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12

 

1486. 17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Verse 17. And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and his house, because of the word of Sarai, Abram’s wife.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기억-지식들이 파괴되었음을, ‘그 집에’, 그가 모았던,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 천적인 것에 인접해 있어야 했던 진리 때문에를 각각 의미합니다.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signifies that the memory-knowledges were destroyed; “and his house” signifies which he had collected; “because of the word of Sarai, Abram’s wife” signifies because of the truth that was to be adjoined to the celestial.

 

※ 주님의 허락으로 영안이 열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영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겉으로는 우리처럼 그 사람의 몸을 보고 있지만 말입니다. 또한 이처럼 우리 안의 천사들은 말씀을 속뜻으로 읽습니다. 비록 우리 눈을 통해 겉 글자로, 사람의 언어로 읽지만 말입니다.

 

※ 말씀의 아케이나에 접근 혹은 도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최대한 쉽게 풀어쓰려고 쓴 것이겠지만...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것은 정말이지... 이 아파트만한 돌더미, 흙더미를 죽을힘을 다해 뒤져 겨우 엄지손톱만 한 금광석을 발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발견이라도 하면, 아니 반드시 발견하게 하시는데, 그때 그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 이제부터라도 라틴어를 해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 중입니다. 포츠(Potts, 1888-1902)는 왜 클라우즈(Clowes, 1774-1806)의 초역을 재역했을까요? 그리고 NCE(2010)를 낸 쿠퍼(Cooper)는 왜 바로 라틴 원전(1749-1756)으로 갔을까요? 책 ‘천국과 지옥’을 번역한 김은경은 수많은 영역본이 있었음에도 왜 바로 라틴 원전으로 한(韓)역했을까요? 번역은 가급적 원전을 가지고 직접 해야지 역본을 가지고 하면 아주 엉뚱한 게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말 전달 게임’처럼 말이지요. 한글 성경도 개역의 경우, 영역, 한(漢)역을 가지고 한 결과, 많은 오역이 있어 이번 개역개정의 경우는 직접 히브리어, 헬라어 원전으로 번역한 것처럼 말입니다.

 

※ 위 괄호 안 연도들은 스베덴보리의 저술들, 특히 아케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 출 주석) 저술 및 번역에 소요된 기간을 뜻합니다.

 

 

1487.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And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이것이 기억-지식들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바로’의 의미가 일반적으로는 기억-지식이며, 결과적으로는 그런 지식에 속한 기억-지식이라는 것을 보면, 그리고 ‘큰 재앙을 내리심’의 의미가 파괴됨이라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memory-knowledges were destroye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in general, consequently the memory-knowledges that belong to such knowledge;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being “smitten with plagues” as being to be destroyed.

 

기억-지식들과 관련하여 이 경우는 이렇습니다. As regards memory-knowledges the case is this.

 

어린 시절, 이 기억-지식들은 그저 단순히 알려는 목적 외에 무슨 다른 거 없이 습득되지만, 주님의 경우는 진리에 대한 기쁨과 애정으로 습득되었습니다. In childhood they are acquired for no other end than that of knowing; with the Lord, they were acquired from the delights and affection of truth.

 

어린 시절 습득한 기억-지식들은 그 수가 엄청나지만, 나중에 주님에 의해 쓰임 받기 위해 질서정연하게 배치됩니다. 먼저는, 생각하는 능력이 생기게 하시려고, 두 번째는, 생각의 재료가 될 수 있게 하시려고, 끝으로, 이게 그 원하시는 건데요, 다시 말해서, 삶 자체가 쓰임새로 구성되며, 쓰임새의 삶이 되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The memory-knowledges acquired in childhood are very numerous, but are disposed by the Lord into order so as to serve for use; first, to give the ability to think; then that they may be of use by means of thought; and lastly that this may take effect, that is to say that the very life may consist in use, and be a life of uses.

 

※ 쓰임새의 삶을 위해 지식을 습득하는 좋은 예는, 예를 들면, 고아와 과부, 나그네를 돌보기 위해 법을 공부하여 판검사가 되고자 하는 경우, 또는 의학을 공부하여 의사가 되고자 하는 경우 등이 있겠습니다.

 

이것이 어린 시절 습득한 기억-지식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들입니다. 이런 게 없으면, 겉 사람은 결코 속 사람과 상호결합할 수 없으며, 동시에 쓰임 받을 수도 없습니다. These are the things performed by the memory-knowledges that are acquired in childhood; and without them the external man can never be conjoined with the internal, and at the same time become use.

 

사람이 쓰임새의 사람이 될 때, 즉 그가 모든 걸 그 쓰임새에 따라 생각하고, 그 쓰임새대로 행할 때, (만일 대세를 따르지 않고, 대신 그런 쓰임새의 실천을 통해 습득된 성품에서 나오는 조용함 가운데 있다면, 그 처음 용도, 곧 사람으로 하여금 합리와 이성의 사람이 되게 하려던) 기억-지식들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어 파괴됩니다. When man becomes use, that is, when he thinks all things from the end of use, and does all things for the end of use—if not by manifest reflection, still by tacit reflection from a nature acquired by so doing—then the memory-knowledges which have served the first use—that the man may become rational—being no longer of service, are destroyed; and so on.

 

※ ‘대세를 따른다’는 것은 누구나 다 지식의 습득과 추구를 자기 사랑을 위해 한다는 것이며, ‘합리와 이성의 사람이 되게 한다’는 것은 그 지식이 머리에만 저장되어 있는 사람이 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 ‘기억-지식이 파괴되었다’는 것은 쓰임새의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회유와 저급한 시도가 먹히지 않는다는 것, 주님으로 말미암은 공동선 앞에서는 세속과 세상의 얄팍한 잔머리는 설 데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여기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것들입니다. These are the things here meant by the words “Jehovah smote Pharaoh with great plagues.

 

2021-10-15(D6)-매일예배(2212, AC.1486-1487, 창12,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일로'.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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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OJ36PdxDo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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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84a. 16절,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Verse 16. And he did well unto Abram for her sake; and he had flock and herd, and he-asses and menservants, and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camels.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주님의 어린 시절, 기억-지식이 증가하였음을,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일반적으로 기억-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각각 의미합니다. He did well unto Abram for her sake” signifies that memory-knowledges were multiplied with the Lord; “and he had flock and herd, and he-asses and menservants, and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camels” signifies all the things in general that belong to memory-knowledges.

 

 

1485.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And he did well unto Abram for her sake.

 

이 말씀이 주님의 어린 시절, 기억-지식이 증가하였음이라는 것은, ‘후대하다’의 의미가 풍성해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memory-knowledges were multiplied with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oing well unto” as being to enrich.

 

이것은 어린 시절 주님의 모습인 아브람을 후대한 ‘바로’, 곧 기억-지식에 관해, 그리고 이것은 또 사래, 즉 주님이 원하셨던 지적 진리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This is said of the memory-knowledge that is signified by “Pharaoh,” that it did well unto Abram, that is to the Lord when a child; and this for her sake, that is, for the sake of the intellectual truth that he desired.

 

이런 풍성함이 올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진리에 대한 욕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It was this desire for truth from which the enriching came.

 

 

1486.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And he had flock and herd, and he-asses and menservants, and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camels.

 

이 표현이 일반적으로 기억-지식에 속하는 모든 것을 의미함은, 이것들이 말씀에 나올 때의 의미들을 생각하면 분명합니다. That these words signify all things in general that belong to memory knowledge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ll these things in the Word.

 

하지만 이 모든 걸 하나하나 자세히, 즉, ‘양과 소’, ‘수나귀와 남종’, ‘여종과 암나귀’ 및 ‘낙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드리는 건 너무 지루할 것 같습니다. But it would be too tedious to show what is signified by each in particular, as what by the “flock and herd,” the “he-asses and menservants,” the “maidservants and she-asses,” and the “camels.

 

각각은 그 나름의 고유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Each has its own peculiar signification.

 

일반적으로 이들은 지식에 관한 기억-지식 및 기억-지식에 속한 모든 걸 의미합니다. In general they signify all things that belong to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and to memory-knowledges.

 

그 각각을 좀 보면, 기억-지식은 ‘수나귀와 남종’으로, 그 즐거움은 ‘여종과 암나귀’로, ‘낙타’는 일반적으로 섬기는 일을, ‘양과 소’는 소유물을 각각 의미하는 등, 말씀 전반에 걸쳐 그렇습니다. Regarded in themselves, memory-knowledges are “he-asses and menservants”; their pleasures are “maid-servants and she-asses”; “camels” are general things of service; “flock and herd” are possessions; and so in the Word throughout.

 

겉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건 그게 무엇이든 오직 섬김에 관한, 즉, 속 사람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All things whatever that are in the external man, are nothing but things of service, that is, they are for the service of the internal man.

 

그래서 그것은 모두 기억-지식에 관한 것이며, 기억-지식은 오직 겉 사람에게 속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이 기억-지식은 몸의 오감을 통해 땅과 세상에서 애써 모은 것들이기 때문이며, 그렇게 모은 이유는, 이 기억-지식이 속 사람이나 합리적인 사람을 섬길 수 있도록, 그리고 다시 영적인 사람을, 그리고 다시 천적인 사람, 최종적으로는 주님을 섬기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So it is with all memory-knowledges, which belong solely to the external man; for they are procured from earthly and worldly things by means of sensuous impressions, in order that they may serve the interior or rational man, and this the spiritual man, this the celestial, and this the Lord.

 

그렇게 이 지식은 그 질서대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치 더 외적인 것일수록 더 내적인 것에 종속된 것처럼 말이지요. 그리고 그렇게 일반적으로나 구체적으로나 모든 것은, 그게 무엇이든 그 질서에 종속되어 결국 주님을 향합니다. Thus are they subordinated one to another, as are the more external things to the more internal, in their order; and thus all things whatever,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re, in their order, subordinated to the Lord.

 

그래서 기억-지식은 가장 낮고, 가장 바깥에 있는 것이며, 그 순서에 따라 거기는 그거보다는 더 내적인 것의 종점입니다. 기억-지식의 위치가 가장 낮고, 가장 바깥이기 때문에, 기억-지식은 봉사와 섬김에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지 싶습니다. Memory-knowledges are therefore the lowest and outermost things, in which are terminated in their order the things that are more interior; and because they are the lowest and outermost things, they must be pre-eminently things of service.

 

누구나 다 이 기억-지식의 쓰임새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거나 자문을 해보면 이 기억-지식이 왜 섬기는 일에 사용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이 지식의 쓰임새를 깨닫게 되면, 그 쓰임새의 퀄러티 또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veryone may know for what such knowledges may be serviceable, if he reflects or inquires in himself for what use they are; and when he is thus reflecting upon their use, he can also apprehend the quality of the use.

 

모든 기억-지식은 나름 어떤 쓰임새를 위해 존재해야 하며, 바로 이것이 그것의 존재 이유입니다. Every memory-knowledge must be for the sake of some use, and this is its servic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6절과 그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얻었더라

 

(속뜻)

어린 시절 주님은 천적 진리를 얻기 위해 먼저 자연적, 지적 진리를 구하셨고, 그래서 관련된 모든 것, 곧 기억-지식과 그 즐거움, 그리고 그 지식의 쓰임새 등으로 풍성해지셨다.

 

2021-10-14(D5)-매일예배(2211, AC.1484a-1486, 창12,16), '이에 바로가 그로 말미암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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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lvo_3UekE6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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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81. 15절,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Verse 15. And 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and praised her to Pharaoh; and the woman was taken to Pharaoh’s house.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의 고관들’로 표현된 중심계율들을,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들이 즐거워하였음을,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그들이 마음의 보다 낮은 부분에 매혹되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signifies the primary precepts, which are “the princes of Pharaoh”; “and they praised her to Pharaoh” signifies that they were pleasing; “and the woman was taken to Pharaoh’s house” signifies that they captivated the lower mind [animus].

 

 

1482.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The princes of Pharaoh saw her.

 

이 말씀이 ‘바로의 고관들’로 표현된 중심계율들을 의미함은 ‘고관들’과 ‘바로’의 의미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primary precepts, which are “the princes of Pharao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rinces,” and of “Pharaoh.

 

말씀의 두 가지 측면, 곧 역사서술 및 예언적인 면에서, ‘고관들’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의미하고, ‘바로’는 ‘애굽’과 그 의미하는 바가 같은데, 여기서는 ‘애굽’ 혹은 ‘바로’가 가장 좋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어린 시절, 처음 습득한 지식 중 기억-지식에 대한 서술이기 때문입니다. In both the historical and prophetical parts of the Word, “princes” signify the things which are primary; and “Pharaoh” signifies the same as “Egypt”; and here “Egypt,” or “Pharaoh,” is used in the best sense, because predicated of the memory-knowledge of knowledges which the Lord first acquired in childhood.

 

이들이 말씀에서는 중심계율들의 의미인 것은, 이런 것들이 그 속뜻 상으로 가지는 상징 때문입니다. That they were primary precepts from the W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se things in the internal sense.

 

일반적으로, 말씀에서 ‘바로’나 ‘애굽’이나 같은 걸 상징한다는 건 많은 구절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요, 마치 다른 나라 군주들이 그 나라의 이름으로 불리듯 군주들 또한 그 나라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고관들’은 이사야에서처럼 제일 중요한 걸 상징합니다. That, speaking generally, by “Pharaoh” in the Word is signified the same as by “Egypt” may be confirmed from many passages; as also that by the kings of other kingdoms, who are named, the same is signified as by the names of the kingdoms; but by “princes” are signified their primary things, as in Isaiah:

 

11소안의 방백은 어리석었고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의 책략은 우둔하여졌으니 너희가 어떻게 바로에게 이르기를 나는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이라 나는 옛 왕들의 후예라 할 수 있으랴 13소안의 방백들은 어리석었고 놉의 방백들은 미혹되었도다 그들은 애굽 종족들의 모퉁잇돌이거늘 애굽을 그릇 가게 하였도다 (사19:11, 13) The princes of Zoan are foolish, the wise counselors of Pharaoh; how say ye unto Pharaoh, I am the son of the wise, the son of ancient kings? The princes of Zoan are become fools, the princes of Noph are deceived. (Isa. 19:11, 13)

 

여기 ‘소안의 방백’과 ‘바로의 가장 지혜로운 모사’는 가장 중요한 기억-지식을 가리키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애굽에서는 지혜가 가장 번창하였으므로, 지혜를 가리켜 ‘지혜로운 자들의 자손’, ‘옛 왕들의 후예’라 부르고 있습니다. Here “the princes of Zoan,” and “the wise counselors of Pharaoh,” denote the primary memory-knowledges; and as wisdom first flourished in Egypt, as before said, it is called “the son of the wise,” and “the son of ancient kings.

 

이렇게 말씀에 자주 나오는 ‘고관(高官)’(프린세스, 백관 (百官), 방백(方伯), 대신(大臣) 등)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가리킵니다. So “princes” frequently denote in the Word primary things.

 

 

1483.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And they praised her to Pharaoh.

 

이 말씀은 그들이 기뻐하였다는 건데요, 굳이 무슨 설명이 필요 없지 싶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were pleasing may be seen without explication.

 

 

1484.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And the woman was taken to Pharaoh’s house.

 

이 말씀이 그들은 마음의 더 낮은 부분에 매혹되었다라는 의미임은 ‘여인’의 의미와, ‘’(house)의 의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captivated the lower min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oman,” and from the signification of “house.

 

여인’은 진리, 여기서는 기억-지식들 안에 있었던, 어린 시절 주님이 사로잡히실 정도로 즐거워했던 진리를 의미합니다. A “woman” signifies truth, here the truth that was in the memory-knowledges with the delights of which the Lord was captivated in childhood.

 

진리에 관한 즐거움은 ‘누이’로 상징된 지적 진리(the intellectual truth)로부터 오는 것들입니다. The delights of truth are those which come from the intellectual truth which is signified by a “sister.

 

’은 앞서 710번 글에서 보여드린 대로, 사람, 특히 사람의 의지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마음의 더 낮은 부분, 곧, 앎과 배움에 관한 애정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A “house” signifies the things that are in man, especially those which are of his will, as before shown (n. 710); here therefore those which are of the lower mind, or of the affection of knowing and learning.

 

 

710. 창7:1,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Enter thou and all thy house into the ark.

 

이 말씀이 의지에 속한 것들을 상징하고 있음이 그래서 분명한 것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e things that are of the will is therefore evident.

 

이해에 속한 것들을 의미하는 전장에서는 다르게 표현되고 있는데요, 즉, 18절 말씀입니다.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며느리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창6:18) In the preceding chapter, where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re meant, it is expressed differently, namely: “Thou shalt come into the ark, thou and thy sons, and thy wife, and thy sons’ wives with thee.” (verse 18)

 

’이 의지와 의지에 속한 것을 상징함은 말씀 많은 곳에서 볼 수 있는데요, 예를 들면, 예레미야입니다. That a “house” signifies the will and what is of the will is evident in various places in the Word; as in Jeremiah:

 

그들의 집과 밭과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라 (렘6:12) Their houses shall be turned over unto others, their fields and their wives together. (Jer. 6:12)

 

여기 ‘’과 ‘’, 그리고 ‘아내’는 의지에 속한 것들에 관련됩니다. Here “houses” and also “fields” and “wives” relate to things which are of the will.

 

다시 Again: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으라 (렘29:5, 28) Build ye houses and dwell in them; and plant gardens and eat the fruit of them. (Jer. 29:5, 28)

 

여기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기’는 의지에 관련되고, ‘밭을 일구기’는 이해와 관련됩니다. 다른 구절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Here “building houses and dwelling in them” relates to the will; “planting gardens” to the understanding: and it is the same in other passages.

 

그리고 ‘여호와의 집’은 아주 자주 사랑이 중심원리인 교회를 상징하는 곳으로 언급되는데, 특별히 ‘유다의 집’은 천적 교회를, ‘이스라엘의 집’은 영적 교회를 상징합니다. And the “house of Jehovah” is frequently mentioned as signifying the church wherein love is the principal; the “house of Judah” as signifying the celestial church; and the “house of Israel” as signifying the spiritual church.

 

’이 교회를 상징하기 때문에, 교회에 속한 사람의 마음 또한 ‘’으로 상징됩니다. (의지와 이해에 속한, 혹은 체어리티와 신앙에 속한 것들이 그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As “house” signifies the church, the mind of the man of the church (wherein are the things of the will and of the understanding, or of charity and faith) is also signified by “hous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5절과 그 내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서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이끌어들인지라

 

세속의 중심계율들도 주님의 진리를 보고 즐거워하며 거기에 매료되어 매혹되었다

 

2021-10-12(D3)-매일예배(2210, AC.1481-1484, 창12,15), '바로의 고관들도 그를 보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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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nTdjDDJJc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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