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332 심화

1.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길의 마지막인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신앙을 높이려 했는데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역설은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선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 따라서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처음에는 여전히 진리의 지식과 형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가 자기 목적을 잃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 참된지를 알고 믿는 것은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무엇을 믿는가 자체만을 신앙의 본질로 만들면, 진리는 점차 삶과의 연결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교리도 남아 있고 성경에 관한 지식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매우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삶의 선을 향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proprium은 그 진리를 자기 생각과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진리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치기보다, 자기 생각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해석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더 이상 자신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됩니다. 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지만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은 점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중요하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계속되면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지키려 했던 신앙 자체마저 변질됩니다.

 

이것은 진리가 선에서 생명을 받는다는 스베덴보리의 기본 질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의 지식이 아무리 정확해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만으로는 살아 있는 신앙을 이루지 못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2를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말씀으로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아는 것이 사는 것보다 앞설 수 있고, 교리적 확신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배운 진리가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과 자기 의를 지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이 경고는 더욱 중요합니다. AC에 관한 지식이 많아지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속뜻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신앙의 생명이 깊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고,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며,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AC.325부터 AC.332까지 이어 보면 그 흐름은 분명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이어 교리가 왜곡되고, 그 왜곡된 상태가 확장되어 여러 파생 교리를 낳고, 마지막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됩니다.

 

결국 라멕은 신앙을 버린 사람의 단순한 표상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높이고 신앙을 그 생명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AC.332의 가장 무거운 질문은 나는 신앙을 얼마나 강하게 붙들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심화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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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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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4:18)

 

AC.332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 역시 각각 이름들로 불렸으며, 마지막이 라멕(Lamech)인데,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8) The heresies that sprang from this one are also called by their names, in the last of which, called Lamech, there was nothing of faith remaining. (verse 18)

 

해설

AC.332는 앞의 AC.331에서 말한 이단의 확장이 계속되어 마침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31에서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된 이단, 곧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욱 확장된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18에는 에녹에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타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집안의 계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에서 여러 파생된 상태들이 생겨나며 점차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AC.332가 먼저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입니다. 처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였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가 한 번 일어나고 계속 유지되면 그것이 한 형태로만 머물지 않고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4낳고, 낳고, 낳았다는 계보의 언어는 속뜻에서 단순한 혈통의 계승만이 아니라 교리와 교회의 상태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영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특정 교단을 정죄하는 의미로 곧바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24부터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면서 생겨난 교리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말은 단순히 교파의 수가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의 영적 분리에서 여러 변형된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하나의 점진적인 변질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 자체를 없앤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려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아직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AC.330에서 가인이 를 받아 보존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했기 때문에 신앙 자체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고 해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승인된 것은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채 전개되면 그 상태 역시 점차 변질될 수 있습니다. AC.331의 에녹은 그 첫 확장이고, AC.332에서는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을 거쳐 라멕에 이릅니다. 각각의 이름은 앞의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32에서 가장 무거운 말이 나옵니다. ‘ 마지막이 라멕인데,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출발점은 신앙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정작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 계열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설입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앞세워 신앙을 지키려 했지만, 신앙을 그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의 성질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단지 어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진리가 되고, 신앙은 삶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되어 있다면 처음에는 여전히 신앙의 지식과 형식을 유지할 수 있어도, 그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을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32는 가인에서 파생되어 라멕에 이른 특정한 교리적 계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당시 인류 전체에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전체 흐름을 함께 보면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교회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과정이 계속 나타납니다.

 

이 점은 AC.330가인의 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가인 계열의 모든 후손이 반드시 끝까지 참된 신앙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과 결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그것을 계속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은 단순히 이단이 여러 이단으로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한 번 무너진 뒤 그 분리가 계속될 때 어떠한 영적 붕괴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이어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이 계속 확대되자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높였던 신앙 자체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창4의 계보 전체를 단순한 절망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한 계열의 성공이나 실패에 매이지 않습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서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의 말씀에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어떤 것들이 보존되고, 또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준비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AC.332는 우리에게 매우 엄중하면서도 단순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신앙을 많이 말하고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 신앙이 살아 있다고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 진리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결합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자신만을 높이기 시작하면, 끝에는 체어리티뿐 아니라 신앙 자체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이 라멕에 이른 가인 계열의 무거운 경고입니다.

 

심화

1. 분리된 신앙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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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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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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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있는가?

 

AC.332 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AC.332 심화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수 있는가? 가인 계열을 따라 읽다 보면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모습이 겹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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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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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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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심화

1. 4 에녹과 창5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4의 에녹은 가인의 아들이고, 5의 에녹은 야렛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이름은 같지만 스베덴보리가 두 에녹에게 부여하는 속뜻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4의 에녹은 AC.331에서 매우 간단하게 정의됩니다. ‘ 이단의 확장을 에녹이라 합니다. 여기서  이단은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창4의 에녹은 가인이라는 분리된 신앙의 교리적 상태가 더 전개되고 확장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에서 설명됩니다. 그곳에서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게 된 것들을 모아 교리적 지식으로 정리하고 보존한 상태와 에녹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을 단지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같은 상응이나 같은 교회적 상태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상응은 단순한 암호표가 아닙니다. ‘에녹이라는 이름은 언제나 하나의 ’, ‘성은 언제나 하나의 ’, ‘물은 언제나 하나의 이라고 기계적으로 대입하여 해독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어떤 인물과 사물과 장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것이 놓인 전체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앞뒤에서 설명되는 영적 상태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두 번 등장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상태를 뜻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이름이 다르다고 해서 전혀 관계없는 상태라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각각의 문맥에서 그 이름을 어떤 교회적 또는 영적 상태와 연결하는가입니다. 4의 에녹은 가인의 계열 안에서 읽어야 하고, 5의 에녹은 그 장에서 전개되는 태고교회의 계승과 퍼셉션의 변화라는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점은 창4와 창5의 계보를 읽는 방식에도 중요한 도움을 줍니다. 두 장을 단순히 하나의 시간표로 이어 붙여 누가 누구와 정확히 같은 시대에 살았는가를 재구성하는 데 초점을 두기보다, 각 계보가 어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를 보여 주는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설에서 중심은 생물학적 연대 계산이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창4와 창5의 두 계열이 역사적으로 정확히 어떻게 병행되었는지를 AC.331만으로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속뜻에서 서로 다른 교회적 계열과 상태를 읽을 수 있다는 것과, 각각의 세대가 시간적으로 정확히 일대일 대응하여 동시에 존재했다고 말하는 것은 서로 다른 주장입니다. 그러므로  계열이 같은 태고교회 시대의 서로 다른 흐름을 보여 준다는 큰 그림은 가능하지만, 그것을 세밀한 연대표처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두 에녹의 차이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4의 에녹은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확장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반면 창5의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으로 알려진 것들을 수집하여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나는 이미 일어난 분리가 더 전개되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보존하는 방향입니다.

 

그러므로 두 에녹에게 공통적으로 교리적인 과 연결되는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교리의 성격과 기능은 매우 다릅니다. 4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더욱 발전하는 쪽이고, 5에서는 퍼셉션으로 받은 것을 잃지 않도록 모아 보존하는 쪽입니다. 같은 이름이지만 서로 다른 교회적 상태를 표상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이 차이는 오늘 우리가 교리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도 의미 있는 통찰을 줍니다. 교리화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교리화하며 무엇을 위해 보존하는가입니다. 생명에서 분리된 진리를 체계화할 수도 있고, 반대로 주님께 받은 선과 진리를 다음 상태를 위해 충실하게 보존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교리가 있는가 없는가가 아니라 그 교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으며 어떤 쓰임을 위해 존재하는가입니다.

 

따라서 창4와 창5의 두 에녹은 오히려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하나는 분리가 굳어지고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 가는 퍼셉션의 지혜를 교리적으로 보존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말씀의 속뜻을 읽을 때 이름 자체보다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교리가 생명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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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led the name of the city after the name of his son, Enoch. (4:17)

 

AC.331

이단의 확장을 에녹(Enoch)이라 합니다. (17) The amplification of this heresy is calledEnoch.(verse 17)

 

해설

AC.331은 매우 짧은 한 문장이지만, 4의 계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글입니다. 4:17에는 가인이 그의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가인의 아들 에녹의 출생을 말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에녹을 앞에서 가인이라 한 이단이 더 확장된 상태로 봅니다. 그래서 AC.331은 단순히 에녹은 누구인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이후 어떻게 더 전개되는지를 보여 주는 첫 계보적 표지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이단은 앞의 AC.324-325에서 이미 설명된 것입니다. AC.324에서는 창4에서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곧 이단들을 다룬다고 했고, AC.325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이라 했습니다. 따라서 AC.331 이단의 확장은 새로운 종류의 이단이 갑자기 등장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상태가 더 진행되고 전개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점은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생물학적 족보로만 읽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이러한 낳음과 계승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어지는지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에녹을 낳았다는 말씀은 속뜻에서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적 상태로부터 또 하나의 발전된 상태가 생겨났다는 식으로 읽게 됩니다.

 

다만 확장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이단 단체가 사람을 많이 모으고 조직을 넓혔다는 뜻으로 곧바로 옮겨서는 안 됩니다. AC.331 자체는 그런 외적 조직 확대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교리적 상태의 전개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원리가 그대로 머물지 않고 더 펼쳐지고 형성되어 가는 과정이 에녹으로 불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의 흐름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25에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AC.327에서는 그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AC.329에서 결국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리고 AC.330에서는 그 결과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지만,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 자체는 보존되었습니다. 이제 AC.331에서는 그 보존된 신앙이 당시의 분리된 상태 그대로 여러 형태로 더 전개되는 과정이 시작됩니다.

 

이 점에서 보존승인을 다시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AC.330에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옳다고 인정된 것은 아닙니다. 신앙이 장차 체어리티를 다시 심는 통로가 되어야 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보존된 신앙은 곧바로 본래의 질서로 회복된 것이 아니라, 4의 이어지는 계보에서 여러 교리적 상태로 더 전개됩니다. 그 첫 번째가 에녹입니다.

 

따라서 AC.331에녹은 가인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시작이라기보다 가인 안에 있던 원리가 한 단계 더 확장된 상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것이 창4의 계보가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로 읽히는 이유입니다. 이후 등장하는 이름들도 각각 앞선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들을 나타내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에녹이라는 이름 자체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5에도 에녹이 등장하지만 그 에녹은 전혀 다른 문맥과 계열 안에서 설명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에녹 = 언제나 이것이라는 고정된 암호표를 적용하는 방식이 아닙니다. 같은 이름이라도 그것이 놓인 문맥과 계열, 그리고 그 이름이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1의 핵심은 단순합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는 그 자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더 확장되고 전개되었으며, 그 첫 상태를 에녹이라 합니다. 4의 계보는 이제부터 바로 그 분리된 신앙이 이후 어떤 교리적 형태들로 발전해 가는지를 추적하게 합니다.

 

이 짧은 한 문장은 오늘 우리의 신앙을 돌아볼 때에도 하나의 경고를 줍니다. 어떤 잘못된 분리는 작은 생각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그것이 계속 유지되면 점차 설명과 논리를 얻고 하나의 확고한 체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교리가 얼마나 잘 정리되어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교리가 여전히 선과 진리,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결합 안에 있는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심화

1. 4 에녹 5 에녹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 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331 심화1. 창4의 ‘에녹’과 창5의 ‘에녹’은 같은 의미인가? AC를 처음 읽는 분에게는 여기서 매우 자연스러운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창4에도 ‘에녹’이 나오고 창5에도 ‘에녹’이 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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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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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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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 가인의 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했고, 그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였으며, 마침내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 결과 교리는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났으며, 사람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 놓였습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께서는 그런 가인을 없애지 않으시고 오히려 보호하셨을까요?

 

AC.330은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이 보호받은 것은 그가 잘했기 때문도 아니고,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주님께 인정받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에 속한 것이 장차 인간의 거듭남에 다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보존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구별입니다. ‘가인의 를 단순히 살인자에게도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는 도덕적 교훈으로만 읽으면 AC.330이 말하는 더 깊은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물론 문자적 이야기에서는 보호라는 모습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나 속뜻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신앙의 보존입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이라 하더라도 신앙에 속한 것 자체가 완전히 사라져서는 안 되었습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바로 그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을까요? 여기에는 태고교회의 천적 상태와 이후 인간의 상태 사이의 변화가 배경에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 있었습니다. 사랑이 먼저였고 그 사랑 안에서 무엇이 참된지를 지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천적 상태가 상실되어 가면서 인간에게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받아들여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으로 인도되는 길이 필요하게 됩니다.

 

다만 AC.330 한 번호만으로 이 이후의 거듭남 질서 전체가 완성되어 설명되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직접 말하는 핵심은 체어리티가 이후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것이므로 신앙이 보존되었다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과 이후 영적 인간의 차이는 뒤의 AC에서 더욱 상세하게 전개됩니다. AC.330은 그 큰 전환을 미리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다는 말의 의미도 분명해집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보호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은 장차 체어리티로 이끄는 기능 때문에 보호받았습니다. 신앙의 목적이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진리는 선을 향하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해야 합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그 진리가 삶 안에서 선이 되고 체어리티로 살아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328 AC.330은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보다 높이려 한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결국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께서는 가인마저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신앙을 보존하여 장차 다시 체어리티와 결합될 길을 남겨 두십니다.

 

여기서 창3 마지막 장면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잘못된 상태에서 취하여 거룩한 것을 모독하지 않도록 생명나무의 길이 보호되었습니다. AC.330의 가인의 표와 동일한 상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두 장면 모두 인간의 타락 가운데서도 주님의 섭리가 구원의 길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간이 자신의 질서를 무너뜨려도 주님께서는 그 상태에 맞추어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길을 마련하십니다.

 

특히 아벨은 죽었지만 가인은 보존된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만 남으면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AC.330의 의미가 완전히 뒤집힙니다. 가인이 보존된 이유는 아벨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아벨에 해당하는 체어리티가 인간에게 심어질 길을 남겨 두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의 보존은 체어리티의 포기가 아니라 체어리티의 미래를 위한 보존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우리가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연구하며 진리를 정확하게 이해하려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신앙과 지식의 목적은 결국 삶입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진리를 통하여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며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향하지 않는다면 신앙이 보존된 본래의 목적을 잃게 됩니다.

 

특히 아르카나를 공부하는 우리에게 가인의 는 의미심장한 경고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교리를 정확하게 배우는 일은 귀하지만, 그 지식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보존하시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까닭은 그 진리를 통하여 우리의 의지와 삶이 변화되고 체어리티가 우리 안에 심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AC.325부터 AC.330까지를 하나로 읽으면 창4의 흐름이 매우 선명해집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이어 교리가 왜곡되고 거짓과 악이 생겨나며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가인의 를 두십니다.

 

인간은 하나였던 것을 갈라놓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것 가운데서도 다시 생명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을 보존하십니다. 이것이 가인의 표에 담긴 섭리입니다. 신앙은 신앙 자체를 위해 보존된 것이 아니라, 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 안에 심어지도록 하기 위해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AC.330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인간의 타락보다 한 걸음 앞서 구원의 길을 남겨 두시는 주님의 섭리가 놓여 있습니다.

 

 

 

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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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art thou cursed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12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When thou tillest the ground, it shall not henceforth yield unto thee its strength; a fugitive and a wanderer shalt thou be in the earth.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ay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and from thy faces shall I be hid, and I shall be a fugitive and a wanderer in the ear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one that findeth me shall slay me.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And Jehovah said unto him, Therefore whosoever slayeth Cain, vengeance shall be taken on him sevenfold. And Jehovah set a mark upon Cain, lest any finding him should smite him. 16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 And Cain went out from the faces of Jehovah, and dwelt in the land of Nod, toward the east of Eden. (4:10-16)

 

AC.330

핏소리(voice of bloods) 소멸된 체어리티를(10),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curse from the ground) 왜곡된 교리를(11),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 거기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을(12) 각각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였습니다. (13-14)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것이었으므로,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으며, 이것이 가인에게 표를 주신 (mark set upon Cain)으로 의미됩니다. (15)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주한 (Cain dwelling toward the east of Eden) 신앙이 이전의 위치에서 옮겨진 것을 나타냅니다. (16) Charity extinguished is called thevoice of bloods.(verse 10); perverted doctrine, thecurse from the ground.(verse 11); the falsity and evil originating thence, thefugitive and wanderer in the earth.(verse 12) And as they had averted themselves from the Lord, they were in danger of eternal death. (verses 1314) But as it was through faith that charity would afterwards be implanted, faith was made inviolable, and this is signified by themark set upon Cain.(verse 15) And its removal from its former position is denoted byCain dwelling toward the east of Eden.(verse 16)

 

해설

AC.330은 창4:10-16 전체의 속뜻을 한꺼번에 압축하여 보여 주는 중요한 개요입니다. 앞의 AC.325-329에서 사랑과 신앙의 분리로 시작된 과정은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 곧 체어리티의 소멸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AC.330은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소멸된 체어리티는 핏소리, 왜곡된 교리는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거기에서 비롯된 거짓과 악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끝까지 진행되면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켜 영원한 죽음의 위험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가장 어두운 지점에서 뜻밖의 반전이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을 완전히 없애지 않으시고 그에게 를 주어 신앙을 보존하십니다. 훗날 체어리티가 바로 그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핏소리는 소멸된 체어리티를 의미합니다. 4:10의 개역개정은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번역하지만, 스베덴보리는 원문의 복수형을 살려 voice of bloods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핵심은 피라는 물질 자체가 아니라 앞의 AC.329에서 아벨의 죽음으로 표상된 체어리티의 소멸입니다. 따라서 핏소리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회적 상태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어지는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는 왜곡된 교리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가 소멸된 뒤에도 신앙과 교리에 속한 것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진리가 선과의 결합을 잃으면 교리 역시 본래의 질서를 잃고 왜곡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가인의 길은 단순히 체어리티 없는 신앙이라는 정지된 상태에 머물지 않습니다. 분리가 계속되면서 교리가 왜곡되는 단계로 나아갑니다.

 

그 결과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로 묘사되는 거짓과 악입니다. AC.330은 이 거짓과 악이 왜곡된 교리에서 비롯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 있을 때 삶의 방향을 제시하지만, 교리가 왜곡되면 생각과 삶 역시 그 왜곡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피하며 유리하는 라는 표현은 단순히 가인이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게 되었다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 왜곡된 교리에서 생겨나는 거짓과 악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 상태는 더욱 심각한 결과로 이어집니다. AC.330그들은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기 때문에 영원한 죽음에 처할 위험에 놓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그들에게서 돌아서셨다고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주님에게서 자신을 돌이켰다고 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선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죽음의 위험은 주님께서 사람을 버리시는 변덕스러운 심판이라기보다 사람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향으로 스스로 나아간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AC.330의 놀라운 반전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생각하면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 역시 사라지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되었고,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였으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를 주십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매우 분명하게 밝힙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은 AC.330 전체의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가인이 보호받은 것은 가인의 상태가 옳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승인되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장차 체어리티가 다시 인간에게 심어질 때 신앙이 그 통로로 사용되어야 했기 때문에,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는 분리된 신앙에 대한 승인의 표가 아니라 미래의 구원을 위하여 신앙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나타냅니다.

 

이 점은 앞의 AC.328과 연결하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세워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지만 않는다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문제는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질서가 뒤집힌 것이었습니다. 이제 인간 편에서는 아벨을 죽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지만, 주님께서는 신앙마저 소멸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장차 그것을 통하여 다시 체어리티가 심어질 길을 남겨 두십니다.

 

여기에는 태고교회 이후의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도 들어 있습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으로부터 진리를 지각하는 질서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상실되어 감에 따라 이후에는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길이 중요해집니다. AC.330은 아직 그 전체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지는 않지만,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이라는 말로 그 이후의 질서를 미리 보여 줍니다.

 

따라서 신앙은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되었다는 말을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높은 지위를 얻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신앙이 보존된 이유는 신앙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가 보존되는 이유는 선으로 이끌기 위해서이고, 신앙이 보존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하여 인간이 다시 체어리티의 삶으로 인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가인이 에덴 동쪽에 거주하였다는 것은 신앙이 이전의 위치에서 옮겨진 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도 AC.330이 직접 말하는 범위를 먼저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신앙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이제 이전과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래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에서는 신앙이 사랑 안에 있었고 사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의 분리 이후에는 그 이전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보존되지만 그 위치와 기능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이렇게 AC.330을 전체적으로 보면 두 흐름이 동시에 나타납니다. 인간 편에서는 체어리티의 소멸 교리의 왜곡 거짓과 주님에게서 돌아섬 영원한 죽음의 위험이라는 하강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섭리 편에서는 바로 그 무너진 상태 속에서도 장차 다시 체어리티에 이를 수 있도록 신앙을 보존하시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갈라놓았지만, 주님께서는 그 갈라진 신앙마저 미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AC.330은 단순한 심판의 개요가 아닙니다. 인간의 타락이 얼마나 깊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면서 동시에 그 타락보다 더 깊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아벨은 죽었지만 가인은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체어리티 없는 신앙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언젠가 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심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가인의 가 가진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심화

1. 주님께서는 가인 보호하셨는가?

 

AC.330 심화 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 심화1. 주님께서는 왜 ‘가인’을 보호하셨는가? AC.330에서 가장 깊이 생각해 볼 부분은 역시 ‘가인의 표’입니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면 가인은 부정적인 것의 연속입니다. 사랑에서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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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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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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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9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의 속뜻을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의 교회 안에서도 아벨의 죽음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과 교회를 살피는 질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회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으로 여겨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랑과 봉사와 구제를 강조하면서도 그것들을 교회의 중심적인 영적 생명과는 별개의 부수적인 활동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입술로 체어리티를 말하는 것과 신앙이 실제로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리가 너무 많아서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교리는 필요합니다. 진리가 없으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 분별하기 어렵고, 사람은 자기 욕망을 사랑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진리를 배우고 가르치는 것은 교회의 중요한 쓰임입니다. 문제는 교리가 선과 삶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가 목적이 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교회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에는 큰 관심을 기울이면서  진리에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리적으로 정확한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거의 전부처럼 여겨지고,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삶은 신앙의 결과 가운데 하나 정도로만 취급될 수 있습니다. 이런 질서가 굳어질수록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거리는 멀어집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면서 진리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도 올바른 해결은 아닙니다. ‘사랑만 있으면 무엇을 믿든 상관없다고 한다면 선과 진리의 또 다른 분리가 일어납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필요로 합니다. 진리는 누구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무엇이 이웃의 참된 유익인지, 어떤 악을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가인을 없애고 아벨만 남기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하나를 이루게 하는 데 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교회 공동체의 관계에서도 나타날 수 있습니다. 교리적 차이를 다룰 때 상대방을 한 사람의 이웃으로 보는 일을 잃어버리고, 논쟁에서 이기는 것이 더 중요해질 수 있습니다. 진리를 지키겠다는 명분 아래 상대방을 모욕하거나 정죄하고, 그의 말을 공정하게 들으려 하지 않으며,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는 데만 몰두한다면 우리가 붙들고 있는 진리가 어떤 사랑과 결합되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교리적 비판이나 분별을 체어리티의 결핍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거짓을 거짓이라고 말하고 해로운 가르침을 경계하는 것은 때로 이웃을 향한 참된 사랑에서 나올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는 무조건적인 동의나 무분별한 관용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와 함께 어떤 사랑에서 그것을 말하는가?입니다. 진리를 말하면서도 상대방의 참된 유익을 구할 수 있고, 오류를 지적하면서도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주님께 남겨 둘 수 있습니다.

 

아벨의 죽음은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교리를 깊이 공부하며 신앙에 대한 확신도 강해지는데, 이상하게도 가족에게는 더 거칠어지고 다른 사람의 허물에는 더 예민해지며 자신의 잘못은 점점 보이지 않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문제는 진리를 너무 많이 배웠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배운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조심해야 할 위험이 있습니다.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알게 되면서 자신이 문자적 의미만 아는 사람보다 영적으로 더 높은 곳에 있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많이 아는 것과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국적인 삶을 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이 많아질수록 오히려 자신의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께 의지하며 이웃에게 더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아벨이 살아 있는지를 살피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교회가 얼마나 사랑을 많이 말하는가?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진리가 실제로 사람의 삶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운 사람이 악을 더 분명히 보고 피하려 하는가, 자기 맡은 일을 더욱 정직하고 충실하게 감당하는가, 약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가, 이웃의 참된 유익을 위해 실제 쓰임을 행하는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내면을 최종적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외적인 행동만으로 한 사람의 지배적인 사랑을 완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아벨을 죽였다’, ‘ 사람에게는 체어리티가 없다고 쉽게 선언하는 것은 이 심화의 목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아벨이 죽어 가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는 희망도 있습니다. 4의 이야기는 아벨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갔지만, 주님의 섭리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후 가인의 상태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마침내 셋과 에노스를 통하여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일으켜 세워지는지를 보게 됩니다. 인간이 질서를 무너뜨려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따라서 오늘 교회에서 아벨을 살린다는 것은 단순히 사랑과 봉사 프로그램을 더 많이 만드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 진리와 선, 교리와 삶을 다시 결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진리가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이웃을 향한 지혜로운 사랑과 실제 쓰임 안에서 생명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AC.329의 짧은 한 문장은 그래서 교회에 매우 무거운 질문을 남깁니다. ‘우리에게 가인은 살아 있는데 아벨은 죽어 있지 않은가? 교리와 신앙 고백과 예배의 외형은 풍성한데 체어리티가 그 신앙의 생명으로 살아 있지 않다면 우리는 이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목적은 우리를 정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진리 안에서 우리 자신의 상태를 살피고,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형제로 함께 있도록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AC.329, 창4:8-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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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talked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4:8-9)

 

AC.329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으로 묘사됩니다. (8) That charity was extinguished in those who separated faith, and set it before charity, is described by Cain slaying his brother Abel. (verses 89)

 

해설

AC.329는 매우 짧지만 창4의 속뜻에서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입니다.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인 것으로 묘사됩니다.이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무엇을 나타내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단지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살해한 사건의 속뜻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태고교회 안에서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 교회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결과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AC.325부터 하나의 과정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었습니다. AC.326에서는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 체어리티에서 비롯된 예배와 분리된 신앙에서 비롯된 예배가 서로 달라졌습니다. AC.327에서는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졌습니다. 그리고 AC.328에서는 그럼에도 체어리티가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어 체어리티보다 높임을 받으려 했고, 이제 AC.329에서 그 과정이 끝까지 진행되어 체어리티 자체가 소멸됩니다.

 

따라서 아벨의 죽음은 사랑과 신앙 사이의 단순한 의견 차이나 긴장이 아닙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결합을 거부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자기 신앙의 본질적인 요소로 인정하지 않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속뜻입니다. 아벨이라는 사람이 체어리티를 표상하기 때문에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된 것을 나타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가인이 단순히 신앙 자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신앙 자체가 체어리티를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AC.325에서부터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나타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원하며, 진리는 선과 결합하기를 원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된 뒤 자신을 독립적인 것으로 세우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주된 것으로 만들려는 데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328AC.329의 연결은 매우 중요합니다. AC.328에서는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아벨은 가인을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고 마침내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게 되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따라서 문제의 핵심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결합과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소멸되었다는 표현도 주의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세상에서 체어리티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거나 주님께서 더 이상 체어리티를 주실 수 없게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29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 표상되는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한 문장을 당시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시대의 모든 인간에게 체어리티가 사라졌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이후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만일 이 시점에서 세상의 모든 선과 체어리티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면 이후 새로운 교회가 일으켜 세워지는 과정이나 셋과 에노스의 계열을 이해하기 어려워집니다. 4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특정한 교회적 계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 주며, 동시에 주님께서는 인간에게서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오늘의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할 때에도 같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아벨을 죽인다는 것을 특정 교파나 특정 사람에게 붙여 사람에게는 체어리티가 없다고 판정하는 말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먼저 우리 자신의 신앙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으로 읽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믿는 것을 실제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올바른 교리를 고백한다는 사실 때문에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를 돌아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반드시 사람이 모든 선행을 즉시 중단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외적으로는 종교적 활동과 도덕적인 행동이 계속될 수도 있습니다. 가인도 이미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교리가 삶의 선과 분리되고,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적인 생명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면 외적인 종교성은 남아 있으면서도 내적인 질서는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의 심각성입니다.

 

특히 말씀과 교리를 깊이 공부하는 사람에게 AC.329는 무거운 경고가 됩니다. 진리를 많이 아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 지식이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끌지 않고 오히려 자기 지성을 높이며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수단이 된다면 진리의 목적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목적 역시 속뜻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보고 피하며, 주님께 받은 선을 실제 삶에서 행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AC.329의 한 문장은 창4 전체에서 매우 무겁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결말처럼 갑자기 등장하지 않습니다. ‘구별분리가 되고,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인 끝에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되는 긴 과정의 결과입니다.

 

이제 창4의 문제는 새로운 단계로 들어갑니다. 아벨은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체어리티가 소멸된 신앙은 어떻게 되는가, 주님께서는 그러한 신앙을 완전히 없애시는가, 아니면 그 안에 아직 보존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는가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가인은 심판을 받고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지만, 동시에 그에게 가 주어집니다. 따라서 AC.329의 체어리티 소멸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주님의 섭리가 그처럼 무너진 상태를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살펴보게 하는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합니다.

 

심화

1. 아벨의 죽음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 심화 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AC.329 심화1. ‘아벨의 죽음’은 교회 안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니라.’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의 속뜻을 ‘체어리티가 소멸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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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0, 창4:10-16, 창4:10-16 전체의 속뜻

10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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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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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베덴보리의 렌즈(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는 사람을 심판하기보다 그의 말과 삶에서 선과 진리, 악과 거짓을 분별하고자 합니다. 오류 때문에 그 안의 진리까지 버리지 않고, 진리 때문에 오류까지 정당화하지 않으며, 사람의 최종적인 내면에 대한 판단은 오직 주님께 남겨 둡니다.

 

 

 

 

이 원고를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읽으면, 상당히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습니다. 겉으로는 ‘이단 침투 사건’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더 깊이 들어가면 핵심은 단순히 ‘어느 교리가 옳고 어느 교리가 틀렸는가’만이 아닙니다. 사람의 외로움과 상처를 이용하여 관계를 만들고, 그 관계를 통해 신뢰를 장악한 다음, 기존의 영적 판단 기준을 서서히 무너뜨리고, 마침내 특정 집단과 특정 가르침에 사람을 종속시키는 과정이 이 원고 전체를 관통합니다. 스베덴보리라면 바로 이 지점을 매우 심각하게 보았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신학에서 인간의 영적 생명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두 능력 가운데 하나가 ‘자유’이고 다른 하나가 rational, 곧 진리를 이해하고 분별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고 속 침투 방식은 사람을 노골적으로 강제하지 않으면서도, 정서적 의존과 ‘우리만 아는 특별한 진리’를 통해 그 두 능력을 점차 약화시키고 있습니다.

 

처음 등장하는 ‘더 깊은 말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라는 표현부터 스베덴보리의 렌즈에서는 아주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 자신이야말로 성경의 문자적 의미 안에 ‘속뜻’이 있으며, 그 안에 무수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말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단순히 ‘더 깊은 말씀이 있다’는 말 자체를 이단의 표지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목사 입장에서 그 말을 들었다면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입니까?’, ‘어디에서 배우셨습니까?’, ‘그 깊다는 말씀의 내용은 무엇입니까?’라고 차분히 물어보는 것이 맞았을 것입니다. 원고의 목사도 나중에 바로 그 질문을 하지 않은 것을 첫 번째 실수라고 회고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속뜻’과 이 원고에서 말하는 ‘더 깊은 말씀’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의 속뜻은 사람을 어떤 인간 지도자나 비밀 조직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주님과 그분의 나라, 거듭남, 사랑과 체어리티의 질서로 데려갑니다. 반면 원고 속 가르침은 ‘기존 교회의 목사는 진리를 다 알지 못한다’, ‘더 깊은 말씀을 아는 특별한 사람을 통해야 한다’, ‘우리 모임에만 구원의 완전함이 있다’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바로 여기서 성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진리의 깊이가 사람을 주님께 더 직접적으로 의지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 집단과 지도자에게 더 종속시킨다면,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이미 매우 중대한 경고 신호입니다.

 

특히 원고 속 ‘박순자 씨’가 하는 일은 처음에는 모두 체어리티처럼 보입니다. 비 오는 날 예배에 참석하고, 한 시간을 걸어 새벽기도에 나오고, 화장실을 청소하고, 식사를 대접하고, 혼자 사는 권사에게 음식을 가져다주고, 사람의 고민을 끝까지 들어줍니다. 겉으로만 보면 선행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행위의 영적 성질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를 낳는 사랑과 목적에서 결정됩니다. 똑같이 음식을 가져다주어도 상대의 행복을 위해서 할 수 있고, 상대의 마음을 확보하기 위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이 눈물을 닦아주어도 진정한 체어리티일 수 있고, 상대의 신뢰를 얻기 위한 수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례는 스베덴보리가 왜 그렇게 끊임없이 ‘의도’, ‘목적’, ‘지배적 사랑’을 강조하는지를 아주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원고의 ‘가장 따뜻한 얼굴로, 가장 부지런한 손으로, 가장 낮은 자세로 온다’는 표현은 다소 극적으로 쓰였지만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영적 악은 항상 노골적인 악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악한 영들도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진리를 말할 수 있고, 선한 것처럼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입니다.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가, 아니면 지배하는가. 주님께 가까이 가게 하는가, 아니면 인간에게 종속시키는가. 선과 진리를 사랑하게 하는가, 아니면 자기 집단만 옳다고 믿게 하는가. 이 기준을 적용하면 원고 속 행동들의 성격이 점차 달리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저는 ‘스베덴보리라면 처음부터 저 사람을 알아봤을까?’라는 식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의 원리를 따르는 목회라면 어느 지점에서 무엇을 확인했을까?’라고 묻는 편이 좋다고 봅니다. 첫 번째 확인점은 바로 ‘더 깊은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도들과 목회자에게 알리지 않은 별도의 성경공부입니다. 세 번째는 교재를 공개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네 번째는 ‘목사도 모르는 진리가 있다’는 우월의식이 성도들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는 공동체 안의 인간관계가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교제에서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관계로 변하는 것입니다. 원고에는 이 신호들이 상당히 일찍부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비밀성’입니다. 천국의 질서는 빛의 질서입니다. 진리는 빛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이것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다’, ‘목사에게는 말하지 말라’,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알려 주면 안 된다’는 식으로 점점 폐쇄적인 구조를 만든다면 그 자체가 이미 의심해 볼 이유가 됩니다. 물론 모든 개인적 성경공부가 공개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공동체 안에서 사람을 은밀하게 선별하고, 지도자에게는 내용을 감추고, 구성원들에게 ‘너희는 이제 남들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특별의식을 심는다면 그것은 자유로운 진리 탐구와는 완전히 다른 구조입니다.

 

원고에서 목사가 교육관의 비밀 모임을 보고도 바로 들어가지 않고 돌아서는 장면은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는 ‘들어가면 감시하는 목사가 될 것 같다’, ‘더 큰 갈등을 만들 것 같다’고 염려합니다. 인간적으로 이해되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면 사랑은 반드시 지혜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이미 교회 시설에서, 목회자에게 알리지 않은 채, 정체를 감춘 교재로 조직적인 교육이 진행되고 있다는 상당한 근거가 확보되었다면 그 시점에는 단순한 관망보다 질서 있는 개입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자유를 존중한다는 것은 거짓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도록 방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들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자유롭게 판단하도록 사실을 제공하는 것이 자유를 보호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목사님의 질문에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답은 이렇습니다. 아마도 ‘사람을 몰아붙이지는 않았겠지만, 거짓은 아주 명확하게 밝혔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저작에서 기존 교회의 잘못이라고 판단한 교리들을 상당히 직설적으로 비판합니다. 삼위일체 이해, 오직 신앙, 대속 개념, 인간의 자유와 행위 등에 대해서 그는 결코 ‘다 좋게 생각합시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를 ‘교리적 차이는 따지지 않고 사람을 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사람에 대해서는 체어리티를 강조하지만, 거짓된 교리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합니다.

 

다만 ‘사람’과 ‘그 사람이 받아들인 거짓’을 구별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원고에서는 처음 돌아온 성도에게 목사가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속은 것입니다. 그 둘은 다릅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대목이 이번 원고에서 가장 좋은 부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도 사람이 거짓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그 사람 자체를 곧바로 악한 사람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거짓은 무지 때문에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신뢰하던 사람에게 속아서 받아들이며, 어떤 것은 상처와 외로움 때문에 붙잡습니다. 특히 사람이 진심으로 선을 원하면서도 거짓을 진리라고 믿은 경우에는 주님께서 그 거짓을 바로잡아 주실 여지가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이미 마음이 기운 성도들을 공개석상에서 논리로 꺾으려 하지 않은 것도 일면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원고의 목사는 ‘마음이 이미 기울어진 사람에게 논리는 닿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을 절대적인 명제로 만들 필요는 없지만, 심리적 현실은 상당히 정확합니다. 사람의 이해성, 그러니까 이해하는 능력은 의지와 애정의 영향을 받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말하면 사람이 어떤 것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이해성은 그 사랑을 지지하는 이유들을 찾기 쉽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는 열 가지 논박보다 관계를 끊지 않고, 돌아올 문을 열어두며, 시간이 지나 실제 열매를 경험하도록 기다리는 것이 더 지혜로울 수도 있습니다.

 

김복순 권사에게 ‘언제든 돌아오고 싶으실 때 문은 열려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억지로 붙잡지 않은 장면도 이 점에서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라면 사람의 자유를 억압하여 진리를 받아들이게 할 수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진리라도 강제로 받아들인 것은 사람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목회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을 보여 주고, 거짓의 구조를 설명하고, 선택의 결과를 알려 주고,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는 그 사람이 자유 안에서 선택하도록 두어야 합니다. 이것이 냉정한 방임과 다른 것은, 떠난 뒤에도 사랑의 문이 닫히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고 원고처럼 성도들이 떠난 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만 할 필요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스베덴보리식으로 본다면 ‘논쟁’보다 ‘교육’이 중요합니다. 특정 집단의 교리를 항목별로 공격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왜 사람은 ‘우리만 아는 진리’에 매혹되는지, 왜 비밀지식이 영적 우월감을 주는지, 왜 외로운 사람에게 친절이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는지, 말씀의 속뜻과 인간이 만들어 낸 비밀 교리를 어떻게 구별하는지, 참된 자유와 종교적 지배는 어떻게 다른지를 평소에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단 예방 교육 자체가 단순한 ‘이단 목록 암기’가 아니라 영적 분별 훈련이 됩니다.

 

그리고 이 원고에는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보았을 때 반드시 한 번 걸러야 할 대목도 있습니다. 발견된 자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신 다른 무언가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는 것을 이단 판별의 결정적 기준처럼 묘사합니다. 일반 복음주의적 관점에서는 이해되는 표현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신학에서는 이것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인간의 죄값을 대신 갚기 위해 아들을 형벌하셨다’는 식의 대속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라면 ‘십자가를 중심에 두느냐’ 하나로 참과 거짓을 판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더 근본적으로 물었을 것은 ‘주님을 누구라고 하는가’, ‘그분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말씀을 어떻게 대하는가’, ‘회개와 거듭남을 어떻게 말하는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는가’, ‘선한 삶이 실제로 요구되는가’,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는가’, ‘한 인간이나 조직을 구원의 필수 중개자로 세우는가’ 같은 질문들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 기준으로 보면 원고 속 집단의 문제는 훨씬 더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기존 교회와 해석이 다르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자유로운 양심과 분별을 약화시키고 특정 집단에 구원을 독점시키며, 인간관계를 도구로 사용한다는 데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이단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입니다. 원고의 후반에서 떠났던 성도가 2년 뒤 돌아와 삶이 무너졌다고 고백할 때 목사가 따지지 않고 기다려 주고, ‘왜 내 말을 안 들었습니까?’라고 하지 않고, 다시 올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은 상당히 좋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체어리티는 바로 이런 데서 빛을 발합니다. 진리를 지킬 때에는 단호하지만, 사람이 돌아올 때에는 그 사람의 과거 오류를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재료로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옳았고 당신이 틀렸다’가 아니라 ‘이제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다만 회복도 단순히 ‘다시 우리 교회로 돌아왔다’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이라면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게 되었느냐입니다. 이전 집단을 미워하고 원래 교회를 다시 좋아하게 되었다고 해서 자동으로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그 경험을 통해 거짓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됨 자체를 미워하고, 사람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경계하며, 말씀의 진리를 자유롭게 배우고,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돌아오는 것이 진정한 회복입니다. ‘이단 탈퇴’는 출발점이지 거듭남의 완성은 아닙니다.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스베덴보리라면 저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에 대해 한 문장으로 압축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거짓을 사랑의 이름으로 방치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진리의 이름으로 사람의 자유를 짓밟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거짓은 밝히고, 침투 행위는 중단시키고, 교회의 질서는 보호하되, 이미 넘어간 사람에게는 돌아올 자유를 남겨두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도들이 목사를 맹목적으로 믿도록 하는 대신, 왜 그것이 거짓인지 말씀과 이성으로 스스로 볼 수 있도록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원고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을 ‘이단을 경계하자’에서 한 걸음 더 깊이 가져가고 싶습니다. 교회가 가장 안전한 때는 성도들이 목사를 무조건 믿을 때가 아닙니다. 성도 각자가 진리를 사랑하고, 말씀 앞에서 생각하며, 선과 악을 분별하고, 사람의 친절과 영적 진리를 혼동하지 않을 때입니다. 목회자의 임무도 성도들을 자기 울타리 안에 단단히 붙잡아 두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와서 아무리 따뜻하게 손을 잡고 ‘더 깊은 진리’를 말하더라도 스스로 그 열매와 방향을 살펴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세우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이 이야기는 앞서 우리가 이야기했던 rational과도 연결됩니다. 정상적인 능력을 가진 성도에게 목회자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호는 모든 답을 대신 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분별할 수 있는 내적 기반’을 길러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자유와 이해성을 보호하면서, 그것이 거짓에 이용되지 않도록 진리로 형성하는 것, 저는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렌즈’로 본 이 사건의 가장 깊은 목회적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SY.67, 이동엽 목사, ‘전광훈 목사 발끝 만이라도 본받으시라 하시는데...’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이 영상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동엽 목사가 자신을 ‘교회지기’라고 부르며 목회자를 ‘등대지기’에 비유하는 대목입니다. 화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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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63, 심령부흥대사경회(79차) 10강 (7/31), 시흥영성수련원

※ ‘SY’ : ‘YouTube Through the Lens of Swedenborg’※ 여기 1강, 2강...은 실제 사경회 일정표가 아닌, 유튜브에 올라온 강의 순서를 말합니다. 10강 1부‘좁은 길’에서 계시록 13, 14장까지 : 종말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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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8 심화

1. 신앙의 질은 체어리티로부터 알 수 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 신앙을 돌아보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의 신앙을 그의 신앙 고백이나 성경 지식, 교리적 입장, 기도와 예배의 열심으로 판단합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AC.328은 그보다 더 깊은 곳을 보라고 합니다. 그 신앙이 그 사람을 어떤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신앙이 실제로 사람을 겸손하게 하고, 악을 멀리하게 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용서하고 섬기게 한다면 그 신앙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을 강하게 주장할수록 더 교만해지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며, 자기의 옳음을 세우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바로 그 열매가 그 신앙의 질을 드러냅니다.

 

이것은 ‘행위를 보고 구원 여부를 판단하자’는 단순한 도덕주의와도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체어리티는 겉으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체어리티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고, 그 선에 따라 이웃에게 유익을 행하려는 내적 애정입니다. 따라서 겉으로 많은 선행을 하면서도 속으로 자기 명예와 공로를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체어리티가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눈에 띄는 큰일을 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의무를 행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이웃의 유익을 진실하게 바란다면 그 안에 체어리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체어리티가 신앙의 내적 질을 보여 줍니다.

 

특히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을 처음 접하면 자칫 ‘신앙보다 체어리티가 중요하니 결국 신앙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아닌가?’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28은 정반대를 말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오직 신앙이 ‘주된 것’이 되어 자신을 체어리티 위에 세우는 데 있습니다. 참된 질서는 신앙 없는 체어리티도,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아니라 둘의 결합입니다. 다만 그 결합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선이 주된 것이고, 진리는 그 선을 섬기며, 사랑이 생명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 형체와 방향을 줍니다.

 

따라서 AC.325에서 시작된 흐름을 여기까지 이어 보면 매우 선명합니다. 처음 태고교회에서는 사랑을 통하여 주님을 신앙하였고, 그 사랑과 신앙은 하나였습니다. 그 후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가인’이 되었고, 체어리티는 ‘아벨’이라 불렸습니다. 분리는 예배에까지 이어졌고, 가인의 상태는 점차 악해졌습니다. 그러나 AC.328에 이르러 주님께서는 아직 한 번 더 길을 열어 놓으십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자기 자리를 낮추고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한다면 아직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끝내 자신을 주된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한다면, 다음에 일어날 일은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4의 비극은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해서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본래 하나여야 할 둘 사이의 질서가 뒤집힘으로써 일어난 비극입니다.

 

 

 

AC.328, 창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art thou not exalted? And if thou doest not well,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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