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5.심화

 

1. ‘14:6, 8-11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8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4:6, 8-11) I am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 Philip saith, Show us the father Jesus saith to him, Am I so long time with you, and hast thou not known me, Philip? He that hath seen me hath seen the father how sayest thou then, Show us the father? Believest thou not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Believe me that I am in the father and the father in me. (John 14:6, 8–11)

 

 

이 구절은 AC.15에서 말하려는 핵심,  주님 안에 아버지가 계시며, 주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는 진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4:6, 811 아버지와 아들이 둘로 나뉜 분이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계신 하나님이시며, 그러므로 사람은 오직 주님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먼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선언부터 보겠습니다. 이 세 표현은 서로 다른 세 가지가 아니라, 하나의 흐름입니다. ‘’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접근과 과정’, ‘진리’는 그 길을 비추는 빛과 기준’, ‘생명’은 그 결과로 주어지는 실제적인 삶’입니다. 즉, 주님은 단순히 길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길 자체이시고, 그 길의 빛이시며, 그 길을 따라 살게 하는 생명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배타적 선언이 아니라, ‘하나님께 이르는 실제적 통로가 오직 주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빌립의 질문이 나옵니다.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이것은 매우 인간적인 질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예수님은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여전히 이 상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믿지만, 하나님은 또 다른 분처럼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때 주님의 대답이 결정적입니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이 말씀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존재의 동일성에 대한 선언’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표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분’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둘이 협력한다는 말이 아니라, ‘완전한 내적 하나 됨’, 곧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존재를 뜻합니다.

 

여기서 AC.15의 핵심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하나님을 막연히 하늘 어딘가에 계신 분으로 찾으려 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무한하고 보이지 않는 분이시지만, 주님 안에서 보이고, 알 수 있고, 가까이 갈 수 있는 형태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중요합니다. ‘내가 하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신다.’ 이것은 주님의 말과 행위가 단순한 인간적 행위가 아니라, ‘그 안에 계신 신성 자체의 작용’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고, 주님의 행위는 곧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믿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접근입니다. 즉, 이 깊은 진리를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주님의 삶과 행하신 일을 통해 그분이 누구신지를 깨달아 가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삶을 통해 믿음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막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 곧 사람을 사랑하시고, 용서하시고, 고치시고, 진리를 말씀하시는 그 모습을 깊이 묵상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렇게 깨닫게 됩니다. ‘, 하나님이 이런 분이시구나.’ 그때 그 사람은 이미 주님을 통해 아버지를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한 문장으로 읽혀야 합니다.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나타나셨으며, 그러므로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하나님을 따로 찾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14:6, 811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아버지 하나님이 완전히 거하시며, 그분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나아갈 수 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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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 창1, '천국 전체가 주님 외에 다른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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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4.심화

 

2. ‘13:13

 

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3:13) Ye call me Lord, and ye say well, for I am (John 13:13).

 

이 구절은 아주 짧지만, AC.14의 핵심을 정확히 받쳐 주는 말씀입니다. 특히 ‘주님(Lord)이라는 이름이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무엇을 뜻하는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3:13너희가 나를 주라 하니 옳다는 선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순한 스승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삶 전체를 다스리시는 주님’, 곧 신적 선과 진리의 근원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참된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뜻’입니다.

 

먼저 ‘너희가 나를 주라 한다’는 표현을 보겠습니다. 성경에서 ‘(Lord)는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권위, 통치, 생명의 근원을 의미하는 이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특히 ‘주님’이라는 이름을 ‘신적 선(Divine good), 곧 사랑의 주체로서의 하나님’과 깊이 연결시킵니다. 다시 말해, ‘주님’은 단순히 가르치는 분이 아니라, ‘사람의 의지와 삶을 실제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너희 말이 옳다, 내가 그러하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제자들의 호칭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바로 그 주님이심을 직접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약에서 ‘여호와’로 불리던 그 하나님이 바로 지금 눈앞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AC.14에서 강조하는 것처럼, ‘‘주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분은 오직 한 분,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연결이 하나 나옵니다. 사람은 흔히 예수님을 ‘선생님’, ‘좋은 분’, ‘구원자’ 정도로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존경하거나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기준과 방향과 통치권을 그분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호칭 문제가 아니라, ‘신앙의 본질, 곧 누가 내 삶의 주인인가를 묻는 말씀’입니다.

 

이걸 실제적으로 풀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좋다고 생각하고, 감동도 받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결정은 자기 기준으로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예수님은 아직 ‘선생님’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문제에서 내 생각은...’보다 ‘주님의 생각은...?’을 먼저 묻게 되고, 실제 선택도 그쪽으로 바뀌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예수님이 주님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너희가 나를 삶의 주인으로 부르는 것이 옳다. 내가 바로 그 주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선언입니다.

 

AC.14와 연결하면 더 또렷해집니다. 많은 사람들이 삼위일체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주님’을 막연하게 나누어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주님이라는 이름은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고. 그래서 이 구절은 AC.14의 핵심을 성경적으로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그분을 존경한다는 뜻이 아니라, 내 삶의 주인이 그분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13:13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주님’, 곧 인간의 생명과 삶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심을 선언하신 말씀이며, 그분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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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심화

 

1.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

 

AC.16 본문 중, 창조하다(create), 짓다(form), 만들다(make)의 차이를, 해설에서는 창조는 생명의 근원 주시는 것을, 지음, 곧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 부여하는 것을,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걸 가리킨다고 했는데, 이 부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네, 이 부분은 AC.16에서 아주 짧게 지나가지만, 사실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를 압축해서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목사님께서 적어 주신 해설 문장, 곧 ‘창조는 생명의 근원을 주시는 것, 형성은 그 생명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 만드는 것은 그것을 삶 속에서 실제로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설명은 방향이 아주 정확합니다. 다만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는 여전히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조금 더 천천히 풀어 보겠습니다.

 

먼저 큰 원리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는 성경에서 같은 뜻을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단어들도 그냥 수사적으로 겹쳐 쓴다고 보지 않습니다. 특히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처럼 나란히 오는 표현은, 다 비슷해 보여도 각각 다른 국면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즉 주님이 인간을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한 단어로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다른 세 동사를 통해 그 과정의 깊이와 순서를 드러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16의 핵심은, 인간의 새 창조가 한순간의 사건이 아니라, 시작과 질서와 구현을 가진 전인적 과정이라는 데 있습니다.

 

창조하다(create)는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것은 인간 안에 없던 생명의 원리를 주님께서 넣어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단지 살아 있다는 생물학적 생명이 아니라, 주님을 향해 열릴 수 있는 영적 생명입니다. 사람이 전에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중심으로만 살다가, 어느 순간 참된 선과 진리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삶이 이대로는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하나님 쪽으로 마음이 열리기 시작하는 것, 이 모든 출발이 ‘창조’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창조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결심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씨를 심으시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전혀 생명이 없던 땅에 처음으로 씨가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또는 완전히 어두운 방에 처음으로 빛이 켜지는 것과 같습니다. 방의 구조가 아직 정리되지 않았고, 그 빛으로 무엇을 할지도 아직 모르지만, 일단 빛이 들어온 것 자체가 결정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이 창조입니다.

 

그다음 ‘형성하다, 짓다(form)는 그렇게 시작된 생명에 모양과 질서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씨가 들어왔다고 바로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듯, 빛이 켜졌다고 곧바로 삶이 정돈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 안에 들어온 진리와 선의 씨앗은 자라기 위해 배열과 분별과 구조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형성, 곧 지음은 인간 안에서 무질서하게 섞여 있던 것들을 나누고, 위아래를 세우고, 중심과 주변을 정리하는 단계입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처음에는 종교적 열심과 자기 의, 참된 순종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선을 행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인정받고 싶어서 하는 것인지, 정말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주님은 그 사람 안에 분별을 세워 주십니다. 무엇이 속 사람에 속하고, 무엇이 겉 사람에 속하는지, 무엇이 기억 지식이고, 무엇이 살아 있는 진리인지, 무엇이 자기 본성의 욕구이고, 무엇이 주님께서 주시는 선한 감동인지 조금씩 구별하게 하십니다. 이것이 형성이고, 지음입니다. 그러므로 형성은 이미 주어진 생명을 ‘아름답고 바른 형식’ 안에 놓는 일입니다. 비유하자면, 설계도 없이 쌓여 있던 자재들이 하나의 집 구조를 이루어 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또는 태아가 단순한 생명 덩어리가 아니라 점차 눈, 귀, 손, 발을 갖춘 인격적 형체로 자라나는 과정과도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만들다(make)는 그렇게 창조되고 형성된 것이 실제 삶에서 구현되고 굳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지 계획이나 가능성의 단계가 아니라, 실제 생활 속에서 그것이 행동과 습관과 성품이 되어 가는 상태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진리가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선을 좋아한다고 해서 당장 선한 삶이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진리와 선이 말과 선택과 관계와 습관 속에서 실제로 ‘만들어져’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용서해야 한다’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창조와 형성의 단계에서는 이미 들어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를 상하게 한 사람을 대할 때, 분노 대신 절제하고, 보복 대신 인내하고, 마음속 판단을 내려놓는 쪽으로 행동하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그 진리가 그의 삶 안에 ‘만들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make는 삶의 현실 속에서 구체화되는 차원입니다. 집의 비유로 말하면, 설계와 구조가 끝난 후 실제로 그 집에 사람이 살고, 방이 쓰이고, 문이 열리고 닫히고, 불이 켜지고 꺼지는 단계입니다. 즉 살아 있는 사용의 단계입니다.

 

이 세 단어를 한 번에 붙들면, 스베덴보리가 왜 굳이 셋을 구별했는지가 더 또렷해집니다. ‘창조’는 시작의 은혜이고, ‘형성’은 질서의 은혜이며, ‘만듦’은 구현의 은혜입니다. 창조가 없으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형성이 없으면 시작된 것이 무질서하게 흩어지며, 만듦이 없으면 모든 것이 관념과 가능성에만 머물고 실제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하나님이 나를 새롭게 하셨다’는 한 문장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생명을 심으시고, 그 생명을 정리하시고, 마침내 그것이 삶이 되게 하시는 전 과정을 포함합니다.

 

초심자에게는 이렇게 풀어도 이해가 쉽습니다. 주님은 먼저 우리 안에 새 생명을 ‘심으시고’(창조), 그다음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정리하시며’(형성), 마지막에는 그것이 실제 성품과 행동이 되게 ‘빚어 가십니다’(만듦). 또는 신앙의 말로 하면, 주님은 먼저 우리를 깨우시고, 그다음 가르치시고, 마지막에는 살게 하십니다. 이 셋이 합쳐져야 비로소 사람이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AC.16의 이 구별은 단지 단어 공부가 아닙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큰 위로가 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안에 겨우 씨앗만 들어온 상태인데, 벌써 열매 맺지 못한다고 낙심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주님은 먼저 창조하시고, 그다음 형성하시고, 그다음 만들어 가신다고. 그러므로 아직 질서가 덜 잡혀 있거나, 실제 삶이 더디게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단계가 다 주님의 일입니다. 이 점을 붙들면, 사람은 조급함 대신 신뢰를 배우게 됩니다.

 

 

 

AC.17, 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AC.17-19)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And the earth was a void and emptiness, and thick darkness was upon the faces of the deep. And the spirit of God moved upon the faces of 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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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 창1: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In the beginning God created the heavens and the earth. (창1:1) AC.16 태고(太古, the most ancient time)를 ‘태초’(太初, the beginning)라고도 합니다. 선지자들에 의해 선지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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