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08(D1)-주일예배(2507, 눅13,10-17),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pdf
0.32MB
2023-10-08(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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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zOmvD61wZjY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10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눅13:10-17)

 

 

주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주님에 대한 표상들이 사라졌을 때, 안식일은 하나님에 대한 것을 가르치는 날이 되었고, 또한 노동에서 벗어나 휴식하는 날이 되었으며, 구원과 영원한 삶에 대해 묵상하는 날이 되었다.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날이 되었다. (참된 기독교 301)

 

 

말씀에는 주님께서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는 모습이 자주 나옵니다. 회당은 주님 당시 유대교회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렸으며, 교리의 해석을 둘러싼 이견들을 조율했습니다. 때로는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그곳에서 벌하기도 했지요.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희생과 번제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경 바빌론의 침략으로 수많은 유대인이 바빌론 등지로 유배되면서 더 이상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들은 지역마다 회당을 짓고, 거기서 예배를 드리고 유대교회의 교리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그런 식으로 자기들의 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전통은 그들이 고향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계속 이어졌지요.

 

회당에서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일들은 대부분 회당장이라는 직분을 맡은 사람들이 수행했는데, 가끔은 외부에서 랍비들을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주님은 이렇다 할 학벌이나 지위가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 회당에서 가르치실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을 뿐 아니라,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도 주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그곳에 귀신 들려 앓으며 장애를 가진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11절에는 그 여자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11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뜻하기도 하고 자아를 뜻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고 봐야 합니다. 교회를 뜻한다 하는 것은, 그녀가 주님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이고, 자아를 뜻한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아직 주님보다 자신의 자아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주님과 인간의 자아를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여자는 열여덟 해 동안이나 자아를 통해 들어오는 지옥의 귀신들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한 싸움이었고, 그러므로 거룩한 싸움이었습니다. 그것을 말씀에서는 열여덟 해 동안 싸운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열여덟은 3과 6을 곱한 수로, 3은 거룩한 것을 뜻하고 6은 내적 싸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싸웠음에도 여자는 아직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리를 펴지 못한다는 것은 그가 하늘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여전히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여자는 아무리 주님을 바라보려 해도 지옥에 붙잡혀 있어서 마음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것이 여자가 열여덟 해 동안 앓고 있는 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여자를 보시고, 그에게 다가가셔서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12절과 13절에서는 주님이 병을 고치시는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2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주님이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는 것은 주님 혼자 병을 치유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능력이 나와 여자에게 전해지고, 여자가 겸손하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이끄시고 인간이 겸손하게 따름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때 여자의 허리가 즉시 펴졌습니다. 허리를 펴는 것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세상만 바라보던 사람이 이제 주님을 바라보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레위기 26장 13절의 말씀처럼 주님께서 “그의 멍에와 빗장을 부수고 바로 서서 걷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자 여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병의 치유가 주님으로부터 이루어졌음을 고백하고 모든 공을 주님께 돌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악을 끊거나, 또는 선을 행할 때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선하고 지혜롭다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는 영적 질병들이 완전히 치유되지 않습니다. 곧 또 다른 시험이 오고, 싸움이 다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힘으로는 아주 작은 악도 물리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주님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시는 이전 상태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주님이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보고 회당장이 분개했습니다. 14절에서는 그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는데요,

 

14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장이 주님께 화를 낸 까닭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그들의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해서는 안 된다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진짜 이유가 뭘까요? 회당장은 유대교회의 거짓 교리 안에 있는 사람이고, 주님은 진리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거짓, 참과 거짓은 절대로 화합할 수 없고, 대신 반목하거나 대립합니다. 그래서 회당장은 주님을 미워하고 주님에게 분노했습니다. 그것은 유대교회의 거짓된 교리가 진리를 대적하는 모습입니다. 회당장이 분노하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5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유대교회의 회당장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지만, 오히려 말씀을 왜곡, 거짓 교리를 만들어 교인들에게 지키게 했는데요, 그것은 진리를 방해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진리의 편인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진리를 반대하는, 불편해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들에게 너희는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여기서 소와 나귀는 선과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하고, 물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 물을 먹이는 것은 자아라는 감옥에 갇혀 선과 진리에 목말라하는 자들을 풀어내 마음껏 선과 진리를 마시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식일에 열여덟 해 동안 귀신 들린 여자가 귀신에서 놓여나는 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자아 사랑에 가로막혀 주님을 사랑할 수 없었던 사람이 오랜 싸움 끝에 주님을 마음껏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일이 안식일에 이루어지는 것은 안식일은 영적 싸움이 끝나는 때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소와 나귀를 안식일에 풀어 물을 먹이듯 귀신에 매인 여자를 안식일에 풀어 주는 것이 어째서 합당하지 아니하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17절에는 주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자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17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교회의 마지막 때에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왜곡해 진리를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그럴듯한 말로 거짓을 진리인 것처럼 포장하고, 그것으로 교인들을 현혹, 진리를 대적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내적 진리로 오실 때, 인간이 만든 모든 거짓은 참 진리이신 주님의 빛 아래 설 자리를 잃어버립니다. 주님이 말씀하시자 모든 반대하는 자들이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그런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열여덟 해 귀신 들린 여자는 어떤 의미에서 우리들 자신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진리 가운데 들어온 지 벌써 여러 해가 되었지만, 주님을 과연 얼마나 사랑하는지 스스로 물어볼 때가 많습니다. 잘못된 습관을 끊지 못해 계속 끌려다닙니다. 주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일 때문에 늘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작은 불행이나 손실에는 크게 낙심하면서 이웃의 불행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은 자아 사랑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옥의 영들이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옥의 영들과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마치 열여덟 해 귀신 들린 여자처럼 그렇게 싸웠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주님이 어느 날 문득 여자의 병을 고쳐주신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자는 그동안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안식일이면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자아 사랑을 부추기는 지옥의 영들과 열여덟 해 동안이나 싸웠습니다. 주님이 안수하실 때 겸손하게 주님께 몸을 맡겼습니다. 이러한 노력 때문에 그는 지옥의 영들이 놓은 덫에서 벗어나 안식일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주님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주님이 손을 내미실 때 겸손하게 엎드려야 합니다. 주께서 말씀을 통해 교리를 가르치실 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치유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들, 그리고 진리를 사랑하시는 모든 분과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나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그들에게 종된 것을 면하게 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내가 너희의 멍에의 빗장을 부수고 너희를 바로 서서 걷게 하였느니라 (레26:13)

 

아멘

 

원본

2020-11-22(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08(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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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10-01(D1)-주일예배(2506, 눅13,6-9), '두루 파고 거름을 주었음에도 열매를 열지 못하면'.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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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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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0-01(D1)-주일예배.축도.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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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1V5lp3sR7E4

 

 

 

두루 파고 거름을 주었음에도 열매를 열지 못하면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눅13:6-9)

 

 

나무에 속한 모든 것은 진리를 뜻하지만, 열매는 다양한 선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선의 상태로 들어가지 못하고 진리의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잎사귀만 있고 열매는 없는 나무와 같다. 마태복음 7장 19절에서는 그것에 대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라고 말한다. (참된 기독교 106)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의 불행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시고, 제자들에게 회개하라 하셨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세상의 재앙이나 환난은 어떤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생기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모두 보이지 않는 어떤 끈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한 사람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면 그 여파가 다른 모든 사람에게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만큼 세상은 천국이 될 것이지만, 반대로 악을 행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세상은 점점 더 지옥으로 변하고, 질병과 환난과 재앙이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우면 어지러울수록 우리 신앙인들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1장 18절 이하에는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그것은 회개하지 않는 신앙인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18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 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21:18-20)

 

말씀에는 제자들이 이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되는데요, 첫째, 주님께서 과연 그 정도로 허기를 느끼시거나 예민하셨을까 하는 것이고요, 둘째는 주님이 허기를 채우려 하셨다면 얼마든지 다른 방법이 있으셨을 텐데 왜 하필이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게로 가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은 사랑 자체이신 분이신 데 왜 무화과나무를 그토록 저주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이 세상에서 보여 주신 모든 기적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그 속에 담긴 영적 의미, 곧 속뜻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겠습니다.

 

말씀에는 주님이 시장하시다 했지만, 그것은 주님의 생리적인 욕구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주님도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에 배고픔을 느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육신의 문제로는 그렇게 힘들어하시지 않으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느끼시는 허기는 무엇이었을까요? 주님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믿음을 따라 선을 행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바로 그 마음이 주님이 느끼시는 배고픔이며 허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길가에 무화과나무가 있는 것을 보시고 바로 다가가 열매가 열렸는지를 살펴보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무의 열매는 신앙인들이 행하는 선한 행위를 뜻하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기까지 했을까요? 무화과나무의 열매는 자연적인 선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세 가지 단계의 천국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선에도 세 가지 단계의 선이 있습니다. 가장 낮은 단계는 자연적 선(natural good)인데, 그것은 오로지 자신의 구원만을 위해 진리를 믿고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연적 선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웃에 대해서나 교회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에 비해 영적인 선(spiritual good)은 진리와 선을 사랑하되 자신보다는 이웃을 위해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높은 단계의 선은 무엇일까요? 바로 천적 선(celestial good)입니다. 천적인 선은 주님을 위해 또는 선 그 자체를 위해 진리와 선을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거듭나는 것은 이렇게 자연적인 차원에서 영적인 차원으로, 영적인 차원에서 천적인 차원으로 신앙이 계속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교회나 사람을 보실 때 그에게 어떤 선이 있는가를 먼저 보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살펴보신 무화과나무에는 안타깝게도 열매가 하나도 달려 있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적인 선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연적 선도 없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주님 당시 유대인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오직 세상의 재물과 지위만을 탐했습니다. 말씀을 대할 때도 문자적인 의미에만 매달릴 뿐 그 안에 담긴 영적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와 관련해 마태복음 13장 15절에서 주님은 유대인들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13:14-15)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유대인들의 경우는 말씀의 내적인 것을 모르는 편이 차라리 낫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타고난 특성상 그들은 진리를 알면 오히려 그것을 더럽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유대교회 사람들의 영적 성향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의 예배는 겉으로만 신성할 뿐 내적으로는 전혀 신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믿음의 열매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향해 ‘네가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하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저주가 아닙니다. 유대인들 스스로 영적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그렇게 표현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말씀입니다. 6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6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는데, 와서 보니 열매가 열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교회를 뜻합니다. 포도원이 교회를 뜻하는 이유는, 포도나무는 영적 선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영적 선이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주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하는 일을 말합니다. 반면에 무화과나무는 자연적 선을 뜻합니다. 포도원의 주인이신 주님이 당신의 뜰에 무화과나무를 심으신 것은 거듭남의 첫 번째 단계는 자연적 선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어떻게 주님을 믿고 사랑하겠습니까? 누구나 처음에는 나만 구원을 받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진리의 길을 갑니다. 그러니까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일을 할 때도 공정하게 하는 것이 모두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주인이 삼 년을 기다려도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진리를 배우기만 할 뿐 전혀 실천하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7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그러자 주인이 포도원지기에게 말합니다.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여기서 포도원 주인이나 포도원지기는 모두 주님을 나타내는데, 정확히 말하면 주님의 두 가지 본질을 나타냅니다. 즉 포도원 주인은 말씀 또는 진리로서의 주님이시고, 포도원지기는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포도원 주인이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찍어버리라 하는 것은 진리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주님이 길가의 무화과나무를 향해 ‘네가 이제부터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시는 것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주인은 또 삼 년을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주님께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에서 삼 년은 처음부터 끝까지, 또는 완전한 것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얼마나 우리를 위해 기다리실 수 있을까요? 주님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때리고, 침을 뱉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 박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셨습니다. 주님은 인간이 스스로 파멸하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포도원 주인이 기다린 삼 년이요, 그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8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주님의 그런 마음을 본문 8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두루 파고 거름을 준다는 것은 주님께서 진리로 가르치고 설득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설득하실까요? 먼저 나무 주변을 두루 파십니다. 두루 판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쓸 만한 진리와 선이 있는지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사람들을 가르치실 때는 일방적으로 진리를 주입하시지 않고, 그가 가지고 있는 진리와 선을 통해 대화하듯 천천히 가르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또 거름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거름은 인분과 같이 더러운 것인데 그것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와 관련해 ‘천국의 비밀’ 4628번 글의 2항을 보면 천국의 천사들은 지옥에서 오는 악한 기운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그 냄새는 인분이나 시체가 썩는 냄새같이 아주 역겹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역한 냄새를 지옥의 영들은 아주 좋아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거짓이나 악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를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그 진리 안에 있을 때 비로소 그동안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악과 거짓들의 역한 냄새를 느낍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거름을 주신다는 것은 주께서 새로운 진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통해 이전의 악과 거짓의 음습한 기운과 역겨운 냄새를 느끼도록 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때 우리는 몸에 밴 악습과 거짓된 신념들을 혐오하게 되고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가르쳐 열매 맺게 하는 방법입니다.

 

9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마음을 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찍어내신다 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주님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주님의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회개하지 않는 신앙인들의 모습을 봤습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마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참된기독교’ 106번 글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의 신앙은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수동적인 신앙에서 능동적인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출애굽기 21장에서는 히브리 사람들의 종은 여섯 해까지만 주인을 섬기고 일곱 해가 되면 자유인이 되어 떠나야 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주는 교훈은 신앙인들은 진리를 위한 싸움을 이겨내야 하고, 그렇게 해서 수동적인 신앙에서 능동적인 신앙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에서 여섯 해는 거듭남을 위한 싸움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수동적인 신앙과 능동적인 신앙은 어떻게 다를까요? 수동적인 신앙은 진리의 명령이니까 어쩔 수 없이 복종하는 신앙입니다. 그에 비해 능동적인 신앙은 진리를 행할 때 기쁨을 느끼는 신앙이며, 그러므로 특별한 노력 없이도 자발적으로 진리에 따라 사는 그런 신앙입니다. 사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웃과 뜻을 맞추고, 그들의 행동을 참아 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때 진리의 명령이니까 용서하고 참는다면 그것은 수동적 신앙입니다. 그러나 기쁨으로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한다면 능동적 신앙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서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얻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죄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주시는 기회를 붙잡고 매 순간 회개해야 합니다.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영원한 자유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진리를 사랑하는 모든 형제자매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합니다.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8:34-36)

 

아멘

 

 

원본

2020-10-25(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10-01(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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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24(D1)-주일예배(2505, 눅13,1-5),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pdf
0.36MB

https://youtu.be/IHM4XUWZFes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눅13:1-5)

 

 

주님으로 말미암은, 사람 안에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것은 서로 주고받는 능력이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능력이며, 그러므로 상호 작용하는 능력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은 회개를 해야 하고, 회개할 때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해야 한다 하신다. (삶에 관한 교리 103)

 

 

사람에 대한 편견이 누구보다도 많았던 사람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장애인들을 비하했고, 문둥병자나 세리, 이방인들을 혐오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졌던 이유는 성경에 나오는 병자나 장애인, 이방인들은 영적으로는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을 혐오하고 차별했습니다. 사람에 대한 유대인들의 편견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요한복음 9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알 수 있는데요, 거기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9:1-7)

 

주님의 제자들조차 장애가 있는 사람은 유전 죄가 많거나 스스로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 맹인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일까요? 첫째는 주님을 모르면 누구나 다 맹인이 된다는 것이며, 둘째는 그러므로 주님에게서 나오는 진리를 통해서만 맹인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직접 진흙에다 당신의 침을 섞어 맹인의 눈에 발라주시고, 그의 눈을 뜨게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비슷한 내용의 말씀인데요, 본문 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

 

이 본문은 여러 다양한 번역들을 살펴보면 대체로 희생제사를 드리던 갈릴리 사람들을 빌라도가 학살, 그들의 피가 희생제물에 흘러들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그 번역들의 예입니다.

 

바로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빌라도가 희생물을 드리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학살하여 그 흘린 피가 제물에 물들었다는 이야기를 일러드렸다. (공동번역)

 

바로 그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 (새번역)

 

바로 그때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제사를 드리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죽인 이야기를 하였다. (현대인의 성경)

 

말씀에서 갈릴리 사람은 그 속뜻으로는 이방인을 뜻하며, 그러므로 갈릴리 사람이 흘리는 피는 이방인의 선을 뜻합니다. 피는 선이나 인애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선이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거나 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빌라도의 제물은 무엇입니까? 고대인들은 예배나 제사를 드릴 때, 제물을 불에 태워 드리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물은 예배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이방인인 빌라도의 제물이기 때문에 자아에 대한 예배를 뜻합니다. 따라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의 피를 자기의 제물에 섞었다는 것은 이방인들 중에 힘 있는 자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힘없는 사람들의 선의와 진실을 짓밟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관련, 지난 정권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조작과 거짓, 선동의 일들이 생각납니다. 가령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이라든지 자유를 찾아 귀순한 두 청년을 판문점에서 강제 북송한 사건이라든지 말이지요. 그런데도 당시 힘 있는 사람들은 죽은 자의 진실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고만 했는데요, 그렇게 했던 이유는 그들이 주님을 예배하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예배하지 않고 거짓을 예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은 자의 진실을 짓밟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희생제물에 섞은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얘기를 들으시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2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우리는 자신에게 닥쳐서는 안 되는 어떤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 닥칠 때, 그들 스스로 지은 죄에 대한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이 너희보다 죄가 더 많아서가 아니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근거 없는 우월감이며 교만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평범한 이웃들에게 그런 불행이나 시련이 닥치는 이유가 뭘까요? 개인의 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3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세상에서의 삶은 사후에 영원히 지속되는 삶에 비하면 찰나와 같은 것입니다. 만약 개인에게 닥친 불행을 영원한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불행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지요. 그러므로 자신에게 닥치든, 이웃에게 닥치든 시련이 있을 때는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살펴보고, 고칠 점이 있으며 고쳐야 합니다. 나와 이웃이 남이 아니라 하나로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이같이 망하리라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란 무엇입니까? 참된 기독교 528번 글은 회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실제적인 회개는 자신을 검토하여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며, 주님께 기도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자신의 의도와 행위를 검토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가 발견되면 그것을 주님 앞에 인정하고, 그러고 나서 주님을 의지해 악을 끊고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4절에서 말씀하십니다.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앞에서 빌라도에게 희생된 갈릴리 사람들의 얘기가 이방인들의 불행에 대한 것이라면, 지금 이 말씀은 신앙인들의 불행에 대한 것입니다. 실로암은 예루살렘에 있는 연못의 이름입니다. 주님 당시에는 그곳을 통해 예루살렘 성 안으로 물이 공급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실로암은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를 뜻하는데요, 또 망대라고 하는 탑은 노아의 후손들이 쌓았던 바벨탑과 같은 의미로 자아에 대한 예배를 뜻합니다.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고 했는데, 열여덟은 영적 싸움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열여덟(18)이라는 수는 그 속뜻으로는 영적 싸움을 뜻하는 6의 배수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들을 종합해 볼 때,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었다는 것은 영적 싸움을 하는 신앙인들이 말씀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총명함을 과시하려 했다는 것이고, 그로 인해 영적으로 죽어갔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이단 교회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해 거짓 교리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고, 그 교리를 근거로 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교인들 위에 군림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실로암의 망대를 만들다 치어 죽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그러한 욕망들이 조금씩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들의 죄가 이들보다 결코 가볍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단단하고 무서운 것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거듭 말씀하신 것입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을 이와 같이 두 번 반복해 말씀하시는 데는 이유가 있는데요, 선과 진리의 결합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첫 번째 회개는 진리 또는 이성에 관한 회개이고, 두 번째 회개는 선 또는 의지의 관한 회개를 의미합니다. 진리 또는 이성에 관한 회개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을 때, 전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만 받아들이지는 않는지, 그리고 진리에다 자신의 생각을 섞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검토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순간 그의 진리는 거짓이 되기 때문이며, 그러면 선 또는 의지에 관한 회개는 무엇입니까? 진리는 바르게 이해하는데 진리에 반(反)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고 고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진정한 회개의 삶이 시작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이웃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을 때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자신과는 무관한 일처럼 생각합니다. 심지어 그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그들 스스로 저지른 죄의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지난 수년을 겪었으며, 사실 아직도 꿈틀 중인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를 통해 실감하는 것은 모든 사람은 영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어떤 형태로든 이웃에게 영향을 주고, 이웃의 행동이 또 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웃의 아픔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의 아픔에 동참하는 일입니까? 주님의 말씀처럼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것이 재앙과 환난을 짧게 끝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것입니다. 환난 가운데서 회개하고 거듭나는 주님의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8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9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눅3:8-9)

 

아멘

 

 

원본

2020-10-11(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24(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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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와 상담이나 교제를 원하시는 분들께’ (2023/9/23)

 

※ 처음부터 저와 전화통화하시거나 저를 만나러 오시기 전, 사전에 저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시는 것이 여러 모로 유익할 것 같아 이런 글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일종의 러프한 자기소개입니다.

 

저는 소위 모태신앙으로 출발, 장로교 통합에서 성장하다가 고등학교 때 침례교회를 다니기 시작했고,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한 후에는 한동안 기업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교회 직원으로 있었고, 그리고 다소 늦은 나이에 신학을 한 후, 어느 교회 부사역자로 있다가 지난 2013년 개척, 목사 안수를 받은 침례교회 목사입니다. 저는 1961년생입니다.

 

오랫동안 침례교 신학에 오리엔티드 되어 있던 저는 그러나 무슨 신학 지식 수준에만 머무르는 게 아닌, 실제 목회현장에서 어떤 영적 체험들을 좀 하게 되면서, '정원 목사'라는 분의 저서들을 통해 영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개척 초기 여러 신학적 비주류(?)들을 잠깐잠깐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그럴려던 게 아니었는데 어떤 것을 좀 살피다 보면 어딘가 저하고는 안 맞아 거기에서 물러나 또 다른 것을 살피고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그만 결과적으로 잠깐잠깐 살펴본 게 된 것이지요. 그렇다고 무슨 이단, 삼단을 기웃거린 것은 아닙니다 ^^ 단지, 조금만 시야를 넓혀도 금새 신앙의 패러다임이 참 다양함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천국은 주님의 선의 종류에 따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공동체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그중 자신에게 맞는 공동체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제가 여러 곳을 두루 살핀 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16년 8월, 어느 기도원에서 어떤 목사님을 만나 수도원의 세계를 알게 되었는데요, 이후 시작한 수도학교에서 저는 수도학교 3년간 많은 수도사, 성인들 및 수도 영성 관련 책을 접할 수 있었고, 또 현재 수도사의 삶을 사시는 분들을 만나 교제할 수 있었으며, 이 일로 저는 현 개신교 일반 목회 스타일로부터 물러날 수 있었습니다.

 

모든 분들 한 분 한 분이 다 별과 같이 빛나는 분들이시지만, 제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책과 성인들은 '성 분도 요셉 라브르', '성 프란치스코', 그리고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등이며, 그러다가 2017년 늦가을, '스베덴보리'(1668-1772, 스웨덴)라는 분을 알게 되었고, 6년 차인 지금은 이분의 저작들(Writings)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 대한 글은 아래 제 블로그 해당 글을 참고하시고요,

 

https://bygrace.kr/376

 

에마누엘 스베덴보리(Emanuel Swendenborg, 1688-1772)

다음은 제가 번역하는 책들의 저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입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1688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서 출생, 웁살라대학에서 언어학, 수학, 광물학, 천문학, 생리학, 신학을

bygrace.kr

 

제 블로그에 가장 최근에 올린 따끈따끈한 글 또한 공유하오니 한번 읽어보시지요.

 

https://bygrace.kr/1671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 라는 유튜브를 보고 나서...’ (2023/9/21)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 라는 유튜브를 보고나서...’ (2023/9/21) 어젯밤 늦게 아들이 저런 제목의 유튜브를 보내와서 잠결에 한참을 들었고, 그리고 이튿날인 오늘 오전, 몇몇 글을 더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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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블로그를 통해 스베덴보리를 좀 살피신 후에도 마음이 동하시면, 그때 비로소 제게 연락주시면 좋겠습니다. 경험상 이런 순서가 피차 좋을 듯 싶어서입니다 ^^ 제 이메일 주소는 bygrace.byun@gmail.com 이며, 이메일로 본인의 연락처 및 간략한 자기소개를 주시면, 제가 카톡으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비록 교제라 할지라도 저는 주(主, dominion)가 번역의 일이라 그저 이 글을, 저 책을 읽어 보세요 정도의 코치 밖에는 못하지 싶습니다. 제 소명의 일도 있고, 그리고 제 남은 시간이 그다지 많지도 않은 것 같아서이며, 무엇보다도 제 역량(?)이 이제 겨우 첫 단계만 열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저는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으로 시작했습니다.

heaven_and_hell, 581.pdf
1.77MB

 

아래는 번역본입니다. 라틴어 전공자의 번역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모든 저작은 그 원본이 라틴어입니다.

 

http://bit.ly/3t7Zl6Y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spiritual-world.com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저 역시 평생을 몸담았던 기존 신학적 입장에서 물러서는 것은... 비유하자면, 마치 인공위성 발사 시, 로켓 추진체가 지면을 박차고 출발, 중력을 극복하고자 죽을 힘을 다해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였음을 말씀드립니다. 참으로 주님의 은혜요, 주님과 천국을 사모함에 따른 내면 열어주심과 그 열린 창으로 천국 지혜를 부어주심이십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하오며, 저를 찾으시는 모든 분 역시, 동일한 은혜 안에 드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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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늦게 아들이 이순신 장군은 구원받았을까?’라는 제목의 유튜브를 보내와서 잠결에 한참을 들었고, 그리고 이튿날인 오늘 오전, 몇몇 글을 더 찾아보며 생각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 ‘구원’이라는 주제는 간단한 게 아니지만... 주님의 빛을 구하며, 인도하심을 따라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개신교인들, 더 나아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구원’은, 쉽게 풀어쓰면, ‘신앙고백에 비해 비록 좀 많이 부족해도 주님의 은혜로 천국 입국을 허락받아 그곳에 가서 많은 복락을 영원히 누리는 것’ 정도이지 싶은데요, 보통은 그렇지 않나요? ㅎㅎㅎ

 

구원에 대한 이런 개념, 관념은 천국 천사들이 볼 땐 뭔가 좀 뒤죽박죽되어 있는 관념입니다.

 

왜냐하면, 이 ‘구원’을 생각하려면 먼저 좀 살펴봐야 하는, 주님, 인간, 천국, 영계 등에 대한 사전 지식들이 필요해서입니다.

 

첫째, ‘속 사람이라는 게 뭐지?’하는 것인데요, 천국은 지상처럼 무슨 시공간의 나라가 아니라 상태와 그 변화의 나라이며, 사람은 그곳에서 이 속 사람의 상태로 지내기 때문입니다. 지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참고로, '속 사람'(internal man)은 우리가 '영육간에...' 할 때, 그 ''으로 우선은 이해하셔도 됩니다. 다만 영 또한 다시 그 안에 겉 사람, 속 사람이 있다는 점, 그리고 실제 우리는 이 영의 속 사람으로 천국에서 지내게 된다는 점,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지식을 바탕으로 둘째, ‘사람의 사후 삶은 생전 삶의 연속’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지상 생활로 결정되는 이 속 사람의 상태는 사후 영계에서도 그대로 유지된다는 말이며, 그래서 지상에서는 이렇게 살던 사람이 갑자기 천국에서 저렇게 살아갈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셋째, ‘천국은 뭔가 부족한 상태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는 건데요, 천국이든 지옥이든 순도 100% 상태여야만, 즉 완전히 선하고 진실하든지, 완전히 악하고 거짓되든지 해야만 드디어 천국으로 올려지거나 지옥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 어느 정도는 선과 악이 몇 대 몇 상태이기 때문에, 천국 또는 지옥으로 가기 전, 이 비율을 순도 100% 상태로 맞추는 중간 상태가 필요한데요,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라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사후 일단은 천국도 지옥도 아닌 이 중간 상태로 들어가며, 여기서 바로 이 순도 100%로 맞추는 작업, 곧 천국 갈 사람은 천국에서는 아무 쓸 데 없는 악과 거짓을, 지옥 갈 사람은 지옥에서는 아무 쓸 데 없는 선과 진리를 떼어내는 과정이 진행됩니다.

 

이쯤에서 열 분 중 아홉 분은 꼭 '연옥'에 대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이 '연옥'에 대해서는 아래 제 블로그 관련 글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는 연옥(煉獄, Purgatory)이 아닙니다. 연옥은 허구이며, 소설입니다.

‘영들의 세계(The world of spirits)는 연옥(煉獄, Purgatory)이 아닙니다. 연옥은 허구이며, 소설입니다.’ (2023/5/10) 스베덴보리(Emanuel Swedenborg, 1688-1772, 스웨덴)는 계시록에 관한 두 개의 저작을 남겼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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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우리의 속 사람이라는 영역은 주님조차 간섭하지 않으시는 영역’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야 사람이 천국을 가든, 지옥을 가든 그것은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에 따른 책임이며, 주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가 둘 사이에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늘 선악간, 천국과 지옥간 균형을 보장하시는, 그런 사랑과 은혜인 것입니다.

 

오래전 주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것은 여러 복합적인 이유가 있으셨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당시 지옥으로 말미암아 이 균형이 거의 깨지기 일보직전이셨기 때문이며, 그래서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친히 거듭남의 과정을 통해 마리아를 통한 인성(human)은 벗으시고, 여호와로 말미암은 새로운 신적 인성(神的 人性, Divine Human)을 입으셨으며, 이 새로운 신적 인성으로 지옥을 방문, 지옥의 광기를 수습하심으로써 다시 이 모든 피조세계의 균형을 맞추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인성을 입고 지옥을 찾으셔야만 했던 이유는, 안 그러면, 즉 직접 여호와라는 신성 그 자체로 지옥을 직접 찾으시면, 지옥은 그대로 소멸되기 때문이며, 지옥의 소멸은 동시에 천국에도 영향을 미쳐 피조 세계 전체가 소멸되기 때문이었는데요, 피조세계는 선악간, 천국과 지옥간 균형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그래서 ‘주님의 은혜란 우리의 속 사람을 뭐 어떻게 뚝딱 변화시켜주시는 그런 게 아니라 우리의 생전 우리의 거듭남을 위해 평생 동행하시는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의 은혜는 평생 우리의 선택을 곁에서 도우시는 그런 은혜입니다. 미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다섯 처녀를 그저 불쌍하다고 눈감아주시는 그런 은혜가 아닙니다. 미리 기름을 준비했던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최종 선택은, 그래서 우리의 최종 모습은 우리가 정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전에 제가 삼성전자 다니던 시절엔 미국 오라클이라는 회사가 참 글로벌 초우량기업 중 하나였습니다. 그 연봉이며, 복지며... 그래서 삼성맨들조차 거기 직원들을 부러워했지요. 자, 그렇게 그곳이 좋아 원했다고 해서 아무나 덜컥 거기 누구 고위직에 의해 낙하산으로 입사를 할 수 있었다 합시다. 만일 그가 그곳의 업무역량을 갖추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상태라면 그는 과연 그곳에서 며칠을 버틸 수 있을까요? 외국기업은 특히나 더 이런 거에 칼 같아서 소위 얄짤없이 바로 쫓겨나지 싶습니다.

 

천국이라는 곳(상태)이 이와 같습니다. 주님은 온 인류를 사랑하셔서 모두를 천국으로 인도하고 싶어하시지만, 우리 중 그 상태가 천국에 합당한 상태, 즉 천국에 머무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면 오히려 우리가 못 견뎌 뛰쳐나오게 되는, 천국은 그런 곳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천국은 화염과도 같은 사랑의 열로 가득한 곳이기 때문이지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주님은 우리의 속 사람 퀄러티까지는 간섭(?)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속 사람의 최종 모습, 최종 퀄러티, 최종 상태는 전적으로 우리 소관, 우리 책임입니다.

 

주님은 모든 순간,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하게 하시려고, 주님이 하실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시는데요, 그러므로 우리는 ‘왜 내가 이 모양이 되도록 나를 내버려 두셨습니까?’라며 주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천국은 그 사람의 상태, 즉 자기 안에 천국이 있는, 그런 사람이라야 갈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이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눅17:20-21)

 

말씀하신 것도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무슨 행동을 하든 늘 ‘아, 내가 이렇게 하면 주님의 법, 주님의 질서를 범하는 게 된다!’며 삼가는 사람입니다.

 

요셉도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6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7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창39:6-10)

 

라며, 그 짓이 하나님께 죄를 짓는 짓임을 분명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너무 길어졌지요? 좀 빨리 결론을 내려보면은요, 이순신 장군이든 누구든 공정과 정의, 나라 사랑이라는 선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그래서 그의 안에 올바름과 의로움의 선이 형성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틀림없이 천국에 갔을 것이다, 그는 지금 천국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그는 생전에 주님이 누구이며, 속 사람을 비롯, 이 모든 게 무엇인지 전혀 몰랐겠지만, 그러나 사후, 천사들을 통해 이 모든 올바름과 의로움, 그리고 그의 안에 있는 선함이 사실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한 분 주님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라는 가르침을 받으면, 그는 거기서 주님을 시인하고 영접하는데, 그래서 주님 말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라는 말씀이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꼭 지상에서만 이루어질 필요는 없는 것이, 태어난 나라와 종교적 환경 등의 이유로 평생 말씀을 들어보지도, 복음을 접해 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전 세계 수많은 종교, 수많은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해 그들 나름의 종교가 있도록 섭리하셨고, 그래서 세상 살 때, 자기 종교의 가르침을 따라 선하게 산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주님의 신성이 그 안에 자리 잡은 사람들은 사후, 주님에 대한 가르침을 받을 때, 그곳에서 주님을 영접합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은 선은 그 안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이며, 선한 사람들은 주님의 진리, 주님에 관한 신적 진리(the Divine truth of the Lord)를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 안에 있는 선과 닮았기 때문이지요.

 

부언하여, 오늘 유튜브 제목인 ‘이순신 장군은 구원을 받았을까?’라는 이 모든 혼란은 사도들의 서신서들을 주님의 말씀과 동격으로 놓고, 거기서 교리들을 추출, 그걸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현 성경 66권 중, 주님의 말씀, 곧 신(神, The Divine)이신 주님이 직접 하신 말씀, 그래서 그 안에 주님의 생명, 곧 속뜻(internal sense, inner meaning)이 들어있는 말씀(the Word)은, 구약은 , , , , , , , 삼상, 삼하, 왕상, 왕하, , , , , , , , , , , , , , , , , , 말 등 29권이고, 신약은 , , , , 계 등 5입니다. (AC.10325)

 

말씀의 속뜻이란, 사람이 육과 영으로 되어 있듯, 말씀도 겉 글자의 뜻과 속뜻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 말씀의 영인 속뜻은 오직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에만 들어 있고, 신약 서신서들을 비롯, 구약의 룻기, 역대서, 잠언, 전도서 등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비록 신앙 생활에 유익하고 좋은 글이지만 그러나 순수하게 외적이기만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내적 존재들인 천사들의 눈에는 위에 언급한 주님의 말씀을 읽을 땐, 그 속뜻, 즉 그 안에 담긴 주님의 생명의 그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향기와... 등등 그 감동에 어쩔 줄을 몰라하지만, 위 리스트에 없는 성경을 읽을 땐, 그저 까맣게만, 즉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천사들은 내적 존재여서 외적인 것은 저들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기 때문이지요...

 

주님은 만유의 대 주재이셔서 이처럼 모든 민족, 모든 인종에게 참으로 공평한 구원 시스템을 준비하셨음을 깨달으시고, 이제부터라도 마음을 넓혀 주님의 시야로 타 종교, 타민족과 인종을 사랑으로 대하시기 바랍니다. 가끔 탈북민들 유튜브나 베트남, 라오스 산지 유튜브 영상들을 보며, 저희 사모에게 '여보, 만약 우리도 저기서 태어났으면 저분들처럼 저렇게 살아가고 있겠지?' 하면서 서로 웃고는 하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교회 밖에서 태어나 교회 밖에서 살아가고 있는 분들은 자기들이 원해서 그 나라, 그 환경 가운데 태어나신 게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그러니 제발, 타 종교, 다른 민족과 인종, 심지어 나랑 다른 신학적 입장 가지신 분들에 대해 너무 그렇게 무슨 결사 반대, 목숨 바쳐... 등 결연한 태도로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태도는 주님 앞에서 오히려 매우 위험하시며, 그래서 절대 안전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신 한번 강조하여 말씀드리지만, 주님의 구원 시스템은 공정, 공평한 시스템이며, 구원은 시스템으로 진행되는 것이지 어떤 허가권자의 재량으로 되는 게 아니라는 점, 본인의 속 사람의 상태가 천국 생활을 감당할 수 있으면 천국에서 지내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뛰쳐나와 지옥에서 지내는 것입니다. 비록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보혈을 흘리셨어도 말입니다. 주님을 영접한다는 말은 주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 속 사람을 변화시켜 거듭나겠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속 사람의 상태란 주님의 신성(神性, The Divine)의 상태, 즉 주님의 선과 진리에 대한 상태를 말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와 교회 밖에 있는 분들의 차이는, 우리에게는 밝고 환한 주님의 말씀이 있는 반면, 저들에게는 없어 저들은 흐릿하고 어두운 빛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온 인류는 한 사람으로 보이며, 그 가운데 교회는 그 한 사람의 심장과 폐의 역할을, 교회 안에 있지 않은 나머지 인류는 나머지 장기들을 비롯, 나머지 지체들을 의미합니다. 전도도 선교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며, 목회든 전도와 선교든 그를 통해 자신의 속 사람이 더욱 잘 준비되고 있다면 참 다행이고 감사할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네, 그렇습니다 ㅎㅎ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시면, 우선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 책 36장, ‘천국의 비 기독교인들’과 55장, ‘천국에 이르는 삶은 어렵지 않다’를 읽어보시기 바라며, 필요하신 분들 위해 관련 pdf를 공유하오니 도움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래는 영문이며,

heaven_and_hell, 581.pdf
1.77MB

 

번역본이 필요하신 분은 아래 링크를 통해 구하실 수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천국과 지옥, 그 중간의 영인들의 세계의 구조, 현상, 그곳 사람들의 상태와 생활을 보여준다. 사람이 사후 겪게되는 세계를 스베덴보리의 천사와의 대화, 관찰과 기록을 통해 알게되며 영의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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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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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17(D1)-주일예배(2504, 눅12,54-59),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며,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pdf
0.40MB

https://youtu.be/khWBCaaU_YM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며,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54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58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 하리라 하시니라 (눅12:54-59)

 

 

하나님의 신성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흘러들어온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것은 사람의 쪽이어야 하며, 자신으로부터가 아니라 자신으로부터인 것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받아들이는 능력이 사람에게 끊임없이 주어지며, 사람이 악을 제거하는 만큼 그 능력은 비록 주님의 것이지만 사람의 것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for the Divine proceeding which is “the Father in the heavens,” flows in with the evil equally as with the good, but the reception of it must be on man’s part, yet not on man’s part as from man, but as if from man, for the ability to receive is given to man continually, and it also flows in to the extent that man removes the evils that oppose, and does this also from the ability that is continually given, the ability itself appearing to be man’s, although it is of the Lord. (AE.644:23)

 

 

※ 오늘로 누가복음 12장을 마칩니다. 지난 7월 30일 주일부터 시작, 오늘까지 8주에 걸쳐 다루었는데요, 늘 이렇게 원고를 프린트하여 나누어드렸으니 수시로 다시 여러 번 읽으시고 확실히 자기 걸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겉 육을 입고 사는 사람들은 이 속뜻 설교를 결코 한번 듣고 완전히 자기 걸로 소화할 수 없기 때문이며, 이렇게 속, 곧 내적(內的, internal)으로 말씀 읽기를 연습하다 보면 어느덧 우리도 천사들처럼 내적으로, 영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이 세상과 세상 모든 일, 곧 주변 일상을 비롯,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것에서 한발 물러나 그 영적 의미들을 천국, 천사들 관점, 곧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며, 그렇게 되면서 우리 모두 세속적 사고에서 벗어나게 되어, 이 세상 사는 동안 주님을 향해 우리를 정결하게 보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살면서 세상을 위해서가 아닌, 주님을 위해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몸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에서 천국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복음서에는 외식하는 자에 대한 에피소드가 자주 나옵니다. 외식(外飾)이라는 말은 한글 성경의 번역이고, 영어 성경 표현은 위선(僞善)입니다. 위선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겉으로는 진실한 듯하나 속으로는 속이는 것, 겉으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면서 속으로는 증오하거나 멸시하는 것이지요. 복음서에 위선자의 대명사로 불리는 사람들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임의로 왜곡, 말씀 속에 있는 내적이고 거룩한 것들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겉으로만 경건할 뿐, 속에는 악의와 교활한 속임수가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을 회칠한 무덤과 같다 비난하셨던 것입니다. 겉은 그럴듯하게 꾸몄지만 그 속은 죽은 자들의 해골과 뼈로 가득한 무덤처럼 말이지요. 교회의 교리가 잘못될 경우, 그 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바리새인들 같은 위선자가 됩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공간 안에 있으면 누구나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습니다.

 

※ 여기 ‘감염(感染)이라고 했는데요, 출애굽, 즉 애굽을 나오다, 애굽에서 출발하다 하는 출애굽 모든 여정은 그 속뜻으로는, 악과 거짓에 감염된 상태에서 우리를 구원, 천국을 향해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입니다.

 

자, 그렇다면 참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위선자가 아닐까요? 비록 참된 신앙 안에 있다 하더라도 거듭나기 전에는 위선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개인의 영적 상태에 따라 누구나 조금씩은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자신의 위선을 얼마나 아느냐 하는 것이고, 거기서 그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어떻게 하면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또한 각 사람에게 오시는 주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 54절과 55절 말씀은 이렇습니다.

 

54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이는 것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55남풍이 부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구름이 서쪽에서 일면 소나기가 온다고 합니다. 이는 주님 활동하신 유대 땅의 지형적 특성 때문인데요, 그러나 그 속뜻으로도, 서쪽은 해가 지는 방향이기 때문에 교회 안에 사랑이 없는 때, 즉 교회의 마지막 때를 나타내며, 또 구름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가리키고, 소나기는 진리를, 그러므로 구름이 서쪽에서 일면 소나기가 온다는 것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께서 말씀의 진리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절에는 남풍이 불면 심히 더울 거라는 것 역시 그 지역 지형적 특성이지만, 역시 그 속뜻으로도, 남풍은 주님에게서 나오는 선을 뜻하며, 그러므로 남풍이 불면 덥다는 것은 주님께서 말씀의 선으로 오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합해 보면, 이 말씀은 교회의 마지막 때 주님이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오신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자아의 욕망을 좇을 때 교회는 기울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때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려 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 신앙인들이 주님께로 돌아서지 않으면, 석양에 해 기울듯 교회 안에는 사랑이 식어갑니다. 바로 그때 주님께서 오셔서 타락한 교회를 정리하시고, 새로운 교회를 여시지요. 교회는 세상의 심장과 폐와 같아서 한순간도 없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다는 것은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말씀의 진리와 선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소나기는 바로 그 진리이고, 남풍은 그 선을 뜻합니다.

 

서쪽에서 구름이 일면 소나기가 올 것을 아는 것처럼 진실한 신앙인들은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을 통해 주님의 임재를 느낍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자기 안의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웁니다. 마치 노아 시대에 방주에 들어간 사람들이 세상을 덮은 거짓의 홍수와 맞서 싸우듯 그렇게 싸웁니다. 진실한 신앙인들은 그런 방법으로 시험을 딛고 한 단계 한 단계 거듭납니다. 하지만 반대로 자아 사랑과 세상 사랑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들 내면의 교회에 오신 주님, 자신들을 찾아오신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박해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스베덴보리 저, ‘계시록 해설’ 644번 글 20번 항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면의 악과 거짓으로 인해 눈이 어두운 자들은 진리를 보지 못하고 주님의 임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럴 경우, 시험을 이기지 못한다.’ 시험을 이기지 못하면 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56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57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그래서 주님께서는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간할 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 한탄하신 것입니다. 시대를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주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아니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생각할 때는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말고 스스로 판단하라는 말씀입니다. 외부의 교회든 내면에 있는 교회든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는 누구나 자신의 판단에 따라 자유롭게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그때는 영이 순수하기 때문입니다. 영이 순수하다는 것은 진리를 위해 진리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타락해 마지막 때가 되면 신앙인들은 자신의 판단을 믿지 않고 타인의 판단을 믿습니다. 자신의 순수한 영으로 진리를 바라보지 않고 타락한 교회의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바라보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 말씀에서 ‘베드로’는 교회의 신앙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는 진리에 대한 순수한 애정으로부터 진리를 생각하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는 교회의 마지막 때 사람들은 스스로 진리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말, 즉 잘못된 교리를 통해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신앙인들이 스스로 진리를 판단하고 믿기를 원하십니다.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자유이며,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은 노예가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위선자가 되지 않을까요? 어떻게 하면 스스로의 판단으로 진리를 믿을 수 있을까요?

 

58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주님께서는 그 대답으로 ‘네가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옥졸에게 넘겨주어 옥졸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것은 한글 성경 번역이고, 영어 성경의 번역은 이렇습니다. ‘네가 원수와 함께 행정관에게 갈 때 길에서 근면하여 그가 너를 재판장에게 넘겨 옥에 갇히지 않도록 하라’입니다. 말씀에서 ‘감옥에 갇히는 것’은 신앙인들이 진리와 선을 모두 잃어버리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 악과 거짓의 노예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가 있어야 악과 거짓을 물리칠 수 있는데 진리가 없으니 악과 거짓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살아있는 자의 삶이 아니라 죽은 자의 삶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길에서 근면하라, 즉 진리 안에서 근면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진리 안에서 근면한 것일까요? 진리가 명령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행하고 진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은 끝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9네게 이르노니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고서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 하리라 하시니라

 

말씀에서 ‘갚는 것’은 진리를 가지고 잘못된 습관을 고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를 알면서 실천하지 않는 것은 주님 앞에 큰 빚을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가지고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깨닫고 고쳐나간다면 그것은 주님의 빚을 갚는 일이며, 주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한 푼도 남김없이 갚으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교회가 아무리 죄를 짓더라도 그것을 허용하십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 악이 선을 넘게 되면, 다시 말해서 그대로 두면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를 것 같으면 지체 없이 오셔서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교회 안의 남은 자를 데리고 새 교회를 여십니다.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시는 주님의 오랜 섭리이며 방법입니다. 교회의 마지막 때 낡은 교회를 폐하시고 새 교회를 세우시는 이 섭리는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신앙인들이 주님의 질서에 반하는 삶을 살 때 주님은 어느 정도는 허용하시지만, 도를 넘으면 직접 그의 내면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임재하실 때 진실한 사람들은 주님을 받아들여 주님과 함께 내면의 악과 거짓을 몰아내는 싸움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한 번 더 거듭납니다. 반대로 진리보다는 세상에 뜻을 둔 위선자들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시험에서 이길 수 없으며 결국 점점 더 깊이 악의 수렁 속으로 빠져듭니다. 주님은 위선자가 되기 쉬운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십니다.

 

첫째는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라 하십니다. 이 말씀은 겉 사람의 자아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지 말고 속 사람에 계신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 있으며, 그를 붙잡고 있는 위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진리 안에서 근면하라 하십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진리 안에서 근면한 것은 진리에 반하는 일은 하지 않고 진리에 합당한 일은 게으름 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진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지만, 게으름 부리지 않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지는 모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진리의 명령 앞에서 게으름을 부릴 때 어둠이 내려앉는 것처럼 악하고 거짓된 것이 삶 가운데 은밀하게 내려앉습니다. 신앙인들은 그렇게 해서 지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근면해야 합니다. 항상 속 사람으로부터 진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호6:3)

 

아멘

 

 

 

원본

2020-09-27(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17(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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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드린 것처럼,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 사람들은 특별히 무슨 신학교육 같은 거를 받지 않아도 주님으로부터 천사들처럼 퍼셉션(perception)이라는 것을 받아 모든 걸 통찰, 지각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 시대에는 주님에 관한 진리들을 오늘날처럼 신학적 교리로 정돈하는 걸 무척 꺼리며 삼가던, 불편해 하던 시대였습니다.

 

이는 예를 들면, 선하고 착한 사람들한테 주님을 생활과 삶으로 보여주지는 않고, 대신 교리교육으로만 가르치려 할 때, 그들이 낯설어 하고 힘들어 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 그 시대에 벌써 주님에 관한 진리들을 수집, 체계화된 교리로 정돈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는데요, 이들이 바로 에녹이라 하는 사람들, 혹은 교회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인류는 나중에는 결국 기록된 말씀을 가지고 교리로 주님과 연결될 것이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므로 그들을 잠시 따로 떼어 보관하시는데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는 말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5:24)

 

의 배경, 속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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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10(D1)-주일예배(2503, 눅12,49-53),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pdf
0.37MB

https://youtu.be/9o9EVXAqlLQ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눅12:49-53)

 

 

주님이 오시기 전에는 교회 안에 거짓과 악밖에 없어서 분쟁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에 의해 진리와 선이 밝혀지자 비로소 분쟁이 일어났다. 진리와 거짓, 선과 악 간의 분쟁이 없으면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다 (계시록 해설 504:31) for before the Lord came into the world there were in the church nothing but falsities and evils, consequently there was no combat between these and truths and goods; but when truths and goods had been unveiled by the Lord, then it was possible for combats to exist, and without combats between these there can be no reformation; (AE.504:31)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는 가나안 원주민들, 즉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그리고 여부스 족속이 이미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땅에서 모두 몰아내라 하셨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가나안 도착과 함께 주님 명하신 대로 처음 땅 분배를 받아 흩어진 후, 자기 땅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완전히는 몰아내지들을 못했습니다.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그동안 너무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야 어떻든 그것은 잘못된 선택이었고, 사람이 주님을 끝까지 의뢰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문제였는데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끊임없이 이 남은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신앙인들도 악과 타협할 때가 있는데요, 그렇게 악과 타협할 때는 일시적으로는 평화를 얻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곧 전보다 더 큰 악에 시달리게 되는데요, 그리고 그렇게 시달릴 대로 시달리고 나서야 진리와 거짓, 선과 악은 절대 타협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됩니다. 영적 전쟁에서는 어느 한쪽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한쪽은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며, 그래서 둘 사이에는 싸움이 그치지를 않습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누구나 다 이렇게 내적 싸움을 하는데요, 그런데 이런 내적 싸움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바로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자아와 세상의 욕망을 좇아 사는 것이 악이며 거짓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내적 싸움이 없다는 게 오히려 참 씁쓸한 케이스가 되겠네요. 그런가 하면 진리를 알면서도 내적 싸움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세상 유혹을 이기지 못해 습관적으로 악을 행하는 사람의 경우인데요, 죄를 반복해서 짓다 보면 나중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수치심이나 굴욕감, 죄의식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들은 거짓을 진실이라 하고 진실을 거짓이라 뒤집기도 합니다. 내적 싸움이 없기 때문에, 겉으로 보면 자유롭고 평온해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평화도 아니고 자유도 아닙니다. 지옥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 뿐이지요.

 

그러면 진정한 평화,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와 관련해 오늘 본문 49절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주님께서는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하십니다. 불은 무슨 뜻일까요? 선과 악, 진실과 거짓 사이에 벌어지는 내적 싸움을 뜻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개인이든 사회든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진실과 거짓, 선과 악 사이에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 오시기 전 이 세상에는 그런 내적 싸움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참된 진리가 없었기 때문인데요, 진리라는 게 있어야 거짓을 볼 수 있고, 그것과 싸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상은 악과 거짓으로 가득했고, 그러므로 구원받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붙잡혀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었지요. 그때 참된 진리이신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가 있는데요, 첫째는, 인간의 인식을 초월해 존재하셨던 여호와께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같은 논리로, 그동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내적 진리가 주님이 오심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진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통해 누구나 내적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인데요, 왜냐하면 아래 요한복음 1장 3절 이하의 증언처럼 주님은 곧 말씀이시며, 그러므로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가 되었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안에 내적 진리가 충만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3-14)

 

그러니까 주님의 인성이 문자로 된 성경이라면 내적 진리는 주님 안의 신성, 곧 문자 안에 담긴 영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오신 세 번째 의미는, 인간에게 거듭남의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세상에서 인성과 신성을 하나로 만드시는 과정은 사실은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결합하여 하나 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치열한 내적 싸움 없이는 거듭남도 없다는 것인데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주님께서는 내가 받을 세례가 있다 하십니다. 말씀에서 세례는 거듭남을 의미하는데요, 그렇다면 주님이 받을 세례는 어떤 것입니까?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로부터 받으신, 유전된 인성(human)을 벗으시고, 당신 안의 여호와께서 주시는 거룩한 인성으로 갈아입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옥과의 치열한 싸움과 승리로만 이루어지는데요, 그래서 인간이 거듭나는 모습과 흡사하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받으실 세례는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 되는 것임과 동시에, 주님에 의해 인간이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시공간 속에서 주님 자신에게 일어나는 세례임과 동시에, 시간을 초월해 모든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라고 말씀하신 것도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분쟁하는 것은 곧 내적 싸움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내적 싸움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그것에 대해 52절과 53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오신 다음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운다고 합니다. 여기서 숫자 셋은 진리는 진리인데 선이 없는 진리를, 그리고 숫자 둘은 선은 선인데 진리가 없는 선을 말합니다. 선 없는 진리나 진리 없는 선은 둘 다 온전한 것이 아니며, 둘 다 진정한 진리와 선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진리는 이웃을 화합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분열시키는데요, 교회 안에서, 아니면 개인의 마음속에서 이렇게 진리를 가장한 거짓, 또는 선을 가장한 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갈라놓을 때가 아주 많습니다. 이것이 한 집에 다섯 사람이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분이 제게 성경이 우선이냐 성문서, 즉 스베덴보리가 쓴 글이 우선이냐 라는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하기를, 성경의 문자적 의미는 주님의 인성에 해당하고, 성문서에서 밝히는 말씀의 내적 의미는 주님 안에 있는 신성과 통합니다. 주님의 인성과 신성이 하나이듯 그 둘은 하나이며, 똑같이 중요합니다 라고 말이지요. 만약 교회 안에서 어떤 이는 성경이 우선이라 하고, 어떤 이는 성문서가 우선이라 한다면 그런 것이 바로 둘과 셋으로 나뉘어 싸우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생각은 진리를 가장한 거짓입니다.

 

또 한 번은 새 교회에서는 진리 진리 하는데 진리보다는 사랑이 먼저가 아니냐고 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먼저이지만 진리를 알아야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으니 진리나 사랑이나 똑같이 소중합니다 말씀드렸는데요,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말씀드려도 듣지 않는 분은 안 듣습니다. 사소한 것 같지만 교회 안에 이런 분쟁이 가끔 생기는데요, 이걸 잘 관리하지 못하면 자칫 교인들 간 분열이 일어나고 맙니다.

 

그러면 아버지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분쟁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아버지는 자아의 악을 뜻하고 아들은 진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아들이 분쟁하는 것은 자아의 악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어머니는 자아의 욕망을 뜻하고 딸은 진리에 대한 애정을 뜻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와 딸이 싸우는 것은 자아의 욕망과 진리에 대한 애정이 서로 싸우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진리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언제나 이런 내적 갈등을 경험합니다. 자아가 원하는 것들은 대개 세상 물질과 쾌락, 명예 같은 것인데 하나님의 진리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먼저 구하라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적 싸움이 있어야 우리는 영적으로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오시기 전 당시 세상은 암흑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자기 욕심껏 사는 것이 선이며 정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웃에게 악을 행하거나 거짓말을 하면서도 양심의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상태로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완전한 진리의 능력으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이 당신의 인성을 거룩하게 만드셨을 때, 말씀의 문자적 의미 또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자연계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몇 가지 과정이 필요했는데요, 먼저, 문자로 된 신구약 성경이 인류에게 주어졌고, 그 다음에 말씀의 내적 의미가 밝혀진 것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말씀이신 주님이 오신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자의 일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 1500년이 지난 후, 가톨릭 사제들에 의해 독점되었던 성경이 평신도에게 돌아옴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이 그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자의 일은 그로부터 250년 후에 주님의 종 스베덴보리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250년이 흘러 극동의 한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에까지 이 말씀의 내적 의미가 전해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인류가 완전한 진리를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기독교’ 508번 글은 지금은 누구나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시대라고 선언합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내적 의미로 인해 이제 완전하고 거룩한 말씀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진리가 바로 그 완전하고 거룩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주님이 주신 이 진리를 가지고 각자 내면의 악과 싸워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인성을 거룩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도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1:14)

 

 

원본

2020-09-06(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10(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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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10주년 예배를 사모와 단둘이 드리는데도 평안하고 감사한 이유’ (2023/9/5)

 

지난 주일(9/3) 오후, 둘째와 저 아랫동네 어느 까페에서 대화하던 중 창립 10주년에 대한 둘째의 반응이 계속 마음에 남아 이렇게 몇 자 적어봅니다.

 

둘째는 자기는 결코 이런 모양의 창립 10주년을 원하지 않았다며, 몹시 실망한 듯 고개를 돌리더군요. 자기는 그래도 번듯한, 최소한 무슨 상가 건물에 사람들도 좀 북적이고, 화환이며, 무슨 그럴듯한 감사예배 식순도 있고... 하여튼 자기는 이건 아닌 것 같다며, 강하게 부정을 하더군요...

 

다음은 제가 스베덴보리를 하게 되면서, 즉 주님이 그를 통해 허락하신 글들 중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 주석) 번역을 하게 되면서 접하게 된 아래 내용들을 통해, ‘아, 그래서 이상하게 나는 이런 예배, 이런 교회가 더 좋았던 거구나...’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로, 위 주석은 총 10,837개의 글로 되어 있는데요, 그 중 414번 글의 3번, 4번 항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 그리고 이 글은 창세기 4장 20절,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중 ‘장막에 거주하며’에 대한 주석입니다.

 

414. [3] 말씀(the Word)에서 이 ‘장막’(tent)이라는 용어를 채택, 사랑에 속한 천적(天的, celestial)인 것들과 거룩한 것들을 표현하는 이유는, 고대에는 예배의 거룩한 의식(儀式, rites)을 그들의 장막에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여러 신성모독스런 예배들을 통해 장막을 신성모독하기(to profane) 시작했을 때, 세워진 게 순서대로 성막(the tabernacle)이고, 나중에는 성전(the temple)입니다. 이런 이유로, 장막은 성막과 성전이 가리키는 모든 것을 표현하고 있으며, 같은 이유로, 거룩한 사람을 가리켜 주님의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라 하는 것입니다.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 같은 걸 상징한다는 것은, 시편을 보면 분명한데요, The reason why the term “tent” is employed in the Word to represent the celestial and holy things of love is that in ancient times they performed the holy rites of worship in their tents. But when they began to profane the tents by profane kinds of worship, the tabernacle was built, and afterwards the temple, and therefore tents represented all that was subsequently denoted first by the tabernacle, and afterwards by the temple. For the same reason a holy man is called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of the Lord. That a “tent,” a “tabernacle,” and a “temple” have the same signification, is evident in David:

 

4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5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6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시27:4-6) One thing have I asked of Jehovah, that will I seek after, that I may remain in the house of Jehovah all the days of my life, to behold Jehovah in sweetness, and to visit early in his temple; for in the day of evil he shall hide me in his tabernacle; in the secret of his tent shall he hide me; he shall set me up upon a rock. And now shall my head be lifted up against mine enemies round about me, and I will offer in his tent sacrifices of shouting. (Ps. 27:4–6)

 

[4] 가장 높은 뜻으로는, 주님은 그의 인성(人性, human essence)과 관련하여 ‘장막’, ‘성막’, 그리고 ‘성전’이십니다. 그래서 모든 천인(天人, celestial man, 천적 인간, 천적 천사, 삼층천 천사)을 그렇게 부르며, 모든 천적이며 거룩한 것들 또한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태고교회(太古, the most ancient church)는 그 뒤에 일어난 교회들(고대교회, 유대교회, 기독교회 등)보다 주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았고,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혼자, 즉 자신들의 가정에서 살면서 자신들의 장막에서 지극히 거룩한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이런 이유로, 장막은 신성모독을 당한 성전보다 훨씬 더 거룩하게 여겨졌습니다. 이를 기념하고자 초막절(草幕, the feast of tabernacles)이 제정된 것이며, 이때 그들은 땅의 소산물을 거두고, 그 기간, 태고교회 사람들처럼 자기들도 장막에서 지낸 것입니다. (레23:39-44; 신16:13; 호12:9) In the supreme sense, the Lord as to his human essence is the “tent,” the “tabernacle,” and the “temple”; hence every celestial man is so called, and also everything celestial and holy. Now as the most ancient church was better beloved of the Lord than the churches that followed it, and as men at that time lived alone, that is, in their own families, and celebrated so holy a worship in their tents, therefore tents were accounted more holy than the temple, which was profaned. In remembrance thereof the feast of tabernacles was instituted, when they gathered in the produce of the earth, during which, like the most ancient people, they dwelt in tents. (Lev. 23:39–44; Deut. 16:13; Hosea 12:9)

 

39너희가 토지 소산 거두기를 마치거든 일곱째 달 열닷샛날부터 이레 동안 여호와의 절기를 지키되 첫날에도 안식하고 여덟째 날에도 안식할 것이요 40첫날에는 너희가 아름다운 나무 실과와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무가지와 시내 버들을 취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이레 동안 즐거워할 것이라 41너희는 매년 이레 동안 여호와께 이 절기를 지킬지니 너희 대대의 영원한 규례라 너희는 일곱째 달에 이를 지킬지니라 42너희는 이레 동안 초막에 거주하되 이스라엘에서 난 자는 다 초막에 거주할지니 43이는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주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44모세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공포하였더라 (레23:39-44)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신16:13)

 

네가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주하게 하기를 명절날에 하던 것 같게 하리라 (호12:9) (AC.414:3, 4)

 

이상, 윗글을 통해 저는 왜 그동안 규모 큰 교회들과 그 예배들을 힘들어했는지, 그리고 왜 집에서 하는 교회와 이런 가정 예배에 오히려 끌렸는지를 알게 되었는데요, 이는 다음에 소개할 정말 놀라운 내용으로 이어지며,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참고로, 아래 내용은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Its Wonders and Hell From Things Heard and Seen) 4장, ‘천국은 두 나라로 구분되어 있다(Heaven Is Divided into Two Kingdom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21. 주님으로부터 나오는 신성(神性, the Divine)을 더 내적으로(內的, interiorly) 받는 천사들이 있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이 있다. 더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은 천적 천사들이라 하고, 덜 내적으로 받는 천사들을 영적 천사들이라 한다. 이에 따라 천국이 두 나라로 구분되는 것이다. 하나는 천적 나라(the celestial kingdom), 다른 하나는 영적 나라(the spiritual kingdom)라 한다.

 

22. 천적 나라를 이루는 천사들은, 그들이 주님의 신성을 보다 깊이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 내적인 천사, 또는 더 높은 천사라고 부른다. 따라서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천국도 더 내적이고, 더 높은 천국이라고 한다. 더 높다, 더 낮다고 말하는 이유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이다.

 

23. 천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인 천적 사랑은 주님을 향한 사랑(love to the Lord)이다. 영적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사랑은 영적 사랑이라 부르며, 이는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다. 또 사람이 사랑하는 것은 그에게 선(좋은 것)이기 때문에, 모든 선은 사랑에 속한다. 따라서 그 두 나라의 선도 하나는 천적 선, 다른 하나는 영적 선이라 한다. 이로 보아, 주님을 향한 사랑이 이웃 사랑과 구분되는 것처럼, 그 두 나라가 구분되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나온 선은 보다 내적인 선이고, 그 사랑도 보다 내적인 사랑이기 때문에, 천적 천사들은 더 내적인 천사들이고, 더 높은 천사들이라 부르는 것이다.

 

24. 천적 나라는 주의 성직의 나라(the Lord’s priestly kingdom)라고도 불린다. 말씀에서는 ‘주의 처소’(his dwelling place)라고 한다. 영적 나라는 주의 왕권의 나라(his royal kingdom)라고도 하며, 말씀에 ‘주의 보좌’(his throne)라고 표현되어 있다. 또 이 세상에 계실 때의 주님을 신성의 천적 측면에서 ‘예수’(Jesus)라 했고, 신성의 영적 측면으로는 ‘그리스도’(Christ)라고 칭했다.

 

25. 주님의 천적 나라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의 신성을 보다 내적으로 받기 때문에, 영적 나라의 천사들보다 지혜와 영광에 있어 훨씬 뛰어나다.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므로 더욱 주님과 가깝고 친밀하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들이 신적 진리(Divine truths)를 계속 그들의 생활 속에 직접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영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를 먼저 그들의 기억과 사고(thought) 속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천적 천사들은 신적 진리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어 진리를 직관하며, 진리를 마치 자기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본다. 그들은 진리가 옳은지 그른지 추론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이 바로 이들에 대한 말씀이다.

 

33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4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렘31:33-34)

 

이상, 저는 그 성향이 천적 나라, 천적 천사가 더 끌리고 좋습니다. 물론 제 착각일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굳이 가슴 신앙, 머리 신앙으로 이해하자면, 저는 가슴 신앙에 더 기울어지는 것 같은데요,

 

그래서입니다. 그래서 이런 모든 이유로, 저는 조용히 아내와 함께 집에서 주님을 거룩하게 예배하는 편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들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천적 나라로, 어떤 사람은 영적 나라로 올라가듯, 그렇게 누구는 이렇게, 또 누구는 저렇게 타고나는 것이며,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아멘,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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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설교 원고 및 유튜브 (성찬, 찬양 및 축도 포함)

2023-09-03(D1)-주일예배(2502, 눅12,41-48),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자'.pdf
0.44MB

https://youtu.be/PLo_BzTYy-g

 

 

원년(2013년) 창립예배 때 특송 : https://youtu.be/pYYoLdKLOK8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자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눅12:41-48)

 

 

사람이 복수와 증오, 간통, 간음, 사기, 속임수, 신성모독, 거짓말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한다면 그는 보다 중한 모독의 죄를 범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2장 47절에서 주님은 주인의 뜻을 알면서도 그 뜻에 따라 행하지 않는 종은 많은 매를 맞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Divine Providence 231:2) Thus if one acknowledges that revenge and hatred, adultery and fornication, fraud and deceit, blasphemy and lying are sins against God and yet commits them, he is therefore in the more grievous of this kind of profanation. For the Lord says: The servant who knows his lord’s will and does not do it, shall be beaten with many strokes (Luke 12:47).

 

 

※ 오늘은 우리 한결같은 교회가 지난 2013년 9월 1일 주일에 시작된 지 만 10년이 되는 주일입니다. 지난 한 주, 개인적으로는 지난 10년 치 일지를 대략 뒤적이며, 어떤 일이 있었고,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오셨는지를 살폈는데요,

 

아주 짧게 요약하면... 처음 얼마 동안은 좀 여러 다양한 세미나, 집회 및 프로그램들 같은 외적인 걸 기웃거리다가 서서히 내적인, 즉 영적인 것들, 곧 헤븐 교회 정원 목사를 비롯, 서사라 목사의 천국 체험 쪽으로 방향이 잡히더니 충주봉쇄수도원(강문호 원장) 수도학교를 통해 수도사와 수도원 세계에 들어가 다양한 수도사, 성인들을 접하면서, 동시에 시흥영성수련원(박희진 원장)의 핵심진리(공용복 선생) 및 책으로는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 등을 통해 수도원 목회 쪽으로, 그리고 이윽고 지금의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하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수년 전부터는 일반목회를 내려놓고 스베덴보리를 통해 계시하신 여러 저작들 번역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지요. 지난 십 년의 여정, 살짝 방황처럼 보이기도 했던 시간이 그러나 사실은 차근차근 스베덴보리를 만나게 하시려는 주님의 섭리였구나 싶고, 한 마디로, 기존 개신교, 기독교에서 벗어나 주님의 새로운 교회로 저를 초대하시는 과정들, 마치 한 마리의 아름다운 나비가 되기 위해 그 긴 유충과 번데기, 그리고 그 껍질을 찢고 나오는 몸부림의 과정들이 있었구나 싶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은 저런 순서로 흐르지 않았다면 절대로 스베덴보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니까 겉(external) 신앙에서 속(internal) 신앙으로 들어간 것이죠.

 

제가 스베덴보리 쪽으로 방향을 확정한 때가 2018년 12월인데요, 그래서 저는 오늘은 명목상의 십 주년이고, 제대로 된 십 주년은 2028년 12월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끝으로, 그러나 이 환골탈태의 과정, 곧 천국을 향한, 주님을 향한 내면의 창문이 열리기까지 저와 가족, 그리고 교회가 겪어야 했던 일들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거절과 세상 관계의 단절, 그리고 외면을 맛보았으며, 특히 우리 가족이 겪어야 했던 교리적 혼란과 흩어짐 등은 오직 주님만이 아시며, 그래서 더욱 주님이 이 모든 일을 기억하시고, 저희 사모와 자녀들에게 하늘의 상인 내면을 확 열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네, 그럼 이 정도로 나누고요, 오늘 말씀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매 순간 자기 스스로의 생각과 의지로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저, 창세기, 출애굽기 속뜻주석인 ‘Arcana Coelestia’ 5846번 글에서 5866번 글까지를 보면, 모든 사람에게는 보통 두 명의 천사 또는 지옥의 영들이 함께 있으며, 그러므로 사람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들은 그와 함께 있는 천사나 영들이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스스로 생각하고 의도하고 행동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모든 것은 천사, 또는 지옥의 영들이 불어넣는 생각과 의도에 따른 것이라는 겁니다. 인간이 그렇게 천사와 영들의 영향을 받는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천사와 영들을 보내 인간을 이끄시는 것은 자유의지를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의지를 지켜주시기 위한 것인데요, 왜냐하면 천국과 지옥의 힘이 인간에게 동등하게 미칠 때, 인간은 비로소 자유로운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내면으로 천사들을 통해서는 천국이 흘러들어오고, 지옥의 영들을 통해서는 지옥이 흘러들어와야 천국과 지옥이 균형을 이루게 되고 그때 사람은 어느 한쪽으로도 쏠리지 않고 자유롭게 천국 또는 지옥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자유의 상태에서 자신의 자아를 부정하고 주님을 선택하는 사람은 천사들의 인도를 받아 거듭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주님을 멀리하고 자아의 욕구를 따르는 사람은 지옥의 영들에게 사로잡히게 되고, 결국 그가 가지고 있던 진리와 선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지난주 말씀에서는 그러한 상태를 잠이 든 사이에 도둑이 들어 벽을 뚫는 것으로 비유했습니다. 도둑은 지옥의 영들을 뜻하고, 벽을 뚫는 것은 지옥의 영들이 진리의 울타리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깨어있으라고 당부하셨지요.

 

주님이 제자들에게 도둑이 들지 않도록 깨어있으라고 하시자 본문 41절에서 베드로가 주님께 묻습니다.

 

41 베드로가 여짜오되 주께서 이 비유를 우리에게 하심이니이까 모든 사람에게 하심이니이까

 

베드로는 어쩌면 스스로, 즉 혼자서 주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항상 깨어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와는 반대였습니다. 주님과 세상을 양손에 쥐고 저울질할 때가 많았고, 아주 작은 일을 하고도 보상받으려 했습니다. 자신의 허물은 보지 않고 다른 사람의 허물만을 봤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자신의 믿음에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 설마 제게 하신 말씀은 아니시지요’라는 뜻으로 주님께 물었고, 그러자 주님께서 그에게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베드로처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주님을 따른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장 참된 진리 안에 있다고 믿는 우리 같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라고 하십니다. 청지기는 어떤 사람입니까? 부잣집에 고용되어 주인 대신 재산이나 종들을 관리하고 또한 집안의 대소사를 맡아 처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영적 의미로 보면 주님의 나라 청지기는 바로 우리 신앙인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으로부터 천국의 재산인 선과 진리의 지식들을 맡아 잘 관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주신 선과 진리들을 삶에 적용하여 자신이 거듭나는 것은 물론 이웃에게 전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될 수 있을까요? 42절부터 43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2 주께서 이르시되 지혜 있고 진실한 청지기가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종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줄 자가 누구냐

43 주인이 이를 때에 그 종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은 복이 있으리로다

 

주님께서는 청지기의 가장 큰 일은 집안의 가족들에게 양식을 나누어주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집안의 가족들은 주님의 나라를 이루는 다양한 진리들을 뜻하고, 양식은 선을 뜻합니다. 따라서 청지기의 책무는 선을 가지고 진리들을 먹이는 일입니다. 선을 가지고 진리를 먹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진리를 가지고만 있지 말고 삶에 적용해 선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진리와 선의 결합이 일어나고 그 진리는 살아있는 진리가 됩니다. 본문에는 또 양식을 나누어 주되 때를 따라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이 말은 진리를 삶에 적용할 때는 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자선을 베풀면 안 됩니다. 때에 따라 우리가 베푸는 선이 상대에게 독이 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에 따라 침묵하는 것이 더 좋은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이 때를 따라 진리에 선을 먹이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이 그렇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진리에 선을 먹일 때 주님께서는 복이 있다 하시고,

 

44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주인이 그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고 하십니다. 진리를 삶으로 실천할 때, 주님은 천사들을 통해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진리를 보내주신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나쁜 청지기도 있는데요, 그들의 운명에 대해 45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45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46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는 벌에 처하리니

 

많은 신앙인이 자기가 오래도록 살 거라 생각하고 청지기의 책무를 소홀히 합니다. 내일 하면 되지 하며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이 더디 오리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남녀 종을 때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남자 종은 신앙인들이 가지고 있는 진리들을, 여자 종은 진리를 삶으로 옮기고자 하는 애정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남자 종을 때리는 것은 진리를 자기 입맛에 맞게 왜곡하는 것입니다. 진리를 왜곡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생각에 맞으면 진리로 받아들이고,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는 진리를 마음대로 해석하는 일입니다. 이런 것이 모두 진리를 왜곡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사람의 인체가 그렇듯 유기적으로 서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온전한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의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빼지 말라 하신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진리에 대한 이런 잘못된 행동들이 진리에 폭행을 가하는 것이며, 남자 종을 때리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자 종을 때리는 것은 진리에 대한 애정이 변질, 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한다 하면서 진리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이기적인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애정이 변하는 것이고, 여자 종을 때리는 것입니다. 진리를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진리와 선이 변질이 될 때, 신앙인들의 생명이 변합니다. 생명이 변한다는 것은 결국 의지가 변한다는 뜻입니다. 선하고 진실한 상태에서 악하고 거짓된 상태로 의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말씀에는 신앙인의 생명이 악하게 변하는 것을 청지기가 먹고 마시고 취하는 모습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주인이 들이닥쳐 그를 엄히 때리고 벌을 내린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사후에 영계에서 받을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청지기가 매를 맞는 것은 진리를 모독한 사람이 사후에 영계에서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과 진리의 지식을 모두 빼앗기는 것을 뜻하며, 그러므로 악과 거짓만 가지고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으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48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님은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죄를 크게 묻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알고 죄를 지은 사람들은 나중에 크게 벌을 받습니다. 진리를 아는 자의 책임이 그만큼 무겁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공부하면서 나는 과연 어떤 청지기인가 하는 자문을 하게 됩니다. 게으른 청지기는 아닌지, 또는 악한 청지기는 아닌지 하는 두려움 마음이 생겼습니다. 누구나 주님께로 불려가는 날이 아직 한참 남았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득 생각해 보니 그렇게 시간이 많이 남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오늘 말씀의 베드로처럼 주님을 가까이 모신다는 자부심만 있을 뿐 진실한 청지기의 삶을 외면한 적이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주인의 뜻을 알고도 그 뜻대로 행하지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바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새로운 교회에서는 청지기의 책무를 게을리하는 것, 진리를 알고도 진리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은 신성모독의 죄를 짓는 일이라고 가르칩니다. ‘Divine Providence’ 231번 글은 신성모독의 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째는 진리를 받아들이고도 진리에 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중한 죄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9장 41절에서 주님은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았다고 하더라도 바로 세상 유혹을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주님의 능력에 의지해 세상 유혹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신성모독은 진심으로 겸손하지 않은 자에게 해당되는 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두 번째는 말씀의 문자적 의미를 가지고 자신의 악과 거짓을 정당화하는 행동입니다.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짓으로 만드는 것이며, 그러므로 신성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말과 행동으로는 진리를 사랑하는 것 같이 하면서 내심으로는 전혀 진리를 믿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주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을 위선자라 하시고 심판 날에 캄캄한 바깥에 쫓겨나 이를 갈 것이라 하셨습니다.

 

네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의 신성은 부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을 하나님의 아들로만 믿고 하나님으로는 믿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 기도할 때도 그들은 주님께 기도하지 않고 아버지에게 기도합니다. 그런 사람들일수록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말씀의 문자적 의미가 주님의 인성에 해당된다면 문자적 의미 안의 영적 의미는 주님의 신성에 해당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말씀의 영적 의미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처음에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살다가 나중에 진리를 부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경우는 가장 큰 모독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그들이 진리를 부인하는 이유는 대개 주님보다는 세상의 영화를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3장 15절 이하에서는 신성을 모독하는 사람들에 대해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말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미지근한 신앙이 바로 신성을 모독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평생을 병과 싸웠던 병자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병자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했을 때 주님께서 직접 그의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병을 고친 다음 다시 죄를 짓는 것은 주님을 모독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 앞에 진심으로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평생을 짊어지고 온 각자의 고질병을 고쳐주시며 다시는 같은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해주십니다. 주님의 그런 은혜가 오늘 이 말씀에 귀 기울이시는 모든 성도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마10:22)

 

아멘

 

 

원본

2020-08-23(D1)

서울 새 교회 이순철 목사

 

설교

2023-09-03(D1)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Posted by bygracet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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