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 (2:4)

 

AC.89

하늘과 땅의 내력(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천적 인간의 형성을 뜻합니다. 여기서 그의 형성이 다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뒤따르는 모든 세부 사항으로부터 매우 분명합니다. 아직 초목이 자라지 않았다는 , 땅을 사람이 없었다는 ,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 그리고 후에 들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를 만드셨다는 등이 그러합니다. 이들의 형성은 이미 장에서 다루어졌음에도 여기서 다시 언급됩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여기서는 다른 사람이 다루어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처음으로 주님께서 여호와 하나님(Jehovah God)이라 불리신다는 사실에서 더욱 분명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을 다루는 구절들에서는 단지 하나님(God)이라고만 불리셨습니다. 나아가 이제는 (ground) (field) 언급되는 반면, 앞에서는 오직 (earth) 언급되었습니다. 구절에서는 먼저 하늘(heaven) (earth)보다 앞에 언급되고, 후에는 (earth) 하늘(heaven)보다 앞에 언급됩니다. 이유는 (earth) 사람을, 하늘(heaven) 사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개혁이 (earth),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반면, 여기서 다루는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람, 하늘(heaven)로부터 시작됩니다.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are the formations of the celestial man. That his formation is here treated of is very evident from all the particulars which follow, as that no herb was as yet growing; that there was no man to till the ground, as well as that Jehovah God formed man, and afterwards, that he made every beast and bird of the heavens, notwithstanding that the formation of these had been treated of in the foregoing chapter; from all which it is manifest that another man is here treated of. This however is still more evident from the fact that now for the first time the Lord is called Jehovah God, whereas in the preceding passages, which treat of the spiritual man, he is called simply God”; and, further, that now ground and field are mentioned, while in the preceding passages only earth is mentioned. In this verse also heaven is first mentioned before earth, and afterwards earth before heaven”; the reason of which is that earth signifies the external man, and heaven the internal, and in the spiritual man reformation begins from earth, that is, from the external man, while in the celestial man, who is here treated of, it begins from the internal man, or from heaven.

 

해설

AC.89는 창2:4부터 시작되는 이야기가 창1의 창조 기사를 단순히 다시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밝힙니다. ‘하늘과 땅의 내력은 속뜻에서 천적 인간의 형성을 뜻합니다. 이것은 뒤이어 나오는 내용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스베덴보리는 말합니다. 1에서는 이미 식물이 나고 사람과 동물이 창조되었는데, 2에서는 다시 아직 초목이 자라지 않았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다고 하며, 여호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다시 들의 짐승과 하늘의 새를 만드셨다고 합니다. 문자적으로만 보면 이미 끝난 창조가 다시 시작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같은 사건을 중복해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다른 사람’, 곧 앞에서 다룬 영적 인간과 구별되는 천적 인간의 형성을 다루기 때문에 이러한 서술이 다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라는 표현은 특히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두 번째 인간이나 별개의 역사적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창1의 여섯 날을 거치며 형성된 영적 인간과, 이제 창2에서 더 깊이 다루어질 천적 인간의 상태가 서로 다르다는 뜻입니다. AC.83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고, AC.84-88에서는 그 천적 인간을 일곱째 날, 안식일, 하나님의 일로 설명했습니다. AC.89부터는 바로 그 천적 인간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더욱 세밀하게 보여 주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창1과 창2의 차이는 단순한 두 창조 이야기의 차이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이라는 서로 다른 상태의 차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사실을 보여 주는 중요한 표지로 하나님의 이름이 달라지는 것을 지적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이 다루어질 때에는 단지 하나님이라 하였는데, 이제 처음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 합니다. AC.89 자체는 여기서 왜 천적 인간과 관련하여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사용되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이 번호에서 그 의미를 미리 완성하여 설명하기보다는, 스베덴보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변화 자체를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왔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본문상의 표지로 읽고 있다는 점을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하나님여호와 하나님의 차이가 직접 설명될 때 다시 살펴볼 중요한 주제입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이라는 표현입니다. 앞에서는 이 언급되었지만 이제는 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것 역시 스베덴보리에게는 우연한 어휘 변화가 아닙니다. 다만 AC.89의 목적은 아직 의 상응을 자세히 해설하는 데 있지 않고, 2:4 이하의 어휘가 앞의 창조 서술과 달라졌다는 사실을 통해 지금부터 다른 상태의 인간이 다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의 구체적인 의미 역시 뒤의 본문에서 직접 설명될 때 충분히 다루는 것이 좋겠습니다.

 

AC.89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마지막에 나오는 하늘의 어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은 겉 사람을, ‘하늘은 속 사람을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창2:4에서는 처음에 하늘과 이라 했다가 이어서 땅과 하늘이라고 순서를 바꿉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어순까지 의미 있는 것으로 읽습니다. 영적 인간의 개혁은 ’, 곧 겉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반면, 천적 인간의 형성은 하늘’, 곧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82에서 하늘은 사람, 땅은 사람을 뜻한다고 밝힌 설명이 여기서 한 단계 더 구체화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인간의 개혁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되고 천적 인간은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이것을 단순히 영적 인간은 외적인 사람이고 천적 인간은 내적인 사람이라는 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영적 인간에게도 분명히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차이는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질서와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먼저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따라 살면서 겉 사람의 삶이 질서 안으로 들어가고, 그 과정을 통해 내적인 것이 열려 가는 방식이 두드러집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상태에서는 주님으로부터 속 사람 안에 있는 사랑과 선이 주도권을 가지며, 거기에서 겉 사람의 모든 것이 질서 지어집니다. 앞서 AC.83에서 신앙보다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한 것과도 같은 방향입니다.

 

이 때문에 AC.89는 창2의 독법을 결정하는 중요한 안내판과 같습니다. 앞으로 나오는 초목, , 땅을 가는 사람, 흙으로 지어진 사람, 생명의 숨, 에덴동산, 각종 나무, 강과 들과 짐승을 창1에서 이미 나온 것들의 단순 반복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 그것들은 천적 인간이 어떻게 형성되고 그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어떤 질서 가운데 놓이는지를 보여 주는 새로운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특히 창1에서는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을 향해 진행되는 영적 인간의 개혁이 두드러졌다면, 이제 창2에서는 속 사람으로부터 겉 사람을 향하여 질서가 내려오는 천적 인간의 형성이 중심이 됩니다.

 

동시에 여기서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표현을 인간이 자기 내면 깊은 곳을 스스로 탐색하여 천적 상태에 도달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바로 앞 AC.88은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이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형성이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속 사람으로부터 역사하시고 그곳에서부터 겉 사람을 질서 있게 만드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AC.88주님께서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신다는 선언과 AC.89천적 인간의 형성은 사람에서 시작된다는 설명은 이렇게 서로 이어집니다.

 

결국 AC.89의 핵심은 창2:4 이하를 읽는 관점의 전환입니다. 반복되는 창조 이야기가 아니라 천적 인간의 형성에 관한 이야기이며,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 ‘이라는 어휘, ‘하늘과 의 순서까지 모두 그 전환을 알리는 표지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차이는 영적 인간의 개혁이 겉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데 비해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2의 이후 구절들은 바로 이 질서 안에서 읽어야 하며, AC.89는 그 전체 해석의 방향을 미리 세워 주는 번호입니다. (AC.89)

 

 

 

AC.90, 창2:5-6, ‘땅에서 지면과 들로 - 천적 인간의 겉 사람이 산출하는 것들’ (AC.90-93)

5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6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And there w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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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8, 창2:2-3,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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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8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그는 하나님의 (work of God)이라 불립니다. 주님 홀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이 일곱째 날에 그의 일을 마치셨다(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 하며, 번이나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다(he rested from all his work) 합니다. 선지서들에서도 사람은 거듭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으로 하신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이라 불립니다. 거듭난 사람에 관하여 말하는 이사야의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becomes celestial, he is called the work of God, because the Lord alone has fought for him, and has created, formed, and made him; and therefore it is here said, God finished his work on the seventh day”; and twice, tha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By the prophets man is repeatedly called the work of the hands and of the fingers of Jehovah”; as in Isaiah, speaking of the regenerate man:

 

11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스라엘을 지으신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너희가 장래 일을 내게 물으며 아들들과 손으로 일에 관하여 내게 명령하려느냐 12내가 땅을 만들고 위에 사람을 창조하였으며 내가 손으로 하늘을 펴고 하늘의 모든 군대에게 명령하였노라, 18대저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을 창조하신 그는 하나님이시니 그가 땅을 지으시고 그것을 만드셨으며 그것을 견고하게 하시되 혼돈하게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거주하게 그것을 지으셨으니 나는 여호와라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21너희는 알리며 진술하고 함께 의논하여 보라 일을 옛부터 듣게 자가 누구냐 이전부터 그것을 알게 자가 누구냐 여호와가 아니냐 외에 다른 신이 없나니 나는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이라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45:11-12, 18, 21) Thus hath said Jehovah the holy one of Israel, and his former, Seek ye signs of me, signs concerning my sons, and concerning the work of my hands command ye me. I have made the earth, and created man upon it; I, even my hands have stretched out the heavens, and all their army have I commanded. For thus hath said Jehovah that createth the heavens, God himself that formeth the earth and maketh it; he establisheth it, he created it not a void, he formed it to be inhabited; I am Jehovah and there is no God else besides me (Isa. 45:1112, 18, 21).

 

이로부터 새로운 창조,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창조하다(create), 형성하다(form), 만들다(make)라는 표현들은 위의 구절, 하늘을 창조하시고, 땅을 형성하시며, 그것을 만드신다(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 말씀에서뿐 아니라 같은 선지서의 다른 곳에서도 서로 뚜렷이 구별되어 사용됩니다. 다음 말씀과 같습니다. Hence it is evident that the new creation, or regeneration, is the work of the Lord alone. The expressions tocreate,toform,and tomake,are employed quite distinctively, both in the above passagecreating the heavens, forming the earth, and making itand in other places in the same prophet, as: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내가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43:7) Everyone that is called by my name, I have created him for my glory, I have formed him, yea, I have made him (Isa. 43:7),

 

또한 장과 창세기 2장에서도 그러합니다. 지금 다루고 있는 말씀, 하나님이 만드시면서 창조하신 그의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다(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구절에서도 그러합니다. 속뜻에서는 이러한 용법이 언제나 서로 구별되는 관념을 전달합니다. 주님께서 창조자(creator), 형성자(former), 또는 만드신 (maker)라고 불리실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and also in both the preceding and this chapter of Genesis; as in the passage before us: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In the internal sense this usage always conveys a distinct idea; and the case is the same where the Lord is called creator, former, or maker.

 

해설

AC.88은 앞의 여러 번호에서 계속되어 온 주님의 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분명하게 결론짓습니다.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주님 홀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87과 직접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싸움을 수행한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주님 홀로 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AC.88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싸움뿐 아니라 사람을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는전체 과정 역시 주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거듭난 인간은 자기 자신이 완성한 작품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입니다.

 

그래서 창2에서 하나님이 그의 일을 마치셨다’, ‘ 모든 일을 마치고 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창조 이야기의 속뜻에서 하나님의 은 단순히 자연계의 우주와 생물을 제작하는 행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인간을 죽은 상태에서 영적 인간으로, 그리고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하시는 새로운 창조가 주님의 일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매우 명시적으로 새로운 창조, 거듭남이라고 부르며, 이 새로운 창조가 주님 홀로 하시는 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창1-2를 거듭남의 이야기로 읽는 것은 우리가 창세기 본문 위에 나중의 교리를 임의로 덧붙이는 것이 아니라, AC.88에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직접 밝히고 있는 속뜻입니다.

 

여기서 주님 홀로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제거하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거듭남 가운데 실제로 진리를 배우고, 악을 거절하고, 시험 가운데 싸우며,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과정에서 생명과 능력을 주시고 선과 진리를 결합시키며 인간을 새롭게 만드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고 자유롭게 응답하지만 자기 자신을 거듭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영적 공로를 근본적으로 배제합니다. 사람이 오랜 시험을 견디고 악을 피하며 선한 삶을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내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인간 자신이 바로 주님께서 만드신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사실을 선지서의 표현으로 확증합니다. 사람은 여호와의 손과 손가락으로 하신 이라고 반복하여 불린다고 하면서 사45를 인용합니다. 그곳에서는 땅을 만들고 사람을 창조하며 하늘을 펴신 분이 여호와이심이 선언되는데,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거듭난 사람에 관한 것으로 읽습니다. 이것은 AC.82하늘 = 사람, = 사람이라는 설명과도 연결됩니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는 말씀은 속뜻에서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새롭게 이루어지는 거듭남과 관계됩니다. 창조의 언어가 곧 거듭남의 언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AC.88에는 또 하나 매우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라는 세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세 말이 아무 차이 없이 반복되는 동의어가 아니라 서로 뚜렷이 구별되어사용되며, 속뜻에서는 각각 구별되는 관념을 전달한다고 말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84에서 이미 예고되었습니다. 거기서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다고 했지만 각각의 차이를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AC.88에서는 적어도 세 표현이 의도적으로 구별된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다만 AC.88 자체는 창조하다가 정확히 무엇이고, ‘형성하다만들다가 각각 무엇을 뜻하는지까지 풀어 주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창조 = 사람, 형성 = 이성, 만듦 = 사람또는 창조 = 신앙, 형성 = 체어리티, 만듦 = 행위와 같은 식으로 우리가 임의의 세 단계 체계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43:7에서도 내가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 ‘내가 형성한 ’, ‘내가 만든 라는 세 표현이 연이어 나타나는 것을 근거로 들며, 1과 창2에서도 같은 구별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말씀에서 비슷한 단어가 반복된다고 해서 모두 단순한 동의어로 처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만 각각의 정확한 차이는 AC 전체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하는 내용을 더 확인하여 판단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원리는 말씀의 영감에 대한 스베덴보리의 이해와도 관계됩니다. 말씀의 표현은 우연히 선택된 것이 아니며, 속뜻에서는 단어의 선택과 반복에도 질서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우리가 모든 성경의 유사어에 임의로 적용하여 서로 다른 상응을 만들어 내서는 안 됩니다. AC.88의 경우에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창조하다’, ‘형성하다’, ‘만들다가 뚜렷이 구별되어 사용된다고 명시하기 때문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표현보다 더 먼저 붙들어야 할 것은 그 모든 동사의 주어가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창조하시는 분도 주님이고, 형성하시는 분도 주님이며, 만드시는 분도 주님입니다. 세 동사의 차이를 아무리 정교하게 분석하더라도 이 중심을 놓치면 AC.88의 논지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번호의 결론은 새로운 창조,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이라는 한 문장으로 모입니다. 1에서 빛이 생기고, 물과 땅이 나뉘고, 식물이 자라고, 광명체가 나타나고, 생물이 생기며, 마침내 사람이 창조되는 모든 과정은 속뜻에서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거듭남의 질서를 묘사합니다. 그리고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도 인간이 자기 힘으로 한 단계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AC.87에서 주님 홀로 그를 위하여 싸우셨고, AC.88에서 주님께서 그를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사람 자체가 하나님의 입니다.

 

이 관점에서 주님의 주님의 안식도 하나로 연결됩니다. 주님께서 쉬신다는 것은 창조주께서 피곤해지셨다는 뜻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수행하신 새로운 창조의 일이 그 사람 안에서 안식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거듭남이 주님의 일이라면 사람이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선을 자기 소유나 공로로 돌릴 이유가 없으며, 동시에 변화가 더디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절망에 빠질 이유도 없습니다. 인간은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악을 피하며 자유롭게 응답하지만, 그를 새롭게 창조하고, 형성하고, 만드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었을 때 그가 하나님의 이라 불리는 이유이며, AC.88이 말하는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의 핵심입니다. (AC.88)

 

 

 

AC.89, 창2:4, ‘하늘과 땅의 내력 - 천적 인간의 형성은 속 사람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These are the nativities of the heavens and of the earth when he created them, in the day in which Jehovah God made the earth 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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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7, 창2:2-3, '싸움은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하신 것이므로, 천적 인간에게서 안식이 시작된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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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7

천적 인간이 안식일(sabbath) 또는 안식(rest) 하나의 이유는, 그가 천적 인간이 싸움이 그치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이 가까이 오며, 천적 천사들도 가까이 옵니다. 이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없으므로 멀리 달아납니다. 그리고 싸움을 수행한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주님 홀로 하신 것이므로, 주님께서 쉬셨다(rested) 합니다. Another reason why the celestial man is the sabbath, or rest, is that combat ceases when he becomes celestial. The evil spirits retire, and good ones approach, as well as celestial angels; and when these are present, evil spirits cannot possibly remain, but flee far away. And since it was not the man himself who carried on the combat, but the Lord alone for the man, it is said that the Lord rested.

 

해설

AC.87은 왜 천적 인간이 안식일이며 안식인지를 또 하나의 각도에서 설명합니다. 앞의 AC.84에서는 모든 싸움이 그치기 때문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고, AC.85에서는 안식이 주님의 뜻이 사람의 뜻이 되는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번 AC.87에서는 그 싸움이 실제로 어떻게 그치는지, 그리고 누가 그 싸움을 수행해 왔는지를 밝힙니다.

 

먼저 스베덴보리는 천적 인간이 될 때 싸움이 그친다고 합니다. 이 말은 AC.81과 다시 연결됩니다. 거기서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고,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 그것들을 멸시한다고 했습니다. AC.87은 그 차이의 배후에 있는 영계의 질서를 설명합니다.

 

천적 상태에 이르면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이 가까이 오며, 천적 천사들도 가까이 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있을 때에는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수 없으므로 멀리 달아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싸움이 그친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더 강한 의지력을 가지게 되어 악을 억누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둘러싼 영적 환경과 결합의 질서 자체가 달라졌다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인간의 영적 상태를 영들과 천사들의 가까움과 멀어짐으로 설명한다는 점도 중요합니다. 인간의 선과 악은 완전히 고립된 내면 현상으로만 다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영계와의 결합 속에서 살며, 그의 지배적인 사랑과 상태에 따라 어떤 영적 사회와 연결되는지가 달라집니다. AC.87은 바로 그 질서를 짧게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번 번호의 핵심은 단순히 악한 영은 떠나고 선한 영과 천사가 가까이 온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 문장이 더 중요합니다. ‘싸움을 수행한 것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주님 홀로 하신 것이다.이 문장이 있어야 주님께서 쉬셨다는 말의 의미가 완성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매우 분명하게 말해 줍니다. 인간은 싸움 가운데 실제로 고통을 느끼고 선택하며 악을 거절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을 가능하게 하고 악에 맞서 선과 진리를 보존하며 승리를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여섯 날의 모든 싸움이 끝났을 때 사람이 쉬었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 사이를 균형 있게 이해하게 합니다. ‘주님 홀로 싸우셨다고 해서 인간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인간이 실제로 싸움을 경험한다고 해서 그 힘과 승리의 근원이 인간 자신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롭게 악과 거짓을 거절해야 하지만, 그 싸움의 능력과 선한 결과는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따라서 AC.87은 거듭남을 자기 수련이나 도덕적 자기극복으로 보는 관점을 분명히 교정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 힘으로 수많은 악한 영들을 쫓아낸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그 사람 안의 질서를 바꾸시고, 악한 영들이 머물 수 없는 상태로 이끄신 결과 싸움이 그치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한 영들이 도저히 머물 없다는 표현도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이것을 천적 인간에게 더 이상 어떤 유혹이나 공격도 절대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확대하면 AC.81과 긴장이 생깁니다. AC.81은 천적 인간도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다만 그 공격이 이전처럼 지속적인 내적 싸움의 상태를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악한 영들이 가까이 머물며 사람을 계속 붙드는 상태는 끝나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의 가까움이 지배적인 질서가 됩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의 접근은 일시적 공격일 수는 있어도 그 사람 안에 안정적으로 자리 잡고 싸움을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AC.85에서 말한 주님의 뜻이 그의 뜻이 된다는 설명과도 잘 연결됩니다. 사람이 자기중심적인 욕망을 삶의 중심으로 삼을수록 악한 영들이 그와 결합할 조건이 많지만, 주님의 선을 사랑하고 그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천적 상태에서는 그 결합의 질서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싸움이 자연스럽게 그치게 됩니다.

 

AC.87의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안식을 단순한 심리적 평온이 아니라 영적 질서의 결과로 설명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편안해서 안식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싸움을 끝내시고 악한 영들이 물러가며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는 질서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안식입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평화는 자기최면이나 감정 조절로 만들어 낸 평온과 다릅니다. 그 평화는 주님께서 이루신 거듭남의 결과이며, 영적 결합의 질서가 바뀐 데서 오는 안식입니다.

 

이번 번호에서 천적 천사들이 따로 언급되는 것도 눈에 띕니다. 선한 영들뿐 아니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온다고 했습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상태가 단지 악이 약해진 상태가 아니라 더 높은 천적 질서와의 결합이 이루어진 상태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AC.87 자체는 천적 천사들의 성격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더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AC.84-87을 함께 보면 안식의 의미가 점점 풍성해집니다. AC.84에서는 싸움이 그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고, AC.85에서는 그 안식이 주님의 뜻이 사람의 뜻이 되는 평화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AC.86에서는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를 안식일의 저녁이라고 했고, 이제 AC.87에서는 그 싸움이 그치는 영적 배경과 주체를 설명합니다.

 

특히 마지막 문장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 전체를 거듭남으로 읽는 데 중요한 열쇠입니다. ‘주님께서 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적으로 피곤하여 일을 멈추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람을 위하여 수행하시던 거듭남의 싸움이 그 사람 안에서 안식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싸움의 주체가 애초부터 주님이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싸움이 인간 자신의 일이었다면 그 싸움이 끝났을 때 인간이 쉬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홀로 싸우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일이 끝났을 때 주님께서 쉬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공로를 배제하는 매우 중요한 설명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많은 싸움을 겪고 악을 이겼다고 해도, 그 승리를 자기 능력이나 자기 의의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싸움의 힘과 승리의 근원은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의 책임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거절하는 실제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강제로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방식은 아닙니다. AC.87은 자유를 없애는 말이 아니라 승리의 근원을 밝히는 말입니다.

 

따라서 주님 홀로 싸우신다는 표현은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수동주의와도 다릅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 힘으로 싸우는 것처럼 실제로 싸워야 하지만, 그 힘이 자기에게서 나온다고 믿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는 그 후자의 진실, 곧 실제 근원은 주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이 점에서 AC.87proprium의 문제와도 조심스럽게 연결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싸움과 승리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 하면 거듭남마저 자기 공로가 됩니다. 그러나 싸움은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하시는 것이며, 인간은 그 주님의 역사에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이 질서가 유지될 때 안식도 자기 성취의 결과가 아니라 주님의 선물이 됩니다.

 

AC.87은 짧지만 싸움과 안식’,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역사’, ‘영들과 천사들의 결합’, ‘거듭남의 주체가 한 문단 안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번호를 단순히 악한 영들이 떠난다는 흥미로운 영계 묘사로만 읽으면 중요한 부분을 놓치게 됩니다.

 

결국 천적 인간이 안식일인 이유는 그가 더 이상 자기 힘으로 싸울 필요가 없을 만큼 강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수행하시던 싸움이 그 사람 안에서 안식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악한 영들은 물러가고 선한 영들과 천적 천사들이 가까이 오며, 그 질서 안에서 싸움은 그칩니다.

 

그러므로 AC.87의 마지막 주님께서 쉬셨다는 말은 거듭남 전체를 주님의 일로 돌리는 고백입니다. 사람은 싸움을 경험하지만 싸우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사람은 승리를 경험하지만 승리를 이루시는 분도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의 일이 천적 상태에 이르면 싸움이 그치고 안식이 시작됩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이 안식일이며 안식인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AC.87)

 

 

 

AC.88, 창2:2-3,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은 주님 홀로 하시는 일이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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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6, 창2:2-3, ‘안식일의 저녁 -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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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6

여섯째 (sixth day)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할 , 여기서 처음 다루고 있는 상태가 안식일의 저녁(eve of the sabbath)입니다. 이것은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천적 인간은 아침(morning)이며, 이에 대해서는 이어 말할 것입니다. When the spiritual man, who has become the sixth day, is beginning to be celestial, which state is here first treated of, it is the eve of the sabbath,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keeping holy of the sabbath from the evening. The celestial man is the morning to be spoken of presently.

 

이날은 준비일이요 안식일이 거의 되었더라 (23:54)

 

해설

AC.86은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경계의 상태를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섯째 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할 ’, 그 상태를 안식일의 저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천적 인간 자체는 아침이라고 예고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의 핵심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 단절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가는 전환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바로 앞 AC.83에서도 이 전환은 이미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여섯째 날에 이르면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며, 그때 신앙이 아니라 사랑, 곧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AC.86의 표현도 똑같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할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저녁은 바로 이 변화가 시작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저녁을 곧바로 어둠이나 타락이나 악의 상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 해설에서 저녁과 아침이 여러 상태의 변화를 나타냈더라도, AC.86은 이번 저녁의 의미를 직접 규정합니다. 그것은 이미 여섯째 이 된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변하기 시작하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번 문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전환의 저녁입니다.

 

이것은 상응을 기계적인 사전처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좋은 예이기도 합니다. 어떤 표현이 다른 문맥에서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해서 언제나 똑같은 뜻을 그대로 대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은 문맥과 상태의 연속성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AC.86에서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안식일의 저녁이 어떤 상태인지 명확히 밝혀 줍니다.

 

저녁은 아직 완전한 아침은 아닙니다. 영적 인간은 이미 여섯째 날에 도달했고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었지만, 사랑이 주된 것이 되는 천적 질서가 이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녁은 이전 상태의 끝과 다음 상태의 시작이 맞닿는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를 시간적으로 정확한 중간 단계처럼 지나치게 도식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몇 시간이나 몇 단계 동안 저녁 상태에 있다가 어느 순간 아침 상태로 넘어간다는 심리적 시간표를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녁과 아침이라는 말씀의 표현을 통해 영적 상태에서 천적 상태로 변화하는 질서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가 유대교회에서 저녁부터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으로 표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대인의 하루 계산법 자체를 설명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유대교회의 안식일 준수라는 외적 제도가 더 깊은 영적 실재를 표상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저녁은 천적 안식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AC.85에서 말한 유대교회의 표상적 성격과 그대로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에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이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여섯 날의 수고와 일곱째 날의 안식이 싸움과 평화를 표상했듯, 저녁부터 시작되는 안식일도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외적인 안식일 규례에도 하나의 영적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안식이 갑자기 아무런 준비 없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싸움과 수고를 지나 안식으로 들어가는 변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날의 영적 상태가 천적 상태로 깊어지기 시작할 때 이미 안식일의 저녁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AC.86AC.84-85의 안식 개념을 조금 더 세밀하게 해 줍니다. AC.84에서는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이며 모든 싸움이 그친 상태라고 했고, AC.85에서는 그 안식이 주님의 뜻이 사람 자신의 뜻이 된 상태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AC.86은 그런 상태가 한순간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되기 시작하는전환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실제 성격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처음에는 진리가 가르치기 때문에 선을 행하고, 양심 때문에 악과 싸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거듭남을 이루어 가시는 동안, 이전에는 의무로 행하던 선을 점차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는 것을 기꺼이 행하게 됩니다. 신앙이 사랑과 결합되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는 변화는 이런 식으로 깊어집니다.

 

그 변화의 시작을 AC.86의 표현을 빌리면 안식일의 저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직 천적 인간의 충만한 아침은 아니지만, 이미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싸움에서 안식으로, 신앙이 앞서는 질서에서 사랑이 주된 질서로, 양심의 결박에서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의 자유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적용은 어디까지나 AC.81-86의 흐름을 종합하여 이해한 것입니다. AC.86 자체는 매우 간결하게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 = 안식일의 저녁’, ‘천적 인간 = 아침이라는 두 관계만을 직접 말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 지나치게 많은 별도의 상응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저녁을 속 사람과 겉 사람의 특정 관계, 신앙의 특정 단계, proprium의 특정 상태 등으로 더 세분하여 확정할 근거는 이번 문장에 없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직접 주는 설명만 붙드는 편이 안전합니다. 저녁은 천적으로 되기 시작하는 상태이고, 아침은 천적 인간입니다.

 

마지막 문장 천적 인간은 아침이며, 이에 대해서는 이어 말할 것입니다는 다음 해설을 위한 예고입니다. 그러므로 AC.86 자체에서 아침의 모든 의미를 미리 풀 필요도 없습니다. 이어지는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설명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개요와 상세 해설의 질서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AC.86의 짧은 문장 안에는 앞 번호들의 흐름이 매우 압축되어 있습니다. 여섯째 날은 영적 인간이고, 그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가 안식일의 저녁이며, 완성된 천적 인간은 아침입니다.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의 변화가 곧 저녁에서 아침으로의 변화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녁에서 아침으로라는 말씀이 단순한 자연적 시간의 반복을 넘어 인간의 영적 상태의 변화를 담을 수 있음을 다시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문맥마다 본문이 주는 설명을 따라야 합니다. 이번에는 특별히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의 전환입니다.

 

결국 AC.86안식일의 저녁은 아직 싸움 속에 머무르는 여섯째 날과 이미 완성된 천적 안식의 아침 사이에 놓인 살아 있는 전환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면서 영적인 것이 천적인 것으로 깊어지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완성될 때 천적 인간은 아침이 됩니다. (AC.86)

 

 

 

AC.87, 창2:2-3, '싸움은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하신 것이므로, 천적 인간에게서 안식이 시작된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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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5, 창2:2-3,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며, 천적 인간의 안식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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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2, 3)

 

AC.85

천적 인간이 일곱째 (seventh day)이며, 따라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불렸다는 것은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아르카나입니다. 이는 천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영적 인간의 본성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무지로 인해 사람들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을 같은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차이는 AC.81에서 있습니다. 일곱째 날에 관하여, 그리고 천적 인간이 일곱째 (seventh day) 또는 안식일(sabbath)이라는 것에 관하여 말하자면, 이는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라는 사실로부터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That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and that the seventh day was therefore hallowed, and called the sabbath, are arcana which have not hitherto been discovered. For none have been acquainted with the nature of the celestial man, and few with that of the spiritual man, whom in consequence of this ignorance they have made to be the same as the celestial man, notwithstanding the great difference that exists between them, as may be seen in n. 81. As regards the seventh day, and as regards the celestial man being the seventh day or sabbath, this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the Lord himself is the sabbath; and therefore he says: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2:28) The son of man is Lord also of the sabbath (Mark 2:27),

 

말씀은 주님께서 사람 자체이시며 안식일 자체이심을 함축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식일,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 불립니다. which words imply that the Lord is man himself, and the sabbath itself. His kingdom in the heavens and on the earth is called, from him, a sabbath, or eternal peace and rest.

 

[2] 여기서 다루고 있는 태고교회는 뒤를 이은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 안식일이었습니다. 이후의 모든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도 역시 안식일이며, 거듭난 사람도 천적 인간이 안식일입니다. 그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그에 앞서 여섯 날의 싸움 또는 수고가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유대교회에서 수고하는 날들과 안식일인 일곱째 날로 표상되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같은 것이 법궤가 나아갈 때와 때에도 표상되었습니다. 광야에서 법궤가 나아간 것은 싸움과 시험을 표상하였고, 법궤가 것은 평화의 상태를 표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법궤가 떠날 모세가 말했습니다.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is here treated of, was the sabbath of the Lord above all that succeeded it. Every subsequent inmost church of the Lord is also a sabbath; and so is every regenerate person when he becomes celestial, because he is a likeness of the Lord. The six days of combat or labor precede. These things were represented in the Jewish church by the days of labor, and by the seventh day, which was the sabbath; for in that church there was nothing instituted which was not representative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The like was also represented by the ark when it went forward, and when it rested, for by its journeyings in the wilderness were represented combats and temptations, and by its rest a state of peace; and therefore, when it set forward, Moses said:

 

35궤가 떠날 때에는 모세가 말하되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가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 하였고 36궤가 때에는 말하되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10:35, 36) Rise up, Jehovah, and let thine enemies be scattered, and let them that hate thee flee before thy faces. And when it rested, he said, Return, Jehovah, unto the ten thousands of the thousands of Israel (Num. 10:3536).

 

그곳에서는 법궤가 여호와의 산을 떠나 그들의 곳을 찾기 위하여(to search out a rest for them) 갔다고 합니다. (10:33) It is there said of the ark that it went from the Mount of Jehovah to search out a rest for them (Num. 10: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길을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길에 앞서가며 그들의 곳을 찾았고 (10:33)

 

[3] 천적 인간의 안식은 이사야에서 안식일로 묘사됩니다. The rest of the celestial man is described by the sabbath in Isaiah:

 

13만일 안식일에 발을 금하여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14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58:13, 14) If thou bring back thy foot from the sabbath, so that thou doest not thy desire in the day of my holiness, and callest the things of the sabbath delights to the holy of Jehovah, honorable; and shalt honor it, not doing thine own ways, nor finding thine own desire, nor speaking a word; then shalt thou be delightful to Jehovah, and I will cause thee to be borne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 and will feed thee with the heritage of Jacob (Isa. 58:1314).

 

천적 인간의 본성은 이와 같아서 그는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하며, 주님의 뜻이 그의 (desire) 됩니다. 이리하여 그는 내적인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데, 이것이 여기서는 땅의 높은 곳에 올림을 받는 (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으로 표현되며, 동시에 외적인 평온과 기쁨을 누리는데, 이것은 야곱의 기업으로 양육되는 (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으로 의미됩니다. Such is the quality of the celestial man that he acts not according to his own desire, but according to the good pleasure of the Lord, which is his desire. Thus he enjoys internal peace and happinesshere expressed bybeing uplifted over the lofty things of the earthand at the same time external tranquility and delight, which is signified bybeing fed with the heritage of Jacob.

 

해설

AC.85는 앞의 AC.84에서 제시된 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라는 아르카나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던 이유부터 말합니다.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없었고 영적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음에도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같은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AC.81을 가리킵니다.

 

이 연결은 중요합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우는 사람이며,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고 악과 거짓을 멸시하는 사람으로 구별되었습니다. AC.83에서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는 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했고, AC.84에서는 천적 인간이 바로 일곱째 날이며 모든 싸움이 그치기 때문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했습니다. AC.85는 이 모든 설명을 안식일이라는 하나의 표상 안에 모읍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가 천적 인간을 안식일이라고 할 수 있는 가장 깊은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인간에게 있지 않습니다.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중심입니다. 천적 인간이 안식일인 것은 그 사람에게서 독립적으로 어떤 높은 영적 상태가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안식의 근원이신 주님의 형상이 그 사람 안에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증하기 위해 스베덴보리는 막2:28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를 인용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는 주님께서 사람 자체이시며 안식일 자체이시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사람 자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참된 인간성의 원형과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적 인간이 사람이며 안식일인 것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이어서 스베덴보리는 하늘과 땅에 있는 주님의 나라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안식일’, 영원한 평화와 안식이라고 불린다고 합니다. 여기서 안식의 의미가 단순히 노동을 멈추는 것에서 크게 확장됩니다. 안식은 주님의 나라의 상태이며, 그 본질은 평화입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의 안식은 단순한 휴식의 표상이 아니라 주님의 질서가 이루어진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다음에는 이 안식의 원리가 교회와 개인에게 차례로 적용됩니다. 먼저 여기서 다루는 태고교회가 그 뒤를 이은 모든 교회보다 더욱 주님의 안식일이었다고 합니다. 태고교회는 천적 교회였으며, 사랑과 퍼셉션의 질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주님의 안식을 표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의 의미는 태고교회라는 과거의 한 교회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의 모든 주님의 가장 내적인 교회도 역시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모든 거듭난 사람도 천적 인간이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AC.82의 원리가 다시 나타납니다. AC.82에서는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으며, 그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교회의 일부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AC.85에서도 동일하게 안식일이라는 표상이 주님에게서 주님의 나라로, 교회로, 그리고 한 사람에게로 이어집니다.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천적 질서가 이루어질 때 그 사람도 안식일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사람이 곧 주님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 이유를 그가 주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제한합니다. 주님은 안식일 그 자체이시고, 거듭난 천적 인간은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입니다. 원형과 형상을 구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식에 앞서는 것이 여섯 날의 싸움 또는 수고입니다. 이것은 AC.84에서 말한 여섯 날 동안의 주님의 과 연결됩니다. 거듭남에는 싸움이 있습니다. 악과 거짓이 사람을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주님께서 사람을 선과 진리의 질서로 이끄시는 과정은 싸움과 시험을 동반합니다. 그러나 그 싸움 자체가 목적은 아닙니다. 싸움은 안식을 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영적 질서가 유대교회의 수고하는 여섯 날과 일곱째 날 안식일로 표상되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매우 넓은 원리로 밝힙니다. ‘ 교회에서는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제정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교회의 안식일 제도는 외적인 생활 규정에 그치지 않고 주님과 주님의 나라, 그리고 인간의 거듭남 가운데 이루어지는 안식을 표상했습니다.

 

이어지는 법궤의 예도 같은 구조를 보여 줍니다. 법궤가 광야에서 나아가는 것은 싸움과 시험을 표상하고, 법궤가 쉬는 것은 평화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법궤가 떠날 때 모세는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대적들을 흩으시고라고 말하고, 법궤가 쉴 때에는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나아감의 대비입니다. 나아감에는 대적과 싸움이 있고, 쉼에는 주님의 임재와 평화가 있습니다. 이것은 여섯 날과 일곱째 날의 관계를 또 다른 성경의 표상으로 보여 줍니다. 광야의 여정이 싸움과 시험이라면 법궤의 쉼은 그 싸움 뒤에 오는 평화입니다.

 

10:33에서 법궤가 그들의 곳을 찾기 위하여앞서 갔다는 표현도 이 때문에 인용됩니다. 주님의 인도하심은 사람을 끝없는 싸움 속에 붙들어 두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식으로 이끌기 위한 것입니다. 거듭남의 싸움은 목적지가 아니라 과정이며, 그 목적은 주님 안에서의 평화입니다.

 

그러나 AC.85의 가장 깊은 설명은 [3]에서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58:13-14를 인용하여 천적 인간의 안식이 실제로 어떤 상태인지를 설명합니다. 이사야는 안식일에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는 상태를 말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천적 인간의 내적 상태로 읽습니다.

 

그는 천적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천적 인간은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하며, 주님의 뜻이 그의 뜻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AC.85에서 안식의 가장 중요한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행동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의 근원이 달라졌습니다. 자기 자신의 욕망과 자기중심적 뜻에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하신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주님의 뜻이 외부에서 강제로 부과되는 명령으로 남지 않고 그의 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AC.81의 천적 인간의 자유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거기서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며, 그의 보이지 않는 결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선을 행하도록 외부에서 억지로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을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과 그의 자유가 서로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천적 상태에서는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되기 때문에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바로 자신의 가장 깊은 기쁨이 됩니다. 이것이 강제와 안식의 차이입니다. 외부에서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면 그것은 안식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을 사랑하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자신도 원하게 되면, 순종과 자유가 하나가 됩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뜻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간의 의지 자체가 제거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천적 인간이 의지가 없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의지가 주님의 선과 결합되어 새롭게 질서를 얻습니다. 본문도 주님의 뜻이 그의 이 된다고 말합니다. 자기중심적인 뜻에서 주님과 결합된 뜻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점은 AC.79-80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AC.79에서 천적 인간은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리되 그것을 자기 자신의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고 했고, AC.80에서는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려 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퍼셉션을 통해 그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5에서는 행동과 의지에서도 같은 질서가 나타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뜻을 근원으로 삼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따라서 AC.79소유’, AC.80’, AC.85뜻과 행동은 서로 연결됩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자기 것으로 주장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선과 진리의 근원으로 삼지 않으며, 자기 뜻을 궁극적인 삶의 기준으로 삼지도 않습니다. 그의 생명은 점점 더 주님으로부터 받는 질서 안에 놓입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바로 그때 인간에게 평화와 행복이 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사58땅의 높은 곳에 올림을 받는 을 내적인 평화와 행복으로, ‘야곱의 기업으로 양육되는 을 외적인 평온과 기쁨으로 풀이합니다. 즉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되는 천적 상태에는 내적 평화와 외적 평온이 함께 따릅니다.

 

이것은 평화를 단순히 외부 환경에 아무 문제가 없는 상태로 이해하지 않게 합니다. 천적 인간의 평화는 먼저 내적인 것입니다. 자기 뜻과 주님의 뜻이 서로 충돌하고, 악과 선이 계속 주도권을 놓고 싸우는 상태가 그쳤기 때문에 평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내적 질서가 외적인 삶에도 평온과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그렇다고 천적 인간에게 자연계의 고난이나 불편, 질병이나 손실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AC.85가 말하는 안식과 평화는 우선 영적 상태에 관한 것입니다. 외적 형편이 언제나 평탄하기 때문에 평화로운 것이 아니라, 사람의 내적 생명이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 있기 때문에 평화로운 것입니다.

 

AC.85를 이렇게 읽으면 안식일의 속뜻도 상당히 달라집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하지 않는 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인간의 뜻이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표상합니다. 여섯 날 동안에는 싸움과 수고가 있지만 일곱째 날에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안에서 주님의 뜻이 사람의 뜻이 됩니다. 그래서 싸움이 안식으로 바뀝니다.

 

이것은 안식일의 외적 준수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유대교회의 안식일 자체가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표상하도록 제정되었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외적 표상이 가리키는 내적 실재입니다. 외적인 안식일은 인간이 주님 안에서 누리는 내적 안식을 가리킵니다.

 

또한 이번 번호는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다는 데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끝까지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안식은 인간 안에서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심리적 평온이 아닙니다. 주님이 안식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안식이며, 주님의 형상이 된 천적 인간도 안식일이 됩니다.

 

따라서 안식의 중심은 결국 주님입니다. 주님 없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과 AC.85의 안식은 같지 않습니다. 천적 인간의 평화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얻는 평온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뜻이 물러가고 주님의 선하신 뜻이 자신의 뜻이 됨으로써 오는 평화입니다.

 

이 점에서 AC.85는 안식과 자유의 관계를 아름답게 보여 줍니다. 일반적으로는 자기 뜻을 포기하면 자유를 잃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천적 질서에서는 정반대입니다. 자기중심적인 뜻과 악의 지배 아래 있을 때 인간은 실제로 종이지만, 주님의 선을 사랑하여 그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자유와 평화를 누립니다.

 

AC.81에서 시작된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차이가 여기까지 오면 더욱 선명해집니다. 죽은 사람은 외적인 결박에 의해 억제되고, 영적 인간은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우며,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여 자유롭게 행합니다. AC.85는 그 천적 자유의 내면을 주님의 선하신 뜻이 그의 뜻이 되는 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번 번호의 안식은 단순히 싸움이 없다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사랑하고 그것을 자신의 뜻으로 기쁘게 행하는 적극적인 생명의 상태입니다. 싸움이 사라진 자리를 공백이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평화와 행복이 채웁니다.

 

결국 AC.85의 흐름은 하나입니다.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나라는 영원한 평화와 안식입니다. 주님의 천적 교회도 안식일이며, 거듭난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될 때 그도 주님의 형상으로서 안식일이 됩니다. 그 안식에 앞서 여섯 날의 싸움과 시험이 있지만, 마침내 주님의 뜻이 자신의 뜻이 될 때 내적인 평화와 행복, 외적인 평온과 기쁨을 누립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라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는 달력의 일곱째 날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거듭남의 일을 이루셔서, 사람이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뜻을 중심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선하신 뜻을 자신의 뜻으로 기쁘게 살아가는 상태입니다. 바로 그 상태가 안식이며, 그 사람에게 이루어진 주님의 안식일입니다. (AC.85)

 

 

 

AC.86, 창2:2-3, ‘안식일의 저녁 -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기 시작하는 상태’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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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4, 창2:2-3,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모든 싸움이 그친 안식의 상태다’ (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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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5, ‘면류관 벗어서’, 찬69, ‘온 천하 만물 우러러입니다.

 

오늘은 2 첫 번째 시간으로, 본문은 1절로 3, AC 글 번호로는 82번에서 84번입니다만, 2 여는 글들 및 개요 글들 포함, 67번부터 다루겠습니다. 여기 여는 글들은 아래 71번 글을 참고하세요.

 

본문 함께 읽습니다.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2:1-3)

 

이 본문을

 

일곱째 날, 곧 천적 인간의 상태

 

이라는 제목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시티아(Arcana Coelestia) 본문 및 해설, 그리고 심화 리딩 주일설교 시작합니다.

 

 

 

AC.67, 창2, '말씀의 내적 의미(속뜻)를 알게 하시고, 알리게 하심'

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내적 의미(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속뜻)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그 내적 의미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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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8, 창2,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예상 반응'

AC.68 저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이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없다고 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은 이것이 모두 상상이라고 할 것이며,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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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9, 창2, '사람은 본래 영들,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

AC.69 사람은 본래 주님에 의해 이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곧, 육체 안에 살아 있는 동안에도 영들과, 그리고 천사들과 말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실제로 태곳적에는 그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왜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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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0, 창2, ‘소생’, 곧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으로 들어갈 때

AC.70 여러 해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을 밝히는 것이 저에게 허락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먼저 사람이 ‘소생될 때’(when he is being resuscitated), 곧 육체의 삶에서 ‘영원한 삶’(the life of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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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1, 창2, 'AC 전개 방식'

AC.71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말씀 본문 안에 들어 있는 내용들 사이에 그대로 끼워 넣게 되면, 그것들은 흩어지고 서로 연결되지 않게 될 것이므로,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그것들을 각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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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2, 창2, '이런 방식을 이 장 끝에서부터 적용'

AC.72 그러므로 이 장의 끝에서, 사람이 어떻게 죽음에서 일으켜 세워져 영원한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지를 말해도 좋다는 허락을 저는 받았습니다. At the end of this chapter, accordingly, I am allowed to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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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3, 창2:1-17 개요,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1절)

창2:1-17 1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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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4, 창2:1-17 개요, '일곱째 날과 안식, 천적 인간'(2-3절)

AC.74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그날에 주님께서 쉬십니다. (2-3절)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on which the Lord rests (verses 2–3).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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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5, 창2:1-17 개요, '초목과 채소, 천적 인간의 내적 구조'(5-6절)

AC.75 그의 지식과 그의 이성(knowledge and rationality, [scientificum et rationale ejus])은 안개에 의해 적셔지는 땅에서 난 초목과 채소(the shrub and the herb)로 묘사됩니다. (5-6절) His knowledge and his rationality [sci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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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6, 창2:1-17 개요, ‘생명의 숨, 천적 인간의 생명'(7절)

AC.76 그의 생명은 그에게 ‘생명의 숨’(the breath of lives)을 불어넣으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7절) His life is described by the breathing into him of the breath of lives (verse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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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7, 창2:1-17 개요, '동방의 에덴동산, 천적 인간의 지성'(8-9절)

AC.77 그다음으로 그의 지성은 ‘동방의 에덴동산’으로 묘사됩니다. 그 안에서 ‘보기에 아름다운’ 나무들은 진리에 대한 퍼셉션들이고, ‘먹기에 좋은’ 나무들은 선에 대한 퍼셉션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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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8, 창2:1-17 개요, '네 강, 천적 인간의 속 사람과 겉 사람'(10-14절)

AC.78 지혜(Wisdom)는 동산 가운데 있는 강을 의미합니다. 그로부터 네 강이 나뉘어 나오는데, 첫째는 선과 진리(good and truth)입니다. 둘째는 모든 선과 진리, 곧 사랑과 신앙에 관한 지식(knowledge [cog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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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79, 창2:1-17 개요, '경작하며 지킴, 천적 인간의 상태'(15절)

AC.79 천적 인간은 이러한 동산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동산은 주님의 것이므로, 이 사람은 이 모든 것을 누리는 것은 허락되지만, 그것들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1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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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0, 창2:1-17 개요, '천적 인간은 오직 퍼셉션으로만'(16-17절)

AC.80 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하여 무엇이 선하고 참된지를 아는 지식 얻는 것은 허락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얻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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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천적 인간,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최종 상태'

AC.81 이 장은 ‘천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으며, 앞의 장은 ‘죽은 상태에 있던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 영적 인간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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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창2:1,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이제 영적 상태에 이르러(render) ‘여섯째 날’(the sixth day)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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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창2:1, ‘다 이루어지니라’, 천적 인간의 시작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 ‘천지와 만물’(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이 ‘다 이루어지니라’(finished)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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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4, 창2:2-3,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seventh day)(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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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최근 개신교 어느 교회 예배에 참석, 오랜만에 참 익숙하지만, 그러나 무척 낯설었던 시간을 가졌는데요, 참 익숙했던 건, 제가 개신교에서 50대 후반까지 머물렀었기 때문이고, 또 무척 낯설었던 건 예배와 설교 전반에 아르카나, 즉 ‘속의 언어’가 아닌, 세상 언어, 곧 ‘겉의 언어’가 많이 섞인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제가 아르카나를 처음 접하던 초창기처럼 무슨 반감이 들거나 그러진 않았는데요, 스베덴보리가 죽는 날까지 자신의 배경인 루터교회를 출석했던 거나 주님이 안식일마다 유대교 회당을 찾으셨던 것처럼, 저 역시 전심으로 그 예배에 참여, 함께 손을 들어 주님을 찬양하고, 말씀에 귀 기울이며, 함께 웃고 즐거워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두 세계의 언어가 섞인 예배였지만, 속으로 실시간 통역을 하면서 ‘, 이걸 이렇게, 저걸 저렇게 표현한 거구나!’ 하면서 드렸습니다. 우리 안에 와있는 천사들 역시 우리의 일상 일거수일투족 중 그렇겠구나 싶었습니다.

 

이 아르카나 순도 8, 90%의 예배는 지상에서는 정말 쉽지 않습니다. 100%는 천국에서나 가능하겠지요. 어쩌면 주님이 훗날을 위해 미리 우리 교회를 통해 이것저것 테스트를 진행하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과 ‘’은 같이 갑니다. ‘’은 ‘’이라는 그릇에 담기며, ‘’이라는 옷을 입고 생활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동안 자연적 인간과 영적, 천적 인간 역시 같이 갑니다. 우리의 영적, 천적 인간은 겉으로 보기엔 ‘자연적 인간’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쉽진 않으시겠지만, 항상 이 ‘균형’을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4-12(D1)

 

2646, 1, 창2.1, 2026-04-12(D1)-주일예배(창2,1-3, AC.67-84),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천적 인간의 시작.pdf
1.13MB

 

 

 

주일예배(2026/04/05, 창1:26-31, AC.51-66, 부활절), '거듭남 여섯 번째 상태 (3), 주님의 부활로 본 창1'

※ 오늘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24, ‘왕 되신 주’,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161, ‘할렐루야 우리 예수’입니다. 오늘은 창1 일곱 번째, 창1 마지막 시간으로, 본문은 26절로 31절,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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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And on the seventh day God finished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from all his work which he had made. And God blessed the seventh day, and hallowed it; because that in it he rested from all his work which God in making created. (2:2, 3)

 

AC.84

천적 인간은 일곱째 (seventh day)입니다. 주님께서 여섯 동안 일하셨으므로 그것을 그분의 (his work)이라 하며, 그때 모든 싸움이 그치므로 주님께서 모든 일을 마치고 쉬신다(rest from all his work) 합니다. 때문에 일곱째 날은 거룩하게 구별되었고, 안식(rest) 뜻하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하여 안식일이라 불렸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말씀 자체로부터 매우 분명합니다. The celestial man is the seventh day, which, as the Lord has worked during the six days, is called his work”; and as all combat then ceases, the Lord is said to rest from all his work.On this account the seventh day was sanctified, and called the sabbath, from a Hebrew word meaning rest.And thus was man created, formed, and made. These things are very evident from the words.

 

해설

AC.84는 창2일곱째 이 무엇인지를 직접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첫 문장에서 아주 간결하게 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일곱째 날은 단순히 창조가 끝난 뒤 이어지는 시간상의 하루가 아니라, 속뜻에서는 거듭남을 통하여 천적 인간이 된 사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83과 연결됩니다. 거기서는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었을 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그 하나 됨 가운데 신앙이 아니라 사랑, 곧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했습니다. AC.84는 그 결과로 이루어지는 천적 상태를 일곱째 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의 차이는 단순한 시간 순서가 아니라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상태 차이입니다.

 

그런데 스베덴보리는 여섯 날 동안 이루어진 일을 사람의 일이라고 하지 않고 그분의 ’, 곧 주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창1부터 이어져 온 거듭남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해 줍니다.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악과 싸우며 실제로 선택하고 행동하지만, 그 사람 안에서 거듭남을 이루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여섯 날 동안의 모든 과정은 궁극적으로 그분의 이라고 불립니다.

 

이 점은 거듭남을 인간 자신의 영적 성취로 이해하지 않게 하는 데 중요합니다. 사람이 여섯 날을 자기 힘으로 통과하여 마침내 일곱째 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람 안에서 일하시며 그를 죽은 상태에서 영적 인간으로, 그리고 천적 인간의 상태로 이끄십니다. 인간은 그 과정에서 자유롭게 주님의 역사에 응답하고 악과 싸우지만, 생명과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이어지는 모든 싸움이 그친다는 말은 AC.81과 직접 연결됩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언제나 승리한다고 했고,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때 그것들을 멸시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4에서는 천적 인간이 일곱째 날인 이유를 바로 이 싸움의 그침과 연결합니다.

 

따라서 안식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정적인 휴식이 아닙니다. 그 앞에는 여섯 날 동안의 주님의 일이 있고, 그 과정에는 영적 싸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적 상태에서는 그 싸움이 그칩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면서, 악과 거짓이 이전처럼 사람 안에서 서로 맞서는 싸움을 일으키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도 모든 싸움이 그친다는 말을 천적 인간에게 악과 거짓이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81은 천적 인간도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가 있다고 명시했습니다. 다만 그는 그것들을 멸시합니다. 즉 악과 거짓이 접근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이 사람의 내면에서 선과 진리와 대등하게 다투며 그를 흔드는 상태가 더 이상 지배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 때문에 주님께서 모든 일을 마치고 쉬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주님의 안식을 인간처럼 일을 많이 하신 뒤 피곤하여 쉬시는 것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속뜻의 초점은 주님께서 피로를 회복하신다는 데 있지 않고, 사람 안에서 이루시던 거듭남의 싸움이 안식의 상태에 이르렀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쉬신다는 표현은 사실 인간에게 일어난 변화와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는 주님께서 그를 거듭나게 하시는 일이 계속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천적 상태에 이르러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싸움이 그치면, 그 상태가 주님의 안식으로 묘사됩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일이 그 사람 안에서 안식의 상태에 이른 것입니다.

 

이 때문에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고 안식일이라 불렸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안식일은 히브리어의 , 그침이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AC.84에서 중요한 것은 히브리어 어원 자체보다 그것이 나타내는 영적 상태입니다. 안식일이 거룩한 것은 단순히 일하지 않는 날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주님께서 인간 안에서 이루신 거듭남의 일이 싸움을 지나 안식에 이른 천적 상태를 표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면 안식일의 거룩함도 외적인 휴식 규정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습니다. 외적인 안식일은 그보다 더 깊은 내적 실재를 표상합니다. 인간 안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살려는 질서가 물러가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사랑과 선이 주된 것이 될 때, 그 사람의 내면에 안식일이 의미하는 상태가 이루어집니다.

 

다만 여기서 싸움이 그쳤다는 것을 거듭난 사람이 현실에서 더 이상 어떤 갈등이나 어려움도 겪지 않는다는 뜻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84가 말하는 combat은 일반적인 인생의 고난이나 심리적 갈등 전체가 아니라 거듭남의 문맥에서 악과 거짓에 맞서는 영적 싸움입니다. 따라서 일곱째 날을 이제 삶에는 아무 문제도 없는 상태로 이해하면 본문의 뜻을 벗어나게 됩니다.

 

또한 천적 인간의 안식을 인간이 자기 노력으로 도달하여 확보하는 완전무결한 상태처럼 생각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번 번호에서 여섯 날의 일이 명시적으로 그분의 이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 안식은 인간이 자기 수행으로 획득한 상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루신 거듭남의 질서에서 오는 상태입니다.

 

AC.84의 마지막 문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습니다.스베덴보리는 비슷해 보이는 세 동사를 나란히 사용합니다. 이번 번호 자체에서는 그 차이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각각에 확정적인 상응을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이 표현은 창1과 창2에서 다루어진 창조가 단순히 최초 인간의 육체적 제작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보여 줍니다.

 

지금까지의 문맥에서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진다는 것은 주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는 과정과 연결됩니다. 1에서 죽어 있던 사람은 여섯 날을 거쳐 영적 인간으로 형성되었고, 2에서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되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면서 천적 인간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따라서 인간의 참된 창조는 그의 내적 생명이 주님으로부터 새롭게 형성되는 것과 분리할 수 없습니다.

 

특히 이 문장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압축해서 보여 줍니다. 자연계의 하늘과 땅, 빛과 광명체, 식물과 동물, 사람의 창조를 말하는 문자적 서술 안에서 그는 인간의 거듭남이라는 속뜻을 읽습니다. 그리고 그 전체 과정의 끝에서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다고 말합니다.

 

AC.83AC.84를 함께 보면 여섯째 날에서 일곱째 날로 넘어가는 구조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여섯째 날에는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일곱째 날에는 그 천적 질서가 이루어져 싸움이 그칩니다. 그래서 천적 인간이 바로 일곱째 이며, 그 상태가 주님의 안식으로 표현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안식이 거듭남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이 지향하는 상태라는 점입니다. 여섯 날 동안의 싸움과 변화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영원히 싸움 속에서만 살도록 거듭나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을 사랑하고 진리를 퍼셉션하여 선을 행하는 것이 자유와 기쁨이 되는 질서로 이끄십니다. AC.81에서 천적 인간의 결박이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라고 한 것도 이와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안식은 수동성이 아니라 질서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악과 거짓의 강제와 저항 속에서 선을 행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입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사랑과 자유에서 나오므로 그 자체가 기쁨이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천적 인간의 안식은 죽은 정지가 아니라 살아 있는 평화에 가깝습니다.

 

AC.84는 또한 주님의 주님의 안식이 모두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듭남과 관계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여섯 날 동안 주님께서 일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신다는 말씀을 인간 밖에서 벌어진 하나님의 행동만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주님께서 어떻게 일하시고 그 일을 어떤 상태에 이르게 하시는가로 읽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82에서 제시된 원리와도 잘 맞습니다. 거기서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말할 수 있다고 했고, 하늘과 땅 역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에게 적용되었습니다. 이제 안식일 역시 인간 밖의 제도만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는 천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말씀의 큰 표상들이 한 사람의 거듭남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따라서 AC.84천적 인간은 일곱째 이라는 문장은 단순한 상응 하나를 알려 주는 문장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은 창1에서 시작된 거듭남의 운동이 어디를 향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죽어 있던 사람이 영적 인간이 되고,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며,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마침내 싸움이 그쳐 주님의 안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영적 인간의 싸움을 부정적으로 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싸움은 안식에 이르는 과정이며,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언제나 승리한다고까지 표현되었습니다. 양심에 따라 악과 싸우는 영적 상태는 실패한 상태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거듭남의 실제적인 과정입니다. 일곱째 날의 안식은 그 여섯 날의 일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완성합니다.

 

결국 AC.84에서 안식일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로 깊어집니다. 천적 인간이 일곱째 이며, 여섯 날 동안의 일은 주님의 이고, 모든 싸움이 그치기 때문에 주님께서 쉬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곱째 날이 거룩하게 구별되어 안식일이라 불립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스베덴보리는 이와 같이 사람이 창조되고, 형성되고, 만들어졌다는 말로 마무리합니다.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창조입니다. 여섯 날의 일과 일곱째 날의 안식은 바로 그 창조의 질서를 묘사합니다. 천적 인간은 그 안식의 상태에 있는 사람이며, 그래서 그 자신이 일곱째 입니다. (AC.84)

 

 

 

AC.85, 창2:2-3, '주님 자신이 안식일이시며, 천적 인간의 안식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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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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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2:1)

 

AC.83

하늘과 땅과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 사람이 여섯째 (sixth day) 되었을 이루어졌다(finished) 합니다. 그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룰 때에는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다시 말해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The 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 are said to be finished, when man has become the sixth day, for then faith and love make a one. When they do this, love, and not faith, or in other words the celestial principle, and not the spiritual, begins to be the principal, and this is to be a celestial man.

 

해설

AC.83은 창1의 여섯째 날에서 창2의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전환을 매우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AC.82에서는 하늘이 속 사람, ‘이 겉 사람이며, ‘ 모든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AC.83은 왜 이 모든 것이 사람이 여섯째 이 되었을 때 이루어졌다고 하는지를 밝힙니다. 그 이유는 그때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먼저 중요한 것은 이루어졌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거듭남에 더 이상 아무런 변화도 남아 있지 않은 절대적인 완성을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창1에서 다루어진 영적 인간의 형성이 하나의 완성된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바로 이어지는 창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더 깊은 변화가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여섯째 날의 완성은 끝이라기보다 다음 상태로 넘어갈 수 있는 충만한 상태라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 상태의 핵심이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는 입니다. 1의 거듭남 과정에서 사람은 먼저 진리를 배우고 신앙을 통하여 선으로 인도됩니다. 처음에는 무엇이 참인지 배우고, 그것을 믿으며, 그 진리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데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신앙으로 받아들인 진리는 점차 삶의 선과 결합합니다. 사람이 단지 이것이 옳기 때문에 해야 한다고 아는 데 머물지 않고 실제로 그것을 사랑하고 행하게 될 때, 신앙과 사랑은 더 이상 서로 떨어진 두 가지가 아니라 하나를 이루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AC.81에서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을 비교한 내용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사랑으로부터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인정하고 행동한다고 했습니다. 반면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그 사랑으로부터 행동합니다. AC.83은 바로 그 전환을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룬다는 말로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의 변화는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남기는 과정이 아닙니다. 이 점을 특히 주의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과 사랑 가운데 하나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하나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달라지는 것은 그 둘의 질서입니다. 이전에는 신앙이 앞에서 사람을 인도했다면, 이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은 그 사랑과 하나 되어 존재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곧바로 신앙이 아니라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신앙이 아니라는 말을 신앙이 중요하지 않게 되거나 필요 없어졌다는 뜻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이미 첫 문장에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룬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그대로 있지만 이제 독립적으로 앞장서는 원리가 아니라 사랑 안에서 사랑과 하나 된 신앙이 됩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이 아니라 천적인 것이 주된 것이 된다는 다음 표현으로 다시 설명됩니다. 여기서도 영적인 것이 제거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the spiritualthe celestial의 관계는 서로 하나가 다른 하나를 없애는 관계가 아니라 무엇이 주된 것이며 무엇이 그 주된 것에 종속되어 질서를 이루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 될 때 그 사람은 천적 인간이 됩니다.

 

따라서 AC.83에서 천적 인간을 정의하는 핵심은 단순히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는 데 있지 않습니다.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그 하나 됨 가운데 사랑이 주된 것이 된 사람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강하다고 해서 곧 천적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하나를 이루고 그 가운데 사랑이 삶을 이끄는 원리가 되는 것입니다.

 

주된 이라는 개념도 중요합니다. 인간 안에는 사랑, 신앙, 지식, 이성, 기억지식 등 여러 가지가 함께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 가운데 무엇이 중심에서 다른 것들을 질서 있게 이끄느냐입니다. AC.78에서도 속 사람과 겉 사람에 속한 모든 것이 지혜에서 나오고, 그 지혜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3은 그 질서의 중심에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 밝힙니다.

 

이 점에서 AC.83은 앞의 AC.77에서 생명나무가 사랑을, 지식의 나무가 신앙을 의미한다고 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사랑과 신앙은 모두 천적 인간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천적 질서에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며 신앙은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문제를 이해할 때도 단순히 신앙이 나쁘다거나 지식이 나쁘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신앙과 지식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스스로 주된 것이 되려는 데 있습니다.

 

AC.83은 또한 왜 창2가 창1의 반복이 아닌지를 보여 줍니다. 1에서 사람은 여섯째 날에 이르러 영적 인간으로 형성됩니다. 사랑과 신앙도 이미 존재합니다. 그런데 창2에서는 그 둘의 내적 질서가 더욱 깊어져 사랑이 주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2의 천적 인간은 창1의 영적 인간과 전혀 별개의 새로운 인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거듭나게 하신 영적 인간이 더 깊은 천적 질서로 들어간 상태입니다.

 

여기서 되기 시작한다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고만 하지 않고 되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사이의 전환적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여섯째 날에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고, 이어지는 일곱째 날에서 천적 인간의 상태가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따라서 거듭남을 너무 딱딱한 단계표로 나누는 것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어느 순간까지는 완전히 영적 인간이었다가 다음 순간 갑자기 완전히 다른 천적 인간으로 바뀐다는 식보다는, 신앙과 사랑이 결합되고 그 질서가 변화하면서 사랑이 주된 것이 되어 가는 과정으로 읽는 것이 AC.83의 표현에 더 잘 맞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을 돌아보는 데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이것이 주님의 뜻이기 때문에순종하는 일이 많습니다. 때로는 마음이 따라오지 않더라도 진리를 붙들고 행동합니다. 이것은 결코 낮게 평가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거듭남을 계속 이루어 가시면, 이전에는 의무와 양심으로 행하던 선을 점차 사랑하게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하는 으로 깊어지는 것입니다. 이때 진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사랑과 하나가 되어 삶 자체가 됩니다. AC.83이 말하는 신앙과 사랑의 하나 됨을 우리의 경험에 적용한다면 이런 방향에서 조심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의무감으로 하는 신앙은 가치가 없고 자발적인 사랑만 참된 것이다라는 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 인간의 신앙과 양심도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형성하시는 귀중한 것입니다. AC.81에서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으나 승리한다고 했습니다. 진리를 붙들고 양심에 따라 악과 싸우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더 깊은 사랑의 질서로 인도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적인 것과 천적인 것의 차이를 우열만으로 보는 것보다 주도 원리의 차이로 보는 것이 이번 번호에서는 특히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주도적인 위치에서 사람을 선으로 인도합니다.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주된 것이 되고 신앙이 그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둘 다 주님의 거듭남의 질서 안에 있지만 그 내적 형태가 다릅니다.

 

AC.83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룬다는 말로 신앙과 삶의 관계도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이 머리 안의 교리적 동의로만 남고 실제 사랑과 삶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직 하나를 이룬 상태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사랑이라고 주장하면서 진리를 떠나는 것도 AC.83의 하나 됨과 다릅니다. 여기서 하나가 되는 것은 바로 신앙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앙과 체어리티가 분리될 수 없다는 더 넓은 가르침과도 연결될 수 있습니다. 다만 AC.83의 직접적인 문맥은 일반적인 신앙과 체어리티 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데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신앙과 사랑의 질서가 어떻게 바뀌는지를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그보다 더 넓은 교리 전체를 이번 번호에 모두 끌어올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룬다는 것을 두 개의 독립적인 실체가 나중에 기계적으로 합쳐진다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참된 신앙은 본래 삶을 향하고, 참된 사랑은 진리와 함께합니다. 거듭남 가운데 주님께서는 사람이 받아들인 진리가 선의 삶과 결합되도록 이끄십니다. 그 결합이 깊어질수록 사람이 아는 것과 원하는 것, 믿는 것과 살아가는 것 사이의 분열도 줄어듭니다.

 

바로 이 점에서 여섯째 날의 이루어짐이 이해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형성되고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갖추어진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사랑이 서로 하나를 이루게 됩니다. 인간 안의 영적 질서가 하나의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완성은 곧 새로운 시작입니다.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하면서 천적 인간의 상태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안식과 일곱째 날은 바로 그 상태를 더 깊이 보여 줄 것입니다. 따라서 창2:1 이루어지니라는 말씀은 창1의 끝을 알리는 동시에 창2의 천적 상태로 들어가는 문턱에 서 있습니다.

 

AC.82AC.83을 함께 읽으면 창2:1의 속뜻이 상당히 분명해집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은 겉 사람이며, ‘ 모든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사람이 여섯째 날이 되어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 하나 됨 가운데 이제 사랑이 주된 것이 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83의 핵심은 단순히 사랑이 신앙보다 중요하다는 문장으로 축약하면 오히려 놓치는 것이 생깁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신앙과 사랑이 하나를 이루고, 하나 가운데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입니다. 신앙은 제거되지 않고 사랑 안에서 자신의 참된 자리를 얻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영적 인간에서 천적 인간으로 넘어가는 전환입니다.

 

결국 AC.83은 천적 인간이 어떻게 시작되는지를 매우 명료하게 보여 줍니다. 신앙만으로 천적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니고, 신앙을 버리고 사랑만 남김으로 천적 인간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거듭남 가운데 신앙과 사랑을 하나 되게 하시고, 그 가운데 사랑이 주된 것이 되게 하실 때 영적인 질서가 천적인 질서로 깊어집니다. 이것이 창2에서 말하는 천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AC.83)

 

 

 

AC.84, 창2:2-3, ‘천적 인간은 일곱째 날이며, 모든 싸움이 그친 안식의 상태다’ (AC.84-88)

2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3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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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2, 창2:1, ‘하늘은 속 사람, 땅은 겉 사람 - 한 사람이 곧 교회여야 한다’ (AC.82-83)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창2:1) AC.82이 말씀은 이제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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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And the heavens and the earth were finished, and all the army of them. (2:1)

 

AC.82

말씀은 이제 사람이 여섯째 (sixth day)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늘(heaven) 그의 사람이고, (earth) 그의 사람이며, 그것들의 만상(the army of them) 사랑과 신앙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인데, 이것들은 앞에서 광명체들과 별들로 의미되었습니다. 사람이 하늘(heaven)이라 불리고 사람이 (earth)이라 불린다는 것은 장에서 이미 인용한 말씀의 구절들로부터 분명하며, 여기에 이사야의 다음 말씀을 덧붙일 있습니다. By these words is meant that man is now rendered so far spiritual as to have become the sixth day”; heaven is his internal man, and earth his external; the army of them are love, faith, and the knowledges thereof, which were previously signified by the great luminaries and the stars. That the internal man is called heaven, and the external earth, is evident from the passages of the Word already cited in the preceding chapter, to which may be added the following from Isaiah:

 

12내가 사람을 순금보다 희소하게 하며 인생을 오빌의 금보다 희귀하게 하리로다 13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가 맹렬히 노하는 날에 하늘을 진동시키며 땅을 흔들어 자리에서 떠나게 하리니 (13:12, 13) I will make a man more rare than solid gold, even a man than the precious gold of Ophir; therefore I will smite the heavens with terror, and the earth shall be shaken out of its place (Isa. 13:1213).

 

13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고 너를 지은 여호와를 어찌하여 잊어버렸느냐 너를 멸하려고 준비하는 학대자의 분노를 어찌하여 항상 종일 두려워하느냐 학대자의 분노가 어디 있느냐, 16내가 말을 입에 두고 그늘로 너를 덮었나니 이는 내가 하늘을 펴며 땅의 기초를 정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너는 백성이라 말하기 위함이니라 (51:13, 16) Thou forgettest Jehovah thy maker, that stretcheth forth the heavens, and layeth the foundations of the earth; but I will put my words in thy mouth, and I will hide thee in the shadow of my hand, that I may stretch out the heaven, and lay the foundation of the earth (Isa. 51:13, 16).

 

말씀들로부터 하늘(heaven) (earth) 모두 사람에 대하여 서술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비록 말씀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지만, 말씀의 내적인 것들은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무엇이든 교회의 사람에게도 말할 있는 그러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결코 교회의 일부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성전이 아닌 사람은 성전이 의미하는 , 교회와 천국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태고교회가 단수로 사람(man)이라 불립니다. From these words it is evident that both heaven and earth are predicated of man; for although they refer primarily to the most ancient church, yet the interiors of the Word are of such a nature that whatever is said of the church may also be said of every individual member of it, who, unless he were a church, could not possibly be a part of the church, just as he who is not a temple of the Lord cannot be what is signified by the temple, namely, the church and heaven. It is for this reason that the most ancient church is called man, in the singular number.

 

해설

AC.82부터 창2 본문의 상세 해설이 시작됩니다. 앞의 AC.73-81이 창2:1-17 전체의 개요였다면, 이제 스베덴보리는 창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를 구체적으로 풀이합니다. 첫 문장에서 그는 이 말씀이 사람이 이제 여섯째 이 될 만큼 영적으로 되었다는 뜻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하늘은 그의 속 사람, ‘은 그의 겉 사람, ‘그것들의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여섯째 이라는 표현은 매우 중요합니다. 1의 여섯 날은 자연계의 창조 순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을 묘사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여섯째 이 되었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여섯 번째 날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거듭남의 과정에서 영적 인간으로 형성된 상태에 이르렀다는 뜻입니다. 바로 앞 AC.81에서 스베덴보리가 창1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다고 한 것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따라서 AC.82는 창1과 창2 사이의 경계도 다시 확인해 줍니다. 1의 여섯째 날에 이르러 사람은 영적 인간이 되었습니다. 2에서는 그 영적 인간이 천적 인간이 되는 일이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창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창1의 거듭남 과정이 여섯째 날의 상태에 이르렀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제 스베덴보리는 하늘을 사람 안에서 풀이합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은 겉 사람입니다. 이것은 AC를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 상당히 낯선 해석일 수 있습니다. 성경의 하늘과 땅을 보통 인간 밖에 있는 우주와 자연계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서 하늘과 땅이 인간의 내적·외적 구조를 나타낼 수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 속 사람이 하늘이라고 해서 속 사람 자체가 천국이라는 단순한 공간적 등식을 세우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겉 사람이 이라고 해서 겉 사람은 낮고 악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거듭난 인간에게서는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모두 주님의 질서 안에 놓입니다. 중요한 것은 속 사람이 주님과 천국을 향하여 열리고, 겉 사람이 그 속 사람과 질서 있게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것들의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을 의미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들이 앞에서 광명체들과 별들로 의미되었다고 덧붙입니다. 이것은 창1의 상세 해설을 다시 연결하는 표현입니다. 창조 이야기에서 하늘의 광명체와 별들이 단순한 천체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는 사람 안에 형성되는 사랑과 신앙 및 그에 속한 것들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2:1천지와 만물이 이루어지니라는 말씀은 속뜻에서 한 사람의 속 사람과 겉 사람,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랑과 신앙 및 그에 관한 지식들이 하나의 질서 안에 형성된 상태를 묘사합니다. 자연계 창조의 완성이 인간 안에서는 거듭남의 한 단계가 완성되는 것으로 읽히는 것입니다.

 

그러나 AC.82에서 더욱 중요한 부분은 그다음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왜 하늘 = 사람’, ‘ = 사람이라고 읽을 수 있는지를 말씀 자체로 확증하기 위해 이사야의 두 본문을 인용합니다. 13:12-13과 사51:13, 16입니다. 이 인용의 목적은 단순히 하늘이라는 단어가 성경 다른 곳에도 나온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사람과 교회의 내적 상태를 가리키는 방식으로 말씀에서 사용된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13에서는 사람이 순금보다 희귀하게 되고 하늘이 진동하며 땅이 그 자리에서 흔들리는 것이 함께 말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말씀을 단순히 물리적 우주의 격변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과 교회의 내적·외적 상태의 변화와 연결합니다. 51에서도 여호와께서 하늘을 펴고 땅의 기초를 정하신다는 말씀이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두시는 것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것이 하늘을 사람에게 적용하여 읽을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됩니다.

 

그러나 AC.82의 가장 중요한 해석 원리는 이 두 인용 뒤에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들이 주로 태고교회를 가리키지만, 말씀의 내적인 것들은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무엇이든 그 교회의 각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본성을 지닌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이번 두 이사야 구절을 설명하기 위한 부연이 아니라 AC 전체의 성경 해석을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원리입니다.

 

즉 말씀에서 교회가 다루어질 때 그것은 거대한 종교 집단이나 역사적 제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한 사람 안에서도 같은 영적 질서가 존재해야 합니다. 교회 전체에 관하여 말하는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타락과 회복의 문제는 한 사람의 내적 생명에도 적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매우 강하게 표현합니다. ‘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결코 교회의 일부가 없기 때문입니다.이것은 교회론을 외적인 소속에서 내적인 상태로 옮겨 놓는 중요한 문장입니다. 어떤 사람이 외적으로 교회 명부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으로 말씀에서 말하는 의미의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 자신 안에 교회를 이루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고 외적인 교회 공동체가 불필요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교회 공동체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공동체를 실제로 교회가 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더 깊이 보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각각의 사람 안에 주님에 대한 사랑과 신앙, 선과 진리의 질서가 없다면 외적인 조직만으로는 말씀에서 의미하는 교회의 본질을 이룰 수 없습니다.

 

이어지는 성전의 비유가 이 원리를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주님의 성전이 아닌 사람은 성전이 의미하는 , 교회와 천국이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도 건물로서의 성전과 사람 안의 영적 실재가 연결됩니다. 성전이 말씀에서 교회와 천국을 의미한다면, 그 교회와 천국의 질서가 한 사람 안에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 안에 천국이 있다는 말을 막연하게 낭만적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AC.82의 문맥에서는 매우 구체적입니다. 사람의 속 사람은 하늘’, 겉 사람은 으로 묘사되고, 그 안에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즉 인간이 하나의 작은 교회이며 성전이라는 말은 그의 내적·외적 삶 전체가 주님의 질서 안에 놓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가 단수로 사람이라 불린다고 설명합니다. 태고교회라는 하나의 교회와 그 교회를 이루는 한 사람 사이에 상응하는 구조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전체에 있는 것이 각 사람 안에도 있으며, 각 사람이 교회의 질서를 자기 안에 받아들일 때 그들이 함께 교회를 이룹니다.

 

여기서 태고교회가 사람이라 불린다는 말을 태고교회 전체가 실제 한 개인이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라는 단수 표현은 그 교회의 내적 성격과 질서를 나타냅니다. 앞서 창1사람역시 거듭나는 인간과 교회의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읽혀 왔습니다.

 

AC.82의 이 원리는 말씀의 속뜻이 왜 동시에 교회와 개인에게 적용될 수 있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예를 들어 교회의 타락에 관한 말씀이 개인의 거듭남과 무관한 역사적 사건으로만 머물지 않고, 한 사람 안에서 선과 진리의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의 회복에 관한 말씀도 한 사람의 내적 회복과 연결됩니다. 말씀의 속뜻에서는 교회와 인간이 서로 분리된 두 주제가 아니라 상응하는 질서 안에 있습니다.

 

이것은 AC를 읽으면서 자주 만나게 될 교회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고대교회, 유대교회, 기독교회 등을 다룰 때 우리는 역사적 집단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들의 영적 특성은 동시에 인간 안의 상태와도 연결됩니다. AC.82는 바로 그 적용이 가능한 이유를 직접 설명해 주는 번호입니다.

 

또한 이 원리는 거듭남이 개인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교회적인 문제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교회의 갱신을 말하면서 구성원 각 사람의 거듭남을 제외할 수 없습니다. ‘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교회의 일부가 없다는 문장은 교회의 참된 갱신이 결국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주님의 질서가 이루어지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문장을 완전히 거듭난 사람만 교회에 들어올 자격이 있다는 배타적인 의미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AC.82는 교회 회원의 자격 심사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속뜻에서 교회와 개인이 왜 서로 대응하여 서술될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문장의 초점은 다른 사람을 교회인지 아닌지 판정하는 데 있지 않고, 교회라고 불리는 것이 먼저 나 자신 안에서 실제가 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AC.82를 이렇게 읽으면 하늘의 의미도 더욱 깊어집니다. 하늘과 땅은 사람 밖에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이 주님의 질서 안에서 연결되고,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이 그 안에서 제자리를 찾을 때 인간 안에 하나의 하늘과 이 형성됩니다.

 

이 점은 창2의 천적 인간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합니다. AC.81까지는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차이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AC.82는 먼저 여섯째 날의 영적 인간이 어떤 상태까지 형성되었는지를 다시 확인합니다. 그의 속 사람과 겉 사람, 사랑과 신앙 및 그에 관한 지식들이 형성되어 천지와 만상이 이루어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어지는 안식과 일곱째 날을 통하여 천적 인간의 상태가 본격적으로 설명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82는 창2:1의 짧은 말씀을 해설하면서 동시에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세웁니다. 여섯째 날은 거듭난 영적 인간의 상태이며, 하늘과 땅은 그의 속 사람과 겉 사람이고, 교회에 관하여 말한 말씀은 그 교회를 이루는 각 사람에게도 적용됩니다. 이 세 번째 원리 때문에 이번 번호는 창2 한 절의 해설을 넘어 AC 전체를 읽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특히 자신이 교회가 아니면 교회의 일부가 없다는 문장을 기억해 둘 만합니다. 교회는 먼저 외부에 존재하는 조직이고 내가 거기에 가입함으로써 교회의 일부가 되는 것만이 아닙니다. 말씀의 선과 진리, 주님을 향한 사랑과 신앙이 내 안에서 실제 삶의 질서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 외적인 교회도 그 내적 실재를 담는 교회가 됩니다.

 

결국 AC.82하늘과 은 먼 우주의 이야기에서 인간 자신의 내면으로 다가옵니다. 하늘은 속 사람이고 땅은 겉 사람이며, 그 만상은 사랑과 신앙 및 그것들에 관한 지식들입니다. 그리고 이 질서는 한 사람 안에서 실제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이기 위해서는 교회를 이루는 사람이 먼저 자기 안에서 교회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원리 때문에 말씀에서 교회에 관하여 말한 것은 동시에 그 교회의 각 사람에 관하여 말할 수 있으며, 태고교회도 단수로 사람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AC.82)

 

 

 

AC.83, 창2:1, ‘신앙과 사랑이 하나가 될 때, 사랑이 주된 것이 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 (창2:1) AC.83‘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상’(heavens and the earth and all the army of them)은 사람이 ‘여섯째 날’(sixth day)이 되었을 때 ‘다 이루어졌다’(finished)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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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창2:1-17 배경, '죽은 사람, 영적 인간, 천적 인간의 세 가지 차이'

AC.81이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며, 앞 장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무엇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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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81

장은 천적 인간을 다루며, 장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고, 영적 인간이나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차이를 있도록 각각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간략히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첫째,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외에는 아무것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하지만, 사랑으로부터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 그렇게 하며, 또한 그것을 바탕으로 행동합니다. 천적 인간은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하며,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또한 사랑으로부터 행동합니다. This chapter treats of the celestial man, as the preceding one did of the spiritual, who was formed out of a dead man. But as it is unknown at this day what the celestial man is, and scarcely what the spiritual man is, or a dead man, it is permitted me briefly to state the nature of each, that the difference may be known. First, then, a dead man acknowledges nothing to be true and good but what belongs to the body and the world, and this he adores. A spiritual man acknowledg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but he does so from a principle of faith, which is likewise the ground of his actions, and not so much from love. A celestial man believes and perceives spiritual and celestial truth and good, acknowledging no other faith than that which is from love, from which also he acts.

 

[2] 둘째, 죽은 사람을 움직이는 목적은 오직 육체적·세상적 삶만을 향하며, 그는 영원한 삶이 무엇인지, 주님이 누구신지도 알지 못합니다. 안다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영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며, 그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합니다. 천적 인간을 움직이는 목적은 주님을 향하며,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Second: The ends which influence a dead man regard only corporeal and worldly life, nor does he know what eternal life is, or what the Lord is; or should he know, he does not believe. The ends which influence a spiritual man regard eternal life, and thereby the Lord. The ends which influence a celestial man regard the Lord, and thereby his kingdom and eternal life.

 

[3] 셋째,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거의 언제나 굴복하며, 싸움 가운데 있지 않을 때에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므로 그는 종입니다. 그를 묶는 것은 외적인 결박들, 법에 대한 두려움, 생명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재산과 이익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것들 때문에 중요하게 여기는 평판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들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만 언제나 승리합니다. 그를 억제하는 결박들은 내적인 것이며, 양심의 결박이라 불립니다. 천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지 않으며,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그것들을 멸시하므로 정복자라 불립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의 결박은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Third: A dead man when in combat almost always yields, and when not in combat, evils and falsities have dominion over him, and he is a slave. His bonds are external, such as the fear of the law, of the loss of life, of wealth, of gain, and of the reputation which he values for their sake. The spiritual man is in combat, but is always victorious; the bonds by which he is restrained are internal, and are called the bonds of conscience. The celestial man is not in combat, and when assaulted by evils and falsities, he despises them, and is therefore called a conqueror. He is apparently restrained by no bonds, but is free. His bonds, which are not apparent, are perceptions of good and truth.

 

해설

AC.81은 창1과 창2의 속뜻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번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창1죽은 사람으로부터 형성된 영적 인간을 다루었다면 창2천적 인간을 다룬다고 다시 확인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천적 인간이 무엇인지 알려져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영적 인간과 죽은 사람이 무엇인지조차 거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세 사람의 차이를 직접 설명합니다. 그 비교 기준은 세 가지입니다. 무엇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는가, 무엇을 삶의 목적으로 삼는가, 그리고 악과 거짓을 만났을 때 무엇에 의해 억제되고 어떻게 싸우는가입니다.

 

먼저 여기서 죽은 사람을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73에서도 이미 주의했던 것처럼, 이것은 창1의 거듭남 이전 상태에 있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살아 있고 생각하고 활동하지만, 속뜻에서는 아직 영적 생명에 들어오지 않은 상태이므로 죽은 사람이라고 불립니다. AC.81은 이제 그 의미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차이는 사람이 무엇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는가에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에 속한 것만을 참되고 선한 것으로 인정하며 그것을 숭배합니다. 여기서 숭배한다는 말은 반드시 종교 의식을 행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그의 마음과 삶의 중심이 육체적·세상적인 것에 놓여 있고, 그것을 궁극적인 선과 진리처럼 여긴다는 뜻입니다.

 

영적 인간은 이와 다릅니다. 그는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중요한 제한을 덧붙입니다. 그는 그것들을 사랑으로부터라기보다는 신앙의 원리로부터인정하고, 또한 그 신앙을 바탕으로 행동합니다. 이것은 영적 인간에게 사랑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적 인간의 특징은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선으로 인도된다는 데 있습니다. 먼저 참된 것을 배우고 믿으며, 그것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양심을 통해 행동하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천적 인간은 다시 다릅니다. 그는 영적·천적인 진리와 선을 믿고 퍼셉션합니다’. 그리고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기서 AC.77에서 나온 퍼셉션의 의미가 다시 중요해집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외적인 교리나 논증을 통해서만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부터 그것을 내적으로 퍼셉션합니다.

 

특히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 외에는 다른 신앙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천적 인간에게 신앙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신앙이 사랑과 분리되어 독립적인 첫째 원리로 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이 출발점으로 두드러지고 그 신앙으로부터 행동하는 반면,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이 먼저이며 신앙은 그 사랑으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같은 선과 진리를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적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두 번째 차이는 목적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느냐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죽은 사람을 움직이는 목적은 육체적·세상적 삶에 한정됩니다. 그는 영원한 삶과 주님을 모르거나, 설령 들어서 알고 있다 하더라도 믿지 않습니다. 그의 관심과 삶의 방향이 현세적인 것 안에 닫혀 있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의 목적은 영원한 삶을 향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을 향합니다. 반면 천적 인간의 목적은 먼저 주님을 향하고, ‘그로 말미암아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을 향합니다. 이 순서의 차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에게는 영원한 삶과 구원이 중요한 목적이 되고 그것을 통하여 주님을 향하는 질서가 두드러집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는 주님 자신이 첫째 목적입니다.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조차 주님으로부터 이어집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이 영원한 삶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목적의 중심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영원히 살기 위해 주님을 믿는다는 데 머물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의 나라와 영원한 삶을 향합니다. 자기 자신의 구원보다 주님이 먼저 놓이는 질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차이는 영적 싸움과 인간을 억제하는 결박에서 나타납니다. 죽은 사람은 싸움 가운데 있을 때 거의 언제나 굴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싸움이 없을 때에는 악과 거짓이 그를 지배하므로 그는 종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싸움은 거듭남 과정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사이에 일어나는 영적 싸움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을 붙들어 악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주로 외적인 결박입니다. 법이 두렵고, 생명이나 재산이나 이익을 잃는 것이 두렵고, 평판을 잃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행동을 억제합니다. 이것은 외적 질서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법과 사회적 질서는 인간 공동체를 위해 반드시 필요합니다. 다만 그 사람이 악을 피하는 내적 이유가 아직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외적인 손실에 대한 두려움에 있다는 것입니다.

 

영적 인간은 싸움 가운데 있으며 언제나 승리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언제나를 거듭나는 사람이 현실에서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장은 죽은 사람과 영적 인간의 상태를 유형적으로 대조하는 문맥에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실제 영적 싸움에 들어가며, 그를 악에서 붙드는 것은 외적인 두려움만이 아니라 양심의 결박이라는 내적인 것입니다.

 

양심은 영적 인간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그는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신앙을 통해 받아들이고, 그것에 어긋나는 일을 할 때 내적으로 고통을 느낍니다. 그래서 아무도 보지 않고 법적인 처벌도 없더라도 이것은 주님 앞에서 해서는 된다는 내적 결박이 작용합니다. 외적인 결박에서 내적인 양심의 결박으로 옮겨진 것은 거듭남에서 매우 큰 변화입니다.

 

그러나 천적 인간에게서는 또 다른 상태가 나타납니다. 그는 싸움 가운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악과 거짓이 공격해 올 때 그것들을 멸시하며, 그래서 정복자라고 불립니다. 이것을 천적 인간에게는 유혹이나 악의 접근 자체가 전혀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도 악과 거짓의 공격을 받을 라고 합니다. 차이는 그것들이 내적인 싸움을 일으켜 그를 흔들 정도의 힘을 갖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영적 인간은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를 양심 가운데 싸우며 진리를 붙듭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기 때문에 악과 거짓을 그것들과 대등한 선택지처럼 놓고 오래 씨름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악하고 거짓임을 퍼셉션하고 배척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를 단순히 싸워 이기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고 정복자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천적 인간의 자유에 관한 매우 중요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결박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것처럼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아무런 질서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결박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자유가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과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줍니다. 죽은 사람은 외적으로는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악과 거짓의 종입니다. 영적 인간은 양심의 결박 가운데 악과 싸웁니다. 천적 인간은 선과 진리를 사랑하고 퍼셉션하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 그의 자유 자체가 됩니다. 외부에서 억지로 붙들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 상태의 차이는 단순히 나쁜 사람, 좋은 사람, 아주 좋은 사람의 세 등급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을 지배하는 중심과 질서가 서로 다릅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을 중심으로 살며 외적 결박에 의해 억제됩니다. 영적 인간은 신앙을 통하여 선과 진리를 인정하고 양심에 의해 살아갑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며, 그것을 따르는 것이 그의 자유가 됩니다.

 

이 세 번째 비교는 창1에서 창2로 넘어가는 이유도 잘 보여 줍니다. 1의 여섯 날은 죽어 있던 사람이 거듭나 영적 인간이 되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창2에서는 그보다 더 깊은 천적 상태가 다루어집니다. 따라서 창1에서 거듭남이 끝났다고 해서 창2가 단순한 반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AC.81은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 사이에 실제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창2가 왜 별도로 필요한지를 설명합니다.

 

다만 이 세 상태를 오늘날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인 세 단계표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창1과 창2의 속뜻, 그리고 영적 인간과 천적 인간의 성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지금 죽은 사람 단계인가, 영적 단계인가, 천적 단계인가?를 점수표처럼 판정하는 데 이 번호를 사용하는 것은 본문의 목적과 거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안에서 무엇이 삶의 중심이 되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지를 비추어 보는 기준으로 읽는 것이 유익합니다.

 

특히 외적 결박, 양심, 퍼셉션이라는 세 구별은 매우 중요합니다. 겉으로 똑같이 악을 행하지 않는 세 사람이 있어도 그 내적 이유는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처벌과 손해가 두려워 악을 피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그것이 신앙의 진리에 어긋난다는 양심 때문에 피할 수 있으며, 또 다른 사람은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 자체를 싫어할 수 있습니다. 외적 행동만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내적인 생명의 질서는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거듭남이 단순한 행동 교정이 아니라는 사실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이 법이 무서워 악을 억제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양심으로 악을 피하며, 더 깊게는 선을 사랑하기 때문에 악을 원하지 않는 상태로 이끄십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간이 자기 힘으로 올라가야 하는 영적 성취의 사다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1부터 계속된 모든 거듭남의 주체는 주님입니다.

 

AC.81의 세 번째 비교는 AC.79-80과도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AC.79에서는 천적 인간이 동산의 모든 것을 누리면서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는다고 했고, AC.80에서는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알려 하지 않고 주님으로부터 퍼셉션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81에서는 바로 그 퍼셉션이 천적 인간의 보이지 않는 결박이라고 합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기 때문에 외적 강제에 의해 움직이지 않고 자유롭게 선을 행합니다.

 

이렇게 보면 천적 인간의 자유와 주님께 대한 의존은 서로 반대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질서 안에 있을수록 인간은 악과 거짓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 가운데 있게 됩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살려고 하는 것이 자유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악과 거짓의 지배 아래 놓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을 사랑하는 상태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 강제가 아니라 자신의 기쁨과 자유가 됩니다.

 

AC.81은 또한 신앙에서 사랑으로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이해하게 해 줍니다. 영적 인간은 신앙으로부터 행동하고,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오는 신앙으로 행동합니다. 그렇다고 영적 인간의 신앙이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거듭남의 실제적인 질서이며 주님께서 사람을 이끄시는 방식입니다. 다만 천적 상태에서는 신앙과 진리가 사랑 안에 더욱 깊이 결합되어,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퍼셉션하는 상태가 됩니다.

 

따라서 천적 인간을 영적 인간보다 단순히 등급이 높은 사람이라고만 이해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영적 인간에게서는 신앙과 양심이 두드러지고, 천적 인간에게서는 사랑과 퍼셉션이 두드러집니다. 이 차이가 창1과 창2의 차이를 이루는 중요한 배경입니다.

 

AC.81은 결국 세 가지 질문으로 세 상태를 구별합니다. ‘무엇을 선과 진리로 인정하는가?’, ‘무엇을 목적으로 살아가는가?’, ‘무엇에 의해 악에서 억제되는가?입니다. 죽은 사람은 몸과 세상을 중심으로 하며 육체적·세상적 삶을 목적으로 삼고 외적 두려움에 의해 억제됩니다. 영적 인간은 영적·천적인 선과 진리를 신앙으로 인정하고 영원한 삶을 목적으로 하며 양심의 결박 가운데 싸웁니다. 천적 인간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믿고 퍼셉션하며 주님 자신을 목적으로 하고,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 안에서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AC.81은 창2의 천적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일종의 기준표와 같은 번호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분류하기 위한 기준표라기보다, 거듭남이 인간의 중심을 얼마나 깊이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주는 기준입니다. 몸과 세상이 중심이던 상태에서 신앙과 양심의 상태로, 그리고 마침내 주님을 향한 사랑과 선과 진리에 대한 퍼셉션이 자유 자체가 되는 상태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2에서 다루는 천적 인간은 바로 이러한 사람입니다. (AC.81)

 

 

 

AC.80, 창2:1-17 개요, '주님으로부터 알고,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알려 하지 말라' (16-17절)

AC.80그는 또한 주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퍼셉션을 통해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아는 것이 허락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과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감각적인 것들과 기억지식(sens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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