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1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이 모든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저세상에서 악령들의 상태를 보면 가장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모든 체어리티를 빼앗아 버린 자들은 이리저리 유리하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도망합니다. 그들이 어디로 가든 어떤 공동체에 가게 되면, 그 공동체는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 즉시 그들의 성질을 알아차립니다. 저세상에는 그러한 퍼셉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쫓아낼 뿐 아니라 심하게 벌하기도 하며, 할 수만 있다면 죽이려 할 만큼 적의를 품습니다. 악령들은 서로 벌하고 괴롭히는 데서 가장 큰 즐거움을 느끼며, 그것이 그들에게는 최고의 만족입니다. 지금까지는 악과 거짓 자체가 이러한 일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그 자체 안에 거짓의 형벌을 가지고 있고, 악은 그 자체 안에 악의 형벌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그 형벌들에 대한 두려움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The state of evil spirits in the other life shows most clearly that those who are in evil and falsity are afraid of everybody. Those who have deprived themselves of all charity wander about, and flee from place to place. Wherever they go, if to any societies, these at once perceive their character by their mere coming, for such is the perception that exists in the other life; and they not only drive them away, but also severely punish them, and with such animosity that they would kill them if they could. Evil spirits take the greatest delight in punishing and tormenting one another; it is their highest gratification. Not until now has it been known that evil and falsity themselves are the cause of this, for whatever anyone desires for another returns upon himself. Falsity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falsity, and evil has in itself the penalty of evil, and consequently they have in themselves the fear of these penalties.
해설
AC.391은 앞의 AC.390에서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자들은 죽임을 당할 것에 대한 끊임없는 두려움 가운데 있다’고 한 설명을 스베덴보리가 사후세계에서 관찰한 악령들의 상태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 줍니다. 모든 체어리티를 스스로 빼앗아 버린 악령들은 이곳저곳을 유리하며 계속 도망합니다.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도 그곳의 영들은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 그들의 성질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쫓아내며 심하게 벌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이러한 영계의 장면 자체보다 그 장면을 설명하는 마지막 원리입니다. ‘거짓은 그 자체 안에 거짓의 형벌을 가지고 있고, 악은 그 자체 안에 악의 형벌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AC.391의 중심입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저세상에는 사람의 내적 성질을 알아차리는 퍼셉션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연계에서는 사람의 내면이 외적인 말과 행동에 의해 상당 부분 가려질 수 있습니다. 악한 의도를 품으면서도 친절하게 말할 수 있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선한 목적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묘사하는 영계에서는 이러한 내적 성질이 훨씬 직접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악령이 어떤 공동체에 접근하면 그 공동체는 ‘그들이 오는 것만으로도’ 그 성질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이것을 영계에 존재하는 퍼셉션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이 ‘perception’은 우리가 태고교회의 퍼셉션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교회시대적 의미와 문맥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후세계에서 영들의 성질을 알아차리는 영적 지각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퍼셉션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므로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완전히 동일한 현상이다’라고 곧바로 등치하기보다, 같은 어휘가 영적 상태를 직접 알아차리는 능력이라는 넓은 의미망 안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그런데 악령들을 몰아내고 벌하는 자들도 악령들이며,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서로 벌하고 괴롭히는 데서 ‘가장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까지 말합니다. 이 장면은 상당히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천사들이 악령들을 고문한다거나 주님께서 악령들에게 고통을 주도록 명령하신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악 자체의 성질을 보여 주는 묘사입니다. 악은 자기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삼으며, 지배하고 해치고 보복하는 데서 즐거움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랑을 선택한 영들이 함께 있게 되면 각자가 다른 사람에게 행하려는 바로 그 악이 서로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바로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에게 바라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온다’고 합니다. 이것을 외부에서 작동하는 기계적인 인과응보 법칙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자연계에서 반드시 똑같은 일을 당한다’는 공식도 아닙니다. 문맥은 악의 사랑이 지배하는 영적 공동체의 질서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괴롭히고 파괴하려는 사랑 안에 있다면, 나와 같은 사랑 안에 있는 자들 역시 나를 그렇게 대하려 합니다. 결국 내가 다른 사람에게 향하게 한 악의 성질이 내가 살아가는 영적 환경의 성질이 되어 나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짓은 그 자체 안에 거짓의 형벌을 가지고 있고, 악은 그 자체 안에 악의 형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형벌이 악과 전혀 관계없이 밖에서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악 자체가 파괴적인 결과를 품고 있습니다. 미움은 관계를 파괴하고, 속임은 신뢰를 파괴하며, 지배욕은 서로의 자유를 파괴합니다. 거짓은 사람이 현실과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그 잘못된 판단에 따라 더 깊은 악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따라서 악과 거짓은 그 자체 안에서 고통과 불안과 충돌의 원인을 만들어 냅니다.
이 원리는 주님의 형벌을 이해할 때도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의 문자에는 여호와께서 진노하시고 벌하시며 멸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표현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더 깊은 설명에서는 주님은 선 자체, 사랑 자체, 자비 자체이시며 누구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악을 선택하고 그 악의 질서 안으로 들어갈 때 그 악 자체가 가진 결과를 경험합니다. 물론 주님의 섭리는 그 결과조차 가능한 한 제한하고 선한 목적을 위해 다스리지만, 악의 고통을 주님에게서 나오는 악으로 돌려서는 안 됩니다.
AC.391의 마지막에 ‘따라서 그들은 그 형벌들에 대한 두려움도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악령이 다른 악령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품고 있는 악의 성질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이 기회만 있으면 상대를 속이고 지배하고 괴롭히려 하므로 상대도 자신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끊임없는 불안을 만들어 냅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서로를 연결하는 사랑과 자비의 결속이 없고, 결국 각자가 서로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됩니다.
이것은 AC.390의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말씀의 이미지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두려움의 가장 깊은 원인이 외부의 추격자가 아니라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이기 때문입니다. 악과 거짓은 세상을 적대적인 곳으로 보게 하고, 다른 사람의 의도를 의심하게 하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품고 있는 악을 다른 사람도 자신에게 품고 있을 것이라고 느끼게 합니다. 그러므로 외부의 위험을 제거한다고 해서 그 두려움이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이 되는 사랑의 성질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설명을 자연계의 모든 불안이나 두려움에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불안장애, 트라우마, 질병, 실제적인 위험 등으로 두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당신 안에 악과 거짓이 있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라고 적용하는 것은 AC.391의 문맥을 벗어난 해석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체어리티를 완전히 빼앗아 버리고 악과 거짓을 자기 삶의 지배적인 원리로 삼은 악령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번호는 다른 사람의 심리 상태를 판단하는 잣대가 아니라 악 자체의 내적 성질을 이해하는 교리로 읽어야 합니다.
또한 이번 번호의 ‘서로 죽이려 한다’는 묘사도 자연계의 모든 악한 사람이 실제 살인을 원한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앞의 AC.374와 AC.390에서 살펴보았듯이 스베덴보리는 미움의 가장 깊은 성질 안에 상대의 선과 생명을 파괴하려는 방향이 있다고 봅니다. 영계에서는 외적인 사회 규범과 체면 때문에 감추어졌던 지배적인 사랑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므로 그 성질이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AC.389-391을 함께 읽으면 하나의 매우 일관된 구조가 보입니다. AC.389에서는 체어리티를 잃으면 주님과의 결합에서 분리되고 자기의 것에 맡겨지며, 그 결과 생각은 거짓이 되고 의지는 악이 되어 생명에 속한 것을 소멸시킨다고 했습니다. AC.390에서는 그러한 악과 거짓의 상태가 끊임없는 두려움과 도망으로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91에서는 사후세계의 악령들을 통해 그 원인을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악과 거짓은 외부에서 형벌이 붙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안에 형벌과 그 형벌에 대한 두려움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 곧 나올 ‘가인의 표’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가인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은 주님께서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로 내려가면서 악과 거짓의 파괴적인 질서에 노출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상태를 방치하여 남아 있는 모든 것까지 파괴되게 하지 않으시고 가인을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표는 악을 승인하는 표가 아니라, 악과 거짓 자체가 가진 파괴력으로부터 아직 보존되어야 할 것을 지키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방향으로 이해할 준비가 더욱 갖추어집니다.
결국 AC.391은 형벌에 대한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합니다. 악의 가장 깊은 형벌은 주님께서 악인에게 악을 돌려주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악 자체가 사람을 주님과 이웃에게서 분리하고 서로를 적으로 만들며 두려움과 고통의 세계를 형성하는 데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는 주님과 사람을 결합시키고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킵니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의 차이는 단순히 한쪽에는 상이 있고 다른 쪽에는 벌이 있다는 차이보다 훨씬 깊습니다. 하나는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자비 안에서 서로의 선을 원하는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사랑과 악 안에서 서로를 해치려는 질서입니다. AC.391의 악령들이 경험하는 두려움과 형벌은 바로 그들이 선택하고 사랑한 악의 질서가 어떤 세계를 만들어 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92, 창4:15,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다 - 분리된 신앙까지 보존하시는 이유’ (AC.392-396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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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0, 창4:14, ‘악과 거짓 가운데 있는 사람은 왜 끊임없이 두려워하는가?’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90악과 거짓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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