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4

이제 이러한 일이 예견되었고,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섭리되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가인에게 아무도 폭력을 가해서는 된다고 선언됩니다. 또한 그에게 표가 주어졌다고 하는데, 이는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그것이 보존되도록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이것들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르카나이며,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결혼과 고자들에 관하여 말씀하신 다음 말씀에서도 그것들을 언급하셨습니다. Now as this was foreseen, and was provided, lest the human race should perish in eternal death, it is here declared that none should do violence to Cain, by whom is signified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and further that a mark was set upon him, which mean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o secure its preservation. These are arcana hitherto undiscovered, and are referred to by the Lord in what he said respecting marriage, and eunuchs, in Matthew:

 

어머니의 태로부터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고자도 있도다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19:12) There are eunuchs who were so born from their mothers womb; and there are eunuchs who were made eunuchs of men; and there are eunuchs who have made themselves eunuchs for the kingdom of Gods sake; he that is able to receive it let him receive it. (Matt. 19:12)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 자들이 고자들(eunuchs)이라고 불립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born from the womb) 천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며, 사람에 의해 고자가 자들(made of men) 영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고, 스스로 그렇게 자들(made so by themselves) 천사적 영들과 같은 자들로서, 이들은 체어리티로부터라기보다 순종으로부터 행합니다. Those in the heavenly marriage are calledeunuchs”; those soborn from the womb,are such as resemble the celestial angels; thosemade of men,are such as are like the spiritual angels; and thosemade so by themselves,are like angelic spirits, who act not so much from charity as from obedience.

 

해설

AC.394는 바로 앞 AC.393의 설명을 가인의 표에 직접 적용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상태에 계속 머물 수 없고, 결국 신앙을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하여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분리 때문에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새로운 길을 섭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의미하는 가인에게 아무도 폭력을 가하지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고 보존하셨다는 것이 이번 번호의 첫 번째 핵심입니다.

 

이 대목은 AC.392에서 이미 제시되었지만, AC.394에서는 그 이유가 훨씬 분명해집니다.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이유는 그 분리 자체를 승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가 완전히 멸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AC.393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했지만, 이후의 인간은 먼저 신앙에 관한 지식을 배우고 그 지식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의 지식 자체가 완전히 파괴되어 버리면 이후의 인간이 체어리티로 인도될 길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타락한 인간의 상태에서도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셨습니다.

 

여기서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의 보존은 단순히 어느 한 교리 체계를 역사적으로 존속시키는 문제가 아닙니다. 인류의 구원 가능성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더 이상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씀을 듣고 신앙의 지식을 배우며 그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인간의 타락 이후에도 주님께서 구원의 통로를 완전히 끊지 않으셨음을 보여 주는 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설명을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르카나라고까지 부릅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마19:12고자에 관한 주님의 말씀을 가져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가인의 표와 고자에 관한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결혼의 속뜻과 연결하고, 더 깊게는 천적 천사·영적 천사·천사적 영들의 서로 다른 상태를 설명하는 말씀으로 읽습니다.

 

여기서 먼저 천국의 결혼이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천국의 결혼은 가장 깊게는 주님과 천국의 결합을 가리키고, 인간 안에서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결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문맥에서는 특히 사랑과 신앙이 올바르게 결합된 상태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바로 이 결혼을 깨뜨린 데 있었습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독립적인 것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 뒤에 천국의 결혼이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결혼 안에 있는 자들이 고자들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의 성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19:12의 말씀을 상응적으로 읽으면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연적·자기적인 결혼 상태를 벗어나 천국의 결혼, 곧 선과 진리의 결합 안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고자는 육체적 조건 자체보다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표상으로 읽어야 합니다.

 

첫째, ‘어머니의 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은 천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AC.393에서 설명한 태고교회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천적 천사들은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합니다. 그들에게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은 처음부터 깊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신앙과 사랑의 분리를 경험한 뒤 다시 결합되는 방식보다, 처음부터 사랑 안에서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와 같습니다. 그래서 태로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들이라는 표현과 연결됩니다.

 

둘째, ‘사람에 의해 고자가 자들은 영적 천사들과 같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천적 천사처럼 처음부터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가 아니라, 밖에서 주어지는 신앙의 지식과 말씀을 통하여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아들입니다. AC.393에서 말한 홍수 후 영적 교회의 질서와 같습니다. 즉 외적으로 들은 진리와 배운 신앙이 수단이 되어 내적으로 체어리티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셋째, ‘스스로 그렇게 자들은 천사적 영들과 같은 자들이며, 이들은 체어리티로부터라기보다 순종으로부터 행한다고 합니다. 이 문장은 매우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천사적 영들이 체어리티가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행동의 직접적인 출발점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천적 상태는 사랑에서, 영적 상태는 진리와 양심을 통하여 체어리티에서 행하지만, 이 보다 외적인 상태에서는 먼저 이것이 주님의 명령이므로 행해야 한다는 순종이 더 직접적인 동기가 됩니다.

 

따라서 세 부류는 모두 같은 수준에서 나열된 세 가지 인간 유형이라기보다, 선과 진리가 결합되는 서로 다른 방식과 정도를 보여 줍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으로부터 직접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사는 배운 진리를 통하여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며, 천사적 영은 보다 외적으로 순종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질서의 목적은 결국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보존과 마19:12가 연결되는 이유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태고교회와 같은 천적 상태를 잃었어도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도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영적 길이 열렸고, 더 외적인 상태에서는 순종을 통하여 질서 안으로 들어오는 길도 남아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낮아질 때마다 그 상태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구원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가인의 가 단순한 보호 표지가 아니라 주님의 섭리를 보여 주는 중요한 상징인 이유입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은 인간의 타락이지만, 주님께서는 그 분리된 신앙 안에 남아 있는 진리의 지식까지 파괴되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훗날 체어리티를 받아들이는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가장 높은 질서를 잃었다고 해서 주님께서 구원의 모든 길을 닫아 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아진 상태에서도 다시 올라올 수 있는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이번 번호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천국의 결혼이라는 관점입니다. 가인 이야기를 단순히 신앙 대 체어리티의 싸움으로만 보면, 해결책이 어느 한쪽을 제거하는 데 있다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결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목표는 분리된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을 다시 결합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신 것도 바로 그 결합의 가능성을 보존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AC.394는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실패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매우 깊게 보여 줍니다. 주님은 인간이 천적 질서를 잃었다고 해서 인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인간이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했을 때에도 신앙의 지식을 보존하시고,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주실 길을 마련하십니다. 직접적인 퍼셉션이 사라진 뒤에는 양심의 길을, 더 외적인 사람에게는 순종의 길을 사용하시면서, 각 상태에서 인간을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이끄십니다.

 

결국 AC.394가인의 는 단순히 타락한 신앙을 살려 두신 사건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영원한 죽음 가운데 멸망하지 않도록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신 섭리의 표입니다. 그리고 마19:12의 세 종류의 고자에 관한 말씀은 인간이 서로 다른 상태와 방식으로 천국의 결혼, 곧 사랑과 신앙의 결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가장 높은 천적 상태를 잃어버린 인간에게도 주님께서는 영적 질서와 순종의 질서를 통해 다시 선과 진리의 결합으로 나아갈 길을 남겨 두셨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에 감추어진 아르카나 가운데 하나입니다.

 

 

 

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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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4:15)

 

AC.393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는 성격의 교회였으며, 심지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모든 것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이러한 성격으로 있을 없고,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여 신앙을 자체로 하나의 교리로 만들 것이 예견되었으므로, 그것들이 실제로 분리되도록 허용하시되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섭리하셨습니다. 신앙을 통하여, 다시 말해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체어리티를 받을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식(cognitio), 듣는 것이 먼저 오고, 지식 또는 들음을 통하여 체어리티,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게 하셨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없어야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태고교회에 있었던 퍼셉션을 대신하여,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뒤를 이었습니다.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하였는데, 이는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으며, 주님의 강림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그러했습니다. 천적 천사들과 영적 천사들이 구별되는 것도 바로 이것에 의해서입니다. Before we proceed to elucidate the internal sense of the words before us, it is necessary to know how the case is with faith. The most ancient church was of such a character as to acknowledge no faith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insomuch that they were unwilling even to mention faith, for through love from the Lord they perceived all things that belong to faith. Such also are the celestial angels of whom we have spoken above. But as it was foreseen that the human race could not be of this character, but would separate faith from love to the Lord, and would make of faith a doctrine by itself, it was provided that they should indeed be separated, but in such a way that through faith, that is, through the knowledges of faith, men might receive from the Lord charity, so that knowledge [cognitio] or hearing should come first, and then through knowledge or hearing,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might be given by the Lord, which charity should not only be inseparable from faith, but should also constitute the principal of faith. And then instead of the perception they had in the most ancient church, there succeeded conscience, acquired through faith joined to charity, which dictated not what is true, but that it is true, and this because the Lord has so said in the Word. The churches after the flood were for the most part of this character, as also was the primitive or first church after the Lords advent, and by this the spiritual angels are distinguished from the celestial.

 

해설

AC.393은 가인의 표에 대한 설명을 잠시 멈추고 신앙의 역사를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말씀의 속뜻을 계속 밝혀 나가기 전에, 신앙이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이어질 가인의 표를 이해하려면 먼저 태고교회에서 신앙과 사랑이 어떤 관계에 있었고, 이후 그 관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한 삽입 설명이 아니라 AC.392에서 말한 분리된 신앙의 보존을 이해하는 교리적 열쇠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에 속한 신앙외에는 어떠한 신앙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신앙을 따로 언급하려 하지도 않았다는 설명입니다. 그들에게 사랑과 신앙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두 개의 별도 항목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 있으면서 그 사랑을 통하여 신앙에 속한 것들을 퍼셉션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어떤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참이라고 믿은 다음 사랑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 내적으로 퍼셉션했습니다. 그래서 사랑과 신앙을 따로 떼어 나는 이것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본래적 질서와 맞지 않았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적 천사들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천적 천사의 상태 사이에 깊은 상응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천적 상태에서는 사랑이 중심이며 진리는 그 사랑 안에서 퍼셉션됩니다. 진리를 먼저 지적으로 확보하고 그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아니라, 선 안에서 진리를 보는 질서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천적 인간은 사랑에서 신앙으로라고 정리해 온 이유입니다.

 

그러나 인류가 계속 그러한 상태에 머물 수 없을 것이 예견되었습니다. 인간은 결국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교리로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의 핵심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 분리를 원하셨다고 이해하지 않는 것입니다. 분리는 인간의 타락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이 그렇게 될 것을 예견하시고, 이미 낮아진 상태에서도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섭리하셨습니다.

 

그 새로운 길이 바로 신앙에 관한 지식들에서 체어리티로나아가는 질서입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인간에게는 먼저 신앙에 관한 지식이 주어집니다. 사람은 말씀을 듣고 배우며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들음을 통하여 주님께서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주십니다. 따라서 순서는 달라집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했다면,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형성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먼저 지식만 충분히 쌓으면 나중에 자동으로 체어리티가 생긴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93은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고 두 번이나 강조합니다. 지식 자체가 체어리티를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진리를 듣고 배우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에게 체어리티를 주실 수 있는 수단과 길이 됩니다. 사람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으로 행하려 할 때 주님께서 그 안에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를 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질서에서도 생명의 근원은 여전히 주님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게 주어진 체어리티가 신앙과 분리될 없어야 아니라 신앙에서 주된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순서와 주도권을 명확히 구별합니다. 시간적·교육적 순서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질서와 주도권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된 것입니다. 이것은 AC.363에서 살펴본 원리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신앙이 먼저 배워질 수 있지만, 신앙이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며,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과 주된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신앙이 먼저다라는 말을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사람이 말씀을 듣고 진리를 배우는 교육적 순서에서 신앙의 지식이 먼저라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본질적이고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AC.393은 첫 번째 의미는 인정하지만 두 번째 의미는 분명히 부정합니다. 지식과 들음은 먼저 올 수 있지만, 그것을 통해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주된 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퍼셉션과 양심의 차이가 등장합니다. 태고교회에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는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하여 얻어지는 양심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이 양심은 퍼셉션과 같은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매우 정밀하게 양심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딕테이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딕테이트한다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처음에는 미묘해 보이지만 매우 큽니다. 퍼셉션을 가진 태고교회 사람은 사랑으로부터 어떤 것이 선하고 참된지를 내적으로 알아차렸습니다. 반면 양심을 가진 영적 인간은 먼저 말씀을 통해 진리를 배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에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진리이다라는 내적인 딕테이트를 받습니다. 즉 양심이 독립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되고 배운 진리를 진리로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해 주는 것입니다.

 

이 설명은 앞의 AC.359AC.370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AC.359에서는 가인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을 conscience dictated’,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반면 AC.370에서는 같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체어리티에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두 표현을 억지로 하나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93은 태고교회에 고유한 퍼셉션과 이후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을 통해 형성되는 양심이 서로 다른 영적 기능임을 분명히 합니다. 따라서 앞의 표현 차이도 그대로 보존하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과도기적 상태 안에서 퍼셉션의 어떤 흔적과 양심이라는 표현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특히 AC.393홍수 후의 교회들은 대부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고대교회의 양심을 시대적으로 무분별하게 섞어서는 안 됩니다. 홍수 후의 영적 교회에서는 말씀과 신앙의 지식이 먼저 주어지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며, 그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와 구별되는 영적 교회의 질서입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강림 후 원시교회 또는 초대교회도 이러한 성격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홍수 직후 어느 고대 종교집단만의 특수한 구조가 아닙니다.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먼저 듣고 배우며, 그 진리를 삶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에게서 체어리티를 받고, 그 결과 양심이 형성되는 것은 영적 교회의 기본적인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차이가 천적 천사와 영적 천사를 구별한다고 말합니다. 천적 천사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퍼셉션하고, 영적 천사는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되며 양심의 질서 안에서 살아갑니다. 둘 가운데 하나가 천국이고 다른 하나가 열등하여 천국이 아니라는 뜻은 아닙니다. 둘 다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만 그 받아들이는 방식과 질서가 다릅니다. 이것이 천적과 영적의 중요한 구별입니다.

 

이제 AC.392가인의 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직접 신앙에 속한 것을 퍼셉션하는 태고교회의 상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게 되었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시키기 시작했을 때, 주님께서는 단순히 그 신앙을 없애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지식이 보존되게 하시고, 훗날 그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를 받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분리를 승인하셨다는 뜻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에게도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질 수 있도록 신앙의 지식을 구원의 수단으로 보존하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것은 타락이지만, 그렇다고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을 파괴해 버리면 이후의 인간은 무엇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의 상태가 낮아진 바로 그 자리에서 새로운 길을 마련하십니다. 사랑에서 직접 진리를 퍼셉션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 말씀을 듣게 하시고, 신앙의 지식을 배우게 하시며, 그 지식을 통하여 체어리티를 주시고, 체어리티와 결합된 신앙으로부터 양심을 형성하십니다.

 

따라서 AC.393은 단순히 옛날에는 퍼셉션이 있었고 나중에는 양심이 생겼다는 교회사적 설명이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을 계속 이어 가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이 더 이상 천적 방식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인간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더 외적인 길을 통하여 다시 내적인 사랑과 체어리티로 인도하십니다.

 

결국 AC.393의 핵심은 순서는 바뀌었지만 목적은 바뀌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으로부터 신앙이 나왔습니다. 이후 영적 교회에서는 신앙의 지식이 먼저 오고 그것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집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독립하여 생명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분리될 수 없으며 신앙에서 주된 을 이루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신앙을 보존하신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분리된 신앙 자체를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의 지식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주어지고 신앙과 사랑의 결합이 회복될 수 있도록 길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AC.394, 창4:15, ‘가인의 표와 천국의 결혼 - 분리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4이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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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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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4:15)

 

AC.392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sacrilege) 됨을 의미합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셔서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Byvengeance being taken sevenfold on anyone who slays Cainis signified that to do violence to faith even when thus separated would be a sacrilege;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signifies that the Lord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 in order that it might be preserved.

 

해설

AC.392에서 드디어 창4장의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장면 가운데 하나인 가인의 가 등장합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속뜻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예상되는 것은 가인의 완전한 제거입니다. 그런데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고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어 그가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것과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여 그것이 보존되게 하셨다는 의미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보존승인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을 참된 신앙으로 인정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 그 신앙의 상태는 이미 충분히 밝혀졌습니다. 그것은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며 소멸시킨 신앙입니다. AC.379에서는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 단지 지식이라고까지 했습니다. 따라서 AC.392의 보존은 교리가 옳으니 보호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보존하십니까? AC.392는 아직 그 이유 전체를 풀어놓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단서를 줍니다. ‘이처럼 분리된 신앙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폭력을 가하는 것은 모독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안에 완전히 소멸시켜서는 안 되는 어떤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89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제 AC.392에서는 그 완전한 소멸을 막기 위해 신앙이 보존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는 가인의 악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보존의 표입니다. 주님께서는 잘못된 것을 잘못되지 않은 것으로 바꾸어 선언하시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상태 속에서도 아직 보존되어야 할 것을 구별하여 지키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주님의 섭리는 언제나 완전한 상태만을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이미 질서를 많이 무너뜨린 상태에서도 아직 남아 있는 선과 진리, 그리고 앞으로 회복의 가능성을 위해 필요한 것을 보존하십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셨다는 표현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distinguished faith in a particular manner입니다. 즉 가인의 표는 단순히 몸에 어떤 표시를 새겼다는 문자적 이미지에 머물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주님께서 이 신앙을 다른 것들과 구별하여 함부로 파괴되지 않도록 하셨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구별하셨는지는 뒤의 번호들을 더 읽어야 충분히 밝혀지겠지만, 적어도 AC.392에서는 구별하여 보존함이라는 두 요소가 핵심입니다.

 

여기서 도 눈에 띕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는 아직 일곱의 상응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일곱은 완전함을 뜻하므로 배의 복수는 완전한 형벌이다와 같은 식으로 미리 결론을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지는 번호에서 그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현재 AC.392에서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을 죽이는 ’, 곧 이처럼 분리된 신앙에 폭력을 가하는 일이 모독으로 간주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모독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모독은 단순한 오류나 악과 같지 않습니다. 거룩한 것과 관계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침해하거나 더럽히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따라서 가인의 신앙이 이미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아무렇게나 파괴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 안에서도 말씀에서 나온 진리의 지식이나 거룩한 것과 관련된 어떤 것이 남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AC.392만으로 그 구체적인 구조를 모두 확정하기보다, 이어지는 설명을 기다리면서 우선 분리된 신앙에도 함부로 폭력을 가해서는 되는 이유가 있다는 데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교회나 다른 사람의 신앙을 바라볼 때에도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만한 원리입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안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신앙적 요소를 한꺼번에 부수는 것이 반드시 선한 일은 아닙니다. 오류는 오류로 분별해야 하지만, 그 사람 안에 주님께서 보존하고 계시는 진리나 선의 가능성까지 함께 파괴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것은 AC.392의 직접적인 역사적 의미라기보다 그 원리에서 조심스럽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적용입니다. 이번 본문의 직접적인 대상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고대의 교회 상태입니다.

 

앞의 AC.389-391을 거쳐 이번 번호에 도달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AC.389에서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사람이 주님과의 결합에서 분리되어 자기의 것에 맡겨지고, 그 결과 악과 거짓이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킨다고 했습니다. AC.390에서는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이 끊임없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한다고 했고, AC.391에서는 악과 거짓 자체가 그 안에 형벌을 품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은 결국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주님의 보존이 개입합니다.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표는 형벌보다 자비의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가인은 자신의 상태가 가져오는 결과를 겪습니다. 지면에서 쫓겨나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며,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결과가 무제한적으로 진행되어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자유와 그 선택의 결과를 없애 버리지 않으면서도, 구원의 가능성을 위해 보존되어야 할 것을 지키십니다.

 

여기서 AC.384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는 표현을 곧바로 기술적인 의미의 리메인스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원문은 그곳에서 remains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표는 리메인스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지금 확정해 버리기보다는,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으며, 생명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이 이루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현재 본문에 더 충실합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이 보존을 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면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신앙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가인의 오류는 신앙이 존재했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두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해결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다시 체어리티와 올바른 관계를 이루도록 보존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선을 섬기도록 질서를 회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창4장의 가인 이야기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해서 이제 신앙은 나쁘고 체어리티만 남겨야 한다는 결론으로 갈 수 없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해답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가인은 그 질서를 뒤집었지만, 주님께서는 그렇다고 신앙 자체가 완전히 소멸되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십니다.

 

결국 AC.392에서 가인의 는 주님의 섭리가 얼마나 깊은지를 보여 주는 표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인간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내려갔지만, 주님께서는 그 잘못된 상태 안에서도 보존할 수 있는 것을 찾으시고 그것을 구별하여 지키십니다. 인간의 악을 선이라고 부르시지는 않지만, 악 때문에 아직 남아 있는 모든 선과 진리까지 함께 멸망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을 죽이는 자는 누구든지 벌을 배나 받으리라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셨다는 말씀은 단순한 범죄자 보호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심각하게 손상된 교회 상태 속에서도 주님께서 신앙을 특별히 구별하여 보존하시는 섭리를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목적은 가인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지키시고 마침내 선과 진리의 질서가 다시 이어질 길을 남겨 두시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AC.393, 창4:15,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홍수 후 교회의 양심 - 신앙과 체어리티의 새로운 질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창4:15) AC.393지금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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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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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91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이 모든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저세상에서 악령들의 상태를 보면 가장 분명하게 있습니다. 스스로 모든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린 자들은 이리저리 유리하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도망합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 어떤 공동체에 가게 되면, 공동체는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 즉시 그들의 성질을 알아차립니다. 저세상에는 그러한 퍼셉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쫓아낼 아니라 심하게 벌하기도 하며, 수만 있다면 죽이려 만큼 적의를 품습니다. 악령들은 서로 벌하고 괴롭히는 데서 가장 즐거움을 느끼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만족입니다. 지금까지는 악과 거짓 자체가 이러한 일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자체 안에 거짓의 형벌을 가지고 있고, 악은 자체 안에 악의 형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형벌들에 대한 두려움도 자체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The state of evil spirits in the other life shows most clearly that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afraid of everybody. Those who have deprived themselves of all charity wander about, and flee from place to place. Wherever they go, if to any societies, these at once perceive their character by their mere coming, for such is the perception that exists in the other life; and they not only drive them away, but also severely punish them, and with such animosity that they would kill them if they could. Evil spirits take the greatest delight in punishing and tormenting one another; it is their highest gratification. Not until now has it been known that evil and falsity themselves are the cause of this, for whatever anyone desires for another returns upon himself. Falsity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falsity, and evil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evil, and consequently they have in themselves the fear of these penalties.

 

해설

AC.391은 앞의 AC.390에서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있다고 한 설명을 스베덴보리가 사후세계에서 관찰한 악령들의 상태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모든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린 악령들은 이곳저곳을 유리하며 계속 도망합니다.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도 그곳의 영들은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 그들의 성질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쫓아내며 심하게 벌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영계의 장면 자체보다 그 장면을 설명하는 마지막 원리입니다. ‘거짓은 자체 안에 거짓의 형벌을 가지고 있고, 악은 자체 안에 악의 형벌을 가지고 있다.이것이 AC.391의 중심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저세상에는 사람의 내적 성질을 알아차리는 퍼셉션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외적인 말과 행동에 의해 상당 부분 가려질 수 있습니다. 악한 의도를 품으면서도 친절하게 말할 수 있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선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영계에서는 이러한 내적 성질이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악령이 어떤 공동체에 접근하면 그 공동체는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그 성질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것을 영계에 존재하는 퍼셉션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이 perception은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교회시대적 의미와 문맥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후세계에서 영들의 성질을 알아차리는 영적 지각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퍼셉션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완전히 동일한 현상이다라고 곧바로 등치하기보다, 같은 어휘가 영적 상태를 직접 알아차리는 능력이라는 넓은 의미망 안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런데 악령들을 몰아내고 벌하는 자들도 악령들이며,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서로 벌하고 괴롭히는 데서 가장 즐거움을 느낀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장면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사들이 악령들을 고문한다거나 주님께서 악령들에게 고통을 주도록 명령하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 자체의 성질을 보여 주는 묘사입니다. 악은 자기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으며, 지배하고 해치고 보복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랑을 선택한 영들이 함께 있게 되면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려는 바로 그 악이 서로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바로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고 합니다. 이것을 외부에서 작동하는 기계적인 인과응보 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자연계에서 반드시 똑같은 일을 당한다는 공식도 아닙니다. 문맥은 악의 사랑이 지배하는 영적 공동체의 질서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파괴하려는 사랑 안에 있다면, 나와 같은 사랑 안에 있는 자들 역시 나를 그렇게 대하려 합니다. 결국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향하게 한 악의 성질이 내가 살아가는 영적 환경의 성질이 되어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은 자체 안에 거짓의 형벌을 가지고 있고, 악은 자체 안에 악의 형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형벌이 악과 전혀 관계없이 밖에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악 자체가 파괴적인 결과를 품고 있습니다. 미움은 관계를 파괴하고, 속임은 신뢰를 파괴하며, 지배욕은 서로의 자유를 파괴합니다. 거짓은 사람이 현실과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그 잘못된 판단에 따라 더 깊은 악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따라서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서 고통과 불안과 충돌의 원인을 만들어 냅니다.

 

이 원리는 주님의 형벌을 이해할 때도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의 문자에는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벌하시며 멸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더 깊은 설명에서는 주님은 선 자체, 사랑 자체, 자비 자체이시며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악을 선택하고 그 악의 질서 안으로 들어갈 때 그 악 자체가 가진 결과를 경험합니다. 물론 주님의 섭리는 그 결과조차 가능한 한 제한하고 선한 목적을 위해 다스리지만, 악의 고통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악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AC.391의 마지막에 따라서 그들은 형벌들에 대한 두려움도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악령이 다른 악령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품고 있는 악의 성질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기회만 있으면 상대를 속이고 지배하고 괴롭히려 하므로 상대도 자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끊임없는 불안을 만들어 냅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서로를 연결하는 사랑과 자비의 결속이 없고, 결국 각자가 서로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됩니다.

 

이것은 AC.390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말씀의 이미지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두려움의 가장 깊은 원인이 외부의 추격자가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악과 거짓은 세상을 적대적인 곳으로 보게 하고, 다른 사람의 의도를 의심하게 하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품고 있는 악을 다른 사람도 자신에게 품고 있을 것이라고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위험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 두려움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이 되는 사랑의 성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자연계의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불안장애, 트라우마, 질병, 실제적인 위험 등으로 두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당신 안에 악과 거짓이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라고 적용하는 것은 AC.391의 문맥을 벗어난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체어리티를 완전히 빼앗아 버리고 악과 거짓을 자기 삶의 지배적인 원리로 삼은 악령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번호는 다른 사람의 심리 상태를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라 악 자체의 내적 성질을 이해하는 교리로 읽어야 합니다.

 

또한 이번 번호의 서로 죽이려 한다는 묘사도 자연계의 모든 악한 사람이 실제 살인을 원한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374AC.390에서 살펴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미움의 가장 깊은 성질 안에 상대의 선과 생명을 파괴하려는 방향이 있다고 봅니다. 영계에서는 외적인 사회 규범과 체면 때문에 감추어졌던 지배적인 사랑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므로 그 성질이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AC.389-391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매우 일관된 구조가 보입니다. AC.389에서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주님과의 결합에서 분리되고 자기의 것에 맡겨지며, 그 결과 생각은 거짓이 되고 의지는 악이 되어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킨다고 했습니다. AC.390에서는 그러한 악과 거짓의 상태가 끊임없는 두려움과 도망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91에서는 사후세계의 악령들을 통해 그 원인을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악과 거짓은 외부에서 형벌이 붙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형벌과 그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곧 나올 가인의 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가인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은 주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로 내려가면서 악과 거짓의 파괴적인 질서에 노출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상태를 방치하여 남아 있는 모든 것까지 파괴되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을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악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악과 거짓 자체가 가진 파괴력으로부터 아직 보존되어야 할 것을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준비가 더욱 갖추어집니다.

 

결국 AC.391은 형벌에 대한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악의 가장 깊은 형벌은 주님께서 악인에게 악을 돌려주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악 자체가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서 분리하고 서로를 적으로 만들며 두려움과 고통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는 주님과 사람을 결합시키고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킵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단순히 한쪽에는 상이 있고 다른 쪽에는 벌이 있다는 차이보다 훨씬 깊습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 안에서 서로의 선을 원하는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사랑과 악 안에서 서로를 해치려는 질서입니다. AC.391의 악령들이 경험하는 두려움과 형벌은 바로 그들이 선택하고 사랑한 악의 질서가 어떤 세계를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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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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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90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있는데, 이는 레위기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됩니다.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in continual dread of being slain, as is thus described in Moses:

 

33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36너희 남은 자에게는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37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앞에 있음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26:33, 36-37) Your land shall be a desolation, and your cities a waste, and upon them that are left of you I will bring softness into their heart in the land of their enemies, and the sound of a driven leaf shall chase them, and they shall flee as fleeing from a sword, and they shall fall when none pursueth, and shall stumble everyone upon his brother, as it were before a sword, when none pursueth. (Lev. 26:33, 3637)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16땅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17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18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19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20땅이 취한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같이 흔들리며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24:16-20) The treacherous deal treacherously, yea, in the treachery of the treacherous they deal treacherously.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he who fleeth from the noise of the fear shall fall into the pit, and he that cometh up out of the midst of the pit shall be taken in the snare; the transgression thereof shall be heavy upon it, and it shall fall, and not rise again. (Isa. 24:1620)

 

예레미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Jeremiah: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내가 두려움을 사방에서 네게 오게 하리니 너희 사람이 앞으로 쫓겨 나갈 것이요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자가 없으리라 (49:5) Behold, I bring a dread upon thee, from all thy circuits shall ye be driven out every man toward his faces, and none shall gather up him that wandereth. (Jer. 49:5)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In Isaiah:

 

16이르기를 아니라 우리가 타고 도망하리라 하였으므로 너희가 도망할 것이요 이르기를 우리가 빠른 짐승을 타리라 하였으므로 너희를 쫓는 자들이 빠르리니 17 사람이 꾸짖은즉 사람이 도망하겠고 다섯이 꾸짖은즉 너희가 도망하고 너희 남은 자는 겨우 산꼭대기의 깃대 같겠고 산마루 위의 기치 같으리라 하셨느니라 (30:16-17) We will flee upon the horse, therefore shall ye flee; and, we will ride upon the swift, therefore shall they that pursue you be rendered swift; one thousand shall flee at the rebuke of one, at the rebuke of five shall ye flee. (Isa. 30:1617)

 

말씀의 구절들과 밖의 여러 구절에서 거짓과 가운데 있는 자들은 도망하는 자들(fleeing), 그리고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는 자들(fear of being slain) 묘사됩니다. 그들은 자기를 보호해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모두 이웃을 미워하므로 서로 죽이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In these and other passages of the Word, those who are in falsity and evil are described asfleeing,and as infear of being slain. They are afraid of everybody, because they have no one to protect them. All who are in evil and falsity hate their neighbor, so that they all desire to kill one another.

 

해설

AC.390은 바로 앞 AC.389에서 설명한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의 의미를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레위기, 이사야, 예레미야에서 사람들이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고, 작은 소리에도 놀라며, 두려움에서 달아나다가 함정에 빠지고, 사방으로 흩어지는 장면들을 가져옵니다. 이 인용들의 공통점은 실제로 누군가가 그들을 죽이려고 쫓아오는가보다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데 있습니다. 두려움의 근원이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내적 상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26:33,36-37은 이 점을 특히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만 들어도 칼을 피해 달아나는 것처럼 도망하고, 심지어 쫓는 자가 없어도엎드러집니다. 실제 위험의 크기와 그들이 느끼는 공포가 일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을 인용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상태 자체가 사람 안에 불안을 만들기 때문에 외부의 작은 자극도 자신을 위협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24:16-20에서도 같은 구조가 나타납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려고 도망하지만 함정에 빠지고, 함정에서 올라오면 다시 올무에 걸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불운이 계속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자기 힘으로 안전을 확보하려 할수록 또 다른 두려움 속으로 들어가는 영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내적인 안전을 잃었기 때문에 장소를 바꾸거나 외적인 조건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두려움의 근본 원인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49:5두려움이 사방에서 온다는 표현도 같은 상태를 보여 줍니다. 사방이 모두 위협으로 느껴지고 각자가 흩어지지만 도망하는 자들을 모을 가 없습니다. 그리고 사30:16-17에서는 빠른 것을 타고 도망하겠다고 하지만 오히려 쫓는 자들이 더 빨라지고, 한 사람의 꾸짖음에도 천 사람이 도망합니다. 자기 힘으로 위험에서 더 빨리 벗어나려 할수록 두려움도 함께 빨라지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모든 장면을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의 표상으로 읽습니다.

 

그렇다면 왜 악과 거짓은 이러한 두려움을 만들어 냅니까? AC.389가 이미 그 근본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리면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하고, 주님과 분리되면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집니다. 그 상태에서는 생각이 거짓으로, 의지가 악으로 향합니다. 이제 AC.390은 그 상태가 인간관계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자기를 보호해 자가 아무도 없다고 느끼게 되고, 그래서 모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여기서 자기를 보호해 자가 아무도 없다는 말은 단순히 사회적으로 친구나 후원자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깊게는 주님과의 결합에서 오는 영적 보호와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동시에 이웃과도 결합시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단순히 자기에게 유익한가 해로운가에 따라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관계의 중심에 자기 사랑이 놓이게 되고, 다른 사람도 경쟁자나 위협으로 보이기 쉬워집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마음으로 바라보므로 다른 사람도 자신을 그렇게 바라볼 것이라고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모두 이웃을 미워하므로 서로 죽이고자 한다고 매우 강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악한 상태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연계에서 실제 살인을 계획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374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미움을 살인의 내적 뿌리와 연결합니다. 외적인 법, 명예, 손실에 대한 두려움, 사회적 규범 등의 제약 때문에 손으로 살인을 행하지 않을 수 있지만, 상대가 없어지기를 바라거나 그의 선을 파괴하려 하고 그의 불행을 기뻐하는 미움 속에는 영적인 의미에서 상대를 제거하려는 성질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90두려움도 모든 자연적인 두려움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위험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인간의 정상적인 보호 반응입니다. 질병이나 사고, 전쟁이나 범죄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악과 거짓 가운데 있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것은 악과 거짓이 지배적인 원리가 되었을 때 생기는 영적인 두려움입니다. 실제로 쫓는 자가 없어도 모두를 적으로 느끼고, 자기 안의 미움과 불신 때문에 다른 사람도 자신을 해칠 것이라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도 새롭게 보입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을 저지른 가인이 이제 자신도 살해당할까 두려워하는 장면입니다.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진 신앙이 악과 거짓에 의해 자신에게 남아 있는 생명마저 파괴될 것을 두려워하는 상태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고 이제 자신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합니다. 체어리티를 파괴하는 원리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죽음의 위협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번호의 목적은 악인은 항상 공포 속에 사니 그것이 벌이다라고 말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과 거짓 자체가 왜 평안과 안전을 만들어 낼 수 없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악은 다른 사람과의 결합을 깨뜨리고, 거짓은 현실과 진리에 대한 시야를 왜곡합니다. 그 결과 사람은 점점 자기 자신 안에 갇히고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못하며 모든 것을 자기에게 대한 위협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악과 거짓의 형벌은 외부에서 임의로 덧붙여지는 것만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이미 파괴와 두려움의 결과를 품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합을 만듭니다. 이것이 모든 자연적 위험을 없애 주거나 신앙인이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영적인 중심에서는 차이가 생깁니다. 자기 자신만을 의지하여 모든 사람을 잠재적 위협으로 바라보는 대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웃과의 관계를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AC.389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고 한 뒤 AC.390이 두려움을 설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대조를 보여 줍니다.

 

이번에 인용된 네 성경 구절도 각각 독립적인 새로운 교리를 제시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의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함’, 이사야의 두려움에서 도망하다 함정에 빠짐’, 예레미야의 사방에서 임하는 두려움’, 다시 이사야의 사람의 꾸짖음에도 사람이 도망함은 모두 하나의 상태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내적인 결합과 보호를 잃었기 때문에 외부 전체를 위협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네 인용은 하나의 증거 묶음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결국 AC.390은 가인의 두려움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설명합니다. 가인을 두렵게 만드는 가장 깊은 원인은 밖에서 그를 찾아다니는 어떤 적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주님과의 결합에서 멀어진 그의 영적 상태입니다. 악과 거짓은 사람을 다른 사람과 분리하고, 그 분리는 불신과 두려움을 낳으며, 마침내 남아 있는 생명까지 파괴하려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다음 이야기는 예상 밖의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가인이 죽임당할 것을 두려워할 때 주님은 그를 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따라서 AC.390가인의 직전에서 인간의 두려움과 주님의 보존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마지막 준비라고 볼 수 있습니다.

 

 

 

AC.391, 창4:14,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 형벌을 품고 있습니다 - 악령들이 서로 두려워하는 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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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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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9

그를 만나는 자마다 그를 죽이리라(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따라 나옵니다. 까닭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릴 그는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합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분리가 있고, 분리가 있는 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자기의 (own) 맡겨집니다.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죽이는 ,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That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signifies that every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follows from what has been said. For the case is this. When a man deprives himself of charity, he separates himself from the Lord, since it is solely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that conjoin man with the Lord. Where there is no charity, there is disjunction, and where there is disjunction, man is left to himself or to his own; and then whatever he thinks is false, and whatever he wills is evil. These are the things that slay man, or cause him to have nothing of life remaining.

 

해설

AC.389는 창4:14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말이 왜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앞의 AC.385에서 그 의미를 먼저 제시했고, 이제 이번 번호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 논리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리면 주님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주님과 분리되면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지며, 그렇게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생각하는 것은 거짓이 되고 의지하는 것은 악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악과 거짓이 사람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속뜻에서 죽임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릴 라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체어리티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등을 해석하면서 계속 확인해 온 원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을 받아들이고 선을 거부함으로써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강한 말을 합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이것은 체어리티를 단순히 신앙생활에 추가되는 좋은 행실 정도로 보는 관점과 전혀 다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생명의 결속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사랑이나 선행이 주님과의 결합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87에서 바로 확인했듯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를 사람이 받아들여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살아낼 때, 그 체어리티 안에서 사람은 주님과 결합됩니다.

 

따라서 오직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는 말은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가인 이야기 전체가 보여 준 것처럼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둘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진리는 선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결국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부정하는 것은 체어리티 없이도 신앙만으로 주님과 결합될 있다는 가인의 원리입니다.

 

이어지는 분리가 있는 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자기의 것에 맡겨진다는 문장은 이번 번호의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 살아갈 때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만, 주님과의 결합을 거부하여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면 인간의 고유한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다는 것은 인간이 참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의 것에 갇히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과 의지가 함께 등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생각은 진리와 거짓의 측면에, 의지는 선과 악의 측면에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것만으로 살아가면 이해의 영역에서는 거짓이, 의지의 영역에서는 악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인간의 모든 자연적 사고와 의지를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도 자기의 것에서 올라오는 악한 충동과 거짓된 생각이 있는 동시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들과 싸우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것은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의 것에 맡겨진 상태입니다. 즉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것은 악과 거짓이지만,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의지하고 생각하며 행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AC.379의지가 실제 사람이다라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악하게 산다면 실제로는 악을 의지하는 것이므로 거기에 신앙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89에서는 그 문제를 한 단계 더 근원적으로 설명합니다. 주님과의 결합을 잃고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의지는 악으로, 생각은 거짓으로 기울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변화는 단순히 생각의 내용을 바꾸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의지 안에 받아들이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살아가는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의 바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가인을 죽이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를 찾아오는 어떤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죽인다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입니다. 따라서 영적 죽음은 단순히 어떤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참된 생명에 속한 것이 사람 안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384와 매우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인이 두려워하는 죽임은 무엇이겠습니까? 악과 거짓이 계속 지배하여 아직 남아 있는 생명에 속한 것마저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AC.389의 마지막 표현인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한다는 말은 AC.384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는 말과 정확히 긴장을 이룹니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죽음의 위험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존이 필요합니다.

 

이제 가인의 가 왜 주어지는지에 대한 배경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잘못된 교리를 옳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그 결과 가인은 선과 진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생명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다면,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완전히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보존의 섭리가 필요합니다. ‘가인의 는 바로 이 문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AC.389는 가인 이야기의 핵심 교리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고, 체어리티의 상실은 주님과의 분리를 가져오며, 그 분리는 사람을 자기의 것에 맡겨지게 합니다. 자기의 것만으로는 생각이 거짓으로, 의지가 악으로 향하고, 악과 거짓은 마침내 사람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신앙의 생명 자체를 그 근원이신 주님과의 결합에서 떼어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반대 방향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자기의 것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도 주님에게서 오고 진리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자기 것처럼 의지하고 생각하고 행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의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을 보면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가인의 길이 체어리티의 상실에서 자기의 , 그리고 악과 거짓과 죽음으로내려가는 길이라면, 거듭남의 길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체어리티와 신앙이 다시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을 이루는 길입니다.

 

 

 

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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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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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8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된다는 것은 앞에서와 같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 a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means as before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해설

AC.388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된다는 것이 앞에서와 같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을 의미한다고 짧게 확인합니다. 여기서 앞에서와 같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이 표현의 의미는 이미 AC.380에서 처음 제시되었고, AC.382에서는 예레미야애가, 아모스, 호세아, 예레미야, 이사야의 여러 구절을 통해 자세히 확증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는 같은 설명을 반복하지 않고 그 의미를 창4:14에 그대로 적용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바로 앞의 AC.386-387과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AC.386에서는 지면에서 쫓겨나는 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고, AC.387에서는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388에서는 그 결과를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이라고 합니다. 즉 진리에서 분리되고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 자체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에게 신앙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교리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로 무엇이 참된 진리이고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영적인 유리함입니다.

 

따라서 피하며 유리한다는 것은 단순한 방황이 아니라 영적 중심과 방향을 잃은 상태입니다. AC.382에서 물을 찾아 이 성읍에서 저 성읍으로 유리하지만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바로 이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계속 진리를 찾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진리가 지향해야 할 선을 잃었기 때문에 어디에서 참된 만족을 얻어야 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AC.388이 이 설명을 길게 반복하지 않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이미 앞에서 충분히 확증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 결과를 전체 흐름 속에서 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됨’,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됨’,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함은 서로 별개의 세 가지 형벌이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붕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설명하는 연속된 상태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결과 신앙이 더 순수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과 진리 모두를 잃고 방향 없이 유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짧지만 분명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서만 선과 진리를 제대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선은 진리를 통하여 형태를 얻습니다. 이 둘의 결합이 깨어지면 사람은 지식을 가지고 있어도 영적으로는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의 유리함은 바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결국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주는 표상입니다.

 

 

 

AC.389,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체어리티를 잃으면 왜 악과 거짓에 맡겨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그를 만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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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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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7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hid from thy faces)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여호와의 얼굴(faces of Jehovah)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얼굴 자비이며,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님의 얼굴(faces) 신앙의 선들을 의미합니다. That to behid from thy faces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the faith of love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thefaces of Jehovah. Theface of Jehovah,as before said, is mercy, from which proceed all the goods of the faith of love, and therefore the goods of faith are here signified by hisfaces.

 

해설

AC.387은 창4:14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리니라는 말을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이라고 해석하고, 그 근거를 여호와의 얼굴의 상응에서 찾습니다. 앞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를 의미하며, 그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얼굴이라는 한 상응어를 설명하는 짧은 문장이면서도, 선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밝혀 주는 번호입니다.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표현에서는 하나님께서 얼굴을 보이시기도 하고 감추시기도 하며, 얼굴을 사람에게 향하시거나 돌리시는 것처럼 묘사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 자체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은 언제나 사랑이시며 자비이십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주님께서 어느 순간 자비를 거두시고 가인에게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이 아니라, 가인이 그 자비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를 설명하면서 계속 지켜 온 원리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과 거짓으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태양은 계속 빛을 비추고 있지만 사람이 등을 돌리거나 문을 닫으면 어둠 가운데 있게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물론 이것은 이해를 위한 비유일 뿐이지만,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상태가 주님의 자비가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그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의 상태라는 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AC.387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여호와의 얼굴이 자비일 뿐 아니라 자비로부터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번 번호에서 매우 중요한 문장입니다. 사람에게 있는 참된 선의 근원을 사람 자신에게 두지 않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여호와의 얼굴, 곧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사람이 선을 의도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선의 최초 근원이 인간의 proprium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사람이 자유롭게 받아들이고 자기 삶에서 의지하고 행할 때 그것이 사람 안에서 신앙의 선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종교적인 위로가 사라졌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훨씬 깊게는 신앙에 생명을 주는 선의 근원과의 결합을 잃은 상태입니다.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두려 했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것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체어리티를 제거한 결과는 신앙만 깨끗하게 남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고, 결국 그 선의 근원이신 주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사랑의 신앙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참된 신앙은 사랑과 독립하여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이 참된 신앙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신앙에 속한 이라는 표현은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것으로 놓은 뒤 나중에 결합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신앙 자체가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그 신앙 안에서 선이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인이 주장했던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정반대입니다.

 

AC.386AC.387을 나란히 놓으면 창4:14의 두 표현도 아름답게 대응합니다. ‘지면에서 쫓겨남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은 사랑의 신앙에 속한 선에서 분리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진리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선의 측면입니다. 결국 가인의 길은 진리만 잃는 것도 아니고 선만 잃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결과 선과 진리 모두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어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되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된다는 설명은 바로 이 두 가지 분리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85-387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자, 선과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유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킬 위험에 놓입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한 하나의 교리적 오류가 점차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를 흔드는 결과로 발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을 주님의 거절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바로 다음 전개가 그것을 더욱 분명히 보여 줍니다. 가인은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졌다고 느끼고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두려워하지만, 주님은 그를 완전히 버려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보존하십니다. 주님의 얼굴이 자비라는 AC.387의 선언은 이후 가인의 를 이해하는 열쇠 가운데 하나가 됩니다. 인간이 자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 빠졌어도 주님의 자비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84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이 남아 있었다고 한 것도 여기와 연결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 선의 근원이 가인 자신에게 있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가 모든 선의 근원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가인에게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에게서 온 것이며, 주님께서는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하지 못하도록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의 가인의 표를 단순한 형벌의 완화가 아니라 주님의 보존 섭리와 연결하여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결국 AC.387의 중심은 여호와의 얼굴은 자비라는 짧은 선언에 있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단지 주님을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에서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됩니다. 반대로 그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그 자비에서 나오는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가인의 비극은 주님께서 자비를 거두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그 자비에서 나오는 사랑의 신앙의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 데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가인에게도 주님은 보존의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것이 곧이어 나타날 가인의 를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준비가 됩니다.

 

 

 

AC.388, 창4:14, ‘피하며 유리하는 자 -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는 상태’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8‘땅에서 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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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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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4:14)

 

AC.386

지면에서 쫓겨나는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ground)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순수한 의미에서는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앞에서 보여 것처럼 교회가 고백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말의 의미는 반드시 다루는 주제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잘못 고백하는 자들, 분열 또는 이단을 고백하는 자들도 역시 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면에서 쫓겨나는 (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That to be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i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ground,which, in the genuine sense, is the church, or the man of the church, and therefore whatever the church professes, as shown above. The meaning of a word necessarily varies with the subject treated of, and therefore even those who wrongly profess faith, that is who profess a schism or heresy, are also calledground. Here however to be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signifies to be no longer in the truth of the church.

 

해설

AC.386은 바로 앞 AC.385에서 지면에서 쫓겨나는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 출발점은 의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순수한 의미에서는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교회가 고백하고 가르치는 것들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장소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교회의 진리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더 이상 그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문장은 어떤 말의 의미는 반드시 다루는 주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땅은 언제나 교회다’, ‘물은 언제나 진리다’, ‘빛은 언제나 신앙이다라는 식으로 하나의 자연적 대상에 하나의 영적 의미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상응의 중심은 있지만, 실제 본문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그 단어가 놓여 있는 전체 문맥과 현재 다루고 있는 영적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바로 이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순수한 의미에서 을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곳이며, 교회의 사람 역시 선과 진리가 심어지는 하나의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앞의 AC.377에서도 사람 자신이 이며 또한 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안에 선들과 진리들이 심어지면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이 심어지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땅이라는 상응의 중심에는 무엇인가가 심어지고 받아들여지는 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가인의 분열이나 이단도 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바로 이번 번호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앙을 잘못 고백하는 자들, 곧 분열 또는 이단을 고백하는 자들도 하나의 이라고 불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어떤 교리적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배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선한 교회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그 땅에 심어져 있으며, 어떤 교리가 그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1에서 땅을 간다는 표현이 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었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가는 것은 좋은 씨를 심고 열매를 얻기 위한 긍정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문맥의 은 이미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간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열된 교리를 계속 배양하고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경작이라는 이미지도 현재 다루는 주제가 무엇인가에 따라 속뜻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상응의 의미가 문맥에 따라 아무렇게나 바뀐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만일 상응의 의미가 아무런 질서 없이 매번 달라진다면 말씀의 내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읽을 수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임의성이 아닙니다. ‘에는 여전히 교회, 교회의 사람, 그리고 그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는 교리와 같은 일관된 의미망이 있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인지, 아니면 그것을 왜곡하여 분열과 이단을 받아들인 상태인지에 따라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응은 고정된 낱말사전도 아니지만 무제한적인 상징 놀이도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의미망과 현재의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AC를 읽는 데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번호에서 =교회라고 배웠다고 해서 이후 모든 을 무조건 교회라는 한 단어로 바꾸어 읽으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처럼 교회의 사람’, ‘교회가 고백하는 ’, 심지어 왜곡된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까지 그 의미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응어를 만날 때 단어는 무엇을 뜻하는가?만 묻기보다 바로 문맥에서 의미로 사용되는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이제 이러한 원리를 현재 구절에 적용하면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다시 여기서는이라고 범위를 한정합니다. 여기서 그것은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을 의미합니다. 즉 가인은 단순히 자신이 살던 토지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교회의 진리 안에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단이나 외적인 교회 조직에서 제명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교회는 사람 안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살아갈 때 그 사람 안에 교회가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여전히 교회에 속해 있고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며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진리를 삶에서 거부한다면 내적으로는 교회의 진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가인의 추방은 바로 이러한 내적인 분리를 보여 줍니다.

 

또한 여기서도 주님께서 먼저 가인을 진리 밖으로 내던지셨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저주가 선에서 돌아선 상태를 의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인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확증한 분열 때문에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진리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면 진리의 생명을 잃고, 결국 무엇이 진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AC.382피하며 유리함과 이번 번호의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됨은 같은 영적 쇠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AC.386은 짧은 번호이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칩니다. 하나는 가인의 지면에서 쫓겨남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상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의 상응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원리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다루는 주제에 따라 의미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상응을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변화도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일관된 상응 질서와 현재의 문맥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상응어의 뜻을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그 상응이 지금 이 문맥에서 왜 그렇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이해하는 것입니다.

 

 

 

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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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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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4:14)

 

AC.385

지면에서 쫓겨나는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hid from thy faces)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된다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To be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to behid from thy facessignifie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good of faith of love; to be a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is not to know what is true and good;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signifies that all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해설

AC.385는 창4:14의 네 표현을 차례로 해석하면서 가인이 처한 영적 상태가 얼마나 위태로워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지면에서 쫓겨나는 은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이고,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것이며,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가 되는 것은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뜻입니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떨어진 상응들이 아니라 하나의 영적 붕괴가 진행되는 순서를 보여 줍니다.

 

먼저 지면에서 쫓겨나는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을 의미합니다. 앞에서 은 문맥에 따라 사람 자신, 교리, 그리고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자리 잡은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표현을 교회의 진리와의 단절로 해석합니다. 가인은 신앙을 높이려 했지만, 체어리티에서 신앙을 분리함으로써 결국 교회의 진리 자체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2에서 보았던 역설과 같습니다. 진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그 결과 무엇이 진리인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하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모든 선에서 분리되는 을 의미합니다. 여기서는 진리의 상실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갑니다. 단지 무엇이 참인지 알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받는 신앙의 선과도 분리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주님의 얼굴은 단순한 외적 형상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사랑과 자비, 선의 현존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에서 숨겨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얼굴을 돌리셨다는 뜻으로 이해하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 때문에 주님에게서 끊임없이 흘러오는 사랑과 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저주와도 같은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시고 그에게서 선과 진리를 빼앗으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스스로 그것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가 변합니다. 그러므로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표현은 주님의 부재라기보다 인간 쪽에서 일어난 수용 능력의 상실을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 안전합니다.

 

세 번째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AC.380AC.382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는 을 의미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이 표현이 다시 나오는 것은 앞의 두 상태가 실제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되면, 결국 선과 진리를 분별할 방향을 잃습니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이 많은 종교적 지식을 가지고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지식을 선을 위해 사용할 생명의 중심을 잃으면 무엇이 실제로 선이며 무엇이 실제로 진리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을 의미합니다. 문자적으로 읽으면 가인이 다른 사람에게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하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상태가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파괴될 위험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자연적인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아직 남아 있는 영적인 것을 소멸시키는 의미로 읽어야 합니다.

 

바로 이 점에서 AC.384가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고백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85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말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존재가 다시 멸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되어 있는 어떤 것이 악과 거짓에 의해 완전히 소멸될 위험을 말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이어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가인의 가 왜 필요한지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이 됩니다.

 

다만 여기서도 AC.384선의 어떤 을 곧바로 전문적인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직 그렇게 부르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가인에게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으며, 이제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파괴할 위험이 있었다는 정도입니다. 이후 스베덴보리가 가인의 표와 보존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본 뒤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이 더 안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가인의 두려움은 단순한 자기보존의 공포 이상으로 읽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뒤에도 신앙에 속한 어떤 지식과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악과 거짓에 완전히 삼켜지면 그것마저 없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섭리는 단지 완전한 사람이나 온전한 교회만을 보존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아직 보존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시고,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여기서 앞으로 나올 가인의 의 의미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자인 가인을 왜 하나님께서 보호하시는지가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가인은 한 개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남아 있는 신앙에 속한 모든 것까지 즉시 소멸되도록 허용하시는 것이 주님의 목적은 아닙니다. 악과 거짓 가운데에서도 아직 보존될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이 점은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킨다는 표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악과 거짓은 주님에게서 오는 어떤 독립된 형벌의 도구가 아닙니다. 악은 선을 파괴하고 거짓은 진리를 왜곡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자신 안에 남아 있는 선과 진리를 더욱 밀어냅니다. 따라서 악과 거짓에 의한 멸망은 외부에서 임의적으로 부과되는 형벌이라기보다 사람이 악과 거짓을 받아들임으로써 영적 생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과정입니다.

 

AC.385의 네 표현을 다시 연결하면 흐름이 매우 분명합니다. 먼저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됩니다. 이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에서 분리됩니다. 그러자 무엇이 진리고 선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악과 거짓이 아직 남아 있는 것마저 완전히 파괴할 위험에 이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단순한 교리상의 작은 차이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 결합을 깨뜨리면 결국 둘 모두를 잃어버리는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가장 위태로운 지점에서 창4의 이야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가인이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말한 뒤 주님은 그를 즉시 멸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에게 표를 주어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십니다. 따라서 AC.385는 단지 가인의 멸망을 선언하는 번호가 아니라, 왜 그에게 보존이 필요했는지를 보여 주는 번호이기도 합니다.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고, 모든 악과 거짓이 그것을 완전히 파괴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가인의 에서는 잘못된 상태를 승인하지 않으면서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AC.386, 창4:14,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지면에서 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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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4, 창4:13, ‘가인에게도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 라멕에 이르러 소멸되는 체어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창4:13) AC.384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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