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됨 없이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지내게 되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제가 그들에게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은혜를 입었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하여 저는, 지금까지 어떤 인간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고, 그의 관념 속에조차 들어온 적이 없는, 다른 삶, 곧 사후세계의 놀라운 것들을 듣고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 종류의 영들에 관하여, 죽음 이후 영혼의 상태에 관하여, 지옥 곧 불신앙 가운데 있는 자들의 비참한 상태에 관하여, 천국 곧 신앙 안에 있는 자들의 복된 상태에 관하여, 그리고 특히 온 하늘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에 대하여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제들에 관해서는 주님의 신적 자비로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더 말씀드리겠습니다.That this is really the case no one can possibly know except from the Lord. It may therefore be stated in advance that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ranted me now for some years to be constantly and uninterruptedly in company with spirits and angels, hearing them speak and in turn speaking with them. In this way it has been given me to hear and see wonderful things in the other life which have never before come to the knowledge of any man, nor into his idea. I have been instructed in regard to the different kinds of spirits; the state of souls after death; hell, or the lamentable state of the unfaithful; heaven, or the blessed state of the faithful; and especially in regard to the doctrine of faith which is acknowledged in the universal heaven; on which subjects, of the Lord’s Divine mercy, more will be said in the following pages.
해설
AC.5는 ‘Arcana Coelestia’ 서문에서 가장 조심스럽고도 가장 오해받기 쉬운 단락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해석의 근거를, 단순한 학문적 연구나 전통적 주석 방법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허락받은 독특한 경험에 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락을 바르게 이해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무엇을 주장하고 있고, 동시에 무엇을 주장하지 않고 있는지를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이 단락의 첫 문장은 매우 절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결코 알 수 없다’는 말은, 자신이 특별히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지식의 출처가 인간이 아니라 주님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속뜻의 실재성은 인간 이성이나 상상력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계시의 영역에 속한다는 선언입니다. 이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한계를 먼저 고백하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어서 ‘미리 말해 두어야 할 것’이라고 하며, 자신의 경험을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어조입니다. 그는 과장하거나 흥분하지 않으며, 기적담을 늘어놓듯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하게,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로 말미암아 ‘허락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주체는 언제나 주님이시며, 자신은 수동적으로 허락을 받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 표현은 이후 AC 전반에서 반복되며, 스베덴보리 자신이 계시의 주인이 아님을 일관되게 드러냅니다.
‘영들과 천사들과 끊임없이, 그리고 중단됨 없이 함께 지냈다’는 말은 충격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그는 이를 신비 체험의 자랑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경험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듣고’, ‘보고’,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개인적 황홀경이나 종교적 감정의 고양이 아니라, 객관적 질서와 교리를 배우는 과정입니다. 이 점에서 그의 경험은 예언자적 환상이나 신비주의적 도취와는 성격을 달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열거하는 가르침의 내용도 주목할 만합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영들, 사후 영혼의 상태, 지옥과 천국을 말하지만, 이를 선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지옥은 ‘신앙 없는 자들의 비참한 상태’로, 천국은 ‘신앙 있는 자들의 복된 상태’ 정도로 정의됩니다. 이는 장소나 형벌의 묘사가 아니라, 상태에 대한 설명입니다. 다시 말해, 천국과 지옥은 외적 공간이 아니라, 속 사람의 상태가 드러난 결과입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마지막에 언급되는 ‘온 천국에서 인정되고 있는 신앙의 교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의 신앙 이해가 개인적 통찰이나 특정 집단의 교리가 아니라, 천국 전체에서 공유되고 승인되는 질서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후 AC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기준이며, 어떤 교리가 참된가를 판단하는 잣대가 됩니다. 참된 교리는 천국과 일치하며, 거짓된 교리는 그와 어긋납니다.
이 단락은 독자에게 신중한 결단을 요구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경험을 그대로 믿을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 그의 글 전체를 어떤 전제 위에서 읽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만일 이 단락을 무시한다면, AC 전체는 근거 없는 알레고리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락을 받아들인다면, AC는 ‘주님께서 주님의 말씀을 스스로 해명하신 기록’이라는 전혀 다른 위상을 갖게 됩니다.
목회적 차원에서 AC.5는 매우 중요한 균형을 제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계시를 말하지만,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영적 세계를 말하지만, 그 목적은 언제나 교회와 신앙,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에 있습니다. 그는 독자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지 않고, 주님께로 향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주님의 신적 자비’(the Lord’s Divine mercy)라는 표현 아래 두어, 인간의 공로나 자격을 철저히 배제합니다.
결국 AC.5는 스베덴보리가 왜 이런 해석을 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이자, 동시에 그 해석이 어디까지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고백입니다. 그는 자신이 본 것과 들은 것을 증언할 뿐이며, 판단과 믿음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 둡니다. 이 절제된 태도야말로, 이 단락을 읽을 때 가장 주의 깊게 보아야 할 지점입니다.
마음이 문자적 의미, 그러니까 기록된 겉 글자에만 붙어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런 내용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그 어떤 사람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세상의 창조, 낙원이라고 하는 에덴동산, 그리고 처음 창조된 사람이라는 아담에 관한 이야기뿐입니다. 누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생각, 곧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뒤따르는 페이지들에서 충분히 입증될 텐데요, 곧, 이 내용들 안에는 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비밀들(arcana)이 들어 있으며, 실상 창세기 1장은 그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새로운 창조, 즉 그의 거듭남에 관한 것을,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에 관한 것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방식은, 그 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런 내용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그 속에 품고 있을 정도라는 사실입니다.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AC.4는 스베덴보리가 앞선 AC.1, 2, 3에서 제시한 원리를, 구체적인 성경 본문, 곧 창세기 1, 2, 3장에 직접 적용하는 첫 단락입니다. 여기서 그는 더 이상 추상적인 말씀론이나 원리 설명에 머물지 않고, 독자가 실제로 손에 쥐고 있는 성경 텍스트를 정면으로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매우 솔직한 인정입니다. 마음이 문자적 의미, 곧 기록된 겉 글자에만 매여 있는 한, 그 안에 담긴 깊은 것들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독자를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누가 그 외의 다른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는 대부분의 독자가 창세기 초반을 읽을 때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이해를 그대로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세상의 창조, 에덴동산, 아담이라는 최초의 인간, 이것이 기록된 겉 글자에서 보이는 전부입니다. 다시 말해, 글자적 의미만으로, 겉뜻으로만 읽는 독자는 잘못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거기까지’만 읽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멈출 때 발생합니다. AC.3에서 이미 말했듯이, 글자는 겉 사람에 해당하며, 속 사람이 누락될 경우 살아 있다 할 수 없습니다. AC.4는 이 구조를 성경 본문에 직접 대입합니다. 창세기 1, 2, 3장을 오직 우주론적 기원 이야기나 고대 신화적 서사로만 읽을 경우, 그 본문은 겉 사람의 차원에만 머물게 됩니다. 형태는 있으나 생명은 감지되지 않지요.
이제 스베덴보리는 결정적인 주장을 제시합니다. 창세기 첫 장은 그 속뜻에 있어,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을 다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창조’는 우주의 물질적 시작이 아니라, 인간 속 사람의 형성과 질서를 뜻합니다. 빛과 어둠, 물의 분리, 땅과 식물, 해와 달, 생물의 창조라는 일련의 과정은, 한 인간이 무질서한 상태에서 점차 질서를 회복하며 주님과 결합해 가는 영적 과정을 상응(相應, correspondence)으로 표현합니다.
더 나아가 스베덴보리는 이 장이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말합니다. 이는 창세기 이야기가 단지 개인의 내면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한 교회의 영적 상태를 동시에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태고교회는 주님과의 직접적인 결합 속에서 사랑을 중심으로 살았던 교회이며, 창세기 1장의 질서와 조화는 바로 그 교회의 내적 상태를 반영합니다. 이처럼 말씀은 개인과 공동체, 내면과 역사라는 여러 층위를 동시에 품고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 가장 강렬한 표현은 마지막 문장입니다.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러한 것들을 나타내고, 의미하며, 그 안에 품고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선언은, 스베덴보리 해석학의 절대적 일관성을 보여 줍니다. 그는 어떤 단어는 속뜻이 있고, 어떤 단어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표현이 예외 없이 속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 속뜻은 거듭남과 태고교회,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는 독자에게 큰 전환을 요구합니다. 창세기 초반을 ‘이미 다 아는 이야기’로 읽는 태도에서,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하는 이야기’로 읽는 태도로의 전환입니다. 문자에 머물면 익숙함만 남지만, 속뜻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 세계가 자신의 개인적 통찰이 아니라, 앞으로의 설명을 통해 ‘충분히 입증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AC 전체가 하나의 증명 과정임을 미리 밝히는 선언입니다.
결국 AC.4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창세기를 과거의 이야기로 읽을 것인가, 아니면 지금도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할 거듭남의 이야기로 읽을 것인가. 겉 사람의 눈으로만 볼 것인가, 아니면 속 사람이 깨어나 그 속뜻을 인식하도록 허락할 것인가. 스베덴보리는 후자를 선택하도록 초대하며, ‘Arcana Coelestia’의 본격적인 여정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말씀은 문자, 즉 겉 글자에 있어서는 죽은 것입니다. 이 점에서의 경우는, 기독교 세계에서 잘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과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동일합니다. 속 사람과 분리될 때 겉 사람은 몸에 불과하며, 그러므로 죽은 것입니다. 살아 있는 것은 속 사람이며, 겉 사람이 살아 있도록 만드는 것도 속 사람인데, 이 속 사람이 곧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도 이와 같아서, 겉 글자만으로 보자면 영혼 없는 몸과 같습니다.Without such a life, the Word as to the letter is dead. The case in this respect is the same as it is with man, who—as is known in the Christian world—is both internal and external. When separated from the internal man, the external man is the body, and is therefore dead; for it is the internal man that is alive and that causes the external man to be so, the internal man being the soul. So is it with the Word, which, in respect to the letter alone, is like the body without the soul.
해설
AC.3은 앞선 AC.1과 AC.2에서 제시된 논증을 하나의 비유로 완결시키는 단락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생명’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기독교 세계에 널리 알려진 인간 이해, 곧 ‘내적 인간(internal man, 속 사람)과 외적 인간(external man, 겉 사람)’의 구분에 정확히 대응시킵니다. 이로써 그는 독자가 더 이상 이를 난해한 신비주의나 특수한 계시 주장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론 위에 말씀론을 올려놓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단언하는 첫 문장은 매우 강력합니다. ‘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말씀은 문자에 있어서는 죽은 것이다’라는 선언은, 성경의 권위를 문자 자체에 두려는 모든 태도에 근본적인 도전을 던집니다. 여기서 ‘죽었다’라는 표현은 단순한 과장이 아닙니다. 그는 생명이라는 개념을 실제 존재론적 기준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생명이 없는 것은 아무리 형태를 갖추고 있어도 참된 의미에서 살아 있다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때 제시되는 비유가 바로 인간입니다. 인간은 겉 사람과 속 사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인식은, 성경적 인간관의 핵심이자 기독교 전통에서 널리 받아들여진 이해입니다. 몸과 영혼, 혹은 외적 삶과 내적 삶의 구분은 누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공통 인식을 그대로 끌어와, 말씀에 적용합니다. 이는 매우 설득력 있는 방식입니다. 왜냐하면 독자는 이미 ‘몸만 있고 영혼 없는 상태’를 죽음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말합니다. 겉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이 살아 있으며, 겉 사람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도 속 사람입니다. 겉 사람은 속 사람이 떠나는 순간, 즉 영혼이 분리되는 순간, 더 이상 인간이라기보다 ‘몸’이 됩니다. 살아 있는 형상을 유지할 수는 있지만, 생명은 없습니다. 이 논리를 그대로 말씀에 적용하면, 문자적 의미는 겉 사람, 곧 몸에 해당하고, 내적 의미는 영혼에 해당합니다.
이 비유가 중요한 이유는, 문자 자체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몸은 필요합니다. 몸이 없으면 영혼은 세상에서 작용, 즉 활동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문자가 없으면 내적 의미(internal sense), 그러니까 속뜻은 인간의 언어 속으로 내려올 수 없습니다. 문제는 분리가 아니라 단절입니다. 몸이 영혼과 결합되어 있을 때만 인간이듯, 문자가 내적 의미와 결합되어 있을 때만, 겉 글자가 속뜻과 결합되어 있을 때만 말씀도 살아있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문자를 버리자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문자를 ‘살아 있게 하자’고 말합니다.
‘문자만으로 보자면 영혼 없는 몸과 같다’는 마지막 문장은, 성경 해석뿐 아니라 설교와 신앙 실천 전체를 향한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문자적 해석만으로도 얼마든지 교리도 만들 수 있고, 윤리적 가르침도 전할 수 있으며, 종교 제도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살아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집니다.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며, 주님을 향하지 않는 것은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단락을 앞선 AC.2와 연결해 보면, 구조가 분명해집니다. AC.2에서는 ‘주님을 내적으로 가리키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다’고 했고, AC.3에서는 그 이유를 인간의 구조에 비추어 설명합니다. 즉, 주님을 향하는 내적 의미가 곧 말씀의 영혼이며, 이것이 빠질 때 문자는 시체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논리는 매우 일관되며, 이후 ‘Arcana Coelestia’ 전체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됩니다.
목회적 관점에서 보면, AC.3은 매우 실제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성경을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읽고 있는가, 아니면 정교하게 보존된 ‘종교적 시신’으로 다루고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형식은 살아 있으나 생명이 없는 신앙, 언어는 풍부하나 주님을 향하지 않는 교리, 제도는 유지되나 내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 교회는, 이 비유에 따르면 이미 겉 사람만 남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AC.3은 성경 해석의 문제를 넘어, 교회와 신앙의 생사를 가르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내적 의미, 곧 주님을 향한 생명이 문자를 살릴 때에만 말씀이 말씀이 됩니다. 이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살아 있는 말씀’의 핵심이며, 이후 모든 상응 해설과 내적 의미 풀이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까지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그 안에 품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구약 성경은 거의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참으로 그러한 성격을 지닌다는 사실은 단 한 가지 숙고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그것은 필연적으로 천국과 교회와 신앙에 속한 것들을 그 안에 지니고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이라 불릴 수 없을 것이며, 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생명에 속한 것들에서 오지 않는다면 어디에서 오겠습니까? 곧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그 말씀에는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으며,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지 그 안에 그분을 품고 있지 않다면, 다시 말해 그 나름의 방식으로 그분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적인 것이 아니라고 참되게 말할 수 있습니다.The Christian world, however, is as yet profoundly unaware of the fact that all things in the Word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nay, the very smallest particulars down to the most minute iota, signify and enfold within them spiritual and heavenly things, and therefore the Old Testament is but little cared for. Yet that the Word is really of this character might be known from the single consideration that being the Lord’s and from the Lord it must of necessity contain within it such things as belong to heaven, to the church, and to religious belief, and that unless it did so it could not be called the Lord’s Word, nor could it be said to have any life in it.For whence comes its life except from those things that belong to life, that is to say, except from the fact that everything 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so that anything which does not inwardly regard him is not alive; and it may be truly said that any expression in the Word that does not enfold him within it, that is, which does not in its own way bear reference to him, is not Divine.
해설
이 단락에서 스베덴보리는 서문 AC.1번에서 제시한 전제를 한 단계 더 밀고 나갑니다. AC.1번이 ‘말씀 안에는 내적 의미가 있다’는 선언이었다면, AC.2번은 ‘그 사실을 기독교 세계가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여기서 ‘기독교 세계’란 성경을 소유하고 읽으며 설교하는 공동체 전체를 가리킵니다. 이는 비판이라기보다 현실 인식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구약 성경은 도덕적 본보기, 역사적 배경, 혹은 신약을 위한 예비 단계 정도로 취급되기 쉬웠고, 그 결과 ‘거의 소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명확히 짚습니다.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 작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영적, 천적인 것을 의미하고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는 일부 상징적 구절이나 예언, 혹은 메시아 관련 본문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가장 미세한 점 하나’라는 표현은 성경 해석에서의 타협을 허용하지 않는 선언입니다. 곧 말씀은 부분적으로가 아니라, 구조적으로, 본질적으로 영적이며 천적이라는 뜻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논증은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를 복잡한 계시 체험이나 신비한 주장에 근거하지 않고, 오히려 ‘단 한 가지 숙고’로부터 논리적으로 이끌어냅니다. 말씀이 주님의 것이며 주님으로부터 왔다면, 그 안에는 반드시 천국, 교회, 신앙에 속한 것들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학적 전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필연성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주님과 무관한 내용을 담고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지점에서 ‘생명’이라는 개념이 중심에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이 왜 ‘살아 있는가’를 묻습니다. 문자, 문체, 역사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생명에 속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생명의 근원을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생명은 오직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에게서 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안의 모든 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주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는 매우 급진적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지 ‘말씀의 핵심은 주님이다’라고 말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는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다시 말해, 문자적으로 아무리 경건하고 아름다운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 안에 주님을 향한 내적 지향이 없다면 그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씀 해석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 신앙과 교회의 모든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단락의 정점입니다. ‘말씀 가운데 어떤 표현이든지 그 안에 그분을 품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신적인 것이 아니다’라는 선언은, 성경을 성경 되게 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신적인 것은 ‘주님을 품는 것’이며, 그분을 가리키는 방식은 다양할 수 있으나, 그 지향 자체가 빠질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성경을 주님과 무관한 교훈집, 역사책, 민족 서사로만 읽는다면, 우리는 이미 그 성경을 신적인 것으로 읽고 있지 않은 셈이 됩니다.
이렇게 볼 때 AC.2번은, 이후 전개될 방대한 상응 해설과 내적 의미 풀이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핵심 단락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이렇게까지 세밀하게 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말씀의 생명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라고 답합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곧 주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AC 전체는 해석 기술의 집합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주님을 살아 있는 분으로 다시 만나게 하려는 시도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그 안에는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총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교회,종교적인 믿음,그리고 그와 연결된 모든 걸 가리킨다는 사실을 누구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글자 그대로의 의미,곧 겉 글자만으로는,그러니까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저 유대교회의 외적 의식들과 규례들만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인데요,그러나 실상은 그 말씀 전체 곳곳에는 외적인 것들,곧 그런 겉 글자 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는 어떤 내적인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이는 다만 극히 일부만이 주님에 의해 사도들에게 드러나고 설명되었을 뿐인데요,예를 들면,희생 제사들은 주님을 상징하며,가나안 땅과 예루살렘은 천국을 상징한다는 겁니다.그러니까 우리가‘천국의 가나안’, ‘하늘의 예루살렘’이라 부르는 것처럼 말입니다.그리고 낙원도 그렇고요.From the mere letter of the Word of the Old Testament no one would ever discern the fact that this part of the Word contains deep secrets of heaven, and that everything within it both in general and in particular bears reference to the Lord, to his heaven, to the church, to religious belief, and to all things connected therewith; for from the letter or sense of the letter all that anyone can see is that—to speak generally—everything therein has reference merely to the external rites and ordinances of the Jewish church. Yet the truth is that everywhere in that Word there are internal things which never appear at all in the external things except a very few which the Lord revealed and explained to the apostles; such as that the sacrifices signify the Lord; that the land of Canaan and Jerusalem signify heaven—on which account they are called the heavenly Canaan and Jerusalem—and that paradise has a similar signification.
해설
이 서문 첫 문장은 ‘Arcana Coelestia’(天界秘義, 1749-1756, 라틴, 창, 출 속뜻 주석, 약어 AC, 총 10,837개 글)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근본적인 전제이자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처음부터 독자에게, 이 저작이 단순한 성경 주석이나 경건한 묵상서가 아니라, ‘성경의 문자 아래 감추어진 하늘의 질서와 주님의 섭리를 해명하는 작업’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는 구약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읽는 사람이라면 ‘결코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데, 이는 독자의 지적 능력이나 신앙의 진실성을 문제 삼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자적 의미라는 읽기의 층위 자체가 본질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 구분은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입니다. 겉뜻과 속뜻이라 해도 되겠습니다. 외적 의미는 역사적 사건, 율법, 의식, 규례, 인물들의 행위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며, 실제로는 유대 교회의 종교사나 민족사처럼 읽힙니다. 그러나 내적 의미는 그러한 외적 형식 안에 담긴 ‘영적 실재의 구조’, 곧 천국의 질서, 교회의 본질, 인간 내면의 상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주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점은 내적 의미가 외적 의미와 나란히 병존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 의미가 내적 의미를 담고 표현하는 그릇이라는 사실입니다. 문자만 붙들면 그릇은 보이지만, 그 안의 내용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구조를 가능하게 하는 원리가 바로 ‘상응’(相應, correspondence)입니다. 상응이란 외적인 사물이나 사건, 제도와 내적인 영적 실재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대응 관계를 말합니다. 제사는 단순한 고대 종교의식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기희생, 그리고 인간과의 결합을 상응적으로 표현합니다. 가나안 땅은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선과 진리가 거하는 상태, 곧 천국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한 정치적 수도가 아니라, 교회의 중심 진리,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에게서 나오는 신적 진리가 질서 있게 거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낙원 또한 신화적 공간이 아니라, 사랑과 지혜가 조화를 이루는 내적 생명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계시하신 ‘몇 가지 예외’를 특별히 언급합니다. 이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시거나, 성전과 제사, 떡과 포도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신 장면들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내적 의미를 부분적으로 열어 보인 책이며, ‘Arcana Coelestia’는 그 열림을 체계적으로 확장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저작은 신약을 넘어서는 것이 아니라, 신약이 열어 둔 문을 끝까지 따라 들어가는 시도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표현은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말입니다. 이는 스베덴보리 해석학의 엄격함을 잘 보여 줍니다. 그는 성경의 어떤 사건뿐 아니라, 어떤 단어, 어떤 이름, 어떤 반복, 어떤 숫자도 우연이 아니며, 각각이 고유한 영적 의미를 지닌다고 봅니다. 이는 임의적 알레고리가 아니라, 천국과 인간 정신의 구조가 질서 있게 상응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나온 결론입니다. 그래서 AC를 읽다 보면 때로는 지나치게 세밀해 보일 정도의 해설이 이어지지만, 그것은 과잉 해석이 아니라 일관된 세계관의 필연적인 결과입니다.
결국 이 서문은 독자에게 하나의 방향 선택을 요구합니다. 성경을 역사적 기록이나 도덕적 교훈의 모음으로만 읽을 것인지, 아니면 그 안에 담긴 하늘의 언어를 배우려 할 것인지의 선택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분명히 후자를 택했으며, ‘Arcana Coelestia’는 그 배움의 여정 전체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 첫 단락은 이후 수천 개의 단락을 읽어 나가며 길을 잃지 않도록 세워 둔 나침반과 같습니다. 문자에 머무르지 말고, 그 안에서 주님과 천국과 교회를 보라는 요청, 이것이 AC 서문 1번이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메시지입니다.
만일 기존 교회, 그러니까 천주교든 개신교든, 더 나아가 정교회든 다니시던 분들이 우리 교회를 다니겠다 하시면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된 저와 저희 교인들이 조심하고, 또 지혜롭게 행해야 할 것들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이 질문은 스베덴보리적 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우리 공동체가, 기존 교회 출신 성도들을 어떻게 지혜롭고 안전하게 맞이할 것인가? 하는 매우 실제적이고 깊은 목회적 질문입니다. 천주교 · 개신교 · 정교회 등 전통 교회 출신 성도들이 새로 오게 되면, 그분들이 느낄 수 있는 심리적 충격, 익숙한 언어 체계의 변화, 기존 교회와의 갈등 불안 등을 고려해야 합니다. 아래는 스베덴보리 오리엔티드 교회가 반드시 유념해야 할 핵심 항목들을 매우 실천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안전지대(Safe Zone)를 먼저 만들어라
기존 교회에서 오시는 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감정은 이질감입니다. 따라서 첫 단계는 너무 낯설지 않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가령, 익숙한 용어를 우선 존중하기 같은 건데요, 보통 ‘하나님’에 익숙하신 분들에게 ‘주님’을 강조한다든지, ‘성경 말씀’을 ‘말씀’(Word)이라고 은근히 구별하신다든지, 그 밖에도 ‘은혜’, ‘믿음’, ’성령’, ‘십자가’ 등, 그분들에겐 매우 익숙한 이런 용어들을 억지로 스베덴보리식으로 바로 바꾸지 않아도 됩니다. 그들의 언어를 먼저 허용해야 마음이 열립니다. 하나 더 살펴보자면, 기존 교회의 신앙고백을 부정하는 듯한 표현 금지가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스베덴보리가 더 깊습니다”라든지, “기존 교회는 피상적입니다”와 같은 이런 말은 절대 금물입니다. 사람은 기존 신앙의 명예를 건드리면 마음을 닫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개종(Secondary Conversion)을 강요하지 말라
다른 교회 출신 분들에게 무심코 하는 가장 위험한 실수는, “이제 주님이 스베덴보리를 통해 말씀하신 이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같은 분위기를 직, 간접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고, 그러니까 그분들의 기존 신앙을 부정하는 듯한 태도 대신, 기존에 믿으신 것 위에 덧붙여,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는 차원으로 안내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도 새 신앙을 요구하지 않았고, 단지 기존 신앙의 내적(內的) 이해를 열어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존 신앙이 말씀의 이쪽 면만 보았다면,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통해 말씀의 저쪽 면도 보게 한 것이지요. 마치 사람을 영과 육, 육과 영, 양쪽 면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심한 교리 충돌 관리가 필요함
기존 교회 출신이 가장 충격받는 지점이 교리의 충돌입니다. 예를 들면, 삼위일체 이해라든지 대속론이나 지옥 이해, 죽음 후 즉시 심판/부활, 천국과 지옥의 구조나 예배, 성례전, 재림 이해 등인데요, 이 차이를 절대 한 번에 좌악 꺼내시면 안 됩니다. 그러지 마시고, 먼저 공통분모를 말해준 다음, 이런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충돌하는 게 아니라는 설명과 함께, 나중에 내적 의미와 구조를 조심스럽게 소개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세심한 배려가 필요한 이유는 우리도 처음에 이랬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세심하고 따뜻한 맞춤식 보살피심을 통해 우리도 오늘 이 자리에 있게 된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기존 교회에 대한 존중의 톤을 확실히 유지하기
천주교, 개신교, 정교회, 루터교 등 모두 주님 안에서 존재하는 교회들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허락, 인도하심으로 생겨난 교회들이라는 말입니다. 스베덴보리도 이들을 비판보다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회 내에서도 “다른 교회는 다 틀렸다”라든지 “스베덴보리가 더 우월하다”, 혹은 “이제는 제대로 믿자”같은 이런 말들이 나오지 않도록 잘 지도해야 합니다. 새로 오신 분들의 마음은 존중 → 평안 → 신뢰 → 배우려는 마음이라는 순서로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내 편을 만드는 게 아니라 말씀의 다른 편을 볼 수 있도록 돕는 사람들입니다.
새 신자 교육은 삼중 구조로 운영해야 함
기존 신앙을 부정하지 않는 설교
예를 들면, 창세기 해설이나 산상수훈, 혹은 시편 등 기존 개신교, 천주교와 크게 갈등 없는 본문들 위주로 설교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점진적 스베덴보리 소개
스베덴보리 교회이니 스베덴보리에 대한 소개는 당연히 필요합니다. 그때 영적 세계나 말씀의 내적 의미, 즉 속뜻, 선과 진리의 결합이나 인간, 자유, 양심 등, 이런 부분은 기존 신앙과 충돌이 거의 없으므로 먼저 소개하기 좋습니다.
고급 교리 교육은 사적, 개별적으로
좀 깊고 무거운 주제들, 가령 대속론 이해라든가 부활과 심판, 동일 인격과 영적 인격, 결혼의 속뜻 같은 이런 주제는 3~6개월이나 충분한 시간이 흐른 후 사적으로, 혹은 전체 프로그램 가운데 특별반 같은 걸 만들어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참고로, 여기 ‘동일 인격’이란 사람은 사후에도 생전의 모든 것, 즉 성격, 애정, 사고 구조 등을 그대로 가지고 간다는 것입니다. 생전과 사후의 인격이 동일해야 상벌이 가능합니다.
기존 교회 배경 성도들의 감정을 이해해야 함
기존 교회 출신은 종종 이런 마음입니다. ‘여기가 너무 좋아. 하지만 내 신앙 전부가 뒤집히는 건 아닐까?’ 같은 마음 말이죠. 그러므로 목회자와 선배 성도들의 역할은,“천천히 오셔도 되요. 급할 것 없습니다”라든지, “기존 신앙도 귀하지요. 주님도 그 신앙으로 당신을 여기까지 인도하셨잖아요? 우리는 그 위에 더 풍성한 것을 드릴 뿐이에요”, 혹은 “무엇이든 편하게 물어보셔요” 와 같은 이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항상 잘 모르겠을 땐, 나는 처음 왔을 때 어땠나를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교인들의 언행을 세심하게 지도해야 함
스베덴보리 전통은 지식적 깊이 때문에 기존 교회 출신에게 우월감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표현을 금하셔야 합니다. 예를 들면, “그건 내적 의미로 보면 달라요”, “원래 이 구절의 참뜻은 …입니다”, “스베덴보리를 읽으면 이런 오해는 없어집니다” 같은 표현들인데요, 이런 말은 상대방에게 “나는 그동안 잘못 믿어왔다”라는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대신, “이 구절을 이런 시각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나 “새로운 관점이 조금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처럼 겸손한 태도가 수반되어야 함을 지도하셔야 합니다.
일상 신앙에서 먼저 신뢰를 얻게 해야 함
기존 교회 출신은 새로운 교리에 대해선 아직 조심스러워도 사람들의 삶과 사랑의 분위기를 보고 마음을 엽니다. 예를 들면, 교인끼리의 친절과 진리 사랑, 뒷말이 없는 공동체, 말씀이 중심에 있는 예배, 기도와 말씀 생활의 균형, 겸손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와 같은 이런 것에서 먼저 감동합니다. 삶의 향기 → 교리에 대한 신뢰 → 마음의 개방이라는 이런 흐름이 필수적입니다.
기존 교회와의 갈등을 절대 유발하지 않도록 지도
새로 오시는 분이 기존 교회와 갈등하면 그분도 상처받고, 우리 교회도 오해받습니다. 따라서 기존 교회를 헐뜯는 발언이라든지, “이제 그 교회 가지 마세요” 같은 말, 그리고 기존 목회자를 비판하는 태도 등은 금지하셔야 합니다. 모두가 기억하셔야 할 것은 스베덴보리적 영성은 부정적 결별이 아니라 긍정적 성숙이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 교회의 본질은 포용임을 기억하기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주님은 각 사람을 그가 알고 있는 진리의 경로 안에서 이끄십니다. 따라서 다른 교단에서 오시는 분들을 그들이 믿어온 길에서 부정하거나 뜯어고치려 들지 말고, 그 길을 더 깊고 더 밝게 해주면 됩니다. 스베덴보리 교회는 폐쇄적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열린 교회입니다.
기독교, 개신교, 심지어 불교 집회에서도 집회 중 각종 질병과 장애가 치유되는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또 방언이라 하여 다른 사람들, 심지어 본인도 그 뜻을 알 수 없는 말들을 하고 말이지요. 이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혹시 무슨 기록들이 있나요? 교인들이 이런 것에 대해 질문하면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실제로 개신교 포함, 기독교, 불교 또는 비기독교 종교 집회에서조차 기적, 치유, 방언 같은 현상들이 일어나는 이유, 그리고 이러한 현상을 스베덴보리는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또 교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매우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 주제입니다. 아래에서 스베덴보리의 명확한 기록, 그 신학적 결론, 그리고 교인들에게 답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지혜로운 방식을 차례대로 정리해 봅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힌 핵심 원칙
외적 기적은 신앙 자체를 절대 만들지 못한다(AC 7290, 7291, 7337 등)
스베덴보리는 다음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기적은 신앙을 만들지 못하며, 오히려 억지로 믿게 하는 강압(coercion)의 성질이 있어 시간이 지나면 신앙을 더 약하게 하거나 없애버리기까지 한다라고 말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내적 자율성을 깨뜨리기 때문에 참된 신앙을 만들지 못한다’(AC 7290–7291 요약)
외적 기적은 영적 진리가 아니라 감각적인(sensuous) 것에 속한다 (AC 7337, 8348, AE 706)
기적을 보고 믿는 것은 내적 신앙이 아니라 감각적인 신앙(sensuous faith)입니다. 이 신앙은 감각적 자극에 의존하고, 계속 새 자극(기적)이 없으면 유지되지 않으며, 삶에서 선(愛)이 없기 때문에 마음속 깊이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기적 자체는 거룩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고, 단지 외적 감각 차원의 현상일 뿐입니다.
외적 기적은 거짓된 종교들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다 (AC 3887, 7012 / TCR 501 등)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거짓된 종교의 사제들, 우상 숭배하는 이들, 심지어 악령들이나 지옥의 영들조차 사람들 앞에서 기적 같은 현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즉, 기적의 출처는 다양하며, ‘기적이 일어났으니 그 집회가 참이다’라는 사고방식은 매우 위험합니다. ‘악령들도 기적 같은 일들을 보이지만, 이는 감각을 속이는 현상에 불과하다’(AC 3887 요약)
기적 치유가 일어나는 이유는 내적 신앙이 아니라, 다른 요인 때문일 수 있다 (AC 10083, TCR 501)
스베덴보리는 다음 네 가지를 명확히 구분합니다. 첫째, 심리적, 정신적 반응(affectional states)입니다. 강한 감정이나 염원, 집단적 분위기, 혹은 마음의 변화에 의해 몸의 증상이 완화되는 경우들이 있겠습니다. 둘째, 일시적인 영적 영향(influx)인데요, 천사들이 순간적으로 마음을 위로하거나 평정을 주는 그런 영향입니다. 셋째, 자연적 질서(natural causes)입니다. 스트레스 감소나 호르몬 변화, 신체 자연 회복력, 혹은 악한 영들에 의한 거짓 치유처럼 일시적으로 증상을 멈추게 하고, 나중에 더 큰 혼란을 가져오게 하는 방식(AC 7039, 7317) 등이 있습니다. 즉, ‘치유가 일어났다 → 하나님이 여기 계신다’같은 논리는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성립하지 않습니다.
방언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입장
스베덴보리는 현대 은사운동의 방언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아주 중요한 원리를 말합니다.
천국에서는 ‘영적 의미에 따라 말이 변한다’ (HH 234–240)
천국의 영들은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대화는 내면의 의미에 따라 자동으로 통역됩니다. 이것이 오순절의 기적(각자 자기 언어로 들음)의 본질인데, 그것을 감각적 방언과 혼동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말의 외형이 아니라 내적 의미가 중요하다 (AC 1635)
방언이라고 하면서 의미가 없고, 이해가 되지 않으며, 생활의 선(善)과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영적 언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즉, 자신의 방언이 참된 방언이 되려면, 방언과 함께 나의 삶과 생활에 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해할 수 없는 방언은 감각적 흥분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스베덴보리는 외적 감각의 흥분(sensuous excitement)에서 나오는 종교적 광열(fanaticism)을 자주 경계합니다. 특히 외적 열광이 내적 선과 연결되지 않을 때, 그것은 영적 현상이 아니라 감정적 현상이라고 봅니다. 즉, 이해할 수 없는 말 자체는 거룩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런 기적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기적은 참된 교리의 증거가 아니다
왜냐하면, 불교·힌두교 집회에서도 일어나고, 심지어 이단, 무당집, 무속 행사에서도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기적이 일어나니까 맞다’는 논리는 기독교적으로도, 스베덴보리 신학적으로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기적보다 더 확실한 기준은 ‘그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하는가’이다 (TCR 501)
스베덴보리는 거듭 말합니다. “기적이 아니라, 삶의 선함이 진짜 증거다.” 곧, 주님 사랑으로 마음이 변화되는가? 이웃 사랑으로 행동이 달라지는가? 교만과 분노, 욕망이 줄어드는가? 하는 증거들 말입니다. 이것이 참된 신앙(믿음)의 유일한 증거입니다.
기적은 사람에게 유익할 수도, 해로울 수도 있다 (AC 7039)
유익할 때는 괴로움과 두려움이 일시적으로 진정될 때, 새로운 의지가 시작될 여지를 줄 때 등이 있겠고, 해로울 때는 그 현상 자체에 집착하게 될 때, 혹은 교만, 우월감, 영적 자만을 낳을 때라든지, ‘현상’이 ‘진리’보다 앞설 때 등이 있겠습니다.
한때 치유의 은사가 너무도 분명하여 소문이 나서 교세가 제법 흥했던, 그러나 그러더니 평소 언행에 있어 슬그머니 그 공을 자기에게 돌리면서 그만 그 은사가 떠나고,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면서 다시 교세가 줄어드는 바람에 그 은사가 계속될 줄 믿고 전에 벌려놓았던 여러 규모 있는 일들로 오랜 세월 크게 곤란을 겪고 있는 분을 제가 알고 있는데요, 바로 이런 경우가 되겠습니다. 비록 그렇지만, 그러나 결국 주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그 목사님을 향하신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목사님, 힘내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에게 이렇게 답하시기 바랍니다
기적은 어디서나 일어납니다. 기독교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불교, 힌두교, 심지어 무속에서도 일어난다는 것은 기적이 참된 신앙의 증거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적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참된 변화는 사랑과 삶에서 온다’고 말합니다.
기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열매가 중요합니다
그 집회를 다녀온 사람이 더 겸손해지고, 더 사랑하고, 더 성실해졌습니까? 자신에게 찾아온 은사와 기적으로 말입니다.그것이 참된 열매입니다.
방언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도 말했듯,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은 공동체에 유익이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의미 없는 말은 영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기적을 구하는 신앙은 감각적 신앙입니다. 주님은 내적 신앙을 원하십니다
외적 현상보다 진리와 사랑, 삶을 깊이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기적·방언·치유를 ‘참된 신앙의 증거’로 보지 않았습니다. 기적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으며, 중요한 것은 그들의 삶이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되는가입니다.
1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a man [vir])하였다 하니라2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창4:1-5)
오늘부터 창세기 4장입니다. 오늘부터는 지난 네 달간 시도해 보았던 AC 주석 원본을 직접 읽는 주일예배 대신 원래대로 보통 3, 40분 분량의 3대지 설교 형식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설교 원고 분량으로는 대략 10-12페이지 정도 될 것 같은데, 설교 포함, 예배 시간을 가급적 최대 1시간을 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우리가 더욱 깊어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말씀에 깊이 잠기기를 원하게 되면, 그때는 따로 AC 원본을 직접 읽는 무슨 별도의 프로그램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설교 끝부분에 이와 관련된 중요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이 창4는 사실 우리에게 무척 익숙한 본문입니다. 바로 저 유명한 ‘가인’(Cain)과 ‘아벨’(Abel)이 나오며, 끝에 가서는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 ‘셋’(Seth)이 나오는 장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4장 본문 중 가인의 대답,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14절)라든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17절)와 같은 데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 아직 지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라고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가인밖에는 없는데... 이 사람들은 갑자기 어디 있다 나오는 거지?’라며, 당혹감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성경, 특히 ‘말씀’을 오직 겉뜻으로만 읽으시는 분들에게는 답하기가 무척 어려운 대표적인 난해구절이 됩니다만, 그러나 사람이 영과 육으로 되어 있듯, ‘말씀’ 또한 영과 육, 곧 속뜻과 겉뜻으로 되어 있음을 아시는 분들한테는 그냥 평범한 상식선에서 쉽게 답할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먼저 아벨로 표상되는 태고교회의 특징인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에 대하여, 그리고 두 종류의 사랑인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에 각각 사용된 전치사 ‘to’와 ‘toward’의 차이에 대하여, 끝으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두 등장인물인 ‘가인’과 ‘아벨’ 및 그들이 드린 예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 아벨로 표상되는 태고교회의 특징인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입니다.
스베덴보리가 기록한 위 1, 2절 개요에 다음과 같은 표현이 나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였으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이 일어났습니다.(AC.325)
여기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라는 표현은 얼핏 보면 그냥 평범해 보이는 표현 같지만, 사실은 그 안에 놀라운 핵심이 들어있어 특별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있어 ‘신앙’(faith)이란 다음 세 가지, 곧 ‘참된 지식’, ‘내적 수용’, 그리고 ‘실천 의지’가 하나로 엮인 상태를 말하는데요, 그는 이 셋을 하나로 만드는 열쇠가 바로 ‘사랑’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 위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라는 표현은 ‘주님을 사랑하니 저절로 주님을 신앙하게 되었다’가 아니라,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신앙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사랑 없는 신앙은 지식, 교리의 수준이며, 관념적이어서 죽은 신앙이지만, 사랑을 통한 신앙은 의지와 삶, 실천으로 연결된 살아있는 신앙이라는 것이지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생명 있는’, 그러니까 ‘살아있는 신앙’(living faith)이란 항상 이렇게 사랑에서 신앙으로, 신앙에서 삶으로라는 흐름을 가집니다. 선에서 진리로, 진리에서 행위로라고 해도 같은 말입니다.
사람은 의지가 열릴 때, 그러니까 움직일 때, 그 안으로 진리가 들어가 자기 것이 되는데요, 그게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persuasion’(설득, 세뇌)이 아닌 ‘genuine faith’, 즉 참 신앙입니다. 사랑 없이 진리만 알았을 때 일어나는 일은, 예를 들면, 입으로는 말해도 마음으로는 믿지 않고, 교리를 외워도 삶은 그대로이며, 위기나 시험 때 쉽게 무너지는 일입니다만, 그러나 사랑이 있으면, 진리가 ‘내 마음의 진리’가 되고, 주님을 향한 애정이 진리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행위가 자연스럽게 따라오지요.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derived from love)이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신앙한다는 것은 단순히 주님을 ‘존재하신다’ 인정하는 걸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본질인 사랑과 자비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 사랑을 자신과 이웃에게 흘려보내려는 마음을 품으며, 그런 과정 속에서 주님의 진리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으로부터의 신앙’입니다. 그런 면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한 ‘신앙은 사랑의 빛을 받아야만 이해된다’는 말이 참 와닿습니다. 참으로 빛없는 눈이 보지 못하듯, 사랑 없는 신앙은 진리를 보지 못한다는 걸 시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라는 표현에 나오는 태고교회는 가장 초기의 교회(primeval church), 그러니까 지금보다, 즉 가인과 아벨이 등장하는 태고교회 후손들보다 훨씬 더 천적인 교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자연스럽게 주님을 ‘신앙’했기 때문에, 따로 교리나 설교, 혹은 무슨 분별적 사고를 통해 신앙을 주장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지성(intellect)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의지(will)에서 오는 신앙, 곧 속 사람에서 직접 나오는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 스베덴보리 저, ‘천국과 지옥’(Heaven and Hell, 1758) 270번 글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제 삼층천, 즉 가장 내적 천국 천사들의 지혜를 묘사하고, 그들의 지혜가 일층천, 즉 가장 외적 천국 천사들의 지혜를 얼마나 크게 초월하는지 설명하겠다. 삼층천 천사들의 지혜는 일층천 천사들도 이해하지 못한다. 삼층천 천사의 내면은 셋째 단계로 열려 있으나, 일층천 천사의 내면은 첫째 단계로만 열려 있기 때문이다. 또 모든 지혜는 더 내면으로 갈수록 증가하고, 내면이 열린 정도만큼 완벽해지기 때문이다.
[2]삼층천인 가장 내적 천국의 천사들은 그 내면이 셋째 단계에로 열려 있기 때문에, 신적 진리는 마치 그들 내면에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셋째 단계의 내면은 둘째나 첫째 단계보다 더 천국의 형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며, 천국의 형상은 신적 진리의 형태이고, 따라서 신적 지혜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신적 진리가 이 천사들에게 새겨져 있는 것 같고, 직감적이고 천성적인 것같이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이 천사들은 참된 신적 진리를 듣는 즉시 그것이 진리임을 확실히 알고 직감적으로 파악하며, 그 후, 마치 자기 안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그 진리를 본다. 이 천사들의 특성이 이렇기 때문에 그들은 결코 신적 진리를 추론하지 않으며, 어떤 진리가 참인가 아닌가 논쟁하는 일은 더욱 없다. 또 그들은 믿는다는 것이나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들은 말한다. “믿는다는 것이 무슨 말인가? 나는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보고 느껴 아는데.” 그들은 이것을 이렇게 비유한다. 예를 들면 그것은 한 사람이 어떤 집과 그 주변의 여러 가지를 보면서 옆 사람에게 거기 집이 있다는 사실과 그 보이는 대로의 모양을 믿으라고 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또 정원과 그 안의 나무와 열매들을 보면서 그것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 옆 사람에게 거기 정원과 나무와 열매가 있음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이 천사들이 결코 신앙을 거론하지 않으며, 신앙이라는 개념조차 없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래서 신적 진리를 추론하지 않으며, 어떤 진리도 그 여부를 놓고 토론하지 않는 것이다.
[3]그러나 일층천인 가장 외적인 천국의 천사들은 신적 진리가 내면에 새겨져 있지 않다. 그들은 생명의 첫째 단계만 열려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진리를 놓고 추론한다. 그리고 추론하는 사람은 추론의 대상 너머의 것은 거의 보지 못한다. 본다 해도 자기 결론을 확정하려는 목적에 그친다. 확정하고 나면, 그것이 신앙의 문제이므로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4]이에 대해 나는 천사들과 얘기한 적이 있다. 그들은 삼층천 천사들과 일층천 천사들의 지혜의 차이는 명백함과 모호함의 차이와 같다고 말했다. 그들은 삼층천의 지혜를 유용한 모든 것으로 가득하고, 사방이 공원과 온갖 화려한 것으로 둘러싸인 장엄한 궁전에 비유했다. 또 그곳 천사들은 지혜의 진리 안에 있으므로 그 궁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볼 수 있고, 공원을 마음대로 거닐며, 이 모든 것에서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진리를 놓고 추론하는 사람들, 특히 진리에 대해 논쟁하는 사람들은 이와 다르다고 했다. 그들은 진리를 진리의 빛에 비추어 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서 받거나 말씀을 글자 그대로 이해하여 진리를 구한다. 그들은 진리를 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는 믿어야 하는 것이고,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 이런 문제를 내적으로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그 지혜의 궁전 입구에도 가지 못하며, 안에 들어가 거닐 수는 더욱 없다고 천사들은 말했다. 첫걸음에서 막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진리 자체 안에 있는 이들은 이와 다르다. 그들이 제한 없이 걸어가고 전진하는 것을 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이 보는 진리가 그들이 어디를 가든 넓은 들판으로 그들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모든 진리는 무한히 확장되며, 수많은 다른 진리와 연결되어 있다.
[5]그 천사들은 또 가장 내적 천국의 천사들의 지혜는 주로 다음 사실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그 천사들이 사물 하나하나에서 신성과 천국적인 것을 보며, 또 연계된 많은 사물에서 경이를 본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눈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상응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들이 궁전과 정원을 볼 때, 그들은 눈에 보이는 대상에 중점을 두지 않고, 그것의 원인이 되는 내적인 것, 즉 그것에 상응하는 것을 생각한다. 이것은 대상의 외관에 맞추어 무한히 다양하게 계속되므로 그들은 질서대로 연결되어 있는 무수한 것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들의 마음이 기쁨에 넘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잊어버린 듯 보인다고 했다. 천국 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주께로부터 나와 천사들 안에 있는 신적인 것에 상응한다는 것은 위에 설명했다.(HH.270)
다음은 두 종류의 사랑인 ‘주님 사랑’(love to the Lord)과 ‘이웃 사랑’(love toward the neighbor)에 각각 사용된 전치사 ‘to’와 ‘toward’의 차이에 대해 살펴봅니다.
우선 결론부터 보면, ‘love to the Lord’는 직접적, 수직적 사랑이고, ‘love toward the neighbor’는 파생적, 수평적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전치사는 그냥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이 ‘어디에서 어디로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드러내는 영적인 구조적 표현인데요,
그럼, 먼저 왜 ‘love to the Lord’인가부터 보겠습니다.
‘to’는 방향이 선명하고 직접적일 때 쓰는 전치사입니다. 가령 다음과 같이 말이지요. go to Seoul, pray to God, give glory to Him 등, 그러니까 어떤 대상에게 직접 닿는, 완전한 방향성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 신학에서 ‘Love to the Lord’는 단순한 호감이나 감정이 아니라, 가장 내적이고, 가장 직접적이며, 영혼의 중심에서 일직선으로 주님께 향하는 사랑, 즉, 본원적, 수직적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to’가 정확합니다.
다음은 왜 ‘love toward the neighbor’인가입니다.
‘toward’는 방향을 나타내지만, ‘to’와 달리 여전히 과정 속에 있는, 완전히 도달한 것이 아닌, 흐름, 움직임, 지향을 나타냅니다. 예를 들면, move toward the light, tend toward unity 같은... 여기엔 향하지만, 그 안에서 계속 확장되고 활동하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스베덴보리의 이웃 사랑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서 ‘neighbor’는 단지 사람(person)만이 아니라, 공동선, 공동체, 나라, 교회, 진리, 선의 영역, 그리고 그 모든 선의 질서 등, 이 전부를 포괄하는 ‘더 넓어지는 사랑의 활동 범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웃 사랑은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밖으로 흘러나가 확장되는 방사형 구조를 갖습니다. 따라서 고정된 대상에게 일직선으로 닿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흘러나가며 확장되는 ‘운동성’을 표현하는 것, 네, 바로 ‘toward’입니다.
이 사소해 보이는 전치사 차이는,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선(사랑)은 중심에서 퍼져나가며, 주님→사람(이웃)으로 흐른다’라는 핵심 천적·영적 구조를 정확히 반영합니다. 그러므로 만약 두 단어를 바꾸면 영적 구조가 흐려지거나 잘못 전달되는 대참사가 발생합니다. 스베덴보리의 문장에 사용된 어휘 하나하나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사용된 게 아닙니다. 그가 보고 온 천국 구조와 시스템을 염두에 둔 정교한 신학적 구조를 반영하고 있어서, 이런 전치사 하나도 그냥 선택된 게 아닌 것이지요. 상응 구조를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약할 수도 있겠습니다. ‘주님 사랑은 뿌리이고, 이웃 사랑은 그 뿌리에서 뻗어 나오는 가지입니다. 그래서 뿌리 사랑은 ‘to’, 가지 사랑은 ‘toward’이지요.’라고 말입니다. 사실 이 전치사 차이는 스베덴보리의 사랑론 전체 구조와 정확히 맞물려 있습니다. 영어 표현 하나가 단순한 언어적 차이가 아니라 신학적·영적 구조의 차이까지 드러낸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끝으로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의 두 등장인물인 ‘가인’과 ‘아벨’ 및 그들이 드린 예배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인 창4:1-5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개요를 처음부터 다시 이어서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고교회는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church had faith in the Lord through love)였으나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some who separated faith from love)이 일어났습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를 ‘가인’(Cain)이라 하고, 이웃을 향한 사랑인 체어리티(charity, 이웃 사랑)를 ‘아벨’(Abel)이라 하였습니다. (1, 2절)(AC.325)
각각의 예배에 대한 설명입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를 ‘가인의 제사’(offering of Cain)라 하고,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를 ‘아벨의 제사’(offering of Abel)라 합니다. (3, 4절) 체어리티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悅納, acceptable)될 수 있었으나 분리된 신앙으로 드리는 예배는 열납될 수 없었습니다.(4, 5절) (AC.326)
분리된 신앙에 속한 사람들은 악한 상태가 되었는데, 이걸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Cain’s anger being kindled, and his countenance falling)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5, 6절) (AC.327)
이 짧은 개요에 이미 모든 핵심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창1-9에 등장하는 모든 인명, 그러니까 ‘아담’(אָדָם, Adam), ‘하와’(חַוָּה, Eve), ‘가인’(קַיִן, Cain), ‘아벨’(הֶבֶל, Abel) 및 ‘셋’(שֵׁת, Seth) 등의 ‘이름’의 의미에 대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이름들은 겉뜻으로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한 개인으로 읽히지만, 속뜻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 곧 그 시대 존재했던 교회의 영적 상태와 본질을 가리킨다는 것을 말입니다. 교리나 신학이라고 해도 됩니다.
그러므로 창1-3에서 ‘아담’과 ‘하와’로 그려진 초창기 가장 순수했던 태고교회를 ‘사랑으로 주님을 신앙하는 교회’라고 했다면, 이제 세월이 흘러 그 이어지는 여러 후손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그 본질에 있어 이상한, 그러니까 그 영적 상태가 달라진 후손이 일어났고, 그 대표적인 입장들을 가리켜 ‘가인’이라 한 것이지요. 물론 ‘아벨’처럼 여전히 선조들의 순수한 상태를 변함없이 이어받는 교회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참고로, ‘이름’들을 이렇게 이해하면, 앞서 잠깐 언급한 난해구절 문제도 너무나 쉽게 해결됩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는 사람들’,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란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 없이 진리만을 주장하는 사람들, 즉 나는 하나님을 안다 말은 하지만, 실제로 주님을 사랑하지는 않는 상태인데요,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교리를 줄줄 외우며, 신학적 논리는 뛰어나지만, 정작 이웃을 향한 사랑, 주님에 대한 겸손한 마음이 없는 신앙 말입니다. 그것은 신앙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것이 ‘가인의 제사’, 곧 ‘가인이 드리는 예배’입니다. 겉으로는 분명 제사를 드렸는데, 겉으로는 분명 예배를 드렸는데, 실제로 그의 마음에는 자기 자신만 있고, 정작 주님은 없는 그런 예배를 말합니다. 주님도 성경에 이미 여러 번 수없이 언급하셨는데요, 신구약 생각나는 한 군데씩만 보면 이렇습니다.
10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11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12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16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17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사1:10-17)
1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2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3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5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7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10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11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15:1-11)
그러니까 이 ‘가인’이라는 전통과 입장은 참으로 인류의 오랜 역사를 마치 대하(大河)와 같이 유유히 흐르는 정말 고약한 흐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가인의 예배’와 달리 ‘아벨의 예배’는 다음과 같은데요, 곧 사랑에서 비롯된 신앙이요, 선(善) 자체로서, 겸손하고,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얼핏 겉보기, 외형은 미약해 보이지만, 그러나 내면은 가장 순전한 상태를 상징합니다. 가인이 이를 미워한 것은 곧 지식 중심의 신앙은 사랑 중심의 신앙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님 말씀이 생각납니다.
31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32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33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34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35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36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37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38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39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40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41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42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43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44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45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46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31-46)
이상으로 창세기 4장, ‘교회로부터 분리된 교리들, 또는 이단들’, 그 첫 번째 본문(창4:1-5)을 대지만 뽑아 말씀드렸습니다.
한 가지 양해 말씀을 드립니다. 사실 저의, 주님께 받은 1차 소명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일반 목회가 아닌, 이런 특수 목회, 곧 스베덴보리의 저작들을 연구, 번역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베덴보리를 알기 훨씬 전인 지난 2013년 가을, ‘한결같은 교회’라 이름하며 시작한 이 사역 또한 가볍지 않아 지금까지 주일예배, 특히 주일 설교 준비에 나름 심혈을 기울여 온 것을 여러분, 특히 제 블로그나 유튜브 구독자들께서는 잘 아실 겁니다. 이 역시 몇 사람 안 되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받은 소명과 이 주일 설교 준비를 지난 수년간 병행하면서 일주일 내내 마음이 둘로 나뉘는 경험을 오래 해왔습니다만, 이제는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결심, 이렇게 주일 설교 원고가 있는 예배는 오늘로 마치고, 다음 주부터는 저희 부부만 예배드리는 설교 없는, 그러나 말씀 읽고 귀 기울이는 간소한 예배로 전환하고자 합니다. 여전히 AC 진도에 맞춰서 가긴 할 테지만 말입니다. 혹시 이 간소한 예배조차 원하시면 유튜브에 올리긴 하겠지만... 그 역시 또 하나의 ‘일’이 될까 봐 확답은 못 드리겠습니다. 원고 없는, 즉 설교 없는 예배가 몹시 낯설겠지만,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읽는 모임을 예배로 인정하신다’는 스베덴보리의 권면에 힘을 얻어 시작합니다. 기도해 주세요.
오늘 이 설교 원고 외에 오늘 본문 창4:1-5와 관련된 AC 번역본도 블로그에 올리겠습니다. 블로그(https://bygrace.kr/)를 찾아주세요.
목사님이 지금 경험하시는 한국 사회의 혼란, 정치적 분열, 거짓과 불의에 대한 분노는 그 자체로 영적 위험이 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영적 각성의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전환을 인생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봅니다. 오늘 내용을 통해 목사님 자신은 물론, 교인들과 공동체가 이 시대 혼란을 영적 도약의 발판으로 삼는 법을 정확히 배우게 될 것입니다.
혼란이 없으면 영적 각성도 없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평안만 있으면 사람은 깊어지지 않는다. 혼란이 있어야 내적 삶이 깨어난다. 그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혼란은 내면의 감춰진 문제를 드러내고, 진리를 더 분명히 갈망하게 만들며, 내적 평화가 어디에서 오는지를 깨닫게 하고, 영적 싸움을 일으켜 성장을 촉진하게 하는 한편, 사람을 더 겸손하게 만들고, 주님께 더 매달리게 만드는 도구라는 것이지요. 즉, 지금 한국 사회의 혼란은 그 자체가 악이 아니라 악을 통해 선을 일으키는 허용적 섭리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혼란은 어떻게 영적 각성을 촉발하는가?
스베덴보리는 혼란이 사람을 잠에서 깨우는 벨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음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는 약하다’는 깨달음
사람은 안정할 때는 교만해지기 쉽고, 혼란을 경험할 때 비로소 자기 한계를 인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성장의 첫 단계라고 봅니다.
‘진리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목마름
정치·사회의 거짓과 어둠이 강해지면 사람은 자연적으로 참된 진리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시대는 성경, AC, 교리, 영적 진리 등, 이런 것들을 더 갈망하는 시대입니다. 목사님이 하시는 번역·설교 사역이 지금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외적 평화’가 아니라 ‘내적 평화’가 참 평화임을 깨닫는다
사회가 안정되면 사람들은 평화를 외적 환경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사회가 혼란하면 사람들은 평안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를 다시 묻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내적 평화는 오직 주님에게서 온다. 지금 목사님이 느끼시는 내면의 불안은 오히려 깊은 영적 평화를 찾는 통로입니다.
‘영적 분별력’이 자라난다
혼란은 반드시 분별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혼란 상황은 거짓과 진리를 구분하는 능력을 필요로 하고, 사회적 혼란 상황은 선과 악의 구조를 이해하는 능력을 필요로 하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의 영적 감각(sense)과 영적 지능(discretion)이 강화됩니다.
‘소명’이 재확인 된다
나라가 평온할 때는 사명을 잊기 쉽지만, 그러나 시대가 악해지면, 사명은 더 선명해집니다. 목사님도 지금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적 분노가 마치 소명을 흔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소명을 더 굳게 붙들라는 부르심입니다.
그럼 혼란을 어떻게 실제로 ‘영적 각성’으로 바꿀 수 있는가?
스베덴보리의 원리를 따라 아주 구체적으로 정리해 드리겠습니다.
혼란을 정죄가 아닌 ‘영적 신호’로 해석하기
예를 들면, 왜 이렇게 정치가 어지러운가?, 왜 악한 자들이 득세하는가? 등, 이때 스베덴보리식 해석은 이렇습니다. 이 시대는 더 깊은 진리를 요청하고 있다, 이 혼란은 나의 영을 깨우기 위해 허용되었다, 악이 드러나야 선의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등, 혼란을 이렇게 재해석하면, 분노가 줄어들고 영적 눈이 뜨입니다.
정치적 감정을 소명적 열정으로 전환하기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정념의 거룩한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분노는 진리를 더 번역해야 한다로, 불의에 대한 혐오는 설교에서 더 분명히 빛을 세우자로, 사회 혼란은 교회를 내적 질서로 세우자로 전환하는 것이지요. 정치적 감정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면, 그 감정은 강력한 영적 에너지가 됩니다.
선한 기도 방향으로 돌리는 것
스베덴보리는 혼란 속에서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을 주님이 특별히 붙드신다고 말합니다. 기도 방향이 이렇습니다. “주님, 이 시대의 혼란이 우리의 내면을 깨우게 하소서. 진리를 사랑하게 하소서. 선을 붙들게 하소서.” 이 기도는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동시에 나라를 바른 방향으로 돕는 일입니다.
영적 독서를 강화하기
혼란 때는 성경, AC, 진리서적을 읽을 때, 평소보다 훨씬 크게 은혜가 됩니다. 왜냐하면 내적 갈증이 크기 때문입니다. 목사님의 AC 번역은 지금 같은 혼란기에 나라를 붙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지지대입니다.
자기 마음의 상태를 자주 점검하기
스베덴보리는 마음 점검을 혼란기 영적 각성의 첫 실천으로 보았습니다. 매일 30초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금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뉴스인가, 아니면 진리인가? 나는 내적 평화를 느끼는가? 이런 점검 자체가 영적 눈을 계속 열어둡니다.
혼란이 커질수록 도리어 변화가 일어난다
교인들에게도 이런 관점을 가르쳐 주시면 정치적 감정이 줄고, 자기 내면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예를 들면, “요즘 혼란은 악이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이때 우리는 더 깊이 진리를 찾게 됩니다”, “지금은 영적 각성의 때입니다”, “외적 평화보다 내적 평화를 세우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등, 이런 설교와 대화는 교회 전체의 정치 과민반응을 많이 줄입니다.
목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가 정치 뉴스, 국가 혼란, 유튜브 정보, 사회적 대립 때문에 정서적으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이때 목회자는 무엇을 붙들어야 할까요? 스베덴보리는 이 주제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명확한 답을 줍니다. 그 답은 하나입니다. 질서(order), 곧 교회의 질서, 말씀의 질서, 주님의 질서입니다. 정치적 혼란을 막는 것은 정치적 해석, 사회 분석, 설득이 아니라 영적 질서입니다. 이 내용을 아주 구체적으로 풀어보겠습니다.
교회는 질서 속에서만 서 있는 공동체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질서의 집으로 봅니다. 질서가 흐르면 천국의 영향이 교회로 흘러오고, 질서가 깨지면 그 틈을 통해 지옥의 영향이 들어옵니다. 정치적 혼란은 교회 밖의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교회 내부의 질서에 영향을 미치는 시험입니다. 스베덴보리의 말입니다. 천국은 질서이며, 지옥은 무질서이다.따라서 교회의 영적 싸움은 정치가 아니라 질서를 지키는 일입니다.
정치가 교회에 들어올 때 나타나는 현상들
스베덴보리는 정념의 기류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다음의 변화가 발생한다고 설명합니다. 회중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 대화 중 무거운 분위기, 말씀보다 뉴스가 더 강한 감정 파동을 일으킴, 설교 내용이 왜곡되는 위험, 소그룹들이 갈라짐, 교회의 영적 분위기(afflatus)가 흐려짐 등,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영적 질서의 틈이 생긴 상태라고 부릅니다.
이때 목회자가 붙들어야 할 단 한 가지 : 질서(order)
스베덴보리는 질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질서란 주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참된 생명의 흐름이다.즉, 내적 질서, 설교의 질서, 예배의 질서, 공동체의 질서 등, 이 모든 질서는 정치적 파동이 아닌, 주님이 흘러오시는 통로입니다. 정치 혼란이 일어날수록 정치가 아니라 말씀의 질서에 더 집중하는 것이 영적 리더의 핵심 사명입니다.
그럼 질서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스베덴보리식으로 질서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말씀의 질서
본문 읽기, 본문 해석, 본문 적용. 이 과정이 감정·정치·의견에 의해 흔들리지 않고, 오직 영적 진리에 의해 세워지는 것입니다. 정치적 소란이 있을수록 목사는 더욱 원문·본문·AC의 질서를 붙들어야 합니다.
예배의 질서
예배는 교회의 하늘 문입니다. 예배 순서·찬양·기도·말씀·축도로 이어지는 이 전통적 질서 자체가 정치와 무관하게 교인들의 내면을 고요한 상태로 만듭니다. 스베덴보리는 예배의 질서는 천국의 구조와 같다. 예배 질서가 무너지면 천국의 기운이 사라진다고 강조합니다. 즉, 정치가 흔들릴수록 예배를 더 단단히, 더 고요히, 더 질서 있게 세워야 합니다.
목회자의 내적 질서
목사의 마음이 흔들리면, 설교에, 상담에, 기도에 그 흐름이 그대로 전달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설교자는 먼저 자기 안에서 질서를 세워야 한다. 그래야 공동체 안으로 질서가 흘러간다. 목사님이 정치 뉴스 감정에서 벗어나 내적 평화와 진리를 회복하면, 그 자체가 교회의 영적 질서를 다시 세우는 일입니다.
정치 혼란기의 실제 목회 적용
스베덴보리의 질서 이론을 현실 목회에 바로 적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치 이야기 금지 규칙이 아니라 말씀 중심 질서를 강화
정치 이야기 하지 맙시다는 갈등을 일으킵니다. 대신 우리 교회의 중심은 말씀입니다, 우리의 평화는 말씀에서 옵니다와 같은 메시지를 반복하면 정치 갈등이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교인들의 감정적 파동을 예배의 고요함으로 덮어주기
예배는 교회의 영적 공기입니다. 예배가 고요하고 안정되면, 교회 안의 정치적 파동이 자연스럽게 가라앉습니다.
설교를 더욱 내적 진리 중심으로
정치적 사례나 시사적 언급은 감정 파동을 다시 일으킵니다. 대신 마음, 내면, 진리, 선, 영적 질서 등, 이런 주제에 집중하면 정치적 감정은 빠르게 사라집니다.
성도끼리 정치 이야기를 해도 싸움이 되지 않게 하는 한 문장
목사님이 이렇게 말하면 큰 도움이 됩니다. 정치적 의견은 달라도 괜찮습니다. 우리는 내면에서 같은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이 한 문장이 교회 내 갈등을 많이 예방합니다.
목사님 자신이 질서의 기둥이 되기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공동체의 질서는 지도자가 내면에서 어떤 질서를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치 혼란 속에서 목사님이 내적 평화를 붙들면, 그 평화가 교회의 기본 분위기(spiritual atmosphere)를 만들게 됩니다.
목사님께 드리는 조용한 결론
정치적 혼란은 교회의 적이 아닙니다.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 교회의 적입니다. 정치에 흔들리지 않고, 말씀·예배·내면의 질서를 붙드는 것, 이것이 목회자가 혼란의 시대에 붙들어야 할 단 한 가지입니다. 목사님이 내면에서 질서를 세울 때, 그 질서가 교회로 흘러갑니다. 정치가 아니라 영적 질서가 교회를 세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