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4.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말입니다. 처음에는 상징과 비슷하게 느껴지지만, 스베덴보리가 사용하는 표상에는 조금 더 특별한 뜻이 있습니다. 아주 쉽게 시작하면, ‘자연적인 어떤 것이 영적인 어떤 것을 눈앞에 나타내 보이는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사람과 장소, 사물과 행위, 사건 등이 그 자체의 문자적 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드러내 보일 때, 그것을 표상한다고 말합니다.

 

AC.4에서 이 말이 중요한 이유는 창세기 첫 장들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이 내적 의미에서 새로운 창조, 곧 인간의 거듭남을 일반적으로 다루고, 특별히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장에는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거나 의미하거나  안에 포함하지 않는 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은 단지 자연계의 사물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의미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영적 상태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는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서 표상과 우리가 흔히 말하는 상징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상징은 사람이 어떤 의미를 정해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단체가 특정한 모양이나 색을 자기 단체의 상징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그 경우 그 모양과 의미 사이의 관계에는 인간의 약속이 크게 작용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씀에서 말하는 표상은 독자가 마음대로 의미를 정해서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질서가 있으며, 말씀은 그 질서에 따라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형태로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표상은 다음 심화에서 다룰 상응과 연결됩니다. 둘은 매우 가까운 개념이지만 완전히 같은 말은 아닙니다. 가장 간단하게 구별하면, ‘상응은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관계이고, ‘표상은 그 관계에 근거하여 자연적인 것이 영적인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연적인 과 영적인 진리 사이에 상응의 관계가 있기 때문에, 말씀에서 빛이 문맥에 따라 진리에 속한 것을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때 빛은 영적인 것을 표상하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이것은 무엇의 암호인가?라고 묻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을 하나씩 다른 단어로 치환하는 암호 해독처럼 생각하면 스베덴보리의 해석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하나의 사물이나 사건이 무엇을 표상하는지는 그것이 놓인 문맥과 말씀 전체의 질서 안에서 살펴야 합니다. 같은 사물이라도 어떤 문맥에서 사용되는가에 따라 선한 의미로 나타날 수도 있고 그 반대의 의미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 제도를 생각하면 표상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단, 제물, , 기름, 제사장의 의복과 여러 의식은 외적으로는 실제 예배의 형식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것들이 그 자체 때문에 거룩했던 것이 아니라 주님과 천국과 교회에 속한 영적인 것들을 표상했기 때문에 거룩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의식은 눈에 보이는 자연적인 형태이지만, 그것이 표상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입니다.

 

가나안 땅과 예루살렘도 비슷합니다. 그것들은 말씀의 문자에서는 실제 장소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말씀의 내적 의미에서는 문맥에 따라 주님의 나라와 교회, 천국에 속한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중요한 것은 가나안이라는 장소 자체가  천국이다라는 단순한 등식이 아닙니다. 그 장소가 말씀 안에서 어떤 영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표상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도 표상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등장하는 왕이나 제사장, 족장과 선지자들이 내적 의미에서 어떤 영적인 것들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의 개인적인 성품 자체가 반드시 그가 표상하는 영적 실재와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표상을 이해할 때 매우 중요한 점입니다. 말씀 안에서 한 사람이 어떤 것을 표상한다는 것과 그 사람 자신이 실제로 그러한 내적 상태를 지녔다는 것은 구별될 수 있습니다. 표상의 기능은 표상하는 사람 자신의 인격적 완전성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알면 구약의 여러 인물과 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어떤 왕이나 제사장이 말씀 안에서 거룩한 것을 표상한다고 해서 그 사람 자신이 반드시 거룩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외적인 표상은 그 사람의 개인적인 내면과 구별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과 교회의 표상적 질서를 통하여 영적인 것을 나타내실 수 있으며, 그 표상에 참여한 사람 자신의 내적 상태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역사 표상의 관계도 조심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씀에서 실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이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브라함 이후의 역사적 말씀에서는 실제 인물과 사건이 동시에 내적 의미를 담는 경우를 계속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창세기 초기의 모든 이야기를 먼저 현대적인 의미의 역사적 사건으로 확정한 다음 거기에 표상적 의미를 하나 더 얹는 방식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초기 장들의 성격과 이후의 역사적 말씀을 구별하여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해당 본문에 들어가면서 차례로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표상은 실제로 있었느냐 아니냐를 결정하기 위한 개념이 아닙니다. 표상의 핵심 질문은 말씀 안에서 이것이 무엇을 나타내는가?입니다. 자연적인 인물과 사물과 사건을 통하여 어떤 영적 실재가 나타나고 있는지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표상은 문자적 의미와 속뜻 사이를 이어 주는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그러나 표상을 안다고 해서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반대입니다. 표상이 상응에 근거한다면 그 의미는 인간의 상상이나 취향이 아니라 말씀의 질서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어떤 표현의 의미를 설명할 때 말씀의 다른 수많은 구절을 함께 제시하고, 같은 표현이 여러 문맥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살펴봅니다. 표상은 자유로운 상상력을 위한 허가증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질서를 더 세밀하게 살피도록 요구하는 개념입니다.

 

이제 AC.4의 마지막 문장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들립니다. 창세기 1장의  하나의 표현도 없으며, 가장 작은 부분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창조와 태고교회에 관한 것을 표상하거나 의미하거나 포함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말은, 창조 이야기의 몇몇 장면에만 상징적인 교훈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체 이야기와 그 안의 세부가 하나의 내적 질서 안에서 영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뜻입니다.

 

결국 표상은 눈에 보이는 말씀의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 사이에서 나타내 보이는 기능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적인 것이 어떻게 영적인 것을 그렇게 나타낼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더 근본적인 원리가 바로 상응입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했다면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관계가 있기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나타낼  있는가? 그 질문이 바로 다음 심화 상응으로 이어집니다.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 사상을 이해하는 데서 가장 핵심이 되는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처음 들으면 굉장히 어려운 철학 용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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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AC.1-3의 원리로 본 창1'

AC.4 마음이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기록된 겉 글자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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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사람(internal man)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으면서 앞으로 매우 자주 만나게 될 중요한 개념입니다. 처음에는 겉으로 보이는  마음속의  정도로 이해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은 그보다 훨씬 깊은 인간의 영적 구조와 관계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지나치게 복잡하게 이해할 필요는 없지만, 단순히 몸은  사람이고 마음은  사람이라고만 이해해 두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3에서 스베덴보리가 속 사람을 처음 언급하는 직접적인 목적은 인간의 구조 자체를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씀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사람에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듯이 말씀에도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외적인 것이 내적인 생명과 분리되면 몸만 남은 것과 같듯이, 말씀도 그 내적인 생명과 분리하여 문자만 보면 영혼 없는 과 같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에서는 우선 인간에게 내적인 차원과 외적인 차원이 있다는 기본적인 구별만 붙잡아도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속 사람은 무엇일까요? 가장 먼저 주의할 것은 속 사람을 단순히 남에게 보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웃으면서 속으로 화를 낼 수도 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머릿속으로 여러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에게 보이지 않는 생각이라고 해서 모두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욕망과 계산, 기억과 상상, 세상적인 판단 역시 몸 밖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사람 안에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들은 내면에 감추어져 있다고 해서 곧 영적인 의미의 속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중요한 구별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보다 영적인 것과 자연적인 에 더 가깝습니다. 인간은 자연계에 살면서 감각을 통해 세상을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비교하고, 추론하며, 자연적인 필요와 목적을 따라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외적 또는 자연적 차원과 깊이 관계됩니다. 반면 인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천국의 질서에 따라 자연적인 삶을 바라보고 이끌 수 있는 더 내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사람에 접근하는 더 정확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겉 사람 역시 단순히 육체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몸은 물론 인간의 가장 외적인 부분에 속하지만, 스베덴보리가 AC 전체에서 말하는  사람 또는 외적 인간은 흔히 자연적인 마음과 그에 속한 애정과 사고까지 포함합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사용하는 지식, 기억, 감각에 기초한 사고, 자연적인 욕구와 관심 등이 이 외적 차원과 관련됩니다. 따라서  사람=마음,  사람=이라는 이분법으로 이해하면 뒤의 AC를 읽으면서 여러 문제가 생깁니다.

 

속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의 영적 차원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사람 안에는 언제나 선한 생각만 들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간은 거듭나기 전에는 자신의 내적 질서가 제대로 열려 있지 않으며, 자연적인 욕망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삶을 지배할 수 있습니다. 거듭남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인간의 내적인 것을 열고 질서 있게 하시며, 그곳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점차 외적인 삶에까지 내려가도록 이끄십니다.

 

여기서 유입이라는 개념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생명은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모든 생명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주님께서  사람이라는  지점에 직접 생명을 넣으시고 그것이  사람으로 흘러간다는 식으로 너무 단순하게 그려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에 여러 내적·외적 단계와 질서가 있음을 설명합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생명과 질서는 근원적으로 주님에게서 오며, 인간의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삶에 이른다는 기본 방향만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때문에 거듭남에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겉으로 나쁜 행동 몇 가지를 고쳤다고 해서 곧 거듭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평판 때문에 정직할 수도 있고, 처벌이 두려워 악을 피할 수도 있으며, 자기 이익을 위해 친절하게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외적인 행동만 보면 선해 보이지만 그 행동을 움직이는 사랑과 목적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 인간의 사랑과 의지와 이해가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겉 사람은 중요하지 않고 속 사람만 중요하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거듭남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속에서 선을 사랑하면서 겉으로는 악을 행한다면 아직 질서가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겉으로 선하게 행동하면서 속에서는 오직 자기 이익만을 사랑하는 것도 온전한 질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을 질서 있게 하실 때, 사람이 내적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선과 진리가 자연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서도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이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주의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어느 날 자기 속 깊은 곳에서 완전히 새로워진 다음 그 변화가 자동으로 밖으로 퍼져 나간다는 단순한 과정은 아닙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우고, 자연적인 삶에서 자신을 살피고, 악을 죄로 인정하여 피하고, 선을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외적인 삶의 선택과 훈련도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사용하여 사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함께 질서 있게 하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에는 안에서 밖으로라는 질서가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말씀을 배우고 행하는 외적인 과정도 그 질서를 이루는 중요한 수단이 됩니다.

 

또 하나 조심해야 할 것은  사람을 인간 안의 가장 깊은 중심(inmost)과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 안의 가장 깊은 것, 내적 인간, 합리적 차원, 자연적 차원 등을 문맥에 따라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따라서  사람=인간의 가장 깊은 지점이라고 고정하면 이후 그의 인간론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게 됩니다. AC.3에서 필요한 것은 그러한 세부 구조를 미리 모두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자연적인 외적 차원보다 더 내적인 영적 차원이 있으며 인간은 그 내적인 것을 통하여 천국의 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구별은 사후의 인간을 이해할 때도 중요합니다. 사람이 죽는다고 그때 처음 영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인간은 지상에서 살 때부터 본질적으로 영이며, 자연계에서는 물질적인 몸을 입고 살아갑니다. 죽음은 그 영적 인간에게서 물질적인 몸이 분리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죽으면  사람은 모두 없어지고  사람만 남는다고 단순하게 말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몸은 벗지만, 사람에게는 사후에도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의 질서가 있으며, 기억과 사고와 애정도 지속됩니다. 지상에서 형성된 삶의 성질이 죽음과 함께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린이에게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처음에는 이렇게 말해도 좋겠습니다.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는 행동보다  깊은 곳이 있어. 주님께서는 우리가 겉으로 착한 척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로 선한 것을 사랑하고 진실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셔. 그리고 그렇게 마음 깊은 곳에서 받아들인 선과 진리가 우리의 말과 행동에도 나타나도록 이끌어 주셔. 이것은 속 사람의 모든 구조를 설명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람 = 남에게 숨긴 생각이라는 오해를 피하면서 거듭남의 방향을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AC.3으로 돌아가면 스베덴보리가 왜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말씀에 비유했는지가 좀 더 분명해집니다.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우리가 자연계에서 읽고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주어진 외적 형태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영적이고 천적인 것이 있습니다. 인간의 외적인 것이 내적인 생명을 표현하도록 창조된 것처럼 말씀의 문자도 그 안의 내적인 것을 담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문자와 속뜻을 서로 경쟁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버릴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사람을 이해하는 핵심은  마음속에 숨겨진 진짜 를 찾는 데 있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자연적인 삶 전체를 새로운 질서 안으로 가져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속 사람과 겉 사람은 서로 따로 움직이지 않고, 내적으로 사랑하고 인정하는 선과 진리가 겉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AC.3, 서문, '말씀의 겉과 속, 사람의 겉 사람과 속 사람'

AC.3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겉 글자만 보겠다는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경우는 기독교 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과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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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라는 표현은 AC.2의 가장 중요한 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뿐 아니라, 뒤에서 계속 만나게 될 인간과 주님, 천국과 거듭남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명’, ‘ 생각’, ‘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나는 내가 생각한다고 느끼고, 내가 사랑한다고 느끼며, 내가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생명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그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인간은 생명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이며, 오직 주님만이 생명 자체이십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생명을 가지고 계시다가 그 일부를 떼어 인간에게 나누어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인간은 주님에게서 독립된 작은 생명 하나를 자기 안에 소유하고 있는 존재가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와 다릅니다. 인간은 매 순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살아갑니다. 생명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께 있고, 인간은 그 생명의 수용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인간을 아무 의지도 없는 그릇이나 기계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것처럼느끼도록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실제로 내가 생각한다’, ‘내가 원한다’, ‘내가 선택한다고 경험합니다. 자기 것처럼의 상태가 있어야 인간에게 자유가 있을 수 있고, 자유가 있어야 선을 받아들이고 악을 거절하는 일이 사람 자신의 삶이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사람이 자신을 단지 움직여지는 도구로만 느낀다면 사랑도 신앙도 거듭남도 자유로운 인간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가르침과 인간은 자유롭게 선택한다는 가르침은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함께 가야 합니다.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 아니지만,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자기 것처럼 받아 생각하고 의도하고 행동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한 뒤에는 내가 했다고 자랑하지 않고 모든 선의 근원을 주님께 돌릴 수 있으며, 동시에 악을 행하고서 주님이 그렇게 하셨다고 책임을 돌릴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어려운 질문 하나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의 생명도 주님에게서 오는가?생명 자체의 근원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나 악은 주님에게서 오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선하고 참된 것이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을 중심으로 뒤틀고 변질시킬 때 악과 거짓이 나타납니다. 햇빛 자체는 깨끗하지만 그것이 통과하는 것이 어떠한가에 따라 밖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합니다. 다만 이 비유에서도 햇빛을 주님 자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고, ‘근원에서 오는 것은 선하지만 수용하는 상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만 이해하면 됩니다.

 

이제 다시 AC.2로 돌아오면 왜 스베덴보리가 여기에서 갑자기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말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의 직접적인 관심은 인간의 생명론을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말씀에는 생명이 있는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말씀은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고,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향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바로 생명 자체이시기 때문에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생명은 종이와 잉크에 어떤 신비한 힘이 들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사람을 영적으로 살게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말씀 안에 있는 신적 진리와 선이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그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주님을 향하며, 주님께서 그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을 질서 있게 하실 때 말씀이 그의 삶에서 살아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말씀을 많이 알고 외우는 것과 그 말씀이 사람 안에서 살아 있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거듭남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은 자기 힘으로 자기 안에 새로운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거듭남은 이미 가지고 있던 자연적 생명을 조금 개선하는 정도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새로운 질서 안으로 들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없애고 강제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자기 안의 악을 보고, 그것을 죄로 여기고 피하며, 선을 행하려고 할 때 주님께서 그 모든 과정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지만, 그것은 인간이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가운데 그의 실제 삶이 됩니다.

 

이제 생명 자체이신 주님이라는 말을 처음보다 조금 다르게 들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창조의 과거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존재하고, 생각하고, 사랑하고, 진리를 이해하며, 선을 행할 수 있는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내가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수용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인간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어떤 존재로 창조되었는지를 바로 알게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AC.2가 말하는 말씀의 생명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말씀은 우리를 말씀 자체에 붙잡아 두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하여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께로 이끌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말씀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 말씀 안에서 주님을 향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 살아갈 때, 말씀의 생명은 단지 책 안에 있는 교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속에서 열리기 시작합니다.

 

 

 

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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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단순한 수사처럼 보이지만, 사실 ‘Arcana Coe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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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큰 줄거리에는 영적인 의미가 있지만 세부 표현들은 그것을 꾸며 주는 문학적 요소에 불과하다고 보지 않습니다. 말씀은 전체로서뿐 아니라 그 안의 개별적인 것들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을 품고 있다고 봅니다.

 

전체적으로라는 말은 말씀 전체나 한 책, 한 장, 하나의 이야기처럼 비교적 큰 단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앞으로 창세기 1장을 해설하면서 스베덴보리는 그 장 전체를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에 관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그런데 개별적으로라는 말이 붙으면서 이야기가 훨씬 깊어집니다. 창세기 1장의 전체 줄거리만 거듭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빛과 어둠, 저녁과 아침,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 해와 달과 별, 동물과 사람 등 각각의 표현도 그 거듭남의 질서 안에서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AC.2에서는 이것을 더욱 강하게 표현하여 가장 작은 세부적인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하나에 이르기까지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어느 부분은 신적이고 어느 부분은 단순한 부수적 기록이라고 나눌 수 없다는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를 보여 줍니다. 역사처럼 보이는 부분, 족보처럼 보이는 부분, 반복되는 이름과 숫자, 장소와 방향 같은 세부까지도 말씀 안에서는 전체의 내적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을 모든 단어에 하나씩 고정된 비밀 암호가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단어 하나를 떼어 놓고 임의의 영적 의미를 붙이는 방식이 아닙니다. 각각의 표현은 그것이 놓여 있는 문맥과 다른 표현들과의 관계, 그리고 말씀 전체의 내적 질서 안에서 의미를 가집니다. 그래서 같은 자연적 대상도 문맥에 따라 그 상응이 다르게 나타날 수 있으며, 하나의 절을 이해하기 위해 앞뒤의 여러 절과 관련된 수많은 표현을 함께 살펴보게 됩니다.

 

여기에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의 진짜 중요성이 드러납니다. ‘전체개별이 서로 따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체의 내적 의미가 개별 표현들을 통해 펼쳐지고, 개별 표현들은 서로 연결되어 전체의 의미를 이룹니다. 창세기 1장이 전체적으로 거듭남을 말한다면, 그 안의 각각의 날과 창조물과 순서도 서로 무관하게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질서 안에서 연결됩니다.

 

그리고 AC.2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향하는지를 밝힙니다. 그 중심은 인간의 거듭남 자체도, 천국 자체도, 교회 자체도 아닙니다. ‘생명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말은 단순히 성경의 모든 부분에 의미가 있다는 주장보다 더 깊습니다. 말씀의 모든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 모든 연결의 가장 깊은 중심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원리를 알고 나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왜 그렇게 세밀한 책인지도 조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창세기와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이름 하나, 숫자 하나, 방향 하나, 반복되는 말 하나까지 오래 붙드는 것은 세부에 집착해서가 아닙니다. 그에게는 그 세부 역시 말씀에 속하며, 따라서 전체의 내적 생명에서 떨어져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앞으로 AC를 읽는 하나의 중요한 원칙이 됩니다. 큰 줄거리를 보면서 작은 표현을 놓치지 않고, 작은 표현을 살피면서 전체의 흐름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따라 더 깊이 들어갈수록 결국 말씀 전체와 그 모든 세부가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향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AC.2가 이 짧은 표현 안에 담고 있는 중요한 뜻입니다.

 

 

 

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이라는 표현은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진리를 말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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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다'

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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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적 진리(Divine Truth)

 

진리’와 ‘신적 진리’가 같은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체계 안에서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구별부터 말씀드리면, ‘진리(truth)는 넓은 범주의 말입니다. 수학의 진리도 있고, 역사적 사실도 있고, 일상의 옳은 판단도 있습니다. 즉, 무엇이 사실이며 옳은가에 대한 인식 전반을 가리킵니다. 반면 ‘신적 진리(Divine Truth)는 그 출처가 하나님 자신에게 있는 진리를 뜻합니다. 곧, 주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진리입니다. 단순히 옳은 정보가 아니라, 신적 생명에서 나오는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적 진리’는 단순한 교리 문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존재가 표현된 방식입니다. 그는 자주 이렇게 설명합니다. 주님은 ‘신적 사랑(Divine Love)과 ‘신적 진리(Divine Truth)로 인간에게 나타나신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본질이고, 진리는 그 사랑이 드러난 형식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랑이 빛으로 나타난 것이 신적 진리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인간의 이해 속에 담길 수 있지만, ‘신적 진리’는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교리를 배워 알게 되면, 그것은 그의 이해 안에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의 사랑에서 나와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질 때, 그것은 ‘신적 진리’와 연결됩니다.

 

어떤 사람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배워 알고 있다면, 그것은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주님의 사랑에서 나와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실제로 삶을 바꾸는 힘으로 작용한다면, 그때 그는 신적 진리를 접하고 있는 것입니다. 차이는 단순한 정보와 생명력의 차이입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신적 진리’는 곧 ‘말씀(the Word)과 깊이 연결됩니다. 말씀은 단지 종교 문헌이 아니라, 신적 진리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말씀 안에 주님이 현존하신다고 말합니다. 신적 진리는 문자 안에 숨어 있지만, 그 본질은 주님 자신입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진리는 넓은 의미의 옳음과 사실입니다. ‘신적 진리는 주님에게서 나오며, 사랑과 결합되어 인간을 살리는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고, 신적 진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 주시는 빛입니다.”

 

그래서 AC.1에서 ‘신적 진리’라는 표현이 나오면, 그것은 단순한 교리 설명이 아니라, 주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생명의 빛을 가리킨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AC.2, 서문, '말씀은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이 들어 있다'

AC.2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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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3, ‘층위’에 대한 원어 표현

AC.1.심화 3. ‘층위’에 대한 원어 표현 ‘층위’라는 한국어는 번역어이기 때문에, 원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의 뉘앙스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층위’에 해당하는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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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층위에 대한 원어 표현

 

층위’라는 한국어는 번역어이기 때문에, 원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의 뉘앙스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층위’에 해당하는 영어(또는 라틴어) 표현은 상황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뉩니다.

 

첫째, 가장 핵심이 되는 용어는 ‘degree’입니다. 라틴어로는 ‘gradus’입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 체계에서 ‘층위’의 기본 개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degree는 단순한 ‘정도’가 아니라, ‘질적으로 구분되는 단계’를 뜻합니다. 그는 특히 두 종류를 구별합니다.

 

* ‘continuous degrees’ (연속적 단계)

* ‘discrete degrees’ (불연속적 단계)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높낮이는 연속적 단계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하늘의 구조, 말씀의 내적 의미, 인간의 속, 겉 사람의 구분은 ‘discrete degrees’, 즉 ‘질적으로 분리된 층위’입니다. 한국어 ‘층위’는 바로 이 discrete degree를 번역할 때 가장 적절합니다.

 

둘째, 문맥에 따라 ‘plane’이라는 표현도 사용됩니다. 이는 ‘평면’, ‘차원’이라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natural plane, spiritual plane 같은 표현입니다. 이때는 ‘차원’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plane은 구조적 단계라기보다 ‘존재하는 영역’에 더 가깝습니다.

 

셋째, level이라는 단어도 가끔 쓰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엄밀한 철학적 구조를 설명할 때는 degree가 핵심입니다. level은 일상적이고 비교적 약한 표현입니다.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층위의 가장 정확한 원어 = ‘degree’ (라틴어 gradus)

* 특히 말씀 해석과 하늘 구조 설명에서 = ‘discrete degree

* 존재 영역을 말할 때 = ‘plane

 

따라서 AC.1 해설에서 말씀의 여러 ‘층위’를 말할 때 원어 개념은 대체로 ‘degrees of meaning’, 또는 더 엄밀히는 ‘discrete degrees of meaning’입니다. 곧, 문자적 의미, 영적 의미, 천적 의미는 서로 ‘연속적으로 확대된 단계’가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의미’라는 뜻입니다.

 

번역에서 ‘층위’를 유지하는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입니다. 만약 조금 더 풀어 설명해야 하는 자리라면, ‘질적으로 구분되는 단계(gradus)’라고 한 번 덧붙여 주면 더 또렷해질 수 있습니다.

 

 

 

AC.1, 심화 4, ‘신적 진리’

AC.1.심화 4. ‘신적 진리’ ‘진리’와 ‘신적 진리’가 같은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 체계 안에서는 분명한 구별이 있습니다. 먼저 가장 단순한 구별부터 말씀드리면,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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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2, ‘층위’

AC.1.심화 2. ‘층위’ ‘층위’라는 말은 일상 한국어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지만, 스베덴보리 신학에서는 거의 구조를 떠받치는 기둥 같은 개념입니다. 먼저 ‘층위’란 무엇인가를 가장 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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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층위

 

층위’라는 말은 일상 한국어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지만, 스베덴보리 신학에서는 거의 구조를 떠받치는 기둥 같은 개념입니다.

 

먼저 ‘층위’란 무엇인가를 가장 간단히 말하면, ‘존재와 인식이 작동하는 서로 다른 차원’입니다. 단순히 높고 낮은 정도 차이가 아니라, 서로 질적으로 다른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하늘과 인간을 설명할 때 항상 이 ‘질적 구분’을 전제합니다. 문자적 의미, 내적 의미, 최심(inmost) 의미가 서로 겹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층위에 놓여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층위는 ‘확대된 버전’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린이와 어른의 지식 차이는 양적 차이입니다. 그러나 물과 수증기의 차이는 질적 차이입니다. 같은 물질이지만 상태가 완전히 다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층위는 후자에 가깝습니다. 자연적 층위, 영적 층위, 천적 층위는 같은 내용을 더 크게 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고 인식하는 단계’입니다.

 

말씀 해석에서 이 개념이 특히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우주 창조’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자연적 층위입니다. 그러나 같은 본문을 영적 층위에서 읽으면 ‘인간의 거듭남’ 이야기입니다. 더 깊은 천적 층위에서는 ‘주님의 신적 질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본문은 하나지만, 층위가 다르면 의미의 세계가 달라집니다.

 

또한 층위는 서로 섞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의 독특한 점입니다. 그는 ‘연속적 상승’이 아니라 ‘불연속적 구분’을 말합니다. 자연적 사고를 조금 더 고양하면 영적 사고가 되는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빛이 비추어야 영적 인식이 열립니다. 그래서 그는 ‘내적 의미는 문자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자동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인간 존재 안에서도 층위가 있습니다. 겉 사람은 자연적 층위에서 살고, 속 사람은 영적 층위에 속합니다. 천적 인간은 더 깊은 층위에서 삽니다. 거듭남은 이 층위가 열리는 과정입니다. 즉, 위로 쌓아 올리는 것이 아니라, 위에 닫혀 있던 층이 열리는 일입니다.

 

층위’라는 표현이 낯설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는 보통 모든 것을 하나의 평면에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평면적 세계관이 아니라, 다층 구조의 세계관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말씀도, 인간도, 하늘도 모두 층위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만약 더 쉬운 비유를 들자면, 한 권의 악보를 생각해 보실 수 있습니다. 종이 위의 음표는 문자적 층위입니다. 그 음표를 해석하여 소리로 구현하는 것은 한 층 위입니다. 그 음악이 마음을 울리는 감동의 차원은 또 다른 층위입니다. 같은 악보이지만, 층위가 달라질수록 세계가 달라집니다.

 

결론적으로, AC.1에서 ‘층위’라는 말은 말씀 안에 여러 차원의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입니다. 겉 글자는 자연적 층위, 그 안의 아르카나는 영적 층위, 그 최심에는 천적 층위가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면, 왜 스베덴보리가 ‘겉 글자만으로는 알 수 없다’고 말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문제는 본문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어느 층위에서 읽고 있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AC.1, 심화 3, ‘층위’에 대한 원어 표현

AC.1.심화 3. ‘층위’에 대한 원어 표현 ‘층위’라는 한국어는 번역어이기 때문에, 원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의미의 뉘앙스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 저작에서 ‘층위’에 해당하는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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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1, ‘religious belief’

AC.1.심화 1. ‘religious belief’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를 설명하는 열거 가운데 등장합니다. 그 문장은, 겉 글자만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그 안에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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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심화

1. religious belief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 의미가 무엇을 다루는지를 설명하는 열거 가운데 등장합니다. 그 문장은, 겉 글자만 보아서는 알 수 없지만, 그 안에는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religious belief, 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religious belief’는 특정 교파의 교리나 기독교 내부 체계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동시에, 단순히 교회 밖 이교 신앙을 지칭하는 말도 아닙니다. 이 표현은 더 넓은 범위를 가리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religious belief’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신앙적 가르침과 믿음의 내용 전체’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신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예배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신앙 세계 전반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 있는 교리도 여기에 포함되고, 교회 밖이라 하더라도 신성을 인정하고 따르려는 종교적 신앙도 여기에 포함됩니다. 핵심은 ‘주님과 인간을 연결하는 내용’이라는 점입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왜 ‘church’와 ‘religious belief’를 나란히 두었는지도 자연스럽게 풀립니다. church는 역사적, 가시적 공동체를 가리키고, religious belief는 그 공동체를 구성하는 신앙의 내용과 가르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그 범위는 교회 내부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신학 전체를 보면, 참된 신앙은 어디에서나 주님을 향할 수 있고, 신성을 인식하고 그 인도에 따르는 삶은 교회 밖에서도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religious belief는 ‘교회 안의 교리 체계’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또한 이 표현은 ‘faith’ 대신 ‘belief’가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랑과 결합된 살아 있는 신앙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로서의 신앙 내용, 곧 ‘신앙의 세계’를 말하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적 생명 상태라기보다, 신앙이 형성하는 사상과 가르침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이것은 개인의 영적 상태를 분석하는 문맥이 아니라, 말씀의 내적 의미가 포괄하는 범위를 설명하는 총론적 문맥에 어울리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AC.1에서 ‘religious belief’를 이해할 때는, 범위를 ‘이교 신앙’으로 좁히는 것도, ‘기독교 교리 체계’로 한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성과 인간을 연결하는 종교적 신앙 일반’, 곧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고 인도하는 신앙의 세계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AC.1의 문장은 더욱 힘을 갖습니다. 겉으로는 유대교 의식과 역사처럼 보이는 말씀 안에, 실제로는 주님과 그분의 천국뿐 아니라, 인간이 신성과 맺는 모든 신앙적 관계의 구조가 담겨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단지 특정 종교 집단의 규례를 기록한 책이 아니라, ‘신앙 세계 전체’를 담고 있는 신적 진리의 그릇이라는 선언입니다.

 

 

 

AC.1, 심화 2, ‘층위’

AC.1.심화 2. ‘층위’ ‘층위’라는 말은 일상 한국어에서는 자주 쓰이지 않지만, 스베덴보리 신학에서는 거의 구조를 떠받치는 기둥 같은 개념입니다. 먼저 ‘층위’란 무엇인가를 가장 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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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AC.1-5)

AC.1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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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6:15

 

끝으로 마가복음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또한 복음이 전파되는 이들도 만민(creatures)이라 하는데, 이는 그들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라는 설명이 선행하고,이어 나옵니다.

 

이 구절은 지금까지의 흐름을 사람에게 직접 적용하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6:15만민(creature)은 단순히 모든 사람이라는 뜻을 넘어서, ‘아직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존재’, 곧 거듭남이 필요한 상태에 있는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먼저 왜 ‘사람(people)이 아니라 ‘피조물(creature)이라고 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영어 성경의 ‘creature’는 단순히 생물이라는 뜻이 아니라, ‘‘창조된 존재’, 혹은 창조의 대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점을 잡아서, 이 구절을 단순한 전도 명령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를 위한 부름’으로 이해합니다.

 

이걸 AC의 흐름과 연결하면 매우 또렷해집니다. 지금까지 계속 보신 것처럼, 사람 안에는 여러 층위, 곧 생각, 애정, 감각이 있지만, 그것이 질서 없이 흩어져 있으면 아직 온전한 ‘사람’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거듭남을 ‘다시 태어남’일 뿐 아니라, ‘다시 창조됨(new creation)이라고 말합니다. 즉, 기존의 상태 위에 조금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질서 자체가 새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제 이 구절을 보면, ‘복음을 모든 피조물(만민)에게 전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많은 사람에게 전하라’는 양적인 명령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태, 곧 새롭게 되어야 할 상태를 향해 복음을 전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복음은 이미 완성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직 되어 가야 할 존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연결이 하나 더 있습니다. 앞에서 ‘짐승’, ‘들짐승’, ‘생물’ 등을 보셨는데, 그것들은 모두 ‘사람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원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 전체를 ‘creature’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사람 전체가 아직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형성되어 가야 할 살아 있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즉, 인간은 이미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통해 계속 새롭게 빚어져 가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깁니다. 어떤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미 생각도 있고, 감정도 있고, 삶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아직 ‘주님의 질서 안에서 하나로 묶여 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때 복음이 들어오면, 그 사람 안에서 ‘생각이 바뀌고, 애정이 바뀌고,삶이 재구성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새 창조’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단순히 ‘정보를 받은 사람’이 아니라, ‘다시 만들어지고 있는 존재’, 곧 ‘creature’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단순한 전도 명령을 넘어, 이렇게 읽히게 됩니다. ‘가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그들을 새롭게 창조하는 복음을 전하라.’ 이것이 스베덴보리적 이해입니다.

 

복음은 이미 잘 사는 사람에게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잘 못 사는 우리, 아직 부족한 우리를 새롭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6:15만민(creature)은 단순한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새롭게 창조되어야 할 존재로서의 인간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AC.46, 심화 12. ‘계19:4’

심화 12. ‘계19:4’ 다음도 계시록입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계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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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19:4

 

다음도 계시록입니다. ‘또 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이르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19:4) and fell before the throne on their faces, and worshiped the lamb (Rev. 19:4).

 

이 구절은 앞서 보신 계7:11과 거의 같은 장면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왜 그들이 엎드려 경배하는가?’, 그리고 ‘그 경배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19:4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의 경배, 사람 안의 가장 높은 진리와 가장 깊은 애정이 주님 앞에서 완전히 하나 되어,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주님께 돌리는 상태’를 뜻합니다.

 

먼저 두 그룹을 구분해 보겠습니다. ‘이십사 장로’는 말씀에서 보통 ‘진리의 충만함, 곧 완전하게 정리된 이해와 신앙의 상태’를 뜻합니다. 숫자 ‘24’는 단순한 수가 아니라, ‘전체성과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이십사 장로들은 ‘질서 잡힌 진리의 세계’, 곧 사람 안에서 정리되고 확립된 이해를 대표합니다. 반면 ‘네 생물’은 앞에서 보셨듯이 ‘살아 있는 애정, 특히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그에 따른 생명력’을 뜻합니다. 즉, 장로가 ‘이해’라면, 생물은 ‘의지’, 다시 말해 ‘진리와 선의 두 축’입니다.

 

이제 이 둘이 함께 ‘엎드려 경배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엎드린다’는 것은 단순한 몸짓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높아짐이 완전히 내려오는 상태’, 곧 ‘자기 것으로는 아무것도 아니다’는 인식입니다. 그리고 ‘경배’는 앞에서도 보셨듯이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주님께로 향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은 이렇게 읽혀야 합니다. ‘사람 안의 이해와 의지, 진리와 선이 모두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전적으로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아멘, 할렐루야’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아멘’은 ‘진리의 확증’, 곧 ‘이것이 참되다’는 이해의 동의이고, ‘할렐루야’는 ‘사랑과 기쁨의 찬양’, 곧 의지의 응답입니다.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각각 ‘이해와 의지의 응답’을 나타냅니다. 다시 말해, 생각으로도 인정하고, 마음으로도 기뻐하며, 전체로 주님께 돌리는 상태입니다.

 

이걸 지금까지의 흐름 속에서 보면 더 또렷해집니다. 처음에는 애정이 혼란스럽고, 그다음 질서 안으로 들어오고, 그다음 일부는 제거되고 일부는 정돈되고, 그다음 전체가 조화를 이루고, 그리고 마침내 여기에서는 ‘그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 하나로 무릎 꿇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거듭남의 매우 깊은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내가 옳다’, ‘내가 잘했다’, ‘내가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점점 주님의 진리와 선 안으로 들어가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 하셨습니다.’ 이때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생각도 그렇게 알고, 마음도 그렇게 느끼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감사가 나오고, 기쁨이 나오고, 찬양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 안의 진리와 선, 이해와 의지가 모두 주님께로 돌아가, 자기 것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주님께 속함을 인정하는 상태가 참된 경배이다.’ 이것이 계19:4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진짜 예배는, 우리가 무엇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19:4이십사 장로와 네 생물의 경배, 사람 안의 이해와 의지 전체가 주님께 속함을 인정하고, 그분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거듭남의 깊은 완성 상태를 의미합니다.’

 

 

 

AC.46, 심화 13. ‘막16:15’

심화 13. ‘막16:15’ 끝으로 마가복음입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막16:15) Go ye into all the world, and preach the gospel to every creature (Mark 16:15).’ ‘또한 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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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심화 11. ‘계7:11’

심화 11. ‘계7:11’ 다음은 계시록입니다.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7:11) All the angels stood round about the thr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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