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There were Nephilim in the earth in those days; and most especially after the sons of God went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y bare to them; the same became mighty men, who were of old, men of renown. (창6:4)

 

 

580. ‘네피림’은, ‘아, 나는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아, 나는 얼마나 탁월한 사람인가...’ 하는 신념(persuasion)과 망상(delusions)에 사로잡혀, 거룩하거나 참된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긴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는, 이런 일이 그들이 신앙에 관한 가르침을 그들의 갈망(yearnings)과 욕구(appetites)에 잠기게 하여, 거짓된 것을 신념화했을 때 일어났음을 말합니다. ‘그들은 용사라’는 그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는 전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By “Nephilim” are signified those who through a persuasion of their own loftiness and preeminence mad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and especially after the sons of God went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y bare to them” signifies that this occurred when they immersed the doctrinal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and formed persuasions of what is false; they are called “mighty men” from their love of self; “of old, men of renown” signifies that there had been such before.

 

 

581. ‘네피림’ 하면, ‘아, 나는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가, 아, 나는 얼마나 탁월한 사람인가...’ 하는 신념과 망상에 사로잡혀, 거룩하거나 참된 어떤 것도 하찮게 여긴 사람들을 말한다는 사실은, 앞서 말한 것과 뒤에 이어지는 내용, 즉,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라는 말씀을 통해, 그들이 신앙에 관한 가르침을 그들의 갈망과 욕구에 잠기게 하여, 거짓된 것을 신념화하였음을 상징한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by the “Nephilim” are signified those who through a persuasion of their own loftiness and preeminence mad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appears from what precedes and what follows, namely, that they immersed the doctrinal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signified by the “sons of God going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ir bearing unto them.

 

그들 자신 및 그들이 가진 환상과 관련된 신념과 망상은 그와 관련된 것들이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증가하다가 결국 되돌릴 수 없는, 돌이킬 수 없는 데까지 갑니다. 이런 상태에서, 이번엔 여기다 신앙의 교리들, 신앙적인 가르침들까지 보태어지면 원리에 가까운 가장 강력한 엉뚱한 종교적 신념들이 생겨나고, 이것이 하나의 입장이 되면, 이번에는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의 가치를 무시해 버리고 마는 상태가 되는데, 이 상태가 바로 ‘네피림’인 것입니다. Persuasion concerning self and its fantasies increases also according to the multitude of things that enter into it, till at length it becomes indelible; and when the doctrinals of faith are added thereto, then from principles of the strongest persuasion they mak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and become “Nephilim.

 

이 네피림이라는 인종(race)은, 홍수 전에 살았는데, 자기들이 가진 끔찍한 환상, 망상으로 모든 영들을 질식시켜 죽이는 그런 인종입니다. (cf. AC.562-563) 이들에게서 쏟아져나오는 이 망상은 질식시키는 독가스 같은 것인데, 영들은 여기에 한 번 걸리면 생각하는 능력을 완전히 빼앗겨 거의 반 죽은 상태가 되지요. 주께서 세상에 오셔서 이런 독을 가진 인종으로부터 영들의 세계를 해방하여 주지 않으셨으면, 거기에 아무도 존재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주님으로 말미암아 영들에 의해 인도함을 받는 인류는 사라졌을 것입니다. That race, which lived before the flood, is such that they so kill and suffocate all spirits by their most direful fantasies (which are poured forth by them as a poisonous and suffocating sphere) that the spirits are entirely deprived of the power of thinking, and feel half dead; and unless the Lord by his coming into the world had freed the world of spirits from that poisonous race, no one could have existed there, and consequently the human race, who are ruled by the Lord through spirits, would have perished.

 

그래서 그들은 지금 지옥 왼쪽 발뒤꿈치 아래, 안개 속 육중하고 거대한 바위 밑에 격리되어, 그곳을 빠져나갈 어떤 시도도 할 수 없습니다. They are therefore now kept in a hell under as it were a misty and dense rock, under the heel of the left foot, nor do they make the slightest attempt to rise out of it.

 

그래서 영들의 세계는 이 가장 위험한 무리로부터 안전합니다. 이들에 관한, 그리고 이런 종류의 신념, 망상이 왜 독과 같은 것인지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1265-1272) Thus is the world of spirits free from this most dangerous crew, concerning which and its most poisonous sphere of persuasions,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네피림’이라 하는 자들이 있었고, 이들은 거룩하고 참된 모든 것을 하찮게 여겼습니다. These are they who are called “Nephilim,” and who make light of all things holy and true.

 

말씀에 그들에 대한 언급이 더 나오는데요, 그들의 후손은 ‘아낙 족속’으로, ‘르바임’으로 불렸습니다. Further mention is made of them in the Word, but their descendants were called “Anakim” and “Rephaim.

 

그들을 ‘아낙 자손’으로 불렀음이 모세의 글에 나옵니다. That they were called “Anakim” is evident from Moses: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There we saw the Nephilim, the sons of Anak, of the Nephilim, and we were in our own eyes as grasshoppers, and so we were in their eyes. (민13:33)

 

그들을 또한 ‘르바임’으로도 불렀음이 모세의 글에 나옵니다. That they were called “Rephaim” appears also from Moses:

 

10이전에는 에밈 사람이 거기 거주하였는데 아낙 족속 같이 강하고 많고 키가 크므로 11그들을 아낙 족속과 같이 르바임이라 불렀으나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에밈이라 불렀으며 The Emim dwelt before in the land of Moab, a people great, and many, and tall, as the Anakim, who also were accounted Rephaim, as the Anakim, and the Moabites call them Emim. (신2:10-11)

 

네피림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 반면, 르바임은 계속 나오는데, 선지자들은 르바임을 바로 위에서 다룬 저런 사람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입니다. The Nephilim are not mentioned any more, but the Rephaim are, who are described by the prophets to be such as are above stated; as in Isaiah:

 

아래의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여 네가 오는 것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의 모든 영웅을 너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Hell low down has been in commotion for thee, to meet thee in coming, it hath stirred up the Rephaim for thee, (사14:9)

 

르바임 같은 영들이 거주하는 지옥을 설명합니다. speaking of the hell which is the abode of such spirits.

 

다시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그들은 죽었은즉 다시 살지 못하겠고 사망하였은즉 일어나지 못할 것이니 이는 주께서 벌하여 그들을 멸하사 그들의 모든 기억을 없이하셨음이니이다 Thy dead shall not live, the Rephaim shall not arise, because thou hast visited and destroyed them, and made all their memory to perish, (사26:14)

 

여기서도 그들의 지옥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들은 그곳에서 다시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where also their hell is referred to, from which they shall no more rise again.

 

계속 이사야입니다. In the same: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 Thy dead shall live, my corpse, they shall rise again; awake and sing, ye that dwell in the dust, for the dew of herbs is thy dew; but thou shalt cast out the land of the Rephaim; (사26:19)

 

르바임의 땅’은 위에서 말한 지옥입니다. the land of the Rephaim” is the hell above spoken of.

 

다윗의 글입니다. In David:

 

주께서 죽은 자에게 기이한 일을 보이시겠나이까 유령들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 Wilt thou show a wonder to the dead? Shall the Rephaim arise, shall they confess to thee? (시88:10)

 

르바임의 지옥에 대해 같은 뜻으로 말하면서, 그들은 절대 일어나지 못하며, 그들의 아주 끔찍한 독과 같은 망상으로 영들의 세계를 들끓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speaking in like manner concerning the hell of the Rephaim, and that they cannot rise up and infest the sphere of the world of spirits with the very direful poison of their persuasions.

 

그러나 주님은 인류가 더 이상 그런 끔찍한 망상과 신념에 푹 빠지는 일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But it has been provided by the Lord that mankind should no longer become imbued with such dreadful fantasies and persuasions.

 

홍수 전을 살았던 사람들은 자신들로 하여금 그런 뒤틀린 생각들을 흡수하게 했던 본성(nature)과 정신(genius)을 가졌던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으나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cf. AC.927) 밝힐 것입니다. Those who lived before the flood were of such a nature and genius that they could be imbued, for a reason as yet unknown,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582.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After that the sons of God came in unto the daughters of men, and they bare to them.

 

이 말씀은, 그들이 신앙에 대한 가르침들을 자신들의 타락한 갈망을 가지고 합쳐버린 바로 그때, 그들은 네피림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런 사실은 위 2절의 내용, 즉,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앙의 가르침들을, ‘딸들’은 갈망을 각각 상징함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y became Nephilim when they had immersed the doctrinals of faith in their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above in verse 2, namely, that the “sons of God” signify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and that “daughters” signify yearnings.

 

그 결과는, 신앙의 거룩한 속성들을 하찮게 여기고, 모독하는 것밖에 없음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 곧 물질만능주의로 되어 있는 인간의 갈망은 거룩하고 참된 것하고는 완전히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The birth thereby produced must needs make light of and profane the holy things of faith, for the yearnings of man, being those of the love of self and of the world, are altogether contrary to what is holy and true.

 

지금은 사람 안에 갈망이 만연합니다. 거룩하고 참되며, 또 그런 걸로 인식되는 무언가가 갈망에 잠기면, 사람은 끝입니다. 갈망은 뿌리뽑히거나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갈망은 모든 생각(idea)에 착 달라붙습니다. 예를 들면, 저세상에서는 생각으로 서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데, 거룩하고 참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모독과 거짓이 그 생각과 결합하고, 이런 이상한 일은 즉시 지각됩니다. Now in man yearnings prevail, so that when what is holy and true, and is acknowledged to be such, is immersed in yearnings, it is all over with the man, for the yearnings cannot be rooted out and separated; they cling to every idea, and in the other life it is ideas that are communicated from one to another, so that as soon as any idea of what is holy and true is brought forth, what is profane and false is joined to it, which is instantly perceived.

 

이런 이유로, 그런 사람들은 당연히 분리되어 지옥으로 던져지게 됩니다. Therefore such persons have to be separated and thrust down into hell.

 

 

583. 네피림을 일컬어 ‘용사’라 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인데, 이것은 말씀 여러 곳에서 그런 사람을 가리켜 ‘용사’라 하는 것으로 보아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입니다. That the Nephilim are called “mighty men” from the love of self, is evident from various passages of the Word, where such are called “mighty”; as in Jeremiah:

 

바벨론의 용사는 싸움을 그치고 그들의 요새에 머무르나 기력이 쇠하여 여인 같이 되며 그들의 거처는 불타고 그 문빗장은 부러졌으며 The mighty ones of Babel have ceased to fight, they sit in their holds, their might faileth, they are become as women, (렘51:30)

 

여기 ‘바벨론의 용사’는 자기 사랑의 덫에 걸린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where the “mighty ones of Babel” denote those who are eaten up with the love of self.

 

같은 예레미야입니다. In the same:

 

칼이 자랑하는 자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어리석게 될 것이며 칼이 용사의 위에 떨어지리니 그들이 놀랄 것이며 A sword is against the liars, and they shall be insane, a sword is against her mighty ones, and they shall be dismayed. (렘50:36)

 

5그들이 놀라 물러가며 그들의 용사는 패하여 황급히 도망하며 뒤를 돌아보지 아니함은 어찜이냐 두려움이 그들의 사방에 있음이로다 6발이 빠른 자도 도망하지 못하며 용사도 피하지 못하고 그들이 다 북쪽에서 유브라데 강가에 넘어지며 엎드러지는도다 9말들아 달려라 병거들아 정신없이 달려라 용사여 나오라 방패 잡은 구스 사람과 붓 사람과 활을 당기는 루딤 사람이여 나올지니라 하거니와 I saw them dismayed, and turning away back, their mighty ones were broken in pieces, and have been put to flight, and looked not back; fear was round about; the swift shall not flee away, nor the mighty one escape; come up, ye horses, and rage, ye chariots, and let the mighty ones go forth, Cush, Put, the Lydians, (렘46:5-6, 9)

 

사람을 속이는 합리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speaking of persuasion from reasonings.

 

계속해서 Again:

 

14너희가 어찌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라 하느냐 15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모압이 황폐하였도다 How say ye, We are mighty, and men of strength for war? Moab is laid waste. (렘48:14-15)

 

성읍들이 점령을 당하며 요새가 함락되는 날에 모압 용사의 마음이 산고를 당하는 여인 같을 것이라 The city is taken, and the strongholds, it has been seized, and the heart of the mighty men of Moab in that day is become as the heart of a woman in her pangs. (렘48:41)

 

같은 뜻으로 말씀하시기를 In like manner it is said:

 

에돔 용사의 마음이 진통하는 여인 같이 되리라 하시니라 The heart of the mighty ones of Edom. (렘49:22)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Jehovah hath redeemed Jacob, and hath avenged him from the hand of him that was mightier than he, (렘31:11)

 

여기 ‘강한 자’는 다른 말, 히브리 말 표현입니다. where “mighty” is expressed by another term.

 

네피림이었던 아낙 자손이 ‘강대한 나라들’이었음은 모세의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 That the Anakim, who were of the Nephilim, were called “mighty ones” is evident from Moses:

 

1이스라엘아 들으라 네가 오늘 요단을 건너 너보다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니 그 성읍들은 크고 성벽은 하늘에 닿았으며 2크고 많은 백성은 네가 아는 아낙 자손이라 그에 대한 말을 네가 들었나니 이르기를 누가 아낙 자손을 능히 당하리요 하거니와 Thou passest over Jordan today, to go in to possess nations greater and more numerous than thyself, cities great and fortified to heaven, a people great and tall, the sons of the Anakim, whom thou knowest, and of whom thou hast heard; who shall stand before the sons of Anak? (신9:1-2)

2021-08-10(D3)-매일예배(AC.580-583, 창6,4), '네피림'.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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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XG9mhStcx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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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창6:3)

 

 

577. ‘열둘’이라는 숫자가 신앙, 혹은 사랑의 속성들과 그 속성에서 대략적으로 파생된 신앙을 상징한다는 사실은 말씀 여러 구절, 곧 여러 현상을 통해 또한 확인할 수 있는데요, 가령, 야곱의 ‘열두’ 아들과 그들의 이름이라든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든지, 그리고 주님의 ‘열두’ 제자 등등... 그러나 이와 관련된 내용은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나중에(cf. AC.3858, 3913:1), 특히 창세기 29장과 30장을 다룰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That the number “twelve” signifies faith, or the things of love and the derivative faith in one complex, might also be confirmed by many passages from the Word, as from the “twelve” sons of Jacob and their names, the “twelve” tribes of Israel, and the Lord’s “twelve” apostles; but concerning these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especially in Genesis 29 and 30.

 

 

578. 이 숫자들을 살핀 것만으로도 주님의 말씀은 그 심장과 내면 깊숙이 무엇이 들어 있으며, 육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는 얼마나 많은 아케이나가 그 안에 봉인되어 있는지가 분명해졌습니다. From these numbers alone it is evident what the Word of the Lord contains in its bosom and interior recesses, and how many arcana are concealed therein which do not at all appear to the naked eye.

 

말씀 어디서나 그렇습니다. 모든 말씀에 다 그런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And so it is everywhere: there are like things in every word.

 

 

579. 여기서 다룬 홍수 전 세대의 경우, 리메인스가 아주 적거나 거의 없었다는 사실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cf. AC.660, 661:2) 그들에 대해 주로 다루게 될 때 말씀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리메인스가 전혀 보존될 수 없었기 때문에 ‘노아’라는 새 교회의 출현이 여기 예언된 것인데요, 이들은 리메인스를 가지고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들에 관하여도 역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635, 737, 1050) That with the antediluvians here treated of there were few and almost no remains, will be manifest from w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will be said of them hereafter; and as no remains could be preserved among them, it is here foretold of the new church called “Noah” that it should have remains; concerning which also,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2021-08-09(D2)-매일예배(AC.577-579, 창6,3), '열둘, 숫자에 담긴 아케이나, 리메인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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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2KERgcf8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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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8(D1)-제9권32호통415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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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And the sons of God saw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hey took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창6:2)

 

 

569. ‘하나님의 아들들’은 신앙의 교리, 가르침(teachings)을 상징합니다. By the “sons of God” are signifi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여기 나오는 ‘딸들’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갈망, 욕망(cravings)을 상징합니다. By “daughters,” here as before, yearnings.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는 신앙의 가르침과 사람의 욕망 둘을, 그 욕망이 무엇이든, 어떤 종류든 상관없이 이 둘을 단단히 묶었다는 뜻입니다. By the “sons of God seeing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aking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is signified that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conjoined themselves with yearnings, in fact with any yearnings whatever.

 

※ 여기 둘을 묶었다, 결합하게 했다, 또는 잠기게 했다 하는 표현의 뜻은, 신앙의 교리, 신학, 가르침을 자신의 갈망, 자신의 욕구, 욕망을 해소, 해결하는 방편으로 이용했다는 의미입니다. 신앙의 진리, 곧 주님의 말씀은 그 자체가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이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순전함으로 따라야 하는데, 이들은 그럴 마음은 전혀 없고, 대신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만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주님의 것에 사사로이 사람의 것을 섞는 신성모독입니다. 이것은 전형적인 자기 사랑의 모습이며, 결코 주님 사랑이 아닙니다.

 

 

570.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의 가르침을 상징한다는 것은, ‘아들들’의 상징을 보면 분명합니다. (바로 위, 그리고 앞 장 4절, ‘아들들’은 교회의 진리를 상징한다는 내용 참조, AC.489) That by the “sons of God” are signified doctrinal things of fait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sons” (concerning which just above, and also in the preceding chapter, verse 4, where “sons” signify the truths of the church).

 

교회의 진리는 교리 형태의 가르침으로 되어 있으며, 본 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 진리를 참으로 여겼습니다. 태고인들을 통해 구전(口傳)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진리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부르는 것이며, 한편으로는, 갈망을 가리켜 ‘사람의 딸들’이라 부르기 때문에, 비교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기도 합니다. The truths of the church are doctrinal things, which regarded in themselves were truths because those here treated of had them by tradition from the most ancient people, and therefore they are called the “sons of God”; they are so called also relatively, because yearnings are called the “daughters of man.

 

본 절에서는 이 교회 사람들의 퀄러티(캐릭터)를 설명하고 있는데요, 즉, 이들은 본래 거룩했던, 교회의 진리를 자기들의 갈망으로 잠기게 했고, 그렇게 더럽혔으며,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기들이 강하게 붙들고 있는 원리들을 더욱 더 신념으로 확고하게 삼았습니다. The quality of the members of this church is here described, namely, that they immersed the truths of the church, which were holy, in their yearnings, and thereby defiled them; and in this way they confirmed the principles of which they were so strongly persuaded.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는데요,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것을 관찰하면 말입니다. 우리가 어떤 주제에 관해 자신을 확신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그것이 진리임을 모든 그럴듯한 것들을 가지고, 심지어는 주님의 말씀으로부터도 가지고 와서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채택한 원리들과 신념들에 착 달라붙어 있는 한, 우리는 모든 것을 그것들과 일치시키려 하고 조화시키려 합니다. How this occurred may be easily conceived by anyone, from observing what passes in himself and others: those who persuade themselves in regard to any subject, confirm themselves in such persuasion by everything which they imagine to be true, even by what they find contained in the Word of the Lord; for while they cling to principles which they have received, and have become persuaded of, they make everything favor and assent to them.

 

우리가 우리 자신에 빠져들면 들수록, 우리는 점점 더 완고하게 그 입장을 고수합니다. And the more anyone is under the influence of self-love, the more firmly he holds them.

 

이런 설명이 지금 논의 중인 인종(人種, race)에 딱 맞습니다. 이들에 관해서는, 나중에 주님의 신적 자비, 곧 주님의 허락하심으로, 우리가 그들의 가공할 신념들을 다루게 될 때 말씀드리겠습니다. (cf. AC.573, 580-586a, 607:3, 619-637, 659-662, 792-813) 참 말씀드리기 생소한 것은,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합리적 사고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그랬다면 그들은 그들 주위 영들의 모든 합리적인 능력들을 죄다 죽여버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의 욕망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했습니다. Such was this race, concerning whom of the Lord’s Divine mercy hereafter, when we come to treat of their direful persuasions, which strange to say are such that they are never allowed to flow in by reasonings, but only from yearnings, for otherwise they would kill everything rational in the spirits present.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해집니다. 그것은 그들이 신앙의 가르침들과 그들의 욕망 둘을 하나로, 실제로 어떤 종류의 무슨 욕망이든지, 이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Hence it appears what is signified by the “sons of God seeing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aking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namely, that they conjoin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with their yearnings, in fact with any yearnings.

 

 

571. 사람이 정신 나간 욕망 가운데 신앙의 진리를 침수시키는 그런 캐릭터가 될 때, 그는 진리를 모독하며, 자신에게서 리메인스를 빼앗습니다. 비록 이들 리메인스가 사람 안에 머물지라도 그는 이 리메인스를 양심으로 데리고 가지 못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그는 이미 더럽혀진 사고(思考, thoughts)로 또 다시 리메인스를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대한 신성모독은 일종의 굳은살을 만들어 모든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마치 댐처럼 차단, 흡수해버리고 맙니다. When a man is of such a character that he immerses the truths of faith in his insane yearnings, he then profanes the truths, and deprives himself of remains, which although they remain cannot be brought forth, for as soon as they are brought forth they are again profaned by things that are profane; for profanations of the Word produce as it were a callosity, which causes an obstruction, and absorbs the goods and truths of remains.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훼손하지 않도록 깨어 있어야 합니다. 거짓된 원리, 가정(assumptions)에 사로잡혀있는 사람한테는 진리가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에는 영원한 산 생명이 들어 있습니다. Therefore let man beware of the profanation of the Word of the Lord, which contains the eternal truths wherein is life, although one who is in false principles does not believe that they are truths.

2021-08-07(D7)-토요예배(AC.569-571, 창6,2), '홍수를 자초한 사람들의 퀄러티(캐릭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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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azWW7mOKFA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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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And it came to pass that man began to multiply himself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and daughters were born unto them. (창6:1)

 

 

566. [4] 에스겔에서 In Ezekiel:

 

41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가 흩어진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여러 나라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42내가 내 손을 들어 너희 조상들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고 I will gather you out of the lands wherein ye have been scattered, and ye shall know that I am Jehovah when I shall bring you again into the ground of Israel, into the land for which I lifted up my hand to give it to your fathers, (겔20:41-42)

 

이스라엘 ‘’(ground)은 내적 예배를 상징합니다. 내적 예배가 없는 곳은 여러 ‘나라’(land)라고 합니다. where “ground” signifies internal worship; it is called “land” when there is no internal worship.

 

말라기에서 In Malachi:

 

11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메뚜기를 금하여 너희 토지 소산을 먹어 없애지 못하게 하며 너희 밭의 포도나무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12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I will rebuke him that consumeth for your sakes, and he shall not corrupt for you the fruit of the ground, nor shall the vine be bereaved for you in the field and all nations shall call you blessed, because ye shall be a delightsome land, (말3:11-12)

 

너희 ‘’(land)은 컨테이너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토지’(ground)가 교회, 혹은 교리를 가리킬 때, ‘’(land)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where “land” denotes the container, and therefore it plainly denotes man, who is called “land” when “ground” denotes the church, or doctrine.

 

[5] 모세의 글에서 In Moses:

 

너희 민족들아 주의 백성과 즐거워하라 주께서 그 종들의 피를 갚으사 그 대적들에게 복수하시고 자기 땅과 자기 백성을 위하여 속죄하시리로다 Sing, O ye nations, his people, he will make expiation for his ground, his people, (신32:43)

 

이것은 분명히 이방인들, 곧 유대인이 아닌 나라들의 교회를 상징하며, 그걸 가리켜 자기 ‘’(ground)이라 하고 있습니다. evidently signifying the church of the gentiles, which is called “ground.

 

이사야에서 In Isaiah: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Before the child shall know to refuse the evil and choose the good, the ground shall be forsaken, which thou abhorrest in presence of both her kings, (사7:16)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ground will be forsaken)를 통해 교회, 혹은 신앙에 관한 참된 교리를 위해 준비된 땅이 황폐해질 것을 말하면서, 주님의 강림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that the “ground will be forsaken” denotes the church, or the true doctrine of faith.

 

’(ground)과 ‘’(field)이라는 말들은 곡식 심기와 연결되어 사용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서처럼 말입니다. That “ground” and “field” are so called from being sown with seed is evident; as in Isaiah:

 

23네가 땅에 뿌린 종자에 주께서 비를 주사 땅이 먹을 것을 내며 곡식이 풍성하고 기름지게 하실 것이며 그 날에 네 가축이 광활한 목장에서 먹을 것이요 24밭 가는 소와 어린 나귀도 키와 쇠스랑으로 까부르고 맛있게 한 먹이를 먹을 것이며 Then shall he give rain of thy seed wherewith thou shalt sow the ground; the oxen also and the young asses that labor on the ground. (사30:23-24)

 

그리고 요엘입니다. And in Joel:

 

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The field is laid waste, and the ground hath mourned, because the corn is laid waste. (욜1:10)

 

이런 걸 보면, 히브리말로 ‘아담’이라고 하는 ‘사람’은 ‘토지’(ground)에서 왔으며, 교회를 상징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Hence then it is evident that “man,” who in the Hebrew tongue is called “Adam,” from “ground,” signifies the church.

 

 

567. 참된 신앙에 관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사는 지역 전부를 총체적으로 아울러 교회 지역이라고 합니다. 전에 유대 교회가 있었던 가나안 땅 같은 곳이지요. 지금 기독 교회가 있는 유럽 또한 그렇습니다. 그 외의 지역과 나라들은 교회 지역이 아니며, 이것이 곧 오늘 본문, ‘땅 위’(faces of the ground)의 의미입니다. All that region is called the region of the church where those live who are instructed in the doctrine of true faith; as the land of Canaan, when the Jewish church was there, and Europe, where the Christian church now is; the lands and countries outside of this are not the region of the church, or the “faces of the ground.

 

홍수 전 교회들이 있었던 곳은 에덴동산에서 발원한 강들로 둘러싸인 땅들을 보고도 알 수 있겠는데요, 이 강들은 말씀 여러 곳에서 가나안 땅 경계로 자주 언급된 강들입니다. (cf. 창15:18; 신1:7; 11:24; 수1:4; 왕상5:9) Where the church was before the flood, may also appear from the lands which the rivers encompassed that went forth from the garden of Eden, by which in various parts of the Word are likewise described the boundaries of the land of Canaan;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15:18)

 

방향을 돌려 행진하여 아모리 족속의 산지로 가고 그 근방 곳곳으로 가고 아라바와 산지와 평지와 네겝과 해변과 가나안 족속의 땅과 레바논과 큰 강 유브라데까지 가라 (신1:7)

 

너희의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다 너희의 소유가 되리니 너희의 경계는 곧 광야에서부터 레바논까지와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서해까지라 (신11:24)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수1:4)

 

또 동으로 가서 거주하면서 유브라데 강에서부터 광야 지경까지 다다랐으니 이는 길르앗 땅에서 그 가축이 번식함이라 (대상5:9)

 

그 장소는 또한 이어지는 내용들, 가령, 네피림이 ‘거기에’(in the land) 있었다는 사실과, 그들이 가나안 땅에 거주했다는 민수기 13장 33절 말씀,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에 관한 말씀 등으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and also from what follows concerning the Nephilim that were “in the land”; and that these Nephilim dwelt in the land of Canaan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the sons of Anak: that they were “of the Nephilim” (Num. 13: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13:33)

 

 

568. ‘딸들’(daughters)이 그런 사람의 의지 안에 거주하는 것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갈망, 욕망을 상징한다는 것은, 그동안 ‘자녀들’(sons and daughters) 관련, 앞장에서 다루어 온 내용들(AC.489-491, 창5:4)을 보면 분명하며, 거기서 ‘아들들’(sons)은 진리를, ‘딸들’(daughters)은 선을 각각 상징합니다. That “daughters” signify such things as are of the will of that man, consequently yearnings, is evident from what was said and shown concerning “sons and daughters” in the preceding chapter (Gen. 5:4), where “sons” signify truths, and “daughters,” goods.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딸들’, 혹은 선은 의지에 속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그런 사람이면 그의 인식능력도, 그의 의지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이 ‘자녀들’입니다. Daughters,” or goods, are of the will, but such as a man is, such is his understanding and such his will, thus such are the “sons and daughters.

 

※ 즉, 우리의 지적 능력과 의지가 어떤 모습일지는 우리의 캐릭터가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우리의 ‘자녀들’ 또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다루는 사람은 부패한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은 의지랄 게 없으며, 대신 원색적 욕망만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걸 의지로 여기며, 실제로 그렇게 부릅니다. The present passage treats of man in a corrupt state, who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instead of will, which is supposed by him to be will, and is also so called.

 

어떤 것에 대한 설명은 설명하고 있는 그것의 퀄러티와 일치합니다. 여기서 딸들이 설명하고 있는 사람은 앞서 지금까지 죽 설명해온 대로 부패한 사람입니다. (cf. AC.560, 562-563, 565) What is predicated is in accordance with the quality of the thing whereof it is predicated, and that the man of whom the daughters are here predicated was a corrupt man, has been shown before.

 

딸들’은 의지 안에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선을 위한 게 전혀 없으면, 그때는 갈망(yearnings)을 상징하게 되며, ‘아들들’은 이해하는 능력(understanding) 안에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 진리에 관한 이해가 전혀 없으면, 그때는 환상(fantasies)을 상징합니다. 왜 이런가 하는 것은, 성(sex)의 본성 때문입니다. 여성은 태생적으로 의지나 탐욕(cupidity)이 이해하는 능력을 다스리게 되어 있습니다. The reason why “daughters” signify the things of the will, and, where there is no will of good, yearnings; and why “sons” signify the things of the understanding, and, where there is no understanding of truth, fantasies, is that the female sex is such, and so formed, that the will or cupidity reigns in them more than the understanding.

 

여성의 몸 모든 섬유조직이 다 이런 기질(disposition), 이런 성향이며, 이것이 여성의 본성인 반면, 남성은 지성(intellect) 또는 이성(reason)이 우위를 나타내는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남성의 몸 모든 섬유조직이 다 이런 기질, 이런 성향이며, 이것이 남성의 본성입니다. Such is the entire disposition of their fibers, and such their nature, whereas the male sex is so formed that the intellect or reason rules, such also being the disposition of their fibers and such their nature.

 

두 사람 간 결혼이 그래서 각 사람 안의 의지와 이해하는 능력 간 결혼과 비슷한 것입니다. 오늘날엔 선을 위한 의지는 없고, 대신 탐욕(cupidity)만 있으며, 약간의 지성이나 이성만 가능한데, 이것이 바로 유대 교회에 있는 그 많은 법들이 왜 남편의 특권(prerogative)과 아내의 복종에 관한 것인지 하는 이유가 되겠습니다. Hence the marriage of the two is like that of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in every man; and since at this day there is no will of good, but only cupidity, and still something intellectual, or rational, can be given, this is why so many laws were enacted in the Jewish church concerning the prerogative of the husband [vir], and the obedience of the wife.

2021-08-06(D6)-매일예배(AC.566-568, 창6,1), '땅 위, 딸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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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7KWMMXap4Q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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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And it came to pass that man began to multiply himself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and daughters were born unto them. (창6:1)

 

 

564. 여기 ‘사람’ [호모, homo, man]은 그 시절 존재하던 인류를 상징합니다. By “man” [homo] is here signified the race of mankind existing at that time.

 

땅 위’(faces of the ground)는 교회가 있던 모든 지역을 상징합니다. By the “faces of the ground” is signified all that tract where the church was.

 

여기 ‘딸들’(daughters)은 그 사람의 의지에 속하는 것들, 결과적으로 갈망, 욕망을 상징합니다. By “daughters” are here signified the things appertaining to the will of that man, consequently yearnings.

 

 

565. 여기 ‘사람’(man)은 그 시절 존재하던 인류, 실제로 악하거나 부패했던 인류를 상징한다는 것이 다음 구절들을 보면 나옵니다. That by “man” is here signified the race of mankind existing at that time, and indeed a race which was evil or corrupt, appears from the following passages: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3절)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The evil of man was multiplied on the earth, and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5절)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I will destroy man whom I have created; (7절)

 

그리고 다음 장에서 and in the following chapter

 

21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이 다 죽었으니 곧 새와 가축과 들짐승과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이라 22육지에 있어 그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다 죽었더라 All flesh died that crept upon the earth, and every man, in whose nostrils was the breath of the spirit of lives. (창7:21-22)

 

사람에 관하여는, 주님 홀로 사람이시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AC.49, 162)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천적(天的, celestial) 인간, 혹은 천적 교회들을 일컬어 ‘사람’(man)이라 합니다. (AC.477) Of man it has already been said that the Lord alone is man, and that from him every celestial man, or celestial church, is called “man.

 

그래서 다른 모든 교회도 사람이라 이름하며, 그렇게 모든 사람 또한 그의 신앙이 무엇인지 상관없이 다 그를 짐승과 구별하여 사람이라 합니다. Hence all of other churches are called men; and so is everyone, no matter of what faith, to distinguish him from the brutes.

 

그러나 주님께 속한 리메인스가 아니면, 여전히 사람은 사람이 아니며, 짐승과 구별되지 않습니다. (AC.530, 560) But still a man is not a man, and distinct from the brutes, except by virtue of remains, which are of the Lord.

 

리메인스 덕에 사람은 사람이라 이름하며, 리메인스, 곧 주님께 속한 이 리메인스가 있어 우리가 사람으로 불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람이 전에 얼마나 악했든 지금 우리가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은 리메인스가 없으면, 결코 사람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가장 고약한 짐승이 되기 때문입니다. From these also a man is called man, and inasmuch as he is so called by reason of remains, which belong to the Lord, it is from him that he has the name of man be he ever so wicked, for a man is by no means man, but the vilest of brutes, unless he has remains.

 

 

566. ‘땅 위’(faces of the ground, 地面)는 교회가 있던 모든 지역을 상징한다는 것은 ‘지면’(ground)의 상징을 보면 분명합니다. 말씀에서는 ‘지면’(ground)과 ‘’(earth) 둘 사이 구분을 아주 정확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면’(ground)은 어디서 언급되든지 교회를 상징하거나 교회의 어떤 면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인간 이름의 기원인 ‘아담’(Adam, man)인데, 이 아담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바로 ‘지면’(ground)입니다. ‘’(earth)은 말씀 여러 곳에서 교회가 없거나 교회와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세기 1장이 보기인데요, 거기 보면, 오직 ‘’(earth)만 나옵니다. 아직 교회, 곧, 거듭난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That by the “faces of the ground” is signified all that region where the church was,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for in the Word there is an accurate distinction made between “ground” and “earth”; by “ground” is everywhere signified the church, or something belonging to the church; and from this comes the name of “man,” or “Adam,” which is “ground”; by “earth” in various places is meant where there is no church, or anything belonging to the church, as in the first chapter, where “earth” only is named, because as yet there was no church, or regenerate man.

 

지면’(ground)은 2장에서 처음 언급됩니다. 그때는 교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The “ground” is first spoken of in the second chapter, because then there was a church.

 

유사한 내용이 이곳과 다음 장에 나옵니다. ‘4내가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23지면의 모든 생물을 쓸어버리시니’ 이는 교회가 있었던 지역을 의미합니다. 같은 장 3절을 보면,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하게 하라’ 이는 생겨날 교회에 관한 것입니다. In like manner it is said here, and in the following chapter (Gen. 7:4, 23), that “every substance should be destroyed from off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ying in the region where the church was; but in Gen. 7:3, speaking of a church about to be created, it is said, “to keep seed alive on the faces of the ground.

 

지면’(ground)은 말씀 어디서나 그 가리키는 바가 동일합니다. 이사야입니다. Ground” has the same signification everywhere in the Word; as in Isaiah:

 

1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그들의 땅에 두시리니 2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얻어 Jehovah will have mercy on Jacob, and will yet choose Israel, and will set them upon their own ground, and the peoples shall take them, and shall bring them to their place, and the house of Israel shall inherit them on the ground of Jehovah, (사14:1-2)

 

이 말씀은 이미 형성된 교회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없는 장소에 관해서는 같은 장 9, 12, 16, 20, 21, 25 및 26절에서 ‘’(earth)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speaking of the church that has been made; whereas where there is no church it is in the same chapter called “earth” (Isa. 14:9, 12, 16, 20–21, 25–26).

 

9아래의 스올이 너로 말미암아 소동하여 네가 오는 것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의 모든 영웅을 너로 말미암아 움직이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을 그들의 왕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12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6너를 보는 이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놀라게 하며 20네가 네 땅을 망하게 하였고 네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안장되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들의 후손은 영원히 이름이 불려지지 아니하리로다 할지니라 21너희는 그들의 조상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의 자손 도륙하기를 준비하여 그들이 일어나 땅을 차지하여 성읍들로 세상을 가득하게 하지 못하게 하라 25내가 앗수르를 나의 땅에서 파하며 나의 산에서 그것을 짓밟으리니 그 때에 그의 멍에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고 그의 짐이 그들의 어깨에서 벗어질 것이라 26이것이 온 세계를 향하여 정한 경영이며 이것이 열방을 향하여 편 손이라 하셨나니 (사14:9, 12, 16, 20-21, 25-26)

 

[2] 다시 Again:

 

17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18그 날에 애굽 땅에 가나안 방언을 말하는 다섯 성읍이 있을 것이며 And the ground of Judah shall be a terror unto Egypt; in that day there shall be five cities in the land of Egypt speaking with the lip of Canaan, (사19:17-18)

 

유다의 ‘’(ground)은 교회가 있는 곳, 애굽 ‘’(land)은 교회가 없는 곳입니다. where “ground” signifies the church, and “land” where there is no church.

 

같은 이사야에서 In the same:

 

20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21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The earth shall reel to and fro like a drunkard; Jehovah shall visit upon the army of the height in the height, and upon the kings of the ground on the ground. (사24:20-21)

 

예레미야에서 In Jeremiah:

 

4땅에 비가 없어 지면이 갈라지니 밭 가는 자가 부끄러워서 그의 머리를 가리는도다 5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 Because of the ground that is worn, because there was no rain on the earth, the husbandmen were ashamed, they covered their heads, yea, the hind also calved in the field, (렘14:4-5)

 

’(earth)은 ‘지면’(ground)을 둘러싼 지역을, ‘지면’(ground)은 ‘’(field)을 둘러싼 지역을 각각 의미합니다. where “earth” is that which contains the “ground,” and “ground” that which contains the “field.

 

[3] 같은 예레미야에서 In the same: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 He brought the seed of the house of Israel from the northern land, from all the lands whither I have driven them, and they shall dwell on their own ground, (렘23:8)

 

북쪽 ‘’(land), 쫓겨났던 ‘나라’(lands)는 교회가 없는 곳을, 자기 ‘’(ground)은 교회나 참된 예배가 있는 곳입니다. where “land” and “lands” are where there are no churches; “ground” where there is a church or true worship.

 

다시 Again:

 

8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내가 유다의 왕 시드기야와 그 고관들과 예루살렘의 남은 자로서 이 땅에 남아 있는 자와 애굽 땅에 사는 자들을 나빠서 먹을 수 없는 이 나쁜 무화과 같이 버리되 9세상 모든 나라 가운데 흩어서 그들에게 환난을 당하게 할 것이며 또 그들에게 내가 쫓아 보낼 모든 곳에서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며 말 거리가 되게 하며 조롱과 저주를 받게 할 것이며 10내가 칼과 기근과 전염병을 그들 가운데 보내 그들이 내가 그들과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시니라 I will give the remains of Jerusalem, them that are left in this land, and them that dwell in the land of Egypt, and I will deliver them to commotion, for evil to all the kings of the earth, and I will send the sword, the famine, and pestilence among them, till they be consumed from off the ground which I gave to them and to their fathers, (렘24:8-10)

 

’(ground)은 교리(혹은 신학)과 거기서 나오는 예배를 상징합니다. 이사야 25장 5절 말씀도 같습니다. where “ground” signifies doctrine and the worship thence derived; and in like manner in the same prophet, chapter 25:5.

 

마른 땅에 폭양을 제함 같이 주께서 이방인의 소란을 그치게 하시며 폭양을 구름으로 가림 같이 포학한 자의 노래를 낮추시리이다 (사25:5)

2021-08-05(D5)-매일예배(AC.564-566, 창6,1), '사람, 땅 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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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vMKwcCpj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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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뜻

THE INTERNAL SENSE

 

 

560. 계속해서 진도를 나가기 전에 먼저, 홍수 이전 교회의 상황은 어땠는지를 좀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Before proceeding further we may mention how the case was with the church before the flood.

 

일반적으로는, 후에 일어난 교회들의 상황들과 같았다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즉, 주님 강림 전 유대교회의 경우나, 주님 강림 후 기독교회의 경우처럼, 참 신앙 지식의 부패와 타락, 뒤집힘 및 불순물을 섞음 등이 되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세히는, 홍수 전 교회에 속한 사람의 경우,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무서운 신념, 곧 소름 끼치는 망상을 품게 되었고,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를 역겨운 갈망, 욕망에 철저히 잠기게 하여 그 결과, 그들 안에 리메인스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지경까지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Speaking generally, it was as with succeeding churches, as with the Jewish church before the Lord’s advent, and the Christian church after his advent, in that it had corrupted and adulterated the knowledges of true faith; but specifically, as regards the man of the church before the flood, he in course of time conceived direful persuasions, and immersed the goods and truths of faith in foul yearnings, insomuch that there were scarcely any remains in them.

 

그들이 이 상태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사실은 스스로를 질식시킨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리메인스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때문인데요,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AC.530), 사람을 짐승 수준의 삶에서 인간의 삶으로 고양하는 것이 바로 이 리메인스이기 때문입니다. When they came into this state they were suffocated as if of themselves, for man cannot live without remains; for, as we have said, it is in the remains that the life of man is superior to that of brutes.

 

리메인스를 가지고, 즉, 주님에게서 온 리메인스를 통해서, 사람은 사람이 될 수도, 무엇이 선이요, 진리인지를 알 수도, 온갖 종류의 일들을 생각할 수도,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리메인스 그 안에는 영적, 천적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From remains, that is, through remains from the Lord, man is able to be as man, to know what is good and true, to reflect upon matters of every kind, and consequently to think and to reason; for in remains alone is there spiritual and celestial life.

 

 

561. 그러면 리메인스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But what are remains?

 

리메인스는 사람이 유년기부터 주님의 말씀을 통해 배워 그의 기억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선과 진리뿐 아니라, 거기서 기원한 모든 상태, 가령, 영유아기 순진무구한 상태, 부모, 형제, 선생님과 친구를 향한 사랑의 상태,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 및 가난한 자, 빈궁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상태 등, 한 마디로, 선과 진리에 속한 모든 상태 또한 가리킵니다. They are not only the goods and truths that a man has learned from the Lord’s Word from infancy, and has thus impressed on his memory, but they are also all the states thence derived, such as states of innocence from infancy; states of love toward parents, brothers, teachers, friends; states of charity toward the neighbor, and also of pity for the poor and needy; in a word, all states of good and truth.

 

선과 진리와 함께 기억에 각인된 이런 상태를 일컬어 리메인스라 합니다. 이것은 주님에 의해 사람 안에 보관되는데, 이때 주님은 사람으로 하여금 조금도 눈치 못 채게 조심조심 그의 속사람 안에 쌓아가십니다. 이것은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즉, 악과 거짓에 관련된 것들하고는 철저히 격리됩니다. These states together with the goods and truths impressed on the memory, are called remains, which are preserved in man by the Lord and are stored up, entirely without his knowledge, in his internal man, and are completely separated from the things that are proper to man, that is, from evils and falsities.

 

이 모든 상태는 그 가운데 아주 작은 것조차 잃는 것이 없도록 주님에 의해 사람 안에 보존됩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도록 전에 이런 경험을 했는데요, 사람의 모든 상태는 그의 영유아 때부터 아주 늙었을 때까지 내세에 그대로 보존될 뿐만 아니라 다시 체험되기도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실제로 사람의 상태는 그가 현세에 살면서 처음 겪었던 상태 그대로 정확히 다시 체험됩니다. All these states are so preserved in man by the Lord that not the least of them is lost, as I have been given to know from the fact that every state of a man, from his infancy to extreme old age, not only remains in the other life, but also returns; in fact his states return exactly as they were while he lived in this world.

 

우리 기억에 아로새겨진 선과 진리뿐 아니라, 우리가 경험한 모든 이노센스나 체어리티도 마찬가지, 즉, 하나도 잃는 것은 없습니다. Not only do the goods and truths of memory thus remain and return, but also all states of innocence and charity.

 

그리고 악과 거짓의 상태가 재발될 때, 곧, 이들 악과 거짓이 개별적이든 전체적이든, 심지어 아주 작은 것조차 역시 고스란히 남아 있고, 다시 체험되는데요, 이때는 주님에 의해 선한 상태로 누그러뜨려집니다. And when states of evil and falsity recur—for each and all of these, even the smallest, also remain and return—then these states are tempered by the Lord by means of the good states.

 

이 모든 사실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에게 리메인스가 전혀 남아 있지 않게 되면, 그는 반드시 영원한 지옥살이, 곧, 영원히 지옥에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AC.468번 글을 보시기 바랍니다.) From all this it is evident that if a man had no remains he must necessarily be in eternal damnation. (See what was said before at n. 468.)

 

 

562. 홍수 전 사람들은 결국 리메인스를 거의 갖고 있지 못하게 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진 독특한 멘탈 때문인데요, 그들은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과 떠오르는 모든 생각에 관해, 무서울 정도로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종교적 신념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멘탈적 특성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고자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들은 어마어마한 자아 사랑의 사람들이었고, 자신들을 신으로 여기며, 자기들이 하는 생각은 무엇이든지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The people before the flood were such that at last they had almost no remains, because they were of such a genius that they became imbued with direful and abominable persuasions concerning all things that occurred to them or came into their thought, so that they would not go back from them one whit, for they were possessed with the most enormous love of self, and supposed themselves to be as gods, and that whatever they thought was Divine.

 

이런 종교적 신념, 종교적 설득력, 이쯤 되면 종교적 수준의 자기기만인데요, 이런 것은 이전에도, 이후에도 어떤 사람들한테서도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고 질식시켜 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내세에서는 이 홍수 전 시대 사람들은 다른 영들과 함께 있을 수가 없는데요, 그들이 나타나면 그들은 공포스럽다 판명된 자신들의 이 종교적 신념을 주입함으로써 사람들의 모든 사고능력을 거두어 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이쯤 하고, 나머지는 주님의 신적 자비, 곧 허락하심으로 이어지는 그 부분에서 계속하겠습니다. (AC.1265-1272) No such persuasion has ever existed in any people before or since, for it is deadly or suffocative, and therefore in the other life the antediluvians cannot be with any other spirits, for when they are present they take away from them all power of thought by injecting their fearfully determined persuasions, not to mention other matters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shall be spoken of in what follows.

 

 

563. 이런 종류의 자기기만이 사람을 점유, 점령하게 되면, 이것은 무슨 접착제처럼 착 달라붙어 만일 이것이 없었으면 여전히 남아 있었을 선과 진리로 하여금 도저히 남아나게도, 더 이상 쌓이게도 하질 않습니다. 또 그동안 쌓아놓은 것들은 사용할 수도 없게 됩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이들은 이런 망상의 정상에 도달, 결국 그들에게 부합하는 고유한 종말, 멸망에 이르게 되며, 홍수와 다름없는 범람으로 질식당하게 됩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의 종말을 ‘홍수’에 비유하며, 태고인들의 관습에 따라 같은 것, 곧, 홍수로 묘사합니다. When such a persuasion takes possession of a man, it is like a glue which catches in its sticky embrace the goods and truths that otherwise would be remains, the result of which is that remains can no longer be stored up, and those which have been stored up can be of no use; and therefore when these people arrived at the summit of such persuasion they became extinct of their own accord, and were suffocated by an inundation not unlike a flood; and therefore their extinction is compared to a “flood,” and also, according to the custom of the most ancient people, is described as 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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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TYscTMy2k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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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6

Genesis 6

 

 

1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And it came to pass that man began to multiply himself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and daughters were born unto them. 2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And the sons of God saw the daughters of man that they were good; and they took to themselves wives of all that they chose. 3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My spirit shall not reprove man forever, for that he is flesh; and his days shall be a hundred and twenty years. 4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There were Nephilim in the earth in those days; and most especially after the sons of God went in unto the daughters of man, and they bare to them; the same became mighty men, who were of old, men of renown. 5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And Jehovah saw that the evil of man was multiplied on the earth, and that all the imagination of the thoughts of his heart was only evil every day. 6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And it repented Jehovah that he had made man on the earth, and it grieved him at his heart.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I will destroy man whom I have created, from upon the faces of the ground, both man and beast, and creeping thing, and fowl of the heavens; for it repenteth me that I have made him.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And Noah found grace in the eyes of Jehovah.

 

 

내용

THE CONTENTS

 

 

554. 여기서 다루는 주제는 홍수 전 사람들의 상태입니다. The subject here treated of is the state of the people before the flood.

 

 

555. 사람과 더불어 교회가 있었던 곳에 갈망(yearnings, 욕구, 욕망, appetites)이 일어나 사람과 교회를 다스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갈망이 바로 ‘딸들’입니다. That with man, where the church was, yearnings—which are the “daughters”—began to reign.

 

그들은 또한 신앙의 가르침들과 자신들의 갈망을 단단히 묶어, 그 결과, 자기들이 악과 거짓 가운데 있음을 확실히 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라는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1-2절) Also that they conjoin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with their yearnings, and thus confirmed themselves in evils and falsities, which is signified by “the sons of God taking to themselves wives of the daughters of man” (verses 1–2).

 

 

556.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리메인스가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리메인스를 습득하여 계속해서 지니고 있게 하시려고 사람들을 새롭게 만드시려는 마음을 먹으셨습니다. ‘백이십 년’은 리메인스를 가리킵니다. (3절) And whereas there were thus no remains of good and truth left, it is foretold that man should be differently formed, in order that he might have remains, which are “a hundred and twenty years (verse 3).

 

 

557. 신앙의 가르침들을 자기들이 가진 욕망 실현의 도구로 이용하고, 이런 상태로 자기를 사랑하고, 자아를 사랑하면서, 남들과 비교, 자기들만이 가진 위대함이 얼마나 뛰어난지, 자기들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들인지 하는, 끔찍할 정도로 소름 돋는 망상, 즉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힌 사람들, 이런 자들이 바로 ‘네피림’입니다. (4절) Those who immersed the doctrinal things of faith in their yearnings, and in consequence of this as well as of the love of self conceived dreadful persuasions of their own greatness in comparison with others, are signified by the “Nephilim (verse 4).

 

 

558. 이렇게 되고 나자 선과 진리에 관한 무슨 의지나 퍼셉션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5절) In consequence of this there no longer remained any will or perception of good and truth (verse 5).

 

 

559.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는 주님의 자비(mercy)에 대한 묘사입니다. (6절) The mercy of the Lord is described by “repenting and grieving at heart” (verse 6).

 

그들은 이런 갈망과 이런 신념은 사람을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하고 만다는 것을 입증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7절) That they became such that their yearnings and persuasions must needs prove fatal to them (verse 7).

 

이런 상황에서, 인류가 건짐을, 구원을 받을 수 있으려면 새로운 교회가 반드시 일어나야 했는데, 그 교회가 바로 ‘노아’입니다. (8절) Therefore in order that the human race might be saved, a new church should arise, which is “Noah” (verse 8).

2021-08-03(D3)-매일예배(AC.554-559, 창6,1-8), '창6,1-8 브리핑'.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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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RG1LjPeLKg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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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6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

Genesis 6

CONCERNING HEAVEN AND HEAVENLY JOY

 

 

553. 천국에서 서로 사랑 가운데 있는 그들은 그들 젊음의 봄날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갑니다. 그들은 수천 년을 더 살면 살수록 더욱 더 기쁘고 행복한 봄을 향해 나아갑니다. 이것은 서로 사랑, 체어리티, 그리고 신앙의 진보와 정도에 따라 영원히 계속해서 증가합니다. They who are in mutual love in heaven are continually advancing to the springtime of their youth, and to a more and more gladsome and happy spring the more thousands of years they live, and this with continual increase to eternity, according to the advance and degree of mutual love, charity, and faith.

 

나이 들고 오랜 세월 쇠약해져 죽은, 주님 신앙, 이웃 사랑, 그리고 남편과 행복한 결혼애 안에서 살아온 여성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꽃 같은 젊음과 꽃다운 시절, 그리고 육안으로는 결코 지각할 수 없는, 미(美)에 대한 모든 관념을 다 초월해 버리는 아름다움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의 본 모습(likeness)을 꾸미고 표현하며, 체어리티의 즐거움과 아름다움으로 하여금 얼굴의 모든 아주 미세한 데서부터 뿜어져 나오게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선과 체어리티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체어리티의 모습들(forms) 그 자체입니다. 더러는 그들을 보고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Those of the female sex who have died in old age and enfeebled with years, and who have lived in faith in the Lord, in charity toward the neighbor, and in happy conjugial love with their husbands, after a succession of years come more and more into the bloom of youth and early womanhood, and into a beauty that surpasses all idea of beauty such as is ever perceptible to the natural sight; for it is goodness and charity forming and presenting their own likeness, and causing the delight and beauty of charity to shine forth from every least feature of the countenance, so that they are the very forms of charity: some have beheld them and been amazed.

 

체어리티의 모습은, 이런 관념적인 것들이 저 세상 삶에서는 표상과 외관으로 보이기 때문에, 초상화처럼 그림으로 그리거나 그려진 체어리티 자체입니다. 이것은 전체적인 천사, 특히 천사의 얼굴이 천사의 내면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과 같은 방식인데요, 이렇게 초상화 그림처럼 보이는 체어리티는 보기에도 분명히 체어리티요, 마음으로 지각하기에도 분명히 체어리티인 그런 생생한 체어리티입니다. The form of charity, as is seen to the life in the other world, is such that it is charity itself that portrays and is portrayed,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 whole angel, and especially the face, is as it were charity, the charity both plainly appearing to the view and being perceived by the mind.

 

이 모습을 눈으로 보게 되면, 그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때문에, 보는 사람의 마음 저 안쪽 가장 깊은 생명은 감동으로 가득 찹니다. When this form is beheld, it is unutterable beauty that affects with charity the very inmost life of the beholder’s mind.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서 신앙의 진리들이, 하나의 이미지로 볼 수 있도록 제공되며, 심지어 그 이미지로부터 지각까지 됩니다. Through the beauty of this form the truths of faith are presented to view in an image, and are even perceived from it.

 

주님 신앙, 곧 체어리티 신앙으로 살아온 사람들은 저 세상에서는 이런 모습들, 즉, 아름다움들이 됩니다. Such forms, or such beauties, do those become in the other life who have lived in faith in the Lord, that is, in the faith of charity.

 

모든 천사들은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함과 함께 모두 이런 모습들이며, 이런 곳이 바로 천국입니다. All the angels are such forms, with countless variety, and of such is heaven.

2021-08-02(D2)-매일예배(AC.553, 창6 O), '창6 오프닝, 천국과 천국의 기쁨에 관하여(3)'.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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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B_3qLKdOlz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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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01(D1)-제9권31호통414호.성찬.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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