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12.심화
1.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 구체적인 삶의 예들
AC.12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표현들이 나옵니다.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고 하고, 이어서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고 합니다. 또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태는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AC.12는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 같은 구체적인 사례를 직접 제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래의 예들은 ‘스베덴보리가 AC.12에서 바로 이런 경우를 뜻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AC.12가 말하는 상태를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해해 보기 위한 예들입니다.
먼저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한다’는 표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씀을 통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고 합시다. 그것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자기 곁의 사람이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는 무관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 경우 진리를 아는 것과 그 진리에서 선을 행하는 것 사이에는 아직 거리가 있습니다.
반대로 그 사람이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보고 실제로 도와준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가 단지 순간적인 기분이나 사람들의 칭찬 때문에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려 한다면 AC.12의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하나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진리가 말에만 머물지 않고 실제 선한 행위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정직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거짓말을 하면 훨씬 유리한 상황이 찾아왔습니다. 그때 손해를 감수하면서도 거짓을 피하고 정직하게 행동한다면, 단지 정직이라는 원칙을 알고 있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입니다. 자기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을 실제 삶에서도 따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이런 행동을 했으니 이 사람은 AC.12의 여섯 번째 상태에 있다’고 판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의 내적 상태는 외적인 행동 하나만 보고 판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예를 드는 목적은 다른 사람의 거듭남 단계를 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서 사랑으로 선을 행한다’는 표현이 실제 삶과 무관한 추상적인 말이 아님을 이해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이것 역시 신앙과 사랑을 두 개의 독립된 기능처럼 기계적으로 나누기보다, 사람이 참된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고 행하는 것이 함께 가는 상태로 이해하면 조금 쉬워집니다.
예를 들어 어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한다고 합시다. 사랑한다고 해서 아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허용하는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무엇이 아이에게 참으로 유익한지를 생각하고, 필요하면 가르치고 바로잡으면서도 아이의 선을 진심으로 원합니다. 여기에는 무엇이 옳고 유익한가를 살피는 것과 실제로 아이의 선을 원하는 것이 함께 필요합니다. 이것 역시 진리와 선, 신앙과 사랑이 함께 작용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생활의 한 예가 될 수 있습니다.
교회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무조건 감싸 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반대로 옳고 그름만 따지면서 상대방의 형편을 전혀 돌아보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참되고 옳은지를 놓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사람의 진정한 유익을 바란다면, 우리는 ‘진리와 선이 함께한다’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AC.12의 또 하나 어려운 표현은 영적 인간의 생명이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착한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정도로 축소해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12는 영적 인간의 생명이 무엇을 먹고 사는가를 설명하면서, 자연적 생명은 음식과 물로 유지되고 영적 생명은 신앙의 지식들과 체어리티의 행위들에 속한 것들로 기뻐하고 유지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면, 사람이 말씀의 진리를 배우는 것을 점점 소중히 여기고, 알고 있는 선을 실제로 행하는 삶에서 의미와 기쁨을 발견하는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전에는 자기 이익과 인정만이 중요했는데,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를 배우는 것이 소중해지고 다른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을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AC.12가 직접 제시한 구체적인 사례라기보다 ‘영적 생명이 무엇으로 기뻐하고 유지되는가’를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적용입니다.
여기서 ‘기쁨’도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선을 행할 때마다 반드시 감정적으로 기분이 좋아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때로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고,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으며, 용서하거나 참고 섬기는 일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적 생명의 기쁨을 단순한 감정적 즐거움과 같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점차 진리와 선에 속한 것들을 향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AC.12에서 특히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상태가 앞선 상태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신앙과 사랑이 완전히 하나가 된 상태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앞선 상태들을 거치면서 신앙으로 말하고 진리와 선 안에서 확증되어 가며, 이제 여섯 번째 상태에서는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게 됩니다.
따라서 위의 생활 사례들도 ‘이 행동 하나를 하면 여섯 번째 상태’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될수록 사람이 알고 있는 진리와 실제로 사랑하고 행하는 선 사이의 거리가 점점 줄어드는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예들입니다.
처음에는 ‘옳으니까 해야 한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따라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참된 것을 인정하는 것과 선한 것을 원하는 것이 점점 함께 움직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말하는 것과 선을 행하는 것이 서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한 삶 안에서 함께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보면 AC.12의 ‘신앙과 사랑 양쪽에서 동시에 함께 행동한다’는 표현도 조금 덜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신앙은 머릿속에만 있고 사랑은 막연한 감정으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참된 것을 받아들이고 그 진리에서 선한 것을 원하며 실제로 행하는 삶 속에서 둘이 함께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만 이 모든 예보다 중요한 것은 AC.12 자체가 말하는 방향입니다. 거듭남은 사람이 진리를 많이 아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신앙과 사랑이 함께 행동한다는 것을 가장 간단히 풀어 말한다면, ‘내가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이 내가 사랑하고 행하는 선과 점점 하나의 삶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AC.12, 창1 개요, '여섯 번째 상태'
AC.12 여섯 번째 상태는 사람이 신앙으로, 그리고 그 신앙에서 사랑으로 참된 것을 말하고 선한 것을 행하는 때입니다. 이때 그에게서 나오는 것들을 ‘산 영’(living soul)과 ‘짐승’(beast)이라 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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