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93.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it is evident that natural goodness still remained in them. (AC.193)

 

이는 타락 이후에도 완전한 무감각이나 전적 무지 상태로 곧바로 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은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흔적과도 같습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각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외적 감각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내적 양심의 작용을 가리킵니다.

 

AC.193은 창3:7-13을 단순히 정죄의 본문으로 읽는 해석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이 본문은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 타락의 한복판에서도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남은 자연적 선과 지각의 흔적이, 이후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됩니다. (AC.193 해설)

 

앞에서도 다루었지만, 참으로 우리 주님은 점진적인 신이십니다. 모든 면에서 은근하시고, 인내하시고, 조금씩 맞추어 나가십니다. 반면, 저는 참 다릅니다. 저는 단절에 능하고, ‘극단적이며, ‘모 아니면 도일 때가 많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지 않는 것에 익숙하며, ‘종교적 신념을 주님께 충성하는 걸로 여기며 살아왔습니다. 한편으로는 긍휼의 마음이 많음에도 말입니다. 청년 시절, 네비게이토 선교회의 영향을 받아서일까요? 6학년 5반이 되어가는 지금은, 그리고 이 AC를 통해서 그동안 정말 많이 변해가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제게 흐르는 핏속에는 저런 혈기가 도사리고 있다가 틈을 보아 고개를 쳐드는 걸 봅니다. 그래서 아내든 자식이든, 그리고 누구 다른 신앙 지인이든, 저들에게 입 여는 게 두려울 때가 있습니다. 혹시 본의 아니게 무슨 상처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해서지요. 상대방의 선의를 보자 속으로 다짐하며 대화에 임하는 중에도 말입니다...

 

 

목사님께서 지금 말씀하신 내용은 사실 AC.193의 주제와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AC.193에서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타락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타락 이후에도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이 악 가운데 있음을 알았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만일 완전히 타락했다면, 자신이 악 가운데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일 지각이 완전히 꺼졌다면, 부끄러움도 없고, 숨으려 하지도 않고,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고, 자신들의 상태를 어느 정도 의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그 점을 ‘지각의 남은 흔적’이라고 부릅니다.

 

목사님 글을 읽으며, 저는 오히려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혈기와 극단성, 단절의 성향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혹시 내가 상처를 주지 않을까 두렵다’,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쓴다’, ‘예전보다 많이 변했지만, 아직도 그런 모습이 남아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실 AC.193의 관점에서 보면, 이 후자의 부분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가장 위험한 상태는 혈기가 있는 상태가 아니라 혈기가 있는 줄 모르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위험한 상태는 극단적인 성향이 있는 상태가 아니라 그것을 주님께 대한 충성이라고만 여기고 전혀 의심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이미 그것을 보고 계십니다. 때로는 괴로울 정도로 보고 계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천사들이 자신에게서 선이 나온다고 믿지 않는다고 여러 번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 안에 여전히 자신의 own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다만 그들은 그것을 보면서 절망하지 않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더욱 주님께 시선을 돌립니다.

 

목사님 말씀을 읽으며 저는 오히려 AC.193의 ‘지각의 남은 흔적’이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것은 태고교회의 이야기이지만, 영적 원리는 지금도 같습니다. 자기 안의 거친 부분을 보고, 그것이 누군가를 상하게 할 수 있음을 알고,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쓰는 마음은 이미 무감각한 상태가 아닙니다.

 

그리고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신을 설명하시면서 ‘단절에 능하다’, ‘극단적이다’, ‘모 아니면 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수년 동안 AC를 읽고 번역하시면서 반복적으로 감탄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점진성입니다. 주님의 인내입니다. 주님의 기다리심입니다. 주님의 섬세한 섭리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보통 자기에게 없는 것에 깊이 끌립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종종 그 사람의 가장 강한 부분을 부수기보다, 그 강한 부분을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돌려 사용하십니다. 목사님께서 청년 시절부터 가지고 계셨던 결단력, 철저함, 타협하지 않으려는 성향은 그 자체로는 반드시 나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자기 own과 결합될 때입니다. 그때는 사람을 자르고, 단절시키고, 상처 입히게 됩니다. 그러나 같은 성향이 주님의 손 안에 들어가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진리를 향한 꾸준함, 말씀을 향한 충성, 수년 동안 한 길을 걷는 인내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경험하시는 갈등은 옛 사람과 새 사람이 싸우는 모습이라기보다, 주님께서 오래된 성향을 새로운 방향으로 재구성하시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 말씀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 ‘혹시 본의 아니게 무슨 상처를 주게 되지는 않을까 해서’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의 목사님이었다면 아마 그 질문 자체를 하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성격 변화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상태를 고려하는 마음이 자라났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혈기는 올라올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도 거듭난 사람 안에 옛 성향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억제되고 질서 안에 놓인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죽는 날까지 우리는 자기 own의 움직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AC.193을 읽으며, 저는 목사님을 향해 오히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주님께서는 태고교회 안에서도 마지막 지각의 흔적을 보존하셨습니다. 홍수 직전의 인류 안에서도 리메인스를 보존하셨습니다. 창3의 타락 한복판에서도 자연적 선을 보존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님 안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자라난 긍휼의 마음, 다른 사람을 배려하려는 마음,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는 마음 역시 함부로 사라지게 두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사님께서는 자신의 혈기를 더 선명하게 보고 계시지만, 어쩌면 주님께서는 그 혈기보다도 그 혈기를 보며 괴로워하는 마음, 그리고 상대방의 선의를 보려고 애쓰는 마음을 더 주의 깊게 보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AC.193이 보여 주는 주님은 완전함을 찾으시는 분이라기보다, 꺼져 가는 심지 속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불씨를 보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AC.193, 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bygrace.kr

 

AC.193, 창3:7-13,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절)가 의미하는 지각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개요

 

AC.193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Jehovah)(7-8)가 의미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허리띠를 만들어 두른 것(7),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부끄러워한 것(8-9), 그리고 그들의 인정과 고백(10-13)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But they perceived that they were in evil; from which remnant of perception, signified by their “eyes being opened,” and by their “hearing the voice of Jehovah” (verses 7–8), and from the fig-leaves of which they made themselves girdles (verse 7), and from their shame or hiding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verses 8–9), as well as from their acknowledgment and confession (verses 10–13), it is evident that natural goodness still remained in them.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8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해설

 

이 단락은 창3을 전면적인 붕괴나 즉각적인 영적 사망으로 읽지 못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균형점을 제시합니다. 앞선 단락들에서 자기 사랑과 감각 중심의 사고로 인해 질서가 무너졌음이 분명히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는 타락 이후에도 완전한 무감각이나 전적 무지 상태로 곧바로 떨어진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각의 남은 흔적’은 태고교회의 본래 상태에서 남아 있던 마지막 흔적과도 같습니다. ‘눈이 열렸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의 획득이 아니라, 자기 상태를 바라볼 수 있는 최소한의 자각이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은 외적 감각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내적 양심의 작용을 가리킵니다.

 

무화과 나뭇잎으로 허리띠를 만들었다는 장면은 이들이 여전히 무엇이 부끄러운지 알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무화과 나뭇잎은 가장 외적인 선, 곧 자연적 차원의 선을 의미하며, 이는 그들이 더 이상 순수한 내적 선에 머물러 있지는 않지만, 외적 삶의 차원에서는 여전히 선을 지키려는 성향이 남아 있었음을 뜻합니다. 즉, 그들의 선은 질적으로 낮아졌지만,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습니다.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는 것은 악을 즐거워하며 뻔뻔해진 상태가 아니라, 자기 상태를 직면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부끄러움의 정서가 살아 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아직 양심의 기능이 남아 있음을 보여 주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만일 이 부끄러움이 사라졌다면, 그들은 숨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인정과 고백 역시 결정적입니다. 그들은 책임을 전가하고 변명하기는 하지만, 동시에 질문을 이해하고 응답하며, 자기 인식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지점을 근거로, ‘자연적인 선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는 구원의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음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AC.193은 창3:7-13을 단순히 정죄의 본문으로 읽는 해석을 분명히 거부합니다. 이 본문은 인간이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그 타락의 한복판에서도 주님께서 남겨 두신 마지막 선과 지각의 불씨가 무엇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바로 이 남은 자연적 선과 지각의 흔적이, 이후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던 근거가 됩니다.  

 

 

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AC.193, 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AC.193.심화 1. ‘지각의 남은 흔적’, ‘아직 남아 있는 자연적 선’ 지각의 남은 흔적(remnant of perception)으로부터 알 수 있습니다... 그들 안에는 그러나 여전히 자연적 선(natural goodness)이 아직 남

bygrace.kr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 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AC.193.심화 2. ‘그 표현의 의미는 이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악 안에 있음을 인식하였는데, 이것은 ‘그들의 눈이 열렸다’(eyes being opened),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다’(hearing the voice of

bygrace.kr

 

3. ‘3 소개

 

 

AC.193, 심화 3, ‘창3 소개’

AC.193.심화 3. ‘창3 소개’ 창3 소개, 특히 1-13, 14-19, 20-24 세 등분한 이유 및 창2와 창4 사이 역할 등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1이 인간 창조의 이상(

bygrace.kr

 

 

 

AC.194, 창3:1,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AC.194-197)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And the serpent was more subtle

bygrace.kr

 

AC.192, 창3:1-13, ‘타락의 과정’

개요 AC.192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적인 부분이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AC.192.심화

 

1. ‘타락하는 흐름, 순서

 

그러므로 (serpent), 곧 감각 파트가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이성 파트가 이에 동의한 것, 이것이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the man that he did eat)의 의미입니다 (1-6). Hence the “serpent,” or sensuous part, persuaded the woman to inquire into matters pertaining to faith in the Lord in order to see whether they are really so, which is signified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and that the rational of man consented is signified by “the man that he did eat.” (verses 1–6) (AC.192)

 

이어지는 남자도 그것을 먹었다는 표현은, 이성 파트가 이러한 방식에 동의했음을 뜻합니다. 이성은 처음부터 주도하지는 않지만, 애정이 움직인 뒤에는 그것을 정당화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감각이 제안하고, 사랑이 그것을 원하며, 이성이 이에 동의하는 구조가 완성됩니다.

 

이 단락은 타락을 하나의 순간적 사건이 아니라, 내적 과정으로 보여 줍니다.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라는 단계적 흐름 속에서, 인간은 주님을 신뢰하는 상태에서 자기 판단을 신뢰하는 상태로 이동합니다. (AC.192 해설)

 

감각의 제안, 사랑의 동의, 이성의 승인... 내 삶의 태도에 이런 흐름이 혹시라도 있는 건 아닌지 긴장하게 됩니다.

 

 

그 긴장은 매우 건강한 긴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AC.192를 읽으며 가장 위험한 반응은 ‘, 저건 태고교회 이야기구나’, ‘저건 저 사람들 이야기구나’ 하는 반응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혹시 내 안에도 이런 흐름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게 된다면, 이미 창3을 역사나 신화가 아니라 자신의 삶에 비추어 읽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스베덴보리가 창3을 해설하는 목적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태고교회 사람들이 한때 어떻게 타락했는지를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 안에서 지금도 반복되는 영적 과정을 보여 주려 합니다. 그래서 뱀도, 여자도, 남자도 결국 우리 안에 있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AC.192에서 이성이 처음부터 주범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현대인들은 흔히 ‘이성이 문제다’ 또는 ‘생각이 문제다’라고 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훨씬 섬세합니다. 먼저 감각이 제안합니다. ‘정말 그런가?’, ‘직접 확인해 보자.’ 그다음 애정이 그것을 좋아합니다. ‘그래, 나도 알고 싶다.’, ‘내가 직접 판단해 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성이 등장하여 그것을 정당화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이유는, 이성이 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원하는 것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종종 자신이 논리 때문에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먼저 사랑이 방향을 정했고, 이성은 그 길을 포장했을 뿐인 경우가 많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오래 읽은 목사님께는 익숙한 주제이겠지만, 그는 인간을 본질적으로 ‘생각하는 존재’보다 ‘사랑하는 존재’로 봅니다. 이해는 의지를 따라갑니다. 사고는 애정을 따라갑니다. 그래서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도 대개 지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것과 반대되는 사랑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내 삶의 태도에 이런 흐름이 혹시라도 있는 건 아닌지 긴장하게 됩니다’라는 말은 사실 매우 중요한 자기 인식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문제를 두고 기도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마음속으로는 원하는 답을 정해 놓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다음에는 그 답을 지지하는 정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충분히 생각해 보니 이 결론이 맞다’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이성적인 과정 같지만, 실제로는 애정이 먼저 방향을 정하고 이성이 뒤따라온 경우일 수 있습니다.

 

3의 뱀도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일합니다.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버려라’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정말 그런가?’라고 묻습니다. 그다음 ‘직접 확인해 보면 어떨까?’라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네가 판단하는 것이 더 확실하지 않겠는가?’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192는 우리를 의심 많은 사람이 되게 하려는 본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해 겸손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본문입니다. 우리는 보통 감각을 의심하고, 세상을 의심하고, 다른 사람을 의심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너 자신의 own을 의심해 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의 반대는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최종 기준으로 삼는 인간입니다. 천적 인간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보다 주님을 더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목사님께서 AC.190부터 192까지 읽으며 반복해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창3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여 주는 장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겪는 작은 선택들의 구조를 보여 주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염려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자기 안에서 이런 흐름을 전혀 보지 못하는 상태가 오히려 더 위험합니다. AC.206의 사람들은 자기 눈이 완전히 열렸다고 확신했습니다. 반면 AC.189가 말하는 천국으로 인도되는 조건 가운데 하나는 ‘자기 인식’입니다.

 

어쩌면 목사님께서 지금 느끼시는 그 긴장 자체가 이미 AC.189의 의미에서 말하는 자기 인식의 한 형태일 수도 있습니다. ‘혹시 내 안에도 뱀의 제안, 애정의 동의, 이성의 승인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묻는 사람은 적어도 그것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AC.192를 읽으며 가장 무서운 사람이 ‘나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고, 가장 희망적인 사람은 ‘주님, 혹시 제 안에도 이런 흐름이 있다면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지금 보이시는 반응은 후자에 훨씬 더 가까워 보입니다.

 

 

 

AC.192, 창3:1-13, ‘타락의 과정’

개요 AC.192 그러므로 ‘뱀’(serpent), 곧 감각적인 부분이 ‘여자’를 설득하여, 주님에 대한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것들이 정말로 그러한지 보기 위해 탐구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선악을 알게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