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6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어떤 이들은 신앙을 단지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주님을 향한 생각이라고 여기며, 어떤 이들은 신앙의 교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신앙 교리에 포함된 모든 것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 특히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습니다. 교리가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 사람이 반드시 순종해야 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love to the Lord) 이웃을 사랑하는 (love toward the neighbor)입니다. 사람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습니다. 점에 대해 주님은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셔서, 조금도 의심할 여지를 남기지 않으십니다. 마가복음입니다. They who have separated faith from love do not even know what faith is. When thinking of faith, some imagine it to be mere thought, some that it is thought directed toward the Lord, few that it is the doctrine of faith. But faith is not only a knowledge and acknowledgment of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comprises, but especially is it an obedience to all things that the doctrine of faith teaches. The primary point that it teaches, and that which men should obey, is love to the Lord, and love toward the neighbor, for if a man is not in this, he is not in faith. This the Lord teaches so plainly as to leave no doubt concerning it, in Mark:

 

2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둘째는 이것이니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계명이 없느니라 (12:29-31) The foremost of all the commandments 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one Lord; therefore thou shalt love the Lord thy God with all thy heart, and with all thy soul, and with all thy mind, and with all thy strength: this is the foremost commandment; and the second is like, namely this, thou shalt love thy neighbor as thyself; there is none other commandment greater than these (Mark 12:2931).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앞의 계명을 크고 첫째 되는 계명(first and great commandment)이라 하시며,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라고 하십니다 (22:37-40).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law and the prophets) 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In Matthew, the Lord calls the former of these thefirst and great commandment,” and says thaton these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Matt. 22:3741) Thelaw and the prophetsare the universal doctrine of faith, and the whole Word.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이웃을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22:37-40)

 

해설

AC.36은 매우 직접적인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합니다.상당히 강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신앙이라고 부르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어떤 교리를 머리로 알고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신앙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을 여러 방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종교적인 생각이라고 여기고, 어떤 사람은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여기며, 어떤 사람은 올바른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런 것들이 전혀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문은 신앙이 신앙 교리에 포함된 것들을 아는 것과 인정하는 데에만 있지 않고라고 말합니다. 인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필요할까요? 스베덴보리는 특히 교리가 가르치는 모든 것에 순종하는 데에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순종AC.36을 이해하는 중요한 말입니다. 신앙은 머릿속에 있는 교리로 끝나지 않고, 그 교리가 가르치는 것을 실제 삶에서 따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처음 읽는 독자에게 질문이 하나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기독교 신앙이란 결국 계명을 지키는 것인가?AC.36은 곧바로 그 오해를 막아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순종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수많은 규칙을 외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이웃을 사랑하는 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교리가 가장 먼저 가르치며 사람이 순종해야 할 핵심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순종이다라는 말을 명령을 따르는 것이 신앙이다라는 뜻으로만 이해하면 부족합니다. 어떤 순종인가가 중요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람이 사랑 안에 있지 않다면 그는 신앙 안에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독립적인 영적 실재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AC.36의 논점은 신앙의 고백이나 교리의 인정을 무가치하게 만드는 데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사랑과 삶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신 사랑을 삶에서 완전히 떼어 놓는다면,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온전한 신앙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AC.36은 스베덴보리 자신의 철학이나 신학 체계를 먼저 제시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인용합니다. 12:29-31에서 주님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로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을, 둘째로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을 말씀하시며 이보다 계명이 없느니라고 하십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신앙의 중심에 두는 직접적인 근거입니다.

 

이어 마22에서도 같은 두 계명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더욱 중요한 말씀이 덧붙습니다. ‘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율법과 선지자신앙의 보편적 교리이며 말씀 전체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성경의 수많은 가르침 가운데 두 항목을 골라 중요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가 달려 있는 중심 원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리는 중요하지 않고 사랑만 있으면 된다는 말과도 다릅니다. 오히려 참된 교리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교리는 무엇이 참인지 가르치고, 사람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교리를 아무리 정확하게 알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AC.36의 기준에서는 신앙의 본래 목적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을 강조한다고 해서 진리를 아무렇게나 생각해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36 자체가 신앙의 교리와 그것이 가르치는 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순종할지를 알려면 먼저 무엇이 참인지 배워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대립시키는 것은 교리냐 사랑이냐가 아니라 삶과 분리된 교리적 신앙사랑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신앙이라고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

 

이렇게 보면 앞의 AC.35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AC.35에서는 이해가 하늘을 향하면서도 의지가 그 반대 방향을 향할 수 있는 인간의 분열을 다루었습니다. AC.36에서는 그 문제가 신앙의 언어로 다시 나타납니다. 이해로 교리를 알고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그 교리가 가르치는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은 우리에게 단순히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만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당신의 사랑과 삶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라고도 묻습니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진 신앙은 아무리 많은 지식과 올바른 고백을 가지고 있어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에는 아직 이르지 못합니다.

 

결국 AC.36에서 신앙은 머리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알고 인정한 진리가 사랑과 만나고, 그 사랑이 순종하는 삶으로 나타날 때 신앙은 신앙답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는 순간 신앙 자체가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신앙의 중심에는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두 큰 계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 심화 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AC.36.심화1.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이 무엇인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이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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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심화 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심화2.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AC.36 참조 구절인 마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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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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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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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5

사람에게는 두 가지 타고나는 역량(faculties), 곧 의지와 이해(will and understanding)가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때, 이 둘은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이 됩니다. 이때에는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동시에 생각하고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해가 의지와 어긋날 때에는, 그러니까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경우인데요, 이때는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뉘는데, 하나, 곧 이해는 스스로를 하늘로 높이려 하고, 다른 하나, 곧 의지는 지옥을 향해 기울어지지요. 그런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동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 전체는 곧장 지옥으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Man has two faculties: will and understanding. When the understanding is governed by the will they together constitute one mind, and thus one life, for then what the man wills and does he also thinks and intends. But when the understanding is at variance with the will (as with those who say they have faith, and yet live in contradiction to faith), then the one mind is divided into two, one of which desires to exalt itself into heaven, while the other tends toward hell; and since the will is the doer in every act, the whole man would plunge headlong into hell 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

 

해설

AC.35는 인간에게 있는 두 가지 기본 역량, 의지이해를 다룹니다. 얼핏 보면 아주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원하고,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 두 역량의 관계를 통해 앞에서 계속 다루어 온 사랑과 신앙의 문제를 인간 마음의 구조 안으로 가져옵니다.

 

먼저 처음 읽는 독자에게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문장이 있습니다. ‘이해가 의지의 지배를 받을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과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보통 반대로 생각합니다. ‘욕망대로 행동하지 말고 이성으로 욕망을 통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의지는 단순히 순간적인 욕망이나 충동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원하고 사랑하는가와 연결된 마음의 근본적인 역량입니다. ‘이해역시 단순한 지능이 아니라 무엇이 참인지 알고 생각하는 역량입니다.

 

그러므로 AC.35의 핵심은 생각하지 말고 원하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실제로 원하는 것과 그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대로라면 사람이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을 또한 생각하고 의도할 때 의지와 이해는 함께 하나의 마음을 이루며, 그 결과 하나의 생명을 이룹니다. 안에서 원하는 것과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하나의 주의가 필요합니다. 의지와 이해가 일치하기만 하면 무조건 좋은 사람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악을 원하면서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어떤 의미에서는 생각과 욕구가 일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AC.35가 지금 다루는 문맥은 앞선 AC.34사랑과 신앙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을 이해로는 인정하면서 실제 의지는 그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원하는 상태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예로 드는 사람이 바로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신앙과 반대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진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해로는 하늘을 향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신앙을 말하고, 교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원하는 것과 살아가는 방향은 그것과 반대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하나의 마음이 둘로 나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AC를 처음 읽는 사람에게 상당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은 단순히 머릿속에서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완성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하늘을 향한다고 해서 사람 전체가 하늘을 향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원하는가, 그리고 그 의지가 삶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함께 보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AC.35에는 매우 강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해는 자신을 하늘로 높이려 하지만 의지는 지옥을 향하며, 모든 행위에서 실제로 행하는 쪽은 의지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자비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사람 전체가 곧장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지가 행위자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으로 그의 삶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원하며 그 원하는 바가 행위로 어떻게 나타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해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5 자체도 이해가 하늘로 높아지려 한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이해할 수 있고, 자기 삶과 다른 더 높은 것을 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이 의지와 분리된 채 머리에만 머물 때입니다. ‘나는 이것이 옳다는 것을 안다나는 이것을 원하고 행한다사이에 깊은 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AC.35의 마지막 말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이런 분열을 설명하고 끝내지 않고 만일 주님께서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이라고 덧붙입니다. 인간에게 이해와 의지의 모순이 있다는 사실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주님의 자비라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상태를 유지하거나 구원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AC.35은 여기서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그 사람을 붙드시고 의지와 이해를 회복시키시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해를 이용하여 의지를 이렇게 교정하신다는 식으로 작동 방식을 미리 확정하기보다, 우선 이 글이 직접 말하는 데 머무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이 자기 의지대로만 내버려져 있지 않고 주님의 자비 아래 붙들려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읽으면 AC.35는 단순한 인간 심리 분석을 넘어 우리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게 합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만 묻지 않고 나는 실제로 무엇을 원하는가?까지 묻게 하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믿고, 이해로는 선과 진리를 인정하면서도 실제 의지가 전혀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 분열입니다.

 

그러므로 의지와 이해가 하나의 마음, 하나의 생명을 이룬다는 말은 단순히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라는 도덕적 충고보다 깊습니다. 사람이 이해로 받아들인 신앙과 실제로 원하는 삶이 서로 갈라지지 않고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그 둘이 갈라져 있는 우리를 절망 가운데 버려두지 않고 붙드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AC.35의 마지막에 자비가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심화

1.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 심화 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AC.35.심화1. ‘우리를 자비로 붙들어 주시는 주님’ 위 AC.35본문, ‘만일 주님께서 그 사람을 자비로 붙들어 주지 않으신다면’(if it were not that the Lord has mercy on him.)말인데요, 우리를 지으신 신(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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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 창1:14-17, '신앙이란 무엇인가?'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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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과 신앙은 하나’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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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4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광명체들(luminaries) 언급하실 , 그것들을 하나로 간주,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으라(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라고 라틴어 단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주님의 허락으로 다음과 같은 가지 놀라운 사실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한테서 오는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는데,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가운데 있는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속에 있어, 하늘의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납니다. 이들 가운데는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주님을 믿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기를, Love and faith admit of no separation, because they constitute one and the same thing; and therefore when mention is first made of “luminaries” they are regarded as one, and it is said, “Let there be [sit]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Concerning this circumstance it is permitted me to relate the following wonderful particulars. The celestial angels, by virtue of the celestial love in which they are from the Lord, are from that love in all the knowledges of faith, 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nce that scarcely anything of it can be described. But, on the other hand, spirits who are in the knowledge of the doctrinals of faith, without love, are in such a coldness of life and obscurity of light that they cannot even approach the first threshold of the court of the heavens, but flee back again. Some of them, while not living according to his precepts, say that they have believed in the Lord, and it was of such that the Lord said in Matthew: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7:21, 22, 끝까지) Not everyone that saith unto me, Lord, Lord, shall enter into the kingdom of the heavens, but he that doeth my will: many will say to me in that day, Lord, Lord, have we not prophesied through thy name (Matt. 7:21–22, to the end).

 

[2] 이로부터 분명해지는 것은,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신앙 안에도 있으며, 그렇게 해서 천적 생명 안에 있지만, 자기는 신앙이 있다 말하면서도 사랑의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 햇빛과 같아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얼어붙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면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 햇볕과 같아,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도 정확히 이와 같은데, 이런 것들은 보통 말씀에서 세상과 위에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또한 신앙이 전혀 없는 상태와 사랑 없는 신앙은,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예고하시면서 겨울(winter) 비유하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Hence it is evident that those who are in love are also in faith, and thereby in heavenly life, but not those who say they are in faith, and are not in the life of love. The life of faith without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without heat, as in the time of winter, when nothing grows, but all things are torpid and dead; whereas faith proceeding from love is like the light of the sun in the time of spring, when all things grow and flourish in consequence of the sun’s fructifying heat. It is precisely similar in regard to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which are usually represented in the Word by such as exist in the world and on the face of the earth. No faith and faith without love are also compared by the Lord to “winter,” where he foretell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in Mark:

 

18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 19이는 그날들이 환난의 날이 되겠음이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13:18, 19) Pray ye that your flight be not in the winter, for those shall be days of affliction (Mark 13:18–19).

 

여기서 (flight) 마지막 때를 뜻하며, 또한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합니다. ‘겨울 사랑이 없는 삶이고, ‘환난의 (day of affliction) 저세상에서의 비참한 상태를 말합니다. Flight” means the last time, and also that of every man when he dies. “Winter” is a life destitute of love; the “day of affliction” is its miserable state in the other life.

 

해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를 한층 더 분명하게 밝힙니다.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없는데, 이는 둘이 하나요, 동일한 것을 이루기 때문입니다.이것이 AC.34 전체의 중심입니다. 사랑과 신앙은 단순히 서로 잘 협력해야 하는 두 가지 종교적 요소가 아니라, 본래 하나를 이루도록 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14의 표현 자체에서 이 질서를 봅니다. 처음 광명체들이 언급될 때 복수의 광명체들을 가리키면서도 라틴어에서는 있으라에 단수형 sit가 사용되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는 이것을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룬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앞의 AC.30-33에서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설명했는데, 이제 AC.34에서는 그 둘이 본래 분리될 수 없는 하나라고 더욱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에게 허락된 영계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천적 사랑 안에 있는 천사들은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으로 인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으며, 그들의 생명과 지성의 빛은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과 신앙의 결합입니다. 천적 사랑과 신앙에 속한 지식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하나의 천국적 생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반대편에는 사랑 없이 신앙의 교리적 지식만 가진 영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적 지식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그들이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가운데 있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하늘 뜰의 첫 문턱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다시 물러난다고 합니다. 이것은 AC.34에서 매우 중요한 대조입니다. 문제는 신앙에 관한 지식의 유무만이 아니라, 그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어 생명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주님의 계명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은 주님을 믿었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스베덴보리는 마7:21 이하를 인용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과, 실제 삶에서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이 인용을 통해 AC.34가 말하는 사랑이 단순한 감정이 아님도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대조하는 것은 사랑의 사랑 없이 신앙이 있다고 말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사랑과 신앙의 결합은 단순히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교리를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실제 삶과 결합되어 주님의 계명에 따라 살아가는 데까지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이 차이를 자연의 매우 선명한 비유로 설명합니다. 사랑 없는 신앙의 생명은 겨울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빛은 있지만 열이 없으므로 아무것도 자라지 않고 모든 것이 굳어 죽은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철의 햇빛과 같습니다. 태양의 열로 인해 모든 것이 자라고 번성합니다.

 

이 비유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두 경우 모두 이 있다는 점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에도 신앙에 관한 교리적 지식과 생각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빛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낳는 사랑과 결합되어 있지 않으므로 겨울의 햇빛처럼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반대로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은 봄의 햇빛처럼 생명을 일으키고 자라게 합니다.

 

따라서 AC.34의 핵심을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중요하다고 요약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사랑과 신앙은 본래 하나이며,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참된 생명을 잃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 신앙이 참된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자연의 모습들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말씀에서 표현하는 데 사용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의 겨울과 봄, 빛과 열, 성장과 죽음 같은 모습들이 말씀 안에서 영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세대의 종말을 말씀하시면서도 너희가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막13:18도망함(flight)마지막 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동시에 각 사람이 죽을 때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겨울은 사랑이 없는 삶, ‘환난의 은 저세상에서의 그 비참한 상태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AC.34의 앞부분에서 설명한 사랑 없는 신앙을 매우 엄중한 모습으로 다시 보여 줍니다.

 

이 대목에서는 도망함을 현대 기독교 종말론에서 말하는 휴거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AC.34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이 지상에서 사라지는가 하는 종말 시간표에 있지 않고, 사람이 마지막 때 또는 죽음을 맞을 때 어떤 영적 상태에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 상태가 겨울’, 곧 사랑 없는 삶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사후 상태에 관한 매우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연계에서 얼마나 많은 신앙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가, 얼마나 자주 주님의 이름을 불렀는가 하는 것만으로 천국의 생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AC.34가 제시하는 대조는 분명합니다. 사랑 없는 교리적 지식은 생명의 차가움과 빛의 어두움 가운데 있지만,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에는 천국적 생명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지식이나 교리를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34 자체가 천적 천사들이 신앙에 속한 모든 지식 안에 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떤 생명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사랑과 신앙이 하나를 이룰 때 신앙에 관한 지식도 살아 있는 질서 안에 있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AC.34는 앞의 AC.30-33을 더욱 선명하게 완성해 갑니다. AC.30에서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는다고 했고, AC.32에서는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이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했으며, AC.33에서는 사랑이 생명과 기쁨의 성질을 결정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4에서는 그 모든 내용을 사랑과 신앙은 분리될 없으며 하나를 이룬다는 말로 집약합니다.

 

결국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겨울의 빛이 아니라 봄의 빛입니다. 신앙에 관한 지식과 고백이 있으면서 사랑의 삶과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을 자라게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을 때, 사랑과 신앙은 본래의 질서대로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AC.34에서 두 광명체를 통해 밝혀지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천적 천사들의 생명과 지성의  어떤 상태일까?

 

AC.34, 심화 1,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AC.34.심화 1.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상태’ 위 AC.34 본문, ‘그러한 생명과 지성의 빛 가운데 있는 그 상태는 거의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and are in such a life and light of intell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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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도망함(flight) 마지막 때와  사람이 죽을  뜻하는가?

 

AC.34, 심화 3, ‘일’(flight)

AC.34.심화 3. ‘일’(flight) 위 AC.34 본문 중 인용 구절, ‘이 일이 겨울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막13:18)에 나오는 ‘일’(flight)을 기독교, 개신교에서는 ‘휴거’라 하여 매우 특별하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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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 창1:14-17, ‘의지'(will)와 '이해’(understanding)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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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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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3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사랑도 없이는 생명이라는 있을 수도, 그리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이라는 것도 있을 없음을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합니다. 만일 사랑(loves), 같은 말이지만 욕망(desires)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것입니다. 실제로 저는 이것을 생생히 적이 있습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에도 어떤 생명과 기쁨의 모습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들은 참된 사랑과는 전적으로 반대됩니다. 참된 사랑이란 사람이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그만큼 이웃을 미워하게 되고, 결과 주님을 미워하게 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따라서 그것들은 사랑이 아니라 미움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며, 참된 기쁨은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뿐이므로, 참된 생명도 하나뿐입니다. 하나의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참된 행복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천국(heavens) 천사들이 누리는 기쁨과 행복입니다. It is in everyone’s power very well to know that no life is possible without some love, and that no joy is possible except that which flows from love. Such however as is the love, such is the life, and such the joy: if you were to remove loves, or what is the same thing, desires—for these are of love—thought would instantly cease, and you would become like a dead person, as has been shown me to the life. The loves of self and of the world have in them some resemblance to life and to joy, but as they are altogether contrary to true love, which consists in a man’s loving the Lord above all things, and his neighbor as himself, it must be evident that they are not loves, but hatreds, for in proportion as anyone loves himself and the world, in the same proportion he hates his neighbor, and thereby the Lord. Wherefore true love is love to the Lord, and true life is the life of love from him, and true joy is the joy of that life. There can be but one true love, and therefore but one true life, whence flow true joys and true felicities, such as are those of the angels in the heavens.

 

해설

AC.3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생명과 사랑의 관계를 매우 단순하면서도 근본적인 원리로 설명합니다. 사람에게 어떤 사랑도 없다면 생명도 있을 수 없고, 사랑에서 흘러나오지 않는 기쁨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AC.33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단순히 우리가 흔히 말하는 따뜻한 감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욕망(desires)을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사람이 무엇을 원하고 추구하며 그것에서 기쁨을 느끼는가는 그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래서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도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은 사람과 같이 된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자신이 실제로 생생하게 보았다고 덧붙입니다.

 

이 말은 인간의 생각과 삶을 움직이는 더 깊은 곳에 사랑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먼저 생각하고 그다음 무엇을 사랑한다고 여기기 쉽지만, AC.33은 그보다 더 근원적인 차원을 보여 줍니다. 어떤 것을 원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한 생각이 일어나고, 그 사랑에 따라 기쁨도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생명의 성질을 알려면 그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에서 기쁨을 얻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구별이 나옵니다. 사랑이 생명을 움직인다고 해서 모든 사랑이 같은 생명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도 생명과 기쁨의 어떤 모양이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높이고 세상의 것을 얻는 데서 강한 욕망과 활력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때 큰 기쁨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이것도 분명히 하나의 살아 있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참된 사랑과 분명히 구별합니다. 참된 사랑은 무엇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게 되면 사람은 자기 자신과 세상을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세우게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이웃을 미워하고, 그 결과 주님을 미워한다고까지 강하게 말합니다.

 

여기서 미워한다는 말을 단순히 감정적으로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만으로 좁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3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지배적인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지배하면 이웃과 주님을 향한 참된 사랑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삶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사랑처럼 보이고 기쁨과 생명까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참된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 구별 때문에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는 첫 문장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문제는 단순히 나는 무엇인가를 열심히 사랑하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이며, 사랑은 어떤 성질을 가지고 있는가?입니다. 사랑의 성질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과 기쁨의 성질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을 하나의 근원으로 연결합니다. 참된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이고, 참된 기쁨은 바로 그 생명에서 나오는 기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된 사랑의 근원이 사람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 사랑이 있는 것처럼 경험되지만, 그 사랑의 참된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은 앞의 AC.30-32와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큰 광명체는 사랑이고 작은 광명체는 신앙이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천적 천사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생명과 행복이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한다고 했습니다. AC.33은 이제 그 원리를 생명과 기쁨이라는 차원에서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따라서 AC.33이 광명체 본문 한가운데에서 갑자기 사랑과 생명과 기쁨을 이야기하는 것은 본문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광명체라고 한 사랑이 왜 그렇게 중심적인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단지 신앙 옆에 놓이는 하나의 종교적 덕목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랑이 사람을 지배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생명과 기쁨도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가 마지막에 천사들의 기쁨과 행복을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나이고, 따라서 참된 생명도 하나이며, 그 생명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이 흘러나옵니다. 천사들의 기쁨과 행복은 바로 이러한 사랑의 생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좋은 환경을 얻거나 원하는 것을 마음껏 누리는 데서 생기는 행복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AC.33은 우리에게 매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보다 먼저 무엇이 나를 살아 있게 하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사람은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도 강렬한 활력과 기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활력이 있다는 사실이나 기쁨을 느낀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참된 생명이라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결국 분별의 기준은 사랑의 성질과 그 근원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참된 사랑, 그리고 주님에게서 오는 그 사랑의 생명이 사람 안에 있을 때 거기에서 참된 기쁨과 행복도 흘러나옵니다. 이것이 AC.33에서 스베덴보리가 사랑이 어떠한가에 따라 생명이 그러하고, 기쁨도 그러하다는 말로 밝히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사랑을 제거하면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

 

AC.33, 심화 1, 사랑을 제거하면 왜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

AC.33.심화1. 사랑을 제거하면 왜 ‘생각이 즉시 멈추는가?’위 AC.33 본문, ‘만일 사랑, 같은 말이지만 욕망을 제거한다면, 욕망은 사랑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생각은 즉시 멈추고, 사람은 마치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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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광명체 본문에서 갑자기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말하는가?

 

AC.33, 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AC.33.심화 2. ‘광명체 본문과 참된 사랑, 생명, 기쁨과 행복’ 지금 광명체 본문인데, AC.33은 조금은 뜬금없이 참된 사랑, 참된 생명, 참된 기쁨과 행복 얘기를 하네요. 짐작은 되지만... 좀 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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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 창1:14-17, ‘사랑 없는 신앙은 빛이 아니다 : 생명을 가르는 광명체의 본질’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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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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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2

사랑과 신앙을 처음에는 함께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라 하고, 그다음에는 사랑을 광명체(greater luminary), 신앙을 작은 광명체(lesser luminary) 합니다. 또한 사랑을 가리켜서는 낮을 다스린다(rule by day) 하고, 신앙을 가리켜는 밤을 다스린다(rule by night) 합니다. 이런 내용이 바로 아르카나(arcana)인데, 특히 마지막 시대에 숨겨져 있는 것을 이제 제가 설명해도 좋다는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 있었습니다. 아르카나가 특히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the consummation of the age)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복음서에서 다음과 같이 친히 예고하신 바와 같습니다. Love and faith are first called “great luminaries,” and afterwards love is called a “greater luminary,” and faith a “lesser luminary”; and it is said of love that it shall “rule by day,” and of faith that it shall “rule by night.” As these are arcana which are hidden, especially in this end of days, it is permitted of the Lord’s Divine mercy to explain them. The reason why these arcana are more especially concealed in this end of days is that 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when there is scarcely any love, and consequently scarcely any faith, as the Lord himself foretold in the evangelists in these words: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4:29) The sun shall be darkene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nd the stars shall fall from heaven, and the powers of the heavens shall be shaken (Matt. 24:29).

 

여기서 (sun) 사랑, 어두워지는 사랑을, ‘(moon) 신앙, 특히 빛을 내지 못하는 신앙을, ‘별들(stars) 신앙 관련 지식(the knowledges of faith), 하늘에서 떨어지는, 그러니까 하늘의 권능들(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의미합니다. By the “sun” is here meant love, which is darkened; by the “moon” faith, which does not give light; and by the “stars,” the knowledges of faith, which fall from heaven, and which are the “virtues and powers of the heavens.

 

[2]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합니다.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며, 천국(heavens)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모든 천국 행복이 여기서 나오는데, 그레이트(great)함은 어떤 말로도 설명할 없고, 어떤 인간의 생각으로도 결코 상상할 없습니다. 사랑의 영향을 받는 이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지만, 동시에 모든 사랑과, 결과 모든 생명, 사랑에서만 나오는 모든 생명과 모든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만 온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perceive). 그들은 자신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나 생명이나 행복은 조금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모든 사랑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은, 주님의 변화산 사건에서 광명체, (sun)로도 표현되었습니다. 기록되기를, The most ancient church acknowledged no other faith than love itself. The celestial angels also do not know what faith is except that which is of love. The universal heaven is a heaven of love, for there is no other life in the heavens than the life of love. From this is derived all heavenly happiness, which is so great that nothing of it admits of description, nor can ever be conceived by any human idea. Those who are under the influence of love, love the Lord from the heart, but yet know, declare, and perceive, that all love, and consequently all life—which is of love alone—and thus all happiness, come solely from the Lord, and that they have not the least of love, of life, or of happiness, from themselves. That it is the Lord from whom all love comes was also represented by the great luminary or “sun” at his transfiguration, for it is written: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얼굴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17:2) His face did shine as the sun, and his raiment was white as the light (Matt. 17:2).

 

얼굴은 가장 안쪽의 것들을 뜻하고, 옷은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뜻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신성(the Lord’s Divine) (sun), 사랑으로, 그의 인성(his human)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 (light)으로 상징되었습니다. Inmost things are signified by the face, and the things that proceed from them by the raiment. Thus the Lord’s Divine was signified by the “sun,” or love; and his human by the “light,” or wisdom proceeding from love.

 

해설

AC.32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조 넷째 날의 ‘ 광명체’가 왜 처음에는 함께 ‘ 광명체들’이라 불리다가, 이어서는 하나는 ‘ 광명체’, 다른 하나는 ‘ 작은 광명체’라고 불리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속뜻에서 사랑과 신앙은 모두 사람을 밝히는 광명체이지만, 둘의 관계에는 분명한 질서가 있습니다. 사랑이 ‘ 광명체’이고 신앙이 ‘ 작은 광명체’입니다. 또한 사랑은 ‘낮을 다스리고’, 신앙은 ‘밤을 다스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치 비교가 아닙니다. AC.30에서 이미 밝혔듯이 생명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신앙은 서로 경쟁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사랑이 먼저이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때문에 둘 다 광명체이지만 사랑은 더 큰 광명체로, 신앙은 더 작은 광명체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아르카나’라고 부르면서, 특히 당시의 ‘마지막 시대’에는 이 사실이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세대의 종말’에 이르러 사랑이 거의 없고, 그 결과 신앙도 거의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순서입니다. 그는 ‘신앙이 없어져서 사랑도 없어졌다’고 하지 않고, ‘사랑이 거의 없고, 결과 신앙도 거의 없다’고 합니다. 이것만으로도 AC.32가 말하려는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마24:29을 인용합니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는 말씀에서, ‘’는 사랑을, ‘’은 신앙을, ‘별들’은 신앙에 관한 지식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속뜻에서는 사랑이 어두워지고, 신앙이 빛을 잃으며, 신앙에 관한 지식들까지 그 본래의 자리를 잃는 교회의 영적 상태가 묘사됩니다.

 

이 관계는 매우 중요합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만 따로 온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생명이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교리와 신앙고백과 성경 지식이 남아 있을 수 있어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분리되면 그것은 본래의 생명을 잃어 갑니다. 그래서 해가 어두워질 때 달도 빛을 내지 못하고 별들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태고교회와 천적 천사들을 예로 듭니다.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다’고 하며,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의 신앙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진리가 없었다거나 신앙에 속한 것을 몰랐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과 신앙이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들에게 신앙은 사랑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안에 있는 신앙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 천국은 사랑의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천국에는 사랑의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이 없으며, 모든 천국의 행복도 여기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천국의 행복은 단순히 좋은 환경이나 즐거운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생명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천적 상태에 있는 이들은 자신들의 사랑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면서도, 모든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모든 생명과 행복이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고, 고백하며, 지각합니다’. 이것은 AC.29-30에서 계속 이어져 온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셋째 날의 사람은 아직 자신이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지만,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사람은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주님의 변화산 사건과 연결합니다. 마17:2에서 주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그는 ‘얼굴’이 가장 안쪽의 것들을, ‘’이 거기에서 나오는 것들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신성은 ‘’, 곧 사랑으로 표현되고,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지혜는 ‘’으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도 같은 질서가 나타납니다. 사랑이 근원이고, 지혜와 빛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AC.32에서 해가 사랑이고 달이 신앙이라는 것은 단순한 상응표 하나를 배우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 상응 안에는 거듭남과 천국의 근본 질서가 들어 있습니다.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며, 신앙은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사랑이 사라지면 신앙도 빛을 잃고, 신앙에 관한 지식들 역시 본래의 영적 기능을 잃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근원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천적 천사들이 사랑과 생명과 행복을 자기에게서 조금도 얻지 않는다고 지각하듯, 사람의 참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신앙 역시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깊어진다는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진리를 알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가 사람 안에서 회복되고 그 모든 생명의 근원이 주님임을 점점 더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AC.32에서 ‘ 광명체’와 ‘ 작은 광명체’가 보여 주는 아르카나입니다. 사랑은 해처럼 중심에 있고, 신앙은 그 사랑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이 질서가 사라진 시대에 바로 그 질서를 다시 밝혀 주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이 글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심화

1. 세대의 종말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 심화 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AC.32.심화1. ‘세대의 종말’은 왜 수백 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일까? 위 AC.32 본문,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now is the consummation of the age) 말인데요, 이 글, 곧 ‘Arcana Coe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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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 심화 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AC.32.심화2. 왜 사랑이 사라지면 사랑과 신앙의 아르카나도 가려지는가? 위 AC.32 본문, ‘이 아르카나가 특히 이 마지막 시대에 가려져 있는 이유는, 지금이 세대의 종말이기 때문이며, 이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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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 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AC.32.심화 3. 여기서 말하는 ‘태고교회, 천적 천사들’의 의미 위 AC.32 본문, ‘태고교회는 사랑 자체 외에 무슨 다른 신앙을 알지 못했습니다. 천적 천사들 역시 사랑에 속한 신앙 외에 무슨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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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 창1:14-17, 생명과 기쁨, 행복의 근원은 ‘사랑’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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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큰 광명체들’의 속뜻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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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14-17)

 

AC.31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의 의미가 사랑과 신앙이며, 또한 ,,(sun, moon, and stars)이라 한다는 사실은 선지자들의 글을 보면 분명합니다. 에스겔에서처럼 말입니다. That the “great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and are also called “sun, moon, and stars,”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Ezekiel:

 

7내가 너를 불 끄듯 할 때에 하늘을 가리어 별을 어둡게 하며 해를 구름으로 가리며 달이 빛을 내지 못하게 할 것임이여 8하늘의 모든 밝은 빛을 내가 네 위에서 어둡게 하여 어둠을 네 땅에 베풀리로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32:7, 8) When I shall extinguish thee, I will cover the heavens and make the stars thereof black; I will cover the sun with a cloud, and the moon shall not give her light; all the luminaries of the light of heaven will I make black over thee, and I will set darkness upon thy land (Ezek. 32:7–8).

 

이 구절들은 바로와 애굽을 다루는데, 말씀에서 바로와 애굽은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의 원리를 뜻합니다.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 이사야에서도 그렇습니다. In this passage Pharaoh and the Egyptians are treated of, by whom are meant, in the Word, the principle of mere sense and of mere knowledge [sensuale et scientificum]; and here, that by things of sense and of mere knowledge, love and faith had been extinguished. So in Isaiah:

 

9보라 여호와의 날 곧 잔혹히 분냄과 맹렬히 노하는 날이 이르러 땅을 황폐하게 하며 그중에서 죄인들을 멸하리니 10하늘의 별들과 별 무리가 그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돋아도 어두우며 달이 그 빛을 비추지 아니할 것이로다 (13:9,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to set the land in desolation, for the stars of heaven and the constellations thereof shall not give their light; the sun is darkened in his going forth, and the moon shall not cause her light to shine (Isa. 13:9–10).

 

요엘에서도입니다. Again, in Joel:

 

1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빛이 산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10그 앞에서 땅이 진동하며 하늘이 떨며 해와 달이 캄캄하며 별들이 빛을 거두도다 (2:1-2, 10) The day of Jehovah cometh,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the earth trembleth before him, the heavens are in commotion; the sun and the moon are blackened, and the stars withdraw their brightness (Joel 2:1–2, 10).

 

[2] 다시 이사야에서는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곧 새 교회와, 특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gain, in Isaiah, speaking of the advent of the Lord and the enlightening of the gentiles, consequently of a new church, and in particular of all who are in darkness, and receive light, and are being regenerated:

 

1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20다시는 네 해가 지지 아니하며 네 달이 물러가지 아니할 것은 여호와가 네 영원한 빛이 되고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 (60:1-3, 20) Arise, shine, for thy light is come; behold darkness covers the earth, and thick darkness the peoples, and Jehovah shall arise upon thee, and the gentiles shall come to thy light, and kings to the brightness of thy rising;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thy sun shall no more go down, neither shall thy moon withdraw itself, for Jehovah shall be to thee a light of eternity (Isa. 60:1–3, 20).

 

시편도 이렇게 말합니다. So in David:

 

5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6땅을 물 위에 펴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7큰 빛들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8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9달과 별들로 밤을 주관하게 하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136:5-9) Jehovah in intelligence maketh the heavens; he stretcheth out the earth above the waters; he maketh great luminaries, the sun to rule by day, the moon and stars to rule by night (Ps. 136:5–9).

 

3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4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148:3, 4) Glorify ye Jehovah, sun and moon, glorify him, all ye stars of light, glorify him, ye heavens of heavens, and ye waters that are above the heavens (Ps. 148:3–4).

 

[3] 이 모든 구절에서 광명체들(luminaries)은 사랑과 신앙을 뜻합니다.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나타내고 뜻했기 때문에,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습니다. 그 교회의 모든 규례는 주님을 대표, 즉 표상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이 등불에 관한 기록입니다. In all these passages, “luminaries” signify love and faith. It was because “luminaries” represented and signified love and faith toward the Lord that it was ordained in the Jewish church that a perpetual luminary should be kept burning from evening till morning, for every ordinance in that church was representative of the Lord. Of this luminary it is written:

 

20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27:20, 21) Command the sons of Israel that they take oil for the luminary, to cause the lamp to ascend continually: in the tabernacle of the congregation without the veil, which is before the testimony, shall Aaron and his sons order it from evening even until morning, before Jehovah (Exod. 27:20–21).

 

이 모든 것이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속 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신다는 뜻임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적절한 곳에서 밝힐 것입니다. That these things signify love and faith, which the Lord kindles and causes to give light in the internal man, and through the internal man in the external, will of the Lord’s Divine mercy be shown in its proper place.

 

해설

AC.31에서 스베덴보리는 앞의 AC.30에서 밝힌 광명체들의 의미를 말씀 전체의 여러 구절을 통하여 확인합니다. 1의 해와 달과 별은 단순히 자연계의 천체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선지서에서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거나 빛을 잃는 장면은 자연계의 천체에 일어날 사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교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이 쇠하거나 소멸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겔32:7-8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바로와 애굽을 다루는데, 그는 말씀에서 바로와 애굽이 여기서는 감각적인 것과 단지 지식적인 것의 원리를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상태가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감각이나 지식 자체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표현도 단지 감각적인 ’, ‘단지 지식적인 에 초점이 있습니다. 사람이 감각과 기억 지식에만 머물러 그것을 영적인 것보다 앞세울 때, 사랑과 신앙의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3:9-10과 욜2:1-2,10에서도 해와 달과 별이 어두워지는 모습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 구절들을 여기서 인용하는 이유는 같은 상응이 말씀의 여러 곳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해와 달과 별이 문자적으로는 천체이지만, 속뜻에서는 사랑과 신앙에 관계된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들의 빛이 사라지는 모습으로 사랑과 신앙이 쇠하고 어두워지는 상태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AC.31은 어두워짐만 말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사60:1-3,20에서는 반대의 상태가 나타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구절이 주님의 강림과 이방인들의 밝아짐, 따라서 새 교회에 관한 것이며, 특별히 어둠 가운데 있다가 빛을 받아 거듭나는 모든 사람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앞에서는 해와 달과 별의 빛이 사라졌지만 여기서는 빛이 임하고, 여호와께서 영원한 빛이 되시며, 해가 다시 지지 않고 달도 물러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랑과 신앙의 빛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이 이 말씀을 통하여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것은 AC.30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앞 글에서 스베덴보리는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것들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는 분은 주님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해와 달의 빛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영적 빛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사랑하고 믿고 진리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창조 넷째 날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놓이는 것도 이러한 사랑과 신앙이 속 사람 안에 자리 잡는 거듭남의 상태와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시136:5-9와 시148:3-4도 인용합니다. 136에서는 큰 빛들과 해와 달과 별이 창조되고 낮과 밤을 주관하는 모습이 나오며, 148에서는 해와 달과 밝은 별들이 여호와를 찬양합니다. 이러한 여러 인용을 통하여 스베덴보리가 보여 주려는 핵심은 말씀에서 광명체들이 사랑과 신앙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창1의 넷째 날도 자연계의 천체에 관한 문자적 서술 안에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사랑과 신앙의 질서를 담고 있습니다.

 

AC.31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 의미가 유대교회의 예배 규례와도 연결됩니다. 27:20-21에서는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사용하여 회막 안의 등불을 저녁부터 아침까지 계속 밝히도록 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광명체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을 표상하고 뜻했기 때문에 이러한 규례가 주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유대교회의 규례들이 주님을 표상하는 것이었으므로, 성막의 등불 역시 단순히 공간을 밝히기 위한 조명 이상의 대표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의미를 마지막 문장에서 매우 중요하게 정리합니다. 그 등불에 관한 규례는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시고 빛나게 하시며, 사람을 통해 사람 안에서도 그렇게 하시는 을 뜻합니다. 다만 스베덴보리는 그 자세한 의미를 여기서 모두 설명하지 않고 적절한 곳에서밝히겠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AC.31에서는 등불의 세부적인 상응을 앞당겨 확정하기보다, 사랑과 신앙의 근원이 주님이며 그것들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큰 원리를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1의 여러 성경 인용은 각각 별개의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모아 놓은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이사야, 요엘, 시편, 출애굽기를 가로질러 하나의 일관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면 광명체들이 어두워지는 것으로 표현되고, 사랑과 신앙이 주님에게서 새롭게 받아들여지면 빛이 임하는 것으로 표현되며, 예배의 표상 안에서는 계속 밝혀지는 등불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AC.31의 중심은 해와 달과 별의 상응을 아는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중심은 우리의 사랑과 신앙에 생명을 주고 빛을 주시는 분이 누구인가에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이 스스로 빛의 근원이 아니듯, 사람 안의 참된 사랑과 신앙도 사람 자신의 proprium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속 사람 안에서 사랑과 신앙을 불붙이고 빛나게 하시며, 그것이 속 사람을 통하여 겉 사람의 삶에도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창조 넷째 날의 광명체들을 통하여 AC.31이 보여 주는 거듭남의 중요한 질서입니다.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 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AC.31.심화 1.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는 실제 사례’ 위 AC.31 본문, ‘여기서는 감각과 단순한 지식에 의해 사랑과 신앙이 소멸되었음을 말합니다.’(and here, that by t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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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 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AC.31.심화 2. 사60에 나오는 ‘새 교회’ 위 AC.31 [2]에서 사60:1-3, 20을 인용하며 ‘새 교회’를 언급하는데요, 이 ‘새 교회’는 어떤 새 교회인가요? 지금은 현 기독교 이후에 오는 교회를 ‘새 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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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적 의미를 몰라도 어떻게 거룩한 표상을 지킬  있었을까?

 

AC.31, 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AC.31.심화 3. ‘유대교회의 항상 타는 등불의 규례’ 위 AC.31 [3]의 ‘유대교회에서는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타는 등불을 두도록 했다’는 부분 말인데요, 그들은 정말 ‘영원히’ 이 규례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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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2, 창1:14-17, ‘큰 광명체’는 사랑, ‘작은 광명체’는 신앙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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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0, 창1:14-17,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AC.30-37)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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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And God said, Let there be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distinguish between the day and the night; and let them be for signs, and for seasons, and for days, and for years. And let them be for luminaries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God made two great luminaries, the greater luminary to rule by day, and the lesser luminary to rule by night; and the stars. And God set them in the expanse of the heavens, to give light upon the earth; (1:14-17)

 

AC.30

큰 광명체들(great luminaries)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먼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자라 가는지를 알지 않으면 분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시며,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생명을 가질 수 없습니다. 이는 주님 친히 요한복음에서 밝히신 바입니다. What is meant by “great luminaries” cannot be clearly understood unless it is first known what is the essence of faith, and also what is its progress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The very essence and life of faith is the Lord alone, for he who does not believe in the Lord cannot have life, as he himself has declared in John: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3:36) He that believeth on the son hath eternal life, but he that believeth not on the son shall not see life, but the wrath of God shall abide upon him (John 3:36).

 

[2] 새로 창조되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신앙이 자라 가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생명이 없습니다. 생명은 선과 진리 안에만 있고, 악과 거짓 안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에 그들은 신앙을 통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데, 먼저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에 불과한 신앙인 기억 지식의 신앙을 받습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 신앙을 받고, 마지막으로는 마음에 속한 신앙, 곧 사랑의 신앙이며 구원의 신앙을 받습니다.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3절로 13절에서 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며,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는 신앙은 20절로 25절에서 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이 때문에 여기서는 이제 처음으로 사랑과 거기서 나온 신앙을 다루는데, 이것들이 바로 광명체들(luminaries)입니다. 사랑은 낮을 다스리는 큰 광명체(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이고,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입니다. 이 두 광명체는 하나가 되어야 하므로, 광명체들이 있어(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라는 라틴어 단수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라틴어 복수 표현인 [sint luminaria]가 아니고 말입니다. The progression of faith with those who are being created anew is as follows. At first they have no life, for it is only in the good and the true that there is life, and none in the evil and the false; afterwards they receive life from the Lord by faith, first by faith of the memory, which is a faith of mere knowledge [fides scientifica]; next by faith in the understanding, which is an intellectual faith; lastly by faith in the heart, which is the faith of love, or saving faith. The first two kinds of faith are represented from verse 3 to verse 13, by things inanimate, but faith vivified by love is represented from verse 20 to verse 25, by animate things. For this reason love, and faith thence derived, are now here first treated of, and are called “luminaries”; love being “the greater luminary which rules by day”; faith derived from love “the lesser luminary which rules by night”; and as these two luminaries ought to make a one, it is said of them, in the singular number, “Let there be luminaries” [sit luminaria], and not in the plural [sint luminaria].

 

[3] 속 사람 안에서의 사랑과 신앙은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의 열과 빛과 같으므로, 전자는 후자로 표현됩니다. 이런 이유로 광명체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set in the expanse of heaven)라고 하는데, 이는 속 사람 안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큰 광명체는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는 이해 안에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입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것은 오직 주님의 자비뿐입니다. Love and faith in the internal man are like heat and light in the external corporeal man, for which reason the former are represented by the latter. It is on this account that luminaries are said to be “set in the expanse of heaven,” or in the internal man; a great luminary in its will, and a lesser one in its understanding; but they appear in the will and the understanding only as does the light of the sun in its recipient objects. It is the Lord’s mercy alone that affects the will with love, and the understanding with truth or faith.

 

해설

AC.30의 중심은 창조 넷째 날에 나타나는 광명체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해와 달의 상응부터 설명하지 않고 먼저 신앙의 본질과 생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 답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의 본질과 생명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신앙이 생명을 가지는 것은 사람이 어떤 교리를 알고 있거나 그것을 지적으로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신앙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3:36을 인용하여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음을 먼저 밝힙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새로 창조되는 사람, 곧 거듭나는 사람 안에서 신앙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를 세 단계로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기억에 속한 신앙’, 곧 단지 지식으로 알고 있는 신앙입니다. 말씀과 교리를 배우고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진리인지를 기억 속에 가지고 있지만, 아직 그것이 사람의 내적 생명이 된 것은 아닙니다. 다음에는 이해에 속한 신앙’, 곧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신앙이 옵니다. 사람은 이제 배운 진리가 왜 참인지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것에 지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아직 신앙의 완성은 아닙니다.

 

마지막에는 마음에 속한 신앙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의 신앙또는 구원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앙이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얻거나 더 정교한 이해에 도달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함으로써 생명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의 두 종류의 신앙은 창1:3-13생명 없는 것들로 표현되고, 사랑에 의해 생명을 얻은 신앙은 창1:20-25생명 있는 것들로 표현됩니다. 셋째 날까지 나타난 빛과 궁창과 땅과 식물은 반드시 필요한 준비이지만, 아직 사랑으로 생명을 얻은 신앙 자체는 아닙니다.

 

이 점은 바로 앞의 AC.29와도 매우 중요하게 연결됩니다. 셋째 날에는 이미 땅에서 풀이 돋고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까지 나타났습니다. 실제로 선하고 참된 것이 사람의 삶에서 어느 정도 열매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스베덴보리는 그 단계가 아직 생명 없는 것들에 속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넷째 날에 이르러 결정적인 변화가 시작됩니다. 사랑과 신앙이 광명체들로 나타나고, 그 생명의 근원이 주님에게 있음을 점점 인정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넷째 날의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는 단순히 자연계의 해와 달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낮을 다스리는 광명체는 사랑을, ‘밤을 다스리는 작은 광명체는 사랑에서 나온 신앙을 뜻합니다. 여기서 순서가 중요합니다. 신앙이 먼저 있고 거기에 나중에 사랑이 덧붙는 것이 아니라, 생명 있는 신앙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큰 광명체이고 신앙이 작은 광명체인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신앙은 서로 분리된 두 생명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둘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라틴어 표현까지 주목합니다. 본문에서 광명체들을 말하면서도 동사가 복수형 sint가 아니라 단수형 sit으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하나를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면 그 신앙에는 본래 있어야 할 생명이 없으며, 사랑 역시 그 사랑에서 나오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 속 사람 안의 사랑과 신앙을 겉 사람의 육체적 차원에서 경험하는 열과 빛에 비유합니다. 그래서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놓였다고 하는 것은 그것들이 속 사람 안에 놓였음을 뜻합니다. 큰 광명체인 사랑은 의지 안에, 작은 광명체인 신앙은 이해 안에 있습니다. 여기서 의지와 이해는 단순한 인간의 심리 기능이 아니라,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중요한 두 능력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중요한 구별이 하나 나옵니다. 사랑과 신앙이 사람의 의지와 이해 안에 있으므로 얼핏 보면 그것들이 사람 자신의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내가 이해하며, 내가 믿는 것처럼 경험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나타날 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태양의 빛이 어떤 대상을 비추면 그 대상 자체가 빛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빛의 근원은 그 대상에 있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의지를 사랑으로 움직이게 하고 이해를 진리 또는 신앙으로 비추는 근원은 오직 주님의 자비입니다.

 

이것은 셋째 날과 넷째 날 사이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특히 중요합니다. 셋째 날의 사람도 이미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아직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깁니다. 넷째 날에는 사람이 점차 그 선과 진리의 생명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합니다. 사람이 선을 행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와 이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사람은 여전히 자유롭게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합니다. 다만 그 선과 진리의 생명과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주님께 돌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0에서 말하는 넷째 날은 단순히 신앙이 강해지는단계가 아닙니다. 신앙의 성질 자체가 달라지는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기억에만 있던 신앙, 이해에 머물던 신앙이 사랑과 결합하여 마음의 신앙이 되고, 비로소 구원의 신앙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랑과 사랑에서 나온 신앙이 큰 광명체와 작은 광명체로 표현됩니다.

 

결국 넷째 날의 핵심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도 아니고 내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믿고 있는가도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신앙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사람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옵니다. 이것을 깨닫고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앞선 날들 동안 준비되어 온 사람의 내면에 비로소 광명체들이 놓이고, 그 빛 아래에서 다음 단계의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날 준비가 이루어집니다.

 

심화

1. 의지와 이해 안에 나타나지만 그 근원은 주님께 있다는 것

 

AC.30, 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

AC.30.심화 1.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지와 이해 안에서 그렇게 나타날 뿐’ 위 AC.30 분문 [3], ‘그러나 그것들은 태양의 빛이 그것을 받는 대상 안에서 보이듯이,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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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1, 창1:14-17, ‘큰 광명체들’의 속뜻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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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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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어에서 ‘homo’와 ‘vir’는 모두 한국어로 번역하면 흔히 ‘사람’ 또는 ‘남자’로 번역될 수 있지만, 원래 의미와 뉘앙스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특히 스베덴보리의 저작, 예컨대 ‘Arcana Coelestia’나 ‘Heaven and Hell’을 읽을 때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의 단어 선택이 단순한 문체상의 차이가 아니라 ‘영적 상태의 차이’를 표현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는 ‘homo’를 쓰고, 어떤 곳에서는 ‘vir’를 쓰는데, 이것은 단순한 문법상의 선택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상태와 관련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homo’는 가장 기본적인 의미로 ‘인간’, ‘사람’, ‘인류’를 뜻하는 말입니다. 남자만을 의미하지 않고 여자도 포함하는 ‘human being’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라틴어에서 ‘homo’는 인간 종 전체를 가리키거나,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말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homo’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을 강조할 때 쓰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 단어를 매우 자주 사용하며, 특히 ‘인간이라는 존재가 무엇인가’를 말할 때 ‘homo’를 씁니다. 예컨대 인간이 ‘의지와 이해’를 가진 존재라는 점, 또는 인간이 ‘사랑과 지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을 말할 때 ‘homo’라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omo’는 ‘인간 일반’, ‘영적 존재로서의 인간’,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는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vir’는 훨씬 좁은 의미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말은 원래 ‘성인 남자’, ‘남성’, 또는 ‘용기 있는 남자’를 의미합니다. 고전 라틴어에서 ‘vir’는 단순히 남성이라는 뜻뿐 아니라 ‘용기’, ‘덕성’, ‘남자다움’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vir’에서 ‘virtus’(덕, 용기)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합니다. 성경 라틴어에서도 ‘vir’는 보통 ‘남자’, ‘남편’, 또는 ‘특정한 인물’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vir’는 종종 ‘여자와 대비되는 남자’ 또는 ‘특정한 인격적 주체’를 강조할 때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의 해석에서는 이 차이가 더욱 의미를 갖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homo’는 인간 전체, 곧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성’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다시 말해 ‘homo’는 남녀를 포함한 ‘사람이라는 존재’를 가리키며, 더 깊은 의미에서는 ‘교회에 속한 인간’, ‘주님의 형상과 모양을 받을 수 있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반면 ‘vir’는 보통 ‘이해 또는 진리의 측면’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종종 남자를 ‘이해 또는 진리’, 여자를 ‘의지 또는 선’과 상응한다고 설명하는데, 이 맥락에서 ‘vir’는 진리를 담당하는 측면, 즉 이해의 기능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창1:26의 ‘사람을 만들자’라는 구절에서 사용되는 ‘사람’은 라틴어로 ‘homo’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남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창2에서 ‘남자와 여자’가 구별되어 등장할 때는 ‘vir’와 ‘mulier’가 사용됩니다. 여기서는 남성과 여성의 구별이 강조되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단순한 성별 구분이 아니라 ‘이해와 의지’, ‘진리와 선’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vir’는 종종 ‘진리의 사람’, ‘이해의 사람’을 의미하는 쪽으로 사용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스베덴보리가 ‘진정한 인간’을 설명할 때입니다. 그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이 진리를 알고 선을 사랑할 때 비로소 ‘homo’가 된다고 합니다. 즉 ‘homo’는 단순히 생물학적 인간이 아니라 ‘영적으로 인간다운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to become a man’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히 성장한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인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homo’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homo’는 ‘인간 일반’, ‘인류’, ‘남녀를 포함한 사람’, 더 깊게는 ‘주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인간 존재’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반면 ‘vir’는 ‘남성’, ‘남편’, 또는 상징적으로 ‘진리와 이해의 측면’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의 글이나 라틴어 성경을 읽을 때 어떤 구절에서 ‘homo’가 나오고 어떤 구절에서 ‘vir’가 나오는지를 보면, 그 구절이 ‘인간 전체’를 말하는지, 아니면 ‘특정한 남성적 또는 진리의 측면’을 말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이런 단어 선택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말씀의 가장 작은 부분까지도 의미를 담고 있다는 스베덴보리의 관점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SC.41,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

스베덴보리는 internal, external, interior, exterior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요? 쉽지 않겠지만, 좀 와닿게 설명해 주세요. 이 네 단어는 겉으로 보면, 단순히 ‘안/밖’의 구분 같지만, 에마누엘 스베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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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39, ‘수도원, 수도사, 성인과 스베덴보리’

수도원, 수도사 등 성인들의 삶에 대해 스베덴보리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스베덴보리를 그의 책, ‘천국과 지옥’을 통해 만나기 전, 여러 해 이쪽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 그런 삶의 유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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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1, ‘다 찬양하여라와, 찬66, ‘다 감사드리세입니다.

 

오늘은 창1 네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9절로 13절, AC 글 번호로는 27번에서 29번입니다. 본문 함께 읽습니다.

 

9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1:9-13)

 

이 본문을

 

땅이 드러나고 씨 맺는 것들, 열매를 향한 셋째 날

 

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에 주목하여 귀 기울이고자 합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AC.27, 창1:9,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And God said, Let the waters under the heaven be gathered together in one place, and let the dry [land] appear; and it was so. (창1:9) AC.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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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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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9, 창1:11-13,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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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입니다.

 

 

이렇게 해서 창1 셋째 날, 곧 거듭남의 세 번째 상태를 마칩니다. 이 ‘셋째 날, 세 번째 상태’에 나온 중요한 표현, 개념들은 속 사람과 겉 사람 간 ‘유입과 저장의 질서’, ‘기억 지식’, ‘마른 땅’, ‘’, ‘바다’ 및 오늘 본문에 나오는 ‘’, ‘씨 맺는 채소’,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 그리고 ‘inanimate’, ‘living soul’, ‘repentance’ 등입니다. 이들 개념이 각 절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에 빠짐없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부디 거듭 읽고, 또 읽고 하여 확실히 이해, 안 보고도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공지입니다. 어느덧 AC 리딩 및 해설 병행 주일예배 설교가 자릴 잡아가는 중인데요, 지난주부터이지만, 앞으로 ‘AC본문 번역-해설-심화’로 구성된 원고를 리딩하는 형태의 주일설교로 쭉 갈 것 같습니다. 해설에 심화까지 곁들이다 보니 이 정도면 그냥 읽기만 해도 정말 귀한 주일설교 한 편 한 편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주일예배는 또 시간의 제한도 고려해야 해서 그 주 범위에 해당하는 모든 글을 다 다룰 수는 없고, 그래서 오늘처럼 맨 끝 AC 글 한 편만 리딩하고자 합니다. 다만 그 앞 범위 글들은 오늘처럼 모두 프린트해서 나눠드리고요. 프린트가 없어도 제 블로그에 글 번호별로 계속 올리고 있으니 참고하세요.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3-15(D1)

 

2642, 4. 창1.4, 2026-03-15(D1)-주일예배(창1,9-13, AC.27-29), ‘셋째 날, 세 번째 상태’.pdf
0.68MB

 

 

주일예배(2026/03/22, 창1:9-25, AC.30-45), '넷째 날, 다섯째 날, 여섯째 날'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2, ‘만유의 주 앞에’와, 찬67, ‘영광의 왕께 다 경배하며’입니다. 오늘은 창1 다섯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4절로 25절, AC 글 번호로는 30번에서 45번입니다.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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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3/08, 창1:6-8, AC.24-26), '둘째 날, 두 번째 상태'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0, ‘큰 영광 중에 계신 주’와, 찬65, ‘내 영혼아 찬양하라’입니다. 오늘은 창1 세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6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24번에서 26번입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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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 12땅이 풀과 각기 종류대로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3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 And God said, Let the earth bring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nd the fruit tree bearing fruit after its kind, whose seed is in itself, upon the earth; and it was so. And the earth brought forth the tender herb, the herb yielding seed after its kind, an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was in itself, after its kind;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1:11-13)

 

AC.29

(earth), 곧 사람이 이렇게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고, 선과 진리에 속한 어떤 싹을 낼 수 있는 상태가 되면, 주님은 먼저 아주 연약한 것을 돋아나게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tender herb)입니다. 다음으로는 더 괜찮은 것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 안에 씨를 지니고 있어 씨 맺는 채소(herb yielding seed)라고 하지요. 마지막으로는 선한 것이 나와 열매를 맺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씨 가진 열매 맺는 나무(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이며, 이 모든 것은 각기 종류대로입니다. 거듭나는 중인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는 주님에게서만 오지요. 그러므로 그것들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여기는 사람은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을 갖고 있지 않은 상태인데,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나중에 그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직 그것들이 주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며, 다만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일 준비 상태에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상태는 여기서 생명 없는(inanimate) 것들로 표현되고, 그다음에 오는 신앙의 생명 상태는 생명 있는(animate) 것들로 표현됩니다. When the “earth,” or man, has been thus prepared to receive celestial seeds from the Lord, and to produce something of what is good and true, then the Lord first causes some tender thing to spring forth, which is called the “tender herb”; then something more useful, which again bears seed in itself, and is called the “herb yielding seed”; and at length something good which becomes fruitful, and is called the “tree bearing fruit, whose seed is in itself,” each according to its own kind. The man who is being regenerated is at first of such a quality that he supposes the good which he does, and the truth which he speaks, to be from himself, when in reality all good and all truth are from the Lord, so that whosoever supposes them to be from himself has not as yet the life of true faith, which nevertheless he may afterwards receive; for he cannot as yet believe that they are from the Lord, because he is only in a state of preparation for the reception of the life of faith. This state is here represented by things inanimate, and the succeeding one of the life of faith, by animate things.

 

[2] 씨를 뿌리는 이는 주님이시며, 씨는 주님의 말씀이고, 땅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주님 자신 친히 밝혀 주셨습니다. (13:19-24, 37-39; 4:14-21; 8:11-16) The Lord is he who sows, the “seed” is his Word, and the “earth” is man, as he himself has deigned to declare (Matt. 13:19–24, 37–39; Mark 4:14–21; Luke 8:11–16).

 

19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20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21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22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23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24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37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38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39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13:19-24, 37-39)

 

14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말씀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4:14-20)

 

11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12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13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 14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15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8:11-15)

 

같은 뜻으로 주님은 이렇게도 설명하십니다. To the same purport he gives this description:

 

26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4:26-28) So is the kingdom of God, as a man when he casteth seed into the earth, and sleepeth and riseth night and day, and the seed groweth and riseth up, he knoweth not how; for the earth bringeth forth fruit of herself, first the blade, then the ear, after that the full corn in the ear (Mark 4:26–28)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가장 보편적 의미로는 전체 천국을 뜻하고, 덜 보편적으로는 주님의 참된 교회를, 가장 개별적 의미로는 참된 신앙에 속한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각 사람을 뜻합니다. 이런 이유로 이러한 사람을 천국(heaven)이라 하는데, 이는 천국이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이며, 또 그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라고도 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주님은 누가복음에서 친히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By the “kingdom of God,” in the universal sense, is meant the universal heaven; in a sense less universal, the true church of the Lord; and in a particular sense, everyone who is of true faith, or who is regenerate by a life of faith. Wherefore such a person is also called “heaven,” because heaven is in him; and likewise the “kingdom of God,” because the kingdom of God is in him, as the Lord himself teaches in Luke:

 

20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7:20, 21) Being demanded of the Pharisees when the kingdom of God should come, he answered them, and said, The kingdom of God cometh not with observation; neither shall they say, Lo here! or, Lo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 (Luke 17:20–21).

 

이것이 사람 거듭남의 세 번째 연속 단계로서, 곧 회개(repentance)의 상태이며, 이 역시 그늘에서 빛으로, 곧 저녁에서 아침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13절에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셋째 날이니라라고 하는 것입니다. This is the third successive stage of the regeneration of man, being his state of repentance, and in like manner proceeding from shade to light, or from evening to morning; wherefore it is said (verse 13),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third day.”

 

해설

AC.29에서는 셋째 날의 거듭남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앞의 AC.27-28에서는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마른 땅이 드러나는 장면을 통하여,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들이 겉 사람의 기억 속에 모이고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체가 준비되는 상태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그 준비된 ‘’에서 처음으로 무엇인가 돋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큰 나무와 풍성한 열매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연한 ’이 나오고, 다음으로 ‘ 맺는 채소’가 나오며, 마지막으로 ‘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옵니다. 이것은 거듭남이 단번에 완성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를 점차 자라게 하시는 질서 있는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때 땅, 곧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천적 씨앗’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씨앗의 근원’입니다. 땅이 씨앗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씨앗을 받아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자기 안에서 선과 진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셋째 날에 비로소 무엇인가 자라기 시작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은 땅 자체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에 있습니다.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은 ‘연한 (tender herb)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주님께서 처음 돋아나게 하시는 ‘어떤 연약한 ’이라고 표현합니다. 거듭남의 처음에는 선과 진리가 아직 매우 미약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조금 알게 되고 그것에 따라 살고자 하지만, 이전의 습관과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의 힘도 여전히 강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나타나는 선은 연한 풀처럼 쉽게 흔들리고 아직 충분히 자리 잡지 못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작고 연약하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것이 주님으로부터 사람 안에서 돋아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 맺는 채소’입니다. 여기서는 처음의 연약한 상태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 유용한 ’이라고 표현하며, 그 안에 다시 씨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 가진 열매 맺는 나무’가 나옵니다. 이제 선한 것이 열매를 맺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따라서 이 세 표현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 선과 진리를 처음 싹트게 하시고, 그것을 점차 자라게 하여 마침내 열매를 맺게 하시는 하나의 진행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AC.29의 매우 중요한 반전이 나타납니다. 이렇게 선과 진리가 싹트고 열매까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스베덴보리는 이 단계의 사람에게 아직 ‘참된 신앙의 생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 자기가 행하는 선과 자기가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모든 선과 모든 진리가 주님에게서 오지만, 이 단계의 사람은 아직 그것을 진정으로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미 완성된 영적 생명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한 준비 상태’에 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해야 왜 식물들이 여기서 ‘생명 없는 것들(inanimate things)로 표현되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자연계의 식물이 문자 그대로 생명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구별하는 것은 거듭남의 상태입니다. 셋째 날에는 선과 진리에 속한 무엇인가가 사람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지만, 사람은 아직 그것들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를 참으로 인정하지 못합니다. 다음 단계에서 등장하는 ‘생명 있는 것들’은 신앙의 생명을 실제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열매 맺는 나무’까지 왔다고 해서 거듭남이 완성된 것이 아닙니다. 셋째 날 전체는 여전히 다음 생명의 단계를 위한 준비입니다.

 

그렇다고 이때 사람이 행하는 선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바로 이 불완전한 상태에서 사람을 이끌어 가십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내가 선을 행한다’, ‘내가 진리를 말한다’, ‘내가 악을 버린다’고 느끼며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듭남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리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마치 자기 스스로 하는 것처럼 악과 싸우고 선을 행해야 합니다. 다만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그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과 능력이 자기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있다는 것을 점차 인정하게 됩니다. AC.29의 셋째 날은 바로 그 인정에 이르기 전의 중요한 준비 단계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이어서 주님의 씨 뿌리는 비유들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 자신이 ‘’를 말씀과 연결하시고, 씨가 뿌려지는 ‘’을 사람과 연결하여 설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의 차이는 같은 씨가 주어져도 그것을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창1장의 땅에서 식물이 돋아나는 모습은 단순한 자연계 식물의 창조를 넘어, 주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고 점차 열매를 향하여 자라 가는 거듭남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4:26-28의 비유는 이 성장의 또 다른 중요한 면을 보여 줍니다.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린 뒤 밤낮 자고 깨는 동안 씨는 자라지만, 그는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됩니다. 창1:11의 식물들과 각각을 일대일로 대응시킬 필요는 없지만, 두 말씀 모두 생명이 단번에 완성된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를 따라 점차 성장한다는 동일한 원리를 보여 줍니다. 인간은 거듭남의 모든 내적 과정을 스스로 볼 수도 통제할 수도 없지만, 주님께서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가운데에서도 받아들인 선과 진리를 질서 있게 자라게 하십니다.

 

이어 스베덴보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 범위로 설명합니다. 가장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전체 천국이고, 덜 보편적인 의미에서는 주님의 참된 교회이며, 개별적인 의미에서는 참된 신앙에 속한 사람, 곧 신앙의 삶으로 거듭난 각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은 단지 개인의 도덕적 개선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한 사람 안에 천국의 질서를 세우시는 일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살아갈수록, 그의 안에는 주님의 나라에 속한 질서가 형성됩니다. 눅17:20-21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는 말씀이 이 문맥에서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베덴보리는 이 셋째 단계를 ‘회개(repentance) 상태’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AC.29 전체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여기서 회개를 단지 죄를 슬퍼하거나 잘못을 후회하는 감정으로만 이해해서는 부족합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씨앗을 받아 선과 진리에 속한 것을 실제로 내기 시작하는 상태, 곧 이전의 삶에서 돌아서 새로운 삶을 향하여 움직이기 시작하는 상태가 셋째 날입니다. 다만 아직 사람은 자기가 행하는 선과 말하는 진리가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회개 역시 완성된 거듭남이 아니라 참된 신앙의 생명을 받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래서 셋째 날에도 다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됩니다’. 사람은 아직 그늘 속에 있지만 빛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으며,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생각하던 선과 진리가 실제로는 주님에게서 온다는 더 깊은 인식을 향하여 인도받고 있습니다. 연한 풀에서 씨 맺는 채소로, 다시 열매 맺는 나무로 나아가는 성장도 바로 이 저녁에서 아침으로의 진행 안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처음부터 완성된 열매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현재 상태에서 시작하여 그가 받을 수 있는 만큼 선과 진리를 싹트게 하시고 점차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AC.29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셋째 날의 사람은 아직 자기 선을 자기 것으로 여기고 있으며 참된 신앙의 생명에도 완전히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 불완전한 상태를 버리지 않으시고 거듭남의 과정으로 사용하십니다. 사람에게서 겨우 ‘연한 ’만 돋아나는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작은 시작을 다음 단계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성장의 근원은 땅인 사람에게 있지 않고 씨를 주시는 주님에게 있습니다. 결국 거듭남은 사람이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이 자기 안에서 자라고 열매 맺도록 주님께 이끌리는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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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8, 창1: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And God called the dry [land] earth, and the gathering together of the waters called he sea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창1:10)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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