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22)

 

AC.300

 

첫 번째 아르카나,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 주님을 의미함과 동시에 천국도 의미한다는 것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서는 언제나 어떤 비밀한 이유(a secret reason)로 주님을 때로는 단지 여호와(Jehovah), 때로는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으로, 또 때로는 먼저 여호와(Jehovah)라고 한 다음 하나님(God)으로, 그리고 또 때로는 주 여호비(Lord Jehovih), 때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God of Israel)으로, 때로는 단지 하나님(God)으로만 부릅니다. 이와 같이 창세기 첫째 장에서는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Let us make man in our image)라고 복수로 말씀하시는 곳에서도 주님을 오직 하나님(God)으로만 부릅니다. 그리고 천적 인간을 다루는 다음 장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으로 부르지요. 주님을 여호와(Jehovah)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그분만이 존재하시거나(is) 살아 계시기(lives) 때문이며, 따라서 그분의 본질(essence)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하나님(God)으로 부르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분의 능력(power)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러한 구별은 이 구별이 나타나는 말씀의 여러 구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49:4-5, 55:7, 18:2, 28-29, 31, 31:14) As regards the first arcanum—that by “Jehovah God” is meant the Lord and at the same time heaven—it is to be observed that in the Word, always for a secret reason, the Lord is sometimes called merely “Jehovah,” sometimes “Jehovah God,” sometimes “Jehovah” and then “God,” sometimes the “Lord Jehovih,” sometimes the “God of Israel,” and sometimes “God” only. Thus in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where it is also said, in the plural,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he is called “God” only, and he is not called “Jehovah God” until the following chapter, where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He is called “Jehovah” because he alone is or lives, thus from essence; and “God,” because he can do all things, thus from power; as is evident from the Word, where this distinction is made. (Isa. 49:4, 5; 55:7; Ps. 18:2, 28, 29, 31; 31:14)

 

4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49:4, 5)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55:7)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9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18: 2, 28-29, 31)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31:14)

 

이러한 이유로 사람과 말하였던 모든 천사나 영을, 그들이 어떤 능력을 가졌다 여겨질 때는 (God)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예는 시편에서 볼 수 있습니다. On this account every angel or spirit who spoke with man, and who was supposed to possess any power, was called “God,” as appears from David: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82:1) God hath stood in the congregation of God, he will judge in the midst of the gods (Ps. 82:1);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89:6) Who in the sky shall be compared unto Jehovah? Who among the sons of the gods shall be likened to Jehovah? (Ps. 89:6).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2–3) Confess ye to the God of gods, confess ye to the Lord of lords (Ps. 136:2–3).

 

능력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켜서도 신들(gods)이라고 합니다. 시82:6, 요10:34-35 참조 Men also as being possessed of power are called “gods,” as in Ps. 82:6; John 10:34, 35.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82:6)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10:34-35)

 

모세 역시 바로에게 신(a god to Pharaoh) 같이 될 것이라 하십니다. Moses also is said to be “a god to Pharaoh.” (Exod. 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7:1)

 

이러한 이유로 히브리어에서 하나님(God)이라는 말은 복수형인 엘로힘(Elohim)입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스스로는 가장 작은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실제로 그들 자신도 이를 인정합니다. 그들의 능력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옵니다. 또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은 오직 주님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창세기 첫째 장에서처럼 어떤 일이 천사들의 사역을 통해 이루어질 때에는 주님을 복수로 호칭합니다. 여기에서도 천적 인간은 사람인 까닭에 주님과 비교될 수 없고, 오직 천사들과만 비교될 수 있었으므로,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말씀하신 것입니다. 곧 지혜롭고 총명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For this reason the word “God” in the Hebrew is in the plural number—“Elohim.” But as the angels do not possess the least power of themselves, as indeed they acknowledge, but solely from the Lord, and as there is but one God, therefore by “Jehovah God” in the Word is meant the Lord alone. But where anything is effected by the ministry of angels, as in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he is spoken of in the plural number. Here also because the celestial man, as man, could not be put in comparison with the Lord, but with the angels only, it is said, the man “is become as one of us, knowing good and evil,” that is, is wise and intelligent.

 

 

해설

 

AC.300은 앞의 AC.299에서 제시된 첫 번째 아르카나, 곧 ‘여호와 하나님’이 주님을 의미함과 동시에 천국도 의미한다는 사실을 설명합니다. 이를 위해 스베덴보리는 먼저 말씀에서 주님을 가리키는 이름들이 서로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점을 밝힙니다. 말씀에는 ‘여호와’,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주 여호비’,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은 여러 이름이 나타나는데, 이것은 단순한 문체상의 변화나 같은 대상을 여러 방식으로 부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각각의 이름은 그 문맥에서 드러나는 주님의 신적 속성과 역사의 서로 다른 측면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말씀에서 어떤 이름이 선택되었는가는 언제나 내적 의미와 관련된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것은 오직 그분만이 스스로 존재하시며, 스스로 살아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천사와 사람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하거나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주님으로부터 존재와 생명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른 어떤 존재로부터 생명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십니다. 따라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님의 신적 존재와 생명, 곧 그분의 본질을 나타냅니다. 본문에서 ‘오직 그분만이 존재하시거나 살아 계신다’ 한 것은 피조물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와 생명이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며, 오직 주님으로부터 끊임없이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분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신적 능력을 나타냅니다. ‘여호와’가 주님의 존재와 생명 자체를 나타낸다면, ‘하나님’은 그 신적 생명과 본질이 능력으로 역사하는 측면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 안에서 본질과 능력이 서로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 자체이신 분이 곧 모든 능력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사49:4-5, 사55:7, 시18과 시31을 언급한 것은 말씀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각각 본질과 능력이라는 구별된 의미를 지니고 사용됨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창세기 첫째 장과 둘째 장에서 사용되는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도 나타납니다. 창1에서는 주님을 일관되게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창1의 내적 의미는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주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점차 새롭게 창조되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혼돈과 공허 가운데 빛이 생기고, 물과 땅이 구별되며, 식물과 광명체, 그리고 생물들이 차례로 나타나는 과정은 사람의 거듭남이 단계적으로 진행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장에서는 사람을 새롭게 형성하시는 주님의 능력이 전면에 나타나므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그러나 창2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납니다. 창2는 창1과 별개의 또 다른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거듭남을 거쳐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의 상태를 다룹니다. 이때에는 단지 주님의 능력으로 사람이 새롭게 형성되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의 생명과 사랑이 사람의 내면에 받아들여지고, 그 사람과 결합하는 상태가 중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능력을 뜻하는 ‘하나님’과 존재와 생명을 뜻하는 ‘여호와’가 함께 사용되어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처럼 창1과 창2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지는 것은 각 장이 다루는 사람의 영적 상태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왜 말씀에서 천사와 영, 심지어 사람들까지도 때때로 ‘신들’이라고 불리는지를 설명합니다. 이는 그들에게 본래부터 신적 본질이나 독립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천사나 사람이 주님의 말씀과 능력을 받아 전달하고, 주님의 권위 아래에서 어떤 일을 수행할 때에는 그들에게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까닭에 능력을 뜻하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그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나타나는 능력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것이며, 그들은 그 능력을 받아 전달하는 사역자에 불과합니다.

 

82:1, 시89:6, 시136:2-3은 주님으로부터 능력과 권위를 받은 존재들을 가리켜 ‘신들’이라 할 수 있으나, 그 모든 능력 위에 계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심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됩니다. 시82:6과 요10:34-35는 하나님의 말씀과 판단의 권위를 맡은 사람들을 가리켜서도 이러한 의미에서 ‘신들’이라 하였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출7:1에서 모세가 바로에게 ‘’ 같이 된다 한 것은 모세 자신이 신적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주님의 말씀과 권위를 대표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인용들의 공통된 핵심은 천사나 사람에게 ‘’이라는 호칭이 사용되더라도 그들의 능력이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스베덴보리는 히브리어 ‘엘로힘’이 복수형이라는 사실도 언급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여럿이시라는 뜻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능력이 천국의 수많은 천사와 그들의 다양한 사역을 통하여 나타날 수 있음을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천국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천사가 있고, 그들이 수행하는 기능도 다양하지만, 그 모든 사랑과 지혜, 그리고 능력의 근원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복수형은 능력의 근원이 여럿임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능력이 여러 형식과 사역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천사들이 자기 자신한테서는 가장 작은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특별히 강조합니다. 참된 천사들은 자신들의 사랑과 지혜, 그리고 능력이 모두 주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알고 인정합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한테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선하거나 참되지 않으며, 모든 선과 진리는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유입된다는 사실을 내적으로 지각합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이 위대한 능력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실제로 역사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천사는 주님의 능력을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형식이며 도구일 뿐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신들’이라 하는 천사들과 ‘여호와 하나님’이신 주님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천사들은 주님의 능력을 받아 ‘신들’이라 불릴 수는 있지만, 결코 ‘여호와’라 불릴 수는 없습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존재하시며, 생명 자체이신 분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생명을 받는 존재이고,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천사는 능력을 받는 존재이고, 주님은 능력 자체이시며, 그 근원이십니다. 따라서 존재와 능력이 하나로 결합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궁극적으로 오직 주님 한 분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AC.300은 ‘여호와 하나님’이 오직 주님을 뜻한다 하면서도, 동시에 천국도 포함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주님과 천국이 같은 존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은 생명 자체이시고, 천국은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천사들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주님과 천국 사이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주님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거나 역사하지 않습니다. 천국 전체는 주님의 사랑과 지혜, 그리고 능력을 받아 하나의 질서 안에서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문맥에서는 주님과 천국이 함께 포함되어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창1:26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와 창3:22의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에 나오는 ‘우리’를 이해하는 원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여러 하나님이 서로 의논한다는 뜻이 아니며, 주님께서 천사들의 조언이나 동의를 필요로 하신다는 뜻도 아닙니다. 모든 것을 행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다만 주님께서 천국 질서, 그러니까 천사들의 사역을 통하여 사람을 창조, 거듭남, 그리고 인도하시므로 복수 표현이 사용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천사들의 사역을 통하여 역사하신다는 말 역시 주님께서 천사의 도움 없이는 어떤 일을 하실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홀로 행하시되, 천국과 세계를 일정한 질서에 따라 다스리십니다. 그 질서 안에서 천사들은 주님으로부터 사랑과 지혜, 그리고 능력을 받아 각자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천사들이 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께서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창1:26의 ‘우리’는 바로 이와 같이 주님께서 천국 전체를 통하여 사람의 거듭남을 이루시는 신적 질서를 나타냅니다.

 

3:22의 ‘우리 중 하나같이’에서도 사람은 주님과 비교된 것이 아니라 천사들과 비교된 것입니다. 사람은 피조물이며 생명을 받는 존재이므로, 생명 자체이신 주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천적이고 지혜로운 상태에 이른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는 언제나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주님처럼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천사들과 같이 선과 악을 알고 지혜롭고 총명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선악을 안다’는 것은 본래 주님으로부터 선을 지각하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아는 천적 인간의 지혜를 나타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자신의 판단으로 선악을 정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를 알았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천사들과 같이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proprium으로부터 선악을 알려 하고 판단하기 시작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받던 참된 지혜는 자기 자신한테서 지혜를 얻으려는 상태로 변질되었습니다. AC.300은 이 타락의 전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창3:22의 ‘우리’가 주님과 그분의 천국을 함께 포함하며, 사람이 주님이 아니라 천사들과 비교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춥니다.

 

AC.300의 중심은 이처럼 주님과 천국을 구별하면서도 그 관계를 하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은 생명과 능력의 유일한 근원이시며, 천국은 그 생명과 능력을 받아들이는 천사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천사들은 주님과 분리되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그들에게 있는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능력은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은 본질과 능력이 하나이신 주님을 뜻하며, 주님께서 천국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문맥에서는 그분과 결합한 천국도 함께 포함하여 뜻합니다.

 

따라서 창1:26과 창3:22의 복수 표현은 하나님의 본질이 여럿이라는 뜻도 아니고, 천사들이 주님과 동등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한 분 주님께서 그분의 생명과 능력을 받아들이는 천국 전체를 통하여 질서 있게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이것이 AC.299에서 예고되고, AC.300에서 밝혀진 첫 번째 아르카나, 곧 ‘여호와 하나님’이 주님을 의미함과 동시에 천국도 의미한다는 말씀의 뜻입니다.

 

 

심화

 

1. ‘사49:4-5’

 

4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5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사49:4, 5)

 

 

스베덴보리가 AC.300에서 사49:4-5를 인용한 목적은 이사야 전체를 해설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같은 문맥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곧 ‘여호와’는 주님의 신적 존재와 본질을, ‘하나님’은 주님의 신적 능력과 역사를 나타낸다는 AC.300의 주장을 성경으로 입증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사49:4에서는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말합니다. 이어지는 5절에서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라고 하면서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처럼 매우 짧은 문맥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 나란히 사용되는 것을 주목합니다. 만일 두 이름이 완전히 같은 뜻이라면 굳이 구별하여 사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불필요한 반복을 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이름에는 언제나 서로 다른 내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여호와’는 판단하시고 부르시며 사명을 맡기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며, 모든 것의 근원 되시는 주님의 신적 존재를 나타냅니다. 반면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라는 말씀에서는 능력과 힘이 강조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주님의 신적 능력이 실제로 역사하는 측면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차이를 근거로 ‘여호와’는 본질을, ‘하나님’은 능력을 의미한다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 인용은 또한 창세기 첫째 장과 둘째 장의 하나님의 이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창1에서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계속 사용되는 것은 주님의 능력이 사람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과정을 다루기 때문이며, 창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그분의 신적 능력이 함께 나타나는 상태를 다루기 때문입니다. 사49:4-5는 이러한 구별이 창세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로 인용된 것입니다.

 

AC.300에서 사49:4-5를 인용한 핵심 이유는,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단순한 동의어나 문체상 반복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 각각 주님의 신적 본질과 신적 능력을 구별하여 나타낸다는 사실을 성경 자체로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2. ‘사55:7’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사55:7)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사55:7을 인용한 이유 역시 앞의 사49:4-5와 같습니다. 이 구절을 자세히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각각 다른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증거로 제시한 것입니다.

 

사55:7은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한 뒤, 이어서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말합니다. 같은 한 절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 연이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말씀은 같은 뜻을 단순히 반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서로 다른 이름이 사용되었다면, 그 이름마다 내적 의미, 곧 속뜻으로는 구별되는 뜻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사람이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나타냅니다. 죄를 떠나 회개하는 것은 단순히 생활을 조금 고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proprium을 떠나 생명 자체이신 주님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여호와’는 주님의 신적 존재와 사랑, 곧 모든 생명의 근원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에서는 주님의 긍휼과 용서가 실제로 사람에게 역사하는 측면이 강조됩니다. 용서는 주님의 신적 사랑이 사람 안에서 효력을 나타내는 작용이며,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능력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은 주님의 신적 능력과 역사하심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구별을 근거로 ‘여호와’는 본질을, ‘하나님’은 능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인용은 AC.300의 중심 논지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말씀은 어떤 때에는 ‘여호와’만 사용하고, 어떤 때에는 ‘하나님’만 사용하며, 또 어떤 때에는 이처럼 두 이름을 함께 사용합니다. 이것은 문체의 변화가 아니라 내적 의미의 차이를 반영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존재와 생명 자체를 강조할 때에는 ‘여호와’라는 이름이, 그 존재가 능력으로 역사하여 사람을 구원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측면을 강조할 때에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AC.300에서 사55:7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한 절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나란히 사용되는 예를 통하여, 말씀에서 ‘여호와’는 주님의 신적 본질과 존재를,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람을 향해 역사하는 신적 능력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역시 창1에서 ‘하나님’이, 창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되는 이유를 이해하도록 돕는 중요한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3. ‘시18: 2, 28-29, 31’

 

2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28주께서 나의 등불을 켜심이여 여호와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29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군을 향해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 31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 (시18: 2, 28-29, 31)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18:2, 28-29, 31을 인용한 이유도 앞의 이사야 본문들과 동일한 맥락입니다. 그는 시편 전체를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일정한 원리에 따라 구별되어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이 구절들을 인용합니다.

 

시18은 다윗이 주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 찬양 속에는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자연스럽게 교차하여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2절에서는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한 뒤 곧이어 ‘나의 하나님이시요’라고 말합니다. 또 28절에서는 ‘여호와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함께 사용되고, 29절에서는 ‘주를 의뢰하고’와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가 나란히 나타납니다. 마지막으로 31절에서는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라고 하여 두 이름을 다시 함께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들이 우연한 반복이 아니라 내적 의미에 따른 것이라고 봅니다.

 

먼저 ‘여호와’라는 이름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과 피난처,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반석, 요새, 산성이라는 표현은 모두 변하지 않는 신적 존재와 보호를 상징하며, 이는 스스로 존재하시고, 모든 생명의 근원 되시는 주님의 본질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이 시편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님의 신적 존재와 사랑을 강조하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반면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주님께서 실제로 사람을 도우시고 힘을 주시며, 승리를 이루시는 능력의 측면을 나타냅니다. ‘내 하나님이 내 흑암을 밝히시리이다’,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라는 말씀에서는 주님의 능력이 사람 안에서 역사하여 어둠을 밝히고 원수를 이기게 하시는 모습이 강조됩니다. AC.300은 바로 이러한 점을 들어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신적 능력과 작용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28절의 ‘여호와 내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AC.300의 핵심 사상을 잘 보여줍니다. 여기서는 두 이름이 하나로 결합되어 사용됩니다. 이는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과, 그분의 능력이 실제로 역사하시는 측면이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가 창2에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중요하게 다루는 것도 바로 같은 이유입니다. ‘여호와’와 ‘하나님’은 서로 다른 두 존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주님의 서로 다른 신적 측면을 나타냅니다.

 

마지막으로 31절은 이러한 논의를 결론짓는 역할을 합니다. ‘여호와 외에 누가 하나님이며 우리 하나님 외에 누가 반석이냐’라는 말씀은 참된 하나님이 오직 한 분뿐이심을 선언합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와 ‘하나님’은 서로 다른 신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동일하신 주님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다만 ‘여호와’는 그분의 신적 존재와 본질을, ‘하나님’은 그 신적 본질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측면을 각각 강조하는 것입니다.

 

AC.300에서 시18:2, 28-29, 31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시편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사용되는 예를 통하여, 말씀이 주님의 신적 본질과 신적 능력을 각각 다른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앞서 인용된 사49와 사55의 경우와 같은 원리를 또 다른 말씀을 통해 확인해 주는 증거가 됩니다.

 

 

4. ‘시31:14’

 

여호와여 그러하여도 나는 주께 의지하고 말하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였나이다 (시31:14)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31:14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사49, 사55, 시18과 동일한 원리를 다시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이 한 절을 깊이 해설하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서로 구별된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간결한 증거로 제시합니다.

 

시31:14은 ‘여호와여’라고 주님을 부른 뒤, 곧이어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고백합니다. 같은 한 절 안에서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이 우연한 반복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에 따른 의도적인 구별이라고 봅니다.

 

먼저 ‘여호와여’라는 부름은 생명과 존재의 근원이신 주님 자신을 향한 신뢰를 나타냅니다. 사람은 오직 스스로 존재하시며, 생명 자체이신 분께 의지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의 ‘여호와’는 주님의 신적 존재와 본질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는 고백은 그 주님께서 자신의 하나님으로서 실제로 역사하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하나님’은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주님의 신적 능력과 역사를 나타냅니다. AC.300은 이러한 구별을 근거로 ‘여호와’는 본질을, ‘하나님’은 능력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짧은 한 절은 AC.300의 핵심 논지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줍니다. 한 분 주님을 가리키면서도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이 함께 사용되는 것은, 주님의 신적 존재와 신적 능력이 서로 다른 두 존재가 아니라 한 분 주님 안에서 구별되면서도 하나임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AC.300에서 시31:14를 인용한 핵심 이유는, 한 절 안에 함께 나타나는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두 이름을 통하여, 말씀이 주님의 신적 본질과 신적 능력을 각각 다른 이름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앞서 인용된 사49, 사55, 시18과 같은 원리를 더욱 간명하게 증명하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5. ‘시82:1’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 (시82:1) God hath stood in the congregation of God, he will judge in the midst of the gods (Ps. 82:1);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82:1을 인용한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여러 구절과는 약간 다릅니다. 앞의 인용들이 ‘여호와’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 구절은 왜 천사들이나 사람들도 말씀에서 ‘gods’(신들)이라고 불리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증거로 사용됩니다.

 

시82:1은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 하나님은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라고 말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하나님 외에도 여러 ‘신들’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여러 신의 존재를 말하는 구절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여기서 ‘gods’는 주님으로부터 신적 능력을 받아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천사들, 또는 그들을 대표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AC.300은 바로 이 점을 입증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합니다. 천사들은 자기 자신에게서 어떤 신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gods’라 불리는 이유는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전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름은 그들에게 붙지만, 실제 신성은 전적으로 주님께 속합니다.

 

구절의 앞부분과 뒷부분도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구절은 먼저 ‘하나님은 신들의 모임 가운데에 서시며’라고 하여 유일하신 하나님을 제시합니다. 이어 ‘그들 가운데에서 재판하시느니라’고 하는데, 여기서 ‘신들’은 하나님과 나란한 또 다른 신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심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시며, 천사들은 그분의 신적 질서를 받들어 섬기는 존재들입니다. 따라서 여기의 ‘gods’는 심판의 주체가 아니라, 주님의 신적 통치 아래 있는 수용자들입니다.

 

이 인용은 AC.300의 앞부분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26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를 설명하면서, 이 ‘우리’는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주님의 일을 수행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시82:1에서 천사들을 ‘gods’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설명을 뒷받침하는 성경적 근거가 됩니다.

 

AC.300에서 시82:1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천사들을 ‘gods’라고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전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역사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성경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6. ‘시89:6’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 (시89:6) Who in the sky shall be compared unto Jehovah? Who among the sons of the gods shall be likened to Jehovah? (Ps. 89:6).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89:6을 인용한 이유는 시82:1과 같은 맥락입니다. 이 구절 역시 천사들을 말씀에서 ‘gods’ 또는 ‘the sons of the gods’라고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성경적 근거로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을 통해 천사들에게 붙여진 이러한 명칭이 그들 자신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을 나타낸다는 점을 밝히고자 합니다.

 

시89:6은 먼저 ‘무릇 구름 위에서 능히 여호와와 비교할 자 누구며’라고 묻습니다. 이어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라고 다시 묻습니다. 이 두 질문은 모두 같은 결론을 향합니다. 곧 여호와와 견줄 수 있는 존재는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신들’(the sons of the gods)은 여호와와 같은 신적 존재들이 아니라, 여호와와 분명히 구별되는 피조물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중요하게 봅니다. 말씀은 ‘신들 중에서 여호와와 같은 자 누구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것은 ‘신들’이 여호와와 동등한 신적 존재라는 말이 아니라, 여호와와 비교되는 피조물임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그들을 ‘신들’이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신성 때문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섬기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AC.300의 중심 논지와도 연결됩니다. 천사들을 가리켜 때로 ‘gods’ 또는 ‘the sons of the gods’라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전달하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있는 모든 지혜와 능력은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므로, 그들은 결코 여호와와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AC.300에서 시89:6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천사들을 ‘신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여호와와 비교될 수 없는 피조물이며,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 때문에 그러한 명칭을 받을 뿐임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다시 한번 성경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7. ‘시136:2-3’

 

2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3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시136:2, 3) Confess ye to the God of gods, confess ye to the Lord of lords (Ps. 136:2–3).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136:2-3을 인용한 이유는 앞의 시82:1, 시89:6과 같은 주제를 더욱 분명하게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말씀에서 천사들을 ‘gods’(신들) 또는 ‘lords’(주들)라고 하더라도, 그들은 결코 주님과 동등한 존재가 아니며,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 때문에 그러한 명칭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시136:2-3은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께 감사하라’에 이어 ‘주들 중에 뛰어난 주께 감사하라’고 합니다. 겉으로만 보면 ‘신들’과 ‘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를 여러 신이나 여러 주가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주들 중에 뛰어난 주’라는 표현 자체가 오직 한 분이신 주님께서 모든 ‘gods’와 ‘lords’의 근원이시며, 그들 위에 계심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점은 명칭의 관계입니다. 만일 천사들이 자기 자신에게서 신성과 주권을 가진 존재라면, 주님을 ‘신들 중에 뛰어난 하나님’, ‘주들 중에 뛰어난 주’라고 부를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모든 ‘gods’와 ‘lords’가 오직 한 분 주님께 속해 있음을 선언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독립된 신적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신성과 권세를 받아 섬기는 존재들임을 보여줍니다.

 

이 구절은 AC.300의 중심 논지를 한층 확장합니다. 앞의 시82와 시89에서는 천사들이 ‘gods’라고 불리는 이유를 설명하였다면, 여기서는 그들이 ‘lords’라고도 불릴 수 있음을 함께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참된 하나님은 오직 ‘God of gods’이시며, 참된 주는 오직 ‘Lord of lords’이십니다. 천사들에게 붙는 명칭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그들 자신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AC.300에서 시136:2-3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천사들이 ‘gods’나 ‘lords’라고 불릴 수는 있지만, 그 모든 명칭의 근원과 주체는 오직 한 분 주님이심을 증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다시 한번 성경으로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8. ‘시82:6’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 (시82:6)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시82:6을 인용한 이유는 앞서 인용한 시82:1, 시89:6, 시136:2-3의 논지를 직접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구절은 말씀에서 천사들, 또는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대표하는 자들을 실제로 ‘신들’(gods)이라 한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입니다.

 

시82:6에서 주님은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표현을 여러 참된 신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구절은 주님께 속한 자들이,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을 받아 그분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신들’이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특히 이 구절은 ‘신들’과 ‘지존자의 아들들’이라는 두 표현을 나란히 사용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신들’이라는 명칭은 독립된 신성을 가진 존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지존자’이신 주님께 속한 존재를 가리키는 명칭임을 보여 준다 설명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모든 존귀함과 권위는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지존자이신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 구절은 AC.300의 논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앞에서 인용한 시82:1, 시89:6, 시136:2-3은 ‘gods’라는 명칭이 말씀에 실제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면, 시82:6은 주님께서 친히 어떤 존재들을 향해 ‘너희는 신들이다’ 말씀하셨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gods’라는 표현 자체가 성경적인 표현이며,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AC.300의 결론은 언제나 같습니다. 천사들이나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대표하는 자들이 ‘신들’로 불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전달하기 때문이지, 그들 자신이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붙는 ‘신들’이라는 명칭은 어디까지나 주님한테서 유래한 것이며,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AC.300에서 시82:6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천사들이나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대표하는 자들을 실제로 ‘신들’이라 한다는 사실을 성경으로 증명하면서도, 그 명칭은 그들 자신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지존자이신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에 근거한 것임을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이는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AC.300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9. ‘요10:34-35’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요10:34, 35)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요10:34-35를 인용한 이유는, 앞서 시82:6을 인용하며 제시한 해석이 주님 자신의 말씀에 의해 직접 확인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시82:6에서는 ‘너희는 신들이다’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요10:34-35에서 주님께서는 바로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하시며 그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따라서 AC.300에서 이 구절은 앞선 시편의 해석을 확증하는 가장 중요한 신약의 증거가 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신 뒤, 곧이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고 설명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설명을 매우 중요하게 봅니다. 여기서 사람들을 ‘신들’이라 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의 본성이나 본질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신들’이라는 명칭은 그들 안에 있는 어떤 고유한 신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적 진리를 받아들이고 전달하는 역할과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점은 AC.300의 핵심 논지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천사들이나 말씀을 맡은 사람들을 ‘gods’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신이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능력이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명칭은 그들에게 적용되지만, 그 명칭의 근거는 언제나 주님에게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라 말씀하시며, 시82:6의 표현이 정당한 성경 표현임을 친히 인정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통해 ‘신들’이라는 호칭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곧 ‘신들’은 여러 신이 존재한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를 받아 대표하는 자들에게 붙는 말씀의 표현입니다.

 

AC.300에서 요10:34-35를 인용한 핵심 이유는, 주님께서 친히 시82:6을 해석하시면서 ‘신들’이라는 호칭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밝히셨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천사들이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gods’라 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적 진리와 능력에 근거한 것임을 확증하며,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더욱 굳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10. ‘출7: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볼지어다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 (출7:1)

 

 

AC.300에서 스베덴보리가 출7:1을 인용한 이유는, 사람을 가리켜서도 말씀에서 ‘god’(신)이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를 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는 천사들이 ‘gods’라고 불리는 여러 구절을 인용하였다면, 여기서는 모세라는 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다’는 말씀을 통해 같은 원리를 확인합니다.

 

출7:1에서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내가 너를 바로에게 신 같이 되게 하였은즉’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모세가 실제로 신이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여전히 사람이며 피조물입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를 받아 바로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대표하는 위치에 세워졌기 때문에 ‘신’이라 불린 것입니다.

 

이 점은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분명히 나타납니다. ‘네 형 아론은 네 대언자가 되리니’라는 말씀은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씀을 전하는 대표자이며, 아론은 모세의 말을 대신 전하는 대언자임을 보여줍니다. 즉, 모세가 ‘신’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의 본질이 신적이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를 맡아 전달하는 대표적 역할 때문입니다.

 

이 구절은 AC.300의 중심 논지를 그대로 뒷받침합니다. 말씀에서 천사나 사람을 ‘god’ 또는 ‘gods’라 할 수 있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신성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권위를 받아 그분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명칭은 그들에게 적용되지만, 그 명칭의 근거는 언제나 주님께 있습니다.

 

또한 이 구절은 앞서 인용한 요10:34-35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이라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바로 그 원리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바로에게 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신 같이’ 되었다 불렸습니다.

 

AC.300에서 출7:1을 인용한 핵심 이유는, 말씀에서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를 받아 대표하는 위치에 있을 때, ‘신’으로 불릴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통해 스베덴보리는 ‘god’ 또는 ‘gods’라는 명칭은 본질적인 신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진리와 권위를 받아 그분을 대표하는 직분과 역할을 의미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증명하며, 창1:26의 ‘우리’가 여러 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을 받아 섬기는 천사들을 가리킨다는 자신의 해석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AC.299, 창3:22, ‘두 가지 아르카나’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나무 열매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창3:22) AC.299 여기에는 두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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