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창3:18)
272.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저주와 황폐함을 의미합니다. By the “thorn and the thistle” are meant curse and vastation;
그리고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은 그가 들짐승처럼 살게 될 것을 상징합니다. and by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is signified that he should live as a wild animal.
사람은 그의 속 사람이 그의 겉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가장 기본으로만 겉 사람에게 작동될 때는 들짐승처럼 살니다. Man lives like a wild animal when his internal man is so separated from his external as to operate upon it only in a most general manner,
사람은 주님한테서 그의 속 사람을 통해 받는 것으로는 사람이지만, 겉 사람한테서 나오는 것으로는 들짐승이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은 그 자체로는 본성, 욕구, 식욕, 공상 및 감각, 그리고 또 유사 신체적 형태 면에서 들짐승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for man is man from what he receives through his internal man from the Lord, and is a wild animal from what he derives from the external man, which, separated from the internal, is in itself no other than a wild animal, having a similar nature, desires, appetites, fantasies, and sensations, and also similar organic forms.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생각엔, 꽤나 그런 줄 알지요. 그는 이런 걸 영적 물질로부터 얻습니다. 이걸 통해서 그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인플럭스를 받는데요, 그러나 저런 인간 안에서는 이 인플럭스가 거꾸로 뒤집혀, 악한 생명, 곧 죽음이 됩니다. That nevertheless he is able to reason, and, as it seems to himself, acutely, he has from the spiritual substance by which he receives the influx of life from the Lord, which is however perverted in such a man, and becomes the life of evil, which is death.
그래서 그를 가리켜 죽은 자라 하지요. Hence he is called a dead man.
273.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저주와 황폐함을 상징한다는 것은, 정 반대되는 것들, 곧 축복과 번성을 가리키는 추수와 과실 나무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thorn and the thistle” signify curse and vastation, is evident from harvest and fruit tree denoting the opposites, which are blessings and multiplications.
‘가시덤불’, ‘엉겅퀴’, ‘들장미’, ‘가시덩굴’ 및 ‘찔레’ 등이 그런 상징을 갖는 것은 말씀을 보면 분명한데요, 호세아입니다. That the “thorn,” the “thistle,” the “brier,” the “bramble,” and the “nettle,” have such a signification,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Hosea:
보라 그들이 멸망을 피하여 갈지라도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하리니 그들의 은은 귀한 것이나 찔레가 덮을 것이요 그들의 장막 안에는 가시덩굴이 퍼지리라 Lo, they are gone away because of the vastation; Egypt shall gather them; Memphis shall bury them; their desirable things of silver, the nettle shall inherit them; the bramble shall be in their tents. (호9:6)
여기 ‘애굽’과 ‘놉’은 주님의 일들을 자신들과 자기들이 소유한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그런 걸 가리킵니다. Here “Egypt” and “Memphis” denote such as seek to understand Divine things from themselves and their own memory-knowledges.
같은 예언서에서 In the same prophet:
이스라엘의 죄 곧 아웬의 산당은 파괴되어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 날 것이니 그 때에 그들이 산더러 우리를 가리라 할 것이요 작은 산더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리라 The lofty places of Aven, the sin of Israel, shall be destroye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come up upon their altars, (호10:8)
여기 ‘아웬의 산당’은 자아 사랑을 상징하며, where the “lofty places of Aven” signify the love of self;
‘가시와 찔레가 그 제단 위에’는 신성모독을 상징합니다. and the “thorn and thistle on the altars,” profanation.
이사야에 In Isaiah:
12그들은 좋은 밭으로 인하여 열매 많은 포도나무로 인하여 가슴을 치게 될 것이니라 13내 백성의 땅에 가시와 찔레가 나며 희락의 성읍, 기뻐하는 모든 집에 나리니 Mourning upon the paps for the fields of desire, for the fruitful vine; upon the ground of my people shall come up the briery thorn. (사32:12–13)
그리고 에스겔에 And in Ezekiel:
이스라엘 족속에게는 그 사방에서 그들을 멸시하는 자 중에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니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그들이 알리라 There shall be no more a pricking brier unto the house of Israel, nor a painful thorn from all that are round about them. (겔28:24)
274.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즉, 거친 음식)이 가리키는 것이 들짐승처럼 사는 것임은, 다니엘서 느부갓네살에 관한 말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eat the herb of the field” (that is, wild food) denotes to live like a wild animal,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Nebuchadnezzar in Daniel: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 They shall drive thee from man, and thy dwelling shall be with the beast of the field; they shall make thee to eat grass as oxen, and seven times shall pass over thee. (단4:25)
그리고 이사야에 And in Isaiah:
26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27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Hast thou not heard how I have done it long ago, and from the days of old have I formed it; now have I brought it to pass, and it shall be to lay waste bulwarks, fenced cities, in heaps; and their inhabitants, short of hand, were dismayed and put to shame; they were made the grass of the field, and the green [olus] of the herb, the grass of the housetops, and a field parched before [coram] the standing corn. (사37:26–27)
여기 ‘들의 풀’, ‘푸른 나물’, ‘지붕의 풀’, 그리고 ‘곡초’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Here it is explained what is signified by the “grass of the field,” the “green of the herb,” the “grass on the housetops,” and a “field parched”;
여기서 다룬 주제가 홍수 전 시대, 곧 ‘태초’와 ‘상고’로 표현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for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time before the flood, which is meant by “long ago,” and the “days of old.”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id, Because thou hast hearkened unto the voice of thy wife, and hast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thee, saying, Thou shalt not eat of it;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in great sorrow shalt thou eat of it all the days of thy life. (창3:17)
267.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는 아담, 혹은 래셔널(rational, 合理)의 동의를 상징하며, 이렇게 되면, 처음엔 래셔널 자신을, 결과적으로는 겉 사람 전체를 외면하거나 저주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가 가리키는 것입니다. By the “man hearkening to the voice of his wife” is signified the consent of the man, or rational, by which it also averted or cursed itself, and consequently the whole external man, denoted by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그의 미래의 삶은 비참할 것이며, 이것은 심지어 그 교회의 종말 때까지, 혹은 ‘네 평생에’ 그럴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To “eat thereof in sorrow” means that the future state of his life would be miserable, and this even to the end of that church, or “all the days of his life.”
268. ‘땅’이 겉 사람을 상징함은 앞서 ‘땅’(earth, 창1:1, AC.16), ‘지면’(ground, 창2:5, AC.90), ‘들’(field, 창2:5, AC.90) 관련 내용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ground” signifies the external man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tated concerning “earth,” “ground,” and “field.”
사람이 거듭날 때, 그를 가리켜 더 이상 ‘땅’이라 하지 않고, 대신 ‘지면’이라고 합니다. 천적 씨가 그의 안에 심겼기 때문입니다. When man is regenerate, he is no longer called “earth,” but “ground,” because celestial seed has been implanted in him;
그는 또한 ‘지면’으로 비유되며, 말씀 여러 곳에서 ‘지면’으로 불립니다. he is also compared to “ground” and is called “ground” in various parts of the Word.
선과 진리의 씨앗들은 속 사람 안이 아닌, 겉 사람, 즉, 그의 어펙션과 기억 안에 심깁니다. 속 사람 안에는 그의 고유 본성과 관련된 아무것도 없고, 대신 겉에 있기 때문입니다. The seeds of good and truth are implanted in the external man, that is, in his affection and memory, and not in the internal man, because there is nothing of one’s own in the internal man, but only in the external.
속 사람 안에는 선들과 진리들이 있으며, 이것들이 더 이상 안 보이면, 그 사람은 겉, 혹은 몸이 됩니다. In the internal man are goods and truths, and when these no longer appear to be present, the man is external or corporeal;
하지만 이들은 사람의 지식이 아닌, 주님으로 말미암아 속 사람 안에 차곡차곡 보관되어 있습니다. 겉 사람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되는 상황, 가령, 시험들, 불행들, 질병들, 그리고 임종의 때와 같은, 그런 상황이 아니면 밖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they are however stored up in the internal man by the Lord, without the man’s knowledge, as they do not come forth except when the external man as it were dies, as is usually the case during temptations, misfortunes, sicknesses, and at the hour of death.
래셔널은 또한 겉 사람에게 속하며(AC.118), 실상은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 일종의 중간역할을 합니다. The rational belongs also to the external man (n. 118), and is in itself a kind of medium between the internal man and the external;
속 사람은 래셔널을 통해 몸과 겉에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for the internal man, through the rational, operates on the corporeal external.
그러나 래셔널이 동의를 하면, 겉 사람은 속과 분리되는 일이 일어나고, 그러면 속 사람의 존재를 더 이상은 알 수 없게 되며, 그 결과 속에 속한 것들인 지성과 지혜 역시 알 수 없게 됩니다. But when the rational consents, it separates the external man from the internal, so that the existence of the internal man is no longer known, nor consequently the intelligence and wisdom which are of the internal.
269. 여호와 하나님(즉, 주님)은 ‘땅’, 혹은 겉 사람을 ‘저주하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겉 사람이 속 사람으로부터 자신을 외면하게 하거나 분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자신에 대한 저주이지요. 이것은 앞서 본 내용(AC.245)으로 분명합니다. That Jehovah God (that is, the Lord) did not “curse the ground,” or the external man, but that the external man averted or separated itself from the internal, and thus cursed itself,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hown (n. 245).
270.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가 삶이 비참해짐을 상징한다는 것은, ‘먹는’ 것이 그 속뜻으로는 사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고, 앞선 내용들과 이어지는 내용들로 분명합니다. That to “eat of the ground in great sorrow” signifies a miserable state of life is evident from what precedes and follows, not to mention that to “eat,” in the internal sense, is to live.
다음과 같은 사실로도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그런 삶의 상태는 악한 영들은 싸움을 시작하고, 수행 천사들은 고생할 때 따라옵니다. The same is evident also from the fact that such a state of life ensues when evil spirits begin to fight, and the attendant angels to labor.
이런 삶의 상태는 악한 영들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할 때 더욱 비참해집니다. This state of life becomes more miserable when evil spirits begin to obtain the dominion;
그때 그들은 겉 사람을 다스리고, 천사들은 단지 속 사람만 다스리는데, 속 사람 안에는 리메인스가 거의 없어, 천사들은 그 사람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것을 거기서 거의 못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for they then govern the external man, and the angels only the internal man, of which so little remains that they can scarcely take anything thence with which to defend the man;
그래서 비참과 염려가 일어납니다. hence arise misery and anxiety.
죽은 사람들은 이런 비참과 염려에 거의 예민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더 이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인데요, 비록 그들이 자신들을 더욱 사람으로 정말로 생각하더라도 말이지요. Dead men are seldom sensible of such misery and anxiety, because they are no longer men, although they think themselves more truly so than others;
그들은 더 이상 영적이고 천적인 것, 그리고 영원한 삶에 관해 짐승들보다 더 아는 게 없으며, 짐승들처럼 땅에 속한 것들을 향해서는 아래를, 세속적인 것들을 향해서는 밖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for they know no more than the brutes of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and what is eternal life, and like them they look downward to earthly things, or outward to worldly ones;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에만 호의를 보이며, 래셔널의 완전한 동의 하에 자신들의 성향과 감각에만 탐닉합니다. they favor only their own, and indulge their inclinations and senses with the entire concurrence of the rational.
이들은 죽은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런 영적 전투나 시험 없이 살아가며, 다 드러난 사람들이 되어, 이들의 삶은 그 무게로 가라앉고, 그래서 그 결과, 점점 더 자신들을 저주하고, 재촉해서 계속해서 더 깊이깊이 지옥의 저주 아래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Being dead, they sustain no spiritual combat or temptation, and were they exposed to it their life would sink under its weight, and they could thereby curse themselves still more, and precipitate themselves still more deeply into infernal damnation:
이들은 다른 삶, 곧 지옥이지요, 거기서는 무슨 시험이나 불행 때문에 죽음에 이를 위험이 전혀 없지만, 그러나 가장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되는, 그런 삶의 입구에 이를 때까지 이런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바로 이런 상태를 본문에서는, ‘땅은 저주를 받고 너는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로 상징한 것입니다. hence they are spared this until their entrance into the other life, where, being no longer in danger of dying in consequence of any temptation or misery, they endure most grievous sufferings, which likewise are here signified by the ground being cursed, and eating of it in great sorrow.
271. ‘네 평생에’가 그 시대 교회의 종말에 대한 상징인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한데요,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어느 한 개인이 아닌, 교회와 교회의 상태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That “all the days of thy life” signifies the end of the days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not an individual man, but the church and its state.
그 교회 시대의 종말은 홍수의 때였습니다. The end of the days of that church was the time of the flood.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창3:16)
261. 지금 ‘여자’가 상징하는 것은 프로프리움(proprium, 固有本性)에 관한 교회인데, 이 프로프리움을 교회가 사랑한 것입니다. By the “woman” is now signified the church as to proprium, which it loved;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가 상징하는 것은 전투이며,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불안입니다. by “greatly multiplying her sorrow” is signified combat, and the anxiety it occasions;
‘임신’은 모든 생각을, by “conception,” every thought;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는 그래서 그녀가 낳게 될 진리들을, by the “sons whom she would bring forth in sorrow,” the truths which she would thus produce;
‘남편’은 여기서도 앞서 살핀 대로, 그것이 따르게 될, 그리고 다스리게 될 래셔널을 상징합니다. by “man,” here as before, the rational which it will obey, and which will rule.
262. 앞서 교회를 ‘여자’로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아왔다면, 여기서는 전에는 자기 자신이었던 그 고유본성 때문에 지금은 비뚤어진 교회를 ‘여자’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태고교회의 비뚤어진 후손들을 지금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That the church is signified by the “woman” has been previously shown, but here the church perverted by the own which was itself formerly signified by the “woman,” because the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had become perverted, is now treated of.
263. 그러므로, 감각 파트가 자신을 외면하거나, 자신을 향해 욕을 할 때, 그 결과는, 악한 영들은 싸움에서 파워풀해지는 반면, 수행 천사들은 애를 먹게 되고... 그래서 이 전투를 묘사하여 이르기를,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즉, 진리를 생각하고, 생각한 진리를 실천에 옮기는 과정을 전투라고 할 만큼 쉽지 않은 과정이 됩니다. When therefore the sensuous part averts itself or curses itself, the consequence is that evil spirits begin to fight powerfully, and the attendant angels to labor, and therefore this combat is described by the words,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in relation to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 that is, as to the thoughts and productions of truth.
264. 이 말씀에 나오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은 영적인 뜻으로 가져온 것입니다. ‘임신’이 마음에 품은 생각과 그 방법을, ‘자식’은 진리를 말하는 것임은, 호세아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conception and birth of sons,” in the Word, are taken in a spiritual sense—“conception” for the thought and device of the heart, and “sons” for truths—is evident from Hosea:
11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하는 것이나 아이 배는 것이나 임신하는 것이 없으리라 12혹 그들이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떠나는 때에는 그들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As for Ephraim, their glory shall fly away like a bird, from the birth, and from the womb, and from the conception; though they shall have brought up their sons, yet will I bereave them, that they be not man; yea, woe also to them when I depart from them, (호9:11-12)
여기 ‘에브라임’은 지성 혹은 진리에 대한 이해를, where “Ephraim” signifies the intelligent, or the understanding of truth;
그리고 ‘자식’은 진리들 자체를, and “sons,” truths themselves.
‘에브라임’에 관한 어떤 곳이든지, 그가 지성을 가졌든,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든 마찬가지라고 하고 있습니다. It is likewise said elsewhere concerning Ephraim, or one who is intelligent, who has become foolish: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그에게 임하리라 그는 지혜 없는 자식이로다 해산할 때가 되어도 그가 나오지 못하느니라 The sorrows of one in travail have come upon him, he is an unwise son, for at the time he will not stand in the breach of the womb of sons. (호13:13)
이사야입니다. And in Isaiah:
4시돈이여 너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대저 바다 곧 바다의 요새가 말하기를 나는 산고를 겪지 못하였으며 출산하지 못하였으며 청년들을 양육하지도 못하였으며 처녀들을 생육하지도 못하였다 하였음이라 5그 소식이 애굽에 이르면 그들이 두로의 소식으로 말미암아 고통 받으리로다 Blush, O Zidon, for the sea hath spoken, the fortress of the sea, saying, I have not travailed, nor brought forth, nor have I brought up young men, nor caused girls to grow up; as at the report concerning Egypt, they shall bring forth according to the report of Tyre, (사23:4-5)
여기 ‘시돈’은, 신앙의 지식들을 가졌었으나 나중에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파괴하여 지금은 척박해진 사람들을 말합니다. where “Zidon” means those who have been in the knowledges of faith, but have destroyed them by memory-knowledges, and so have become barren.
[2] 다시 같은 선지서인데요, 거듭남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여기서도 신앙의 진리들이 ‘아이’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Again in the same prophet, treating of regeneration, and where likewise the truths of faith are signified by “sons”:
7시온은 진통을 하기 전에 해산하며 고통을 당하기 전에 남아를 낳았으니 8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이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이냐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한 순간에 태어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은 진통하는 즉시 그 아들을 순산하였도다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아이를 갖도록 하였은즉 해산하게 하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해산하게 하는 이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 Before she travailed she bringeth forth; and before her pain came, she was delivered of a man child; who hath heard such a thing? Who hath seen such things? Shall the earth bring forth in one day, and shall I not cause to bring forth? saith Jehovah; shall I cause to bring forth, and close up? saith thy God. (사66:7-9)
천국 결혼을 통해 잉태되고 태어나는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켜, 그래서 ‘아들들’이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 하신 말씀입니다. Goods and truths, being conceived and born of the heavenly marriage, are therefore called “sons” by the Lord in Matthew: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He that soweth the good seed is the son of man; the field is the world and the seed are the sons of the kingdom. (마13:37-38)
구원하는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을 가리켜 주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요8:39)이라 하십니다. And the goods and truths of a saving faith he calls “sons of Abraham” (John 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They answered and said to Him, Abraham is our father. Jesus says to them, If you were Abraham’s children, you would do the works of Abraham. (요8:39)
‘후손’은 (255번 글에서 다룬 대로) 신앙을 가리키며, 그리고 ‘후손’에 속한 ‘자손’은 신앙의 선들과 진리들이기 때문입니다. for “seed” (as stated n. 255) denotes faith, wherefore “sons,” which are of the “seed,” are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이런 이유로, 또 주님은 그 자신을 ‘후손’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자신을 가리켜 ‘인자’, 즉, 교회의 신앙이라 하셨습니다. Hence also the Lord, as being himself the “seed,” called himself the “Son of man,” that is, the faith of the church.
265. ‘남편’이 래셔널을 상징한다는 것이 이 장 6절에 보면 있는데요, 거기에 보면,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즉, 그도 동의했음을 의미합니다. That by “man” [vir] is signified the rational appears from verse 6 of this chapter, in that the woman gave to her man with her, and he did eat, by which is meant his consent;
같은 내용이 158번 글, 아담에 관한 내용을 보아도 분명한데요, 거기 보면, 아담(남자, 사람, vir)은 지혜와 지성을 가진 사람을 의미합니다. and the same is also evident from what was said of the man in n. 158, where by him is meant one who is wise and intelligent.
하지만 여기 나오는 ‘남편’은 래셔널을 가리킵니다. 지식의 나무를 먹음으로써 지혜와 지성이 파괴되었고, 그 결과, 아무것도 안 남았기 때문이며, 이렇게 된 이유는, 외관상 그럴듯하게 지성을 흉내 내는 것으로 전락한 것이 바로 레셔널이기 때문입니다. Here however “man” denotes the rational, because in consequence of the destruction of wisdom and intelligence by eating of the tree of knowledge, nothing else was left, for the rational is imitative of intelligence, being as it were its semblance.
266. 모든 법과 수칙(守則, precept)은 참된 출발점인 천적, 영적인 것에서 나오므로, 다음과 같은 사실, 곧, 이 결혼의 법칙 또한 그렇다는 것이며, 그러려면 아내는 반드시 남편의 사려분별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이성으로 움직이는 남편과 달리 그녀의 고유본성에 속한 디자이어로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As every law and precept comes forth from what is celestial and spiritual, as from its true beginning, it follows that this law of marriage does so, which requires that the wife, who acts from desire, which is of what is her own, rather than from reason, like the man, should be subject to his prudence.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창3:15)
257. ‘뱀의 머리’가 악, 특히 자아 사랑의 지배를 의미한다는 것은, 그 본성을 보면 확실한데요, 이 본성은 단지 지배 자체에 대한 추구뿐 아니라, 심지어 지상의 모든 것을 지배하고자 하며, That by the “head of the serpent” is meant the dominion of evil in general, and specifically of the love of self, is evident from its nature, which is so direful as not only to seek dominion, but even dominion over all things upon earth;
이 정도로는 양이 안 차 계속해서 이번에는 천국의 모든 것을, 더 나아가 급기야 바로 주님까지도!. 그리고도 여전히 만족을 모르는, 아주 끔찍한 본성입니다. nor does it rest satisfied with this, but aspires even to rule over everything in heaven, and then, not content with this, over the Lord himself, and even then it is not satisfied.
이것이 자아 사랑의 스파크가 일어나는 곳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This is latent in every spark of the love of self.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하는 사실은, 사후(死後)에 규제가 풀려 하고픈 대로 마음껏 할 수 있게 되면, 이런 본성이 즉시 우리 안에서 거침없이 터져 나오며, 심지어 가장 높은 데까지 올라가고자 자라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If it were indulged, and freed from restraint, we should perceive that it would at once burst forth and would grow even to that aspiring height.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뱀’, 곧 자아 사랑이라는 이 악은 지배하는 삶을 정말 간절히 원하고, 그리고 이런 삶을 거절하는 사람들을 증오한다는 사실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how the “serpent,” or the evil of the love of self, desires to exercise dominion, and how much it hates all those who refuse its sway.
이것이 ‘뱀의 머리’의 의미, 곧 자신을 지극히 높이는 것이며, 그래서 주께서 ‘상하게’, 땅에까지 밟히게 하시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앞 절에서 기술한 대로,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을지니라’의 삶인 것입니다. This is that “head of the serpent” which exalts itself, and which the Lord “tramples down,” even to the earth, that it may “go upon its belly, and eat dust,” as stated in the verse immediately preceding.
그래서 또한 이사야서에서는, ‘뱀’, 혹은 ‘루시퍼’라 하는 ‘용’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Thus also is described the “serpent” or “dragon” called “Lucifer” in Isaiah: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3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14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15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O Lucifer, thou hast said in thy heart, I will ascend the heavens, I will exalt my throne above the stars of God, and I will sit upon the mount of the congregation, in the sides of the north, I will ascend above the heights of the cloud, I will be made equal to the most high; yet thou shalt be brought down to hell, to the sides of the pit. (사14:12-15)
계시록에서는 ‘뱀’, 혹은 ‘용’을 그가 자기 머리를 어떤 방식으로 높이는지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The “serpent” or “dragon” is also described in the Revelation in regard to the way in which he exalts his head:
3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9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A great red dragon, having seven heads, and ten horns, and many diadems upon his heads; but he was cast into the earth. (계12:3, 9)
시편에서는, In David:
1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2여호와께서 시온에서부터 주의 권능의 규를 내보내시리니 주는 원수들 중에서 다스리소서 6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 7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그의 머리를 드시리로다 The saying of Jehovah to my Lord, Sit thou at my right hand, until I make thine enemies thy footstool: Jehovah shall send the rod of thy strength out of Zion, he shall judge the nations, he hath filled with dead bodies, he hath bruised the head over much land; he shall drink of the brook in the way, therefore shall he lift up the head. (시110:1-2, 6-7)
258. ‘상하게 할 것이요’, 혹은 ‘상하게 할 것이니라’가 디프레션을 의미하며, 그 결과, ‘배로 다니며 흙을 먹을지니라’가 되게 하려는 것이 지금 분명한 것은, 본 절과 선행절들을 보면 됩니다. That by “trampling on” or “bruising” is meant depression, so as to compel it to “go on the belly and eat the dust,” is now evident from this and the preceding verses.
이사야서에서도 이와 같은데요, So likewise in Isaiah:
4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신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이로다 5높은 데에 거주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6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Jehovah hath cast down them that dwell on high; the exalted city he will humble it; he will humble it even to the earth; he will prostrate it even to the dust; the foot shall tread it down. (사26:4-6)
2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3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He shall cast down to the earth with the hand; they shall be trampled on by feet—a crown of prid. (사28:2-3)
259. ‘발꿈치’가 가장 자연적인 것, 혹은 육체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먼저 태곳적 사람들이 사람에 관한 다양한 것들을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을 때까지는 알 수가 없는 건데요, That by the “heel” is meant the lowest natural or corporeal cannot be known unless the way in which the most ancient people considered the various things in man is known.
그들은 그들의 천적, 영적인 일들을 사람의 머리와 얼굴로 언급했습니다. They referred his celestial and spiritual things to the head and face;
또한 이들로부터 나오는 선행과 자비는 가슴으로, what comes forth from these as charity and mercy, to the chest;
자연적인 것들은 발로, natural things, to the feet;
더 자연적인 것들은 발바닥으로, lower natural things, to the soles of the feet;
가장 자연적이고 육체적인 것들을 발꿈치로 언급했습니다. and the lowest natural and corporeal things, to the heel;
그들은 그저 그렇게 하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게 불렀습니다. nor did they merely refer to them, but also so called them.
사유(思惟, reason)의 가장 낮은 단계, 곧 기억-지식들의 경우 또한 그런데, 야곱이 단과 관련하여 예언한 데를 보면 그렇습니다. The lowest things of reason, that is, memory-knowledges, were also meant by what Jacob prophesied concerning Dan: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Dan shall be a serpent upon the way, an adder upon the path, biting the horse’s heels, and his rider falls backward. (창49:17)
시편에서도 Also in David: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The iniquity of my heels hath compassed me about. (시49:5)
야곱 관련해서도 같은 식으로 그가 자궁으로부터 나올 때, In like manner by what is related of Jacob, when he came forth from the womb,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That his hand laid hold of Esau’s heel, whence he was called Jacob, (창25:26)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에서 나오는데요, ‘야곱’으로 상징되는 유대 교회가 발꿈치에 상해를 입혔기 때문입니다. for the name “Jacob” comes from the “heel,” because the Jewish church, signified by “Jacob,” injured the heel.
뱀은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들밖에는 상해를 입힐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독사의 일종이 아닌 한, 사람의 내면 자연적인 것들과, 더욱 그의 영적인 일들은 물론 더더욱 천적인 일들은 말이지요. 주님이 그것을 보존하시고 보관하시기 때문인데요, 이 리메인스에는 아직 주님의 지식까지는 없습니다. A serpent can injure only the lowest natural things, but unless it is a species of viper, not the interior natural things in man, still less his spiritual things, and least of all his celestial things, which the Lord preserves and stores up in man without his knowledge.
그렇게 주님으로 말미암아 보관된 것을 가리켜 말씀에서는 ‘남은 자’(리메인스, remains)라 하고 있습니다. What are thus stored up by the Lord are called in the Word “remains.”
뱀이 감각적 원리와 자아 사랑을 가지고 홍수 전 사람들에게 있는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들을 파괴한 유형, The mode in which the serpent destroyed those lowest natural things in the people before the flood, by the sensuous principle and the love of self;
또 유대인들 사이에서 감각적인 것들과 전통 및 하찮은 것들, 그리고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파괴한 유형, and among the Jews, by sensuous things, traditions, trifles, and by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그리고 오늘날도 그가 어떻게 감각과 기억-지식, 그리고 철학에 속한 것들을 가지고, 그리고 동시에 이런 같은 사랑들을 가지고 그들을 그동안 파괴해 왔으며, 계속해서 파괴하는지 하는 그 유형에 대한 설명을 지금부터 오직 주님의 신적 자비로 듣게 되실 것입니다. and how at this day he has destroyed and continues to destroy them by the things of sense, of memory-knowledge, and of philosophy, and at the same time by the same loves, sha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old hereafter.
260.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으로부터 분명한 것은 주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심이 그 시대 교회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is evident that it was revealed to the church of that time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to save them.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창3:15)
254. ‘네 후손’이 모든 부정(不貞)을 의미한다는 것은, ‘뱀’의 상징이 모든 악이라는 점과, That by the “seed of the serpent” is meant all infidelity,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serpent,” as being all evil;
‘씨’라는 것이 생산 관련, 또는 출산과 관련되는 것이라는 점, “seed” is that which produces and is produced, or that which begets and is begotten;
그리고 여기서는 그 대상이 교회이기 때문에, ‘네 후손’은 부정을 가리킴이 분명합니다. and as the church is here spoken of, this is infidelity.
이사야서를 보면, 비뚤어진 유대 교회를 가리켜, ‘행악의 종자’,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 ‘거짓의 후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In Isaiah, in reference to the Jewish church in its perverted state, it is called a “seed of evil doers,” a “seed of adultery,” a “seed of falsehood”:
4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Woe to the sinful nation, a people laden with iniquity, a seed of evil doers, sons that are destroyers; they have forsaken Jehovah, they have provoked the holy one of Israel, they have estranged themselves backward. (사1:4)
3무당의 자식, 간음자와 음녀의 자식들아 너희는 가까이 오라 4너희가 누구를 희롱하느냐 누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혀를 내미느냐 너희는 패역의 자식, 거짓의 후손이 아니냐 5너희가 상수리나무 사이,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욕을 피우며 골짜기 가운데 바위 틈에서 자녀를 도살하는도다 Draw near hither, ye sons of the sorceress, the seed of the adulterer. Are ye not children of transgression, a seed of falsehood? (사57:3-5)
그리고 다시 ‘뱀’ 또는 ‘용’, 거기 계명성(루시퍼, 12절)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And again, speaking of the “serpent” or “dragon,” who is there called Lucifer:
19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쫓겼으니 가증한 나무 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떨어진 주검들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 20네가 네 땅을 망하게 하였고 네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안장되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들의 후손은 영원히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하리로다 할지니라 Thou art cast out of thy sepulcher like an abominable shoot, because thou hast corrupted thy land, thou hast slain thy people; the seed of evildoers shall not be called to eternity. (사14:19-20)
255. ‘여자의 후손’이 주님 신앙을 상징한다는 것은, ‘여자’의 상징이 교회라는 점과, 그 ‘후손’은 신앙 말고는 없다는 점을 볼 때 분명합니다. 교회를 가리켜 교회라 하는 것은 주님 신앙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That the “seed of the woman” signifies faith in the Lor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woman” as being the church, whose “seed” is nothing but faith, for it is from faith in the Lord that the church is called the church.
말라기에 보면, 신앙을 가리켜 ‘경건한 자손’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In Malachi, faith is called the “seed of God”:
14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15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 Jehovah hath witnessed between thee and the wife of thy youth; and not one hath done so who had a residue of the spirit; and wherefore one, seeking the seed of God? But observe ye in your spirit, lest he deal treacherously against the wife of thy youth. (말2:14-15)
이 구절에서, ‘어려서 맞이한 아내’는 고대 및 태고교회들이며, 그 ‘후손’(혹은 신앙)에 대하여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the “wife of youth” is the ancient and most ancient churches, of whose “seed” (or faith) the prophet speaks.
이사야 역시, 교회와 관련하여 In Isaiah also, in reference to the church:
3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I will pour waters upon the thirsty, and floods upon the dry [land]; I will pour my spirit upon thy seed, and my blessing upon thine offspring. (사44:3)
계시록입니다. In Revelation:
17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더라 The dragon was wroth with the woman, and went to make war with the remnant of her seed, who were keeping the commandments of God, and have the testimony of Jesus Christ. (계12:17)
그리고 시편입니다. And in David:
3주께서 이르시되 나는 내가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4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왕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 29또 그의 후손을 영구하게 하여 그의 왕위를 하늘의 날과 같게 하리로다 36그의 후손이 장구하고 그의 왕위는 해 같이 내 앞에 항상 있으며 I have made a covenant with mine elect, I have sworn unto David my servant, even to eternity will I establish thy seed, and his seed will I make to endure forever, and his throne as the days of the heavens; his seed shall endure to eternity, and his throne as the sun before me, (시89:3-4, 29, 36)
여기서 ‘다윗’은 주님을, where by “David” is meant the Lord;
‘왕위’는 주님의 나라를, by “throne,” his kingdom;
‘해’는 사랑을, by the “sun,” love;
‘자손’은 신앙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by “seed,” faith.
256. 신앙뿐 아니라 주님 자신까지 둘 다를 가리켜 ‘여자의 후손’이라 하는 이유는, 신앙은 오직 주님 홀로 한 분만 주시는 것, 그래서 주님이 곧 신앙이시기 때문이고, 또한 주님은 사람으로 태어나,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의 결과, 아주 끔찍하고 지옥과도 같은 본성으로 완전히 굴러떨어진 그런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주님의 신적 천적 본성, 즉 신성과 주님의 인간으로서의 본성, 곧 인성을 주님의 신적 권능으로 결합, 자기 안에서 하나가 되어 신적 인성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Not only is faith but also the Lord himself is called the “seed of the woman,” both because he alone gives faith, and thus is faith, and because he was pleased to be born, and that into such a church as had altogether fallen into an infernal and diabolical own through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in order that by his Divine power he might unite the Divine celestial own with the human own in his human essence, so that in him they might be a one;
만일 이러한 하나 됨이 실현되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피조 세계는 완전히 소멸될 뻔하였습니다. and unless this union had been effected, the whole world must have utterly perished.
이런 사유로, 주님은 여자의 후손이시고, 그래서 ‘그것’이 아닌, ‘그’라 하신 것입니다. Because the Lord is thus the seed of the woman, it is not said “it,” but “he.”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창3:15)
250. 모든 사람이 이 구절을 주님의 강림(降臨)을 예언한 첫 번째 구절로 알고 있습니다. Everyone is aware that this is the first prophecy of the Lord’s advent into the world;
실제로 이 워딩을 보면 분명 그런 것처럼 보이며, 그래서 이 워딩과, 또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심지어 저 유대인들조차 어떤 메시아가 한 분 오실 줄 알았습니다. it appears indeed clearly from the words themselves, and therefore from them and from the prophets even the Jews knew that a messiah was to come.
그러나 지금까지 ‘뱀’, ‘여자’,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에 대한 특별한 의미들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Hitherto however no one has understood what is specifically meant by the “serpent,” the “woman,” the “serpent’s seed,” the “woman’s seed,” the “head of the serpent which was to be trodden upon,” and the “heel which the serpent should bruise.”
그러므로 이들이 설명되어야 합니다. They must therefore be explained.
여기서 ‘뱀’은 일반적으로 모든 악을 의미하며, 특별히 자아 사랑을 의미합니다. By the “serpent” is here meant all evil in general, and specifically the love of self.
‘여자’는 교회를, by the “woman” is meant the church;
‘뱀의 후손’은 모든 부정(不貞)을, by the “seed of the serpent,” all infidelity;
‘여자의 후손’은 주님 신앙을, by the “seed of the woman,” faith in the Lord;
‘그’는 주님 자신을, by “he,” the Lord himself;
‘뱀의 머리’는 일반적으로 악의 지배를, 특별히 자아 사랑의 지배를, by the “head of the serpent,” the dominion of evil in general, and specifically that of the love of self;
‘상하게 하다’는 암울함, 곧 ‘배로 다니고 흙을 먹어야 함’을, by to “trample upon,” depression, so that it should “go upon the belly and eat dust”;
‘발꿈치’는 가장 낮은 자연적인 것(육체적인 것으로서), 뱀이 ‘상하게’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and by the “heel,” the lowest natural (as the corporeal), which the serpent should “bruise.”
251. ‘뱀’이 일반적으로 모든 악을 의미하며, 특별히 자아 사랑을 의미한다고 하는 이유는, 모든 악은 마음의 감각 파트로부터, 그리고 처음부터 ‘뱀’으로 상징된 기억-지식으로부터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he “serpent” means all evil in general, and specifically the love of self, is that all evil has had its rise from that sensuous part of the mind and also from that memory-knowledge which at first were signified by the “serpent”;
그리고 그래서 여기서 뱀은 모든 종류의 악, 특히 자아 사랑, 또는 같은 건데, 이웃과 주님을 향한 증오를 가리킵니다. and therefore it here denotes evil of every kind, and specifically the love of self, or hatred against the neighbor and the Lord, which is the same thing.
이 악이나 증오는 다양하며, 수많은 속(屬, genera)과 더욱 수많은 종(種, species)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말씀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뱀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뱀’(snakes, 마23:33), ‘독사’(cockatrices, 렘8:17), ‘독사’(asps, 신32:33), ‘독사’(adders, 시140:3), ‘불뱀’(fiery serpents, 민21:6), ‘독사’(vipers, 마23:33)로, 그리고 기타 ‘날으는 뱀’, ‘기는 뱀’ 등인데요, 독의 차이, 곧 증오의 차이에 따른 것입니다. As this evil or hatred was various, consisting of numerous genera and still more numerous species, it is described in the Word by various kinds of serpents, as “snakes,” “cockatrices,” “asps,” “adders,” “fiery serpents,” “serpents that fly” and “that creep,” and “vipers,”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the poison, which is hatred.
그래서 이사야서에서 보면은, Thus we read in Isaiah:
블레셋 온 땅이여 너를 치던 막대기가 부러졌다고 기뻐하지 말라 뱀의 뿌리에서는 독사가 나겠고 그의 열매는 날아다니는 불뱀이 되리라 Rejoice not thou, whole Philistia, because the rod which smiteth thee is broken, for out of the serpent’s root shall go forth a cockatrice, and his fruit shall be a flying fire serpent. (사14:29)
‘뱀의 뿌리’는 마음의 해당 파트나 해당 원리를 가리키는데, 감각들과 기억-지식하고 연결된 것입니다. The “serpent’s root” denotes that part of the mind, or that principle, which is connected with the senses and with memory-knowledge;
‘독사’는 거짓에서 기원한, 즉 유래된 악을 가리킵니다. the “cockatrice” denotes evil originating in the falsity thence derived;
‘날아다니는 불뱀’은 자아 사랑에서 나오는 탐욕을 가리킵니다. and the “flying fire serpent,” the cupidity that comes from the love of self.
유사한 내용이 같은 선지서 또 다른 곳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By the same prophet also similar things are elsewhere thus described: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They hatch cockatrice’s eggs, and weave the spider’s web; he that eateth of their eggs dieth, and when it is crushed there cometh out a viper. (사59:5)
여기 나오는 뱀을 계시록에서는 ‘큰 붉은 용’, ‘옛 뱀’, ‘마귀, 사탄’, ‘온 천하를 꾀는 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The serpent described here in Genesis is called in the Revelation the “great and red dragon,” and the “old serpent,” and also the “devil and satan,” that “deceives the whole world,”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And another sign was seen in heaven; and behold, a great red dragon, having seven heads, and ten horns, and upon his heads seven diadems. (계12:3)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 And the great dragon was cast out, the ancient serpent called the Devil and Satan, who seduces the whole world; he was cast out into the earth, and his angels were cast out with him. (계12:9)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And he took hold of the dragon, the ancient serpent, which is the Devil and Satan, and bound him a thousand years; (계20:2)
이곳과 또 다른 곳들에서, ‘마귀’는 그 무슨 우두머리 노릇을 하는 특별한 마귀를 말하는 게 아니라, 악한 영들의 무리 전체를, 그리고 악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where, and also in other places, by the “devil” is not meant any particular devil who is prince over the others, but the whole crew of evil spirits, and evil itself.
252. ‘여자’가 교회를 의미한다는 것은 위 천국의 결혼을 다룬 155번 글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by the “woman” is meant the church,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bove (n. 155) concerning the heavenly marriage.
천국 결혼의 본질은, 천국이, 결과적으로는 교회가 자기 본성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인데요, 이때 천국도, 주님도 각자 자기 본성 안에 있는 그런 하나 됨입니다. 본성 없이는 하나 됨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Such is the nature of the heavenly marriage, that heaven, and consequently the church, is united to the Lord by its own, insomuch that these are in their own, for without their own there can be no union.
주님이 자비로 이노센스, 평화, 그리고 선을 이 본성 안으로 스며들게 하실 때, 교회는 그 아이덴티티를 여전히 유지하면서도, 천국을 맛보며, 가장 행복한 상태가 됩니다. (164번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When the Lord in mercy instills innocence, peace, and good into this own, it still retains its identity, but becomes heavenly and most happy (as may be seen at n. 164).
주님으로 말미암은 천국적이고 천사적인 본성의 퀄리티와, 자아로 말미암아서 지옥적이고 끔찍해져 버린 본성의 퀄러티는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The quality of a heavenly and angelic own from the Lord, and the quality of an own, which, because from self, is infernal and diabolical, cannot be told.
그 차이는 천국과 지옥과도 같은 차이입니다. The difference is like that between heaven and hell.
253. 교회를 가리켜 ‘여자’, ‘아내’, ‘신부’, ‘처녀’, ‘딸’이라 하는 것은 천국적, 천사적 본성 덕분입니다. It is by virtue of a heavenly and angelic own that the church is called a “woman,” and also a “wife,” a “bride,” a “virgin,” and a “daughter.”
계시록에 보면, 교회를 가리켜 ‘여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She is called a “woman” in Revelation:
1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4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5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13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박해하는지라 A woman clothed with the sun, and the moon under her feet, and upon her head a crown of twelve stars. And the dragon persecuted the woman who brought forth the man child. (계12:1, 4-5, 13)
이 구절에서, ‘여자’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In this passage by a “woman” is meant the church;
‘해’는 사랑을, by the “sun,” love;
‘달’은 신앙을, by the “moon,” faith;
‘별들’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의 진리들을 의미하는데, 이 모든 것들은 악한 영들이 아주 극도로 증오하며, 박해하는 것들입니다. by “stars,” as before, the truths of faith, all of which evil spirits hate, and persecute to the utmost.
이사야도 역시 교회를 가리켜 ‘여자’, ‘아내’로 부르고 있습니다. The church is called a “woman,” and also a “wife,” in Isaiah:
5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6여호와께서 너를 부르시되 마치 버림을 받아 마음에 근심하는 아내 곧 어릴 때에 아내가 되었다가 버림을 받은 자에게 함과 같이 하실 것임이라 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느니라 Thy maker is thy husband, Jehovah of armies is his name, and thy redeemer the holy one of Israel, the God of the whole earth is he called; for as a woman forsaken and afflicted in spirit hath Jehovah called thee, and as a wife of youth [adolescentiarum], (사54:5-6)
여기서도 ‘지으신 이’를 가리켜 ‘남편’이라 하는데요, 그 이유는 그 본성과 하나 되었기 때문입니다. where the “maker” is called also the “husband,” because united to the own;
‘버림 받은 여자’, ‘어린 아내’는 특별히 고대교회와 태고교회를 상징합니다. and a “woman forsaken” and a “wife of youth” signify specifically the ancient and most ancient churches.
마찬가지로, 말라기에서도 Likewise in Malachi: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Jehovah hath borne witness between thee and the wife of thy youth. (말2:14)
이 여자를 계시록에서 ‘아내’요, ‘신부’로 부르고 있습니다. She is called a “wife” and a “bride” in the Revelation:
2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9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I saw the holy city new Jerusalem coming down from God out of heaven, prepared as a bride adorned for her husband: come hither, I will show thee the bride, the lamb’s wife. (계21:2, 9)
교회를 여러 선지서들에서는 ‘처녀’, ‘딸’로 부르고 있습니다. The church is called a “virgin” and a “daughter” throughout the prophets.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창3:14)
242.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로 상징되는 것은, 자기들의 감각 파트가 바로 (자기들의 추락의) 원인이었음을 그들이 지각하였다는 것입니다.By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is signified that they perceived their sensuous part to be the cause [of their fall].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가 상징하는 것은, 그들의 감각 파트가 자신을 하늘의 일로부터 고개를 돌려 육체의 일을 향하게 하였고, 결국 저주를 자초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The serpen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averted itself from that which is heavenly, and turned itself to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us cursed itself;
여기 ‘가축’과 ‘들의 짐승’은 앞에서처럼 어펙션들을 상징합니다.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here signify affections, as before.
‘배로 다니고’가 상징하는 것은, 그들의 감각 파트는 더 이상 하늘의 일들을 올려다 볼 수 없고, 대신 육체와 땅의 일들을 향해서 내려다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The “serpent going upon its belly”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could no longer look upward to the things of heaven, but only downward, to those of the body and the earth.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그들의 감각 파트는 오직 육체와 땅에 속한 것들로만 살아가는, 다시 말해서, 지옥을 경험하는 그런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Its “eating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became such that it could not live from anything but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e earth, that is to say, it became infernal.
243.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인들에게 있어, 몸과 관련된 감각적인 것들은 그들의 속 사람을 따르고 순종하는 그런 캐릭터들이었고, 심지어 그들은 그런 것에는 아예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In the most ancient celestial men the sensuous things of the body were of such a character as to be compliant and subservient to their internal man, and beyond this they did not care for them.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을 사랑하기 시작하고나서부터 그들은 감각에 관한 것들을 속사람보다 앞세웠고, 그러더니 그렇게 그것들은 분리되고, 육체가 되었으며, 그렇게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But after they had begun to love themselves, they set the things of sense before the internal man, and therefore those things were separated, became corporeal, and so were condemned.
24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라는 표현은, 앞서 밝힌 대로, 그들이 자기들의 감각 파트가 자기들의 추락의 원인임을 깨달았다는 상징으로, 여기에 대해서는 뭐, 더 설명할 게 없지 싶습니다.Having before shown that by “Jehovah God speaking to the serpent” is signified their perceiving the sensuous part to be the cause of their fall, no more need be said in regard to these words.
245.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가 상징하는 것은, 그들의 감각 파트가 자신을 하늘의 일로부터 고개를 돌려 육체의 일을 향하게 하였고, 결국 저주를 자초하게 하였다라는 것임은 말씀의 속뜻을 보면 명료해질 것입니다.That “he said to the serpent,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signifies that the sensuous part averted itself from that which is heavenly, turned itself to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us cursed itself, may be clearly shown from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은 결코 누구를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Jehovah God or the Lord never curses anyone.
주님은 절대로 누구에게 화를 내시거나, 절대로 누구를 시험하시거나, 절대로 누구를 벌하시거나, 절대로, 절대로 누구를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He is never angry with anyone, never leads anyone into temptation, never punishes anyone, and still less does he curse anyone.
이 모든 것은 지옥의 영들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결코 무슨 자비나 평화, 선한 의도 등에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All this is done by the infernal crew, for such things can never proceed from the fountain of mercy, peace, and goodness.
이 말씀을 비롯, 성경의 여러 다른 데들에서 위와 같은 표현들, 곧 여호와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화를 내시며, 벌하시고, 시험하신다고, 뿐만 아니라 죽이시고, 심지어 저주하신다는 표현들이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온 우주 안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정하시는 분, 심지어 악 자체는 물론, 형벌, 시험들까지도 모두 다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믿을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The reason of its being said, both here and in other parts of the Word, that Jehovah God not only turns away his face, is angry, punishes, and tempts, but also kills and even curses, is that men may believe that the Lord governs and disposes all and every thing in the universe, even evil itself, punishments, and temptations;
또 그들이 이런 가장 보편적인 생각을 받아들였을 때, 나중에 배울 수 있게 하려는 것인데요, 주님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지를, 형벌이나 시험 같은 악을 돌이켜 선이 되게 하심으로써 말이지요.and when they have received this most general idea, may afterwards learn how he governs and disposes all things by turning the evil of punishment and of temptation into good.
말씀을 가르칠 때와 배울 때, 이런 가장 보편적인 진리들이 반드시 가장 먼저 나와야 합니다.In teaching and learning the Word, the most general truths must come first;
그리고 이런 이유로, 문자의 뜻이 이런 일들로 가득한 것입니다.and therefore the literal sense is full of such things.
246. ‘가축과 들의 짐승’이 어펙션을 상징한다는 것은 앞서 그것을 다룬 글들인 45번, 46번 글과, 거기에 주님의 허락으로 추가하는 시편의 다음 구절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signify affections is evident from what was previously said concerning them (n. 45–46), to which it is permitted to add the following passage from David:
9하나님이여 주께서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기업이 곤핍할 때에 주께서 그것을 견고하게 하셨고 10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Thou, O God, dost send the rain of thy kindnesses; thou confirmest thy laboring inheritance; thy wild animal shall dwell therein, (시68:9-10)
여기서도 ‘주의 회중’, 곧 ‘들짐승’은 선한 애정을 가리킵니다. ‘주의 회중을 그 가운데에 살게 하셨나이다’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where also “wild animal” denotes the affection of good, because it is said that it shall “dwell in the inheritance of God.”
창세기 1장 24절, 25절에서는 ‘가축과 땅의 짐승’이라 하신 반면, 여기와 또 창세기 2장 19절, 20절에서는 ‘가축과 들의 짐승’으로 언급하시는 이유는, 현 본문 구절은 교회 혹은 거듭난 사람을 다루고 있는 반면, 창세기 1장은 아직은 교회가 아닌, 혹은 이제 막 거듭남의 과정을 시작하려는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here, and also in chapter 2:19–20,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are mentioned, while in chapter 1:24–25,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re named, is that the present passage treats of the church or regenerated man, whereas the first chapter related to what was as yet not a church, or to man about to become regenerate;
※ 창2:19-20, 창1:24-25
19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And Jehovah God formed out of the ground every beast of the field, and every fowl of the heavens, and brought it to the man to see what he would call it; and whatsoever the man called every living soul, that was the name thereof.20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And the man gave names to every beast, and to the fowl of the heavens, and to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but for the man there was not found a help as with him. (창2:19-20)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living soul after its kind; the beast, and the thing moving itself,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it was so.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fter its kind, and the beast after its kind, and everything that creepeth on the ground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24-25)
이 ‘들’이라는 말은 교회, 혹은 거듭남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for the word “field” is applied to the church, or to the regenerate.
247. ‘배로 다니고’가 가리키는 것이, 그들의 감각 파트는 더 이상 하늘의 일들을 올려다 볼 수 없고, 대신 육체와 땅의 일들을 향해서 내려다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임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면 분명한데요, 고대에는 ‘배’가 상징하는 것이 그런 것이었고, 그건 배가 땅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습니다. That the “serpent going on his belly” denotes that their sensuous part could no longer look upward to the things of heaven, but only downward to those of the body and the earth,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in ancient times by the “belly” such things are signified as are nearest to the earth;
‘가슴’하면 땅 위, by the “chest” such as are above the earth;
‘머리’하면 가장 높은 곳입니다. and by the “head,” what is highest.
여기서 언급 중인 것은, 감각 파트는, 그 자체로 사람의 본성 중 가장 낮은 파트로서, ‘배로 다녔다’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을 향해 돌아섰기 때문입니다. It is here said that the sensuous part, which in itself is the lowest part of man’s nature, “went upon its belly,” because it turned to what is earthly.
그 배가 땅에 착 달라붙음, 그 얼굴에 진토가 날라와 덕지덕지 묻옴 등 이런 유사한 상징이 유대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The depression of the belly even to the earth, and the sprinkling of dust on the head, had a similar signification in the Jewish church.
24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25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26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Wherefore hidest thou thy faces, and forgettest our misery and our oppression? For our soul is bowed down to the dust, and our belly cleaveth to the earth. Arise, a help for us, and redeem us for thy mercy’s sake, (시44:24-26)
여기서도 보면 분명히, 사람이 여호와의 얼굴을 외면하여 등돌리는 것을 가리켜, ‘그의 배가 땅 먼지에 착 달라붙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where also it is evident that when man averts himself from the face of Jehovah, he “cleaves by his belly to the dust and to the earth.”
요나서에도 보면, 큰 물고기의 ‘배’, 요나가 그리로 던져졌지요. 마찬가지로 땅에 속한 낮은 파트들, 세속의 일들을 상징합니다. 아래 그의 예언을 보시면 분명합니다. In Jonah likewise, by the “belly” of the great fish, into which he was cast, are signified the lower parts of the earth, as is evident from his prophecy: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Out of the belly of hell cried I, and thou heardest my voice, (욘2:2)
여기 ‘스올’은 낮은 땅, 곧 지옥을 가리킵니다. where “hell” denotes the lower earth.
248. 그래서 만일 사람이 하늘에 속한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때엔 그를 가리켜 ‘똑바로 서서 걷다’, ‘위를 보다’, ‘앞으로 나아가다’라고 합니다. 다 같은 의미이지요. And therefore when man had regard to heavenly things, he was said to “walk erect,” and to “look upward,” or “forward,” which means the same;
반대로 그가 육체적이고 세속적인 일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면 그때는 ‘엎드려 배로 다니다’, ‘아래를 보다’, ‘뒤로 물러가다’라고 합니다. but when he had regard to corporeal and earthly things, he was said to be “bowed to the earth,” and to “look downward” or “backward.”
레위기입니다. As in Leviticus: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I am Jehovah your God, who brought you forth out of the land of Egypt, that ye should not be their bondmen; and I have broken the bonds of your yoke, and made you to go erect. (레26:13)
미가서에도 In Micah: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Ye shall not thence remove your necks, neither shall ye go erect. (미2:3)
예레미야서에도 In Jeremiah:
8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13높은 곳에서 나의 골수에 불을 보내어 이기게 하시고 내 발 앞에 그물을 치사 나로 물러가게 하셨음이여 종일토록 나를 피곤하게 하여 황폐하게 하셨도다 Jerusalem hath sinned a sin, therefore they despise her, because they have seen her nakedness; yea, she groaned and hath turned backward. From on high hath he sent fire into my bones, and hath made me to return backward; he hath made me desolate. (애1:8, 13)
그리고 이사야서에서도 And in Isaiah:
2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25헛된 말을 하는 자들의 징표를 폐하며 점 치는 자들을 미치게 하며 지혜로운 자들을 물리쳐 그들의 지식을 어리석게 하며 Jehovah thy redeemer, that turneth wise men backward, and maketh foolish their knowledge. (사44:24-25)
249.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가, 그들의 감각 파트가 몸과 땅에 속한 것들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음을, 즉, 지옥을 경험하게 되었음을 상징하고 있음은, 말씀에 나오는 ‘흙’의 상징을 보면 또한 분명합니다. That to “eat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became such that it could not live from anything except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e earth, that is to say, that it became infernal, is evident also from the signification of “dust” in the Word;
미가서입니다. as in Micah:
14원하건대 주는 주의 지팡이로 주의 백성 곧 갈멜 속 삼림에 홀로 거주하는 주의 기업의 양 떼를 먹이시되 그들을 옛날 같이 바산과 길르앗에서 먹이시옵소서 16이르되 여러 나라가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러워하여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며 17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리이다 Feed thy people as in the days of eternity. The nations shall see and shall blush at all their might; they shall lick the dust like a serpent, they shall be shaken out of their holds like creeping things [serpentes] of the earth. (미7:14, 16-17)
‘옛날 같이’는 태고 교회를 의미합니다. The “days of eternity” mean the most ancient church;
‘여러 나라’는 자기 본성을 의뢰하는 자들로,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로 서술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the “nations,” those who trust in their own, of whom it is predicated that “they shall lick the dust like a serpent.”
시편에도 In David:
광야에 사는 자는 그 앞에 굽히며 그의 원수들은 티끌을 핥을 것이며 Barbarians shall bow themselves before God, and his enemies shall lick the dust. (시72:9)
‘광야에 사는 자’와 ‘원수들’은 오직 땅의 일들만, 세상 일들만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Barbarians” and “enemies” are those who regard only earthly and worldly things.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Dust shall be the serpent’s bread. (사65:25)
‘흙’이 영적, 천적인 하늘의 일이 아닌, 오로지 육의 일, 땅의 일만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기 때문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As “dust” signifies those who do not regard spiritual and celestial things, but only what is corporeal and earthly, therefore the Lord enjoined his disciples that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if the city or house into which they entered was not worthy, they should shake off the dust of their feet.” (마10:14)
하신 것입니다.
(‘먼지’가 선고, 지옥 등과 관련된 것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19절에서 더 깊이 볼 것입니다.) (That “dust” signifies what is condemned and infernal, will be further shown at verse 19.)
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창3:14)
242.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로 상징되는 것은, 자기들의 감각 파트가 바로 (자기들의 추락의) 원인이었음을 그들이 지각하였다는 것입니다. By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is signified that they perceived their sensuous part to be the cause [of their fall].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가 상징하는 것은, 그들의 감각 파트가 자신을 하늘의 일로부터 고개를 돌려 육체의 일을 향하게 하였고, 결국 저주를 자초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The serpen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averted itself from that which is heavenly, and turned itself to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us cursed itself;
여기 ‘가축’과 ‘들의 짐승’은 앞에서처럼 어펙션들을 상징합니다.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field” here signify affections, as before.
‘배로 다니고’가 상징하는 것은, 그들의 감각 파트는 더 이상 하늘의 일들을 올려다 볼 수 없고, 대신 육체와 땅의 일들을 향해서 내려다만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The “serpent going upon its belly”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could no longer look upward to the things of heaven, but only downward, to those of the body and the earth.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가 상징하는 것은, 그들의 감각 파트는 오직 육체와 땅에 속한 것들로만 살아가는, 다시 말해서, 지옥을 경험하는 그런 것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Its “eating dust all the days of its life” signifies that their sensuous part became such that it could not live from anything but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e earth, that is to say, it became infernal.
243. 천적 인간이었던 태고인들에게 있어, 몸과 관련된 감각적인 것들은 그들의 속 사람을 따르고 순종하는 그런 캐릭터들이었고, 심지어 그들은 그런 것에는 아예 관심도 갖지 않았습니다. In the most ancient celestial men the sensuous things of the body were of such a character as to be compliant and subservient to their internal man, and beyond this they did not care for them.
그러나 그들이 자신들을 사랑하기 시작하고나서부터 그들은 감각에 관한 것들을 속사람보다 앞세웠고, 그러더니 그렇게 그것들은 분리되고, 육체가 되었으며, 그렇게 저주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But after they had begun to love themselves, they set the things of sense before the internal man, and therefore those things were separated, became corporeal, and so were condemned.
244.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라는 표현은, 앞서 밝힌 대로, 그들이 자기들의 감각 파트가 자기들의 추락의 원인임을 깨달았다는 상징으로, 여기에 대해서는 뭐, 더 설명할 게 없지 싶습니다. Having before shown that by “Jehovah God speaking to the serpent” is signified their perceiving the sensuous part to be the cause of their fall, no more need be said in regard to these words.
245.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가 상징하는 것은, 그들의 감각 파트가 자신을 하늘의 일로부터 고개를 돌려 육체의 일을 향하게 하였고, 결국 저주를 자초하게 하였다라는 것임은 말씀의 속뜻을 보면 명료해질 것입니다. That “he said to the serpent,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signifies that the sensuous part averted itself from that which is heavenly, turned itself to that which is of the body, and thus cursed itself, may be clearly shown from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여호와 하나님, 곧 주님은 결코 누구를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Jehovah God or the Lord never curses anyone.
주님은 절대로 누구에게 화를 내시거나, 절대로 누구를 시험하시거나, 절대로 누구를 벌하시거나, 절대로, 절대로 누구를 저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He is never angry with anyone, never leads anyone into temptation, never punishes anyone, and still less does he curse anyone.
이 모든 것은 지옥의 영들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은 결코 무슨 자비나 평화, 선한 의도 등에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All this is done by the infernal crew, for such things can never proceed from the fountain of mercy, peace, and goodness.
이 말씀을 비롯, 성경의 여러 다른 데들에서 위와 같은 표현들, 곧 여호와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시고, 화를 내시며, 벌하시고, 시험하신다고, 뿐만 아니라 죽이시고, 심지어 저주하신다는 표현들이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온 우주 안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모든 것을 정하시는 분, 심지어 악 자체는 물론, 형벌, 시험들까지도 모두 다 다스리시는 분이 바로 주님이심을 믿을 수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The reason of its being said, both here and in other parts of the Word, that Jehovah God not only turns away his face, is angry, punishes, and tempts, but also kills and even curses, is that men may believe that the Lord governs and disposes all and every thing in the universe, even evil itself, punishments, and temptations;
또 그들이 이런 가장 보편적인 생각을 받아들였을 때, 나중에 배울 수 있게 하려는 것인데요, 주님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역사하시는지를, 형벌이나 시험 같은 악을 돌이켜 선이 되게 하심으로써 말이지요. and when they have received this most general idea, may afterwards learn how he governs and disposes all things by turning the evil of punishment and of temptation into good.
말씀을 가르칠 때와 배울 때, 이런 가장 보편적인 진리들이 반드시 가장 먼저 나와야 합니다. In teaching and learning the Word, the most general truths must come first;
그리고 이런 이유로, 문자의 뜻이 이런 일들로 가득한 것입니다. and therefore the literal sense is full of such things.
241. 태고적 사람들은, 천적인간들이었는데요, 그들은 다음과 같은 특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땅 위 온 세상 모든 사물을 실제로 두 눈으로 보면서도, 그들은 그 사물들이 상징하고 표현하는 하늘의 것, 주님의 것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being celestial men, were so constituted that every object they beheld in the world or upon the face of the earth, they indeed saw, but they thought about the heavenly and Divine things the objects signified or represented.
그들의 시력은 그저 돕는 도구였을뿐이었고, 그래서 그 결과는 그들의 말이었습니다. Their sight was merely an instrumental agency, and so consequently was their speech.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통해 이런 걸 알 수 있는데요, 만일 누가 어떤 사람이 하는 말에 깊이 동의가 되면, 그는 실제로 그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마치 말보다는 말에 담긴 취지만 취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Anyone may know how this was from his own experience, for if he attends closely to the meaning of a speaker’s words, he does indeed hear the words, but is as if he did not hear them, taking in only the sense;
그리고 좀 더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심지어 그 말의 뜻보다 보편적인 의미에 더 주의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and one who thinks more deeply does not attend even to the sense of the words, but to a more universal sense.
그러나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이 후손들은 그들의 선조들하고는 달랐습니다. 그들은 땅 위 온 세상 모든 사물들을 볼 때, 그것들을 사랑했고, 그들의 마음은 거기에 사로잡혔으며, 그것들에 대해서 생각했고, 그리고 그것들을 가지고 하늘과 주님의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But the posterities that are here treated of were not like their fathers, for when they beheld the objects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as they loved them, their minds cleaved to them, and they thought about them, and from them about things heavenly and Divine.
그렇게 해서 이들에게는 감각적인 것이 원리가 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선조들에게는 도구였던 것들이 말입니다. Thus with them what is sensuous began to be the principal, and not as with their fathers the instrumental.
이처럼 세상에 속한 것, 땅에 속한 것이 원리가 되면,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것들을 이 원리를 가지고 추론하며, 그래서 그렇게 자신들을 소경으로 만들어 갑니다. And when that which is of the world and of the earth becomes the principal, then men reason from this about the things of heaven, and so blind themselves.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 역시, 각자의 경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How this is may also be known by anyone from his own experience;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있으면서 정작 그 말의 뜻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 말에서 건지는 게 거의 없고, 더 나아가 보편적인 의미는 더 말할 것도 없으며, 때로는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을 단어 하나 가지고, 심지어 문법적 특이점 하나를 가지고 일일이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for he who attends to the words of a speaker, and not to the sense of the words, takes in but little of the sense, and still less of the universal import of the sense, and sometimes judges of all that a man says from a single word, or even from a grammatical peculiar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