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천국에 가면,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까마득한 조상을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하나? 또 나중에, 아들의 아들의 아들의... 까마득한 후손이 찾아와 나한테 인사를 하게 되나?

 

답은, 지상 혈연관계는 지상에서 끝, 천국까지 이어지지 않는다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사후, 영계에서 눈을 뜬 후, 먼저 가신 부모님과 혈육들을 만나 입 싹 씻거나 안면 싹 바꾸고 하는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너무너무 반가워 펄쩍펄쩍 뛰지요 ^^

 

그러나 이런 반가운 인사는 얼마 동안 만입니다. 사람은 사후, 몇 번의 상태변화를 겪게 됩니다. 이때 겉, 곧 영의 외면은 휴면상태로 들어가고, 속, 곧 영의 내면이 열리는데, 이것이 바로 앞으로 영원히 머물게 될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며, 이 상태가 되면, 더 이상 세상 살 때 지니고 살던 모습이 아니게 되어, 더 이상 서로를 알아볼 수도, 인식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주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을 산 사람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상에서 주님을 등지고 자기 사랑, 세상 사랑의 삶을 산 사람들은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모습으로 바뀝니다. 후자의 경우, 자기들끼리는 사람 모습으로 보이지만, 천국 빛 앞에서는 본 모습이 드러납니다

 

천국은 수많은 공동체로 이루어지며 각 공동체는 주님의 특별한 선을 표현합니다, 곧, 주님의 어떤 선 하나는 천국의 어떤 한 공동체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각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고유한, 또는 대표적인 선을 따라 해당 공동체로 배정되며, 이렇게 지상에서는 혈육으로 만나 함께 살았어도 천국에서는 자신의 고유한 선을 따라 흩어지기 때문에 선의 종류가 같지 않으면, 사후 같은 공동체에서 함께 할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어차피 헤어질 것을 왜 굳이 지상에서 서로 혈육으로 만나 함께 살게 하실까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주님의 선으로 준비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선은 오직 주님으로 말미암으므로 주님이 혈육 저마다의 모습, 곧 아버지의 모습으로, 어머니의 모습으로, 형제의 모습, 자녀와 손주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이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아버지로 계신 주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곧, 아버지 안에 계신 주님께 예를 다해야 합니다. 어머니도, 형제도, 아들도, 딸도 그렇습니다!

 

이것을 조금 확장하면, 우리의 이웃, 교회, 그리고 사회 직장 등,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하며, 이것이 바로 이웃 사랑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기억하고 혈육을 사랑해도 사랑해야 혹시 모를, 내 핏줄을 사랑하면서 사실은 주님께는 죄를 짓는 우매함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꼭 붙들고 있어야 자식이 나를 속상하게 해도 자식 안에 계신 주님께 예의 바르게 행할 수 있습니다. 쉽지 않으시겠지만...

 

지상 혈연과 혈육 관계는 지상까지만, 천국은 오직 주님과 나, 일대일 사랑의 나라, 그리고 이런 주님 사랑으로 나보다 남을 더 사랑하는 나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멘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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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오늘 말씀의 한 토막입니다

 

...저는 램프가 달린 램프 스탠드와 꽃처럼 생긴 가장 값진 조명기구들을 주님에 대한 경외함으로, 온 힘을 다해 부지런히 빚고 있는 천사 같은 영들을 보았습니다. 두어 시간 동안 저는 그들이 얼마나 엄청난 수고로 그 모든 것들로 하여금 아름답고, 또 주님을 잘 표현하게 하려고 애를 쓰는지를, 허락을 받아 참관할 수 있었습니다... (AC.552)

 

스베덴보리가 주님의 허락으로 영이 열려 천국으로 들려 올라가 체험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여기서 그들이 이 조명기구로 하여금 ‘주님을 잘 표현하게’ 하려고 저렇게 무던히도 애를 쓰며, 정성을 다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 깊었습니다

 

천국을 비롯, 피조세계 내 모든 피조물은 기본적으로 자기를 지으신 주님을 표현해야 합니다. 어떤 작품이든지 자기를 만든 작가를 표현하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이지요

 

저는 오늘 주님을 잘 표현했나요? 저의 말과 태도, 일상을 통해 주님을 얼마나 드러냈으며, 주님이 보이셨을까요...

 

‘주님을 잘 표현하는’ 피조물의 본분으로 오늘도 내일도 살기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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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초일류기업에 입사하면 좋지요. 연봉과 복지가 정말 좋으니까요 ^^ 그러나 그것도 업무역량이 받쳐줘야 가능한 얘깁니다. 전에 삼성 시절, 앤더슨 컨설팅 사람들과 일한 적이 있는 저는 그들의 업무역량에 명함도 못 내밀었거든요... ^^ 역량, 능력도 없이 그런 데 들어가면, 시간시간 지옥도 그런 지옥이 없을 거고, 아마 금방 뛰쳐나오게 될 겁니다 ^^

 

왜 이런 얘길 할까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천국이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

 

전혀 준비 없이, 전혀 천국 생활에 필요한 역량을 갖추지 않은 채 무조건 천국 들어가기를 원하는 영들은 이 글 제목처럼 저런 황당한 경험들, 곧 천국 안은 고사하고, 천국 문턱에서 그만 저런 고통을 맛보고는 자기들의 내면 상태와 맞는 곳, 지옥으로 뛰어내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에 대하여 미리 잘 알고, 남은 생애를 오직 거기에 맞춰 준비를 잘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천국 생활에 합당한 역량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주님을 사랑함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천국을 향한 내면이 열려 천국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향해 등을 돌리는 사람들은 천국을 향한 내면은 닫히고, 대신 지옥을 향한 내면이 열려 지옥의 기운들을 받게 됩니다. 그 결과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을 한 개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것이며, 주님의 선을 사랑하는 것은, 그 선을 의도하고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준비, 곧 천국에 합당한 내면도 열리지 않은 채, 천국 진입을 시도하게 되면(※ 물론 시도 자체도 불가능, 저런 경험도 오직 주님이 허락하셔야만!) 저렇게 되는 것이며, 저렇게 되는 것은, 저 영의 내면이 천국 질서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정확히 알아 부디 우리 모두 자기 역량에 맞는 천국으로 주님의 인도를 받아 배정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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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들은 일종의 그릇이요, 수용체입니다. 무엇을 담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무엇을 담을 수 있을까요?

 

바로 천국을 담을 수 있습니다. 천국의 모든 것, 곧 주님을 담을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천사들은 사랑 덩어리이며,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사랑은 자기와 조화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며, 수용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정체이며, 본질입니다

 

세상에서 전혀 배움이 없어 아주 단순하였지만 남을 사랑하고 신(神)을 사랑했던 사람들은 천국에 올라가 아주 지혜로운 사람들이 됩니다. 주로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그런데요,

 

그들은 이미 사랑으로 준비된 사람들이어서 곧 천사들의 지혜와 지성, 천국과 주님의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기 내면이 열린 정도만큼이지만 말입니다. 천국도 결국 자기 용량만큼만 담을 수 있기 때문인데요, 어쨌든 ^^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 여기에 지상에서도 얼마든지 천국을 넉넉히 사는 비밀이 있습니다. 아멘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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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을 이루는 주님의 신성(神性, the Devine)은 사랑이며, 선과 진리입니다. 주님의 신적 선은 천국 사랑의 열이며, 신적 진리는 천국 충만한 빛입니다

 

천국 천사들은 주님의 신성을 담는 그릇입니다. 저마다 그릇의 크기와 역량이 다 다르지만 그들은 주님의 신성, 곧 주님의 신적 성품으로 충만합니다

 

천사들도 저마다 그 고유한 퍼스낼러티가 있지만 모두 주님 자신입니다. 그들 안 충만한 신성이 오직 주님의 것이며, 곧 주님 자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그래서 천사들도 오직 사랑입니다. 천사들은 지상의 사람과 연합하는데, 그래서 오직 사랑 가운데 연합합니다

 

시국 영상과 글을 볼 때, 우리 눈을 통해 천사들도 보며, 천사들을 통해 주님도 보십니다. 그때 어떤 경우에도 주님은 이를 가시지 않으며, 천사들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옥 기운이 아닌, 주님의 마음으로 시국을 살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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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12

 

1490. 18절,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Verse 18. And Pharaoh called Abram,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주께서 생각에 잠기셨음을,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그것이 그를 슬프게 하였음을,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천적인 것과 결합하려는 진리 말고 다른 그 어떤 진리도 가질 필요가 없었음을 그가 알고 있었음을 각각 의미합니다. And Pharaoh called Abram”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signifies that it grieved him; “Why didst thou not tell me that she is thy wife?” signifies seeing that he knew that he ought not to have any other truth than that which would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1491.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And Pharaoh called Abram.

 

이 표현이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음을 의미함이라는 것은 ‘바로’(Pharaoh)의 의미가 기억-지식이라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Pharaoh” as being memory-knowledge.

 

기억-지식 자체, 즉, 기억-지식의 일들을 일컬어, 이 지식은 주님이 어린 시절에 습득하신 것인데, 여기서 ‘바로’라 하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말을 거는 건 기억-지식입니다. 즉, 그 지식을 통해서 그렇게 말을 거시는 분은 여호와이시지요. The memory-knowledge itself, that is, the matters of memory-knowledge, which the Lord acquired when a child, are here called “Pharaoh”; thus it is that knowledge itself which thus addresses the Lord, that is, it is Jehovah who does so by means of that knowledge.

 

※ 지식이 말을 건다는 건, 그 지식이 생각났다, 기억이 났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은 바로라는 지식이 기억이 나 생각에 잠기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이 표현의 의미는 주님이 생각에 잠기셨다라는 것입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se things signify that the Lord bethought himself.

 

정신적 관찰, 곧 생각에 잠기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식, 즉, 바로라고 하는 지식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Mental observation comes by means of memory-knowledge, thus by means of Pharaoh, by whom, as before said, this knowledge is signified.

 

 

1492.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And said, What is this that thou hast done unto me?

 

이 표현을 보고, ‘아, 주님이 그걸 생각하고 무척 슬퍼하셨구나...’ 알 수 있는 것은 이 표현 전반에 실린 분(忿)이 느껴지는 분위기를 볼 때 분명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큰 슬픔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That this signifies that it grieved him is also evident from the very indignation in which this is said: the grief itself is thus expressed.

 

속뜻이라는 게 이런 겁니다. 어펙션(affection) 자체는 말 속에 숨어 겉으로는 안 보이지만 사실은 말을 구성하는 것이지요. 겉 글자로 되어 있는 단어들은 속뜻을 아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마치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The internal sense is such that the affection itself that lies hidden in the words is what constitutes it; the words of the letter are not attended to, but are as if they had no existence.

 

이 말 속 어펙션은 말하자면, 기억-지식의 분(忿)이요, 주님의 큰 슬픔입니다. 이 슬픔은, 주님이 어린 시절 즐거움과 큰 기쁨으로 배우셨던 그 기억-지식들과 이젠 이별해야 한다,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에서 오는 그런 슬픔입니다. The affection in these words is the indignation as it were of the memory-knowledge, and the Lord’s grief; and in fact grief from this, that the memory-knowledges which he had learned with pleasure and delight should be thus destroyed.

 

이 경우는 다음과 같은 건데요, 아이들이 뭘 좋아하길래 그 부모들이 보니 너무 위험해 보여 아이들에게서 그걸 빼앗을 때, 그때 아이들이 느끼는 큰 슬픔 같은 그런 것입니다. The case herein is like that of little children who when they love something their parents see to be hurtful to them, and it is taken away from them, are thereby grieved.

 

※ 어린 시절에 배운 세상 지식 하나 단절한다는 게, 헤어진다는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이렇게까지 슬퍼하시나 싶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많이 사랑하지 않았으면 헤어질 때도 별로 서운하지 않은 그런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무덤덤함은 사실은 우리의 냉정함을, 우리가 처음 무엇을 배울 때, 우리는, 주님과 달리 우리는 무슨 그리 큰 고마움도, 기쁨도, 반가움도 없이 그저 태어났으니까 산다,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으니 등교한다, 수업시간이 되었으니 교실에 앉아 있다... 등과 같은 수동적 삶을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린 시절에도 확실히 다르셨습니다. 여느 어린이들은 우리와 같이 저랬다면 주님은 비록 세상 지식, 바로와 애굽을 배우실지라도 그 지식으로 지성을 접하고, 그 지성으로 영적, 천적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아셨기에 정말 소중히 여기시고 정성을 다해 배우셨음을, 세상 학문과 지식에 대하여도 주님은 정말 기뻐하고 사랑하셨음을 오늘 본문에서 보면서, 나는 어땠나, 나는 그동안 무슨 공부를 할 때 어떤 태도로 임했나를 돌이키게 됩니다.

 

비록 세상 학문이라 하더라도 그걸 통해 영적, 천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지성을 얻을 수만 있다면, 선용(善用)을 통한 주님의 질서와 순서 가운데 머무를 수만 있다면, 그래서 세상 학문과 지식이 그 쓰임새를 다하고 마침내 헤어질 때가 오더라도 냉냉함과 무덤덤함 대신 오늘 본문 주님처럼 저렇게 큰 사랑과 애정을 가지고 슬퍼하게 되지 않을까 생각에 잠겨 봅니다.

 

무엇 또는 누구와 헤어질 때, 평소 많이 사랑하였으면 크게 슬퍼할 것이요, 적게 사랑하였으면 덤덤할 것입니다. 사람은 헤어질 때 모습을 보고 그는 평소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1493. 그를 네 아내라고 That she was thy wife.

 

이것이 상징하는 건, 그는 천적인 것과 결합했어야 할 진리 아닌 다른 진리를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것은 ‘아내’의 의미가 천적인 것과 결합해야 하는 진리임을 생각할 때 분명합니다. (위 12절 참조) That this signifies that he ought to have no other truth than that which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a “wife” as being the truth that was to be conjoined with what is celestial (concerning which above, at verse 12).

 

여기서는 주님이 지성을 향해, 그리고 그렇게 해서 지혜를 향해 나아가신 순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성에 대하여 지혜 자체가 되신 것처럼 인성에 대하여도 지혜 자체가 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There is here described the order in which the Lord advanced to intelligence, and thus to wisdom; so that, as he was wisdom itself as to his Divine essence, so he should become wisdom itself as to his human essence.

 

 

※ 이상으로, 오늘 본문 18절과 그 속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이렇게 행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느냐

 

(속뜻)

주님은 이제 세상 학문과 헤어지실 때가 되어 깊이 생각에 잠기셨고 많이 슬퍼하셨다. 주님의 천적 진리를 향한 여정에 더 이상 세상 지식은 함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 이제 우리는 어른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성장, 성숙한 어른이면, 우리는 천국과 주님을 향하는데 별 도움 안되는 것들하고는 마땅히 결별해야 합니다. 주님과 결합하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하면서 스마트폰과 인터넷, 유튜브와 세상 뉴스는 또 붙들고 놓지 않는 사람... 본인도 참 괴롭겠지만 타인 보기에도 참 민망한 사람입니다. 제가 이런 사람입니다...

2021-10-20(D4)-매일예배(2216, AC.1490-1493, 창12,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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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we7MTCObb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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