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9.심화

 

3. ‘45:11-12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내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45:11, 12) Thus saith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Isa. 45:11–12).

 

이 구절은 AC.49의 문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앞서 보신 렘4의 ‘황폐 상태’와 대비되면서, ‘주님이 어떻게 사람 안에 다시 질서를 세우시는가,  창조와 재창조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45:11-12는 사람 안의 속 사람(하늘)과 겉 사람(땅), 그리고 그 위의 사람’(참된 인간 상태)까지 모두 주님이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는 것을 선언하는 말씀이며, 따라서 거듭남은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라는 것을 밝히는 구절’입니다.

 

먼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입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은 계속 보신 것처럼 ‘진리 안에 있는 사람, 혹은 교회 상태’를 뜻합니다. 그리고 ‘지으신 이(former)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히 처음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 안에 질서를 세우고 형상을 갖추게 하는 분’을 뜻합니다. 즉, 주님은 단순한 창조자가 아니라, ‘지금도 사람을 계속 형성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제 핵심 선언이 나옵니다. ‘내가 땅을 만들고, 그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다.’ 여기서 ‘(earth)은 ‘겉 사람, 외적인 삶의 자리’이고, 그 위에 ‘사람(man)을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겉 사람이라는 기반 위에, 비로소 ‘참된 인간 상태, 즉 진리와 선이 결합된 상태’가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보신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흐름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과정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다음 ‘내가 하늘을 펴고, 그 모든 군대를 명령하였다’입니다. ‘하늘(heavens)은 ‘속 사람, 내적인 영역’, 그리고 ‘하늘의 군대’는 그 안에 있는 ‘모든 진리와 선, 혹은 생각과 애정의 질서’를 뜻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단순한 우주 창조가 아니라, ‘사람 안의 내적 구조 전체, 즉 생각, 이해, 애정, 질서를 주님이 배열하고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이제 전체를 하나로 묶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주님은 사람의 겉 사람(삶의 자리)을 마련하시고, 그 위에 참된 인간 상태를 창조하시며, 동시에 속 사람(내면의 하늘)을 펼쳐 그 안의 모든 질서를 다스리신다.’ 즉, 위와 아래, 안과 밖, 시작과 완성까지 ‘전부 주님의 손안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앞부분이 매우 중요합니다.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묻고,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이것은 일종의 책망입니다. 즉, ‘사람이 자기 힘으로 무엇을 이루려 하거나, 하나님의 일을 자기 기준으로 재단하려는 태도’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곧 ‘거듭남을 내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사람을 새롭게 하는 일은 너희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일이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사람은 협력하고 응답할 수는 있지만, ‘창조와 형성의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노력하고, 애쓰고, 결단합니다. 이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반드시 깨닫게 됩니다. ‘이 변화는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하시는 일이다.’ 바로 그 깨달음이 이 구절이 말하는 자리입니다.

 

우리는 변화되기 위해 애쓰지만, 실제로 우리를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45:11-12는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그 안의 모든 질서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분이 오직 주님이심을 선언하며, 거듭남이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임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AC.49, 심화 4, ‘겔1:26’

AC.49.심화 4. ‘겔1:26’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겔1:26) Above the expanse, as the appearance 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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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2, ‘렘4:23, 25’

AC.49.심화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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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s, and they had no light.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3, 25).

 

이 구절은 겉으로 보면 단순히 폐허와 심판의 장면처럼 보이지만, AC.49의 문맥에서는 ‘거듭남 이전, 혹은 교회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  내면의 빛이 꺼진 상태’’를 매우 선명하게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4:23, 25 혼돈, 공허, 빛 없음, 사람 없음, 새가 날아감, 사람 안에서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 그리고 그 작용들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단계적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먼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다’입니다. 여기서 ‘(earth)은 앞서 계속 보신 것처럼 ‘사람, 혹은 그의 삶의 자리’를 뜻합니다. 그리고 ‘혼돈(void)과 ‘공허(emptiness)는 창세기 1장의 첫 상태와 동일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질서가 완전히 무너진 상태, 선과 진리가 전혀 자리 잡지 못한 상태’로 봅니다. 즉, 단순히 부족한 것이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정돈되지 않은 상태’, 혹은 다시 무너져 그 상태로 돌아간 상태입니다.

 

그다음 ‘하늘에 빛이 없다’입니다. ‘하늘(heavens)은 ‘속 사람, 내적인 영역’, ‘(light)은 ‘진리의 인식과 이해’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사람 안의 내적 영역에서 더 이상 진리가 비추지 않는 상태’, 다시 말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분별할 빛이 완전히 꺼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이 매우 심각한 상태입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문제보다, ‘내적 빛이 꺼지는 것이 더 근본적인 붕괴’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이 없으며’가 나옵니다. 여기서 ‘사람(man, homo)은 단순한 인간 존재가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진리와 선이 결합된 상태, 곧 ‘참된 인간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사람이 물리적으로 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더 이상 사람다운 상태’, 곧 진리와 선의 결합이 없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겉으로는 사람처럼 살아도, 영적으로는 ‘사람이 아닌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입니다. ‘(birds)는 앞서 계속 보셨듯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 곧 생각과 이해의 작용’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새들이 ‘날아갔다’는 것은, 단순히 약해진 것이 아니라, ‘완전히 사라진 상태’입니다. 즉, 더 이상 진리를 생각하거나 분별하는 능력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무지가 아니라, ‘진리를 생각하려는 힘 자체가 떠난 상태’입니다.

 

이 네 가지를 하나로 묶으면 이렇게 됩니다. ‘삶의 자리(땅)가 무너지고  내적 빛이 꺼지고  참된 인간 상태가 사라지고  생각과 분별의 기능까지 떠난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황폐’, 곧 스베덴보리가 자주 말하는 ‘vastation’(황폐)의 상태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진리를 알고, 양심도 있고, 선을 행하려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점점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 사로잡히면서, 진리를 무시하고, 양심을 거스르고, 결국에는 무엇이 옳은지도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는, ‘옳고 그름 자체가 의미 없게 느껴지고’, 마음도 굳어지고, 생각도 흐려집니다. 이것이 바로 이 구절이 말하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왜 이런 구절이 AC.49에 등장하느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무서운 상태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왜 주님이 태고교회와 같은 직접적인 방식으로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시는가’를 설명하는 배경이 됩니다. 인간이 이처럼 내적으로 어두워진 상태에서는, 설령 주님이 직접 나타나셔도 그것을 바르게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른 방식, 곧 말씀과 진리를 통한 인도라는 방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장 위험한 상태는 고통받는 때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지 더 이상 느끼지도, 생각하지도 않는 상태입니다.’

 

4:23, 25는 사람 안에서 진리의 빛과 선의 상태,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고 생각하는 기능까지 모두 사라진 영적 황폐의 상태를 묘사한 말씀입니다.’

 

 

 

AC.49, 심화 3, ‘사45:11-12’

AC.49.심화 3. ‘사45:11-12’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곧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또 내 아들들과 내 손으로 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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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심화 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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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AC.49 본문 중, ‘태고교회, 곧 그 교회의 사람들과는 주님께서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말씀하셨는데, 그때 주님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에 나오는 이에 대해서는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가 무척 궁금합니다. 이 간단해 보이는 기술(記述) 안에 무엇이 들어있길래 드릴 말씀이 많지만이라 하였으며, 그런데 왜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한 것일까요?

 

이 한 문장은 정말 짧지만, 스베덴보리 전체 저작의 깊은 층을 살짝 열어 보이는 ‘힌트’ 같은 구절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드릴 말씀이 많지만은 태고교회의 사람들과 주님 사이의 직접적 교통, 곧 퍼셉션과 가시적 현현에 대한 매우 깊은 실제 내용들이 있기 때문이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것은 그것을 지금의 독자 상태로는 오해하거나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먼저 ‘드릴 말씀이 많지만’에 담긴 내용을 보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다른 곳들에서 조금씩 흘려 말합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은 지금 우리처럼 말씀을 ‘배워서’ 아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직접 퍼셉션(perception)으로 아는 사람들’이며,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옳은지를 외부에서 배우지 않고, ‘내면에서 바로 느끼고 분별하는 상태’였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AC.49가 암시하는 것은 단순한 내적 지각을 넘어서, ‘주님이 실제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들과 교통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스베덴보리에게서는 ‘영계에서 실제로 경험한 사실’입니다. 즉, 태고교회 사람들은 주님과의 교통이 지금보다 훨씬 직접적이어서, 어떤 경우에는 ‘영적 눈으로 주님의 현현을 인식하는 상태’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라는 표현의 배경입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실제로 스베덴보리가 다른 저작들에서, 천사들과의 대화, 영계에서의 주님의 현현 등을 통해 간접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드릴 말씀이 많다’는 것은, 단순한 교리 설명이 아니라, ‘인간과 주님의 관계가 지금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졌던 상태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왜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했을까요? 여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독자의 상태 문제’입니다. AC를 읽는 사람들은 대부분 ‘영적 인간’의 단계, 즉 양심과 진리를 통해 인도받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태고교회는 그보다 훨씬 위의 ‘천적 인간’ 상태입니다. 이 상태를 충분한 준비 없이 설명하면, 사람은 그것을 ‘자기 상태로 착각하거나, 혹은 신비주의적으로 오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도 직접 주님을 보고 들을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오히려 큰 혼란을 가져옵니다.

 

둘째는 ‘섭리적 이유’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반복해서 말합니다. 주님은 각 시대와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자신을 드러내신다고. 지금 시대는 태고교회처럼 직접적 현현과 퍼셉션으로 인도받는 시대가 아니라, ‘말씀과 진리를 통해, 그리고 자유와 이성 안에서 인도받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너무 앞선 상태를 상세히 드러내는 것은, 현재 주어진 길, 곧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삶으로 옮기는 길을 흐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이 주제는 매우 깊고 실제적인 내용이 있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간략히 언급만 하고 넘어가는 것이 적절하다.’ 즉, 숨기는 것이 아니라, ‘순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상태에 맞게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지금은 말씀을 통해 배우고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입니다.’ 이 정도로 설명하시면, 성도들이 괜히 신비적인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으면서도, 이 구절의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드릴 말씀이 많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는 것은, 태고교회의 직접적 주님 교통에 관한 깊은 실제들이 있으나, 그것을 지금 단계에서 자세히 밝히는 것은 오해와 혼란을 낳을 수 있기 때문에 섭리적으로 유보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AC 전체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 이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되어 있는 부분들이 나중에 다른 글들에서 조금씩 풀려나오는 것을 경험하시게 될 것입니다.

 

 

 

AC.49, 심화 2, ‘렘4:23, 25’

AC.49.심화 23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5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3, 25) I beheld the earth, and lo, it was void and emptiness, and the hea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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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9, 창1:26,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AC.49-52)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And God said, Let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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