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7을 읽으면 ‘악한영들은물러가고선한영들이가까이오며,천적천사들도가까이온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앞의 AC.50에서는 사람마다 적어도 두 영과 두 천사가 함께 있다고 했습니다. 그때 ‘두영’을 악한 영들로 이해했다면 여기서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AC.87의선한영들은갑자기어디에서등장한것인가?’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앞에서 가졌던 전제 하나를 바로잡는 것이 좋습니다. ‘영들’이라는 말 자체를 언제나 ‘악한영들’과 같은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87만 보아도 스베덴보리는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따라서 어떤 번호에서 단순히 ‘영들’이라고 했을 때 그것을 자동으로 악한 영들이라고 확정하기보다, 그 번호의 문맥과 스베덴보리의 직접 설명을 따라 판단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AC.50의 ‘두영’에 대한 앞선 설명도 수정해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50이 사람과 영계 및 천국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영들’과 ‘천사들’을 구별했다고 해서, 거기서 말한 ‘영들’이라는 명칭 자체가 곧 ‘악한영들’을 뜻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영’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선악을 확정하는 명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AC.87은 같은 ‘영들’ 가운데 ‘악한영들’과 ‘선한영들’을 명시적으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렇다면 AC.87에서 왜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을 따로 말할까요? 여기서는 원문이 말하는 데까지 정확히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이 가까이 오며 천적 천사들도 가까이 옵니다. 그리고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어 멀리 달아납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선한영들’과 ‘천적천사들’은 같은 명칭으로 묶이지 않고 서로 구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AC.87한 번호만 가지고 이 두 부류의 존재론적 차이와 영계에서의 정확한 위치, 역할, 상태를 모두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영들은천사들보다아래단계의존재들이다’, ‘아직완전히확정되지않은상태의존재들이다’, ‘선한영들은인간을더나은상태로이끄는역할을한다’는 식으로 전체 구조를 먼저 완성하면 AC.87이 직접 말하지 않은 내용까지 섞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구별은 스베덴보리가 영들의 세계와 천국, 영들과 천사들의 상태를 직접 설명하는 곳에서 차례로 확인하는 편이 안전합니다.
AC.87에서 지금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충분합니다. ‘영들’이라는 말은 곧 ‘악한영들’이라는 고정된 뜻이 아니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악한 영들과 선한 영들을 분명히 구별합니다. 또한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도 서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을 때 ‘영’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미리 정해 둔 하나의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하기보다, 그 문맥에서 어떤 영들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용어 문제를 넘어 앞으로 AC를 읽는 데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우리가 상응을 고정된 사전처럼 사용하지 않기로 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계의 존재들을 가리키는 명칭도 한 번 정한 설명을 모든 번호에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50은 AC.50의 문맥에서, AC.87은 AC.87의 문맥에서 먼저 읽어야 하며, 여러 번호가 충분히 쌓였을 때 스베덴보리 자신이 보여 주는 전체 구조를 따라 정리해야 합니다.
따라서 ‘선한영들은갑자기어디에서등장했는가?’라는 질문에 지금 가장 정확하게 답하면 이렇습니다. 선한 영들이 AC.87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앞서 ‘영들’을 너무 빨리 ‘악한영들’로만 한정해서 이해했던 것입니다. AC.87은 그 이해를 바로잡아 줍니다. 영들 가운데 악한 영들도 있고 선한 영들도 있으며, 이 번호에서는 천적 인간에게서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자세한 영들과 천사들의 질서는 앞으로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을 열어 줄 때 따라가면 됩니다. (AC.87심화1)
이장의끝에서는,이세상에머무는동안이와다르게생각했던사람들의몇가지사례를제시하겠습니다. At the end of the chapter, several examples will be given of those who during their abode in this world had thought otherwise.
해설
AC.323은 한 문장으로 된 매우 짧은 글이지만, 앞의 AC.320-322를 마무리하면서 이 장 끝에 나올 실제 사례들을 미리 예고하는 연결고리입니다. 여기서 ‘이와다르게생각했던사람들’이란 앞에서 설명한 사후의 인간 상태를 지상에 있을 때 믿지 않았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간 직후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AC.321에서는 영의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탁월하다고 했으며, AC.322에서는 그것을 시각과 청각, 후각과 촉각, 욕망과 애정, 사고와 언어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설명했습니다. AC.323은 이제 이러한 사실을 지상에서 믿지 않았던 사람들의 사례를 이 장 끝에서 보여 주겠다고 예고합니다.
이 점은 스베덴보리가 사후세계에 관하여 말하는 방식에서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앞의 AC.322에서 자신이 ‘수천번반복된경험’을 통하여 영들의 감각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섬세하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후의 인간을 전혀 다르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실제로 저세상에서 무엇을 경험하는지를 사례로 제시하겠다고 합니다. 즉 자신의 설명을 추상적인 교리적 진술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자신이 경험했다고 말하는 구체적인 사례로 이어 가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와다르게생각했다’는 것은 단순히 사후세계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는 뜻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문맥을 따르면, 사람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가며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말한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능력들이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더 완전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경우까지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323은 또한 AC.320-322가 창세기 4장의 속뜻과 직접 연결된 본문이 아니라, 창4를 시작하기 전에 삽입된 사후세계에 관한 연속 기사라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이 짧은 기사는 여기서 일단 멈추지만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창4의 속뜻을 설명한 뒤 장의 끝에서 다시 이 주제로 돌아와, 앞에서 말한 사실들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의 사례를 제시하겠다고 합니다.
따라서 AC.323의 역할은 새로운 사후세계 교리를 하나 더 가르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의 세 글에서 말한 것을 기억하게 하면서 ‘뒤에서실제사례를통해다시확인하겠다’고 약속하는 데 있습니다. AC.320-323을 통해 먼저 붙들어야 할 핵심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증언에 따르면 육체의 죽음은 인간 존재의 소멸이 아니며, 사람은 사후에도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짧은 사후세계 기사를 잠시 내려놓고, AC.324부터 본격적으로 창세기 4장의 속뜻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영들이육체안에서살때보다훨씬더섬세한감각을지니고있지않다는그릇된생각을조심해야합니다.저는수천번반복된경험을통하여사실은그반대임을알고있습니다.영의본성에관하여미리형성된관념때문에이것을믿지않으려는사람이있다면,그가저세상에들어갔을때자신의경험을통해배우게하십시오.그러면믿지않을수없을것입니다.무엇보다도영들은시각(sight)을가지고있습니다.그들이빛가운데살기때문인데,선한영들과천사적영들,그리고천사들은이세상의한낮정오의빛으로는거의비교할수없을만큼훨씬더밝은빛가운데살아갑니다.그들이머물며사물을보는그빛에대해서는주님의신적자비(theLord’sDivinemercy)로이후에설명하겠습니다.영들은또한청각(hearing)을가지고있으며,그청각또한육체의청각으로는비교할수없을만큼섬세합니다.그들은여러해동안거의끊임없이저와말해왔습니다.다만그들의말에관해서도주님의신적자비로이후에설명하겠습니다.그들에게는후각(thesenseofsmell)도있으며,이에관해서도역시주님의신적자비로이후에다루고자합니다.그들에게는지극히섬세한촉각(amostexquisitesenseoftouch)이있습니다.지옥에서겪는고통과고문도이촉각에서비롯됩니다.모든감각은촉각과관련되며,다른감각들은단지촉각의여러차이와다양한형태일뿐입니다.그들은또한육체안에있을때가졌던것들과는비교할수없는욕망과애정들을가지고있는데,이에관해서도주님의신적자비로이후에더말씀드리겠습니다. Beware of the false notion that spirits do not possess far more exquisite sensations than during the life of the body.I know the contrary by experience repeated thousands of times.Should any be unwilling to believe this, in consequence of their preconceived ideas concerning the nature of spirit, let them learn it by their own experience when they come into the other life, where it will compel them to believe.In the first place spirits have sight, for they live in the light, and good spirits, angelic spirits, and angels, in a light so great that the noonday light of this world can hardly be compared to it.The light in which they dwell, and by which they see,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Spirits also have hearing, hearing so exquisite that the hearing of the body cannot be compared to it.For years they have spoken to me almost continually, but their spee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described hereafter.They have also the sense of smell, which also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treated of hereafter.They have a most exquisite sense of touch, whence come the pains and torments endured in hell; for all sensations have relation to the touch, of which they are merely diversities and varieties.They have desires and affections to which those they had in the body cannot be compared, concerning which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hereafter.Spirits think with much more clearness and distinctness than they had thought during their life in the body.
영들은육체안에서살때보다훨씬더맑고분명하게생각합니다.그들의생각에속한하나의관념안에는이세상에서가졌던천개의관념안에들어있던것보다더많은것이담겨있습니다.그들은매우예리하고섬세하며,명민하고분명하게서로말합니다.만일사람이그것가운데무엇이라도지각할수있다면크게놀랄것입니다.요컨대영들은사람이가지고있는모든것을가지고있으나,육체와뼈,그리고그것들에따르는불완전함을제외하면훨씬더완전한방식으로가지고있습니다.그들은자신들이육체안에서살때에도실제로감각한것은영이었음을인정하고지각합니다.감각능력이육체안에서나타나기는했지만,그것이육체에속한것은아니었습니다.그러므로육체를벗어버리면감각은훨씬더섬세하고완전해집니다.생명은감각의활동으로이루어집니다.감각이없다면생명도없기때문입니다.따라서감각능력이어떠하냐에따라생명도그러합니다.이것은누구나관찰할수있는사실입니다. There are more things contained within a single idea of their thought than in a thousand of the ideas they had possessed in this world.They speak together with so much acuteness, subtlety, sagacity, and distinctness, that if a man could perceive anything of it, it would excite his astonishment.In short, they possess everything that men possess, but in a more perfect manner, except the flesh and bones and the attendant imperfections.They acknowledge and perceive that even while they lived in the body it was the spirit that sensated, and that although the faculty of sensation manifested itself in the body, still it was not of the body; and therefore that when the body is cast aside, the sensations are far more exquisite and perfect.Life consists in the exercise of sensation, for without it there is no life, and such as is the faculty of sensation, such is the life, a fact that anyone may observe.
해설
AC.322는 앞의 AC.321에서 간략하게 제시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펼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이 육체를 벗으면 감각을 잃거나 희미한 존재가 된다는 생각을 ‘그릇된생각’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수천 번에 걸친 경험을 근거로 오히려 그 반대라고 증언합니다. 영들은 보고 듣고 냄새 맡고 접촉하며, 욕망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말합니다. 더구나 이러한 능력들은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섬세하고 완전하다고 합니다.
이 설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로감각하는것은영’이라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입니다. 우리는 눈이 보고 귀가 듣는다고 생각하지만,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육체의 감각기관은 자연계의 것을 인간의 내적인 생명에 전달하는 기관입니다. 감각 능력이 육체를 통하여 나타나기는 하지만 감각하는 생명 자체가 육체에 속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육체가 죽는다고 인간의 감각까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적 육체의 제약을 벗으면서 영의 감각은 더욱 섬세하고 완전하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시각을 예로 듭니다. 영들은 빛 가운데 살며, 특히 선한 영들과 천사적 영들, 천사들은 이 세상의 한낮과 거의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청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영들과 거의 끊임없이 대화했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청각이 육체의 청각보다 훨씬 섬세하다고 증언합니다. 후각과 촉각 역시 존재하며, 특히 모든 감각이 어떤 의미에서는 촉각과 관계된다는 흥미로운 설명도 덧붙입니다. 다만 이러한 각각의 감각과 영계의 빛과 언어에 관한 자세한 설명은 이후에 하겠다고 여러 차례 예고합니다.
여기서 감각만큼 중요한 것이 욕망과 애정입니다. 영들은 육체 안에서 가졌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한 욕망과 애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후의 인간이 생각만 남은 추상적인 정신적 존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의 생명에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사랑하는가가 본질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육체의 죽음이 그러한 애정의 생명을 없애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후에도 인간은 감각하고 생각할 뿐 아니라 원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계속 살아갑니다.
사고와 언어에 관한 설명은 더욱 놀랍습니다. 영들의 하나의 관념에는 지상에서 가졌던 천 개의 관념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은 훨씬 더 맑고 분명하며, 서로 말할 때에도 예리하고 섬세하며 명민하고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단순히 사후에 머리가 좋아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계의 육체와 그 제약 안에서 표현되던 인간의 내적인 생각이 영의 상태에서는 훨씬 풍부하고 직접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매우 인상적인 결론을 내립니다. 영들은 ‘사람이가지고있는모든것을가지고있으나,육체와뼈,그리고그것들에따르는불완전함을제외하면훨씬더완전한방식으로가지고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20부터 계속된 설명의 핵심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사후의 인간은 지상 인간에게서 무엇인가가 크게 빠져나간 불완전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원하고 사랑하는 온전한 사람임을 경험합니다.
마지막으로 ‘생명은감각의활동으로이루어진다’는 말은 AC.322전체를 압축합니다. 여기서 감각은 단순히 육체의 오감만을 뜻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글 전체가 시각과 청각뿐 아니라 욕망과 애정, 사고와 언어까지 함께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느끼고 원하고 사랑하고 생각하며 다른 존재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감각 능력이 어떠하냐에 따라 생명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AC.320-322를 함께 읽으면 하나의 흐름이 선명해집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AC.321에서는 사후의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이 오히려 더 탁월하다고 했고, AC.322에서는 그것을 구체적인 감각과 애정과 사고의 경험으로 펼쳐 보였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반복해서 전하려는 것은 분명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생명이 희미해지는 과정이 아닙니다. 육체를 벗은 뒤에도 인간은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사랑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두번째일반적인사실은영이육체안에서살때보다훨씬더뛰어난감각기능을누리며,생각하고말하는능력또한훨씬더탁월하다는것입니다.그래서이두상태는거의비교할수없을정도입니다.그러나영들은주님께서그들에게성찰하는능력을허락하시기전까지는이사실을스스로깨닫지못합니다. A second general fact is that a spirit enjoys much more excellent sensitive faculties, and far superior powers of thinking and speaking, than when living in the body, so that the two states scarcely admit of comparison, although spirits are not aware of this until gifted with reflection by the Lord.
해설
AC.321은 앞의 AC.320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AC.32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AC.321에서는 사후의 삶이 단지 지상 삶의 의식이 그대로 계속되는 정도가 아니라, 감각과 생각과 말의 능력에 있어서 육체 안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차이가 ‘두상태를거의비교할수없을정도’라고까지 표현합니다. 이것은 사후의 인간을 희미한 의식이나 그림자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관념과 정반대입니다. 사람이 육체를 벗었다고 해서 감각과 사고가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으로서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이 훨씬 더 탁월해진다는 것입니다. 바로 다음 AC.322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이것을 자신의 반복된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영들 자신은 처음부터 자신들의 능력이 그렇게 달라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20과 연결해서 생각하면 그 이유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나’라는 의식의 연속성을 경험합니다. 여전히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기 때문에 자신이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자신의 감각과 사고가 훨씬 더 탁월해졌음에도 그것을 당연한 자신의 상태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들이 이 사실을 깨닫는 것도 ‘주님께서그들에게성찰하는능력을허락하실때’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능력이 향상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닙니다. 자기 상태를 돌아보고 그것을 이전 상태와 비교하여 알아차리는 것 역시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 생명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끼기 쉽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모든 생명과 그것을 인식하는 능력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AC.320과 AC.321을 함께 놓으면 사후세계에 관한 매우 중요한 그림이 나타납니다. 죽음 이후에도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계속 살아가며, 그 연속성이 너무 자연스러워 처음에는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삶은 지상에서보다 희미해진 삶이 아니라,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능력에 있어서 오히려 훨씬 더 탁월한 삶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의식과 인격이 흐려져 사라져 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전하는 증언입니다.
다만 AC.321에서는 아직 이러한 차이가 왜 생기는지, 각각의 감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지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어지는 AC.322에서 훨씬 구체적으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한 가지를 분명히 붙들면 충분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후의 인간은 지상의 인간보다 덜 인간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각과 사고와 말의 능력이 더욱 탁월한 상태에서 계속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이 점은 결국 우리가 ‘인간이란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만일 육체가 죽은 뒤에도 감각하고 생각하고 말하는 인간 자신이 계속 살아가며, 오히려 그러한 능력이 더욱 탁월해진다면 인간의 본질을 자연계의 육체에만 둘 수는 없습니다. AC.321은 그 사실을 긴 논증으로 설명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영들과 함께하면서 거듭 경험한 하나의 일반적인 사실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다음 AC.322에서는 그 증언을 더욱 구체적인 경험으로 펼쳐 보이게 됩니다.
임종,그러니까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정말 수없이 다양한 케이스가 있습니다.평안한,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쓸쓸히 홀로 고독사하는 사람도 있고...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편안하게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교통사고 등 갑작스런 사고사나 전쟁이나 강도,감옥 형장의 이슬,혹은 자살 등...제가 말씀드리고픈 것은 저는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는데요,그러니까 이런 사별의 경험은 정말 선 굵은 인생의 자국을 남기더라는 거죠.아마 숨을 거두시는 분도 그러지 싶은데...그런데 어떻게 사후 자기가 죽은지조차 모를 수가 있는 건가요?모든 게 이어진다면서 말이죠...
임종, 곧 지상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히 숨을 거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곁에 없는 가운데 홀로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오랜 치료 끝에 떠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사고나 재난, 전쟁이나 범죄처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 역시 고등학생 때 모친을 교통사고로 잃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갑작스러운 사별은 남겨진 사람의 삶에 아주 깊고 오래가는 자국을 남깁니다.
그래서 AC.320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죽음의 모습이 이렇게 다양하고, 어떤 죽음은 너무나 갑작스럽고 충격적인데, 어떻게 죽은 사람이 처음에는 자신이 죽은 사실조차 모를 수 있을까요?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죽음 이후에도 삶과 의식이 이어진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이어진다면 사고나 죽음의 순간에 대한 의식도 그대로 이어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여기서 먼저 구별할 것은 ‘의식의연속’과 ‘자신이처한새로운상태에대한인식’입니다. AC.320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신이 여전히 감각하고, 원하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연속성이 너무나 자연스럽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알지 못합니다. 자신에게는 ‘나는여전히살아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흔히 ‘의식이끊어지는사건’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이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야 할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AC.320의 설명은 그 반대입니다. 육체의 생명은 끝났지만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그는 오히려 ‘나는죽지않았는데왜내가죽었다고하는가?’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에게 영이라고 말해 주었을 때 놀라고 경이로워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자신은 여전히 감각과 욕구와 생각을 가진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교통사고나 전쟁, 범죄와 같은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AC.320만으로 각각의 경우에 죽은 사람이 정확히 무엇을 경험하는지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이 항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증언하는 것은 죽음의 방식에 따른 세부 과정이 아니라,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도 자신의 존재와 의식이 계속되기 때문에 처음에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일반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특정한 임종의 경우를 상상하여 그 사람이 반드시 이런 순서로 경험할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지상에서 남겨진 사람이 경험하는 ‘죽음’과, 죽은 사람 자신이 경험하는 ‘계속되는삶’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겨진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너무나 큰 단절입니다. 특히 갑작스러운 사별은 그 순간을 평생 잊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AC.320에서 스베덴보리가 전하는 죽은 사람의 경험은 ‘나는없어졌다’가 아니라 오히려 ‘나는여전히살아있다’입니다.
이것은 제가 어린 시절 모친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떠나보낸 경험을 생각할 때에도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남겨진 저에게 그 사건은 너무나 갑작스러운 단절이었지만, AC.320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어머니 자신의 생명까지 그 사고의 순간에 함께 끊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 이후 어머니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경험하셨는지를 제가 알 수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육체의 죽음이 그분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라는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저세상에와있다는사실을알지못한다’는 말은 사람이 죽음이라는 사건을 부정하거나 혼란에 빠져 있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AC.320의 초점은 삶의 놀라운 연속성에 있습니다. 사람은 죽었는데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는 죽었지만 사람 자신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AC.320은 우리에게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어 줍니다. 지상에 남은 사람에게 죽음은 분명 슬프고 때로는 견디기 어려운 이별입니다. 그 슬픔을 가볍게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증언을 따른다면 그 이별의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육체의 죽음 너머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생각하고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AC.320이 들려주는 첫 번째 사후세계의 소식은 어쩌면 아주 단순합니다. ‘죽음뒤에도사람은살아있습니다.’
영혼이나 영으로 산다는 것에 관하여On The Nature Of The Life Of The Soul Or Spirit
AC.320
영혼(soul)으로서의삶,곧죽은뒤처음영계에들어가는신참,신생영들(novitiatespirits)의삶에관한일반적인사항과관련해서말하자면,저는많은경험을통해다음과같은사실을알게되었습니다.사람이저세상(theotherlife)에들어가면그는자신이저세상에와있다는사실을알지못하고,여전히이세상에있으며,심지어아직도육체안에있다고생각합니다.이러한상태는매우실제적이어서,누군가그에게자신이영이라고말해주면그는크게놀라고경이로워합니다.이는자신이감각과욕구,생각에있어서전과똑같이한인간으로존재함을발견하기때문이며,또한세상에살때에는영의존재를믿지않았거나,혹은어떤사람들처럼영이지금자신이경험하는것과같은존재일수있다고는전혀생각하지않았기때문입니다. With regard to the general subject of the life of souls, that is, of novitiate spirits, after death, I may state that much experience has shown that when a man comes into the other life he is not aware that he is in that life, but supposes that he is still in this world, and even that he is still in the body.So much is this the case that when told he is a spirit, wonder and amazement possess him, both because he finds himself exactly like a man, in his senses, desires, and thoughts, and because during his life in this world he had not believed in the existence of the spirit, or, as is the case with some, that the spirit could be what he now finds it to be.
해설
AC.320부터 AC.323까지는 창세기 4장의 속뜻으로 들어가기 전에 삽입된 ‘영혼이나영으로산다는것에관하여’라는 짧은 연속 기사입니다. 앞의 AC.314-319에서 사람이 영생에 들어가는 과정에 관한 여러 경험을 소개했다면, 여기서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좀 더 일반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AC.32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죽은 뒤에도 자기 존재가 단절되었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저세상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자신이 저세상에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여전히 이 세상에 있으며 심지어 육체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죽음 이후의 삶이 지상의 의식과 전혀 연결되지 않은 낯선 존재 상태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나’라는 분명한 자각 가운데 계속된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를 스베덴보리는 매우 단순하게 설명합니다. 사람은 죽은 뒤에도 ‘감각과욕구,생각’에 있어서 자신이 이전과 똑같이 한 인간임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계속되고 있음을 알고, 무엇인가를 원하고 사랑하며, 주변의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오히려 놀라게 됩니다. 지상에서는 영을 육체를 잃은 희미한 존재처럼 생각했는데, 실제로 영이 되고 보니 자신이 여전히 온전한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입니다. 죽음으로 없어지는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자연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입고 있던 육체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애정, 곧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원하는가 하는 내적인 생명은 육체의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에게 죽음은 ‘존재하던사람이없어지고전혀다른존재가생기는사건’이 아니라, 사람이 자연계의 육체를 벗고도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살아 있음을 발견하는 사건입니다.
특히 AC.320은 우리가 흔히 가지고 있는 ‘영’에 대한 막연한 관념을 돌아보게 합니다. 사람은 영을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나 의식만 남은 어떤 것으로 상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하는 영은 그렇게 막연한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죽은 사람 자신이 ‘나는전과똑같은사람인데무엇이달라졌다는것인가?’라고 생각할 만큼 자기 존재와 감각과 사고의 연속성을 경험합니다. 이어지는 AC.321-323에서는 이 점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AC.320이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은 ‘죽으면내가없어지는가?’가 아니라 ‘육체를벗은뒤에도계속살아가는나는과연어떤사람인가?’입니다. 죽음 이후에도 생각하고 원하고 사랑하는 내가 계속된다면, 지금 무엇을 사랑하며 어떤 내적인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는 결코 가벼운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AC.320자체의 초점은 아직 사후의 심판이나 천국과 지옥의 결정에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먼저 확실하게 말하려는 것은 훨씬 기본적인 사실입니다.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의 의식과 인격이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자신이 여전히 살아 있으며 여전히 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20은 이후 이어질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 설명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문과 같습니다. ‘영혼이나영으로산다’는 것은 희미하고 추상적인 상태로 존재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여전히 보고 느끼고 원하고 생각하는 ‘나’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삶의 소멸이 아니라, 사람이 육체를 벗은 뒤에도 자신의 생명이 계속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경계입니다.
AC.42를 처음 읽으면 놀라운 장면을 계속 만나게 됩니다.스베덴보리는 겔29:3의 바로와 큰 악어,겔32:2의 바다와 강을 휘젓는 악어,사27:1의 리워야단과 바다의 용,렘51:34의 삼키는 큰 뱀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그것들이 기억 지식과 그 일반 원리,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신앙의 신비에 들어가려는 상태와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그러면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이것을어떻게알았을까?’
먼저 분명히 할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의 속뜻을 단순한 개인적 성경 연구의 결과라고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이 저작 전체의 전제 자체가 말씀에는 문자적 의미 안에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내적 의미가 있으며,그것이 주님의 자비로 밝혀졌다는 것입니다.따라서 그의 주장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면 적어도‘스베덴보리는자신이말씀의내적의미에관한계시를받았다고이해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그러면주님이나천사가옆에서한문장씩불러주었고스베덴보리는받아적었는가?’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그의 저술에는 영들과 천사들과의 대화,영계에서 보고 들은 것,어떤 것의 의미를 지각하거나 알도록 허락받았다는 진술 등이 매우 많이 등장합니다.그러나 이것들을 모두 하나의 방식으로 묶어‘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는천사가구술한책이다’라고 말하면 그의 저술 방식 자체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반대로‘성경을펼치면속뜻이화면처럼눈앞에자동으로나타났다’고 말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실제로 보고 들었다고 기록한 경험과,말씀의 내적 의미를 해설하는 작업은 서로 깊이 관련되어 있지만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그가 어떤 한 절의 속뜻을 알게 되는 모든 순간에 정확히 어떤 인식 과정이 일어났는지를 우리가 재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일관된상응의연결’입니다.예를 들어AC.42에서 큰 물고기가 기억 지식의 일반적인 것을 뜻한다고 한 뒤,스베덴보리는 그 뜻을 한 구절에만 기대지 않습니다.여러 선지서의 서로 다른 구절을 가져와 같은 상징이 문맥에 따라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보여 줍니다.앞으로AC를 계속 읽으면 물,땅,씨,나무,빛,새,짐승,애굽,앗수르,바벨론 같은 표현들이 한 번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서 서로 연결되어 해석되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속뜻을‘단어마다비밀암호하나가붙어있는것’처럼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물고기=기억지식’, ‘새=이성적인것’이라는 대응표를 외운 뒤 모든 성경 구절에 기계적으로 대입하는 방식이 아닙니다.같은 표현도 문맥과 그것이 놓인 관계,긍정적 또는 부정적 의미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AC.42에서‘큰바다짐승’이 좋은 창조의 일부로 등장하면서도,선지서에서는 인간 자신의 지혜와 결합된 부정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내적 의미를 인간이 임의로 만들어 내는 비유적 해석으로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그의 설명에서 상응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주님께서 세우신 질서에 근거합니다.따라서 그에게 속뜻은‘이구절을오늘내삶에이렇게적용해볼수있겠다’는 설교적 적용과는 성격이 다릅니다.우리는 그의 해석에 동의할 것인지 검토할 수 있지만,적어도 그가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정확하게 구별해야 합니다.그는 자신이 성경에 재미있는 상징적 의미를 덧붙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스베덴보리의 속뜻 설명을 읽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가계시를받았다고했으니아무것도묻지말고받아들여야한다’고 할 필요도 없고,반대로 한 구절만 떼어 놓고‘문자만보면이런뜻은전혀나오지않는다’며 즉시 버릴 필요도 없습니다.오히려AC를 계속 읽으면서 그가 같은 상징을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하는지,서로 다른 구절의 해석이 일관되는지,앞뒤의 교리적 맥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좋습니다.
AC.42의 겔32:2가 좋은 사례입니다.그 한 절만 처음 보면‘기억지식을수단으로삼아자기자신으로부터신앙의신비속으로들어가려는사람’이라는 해석은 매우 갑작스럽게 느껴집니다.그러나AC.40-42에서 물고기와 큰 물고기,기억 지식과 그 일반적인 것,인간의 지혜와 지성이라는 연결을 차례로 읽고 나면 적어도 스베덴보리가 어떤 구조 안에서 그 구절을 읽고 있는지는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그리고AC전체를 더 읽을수록 그 연결이 다른 곳에서도 반복되는지 검토할 수 있습니다.
결국‘스베덴보리는이것을어떻게알았는가?’라는 질문에는 두 층의 답이 필요합니다.스베덴보리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말씀의 내적 의미는 인간의 독창적인 추론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밝혀진 것입니다.그러나 그 계시가 매 구절마다 정확히 어떤 심리적·지각적 과정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우리가 하나의 공식으로 재구성해서는 안 됩니다.우리가 그의 저작에서 실제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영계와의 열린 교통을 주장했고,말씀의 내적 의미가 주님으로부터 밝혀졌다고 증언했으며,그것을 방대한 성경 구절과 상응의 연결 속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어떻게이런뜻이나오지?’라는 어리둥절함을 그대로 가지고 읽어도 괜찮습니다.오히려 그 질문을 가지고 계속 읽는 것이 좋습니다.한두 구절에서 모든 것을 납득하려 하기보다AC전체를 따라가면서 같은 상응이 어떻게 되풀이되고,문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며,전체 말씀의 내적 의미 안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확인하는 것 자체가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검토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AC.41에‘천사적영’(angelic spirit)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천사’라는 것인지‘영’이라는 것인지,혹은 천사와 영 사이에 또 다른 종류의 존재가 있다는 뜻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조심해야 할 것은‘천사적영’을 단순히‘천사를다른관점에서부르는이름’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의 존재들을 설명하면서‘영들’(spirits), ‘천사적영들’(angelic spirits), ‘천사들’(angels)이라는 표현을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따라서‘angelicspirit’이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그것을 곧바로‘angel’과 완전히 같은 말로 바꾸어 읽는 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천사적영’을 천사와 영 사이에 존재하는 완전히 별개의 제3종족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생물학적 종과 같은 구별이 아니라 영적 상태의 차이입니다.스베덴보리가 사후의 인간을‘영’, ‘천사적영’, ‘천사’등으로 말할 때에는 그 존재의 상태와 그가 속한 사회,그리고 설명하고 있는 문맥이 함께 고려됩니다.따라서‘천사적영’이라는 표현에는 적어도 일반적인‘영’보다 천사적인 상태와 성질에 가까운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면AC.41에서는 왜 굳이‘천사적영’을 언급했을까요?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사실‘천사적영이정확히어느계층에속하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이 글의 중심은‘생명’입니다.사람의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 생명이 없지만,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그 실제적인 예로 천사적 영의 말과 생각을 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천사적 영의 말 하나하나와 생각 하나하나,심지어 생각의 가장 미세한 부분까지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그리고 그 이유를 그 가장 작은 것 안에도‘주님에게서나오는애정’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따라서 이 대목을 읽을 때 우리의 관심도‘천사적영은천사인가영인가?’라는 존재 분류에만 머물기보다, ‘왜그의생각의가장작은부분까지살아있다고하는가?’라는AC.41의 본래 질문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은AC.41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독법이기도 합니다.스베덴보리의 글에는 사후세계의 여러 존재와 상태를 가리키는 낯선 명칭들이 등장합니다.그런 표현의 정확한 의미를 살펴보는 것은 필요하지만,한 단어가 등장할 때마다 곧바로 완성된 영계의 계층표를 만들려고 하면 오히려 그 글이 지금 말하려는 중심을 놓칠 수 있습니다.AC.41에서‘천사적영’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천사적영’을‘천사와완전히같은존재를달리부르는말’이라고 고정하지도 않고, ‘천사와영사이의별도종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우선은‘천사적인상태와성질을가진영적존재를가리키는스베덴보리의표현’정도로 이해하면서,AC.41의 핵심인‘주님에게서오는애정이생각과말의가장작은부분까지살아있게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면 충분합니다.이후AC를 계속 읽으면서 스베덴보리가‘영’, ‘천사적영’, ‘천사’를 실제로 어떤 문맥에서 구별하여 사용하는지를 차츰 더 정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AC.67을 처음 읽는 독자는 거의 즉시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는 ‘다른삶의본성’을 알지 못하면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다른삶’은 무엇이며, 그 ‘본성’을 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AC.67은 아직 그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제부터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예고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뒤에 나올 내용을 모두 앞당겨 설명하기보다, 앞으로의 독서를 위해 필요한 정도만 먼저 짚는 것이 좋겠습니다.
먼저 ‘다른삶’은 이 세상의 육체적 삶과 구별되는 사후의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사후의 삶은 단지 죽은 뒤에도 어딘가에서 존재한다는 막연한 관념이 아닙니다. AC.67에서 그는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고 그 기간 동안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앞으로 그가 말할 ‘다른삶’은 자신의 추측이나 철학적 사변으로 제시되는 세계가 아니라, 직접 듣고 보도록 허락되었다고 그 자신이 증언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AC.67은 단순히 ‘사후의삶이있다’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그 삶을 향하고 있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다른삶의본성’을 아는 것과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서로 연결됩니다. 말씀의 속뜻이 인간의 영적 생명과 주님의 나라에 속한 실재를 다루고 있다면, 그 실재가 어떠한지를 전혀 알지 못한 채 그 속뜻의 가장 깊은 아르카나를 충분히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삶의본성’을 알아야 한다는 말을 AC를 읽기 전에 영계에 관한 모든 지식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AC.67부터 이어지는 기록 자체가 독자에게 그 삶을 차례로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완성된 영계 지식을 요구한 뒤 속뜻으로 들어가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을 밝히는 과정에서 필요한 다른 삶의 본성도 함께 열어 보이려 합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지금부터 그가 밝히는 내용을 따라가면서 두 가지를 함께 배우게 됩니다. 다른 삶이 어떠한가를 알아 가는 동시에, 왜 그러한 지식이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지도 알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67뒤에 영계에 관한 기록이 이어지는 것은 창2의 해설과 무관한 이야기가 갑자기 끼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을 향하고 있다고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다른 삶에 관한 기록은 앞으로 말씀의 속뜻을 읽기 위해 독자의 시야를 넓혀 주는 역할을 합니다. 눈에 보이는 육체적 삶만이 인간 존재의 전부라는 전제에서 벗어나, 말씀의 속뜻이 향하고 있는 영적 삶의 실재를 함께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삶의본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AC.67한 번호에서 완전히 닫히는 질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서 시작되어 앞으로 계속 답을 얻게 되는 질문입니다. AC.67에서 우선 붙들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은 서로 떨어진 두 주제가 아니며,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그 삶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삶의 본성을 알아 가는 것이 속뜻의 아르카나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다른삶’이 실제로 어떠한지는 이어지는 그의 증언을 따라가며 확인하게 됩니다. (AC.67심화1)
AC.63은‘여섯째날의끝에서악한영들은떠나가고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한다’고 말합니다.그런데 바로 앞AC.59에서는 악한 영들이 오랫동안 사람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어 그의 욕정을 자극한다고 했습니다.따라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자연스럽게 질문이 생깁니다. ‘악한영들은사람에게계속관계하는것아닌가?그런데왜여기서는떠난다고하는가?’
먼저AC.63이 실제로 말하는 것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좋습니다.본문은 분명히‘악한영들은떠나가고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한다’고 합니다.따라서 처음부터 이것을‘사실떠나는것이아니라그대로주변에있으면서영향력만약해진다’고 바꾸어 번역하듯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스베덴보리가‘떠난다’고 했으면 우선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동시에 이 한 문장을 가지고‘거듭난사람에게는이제어떤악한영도전혀접근할수없으며악의영향가능성자체가영원히사라진다’고 확대해서도 안 됩니다.AC.63은 여기서 영들과 인간의 관계 전체를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여섯째 날의 끝에서 일어나는 상태 변화를 요약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맥에서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큰 전환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AC.59에서는 전투 가운데 악한 영들이 사람의 욕정을 자극하고 있었고,AC.63에서는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어 작용하면서 그 전투가 그칩니다.바로 그 뒤에‘악한영들은떠나가고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한다’는 말이 나옵니다.따라서 악한 영들의 떠남은 적어도 전투가 그치고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변화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기존 설명처럼 이것을‘악한영들이지배권을잃는다’고 표현하면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그러나 이것을AC.63의 문장 자체가 정확히 정의한 뜻이라고 단정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떠남’이 영계에서 어떤 관계 변화와 정확히 대응하는지,악한 영들이 이후 사람과 전혀 관계하지 않는다는 뜻인지 아닌지는 관련AC들의 설명을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특히‘사람에게는언제나선한영과악한영이함께있어균형이유지되어야하는것아닌가?’라는 질문은 매우 중요하지만,그것 역시 인간의 자유와 영적 균형에 관한 더 큰 교리에 속합니다.그 교리를AC.63한 문장 안에 억지로 끌어와‘그러므로떠난다는것은사실밖으로밀려난다는뜻이다’라고 결론 내리면,오히려 본문의 표현을 다른 교리에 맞추어 수정하는 셈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에는 두 사실을 함께 붙들면 좋겠습니다.첫째,AC.63은 여섯째 날 끝에 악한 영들이 실제로‘떠난다’고 말합니다.둘째,이 한 문장만으로 인간과 악한 영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끝난다고까지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그 사이의 세부적인 영적 질서는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더 설명하는 내용을 따라가며 확인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무엇보다 본문의 강조점은 악한 영들이 어디로 이동했는가를 추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더 중요한 것은‘선한영들이그자리를대신한다’는 것입니다.여섯째 날까지 이어진 전투가 그치고 사랑이 주된 원리가 되면서 사람을 둘러싼 영적 상태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악한영들은떠나가고’라는 말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악한영은완전히소멸하는가,몇미터밖으로물러나는가?’같은 공간적인 그림이 아니라,여섯째 날의 전투가 끝나고 다음 상태가 시작된다는 문맥입니다.영들의 세계에서‘떠남’이 정확히 어떤 상태의 변화를 뜻하는지는 충분한 관련 본문을 만나면서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