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창2:25)

 

 

163. 저들의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저들이 천진난만하였음을 상징합니다. 주께서 저들이 수용 불능 상태가 되는 걸 막으시려고, 저들의 own 안으로 그동안 천국의 천진난만함을 늘 공기처럼 공급하신 덕분이지요. Their being “naked and not ashamed” signifies that they were innocent, for the Lord had instilled innocence into their own, to prevent its being unacceptable.

 

 

164. 사람의 own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그저 악할 뿐입니다. 그리고 눈으로 볼 수 있도록 디스플레이 될 때는 정말 소름 끼치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이웃사랑과 천진난만함이 그 own 안으로 공급될 때는, 그때는 선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앞의 154번 글 참조) The own of man, as before stated, is mere evil, and when exhibited to view is most deformed, but when charity and innocence from the Lord are instilled into the own, it then appears good and beautiful (as before observed, n. 154).

 

이웃사랑과 천진난만함은 이 own(즉, 사람한테 있는 악하고 거짓된 것)을 너그럽게 봐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말하자면, 폐지하기도 합니다. 어린아이들한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어린아이들한테는 얘네들이 자기 부모를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한, 악하고 거짓된 것들이 그저 숨겨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게 됩니다. 그들의 유아적 천진난만함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Charity and innocence not only excuse the own (that is, what is evil and false in man), but as it were abolish it, as may be observed in little children, in whom what is evil and false is not merely concealed, but is even pleasing, so long as they love their parents and one another, and their infantile innocence shows itself.

 

그래서 이를 통해, 사람이 어느 정도 천진난만하지 않으면 왜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지를 알 수도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Hence it may be known why no one can be admitted into heaven unless he possesses some degree of innocence; as the Lord has said:

 

14...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5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6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Suffer the little children to come unto me, and forbid them not, for of such is the kingdom of God. Verily I say unto you, whosoever shall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as a little child, he shall not enter therein. And he took them up in his arms, put his hands upon them, and blessed them (막10:14-16)

 

 

165. ‘부끄러워하지 않는 벌거벗음’이 천진난만함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이어지는 내용들로 증명이 되는데요, 온전함과 천진난만함이 그들을 떠났을 때, 그들은 자기들이 벌거벗었음을 보고 부끄러워했습니다. 그런 모습이 그들에게는 부끄럽게, 수치스럽게 보였고,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을 숨겼습니다. That the “nakedness of which they were not ashamed” signifies innocence is proved by what follows, for when integrity and innocence departed they were ashamed of their nakedness, and it appeared to them disgraceful, and they therefore hid themselves.

 

같은 사실이 영들의 세계에서 본 것들을 가지고도 분명한데요, 영들은 자기들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자기들의 죄 없음을 증명하고자 할 때, 그 증거로 자기 자신을 벌거벗은 모습으로 보여줍니다. 이 벌거벗음으로 자기들의 천진난만함을 테스트하기 위해서지요.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representations in the world of spirits, for when spirits wish to exculpate themselves and prove their guiltlessness, they present themselves naked in order to testify their innocence.

 

특별히 천국에 있는 천진난만한 사람들로부터 분명해지는데요, 그들은 그들의 천진난만함의 본성에 따라 화환으로 데코레이션을 한 벌거벗은 유아들로 나타납니다. Especially is it evident from the innocent in heaven, who appear as naked infants decorated with garlands according to the nature of their innocence;

 

그 천진난만함이 이들만큼은 아닌 사람들은 의복을 입은 상태로 나타나는데 눈이 부신 의복(다이아몬드 실크라고도 할 수 있는)이며, 선지서에서 자주 보게 되는 천사들처럼 나타납니다. while those who have not so much innocence are clad in becoming and shining garments (of diamond silk as you might say), as the angels were occasionally seen by the prophets.

 

 

166. 이상이 말씀 창세기 2장에 들어 있는 내용들 몇 가지이지만, 여기서 말씀드릴 수 있었던 것들은 사실 아주 조금입니다. Such are some of the things contained in this chapter of the Word, but those here set forth are but few.

 

오늘날 그 어느 누구에게도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천적 인간과 또 그 관련 내용들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호하고 이해하기조차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And as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who at the present day is known to scarcely anyone, even these few things cannot but appear obscure to some.

 

 

167. 만일 누군가 말씀 각 구절마다 얼마나 많은 아케이나(arcana, 秘義)가 들어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아마 그는 놀라자빠질 것입니다. 거기 들어 있는 수많은 아케이나를 그동안 휙휙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글자, 문장으로 보이는 건 아주 미미할 뿐입니다. If anyone could know how many arcana each particular verse contains, he would be amazed, for the number of arcana contained is past telling, and this is very little shown in the letter.

 

이런 사정을 간략히 말씀드리면, 영들의 세계에서는 말씀의 이런 글자 상 단어들이 정확히 그 문장 그대로 생생하고 아름다운 질서로 표현됩니다. To state the matter shortly: the words of the letter, exactly as they are, are vividly represented in the world of spirits, in a beautiful order.

 

영들의 세계는 표상들의 나라이며, 거기서 생생하게 표현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당 표상들에 들어 있는 아주 미세한 것 관련해서까지 두 번째 천국 천사들에 의해 지각됩니다. For the world of spirits is a world of representatives, and whatever is vividly represented there is perceived, in respect to the minute things contained in the representatives, by the angelic spirits who are in the second heaven;

 

그리고 그렇게 지각된 것들은 이번에는 세 번째 천국 천사들에 의해 어떻게 형언할 수 없는 천사들의 생각 가운데 풍성하고 충만하게 지각됩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무한한 다양성 가운데 지각되어 주님의 선하신 기쁨 가운데 있게 되는 것입니다. and the things thus perceived by the angelic spirits are perceived abundantly and fully in inexpressible angelic ideas by the angels who are in the third heaven, and this in boundless variety in accordance with the Lord’s good pleasure.

 

주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Such is the Word of the Lord.

 

2021-04-03(D7)-창세기(창2,25, AC.163-167),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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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Therefor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his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shall be one flesh. (창2:24)

 

 

160. ‘부모를 떠나는 것’은 속사람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겉을 품고 낳는 것은 속이기 때문입니다. To “leave father and mother” is to recede from the internal man, for it is the internal which conceives and brings forth the external;

 

그의 아내와 합하는 것’은 속이 겉 안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to “cleave unto his wife” is that the internal may be in the external;

 

한 몸을 이루는 것’은 그들이 거기서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to “be one flesh,” that they are there together;

 

앞서는 속사람과 속으로 말미암은 겉이 영이었기 때문이지만 지금은 그들은 육이 되었습니다. and because previously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from the internal were spirit, but now they have become flesh.

 

천적, 영적 생명은 그 own과 하나 될 수 있을지도 몰라 그 own 곁에 있게 되었습니다. Thus was celestial and spiritual life adjoined to the own, that they might be as one.

 

 

161. 이들 태고교회의 후손은 악하지는 않았고, 여전히 선했습니다.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not evil, but was still good;

 

그들은 겉사람으로나 자신들의 own으로 살아가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그들에게 주님에 의해 허락된 것입니다. and because they desired to live in the external man or in their own, this was permitted them by the Lord;

 

하지만 자비롭게도 영적, 천적인 것은 그 안에 소리 없이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what is spiritual celestial, however, being mercifully instilled therein.

 

속과 겉이 어떻게 하나로 움직이는 것일까, 어떻게 그들은 하나로 보이는 걸까 하는 것은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인플럭스(influx, 入流)를 모르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How the internal and external act as a one, or how they appear as a one, cannot be known unless the influx of the one into the other is known.

 

이것을 좀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 어떤 행위를 하나 보면, In order to conceive some idea of it, take for example an action.

 

어떤 행위가 그 안에 이웃사랑, 즉 사랑과 신앙이 없으면,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이 안 계시면, 그 행위는 이웃사랑의 일이라고, 신앙의 열매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Unless in an action there is charity, that is, love and faith, and in these the Lord, that action cannot be called a work of charity, or the fruit of faith.

 

 

162. 진리와 옳음에 관한 모든 법들은 천적 기원들로부터, 천적 인간이라는 생명의 질서로부터 흘러옵니다. All the laws of truth and right flow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천국 전체가 천적 인간인데, 그것은 주님 홀로 천적 인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천국의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모든 것 되시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천적이다’ 하는 것입니다. For the whole heaven is a celestial man because the Lord alone is a celestial man, and as he is the all in all of heaven and the celestial man, they are thence called celestial.

 

모든 진리와 옳음의 법이 천적 기원들로부터, 천적 인간이라는 생명의 질서로부터 내려오기 때문에 결혼들에 관한 법도 어떤 특별한 방식으로 내려옵니다. As every law of truth and right descends from celestial beginnings, or from the order of life of the celestial man, so in an especial manner does the law of marriages.

 

지상의 모든 결혼들은 그 기원을 반드시 천적 결혼, 혹은 천국의 결혼에 두어야 하며, 또한 따라야 합니다. It is the celestial (or heavenly) marriage from and according to which all marriages on earth must be derived;

 

이 결혼은 한 분 주님과 하나의 천국, 혹은 주님이 머리이신 하나의 교회와 같은 그런 것입니다. and this marriage is such that there is one Lord and one heaven, or one church whose head is the Lord.

 

이런 기원을 가진 결혼들에 관한 법은 그래서 한 남편에게는 한 아내여야 한다는 것이며, 그 결혼들이 천적 결혼임을 이런 케이스로 표현할 때, 그 결혼들은 천적 인간의 전형이 됩니다. The law of marriages thence derived is that there shall be one husband and one wife, and when this is the case they represent the celestial marriage, and are an exemplar of the celestial man.

 

이 법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다 잘 아는 법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속사람한테는 아예 심비(心碑)에 기록되기까지 한 법이었고, 그래서 그 시대에는 한 남자에 반드시 한 아내요, 그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이 탄생하곤 하였습니다. This law was not only revealed to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but was also inscribed on their internal man, wherefore at that time a man had but one wife, and they constituted one house.

 

그러나 그들의 후손이 더 이상 속사람 되기를 중단, 겉사람이 되었을 때, 그들은 아내들을 여럿 두었습니다. But when their posterity ceased to be internal men, and became external, they married a plurality of wives.

 

태고교회 사람들은 그들의 결혼으로 천적 결혼을 표현하였기 때문에, 결혼애를 통해 그들은 천국과도 같은 행복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기울어졌을 때, 그들은 더 이상 결혼애로 인한 그 어떠한 행복도 지각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숫자로 만족해야 했는데, 겉 사람의 기쁨이라는 것은 그저 이런 종류의 만족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Because the men of the most ancient church in their marriages represented the celestial marriage, conjugial love was to them a kind of heaven and heavenly happiness, but when the church declined they had no longer any perception of happiness in conjugial love, but in pleasure from a number, which is a delight of the external man.

 

이것을 주께서는 ‘마음의 완악함’이라 하신 것이며, 이런 이유로 모세가 그들에게 여러 명의 아내를 둘 수 있도록 허락한 것이라고 친히 가르치십니다. This is called by the Lord “hardness of heart,” on account of which they were permitted by Moses to marry a plurality of wives, as the Lord himself teaches:

 

5...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For the hardness of your heart Moses wrote you this precept, but from the beginning of the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cause shall a man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shall cleave unto his wife, and they twain shall be one flesh; wherefore they are no more twain but one flesh; what therefore God hath joined together let not man put asunder (막10:5-9)

 

2021-04-02(D6)-창세기(창2,24, AC.160-162),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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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56-159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And the man said, This now is bone of my bones, and flesh of my flesh; therefore she shall be called wife, because she was taken out of man [vir]. (창2:23)

 

 

156.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은 겉사람의 own을, ‘’는 이 own이 그다지 생명 공급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은 생명 공급을 받은 own을 각각 상징합니다.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y the own of the external man; “bone,” this own not so much vivified, and “flesh,” the own that is vivified.

 

나아가 아담은 속사람을 상징하며, 이어지는 구절에 서술된 대로 겉사람과 커플을 이룸으로써 앞서 ‘여자’라 부르던 own이 여기서는 ‘아내’로 명명됩니다. Man, moreover, signifies the internal man, and from his being so coupled with the external man as is stated in the subsequent verse, the own which was before called “woman” is here denominated “wife.

 

한글 번역에는 빠졌지만, ‘이제’는 상태가 바뀌었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Now signifies that it was thus effected at this time because the state was changed.

 

 

157.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표현이 그 안에 속사람이 들어 있는 겉사람의 own을 상징한다는 점 때문에, 고대에는 자기들의 own [proprii]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불렀습니다. 가계, 혈통, 그 밖의 무슨 관계든지 말이지요. Inasmuch as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signified the own of the external man in which was the internal, therefore in ancient times all those were called “bone of bones and flesh of flesh” who could be called their own [proprii], and were of one house, or of one family, or in any degree of relationship.

 

그래서 라반이 야곱에게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Thus Laban said of Jacob,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Surely thou art my bone and my flesh (창29:14)

 

아비멜렉도 그의 어머니의 형제들과 그의 외조부의 집 온 가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And Abimelech said of his mother’s brethren, and of the family of the house of his mother’s father,

 

나는 너희와 골육임을 기억하라 Remember that I am your bone and your flesh (삿9:2)

 

이스라엘 지파들 역시 다윗에게 찾아와 자신들을 이렇게 말하고요, The tribes of Israel also said of themselves to David,

 

보소서 우리는 왕의 한 골육이니이다 Behold, we are thy bone and thy flesh (삼하5:1)

 

 

158. 아담이 속사람, 같은 말이지만, 지성과 지혜의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man signifies the internal man, or what is the same, one who is intelligent and wise, is plain from Isaiah: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I behold, and there is no man [vir], even among them, and there is no counselor (사41:28)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지요. meaning none wise and intelligent.

 

위 본문의 ‘사람’은 라틴어로 ‘비르(vir)’입니다. 라틴어에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homo)’라는 말이 따로 있지만, ‘호모’에 비해 ‘비르’는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며, 위 본문에서는 바로 이 ‘비르’가 사용되었습니다.

 

예레미야도 보면은, Also in Jeremiah: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Run ye to and fro through the streets of Jerusalem, and see if ye can find a man, if there be any executing judgment, seeking the truth (렘5:1)

 

여기 ‘정의를 행하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을, ‘진리를 구하는 자’는 지성인을 각각 의미합니다. One who executes judgment” means a wise person; and “one who seeks the truth,” an intelligent one.

 

 

159. 하지만 먼저 천적인 사람의 상태에 대한 선이해 없이는 어떻게 이런 일들이 그런 경우가 되는지 지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But it is not easy to perceive how the case is with these things unless the state of the celestial man is understood.

 

천적인 사람 안에서 속사람은 겉사람과 뚜렷이 구별되는데요, 실제로 천적인 사람은 속사람에게 속한 것과 겉사람에게 속한 것, 그리고 겉사람이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사람을 통해서 어떻게 다스림을 받는지를 지각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In the celestial man the internal man is distinct from the external, indeed so distinct that the celestial man perceives what belongs to the internal man, and what to the external, and how the external man is governed through the internal by the Lord.

 

그런데 이런 천적인 사람들의 후손의 상태가 변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own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인데요, 그것은 겉사람에게 속한 것이었고, 그 결과, 그들은 변질되어 속사람은 겉사람하고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더 이상 지각 조차 못 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대신 속 사람이란 건 그저 겉 사람과 같은 것인가보다 정도로만 여기게 되었지요. 이런 종류의 어처구니없는 퍼셉션은 사람이 자신의 own을 향해 기울어질 때 생기기 때문입니다. But the state of the posterity of this celestial man, in consequence of desiring their own, which belongs to the external man, was so changed that they no longer perceived the internal man to be distinct from the external, but imagined the internal to be one with the external, for such a perception takes place when man inclines to his own.

 

2021-04-01(D5)-창세기(창2,23, AC.156-159),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여자'.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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