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2

또한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지성도 없습니다.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선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선도 없습니다.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진리도 없으며,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진리도 없습니다.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고, 따라서 주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들도 실제로 이러한 이름들로 불리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 Be it known moreover that there is no wisdom which is not from love, thus from the Lord; nor any intelligence except from faith, thus also from the Lord; and that there is no good except from love, thus from the Lord; and no truth except from faith, thus from the Lord. What are not from love and faith, and thus from the Lord, are indeed called by these names, but they are spurious.

 

해설

AC.112는 앞의 AC.110-111에서 다소 어렵게 느껴졌던 여러 구별을 매우 간결한 질서로 정리합니다. 지혜는 사랑에서 나오고, 지성은 신앙에서 나오며,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네 관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에서 나온다는 말 뒤에도, 신앙에서 나온다는 말 뒤에도 계속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라고 덧붙입니다. 결국 이 번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의 궁극적인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먼저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다’는 말은 앞에서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을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라고 한 설명과 그대로 이어집니다(AC.107). 참된 지혜는 사랑과 분리되어 머리에서 독립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지성은 없다’는 말은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한 AC.110과 연결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서 지성이 나오는 질서입니다. 따라서 사랑, 신앙, 지혜와 지성은 서로 떨어진 여러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과 진리도 같은 구조 안에 있습니다. 선은 사랑에서 나오고 진리는 신앙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AC.110에서 금이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을,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사랑의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뜻한다고 한 설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선과 진리를 단순한 도덕적 행동과 정확한 지식으로만 보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선에는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사랑이 있고, 진리에는 그것을 살아 있게 하는 신앙이 있으며, 그 사랑과 신앙의 근원은 다시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AC.112는 앞의 AC.111에서 기억지식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르는 겉 사람의 상태를 왜 문제 삼았는지도 밝혀 줍니다. 어떤 사람이 많은 것을 알고 매우 정교하게 추론할 수 있다고 해서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이 자동으로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겉으로 선해 보이는 행동이나 사실에 맞는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여기서 말하는 선과 진리의 생명이 모두 설명되는 것도 아닙니다. AC.112가 보는 것은 그 외적인 모습만이 아니라 그것이 어디에서 생명을 얻고 있는가 하는 근원과 질서입니다.

 

이 때문에 마지막 문장의 ‘진정한 것이 아닙니다’라는 표현을 세심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지 않는 것들도 실제로 ‘지혜’, ‘지성’, ‘선’, ‘진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신앙의 생명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여기서 말하는 본래적인 의미의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얻는 모든 지식이나 이성적 사고, 또는 자연적인 선행을 무가치하다고 선언하는 말이라기보다, 그것들을 참으로 살아 있게 하는 영적 생명의 근원이 따로 있음을 구별하는 말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AC.112가 보여 주는 주님의 모습이 선명해집니다. 주님은 단지 인간에게 무엇이 선이고 진리인지를 바깥에서 알려 주시는 분만이 아닙니다. 사랑의 근원도 주님이시고, 신앙의 근원도 주님이시며, 그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의 근원도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참으로 지혜롭고 선해지는 것은 자기 안에 주님과 별개의 또 하나의 선과 지혜의 원천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 그 생명이 자기 안에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AC.112의 반복되는 ‘따라서 주님으로부터’는 그래서 단순한 교리적 수식어가 아닙니다. 앞에서 에덴으로부터 강이 흘러나오고 그 강이 동산을 적셨던 것처럼, 이제 그 생명의 흐름이 사랑과 신앙,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 전체를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름은 인간에게 붙고 그 지혜와 지성은 인간 안에서 실제로 나타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이 근원의 질서를 놓치지 않는 것이 AC.110-112의 여러 세밀한 구별을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AC.112 해설)

 

 

 

AC.113, 창2:11-12, ‘금은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하고 표상함’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3말씀에서 ‘금’(gold)이 지혜 또는 사랑의 선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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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1, 창2:11-12,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과 그 지혜와 지성을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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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겉 사람들은 기억지식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많은 사람은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 둘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각각은 서로 구별되며,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그리고 보편적인 천국 전체는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에 의해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어집니다. It is however a very difficult matter to describe these things as they are in the internal sense, for at the present day no one knows what is meant by faith from love, and what by the wisdom and intelligence thence derived. For external men scarcely know of anything but memory-knowledge, which they call intelligence and wisdom, and faith. They do not even know what love is, and many do not know what the will and understanding are, and that they constitute one mind. And yet each of these things is distinct, yea, most distinct, and the universal heaven is ordinated by the Lord in the most distinct manner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of love and faith, which are innumerable.

 

해설

AC.111은 앞의 AC.110에서 제시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을 설명하기가 왜 어려운지를 밝힙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이 개념들이 추상적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오늘날 사람들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신앙에서 나오는 지혜와 지성이 무엇인지 자체를 거의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AC.110의 ‘사랑의 선’,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 ‘사랑의 진리’,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라는 구별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느 정도 당연합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바로 그 어려움을 인정하면서 설명을 이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특히 지적하는 것은 ‘겉 사람’이 지성과 지혜를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겉 사람은 기억지식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지성과 지혜와 신앙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가 기억지식 자체를 부정한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기억지식은 주님의 유입을 받는 인간의 능력 가운데 하나로 계속 등장했습니다. 문제는 기억지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것을 곧 지성이나 지혜라고 여기고, 심지어 신앙까지도 알고 기억하고 있는 내용과 동일시하는 데 있습니다. AC.111은 지식의 양과 참된 지혜의 생명이 같은 것이 아님을 구별합니다.

 

그 차이를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고 신앙이 그 사랑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지혜와 지성도 머릿속에 축적된 기억지식에서 독립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거기서 다시 지혜와 지성이 나옵니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지혜와 지성을 이해하려면 사람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앎과 이해에 어떤 사랑이 생명을 주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AC.110에서 비손을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이라고 한 배경이기도 합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많은 사람이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의지와 이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의 마음을 이룬다는 것도 모른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를 이룬다’는 것과 ‘구별된다’는 것이 서로 반대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의지와 이해는 하나의 마음을 이루지만 서로 같은 것은 아니며, 오히려 ‘참으로 가장 뚜렷하게 구별’됩니다. 사랑과 신앙 역시 서로 결합하여 하나의 생명을 이루지만 그렇다고 둘의 차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AC.110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세밀하게 구별한 것도 이러한 질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별은 단순한 인간 심리의 분석에 그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전체가 ‘무수히 많은 사랑과 신앙의 차이’에 따라 주님에 의해 가장 뚜렷하게 질서 지어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질서가 획일성을 뜻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하나 됨은 서로 다른 것들의 차이를 없애 모두 똑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차이들을 가장 뚜렷하게 구별하시면서도 그것들을 하나의 천국으로 질서 지으시는 것입니다. 구별과 하나 됨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주님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사람 안의 의지와 이해,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를 주님께서는 뒤섞어 차이를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고유한 질서 안에 두시면서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생명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래서 AC.111의 마지막 문장은 앞의 세밀한 구별들이 단순한 용어상의 복잡함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처럼 세밀하게 구별하는 까닭은 주님께서 사람과 천국을 실제로 그렇게 질서 지으신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111을 읽으면서 아직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혜와 지성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모두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이 번호는 왜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없는지를 먼저 보여 줍니다. 기억지식을 지혜로 여기고, 알고 있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기 쉬운 우리의 익숙한 틀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제 보여 주려는 것은 지식에서 출발하여 사랑으로 올라가는 질서가 아니라,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서 지혜와 지성이 생명을 얻는 질서입니다. AC.111은 바로 그 낯선 질서로 독자를 데려가기 위한 중요한 문턱입니다. (AC.111 해설)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 심화 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 심화1.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무엇이며, 왜 거기서 지혜와 지성이 나오는가?’ AC.111에서 스베덴보리는 오늘날에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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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2, 창2:11-12, ‘참된 지혜와 지성, 선과 진리는 모두 주님으로부터 옴’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2또한 사랑에서 나오지 않는 지혜는 없으며,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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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10, 창2:11-12,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하윌라는 마음을 뜻함’ (AC.110-115)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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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창2:11, 12)

 

AC.110

‘첫째’(first) 강, 곧 ‘비손’(Pishon)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뜻하고, ‘하윌라 땅’(land of Havilah)은 마음을 뜻하며, ‘금’(gold)은 선을 뜻하고,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는 진리를 뜻합니다. ‘금’(gold)이 두 번 언급되는 것은 그것이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을 뜻하기 때문이며, ‘베델리엄과 호마노’(bdellium and the onyx stone)가 언급되는 것은 하나는 사랑의 진리를, 다른 하나는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천적 인간입니다. The “first” river, or “Pishon,” signifies the intelligence of the faith that is from love; “the land of Havilah” signifies the mind; “gold” signifies good; “bdellium and the onyx stone,” truth. “Gold” is mentioned twice because it signifies the good of love and the good of faith from love; and “bdellium and the onyx stone” are mentioned because the one signifies the truth of love, and the other the truth of faith from love. Such is the celestial man.

 

해설

AC.110은 창2:10에서 ‘네 근원’으로 갈라진 강 가운데 첫째 강인 비손의 의미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앞에서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이며, 그 강이 동산을 적시는 것은 지성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AC.107). 이제 그 지성이 네 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묘사되는데, 첫째 강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뜻합니다. 따라서 비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인간의 지적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에덴의 사랑에서 흘러나온 지혜의 흐름 안에 있는 지성입니다.

 

이 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표현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신앙의 지성’이라고 하지 않고 그 신앙이 ‘사랑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앞에서 생명나무가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한다고 했던 것과 같은 질서입니다(AC.102).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비손이 나타내는 지성 역시 사랑과 분리되어 스스로 진리를 판단하고 축적하는 지성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 속한 지성입니다.

 

‘하윌라 땅’은 이러한 지성이 펼쳐지는 ‘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 땅에서 발견되는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는 그 마음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금은 선을 뜻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그것을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으로 구별합니다. 베델리엄과 호마노 역시 진리를 뜻하면서 각각 ‘사랑의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하윌라의 귀한 것들은 단순히 천적 인간이 많은 지식이나 훌륭한 덕목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의 마음 안에서 사랑을 중심으로 선과 진리가 질서 있게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사랑의 선’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선’, ‘사랑의 진리’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진리’를 구별한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AC.110은 아직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임의로 각각의 내용을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이 서로 무관하게 흩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앙에 속한 선과 진리조차 사랑에서 나오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천적 질서 안에 있습니다. 이어지는 AC.111-115에서 스베덴보리가 이 상응들을 어떻게 더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AC.110의 마지막 문장, ‘이러한 사람이 천적 인간입니다’가 앞의 모든 설명을 하나로 묶습니다. 천적 인간은 단순히 특별한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나 높은 영적 체험을 가진 사람이 아닙니다. 이 번호에서 묘사되는 그의 특징은 사랑이 생명의 중심이 되고, 그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며, 그 질서 안에서 지성과 선과 진리가 형성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계속 보아 온 것처럼 그 사랑과 생명의 근원 자체도 인간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의 지성과 선과 진리는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하여 주님께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의 생명에서 흘러나와 그의 마음 안에 자리 잡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비손이 하윌라 온 땅을 두르고 그곳에 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다는 창세기의 묘사는 단순한 지리적 정보 이상의 내적인 질서를 보여 줍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나오고, 그 신앙에 지성이 있으며, 그 마음 안에 선과 진리가 함께 있는 상태입니다. AC.110은 아직 그 각각의 상응을 제시하는 단계이지만, 마지막의 ‘이러한 사람이 천적 인간입니다’라는 한 문장을 통하여 이 모든 것을 한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생명의 질서로 보게 합니다. (AC.110 해설)

 

 

 

AC.111, 창2:11-12,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과 그 지혜와 지성을 오늘날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창2:11, 12) AC.111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속뜻에 있는 그대로 설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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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9, 창2:10, ‘지혜와 지성은 사람 안에 나타나지만 오직 주님의 것임’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9지혜와 지성이 사람 안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들은 오직 주님의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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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의 결혼 생활은 실제로 어떤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목격한 ‘천국 부부의 삶’

 

 

스베덴보리가 영계를 왕래하면서 가장 경외심을 느꼈던 장면 중 하나는 천국에서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천국에도 결혼이 있다’ 정도의 진술을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들의 일상 전체, 곧 그 얼굴의 빛, 말투, 행동, 기쁨의 흐름, 심지어 생각의 결합까지 모두 관찰하고 기록했습니다. 그가 본 천국의 결혼 생활은 지상에서 우리가 아는 결혼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천국 부부는 ‘두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영혼’이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부부를 보고 가장 먼저 충격받은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얼굴을 닮아 있었습니다. 서로의 말투, 기쁨의 색깔, 빛깔까지 닮아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 부부는 두 사람이 아니라, 두 영혼이 하나의 생명을 공유하는 것이다.’(‘결혼애’ 178, 181) 지상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살면서도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천국에서는 같은 선(善), 같은 진리, 같은 사랑을 공유하므로 자연스럽게 하나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본 천국 부부 중 일부는 서로 손을 잡고 걸을 때, 마치 한 존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천국 부부의 얼굴에는 ‘부드러운 빛’이 흐른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부부를 볼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서 어떤 따뜻한 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빛은 열정적인 환희가 아니라 잔잔한 기쁨이 차오른 채 넘치지 않는 ‘평화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습니다. ‘나는 그들의 눈에서 사랑과 지혜가 서로 흐르고 오르는 것을 보았다.’ 즉, 부부끼리 서로를 바라볼 때, 지혜가 흐르고 사랑이 흘러서 두 영혼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입니다.

 

 

천국 부부는 말보다 ‘감정의 투명한 교류’로 소통한다

 

천국에서는 사람의 내적 감정이 표정, 눈빛, 기운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감추기, 오해, 삐침, 질투 같은 것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부부 사이의 대화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말이 거의 필요 없었다. 마음이 마음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말을 한다고 해도 그 말은 서로의 애정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역할입니다. 천국의 말은 다정하고 부드러우며, 상대의 마음을 감싸는 음색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 부부의 일상은 ‘함께 일하고, 함께 기뻐하며, 함께 주님을 사랑하는 삶’이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부부가 어떤 의미에서 ‘동역자’라고 말했습니다. 부부는 각자 역할이 있지만, 그 역할의 목표는 하나입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더 선한 방식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며, 자신이 맡은 영적 공동체를 돕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공동체에 진리를 가르치고, 아내는 그 진리를 사랑으로 완성시키는 데 기여하며, 이 두 흐름이 하나의 선으로 결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의 남편은 지혜를 통해 아내를 사랑하고, 천국의 아내는 사랑을 통해 지혜, 곧 남편을 사랑한다.’(‘결혼애’ 21) 지상에서처럼 가사 분담, 성 역할 갈등 같은 개념은 없습니다. 모든 활동은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천국 부부에게는 ‘권태’, ‘식상함’, ‘갈등’이 없다

 

왜 없는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주님에게서 직접 흐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천국 부부의 사랑을 ‘늘 새로워지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천국의 결혼 사랑은 주님으로부터 오며, 그러므로 하루하루 더 새로워지고 풍성해진다.’ 지상의 결혼처럼 싫증이 나거나, 익숙해져 무감각해지거나, 서로를 상처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이 이미 악과 이기심에서 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천국 부부는 ‘성’(性) 또한 영적 기쁨으로 경험한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스베덴보리는 이 부분을 매우 조심스러우면서도 아주 깊게 기록했습니다. 천국의 혼인 사랑에는 ‘친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친밀함은 지상의 성적 욕구와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그것은 정서의 가장 순전한 결합, 영혼이 영혼을 포옹하는 기쁨, 두 생명의 교류가 빛처럼 흐르는 경험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천국의 부부는 서로를 포옹할 때, 사랑과 지혜가 흐르는 것을 느낀다.’ 육체적 욕구가 아니라 영적 친밀성이며, 그 기쁨은 지상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고결합니다.

 

 

천국 부부의 사랑은 ‘영원히 유지되는 기쁨’이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의 부부는 함께 있을 때, 주님의 사랑을 가장 선명하게 경험한다.’ 그래서 그들의 사랑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 결합은 중간 영계에서 검증되고, 천국의 빛 속에서 굳어지며, 영원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을 스베덴보리는 ‘혼인천국’(婚姻天國)이라고 불렀습니다.

 

 

요약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의 결혼은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두 영혼이 하나의 마음을 공유하는 결합, 말보다 감정이 더 투명하게 흐르는 소통, 갈등, 질투, 오해가 없는 평화, 주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새로워지는 기쁨, 하나의 선을 이루는 동역자 관계, 영혼의 친밀함이 최고조로 발현되는 관계, 영원히 지속되는 관계라고 말입니다. 지상의 어떤 결혼도 천국의 이 결혼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SC.77, ‘AC 본문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 작업에 대하여

제가 작업 중인 이 ‘AC본문 번역 및 해설, 그리고 심화’라는 작업에 무슨 근본적인 문제가 있나요? 제가 이런 질문을 드리는 이유는, 제가 이 작업을 해서 나온 ‘창1, AC.1-66 –ChatGPT’라는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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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5, ‘지상에서 배우자가 없었던 사람의 천국에서의 결혼은?’

지상에서 배우자가 없었던 사람의 천국 결혼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바로 스베덴보리의 경우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주님이 정해주신 짝을 만나 결혼했겠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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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서 배우자가 없었던 사람의 천국 결혼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바로 스베덴보리의 경우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주님이 정해주신 짝을 만나 결혼했겠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를 오래 읽은 독자라면, 반드시 한 번쯤 품게 되는 핵심 질문입니다. 그리고 아주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스베덴보리가 천국에서 혼인했는가? 스베덴보리는 ‘천국 결혼의 본질’을 깊이 알고 있었지만, 자신이 사후에 실제로 누구와 결혼하게 될지는 생전에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저술 전체와 영적 원리를 종합하면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반드시 자기 본질에 맞는 짝을 만나게 된다.’ 이것만큼은 거의 확정적 진실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의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본질의 결합’이며, 스베덴보리처럼 영적 본질이 정련된 사람에게는 반드시 그 본질에 맞는 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서 매우 차분하게,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원리와 그의 삶과 저술 전체를 조합해 ‘스베덴보리가 천국에서 어떤 결혼을 하게 되는가’를 전기적, 서술적 흐름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상에서 결혼하지 않았지만, 영혼의 본질은 결혼에 적합한 구조였다

 

스베덴보리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혼을 회피한 사람이 아니라 사명을 위해 결혼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50대 후반, 영계를 왕래하게 되면서, 자신의 삶이 ‘개인적 가정생활’보다 인류 전체에 대한 사명으로 옮겨졌다고 기록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결혼애’(結婚愛, Conjugial Love, 176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결혼을 향하도록 창조되었다.’ 즉, 영혼의 가장 깊은 층은 짝을 향해 열려 있는 구조입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지상에서 결혼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영계에서의 결혼과는 무관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왕래하면서 천국 결혼이 ‘영혼의 본질 일치’에 의해 결정됨을 직접 확인했다

 

스베덴보리가 보았던 천국 부부들은 지상에서 어떤 관계였느냐보다 ‘영혼이 어떤 성질이었느냐’가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국에서 부부는 서로의 내적 선과 진리의 일치로 결합한다.’(‘결혼애’ 41, 50, 56 등) 스베덴보리는 인류 중에서 내적 선과 진리의 결합이 가장 깊고 특수한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결론은 하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도 반드시 그 내적 본질에 맞는 짝이 있다.

 

 

스베덴보리는 이미 생전에 ‘결혼에 적합한 상태’에 있었다

 

스베덴보리가 기록한 천국 결혼의 준비 조건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1.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이 선함과 하나가 된 상태

2. 영혼의 이기심이 정화된 상태

3. 주님을 삶의 중심으로 둔 상태

 

스베덴보리는 이 세 가지 조건을 생전 25년 이상 철저히 갖추어 있었던 사람입니다. 특히 영계 왕래 후에는 감정, 사랑, 욕망, 동기까지 투명하게 드러나는 상태에서 자신의 내적 상태가 조정되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천국에서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은 그의 저술 전체가 증언하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에 ‘주님이 예비한 짝’을 만날 가능성이 사실상 100%이다

 

천국에서의 결혼 원리는 매우 단순합니다. ‘영혼의 본질이 맞으면, 두 사람은 서로를 알아본다.’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본 여러 부부의 모습은 다 다음과 같은 흐름을 보여줍니다. 서로의 영혼의 냄새(seemly aura)를 바로 알아보고, ‘이 사람이구나!’ 하는 강렬한 인식이 생기며, 천국의 빛 속에서 그 결합이 영원히 굳어진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창조하신 완전한 결혼이다.’ 스베덴보리처럼 영혼이 완전히 정련된 사람은 천국에서 가장 조화로운 짝을 만나게 됩니다. 그 짝은 동시대에 태어난 사람일 수도 있고, 다른 시대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시대, 민족, 언어의 장벽을 넘어선다.’

 

 

스베덴보리는 생전에는 ‘나는 결혼할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겸손했기 때문이다

 

스베덴보리는 결코 ‘나는 천국에서 결혼할 것이다’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보기에 자신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지, 자신의 개인적 영광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조심스럽게 단서를 남겼습니다. ‘천국적 결혼은 주님이 직접 이루시는 가장 큰 선이다.’, ‘이 결혼은 모든 사람을 향해 열려 있다.’, ‘진리를 사랑한 이에게는 그에 맞는 짝이 주어진다.’ 그렇다면 진리를 목숨처럼 사랑하며, 진리의 선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스베덴보리가 천국에서 결혼하지 않을 이유는 단 한 가지도 없습니다.

 

 

결론,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반드시 자기 본질에 완벽히 맞는 짝을 만나 결혼했을 것이다

 

이것은 교리적 상상이나 추정이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남긴 영계 관찰 전체를 종합한 영적 필연성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1. 천국적 결혼은 영혼의 본질이 결정한다.

2. 스베덴보리는 영혼의 본질이 선과 진리의 완성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다.

3.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영적으로 상응하는 짝이 있다.

4. 천국에서는 그 짝을 찾지 못하는 일이 없다.

 

따라서, 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주님이 정해주신 짝을 만나 결혼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아니, 영계의 질서상 ‘반드시’라고 말해도 됩니다. 그리고 그 결혼은 지상의 어떤 결혼보다 훨씬 깊고 밝고 자유로운 결합일 것입니다.

 

 

 

SC.74,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한 경우’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했지만, 뒤늦게 지상 배우자가 사후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할 경우는? 이 질문은 결코 엉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결혼론과 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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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9

지혜와 지성이 사람 안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들은 오직 주님의 것이라는 사실이 에스겔에서 이와 유사한 표상들을 통하여 분명히 선언됩니다. That although wisdom and intelligence appear in man, they are, as has been said, of the Lord alone, is plainly declared in Ezekiel by means of similar representatives: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2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재료가 되리라 (겔47:1, 8-9, 12) Behold, waters issued out from under the threshold of the house eastward; for the face of the house is the east; and he said, These waters issue out to the border toward the east, and go down into the plain, and come to the sea, which being led into the sea,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which creepe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by the river upon the bank thereof, on this side and on that side, there come up all trees for food, whose leaf shall not fade, neither shall the fruit thereof be consumed; it is born again in its months, because these its waters issue out of the sanctuary, and the fruit thereof shall be for food, and the leaf thereof for medicine (Ezek. 47:1, 8–9, 12).

 

여기서 ‘동쪽’(east)과 물과 강이 흘러나온 ‘성소’(sanctuary)는 주님을 뜻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에서는, Here the Lord is signified by the “east,” and by the “sanctuary,” whence the waters and rivers issued. In like manner in John:

 

1또 그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계22:1, 2) He showed me a pure river of water of life, bright as crystal, going forth out of the throne of God and of the lamb. In the midst of the street thereof, and of the river on this side and that, was the tree of life, which bare twelve [manner of] fruits, and yielded her fruit every month; and the leaf of the tree was for the healing of the nations (Rev. 22:1–2).

 

해설

AC.109는 창2:10의 강에 관한 설명을 그 근원까지 거슬러 올라가 마무리합니다. 지혜와 지성은 분명 사람 안에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생각하고 이해하고 분별하며 지혜롭게 행동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사람 자신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들은 오직 주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설명하기 위해 에스겔의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과 요한계시록의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나오는 생명수의 강을 인용합니다. 두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물과 강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물과 강이 ‘어디에서 나오는가’입니다.

 

먼저 겔47:1, 8-9, 12에서 물은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흐릅니다. 그 물이 바다에 이르면 죽어 있던 물이 되살아나고,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생물이 살며, 강 좌우에는 먹을 과실나무가 자랍니다. 그 나무들은 잎이 시들지 않고 열매가 끊이지 않으며 달마다 새 열매를 맺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생명과 풍성함의 이유가 본문 자체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 물이 성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점을 붙들어 ‘동쪽’과 물과 강이 나오는 ‘성소’가 주님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 인용은 앞의 창2:10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듯이, 에스겔에서는 성소에서 물이 흘러나와 그 물이 이르는 곳을 살립니다. AC.107에서 에덴에서 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이고, 동산을 적시는 것은 지성을 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109가 에스겔의 말씀을 인용하는 까닭은 지혜와 지성이 사람 안에서 생명을 일으키더라도 그 생명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물이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성소에서 나오듯이, 사람 안에 나타나는 참된 지혜와 지성도 그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이것을 더욱 직접적으로 보여 줍니다. ‘생명수의 강’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계속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는 만국을 치료합니다. 여기서는 창2에서 지금까지 살펴본 ‘강’과 ‘생명나무’가 다시 함께 나타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통하여 생명을 주는 물과 강의 근원이 주님이심을 다시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AC.109는 앞의 AC.105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AC.105에서는 생명나무가 ‘주님의 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09에서는 지혜와 지성도 오직 주님의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과 신앙뿐 아니라 지혜와 지성까지도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모두 주님께 이릅니다. 사람은 그것들을 실제로 받아 자기 안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며 살아가지만, 그 생명의 근원까지 자기 것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오직 주님의 것’이라는 말을 사람 안의 지혜와 지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표현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에스겔의 물은 실제로 바다를 되살리고 생물을 살리며 나무에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요한계시록의 생명수의 강도 실제로 생명나무와 그 열매와 치료를 낳습니다.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은 인간 안에서 일어나는 생명의 역사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밝혀 줍니다. 사람 안에 지혜와 지성이 나타나는 것은 실제이지만, 그것들이 살아 있는 까닭은 그 근원이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창2:10의 한 장면 전체가 여기에서 더욱 선명해집니다. 에덴에서 강이 나와 동산을 적십니다.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을 줍니다. 그러나 그 사랑과 지혜와 지성의 가장 깊은 근원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면서 사람이 스스로 지혜로워지기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소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보좌에서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듯이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시는 분입니다. 사람 안에서 지혜와 지성이 살아날수록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서 찾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 이것이 AC.109가 창2:10의 강을 통하여 보여 주는 생명의 질서입니다. (AC.109 해설)

 

 

 

AC.110, 창2:11-12, ‘비손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의 지성을, 하윌라는 마음을 뜻함’ (AC.110-115)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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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8, 창2:10, ‘동산을 적시는 물과 강은 사람을 자라게 하는 지혜를 뜻함’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8 태고인들은 사람을 ‘동산’(garden)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관계되는 것들을 ‘강들’(rivers)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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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8

 

태고인들은 사람을 ‘동산’(garden)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관계되는 것들을 ‘강들’(rivers)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단지 그렇게 비유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불렀는데, 그들의 말하는 방식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이후 선지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때로는 그것들을 그렇게 비유했고 때로는 실제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이사야에서는, The most ancient people, when comparing man to a “garden,” also compared wisdom, and the things relating to wisdom, to “rivers”; nor did they merely compare them, but actually so called them, for such was their way of speaking. It was the same afterwards in the prophets, who sometimes compared them, and sometimes called them so. As in Isaiah:

 

10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사58:10, 11) Thy light shall arise in darkness, and thy thick darkness shall be as the light of day, and thou shalt be like a watered garden, and like an outlet of waters, whose waters lie not (Isa. 58:10–11).

 

이는 신앙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다룬 말씀입니다. 또 거듭난 사람들을 말하면서, Treating of those who receive faith and love. Again, speaking of the regenerate: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께서 심으신 침향목들주2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민24:6) As the valleys are they planted, as gardens by the river’s side; as lignaloes2 which Jehovah hath planted, as cedar trees beside the waters (Num. 24:6).

 

예레미야에서는, In Jeremiah:

 

7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8그는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렘17:7, 8) Blessed is the man who trusteth in Jehovah; he shall be as a tree planted by the waters, and that sendeth forth her roots by the river (Jer. 17:7–8).

 

에스겔에서는 거듭난 사람들을 동산과 나무에 비유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부릅니다. In Ezekiel the regenerate are not compared to a garden and a tree, but are so called:

 

4물들이 그것을 기르며 깊은 물이 그것을 자라게 하며 강들이 그 심어진 곳을 둘러 흐르며 둑의 물이 들의 모든 나무에까지 미치매, 7그 뿌리가 큰 물가에 있으므로 그 나무가 크고 가지가 길어 모양이 아름다우매 8하나님의 동산의 백향목이 능히 그를 가리지 못하며 잣나무가 그 굵은 가지만 못하며 단풍나무가 그 가는 가지만 못하며 하나님의 동산의 어떤 나무도 그 아름다운 모양과 같지 못하였도다 9내가 그 가지를 많게 하여 모양이 아름답게 하였더니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는 모든 나무가 다 시기하였느니라 (겔31:4, 7-9) The waters made her to grow, the deep of waters uplifted her, the river ran round about her plant, and sent out its channels to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e was made beautiful in her greatness, in the length of her branches, for her root was by many waters. The cedars in the garden of God did not hide her; the fir trees were not like her boughs, and the plane trees were not like her branches, nor was any tree in the garden of God equal to her in her beauty; I have made her beautiful by the multitude of her branches, and all the trees of Eden that were in the garden of God envied her (Ezek. 31:4, 7–9).

 

이 구절들로부터 분명한 것은, 태고인들이 사람이나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을 ‘동산’(garden)에 비유할 때 그를 적실 ‘물들’(waters)과 ‘강들’(rivers)을 덧붙였으며, 이 물들과 강들로 그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들을 뜻했다는 것입니다. From these passages it is evident that when the most ancient people compared man, or the things in man, to a “garden,” they added the “waters” and “rivers” by which he might be watered, and by these waters and rivers meant such things as would cause his growth.

 

주2. 라틴 tentoria, ‘텐트’(tents), 얼핏 santalos에 대한 미스프린트 같음 [편집자 주] The Latin is tentoria, “tents,” seemingly a misprint for santalos. [Reviser]

 

해설

AC.108은 앞의 AC.107에서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뜻한다고 한 해석의 배경을 설명합니다. 태고인들은 사람을 ‘동산’에 비유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불렀고, 지혜와 지혜에 관계되는 것들도 ‘강들’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시적 수사가 아니라 그들의 말하는 방식 자체였으며,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표현 방식이 이후 선지자들의 말씀에도 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이 번호에서는 물과 강, 동산과 나무가 함께 등장하는 여러 성경 구절을 제시합니다.

 

먼저 사58:10-11의 ‘물 댄 동산’과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물의 근원’은 신앙과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왜 이 구절을 인용했는지는 창2:10과 나란히 놓으면 분명해집니다. 동산이 아름답게 유지되는 것은 그 안에 물이 있기 때문이며, 사람의 영적 생명도 그를 살아 있게 하고 자라게 하는 것이 끊임없이 공급될 때 유지됩니다. 따라서 ‘물 댄 동산’이라는 말씀은 단순히 풍요로운 자연의 모습을 빌린 비유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받아 생명 있게 되는 사람의 상태를 보여 주는 표현으로 읽힙니다.

 

이어지는 민24:6과 렘17:7-8도 같은 점을 보여 줍니다. ‘강가의 동산’, ‘물가의 백향목’, 그리고 ‘물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가로 뻗은 것’이라는 표현에는 모두 나무나 동산의 생명이 물과 분리될 수 없다는 공통된 모습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들을 ‘거듭난 사람’과 연결합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자기 안에서 스스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것을 받아 자라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물과 강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자라게 하는 것들을 나타냅니다.

 

에스겔의 긴 인용은 이 원리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여기서는 거듭난 사람을 동산이나 나무에 단순히 ‘비유하는’ 정도를 넘어 실제로 나무와 동산의 언어로 말합니다. 물이 나무를 자라게 하고, 깊은 물이 높이며, 강과 수로가 나무들에게 흘러가고, 그 결과 가지가 많아지고 아름다워집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긴 본문을 인용한 까닭은 바로 이 구조 때문입니다. 나무의 성장과 아름다움의 근원이 나무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을 적시는 물에 있듯이, 사람 안의 영적 성장도 그 사람 자신만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08은 AC.107의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해하게 합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거기서 흘러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이며, 그 강이 동산을 적시는 것은 지성을 주는 것입니다. 이제 AC.108에서는 그 물과 강이 동산과 나무를 실제로 ‘자라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지혜는 단지 사람이 무엇을 많이 아는 상태가 아니라, 사람의 내적인 생명을 적시고 자라게 하며 열매 맺게 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지혜가 사랑에서 분리된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와 지성을 살아 있게 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미지의 중심에는 다시 주님이 계십니다. 앞의 AC.105에서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고 했고, AC.107에서는 에덴의 사랑에서 지혜의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108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물 댄 동산’, ‘강가의 동산’, ‘물가에 심어진 나무’는 인간이 자기 지혜로 스스로를 풍성하게 만드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물을 만들어 내는 동산이 아니라 물을 받아 자라는 동산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에서 지혜가 흘러나오고, 그 지혜가 사람의 지성을 적시며, 그로 말미암아 그의 내적인 삶이 자라고 아름다워집니다.

 

따라서 AC.108의 여러 성경 인용은 서로 흩어진 증거 구절들의 모음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의 생명의 질서를 보여 줍니다. ‘동산과 나무’는 생명을 받아 자라는 사람과 사람 안의 것들을 나타내고, ‘물과 강’은 그것들을 살아 있게 하고 자라게 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 질서를 이해하면 창2:10의 강은 에덴동산의 장식적인 요소가 아니라 동산을 살아 있게 하는 생명의 흐름이 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의 더 깊은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와 생명을 주시는 주님께 있습니다. (AC.108 해설)

 

 

 

AC.109, 창2:10, ‘지혜와 지성은 사람 안에 나타나지만 오직 주님의 것임’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9지혜와 지성이 사람 안에 나타나기는 하지만,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들은 오직 주님의 것이라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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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7, 창2:10,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뜻함’ (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에덴에서 흘러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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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river out of Eden)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뜻합니다. ‘에덴’(Eden)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동산을 적신다’(to water the garden)는 것은 지성을 주는 것이며,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된다’(thence parted into four heads)는 것은 다음에 나오는 네 강을 통하여 지성을 묘사한 것입니다. A “river out of Eden” signifies wisdom from love, for “Eden” is love; “to water the garden” is to bestow intelligence; to be “thence parted into four heads” is a description of intelligence by means of the four rivers, as follows.

 

해설

AC.107은 창2:10의 전체 속뜻을 먼저 압축하여 제시합니다.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뜻하고, 그 강이 ‘동산을 적신다’는 것은 지성을 주는 것을 뜻하며, 그 강이 ‘네 근원’으로 갈라지는 것은 이어지는 네 강을 통하여 그 지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묘사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절은 단순히 에덴동산을 흐르는 한 강과 네 강의 지리적 모습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로 말미암아 지성이 생명을 얻는 천적 인간의 내적인 질서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에덴’과 ‘강’의 관계입니다. 앞에서 에덴은 사랑을 뜻한다고 했습니다(AC.98, 100). 그런데 이제 그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오며, 그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뜻합니다. 지혜가 사랑과 따로 존재하거나 사랑보다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천적 인간에게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과 지성이 그 사랑에서 나온다고 설명한 생명의 질서와 같습니다. 사랑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중심이라면, 지혜는 그 사랑으로부터 흘러나와 사람의 지성을 살아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 강이 ‘동산을 적신다’는 표현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앞에서 ‘동산’은 지성을 뜻했습니다. 그러므로 동산이 스스로 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에 의해 적셔지듯이, 인간의 지성 역시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과 지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받아 생명을 얻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를 ‘지성을 준다’고 표현한 것은 지성이 단순히 인간이 스스로 축적한 지식이나 사고 능력의 산물이 아니라, 그 깊은 근원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보면 창2:10은 앞의 AC.98-105에서 계속 설명해 온 내용을 매우 아름다운 하나의 장면으로 보여 줍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오며, 그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이고, 그 지혜가 동산을 적셔 지성을 줍니다. 사랑과 지혜와 지성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흐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으므로(AC.105), 이 흐름의 궁극적인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사랑을 주시고, 그 사랑에서 지혜가 흘러나오며, 그 지혜가 사람의 지성을 살아 있게 합니다.

 

이 점은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이끄시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합니다. AC.107의 그림에서 주님은 인간의 지성을 바깥에서 억지로 움직이시는 분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의 중심에 사랑을 주시고, 그 사랑에서 지혜가 흘러나오게 하시며, 그 지혜로 지성을 적시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참된 지성이란 단지 많은 것을 알고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에서 흘러나온 지혜로 생명을 얻은 지성이라는 것이 이 구절의 질서 안에서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강이 ‘네 근원’으로 갈라진다는 것은 그 지성이 이제 여러 측면에서 더 구체적으로 묘사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AC.107은 아직 네 강 각각의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이어지는 글에서 그것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단계에서는 네 강의 의미를 앞질러 해석하기보다 ‘사랑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지성을 주며, 그 지성이 이어지는 네 강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묘사된다’는 전체 흐름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창2:10의 중심에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지혜와 지성을 만들어 내는 모습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의 생명이 지혜가 되어 흘러가며 인간의 지성을 적시는 모습이 있습니다. (AC.107 해설)

 

 

 

AC.108, 창2:10, ‘동산을 적시는 물과 강은 사람을 자라게 하는 지혜를 뜻함’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창2:10) AC.108 태고인들은 사람을 ‘동산’(garden)에 비유할 때 지혜와 지혜에 관계되는 것들을 ‘강들’(rivers)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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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6, 창2:9,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의 본성은 뒤에서 더 밝혀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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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했지만, 뒤늦게 지상 배우자가 사후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할 경우는?

 

 

이 질문은 결코 엉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결혼론과 영계 질서의 핵심을 정확히 찌르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네, 그런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다만 그 만남은 비극도 아니고, 충격도 아니고,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재회가 이루어진 뒤, 각자의 길을 가는 형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장면을 분명히 보았고, 그에 대해 매우 섬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장면을 여러 번 관찰했습니다.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천국에 먼저 간 사람은 이미 ‘자기 본질에 맞는 짝’을 찾았다

 

천국에서의 혼인은 지상의 법률적 혼인이 아니라 영적 본질(affectional essence)이 맞는 두 존재의 결합입니다. 따라서 지상에서 함께 살았던 부부라도 영적 본질이 전혀 맞지 않았다면, 천국에서 부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중간 영계에서 정화된 뒤, 자신과 영적으로 가장 잘 맞는 ‘진짜 짝’을 만나 천국적 결혼을 이루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예비하신 진짜 짝’이라고 표현합니다.

 

 

이후, 지상 배우자가 죽어 중간 영계에 도착한다

 

이때 중간 영계에 들어온 지상 배우자는 먼저 천국에 올라간 배우자가 ‘다른 천국적 짝’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대부분 처음에는 죽음의 평안 속에서 자신의 새로운 상태, 천사의 안내, 중간 영계의 분위기 등 이런 것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먼저 천국 간 배우자가 중간 영계 배우자를 보러 오는가?

 

여기서 매우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천국에 간 사람은 ‘굳이 내려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둘 사이에는 더 이상 영적 친화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을 빌리면, ‘영적 친화성이 없는 존재는 서로에게 끌림이 생기지 않는다.’ 즉, 주님이 그 마음 안에서 집착을 제거하셨기 때문에 억지로 가서 만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필요하다면 ‘일시적 만남’은 허용된다

 

중간 영계에 새로 도착한 지상 배우자가 강하게 보기 원하거나 서로에게 아직 ‘남은 질문’이 있다면, 천사들이 그 만남을 잠시 허용하기도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아주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그 만남은 대부분 다음과 같습니다. 둘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러나 이전처럼 강한 감정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로 ‘아, 당신이 오셨군요.’ 정도의 자연스러운 인식이 있습니다. 대립도, 갈등도, 원망도 없습니다. 은근한 감사, 또는 담담한 정서가 흐릅니다. 그리고 아주 조용하게 말합니다. ‘당신도 당신의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에게 맞는 자리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헤어집니다.

 

 

그 이별은 슬픔이 아니라 평화에 가깝다

 

스베덴보리는 강조합니다. ‘영계에서의 이별은 지상의 감정적 상실이 아니다. 상태가 맞지 않는 둘은 자연스럽게 헤어진다.’ 즉, 천국에 있던 배우자도 슬퍼하지 않고, 중간 영계에 도착한 배우자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간 영계에서는 이미 지상적 집착(attachment)이나 소유 의식이 천사들에 의해 부드럽게 제거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만남은 억지도, 슬픔도, 미련도, 적대도 없이 단지 ‘아주 조용한 고별’ 같은 이런 정서로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평화로운 결별 장면’이라고 불렀습니다.

 

 

중간 영계에 도착한 그 배우자는 어떻게 되는가?

 

그는 자신에게 가장 맞는 영적 상태를 향해 중간 영계에서 정화 과정을 거치며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 정화가 충분해지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진짜 짝, 즉 자신의 본성에 가장 잘 맞는 이성(異性)을 만나게 됩니다. 그 결합은 지상 결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고 밝고 평화롭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혼의 진짜 결혼’이라 불렀습니다.

 

 

이런 재회와 결별은 ‘비극’이 아니라 ‘질서’이다

 

스베덴보리는 결론을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영적 질서이며, 불일치한 둘이 억지로 함께 있는 일이 없다.’ 그리고 또 한마디로 요약합니다. ‘지상에서의 결혼은 과정이고, 천국에서의 결혼은 본질이다.’ 즉, 지상에서는 의무, 상황, 문화, 정, 책임이 부부를 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영혼의 본질이 같아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말씀처럼 ‘만나더라도 평범하게 헤어지는 경우’가 맞습니다

 

네, 목사님 말씀이 정확합니다. 이미 천국에서 다른 짝을 만난 쪽은 한때의 지상 배우자를 따뜻한 기억으로만 바라보며,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한 배우자와는 조용히 재회하고, 조용히 인사하고, 조용히 각자의 길을 가는 그런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의 감정적 분위기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별에는 고통이 아니고, 서로의 길을 인정하는 평화가 있다.’

 

 

 

SC.75, ‘지상에서 배우자가 없었던 사람의 천국에서의 결혼은?’

지상에서 배우자가 없었던 사람의 천국 결혼은 어떻게 이루어지나요? 바로 스베덴보리의 경우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 주님이 정해주신 짝을 만나 결혼했겠지요? 목사님, 이 질문은 스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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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3, ‘부부 중 한 사람만 신앙이 깊은 경우,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수많은 부부의 사후 모습들인데요, 이 주제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목사님처럼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 분에게는 특별히 자주 받는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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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

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곧 퍼셉션의 본성이 어떠한지, ‘생명나무’(tree of lives), 곧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의 본성이 어떠한지, 그리고 ‘지식의 나무’(tree of knowledge), 곧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의 본성이 어떠한지는 뒤에 이어지는 글들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But the nature of the “tree of the garden,” or perception; of the “tree of lives,” or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and of the “tree of knowledge,” or faith originating in what is sensuous and in mere memory-knowledge, will be shown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106은 창2:9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짧게 정리하면서, 이 절에서 등장한 세 가지 중요한 주제가 앞으로 더 자세히 밝혀질 것이라고 예고합니다. 곧 ‘동산의 나무’인 퍼셉션, ‘생명나무’인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그리고 ‘지식의 나무’인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입니다. AC.102에서 먼저 제시했던 세 가지 의미를 AC.103-105에서 일부 설명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으로 이 주제들이 모두 설명되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지금 창2:9을 읽는 독자에게도 중요한 안내가 됩니다. 특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해서는 아직 성급하게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은 그것이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비롯되는 신앙을 뜻한다는 데까지입니다.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 사람이 감각과 기억지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그리고 이것이 이후의 타락 이야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앞으로 이어지는 설명을 더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지식의 나무’를 지식이나 이성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해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아직 하지 않은 말을 앞질러 하는 것이 됩니다.

 

‘생명나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AC.105에서는 그것을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라고 하면서, 마침내 ‘주님의 자비’라고 설명했습니다.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106은 그 생명나무의 ‘본성’ 역시 뒤에서 더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 붙들어야 할 중심은 생명나무를 어떤 교리적 정의 하나로 완전히 파악했다는 생각보다,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의 자비에 있다는 지금까지의 질서입니다.

 

퍼셉션 역시 아직 다 밝혀진 것이 아닙니다. AC.104에서 그것은 참되고 선한 것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중요한 설명이지만, AC.106은 그 ‘본성’이 앞으로 더 밝혀질 것이라고 합니다. 이 점은 우리가 AC를 읽는 태도에도 도움이 됩니다. 어떤 낯선 개념을 처음 만났을 때 즉시 익숙한 개념으로 바꾸어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그 말을 어떻게 사용하고 점차 어떤 내용을 더해 가는지를 따라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AC.106은 내용은 짧지만 독자에게 중요한 여백을 남깁니다. 주님의 말씀과 그 속뜻을 이해하는 일은 한 표현의 뜻을 한 번 확인하고 끝내는 일이 아니라, 이어지는 말씀 안에서 그 뜻이 점차 열리고 서로 연결되는 과정을 따라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창세기 첫 부분처럼 우리가 오랫동안 익숙하게 읽어 온 말씀을 전혀 다른 깊이에서 다시 접할 때에는, 처음부터 모든 것을 자기 이해 안에 넣으려 하기보다 지금 밝혀진 만큼 충실히 받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은 기다리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AC.106에서 우리는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에 관한 결론에 도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문턱에 서 있습니다. 지금까지 분명해진 것은 참과 선을 퍼셉션하게 하시는 분도 주님이시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의 근원도 주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신앙의 근원을 찾는 문제는 앞으로 더 밝혀질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독자에게 결론을 서두르게 하지 않고, 이어지는 말씀과 설명을 따라 그 차이를 더 분명히 보도록 이끕니다. (AC.106 해설)

 

 

 

AC.107, 창2:10, ‘에덴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를 뜻함’ (AC.107-109)

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창2:10) AC.107‘에덴에서 흘러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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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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