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lia et scientifica) 통해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해서도 됩니다. 그렇게 하면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됩니다. (16-17) He is also permitted to acquire a knowledge of what is good and true by means of every perception from the Lord, but he must not do so from himself and the world, nor search into the mysteries of faith by means memory-knowledge [sensualia et scientifica]; which would cause the death of his celestial nature (verses 1617).

 

16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16, 17)

 

해설

AC.80은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핵심 원리를 개요 단계에서 제시합니다. 바로 앞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며, 인간은 그 안의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0은 그 원리가 인간의 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아는 것이 금지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문제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알려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2:16-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식이나 이성 자체에 대한 금지로 읽으면 스베덴보리의 뜻과 멀어집니다. 앞의 AC.75AC.78에서 이미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이성과 기억지식도 올바른 질서 안에서는 그의 겉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지식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선과 진리를 어디로부터알고자 하느냐입니다.

 

천적 인간에게 허락된 길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선과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AC.77에서 에덴동산의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AC.80은 그 퍼셉션의 근원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그것은 인간 자신에게서 솟아나는 직감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퍼셉션입니다. 천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것을 자신의 생명 안에서 누립니다.

 

반대로 금지되는 것은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선과 진리를 알려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세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혜의 근원으로 삼고, 외부 세계에서 감각으로 받아들인 것과 자기 기억에 축적된 지식을 최종적인 판단 기준으로 삼아 신적인 것들을 판단하려 할 때 본래의 천적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80의 핵심은 이성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억지식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 관한 지식을 배우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AC.78에서 이성과 기억지식은 겉 사람에게 속하며 모두 지혜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문제는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 사람 위에 서서 신적인 것들을 자기 기준으로 심판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이성과 기억지식은 질서 안에서는 유용하지만,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판단하는 최고의 권위가 될 때 질서가 전도됩니다.

 

이 점에서 sensualia et scientifica’,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감각적인 것들은 인간이 육체의 감각을 통하여 접하는 가장 외적인 차원의 것들과 관련되고, ‘기억지식은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학습된 것들이 기억 속에 축적된 앎과 관련됩니다. 이것들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닙니다.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감각과 기억지식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하여 신적인 진리를 자기 힘으로 판정하려 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여기서 신앙의 아르카나를 탐구한다는 말도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신앙에 관하여 질문하거나 말씀의 깊은 뜻을 연구하는 것 자체를 금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 자신의 방대한 저술과 말씀 해설부터 성립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문제는 탐구 자체가 아니라 탐구의 질서입니다.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출발점이자 최종 기준으로 삼아 신적인 것들이 참인지 아닌지를 인간 자신이 판정하려는 태도가 문제입니다.

 

따라서 AC.80신앙은 무조건 믿어야 하며 이성적으로 질문해서는 된다는 반지성주의의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이성과 신앙의 대립이 아니라 질서의 문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이성과 기억지식이 그것을 이해하고 확인하며 자연적 삶에서 섬기는 것은 올바른 질서입니다. 반대로 감각과 기억지식을 최상위에 놓고 그것으로 신앙의 아르카나를 재단하면서, 감각적으로 입증되지 않거나 인간의 자연적 이성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천적 질서와 반대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79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말라는 말씀과도 직접 연결됩니다.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는 것은 결국 지혜와 판단의 근원을 자기 자신에게 두는 것입니다. AC.79에서 동산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는 문제가 제시되었다면, AC.80에서는 그것이 인식의 차원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대신, ‘내가 스스로 알아내고 내가 판단한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여기서 proprium과의 연결도 더욱 분명해집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자기에게서 생명과 선과 진리가 나오는 것처럼 여기려는 성향과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선과 진리를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지만, 그 질서에서 벗어나면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려 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80의 금령은 단순히 특정한 지식을 얻지 말라는 금지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과 심판자로 세우지 말라는 보호의 명령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은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그의 천적 본성의 죽음을 초래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육체의 죽음이 아닙니다. 2:17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의 속뜻에서 천적 인간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며 살아가는 천적 상태가 소멸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씀을 읽으면서 아담과 하와가 그날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다는 문제에 곧바로 매달릴 필요가 없습니다. AC.80이 제시하는 속뜻에서는 죽음의 초점이 육체적 사망 시점에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천적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들을 알려 할 때, 그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73에서 사용된 죽어 있던 사람이라는 표현과도 구별하여 읽어야 합니다. AC.73에서는 창1의 거듭남 이전 상태에서 죽어 있던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다시 천적 인간이 되는 흐름을 말했습니다. AC.80에서는 이미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의 천적 본성이 죽게 되는 위험을 말합니다. 두 경우 모두 단순한 육체적 죽음을 뜻하지 않지만, 문맥과 기능은 서로 다릅니다.

 

또한 AC.80은 인간이 세상을 무시해야 한다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된다는 말을 자연계의 경험이나 학문을 불신하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자연적 사실을 알아내는 일에서는 감각과 관찰과 이성과 기억지식이 당연히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와 신적인 선과 진리의 근원까지 인간 자신이 결정하려 하는 데 있습니다.

 

이 구별은 오늘날에도 중요합니다. 자연과학의 문제를 신앙만으로 대신 판단하는 것도 질서의 혼동일 수 있고, 반대로 자연과학이 다루는 방법만을 가지고 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존재 여부를 최종 판정하려 하는 것도 서로 다른 차원을 혼동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80 자체가 현대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논하는 번호는 아니므로 이 문제를 지나치게 확대하기보다는,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이 신앙의 아르카나를 판단하는 최종적인 원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본문의 원리에 머무는 것이 좋겠습니다.

 

AC.80에서 특히 아름다운 것은 이 금령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기 위한 명령이라기보다 천적 생명을 보호하는 질서로 읽힌다는 점입니다. 주님께서는 천적 인간에게 선과 진리를 알지 못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그것들을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금지되는 것은 생명의 근원에서 떠나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삼는 것입니다. 금령은 앎을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참된 앎의 질서를 보존하기 위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2:16-17의 허용과 금지는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라는 허용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는 금지는 모두 같은 질서를 말합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풍성하게 받아 누리는 것은 허락되어 있지만,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아내어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AC.79AC.80을 함께 읽으면 에덴의 질서가 매우 선명해집니다. AC.79에서는 누리되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AC.80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알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나는 소유의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앎의 질서처럼 보이지만, 사실 둘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과 지혜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창3의 타락 이야기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타락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과일 하나를 먹은 사건으로만 이해되지 않습니다. 더 깊은 차원에서는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던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과 감각과 기억지식을 통해 신적인 것들을 알려 하고 판단하려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과정이 다루어집니다. AC.80은 그 문제를 창2의 개요에서 미리 명확하게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AC.80의 핵심은 알지 말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어디로부터 아는가?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 선과 진리를 아는 것과,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것을 알려 하는 것은 겉으로는 모두 안다는 행위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전혀 다른 질서입니다. 전자는 천적 생명의 질서이고 후자는 그 천적 본성을 죽음으로 이끄는 질서입니다.

 

AC.80은 그래서 창2:16-17의 금령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기준을 세웁니다. 인간에게 금지된 것은 지식도, 이성도, 질문도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세우고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을 가지고 신앙의 아르카나를 자기 힘으로 판단하려 하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의 참된 질서는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하고,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누리며, 그 모든 것의 근원을 주님께 돌리는 데 있습니다. 그 질서를 떠나는 것이 바로 그의 천적 본성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AC.80)

 

 

 

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며, 앞 장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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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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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사람은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The celestial man is such a garden. But as the garden is the Lords, it is permitted this man to enjoy all these things, and yet not to possess them as his own (verse 15).

 

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15)

 

해설

AC.79는 앞의 에덴동산에 관한 개요를 매우 중요한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AC.77에서는 천적 인간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안의 나무들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AC.78에서는 동산의 강이 지혜이고, 거기서 갈라지는 네 강이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을 나타내며, 이 모든 것이 지혜에서, 그리고 그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9는 이 모든 것을 한데 모아 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과 무관한 외부의 어떤 아름다운 장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천적 인간 자신이 그러한 동산입니다. 그의 지성,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 그리고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모두 주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 있을 때 그 인간이 바로 에덴동산으로 묘사될 수 있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AC.79의 핵심은 그다음 문장에 있습니다. ‘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천적 인간이 동산이라고 했지만 그 동산의 소유자는 천적 인간이 아닙니다. 그의 안에 있는 사랑도, 신앙도, 퍼셉션도, 지혜도, 선과 진리도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모두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은 자신 안에 있는 천국적인 것들을 누릴 수 있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누린다는 것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한다는 것이 분명하게 구별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선과 진리, 사랑과 지혜를 주시고 그것들을 실제 자신의 삶 안에서 누리도록 하십니다. 인간은 사랑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들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자유롭게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의 근원까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그것들을 받는 자이지 그 생명과 선과 지혜의 원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구별은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이시라고 해서 인간이 아무것도 생각하거나 행하지 않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인간이 실제로 사랑하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한다고 해서 그 안의 참된 선과 진리가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것으로 느끼면서 자유롭게 살아가되, 그것의 근원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AC.79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에 담긴 중요한 질서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것을 누리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지혜를 갖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거나 선을 행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충분히 받아 누리되 이것은 나에게서 나온 나의 것이다라고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9는 앞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할 proprium의 문제와 깊이 연결됩니다. ‘proprium은 문자 그대로 인간 자신의 것, 곧 인간이 자기에게 속한다고 여기는 것을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에게 타락한 인간의 proprium은 자기에게 생명과 선과 지혜가 있는 것처럼 여기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려는 방향과 연결됩니다. AC.79는 아직 그 전체 교리를 펼치지는 않지만, 에덴의 질서를 설명하면서 이미 그 문제의 핵심을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이 에덴동산인 까닭은 그가 자기 안의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주장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는 선과 진리와 지혜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동산은 그의 안에 있으면서도 그의 소유가 아니라 주님의 동산입니다. 이것은 매우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의 거듭남 이해에서는 중요한 원리입니다.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받을수록 더욱 살아 있는 인간이 되지만, 동시에 그것이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을 더욱 인정하게 됩니다.

 

여기서 주님의 이라는 말을 단순한 소유권의 비유로만 읽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지성과 사랑을 외적으로 소유하고 계신다는 뜻이라기보다, 인간 안의 모든 참된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76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었던 것과도 연결됩니다.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면, 그 생명으로 살아 움직이는 선과 진리와 지혜 역시 인간 자신의 독립적인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AC.78의 마지막 문장과도 매우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거기서는 네 강으로 묘사된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고, 그 지혜는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AC.79에서 동산은 주님의 이라고 하는 것은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원리가 아닙니다. 이미 모든 것의 근원이 주님께 있음을 설명한 뒤, 그 질서를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도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자기 이성으로 만들어 내어 자기 것으로 확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그것을 퍼셉션하는 사람입니다. AC.77의 나무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던 것도 이런 질서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퍼셉션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 있다면 더 이상 주님으로부터 받는 퍼셉션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이것은 모두 주님의 것이니 나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AC.79의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인간에게 그것들을 누리는 을 허락하셨다는 표현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실제 자신의 삶 안에서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 사용합니다. 사랑하고, 배우고, 분별하고, 선을 행하며, 쓰임을 살아갑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기 삶 안에서 실제로 살아 내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몫입니다.

 

따라서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은 책임이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공로와 근원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는 것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에게서 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이 주님임을 인정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이후 여러 저작에서 거듭남과 자유를 설명할 때 반복해서 나타나는 중요한 질서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나 AC.79라는 개요에서 그 후대의 교리 전체를 미리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창2:15의 속뜻을 읽기 위한 기본 원리를 붙드는 것입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 그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누리도록 허락받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알면 창2:15여호와 하나님이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는 말씀도 단순한 농사 명령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기 시작합니다. 다만 경작하며 지키다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당 절의 상세 해설에서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9에서는 우선 동산이 주님의 것이며 인간은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는 기본 질서를 세우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특히 동산을 경작한다는 말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과 지혜를 생산한다는 뜻으로 읽으면 AC.79의 핵심과 정반대가 됩니다. 동산 자체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맡겨진 활동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 안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입니다. 인간은 근원이 아니라 받는 자이며, 동시에 받은 것을 살아 내는 자입니다.

 

이 원리는 앞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명령을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해집니다.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과 진리를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기고 자기의 감각과 이성을 근원으로 삼으려 할 때, 에덴의 질서는 흔들리게 됩니다. AC.79는 아직 그 타락을 다루지 않지만, 타락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을 미리 세워 놓습니다.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이 질서를 인정하는 것이 에덴의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에덴의 행복은 단순히 모든 것을 많이 소유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과 지혜를 누리고,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의 근원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주님으로부터 모든 선과 진리를 받는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덜 인간적인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그것을 자기 삶 안에서 자유롭게 누릴 때 인간은 참으로 살아 있게 됩니다. 반대로 인간이 그 생명의 근원을 자기에게 돌릴수록 본래의 질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AC.73부터의 개요를 함께 놓으면 이 흐름은 더욱 분명합니다.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되고,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의 지식과 이성, 생명, 지성, 퍼셉션, 사랑과 신앙, 지혜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질서가 차례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AC.79는 그 모든 것을 인간이 어떤 태도로 받아야 하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누릴 수 있지만 그의 독립적인 소유물이 아닙니다. 동산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은 앞으로 에덴의 상실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인 기준이 됩니다. 에덴을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아름다운 장소에서 추방되는 것보다 훨씬 깊은 문제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살아가는 천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것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창2 후반과 창3에서 차례로 밝혀질 것이므로 지금은 미리 상세하게 전개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9에서 우선 붙들 것은 매우 명료합니다.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그가 에덴인 까닭은 그 안의 모든 것이 그의 독립적인 소유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질서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 퍼셉션과 지혜를 자유롭게 누립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자기 자신에게서 나온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AC.79는 에덴동산의 가장 깊은 질서 가운데 하나를 보여 줍니다. ‘누리되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 .인간은 주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을 자신의 삶 안에서 충분히 받아 누리면서도 그 근원을 주님께 돌립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이 주님의 동산으로 살아가는 질서이며, 이후 말씀에서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로 기울기 시작할 때 무엇이 무너지게 되는지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AC.79)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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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갈래 -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갈라져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cognitio)입니다.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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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강이 갈라져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cognitio)입니다.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합니다. 셋째는 이성이고, 넷째는 기억지식(scientia)인데,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합니다. 모든 것은 지혜에서 나오며,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 (10-14) Wisdom is meant by the river in the garden. From thence were four rivers, the first of which is good and truth; the second is the knowledge [cognitio] of all things of good and truth, or of love and faith. These are of the internal man. The third is reason, and the fourth is memory-knowledge [scientia], which are of the external man. All are from wisdom, and this is from love and faith in the Lord (verses 1014).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근원이 되었으니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땅을 둘렀으며 12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땅을 둘렀고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10-14)

 

해설

AC.78은 창2:10-14에 나오는 에덴동산의 강과 네 갈래 강의 속뜻을 개요로 보여 줍니다. AC.77에서 천적 인간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되고, 그 동산의 나무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8에서는 그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이 지혜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의 강에서 네 강이 갈라져 나오는 모습으로 천적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어떻게 질서를 이루는지가 묘사됩니다.

 

먼저 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한다는 것이 출발점입니다. 바로 앞 AC.77에서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으로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그 동산을 적시며 흘러나오는 강은 지혜입니다. 여기서도 강이라는 자연물의 성질을 보고 우리가 임의로 물이 흐르므로 지혜도 흐른다는 식의 상응을 만들어 낼 필요는 없습니다. AC.78은 직접 = 지혜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우선 그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강은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2:10에서는 에덴에서 강이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AC.78은 이 네 강을 차례대로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것들로 설명합니다. 첫째와 둘째는 속 사람에게 속하고, 셋째와 넷째는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따라서 네 강은 단순히 고대 세계의 네 지리적 수계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 안에 있는 내적·외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첫째 강은 선과 진리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아직 창2:11의 비손이라는 이름과 그 주변의 금, 베델리엄, 호마노가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개요이므로 첫째 강이 선과 진리를 나타낸다는 큰 대응 관계만 제시합니다. 이 선과 진리가 속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째 강은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cognitio)입니다. 여기서 원문의 cognitio를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Pottsknowledge라고 옮겼지만 스베덴보리는 뒤의 넷째 강에 사용하는 scientia와 다른 라틴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한국어에서도 둘을 모두 지식이라고 해 버리면 스베덴보리가 개요에서 세운 구별이 흐려집니다.

 

이번 번역에서는 그래서 cognitio으로 옮겼습니다. 이것은 선과 진리, 다시 말해 사랑과 신앙에 관한 것들을 아는 것과 관련됩니다. 다만 이 한 문장만으로 cognitio의 전체적인 전문용어 체계를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으로 AC에서 이 단어가 반복해서 사용되는 문맥을 보면서 그 의미 범위를 더 정확하게 잡아야 합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둘째 강의 cognitio와 넷째 강의 scientia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첫째와 둘째를 묶어 이것들은 사람에게 속한다고 합니다. 즉 선과 진리, 그리고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이 속 사람과 관련됩니다. 여기서도 사람이라는 말을 단순히 인간의 깊은 심리나 무의식 정도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별은 인간의 영적 구조와 거듭남을 이해하는 중요한 틀입니다. 속 사람은 주님과 천국을 향하여 열릴 수 있는 인간의 내적인 부분이며, 겉 사람은 자연계와 감각적인 삶을 향하여 있는 부분입니다.

 

그렇다고 속 사람은 선하고 겉 사람은 나쁘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AC.78의 네 강 자체가 그런 오해를 막아 줍니다. 셋째와 넷째 강, 곧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 역시 하나의 지혜에서 나옵니다. 문제는 겉 사람 자체가 아니라 속 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질서입니다. 겉 사람이 속 사람과 조화를 이루고 그 안에 있는 선과 진리를 자연적 삶에서 섬길 때, 이성과 기억지식도 온전한 쓰임을 갖습니다.

 

셋째 강은 이성입니다. 이것은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성을 속 사람에 속한 선과 진리보다 열등하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성은 인간이 자연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분별하며 이해하는 데 중요한 능력입니다. 다만 천적 인간의 질서에서는 이성이 스스로 최고의 권위를 주장하지 않고 속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과 질서 있게 연결됩니다.

 

넷째 강은 기억지식(scientia)입니다. ‘scientia역시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을 때 매우 주의해야 하는 용어입니다. 이것을 현대적인 과학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여기서는 인간이 감각과 경험, 학습 등을 통하여 기억 안에 받아들인 지식과 관련됩니다. 그래서 기억지식이라고 옮기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연적·외적 차원의 앎이라는 성격을 비교적 잘 살릴 수 있습니다.

 

AC.75에서 이미 천적 인간의 scientificum et rationale’, 곧 지식과 이성이 언급되었습니다. AC.78에서는 이제 이성과 기억지식이 겉 사람에게 속한다고 명시함으로써 그 위치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AC.75에서 우리가 지식과 이성을 너무 빨리 천적 인간의 내적인 인식 구조라고 규정하지 않았던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AC.78에 이르러 스베덴보리 자신이 그것들을 겉 사람과 연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네 강 모두가 어디에서 나오는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모든 것은 지혜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첫째의 선과 진리, 둘째의 사랑과 신앙에 관한 앎, 셋째의 이성, 넷째의 기억지식이 서로 완전히 독립된 네 능력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지혜에서 나와 속 사람과 겉 사람에 각각 질서 있게 자리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단계 더 근원으로 올라갑니다. ‘ 지혜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AC.78 전체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마지막 문장입니다. 네 강의 근원은 지혜이고, 그 지혜의 근원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지혜는 인간 자신의 뛰어난 지능이나 많은 지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이 질서 있게 흘러나옵니다.

 

이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기억지식을 많이 쌓아서 이성이 생기고, 이성을 충분히 발전시키면 선과 진리에 이르며, 결국 사랑과 신앙에 도달한다는 식의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구조가 아닙니다. AC.78이 제시하는 천적 질서는 반대 방향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로부터 속 사람의 선과 진리와 그것들에 관한 앎이 나오며, 또한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도 질서를 얻습니다.

 

그렇다고 자연적 지식과 이성을 무가치하게 여겨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번호에서 이성과 기억지식도 에덴의 하나의 강에서 갈라져 나온 네 강 가운데 포함됩니다. 그것들이 올바른 근원과 질서 안에 있을 때에는 천적 인간의 삶을 이루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문제는 이성과 기억지식이 자기 자신을 근원으로 여기고 속 사람으로부터 분리될 때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창2와 창3에서 매우 중요하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고자 하고, 자기의 감각과 기억지식과 이성을 최종적인 판단자로 삼으려 할 때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AC.78은 아직 그 타락을 다루는 번호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타락 이전의 올바른 천적 질서를 보여 줍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 근원에 있고, 거기서 지혜가 나오며, 그 지혜에서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이 질서 있게 나옵니다.

 

이것을 바로 앞 AC.77과 함께 읽으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AC.77에서는 생명나무가 사랑이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78에서는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따라서 사랑과 신앙은 에덴동산 안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서로 무관한 원리가 아닙니다. 천적 인간의 지혜 전체가 그것들로부터 나옵니다.

 

다만 여기서도 사랑과 신앙을 완전히 동등한 두 출발점이라고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천적 인간에게서 사랑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신앙이 그 사랑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과 AC 전체를 통해 더 정교하게 드러납니다. AC.78의 표현은 우선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 문장을 그대로 존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네 강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구조로 읽는 것은 에덴동산의 지리적 묘사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열어 줍니다. 비손, 기혼, 힛데겔, 유브라데라는 네 강을 고대 지도에서 찾아내는 것만으로는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속뜻에 이를 수 없습니다. 말씀은 이 강들을 통해 천적 인간 안에서 주님으로부터 오는 지혜가 어떻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까지 질서 있게 펼쳐지는지를 묘사합니다.

 

그렇다고 각각의 강 이름과 지역을 이번 개요에서 미리 상세히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첫째 강이 왜 선과 진리인지, 둘째 강이 왜 선과 진리에 관한 앎인지, 셋째와 넷째가 왜 이성과 기억지식인지에 대한 세부적인 근거는 창2:10-14의 상세 해설에서 다루어질 것입니다. AC.78에서는 네 강 전체의 구조를 먼저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구조를 간단히 말하면 이렇습니다. 첫째와 둘째는 속 사람에게 속하고, 셋째와 넷째는 겉 사람에게 속합니다. 그러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두 개의 서로 끊어진 세계가 아닙니다. 모두 하나의 지혜에서 나오며, 그 지혜는 다시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 안에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하나의 근원 아래 질서를 이룹니다.

 

이 점에서 AC.78은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매우 중요한 개요 번호입니다. 거듭남의 목적은 겉 사람을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이성과 기억지식을 버리고 순수하게 내적인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올바른 질서로 연결되어, 겉 사람에 속한 이성과 기억지식까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기억지식과 이성을 많이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영적이지 못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어디에서 출발하며 무엇을 섬기느냐입니다. 자기 지성과 기억지식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최종 기준이 되면 질서가 거꾸로 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질서 아래 놓일 때 이성과 기억지식은 인간의 자연적 삶에서 매우 중요한 쓰임을 담당합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면서 공부보다 사랑이 중요하다’, ‘이성보다 신앙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단순한 양자택일을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78이 보여 주는 것은 어느 하나를 버리는 구조가 아니라 모두가 올바른 근원과 질서 안에 놓이는 구조입니다. 사랑과 신앙으로부터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가 속 사람뿐 아니라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까지 질서 있게 합니다.

 

AC.73부터의 개요를 함께 놓으면 이제 천적 인간의 모습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그는 일곱째 날이며, 그의 지식과 이성이 묘사되고, 그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며, 그의 지성은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동산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있고, 생명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사랑과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동산에서 흘러나오는 강은 지혜이며, 그 지혜로부터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이 나옵니다.

 

그 모든 흐름의 가장 깊은 근원에 있는 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입니다. 이것이 AC.78의 마지막 문장이면서 동시에 전체 번호를 묶는 핵심입니다. 천적 인간의 선과 진리, 그것들에 관한 앎, 이성과 기억지식은 서로 흩어진 능력들이 아니라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오는 하나의 지혜 안에서 질서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AC.78에서 에덴의 강과 네 강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고대 지리의 수계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이 보여 주는 영적 질서를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지혜가 나오고, 그 지혜에서 속 사람의 선과 진리와 그에 관한 앎이 나오며, 겉 사람의 이성과 기억지식도 나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 전체가 하나의 지혜 아래 질서를 이루는 것, 이것이 에덴의 강과 네 갈래 강을 통해 묘사되는 천적 인간의 내적 질서입니다. (AC.78)

 

 

 

AC.79,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에덴동산이지만,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다' (15절)

AC.79천적 인간은 이와 같은 동산입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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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과 두 나무 - 천적 인간의 지성과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AC.77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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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신앙을 의미합니다. (8-9) Afterwards his intelligence is described by the garden in Eden, in the east; in which the trees pleasant to the sight are perceptions of truth, and the trees good for food are perceptions of good. Love is meant by the tree of lives, faith by the tree of knowledge [scientiae] (verses 89).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9여호와 하나님이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8, 9)

 

해설

AC.77은 창2:1-17 개요 가운데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한층 더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번호입니다.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이 초목과 채소로 묘사되었고,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이제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밝힙니다. 그것이 바로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입니다. 그리고 그 동산 안의 여러 나무는 천적 인간의 퍼셉션을,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먼저 에덴동산이 천적 인간의 지성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흔히 에덴동산을 최초의 두 사람이 살았던 아름다운 낙원으로 떠올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창2의 속뜻에서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와 연결합니다. AC.77에서는 그 가운데서도 특별히 그의 지성이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에덴은 단순한 아름다운 장소가 아니라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지성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그렇다고 에덴’, ‘동산’, ‘동쪽각각의 상응을 지금 모두 풀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AC.77은 개요이기 때문입니다. 왜 에덴이 지성과 관계되는지, 왜 그 동산이 동쪽에 있다고 하는지, 동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뒤의 창2:8 상세 해설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지금은 스베덴보리가 먼저 제시하는 큰 대응 관계, 천적 인간의 지성=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을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이어서 동산 안의 나무들이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보기에 좋은 나무들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하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선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퍼셉션은 창2의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천적 인간은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단지 외부에서 배운 규칙이나 논증을 통해서만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퍼셉션을 통해 그것을 지각합니다. 따라서 에덴동산의 나무들은 단순히 천적 인간이 알고 있는 여러 지식의 목록이 아니라 그의 지성 안에 있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묘사합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가 보기에 좋은 먹기에 좋은 을 구별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자는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고 후자는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그러나 본다 = 진리’, ‘먹는다 = 이라는 상응의 세부적인 근거를 AC.77에서 우리가 임의로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뒤의 상세 해설에서 스베덴보리가 그 의미를 어떻게 풀어 가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이 두 종류의 나무가 천적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진리와 선에 대한 퍼셉션을 각각 나타낸다는 사실이 핵심입니다.

 

특히 여기서 퍼셉션을 일반적인 직감이나 느낌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왠지 이것이 맞는 같다고 느끼는 심리적 직관을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천적 인간의 퍼셉션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퍼셉션은 태고교회와 천적 인간의 매우 독특한 내적 상태와 관련된 개념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지각하는 능력이며, 단순한 개인적 감정이나 주관적 확신과는 구별됩니다.

 

이 점은 앞으로 에덴 이야기를 읽는 데 중요합니다. 에덴동산을 천적 인간의 지성이라고 할 때, 그 지성은 단순히 논리적 추론 능력이 뛰어난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동산의 나무들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는 사실이 바로 그것을 보여 줍니다. 천적 인간의 지성은 사랑과 퍼셉션의 질서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동산 가운데 특별한 두 나무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지식의 나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아주 간결하게 사랑은 생명나무로, 신앙은 지식의 나무로 의미된다고 합니다. 이 대응은 창2와 창3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먼저 생명나무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랑을 단순한 인간적 감정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문맥은 천적 인간의 상태이며, 천적 인간에게 중심이 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입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사랑을 의미한다는 것은 천적 인간의 참된 생명이 사랑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로 앞 AC.76에서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되었다는 점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다른 하나인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점은 특히 주의 깊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신앙은 우리가 고정해 온 용어대로 faith입니다. 따라서 이 나무를 단순히 지식’, ‘학문’, ‘이성또는 인간의 지적 능력자체라고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77은 분명히 그것이 신앙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곧바로 생명나무는 좋은 나무이고 지식의 나무는 나쁜 나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신앙 자체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창4에서도 계속 살펴보았듯 문제는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첫째가 되려고 할 때 발생합니다. 2에서도 이 질서의 문제가 매우 중요하게 나타날 것입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사랑이 중심이며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 점에서 AC.77의 두 나무는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배경을 제공합니다. 생명나무가 사랑이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이라면, 핵심 문제는 단순히 어떤 나무의 열매를 먹었는가?라는 외적인 사건에만 있지 않습니다. 사랑과 신앙이 인간 안에서 어떤 질서에 놓여 있는가라는 훨씬 깊은 문제가 말씀의 속뜻에 들어 있습니다. 다만 이 문제는 창2:16-17과 창3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펼쳐지므로 AC.77에서 미리 모든 결론을 끌어오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특히 tree of knowledge [scientiae]라는 표현도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Pottsknowledge라고 번역하면서 라틴어 scientiae를 함께 표시합니다. 이 단어를 현대적인 의미의 과학이나 학문적 지식으로 읽으면 본문의 뜻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어 체계에서 scientia와 관련된 표현은 기억에 받아들인 앎이나 지식과 연결되며, 여기서는 그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밝힙니다. 따라서 지식의 나무라는 명칭만 보고 지식 자체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AC.75AC.77을 비교하면 이 점이 더욱 분명합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스베덴보리가 지식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지식과 이성과 신앙이 사랑이라는 중심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는가입니다.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진리와 신앙은 그 사랑에서 나옵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반면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의 선이 중심이며, 그 사랑으로부터 진리와 신앙을 퍼셉션합니다. 따라서 생명나무가 사랑이고 지식의 나무가 신앙이라는 AC.77의 짧은 설명은 천적 인간 안에서 사랑과 신앙의 올바른 질서를 보여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나무를 서로 적대적인 두 원리로 만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사랑과 신앙은 본래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질서에서는 하나를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분리되고, 인간이 신앙에 속한 것을 자기 자신에게서 알고 판단하려 할 때입니다. 바로 이 문제가 뒤의 에덴 이야기와 창3에서 점차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이라는 표현과 생명나무의 사랑을 연결하여 동쪽은 주님이므로 에덴동산은 주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지성이다라고 지금 곧바로 완성된 상응 체계를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방향이 뒤의 상세 해설과 연결될 수 있더라도, AC.77은 아직 각 요소의 세부 의미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번 개요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제시한 대응 관계를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AC.77은 앞의 개요들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아름답게 연결됩니다. AC.73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창2의 주제라고 했습니다.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고 했고,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을,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을 설명했습니다. 이제 AC.77에서는 그의 지성과 그 지성 안의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그리고 사랑과 신앙을 보여 줍니다. 개요가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점점 더 구체적으로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특히 기억할 것은 에덴동산 = 천적 인간의 지성이라는 사실입니다. 에덴은 단순히 잃어버린 옛 낙원의 지리적 장소를 찾기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주님에 의해 거듭난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 동산 안에 있는 아름다운 나무들은 그의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그 중심에는 사랑과 신앙이라는 두 중요한 것이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도 모든 것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AC.76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주님께서 불어넣으시는 생명의 숨으로 묘사되었다면, AC.77의 에덴동산 역시 그 생명을 받은 인간 안에 형성된 지성의 상태입니다. 인간이 자기 지혜로 에덴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사랑과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서 그의 내면이 에덴동산으로 묘사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7의 핵심은 여러 상응을 따로 외우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이 있고, 그의 지성은 에덴동산으로 묘사되며, 그 안에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있고, 사랑과 신앙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앞으로 창2와 창3에서 인간의 내적 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고 또 어떻게 무너지게 되는지를 이해하는 기초가 됩니다.

 

AC.77은 따라서 에덴동산 이야기를 읽는 매우 중요한 열쇠입니다.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은 천적 인간의 지성을,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을,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을 나타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지식의 나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이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붙들고 있으면 이후 에덴의 이야기는 단순한 고대의 정원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 퍼셉션과 인간의 지혜에 관한 깊은 말씀으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AC.77)

 

 

 

AC.78, 창2:1-17 개요, '에덴의 강과 네 갈래 - 지혜에서 나오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의 모든 것' (10-14절

AC.78동산의 강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거기에서 네 강이 갈라져 나왔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이고, 둘째는 선과 진리에 관한 모든 것,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앎(cognitio)입니다.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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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의 생명 -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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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the breath of lives)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7)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7)

 

해설

AC.76 2:1-17 개요의 흐름을 한층 깊은 곳으로 이끕니다. AC.73에서는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2에서 다루어진다고 했고, AC.74에서는 천적 인간이 일곱째 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땅의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6에서는 그 천적 인간의 생명자체가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밝힙니다. 그것은 창2:7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의 을 불어넣으시는 것입니다.

 

이 한 문장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그의 생명이라는 표현입니다. 여기서 는 바로 앞에서 계속 다루고 있는 천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AC.76은 일반적인 생물학적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는 글이 아닙니다. 2:7의 문자적 의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생령이 되는 장면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말씀의 속뜻에서 천적 인간의 생명이 묘사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을 단순히 최초 인간의 육체에 호흡이 시작된 사건으로만 읽어서는 AC.76이 가리키는 속뜻에 이르지 못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지금 관심을 두는 것은 인간의 몸이 어떻게 생물학적으로 살아나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천적 인간의 참된 생명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그 생명이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생명의 주체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생명을 만들어 내지 않습니다. ‘불어넣으심이라는 말씀 자체가 생명이 인간 자신에게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주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인간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생명을 받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 원리는 스베덴보리의 인간 이해 전체에서 매우 중요하며, 천적 인간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닙니다. 오히려 천적 인간은 자기에게 있는 사랑과 지혜와 생명이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그것들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가장 내적으로 인정하는 인간입니다.

 

다만 AC.76의 한 문장만으로 이 불어넣으심의 모든 상응을 미리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명의 이라고 하는지, 그리고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는 창2:7의 상세 해설에서 스베덴보리가 구체적으로 밝힐 것입니다. 지금은 개요이므로 천적 인간의 생명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는 큰 대응 관계를 정확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점은 바로 앞 AC.75와 비교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AC.75에서는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말했습니다. 지식과 이성은 인간의 중요한 능력이지만 그것 자체가 인간의 생명은 아닙니다. 이제 AC.76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생명으로 들어갑니다. 인간에게 지식이 있고 이성이 있으며 지성이 있다고 해서 그것들이 스스로 살아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생명을 받아야 비로소 살아 움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천적 인간을 단순히 매우 지혜로운 사람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의 핵심은 지식의 양이나 추론 능력의 탁월함에 있지 않습니다. AC.75가 그의 지식과 이성을 말한 뒤 곧바로 AC.76이 그의 생명을 말한다는 순서도 의미 있게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과 정교한 이성을 갖추고 있어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순서를 근거로 지식과 이성은 낮고 생명은 높다는 식의 위계적 상응을 우리가 임의로 만들어 낼 필요도 없습니다. 개요에서 스베덴보리가 서로 다른 요소들을 차례로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따라가면 충분합니다. AC.75에서는 지식과 이성, AC.76에서는 생명, 이어지는 AC.77에서는 지성을 말합니다. 각각의 의미와 관계는 뒤의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생명의 이라는 표현을 오늘날 흔히 말하는 하나님의 영을 인간에게 불어넣으셨다는 식으로 곧바로 동일시하는 것도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성경의 ’, ‘호흡’, ‘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경우가 있지만, AC.76 자체는 아직 그 교리적 관계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생명의 =성령이라고 단순 등식으로 확정하기보다, 스베덴보리가 해당 절을 상세히 해설할 때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기다리는 것이 정확합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Potts 영어가 the breath of lives라고 복수형을 그대로 살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2:7의 히브리어 역시 문자적으로는 생명들의 에 해당하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보고 곧바로 여러 종류의 생명이나 몇 단계의 생명을 뜻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AC.76은 그 복수형 자체의 속뜻을 아직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종 번역에서는 개역개정의 익숙한 표현과 한국어의 자연스러움을 고려하여 생명의 으로 두고, 상세 해설에서 필요할 때 원문의 복수형을 다시 살피는 것이 좋겠습니다.

 

AC.76은 또한 창1의 거듭남 전체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1의 여섯 날 동안 사람에게 빛이 생기고, 선과 진리가 구별되고, 신앙에 속한 것들이 생겨나며, 살아 있는 것들이 나타나고,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는 과정이 묘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거듭남의 근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님입니다. 2:7에서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은 천적 인간 역시 자기 힘으로 천적 생명을 획득한 존재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아 사는 존재임을 다시 보여 줍니다.

 

이것은 proprium의 문제와도 앞으로 깊이 연결됩니다. 인간의 proprium은 자기에게 있는 생명과 선과 지혜를 자기 자신의 것으로 여기려는 방향으로 기울기 쉽습니다. 그러나 참된 질서에서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과 진리와 생명의 근원이 주님입니다.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이해할 때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다만 AC.76 자체가 아직 proprium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그 문제를 길게 전개하기보다 앞으로 창2의 본문이 그것을 어떻게 열어 가는지 따라가는 편이 좋겠습니다.

 

따라서 AC.76의 핵심은 매우 단순하면서도 깊습니다. 천적 인간에게는 지식과 이성이 있지만 그의 참된 생명은 그것들 자체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의 생명은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말씀은 그 사실을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이라는 형상으로 묘사합니다.

 

AC.73부터 지금까지의 개요를 함께 놓으면 흐름이 더욱 또렷해집니다. AC.73에서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의 전환을 말했습니다. AC.74에서는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이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으로 묘사된다고 합니다. 개요가 한 문장씩 천적 인간의 상태를 열어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생명의 숨이 정확히 어떤 물질인가?가 아닙니다. ‘천적 인간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답은 인간 자신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입니다. 인간은 생명의 원천이 아니라 생명을 받는 존재이며, 천적 인간은 이 질서를 가장 내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입니다. 2:7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은 바로 그 천적 생명을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AC.76)

 

 

 

AC.77, 창2:1-17 개요, '에덴동산과 두 나무 - 천적 인간의 지성과 퍼셉션, 사랑과 신앙' (8-9절)

AC.77그다음 그의 지성은 동쪽에 있는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좋은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며,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생명나무는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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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은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5-6절)

AC.75그의 지식과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은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난 초목과 채소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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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그의 지식과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초목과 채소로 묘사됩니다. (5-6)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shrub and the herb out of the ground watered by the mist (verses 56).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셨더라 (5, 6)

 

해설

AC.75는 창2:1-17 개요의 세 번째 항목입니다. AC.73에서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된 뒤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창2에서 다루어진다고 했고, AC.74에서는 그 천적 인간이 일곱째 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이제 AC.75에서는 천적 인간 안에 있는 지식과 이성이 말씀에서 무엇으로 묘사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것은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초목과 채소입니다.

 

먼저 중요한 것은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천적 인간이 사랑과 퍼셉션에 의해 인도된다고 해서 지식이나 이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오히려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다만 앞으로 살펴보게 되듯 그것들이 천적 인간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은 영적 인간의 경우와 같지 않습니다.

 

원문은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라고 합니다. 여기서 scientificum은 영어 번역에서 knowledge로 옮겨졌지만, 현대 한국어에서 지식이라고 할 때 떠올리는 학문적 지식에만 한정해서 이해하면 좁아질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용례에서 이 말은 인간이 감각과 경험, 교육 등을 통하여 겉 사람의 기억 안에 받아들인 여러 앎과 관련됩니다. 이러한 것들은 이성이 사고하고 판단하는 데 사용되는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rationale는 이성과 관련됩니다. 그러나 현재 해설처럼 scientificum 경험과 학습으로 쌓인 지식이고 rationale 지식이 질서 잡혀 이해로 올라간 상태라고 너무 간단하게 두 층으로 고정하는 것은 조금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후 AC에서 지식, 이성,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훨씬 정교하게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AC.75에서는 우선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2:5-6의 자연적 이미지들이 그것들을 묘사한다는 사실까지만 정확히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지식과 이성을 묘사하는 것이 초목과 채소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나무는 높이 자라지만 초목과 채소는 가까이 자라므로 지식과 이성이 중심이 아니라 섬기는 자리에 있다는 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본문보다 앞서갑니다. AC.75는 식물의 높낮이를 근거로 그런 해석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말씀의 상응을 설명할 때에는 자연물의 외형에서 우리가 그럴듯한 의미를 만들어 내기보다,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 상응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원칙은 우리의 AC 작업에서 특히 중요합니다. ‘초목은 낮으니까 겸손’, ‘나무는 높으니까 높은 지혜’, ‘안개는 부드러우니까 은밀한 은혜와 같이 자연적 이미지에서 곧바로 영적 의미를 추론하면 아름다운 묵상은 만들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동일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상응은 단순한 시적 연상이나 비유가 아니라 말씀의 내적 질서와 관련되므로, 가능한 한 해당 AC의 직접적인 설명을 따라야 합니다.

 

안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안개가 주님으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계시나 교훈이 아니라 내적으로 스며드는 생명의 영향을 뜻한다고 설명하고, 다시 비와 안개를 위에서 아래로 강하게 주입되는 방식안에서 밖으로 부드럽게 흘러가는 방식으로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AC.75 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글이 말하는 것은 지식과 이성이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안개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창2:6을 직접 해설하는 곳에서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따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개요의 역할은 앞으로 펼쳐질 세부 상응을 미리 모두 해석하는 데 있지 않고, 독자가 본문 전체의 구조를 먼저 볼 수 있도록 큰 대응 관계를 알려 주는 데 있습니다. AC.75에서는 지식과 이성초목과 채소라는 자연적 이미지로 묘사된다는 큰 틀을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그렇다고 현재 해설이 강조한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라는 점까지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AC.75 자체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사실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의 scientificum et rationale을 명시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적 인간의 특징이 사랑과 퍼셉션이라고 해서 그가 이성을 사용하지 않거나 자연적 지식을 가지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천적 인간은 지식과 이성을 가장 바른 자리에 사람이다’, ‘지식은 사랑을 섬기고 이성은 선을 밝힌다’, ‘그의 지식은 날카롭기보다 온화하고 그의 이성은 논쟁적이기보다 투명하다는 기존 표현은 이번에는 빼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부분은 스베덴보리의 전체적인 천적 인간 이해와 어느 정도 연결할 수 있지만, 뒤의 온화하다’, ‘투명하다는 표현은 우리의 문학적 묘사입니다. 최종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과 우리의 묵상을 분명히 구별하는 편이 좋습니다.

 

AC.73부터의 흐름을 다시 보면 AC.75의 위치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AC.73은 창2 전체의 주체가 어떤 인간인지를 먼저 밝혔습니다. 그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 사람입니다. AC.74는 그 천적 인간의 상태를 일곱째 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5는 이제 그 사람 안의 특정한 능력, 곧 지식과 이성을 가리킵니다. 개요가 점차 천적 인간의 상태 안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5천적 인간의 인식 구조라고 부르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가능하지만, 그 구조 전체가 이 한 문장에 다 들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뒤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되고, AC.77에서는 그의 지성이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따라서 지식과 이성, 생명, 지성이 각각 구별되어 차례로 등장한다는 점을 주의해서 보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지식과 이성과 뒤에 나올 지성을 너무 빨리 하나의 인식 능력으로 묶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개요에서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했다면 일단 그 구별을 존중해야 합니다. 각각이 천적 인간 안에서 무엇을 뜻하고 서로 어떻게 관계되는지는 뒤의 상세 해설을 따라가면서 확인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2:5-6의 문자적 본문도 이 관점에서 다시 보입니다.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지면을 적셨더라는 문장은 자연적 창조의 장면만을 읽을 때에는 식물이 생겨나기 전 땅의 상태를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AC.75는 속뜻에서 이 표현들이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과 관계된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문자적 자연물의 묘사가 인간 내면의 상태를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AC.75 단계에서는 아직 초목과 채소가 없다고 하는가?’, ‘ 비가 아직 내리지 않았는가?’, ‘ 땅을 사람이 없다고 하는가?’, ‘ 안개가 땅에서 올라오는가?를 모두 답하려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바로 그런 질문들이 뒤의 상세 해설을 필요로 하는 이유입니다. 개요와 상세 해설의 역할을 구별하면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하는 것도 줄일 수 있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가 먼저이고 천적 인간에게는 선이 먼저라는 원리를 사용했습니다. 이 큰 구별 자체는 매우 중요하며 앞으로 계속 필요합니다. 그러나 AC.75에서 그래서 천적 인간은 지식을 쌓거나 이성을 단련한다는 감각이 거의 없다고까지 나아가는 것은 근거가 충분하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이 외적인 교육이나 지식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창2의 천적 인간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퍼셉션이라는 독특한 특성을 고려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앞으로 관련 AC가 직접 설명할 때 충분히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은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존재하지만 그것들의 질서와 역할은 그의 천적 상태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안식의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이상 지식과 이성을 통해 하나님께 도달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주님 안에 있다는 기존 표현도 수정하겠습니다. ‘이미 주님 안에 있다는 말은 신학적으로 여러 의미로 읽힐 수 있고, AC.75의 표현도 아닙니다. 무엇보다 거듭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생명과 선과 진리를 계속 주님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기본 질서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상태를 이제 이상 배울 필요도, 생각할 필요도, 분별할 필요도 없는 상태처럼 그리는 것도 피해야 합니다. AC.75가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을 명시적으로 언급한다는 사실 자체가 그런 단순화를 막아 줍니다. 천적 인간에게 지식과 이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그의 천적 생명의 질서 안에 존재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하나의 중요한 독법을 가르쳐 줍니다. 스베덴보리의 천적 인간을 이성을 초월했으므로 이성이 필요 없는 사람으로 낭만화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이 중심이라고 해서 진리와 지식이 무가치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인간의 여러 능력은 주님이 정하신 질서 안에서 각각의 쓰임을 갖습니다.

 

다만 이것을 곧바로 오늘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우리의 지식과 이성은 나무처럼 자신을 드러내는가, 아니면 초목과 채소처럼 삶을 섬기는가?라고 묻는 것은 이번 최종본에서는 빼겠습니다. 질문 자체는 좋은 묵상이지만 나무=자기과시, 초목과 채소=겸손한 섬김이라는 상응을 먼저 만들어 낸 뒤 그 위에 적용을 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AC 해설에서는 먼저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밝힌 상응을 정확히 세우고, 그 위에서 적용을 만드는 것이 좋습니다.

 

AC.75의 역할은 훨씬 간결하고 분명합니다. 2의 천적 인간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으며, 말씀은 그것들을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초목과 채소라는 자연적 형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한 형상으로 묘사되는지는 뒤에서 더 자세히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기억할 것은 세 가지 정도면 충분합니다. 첫째, AC.73부터는 사후세계가 아니라 다시 거듭남의 문맥입니다. 둘째, 2의 주체는 천적 인간입니다. 셋째, 그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창2:5-6의 초목과 채소로 묘사됩니다. 이 큰 구조를 먼저 붙들고 뒤의 상세 해설로 들어가면 각각의 상응을 억지로 앞당겨 해석하지 않고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차례대로 따라갈 수 있습니다.

 

AC.73에서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AC.74에서는 천적 인간은 일곱째 ’, 그리고 AC.75에서는 그의 지식과 이성은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개요는 한 문장씩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다음 AC.76에서는 한층 더 근본적인 문제, 곧 그 천적 인간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가 생명의 을 통해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AC.75는 천적 인간을 지식이나 이성이 없는 신비적인 존재로 그리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에게도 지식과 이성이 있음을 분명히 하면서, 그것들이 말씀 안에서 어떤 자연적 형상으로 표현되는지를 알려 주는 개요입니다. 지금은 그 대응 관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초목과 채소와 땅과 안개의 세부적인 의미는 해당 절의 상세 해설이 열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읽기입니다.

 

 

 

AC.76,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의 생명 -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심'(7절)

AC.76‘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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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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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 3)

 

해설

AC.74는 바로 앞 AC.73을 한 걸음 더 이어 갑니다. AC.73에서 스베덴보리는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었을 , 그는 그다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죽어 있던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이 아니라 거듭남 이전의 영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했습니다. 이제 AC.74에서는 그렇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을 일곱째 이라고 부르며, 바로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합니다.

 

이 한 문장은 창1의 여섯 날과 창2의 일곱째 날을 하나의 거듭남의 연속으로 연결합니다. 1의 여섯 날은 자연계 창조의 시간표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사람이 주님에 의해 단계적으로 거듭나는 상태들을 나타냈습니다. 그리고 그 여섯 날을 지나 이제 일곱째 날에 이른 인간이 바로 천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일곱째 은 단순히 일주일의 마지막 하루를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맥에서는 거듭남이 천적 상태에 이른 인간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에 들어간다고 하지 않고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은 단순한 자연적 시간 단위가 아니라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천적 인간이 어느 날 경험하는 휴식 시간이 아니라 천적 인간의 상태 자체를 나타냅니다. 1의 여섯 날 역시 같은 관점에서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로 읽어 왔으며, 이제 그 연속이 일곱째 날이라는 천적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할까요? 우선 이것을 주님께서 더 이상 일하시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생명과 섭리와 역사가 멈추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창2안식은 주님의 활동 중단을 뜻하는 자연적 휴식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속뜻에서는 거듭나는 인간 안에서 주님의 역사가 어떤 새로운 상태에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이 의미는 뒤의 개별 절 해설에서 훨씬 자세히 설명될 것이므로 AC.74라는 개요에서 너무 앞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창1 흐름을 생각하면 기본 방향은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남의 초기와 중간 단계에서는 인간이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려고 하면서 악과 거짓에 맞서 싸웁니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고 선택하고 싸우며 선을 행하는 것처럼 느낍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질수록 모든 선과 진리, 그리고 악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능력까지 실제로는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쉬신다는 표현을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천적 인간도 생각하고 사랑하고 행동하며 쓰임을 행합니다. 문제는 활동의 유무가 아니라 그 활동의 근원이 누구에게 있다고 여기는가입니다. 거듭남의 질서가 깊어질수록 인간 자신의 proprium이 주도권을 주장하는 것이 물러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인간 안에서 더욱 자유롭게 역사하게 됩니다. ‘안식의 의미는 뒤의 AC.85에서 본격적으로 밝혀질 것이므로 여기서는 이 정도의 방향을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주님이 사람 안에서 편히 거하실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의 안식이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아름다운 표현이지만 AC.74 자체가 그렇게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또한 주님이 거하신다주님이 쉬신다는 표현을 바로 동일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번 최종본에서는 스베덴보리가 직접 사용하는 주님의 안식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두고, 그 구체적인 의미는 뒤의 본문이 설명하도록 남겨 두는 편이 좋겠습니다.

 

AC.74는 또한 창1의 여섯째 날과 창2의 일곱째 날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여섯째 날의 인간은 이미 영적 인간입니다. 따라서 여섯째 날을 아직 거듭나지 못한 낮은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의 거듭남 과정은 여섯째 날에 이르러 이미 매우 중요한 완성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창2는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천적 인간의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때문에 여섯째 날의 신앙에 머물러서는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영적 인간이 반드시 천적 인간이라는 더 높은 등급으로 올라가야 하고, 영적 상태는 불완전한 신앙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 AC.73에서 살펴보았듯, 1-2의 이 특정한 거듭남 서술에서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이어지는 순서가 나타나지만,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에서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가 각각 고유한 성격을 갖습니다.

 

따라서 이 개요의 순서를 모든 사람에게 적용하여 영적 인간은 아직 여섯째 날에 머문 사람이고 천적 인간만 완성된 사람이다라고 단순화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2의 에덴 이야기가 나타내는 천적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창1과 창2의 속뜻을 연속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문맥 안에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안식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적인 상태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안식이라는 말을 들으면 일을 모두 마치고 활동을 중단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천국적 삶은 무활동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전체 가르침에서 천국의 생명은 사랑에서 나오는 쓰임의 생명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라는 것은 그의 삶이 멈추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싸움과 활동의 질서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현재 해설처럼 이 한 문장에서 곧바로 천국은 사랑에서 나오는 활동이 수고로 느껴지지 않는 상태라고 사후 천국의 삶까지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설명 자체는 스베덴보리의 쓰임과 천국 이해와 연결할 수 있지만, AC.74의 직접적인 주제는 사후 천국이 아니라 거듭난 천적 인간입니다. 바로 앞 AC.72까지 사후세계 이야기를 다루었다고 해서 AC.73 이후에도 계속 사후세계 문맥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AC.73부터는 분명히 창2:1-17의 속뜻 개요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AC.74안식은 우선 현재의 거듭남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인간이 주님에 의해 새롭게 되어 천적 인간이 된 상태가 일곱째 날이며, 그 상태를 말씀에서는 주님께서 쉬시는 날이라고 표현합니다. 왜 이것이 주님의 안식인지, 왜 일곱째 날이 복되고 거룩한지에 대해서는 뒤의 개별 절 해설이 더욱 자세하게 설명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AC.74는 개요로서 아주 절제되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천적 인간의 모든 특징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단지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합니다. 이 짧은 등식을 먼저 기억해 두면 뒤에서 창2:2-3을 자세히 해설할 때 각각의 표현이 무엇을 뜻하는지 훨씬 쉽게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곱째 날 이후에 이어지는 에덴동산의 모든 묘사도 같은 문맥 안에 놓입니다. AC.75부터는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이 어떻게 묘사되는지, AC.76에서는 그의 생명이 어디에서 오는지, 이어 에덴동산과 나무들과 강이 무엇을 나타내는지가 차례로 개요로 제시됩니다. 즉 창2:1-17 전체는 바로 이 일곱째 날의 인간’, 곧 천적 인간의 상태를 여러 측면에서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히게 됩니다.

 

그렇다고 에덴의 모든 내용이 단순히 안식 이후의 을 묘사한다고 미리 규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각각의 표상에는 고유한 의미가 있으며, 특히 이후에는 천적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서 지혜를 얻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 중요한 경계까지 등장합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을 모든 것이 완성되어 이제 아무 위험도 없는 상태라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2의 뒤쪽으로 갈수록 인간의 proprium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AC.73AC.74를 함께 놓으면 창2의 출발점이 분명해집니다. AC.73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었을 , 그는 그다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고 하여 창1에서 창2로 넘어가는 거듭남의 흐름을 제시합니다. AC.74는 그 천적 인간이 바로 일곱째 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의 전환과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의 전환은 이 개요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의 주체를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1에서 인간을 단계적으로 거듭나게 하신 분은 주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날도 인간이 자신의 노력으로 획득하여 주님께 안식을 제공하는 상태가 아닙니다. 인간을 천적 상태로 인도하시는 분 역시 주님이십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의 안식은 인간의 영적 성취를 자랑하는 표지가 아니라, 인간 안에서 주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역사가 어떤 질서에 이르렀음을 나타내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이 AC.74가 창2의 첫머리에 놓는 두 번째 열쇠입니다. AC.73의 첫 번째 열쇠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였다면, AC.74의 두 번째 열쇠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입니다. 이제 이어지는 개요들은 이 일곱째 날의 인간, 곧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하나씩 보여 주게 됩니다.

 

 

 

AC.75,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의 지식과 이성은 초목과 채소로 묘사된다’(5-6절)

AC.75그의 지식과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은 안개로 적셔지는 땅에서 난 초목과 채소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 are described by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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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3, 창2:1-17 개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1절)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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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4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And there was no shrub of the field as yet in the earth, and there was no herb of the field as yet growing, because Jehovah God had not caused it to rain upon the earth. And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he made a mist to ascend from the earth, and watered all the faces of the ground. 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And Jehovah God formed man, dust from the ground, and breathed into his nostrils the breath of lives, and man became a living soul. 8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And Jehovah God planted a garden eastward in Eden, and there he put the man whom he had formed. 9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And out of the ground made Jehovah God to grow every tree desirable to behold, and good for food; the tree of lives also, in the midst of the garden; and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10강이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 And a river went out of Eden to water the garden, and from thence it was parted, and was into four heads. 11첫째의 이름은 비손이라 금이 있는 하윌라 온 땅을 둘렀으며 The name of the first is Pishon; that is it which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Havilah, where there is gold. 12그 땅의 금은 순금이요 그곳에는 베델리엄과 호마노도 있으며 And the gold of that land is good; there is bdellium and the onyx stone. 13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이라 구스 온 땅을 둘렀고 And the name of the second river is Gihon; the same is it that compasseth the whole land of Cush. 14셋째 강의 이름은 힛데겔이라 앗수르 동쪽으로 흘렀으며 넷째 강은 유브라데더라 And the name of the third river is Hiddekel; that is it which goeth eastward toward Assyria; and the fourth river is Euphrates. 15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And Jehovah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till it and take care of it. 16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And Jehovah God commanded the man, saying, Of every tree of the garden eating thou mayest eat.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But of the tree of the knowledge of good and evil, thou shalt not eat of it; for in the day that thou eatest thereof, dying thou shalt die. (2:1-17)

 

AC.73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었을 , 그는 그다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됩니다. 지금 여기에서 바로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1) When from being dead a man has become spiritual, then from spiritual he becomes celestial, as is now treated of (verse 1).

 

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 (1)

 

해설

AC.73부터 창2:1-17의 본격적인 개요가 시작됩니다. 바로 앞 AC.67-72에서는 다른 에 관한 기록을 왜 밝히는지,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다는 것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그리고 이런 기록을 AC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가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그 서론을 마치고 다시 말씀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따라서 AC.73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그다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는 말을 앞에서 다룬 사후 소생의 연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는 다시 창1부터 계속되어 온 인간의 거듭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은 AC.73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서 죽어 있던 사람은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1의 속뜻에서 이미 보았듯이 거듭남 이전의 인간, 곧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의 생명이 아직 자기 안에서 살아 움직이지 않는 상태의 인간을 가리킵니다. 1의 여섯 날은 그러한 인간이 주님에 의해 단계적으로 새롭게 되어 마침내 영적 인간이 되는 과정을 묘사했습니다. 그리고 창2에서는 그다음 상태, 곧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되는 상태가 다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AC.73은 창1과 창2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한 문장입니다. 1과 창2가 서로 독립된 두 개의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이 더 깊어지는 연속된 질서를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1에서 죽어 있던 인간이 영적 인간이 되었고, 이제 창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여기서 영적 인간천적 인간이라는 두 표현을 정확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창1에서 살펴본 영적 인간은 주님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를 통해 선으로 인도되는 사람입니다. 그의 거듭남에서는 신앙에 속한 진리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는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이해하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양심을 통해 주님께 인도됩니다. 그래서 영적 인간에게는 진리와 신앙이 먼저 의식되고, 그것을 통해 사랑과 체어리티의 선으로 나아가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반면 천적 인간에서는 사랑과 선이 중심이 됩니다. 이것을 단순히 영적 인간은 머리로 알고 천적 인간은 행동으로 산다고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인간도 진리를 삶으로 살아야 하고 체어리티를 행합니다. 차이는 선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인간 안에서 어떤 질서로 받아들여지는가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진리를 통하여 선으로 인도되는 반면, 천적 인간에게서는 주님을 향한 사랑의 선으로부터 진리가 지각됩니다.

 

이 차이는 우리가 창1에서 이미 살펴본 양심퍼셉션의 차이와도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은 주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신 진리를 알고,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해야 한다는 양심을 통해 인도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특징은 퍼셉션입니다. 그는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단지 외적으로 배운 규칙에서 추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 안에서 그것을 내적으로 지각합니다. 2의 에덴동산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천적 인간의 상태를 묘사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AC.73의 한 문장만 가지고 모든 영적 인간은 결국 천적 인간으로 발전해야 하며, 영적 인간은 단지 미완성 단계에 불과하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이 창1-2의 연속적인 속뜻에서는 한 인간의 거듭남이 죽은 상태에서 영적 상태를 거쳐 천적 상태에 이르는 과정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전체 저작에서는 천적 인간과 영적 인간, 천적 교회와 영적 교회가 각각 고유한 성격을 가진 것으로 설명됩니다. 특히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고 그 이후의 고대교회는 영적 교회였습니다. 따라서 여기의 순서를 모든 시대와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AC.73as is now treated of’, 지금 여기에서 바로 일이 다루어지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이것은 일반적인 인간론을 잠시 말하는 문장이 아니라 지금부터 해설할 창2의 속뜻을 미리 요약하는 말입니다. 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는 문자적 의미에서는 창조의 완성을 말하지만, 속뜻에서는 거듭남의 여섯 날을 거쳐 영적 인간이 된 사람이 이제 천적 인간의 상태로 들어가는 새로운 단계와 연결됩니다.

 

현재 제목과 해설에서 이 변화를 완성을 향한 생명의 상승이라고 표현했던 것은 조금 수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론 창2의 천적 상태가 앞선 상태보다 더 내적인 상태라는 의미는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은 상승이 아니라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된다입니다. 이를 지나치게 위계적인 상승 과정으로 표현하면 영적 인간이나 영적 천국이 불완전한 상태에 불과하다는 오해가 생길 수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라는 창2:1의 구체적인 속뜻은 AC.82 이하에서 자세히 다루어질 것이므로, AC.73에서 미리 모든 세부 상응을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3은 개요입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1에서 영적 인간이 사람이 2에서는 천적 인간이 되는 과정으로 들어간다는 큰 흐름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기서 창1의 여섯째 날과 창2의 일곱째 날의 관계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1에서 인간은 여섯 날의 거듭남 과정을 거쳐 영적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듭남의 목표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끊임없이 싸우는 상태에 영원히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점점 더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고, 인간이 자신의 것으로 여겼던 것을 내려놓으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선 안에서 살아가는 상태로 인도되는 것입니다. 다음 AC.74에서는 바로 이 천적 인간을 일곱째 이라고 부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AC.73은 여섯 날에서 일곱째 날로 넘어가는 내적 의미를 한 문장으로 예고하는 역할도 합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쉬신다는 것도 인간이 완전무결해져 더 이상 아무 변화도 필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미리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AC.74 이하에서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지금은 여섯 날 동안 인간이 경험한 거듭남의 싸움과 수고가 천적 상태에서는 다른 질서로 바뀐다는 정도만 기억하면 충분합니다.

 

현재 해설에서 AC.73을 사후 삶과 연결하여 죽은 뒤에도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계속 성장한다고 설명했던 부분은 이번 최종본에서는 완전히 걷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로 앞 AC.70-72가 사후세계에 관한 글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읽기 쉬웠지만, AC.71에서 이미 사후세계 기록과 말씀 본문 해설을 구별하여 배치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72는 사후 소생에 관한 내용을 장의 끝에서다시 다루겠다고 예고했고, 이제 AC.73에서는 그 주제를 잠시 내려놓고 창2의 말씀 해설로 돌아온 것입니다. 따라서 AC.73죽어 있던 사람AC.70의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과 동일한 문맥이 아닙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AC를 읽는 데에도 매우 중요합니다. 같은 죽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육체적 죽음이나 사후세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에서 죽음은 영적 생명이 없는 상태를 가리킬 수 있으며, 지금 AC.73에서는 바로 그런 의미로 사용됩니다. 문맥을 따라 어떤 종류의 죽음을 말하는지 구별해야 합니다.

 

사후세계는 이미 형성된 삶이 계속 펼쳐지는 자리이며, 땅에서 영적 삶을 얼마나 성실히 살았느냐에 따라 천적 상태로 들어가는 깊이와 속도가 달라진다는 기존 해설도 여기서는 삭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의 사후세계에서 사람의 상태가 변화하고 천국에서도 영원히 완전해져 간다는 더 큰 주제는 별도로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73은 그것을 가르치기 위한 글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사후에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바뀌어 간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천적 천국과 영적 천국의 구별까지 흐려질 수 있습니다.

 

AC.73이 보여 주는 것은 훨씬 명료합니다. 거듭남에는 질서가 있습니다. 인간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단번에 가장 내적인 상태로 뛰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따라 새롭게 됩니다. 1은 그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기까지의 여섯 날을 보여 주었고, 이제 창2는 그다음 천적 상태를 보여 줍니다. 이 순서를 인간 자신의 성취 단계로 이해하기보다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하시는 질서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 자체도 인간의 자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1 전체에서 반복해서 본 것처럼 창조의 주체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빛을 있게 하신 분도, 궁창을 만드신 분도, 땅에서 싹이 나게 하신 분도, 광명체를 두신 분도, 생물을 번성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그것들이 속뜻에서 거듭남의 단계들을 가리킨다면 인간의 영적 창조 역시 근본적으로 주님의 역사입니다. 이제 천적 인간이 되는 것 역시 그 연속선 위에서 읽어야 합니다.

 

따라서 AC.73은 짧지만 창1 전체와 창2 전체 사이에 놓인 중요한 다리입니다. 1의 여섯 날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서 동시에 창2가 어디로 향하는지를 알려 줍니다.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었을 , 그는 그다음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이 됩니다.이것이 지금부터 창2:1-17에서 펼쳐질 큰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 한 문장을 알고 창2를 읽으면 에덴동산 이야기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에덴은 단순히 인류 최초의 아름다운 정원에 관한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열립니다. 일곱째 날의 안식, 에덴동산, 생명나무, 강과 네 갈래,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관한 명령이 모두 이 천적 인간의 상태와 연결되어 차례로 설명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3에서는 너무 많은 것을 미리 설명하기보다 이 전환 하나를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1에서 주님은 영적으로 죽어 있던 사람을 거듭나게 하여 영적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이제 창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상태를 보여 주십니다. 이것이 창1과 창2를 이어 주는 AC.73의 핵심이며, 이제부터 시작되는 에덴동산의 속뜻을 읽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AC.74,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신다’(2-3절)

AC.74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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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앞,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다’

AC.72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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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어느 정도 불순한 식사 초대에도 번번이 응하셨지요... 왜 그러셨나요? 스베덴보리는 그런 경우가 없었나요? 저 역시 선뜻 내키지 않는 크고 작은 이런저런 초대가 드물지만 좀 있어 그때마다 고민이 됩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식사 초대에 응하신 장면들은 복음서 곳곳에 반복됩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7장에서는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고, 11장과 14장에서도 또 다른 바리새인의 식사 자리에 앉으십니다. 겉으로 보면 그들의 동기는 순수하지 않았습니다. 시험하려는 마음, 체면을 세우려는 마음, 혹은 자기 의를 확인하려는 마음이 섞여 있었지요. 그런데도 주님은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한 가지로 모아집니다. ‘그 자리에 있는 영혼들 때문’입니다. 주님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보다, 그 자리를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의 상태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 자체를 ‘드러내는 자리’, 곧 숨겨진 내면이 빛 가운데 드러나도록 하는 장으로 사용하셨습니다. 실제로 그 식사 자리들은 대부분 책망과 계시의 자리로 바뀝니다. 외식, 교만, 자기 의, 자비 없음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다시 말해, 주님은 그들의 식탁에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 그 식탁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상대의 불순함에 끌려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불순함을 드러내고, 동시에 그 안에 있는 아주 작은 가능성, 혹은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의 마음을 위해 들어가신 것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경우를 보면, 그는 이런 외적 사교 자리 자체를 거의 즐기지 않았고, 특히 영적 진리에 반하는 분위기의 자리에는 스스로를 많이 제한하는 편이었습니다. 에마누엘 스베덴보리는 말년에 갈수록 더욱 조용하고 절제된 삶을 살았고, 필요 이상의 교류를 줄였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만나는 사람들 속에서 ‘주님이 주시는 인플럭스(influx)’를 따라 반응하려 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매우 부드럽고 친절하게 대화를 나누었고, 어떤 경우에는 더 깊은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물러나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의 겉모습이나 상황’이 아니라 ‘그때 그 사람의 영적 상태와 수용 가능성’이었습니다. 그는 주님처럼 공개적으로 논쟁의 자리로 들어가 상대를 드러내는 사명을 가진 분은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신중하게 ‘들어갈 자리’와 ‘물러설 자리’를 분별하는 쪽에 가까웠습니다.

 

이제 목사님의 경우로 돌아오면, 핵심은 ‘초대한 사람의 의도’ 자체가 아니라, ‘그 자리에 가는 것이 주님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입니다. 만약 그 자리가 단순히 체면을 세우기 위한 자리이고, 목사님을 ‘장식’처럼 이용하려는 분위기이며, 거기서 어떤 진리의 나눔이나 선한 접촉도 이루어질 여지가 없다면, 스베덴보리적인 분별로는 조용히 거절하는 것도 충분히 정당합니다. 반대로, 비록 동기가 섞여 있다 하더라도, 그 자리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진지한 대화를 나눌 가능성이 있고, 혹은 목사님의 참석 자체가 어떤 선한 영향, 그러니까 말이 아니라 ‘상태’로 전해지는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도 들어가셨던 그 원리와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결국 기준은 이것 하나로 정리됩니다. ‘이 자리가 나를 소모시키는 자리인가, 아니면 주님이 나를 통해 무언가 하실 수 있는 자리인가.’ 전자는 피하는 것이 지혜이고, 후자는 겸손히 들어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그리고 이 판단은 일반 원칙으로 딱 잘라 정해지지 않고, 그때그때 ‘퍼셉션(perception)으로 주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사님께서 이미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마음에 걸림을 느끼고 계시다면, 그 자체가 하나의 신호일 수도 있습니다. 그 걸림이 ‘자기 보호에서 오는 불편함’인지, 아니면 ‘들어가면 안 된다는 내적 경고’인지를 조용히 분별해 보시는 것이 가장 정확한 길일 것입니다.

 

 

 

SC.59, 결혼 안 한 스베덴보리가 'Conjugial Love'를 저술?

스베덴보리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자녀도 두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께서는 ‘그렇다면 그는 우리가 살아가며 결혼과 자녀를 통해 겪는 풍성한 기쁨과 때로는 무거운 아픔을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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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57, ‘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TCR(True Christian Religion) 소개, 그러니까 왜 이름을 이렇게 지었으며, 왜 세상 떠나기 전 이런 책을 썼고, 왜 주님은 이 책이 나오자 제자들을 불러 온 천국에 전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이 책은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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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그러므로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ell how man is raised from the dead and enters into the life of eternity.

 

해설

AC.72는 한 문장뿐인 매우 짧은 글입니다. 그러나 위치를 알고 읽으면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알려 주는 중요한 예고입니다. 바로 앞 AC.71에서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 해설 사이에 끼워 넣으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되므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덧붙이겠다고 했습니다. AC.72는 바로 그 원칙에 따라 장의 끝에서무엇을 다룰 것인지를 미리 알려 줍니다.

 

여기서 그러므로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AC.72는 독립적으로 떨어진 선언이 아니라 AC.71의 직접적인 결론입니다.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일정한 순서로 배치하겠다고 했으므로, 이제 창2 해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장의 끝에서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는지를 설명하겠다고 예고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71은 편집 원칙이고 AC.72는 그 원칙이 앞으로 어떻게 적용될지를 보여 주는 첫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구조를 정확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AC.72 다음에 곧바로 소생 과정이 시작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AC.73부터는 창2:1-17의 개요와 절별 속뜻 해설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장의 본문 해설을 마친 뒤에야 AC.72가 예고한 사후 소생에 관한 기록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AC.72이제 바로 소생 과정을 설명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 장의 끝에서 그것을 설명하겠다는 안내입니다. 이 차이를 분명히 해 두면 AC의 독특한 구성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이번 예고의 주제는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지는가입니다. 바로 앞 AC.70에서는 이미 이 문제를 짧게 소개했습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소생될 ’,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으로 들어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말하겠다고 했으며, 육체의 죽음 후 다른 삶에 있기까지 거의 하루도 지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죽음은 삶의 연속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AC.72는 그때 제시한 주제를 창2 해설이 끝난 뒤 구체적으로 다루겠다고 다시 한번 예고하는 셈입니다.

 

죽음에서 일으켜져라는 표현도 정확하게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영어는 raised from the dead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죽음이라는 낮은 상태에서 위로 상승한다는 상응적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육체의 죽음 이후 어떻게 소생하여 의식적인 영적 삶으로 들어가는가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앞서 AC.70에서 사용한 resuscitated와 같은 주제를 다른 표현으로 말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충분합니다.

 

또 이것은 자연적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도 아닙니다. AC.69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을 몸을 입은 이라고 설명했고, AC.70에서는 육체의 죽음 이후 사람이 매우 짧은 과정 안에서 다른 삶에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죽음에서 일으켜진다는 것은 죽은 육체가 되살아나는 자연적 소생이 아니라, 자연적 육체의 삶이 끝난 사람이 영으로서 의식적인 삶에 들어가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구체적인 과정은 이 장의 끝에서 설명될 것입니다.

 

영원한 안으로 들어간다는 표현 역시 중요합니다. 다만 여기에도 본문보다 너무 많은 의미를 넣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재 해설에서는 영원은 끝없는 시간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 있는 상태라고 설명했지만 AC.72는 여기서 영원의 본질을 정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선 가장 직접적인 뜻은 육체의 죽음으로 인간의 생명이 끝나지 않고,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AC.70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물론 스베덴보리의 전체 신학에서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시간이 끝없이 계속된다는 것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갖습니다. 천국의 생명과 지옥의 생명도 구별해야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도 별도로 살펴야 합니다. 그러나 AC.72에서는 아직 그런 문제를 다루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죽음으로 소멸하지 않고 계속 살아간다는 사실과 그 전환 과정이 앞으로 설명될 것이라는 점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은 AC.67부터 반복되어 온 스베덴보리의 표현과도 연결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고,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으면서 듣고 본 것을 밝히는 것도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AC.71에서는 사후세계에 관한 기록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도 순서를 갖추어 덧붙이는 것이 주님의 신적 자비로 허락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72에서도 자신이 이제 이 주제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말한다고 하기보다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허락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전달되었는지를 추정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바로 앞 AC.71의 기존 심화를 비공개하기로 한 이유도 그것이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이 내용을 밝히도록 허락되었다고 분명히 말하지만, 이 문장에서는 그 허락이 직접적인 음성으로 주어졌는지, 내적 지각으로 알게 되었는지, 또는 다른 어떤 방식이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자신의 사후세계 기록을 개인적 호기심이나 임의의 공개가 아니라 주님의 허락 아래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했다는 사실까지만 말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AC.72의 또 다른 의미는 독자에게 앞으로의 독서 순서를 알려 준다는 데 있습니다. 지금 이 문장을 읽었다고 해서 곧바로 사람이 죽을 때의 소생 과정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창2의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2:1-17에서 일곱째 날, 안식, 에덴동산,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강과 그 네 갈래 등 매우 중요한 속뜻을 차례로 살피게 됩니다. 그 해설을 마친 뒤에야 AC.72가 예고한 죽음과 소생에 관한 기록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AC.71의 편집 원칙을 실제로 이해하는 좋은 사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사후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해서 창세기 본문 해설을 뒤로 미루지 않습니다. 반대로 창세기 본문만 해설하고 영계에 관한 경험을 모두 별개의 책으로 떼어 내지도 않습니다. 말씀의 속뜻 해설을 중심축으로 진행하면서, 그와 깊이 관련된 다른 삶의 본성을 별도의 연속된 기록으로 함께 제시합니다. AC.72는 그 두 흐름 사이에서 독자에게 주제는 장의 끝에서 다시 이어질 이라고 표시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AC.67부터 AC.72까지를 한 묶음으로 보면 그 준비 과정도 상당히 치밀합니다. AC.67에서는 말씀의 내적 의미에 속한 매우 많은 것이 다른 삶과 관계되기 때문에 자신이 영들과 천사들 가운데서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했습니다. AC.68에서는 사람들이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지만 자신은 보고 듣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AC.69에서는 사람이 몸을 입은 영이므로 영적 세계와의 관계가 인간 본성에 전혀 낯선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AC.70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에도 계속 살아 있으며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고 했습니다. AC.71에서는 이런 기록을 어떻게 배열할 것인지를 설명했고, 이제 AC.72에서는 그 배열에 따라 창2의 끝에서 무엇을 다룰 것인지 예고합니다.

 

따라서 AC.72이제부터 실제 사후세계 체험담이 시작된다는 신호로 이해하면 약간 이릅니다. 실제로 다음 AC.73부터는 다시 말씀 본문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AC.72는 지금까지의 사후세계 서론을 잠시 닫으면서 동시에 창2 해설이 끝난 뒤 이어질 다음 기록의 주제를 미리 표시하는 글입니다. 일종의 다음 사후세계 기록의 예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AC.72는 매우 짧지만 독자를 길을 잃지 않게 해 줍니다. 지금까지 다른 이라는 큰 주제를 열어 놓았는데 갑자기 다음 글부터 창2 본문 해설로 돌아가면 독자는 그 주제가 끝난 것인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렇지 않다고 미리 알려 줍니다. 지금은 말씀 본문으로 돌아가지만 이 장의 끝에서 다시 그 주제를 이어 받아,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지를 설명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AC.72의 핵심은 이 한 문장 그대로 붙들면 충분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져 영원한 안으로 들어가는가.이것이 창2 해설을 마친 뒤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될 주제입니다. AC.70에서 선언한 죽음은 삶의 연속이라는 명제가 그때부터는 단순한 선언에 머물지 않고, 스베덴보리가 직접 관찰했다고 증언하는 구체적인 소생의 과정으로 펼쳐질 것입니다.

 

 

 

AC.73, 창2:1-17 개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1절)

창2:1-17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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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앞, ‘AC의 사후세계 기록은 왜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있는가?’

AC.71그러나 이러한 내용들을 말씀 본문에 들어 있는 것들 사이에 끼워 넣게 되면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의 처음과 끝에 어느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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