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serpent, Because thou hast done this, thou art cursed above every beast, and above every wild animal of the field; upon thy belly shalt thou go, and dust shalt thou eat all the days of thy life.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And I will put enmity between thee and the woman, and between thy seed and her seed; he shall trample upon thy head, and thou shalt bruise his heel. 16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And unto the woman he said, I will greatly multiply thy sorrow and thy conception; in sorrow thou shalt bring forth sons, and thine obedience shall be to thy man [vir], and he shall rule over thee. 17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And unto the man he said, Because thou hast hearkened unto the voice of thy wife, and hast eaten of the tree of which I commanded thee, saying, Thou shalt not eat of it; cursed is the ground for thy sake; in great sorrow shalt thou eat of it all the days of thy life. 18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And the thorn and the thistle shall it bring forth unto thee, and thou shalt eat the herb of the field. 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In the sweat of thy face shalt thou eat bread, till thou return unto the ground; for out of it wast thou taken; for dust thou art, and unto dust shalt thou return. (창3:14-19)

 

 

234. 결국은 홍수를 만나게 될 태고교회의 그 다음 상태가 여기 기술됩니다. The subsequent state of the church down to the flood is here described;

 

그리고 그때 교회는 자기 자신을 끔찍하게 파괴하였기 때문에, 주님은 친히 세상에 오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예언을 주십니다. and as at that time the church utterly destroyed itself, it is foretold that the Lord would come into the world and save the human race.

 

 

235. 감각들을 가지고는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은 믿으려고를 하지 않는 감각 파트, 이게 바로 ‘’인데요, 이런 태도 때문에 저주를 자초했고, 지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Being unwilling to believe anything that could not be apprehended by the senses, the sensuous part which is the “serpent” cursed itself, and became infernal. (창3:14)

 

 

236. 이런 이유로, 온 인류가 지옥을 향하여 달려들어가게 되는 걸 막기 위해 주님은 친히 세상에 오시겠다 약속하셨습니다. Therefore to prevent all mankind from rushing into hell, the Lord promised that he would come into the world. (창3:15)

 

 

237. 교회가 ‘여자’라는 표현으로 더 자세히 설명되고 있는데요, 이 교회는 자아 혹은 본성을 너무 사랑해서 더 이상 진리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비록 이것들을 '다스리도록' 이성이 그들에게 주어졌어도 말입니다. The church is further described by the “woman,” which so loved self or the own as to be no longer capable of apprehending truth, although a rational was given them that should “rule”. (창3:16)

 

 

238. 그 다음은 이성의 퀄러티 설명입니다. 여기 보면, 이성은 동의했고, 저주를 자초하였으며, 결국 지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이성 대신 추론만 남게 되었습니다. The quality of the rational is then described, in that it consented, and thus cursed itself, and became infernal, so that reason no longer remained, but ratiocination. (창3:17)

 

 

239. 저주와 황폐함, 그리고 그들의 정처없이 떠돌게 된 본성에 관한 설명입니다. The curse and vastation are described, and also their ferine nature. (창3:18)

 

 

240. 다음은, 신앙과 사랑의 모든 것을 그들이 아주 극도로 싫어하고 혐오함을, Next, their aversion to everything of faith and love;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됨으로써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라 할 수 없게 되었다는 설명입니다. and that thus from being man they became not men. (창3:19)

 

2021-04-21(D4)-창세기(창3,14-19, AC.234-240), '창3,14-19 브리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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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9-233

 

11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And he said, Who told thee that thou wast naked? Hast thou eaten of the tree whereof I commanded thee that thou shouldest not eat? 12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the man said, The woman whom thou gavest to be with me, she gave me of the tree, and I did eat. 13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And Jehovah God said unto the woman, Why hast thou done this? And the woman said, The serpent beguiled me, and I did eat. (창3:11-13)

 

 

229. 이 말씀들이 상징하는 바는 앞서 설명되어온 내용으로 분명한데요, 즉, 사람의 합리적인 면이 오운 때문에 속아 넘어가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오운은 자신한테 무척 소중해서, (이걸 가리켜, 자아 사랑이라 하지요.) 사람은 자기가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더 이상 아무것도 안 믿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The signification of these words is evident from what has been explained before, namely, that the rational of man suffered itself to be deceived by its own, because this was dear to him (that is, by the love of self), so that he believed nothing but what he could see and feel.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는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은 뱀하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과, 실제로 뱀이라는 건 없었고, ‘’으로 상징된 감각 파트를 특정하는 것조차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Everyone can see that Jehovah God did not speak to a serpent, and indeed that there was no serpent, neither did he address the sensuous part that is signified by the “serpent”;

 

또 이 말씀들은 어떤 다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는데요, 그것은, 자신들이 감각 때문에 속았다는 걸 그들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이 주님과 주님 신앙에 관해 들어온 것들을, 믿기 전에 먼저 좀 확인했으면 했는데요, 바로 이런 것이 자아 사랑입니다. but that these words involve a different meaning, namely, that they perceived themselves to be deluded by the senses, and yet, in consequence of self-love, were desirous of ascertaining the truth of what they had heard concerning the Lord, and concerning faith in him, before they believed it.

 

 

230. 이들 후손의 지배적인 악은 자아 사랑이었습니다. 동시에 세상 사랑은 오늘날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The ruling evil of this posterity was the love of self, without their having at the same time so much of the love of the world as exists at the present day;

 

그들이 그들 소유의 가정과 권속들 내에서 지냈기 때문이며, 부를 축적하고자 하는 열망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for they dwelt within their own households and families, and had no desire to accumulate wealth.

 

 

231. 홍수 전 있었던 태고 교회의 악, 뿐만 아니라, 홍수 후인 고대 교회의 악, 그리고 또한 유대 교회의 악, 계속해서 새 교회, 곧 주님 오신 후 시작된 이방 교회의 악, 그리고 오늘날 현 교회의 악까지, 이 모든 악은 주님과 주님의 말씀 대신 자신과 자신의 감각을 믿었고, 그리고 지금도 믿고 있는 것입니다. The evil of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existed before the flood, as well as that of the ancient church after the flood, and also that of the Jewish church, and subsequently the evil of the new church, or church of the Gentiles, after the coming of the Lord, and also that of the church of the present day, was and is that they do not believe the Lord or the Word, but themselves and their own senses.

 

이런 이유로 신앙이라는 게 사라졌고, 신앙이 사라진 곳에 이웃 사랑도 사라진 것이며,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악과 거짓이 된 것입니다. Hence there is no faith, and where there is no faith there is no love of the neighbor, consequently all is false and evil.

 

 

232.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이전 시대에 비해 상황이 훨씬 더 나빠졌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대인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던 어떤 새로운 기억-지식들 때문에 감각들을 더 이상 쉽사리 믿지 않게 된 것인데요, 이것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형언할 수 없는 어두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At this day, however, it is much worse than in former times, because men can now confirm the incredulity of the senses by memory-knowledges unknown to the ancients, and this has given birth to an indescribable degree of darkness.

 

만약 사람들이 이 어두움의 이 엄청난 실상을 알 수 있다면 그는 아마 기절할 만큼 놀라 자빠질 것입니다. If men knew how great is the darkness from this cause they would be astounded.

 

 

233.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신앙의 신비들을 탐험하겠다고 하는 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겠다는 것만큼이나, 그리고 갈비뼈 하나가 가슴과 심장의 극히 미세한 근육들을 통제하겠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입니다. To explore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of memory-knowledges is as impossible as it is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or for a rib to govern the finest fibrils of the chest and of the heart.

 

정말 엄청난 것, 네, 정말 훨씬 더 엄청난 것은 영적, 천적인 일에 우리의 감각들 및 기억-지식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So gross, yea, much more so, is that which pertains to our senses and memory-knowledge relatively to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셀 수 없이 많은, 자연의 비밀들을 조사하겠다고 하는 사람은 사실은 거의 단 한 가지도 발견하기 어렵고, 또 잘 알려진 대로, 조사하는 중에 그만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He who would investigate the hidden things of nature, which are innumerable, discovers scarcely one, and while investigating them falls into errors, as is well known.

 

영적, 천적 삶 가운데 감추어진 진리들을 조사하는 경우는 더합니다. 그런 삶에는 자연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하찮아 보이는 것 하나 안에도 얼마나 무한한 신비들이 존재하는지 모릅니다! How much more likely is this to be the case while investigating the hidden truth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where myriads of mysteries exist for one that is invisible in nature!

 

[2] 한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면은, As an illustration take this single example:

 

사람은 혼자서는 악을 행하고,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of himself man cannot but do what is evil, and turn away from the Lord.

 

하지만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라 그와 함께 있는 악한 영들이 그러는 것이며, Yet man does not do these things, but the evil spirits who are with him.

 

악한 영들 역시 그들 자신이 그러는 게 아니라 그들이 그동안 자신의 오운으로 만들어 온 악 자체가 그러는 것입니다. Nor do these evil spirits do them, but the evil itself which they have made their own.

 

그럼에도불구하고, 사람이 악을 행하여 자신을 주님으로부터 돌아서게 하는 것이며, 사람이 죄를 지은 것입니다. Nevertheless man does evil and turns himself away from the Lord, and is in fault;

 

그러면서도 그는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아 살아갑니다. and yet he lives only from the Lord.

 

또 한편으로, 사람은 혼자서는 선을 행할 가능성도, 주님을 향할 수도 없지만, 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하게 됩니다. So on the other hand, of himself man cannot possibly do what is good, and turn to the Lord, but this is done by the angels.

 

그런데 이 역시 천사들이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주님 홀로 하시는 것입니다. Nor can the angels do it, but the Lord alone.

 

그러면서도 마치 사람이 혼자 알아서 선도 행하고, 주님을 향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And yet man is able as of himself to do what is good, and to turn himself to the Lord.

 

이런 사실들은 우리가 가진 감각들이나 기억-지식, 철학 같은 걸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걸 가지고 누구더러 컨설팅을 좀 해달라 하면, 이 모든 게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분명 모조리 부정될 것입니다. These facts can never be apprehended by our senses, memory-knowledge, and philosophy, but if these are consulted will be denied in spite of their truth.

 

모든 게 다 그렇듯 말입니다. And it is the same all through.

 

[3] 지금까지 들으신 내용으로부터 분명한 사실은, 믿음의 일들을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들을 가지고 찾아보겠다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신들을 의심뿐 아니라 부인, 곧 흑암 가운데 고꾸라지게 하며, 그 결과 결국엔 모든 탐욕 한 가운데 빠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From what has been said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consult sensuous things and memory-knowledges in matters of belief, plunge themselves not only into doubt, but also into denial, that is, into thick darkness, and consequently into all cupidities.

 

그 이유는, 그들이 거짓된 것을 믿고, 거짓된 것을 행하기 때문이며, For as they believe what is false, they also do what is false.

 

또 그들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래서 이 몸, 이 육체 그리고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일들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And as they believe that what is spiritual and celestial has no existence, so they believe that there is nothing else but what is of the body and the world.

 

이렇게 저들은 자아와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사랑하며, 그래서 이런 식으로 모든 탐욕을 행하고, 악들은 거짓된 것으로부터 샘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And so they love all that belongs to self and the world, and in this way do cupidities and evils spring from what is false.

 

2021-04-20(D3)-창세기(창3,11-13, AC.229-233), '자아 사랑, 세상 사랑의 비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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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천 산책(4/19)

일상 2021. 4. 19.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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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26-228

 

9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10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And Jehovah God cried unto the man [homo], and said unto him, Where art thou? And he said,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and I hid myself. (창3:9-10)

 

 

226. ‘부르시며’, ‘동산에서 나는 소리’,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의 의미들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The meaning of “crying,” of the “voice in the garden,” of their “being afraid because they were naked,” and of “hiding themselves” has been previously explained.

 

말씀에서, 사람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너는 무엇을 하느냐 먼저 묻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주님은 이미 다 아시면서 말이지요. It is common in the Word for man to be first asked where he is and what he is doing, although the Lord previously knew all things;

 

그러시는 이유는, 그러면 그가 혹시 시인하고 자백할까 해서입니다. but the reason for asking is that man may acknowledge and confess.

 

 

227. 퍼셉션, 내면의 소리, 그리고 양심 등의 기원을 알 수 있었으면 하는 것과, 또 오늘날(1,750년 즈음 유럽)엔 그 기원에 관해 거의 알려진 게 없는 이유로, 제가(Swedenborg, 스베덴보리, 1688-1772) 이 주제에 관해 무언가를 연관 지을 수 있었으면 합니다. As it is desirable that the origin of perception, internal dictate, and conscience, should be known, and as at the present day it is altogether unknown, I may relate something on the subject.

 

정말 엄청난 진실은, 주님이 영들과 천사들을 통해 사람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It is a great truth that man is governed by the Lord by means of spirits and angels.

 

악한 영들의 지배가 시작되면, 천사들은 악과 거짓들로부터 고개를 돌리게 하려고 애를 쓰며, 이렇게 전투가 발생합니다. When evil spirits begin to rule, the angels labor to avert evils and falsities, and hence arises a combat.

 

사람은 퍼셉션, 내면의 소리 및 양심의 전투를 통해 점점 더 예민해집니다. It is this combat of which the man is rendered sensible by perception, dictate, and conscience.

 

이것들과 또 시험들을 통해 사람은 영들과 천사들이 자기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아주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육체의 일에 아주 깊이 잠겨 영들과 천사들에 관한 것을 전혀 믿지 않는 그런 사람만 아니라면 말입니다. By these, and also by temptations, a man might clearly see that spirits and angels are with him, were he not so deeply immersed in corporeal things as to believe nothing that is said about spirits and angels.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그들이 이런 전투들을 수백 번 느껴도 여전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 건 다 상상이며, 마음이 어수선해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입니다. Such persons, even if they were to feel these combats hundreds of times, would still say that they are imaginary, and the effect of a disordered mind.

 

저는 허락하심을 받아 이런 전투들을 수천 번씩이나 느낄 수 있었고, 아주 생생하게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은 수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지요. 뿐만 아니라, 이런 전투들을 일으키는 그들이 누구며, 무슨 일을 했고, 어디 출신인지, 그리고 그들이 언제 오며, 언제 떠나가는지 등도 마찬가지로 느끼고,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I have been permitted to feel such combats, and to have a vivid sense of them, thousands and thousands of times, and this almost constantly for several years, as well as to know who, what, and where they were that caused them, when they came, and when they departed;

 

저는 그들과 지금까지도 대화하고 있습니다. and I have conversed with them.

 

 

228. 천사들에게는 말로 어떻게 설명이 안 되는 정말 차원이 다른 정교한 퍼셉션이 있는데요, 천사들은 어떤 일이 신앙의 진리, 사랑의 선하고 반대되는지 여부를 이 퍼셉션을 가지고 압니다. It is impossible to describe the exquisite perception whereby the angels discover whether anything gains admission that is contrary to the truth of faith and the good of love.

 

천사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언제 해야 할지를 그런 것에 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는 사람이 혼자 하는 것 보다 수천 배나 더 완벽하게 지각합니다. They perceive the quality of what enters, and when it enters, a thousand times more perfectly than the man himself, who scarcely knows anything about it.

 

사람이 하는 가장 작은 생각조차도 천사들은 더욱 완벽하게 지각합니다. 사람이 그걸 가지고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그레이트한 생각보다도 더 말이지요. The least of thought in a man is more fully perceived by the angels than the greatest is by himself.

 

이런 이야기는 정말 믿어지지 않으시겠지만 백 프로 사실입니다. This is indeed incredible, yet is most true.

 

2021-04-19(D2)-창세기(창3,9-10, AC.226-228),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것'.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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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8-225

 

8그들이 그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And they heard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n the air of the day; and the man and his wife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n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창3:8)

 

 

218.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는 그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느끼게 한 내면의 소리를 상징합니다. 이 소리는 그들이 전에 소유했던 퍼셉션 가운데 아직 남아 있던 나머지입니다.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signified an internal dictate which caused them to feel afraid, this dictate being the residue of the perception which they had possessed;

 

그 날 바람이 불 때’는 교회가 아직 약간의 퍼셉션을 갖고 있던 기간을 가리킵니다.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denoted a period when the church still possessed some residue of perception;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는 그 소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치 악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그러듯 말입니다.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God” is to fear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동산 나무 사이에’는, 그들이 자신들을 숨긴 곳이지요, 자연적 선을 상징합니다. by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in which they hid themselves, is signified natural good;

 

여기 가장 안쪽을 ‘사이에’라 하고, that which is inmost is called the “midst”;

 

나무’는, 앞서 살핀 대로, 퍼셉션을 가리킵니다. the “tree” denotes perception as before;

 

그런데 이제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기 때문에, 마치 유일하게 남은 것처럼 나무를 단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but because there was little perception remaining, the tree is spoken of in the singular number, as if there were only one remaining.

 

 

219.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가 그들이 두려워한 내면의 소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은 말씀에 나오는 ‘소리’가 상징하는 것을 보면 분명합니다. 말씀에서 ‘여호와의 소리’는 말씀 그 자체, 신앙의 교리, 양심이나 내적으로 주의하기, 그리고 또한 그렇게 이어지는 모든 책망을 지적하기 위해 사용되곤 합니다. That by the “voice of Jehovah God going to itself in the garden” is meant an internal dictate of which they were afraid,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voice” in the Word, where the “voice of Jehovah” is used to designate the Word itself, the doctrine of faith, conscience or a taking notice inwardly, and also every reproof thence resulting;

 

그래서 천둥소리들을 ‘여호와의 소리’라고 하는데요, 요한계시록입니다. whence it is that thunders are called the “voices of Jehovah,” as in John:

 

사자가 부르짖는 것 같이 큰 소리로 외치니 그가 외칠 때에 일곱 우레가 그 소리를 내어 말하더라 The angel cried with a loud voice, as a lion roareth, and when he had cried seven thunders uttered their voices, (계10:3)

 

그때 외적, 내적 둘 다인 어떤 소리였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denoting that there was then a voice both external and internal.

 

다시, Again: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의 나팔을 불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그의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하나님의 그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In the days of the voice of the seventh angel the mystery of God shall be consummated. (계10:7)

 

시편입니다. In David:

 

32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33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Sing unto God, sing praises unto the Lord, who rideth upon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lo, he shall send out his voice, a voice of strength. (시68:32-33)

 

옛적 하늘들의 하늘’은 태고교회의 지혜를 말합니다. The “heavens of heavens which were of old,” denote the wisdom of the most ancient church;

 

소리’는 계시, 그리고 또한 내면의 소리를 뜻합니다. voice,” revelation, and also an internal dictate.

 

다시, Again:

 

3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4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5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 7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8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 9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 The voice of Jehovah is upon the waters; the voice of Jehovah is in power; the voice of Jehovah is in glory; the voice of Jehovah breaketh the cedars; the voice of Jehovah divideth the flames of fir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wilderness to shake; the voice of Jehovah maketh the hinds to calve and uncovereth the forests. (시29:3-5, 7-9)

 

이사야입니다. And in Isaiah:

 

30여호와께서 그의 장엄한 목소리를 듣게 하시며 혁혁한 진노로 그의 팔의 치심을 보이시되 맹렬한 화염과 폭풍과 폭우와 우박으로 하시리니 31여호와의 목소리에 앗수르가 낙담할 것이며 주께서는 막대기로 치실 것이라 Jehovah shall cause the excellency of his voice to be heard, for through the voice of Jehovah shall Asshur be beaten down. (사30:30-31)

 

 

220. ‘거니시는 소리’는 남아 있는 퍼셉션이 거의 없음을, 또한 혼자여서 아무도 자신에게 귀 기울이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다음 절에 나오는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를 보면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voice going to itself,” is meant that there was but little perception remaining, and that alone as it were by itself and unheard, as is manifest also from the following verse where it is said, “Jehovah called to the man.

 

그래서 이사야에서, So in Isaiah:

 

3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6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The voice of one crying in the wilderness; the voice said, Cry. (사40:3, 6)

 

광야’는 신앙이라는 게 남아 있지 않은 교회입니다. The “wilderness” is a church where there is no faith;

 

외치는 자의 소리’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수태고지(受胎告知), 곧 일반적으로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모든 소식을 말합니다. 거듭나는 사람들에게 있는 내면의 소리처럼 말이지요. the “voice of one crying” is the annunciation of the Lord’s advent, and in general every announcement of his coming, as with the regenerate, with whom there is an internal dictate.

 

 

221. ‘그날 바람이 불 때’가 기간, 곧, 교회에 아직 어느 정도 퍼셉션이 남아 있던 기간을 상징한다는 것이 분명한 것은, ‘’과 ‘’의 상징 때문입니다. That by the “air” or “breath” “of the day” is signified a period when the church had still somewhat of perception remaining,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day” and of “night.

 

태고교회 사람들은 교회의 상태들을 낮과 밤의 때들과 비교했는데, 교회가 아직 빛 가운데 있었을 때를 낮 시간으로 보았고, 이런 이유로, 이 상태가 ‘그날’의 숨 또는 바람으로 비교된 것입니다. 자기들이 저녁의 상태에 있음을 알 수 있을 만큼의 퍼셉션이 아직 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the states of the church to the times of the day and of the night, to the times of the day when the church was still in light, wherefore this state is compared to the breath or air “of the day,” because there was still some remnant of perception by which they knew that they were fallen.

 

주님은 또한 신앙의 상태를 ‘’으로, 신앙이 없는 상태를 ‘’으로 부르십니다. The Lord also calls the state of faith “day,” and that of no faith “night”;

 

요한복음입니다. as in John: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I must work the works of him that sent me, while it is day; the night cometh when no man can work. (요9:4)

 

같은 이유로, 사람의 거듭남의 상태들을 창세기 1장에서 ‘날들’이라 하였습니다. Th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were for the same reason called “days” in chapter 1.

 

 

222.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가 악을 자각하는 사람들이 흔히들 그러듯 그 내면의 소리를 두려워함을 의미하는 것은, 그들의 대답인 10절 말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를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o “hide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means to be afraid of the dictate, as is wont to be the case with those who are conscious of evil, is evident from their reply (verse 10): “I heard thy voice in the garden, and I was afraid because I was naked.

 

여호와의 낯’ 혹은 주님의 얼굴은 자비, 평강 및 모든 선입니다. 다음 축복의 말씀들을 보면 분명한 것처럼 말입니다. The “face of Jehovah,” or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as is clearly evident from the benediction:

 

25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Jehovah make his faces to shine upon thee, and be merciful unto thee; Jehovah lift up his faces upon thee, and give thee peace. (민6:25-26)

 

시편에서는, And in David: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God be merciful unto us, and bless us, and cause his faces to shine upon us. (시67:1)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There be many that say, Who will show us any good? Jehovah, lift thou up the light of thy faces upon us. (시4:6)

 

그래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자비를 가리켜 ‘자기 앞의 사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The mercy of the Lord is therefore called the “angel of faces,” in Isaiah:

 

7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의 찬송을 말하며 그의 사랑을 따라, 그의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그가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하여금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의 사랑과 그의 자비로 그들을 구원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I will make mention of the mercies of Jehovah; he hath requited them according to his mercies, and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his mercies; and he became their savior. In all their affliction he was afflicted, and the angel of his faces saved them; in his love and in his pity he redeemed them. (사63:7-9)

 

 

223. ‘주의 낯’은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이시 때문에, 분명한 것은, 주님은 만물을 향해 자비로우시며, 결코 그 어느 누구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고, As the “face of the Lord” is mercy, peace, and every good, it is evident that he regards all from mercy, and never averts his countenance from any;

 

오히려 사람입니다. 악 가운데 있을 때, 얼굴을 돌리는 자는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과, but that it is man, when in evil, who turns away his face, as is said by the Lord in Isaiah: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Your iniquities have separated between you and your God, and your sins have hid his face from you; (사59:2)

 

그리고 여기 ‘그들이 자기들이 벗었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지라’를 보면 말이지요. and here, “they hid themselves from the face of Jehovah, because they were naked.

 

 

224. 퍼셉션을 가진 사람들이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자비, 평화, 그리고 모든 선, 혹은 ‘여호와의 얼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양심을 가진 사람들 역시 방식은 다르지만 같습니다. 이것들은 늘 자비롭게 작동하지만, 사람의 상태에 따라 수용되는 정도가 달라집니다. Mercy, peace, and every good, or the “faces of Jehovah,” are the cause of the dictate with those who have perception, and also, although in a different manner, with those who have conscience, and they always operate mercifully, but are received according to the state in which the man is.

 

이 사람의 상태, 곧 태고교회의 이 후손의 상태는 일종의 자연적 선이었습니다. The state of this man, that is, of this posterity of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ne of natural good;

 

이렇게 자연적 선 가운데 있는 그들은 자신들이 벌거벗었다는 이유로 두려워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주님 앞에 자신들을 감추는 그런 캐릭터입니다. and they who are in natural good are of such a character that they hide themselves through fear and shame because they are naked;

 

반면, 이 자연적 선이 고갈된 사람들은 자신들을 숨길 줄 모릅니다. 그들은 전혀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while such as are destitute of natural good do not hide themselves, because they are insusceptible of shame;

 

예레미야입니다. concerning whom, in Jeremiah 8:12–13. (See above, n. 217.)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렘8:12-13)

 

 

225. ‘동산 나무 사이에’는 그 안에 ‘나무’라 부르는 어떤 퍼셉션이 있는 자연적 선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동산’이 전에 천적 인간이 거주했던 곳이었음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midst of the tree of the garden” signifies natural good, in which there is some perception which is called a “tree,” is also evident from the “garden” in which the celestial man dwelt;

 

모든 선과 진리를 가리켜 ‘동산’이라고 합니다. 그곳을 경작하는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기 때문입니다. for everything good and true is called a “garden,” with a difference according to the man who cultivates it.

 

선은 그 가장 안쪽이 천적이지 않으면 선이 아닙니다. 그곳으로부터이거나 그곳을 통해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퍼셉션이 나옵니다. Good is not good unless its inmost is celestial, from which, or through which, from the Lord, comes perception.

 

이 가장 안쪽을 가리켜 ‘사이’라 하며, 여기서든 말씀 어디에서든 또한 같습니다. This inmost is here called the “midst,” as also elsewhere in the Word.

 

2021-04-18(D1)-창세기(창3,8, AC.218-225),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 an internal dictate'.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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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217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3:7)

 

 

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는 그들이 어떤 내적 직관을 통해, ‘자기들이 벗은 줄을’, 즉, 더 이상 전처럼 순진함이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signifies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from an interior dictate, that they were “naked,” that is,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212. ‘눈이 밝아져’가 일종의 내적 직관을 상징하는 것임은 말씀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들, 가령, 발람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그 구절에서 발람은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나서는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민24:3, ※ 이 부분을 왜 ‘감았던’으로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른 번역은 ‘’입니다.)라고 합니다.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And he lifted up his enunciation, and said, Balaam the son of Beor has said, and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has said; (민24:3)

 

그리고 요나단인데요, 그는 벌집의 꿀을 조금 맛본 후, 그것, 곧, 아버지 사울의 명령이 악함을 직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즉, 내적 시야가 열려 전엔 몰랐던 것을 이젠 보게 되었다.” 라고 말이지요.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삼상14:29)

 

더욱이 말씀에서 ‘’은 종종 이해력과, 거기서 나오는 내적 직관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됩니다. 시편입니다. 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시13:3)

 

여기 ‘’은 이해력을 가리킵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에스겔에서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겔12:2)라 하십니다.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Son of man, thou dwellest in the midst of a rebellious house,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they have ears to hear, and hear not; for a rebellious house are they. (겔12:2)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사6:10)

 

위 말씀은, 그들로 소경이 되게 해야지 안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모세 또한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So Moses said to the people,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신29:4)

 

여기서 ‘마음’은 의지를, ‘’은 이해력을 각각 가리킵니다.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이사야에서는 주님을 가리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사42:7)라 하십니다.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to open the blind eyes; to bring the bound out from the dungeon; and from the prison house those that dwell in darkness. (사42:7)

 

역시 같은 선지서에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라 하셨습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And in that day shall the deaf hear the words of the book; and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사29:18)

 

 

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는 그들이 더 이상 전처럼 순진함이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상징하는데요, 이것은 앞장 마지막 구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를 보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그들이 벌거벗었으므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로 읽고, 순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By “knowing that they were naked” is signified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themselves to be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as is evident from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where it is said,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and where it may be seen that “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 signifies to be innocent.

 

그들의 ‘부끄러워함’이 상징하는 것은 오히려 정반대인데요, 본문 7절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하는 부분 때문입니다. The contrary is signified by their “being ashamed,” as in this verse, where it is said that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

 

순진함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은 일종의 부도덕함이요, 창피함입니다. 그것엔 악을 생각함이라는 의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은 수치스럽고 악한 그런 종류의 일에 사용되며, 전도된 교회를 서술할 때 사용됩니다. 에스겔입니다. For this reason “nakedness” is used in the Word as a type of disgrace and evil, and is predicated of a perverted church, as in Ezekiel: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겔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겔23:29)

 

계시록에서는 In John: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 (계3:18)

 

그리고 마지막 날에 관하여는 And concerning the last day: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계16:15)

 

신명기에서는 In Deuteronomy: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If a man hath found some nakedness in his wife,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신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봉사할 때, 베로 속바지를 입어 하체를 가리도록, 안 그러면 죄를 짊어진 채 죽는다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aron and his sons were commanded to have linen breeches when they came to the altar, and to minister, 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42And thou shalt make for them breeches of linen to cover the flesh of nakedness; from the loins and even to the thighs they shall be. 43And they shall be upon Aaron, and upon his sons, when they come in to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or when they approach the altar to minister in the holiness; lest they bear iniquity, and die; it is a statute of an age for him and for his seed after him. (출28:42-43)

 

 

214. 그들을 ‘벌거벗겨진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자신들의 오운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They are called “naked” because left to their own;

 

자신들의 오운, 곧 자기 자신들만 남은 사람들은 지성과 지혜, 혹은 신앙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결과적으로, 진리와 선에 관하여 ‘벌거벗겨진 사람들’이며, 이런 이유로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for they who are left to their own, that is, to themselves, have no longer anything of intelligence and wisdom, or of faith, and consequently are “naked” as to truth and good, and are therefore in evil.

 

 

215. 인간의 오운은 악과 거짓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저에게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영들 스스로가 하는 말은 그 말이 무슨 내용이든 모두 악하고 거짓이더라는 사실, 그들이 한 말을 내가 알게 될 때마다 나는 즉시 그것이 거짓임을, 심지어 그들이 자기들이 한 말은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음을 자기들은 정말 완전 납득한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말입니다.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has been made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atever spirits have at any time said from themselves has been so evil and false that whenever it was made known to me that they spoke from themselves I at once knew that it was false, even though while speaking they were themselves so thoroughly persuaded of the truth of what they said as to have no doubt about it.

 

자기 자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The case is the same with men who speak from themselves.

 

또 같은 식으로, 어떤 사람들이 영적, 천적 삶이나 신앙의 일들에 관하여 세상 이성으로 접근하기 시작할 때마다 저는 그들은 의심을 하고 있고, 심지어 부인까지 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관하여 세상 이성으로 접근한다는 건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And in the same way, whenever any persons have begun to reason concerning the thing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or those of faith, I could perceive that they doubted, and even denied, for to reason concerning faith is to doubt and deny.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아 또는 그들의 오운으로 말미암는 것이어서, 그들은 그저 거짓들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결과적으로는 짙은 어둠, 곧 거짓들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들이 이 심연 가운데 있을 때는 아주 작은 것 하나로도 수천의 진리들을 압도할 수가 있는 것이, 마치 눈동자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 한 조각만으로도 온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에 대해 눈을 감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And as it is all from self or their own, they sink into mere falsities, consequently into an abyss of thick darkness, that is, of falsities, and when they are in this abyss the smallest objection prevails over a thousand truths, just as a minute particle of dust in contact with the pupil of the eye shuts out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t contains.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이사야에서 Of such persons the Lord says in Isaiah: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 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 (사5:21)

 

10...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Thy wisdom and thy knowledge, it hath turned thee away, 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 I, and none else besides me; and evil shall come upon thee, 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 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 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 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 of which thou art not aware. (사47:10-1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 [scientia],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 (렘51:17)

 

만든 신상’은 거짓이요, ‘부어 만든 신상’은 악, 곧 인간의 오운 속 악입니다. A “graven image” is the falsity, and a “molten image” the evil, of man’s own.

 

 

216. ‘잎을 엮어는 자신들을 변명하는 것입니다. To “sew leaves together” is to excuse themselves;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이며, the “fig tree” is natural good;

 

치마로 삼았더라는 부끄러워했다는 것입니다. and to “make themselves girdles” is to be affected with shame.

 

이렇게 태고인들은 말했고, Thus spoke the most ancient people,

 

이렇게 그들은 그 교회의 후손을 묘사했습니다. 이 묘사는 그들이 전에 즐거워하던 이노센스 대신 이제는 자연적 선, 곧 그 안에 그들의 악이 숨겨져 있는 그런 선만 소유하게 되었고, and thus they described this posterity of the church, signifying that instead of the innocence they had formerly enjoyed, they possessed only natural good, by which their evil was concealed;

 

그리고 그런 자연적 선 안에 있게 되어 그들이 부끄러워했음을 상징하는 그런 묘사입니다. and being in natural good, they were affected with shame.

 

 

217. 말씀에서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상징하기 위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 오늘날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That the “vine” is used in the Word to signify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is at this day utterly unknown, becaus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 has been lost;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표현들이 있는 곳들에서는 이런 의미를 상징하거나 포함하고 있습니다. nevertheless, wherever these expressions occur, they signify or involve this meaning;

 

주께서 포도원무화과나무와 관련된 비유들에서 하신 말씀들 또한 그렇습니다. as also in what the Lord spoke in parables concerning a “vineyard” and a “fig tree”;

 

마태복음입니다. as in Matthew: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Jesus seeing a fig tree in the way, came to it, but found nothing thereon save leaves only, and he said unto it, Let no fruit grow on thee henceforward forever; and presently the fig tree withered away, (21:19)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지상에서는 그 어떤 선도, 심지어 자연적 선 조차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by which is meant, that no good, not even natural good, was to be found upon the earth.

 

예레미야에 나오는 포도나무무화과나무역시 유사한 의미입니다. Similar is the meaning of the “vine” and “fig tree” in Jeremiah:

 

12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3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을 진멸하리니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을 것이며 무화과나무에 무화과가 없을 것이며 그 잎사귀가 마를 것이라 내가 그들에게 준 것이 없어지리라 하셨나니 Were they ashamed when they had committed abomination? Nay, they were not at all ashamed, and they knew not how to blush; therefore I will surely gather them, saith Jehovah; there shall be no grapes on the vine, nor figs on the fig tree, and the leaf hath fallen, (8:12-13)

 

이 말씀은 모든 선, 곧 영적, 자연적 선 둘 다 사라져버렸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들은 너무나 타락한 나머지 심지어 부끄러워하지도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날, 악 가운데 있어 자기들의 사악함에도 불구, 얼굴이 붉어지기는 커녕 오히려 그걸 자랑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by which is signified that all good, both spiritual and natural, had perished, since they were so depraved as to have lost even the sense of shame, like those at the present day who are in evil, and who, so far from blushing for their wickedness, make it their boast.

 

호세아입니다. In Hosea: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을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을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그들이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가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I found Israel like grapes in the wilderness; I saw your fathers as the first ripe in the fig tree in the beginning. (9:10)

 

요엘서입니다. And in Joel: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 Be not afraid, ye beasts of my fields, for the tree shall bear its fruit, the fig tree and the vine shall yield their strength. (2:22)

 

여기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각각 가리킵니다. The “vine” here denotes spiritual good, and the “fig tree” natural good.

 

2021-04-17(D7)-창세기(창3,7, AC.211-217), '무화과나무 natural good만 남은 사람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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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4-215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214. 그들을 ‘벌거벗겨진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자신들의 오운만 남았기 때문입니다. They are called “naked” because left to their own;

 

자신들의 오운, 곧 자기 자신들만 남은 사람들은 지성과 지혜, 혹은 신앙의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아 결과적으로, 진리와 선에 관하여 ‘벌거벗겨진 사람들’이며, 이런 이유로 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for they who are left to their own, that is, to themselves, have no longer anything of intelligence and wisdom, or of faith, and consequently are “naked” as to truth and good, and are therefore in evil.

 

 

215. 인간의 오운은 악과 거짓 말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저에게는 그동안 다음과 같은 사실로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언제든지 영들 스스로가 하는 말은 그 말이 무슨 내용이든 모두 악하고 거짓이더라는 사실, 그들이 한 말을 내가 알게 될 때마다 나는 즉시 그것이 거짓임을, 심지어 그들이 자기들이 한 말은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음을 자기들은 정말 완전 납득한 것이라고 말하더라도 말입니다. That man’s own is nothing but evil and falsity has been made evident to me from the fact that whatever spirits have at any time said from themselves has been so evil and false that whenever it was made known to me that they spoke from themselves I at once knew that it was false, even though while speaking they were themselves so thoroughly persuaded of the truth of what they said as to have no doubt about it.

 

자기 자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의 경우도 똑같습니다. The case is the same with men who speak from themselves.

 

또 같은 식으로, 어떤 사람들이 영적, 천적 삶이나 신앙의 일들에 관하여 세상 이성으로 접근하기 시작할 때마다 저는 그들은 의심을 하고 있고, 심지어 부인까지 하고 있음을 지각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에 관하여 세상 이성으로 접근한다는 건 의심하고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And in the same way, whenever any persons have begun to reason concerning the things of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or those of faith, I could perceive that they doubted, and even denied, for to reason concerning faith is to doubt and deny.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자아 또는 그들의 오운으로 말미암는 것이어서, 그들은 그저 거짓들 가운데로 가라앉으며, 결과적으로는 짙은 어둠, 곧 거짓들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습니다. 그들이 이 심연 가운데 있을 때는 아주 작은 것 하나로도 수천의 진리들을 압도할 수가 있는 것이, 마치 눈동자 표면에 내려앉은 먼지 한 조각만으로도 온 우주와 그 안에 담긴 모든 것에 대해 눈을 감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And as it is all from self or their own, they sink into mere falsities, consequently into an abyss of thick darkness, that is, of falsities, and when they are in this abyss the smallest objection prevails over a thousand truths, just as a minute particle of dust in contact with the pupil of the eye shuts out the universe and everything it contains.

 

그런 사람에 관해 주님은 이사야에서 Of such persons the Lord says in Isaiah: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Woe unto those who are wise in their own eyes, and intelligent before their own faces. (사5:21)

 

10...네 지혜와 네 지식이 너를 유혹하였음이라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나뿐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였으므로 11재앙이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그 근원을 알지 못할 것이며 손해가 네게 이르리라 그러나 이를 물리칠 능력이 없을 것이며 파멸이 홀연히 네게 임하리라 그러나 네가 알지 못할 것이니라 Thy wisdom and thy knowledge, it hath turned thee away, and thou hast said in thine heart, I, and none else besides me; and evil shall come upon thee, thou shalt not know from whence it riseth, and mischief shall fall upon thee, which thou shalt not be able to expiate, and vastation shall come upon thee suddenly, of which thou art not aware. (사47:10-11)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금장색마다 자기가 만든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Every man is made stupid by knowledge [scientia], every founder is confounded by the graven image, for his molten image is falsehood, neither is there breath in them. (렘51:17)

 

만든 신상’은 거짓이요, ‘부어 만든 신상’은 악, 곧 인간의 오운 속 악입니다. A “graven image” is the falsity, and a “molten image” the evil, of man’s own.

 

2021-04-16(D6)-창세기(창3,7, AC.214-215), '벗은 상태가 된 사람들의 영적 비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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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11-213

 

7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And the eyes of them both were opened, and they knew that they were naked; and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made themselves girdles. (창3:7)

 

 

211. 그들의 ‘눈이 밝아져’는 그들이 어떤 내적 직관을 통해, ‘자기들이 벗은 줄을’, 즉, 더 이상 전처럼 순진함이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Their “eyes being opened” signifies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from an interior dictate, that they were “naked,” that is,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212. ‘눈이 밝아져’가 일종의 내적 직관을 상징하는 것임은 말씀에 나오는 유사한 표현들, 가령, 발람이 자신을 가리켜 말하는 데를 보면 분명합니다. 그 구절에서 발람은 전능자의 환상을 보고 나서는 자신을 가리켜 ‘눈을 감았던 자’(민24:3, ※ 이 부분을 왜 ‘감았던’으로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바른 번역은 ‘’입니다.)라고 합니다. That by having the “eyes opened” is signified an interior dictate is evident from similar expressions in the Word, as from what Balaam says of himself, who in consequence of having visions calls himself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Num. 24:3)

 

그가 예언을 전하여 말하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And he lifted up his enunciation, and said, Balaam the son of Beor has said, and the man whose eyes are opened has said; (민24:3)

 

그리고 요나단인데요, 그는 벌집의 꿀을 조금 맛본 후, 그것, 곧, 아버지 사울의 명령이 악함을 직관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즉, 내적 시야가 열려 전엔 몰랐던 것을 이젠 보게 되었다.” 라고 말이지요.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1 Sam. 14: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And from Jonathan, who when he tasted of the honeycomb and had a dictate from within that it was evil, said that his “eyes saw,” that is, were enlightened, so that he saw what he knew not. (삼상14:29)

 

더욱이 말씀에서 ‘’은 종종 이해력과, 거기서 나오는 내적 직관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됩니다. 시편입니다. Moreover in the Word, the “eyes” are often used to denote the understanding, and thus an interior dictate therefrom, as in David: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Lighten mine eyes, lest I sleep the sleep of death (시13:3)

 

여기 ‘’은 이해력을 가리킵니다. where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에스겔에서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겔12:2)라 하십니다. So in Ezekiel, speaking of those who are not willing to understand,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겔12:2)

 

인자야 네가 반역하는 족속 중에 거주하는도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하나니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임이라 Son of man, thou dwellest in the midst of a rebellious house, who have eyes to see, and see not; they have ears to hear, and hear not; for a rebellious house are they. (겔12:2)

 

이사야입니다. In Isaiah: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Shut their eyes, lest they see with their eyes, (사6:10)

 

위 말씀은, 그들로 소경이 되게 해야지 안 그러면 그들이 이해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denotes that they should be made blind, lest they should understand.

 

모세 또한 백성들에게 말했습니다. So Moses said to the people,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Jehovah hath not given you a heart to know, and eyes to see, and ears to hear, (신29:4)

 

여기서 ‘마음’은 의지를, ‘’은 이해력을 각각 가리킵니다. where “heart” denotes the will, and “eyes” denote the understanding.

 

이사야에서는 주님을 가리켜,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사42:7)라 하십니다. In Isaiah it is said of the Lord, that “he should open the blind eyes.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to open the blind eyes; to bring the bound out from the dungeon; and from the prison house those that dwell in darkness. (사42:7)

 

역시 같은 선지서에서,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사29:18)라 하셨습니다. And in the same prophet: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그 날에 못 듣는 사람이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에서 맹인의 눈이 볼 것이며 And in that day shall the deaf hear the words of the book; and the eyes of the blind shall see out of thick darkness, and out of darkness. (사29:18)

 

 

213.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는 그들이 더 이상 전처럼 순진함이 아닌, 악 가운데 있음을 알게 되었고, 시인하게 되었음을 상징하는데요, 이것은 앞장 마지막 구절,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2:25)를 보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걸 ‘그들이 벌거벗었으므로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로 읽고, 순진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By “knowing that they were naked” is signified their knowing and acknowledging themselves to be no longer in innocence as before, but in evil, as is evident from the last verse of the preceding chapter, where it is said, “and they were both naked, the man and his wife, and were not ashamed,” and where it may be seen that “not to be ashamed because they were naked” signifies to be innocent.

 

그들의 ‘부끄러워함’이 상징하는 것은 오히려 정반대인데요, 본문 7절에,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하는 부분 때문입니다. The contrary is signified by their “being ashamed,” as in this verse, where it is said that they “sewed fig leaves together, and hid themselves”;

 

순진함이 전혀 없는 곳에서는 벌거벗음은 일종의 부도덕함이요, 창피함입니다. 그것엔 악을 생각함이라는 의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for where there is no innocence, nakedness is a scandal and disgrace, because it is attended with a consciousness of thinking evil.

 

이런 이유로, 말씀에서 ‘벌거벗음’은 수치스럽고 악한 그런 종류의 일에 사용되며, 전도된 교회를 서술할 때 사용됩니다. 에스겔입니다. For this reason “nakedness” is used in the Word as a type of disgrace and evil, and is predicated of a perverted church, as in Ezekiel:

 

네가 어렸을 때에 벌거벗은 몸이었으며 피투성이가 되어서 발짓하던 것을 Thou wast naked and bare, and trampled on in thy blood. (겔16:22)

 

그들이 너를 벌거벗은 몸으로 두어서 네 벗은 몸을 드러낼 것이라 They shall leave her naked and bare, and the nakedness shall be uncovered. (겔23:29)

 

계시록에서는 In John: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 I counsel thee to buy of me white raiment that thou mayest be clothed, and that the shame of thy nakedness do not appea. (계3:18)

 

그리고 마지막 날에 관하여는 And concerning the last day:

 

보라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Blessed is he who watcheth, and keepeth his garments, lest he walk naked and they see his shame. (계16:15)

 

신명기에서는 In Deuteronomy:

 

사람이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줄 것이요 If a man hath found some nakedness in his wife, let him write her a bill of divorcement. (신24:1)

 

같은 이유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은 제단에 나아가 봉사할 때, 베로 속바지를 입어 하체를 가리도록, 안 그러면 죄를 짊어진 채 죽는다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For the same reason Aaron and his sons were commanded to have linen breeches when they came to the altar, and to minister, to “cover the flesh of their nakedness, lest they should bear iniquity, and die.

 

42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속바지를 만들어 허리에서부터 두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하라 43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들을 입어야 죄를 짊어진 채 죽지 아니하리니 그와 그의 후손이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 42And thou shalt make for them breeches of linen to cover the flesh of nakedness; from the loins and even to the thighs they shall be. 43And they shall be upon Aaron, and upon his sons, when they come in to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or when they approach the altar to minister in the holiness; lest they bear iniquity, and die; it is a statute of an age for him and for his seed after him. (출28:42-43)

 

2021-04-15(D5)-창세기(창3,7, AC.211-213), '눈이 밝아져, 벗은 줄을 알고'.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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