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이야기 첫 번째 시간에서 저는 주님의 지혜에는 여섯 단계, 등급(degree)이 있다 말씀드렸고, 그 첫 1, 2등급은 오직 주님께 속한 영역이라 그 어떤 피조물도 이해불가이며, 3등급부터 차례로 삼층천, 이층천, 그리고 일층천 천사에게 허락되었으며, 마지막 6등급이 비로소 인류에게 허락되었다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내적 시야, 시력을 가지고 이해할 수도 있겠어요. 우리는 내적 시력이 6등급으로 아주 안 좋아 아주 거칠고 대문짝만하게 써야 겨우 보여 더듬더듬 읽을 수 있지요. 그래서 한정된 지면에 몇 글자 싣지도 못하고, 말씀을 오직 겉 글자로만 읽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사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위로 갈수록, 혹은 내적일수록 더 시력이 좋아 인류가 읽지 못하는 것들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시력이 좋을수록 더 많은 것을 읽고 볼 수 있으니까요

 

참고로, 각 천국 천사들의 차이를 좀 말씀드리면, 삼층천 가장 내적 천사들의 지혜는 이층천 천사들의 지혜를 수천 수만배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이층천 천사들은 삼층천 천사들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물어봐야 합니다. 이런 관계는 나머지도 같습니다

 

그러면 일층천 천사들을 보고 우리는 ‘에계, 겨우...’ 하겠지만... 인류의 현자(賢者)들의 지혜와 일층천 천사들의 지혜가 또 위와 같은 차이입니다. 그만큼 하늘의 지혜는 지상하고는 비교불가입니다

 

밀턴, 괴테 및 스베덴보리 등 기네스 북에, 인류 중 가장 지능이 높았던 사람들로 등재된 이분들 역시 그저 하늘의 빛 한 조각 받아 저렇게들 뛰어나다 하지만 이분들 역시 일층천 천사 앞에 서서 그들의 지혜를 접하게 되면 그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감탄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 싶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이 아무리 뛰어난들 분명한 사실은 저들을 포함, 모든 피조는 유한한 반면, 주님은 무한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수학을 좀 하신 분들은 이 유한과 무한의 차이를 느끼실 겁니다. 무한 앞에 유한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네, 그런 것입니다. 주님은 무한하신 분입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어떤 이해가 안 가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도 그걸 듣게 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인정하고, 주님께 겸손히 빛을 구하는 그런 태도가 안전할 것입니다

 

창세기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런 사전 준비를 좀 하는 이유는,

 

첫째, 우리의 시야가 너무 조야(粗野)하기 때문이며, 그래서 의도치 않게 주님과 주님의 말씀(The Word)을 모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이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의 타고난 성정 상, 그들이 깨닫고, 알게 되면 그들은 반드시 주님 모독의 길을 걸을 것임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보호하시기 위해 막으신 것입니다

 

주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의 두려움은 그것이 사람의 영을 더럽히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덕지덕지 붙어있기만 한 악은 나중에 주님이 떼어내시면 되지만, 영 자체가 변질되어 더럽혀지면, 그건 주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로 표현된 태고 교회의 멸망 때, 사실은 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며, 그래서 이들은 지금도 지옥 저 한쪽 구석에서 지옥의 다른 영들을 해치지 못하게 따로 격리상태에 있습니다. 신성모독의 폐해는 이토록 정말 지독한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처음 듣는 내용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인데,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6등급 시력인 인류에게 부득불 그들의 언어로 맞추어 주신 것임을 떠올리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말씀을 읽을 때, 천사들은 각각 자기들의 시력으로 우리 눈엔 안 보이는 더 내적인 뜻으로 읽습니다. 그걸 가리켜 속뜻(internal meaning), 혹은 아케이나(arcana, 秘義)라 합니다

 

셋째, 이런 속뜻을 이제는 인류에게 오픈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늘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나중에 어차피 천국 가면 다 알게될 걸 왜 굳이 골치아프게 미리... 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말씀을 겉뜻으로만 읽어 본의 아니게 아주 엉뚱한 삶을 살다 생을 마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다시 오실 주님을 올바로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인류 네 번째 교회인 현 기독교회는 말씀을 겉뜻으로만 읽어 말씀의 속뜻으로 오실 주님을 맞이하기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제 말씀의 속뜻을 여시고, 이 일에 필요한 많은 일꾼을 부르십니다. 인류 다섯 번째요, 마지막 교회인 주님의 새 교회는 태고 교회처럼 말씀을 속뜻으로 받드는 영원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주님은 속뜻을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활짝 열어 놓으셨습니다. 원래 태초의 인류는 속뜻의 사람들이었으나 점차 주님보다 자기를 사랑하게 되어 그 내면이 닫히고, 내적 시력을 잃게 된 것이므로, 이제라도 주님을 사랑하여 말씀의 영인 속뜻, 곧 말씀을 영으로 읽기를 간절히 사모하시면, 사람마다 조금씩 내적 시력이 회복되어 그 속뜻이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빛 비춰주시기를 간절히 사모함. 이것이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열쇠입니다

 

저는 이 공부를 시작할 무렵, 오른쪽 눈 시력 문제로 큰 어려움을 겪었더래서 더더욱 이 시력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체험했어요. 이 글을 쓰며 생각하니, 혹시 이 내적 시력의 메시지를 가르치시려는 무슨 주님의 섭리가 아니셨을까 싶습니다 ^^

 

이밖에도 몇 가지 이유가 더 있겠지만 이 정도로 마치고, 다음 세 번째 이야기부터 드디어 창세기 1장을 시작하겠습니다

 

주님이 이 공부에 임하는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빛, 환히 비추사 닫혔던 우리의 내면이 열리고, 어두웠던 내적 시야, 시력이 차츰 회복되어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역사가 일어나게 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 받들어 간절히 간절히 기도합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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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3

 

1558. 4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Verse 4. Unto the place of the altar which he had made there in the beginning; and there Abram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제단이 있는 곳으로’, 예배(worship)에 관한 거룩한 것들을, ‘그가 처음으로 쌓은’, 주님의 어린 시절, 주님이 가지고 계셨던 것을, ‘아브람이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 상태에서 드린 내적 예배를 각각 의미합니다. Unto the place of the altar” signifies the holy things of worship; “which he had made in the beginning” signifies which he had when a child; “and there Abram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signifies the internal worship in that state.

 

 

1559. 제단이 있는 곳으로 Unto the place of the altar.

 

이것이 ‘예배에 관한 거룩한 것들’에 관한 의미임은 ‘제단’의 의미가 예배에 관한 주된 표상(principal representative)인 점을, 제단하면 예배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AC.921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e holy things of worship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n “altar” as being the principal representative of worship (concerning which, see n. 921).

 

 

1560. 그가 처음으로 쌓은 Which he had made in the beginning.

 

이것이 ‘주님이 아이였을 때 가지셨던’이라는 의미임은 앞장 8절의 내용을 보시면 됩니다. That this signifies which he had when a child,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in the preceding chapter at verse 8.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창12:8)

 

여기서는 ‘처음으로’(in the beginning)라 하고, 앞절에서는 ‘전에’(at the first)라 하는 이유는, 그때가 주님이 지식으로 가득 채워지시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It is here said, “in the beginning,” and in the preceding verse, “at the first,” because that was before the Lord had been imbued with knowledges.

 

사람이 가르침을 받기 이전 모든 상태를 ‘’(the first)[라. 이니티움 initium]이라 하고, 그가 가르침을 받기 시작할 때를 ‘처음’(the beginning)[라. 프링치피움 principium]이라 합니다. All the state before a man is instructed, is “the first” [initium]; and when he begins to be instructed, it is “the beginning” [principium].

 

 

1561. 아브람이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And there Abram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이것이 ‘그 상태에서 드린 내적 예배’라는 의미임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의 의미를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AC.440, 1455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e internal worship in that stat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calling on the name of Jehovah” (explained above, n. 440, 1455).

 

여기서도 역시, 그 유사한 상태들 때문에, ‘제단’이 언급되고 있으며, 이르기를,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하고 있습니다. 앞장 8절의 경우처럼 말이지요. 다만 그 차이가 있다면, 앞장 8절이 뿌연 상태였다면 지금 여기는 또렷한 상태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Here too, because of the similarity of the states, mention is made of an “altar,” and it is said that he “called on the name of Jehovah,” as was the case in the preceding chapter, verse 8; but there is this difference, that as compared with the former, the state here described is a lucid one.

 

위에 묘사된 상태에서 지식이 이식되어 뿌리를 내리면, 그 지식은 상태를 명료하게 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선이 지식을 통해 먼젓번 천적 상태와 조인이 될 때, 그때 그 활동이 지금 우리 앞에 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배 자체가 어떤 활동으로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천적인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When knowledges are implanted in the state described above, they make it lucid; and when truth and good are conjoined with the former celestial state by means of knowledges, its activity is then described as in the words now before us; for worship itself is nothing but a certain activity coming forth from the celestial which is within.

 

천적인 것 그 자체는 활동 없이는 존재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The celestial itself cannot possibly exist without activity.

 

예배는 그 첫 번째 활동입니다. 천적인 것은 그 자신을 이런 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천적인 것은 이런 것, 곧 주님을 예배하는 데서 기쁨을 지각하기 때문입니다. Worship is its first activity; for it puts itself forth in this way, because it perceives joy in it.

 

모든 사랑의 선과 체어리티의 선은 그 자체가 본질적, 필수적 활동입니다. All the good of love and of charity is essential activity itself.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3장 4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속뜻)

지식을 통해 이젠 명료한 상태가 되신 주님은 어린 시절 주님이 가지고 계셨던 그 천적인 것들과 결합, 참된 예배의 기쁨을 맛보셨다

 

※ 창세기 12장부터는 표상교회의 시작입니다.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대신 표현’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부터 이후 주님의 초림 때까지의 모든 말씀(The Word)은 표상으로 읽어야 합니다. 즉, 주님과 천국, 그리고 교회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주님의 어린 시절을 표상합니다. 하란을 출발, 가나안을 거쳐 애굽에 내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다시 가나안으로 올라오는 이 일련의 여정은, 주님의 어린 시절, 주님의 지식과 이성, 지성이 어떻게 발전하셨는지, 어떻게 세상 여느 어린이들처럼 시작하셨는지, 그러나 또 다른 점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빠른 성취를 이루실 수 있었는지 등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2021-11-07(D1)-주일예배(2228, AC.1558-1561, 창13,4),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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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28_G2FGsP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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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07(D1)-제9권45호통428호.성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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