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9
‘그를 만나는 자마다 그를 죽이리라’(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는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따라 나옵니다.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릴 때 그는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합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분리가 있고, 분리가 있는 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own)에 맡겨집니다. 그러면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죽이는 것, 곧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That “everyone finding him would slay him” signifies that every evil and falsity would destroy him, follows from what has been said. For the case is this. When a man deprives himself of charity, he separates himself from the Lord, since it is solely charity, that is, love toward the neighbor, and mercy, that conjoin man with the Lord. Where there is no charity, there is disjunction, and where there is disjunction, man is left to himself or to his own; and then whatever he thinks is false, and whatever he wills is evil. These are the things that slay man, or cause him to have nothing of life remaining.
해설
AC.389는 창4:14의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는 말이 왜 ‘모든 악과 거짓이 그를 멸망시키리라’는 것을 의미하는지 설명합니다. 앞의 AC.385에서 그 의미를 먼저 제시했고, 이제 이번 번호에서 그 이유를 밝힙니다. 그 논리는 매우 분명합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리면 주님에게서 자신을 분리하고, 주님과 분리되면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지며, 그렇게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생각하는 것은 거짓이 되고 의지하는 것은 악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악과 거짓이 사람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합니다. 이것이 속뜻에서 ‘죽임’입니다.
먼저 주목할 것은 ‘사람이 스스로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릴 때’라는 표현입니다. 주님께서 사람에게서 체어리티를 거두어 가신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체어리티를 배척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주님에게서 분리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인의 ‘저주’,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함’ 등을 해석하면서 계속 확인해 온 원리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악을 받아들이고 선을 거부함으로써 주님에게서 돌아섭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하지 않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태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매우 강한 말을 합니다.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것은 오직 체어리티, 곧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이다.’ 이것은 체어리티를 단순히 신앙생활에 추가되는 좋은 행실 정도로 보는 관점과 전혀 다릅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는 생명의 결속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낸 사랑이나 선행이 주님과의 결합을 획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AC.387에서 바로 확인했듯이 사랑의 신앙에 속한 모든 선은 주님의 자비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를 사람이 받아들여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로 살아낼 때, 그 체어리티 안에서 사람은 주님과 결합됩니다.
따라서 ‘오직 체어리티가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킨다’는 말은 신앙이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가인 이야기 전체가 보여 준 것처럼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둘을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으며, 진리는 선을 섬깁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신앙도 결국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부정하는 것은 ‘체어리티 없이도 신앙만으로 주님과 결합될 수 있다’는 가인의 원리입니다.
이어지는 ‘분리가 있는 곳에서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기의 것에 맡겨진다’는 문장은 이번 번호의 중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proprium 이해와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받아 살아갈 때는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지만, 주님과의 결합을 거부하여 자기 자신에게 맡겨지면 인간의 고유한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이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에게 맡겨진다’는 것은 인간이 참으로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생명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오히려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의 것에 갇히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가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든 거짓이고, 그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악’이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생각과 의지가 함께 등장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생각은 진리와 거짓의 측면에, 의지는 선과 악의 측면에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와 선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것만으로 살아가면 이해의 영역에서는 거짓이, 의지의 영역에서는 악이 나타납니다. 인간의 영적 생명 전체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인간의 모든 자연적 사고와 의지를 무차별적으로 정죄하는 말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거듭나는 사람에게도 자기의 것에서 올라오는 악한 충동과 거짓된 생각이 있는 동시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그것들과 싸우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것은 ‘주님과 분리되어 자기의 것에 맡겨진 상태’입니다. 즉 자기에게서 나온 것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는 상태를 말합니다. 인간에게서 스스로 나오는 것은 악과 거짓이지만,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마치 자기 것처럼 자유롭게 의지하고 생각하며 행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이것은 AC.379의 ‘의지가 실제 사람이다’라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그곳에서는 선한 것을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악하게 산다면 실제로는 악을 의지하는 것이므로 거기에 신앙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89에서는 그 문제를 한 단계 더 근원적으로 설명합니다. 주님과의 결합을 잃고 자기의 것에 맡겨지면 의지는 악으로, 생각은 거짓으로 기울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변화는 단순히 생각의 내용을 바꾸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의지 안에 받아들이고, 그 선으로부터 진리를 보고 살아가는 질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의 ‘바로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죽인다’는 말도 중요합니다. 가인을 죽이는 것은 문자적으로 그를 찾아오는 어떤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속뜻에서는 악과 거짓이 사람을 죽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죽인다’는 말의 의미를 곧바로 설명합니다. ‘그에게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죽음은 단순히 어떤 형벌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 곧 참된 생명에 속한 것이 사람 안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 대목은 바로 앞 AC.384와 매우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가인이 두려워하는 ‘죽임’은 무엇이겠습니까? 악과 거짓이 계속 지배하여 아직 남아 있는 생명에 속한 것마저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AC.389의 마지막 표현인 ‘생명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게 한다’는 말은 AC.384의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는 말과 정확히 긴장을 이룹니다. 아직 남아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죽음의 위험이 있으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보존이 필요합니다.
이제 ‘가인의 표’가 왜 주어지는지에 대한 배경도 더욱 선명해집니다. 주님께서 가인의 잘못된 교리를 옳다고 인정하시기 때문에 그를 보호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분명 잘못된 것이며, 그 결과 가인은 선과 진리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아직 생명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다면, 악과 거짓이 그것마저 완전히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보존의 섭리가 필요합니다. ‘가인의 표’는 바로 이 문제와 연결하여 읽어야 할 것입니다.
결국 AC.389는 가인 이야기의 핵심 교리를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는 사람을 주님과 결합시키고, 체어리티의 상실은 주님과의 분리를 가져오며, 그 분리는 사람을 자기의 것에 맡겨지게 합니다. 자기의 것만으로는 생각이 거짓으로, 의지가 악으로 향하고, 악과 거짓은 마침내 사람 안에서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킵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체어리티를 충분히 실천하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함으로써 신앙의 생명 자체를 그 근원이신 주님과의 결합에서 떼어 놓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반대 방향도 암시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자기의 것에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서 옵니다. 선도 주님에게서 오고 진리도 주님에게서 옵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받아들이며, 주님께서는 사람이 자유롭게 그것을 자기 것처럼 의지하고 생각하고 행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자기 자신을 생명의 근원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라, 자기의 것에서 나오는 악과 거짓을 보면서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더욱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가인의 길이 ‘체어리티의 상실에서 자기의 것, 그리고 악과 거짓과 죽음으로’ 내려가는 길이라면, 거듭남의 길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진리를 받아 체어리티와 신앙이 다시 하나의 살아 있는 생명을 이루는 길입니다.
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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