는 쓰임에서 특별한 기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둘 중 누구를 더 영적이라고 단순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참된 주님 사랑이라면 반드시 이웃의 선으로 흘러나오고, 참된 이웃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원천이 주님에게 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마리아만 있고 마르다가 없으면 쓰임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마르다만 있고 마리아가 없으면 쓰임이 자기 힘과 자기 공로로 흐를 위험이 있습니다. 천국적 질서는 이 둘이 서로를 살리는 질서입니다.
여기에서 ‘주님 사랑이 더 뜨거우면 3층천, 이웃 사랑이 더 뜨거우면 2층천’이라는 강사의 설명을 목회적으로도 너무 경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일 사람이 ‘나는 주님 사랑을 더 많이 해서 3층천에 가야겠다’고 생각한다면 그 순간 주님 사랑이 자기 등급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목적이 더 높은 천국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 사랑 안에 자기애가 섞이기 시작합니다. 참된 주님 사랑은 주님 자체를 사랑합니다. 천국의 높은 자리를 얻기 위해 주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체어리티는 상급을 얻기 위해 이웃을 섬기지 않습니다. 이웃의 선 자체를 기뻐하기 때문에 섬깁니다.
그래서 천국의 높이를 측정하는 가장 안전한 기준은 ‘나는 어느 천국에 갈 사람인가?’가 아니라 ‘내 사랑의 중심이 어디인가?’입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면서 그 사랑이 사람을 정죄하고 자기 교리를 자랑하게 만든다면 다시 살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주님의 진리와 무관하게 모든 것을 용납한다면 그것 역시 천국적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사랑에는 진리가 필요하고 진리에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두 가지가 결합될 때 천국의 질서가 됩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의 ‘익은 열매’라는 주제와도 연결됩니다. 익은 열매의 최종 표지는 특별한 체험이나 높은 천국의 자격증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한 사람의 실제 지배적 사랑으로 자리 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말과 행동과 쓰임으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천국의 어느 층에 들어갈지를 스스로 계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쓰임이 무엇인가?’를 묻게 됩니다. 천국은 사랑의 상태이므로 천국을 준비하는 가장 직접적인 길도 사랑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2강 9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천국을 1층천·2층천·3층천으로 구분하고, 특히 3층천은 주님 사랑이 뜨거운 성도들, 2층천은 이웃 사랑이 강한 성도들이 사는 곳이며, 하나님의 빛과 생명수가 위로부터 각 천국을 통하여 질서 있게 흘러내리고 그 사랑의 상태에 따라 하나님이 태양 또는 달처럼 보인다고 설명하는 강사의 천국론은 천국의 본질이 사랑이며 천국의 차이가 결국 사랑의 상태와 관계된다는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와 매우 놀라운 접점을 가지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세 천국을 단순한 영적 등급이나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경쟁적 서열로 보기보다 천적·영적·자연적 사랑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서로 다른 내적 단계로 이해하며,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 역시 서로 분리된 두 사랑이 아니라 한 주님의 사랑이 내적으로는 주님을 향하고 외적으로는 이웃을 향한 쓰임으로 흘러가는 하나의 천국적 생명의 서로 다른 표현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이번 9부에서 특히 깊이 붙들 만한 것은 ‘천국은 사랑으로 충만한 나라’라는 강사의 말입니다. 천국의 구조를 아무리 정확히 알아도 이 한 가지를 놓치면 사실상 천국을 모르는 것입니다. 1층천과 2층천과 3층천의 위치를 도표로 정확히 그릴 수 있고, 어느 층에서 주님이 태양처럼 보이고 어디에서 달처럼 보이는지 외울 수 있어도, 이웃의 선을 기뻐하지 못하고 자기 뜻만 사랑한다면 그 지식 자체가 천국의 상태를 만들지는 못합니다. 반대로 영계의 구조를 거의 몰라도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 안에는 이미 천국과 상응하는 질서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마리아와 마르다를 서로 경쟁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해 보입니다. 주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와 식사를 준비하며 섬기는 마르다는 결국 한 영적 인간 안에서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주님을 사랑하는 내적 생명이 이웃을 섬기는 외적 쓰임으로 흘러나와야 합니다. 내적인 마리아가 없는 마르다는 쉽게 자기 일과 자기 공로에 빠질 수 있고, 외적인 마르다가 없는 마리아는 사랑을 삶의 열매로 나타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천국에서는 둘이 하나가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으로 옮기면 이것은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 의지와 이해, 그리고 마지막에는 쓰임의 결합입니다. 천국의 가장 깊은 사랑도 쓰임이 되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천사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지혜를 주시는 이유도 그들이 더 높은 ‘지위’를 누리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깊고 넓은 쓰임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높은 존재가 가장 많은 사람에게 섬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가장 깊이 주님에게서 받아 가장 기쁘게 섬기는 존재라는 역설이 여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느 천국에 갈 것인가?’보다 더 좋은 질문은 ‘나는 지금 어떤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는가?’일 것입니다. 말씀을 읽을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는가, 주님을 사랑할수록 이웃의 선이 더 귀해지는가, 이웃을 섬기면서 자기 공로가 아니라 주님께 감사를 돌리는가, 그리고 나와 전혀 다른 쓰임을 가진 사람의 선도 기뻐할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랑의 질서가 사람 안에서 조금씩 형성될 때, 천국은 죽은 뒤에 처음 만나는 낯선 삼층 건물이 아니라 이미 지금 우리의 속 사람 안에서 시작되는 주님의 나라가 됩니다.
2강10부
흰옷과 ‘그리스도의 생명 내주합일’ : 죄성이 사라지는가, 아니면 주님의 생명이 지배하게 되는가
2강 10부에서는 앞에서 다룬 천국의 세 층과 주님 사랑·이웃 사랑의 문제에서 다시 ‘흰옷’과 ‘이긴 자’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강사는 요한계시록 7장의 큰 무리를 언급하면서, 큰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말씀을 읽고,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결국 흰옷을 입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어 ‘벌거벗은 수치’를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아 나타나는 부끄러운 행실로 설명하고,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그러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실제 경험으로 받아 의인이 된 상태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흰옷은 단순한 상징적 이미지가 아니라 ‘광야 연단을 마치고 죄의 문제를 해결한 성도’에게 주어지는 매우 구체적인 영적 표지입니다.
이 대목은 지금까지 이 강의에서 반복해 온 ‘익은 열매’, ‘이긴 자’, ‘광야 연단’, ‘생명과’, ‘흰옷’이 사실상 하나의 상태를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한 것이라는 강사의 이해를 다시 확인하게 합니다. 죄성과 정욕의 지배 아래 있는 동안에는 자기 옷이 더럽혀지고 벌거벗은 수치가 드러나지만, 보혈의 은총과 연단을 통하여 그 문제가 해결되면 흰옷을 입고, 생명과를 먹으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되는 상태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 상태를 매우 높은 의미의 ‘이긴 자’에게만 적용하고, 교회 시대 동안 지상에서 이미 흰옷을 입은 성도는 결국 14만 4천의 ‘교회 시대 이긴 자들’이라고까지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부분에는 귀하게 받을 요소와 반드시 구별해야 할 요소가 동시에 있습니다. 먼저 ‘흰옷’을 삶과 실제 영적 상태에 연결하는 강사의 기본 방향은 중요합니다. 사람이 입으로만 신앙을 고백하고 실제 삶은 계속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도 ‘나는 이미 완전히 의롭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경회가 신앙의 실제 열매를 계속 요구하는 힘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옷’은 기본적으로 진리를 표상합니다. 몸이 옷을 입듯 선은 진리로 둘러싸여 외적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흰옷’은 단지 죄가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증명서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진리가 순수하게 되어 그 사람의 선한 사랑과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흰옷을 ‘이제 죄성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어 더 이상 내 안에 악의 근원이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거듭난 사람에게도 proprium에서 나오는 악의 성향은 남아 있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그것을 억제하시고, 사람이 그것을 자기 생명으로 사랑하지 않도록 하시며, 선과 진리가 지배하도록 질서를 바꾸십니다. 천사들조차 자기 자신에게서 선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높은 천사일수록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오며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흰옷의 참된 빛은 ‘나는 이제 깨끗하다’는 자기 확신의 빛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그 사람의 삶을 통하여 순수하게 비치는 빛이라고 보는 편이 더 천국적입니다.
강사는 이어 로마서 8장 10절,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를 ‘이긴 자’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의 해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는 것이 곧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어 생명과를 먹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육체에는 여전히 죄성의 뿌리가 있지만 영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 의로 살아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은 강사의 체계 안에서도 꽤 세밀한 구별을 보여 줍니다. 한편으로는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강하게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에는 여전히 죄성의 뿌리가 남아 있다고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매우 중요한 접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자연적 proprium은 본질적으로 주님에게서 독립적인 선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란 인간 안에서 ‘악의 가능성 자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지배하는가가 바뀌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중심이었고 진리를 자기 욕망을 위해 사용했다면,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주님과 이웃의 선이 중심이 되고 자연적 욕망은 그 아래 질서 있게 놓입니다. 악은 더 이상 왕이 아니며,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강사가 말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된다’는 표현을 스베덴보리식으로 조금 더 안전하게 옮기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의 속 사람에 받아들여져 그의 지배적 사랑과 삶을 이루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내주’는 이해할 수 있지만 ‘합일’은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인간의 생명과 주님의 신적 생명이 존재론적으로 하나의 본질로 융합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원히 피조물이고 주님은 영원히 창조주이십니다. 결합은 깊어질 수 있지만 구별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생명이 내 안에 들어와 내 생명 자체가 되었다’는 표현을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면 인간이 신적 생명을 독립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생명은 매 순간 주님에게서 유입됩니다. 인간은 그 생명을 마치 자기 것처럼 느끼며 자유롭게 살아가지만 실제 원천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천국의 자유가 바로 이 역설 위에 있습니다. ‘내 것처럼 살되 내 것이 아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강사가 흰옷을 설명하면서 ‘예수님도 마음대로 그냥 입혀 주실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그렇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부분도 눈에 띕니다. 이 말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임의적인 특혜가 아니라 일정한 영적 질서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죄를 사랑하면서도 아무 변화 없이 ‘그냥 흰옷을 입혀 주시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기본 직관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은 아무도 임의로 천국에 넣지 않으십니다. 천국은 사랑과 삶의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도 마음대로 못 하신다’는 표현은 신학적으로 조금 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이 어떤 더 높은 법에 묶여 어쩔 수 없이 따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신적 질서 자체가 주님에게서 나오며, 주님의 사랑과 지혜는 언제나 그 질서와 하나입니다. 주님은 자비롭기 때문에 질서를 무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바로 무한한 자비 때문에 사람의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해치지 않는 질서로 구원하십니다. 강제로 천국적 사랑을 주입하는 것은 구원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흰옷을 그냥 입혀 줄 수 없다’는 말의 더 깊은 의미도 보입니다. 사람이 악을 사랑하는 상태 그대로인데 외부에서 천국적 진리의 상태만 덮어씌울 수는 없습니다. 옷은 몸과 맞아야 합니다. 말씀의 상응으로 표현하면 선과 진리가 결합해야 합니다. 내면의 사랑은 자기애인데 외적으로만 천국적 진리의 흰옷을 입는다면 그것은 오래 유지될 수 없습니다. 사후에는 외적 가면이 벗겨지고 실제 사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람의 겉모습만 천국적으로 꾸미시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의 사랑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강사는 흰옷을 입었다는 영적 체험을 주장하는 경우에 대해서도 경계합니다. 꿈이나 환상에서 예수님이 흰옷을 입혀 주셨다고 해서 곧바로 자신이 계시록의 ‘이긴 자’가 되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환상은 특정 부분의 행실이 하나님 앞에 합당하다는 일시적 상징일 수 있으며,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혈기와 죄성의 지배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이번 강의에서 매우 귀하게 받을 수 있는 대목입니다. 강사 자신의 체계가 영적 체험을 많이 다루면서도, 체험 하나를 곧 최종 영적 상태로 확정하지 않도록 경계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이 경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계의 형상을 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영적 성숙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환상 속에서 흰옷을 입었다고 해도 중요한 것은 그 뒤 실제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입니다. 더 겸손해졌는가, 더 온유해졌는가, 진리를 더 사랑하게 되었는가, 이웃에게 더 선한 쓰임이 되었는가가 중요합니다. 영적 체험은 얼마든지 사람의 기억 속에 남을 수 있지만 거듭남은 지배적 사랑의 변화로 나타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의 영계에서는 모든 형상이 상응합니다. 흰옷을 보았다면 그것은 어떤 진리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을 문자 그대로 ‘내가 영구적인 흰옷을 지급받았다’는 신분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영계의 옷은 내적 상태와 함께 변합니다. 진리의 상태가 달라지면 그에 상응하는 외관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 형상의 의미는 항상 그 사람의 실제 사랑과 진리의 상태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강사는 이어 계시록에 나타나는 옷을 몇 가지로 구별하며 ‘자기 옷’, ‘흰옷’, ‘세마포’를 구분합니다. 자기 옷은 행실을 뜻하고,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으면 더럽혀질 수 있으며 회개하면 다시 빨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은 강사의 체계 안에서 매우 직관적입니다. 사람의 행실은 더럽혀질 수도 있고 깨끗해질 수도 있으며, 그러므로 지속적인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조금 더 정교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옷은 진리이고, 그 진리가 실제 행실로 나타나므로 행실과 옷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악한 사랑이 진리를 지배하면 진리가 더럽혀지고, 선한 사랑이 진리를 받아들이면 진리가 희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진리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묻게 합니다. 같은 성경 구절도 자기애를 위해 사용하면 더럽혀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순종’을 지도자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용한다면 진리의 옷이 지배욕으로 더럽혀질 수 있습니다. ‘축복’을 자기 탐욕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가르친다면 진리가 세상 사랑에 종속됩니다. 반대로 같은 말씀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여 자기 악을 보고 회개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데 사용한다면 진리는 선과 결합됩니다. 그러므로 진리 자체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것을 어떤 사랑 아래 두느냐에 따라 그것이 그의 삶에서 더럽게 또는 밝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흰옷’은 단순히 ‘나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상태보다 훨씬 깊습니다. 진리가 자기애에서 벗어나 주님의 선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사람은 외적으로 매우 도덕적이면서도 그 도덕성을 자기 의의 근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겉으로 깨끗해 보여도 내적으로는 자기 공로가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기 약점을 잘 알고 끊임없이 주님의 자비를 의지하면서 진리를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은 외적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그 방향 자체가 천국적일 수 있습니다. 흰옷의 본질은 인간적 무결점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선한 사랑과 순수하게 결합되는 데 있습니다.
강사는 교회 시대 동안 지상에서 이미 흰옷을 입은 사람을 14만 4천으로 한정합니다. 이 부분은 앞서 여러 번 살펴본 것처럼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144,000은 문자적 인원수로 제한된 영적 엘리트 집단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충만하게 결합된 교회의 전체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흰옷이라는 영적 상태도 정확히 144,000명에게만 허락된 독점적 상태로 볼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을 가능한 가장 충만한 천국적 상태로 이끄십니다.
더구나 ‘흰옷’을 받은 사람을 별도의 영적 계급으로 고정하면 자기 상태를 측정하려는 유혹이 커질 수 있습니다. ‘나는 흰옷을 입었는가?’, ‘나는 아직 자기 옷을 빨고 있는가?’, ‘나는 14만 4천의 단계인가?’라는 질문이 신앙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는 더 직접적인 질문이 중요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보여 주신 악을 나는 죄로 인정하고 있는가?’, ‘오늘 알고 있는 진리를 실제로 행하고 있는가?’, ‘내 안에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이 점점 지배적인 사랑이 되고 있는가?’입니다. 영적 등급을 계산하기보다 실제 사랑과 삶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말하는 ‘벌거벗은 수치’도 깊이 볼 수 있습니다. 강사는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아 부끄러운 행실이 나타나는 것이 벌거벗은 수치라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벌거벗음’은 문맥에 따라 여러 의미를 갖지만, 악한 의미에서는 선과 진리가 없는 상태, 또는 인간의 proprium이 그대로 드러난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자기 힘과 자기 지혜로 선하다고 생각할 때에는 스스로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신적 진리의 빛 앞에서는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드러납니다. 그때 자기 공로와 자기 의가 무너지고 ‘나는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선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영적으로 벌거벗지 않는 가장 깊은 길은 자기 선으로 자기를 덮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의를 만들어 옷처럼 두르는 것과 정반대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거룩하다’, ‘나는 이 정도 연단을 통과했다’, ‘나는 흰옷을 입었다’는 자기 확신 자체가 오히려 자기 옷이 될 수 있습니다. 천국적 흰옷은 자기 의의 옷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의 옷입니다.
이 점에서 로마서 8장 10절을 강사가 ‘이긴 자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으로 제한하는 데에도 조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강사의 체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는 상태를 매우 높은 내주합일의 단계로 이해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에게 들어와 생명이 되는 과정은 거듭남의 모든 단계에서 일어납니다. 정도와 깊이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이 14만 4천이라는 특정 집단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만큼 그 생명이 그의 사랑과 삶 안에 자리 잡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다’는 말은 인간이 자신의 생명을 자기에게서 찾지 않고 주님에게서 받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삶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사실을 교리적으로 알고, 나중에는 시험을 통하여 실제로 깨닫습니다. 자기 힘으로 악과 싸우다 실패하면서 주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고, 선을 행한 뒤 자기 공로를 주장하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 ‘이 선도 주님에게서 왔다’고 인정하게 됩니다. 그렇게 주님과의 결합이 점점 깊어집니다.
이번 10부에서는 강사가 ‘육체에는 죄성의 뿌리가 여전히 있지만 영에는 생명이 있다’고 말한 부분을 특히 주목할 만합니다. 이 표현을 그의 전체 체계 안에서 조금 더 발전시킨다면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핵심은 죄성이라는 어떤 실체를 완전히 추출해 버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인간을 다스리는가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적 인간에는 계속 자기애의 가능성이 있지만,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의지가 그것을 아래에 두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질서입니다.
거듭남 이전에는 자연적 인간이 속 사람을 끌고 다니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옳다’, ‘나에게 유리한 것이 선이다’,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다’가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 속 사람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자연적 인간을 다스리기 시작합니다. 돈을 벌지만 돈이 주인이 아니고, 명예를 맡을 수 있지만 명예가 생명의 목적은 아니며, 자연적 즐거움을 누리지만 그것이 주님의 질서를 넘어서지 않습니다. 이것이 천국적 질서입니다.
따라서 ‘죄성이 해결되었다’는 말을 ‘악의 가능성이 사라졌다’보다 ‘악이 더 이상 지배권을 가지지 못한다’고 이해하면 훨씬 안전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인간은 자기 힘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의 악의 가능성을 더 잘 알기 때문에 주님께 더욱 의존합니다. 이것이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겸손도 깊어지는 이유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흰옷’은 완덕의 졸업복이라기보다 주님과 결합되어 살아가는 상태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옷은 ‘나는 이제 도착했다’는 옷이 아니라 ‘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살아야 한다’는 옷입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계속 그 옷을 주님에게서 받습니다. 그들의 진리도 그들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계속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연단’을 더욱 아름답게 바꾸어 줍니다. 연단의 목적은 흰옷을 받을 자격을 만들어 내는 인간적 성취가 아닙니다. 연단 가운데 자기 힘으로는 선할 수 없음을 보게 되고, 자기 의가 벗겨지고, 주님의 진리에 더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진리가 점점 삶의 옷이 됩니다. 그러므로 연단의 열매는 ‘나는 강해졌다’가 아니라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더 깊이 압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2강 10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큰 환난을 통과한 성도들이 어린양의 피에 자기 옷을 씻어 희게 한 것과 사데 교회의 이기는 자가 흰옷을 입는 약속을 연결하여, 죄성과 정욕의 지배에서 완전히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경험으로 받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영 안에 내주합일된 교회 시대 이긴 자가 흰옷을 입으며, 이러한 성도들이 14만 4천이라고 설명하는 강사의 해석은 신앙을 외적인 고백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삶과 인격의 정결을 요구한다는 강한 장점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흰옷을 죄의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된 인간적 완덕의 증표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순수한 진리가 선한 사랑과 결합하여 사람의 삶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상태로, ‘그리스도의 생명 내주합일’을 인간이 신적 생명 자체를 소유하는 존재론적 융합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되는 선과 진리가 그의 지배적 사랑과 삶을 이루는 깊은 결합으로, 죄성의 해결을 악의 뿌리가 존재에서 삭제되는 것보다 악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새 의지가 자연적 인간을 다스리게 되는 질서의 회복으로 이해할 때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집니다.’
그리고 이번 10부에서 가장 중요하게 남길 것은 어쩌면 강사 자신이 한 말 속에 이미 들어 있습니다. ‘육체에는 여전히 죄성의 뿌리가 있지만 영에는 생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표현을 조금만 더 깊이 밀고 가면 ‘흰옷 입은 사람’도 자기에게서 완전히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보입니다. 그에게도 주님이 계속 필요합니다. 자연적 인간의 proprium은 여전히 주님의 질서 아래 있어야 하고, 생명은 계속 주님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흰옷을 입은 사람의 가장 특징적인 태도는 ‘나는 깨끗해졌다’는 자기 확신보다 ‘주님께서 저를 깨끗하게 하십니다’라는 의존일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생명과를 먹었다’보다 ‘주님만이 생명이십니다’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영적 성숙이 높아질수록 자기 신분에 대한 확신이 커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에 대한 의존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 체험을 분별하는 데도 좋은 기준이 됩니다. 꿈에서 흰옷을 입었다는 체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다음 날 배우자에게 어떻게 말하는가이고, 자신을 비판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이며, 돈과 명예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가입니다. 환상 속 흰옷은 한순간 보일 수 있지만 삶의 흰옷은 매일의 선택 속에서 나타납니다. 주님의 진리가 자기애에 더럽혀지지 않고 실제 선과 체어리티로 나타나는가가 중요합니다.
결국 흰옷은 ‘나는 어느 단계에 올라갔는가?’를 증명하기 위한 옷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를 입고 살아가는 옷입니다. 그리고 그 옷이 정말 희어질수록 사람은 자기 옷을 바라보는 시간이 줄고 어린양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날 것입니다. 계시록의 중심은 흰옷 입은 사람의 위대함이 아니라 그 옷을 희게 하시는 어린양이시기 때문입니다.
2강11부
‘자기 옷, 세마포, 흰옷’ : 천국의 옷은 상급의 훈장인가, 내적 선과 진리가 밖으로 드러난 상응인가
2강 11부에서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 등장했던 ‘옷’의 문제가 하나의 체계로 정리됩니다. 강사는 계시록에 나타나는 옷을 크게 ‘자기 옷’, ‘세마포’, ‘흰옷’으로 구별합니다. ‘자기 옷’ 또는 ‘두루마기’는 사람의 행실과 생활 인격을 뜻하며,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으면 더러워지고 회개와 보혈을 통하여 다시 빨 수 있는 옷입니다. ‘세마포’는 천국에 들어간 뒤 지상에서 행한 삶과 상급에 따라 주어지는 옷이고, ‘흰옷’은 이 땅에서 광야 연단을 마치고 ‘이긴 자’가 되어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경험적으로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옷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강사의 체계에서는 세 종류의 옷이 서로 다른 영적 단계와 역할을 나타내며, 특히 흰옷은 지상에서 이미 정결의 완성에 이른 ‘이긴 자’의 표지라는 성격을 갖습니다. 이 구분은 강사의 전체 성화론을 상당히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사람의 일상적인 행실이 먼저 있고, 그것이 광야 연단과 회개를 통하여 정결해지며, 그 결과 흰옷을 입는 이긴 자의 상태에 이르고, 사후에는 지상에서 맺은 행실의 열매에 따라 천국의 세마포와 여러 상급이 주어진다는 구조입니다.
여기서 먼저 ‘옷’을 단순한 장식물로 보지 않고 인간의 영적 상태와 연결하는 강사의 기본 직관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상응에서 ‘옷’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행실’ 그 자체라기보다 ‘진리’입니다. 몸이 옷을 입듯 선은 진리를 입습니다. 선은 인간의 의지와 사랑에 속하고, 진리는 그 선이 어떻게 생각되고 표현되며 행해지는가를 둘러싸는 형체가 됩니다. 그래서 천사들이 입는 옷도 그들의 내적 진리 상태와 상응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강사의 ‘행실’ 해석을 전부 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가 실제 삶과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행하면 그 진리는 그의 생활과 인격 속에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옷=행실’이라고 바로 등치하기보다 ‘옷은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이며, 그 진리가 실제 삶에서 행실로 나타난다’고 한 단계 더 정밀하게 설명하면 두 관점이 상당히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자기 옷이 더러워진다’는 말도 더욱 깊어집니다. 강사는 자기 옷이 더러워지는 것을 죄성과 정욕의 지배를 받아 부끄러운 행실이 나타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것은 실제 삶의 차원에서 매우 분명한 설명입니다. 그러나 상응적으로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진리가 악한 사랑과 결합하여 왜곡되는 상태까지 포함할 수 있습니다. 진리 자체는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진리는 언제나 순수합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 진리를 무엇을 위해 사용하는가입니다. 자기애와 명예욕과 지배욕이 진리를 붙잡으면 진리의 외형은 남아 있으면서도 그 쓰임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순종’이라는 진리가 사람을 주님께 순종하게 하는 대신 지도자 개인에게 절대 복종시키는 데 사용될 수 있고, ‘교회의 질서’라는 진리가 조직의 잘못을 덮는 데 쓰일 수도 있으며, ‘성결’이라는 진리가 다른 사람을 낮추고 자기 영적 수준을 자랑하는 근거로 사용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때 진리의 옷이 인간의 proprium에 의해 더럽혀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시록 16장의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을 강사는 주님의 재림 직전에 성도가 자기 행실을 정결하게 지켜야 한다는 경고로 읽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옷을 지키는 사람이 천년왕국에 들어가는 복을 받는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말씀을 어느 미래 시점의 마지막 점검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깨어 있음’은 언제나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생각을 말씀의 빛으로 살피는 상태이고, ‘옷을 지킨다’는 것은 주님께 받은 진리가 자기애와 거짓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도록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도적같이 오심’ 역시 단순히 미래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시는 시간적 사건뿐 아니라, 신적 진리가 예기치 않은 순간 우리의 실제 상태를 드러내는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평소에는 자기가 온유하다고 생각하다가 모욕을 당하는 순간 숨은 분노가 드러날 수 있고, 정직하다고 생각하다가 큰 이익이 걸린 순간 탐욕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때 진리가 우리에게 갑자기 ‘옵니다’. 바로 그 순간 옷을 지키는가가 중요합니다.
이어 강사는 계시록 7장의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이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는 말씀을 읽으면서, 자기 옷은 더러워져도 보혈로 다시 빨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래서 성도는 자기 옷을 ‘부지런히 빨아야’ 하고, 그 과정을 통하여 자아가 깨어지고 정결해져 익은 열매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부분에는 이 사경회의 중요한 영적 장점이 다시 드러납니다. 신앙생활 중에 넘어지거나 행실이 더러워졌다고 해서 ‘이미 구원받았으니 상관없다’고 하지 않고, 실제 회개와 정결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번 실패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라 다시 씻고 회개하며 계속 정결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거듭남의 점진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어린양의 피’를 단순히 십자가에서 흘리신 자연적 혈액 자체로만 읽지 않고 주님의 신적 진리, 특히 인간을 구속하고 거듭나게 하는 진리를 표상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피에 옷을 씻는다’는 것은 놀라운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자연적 피로 흰옷을 빨면 오히려 붉어지지만 계시록에서는 피로 빨수록 희어집니다. 이미 여기서 문자 이상의 의미를 요구합니다. 주님의 신적 진리가 인간의 거짓을 밝히고, 악을 죄로 깨닫게 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사람의 진리가 순수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보혈의 은총과 말씀에 따른 실제 회개는 서로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주님의 구속은 인간의 죄를 단지 외적으로 덮어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실제로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는 능력입니다.
계시록 22장의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라는 말씀도 강사는 같은 맥락에서 읽습니다. ‘두루마기’ 역시 자기 행실이며,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광야 연단 가운데 자기 생활 인격을 깨끗하게 빨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도 삶의 정결을 강조하는 강사의 방향은 귀하지만, ‘새 예루살렘’을 미래에 들어갈 자연적 형태의 거대한 천국 도시로만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와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새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세우시는 새 교회, 특히 그 교회의 참된 교리를 표상합니다. 그러므로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떤 천국 도시의 출입 허가증을 얻는 장면만이 아니라, 주님의 진리를 받아 새 교회의 선과 진리 안으로 실제로 들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문’은 입문하게 하는 진리이며, 그 진리를 살아야 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따라서 ‘두루마기를 빤다 → 새 예루살렘에 들어갈 권세를 얻는다’는 말씀은 공로를 쌓아 천국 입장권을 얻는 구조가 아닙니다. 사람이 주님의 진리를 받아 악과 거짓을 거절하면서 그 진리에 맞는 삶의 상태가 되어 가기 때문에, 그와 같은 선과 진리의 질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천국은 법적 자격증 하나를 확인하여 들여보내는 나라가 아니라 상태가 같은 사람들이 결합하는 나라입니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의 문은 밖에서 잠겨 있다가 어떤 점수가 되면 열리는 문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가 그 성의 선과 진리와 상응할 때 자연스럽게 들어갈 수 있는 문입니다.
이제 강사가 구별하는 두 번째 옷인 ‘세마포’를 보겠습니다. 강사는 세마포를 지상에서 행한 ‘행함’과 상급에 따라 천국에서 받는 옷이라고 설명합니다. 흰옷은 지상에서 이긴 자가 되어 입을 수 있지만, 세마포는 천국에서 상급으로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어 천국에서 받는 상급에는 지혜, 인격, 주택, 환경, 세마포 옷, 면류관, 사랑 등이 있고, 1층천보다 2층천, 2층천보다 3층천의 성도들이 더 큰 상급을 받으며, 그 차이가 옷의 밝기와 화려함에도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옷을 보면 ‘저분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던 분이구나’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천국 묘사와 외관상 상당히 비슷합니다. 천사들의 옷은 실제로 서로 다르며, 높은 천국의 천사들에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밝고 아름다운 옷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설명하는 방식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사의 세마포나 밝은 옷은 지상에서 선행한 양만큼 하나님께서 사후에 ‘보상물’로 지급하는 훈장이 아닙니다. 그 천사의 내적 상태와 상응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천사의 선이 더 내적이고 그 선에서 나오는 진리가 더 순수하면, 그 진리의 상태가 더 밝고 아름다운 옷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옷은 ‘상급’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외적 보상이 내적 상태에 덧붙여지는 방식의 상급이 아니라, 내적 선과 진리 자체가 외적 형상으로 나타난 상급입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천국에서는 존재와 상급이 분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 사랑하는 것이 곧 더 큰 행복이고, 더 지혜로운 것이 곧 더 큰 빛이며, 더 순수한 진리가 곧 더 밝은 옷으로 나타납니다.
계시록 19장에서도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강사의 ‘행함과 세마포’ 연결은 분명 성경적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다만 상응적으로는 그 ‘옳은 행실’이 단순한 외적 행위의 누적이 아니라 선에서 나온 진리의 삶이라는 점을 보아야 합니다. 두 사람이 같은 구제를 해도 그 행위의 영적 질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정말 이웃의 선을 위해 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기 위해 줄 수 있습니다. 외적 행실만 세면 같지만 영계에서 나타나는 ‘옷’은 같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옷은 행위의 숫자가 아니라 그 행위를 움직인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온 진리의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강사의 ‘행한 대로 상 받는다’는 강조를 더욱 깊게 이해하도록 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오히려 삶이 결정적입니다. 그러나 행위의 생명은 사랑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것을 행합니다. 그래서 행위는 그 사람의 내면을 완성하고 확정하는 기능을 합니다. 단지 생각만 한 선보다 실제로 행한 선이 인간의 의지와 더 깊이 결합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행한 대로’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위의 개수를 계산하여 상금을 차등 지급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실제 삶에서 형성한 사랑과 선의 정도에 따라 그가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3층천의 천사가 더 밝은 세마포를 입고 있다고 해서 1층천의 천사가 억울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비교에서 생기는 시기와 열등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사랑과 쓰임 안에서 충만합니다. 작은 그릇도 가득 차 있고 큰 그릇도 가득 차 있습니다. 그릇의 크기는 다르지만 행복의 충만함은 각자의 상태에서 완전합니다. 이것이 자연계의 계급사회와 천국의 질서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그래서 천국의 차이를 ‘차별’이나 ‘우열’보다 ‘서로 다른 사랑과 쓰임의 질서’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합니다.
강사가 세 가지 옷 가운데 ‘무엇이 제일 좋은가?’라고 묻고 흰옷을 가장 좋은 것으로 말하는 부분 역시 강사의 단계적 영성 이해를 잘 보여 줍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자기 옷·세마포·흰옷을 서로 경쟁하는 세 등급의 옷으로 분리하기보다는 말씀의 각 문맥에서 진리의 서로 다른 상태를 보여 주는 표현들로 보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흰옷’은 진리의 순수함을, ‘세마포’는 특별히 선에서 나오는 영적·천국적 진리와 의로운 삶을, ‘옷을 씻는다’는 것은 그 진리를 악과 거짓에서 정결하게 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각 표현은 문맥에 따라 초점이 다를 뿐 반드시 ‘자기 옷보다 세마포가 높고 세마포보다 흰옷이 높다’는 고정된 천국 의복 서열표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흰 세마포라는 표현 자체가 나타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둘을 너무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가 바로 밝고 순수한 진리의 상태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상응은 동일한 영적 실재를 여러 형상으로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 용어를 하나의 고정된 영적 등급에 배정하기보다 그 문맥에서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인간이 만든 상징 사전의 중요한 차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상응은 ‘A는 언제나 B’라는 기계적 암호표가 아니라 말씀의 전체적 질서와 문맥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영적 언어입니다.
이 점은 이 사경회의 ‘모형적 진리’를 다룰 때에도 계속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강의는 성경의 여러 사건과 사물을 매우 체계적으로 영적 단계에 배치합니다. 출애굽은 구원, 광야는 연단, 할례는 죄성 제거, 가나안은 생명과의 상태, 흰옷은 이긴 자, 세마포는 사후 상급이라는 식입니다. 이런 구조는 기억하기 쉽고 신앙생활에 분명한 목표를 준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고정되면 말씀의 풍성한 속뜻이 한 개의 단계표 안에 갇힐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는 이 체계의 영적 열망은 존중하면서도, 말씀 자체의 상응은 그보다 훨씬 더 넓고 깊게 펼쳐진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강사가 ‘자기 옷을 지키라’는 말씀을 재림 직전의 성도들에게 주신 경고로 읽는 부분에서도 이 차이가 나타납니다. 미래의 종말을 준비하라는 경고로 받아들이는 것은 강사의 체계 안에서는 일관됩니다. 그러나 상응적 의미에서는 매 순간이 주님의 오심 앞에 있습니다. 진리가 내게 임할 때 내 실제 상태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나는 말씀의 진리를 알고 있지만 그것을 자기 의의 옷으로 입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선을 섬기는 진리의 옷으로 입고 있는가? 내가 가진 신학 지식은 사람을 품는가, 사람을 재단하는가? 내가 아는 영계의 지식은 나를 겸손하게 하는가, 특별하게 느끼게 하는가? 이런 질문들이 ‘자기 옷을 지키는’ 일을 현재의 거듭남으로 가져옵니다.
여기에서 ‘벌거벗음’의 의미도 다시 깊어집니다. 사람이 진리의 옷을 잃으면 proprium의 실제 모습이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인간이 자기 선과 자기 지혜로 스스로를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진리가 깊이 들어오면 자기가 얼마나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의존하고 있었는지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부끄러운 경험일 수 있지만 동시에 매우 중요한 거듭남의 시작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벌거벗었다는 것을 알아야 주님에게서 옷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미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주님의 진리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기의 완전함을 선언하는 것과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진리를 입은 사람일수록 자기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proprium을 더 잘 보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인간보다 훨씬 밝은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자기 빛을 자랑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빛이 자기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흰옷의 밝음과 겸손의 깊이는 함께 갑니다.
이것은 수도적 영성에도 매우 중요한 분별 기준입니다. 외적으로 검소한 옷을 입는 것과 영적으로 흰옷을 입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아주 검소하게 살면서도 자기 검소함을 자랑할 수 있고, 누군가는 세상적인 옷을 평범하게 입으면서도 자기 공로를 거의 주장하지 않고 주님의 선을 받아 이웃에게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외적인 옷은 영적 상태의 표지가 될 수도 있지만 그 자체가 상태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옷은 사람 앞에서 입는 수도복이나 성직복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속 사람이 입고 있는 진리의 옷입니다.
그러므로 이 강의의 ‘옷’에 관한 설명은 시흥영성수련원의 수도적 전통과도 의미 있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수도적 훈련은 외적 생활을 단순하게 하고 절제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지만, 그 목적은 내적인 옷을 깨끗하게 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을 줄이면서 판단하는 마음은 더 강해진다면 아직 옷이 희어졌다고 말하기 어렵고, 많은 것을 포기하면서 ‘나는 이렇게 버린 사람’이라는 자기 공로가 커진다면 또 다른 얼룩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반대로 훈련을 통하여 자기 판단이 줄고, 다른 사람의 약점을 더 오래 품게 되며, 자기 공로를 덜 주장하고, 주님의 진리를 더 순수하게 살아가게 된다면 외적 수도생활이 내적 정결의 쓰임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2강 11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계시록의 옷을 ‘자기 옷·세마포·흰옷’의 세 종류로 구별하여 자기 옷은 죄성과 정욕에 따라 더러워지거나 보혈과 회개로 씻을 수 있는 행실과 생활 인격, 세마포는 지상에서 맺은 행함과 상급에 따라 천국에서 받는 옷, 흰옷은 지상에서 광야 연단을 마치고 의롭다 하심을 경험적으로 받은 이긴 자의 특별한 표지라고 설명하는 강사의 체계는 신앙의 실제 삶과 정결, 그리고 지상생활의 영원한 의미를 강하게 강조한다는 장점을 가지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말씀의 옷을 기본적으로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로 이해하고, 옷이 더럽혀짐을 그 진리가 자기애와 세상 사랑에 종속되어 왜곡되는 상태로, 옷을 씻음을 주님의 신적 진리에 따라 거짓과 악을 죄로 알고 거절하여 진리가 다시 순수해지는 과정으로, 흰옷과 세마포의 밝음을 인간의 공적에 따라 외부에서 지급되는 천국의 훈장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의 내적 상태가 영계에서 상응하여 밖으로 나타나는 형상으로 이해할 때 그 아르카나가 더욱 깊이 열립니다.’
이번 11부에서 특별히 붙들 만한 것은 강사가 반복하는 ‘자기 옷을 빨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 표현은 자칫하면 ‘내가 내 힘으로 나를 깨끗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자기완성의 언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원리로 읽으면 훨씬 균형 있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실제로 자기 옷을 빨아야 합니다. 악을 죄라고 인정하고 거절해야 하며, 잘못했으면 회개하고 삶을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물도 주님에게서 오고, 무엇이 더러운지 보여 주는 빛도 주님에게서 오며, 그것을 씻을 힘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씻지만 실제 정결의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리고 옷은 한 번 빨았다고 영원히 세탁이 필요 없는 물건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현실과 잘 맞습니다. 오늘 한 악을 이겼다고 모든 악을 이긴 것은 아니고, 한 영역에서 자기애를 발견했다고 proprium의 모든 층을 본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조금씩 더 깊은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계속되는 정결입니다. 그 과정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내 옷이 얼마나 희어졌는가’를 자랑하기보다,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작은 얼룩까지 더 잘 보게 됩니다.
어쩌면 바로 이것이 진짜 흰옷에 가까워지는 표지인지도 모릅니다. 처음에는 큰 죄만 보이지만 나중에는 미세한 자기 의,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남의 선을 시기하는 마음, 자기 영적 성장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은 마음까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더러움이 더 잘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장하는 사람은 자신을 더 깨끗하게 느끼기보다 오히려 주님의 자비가 더 필요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이르면 이 질서는 완성되지만 주님에게서 독립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사가 입는 눈부신 세마포도 천사 자신의 공로가 빛나는 옷이 아닙니다. 주님의 진리가 그 천사의 사랑을 통하여 빛나는 옷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사는 자기 옷을 바라보며 자랑하기보다 주님을 바라봅니다. 가장 밝은 옷을 입은 존재가 가장 깊이 ‘이 빛은 제 것이 아닙니다’라고 아는 곳, 바로 그곳이 천국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2강 11부의 옷 이야기를 가장 간단히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무슨 옷을 받느냐’보다 ‘누구의 빛을 입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 의의 옷을 입는가, 주님의 진리의 옷을 입는가입니다. 그리고 자기 의의 옷은 아무리 화려해도 영계의 빛 앞에서는 벌거벗음이 드러나지만, 주님의 진리를 받아 실제 선과 체어리티로 살아간 사람의 옷은 그 사람이 자랑하지 않아도 스스로 빛납니다. 그 빛의 원천이 그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강12부
‘말씀에 철저히 순종할수록 죄성이 드러난다’ : 시험은 죄를 만들어 내는가, 숨어 있던 proprium을 드러내는가
2강 12부에서는 앞서 ‘자기 옷을 빠는 다섯 가지’ 가운데 특히 ‘빛’, 곧 말씀과 순종의 문제가 한층 깊어집니다. 강사는 요한복음 15장 3절의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를 들어,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려고 할 때 정결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원수를 사랑하라’, ‘선으로 악을 이기라’와 같은 말씀을 실제로 지키려고 할 때 비로소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지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강사는 그래서 ‘진리를 잘 알아야 한다. 일단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 지식이 실제 순종으로 이어져야 ‘익은 열매’가 된다고 강조합니다. 이 대목은 이번 2강 전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반복된 ‘광야’, ‘연단’, ‘자기 옷을 빪’, ‘정결’, ‘익은 열매’가 실제 인간의 내면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강사가 제시하는 예가 매우 현실적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씀을 깨닫고 ‘이제부터 나는 오래 참아야겠다’고 결심합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에는 자기가 제법 오래 참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이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참습니다. 두 번째도 참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쯤 되자 얼굴이 붉어지고 마음이 격해지며 결국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강사는 바로 이때 그동안 보이지 않던 ‘죄성’이 드러난다고 설명합니다. 말씀이 없었을 때에는 그것이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말씀을 지키려고 하자 오히려 자기 안의 반대되는 성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아도 매우 중요한 거듭남의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진리는 인간 안에 악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진리가 들어오면 이미 있던 악이 드러납니다. 빛이 방 안의 먼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두울 때 보이지 않던 먼지를 보이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말씀을 깊이 알수록 오히려 자기 자신이 전보다 더 나빠진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처음 할 때에는 ‘나는 이 정도면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씀을 진지하게 살아 보려고 하자 전에 보이지 않던 분노와 질투와 인정욕과 자기 의와 지배욕이 보입니다. 그러면 ‘내가 신앙생활을 오래 했는데 왜 오히려 악해지는가?’ 하는 낙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악이 새로 생긴 것은 아닙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역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주님께 가까워질수록 자기가 얼마나 선한지를 더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얼마나 주님의 선과 다른지를 더 세밀하게 보게 됩니다.
강사는 로마서 7장의 바울을 이 원리와 연결합니다. 계명이 오기 전에는 ‘죄가 죽은 것’처럼 있었지만 계명을 만나자 죄가 기회를 타서 탐심을 일으켰다는 바울의 표현을,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할 때 내면에 숨어 있던 죄성이 실제로 활동하며 드러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강사의 표현으로는 ‘말씀을 지키고자 결단하고 실천하려고 노력하는데 기회가 주어지니까 마음속의 악심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철저히 살려고 하면 할수록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설명의 중요한 장점은 로마서 7장을 단순한 교리 논쟁으로 남겨 두지 않고 실제 영적 경험과 연결한다는 데 있습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는 고백이 말씀대로 살아 보려는 사람의 내적 갈등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현상을 ‘죄성이라는 실체가 육체와 영 속에 뿌리박혀 있다가 기회가 오면 발동한다’는 방식보다 조금 다르게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에게는 유전적으로 물려받은 악의 경향들이 있고, 살아오면서 자유롭게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만든 실제 악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육체 안에 물질처럼 박혀 있는 어떤 ‘죄의 물질’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악은 본질적으로 사랑과 의지의 뒤틀린 질서입니다. 자기를 주님보다 사랑하고 세상을 천국보다 사랑하며, 이웃의 선보다 자기 유익을 앞세우려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어떤 죄의 물질을 몸에서 추출하는 과정이라기보다 사랑의 질서가 뒤바뀌는 과정입니다.
여기에서 강사가 ‘기회가 주어져야 죄성이 나타난다’고 한 말은 상당히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평안한 환경에서는 자기가 온유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아무도 내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 내가 얼마나 자기 뜻을 사랑하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돈이 충분할 때에는 정직하기 쉽고, 아무도 나를 모욕하지 않을 때에는 용서하기 쉽고, 사람들이 나를 인정할 때에는 겸손하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이 조건들이 깨질 때 실제 사랑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시험은 인간에게 전혀 새로운 악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안에 있던 사랑의 질서를 밖으로 끌어내어 보이게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시험’의 핵심과 매우 가깝습니다. 영적 시험은 단순히 어려운 일을 겪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그와 반대되는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 일어나는 내적 싸움입니다. 진리가 없으면 이 싸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에게는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특별한 내적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정말 주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미움이 올라올 때 두 사랑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하나는 ‘저 사람에게 갚아 주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합니다. 바로 그때 시험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시험은 어느 정도 거듭남이 시작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아직 선과 진리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는 영적 의미의 싸움이 일어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강사가 ‘순종하고자 할 때 마귀가 방해한다’고 설명하는 부분과도 연결됩니다. 그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지키려고 하면 마귀가 ‘그래, 네가 지키나 보자’는 식으로 방해하고 송사하며 범죄할 환경을 만든다고 설명합니다. 그 가운데 사람이 말씀을 지키려고 인내하지만 실패하기도 하고, 부끄러운 행실이 나타나면 회개하여 다시 ‘자기 옷을 빨며’,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진적으로 자아가 깨어지고 정결해진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서 한 가지를 더욱 정교하게 구별합니다. 지옥의 영들은 실제로 인간의 악과 거짓을 자극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인간 안에 없던 악을 창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인간의 기억과 악한 애정에 연결되어 그것을 자극하고 확대합니다. 반대로 천사들은 인간 안의 선과 진리, 특히 주님께서 보존해 두신 리메인스와 연결되어 그것을 지키고 북돋습니다. 그러므로 시험 가운데 한 인간의 내면에서는 천국과 지옥의 영향이 맞부딪힙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가운데 자유를 보존받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거듭남이 강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자유 가운데 어느 쪽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마귀가 일부러 원수 같은 사람을 보내 범죄하게 한다’는 식의 표현은 조금 조심해서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 특정 인물이 지옥에 의해 의도적으로 ‘파견되었다’고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마귀가 보낸 시험거리’로 대상화할 위험도 있습니다. 더 안전한 이해는 이렇습니다. 어떤 인간관계와 환경이 주어졌을 때 지옥은 그 상황을 이용하여 내 안의 악을 자극할 수 있고, 주님께서는 같은 상황을 허용하시면서 오히려 내가 그 악을 보고 자유롭게 거절하도록 이끄십니다. 같은 사건을 지옥은 파괴에 이용하려 하고 주님은 구원에 굽혀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앞에서 여러 차례 살펴본 ‘허용의 섭리’와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내가 화를 내게 하려고 일부러 누군가를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자유에서 생긴 불편한 행동이나 자연적 상황을 허용하시고, 그 상황에서 내 안에 숨어 있던 분노가 드러날 때 그것을 거듭남의 기회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왜 저 사람이 내게 이런 짓을 했는가?’만 묻다가 끝나지 않고 ‘이 사건을 통해 내 안에서 무엇이 드러났는가?’를 물을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상대의 악은 악대로 분별하면서, 동시에 그 일을 통해 드러난 자기 악도 보는 것입니다.
강사가 ‘사랑은 오래 참고’를 예로 든 것은 이 점을 매우 잘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말씀을 외웁니다. 다음에는 ‘나는 참아야 한다’고 결심합니다. 그다음에는 실제 사람이 나타납니다. 그 사람이 나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내 안의 분노가 드러납니다. 바로 여기서 선택이 시작됩니다. ‘저 사람이 나를 화나게 했으니 내 분노는 정당하다’고 하면 악을 자기 것으로 더욱 확정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저 사람이 잘못한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 증오와 복수심 역시 주님의 뜻이 아니다’라고 인정하면 자기 악을 상대의 잘못과 분리해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영적 자기 성찰의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 옷을 빤다’는 앞의 설명과 연결됩니다. 자기 옷을 빤다는 것은 ‘나는 다시는 화내지 않겠다’고 감정적으로 결심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무엇이 더러운지를 진리의 빛으로 보는 것입니다. ‘나는 저 사람 때문에 화가 났다’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 ‘나는 내 뜻이 거절당하는 것을 견디기 싫어한다’, ‘나는 내 명예가 손상되는 것을 견디기 싫어한다’, ‘나는 저 사람이 내 판단대로 움직이기를 원한다’는 더 깊은 사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외적인 행위 아래에 있는 사랑을 볼 때 거듭남은 훨씬 깊어집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에게 회개는 단지 잘못한 행동을 후회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기 악을 살피고, 그것을 주님께 죄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실제로 그것을 거절하는 삶이 뒤따라야 합니다. 이것이 반복될 때 악은 점차 힘을 잃습니다. 강사가 말한 ‘반복되면서 점진적으로 자아가 깨어지고 자기 옷이 빨아지고 정결해진다’는 설명은 바로 이 점에서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상당히 가까운 접점을 가집니다. 한 번의 강렬한 체험으로 인간 전체가 즉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말씀과 시험과 회개와 새로운 순종이 반복되면서 질서가 바뀌는 것입니다.
다만 여기서 ‘자아가 깨어진다’는 표현도 조금 세밀하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거듭남은 인간의 개성과 자아의식 자체를 파괴하는 과정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무개성한 존재로 만들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천사들은 지상에서보다 훨씬 더 뚜렷한 개성과 자유를 가집니다. 깨어져야 하는 것은 인간됨 자체가 아니라 proprium이 독립적인 선과 지혜의 원천이라고 믿는 환상입니다. ‘내가 옳다’, ‘내 힘으로 선할 수 있다’, ‘내가 중심이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 질서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자기부인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무기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자유롭고 생생해집니다. 자기애의 강제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수도적 영성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자아를 깨뜨린다’는 말을 지도자의 뜻에 무조건 복종하여 자기 판단력과 인격을 없애는 것으로 이해하면 위험합니다. 주님께서 깨뜨리시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이성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애가 독점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오히려 거듭난 사람일수록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더 자유롭고 이성적으로 분별하며, 사람에게 끌려가기보다 주님의 진리에 따라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수도적 순종의 목적도 인간 지도자에게 종속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고,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데 있어야 합니다.
강사는 이 과정에서 ‘말씀을 잘 모르면 익은 열매가 안 된다. 진리를 잘 알아야 한다. 일단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역시 중요한 말입니다. 사람이 무엇이 악이고 선인지 알지 못하면 자유롭게 선택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의 초기에 진리를 배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사람의 이해 안에 먼저 진리가 들어오고, 그 진리가 삶을 통하여 의지와 결합하면서 거듭남이 진행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에서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지식 자체가 거듭남은 아닙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천국적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많이 알면서 살지 않으면 자기 정죄의 자료가 더 많아질 수도 있습니다. 진리는 삶을 위해 주어집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열 가지 언어로 분석하는 것보다 실제 원수를 한 번 용서하는 것이 그 진리가 인간의 생명과 결합되는 데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식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는 길을 보여 주고, 행함은 그 길을 실제로 걷는 것입니다. 둘은 함께 가야 합니다.
여기서 앞서 계속 다루었던 ‘양심’과도 연결됩니다. 강사는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양심이 새겨졌다’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영적 인간의 양심은 그가 받아들인 신앙의 진리에서 형성됩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주님의 뜻이라고 진실하게 받아들이면, 그 진리에 반하여 행동하려 할 때 내적인 불편과 고통을 느낍니다. 이것이 양심입니다. 따라서 말씀을 배우고 그것을 실제 진리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양심이 형성된다는 강사의 설명은 스베덴보리의 영적 인간 이해와 상당히 잘 맞습니다.
예를 들어 이전에는 화를 내도 별로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던 사람이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씀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뒤 화를 내면 마음이 아픕니다. 겉으로 보면 전보다 더 괴로워진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좋은 변화입니다. 양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전에는 악과 자신이 너무 가까워 갈등조차 없었지만 이제는 진리가 안에 들어와 악과 충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적 싸움이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양심의 아픔을 무조건 없애야 할 부정적인 감정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병적인 죄책감과 영적 양심은 구별해야 하지만, 진리에 어긋난 행동을 했을 때 마음이 아픈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셨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진리가 그의 내면에서 살아 있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아픔 속에서 자기 자신만 바라보며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돌아가 실제로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시험의 목적도 달라집니다. 시험은 내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시험장이 아닙니다.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를 보게 하는 자리입니다. ‘나는 오래 참는 사람인가?’를 증명하려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참지 못하는 순간 ‘내 안에 무엇이 이렇게 강하게 자기 뜻을 주장하는가?’를 보게 됩니다. 그러면 시험은 자기 의를 강화하는 장소가 아니라 자기 인식이 깊어지는 장소가 됩니다.
이것은 강사가 말한 ‘철저히 살려고 하면 할수록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표현을 아주 깊게 만들어 줍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이 점점 더 자기 죄를 못 느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세한 악까지 느끼게 됩니다. 처음에는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 같은 큰 외적 악만 죄로 보이지만, 나중에는 미움과 정욕과 탐욕뿐 아니라 더 미세한 자기 의, 인정욕, 영적 우월감, 다른 사람의 실패를 은근히 기뻐하는 마음까지 보이기 시작합니다. 빛이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성숙을 ‘나는 이제 죄를 거의 느끼지 않는다’로 측정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주님께 가까운 사람일수록 자기 안에서 주님과 다른 것을 더 빨리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때문에 계속 자기 자신만 들여다보며 침울해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기 악을 보는 목적은 자기에게 절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을 더 의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빛은 먼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그 먼지를 치울 수 있도록 비춥니다.
이 점에서 이 사경회가 강조하는 ‘연단’도 조금 다른 빛을 얻습니다. 연단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괴롭혀 강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말씀의 빛이 실제 삶의 환경을 만나면서 인간 안의 숨은 질서가 드러나고 다시 정돈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어려움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많이 거듭났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어려움 가운데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선택했느냐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고도 더 완고해질 수 있고, 작은 시험 하나를 통하여 깊은 자기애를 보고 돌이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의 주도권은 끝까지 주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의 악을 볼 수 있는 것도 주님께서 진리의 빛을 주셨기 때문이고, 그것을 견디며 싸울 수 있는 것도 주님께서 리메인스를 보존하셨기 때문이며, 악을 거절할 자유가 유지되는 것도 주님의 보호 때문입니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그 빛에서 도망가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악이 드러날 때 합리화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이것은 내 안에 있는 악이며 주님의 뜻과 다르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옷을 빤다’는 말은 매우 능동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겸손한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실제로 빨아야 합니다. 회개해야 하고, 악을 거절해야 하며, 다음에는 다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물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씻는 진리와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자기 옷을 빠는 것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거듭남을 설명하면서 반복하는 ‘사람은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행해야 하지만, 실제 힘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2강 12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요한복음의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와 로마서 7장의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가 기회를 타서 탐심을 이루었다’는 말씀을 연결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철저히 순종하려 할 때 이전에는 숨어 있던 죄성이 범죄할 환경과 연단 가운데 드러나고, 사람이 실패할 때마다 회개하여 자기 옷을 다시 빨며,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점진적으로 자아가 깨어지고 정결해져 익은 열매가 된다고 설명하는 강사의 해석은 거듭남을 단순한 지식이나 일회적 체험이 아니라 말씀-순종-시험-자기 발견-회개-새로운 순종의 실제적 과정으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통찰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죄성이 어떤 물질처럼 인간 안에 있다가 말씀이 자극하여 생겨나는 것으로 보기보다, 주님의 진리가 빛으로 들어올 때 이미 proprium 안에 숨어 있던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무질서가 드러나고, 천국과 지옥의 영향 사이에서 인간이 주님께서 보존하시는 자유로 악을 죄로 인정하여 거절함으로써 그 악의 지배력이 점차 약해지고 선과 진리가 지배적인 질서를 이루어 가는 영적 시험과 거듭남의 아르카나로 이해할 때 더욱 깊어집니다.’
이번 12부에서 특별히 붙들 만한 것은 ‘말씀대로 살려고 했더니 오히려 내 악이 더 많이 보인다’는 역설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서 사람을 낙심시키기 쉬운 경험입니다. 전에는 별문제 없이 살았는데 말씀을 깊이 읽기 시작하자 자기 안의 문제가 너무 많이 보입니다. 전에는 자기가 제법 사랑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를 실제로 살아 보려 하니 미움이 얼마나 깊은지 알게 됩니다. 전에는 자기가 겸손하다고 생각했는데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을 만나자 명예욕이 얼마나 강한지 보입니다. 전에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순간이 오자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내가 더 나빠졌다’고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쩌면 빛이 더 밝아진 것입니다. 어두운 방에서는 흰옷의 얼룩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밝은 햇빛 아래로 나오면 작은 얼룩까지 보입니다. 얼룩이 그 순간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순간 보인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악을 더 세밀하게 보게 되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후퇴가 아니라 전진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악을 본 다음입니다. ‘나는 역시 안 되는 사람이다’라고 주저앉는 것도 아니고, ‘사람은 원래 다 그렇다’며 합리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 이것이 제 안에 있었군요’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주님의 힘으로 다르게 선택해 보는 것입니다. 또 실패하면 다시 회개하고 다시 일어납니다. 강사가 말한 ‘반복되면서 점진적으로 자아가 깨어지고 정결해진다’는 표현은 바로 이 점에서 매우 실제적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기 어려워집니다. 자기 안에도 빛이 비치기 전에는 몰랐던 것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분노를 보면서 ‘저 사람은 왜 저럴까?’라고 하기 전에 자기 안의 분노도 볼 수 있고, 누군가의 명예욕을 보면서 자기 안의 더 미세한 인정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빛이 참으로 사람을 정결하게 한다면 그 결과는 자기 의가 아니라 겸손과 체어리티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익은 열매’의 가장 분명한 표지 가운데 하나는 자기에게 악이 없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악이 드러났을 때 그것을 더 빨리 주님께 가져가는 사람이 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변명하는 시간이 짧아지고, 남을 탓하는 시간이 줄어들며, 회개가 빨라지고, 다시 선을 선택하는 시간이 빨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완벽한 자기 자신을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더 빨리 돌아가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결국 말씀의 빛은 우리를 정죄하기 위해 비추는 빛이 아닙니다. 무엇을 씻어야 하는지 보여 주기 위한 빛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악을 보여 주신 뒤 혼자 씻으라고 떠나시는 분도 아닙니다. 그 악을 볼 수 있게 하신 바로 그분이 그것과 싸울 힘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시험 가운데 자기 안의 예상하지 못한 악을 발견했을 때조차 마지막 시선은 그 악이 아니라 주님께 향해야 합니다. ‘내 안에 이것이 있었구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므로 더욱 주님이 필요하구나’로 나아가는 것, 바로 그것이 광야의 연단이 절망이 아니라 거듭남이 되는 길입니다.
2강13부
‘흰옷을 입는 원리’ : 출애굽-광야-가나안은 구원의 단계표인가, 거듭남의 내적 여정인가
2강 13부에서 강사는 지금까지 길게 설명한 ‘자기 옷을 빠는 과정’을 마무리하면서 이제 ‘흰옷을 입는 원리’로 넘어갑니다. 사데 교회에 주신 말씀, 곧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그리고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라는 말씀을 근거로, 흰옷은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어 이것을 출애굽의 모형과 연결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는 것을 표상하고, 그렇게 출애굽한 백성이 곧바로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고 광야를 통과해야 했던 것처럼, 구원받은 성도도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자기 옷을 씻어야 하며, 그것이 충분히 깨끗해졌을 때 비로소 ‘보혈로 만들어진 은총의 흰옷’을 입고 가나안,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강사의 설명은 매우 선명합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출애굽-광야 연단-자기 옷을 씻음-흰옷-가나안’이라는 하나의 구원 도식이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이 도식은 지금까지 2강에서 다룬 거의 모든 주제를 하나로 묶습니다. 처음 구원받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광야의 연단이 있어야 하고, 그 연단을 통하여 죄성과 정욕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기 생활 인격이 정결해져야 하며, 그렇게 ‘익은 열매’가 된 사람에게 흰옷이 주어지고 마침내 생명과를 먹으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강사가 이 사경회 전체에서 반복하는 ‘구원받은 성도가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의 골격이 여기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보면 이 구조에는 매우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특히 ‘애굽에서 나왔다고 곧 가나안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곧 거듭남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진리를 처음 받아들이고 주님을 믿기 시작하는 것과, 그 진리가 그의 의지와 사랑에까지 내려가 실제 생명이 되는 것 사이에는 긴 과정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 역시 거듭남을 순간적인 사건이 아니라 여러 상태를 거치는 질서 있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과 광야와 가나안을 인간의 영적 여정과 연결하려는 강사의 기본 직관 자체는 매우 귀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모형을 조금 다르게 읽습니다. 출애굽 사건은 단지 ‘예수 믿고 구원받는 첫 단계’, 광야는 그 다음 ‘성화 단계’, 가나안은 그 다음 ‘완성 단계’라는 식의 고정된 시간표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출애굽과 광야와 가나안 정복은 한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의 깊은 내적 상태들을 보여 줍니다. 애굽은 지식과 자연적 인간의 상태와 관계하고, 애굽의 속박은 거짓과 악의 지배 아래 있는 상태를 나타내며, 거기에서 나오는 것은 주님의 신적 능력으로 그 속박에서 해방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광야는 아직 선과 진리가 충분히 결합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이 시험을 받고 진리를 배우며 질서가 세워지는 과정이고, 가나안은 주님의 나라, 더 내적으로는 사람 안에 세워지는 천국적 선과 진리의 질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출애굽에서 가나안까지의 이야기는 단순히 ‘죽은 뒤 어느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자격 취득 과정’이라기보다 ‘주님께서 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어떻게 다시 질서 안에 세우시는가’를 보여 주는 거대한 거듭남의 아르카나입니다. 가나안은 죽은 뒤에야 처음 들어가는 어떤 장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지배하는 상태로 들어갈 때 이미 그의 내면에서 가나안이 시작됩니다. 천국은 사후에 갑자기 주어지는 보상이 아니라 지상에서 형성된 지배적 사랑이 사후에 완전히 펼쳐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지 않으면 강사가 말하는 ‘흰옷을 입어야 가나안 땅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표현도 더욱 깊게 읽을 수 있습니다. 흰옷이 천국 입구에서 제시해야 하는 일종의 영적 통행증은 아닙니다. 흰옷은 그 사람의 내적 상태가 이미 천국의 진리와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나타내는 상응입니다. 그러므로 흰옷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적 선과 진리의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 상태가 흰옷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원인과 표지를 구별해야 합니다.
강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문제는 언제 입느냐가 중요하다.’ 그리고 ‘교회 시대 이긴 자들, 처음 익은 열매 된 성도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입는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지상에서 이미 흰옷을 입고 주님과 동행하다가 천국에 가지만, 큰 환난을 살아서 통과하는 많은 성도들은 천년왕국 입구에서, 혹은 죽은 뒤 영계에서 천국 입구에 이를 때 흰옷을 입는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강사의 종말론과 성화론이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흰옷을 ‘언제 받는가’에 따라 영적 집단과 시대가 나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부분에서 상당한 방향 전환이 필요합니다. 영적 상태를 자연적 시간표와 지나치게 결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시대 이긴 자는 지상에서 흰옷을 받고, 환난 성도는 천년왕국 입구에서 받고, 다른 사람은 사후 천국 입구에서 받는다’는 식으로 흰옷 지급 시점을 구분하기보다, 흰옷은 언제나 그 사람에게 있는 순수한 진리의 상태를 표상한다고 봅니다. 사람이 지상에서 진리를 받아 선과 결합시키면 이미 영적으로 그 옷을 입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사후에는 자연계 육체와 외관이 사라지면서 그 사람의 실제 내적 상태가 그에 상응하는 옷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천국의 옷에 관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워집니다. 천사들은 실제로 옷을 입습니다. 그러나 누군가가 천국 입구에서 창고를 열어 옷을 지급하기 때문에 입는 것이 아닙니다. 천사의 옷은 그의 지성과 진리의 상태에 상응하여 나타납니다. 더 내적인 천국의 천사들이 더 밝고 빛나는 옷을 입는 것도 그들이 더 많은 상급 점수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진리가 더 내적인 선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언제 흰옷을 입는가?’라는 질문은 상응적으로는 ‘언제 주님의 진리가 내 삶에서 선과 결합하여 순수한 상태가 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뀝니다.
강사가 흰옷을 ‘보혈로 만들어진 은총의 옷’이라고 표현한 것은 아름다운 신앙적 표현입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보혈’을 물질적인 피 자체보다 주님의 신적 진리, 특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하여 모든 지옥과 싸워 이기시고 인성을 신성하게 하신 주님의 구속 사역에서 나오는 신적 진리와 생명으로 봅니다. 따라서 흰옷이 어린양의 피로 희어진다는 것은 주님의 구속의 능력이 인간에게 진리로 임하고, 그 진리를 따라 사람이 악을 죄로 인정하여 거절함으로써 그의 삶이 정결해지는 것을 뜻합니다. 모든 정결의 시작과 능력은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균형이 하나 생깁니다. 앞서 강사는 자기 옷을 빠는 다섯 가지 가운데 네 가지, 곧 보혈, 연단의 환경, 성령의 감동과 깨달음, 빛인 말씀은 주님께서 주시지만 마지막 ‘순종’은 ‘내가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순종’이며, 진리의 말씀에 실제로 순종해야 깨끗해지고 정결해지며 익은 열매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거듭날 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사람은 악과 싸워야 하고, 진리를 행해야 하며, 마치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도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싸움의 실제 힘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따라서 ‘내가 순종해야 한다’는 강사의 강조는 옳은 방향을 갖고 있지만, 그것이 ‘앞의 네 가지는 하나님이 하시고 마지막 한 가지는 인간이 독립적으로 완성한다’는 식의 역할 분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순종하려는 자유와 힘조차 주님에게서 계속 유입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주님이 다 하시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안 됩니다. 바로 여기에 스베덴보리의 거듭남에서 매우 섬세한 역설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하는 것처럼 악을 거절하고 선을 행해야 하지만, 그 일을 한 뒤에는 그것이 자기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질서가 지켜질 때 인간의 자유는 없어지지 않으면서도 자기 공로가 생기지 않습니다. ‘나는 순종했다’는 사실은 있지만 ‘그러므로 내가 나를 깨끗하게 했다’는 결론으로 가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제가 자유롭게 순종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강사의 광야 이해에서도 이 점은 중요합니다. 광야 연단을 잘 견디고 많은 고난을 통과했기 때문에 사람이 흰옷을 ‘획득’한다고 생각하면 고난 자체가 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은 자동적으로 사람을 정결하게 하지 않습니다. 같은 고난을 겪고 한 사람은 더 온유해질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더 완고해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환경에서 주님의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악을 어떻게 거절했느냐입니다. 광야는 구원의 점수를 쌓는 곳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것이 드러나고 질서가 다시 세워지는 곳입니다.
이것은 이 사경회가 매우 강조하는 ‘연단’의 의미를 오히려 더 깊게 만들어 줍니다. 연단의 가치는 고통의 강도에 있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이 아팠느냐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무엇이 드러났고, 무엇을 주님께 맡겼으며, 어떤 사랑이 새롭게 지배하게 되었느냐에 있습니다. 사람이 고난을 겪으면서 ‘나는 이렇게 많은 고난을 견딘 사람이야’라는 자기 의가 강해진다면 광야를 오래 걸었어도 아직 가나안의 사랑과는 멀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작은 인간관계의 시험 하나에서 자기 지배욕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그것을 내려놓았다면 그 작은 사건이 매우 깊은 광야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강사가 출애굽을 유월절 어린양의 피와 연결한 것은 매우 의미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힘으로 바로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했습니다. 먼저 주님의 능력이 그들을 해방시켰습니다. 이것은 거듭남에서도 같습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지옥의 속박에서 자신을 구출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구속하십니다. 그러나 애굽에서 나온 뒤에는 광야를 걸어야 했습니다. 만나를 먹어야 했고, 말씀을 받아야 했으며, 시험을 겪어야 했고, 불순종과 반역이 드러나야 했습니다. 이 전체 이야기가 ‘구원은 전적으로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은 그 구원을 자유롭게 받아 삶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는 신적 질서를 놀랍도록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가나안’도 다시 보아야 합니다. 강사는 가나안을 천국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표상적 읽기의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가나안은 아주 깊은 의미에서 주님의 나라, 교회, 그리고 인간 안에 있는 천국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특히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에서 가나안은 주님의 인성이 신성과 결합되어 가는 과정과도 연결되며, 이스라엘의 정복 이야기에서는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악과 거짓이 제거되고 선과 진리의 질서가 세워지는 것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가나안은 하나의 고정된 의미로만 환원되지 않습니다. 말씀의 문맥과 단계에 따라 더욱 깊은 아르카나가 열립니다.
이 점은 ‘모형적 진리’와 ‘상응의 속뜻’ 사이의 차이를 잘 보여 줍니다. 강사의 모형적 진리는 성경 사건을 주로 하나의 구원 단계와 연결합니다. 애굽은 죄악 세상, 출애굽은 구원, 광야는 성화와 연단, 요단은 어떤 전환, 가나안은 천국이라는 식입니다. 이것은 설교와 영성훈련에서 매우 이해하기 쉽고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상응은 거기서 한 단계 더 들어갑니다. 한 장소나 사건의 의미가 단순한 일대일 암호가 아니라 말씀 전체의 내적 연결 속에서 사람의 의지와 이해, 선과 진리, 시험과 거듭남의 상태를 매우 세밀하게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이 사경회의 ‘모형적 진리’를 ‘틀렸다’고 잘라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말씀의 문자 안에 영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그것을 삶의 여정과 연결하려는 귀한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 그 모형이 훨씬 더 넓어집니다. 출애굽은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여러 차례의 출애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악의 속박에서 빠져나오면 그 다음에는 더 내적인 악이 드러납니다. 또 광야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어느 한 영역에서는 가나안의 질서가 세워졌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아직 애굽의 속박 가운데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실제 거듭남의 경험과도 잘 맞습니다. 사람은 어느 날 ‘나는 이제 광야를 다 통과했고 가나안에 들어왔다’고 완전히 졸업하기 어렵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 안의 더 깊은 층을 계속 여십니다. 이전에는 행동의 악을 다루셨다면 나중에는 생각과 의도의 악을 보여 주시고, 그다음에는 자기 의와 영적 자만처럼 훨씬 미세한 proprium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됩니다.
그렇다면 ‘이긴 자’도 완전무결하여 더 이상 싸울 것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계시록의 ‘이김’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악과 거짓을 이기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은 그 승리에 참여합니다. 오늘 하나의 악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했다면 그 영역에서 ‘이김’이 일어난 것입니다. 내일 더 깊은 악이 드러나면 또 싸움이 시작됩니다. 이 관점에서는 ‘이긴 자’가 소수의 특별한 영적 엘리트 집단을 가리키기보다,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거절하며 거듭남의 길을 걷는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부르심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흰옷’을 바라보는 태도도 바꿉니다. ‘나는 흰옷을 받았는가?’를 확인하려 하기보다 ‘지금 내게 주어진 진리를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흰옷은 자기 영적 등급을 확인하는 표지가 아니라 진리가 삶이 되어 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도 자기 뜻을 위해 사용하면 옷은 희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알고 있는 진리가 많지 않아도 그것을 정직하게 살아가고 주님과 이웃의 선을 위해 사용하면 그 진리는 생명을 얻습니다.
이 지점에서 강사의 ‘자기 옷을 부지런히 빨아야 한다’는 앞선 표현이 다시 살아납니다. 자기 옷을 빠는 것은 흰옷이라는 영적 자격증을 얻기 위한 경쟁이 아닙니다. 매일 자기 안에서 진리와 어긋나는 것을 발견하고 씻는 것입니다. 어제는 분노를 보았다면 오늘은 그 분노 밑의 자기 의를 보고, 내일은 그 자기 의 밑에 있는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빛이 깊어질수록 더 미세한 얼룩이 보입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정결은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깊은 겸손을 낳습니다. 자기 안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proprium을 계속 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이제 흰옷 입은 사람이다’라는 자의식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선과 진리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지각이 깊어집니다. 이것이 천적 상태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2강 13부 후반에서 강사는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흰옷과 인침과 할례와의 관계’를 살펴보겠다고 예고합니다. ‘인침받았다’, ‘할례를 베푼다’, ‘흰옷을 입혀 준다’는 세 표현이 서로 어떤 관계인가를 아브라함을 통해 분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서 4장 9절에서 11절로 들어갑니다. 이것은 다음 부분에서 상당히 중요한 분기점이 됩니다. 왜냐하면 강사의 체계에서 ‘할례’는 죄성 제거와, ‘인침’은 하나님의 인정 및 소유의 표와, ‘흰옷’은 의롭다 하심과 이긴 자의 상태와 긴밀하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에게 ‘할례’의 속뜻은 단순한 죄성이라는 실체의 제거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더러움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뜻하며, ‘인침’ 역시 문자 그대로 특정 집단에게 찍히는 초자연적 표식보다 주님의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 인정되고 보존되는 상태와 관계합니다. 따라서 다음 부분에서는 두 체계가 서로 매우 가까이 접근하면서도 결정적으로 갈라지는 지점이 나타날 가능성이 큽니다.
2강 13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애굽에서 구원받은 이스라엘이 광야의 연단을 통하여 자기 옷을 씻고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간 모형을, 보혈로 구원받은 성도가 광야 연단을 통하여 죄성과 정욕의 지배에서 정결해져 익은 열매가 되고 흰옷을 입은 이긴 자가 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구원의 원리로 설명하는 강사의 해석은 구원을 단순한 최초의 신앙고백으로 끝내지 않고 실제 삶의 변화와 순종과 정결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한 영적 통찰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출애굽-광야-가나안을 서로 분리된 구원 단계와 사후 입국 절차로만 보기보다 주님께서 한 인간 안에서 악과 거짓의 속박을 끊으시고, 시험 가운데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시며, 마침내 그 사람의 속 사람에서 주님의 선과 진리가 지배하는 천국적 질서를 세워 가시는 거듭남의 연속적인 아르카나로, 흰옷 역시 그 과정이 끝났음을 증명하는 외적 자격증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받은 순수한 진리가 선과 결합하여 삶을 이루고 있는 내적 상태의 상응으로 이해할 때 더욱 깊어집니다.’
이번 13부에서 특히 귀하게 붙들 만한 것은 ‘출애굽했다고 끝난 것이 아니다’라는 강사의 문제의식입니다. 이것은 표현 방식의 차이를 넘어 오늘날 신앙에 던지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과 ‘주님의 생명이 나의 실제 사랑과 삶을 지배한다’는 것은 동일한 말이 아닙니다. 말씀을 안다는 것과 그 말씀대로 사는 것도 동일하지 않습니다. 애굽 문을 나섰다는 것과 가나안의 질서가 사람 안에 세워졌다는 것 사이에는 실제 거듭남의 여정이 있습니다.
다만 그 여정을 ‘내가 얼마나 연단을 많이 통과했는가’로 측정해서는 안 됩니다. 광야의 핵심은 고난의 양이 아니라 사랑의 변화입니다. 사람이 백 번 고난을 겪고도 자기 의가 더 강해질 수 있고, 단 한 번의 작은 시험을 통하여 자기 안의 지배욕을 깊이 보고 주님께 돌이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야를 오래 걸었다는 사실보다 그 광야에서 무엇이 죽고 무엇이 살아났는가가 중요합니다. proprium의 지배가 약해지고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강해졌는가가 핵심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이 사경회가 그렇게 강조해 온 ‘연단’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과 만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접점이 됩니다. 연단은 사람을 영적 강자로 만드는 훈련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는 선할 수 없음을 배우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오래 참고 견디는 사람인가를 증명하는 곳이 아니라, 참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고 주님의 힘을 구하는 곳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는 이것도 견뎠다’는 영적 훈장을 하나씩 다는 일이 아니라, 자기 뜻과 자기 의가 주님의 뜻 앞에서 내려가는 과정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가나안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오히려 자신을 ‘가나안 성도’라고 부르기 어려워질 것입니다.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더 깊이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흰옷이 밝아질수록 그 옷의 빛이 자기에게서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도 더 분명하게 알게 됩니다. 가장 밝은 천사일수록 자기에게 선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립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광야-가나안이라는 이 사경회의 강력한 영적 도식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를 통과하면서 폐기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애굽은 ‘저기 밖에 있는 세상’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아직 자기애가 지배하는 영역이고, 광야는 하나님께서 나를 괴롭히시는 장소가 아니라 그 자기애를 말씀의 빛 가운데 보여 주시고 다시 질서 있게 하시는 상태이며, 가나안은 죽은 뒤에만 들어갈 먼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가 내 사랑과 생각과 행동을 다스리기 시작하는 바로 그곳입니다. 그리고 흰옷은 그 여정의 공로를 자랑하는 졸업복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그 길을 인도하신 주님의 진리를 입고 있다는 표지입니다.
2강14부
‘할례-인침-흰옷’ :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것은 죄성이 한 덩어리째 제거되었다는 뜻인가
2강 14부에서는 앞에서 예고했던 ‘흰옷-인침-할례’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강사는 로마서 4장 9절에서 11절의 아브라함 이야기를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아브라함이 먼저 무할례 상태에서 신앙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았고, 그 후에 받은 할례의 표가 바로 그 ‘신앙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는 바울의 설명에 주목합니다. 여기서 강사는 ‘의롭다 하심’, ‘할례’, ‘인침’을 서로 연결하고, 이것을 다시 계시록의 ‘흰옷’과 연결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의인으로 인정하시는 것, 그 의를 ‘인치시는 것’, 할례를 받는 것, 흰옷을 입는 것이 결국 동일한 영적 실재를 서로 다른 표현으로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강사의 체계 안에서 이 연결은 상당히 정교합니다. 단순히 ‘예수를 믿었으므로 죄 사함을 받았다’는 최초의 칭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 연단을 통과하면서 실제 죄의 문제가 처리되고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경험적으로 의인이라 인정하시는 상태를 ‘흰옷’, ‘할례’, ‘인침’이라는 서로 다른 성경적 표상으로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앞서 계속 다루었던 ‘익은 열매’, ‘이긴 자’, ‘생명과’, ‘그리스도의 생명 내주합일’도 결국 이 상태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을 이해하면 2강 전체에서 강사가 구축하고 있는 성화론의 중심 구조가 상당히 선명하게 보입니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먼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강사가 근거로 사용하는 로마서 4장은 스베덴보리의 기준에서 창세기나 출애굽기처럼 연속적인 속뜻, 곧 아르카나를 담은 말씀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로마서의 내용이 무가치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도서신은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고 신앙생활을 권면하는 데 매우 유익하지만,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처럼 문자 하나하나가 연속적인 천국적 아르카나를 품고 있는 방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이번 부분에서는 강사가 로마서를 통하여 세운 교리적 연결을 그대로 ‘말씀의 속뜻’이라고 확정하기보다, 실제 아르카나는 그가 연결하고 있는 창세기의 할례와 여호수아서의 가나안 및 길갈의 표상에서 더 깊이 살펴보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에 맞습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흥미로운 일이 생깁니다. ‘할례’의 속뜻에 관해서는 강사의 해석이 스베덴보리와 상당히 가까운 곳까지 들어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할례는 단순히 유대 민족의 육체적 표지가 아닙니다. 영적으로는 인간을 주님과 천국으로부터 가로막는 불결한 사랑, 특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을 표상합니다. 육체의 포피를 잘라 내는 자연적 행위가 내적으로는 인간의 자연적 사랑에 붙어 있는 불결한 것을 제거하는 영적 정결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육적 할례를 ‘영적 할례에 대한 모형’이라고 말하고 ‘우리는 영적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방향 자체는 매우 중요한 영적 직관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단계에서 중요한 차이가 나타납니다. 강사는 여호수아 5장의 길갈 사건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내가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고 하신 것을 ‘죄성이 굴러 떨어졌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이 ‘죄성’을 교만성, 음란성, 태만성 등 죄를 짓게 하는 여러 성질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할례란 바로 이 죄성 덩어리가 잘려 나가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 사경회의 성결론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죄를 하나씩 용서받는 차원을 넘어 죄를 계속 생산하는 내적 ‘죄성’ 자체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인간의 악을 어떤 하나의 ‘죄성 덩어리’처럼 생각하고, 어느 영적 단계에 이르면 그것이 인간에게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다고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proprium은 그 자체로 선의 근원이 아닙니다. 거듭난 뒤에도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서 선해지는 존재가 아닙니다. 천사조차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선하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거듭남의 완성은 인간에게서 악의 가능성 자체가 제거되어 그가 독립적으로 순수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할례’에서 잘라 내는 것은 무엇일까요? 핵심은 악한 사랑의 ‘지배’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자체가 자연적 인간 안에서 완전히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질서에 어긋난 방식으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사람을 지배하는 상태가 제거되는 것입니다. 자연적 자아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언제나 악은 아닙니다. 몸을 돌보고 생계를 유지하며 맡은 책임을 감당하는 데에는 자연적인 자기 관심이 필요합니다. 세상의 재물을 사용하는 것도 그 자체로 악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보다 위에 올라가 중심을 차지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할례는 자연적 인간 자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사랑을 천국적 질서에 복종시키는 정결입니다.
이 차이는 아주 중요합니다. 만일 ‘죄성 덩어리가 떨어져 나갔다’고 이해하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제 죄성이 제거된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역설적으로 매우 미세한 영적 자기 의가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할례받았다’, ‘나는 흰옷을 입었다’, ‘나는 생명과를 먹었다’, ‘나는 아직 광야에 있는 사람들과 다르다’는 식의 영적 계층 의식이 생길 위험이 있습니다. 물론 강사 자신은 오히려 ‘저는 아직 굴러 떨어지지 않아 너무너무 강력하게 살아 있어 고민이 많다’고 말하며 자신을 낮춥니다. 이 대목은 강사의 가르침을 해설할 때 중요하게 존중해야 할 부분입니다. 적어도 강사는 이 교리를 자기 자신이 이미 도달한 높은 상태를 자랑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이 고백은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와 만날 수 있는 좋은 지점을 제공합니다. 사람이 주님의 빛 가운데 들어갈수록 자기 proprium의 활동을 더 세밀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눈에 띄는 큰 악만 보이지만 나중에는 그 밑에 숨어 있는 자기 의,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기 판단을 고집하는 마음, 영적으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까지 보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죄성이 다 떨어져 나갔다’는 확신보다 ‘주님 없이는 순간도 선 안에 머물 수 없다’는 지각이 깊어지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천국적 질서에 더 가깝습니다.
강사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할례를 ‘언제’ 받았느냐입니다. 출애굽할 때도 아니고 광야 한가운데서도 아니며, 광야 여정을 다 마치고 가나안 땅 입구인 길갈에서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이것을 ‘광야 과정이 다 끝나야 영적 할례를 받을 수 있다’는 모형으로 읽습니다. 그리고 그 할례가 곧 흰옷을 입는 것이며, 교회 시대의 ‘처음 익은 열매’는 육체가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이 상태에 이르지만 나머지 성도들은 가나안, 곧 천국 입구에서 흰옷을 입는다고 설명합니다.
이 해석은 강사의 ‘모형적 진리’ 체계에서는 매우 일관됩니다. 출애굽-광야-요단-길갈의 할례-가나안이라는 역사적 순서를 그대로 영적 성장의 단계표로 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것을 그렇게 단선적인 단계표로 고정하지 않습니다. 할례가 표상하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정결은 거듭남의 어느 한 시점에 한 번 일어나고 끝나는 사건이라기보다 거듭남 전체를 관통하는 과정입니다. 사람 안의 더 외적인 자기애가 먼저 다루어지고, 그 다음에는 더 내적인 자기애가 드러나며, 주님께서는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차례차례 그것을 질서 아래 두십니다.
여기서 ‘길갈’과 ‘애굽의 수치가 굴러감’이라는 표현도 풍성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온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아직 ‘애굽의 수치’가 남아 있었다고 표현됩니다. 이것은 자연계의 역사만 보아도 흥미롭지만 영적으로 보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사람은 외적으로 애굽을 떠났는데 내적으로는 아직 애굽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전의 삶을 버리고 교회에 들어왔으며 신앙을 고백하고 말씀을 배우고 오랫동안 광야의 훈련을 거쳤는데도, 자연적 인간 안에는 여전히 과거의 사랑과 사고방식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오는 것’과 ‘애굽이 내 안에서 나가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 거듭남에서도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은 술을 끊고, 음란한 행동을 버리고,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되고, 외적 생활이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적 변화의 안쪽에 ‘나는 이제 저 사람들보다 낫다’는 자기 의가 자리 잡을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애굽에서는 나왔지만 더 내적인 애굽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더 깊은 길갈로 데려가십니다. 외적인 악만이 아니라 그 악의 뿌리에 있는 지배욕과 자기애까지 보게 하십니다.
이렇게 보면 ‘할례’는 죄성을 한 번에 떼어 내는 신비한 영적 수술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자연적 인간의 불결한 사랑을 계속 정결하게 하시는 거듭남의 표상이 됩니다. 사람이 자기애를 죄로 인정하여 거절할 때마다 작은 할례가 일어난다고 표현해도 좋겠습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의 한 역사적 사건을 무수한 개인적 사건으로 단순 분해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그 표상이 가리키는 영적 실재가 인간의 거듭남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강사는 이어 로마서 2장 28절과 29절의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를 읽으면서 이를 ‘영적 할례’, ‘마음의 할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2장 11절의 ‘그리스도의 할례’도 같은 의미로 연결합니다. 강사의 결론은 명확합니다. ‘이렇게 할례받으면 흰옷을 입게 되는 것이고, 표현은 다르지만 다 똑같은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할례를 받아야 그리스도의 생명이 영 속에 내주합일되고’, 그것이 곧 ‘생명과를 먹는 것’이며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여러 영적 표상을 하나의 중심 경험으로 통합하려는 강사의 강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할례, 흰옷, 인침, 생명과, 내주합일, 신의 성품에 참여함이 모두 ‘죄성이 처리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인간 안에 들어오는 완성된 성결 상태’를 서로 다르게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이 체계는 매우 단순하고 힘이 있습니다. 여러 성경 본문이 하나의 영적 지도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여러 표상을 완전히 같은 뜻으로 등치시키지는 않습니다. 서로 긴밀하게 관계되지만 각각 강조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할례’는 특히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불결함에서 정결하게 되는 것과 관계하고, ‘옷’은 선을 둘러싸는 진리와 관계하며, ‘흰옷’은 그 진리의 순수성과 관계합니다. ‘인침’은 주님의 것임이 인정되고 보호되는 상태, 더 깊게는 주님의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 받아들여져 구별되는 상태와 관계하며, ‘생명나무’와 그 열매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생명, 지혜와 행복에 관계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거듭남 안에서 서로 연결되지만 동일한 단어의 반복은 아닙니다.
이것이 상응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칙입니다. 말씀의 여러 상징을 하나의 교리적 뜻으로 전부 환원하면 설명은 간단해지지만 말씀의 입체성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마치 인체의 심장과 폐와 눈과 손을 모두 ‘생명’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심장=폐=눈=손이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모두 한 사람의 생명에 참여하지만 각각 다른 기능과 상응을 갖습니다. 마찬가지로 할례와 흰옷과 인침과 생명나무도 모두 거듭남과 주님과의 결합에 관계하지만 각기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이 차이를 살려 보면 오히려 강사의 전체 체계가 더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할례’에서는 무엇이 제거되어야 하는지를 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질서 밖에서 지배하는 상태입니다. ‘흰옷’에서는 무엇을 입어야 하는지를 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순수한 진리입니다. ‘인침’에서는 누구에게 속하는지를 봅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속한 존재가 아니라 주님께 속하여 그분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입니다. ‘생명나무’에서는 어디에서 생명이 오는지를 봅니다. 생명의 원천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 자신입니다. 이렇게 보면 네 표상이 하나로 뭉개지지 않으면서도 놀랍도록 하나의 질서를 이룹니다.
특히 ‘인침’을 생각할 때 이 점이 중요합니다. 인침은 인간이 어떤 높은 성결 단계에 도달했다는 인증서처럼 이해될 수 있지만, 계시록의 상응에서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 속한 사람 안에 있는 선과 진리가 보호된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7장에서 종들의 이마에 인치는 것도 자연적 이마에 보이지 않는 도장을 찍는 장면에 머물지 않습니다. ‘이마’는 사랑을 표상합니다. 얼굴에서 이마가 가장 앞에 있고 인간의 애정이 얼굴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마에 하나님의 인을 받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선이 그 사람의 내적 생명에 받아들여진 상태와 관계합니다.
그렇다면 ‘인침’의 핵심은 ‘나는 선택된 특별한 사람이다’가 아니라 ‘내 사랑의 주인이 누구인가?’가 됩니다. 자기애가 이마에 쓰여 있는가, 주님 사랑이 이마에 쓰여 있는가입니다. 사람은 입으로 주님을 고백하면서도 실제 지배적 사랑은 자기 명예와 권력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리적 표현은 부족해도 주님께서 가르치신 선을 사랑하고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는 사람에게는 천국적 사랑의 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강사가 14만 4천과 인침받은 종들을 특별한 ‘처음 익은 열매’ 집단으로 연결하는 해석과도 차이를 만듭니다. 강사의 체계에서는 특정한 영적 완성 단계에 이른 사람들이 교회 시대 동안 미리 흰옷을 입고 인침을 받은 14만 4천이라는 구조가 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계시록의 144,000은 정확한 자연적 인원수를 뜻하지 않습니다. ‘12’와 그 배수는 선과 진리의 모든 것을, 충만한 전체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144,000은 주님의 새 교회에 속하여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의 충만한 상태를 표상한다고 보는 것이 상응에 맞습니다.
여기에서 특히 조심해야 할 것은 ‘처음 익은 열매’라는 표현이 영적 엘리트 의식을 낳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강사는 성도들에게 더 깊은 성결과 순종을 촉구하기 위해 이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 열망 자체는 귀합니다. ‘적당히 믿다가 천국만 가면 된다’는 안일함을 거부하고 이 땅에서 실제로 주님의 생명이 나타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열망이 ‘우리는 일반 성도보다 높은 처음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는 자기 구별로 흐르면 바로 그 순간 할례가 제거해야 할 자기애가 영적 형태로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수도적 영성에서 특히 중요한 경계입니다. 세상보다 더 엄격하게 살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절제하고, 더 오래 연단받았다는 사실은 분명 귀한 훈련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는 보통 신자들과 다르다’는 의식으로 굳어지면 외적 성결이 내적 자기애를 강화하는 역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진정한 영적 할례는 바로 그 미세한 영적 우월감까지 잘라 내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나는 많이 버렸다’는 자기 의까지 버리는 것이 할례의 더 깊은 층일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강사가 자기 자신을 두고 ‘저는 아직 굴러 떨어지질 않아 가지고 너무너무 강력하게 살아 있어 고민이 많습니다’라고 말한 대목은 오히려 이 강의를 건강하게 붙잡아 주는 중요한 고백입니다. 자신이 가르치는 ‘죄성 제거’를 이미 완성했다고 선언하지 않고 자기 안의 현실적인 싸움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고백을 한 걸음 더 밀고 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직 실패했다는 증거만이 아니라, 주님의 빛 아래에서 proprium의 활동을 보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언젠가 내 안에서 완전히 사라져 내가 자체로 깨끗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목표로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나타날 때마다 주님께 의지하여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강사는 또 사람들이 ‘생명을 받았다’, ‘흰옷을 입었다’고 서로 주장하며 싸우는 현실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서 왜 그런 잘못을 즉시 고쳐 주시지 않는가를 ‘연단시키는 섭리’로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세히 일일이 바로잡아 주시면 연단이 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신앙대로 살아가도록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파들이 서로 싸우는 현실까지 이러한 연단의 섭리와 연결합니다. 이 대목은 매우 흥미롭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좀 더 세밀한 보완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오류에 빠져 서로 싸우도록 의도적으로 내버려 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의 자유를 강제로 제거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오류와 갈등을 허용하십니다. 그리고 그 허용된 악과 거짓까지도 가능한 한 선한 결과를 위해 굽혀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허용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교파 간 갈등 자체가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연단 프로그램이라고 말하기보다, 인간의 자기애와 교리적 proprium에서 생긴 분열을 주님께서 허용하시되 그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진리를 찾고 자기 의를 보며 더 깊은 체어리티로 나아갈 수 있도록 섭리하신다고 이해하는 편이 좋습니다.
실제로 교리적 차이는 사람 안의 사랑을 드러내는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내 교리가 옳다’고 확신할 때 나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 진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진리를 붙드는가, 아니면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진리를 사용하는가? 상대의 오류를 보면서 그의 영원한 선을 염려하는가, 아니면 내가 우월하다는 만족을 느끼는가? 바로 여기에서 교리 논쟁은 영적 할례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스베덴보리의 렌즈’라는 작업 자체에도 이 원리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를 기준으로 다른 설교와 신학을 살펴보는 일이 ‘스베덴보리는 옳고 저 사람들은 틀렸다’를 확인하는 작업으로 변한다면, 진리의 렌즈가 자기 의의 렌즈로 바뀔 수 있습니다. 반대로 다른 전통 안에서 주님께서 보존하신 선과 진리를 먼저 발견하고, 그 장점을 충분히 인정한 뒤, 상응과 아르카나를 통하여 더 깊은 의미를 열어 주는 방향으로 간다면 이 작업 자체가 체어리티의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사람을 이기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번 14부는 이 사경회와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만나는 매우 흥미로운 지점을 보여 줍니다. 강사는 ‘죄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고,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불결함이 정결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강사는 이것을 ‘할례’라고 부르고, 스베덴보리 역시 할례의 속뜻을 정결과 연결합니다. 강사는 외적인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를 말하고, 스베덴보리 역시 문자적 의식이 아니라 그것이 표상하는 내적 상태를 봅니다. 여기까지는 놀랄 만큼 가깝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차이는 ‘그 정결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서 나타납니다. 강사의 표현에서는 죄를 짓게 하는 ‘죄성 한 덩어리’가 어느 단계에서 굴러 떨어져 제거되는 그림이 강합니다. 반면 스베덴보리에게 거듭남은 인간의 proprium이 존재론적으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의 질서 아래 놓이고, 주님에게서 오는 새로운 의지와 이해가 점점 지배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인간은 천사가 된 뒤에도 자기에게서 선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주님에게서 선과 진리를 받습니다. 따라서 가장 높은 상태의 표지는 ‘내 죄성이 제거되었다’는 자기 확신보다 ‘나에게서 선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선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더욱 깊은 인정입니다.
이 차이는 작아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큽니다. 전자는 완성의 순간에 인간 자신이 ‘성결한 존재’가 되는 방향으로 읽힐 수 있지만, 후자는 영원히 주님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되는 방향입니다. 천국은 독립적으로 거룩해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거룩함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2강 14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신앙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고 그 후 받은 할례가 그 의를 인친 표가 되었다는 로마서의 말씀과, 가나안 입구 길갈에서 할례받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오늘 애굽의 수치를 너희에게서 굴러가게 하였다’고 하신 말씀을 연결하여, 할례-인침-흰옷-생명과-그리스도의 생명 내주합일을 죄를 짓게 하는 죄성의 덩어리가 제거되고 하나님께 경험적으로 의롭다 인정받은 이긴 자의 동일한 영적 상태를 가리키는 여러 표현으로 이해하는 강사의 해석은 외적 종교의식보다 마음의 실제 정결과 성결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귀하며, 특히 할례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불결함에서 정결하게 되는 영적 표상으로 보는 점에서는 스베덴보리의 상응과 상당히 가까이 접근하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정결을 proprium이라는 악의 가능성이 어느 순간 한 덩어리째 인간 존재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으로 보기보다, 주님의 지속적인 거듭남의 역사 가운데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도록 질서 아래 놓이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지배적 사랑과 생명을 이루어 가는 것으로 이해하며, 할례와 흰옷과 인침과 생명나무 역시 모두 거듭남과 관계하면서도 각각 정결, 진리의 순수함, 주님께 속함과 보호,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라는 고유한 아르카나를 지닌 것으로 구별할 때 말씀의 풍성함이 더욱 깊이 열립니다.’
이번 14부에서 특히 깊이 남는 것은 ‘애굽의 수치가 굴러갔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꼭 ‘내 안의 죄성이라는 물질이 완전히 제거되었다’는 뜻으로 읽지 않아도 이 말씀은 충분히 강력합니다. 오히려 이렇게 읽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애굽에서 나왔지만 애굽은 아직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주님께서 우리를 어떤 외적 악에서 건져 내신 뒤에도 그 악을 사랑했던 더 깊은 이유는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행동은 달라졌는데 사랑은 아직 달라지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말은 온유해졌는데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상대를 지배하고 싶을 수 있고, 재물을 포기했는데 ‘재물을 포기한 나’를 사랑할 수도 있으며, 세상 명예를 버렸는데 ‘영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명예’를 새롭게 추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에는 계속되는 ‘길갈’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난 악만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밑의 사랑을 다루십니다. 그리고 더 깊은 사랑이 드러날 때마다 사람은 다시 선택해야 합니다. ‘이것도 주님보다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이것도 주님께 내어 드릴 것인가?’ 바로 그때 마음의 할례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보면 영적 할례의 가장 깊은 칼날은 다른 사람을 향하지 않고 자기 proprium을 향합니다. ‘저 사람은 아직 할례받지 못했다’, ‘저 사람은 아직 광야 성도다’, ‘나는 흰옷 입은 사람이다’라고 사람들을 나누는 순간 그 칼날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참된 할례는 오히려 그런 생각을 일으키는 내 안의 영적 우월감을 잘라 냅니다.
그리고 그 정결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이상하게도 자기 성결을 덜 의식하게 됩니다. 주님을 더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깨끗해졌는가?’보다 ‘주님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가?’가 더 크게 보이고, ‘나는 어느 단계인가?’보다 ‘오늘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이웃에게 어떻게 선을 행할 것인가?’가 중요해집니다. 이것이 할례와 흰옷과 인침을 하나로 묶어 주는 가장 안전한 중심일 것입니다. 인간이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주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2강15부
‘마음의 할례와 생명책’ :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이름이 지워진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2강 15부에서는 앞에서 다룬 ‘할례-흰옷-인침-생명과’의 관계가 두 갈래로 더욱 선명해집니다. 하나는 신명기 30장 6절을 통해 ‘마음의 할례’와 ‘생명’을 직접 연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계시록 3장 5절의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을 통해 ‘이긴 자’의 구원이 확정되는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강사는 먼저 ‘구약 성경에 마음의 할례와 생명이라는 말이 동시에 나오는 구절’로 신명기 30장 6절을 제시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는 말씀입니다. 강사는 이 말씀을 매우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은 결과 사람이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이 곧 ‘생명을 얻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이번 대목은 사실 앞서 강사가 여러 본문을 연결하여 만들어 온 ‘할례-생명과-그리스도의 생명 내주합일’이라는 체계 가운데 상당히 강한 성경적 접점을 제공합니다. 그동안에는 로마서와 골로새서, 계시록의 흰옷과 생명나무를 서로 연결하면서 하나의 영적 구조를 만들었다면, 신명기 30장 6절에서는 실제로 ‘마음의 할례’, ‘하나님을 사랑함’, ‘생명’이 한 구절 안에 나옵니다. 강사가 최근에 이 구절을 발견하고 감사했다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이 가르쳐 온 전체 체계가 구약의 한 말씀 안에서 매우 압축적으로 만나는 것을 발견했다고 느낀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신명기 30장 6절은 매우 깊게 읽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특히 여기에서는 할례의 목적이 분명합니다. 단순히 ‘죄성이라는 무엇을 제거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정결은 부정적인 것의 제거로 끝나지 않습니다. 악을 제거하는 목적은 그 자리에 선이 들어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기애가 물러나는 이유는 인간이 공허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 사랑이 중심에 자리 잡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할례의 본질을 ‘무엇이 잘려 나갔는가?’만으로 정의하기보다 ‘잘려 나간 뒤 무엇이 지배적 사랑이 되었는가?’로 보는 것이 더 깊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신명기 30장 6절은 강사의 ‘죄성 제거’라는 표현을 매우 중요한 방향으로 보완해 줍니다. 말씀은 ‘마음에 할례를 베풀어 죄성을 없애겠다’에서 멈추지 않고 ‘너로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겠다’고 합니다. 목적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생명’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인간 안에 어떤 신비한 생명 물질이 들어와 저장되는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새로운 질서 안에서 사는 것과 연결됩니다. 주님 사랑이 인간의 생명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이것이야말로 영적 생명의 본질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중심으로 삽니다. 무엇이 나에게 유리한가, 무엇이 내 명예를 높이는가, 무엇이 내 욕망을 만족시키는가가 중심입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랑의 질서가 바뀝니다. 주님을 모든 것보다 사랑하고 이웃의 선을 자기 유익보다 사랑하는 새로운 의지가 형성됩니다. 이것이 천국의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사후에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도 사후에 계속 존재합니다.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로 살아가는 천국적 생명입니다.
이렇게 보면 신명기 30장 6절의 순서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할례-사랑-생명’입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무질서가 정결되고, 그 결과 주님 사랑이 중심이 되며, 그 사랑이 생명이 됩니다. 이것은 앞서 강사가 말한 ‘생명과를 먹는다’는 표현도 훨씬 명료하게 해 줍니다. 생명과를 먹는다는 것은 어떤 특별한 영적 능력을 소유하게 되는 것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먹음’은 받아들여 자기 것으로 삼는 것을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가 드러납니다. 강사는 ‘마음의 할례를 받아야 마음과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래야 생명을 얻는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상응적으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시간적 3단계라기보다 하나의 유기적인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더 미세한 자기애가 드러나 정결되고, 더 정결될수록 주님 사랑이 더 자유롭게 흘러들어오며, 그 사랑이 다시 더 깊은 생명의 상태를 만듭니다. 할례가 끝난 뒤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정결과 사랑이 서로를 깊게 하면서 거듭남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완전한 할례’를 어느 한 시점의 졸업 사건처럼 생각하지 않도록 해 줍니다.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했다고 모든 자기애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 사랑의 빛이 밝아질수록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더 미세한 자기애가 보입니다. 그러면 다시 정결이 필요합니다. 더 깊은 마음의 할례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정결과 사랑과 생명이 점점 더 깊어지는 과정입니다.
이 대목은 강사가 지금까지 반복해 온 ‘이긴 자’의 개념도 조금 새롭게 보게 합니다. 참된 이긴 자의 가장 분명한 표지가 ‘죄성이 제거되었다는 자기 확신’이라기보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면, 영적 성숙의 기준도 달라집니다. 영계의 구조를 얼마나 많이 아는가, 얼마나 강한 은사를 받았는가, 얼마나 많은 연단을 통과했는가보다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랑이 실제 삶에서 얼마나 지배적으로 되었는가가 중요해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마음의 할례’는 자기부인의 가장 긍정적인 정의를 줍니다. 자기부인은 자기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중심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를 죽여 아무 감정도 욕망도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애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님의 사랑을 기뻐하는 새 의지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이 사경회의 강한 자기부인과 연단의 언어도 훨씬 건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표는 ‘고통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강사는 이어 두 번째 주제로 계시록 3장 5절을 가져옵니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강사는 여기서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는다’를 ‘완전한 구원을 보장받는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반대 방향의 추론을 합니다. ‘반드시 흐리지 않는다’는 약속이 특별히 이긴 자에게 주어진다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이름이 ‘흐려질 수도 있고 지워질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강사는 출애굽기 32장의 금송아지 사건을 가져옵니다. 모세가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간구하자 여호와께서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고 답하신 말씀입니다. 강사는 여기의 ‘주의 책’을 ‘생명책’으로 이해하고, 따라서 생명책에 한 번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무조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성경 전체를 세밀하게 보지 않은 해석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대목은 기독교 구원론의 오래된 논쟁, 곧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의 구원이 영원히 취소될 수 없는가, 아니면 사람이 이후의 악한 삶과 배교를 통해 그 구원을 잃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강사의 입장은 분명 후자 쪽에 가깝습니다. 다만 그의 전체 체계에는 조금 더 독특한 요소가 있습니다. 보통의 성도는 아직 구원이 완전히 확정된 상태가 아니며, 광야 연단을 다 통과하여 ‘이긴 자’가 되고 흰옷을 입은 뒤에야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는다’는 완전한 구원 보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상태를 일종의 ‘완전 성화의 은총’과도 연결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 문제를 조금 다른 언어로 보게 됩니다. 먼저 ‘생명책’을 실제 하늘의 장부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했다가 죄를 지으면 지우개로 지우시는 자연적 책의 이미지가 핵심은 아닙니다. 말씀에서 ‘책’은 사람의 내적 상태, 삶에 새겨진 것, 또는 주님의 신적 기억 안에 있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특히 ‘생명책’은 천국적 생명에 속한 것, 곧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살아온 실제 삶과 관계합니다.
그렇다면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는 것은 단순한 행정적 등록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실제 생명 가운데 천국에 속한 것이 형성되어 있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어떤 존재의 성질과 상태를 나타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름이 기록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천국적 질이 인정되어 있다는 뜻이며, ‘이름이 지워진다’는 표현도 단순히 과거의 구원 자격이 취소되는 법적 행위보다 그 사람 안에서 천국적 삶이 사라지는 상태와 관련하여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사람이 죽은 뒤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는 것이 주님의 임의적인 장부 판정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지상에서 형성한 지배적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사람을 천국 명단에 넣었다 뺐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유 가운데 천국의 생명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하면서 자기 내적 생명을 형성합니다. 선과 진리를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면 천국과 결합하고, 악과 거짓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이면 지옥과 결합합니다.
따라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도 ‘한때 교회 등록을 했던 사람이 구원 명단에서 삭제될 수 있는가?’보다 ‘사람이 한때 진리를 받아들였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거부하고 악을 지배적 사랑으로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깊어질 수 있습니다. 지상생활 동안 인간의 상태는 변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처음에는 진리와 선에 열려 있다가 점차 자기애에 빠질 수도 있고, 반대로 오랫동안 악하게 살다가 회개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돌아설 수도 있습니다. 지상생활은 사랑이 아직 형성되고 변화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끝까지 견디는 자’라는 성경의 반복적 권면도 중요합니다. 최초의 신앙고백만으로 사람의 영원한 상태가 기계적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가 실제 삶과 사랑으로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는 강사가 ‘한 번 생명책에 기록되었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을 경계하는 방향을 충분히 귀하게 받을 수 있습니다. 신앙은 삶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제 내 이름이 지워질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도록 만드는 것도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지향하는 방향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떨어뜨릴 기회를 찾는 분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순간 구원 쪽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의 첫 호흡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끊임없이 천국을 향합니다. 인간이 자유롭게 그 인도를 거절할 수 있기 때문에 지옥이 가능하지만, 주님의 의지는 언제나 구원입니다.
따라서 구원의 확신도 ‘나는 어느 영적 단계에 도달했으므로 이제 절대로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는다’는 자기 상태의 판정에 두기보다, 주님의 신실하심과 현재의 사랑의 방향에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는 완전 성화에 도달했는가?’를 계속 측정하기보다 ‘나는 지금 주님을 향하고 있는가? 악이 드러날 때 그것을 죄로 알고 거절하고 있는가? 넘어졌을 때 주님께 돌아가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적으로도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생활 중 반복해서 실패하는 사람이 ‘나는 아직 이긴 자가 아니므로 언제든 생명책에서 지워질 수 있다’는 공포에 사로잡힌다면, 회개의 에너지가 주님을 바라보는 데서 자기 상태를 끝없이 검사하는 데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넘어지는 횟수를 계산하여 어느 선을 넘으면 이름을 지워 버리시는 분처럼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악에 대한 사람의 태도입니다. 그 악을 사랑하며 정당화하는가, 아니면 비록 넘어져도 그것을 죄라고 인정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오는가입니다.
거듭나는 사람도 넘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악을 ‘나의 참된 선’이라고 사랑하지 않습니다. 넘어지고 나면 괴로워하고 주님께 돌아갑니다. 이것은 단순한 감정적 죄책감이 아니라 새로운 의지가 이미 어느 정도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죄를 거의 짓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 의와 지배욕을 선이라고 확신하고 사랑한다면 내적 상태는 훨씬 심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외적 행위의 목록보다 지배적 사랑을 보십니다.
이 지점에서 계시록 3장 5절의 ‘이기는 자’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강사는 이것을 광야 연단을 완전히 통과하여 흰옷을 입은 특별한 완성 단계의 사람으로 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김’을 거듭남의 살아 있는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악이 올라올 때 주님의 진리를 선택하고, 거짓이 설득하려 할 때 진리를 붙들며, 자기 사랑이 지배하려 할 때 주님의 도움으로 그것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이김의 실제 능력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따라서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않는다’는 약속은 ‘드디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완전한 구원 안전지대에 도달했다’는 뜻보다, 주님과 결합된 천국적 생명이 그 사람 안에 실제로 형성되어 있다는 약속으로 읽는 편이 더 깊습니다. 선과 진리가 단순한 기억 속의 지식이 아니라 지배적 사랑과 삶이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천국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상이 아니라 이미 그의 생명과 같은 상태가 됩니다.
물론 여기에서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안전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천국의 천사들도 영원히 주님에게 의존합니다. ‘이름이 지워지지 않는다’는 가장 깊은 안전은 인간의 독립적 성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합에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자기 생명으로 기쁘게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천국에 자유롭게 머뭅니다. 이 안전은 쇠사슬처럼 강제된 안전이 아니라 사랑에서 오는 안전입니다.
여기에서 신명기 30장 6절과 계시록 3장 5절이 매우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생명을 얻게 한다’와 ‘이기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흐리지 않는다’입니다. 강사의 해석에서는 전자는 생명과를 얻는 성화의 완성이고 후자는 그 완성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구원 보장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둘 모두 주님과의 사랑의 결합으로 모을 수 있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아 자기애의 지배가 물러나고 주님을 사랑하는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는 것이 ‘생명’이며, 그 생명이 사람의 실제 성질과 삶이 되는 것이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됨’입니다.
이렇게 보면 구원은 법정적 선언과 실제 삶이 둘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악한 사람을 악한 상태 그대로 두고 서류상 의인으로 기록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스스로 의인이 되어 자격을 획득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진리와 선을 주시고 인간이 자유롭게 그것을 받아 악을 거절하며 살도록 하심으로써 실제 천국적 생명이 형성됩니다. 모든 능력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인간의 자유로운 수용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앞서 계속 등장한 ‘보혈’과도 연결됩니다. 보혈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내 죄가 법적으로 덮였으니 이제 안전하다’는 선언만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구속을 통하여 지옥을 이기시고 인간에게 주신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실제 악에서 벗어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혈, 마음의 할례, 흰옷, 생명과, 생명책은 서로 다른 언어지만 모두 실제 거듭남과 관계합니다. 다만 각각의 상응을 완전히 같은 뜻으로 뭉개지 않고 고유한 강조점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번 대목에서 또 하나 귀하게 볼 것은 강사가 ‘할례의 목적이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그 근거를 자신이 새롭게 발견한 신명기 30장 6절에서 찾은 태도입니다. 자신이 이미 가진 체계를 일방적으로 반복하기보다 성경을 계속 읽으면서 그 체계를 뒷받침하거나 확장하는 본문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 연결을 모두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말씀을 계속 살피려는 이 태도는 존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여기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야 합니다. 신명기의 ‘마음’, ‘할례’, ‘사랑’, ‘생명’이 각각 말씀의 전체 속뜻에서 무엇을 표상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이 한 절이 단순히 ‘내가 가르치던 교리를 증명하는 근거 구절’이 아니라 인간의 거듭남 전체를 담은 말씀으로 열립니다. ‘마음’은 의지와 사랑, ‘할례’는 불결한 자기 사랑에서의 정결, ‘여호와를 사랑함’은 새 의지의 중심,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적 선으로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한 절 안에 거듭남의 질서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 본문을 기존 교리의 증거구절로만 사용하면 본문의 역할이 축소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을 통해 본문 자체의 내적 질서를 보면 교리보다 말씀이 더 커집니다. 말씀이 체계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가 말씀 앞에서 계속 교정되고 확장됩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지향해야 할 방향도 바로 이것일 것입니다.
2강 15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신명기 30장 6절에서 ‘마음의 할례-마음을 다한 하나님 사랑-생명’을 하나의 연속적인 영적 원리로 읽고, 계시록 3장 5절의 ‘이기는 자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리라’와 출애굽기 32장의 ‘범죄한 자를 내 책에서 지우리라’를 연결하여, 광야 연단과 영적 할례를 통하여 흰옷 입은 이긴 자가 되면 비로소 생명과를 얻고 완전한 구원을 보장받지만 그 이전에는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질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하는 강사의 해석은 신앙을 한 번의 고백이나 형식적 구원확신에 머물게 하지 않고 실제 사랑과 삶의 변화, 끝까지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강한 장점을 지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마음의 할례를 죄성이라는 실체가 한 번에 제거되는 사건보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의 무질서가 정결되어 주님 사랑이 지배적 사랑으로 자리 잡는 과정으로, 생명을 그 결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로 살아가는 천국적 상태로, 생명책을 하늘의 자연적 명부라기보다 인간에게 실제 형성된 천국적 사랑과 삶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형상으로 이해하며, 구원의 안전 역시 인간이 어느 완덕 단계에 도달하여 독립적으로 확보하는 자격보다 주님과의 실제 사랑의 결합 안에서 이해할 때 더욱 깊고 안정적인 의미가 열립니다.’
이번 15부에서 가장 깊이 붙들 만한 말씀은 아마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일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영적 할례가 되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은 기준을 줍니다. 내가 얼마나 특별한 체험을 했는가가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연단을 통과했는가도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실제로 더 깊어지고 있는가입니다.
그리고 주님 사랑이 깊어지고 있는지는 이웃을 통해 드러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더 쉽게 정죄하고, 자기 교리를 자랑하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영적 등급을 갖기를 원한다면 아직 무엇인가 뒤틀려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을 알아 갈수록 자기 공로가 작아지고, 다른 사람의 선을 더 기뻐하며, 약한 사람을 더 오래 품고, 맡겨진 쓰임을 더 기쁘게 행한다면 마음의 할례가 실제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책의 문제도 두려움보다 사랑의 문제로 바꾸어 줍니다. ‘내 이름이 혹시 지워지면 어떡하지?’를 매일 두려워하며 사는 것이 신앙의 중심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오늘 어떤 사랑을 생명으로 만들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이 날마다 주님의 도움으로 악을 거절하고 선을 선택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형성해 간다면, 생명책은 멀리 하늘 어딘가에 있는 불안한 명부가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주님께서 새겨 가시는 천국적 생명의 기록처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의 가장 깊은 저자는 결국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자기 공로로 자기 이름을 생명책에 새기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주시고 선을 주시고 싸울 힘을 주시며, 인간은 그 모든 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받아 사용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고백은 ‘내가 끝까지 버텨 내 이름을 지켰습니다’보다 ‘주님께서 저를 붙드셨고, 저는 그 붙드심을 거절하지 않으려 애썼습니다’에 가까울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완전한 구원의 보장’도 자기 영적 성취에 대한 확신보다 주님께 대한 더 깊은 신뢰로 바뀝니다. 내가 완전하기 때문에 안전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생명이시며 내가 그분의 생명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안전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이 깊어지는 만큼 마음의 할례도 깊어지고, 흰옷도 밝아지며,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 곧 주님 앞에서 형성되어 가는 나의 참된 천국적 성질도 더욱 분명해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2강16부
‘감추인 만나와 흰 돌에 기록된 새 이름’: 주님의 생명을 먹는다는 것과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2강 16부에서는 강사가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기는 자의 축복’을 계속 정리하면서 버가모 교회에 주신 약속으로 들어갑니다. 계시록 2장 17절의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는 말씀입니다. 강사는 여기서 두 가지를 붙듭니다. 하나는 ‘감추인 만나’이고 다른 하나는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입니다. 그리고 앞서 계속 설명해 온 ‘생명과’, ‘그리스도의 생명’, ‘이긴 자’, ‘새 이름’의 체계 안에 이 말씀을 넣어 해석합니다.
먼저 강사는 ‘감추인 만나’의 뜻을 요한복음 6장에서 찾습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인용하면서, 광야의 만나가 육체를 살리는 양식이었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참된 만나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버가모 교회의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감추인 만나’도 결국 그리스도의 생명과 연결됩니다. 이 부분은 강사가 2강 전체에서 일관되게 전개해 온 핵심 주제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에베소 교회의 ‘생명나무의 과실’, 버가모 교회의 ‘감추인 만나’가 모두 결국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문제로 모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만나’를 생명과 연결하는 방향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생명’은 어떤 영적 물질이 인간의 영 안으로 들어와 자리 잡는 것이라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적 선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말씀에서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입으로 섭취하는 자연적 행위에 머물지 않고, 영적으로 어떤 선을 받아들여 자기 의지와 생명에 결합하는 것을 표상합니다. 자연적 음식이 몸에 들어와 몸의 일부가 되듯 영적 음식은 사람의 의지와 사랑에 받아들여져 그의 생명이 됩니다. 그러므로 ‘만나를 먹는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자기 삶으로 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의 만나 자체가 이것을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스스로 먹을 것을 만들어 낼 수 없었습니다. 매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받아야 했습니다. 어제 많이 모아 두었다가 자기 소유처럼 저장하여 오늘까지 의지할 수도 없었습니다. 안식일을 위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남겨 둔 만나에는 벌레가 생겼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것은 인간에게 있는 선이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매우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인간은 한 번 받은 은혜를 자기 소유로 만들어 ‘이제 나는 선한 사람이다’라고 독립할 수 없습니다. 오늘의 선도 오늘 주님에게서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앞서 강사가 말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된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보완점이 됩니다. 주님의 생명이 인간에게 들어온다는 것을 주님의 생명 자체가 인간의 고유한 소유물이 되어 그가 독립적인 생명의 원천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오직 주님만 생명 자체이십니다. 인간과 천사는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천국에서 가장 높은 천사조차 자기에게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생명과 선과 지혜가 순간순간 주님에게서 유입된다는 것을 지각합니다.
따라서 ‘감추인 만나’를 받는다는 것은 놀랍게도 ‘내가 생명을 소유한다’는 것보다 정반대의 상태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나는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생명을 받아야 사는 존재다’라는 것을 깊이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겸손입니다. 자연적 인간은 독립을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 ‘내 능력’, ‘내 의’, ‘내 성취’라고 말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은 점점 모든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참된 생명을 많이 받을수록 자기 생명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만나’ 앞에 ‘감추인’이라는 말이 붙을까요? 바로 여기에 계시록의 깊은 아르카나가 있습니다. 자연적 인간에게 천국의 선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선을 외적 행동으로 이해합니다. 남을 돕고, 헌금하고, 봉사하고, 규칙을 지키면 선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행동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같은 행동도 그 안에 어떤 사랑이 있는가에 따라 영적 질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인정받기 위해 봉사할 수도 있고, 자기 의를 세우기 위해 희생할 수도 있으며,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 친절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만나처럼 보여도 그 안의 생명은 다를 수 있습니다.
참된 천국적 선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이 선의 내적 기쁨은 그것을 실제로 살아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감추어져’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포기하고 이웃의 선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데서 오는 기쁨, 자기 공로를 내려놓고 모든 선을 주님께 돌리는 데서 오는 평안은 자기애의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천국의 기쁨은 자연적 인간에게 감추인 만나입니다. 밖에서 설명만 들어서는 그 맛을 알 수 없고, 실제로 받아먹어야 압니다.
이 점은 계시록 2장 17절 후반의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와도 놀랍도록 연결됩니다. 영적 상태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체험되어야 압니다. 어떤 사람이 어머니의 사랑에 관한 책을 백 권 읽었다고 해서 실제 어머니가 자녀를 사랑하면서 느끼는 것을 그대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의 선도 교리로 설명할 수는 있지만 그 선 자체를 사랑하여 살아 보지 않으면 그 내적 질을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영적 상태의 고유성을 매우 깊게 보여 줍니다.
강사는 이어 ‘감추인 만나’를 받은 사람들의 상태를 자신의 ‘영의 지성소’와 ‘영의 성소’ 구분과 연결합니다. 강사의 설명에 따르면 생명과를 먹고 하나님의 생명과 더 깊이 합일된 이들은 ‘영의 지성소’에 합일되어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고, 나머지 성도들은 ‘영의 성소’에 합일되어 만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립니다. 그리고 그 차이는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의 원리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에는 강사의 천국 이해에서 반복되는 일종의 단계적 구조가 나타납니다. 모든 구원받은 사람이 동일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성결과 순종의 정도에 따라 영원한 상태에도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도 천국에 차이가 있다는 점 자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모든 천사가 똑같은 상태에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크게 세 천국, 곧 천적 천국, 영적 천국, 자연적 천국으로 구별하고, 그 안에도 셀 수 없이 많은 공동체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각 공동체는 서로 다른 선과 쓰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구원받으면 모두 완전히 동일한 상태가 된다’는 획일적인 천국관보다는 강사가 말하는 차등적 상태가 오히려 실제 천국의 다양성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누가 더 높은 등급을 획득했는가’라는 자연적 서열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국의 높고 낮음은 세상의 계급과 다릅니다. 천국에서 더 내적인 상태에 있는 천사는 다른 천사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랑이 깊을수록 더 겸손하고 더 기쁘게 섬깁니다. 천국의 차이는 특권의 차이라기보다 사랑과 쓰임의 차이입니다. 모든 천사는 자기에게 맞는 공동체에서 완전한 기쁨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새 예루살렘에 들어간 사람’과 ‘만국에 들어간 사람’을 마치 천국의 일등석과 일반석처럼 생각하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천국 이해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여기서 ‘행한 대로 갚으신다’는 말씀도 같은 원리로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지상의 선행 점수를 계산하여 사후에 더 좋은 지역을 배정하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의 행위에는 그의 사랑과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반복하여 자유롭게 선택한 행위는 결국 그의 성품이 됩니다. 따라서 ‘행한 대로’란 단순히 외적인 행동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통하여 형성된 사랑의 질을 뜻합니다. 사후에 사람은 바로 그 사랑의 상태에 맞는 공동체로 갑니다. 이것이 심판이며 동시에 완전한 질서입니다.
강사는 이제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로 넘어갑니다. 그는 먼저 ‘새 이름’을 앞서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사건과 연결합니다. 야곱이 얍복강에서 씨름한 뒤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처럼, 이긴 자에게도 새 이름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흰 돌’이라는 독특한 표현에 주목합니다. 성경에서 주님을 가리켜 ‘산 돌’, ‘모퉁잇돌’ 등 여러 ‘돌’의 표현이 사용되는 것을 언급하면서 이 흰 돌 역시 주님 및 이긴 자의 상태와 관련하여 이해하려 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 매우 풍성하게 열립니다. 말씀에서 ‘돌’은 가장 기본적으로 진리를 표상합니다. 특히 자연적 차원에서 확정된 진리, 곧 삶의 기초가 되는 진리와 관계합니다. 돌이 단단하여 건축의 기초가 되는 것처럼 진리는 영적 삶의 구조를 세우는 기초가 됩니다. 그래서 십계명이 돌판에 기록되었고, 제단이 돌로 세워졌으며, 주님께서 ‘모퉁잇돌’로 불리십니다. 주님은 모든 진리의 근원이시며 교회와 천국의 기초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흰색’은 진리의 순수성과 빛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흰 돌’은 순수한 진리, 특히 선에서 나오는 진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차가운 교리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결합하여 밝아진 진리입니다. 앞서 ‘흰옷’에서도 흰색이 진리의 순수성과 관련되었듯 여기서도 같은 상응의 질서가 작용합니다. 다만 ‘옷’은 인간의 선을 둘러싸고 표현하는 진리를, ‘돌’은 더 확정되고 기초가 되는 진리를 강조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흰 돌 위에 ‘새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말씀에서 ‘이름’은 매우 깊은 의미를 가집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어떤 존재의 질, 곧 그 사람의 사랑과 신앙과 삶으로 형성된 전체적인 영적 성질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는 사건들은 단순한 개명이 아닙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사래가 사라가 되며,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는 것은 새로운 영적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천국에서 새로운 별명을 하나 받는다는 뜻보다 사람이 거듭남을 통하여 이전과 다른 영적 성질을 갖게 되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지배하던 옛 사람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지배하는 새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름이 달라졌다는 것은 생명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사가 야곱과 이스라엘을 연결한 직관과 매우 좋은 접점을 이룹니다. 다만 야곱이 문자적으로 이름을 바꾸었으므로 모든 이긴 자에게도 문자적인 비밀 이름 하나가 주어진다고 보는 데 머물기보다, ‘야곱’이 표상하는 상태에서 ‘이스라엘’이 표상하는 상태로의 변화가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말씀에서 이름의 변화는 상태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새 이름’은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새롭게 형성된 사람의 영적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이 의미를 더욱 깊게 합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은 철저히 고유합니다. 천국에는 똑같은 두 천사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른 유전적 성향과 환경, 경험, 지식, 자유로운 선택을 가지고 살아왔으며,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섭리 가운데 이끌어 각 사람에게 고유한 천국적 형태를 이루십니다. 따라서 거듭난 사람의 ‘새 이름’은 대량생산된 동일한 이름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천국의 다양성과도 연결됩니다. 천국은 모든 사람이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느끼는 획일적 공동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셀 수 없이 다양한 천사들이 각자 고유한 선과 쓰임을 가지면서 주님 안에서 하나를 이룹니다. 마치 몸의 눈과 귀와 손과 발이 서로 다르지만 하나의 생명을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은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고유한 쓰임과 사랑의 형태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새 이름이 ‘내가 만들어 낸 이름’이 아니라 ‘주시는 이름’이라는 점입니다. 거듭남의 새로운 정체성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는 영적 자기계발의 결과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 새로운 의지와 이해를 형성하십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그 역사를 받아들이고 협력하지만 새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새 이름은 자기 성취의 훈장이 아니라 은총의 표지입니다.
이것은 앞서 강사가 반복해서 말한 ‘이긴 자’라는 표현에도 중요한 균형을 줍니다. ‘이긴 자’라는 말만 강조하면 자칫 영적 영웅의 이미지가 생길 수 있습니다. 많은 시험을 자기 의지로 극복하여 마침내 높은 단계에 오른 사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이김의 실제 능력은 언제나 주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은 주님의 힘을 받아 악과 거짓을 거절합니다. 그러므로 이긴 자가 받는 ‘새 이름’은 ‘내가 이겨서 획득한 칭호’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새롭게 하신 결과로 나타난 새로운 영적 성질’입니다.
‘흰 돌’과 ‘새 이름’을 함께 보면 더욱 아름답습니다. 진리가 사람에게 단순히 지식으로 머물러 있을 때에는 아직 돌 위에 새 이름이 기록된 상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삶이 되고, 그 진리에 따라 악을 거절하며 선을 행하고, 그 결과 사람의 사랑과 성품이 달라지면 진리가 그의 생명 안에 새겨집니다. 말하자면 ‘돌 위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더 이상 책 속의 문장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알고 있는 것과, 오랫동안 자기를 힘들게 한 사람을 실제로 용서하면서 그 진리가 자기 성품의 일부가 된 것은 다릅니다. 전자는 돌을 보고 있는 것이고 후자는 그 돌에 새 이름이 기록되기 시작한 것과 비슷합니다. ‘겸손하라’는 말씀을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실제로 자기 공로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선을 기뻐하는 것도 다릅니다. 진리가 의지와 결합할 때 사람의 이름, 곧 그의 영적 성질이 바뀝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은 갑자기 천국에서 부여되는 낯선 이름이라기보다 지상에서부터 형성되는 새로운 사람의 생명과 관계합니다. 사후에는 그것이 완전히 드러납니다. 지상에서는 사람의 겉모습과 사회적 지위와 말솜씨가 그의 실제 상태를 가릴 수 있지만, 영계에서는 내적 상태가 점점 외적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사랑하는 것이 얼굴과 말과 주변 환경과 공동체에까지 드러납니다. 그때 그의 ‘이름’, 곧 실제 영적 성질도 명백해집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어떤 비밀 암호를 혼자만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의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셨는지는 그 사람 자신과 주님 사이에 고유한 깊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의 삶을 외적으로 알 수는 있어도 주님께서 그 사람을 어떤 시험에서 어떻게 붙드셨고, 어떤 악에서 어떻게 건지셨으며, 어떤 선을 그의 생명으로 만드셨는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영적 상태를 함부로 판정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누가 ‘이긴 자’인지, 누가 ‘익은 열매’인지, 누가 ‘흰옷을 입었는지’를 외부 사람이 쉽게 확정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이 사람의 내적 사랑을 아십니다. 어떤 사람은 외적으로 매우 평범해 보여도 오랫동안 자기 안의 깊은 악과 싸우며 주님을 의지해 왔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매우 영적인 언어와 체험을 말하면서도 내적으로는 인정욕과 지배욕이 중심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영적 등급을 다른 사람에게 붙이는 일에 매우 신중해야 합니다. ‘저 사람은 광야 성도’, ‘이 사람은 이긴 자’, ‘저 사람은 생명과를 아직 못 먹은 사람’이라고 구분하는 순간, 말씀의 상응이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가 될 위험이 있습니다. 상응은 우선 자기 자신을 비추는 빛이어야 합니다. ‘나는 감추인 만나를 먹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나는 특별한 생명을 받았는가?’보다 ‘나는 오늘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실제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감추인 만나’와 ‘새 이름’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먹을수록 그의 사랑이 달라지고, 사랑이 달라질수록 그의 영적 성질, 곧 ‘이름’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은 감추인 만나를 먹은 결과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면서 사람이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본질을 매우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거듭남은 단순히 ‘나쁜 내가 좋은 내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의지와 이해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새로운 창조에 비유합니다. 창세기 1장의 창조 자체가 가장 깊은 속뜻에서는 인간이 자연적 상태에서 영적이고 천적인 사람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어둠에 빛이 비치고, 물이 나뉘고, 땅이 드러나며, 식물이 자라고,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생물과 사람이 창조되는 모든 과정이 한 사람 안에서 새로운 질서가 세워지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새 이름’은 창세기적 표현으로 말하면 ‘새로운 사람이 창조되었다’는 뜻과도 연결됩니다. 이전에는 proprium에서 생각하고 사랑하던 사람이 이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 생각하고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물론 자연적 인격과 기억과 개성은 그대로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원래 그에게 주신 고유한 것을 정결하게 하여 참된 형태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거듭날수록 인간은 자기 개성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참된 자기 자신이 됩니다.
여기에서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매우 따뜻한 의미도 가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집단의 한 번호로 구원하지 않으십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고유하게 아십니다. 그의 어린 시절부터 모든 경험과 상처와 선택과 싸움을 아시며, 그 모든 것을 섭리 가운데 사용하여 오직 그 사람에게만 가능한 천국적 쓰임을 형성하십니다. 천국에는 복제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강조하는 ‘이긴 자가 되라’는 권면도 이 관점에서 받으면 부담스러운 영적 경쟁이 아니라 매우 개인적인 부르심이 됩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익은 열매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내게 주어진 삶 속에서 주님께서 이루시려는 고유한 거듭남을 끝까지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남의 속도와 비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강 16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감추인 만나’를 요한복음 6장의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그리스도의 생명을 받는 것으로,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은 것처럼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새로운 영적 신분과 축복으로 이해하는 강사의 해석은 이긴 자의 삶을 단순한 외적 보상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실제로 얻는 문제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중요한 통찰을 지니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이를 더욱 내적으로 보아 ‘감추인 만나’를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유입되는 천국적 선을 받아 자기 사랑과 삶으로 삼는 것으로, ‘흰 돌’을 선에서 나오는 순수하고 확정된 진리로, 그 위의 ‘새 이름’을 거듭남을 통하여 형성된 새로운 사랑과 신앙과 쓰임의 고유한 영적 성질로 이해하며, ‘받는 자밖에는 알 사람이 없다’는 말씀 역시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서 이루시는 거듭남이 획일적인 영적 등급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만 고유한 천국적 생명의 형태라는 아르카나로 읽을 때 더욱 깊어집니다.’
이번 16부에서 특별히 붙들 만한 것은 ‘감추인 만나’와 ‘새 이름’ 사이의 관계입니다. 만나를 먹으면 생명이 달라지고, 생명이 달라지면 이름이 달라집니다. 주님의 선을 받아들이면 사랑이 달라지고, 사랑이 달라지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단지 더 많은 성경 지식이나 더 특별한 영적 체험이 아닙니다.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새로움은 외부에서 붙여 주는 명예로운 칭호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이긴 자’, ‘처음 익은 열매’, ‘성결한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해서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의 진리를 따라 악을 거절하고, 맡겨진 사람을 사랑하고, 자기 공로를 내려놓으며, 날마다 주님에게서 선을 받아 살아가는 동안 그 사람 안에 ‘새 이름’이 기록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 이름을 받는 가장 깊은 길은 어쩌면 자기 이름을 높이려는 욕망에서 벗어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이름, 교회에서 높아지는 이름, 영적으로 특별하다고 알려지는 이름을 붙들수록 proprium의 옛 이름은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몰라도 주님 앞에서 선을 행하고, 그 선을 자기 공로로 돌리지 않을 때 주님께서만 아시는 새 이름이 형성됩니다.
그리고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는 말씀은 그 때문에 더욱 아름답습니다. 천국의 새 이름은 남에게 보여 주는 훈장이 아닙니다. 주님과 그 사람 사이에서 형성된 고유한 사랑의 역사입니다. 우리가 겪었던 광야와 시험과 넘어짐과 회개와 다시 일어섬, 아무도 몰랐던 작은 순종들까지 주님께서는 모두 아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한 사람을 다른 누구와도 같지 않은 천국의 한 구성원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감추인 만나를 먹고 흰 돌에 새 이름을 받는다’는 말씀의 마지막 초점은 ‘나는 어느 등급의 이긴 자인가?’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 나는 누구에게서 생명을 받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proprium에서 받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에게서 받아 살고 있는가입니다. 날마다 주님에게서 만나를 받아먹는다면 새 이름은 이미 그 사람 안에서 조금씩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완전히 드러나는 날, 사람은 전혀 낯선 누군가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처음부터 그 사람 안에 이루고자 하셨던 가장 참된 자기 자신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2강17부
‘새 이름’과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음’ :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은 결국 무엇을 말하는가
2강 마지막 17부는 앞에서 다룬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의 설명을 마무리하고, 서머나 교회에 주어진 마지막 약속인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를 풀이한 뒤, 지금까지 살펴본 ‘이긴 자가 받는 열두 가지 축복’ 전체를 한데 모으는 것으로 끝납니다. 강사는 먼저 ‘새 이름’을 매우 실제적인 영계의 이름으로 이해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던 것처럼, 사람은 천국에서 지상에서 사용하던 이름과는 다른 새 이름을 받게 되며, 그 이름을 들으면 그 사람이 지상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곧바로 느낄 수 있는 이름일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특히 ‘교회 시대 처음 익은 열매’, 곧 이긴 자들은 죽은 뒤가 아니라 육체로 살아 있을 때부터 이 새 이름을 받는다고 봅니다. 다만 강사 자신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은 그렇게 안 믿어도 상관없다. 구원과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이해와 구원의 본질을 구별합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이름’이 사람의 영적 성질을 나타낸다는 강사의 직관 자체는 상응의 원리와 매우 가깝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그 존재의 질, 곧 사랑과 신앙과 삶의 상태 전체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름이 바뀌는 사건은 단순한 개명 이상입니다. 그 사람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가 달라졌음을 표상합니다. 따라서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을 새로운 영적 상태와 성질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매우 깊은 방향입니다.
다만 ‘천국에 가면 지금의 이름 대신 문자적으로 새로운 이름표 하나를 부여받는다’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습니다. 상응의 중심은 이름표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사람은 거듭남을 통해 실제로 다른 사람이 되어 갑니다. 기억과 개성과 인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지배하던 사랑의 중심이 달라집니다. 자기애와 세상 사랑이 중심이던 사람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은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 이루신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신앙과 새로운 쓰임의 고유한 질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다’는 말씀도 더욱 깊게 합니다. 한 사람의 거듭남은 철저히 고유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말씀을 읽고 같은 교회에 다녀도 주님께서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재물에 대한 애착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명예욕을 통하여, 어떤 사람은 인간관계의 상처를 통하여,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의와 종교적 우월감과 싸우면서 거듭납니다. 다른 사람은 그 외형을 어느 정도 볼 수 있지만, 주님께서 그 영혼 안에서 무엇을 다루셨고 그 사람이 어떤 자유로운 싸움을 통하여 어떤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완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새 이름’은 주님과 그 사람 사이에 있는 고유한 거듭남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강사가 ‘이긴 자는 살아 있을 때 새 이름을 받는다’고 말한 것을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조금 바꾸어 말하면, 거듭남은 사후에 갑자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상에서부터 사람의 실제 영적 성질을 새롭게 만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오늘 하나의 악을 죄로 인정하고 거절할 때, 자기 공로 하나를 내려놓을 때, 누군가를 용서하고 진리를 실제 선으로 행할 때, 이미 옛 이름에서 새 이름으로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후에는 그 상태가 감춰지지 않고 완전히 드러날 뿐입니다.
그리고 강사는 이제 ‘끝으로’ 서머나 교회의 약속으로 갑니다. 계시록 2장 11절,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입니다. 강사는 성경에는 두 종류의 사망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첫째 사망은 육체의 죽음이고, 둘째 사망은 영혼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 곧 불못과 무저갱 및 지옥과 관련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일반 성도도 당연히 지옥에 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왜 굳이 ‘이긴 자’에게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특별한 약속이 주어졌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그리고 그 답을 자신의 종말론적 시간표 속에서 찾습니다.
강사의 설명에서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이 단순히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뜻만이 아닙니다. 계시록 9장의 다섯째 나팔 때 무저갱이 열리고 황충 같은 악령들이 올라와 사람들을 다섯 달 동안 괴롭히는 대환란의 재앙에서 보호받는다는 의미로 연결합니다. 곧 이긴 자들은 그 환난 이전에 휴거되므로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악령들의 해를 아예 경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강사는 이것을 ‘대환란을 면제받고 휴거된다는 간접적인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설명을 끝으로 ‘이긴 자가 받는 열두 가지 축복’을 모두 살펴보았다고 선언합니다.
여기서는 ‘스베덴보리의 렌즈’와 강사의 미래주의적 계시록 해석 사이의 차이가 매우 선명하게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록 9장의 무저갱과 황충을 미래 특정 기간에 지구상에 나타날 실제 악령 군단과 재앙으로 읽지 않습니다. 계시록의 무저갱, 황충, 불못, 둘째 사망은 교회와 영계의 상태를 보여 주는 상응적 형상들입니다. 따라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를 미래 대환란 이전에 육체적으로 휴거되어 특정 재앙을 피하는 것으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죽음’은 말씀에서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적 몸으로 살아 있어도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거절하고 악과 거짓을 자기 생명으로 삼으면 영적으로는 죽은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가 죽어도 주님의 생명 가운데 있는 사람은 실제로는 더욱 충만하게 삽니다. 그렇다면 ‘둘째 사망’은 육체의 첫째 죽음 이후에 다시 일어나는 어떤 물리적 죽음이라기보다, 사람이 자기애와 거짓을 지배적 생명으로 삼아 주님에게서 오는 천국적 생명과 영원히 등을 지는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은 매우 깊은 거듭남의 약속이 됩니다. 사람이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에 맞서 싸우면서 주님과 이웃을 향한 선을 지배적 사랑으로 받아들이면, 그 사람의 참된 생명은 더 이상 지옥적 사랑에 속하지 않습니다. 육체의 죽음은 그 생명을 빼앗지 못합니다. 오히려 육체가 벗겨진 뒤 그가 지상에서 받아들였던 천국적 사랑이 더 자유롭게 드러납니다. 그런 의미에서 ‘둘째 사망이 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외부 재앙 하나를 면제받는 데서 훨씬 더 깊이, 그 사람의 생명이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결합되어 있다는 뜻이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기는 자’의 의미를 다시 중심으로 돌려놓습니다. 강사는 이긴 자를 광야 연단을 모두 마치고 죄성을 제거하여 생명과를 먹고 흰옷을 입고 새 이름을 받은 특별한 성도로 이해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이긴다’는 말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김의 대상은 먼저 내 밖의 적그리스도나 미래의 황충이 아니라 내 안에서 주님께 반대되는 악과 거짓입니다. 그리고 이김의 실제 능력은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지옥을 이기신 분이시며, 인간은 주님의 힘을 받아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악을 거절합니다.
이 점에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약속은 인간 자신의 영적 전투 능력을 칭찬하는 훈장이 아닙니다. 주님과 결합된 생명의 결과입니다. 사람이 시험을 많이 이겨서 ‘나는 이제 죽음을 초월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주님의 선을 자기 생명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죽음이 그 생명을 지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강사가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을 하나의 패키지처럼 정리하여 ‘이긴 자가 되면 다 받는다. 살아 있을 때 받는 것도 있고 천국 가서 받는 것도 있다’고 말한 부분도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통합할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과실, 감추인 만나, 흰 돌, 새 이름, 흰옷, 생명책,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 주님의 보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새벽별, 둘째 사망을 받지 않음 등은 서로 무관한 열두 개의 상품 같은 상급이 아닙니다. 하나의 천국적 생명이 서로 다른 측면에서 표현된 것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들이고, 진리가 삶이 되고, 새로운 영적 성질이 형성되고, 주님에게 속하며, 쓰임 가운데 굳게 서고, 악과 거짓의 지배에서 벗어나며, 마침내 주님과의 결합 가운데 사는 하나의 상태를 여러 상응적 형상으로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계시록의 일곱 교회에 주어진 약속들은 ‘높은 단계에 올라가면 하나씩 획득하는 영적 특전 목록’이라기보다 거듭난 인간의 모습을 여러 방향에서 묘사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사람과 감추인 만나를 먹는 사람, 흰옷을 입는 사람과 새 이름을 받는 사람이 각각 별개의 부류가 아니라, 주님의 선과 진리를 생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의 서로 다른 면입니다. 물론 각 표현의 고유한 상응은 보존되어야 합니다. 모두 같은 뜻이라고 뭉개서는 안 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의 주님과 하나의 거듭남이 있습니다.
특히 2강 전체를 돌아보면 강사의 가장 강한 장점도 바로 여기에서 다시 보입니다. 그는 구원을 ‘예수 믿었으니 이제 끝났다’는 식으로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신앙이 실제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하고, 자기 옷을 빨아야 하며, 말씀에 순종해야 하고, 광야 연단 속에서 자기 안의 죄성과 정욕이 드러나야 하며,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신앙만’의 구원을 강하게 거부하고 신앙과 체어리티와 삶의 결합을 강조한 것과 중요한 접점을 갖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가 계속 보완해 온 핵심도 분명합니다. 이 거듭남을 일정한 단계에 도달하여 ‘죄성 한 덩어리’를 완전히 제거하고 ‘이긴 자’라는 특별한 계급에 들어가는 과정으로 지나치게 고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듭남은 주님에게서 독립적으로 완전해지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주님에게 의존하게 되는 과정입니다. 악의 가능성이 존재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악이 지배권을 잃고 주님에게서 오는 새 의지가 사람을 다스리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깊은 ‘이김’은 ‘나는 더 이상 죄성이 없다’는 상태가 아니라, 자기에게서 선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속 주님께 돌아가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험이 올 때 자기 힘을 믿기보다 주님의 힘을 구하고, 넘어졌을 때 악을 합리화하지 않고 회개하며, 선을 행했을 때 공로를 자기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그렇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이상하게도 자기 영적 등급에는 덜 관심을 가지게 되고 주님과 이웃의 선에는 더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이것은 강사가 마지막에 청중에게 ‘여러분 모두가 이긴 자 되시기를 축원한다’고 한 권면도 더 깊게 받을 수 있게 합니다. ‘이긴 자가 되십시오’가 ‘다른 신자보다 높은 반열에 올라가십시오’라는 경쟁적 권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오늘 여러분에게 주어진 영적 싸움에서 주님의 힘을 받아 악을 거절하십시오’라는 권면이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분노가 싸움이고, 누군가에게는 재물욕이 싸움이며, 누군가에게는 음란이나 인정욕, 자기 의, 지배욕이 싸움일 수 있습니다. 그 싸움은 매우 개인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 사경회의 수도적 전통을 가장 건강하게 받아들이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수도적 연단의 목적은 ‘영적 강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힘의 한계를 보고 주님에게 의지하도록 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많이 참았다는 기록보다 사랑이 많아졌는가, 많이 금식했다는 기록보다 다른 사람의 약함을 더 품게 되었는가, 많은 말씀을 배웠다는 사실보다 자기 의가 줄어들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연단의 열매가 체어리티가 아니라 우월감이라면 다시 돌아보아야 합니다.
2강 17부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한 문장에 모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버가모 교회의 이긴 자에게 주어지는 흰 돌의 새 이름을 지상에서 이미 익은 열매가 된 이긴 자가 살아 있을 때 받는 새로운 영적 이름으로 설명하고, 서머나 교회의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를 계시록 9장의 무저갱에서 올라오는 황충 악령들의 대환란 재앙을 이긴 자들이 휴거를 통해 면제받는다는 간접적인 약속으로 해석한 뒤, 일곱 교회에 주어진 이긴 자의 열두 가지 축복을 모두 하나의 완성된 성결 상태에 주어지는 약속으로 정리하는 강사의 설명은 신앙을 실제 삶의 변화와 영적 싸움으로 밀어붙이는 강한 영성을 담고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새 이름’을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 각 사람 안에 형성하시는 고유한 새로운 사랑과 신앙과 쓰임의 영적 성질로, ‘둘째 사망’을 미래 대환란의 특정 악령 재앙보다 더 깊이 자기애와 거짓을 지배적 생명으로 삼아 주님의 천국적 생명과 분리되는 상태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음’을 주님의 힘으로 악과 거짓을 거절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지배적 생명이 된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그 천국적 생명을 잃지 않는 것으로 이해하며, 열두 가지 축복 전체도 여러 독립적 특전이라기보다 주님과 결합된 한 천국적 생명의 서로 다른 상응적 모습으로 읽을 때 계시록의 아르카나가 더욱 깊게 열립니다.’
그리고 2강 전체의 마지막에서 한 가지를 특별히 남기고 싶습니다. 강사는 이 긴 강의를 ‘이긴 자’로 마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끝까지 따라오고 나면 ‘이긴 자’라는 말의 무게중심이 조금 달라집니다. 처음에는 모든 연단을 완수하여 높은 영적 단계에 오른 사람이 먼저 보이지만, 마지막에는 그 사람을 이기게 하시는 주님이 더 크게 보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계시록의 중심은 이긴 인간이 아니라 이미 지옥 전체를 이기신 어린양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긴 자의 최종 고백은 ‘나는 광야를 다 통과했습니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저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일 것이고, ‘나는 흰옷을 얻었습니다’가 아니라 ‘주님의 진리가 저를 입혀 주셨습니다’일 것이며, ‘나는 생명과를 얻었습니다’가 아니라 ‘주님만이 제 생명이십니다’일 것입니다. ‘내 이름은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보다 ‘주님께서 제 생명을 붙들고 계십니다’가 더 깊은 고백일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고백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다른 사람을 ‘아직 광야 성도’, ‘아직 생명과를 못 먹은 사람’, ‘아직 이긴 자가 아닌 사람’이라고 쉽게 나누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 자신도 오직 주님의 자비로 서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깊어질수록 체어리티도 깊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그 진리는 충분히 생명이 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2강의 긴 여정을 하나로 모으면 ‘영계의 지도를 얼마나 정확하게 그렸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되어 가고 있는가?’입니다. 중간 영역의 구조, 세 천국, 흰옷과 세마포, 영적 할례, 생명과, 감추인 만나, 흰 돌과 새 이름, 생명책, 둘째 사망까지 결국 이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사람이 죽은 뒤 가는 곳은 지금의 사랑과 무관한 낯선 장소가 아니라, 그가 주님의 도움 가운데 자유롭게 형성해 온 사랑과 상응하는 영원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강의 마지막을 가장 짧게 압축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긴 자란 자기 힘으로 완전해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힘으로 거절하면서 마침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의 지배적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며, 그의 모든 축복은 결국 하나, 주님과의 결합입니다.’ 강사가 마지막으로 ‘여러분 모두가 이긴 자 되시기를’ 축원하고 ‘끝’이라고 말한 자리에서, ‘스베덴보리의 렌즈’도 바로 이 의미로 그 축원에 함께 ‘아멘’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