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이며, ‘동산 가운데’(in the midst of the garden)는 속 사람의 의지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말씀에서 ‘마음’(heart)이라 하는 의지는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서 가장 먼저 소유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으므로,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에 관하여 말해지기는 하지만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의 의지라고 하는 것은 탐욕이며, 이것이 사람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지가 생명나무가 놓여 있는 ‘동산 가운데’(midst of the garden)이고,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으므로,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주님의 자비이며, 주님으로부터 모든 사랑과 신앙이 나오고, 따라서 모든 생명이 나옵니다. The “tree of lives” i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in the midst of the garden” is in the will of the internal man. The will, which in the Word is called the “heart,” is the primary possession of the Lord with man and angel. But as no one can do good of himself, the will or heart is not man’s, although it is predicated of man; cupidity, which he calls will, is man’s. Since then the will is the “midst of the garden,” where the tree of lives is placed, and man has no will, but mere cupidity, the “tree of lives” is the mercy of the Lord, from whom comes all love and faith, consequently all life.

 

해설

AC.105는 창2:9의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라는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가장 깊은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고, 그것이 있는 ‘동산 가운데’는 속 사람의 의지를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서 이 의지를 ‘마음’이라고도 한다고 하면서, 그것이 사람과 천사 안에서 주님께서 가장 먼저 소유하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생명나무가 동산의 가장자리가 아니라 ‘가운데’에 있다는 것은 이렇게 사람의 생명의 중심과 관계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설명은 매우 강합니다. 아무도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을 행할 수 없으므로 의지 또는 마음은 사람의 것이 아니며, 사람이 자기 의지라고 부르는 것은 오히려 ‘탐욕’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인간에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동하는 능력 자체가 없다고 말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 그가 묻고 있는 것은 ‘선한 의지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그 생명의 근원을 인간 자신에게 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선을 원하고 행하게 하는 선의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이것은 앞의 AC.99와 AC.104에서 계속 밝혀진 질서와도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은 자신의 지성이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든다는 것을 퍼셉션하며, 퍼셉션 자체도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 감각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105는 그보다 더 중심으로 들어갑니다. 사람의 지성만이 아니라 사랑하고 선을 원하는 의지의 생명 역시 그 근원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인간이 자기 안에 독립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모든 사랑과 신앙과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있는 것은 ‘단지 탐욕’이라고까지 말할까요? 이 표현은 인간을 비하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과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철저히 구별하려는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이 선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 생명의 근원을 자신에게 돌리게 됩니다. 그러나 AC.105가 가리키는 생명의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선한 의지와 사랑과 신앙과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며, 인간은 그것들을 주님으로부터 받아 살아갑니다. 바로 이것이 생명나무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의 자비’를 뜻한다고 하는 이유입니다.

 

여기서 주님의 모습이 매우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은 사람에게서 생명을 요구하시면서 그 생명을 스스로 만들어 내라고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선한 의지를 만들어 내어 먼저 주님께 가져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AC.105가 말하는 질서에서는 오히려 주님께서 그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사랑도 주님으로부터 오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도 주님으로부터 오며, 따라서 모든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생명나무’를 마지막에는 ‘주님의 자비’라고까지 풀이합니다. 생명나무의 중심에는 인간의 성취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없애기보다, 우리가 가진 선의 근원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묻습니다.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생명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고, 사랑하고 믿고 살아갈 수 있는 것 자체가 주님의 자비로 말미암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AC.105가 보여 주는 천적 질서와 맞닿아 있습니다. 에덴동산 가운데 생명나무가 있다는 것은 결국 인간 생명의 가장 깊은 중심에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과 그분의 자비가 계셔야 함을 보여 줍니다. (AC.105 해설)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 심화 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 심화1.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고 단지 탐욕만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AC.105에서 가장 강하게 들리는 문장은 아마 ‘사람에게는 의지가 없으며 단지 탐욕만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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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6, 창2:9, ‘퍼셉션과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의 본성은 뒤에서 더 밝혀진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6그러나 ‘동산의 나무’(tree of the gard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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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4, 창2:9, ‘퍼셉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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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

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에 관하여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며, 태고교회에는 매우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퍼셉션은 천사들에게서는 매우 완전하여, 그들은 그것으로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오는지와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지를 알아차리고 알며, 또한 자기들에게 오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단지 그가 가까이 오는 것과 그의 관념 하나만으로 알아차리고 압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없고 양심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양심조차 없습니다. 그리고 매우 많은 사람은 양심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며, 퍼셉션이 무엇인지는 더욱 알지 못합니다. At this day it is unknown what perception is. It is a certain internal sensation, from the Lord alone, as to whether a thing is true and good; and it was very well known to the most ancient church. This perception is so perfect with the angels, that by it they are aware and have knowledge of what is true and good; of what is from the Lord, and what from themselves; and also of the quality of anyone who comes to them, merely from his approach, and from a single one of his ideas. The spiritual man has no perception, but has conscience. A dead man has not even conscience; and very many do not know what conscience is, and still less what perception is.

 

해설

AC.104는 앞에서 ‘나무’가 뜻한다고 한 퍼셉션이 무엇인지를 직접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퍼셉션은 어떤 것이 참되고 선한지를 아는 ‘일종의 내적 감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내적 감각’ 자체보다 그 앞에 붙은 ‘오직 주님으로부터’입니다. 퍼셉션은 사람이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다가 발견하는 직감이나,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따라 생겨난 확신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이 점은 지금까지 설명해 온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AC.99에서 천적 인간은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는 것을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104에서는 그 퍼셉션 때문에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뿐 아니라, 무엇이 주님으로부터 오는지와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지도 알아차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퍼셉션은 ‘나는 이렇게 느끼므로 이것이 옳다’는 자기 확신과는 오히려 반대 방향에 있습니다. 자기에게서 오는 것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퍼셉션의 중요한 내용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어떤 생각이 자기 안에서 강하게 일어나거나 어떤 확신이 마음 깊은 곳에서 느껴진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곧 주님에게서 온 것이라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104가 말하는 퍼셉션은 그런 주관적인 확신에 거룩한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서 참과 선을 알아차리는 것이었고, 천사들에게서는 그것이 너무나 완전하여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지와 무엇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지를 분별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퍼셉션을 높이는 동시에, 사람이 자기 느낌과 판단을 주님의 음성으로 쉽게 동일시하지 못하게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퍼셉션이 태고교회에는 매우 잘 알려져 있었지만 오늘날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에게는 퍼셉션 대신 양심이 있다고 구별합니다. 여기서 양심을 퍼셉션보다 열등한 가짜 기능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적어도 이 번호에서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에게서 주님의 인도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같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퍼셉션이 있고 영적 인간에게는 양심이 있습니다. 뒤에서 이 차이가 더 밝혀질 때까지, 둘을 단순한 우열의 척도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사람에게는 양심조차 없다’는 말에서 ‘죽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의 거듭남의 문맥에서 ‘죽은’ 상태에 있는 사람, 곧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퍼셉션뿐 아니라 양심도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스베덴보리는 매우 많은 사람이 양심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며 퍼셉션은 더욱 알지 못한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특별한 영적 능력을 잃었다는 설명이라기보다, 사람이 자기 판단만을 중심으로 살아갈수록 무엇이 주님에게서 오는 참과 선인지 알아차리는 문제 자체가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결국 AC.104가 보여 주는 퍼셉션의 중심에는 인간의 특별한 영적 능력보다 주님이 계십니다. 퍼셉션이 귀한 것은 사람이 남보다 신비한 것을 더 많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참과 선의 근원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주님께 있음을 그 생명의 질서 안에서 알아차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읽으며 우리가 먼저 관심을 가져야 할 것도 ‘나에게 퍼셉션이 있는가?’라는 특별한 체험의 문제가 아니라, ‘나는 참과 선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가? 내 느낌과 판단을 주님의 것으로 쉽게 여기지는 않는가?’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AC.104에서 퍼셉션을 설명하는 일은 결국 인간의 내면을 특별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고, 모든 참과 선의 근원이신 주님께 시선을 돌리는 데 있습니다. (AC.104 해설)

 

 

 

AC.105, 창2:9, ‘동산 가운데의 생명나무, 의지의 중심에 있는 주님의 자비’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5‘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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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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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

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하는 이유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 인간을 주제로 할 때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The reason why “trees” here signify perceptions is that the celestial man is treated of, but it is otherwise when the subject is the spiritual man, for on the nature of the subject depends that of the predicate.

 

해설

AC.103은 앞의 AC.102에서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한다고 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나무’라는 대상 자체에 언제 어디서나 ‘퍼셉션’이라는 하나의 뜻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천적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영적 인간을 주제로 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분명히 말하면서, 그 이유를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짧은 문장은 상응과 말씀의 속뜻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만일 ‘나무 = 퍼셉션’, ‘동쪽 = 주님’과 같은 대응 관계만 모아 놓고 그것을 모든 본문에 그대로 적용한다면, 상응은 일종의 암호표가 되고 말씀 해석은 그 암호를 대입하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AC.103은 그렇게 읽을 수 없게 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이라도 지금 무엇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지에 따라 그 대상이 나타내는 것의 성질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한 표현을 이해하려면 그 단어 하나만 떼어 볼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놓인 전체 문맥과 그곳에서 다루는 사람의 상태와 생명의 질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창2:9에서 다루는 사람은 천적 인간입니다. 앞에서 천적 인간은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시며, 그 사람 자신도 이것이 실제로 그러하다는 것을 퍼셉션하는 사람으로 설명되었습니다(AC.99).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의 ‘에덴동산’에 있는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앞의 설명과 동떨어진 새로운 상응이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으며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천적 인간이라는 주제 안에서 ‘나무들’의 의미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103은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줍니다. 말씀의 속뜻을 안다는 것은 여러 상응의 뜻을 많이 외워서 말씀을 마음대로 풀 수 있게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알고 있는 뜻을 본문에 먼저 대입하기보다, 지금 이 말씀에서 무엇을 다루고 있는지를 주의 깊게 살피고 그 문맥과 질서 안에서 의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상응에 관한 지식조차 말씀보다 앞설 수 없으며, 우리가 만든 해석의 공식이 말씀을 지배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앞의 AC.98-99에서 본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사람의 지성이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들듯이, 말씀을 이해하는 일에서도 자기 지식과 추론을 가장 높은 자리에 놓는 것이 목적일 수 없습니다. 물론 이성과 지식은 필요하지만, 그것들은 주님과 그분의 말씀을 섬기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AC.103의 짧은 설명은 상응을 기계적인 해석 도구로 만드는 일을 막으면서, 동시에 말씀 앞에서 자신의 이해를 앞세우기보다 그 말씀 자체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겸손히 따라가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따라서 여기서 ‘나무는 퍼셉션을 뜻한다’는 한 가지 상응만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왜 여기서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금 말씀에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통하여 생명을 받고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천적 인간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리를 붙들 때 우리는 상응을 고정된 공식으로 다루는 대신, 말씀의 문맥과 질서를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주님이 보여 주시는 의미를 따라갈 수 있게 됩니다. (AC.103 해설)  

 

심화

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AC.103 심화 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

AC.103 심화1. 상응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은가? ‘술어의 성질은 주제의 성질에 달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AC.103에서 스베덴보리는 ‘나무들’이 퍼셉션을 뜻하는 이유가 여기서 천적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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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4, 창2:9, ‘퍼셉션은 오직 주님으로부터 오는 일종의 내적 감각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4오늘날에는 퍼셉션이 무엇인지 알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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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2, 창2:9,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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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창2:9)

 

AC.102

‘나무’(tree)는 퍼셉션을 뜻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tree desirable to behold)는 진리의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tree good for food)는 선의 퍼셉션을 뜻합니다. ‘생명나무’(tree of lives)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는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A “tree” signifies perception; a “tree desirable to behold,” the perception of truth; a “tree good for food,” the perception of good; the “tree of lives,” love and the faith thence derive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faith derived from what is sensuous, that is, from mere memory-knowledge.

 

해설

AC.102는 창2:9에 나오는 여러 ‘나무’의 속뜻을 먼저 한꺼번에 제시합니다. ‘나무’ 자체는 퍼셉션을 뜻하고, 그 가운데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는 진리의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는 선의 퍼셉션을 뜻합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있는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에서,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나무’를 단순히 어떤 지식이나 교리를 뜻한다고 하지 않고 ‘퍼셉션’과 연결한다는 점입니다. 앞에서 에덴동산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을 뜻했습니다(AC.98-101). 그러므로 그 동산에서 자라는 나무들도 그 사람 안에 독립적으로 축적된 지식의 목록이라기보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 안에서 진리와 선을 퍼셉션하는 것과 관계됩니다.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와 ‘먹기에 좋은 나무’가 각각 진리와 선의 퍼셉션을 뜻하는 것도 이 문맥 안에 있습니다.

 

특히 ‘생명나무’가 사랑만이 아니라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을 뜻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에서 살펴본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와 이어집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나타내는 것은 사랑과 신앙이 서로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사랑이 근원이 되고 신앙이 거기서 나오는 질서입니다.

 

반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곧바로 ‘감각이나 기억지식은 악하다’고 결론 내리면 안 됩니다. 앞의 여러 번호에서도 이성과 기억지식 자체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질서 안에 놓여야 함을 보았습니다. AC.102에서 대비되는 것은 지식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신앙의 근원과 질서입니다.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신앙과,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신앙을 끌어내려는 질서가 서로 대비되고 있습니다.

 

AC.102는 아직 이 각각의 의미를 자세히 증명하거나 설명하지 않습니다. 창2:9의 여러 나무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먼저 제시하는 개요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적인 것과 단순한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이라는 기본 구조를 붙들고, 이어지는 설명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AC.102 해설)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 심화 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 심화1. 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감각과 기억지식에서 나오는 신앙을 뜻하는가? AC.102에서 스베덴보리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감각적인 것에서 나오는 신앙, 곧 단순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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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3, 창2:9, ‘나무가 퍼셉션을 뜻하는 것은 여기서 천적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2:9) AC.103여기서 ‘나무들’(trees)이 퍼셉션을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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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1, 창2:8, ‘동쪽은 주님을 뜻하며, 기도할 때 동쪽을 향한 표상적 관습’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the Lord is the “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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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수많은 부부의 사후 모습들인데요, 이 주제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목사님처럼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 분에게는 특별히 자주 받는 질문일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았지만, 영계를 왕래하며 수천 쌍의 부부를 관찰했습니다. 그는 그들의 사후 상태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때로는 고통스러운, 때로는 감동적인 장면들을 통해 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습니다. ‘영적으로 맞지 않던 부부는 사후에 자동으로 분리되지만, 서로를 사랑했던 부부는 다시 만나 조용한 이별 또는 새로운 결합을 경험한다. 그리고 영적으로 깊이 맞았던 부부는 천국에서도 진짜 부부가 된다.’

 

 

‘겉으로만 신앙이 있었던 배우자’의 경우, 자연스러운 이별

 

스베덴보리가 가장 자주 본 유형입니다. 지상에서는 교회 다니고, 예배 참석하고, 외적 신앙 행위를 하던 배우자가 실제로는 자기애, 명예욕, 세속 욕망, 이기적 동기 속에서 살았던 경우입니다. 이 부부는 지상에서는 서로 생활을 함께하더라도, 내적 삶(affection)은 이미 다른 방향입니다. 그래서 사후에는 중간 영계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멀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들은 누가 끊어놓은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 사랑의 흐름이 없다.’ 이 이별은 다툼도 없고, 원망도 없고, 씁쓸함도 없이 아주 조용하게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억지 동거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쪽은 신앙이 깊고, 다른 쪽은 선한 사람인 경우’, 부드러운 재회와 조용한 결별

 

이 경우는 지상에서 흔히 있는 모습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신앙이 깊고, 영적 진리를 사랑했는데, 아내는 신앙은 없지만, 선하고 다정하며 양심이 깊은 경우, 혹은 그 반대인 경우인데요, 스베덴보리는 이런 부부를 중간 영계에서 종종 보았습니다. 이럴 경우, 이들은 먼저 서로를 알아보고, 반갑게 재회합니다. 지상에서 서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서로의 상태를 보고, 깊은 감사가 오갑니다. 지상에서의 사랑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영적 본질(사랑의 종류)의 차이가 드러나며, 결국 서로 다른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이 과정은 대부분 매우 평화롭게, 슬픔 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그들은 서로의 삶을 축복하며 헤어진다.’ 이 흐름은 서로의 내적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지, 관계가 나빠서가 아닙니다.

 

 

‘한쪽은 깊은 영적 삶, 다른 쪽은 신앙과 선이 전혀 없는 경우’, 짧은 만남, 그리고 이별

 

스베덴보리는 이런 유형의 부부에 대해 약간은 안타까운 사례들을 기록합니다. 지상에서는 법적 부부였지만, 감정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살았거나 사실상 각자 따로 삶을 살았던 부부들인데요, 이들은 사후에 잠시 재회하지만, 서로에게 아무런 영적 끌림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묘사합니다. ‘그들의 만남은 의무감이 아닌, 마치 예절 같은 만남이었다.’ 그러고 나서 둘은 각자 자신의 상태에 맞는 길로 자연스럽게 떠납니다. 이것은 사랑이 없어서 생기는 이별이 아니라, 사랑의 종류(본질)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사랑했지만, 영적 수준 차이가 컸던 부부’, 감동적인 장면들

 

이 경우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먼저 떠난 배우자의 깊은 영적 삶과 뒤따라온 배우자의 아직 미숙한 상태가 중간 영계에서 서로 비교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신앙과 진리의 삶을 깊이 걸었고, 아내는 신앙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 남편을 깊이 애정하고 존중하며 살았던 경우, 또는 그 반대인데요, 이런 경우, 사후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다시 만나 다음과 같은 ‘영적 교류’가 이루어집니다. 먼저 상호 감사의 눈물입니다. 지상에서 서로에게 준 사랑과 지지에 대한 감사를 표현합니다. 다음, 영적 차이의 인식인데요, 둘은 서로의 내적 상태 차이를 즉시 느낍니다. 천국 상태의 배우자는 그 상태를 낮추어 상대에게 맞추어 줍니다. 그러나 결국 각자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영적 본질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들의 이별은 아픔이 아니라, 서로의 길을 인정하는 평화였다.’

 

 

‘영적 친화성이 깊었던 부부’, 천국에서도 진짜 부부가 된다

 

스베덴보리가 가장 감동적으로 기록한 장면들입니다. 이들은 지상에서 서로를 깊이 존중, 서로를 도우며 성장을 도왔고, 서로의 신앙과 양심의 길을 지지함으로써 마음의 깊은 결합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사후에는 중간 영계에서 잠시 정화 과정을 거친 후, 둘이 천국의 같은 공동체로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장면을 보고 말합니다. ‘그들은 다시 만나 ‘아, 이 사람이 나의 진짜 짝이었구나!’ 하는 환희를 느낀다.’ ‘지상에서는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보지 못했으나, 천국의 빛 속에서는 그 결합이 명백해졌다.’ 이 부부는 천국에서도 실제로 하나의 가정을 이루고 ‘일심동체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영혼의 결합이므로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참된 하나이다.’ 지상에서 서로 깊이 맞았던 부부는 천국에서도 진짜 부부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최종 결론, 부부 결합은 지상의 법률이 아니라 ‘영적 본질’이 결정한다

 

스베덴보리는 천 명 이상의 부부 사례를 관찰하고 이렇게 결론내립니다.

 

- 영적으로 맞지 않은 부부는 사후에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 사랑은 있었지만, 본질이 다르면 일시적 재회 뒤 조용한 이별이 있다.

 

- 한쪽만 깊은 신앙을 가졌더라도, 선한 자는 천국으로 인도된다.

 

- 천국에서도 부부는 지상의 외적 결혼이 아니라 내적 결합으로 결정된다.

 

- 정말 서로의 영적 본질이 맞는 부부는 천국에서도 영원히 함께 산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에서의 결혼은 주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합이며, 지상에서는 각자 서로를 돕는 길을 걷는 것이다.’

 

 

 

SC.74,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한 경우’

이미 한쪽은 천국에서 자신의 진짜 짝을 만나 결혼했지만, 뒤늦게 지상 배우자가 사후 중간 영계에 막 도착할 경우는? 이 질문은 결코 엉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의 결혼론과 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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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2, ‘천국에서의 가족은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는가?’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탐방하면서 ‘천국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가족이 혈연으로 묶여 있지만, 영계에서는 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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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탐방하면서 ‘천국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가족이 혈연으로 묶여 있지만, 영계에서는 혈연이 본질적 요소가 아니라 애정의 본질(사랑의 종류)이 결합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여러 차례 관찰하면서 결국 확신한 결론은 이렇습니다. ‘천국의 가족은 지상 혈연을 바탕으로 재편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본질이 서로 맞는 사람들로 새롭게 구성된다.’ 그러나 이것이 지상 가족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고, 더 진정한 방식으로 재구성되는 것입니다. 아래에서 그 실제 모습을 깊이 있게 설명드리겠습니다.

 

 

천국에서의 가장 기본 원리, 혈연이 아니라 ‘내적 애정’(affection)이 가족을 형성한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 들어갔을 때, 가장 충격을 받은 사실 중 하나가 ‘천국에서 가족은 혈연이 아니라 사랑이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혈연은 자연계의 관계인 반면, 천국은 영적 친화성으로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국의 사람들은 자연적 혈연보다, 영적으로 친근한 이들과 더 깊은 결합을 이루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천국에서는 같은 종류의 선을 사랑하는 이들이 서로를 가족으로 여긴다.’ 즉, 천국 공동체란 비슷한 선(善)의 냄새와 색깔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입니다.

 

 

천국의 가족 공동체는 ‘같은 종류의 선’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공동체를 ‘향기’와 ‘빛깔’로 묘사했습니다. 예를 들어, 부드럽고 자비심 많은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진리를 추구하는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섬김과 겸손의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공동체, 아이 같은 순전한 선을 가진 영들의 공동체 등, 이들은 마치 서로 ‘같은 영적 호흡’을 하듯 함께 있을 때 깊은 평화를 느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천국의 가족적 결합’이라 부릅니다.

 

 

지상 가족은 천국에서 ‘새로운 방식의 따뜻한 가족’이 된다

 

스베덴보리가 발견한 아름다운 사실 하나는 지상 가족이 천국에서 완전히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상과는 다른 방식의 가족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와 성인 자녀는 함께 살지는 않지만, 서로의 공동체를 자유롭게 왕래하며, 깊은 애정을 나눕니다. 신앙적, 성격적으로 가까웠던 형제자매는 종종 같은 층위의 천국에 있게 되어, 인간적으로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합니다. 부부 중 영적 친화성이 같았던 경우에는 천국에서도 실제 부부로 생활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천국의 가족 관계는 지상에서보다 더 깊고, 더 진실하고, 더 자유롭다.’

 

 

천국의 한 공동체는 ‘영적 친화성’이 모여 이루는 가족 같은 사회

 

스베덴보리가 본 천국의 공동체는 단순한 모임이나 이웃이 아니라 ‘가족 같은 영적 공동체’입니다. 그 공동체 안에는 선배 같은 존재, 동료 같은 존재, 동생처럼 느껴지는 존재, 이웃 같은 존재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며, 각자는 자신과 마음이 가장 잘 맞는 사람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가족의 재편성’이라고 부릅니다. 이 가족들은 혈연의 형태는 없지만, 그 깊이는 지상의 가족보다 더 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비난, 질투, 오해, 상처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상 가족과의 애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천국에서 새로운 가족 공동체를 갖는다고 해서 지상의 가족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지상의 가족은 천국에서도 사랑으로 기억되며, 서로의 평안을 기뻐한다.’ 즉, 지상 가족은 천국에서 감사와 기쁨으로 기억되는 특별한 인연입니다. 하지만 각자 영적으로 가장 편안한 공동체에 가기 때문에 모두 한 집에 살지는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지상 가족이 천국에서도 ‘새로운 형태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기도 한다

 

스베덴보리가 본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는 지상에서 실제로 영적 친화성이 매우 깊었던 가족이 천국에서도 비슷한 층위의 공동체에 들어가 더 밝고 자유로운 형태의 가족이 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부가 둘 다 선을 사랑했다면 천국에서도 실제 부부로 사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부모와 성인 자녀가 같은 천국 층위에서 자주 교류하기도 하고, 영적으로 깊은 유대를 맺은 형제자매가 같은 공동체 안에서 돕고 지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보고 말했습니다. ‘천국에서 가족은 지상보다 더 온전한 방식으로 보존된다.’

 

 

가장 중요한 핵심, 천국의 가족 공동체는 ‘하나님의 질서’ 안에서 가장 조화롭게 재구성된다

 

결국 스베덴보리가 확인한 진리는 이것입니다.

 

- 천국에서는 혈연이 아니라 선(善)의 본질로 가족이 구성된다.

 

- 지상 가족은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방식으로 유지된다.

 

- 영적으로 친화성이 깊었던 가족은 천국에서도 특별히 가깝다.

 

- 영적 수준이 다르면 서로 왕래는 가능하지만, 함께 살지는 않는다.

 

- 천국 공동체는 서로를 가족처럼 느끼는 새로운 영적 질서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슬픔 없이, 집착 없이, 평화와 기쁨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의 질서 안에서는 어떤 관계도 어그러짐이 없다. 모든 결합은 가장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SC.73, ‘부부 중 한 사람만 신앙이 깊은 경우, 사후에는 어떻게 되는가?’

다음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관찰한 수많은 부부의 사후 모습들인데요, 이 주제는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목사님처럼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 분에게는 특별히 자주 받는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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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1, ‘영계에서 가족끼리 자주, 그리고 드물게 만나는 경우’

영계에서는 누구와 자주 교류하고, 누구와는 특별한 때에만 만나고, 누구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는가? 이것은 모두 내적 상태(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스베덴보리는 아주 일관되게 기록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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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계에서는 누구와 자주 교류하고, 누구와는 특별한 때에만 만나고, 누구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는가? 이것은 모두 내적 상태(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스베덴보리는 아주 일관되게 기록합니다. 지상처럼 거리, 약속, 시간이 결정 요인이 아닙니다. 천국이나 중간 영계에서는 ‘영혼의 향방(향기)’이 곧 만남의 조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만남은 두 마음의 애정이 서로를 향해 열릴 때 이루어진다.’ 이 원리로 인해 가족 간에도 자주 보는 경우와 드물게 보는 경우가 생깁니다.

 

 

자주 만나는 가족, ‘애정의 기운이 서로를 자연히 가까이하게 하는 경우’

 

스베덴보리는 천국의 여러 공동체에서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친척들이 자주 교류하는 장면을 봤습니다. 이들이 자주 만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지상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관계

 

지상에서 서로를 진지하게 사랑하고, 아끼고, 도와주고, 영적 성장을 북돋아 주는 관계였다면, 영계에서도 그 ‘향방’이 일치합니다. 영계에서 사랑은 방향을 만들어 내는 힘입니다. 서로 비슷한 방향으로 흐르는 영혼들은 자연스럽게 서로를 ‘불러냅니다.’

 

영적 친화성이 비슷한 경우

 

예를 들어, 부모와 자녀 모두 신앙적으로 비슷한 깊이를 가진 경우, 형제자매가 모두 선한 본성을 유지한 경우, 남매가 서로의 삶을 도와주며 지낸 경우, 이들은 천국에서도 비슷한 층위의 공동체에 들어가며, 정기적으로 만나 삶을 나누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비슷한 선을 가진 이들은 천국에서 자주 교류한다.’

 

서로의 영적 기쁨을 북돋아 주는 관계

 

천국의 사람들은 ‘누구와 함께 있을 때 영적 기쁨이 더 밝아지는가?’를 아주 정확히 느낍니다. 그 기쁨을 선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자연스럽게 자주 교류합니다. 가족 중에 이런 관계가 있었던 경우, 영계에서도 빈번한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드물게 만나는 가족, ‘애정은 있지만, 상태가 다를 때’

 

스베덴보리는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하지만, 영적 수준이 다르면 ‘자주 만나기 어렵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결코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가 서로 달라 애정이 지속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둘의 영적 ‘공기’가 다를 때

 

스베덴보리는 자주 천국의 공기를 ‘선함의 향기’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아주 깊은 천국적 신앙 단계인 반면, 아들은 비교적 외적 선의 단계라면, 둘은 서로를 보지만, 영적 호흡(affection)이 오래 합쳐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만남은 가능하나 길게 머물 수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짧은 기쁨, 그러나 온전한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서로 좋아하지만, 정서의 깊이가 다를 때

 

어떤 가족은 지상에서 서로 사랑했지만, 영혼의 기질(애정의 종류)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천적(天的) 사랑’을 가진 유형(순전한 선)인 반면, 다른 사람은 ‘영적(靈的) 사랑’을 가진 유형(진리를 통한 선)일 경우, 두 사람은 만날 때마다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만, 각자의 공동체로 돌아가야만 편안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만남은 ‘특별한 일’처럼 반갑고 의미 있지만, 빈번한 일은 되지 않습니다.

 

서로 사랑하지만, ‘사명’이 다른 경우

 

천국 사람들은 각자 맡겨진 일, 주님과의 결합의 형태, 섬김의 방식이 다릅니다. 그 사명의 깊이에 따라 서로를 자주 만나지 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남에 대한 욕심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사랑에 집착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유 속에서 더욱 밝아진다.’ 즉, 자주는 아니어도 항상 ‘열려 있는 관계’입니다.

 

 

거의 만나지 않는 가족, ‘영적 방향이 완전히 다른 경우’

 

이 경우는 ‘관계 단절’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영계에서는 서로 다른 애정은 서로를 향해 움직일 수 없다.’ 예를 들어, 한 사람은 선한 삶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명예, 자기애, 세속적 욕망을 사랑했다면, 중간 영계에서라면 잠시 재회할 수는 있지만, 그 후에는 자연스럽게 헤어집니다. 이때 천국인은 전혀 슬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천국인은 악을 향해 마음이 끌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천국적 정서의 특징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결론, ‘자주 만남은 사랑의 친화성이고, 드문 만남은 자유의 표현이다.’

 

스베덴보리는 천국에서의 가족 관계를 이렇게 종합합니다. 자주 만나는 경우는 서로 비슷한 선이거나 비슷한 신앙, 그리고 서로에게 기쁨을 주는 관계이거나 영적 공기가 비슷한 경우이고, 드물게 만나는 경우는 본질은 같으나 깊이가 다르거나, 서로를 사랑하지만, 영역(사명)이 다른 경우 등, 이럴 땐, 서로의 상태가 맞춰질 때만 만남이 허용된다. 그리고 거의 만나지 않는 경우는 본질의 사랑이 완전히 다른 경우이거나 영적 방향성이 전혀 반대인 경우이다.

 

 

결정적이고 실제적인 메시지

 

스베덴보리는 이 내용을 정리하며, 아주 중요한 목회적 통찰을 남깁니다. ‘사랑의 깊이는 영원히 기억되고, 각자의 거처는 영적 본질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만남의 자유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즉, 가족 사랑은 영원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랑의 형태가 영계의 형태에 맞게 변형되어 가장 순전한 방식으로 보존된다는 것입니다.

 

 

 

SC.72, ‘천국에서의 가족은 어떻게 새롭게 구성되는가?’

스베덴보리는 천국을 탐방하면서 ‘천국의 가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가족이 혈연으로 묶여 있지만, 영계에서는 혈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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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70,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는가’

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왕래하면서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느냐’는 질문을 수백 명에게 받았고, 또 실제 장면들을 여러 번 보면서 그 답을 아주 정교하게 정리했습니다.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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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

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the Lord is the “east” also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1그 후에 그가 나를 데리고 문에 이르니 곧 동쪽을 향한 문이라 2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 같고 땅은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빛나니, 4여호와의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가고 (겔43:1-2, 4) He brought me to the gate, even the gate that looketh the way of the east, and behold the glory of the God of Israel came from the way of the east; and his voice was as the voice of many waters, and the earth shone with his glory (Ezek. 43:1–2, 4).

 

주님이 ‘동쪽’(east)이시기 때문에, 성전이 세워지기 전 표상적 유대교회에서는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거룩한 관습이 있었습니다. It was in consequence of the Lord’s being the “east” that a holy custom prevailed in the representative Jewish church, before the building of the temple, of turning their faces toward the east when they prayed.

 

해설

AC.101은 AC.98에서 ‘동쪽’이 주님을 뜻한다고 한 것을 에스겔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에스겔의 환상에서 선지자는 ‘동쪽을 향한 문’으로 인도되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영광이 ‘동쪽에서부터’ 옵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동문을 통하여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에서 ‘동쪽’을 주님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AC.98의 ‘동쪽 에덴동산’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동산’이 지성이고 ‘에덴’이 사랑이라면, ‘동쪽’은 그 사랑과 지성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듭니다. 따라서 ‘동쪽’이 주님을 뜻한다는 것은 AC.98-99에서 계속 설명한 생명의 질서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표상적 유대교회의 한 관습을 언급합니다.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는 기도할 때 얼굴을 동쪽으로 향하는 거룩한 관습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방향 자체에 어떤 독립적인 거룩함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방향이 주님을 표상했다는 점입니다. ‘동쪽’을 향한다는 외적인 행위는 그 표상 안에서 주님을 향하는 내적인 것을 나타냈습니다. 따라서 이 관습은 말씀 안의 ‘동쪽’과 예배의 표상이 서로 같은 중심, 곧 주님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렇게 AC.98-101의 흐름을 보면 ‘동쪽 에덴동산’의 세 요소가 하나씩 분명해집니다. ‘동산’은 지성이고, ‘에덴’은 사랑이며, ‘동쪽’은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이 표현 전체가 나타내는 것은 단순히 아름답고 지혜로운 인간의 상태가 아니라,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지성이 흘러드는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입니다. (AC.101 해설)

 

 

 

AC.102, 창2:9, ‘나무는 퍼셉션, 생명나무는 사랑과 거기서 나오는 신앙’ (AC.102-106)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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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00, 창2:8, ‘에덴은 사랑을, 동산은 지성을 뜻함을 보여 주는 이사야의 말씀’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동산’(garden)이 지성을 뜻하고, ‘에덴’(Eden)이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도 나타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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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0

‘동산’(garden)이 지성을 뜻하고, ‘에덴’(Eden)이 사랑을 뜻한다는 것은 이사야에서도 나타납니다. That a “garden” signifies intelligence, and “Eden” love, appears also from Isaiah:

 

나 여호와가 시온의 모든 황폐한 곳들을 위로하여 그 사막을 에덴 같게, 그 광야를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였나니 그 가운데에 기뻐함과 즐거워함과 감사함과 창화하는 소리가 있으리라 (사51:3) Jehovah will comfort Zion, he will comfort all her waste places, and he will make her wilderness like Eden, and her desert like the garden of Jehovah; joy and gladness shall be found therein, confession and the voice of singing (Isa. 51:3).

 

이 구절에서 ‘광야’(wilderness), ‘기쁨’(joy), ‘감사함’(confession)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을 나타내는 표현들이며, ‘사막’(desert), ‘즐거움’(gladness), ‘노랫소리’(the voice of singing)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는 표현들입니다. 앞의 것들은 ‘에덴’(Eden)에, 뒤의 것들은 ‘동산’(garden)에 관계됩니다. 이 선지서에서는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에덴에 있는 동산’(garden in Eden)이 더 나아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뒤의 10절에 관한 설명에서 볼 수 있습니다. In this passage, “wilderness,” “joy,” and “confession” are terms expressive of the celesti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relate to love; but “desert,” “gladness,” and “the voice of singing,” of the spiritual things of faith, or such as belong to the understanding. The former have relation to “Eden,” the latter to “garden”; for with this prophet two expressions constantly occur concerning the same thing, one of which signifies celestial, and the other spiritual things. What is further signified by the “garden in Eden,” may be seen in what follows at verse 10.

 

해설

AC.100은 AC.98에서 밝힌 ‘동산’과 ‘에덴’의 뜻을 이사야의 말씀으로 확인합니다. 사51:3에는 황폐해진 시온을 여호와께서 회복하실 때 ‘그 광야를 에덴 같게, 그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신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에덴’과 ‘동산’이 단순히 같은 아름다운 장소를 반복해서 표현한 말이 아니라, 서로 구별되면서도 함께 하나를 이루는 두 종류의 것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그는 먼저 ‘광야’, ‘기쁨’, ‘감사함’을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로 보고 이것들을 ‘에덴’과 연결합니다. 반면 ‘사막’, ‘즐거움’, ‘노랫소리’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로 보고 이것들을 ‘동산’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AC.98의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이라는 설명이 이사야의 병행 표현에서도 같은 질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을 서로 분리된 두 종류의 신앙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번호가 직접 밝히는 구별은 앞의 것들이 사랑에 관계되고 뒤의 것들이 이해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99에서 천적 인간에게 주님께서 사랑과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을 통하여 이해와 이성과 기억지식에 속한 것들 안으로 흘러드신다고 한 설명과도 이어집니다. 사랑과 이해는 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함께 있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이사야에서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난다고 말하는 점입니다. 그는 성경의 이러한 병행 표현을 단순한 문학적 반복으로만 읽지 않고, 한 표현은 천적인 것을, 다른 표현은 영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광야와 사막’, ‘기쁨과 즐거움’, ‘감사함과 노랫소리’, 그리고 ‘에덴과 동산’이라는 짝은 같은 말을 아무 뜻 없이 되풀이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관계되는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이 함께 말씀 안에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다만 AC.100은 ‘에덴에 있는 동산’의 의미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 더 나아간 의미는 뒤의 10절에 관한 설명에서 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에덴’은 사랑에, ‘동산’은 지성에 관계되며, 이 둘의 결합이 천적 인간의 생명의 질서를 나타낸다는 데까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AC.100 해설)  

심화

1. ‘왜 같은 것을 말하는 두 표현을 하나는 천적, 다른 하나는 영적이라고 하는가?’

 

AC.100에서 스베덴보리는 사51:3의 말씀을 매우 독특하게 읽습니다. ‘광야를 에덴 같게, 사막을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신다는 말씀에서 ‘광야’, ‘기쁨’, ‘감사함’은 신앙의 천적인 것들, 곧 사랑에 관계되는 것들을 나타내고, ‘사막’, ‘즐거움’, ‘노랫소리’는 신앙의 영적인 것들, 곧 이해에 속한 것들을 나타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사야에서는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나며, 그중 하나는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같은 것을 말하는 두 표현에 서로 다른 속뜻이 있다고 보는 것일까요?

 

먼저 AC.100이 말하는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라는 말을 ‘두 표현의 뜻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의미로 읽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표현은 하나의 주제를 함께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서로 구별되는 두 측면을 봅니다. 하나는 사랑에 관계되는 천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에 속한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에덴’과 ‘동산’도 서로 떨어진 두 주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의 질서 안에서 사랑과 지성을 각각 나타냅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AC.98-99에서 설명한 천적 인간의 질서와 연결됩니다. ‘에덴’은 사랑이고 ‘동산’은 지성이며,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흘러듭니다. 따라서 사랑과 지성은 하나를 이루지만 그렇다고 서로 같은 것은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이고 지성은 지성이며,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도 구별됩니다. 하나를 이루는 것 안에 이러한 구별이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도 같은 하나의 주제를 말하면서 서로 다른 표현을 통하여 그 구별되는 측면들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 AC.100을 읽는 중요한 실마리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성경에 나오는 모든 병행 표현을 우리가 임의로 둘씩 짝지어 ‘첫째 표현은 천적, 둘째 표현은 영적’이라고 판정해서는 안 됩니다. AC.100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은 이사야에서 같은 것에 관하여 두 표현이 끊임없이 나타나며 그중 하나가 천적인 것을, 다른 하나가 영적인 것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표현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실제 말씀의 문맥과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속뜻을 따라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을 독자가 마음대로 적용할 수 있는 기계적인 해석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구별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말씀의 속뜻에서 사랑과 이해, 선과 진리,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서로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AC.100의 이사야 인용에서도 ‘광야’와 ‘사막’, ‘기쁨’과 ‘즐거움’, ‘감사함’과 ‘노랫소리’가 하나의 회복을 함께 묘사하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 사랑에 관계되는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앞의 것은 ‘에덴’에, 뒤의 것은 ‘동산’에 관계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100은 단순히 ‘에덴은 사랑, 동산은 지성’이라는 두 단어의 상응을 증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 서로 나란히 놓인 표현들이 하나의 내용을 풍성하게 말하면서도 그 속에서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랑에 관계되는 것과 이해에 속한 것이 서로 구별되어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이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여기서는 우선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반복을 단순한 중복으로만 보지 않고 그 안의 구별과 결합을 함께 읽고 있다는 데까지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이후 AC에서 이러한 병행 표현들이 다시 나타날 때마다 실제 본문 안에서 그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하나씩 확인해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00 심화 1)

 

 

 

 

AC.101, 창2:8, ‘동쪽은 주님을 뜻하며, 기도할 때 동쪽을 향한 표상적 관습’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101주님이 ‘동쪽’(east)이시라는 것은 말씀에서도 나타납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the Lord is the “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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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99, 창2:8, ‘영적 인간에게 뒤집혀 있던 생명의 질서가 천적 인간에게서 회복됨’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창2:8) AC.99영적 인간에게서 생명, 곧 생명의 질서는 이러합니다. 주님께서는 신앙을 통하여 그의 이해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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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는 영계를 왕래하면서 ‘영적으로 다른 상태의 가족이 서로를 만나느냐’는 질문을 수백 명에게 받았고, 또 실제 장면들을 여러 번 보면서 그 답을 아주 정교하게 정리했습니다. 결론은 단순합니다. 영적 수준, 즉 상태가 달라도 일시적 재회는 가능하다. 그러나 영원한 결합은 오직 영적 친화성이 있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즉, ‘만남은 가능’, 그러나 ‘함께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두 가지를 매우 정확하게 구분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장면, ‘다른 수준에 살더라도, 사랑하면 찾아온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남성과 어머니의 관계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아들은 지상에서 신앙을 진실하게 살았고, 천국의 한 공동체로 갈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어머니는 지상에서는 신앙을 고백했지만, 내적 삶은 그렇지 못해 중간 영계에서 오랫동안 정화 과정을 겪고 있었습니다. 아들은 천국 공동체에 이미 소속된 상태였지만, 어머니가 중간 영계의 한 단계에 도달했을 때, 그는 사랑의 인도하심으로 그곳에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록합니다. ‘그는 어머니가 있는 곳에 곧바로 나타났고, 그녀는 즉시 아들을 알아보았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들이 ‘천국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흐름이 그를 어머니의 상태, 즉 어머니와 같은 눈높이로 ‘임재’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영계의 자연스러운 원리입니다.

 

 

만남은 가능하지만, ‘함께 사는 것’은 영적 친화성에 달려 있다

 

스베덴보리는 여러 사례를 관찰하면서 확인했습니다. 서로 다른 천국 층위에 있어도 서로의 상태에 맞출 수 있으면 만날 수 있다. 왜냐하면 영계에서는 ‘수준 차이’가 공간적 거리가 아니라 상태의 밀도 차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함께 사는 것, 그러니까 거처를 함께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선과 진리의 수준을 가진 이들과 자연히 함께 살게 된다.’ 즉, 잠시 만나는 것은 사랑으로 가능, 그러나 영원한 결합은 본질(affectional state)에 따라 결정된다는 원리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본 세 가지 재회 형태

 

스베덴보리는 수많은 재회 장면을 관찰한 뒤, 이를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습니다.

 

서로 사랑했지만 영적 수준이 달랐던 가족, ‘일시적 재회는 가능’

 

예를 들면, 신앙적으로 깊이 살았던 자녀와 신앙이 얕았던 부모, 도덕적으로는 선했지만, 신앙적으로는 약한 형제, 경건했던 배우자와 세속적이었던 배우자 등은 중간 영계에서 충분히 서로를 만납니다. 이 만남은 지상에서의 감사, 못다 한 대화, 사랑의 표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그 후 각자 자기 본질에 맞는 천국의 공동체로 들어가면 영원한 동거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슬픔이 없는 헤어짐’이라고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 들어간 영혼은 타인의 상태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적 수준이 상당히 비슷했던 가족, ‘천국에서도 교류가 계속된다’

 

이 경우는 같은 종류의 선, 같은 방식의 신앙, 비슷한 내적 애정을 가진 가족입니다. 이들은 종종 천국에서도 서로 가까운 공동체에 들어가며, 정기적으로 서로 교류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가족은 천국에서 더욱 가까워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영적 친화성이 만들어 내는 결합입니다.

 

지상에서는 가족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경우, ‘만남 자체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지상에서는 가족 관계였지만, 한 사람은 선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은 자기애, 권력욕, 증오를 사랑했다면, 이 둘은 중간 영계에서도 서로를 자연스럽게 떠나게 됩니다. 이때의 ‘이별’은 지상적 슬픔을 동반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천국인은 악을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할 수 없다. 그 사랑은 천국의 사랑과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영적 수준이 달라서 함께 살지는 못하지만, ‘사랑의 기억’은 존중된다

 

천국의 사람들은 지상의 가족 관계를 완전히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억은 지상적 집착이 아니라 감사와 자비의 형태로 남습니다. ‘그가 나에게 해준 사랑이 있었다.’, ‘우리는 지상에서 함께 걸어갔다.’, ‘그때 나는 보호받았다.’ 등, 이런 기억은 천국에서 빛처럼 따뜻하게 반짝입니다. 그러나 ‘왜 내 가족은 천국에 오지 않았는가?’라는 슬픔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단호히 말합니다. ‘천국에는 슬픔이 없다. 슬픔을 남기는 기억은 주님이 제거하신다.’

 

 

결정적 통찰, ‘영적 수준 차이’는 재회를 막지 않지만, ‘본질의 차이(사랑의 종류)’는 영원한 결합을 막는다

 

스베덴보리가 수천 건의 사례에서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만나게 되고, 본질(선)은 함께 살게 한다. 그러나 악은 결합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즉, 만남은 사랑에 의해, 결합은 본질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의 법칙입니다.

 

 

 

SC.71, ‘영계에서 가족끼리 자주, 그리고 드물게 만나는 경우’

영계에서는 누구와 자주 교류하고, 누구와는 특별한 때에만 만나고, 누구와는 거의 만나지 않게 되는가? 이것은 모두 내적 상태(state)에 의해 결정된다고 스베덴보리는 아주 일관되게 기록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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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69, ‘가족 중 일부가 지옥 간 경우’

가족 중 일부가 지옥에 간 경우, 스베덴보리가 본 실제 관계 이 부분은 많은 성도들뿐 아니라 스베덴보리 자신도 깊이 고민했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는 살아 있을 때, 자신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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