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2

‘지키는 자’(keeper)가 된다는 것은 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대교회에서 ‘문지기들’(door keepers)과 ‘문을 지키는 자들’(porters), 곧 문지방을 지키는 자들이 그러했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의 ‘지키는 자’라고 불리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인’이라 하는 교리의 원리에 따르면 신앙이 지배해야 했으며, 이는 7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To be a “keeper” signifies to serve, like “door keepers” and “porters” (that is, the keepers of the threshold) in the Jewish church. Faith is called the “keeper” of charity, from the fact that it ought to serve it, but it was according to the principles of the doctrine called “Cain” that faith should rule, as was said in verse 7.

 

해설

AC.372는 창4:9에서 가인이 한 말 가운데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의 ‘지키는 자’(keeper)를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370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대답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했음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72에서는 왜 ‘지키는 자’라는 말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나타내는지를 설명합니다. 결론은 매우 분명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의 지키는 자라고 불리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질문은 단순히 ‘내가 동생을 보호할 책임이 있습니까?’라는 책임 회피를 넘어, 속뜻에서는 ‘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까?’라는 영적 질서에 대한 거부가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지키는 자’가 ‘섬기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하면서 유대교회의 문지기들을 예로 듭니다. 문지기는 문이나 문지방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는 집이나 성전 자체의 주인이 아니라 그곳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역할은 자신이 지키는 것을 대신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온전히 기능하도록 섬기는 데 있습니다. 바로 이 이미지가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의 ‘지키는 자’입니다. 신앙의 진리들은 무엇이 선인지, 무엇이 악인지,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어떤 악을 죄로 여겨 피해야 하는지를 가르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보호하고 인도하며 체어리티가 삶에서 올바르게 나타나도록 섬깁니다.

 

여기서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긴다’는 말을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문지기가 집을 섬긴다고 해서 문지기의 역할이 불필요한 것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진리가 없으면 인간은 자기가 선이라고 느끼는 것을 곧바로 참된 선이라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선한 의도만으로 무엇이 실제로 이웃에게 유익한지를 언제나 정확히 아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밝혀 줍니다. 그러므로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고 해서 진리가 불필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는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둘의 올바른 질서를 회복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의 창4:7, 특히 AC.361-365에서 살펴본 ‘주도권’의 문제와 정확히 이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거기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AC.372 마지막에서 ‘이는 7절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라고 한 것은 바로 그 논의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AC.372를 이해하려면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먼저 생기는가?’라는 시간적 순서보다 ‘둘이 결합된 뒤 무엇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목적과 주도권의 질서를 보아야 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에서는 진리를 먼저 배우고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최종적인 질서에서 신앙이 사랑을 지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며,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깁니다.

 

이 점은 방금 AC.371에서 살펴본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졌다’는 말과도 잘 연결됩니다. 홍수 후 영적 인간에게서는 먼저 말씀과 계시된 진리를 배우고, 그것으로 양심이 형성되며,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고 해서 신앙이 체어리티의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체어리티와 모든 선의 근원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신앙은 주님께서 인간을 체어리티로 이끄시는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긴다는 AC.372의 설명과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가 주어진다는 AC.371의 설명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함께 읽을 때 영적 인간의 질서가 더 선명해집니다. 진리가 먼저 의식에 들어올 수 있지만,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섬기는 것은 선이며, 신앙이 살아 있게 되는 것은 체어리티 안에서입니다.

 

반대로 ‘가인’이라 하는 교리는 이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의 교리의 원리에 따르면 신앙이 지배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가인의 문제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과 구별하여 하나의 독립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다음에는 사랑과 분리하며, 나중에는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더 중요하다고 여기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합니다. 그 결과 아벨, 곧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그리고 아벨을 죽인 뒤에는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합니다. 결국 ‘나는 체어리티를 섬기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신앙이 자신의 올바른 기능을 거부하고 오히려 주인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할 때 체어리티가 소멸되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으면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 어떤 교리를 정확히 고백하는가, 어떤 진리를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이해하는가가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면 진리가 사람을 사랑과 쓰임으로 인도하기보다 자기의 의로움과 우월성을 확인하는 수단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진리 자체가 악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사용하는 사랑의 질서가 뒤집힌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을 가졌다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여 그것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게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키는 자’라는 표현에는 단순한 보호 이상의 아름다운 질서가 담겨 있습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킵니다.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악을 선이라고 부르지 않도록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키고, 좋은 의도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잘못된 행동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킵니다. 또한 감정적인 호의만을 체어리티라고 착각하지 않도록 무엇이 이웃의 참된 선인지를 말씀의 진리가 밝혀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진리가 체어리티를 지키는 목적은 진리가 왕좌에 앉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더 순수하고 지혜롭게 쓰임을 행하도록 섬기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체어리티의 ‘문지기’와 같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날 교회와 개인의 신앙을 살피는 데도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교리가 정확하고 성경 지식이 많으며 신앙고백이 분명한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람을 더 겸손하게 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고, 맡겨진 쓰임을 성실하게 감당하도록 섬기지 않는다면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를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진리를 가볍게 여기는 것도 올바른 질서는 아닙니다. 문지기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문지기가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선을 섬기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며, 선과 진리 모두의 근원과 주인은 오직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72는 가인의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질문에 속뜻으로 매우 분명한 대답을 줍니다. ‘그렇다. 신앙은 체어리티의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인의 교리는 그 질서를 거부했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지배하려 했으며, 그 결과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따라서 이 짧은 번호는 가인과 아벨 이야기 전체의 핵심을 다시 압축합니다. 참된 신앙의 위대함은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로 체어리티를 지키고 섬기며,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되는 데 있습니다.

 

 

 

AC.373, 창4:10, ‘네 아우의 핏소리가 내게 호소하느니라 -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과 죄책의 고발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And he said, What hast thou done? The voice of thy brother’s bloods crieth to me from the ground. (창4:10) AC.373‘네 아우의 피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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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1, 창4:9, ‘퍼셉션에서 양심으로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의 속뜻’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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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창4:9)

 

AC.37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Jehovah said unto Cain)는 것은 체어리티, 곧 ‘아우 아벨’(brother Abel)에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을 의미합니다. 가인의 대답인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으며,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 결과 신앙이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거부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 “Jehovah said unto Cain” signifies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 that gave them a dictate concerning charity or the “brother Abel.” Cain’s reply, “I know not, am I my brother’s keeper?” signifies that faith considered charity as nothing, and was unwilling to be subservient to it, consequently that faith altogether rejected everything of charity. Such did their doctrine become.

 

해설

AC.370은 창4:9의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와 가인의 대답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를 설명합니다. 앞의 창4:6-8에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체어리티와의 올바른 질서를 거부하다가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제 아벨이 죽은 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한 가인에게 아벨의 행방을 묻는 장면이지만, 속뜻에서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신앙에게 다시 ‘체어리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장면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은 앞의 가인과 아벨 이야기를 한 단계 더 깊은 교리적 상태로 끌고 갑니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에 대한 설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체어리티, 곧 아우 아벨에 관하여 그들에게 어떤 딕테이트를 주는, 내면에서 오는 어떤 퍼셉션’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AC.359-360과 함께 읽으면 특히 흥미롭습니다. 거기서는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를 ‘conscience dictated’, 곧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했는데, 여기서는 ‘a certain perceptivity from within’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가인 계열의 내적 경고를 설명하면서 ‘양심’과 ‘퍼셉션’에 관련된 표현을 모두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두 용어의 교리적 구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사랑으로부터 선과 진리를 지각하는 퍼셉션이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에게 특징적인 것은 배운 진리와 선으로부터 형성되는 양심입니다. 그러므로 AC.370의 표현은 가인 계열에게 후대 고대교회의 양심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로 읽기보다, 태고교회의 질서가 크게 훼손된 상태에서도 체어리티에 관하여 내면에서 무엇인가를 알리고 지시하는 퍼셉션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은 이미 죽었습니다. 속뜻으로는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체어리티를 거부했다고 해서 주님께서 즉시 그를 완전히 버리시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내면에서는 여전히 ‘아벨이 어디 있느냐’, 곧 ‘체어리티는 어디에 있느냐’는 딕테이트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모르셔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알 수 있도록 내면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도 주님께서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고 말씀하셨듯이, 체어리티를 실제로 소멸시킨 뒤에도 주님의 말씀은 계속됩니다. 인간의 상태가 변한다고 해서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먼저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인의 대답은 이제 그들의 상태가 얼마나 깊이 굳어졌는지를 보여 줍니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스베덴보리는 이 짧은 대답을 세 단계로 풉니다. 첫째, 신앙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겼습니다.’ 둘째, 신앙은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셋째, 그 결과 신앙은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완전히 거부했습니다.’ 앞의 번호들에서 진행되어 온 가인의 타락이 여기에서 하나의 완성된 교리적 태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구별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신앙을 사랑에서 독립된 것으로 여기면서 둘의 분리가 생겼고,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가 나타났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고, 마침내 아벨을 죽였습니다. 이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왜 아벨을 지켜야 하는가?’라고 말합니다. 체어리티 자체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체어리티에 종속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특별히 주의해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체어리티가 신앙을 억압하거나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열등하여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신앙과 체어리티가 결합될 때 각각의 기능이 온전해진다는 뜻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밝혀 주지만, 그 진리를 사랑하고 실제로 행하게 하는 생명은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다는 것은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며 그것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앞의 AC.361-365에서 스베덴보리가 강조했듯이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신앙은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하며, 체어리티는 신앙을 통하여 자신이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아갑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그 생명의 근원과 주도권은 사랑과 체어리티에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말은 단순한 책임 회피보다 훨씬 깊은 뜻을 갖습니다. 가인은 아벨을 ‘아우’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 서로 완전히 무관한 두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의 문자 자체가 보존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둘은 ‘형제’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이제 ‘내가 그를 지켜야 하는가?’라고 묻습니다. 속뜻으로 읽으면 ‘신앙이 왜 체어리티를 돌보아야 하는가? 신앙이 체어리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는 말이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앙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잃어버립니다. 신앙의 모든 진리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인도하고, 악을 죄로 여겨 피하며, 선을 실제 삶으로 행하게 하기 위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선언한다면 자신에게 생명을 주는 목적과 결합을 거부하는 셈입니다.

 

마지막의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라는 한 문장도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가인이라는 한 개인이 순간적으로 거짓말하고 책임을 회피했다는 심리적 설명에 머물지 않습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의 ‘교리’가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지만, 그것이 반복되고 확증되면서 하나의 교리가 되었습니다. 신앙을 그 자체로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높이고,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낮추며,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신앙에 불필요한 것으로 여기는 체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단지 사람들이 이웃 사랑을 잘 실천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이라는 사실 자체를 교리적으로 거부하기에 이른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교리가 왜 중요한지도 역으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저장된 신학적 문장이 아닙니다. 무엇을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사람의 사랑과 삶의 방향도 영향을 받습니다. 체어리티를 신앙의 생명으로 인정하는 교리는 사람이 ‘내가 믿는 진리가 어떻게 이웃의 선으로 나타나야 하는가?’를 묻게 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를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만드는 교리는 결국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는 태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을 오늘날 특정 교파나 특정 신학적 표어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다루는 것은 신앙이 실제로 사랑과 삶에서 분리되어 체어리티를 무가치한 것으로 만드는 내적 원리입니다. 사람의 실제 영적 상태는 그가 사용하는 교리적 명칭만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사랑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AC.370의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함께 놓으면 더욱 깊은 대비가 나타납니다. 한쪽에서는 내면으로부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퍼셉션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그들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하는 교리를 만들어 냅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내적 딕테이트와 인간이 스스로 확증한 교리가 서로 맞서는 것입니다. 내면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생명임을 알리고 있는데, 인간은 신앙이 체어리티 아래 있기를 거부하는 교리를 세웁니다. 따라서 가인의 문제는 단순히 진리를 몰랐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에 관한 어떤 내적 퍼셉션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거부하고 반대되는 것을 교리로 굳혔다는 데 있습니다.

 

결국 AC.370은 창4:9의 질문을 우리에게도 돌려놓습니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것은 단지 가인에게 죽은 동생의 행방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그 신앙 안에서 체어리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 질문이 됩니다. 우리가 알고 고백하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의 참된 선을 구하게 하는지, 우리의 신앙이 사랑과 자비와 쓰임의 삶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를 돌아보게 합니다. 참된 신앙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 홀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AC.371, 창4:9, ‘퍼셉션에서 양심으로 -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의 속뜻’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창4:9) AC.371‘여호와께서 말씀하심’(speaking of Jehovah)으로 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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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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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AC 글 번호로는 359번에서 369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6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8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6-8)

 

제목은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이며, 다음은 오늘부터 시작하는 ‘3분 요약’입니다. 새로 오신 분들, 그리고 기존 성도 모두를 위한, 지난 2월부터 시작한 이 특별한 주일예배를 위한, 그 흐름과 문맥을 잊지 않기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리딩에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큰 흐름을 잠깐 돌아보겠습니다. 우리는 창세기의 문자적 의미를 존중하면서,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따라 그 속뜻을 함께 읽고 있습니다. 창1에서는 천지창조를 주님께서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거듭남의 과정으로, 창2에서는 에덴동산을 주님의 사랑과 생명 안에 살아가는 천적인 상태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창3에서는 사람이 주님보다 자기 감각과 proprium을 따르면서 그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창4에서는 그 이후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읽고 있습니다. 가인은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나타냅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함께 있어야 할 형제이지만,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그 자체로 중요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의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지난주에는 가인과 아벨의 제물을 읽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제물을 드렸지만 중요한 것은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그 예배가 어디에서 나왔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지만, 사랑의 생명이 없으면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가인은 자기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했고 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지난주 리딩이 끝났습니다.

 

오늘은 그 다음 장면입니다. 아직 가인은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먼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십니다. 오늘은 한 가지를 마음에 두고 읽겠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함께 살아야 할 형제이며,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이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주님께서 어떻게 인간을 부르시는지 함께 읽겠습니다.

 

 

다음은 오늘 리딩 범위인 AC.359-369 요약입니다.

 

 

AC.359-369는 앞의 AC.346-358에서 가인의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그 결과 가인이 분하여 얼굴이 떨어진 뒤, 그러니까 안색이 변한 뒤, 주님께서 아직 그에게 돌이킬 길을 열어 주시는 장면에서 시작, 마침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창4:6-8의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그리고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을 하나씩 풀면서, 스베덴보리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할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체어리티 위에 군림하려 함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이번 구간의 중심은 단순히 ‘가인이 왜 아벨을 죽였는가?’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주도해야 하며, 그 질서가 뒤집힐 때 신앙은 어떻게 자기 생명인 체어리티를 잃게 되는가?’에 있습니다.

 

AC.359-360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라는 말씀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양심이 말해 주었다’(conscience dictated)는 뜻이라고 설명합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이 떨어졌으며,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벨을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바로 그 사이에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악이 실제 행위로 완성되기 전에 주님께서 인간의 내면에 경고하시며 돌이킬 가능성을 열어 두신다는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가인의 상태가 이미 크게 기울어졌어도 주님의 부르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여기서 ‘양심’이라는 표현은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차이를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태고교회의 천적 인간은 퍼셉션으로 인도되었고, 홍수 후 고대교회의 영적 인간은 선과 진리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양심으로 인도되었다고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AC.359-360에서 가인에게 ‘양심이 말해 주었다’고 한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후대 영적 인간과 똑같은 형태의 완성된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미 타락의 길에 들어섰어도 주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딕테이트와 경고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악을 선택하기 전에 끊임없이 선을 향하여 돌이킬 길을 보여 주십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를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지 못하도록 그의 자유를 강제로 빼앗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침묵하신 것도 아닙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하시며 그의 상태를 보여 주시고,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고 경고하시며, 아직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을 강제로 선하게 만드는 방식이 아니라, 자유 가운데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스스로 악에서 돌아서도록 끊임없이 이끄시는 방식으로 역사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이야기는 악이 이미 결정된 운명처럼 진행된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 차례의 경고와 돌이킬 가능성에도 불구, 인간이 점차 체어리티를 거부하는 이야기입니다.

 

AC.361부터는 그 돌이킬 길이 무엇인지 더욱 분명해집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것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함께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것은 선한 의도가 없다면 체어리티가 없고 오히려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매우 뜻밖의 방식으로 풉니다. 여기서 ‘너를 원하는 것’은 체어리티이며,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문제는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둘 사이의 질서에 있습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서로 적대하는 두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교회적 생명을 이루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문제는 가인, 곧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위에 서서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한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창4:7의 깊은 긴장은 ‘신앙이냐 체어리티냐’가 아니라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입니다.

 

AC.362는 이 질서의 전도가 어떻게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여기서 ‘가인’은 이제 단순히 한 사람의 내적 상태가 아니라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하고, 그 결과 사랑의 자손인 체어리티에서도 신앙을 분리하는 하나의 ‘신앙의 교리’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어느 교회에서든 사람들이 신앙의 어떤 한 조항에 지나치게 집중하여 그것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 때 이단이 생길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거짓으로 믿어서 이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한 가지를 전체보다 앞세우고 그것을 중심으로 나머지 모든 것을 재배열하면서 교리의 질서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그 생각을 자신이 발견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거기에 결합하면 문제는 더욱 깊어집니다. 사람은 자기가 특별히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에 마음이 사로잡히면 점차 모든 것이 그것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게 됩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경도, 경험도, 다른 교리도 모두 자기 생각을 확증하는 자료처럼 읽히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틀림없는 진리라고 맹세할 정도가 됩니다. 이것이 AC.362가 보여 주는 가인의 교리가 굳어지는 과정입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사랑 없이 살아감으로써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가 서로 결합하여 그 교리를 더욱 확증했습니다.

 

이 대목은 교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특별히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문제는 교리를 깊이 연구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진리의 한 측면을 전체 질서에서 떼어 내어 가장 중요한 것으로 만들고, 그 지식을 자기의 발견이나 영적 우월성으로 소유하려 할 때 문제가 시작됩니다. 이것은 AC를 읽고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배우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깊은 진리를 안다는 자기 의식을 강화한다면 높은 진리조차 가인의 교리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진리는 언제나 사랑과 체어리티를 섬겨야 합니다.

 

AC.363은 그래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올바른 질서를 매우 명확하게 선언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결합될 수 있지만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에서 ‘선을 행한다’는 것은 속뜻으로 선한 의도를 가지는 것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을 행하는 것은 선을 의도하는 것(from willing what is good)에서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착한 행동 몇 가지를 더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 의지가 선을 향하고 그 선에서 실제 행위가 나오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고대에는 행위와 의지가 하나였다’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을 고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거짓이나 위선을 전혀 몰랐다는 일반적인 역사적 진술로 확대하기보다, 이 문맥에서 다루는 태고교회 사람들의 특유한 내적 상태와 연결하여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태고교회 사람들에게는 의지와 행위가 아직 하나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행위를 보면 그 사람의 의지를 알 수 있었으며, 속마음과 다른 모습을 밖으로 꾸미는 위선이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AC.363의 관심은 당시 인류 전체의 사회사를 설명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서 살펴본 가인의 제물과도 정확히 연결됩니다. 가인에게는 행위가 있었고 예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AC.348-349에서 그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로 설명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지 외적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의지에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선한 의지의 궁극적 근원 역시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을 받아 의지하고 행할 때,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다시 결합되며 그의 얼굴, 곧 내적인 것들도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AC.364에서는 그 반대의 상태가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선한 의도가 없으면 체어리티가 없고, 체어리티가 없는 곳에는 무자비함과 증오가 있으며 그 결과 온갖 악이 들어올 준비를 합니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것은 악이 아직 완전히 들어와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최종 상태라기보다, 마음 문 앞에서 들어오기를 원하며 기다리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가인은 이미 분노했고 얼굴도 떨어졌지만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에는 경고와 함께 아직 돌아설 수 있다는 가능성도 들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죄를 일반적으로 ‘마귀’라고 부르며, 사람이 체어리티를 잃을 때 마귀, 곧 지옥의 무리가 가까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악을 행한 책임을 외부 마귀에게 돌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의 유입에 관한 가르침에서 인간에게 선과 악의 영향이 유입되지만, 인간은 자유 가운데 어느 것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삼을지를 선택합니다. 그러므로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것은 악이 강제로 인간 안으로 들어온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사라진 마음이 악의 유입을 받아들이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AC.364는 그 악을 마음 문에서 몰아내는 길을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하게 제시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더 강한 자기 의지나 더 많은 종교 지식만으로 악을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을 받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악을 몰아내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계속 이어져 온 가인의 문제를 정확히 뒤집습니다. 가인의 문제는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회복의 길 역시 신앙을 더욱 독립적으로 강화하는 데 있지 않고, 신앙이 다시 사랑과 체어리티 안으로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AC.365는 이 관계를 ‘불꽃’과 ‘빛’이라는 아름다운 비유로 설명합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불꽃에는 열과 빛이 함께 있으며, 열과 빛은 모두 불꽃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불꽃의 열이 없는 빛과 같아집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빛’이라고 부릅니다. 겨울에도 빛은 있습니다. 사물을 볼 수도 있고 무엇이 어디 있는지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그 아래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이 ‘겨울의 빛’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성질을 매우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사람에게 성경 지식과 교리적 이해가 있을 수 있고, 상당히 정확하게 진리를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습니다. 반대로 이것이 진리나 신앙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도 아닙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의 빛을 필요로 하며, 진리는 사랑이 어떻게 지혜롭게 이웃을 섬겨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문제는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이 불꽃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존재하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AC.361-365가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신앙을 버리고 체어리티만 가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다시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사랑이 신앙을 지배해야 한다는 단순한 인간 중심적 명제가 아닙니다. 모든 참된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시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이 진리를 통하여 인간의 삶을 이끈다는 뜻입니다.

 

AC.366에서 마침내 창4:8의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에 이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먼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라는 표현이 ‘시간의 간격’을 뜻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아벨의 죽음은 가인의 분노 직후 갑자기 일어난 사건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가인이 분노하고, 얼굴이 떨어지고, 주님의 경고를 받고,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을 들었음에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단계에 이른 것입니다. 가인의 타락은 이번에도 점진적입니다.

 

여기서 아벨을 거듭 ‘아우’, 곧 ‘형제’라고 부르는 것도 중요합니다. 아벨로 표상되는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니라 신앙의 형제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본래 한 교회 안에서 함께 태어나 함께 살아야 하는 두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무관한 적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에게 생명을 주어야 할 형제를 죽였다는 뜻입니다.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순간 신앙은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생명의 근원을 잃게 됩니다.

 

또한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들’이라는 것도 중요합니다. ‘들’은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소멸은 단순히 감정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교리의 ‘들’에서도 일어납니다. AC.362에서 보았듯이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는 생각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고, 그 교리가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낼 때, 바로 그 교리의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교리는 체어리티를 살리는 들이 될 수도 있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들이 될 수도 있습니다.

 

AC.367은 그래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사실을 말씀 전체를 통해 확증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처럼 말씀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형제와 장자권의 이야기를 가져옵니다. 이 이야기들에는 공통적으로 ‘누가 장자인가’, ‘누가 주도권을 가지는가’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 다 교회의 자손이지만,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어느 것이 앞서는 것처럼 보이는가와 궁극적으로 어느 것이 주도해야 하는가 사이에 긴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특히 야곱과 에서의 관계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와 비슷한 문제를 보여 줍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밀어내려 했으며 장자권과 주도권을 차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궁극적으로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지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질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영적 인간의 거듭남 과정에서는 진리와 신앙이 먼저 앞에 서서 사람을 이끄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먼저 말씀을 배우고 무엇이 선인지 알며, 그 진리에 따라 자신을 훈련합니다. 그러나 거듭남이 깊어지면 진리가 선 안으로 들어가고, 마침내 선과 체어리티가 진리를 이끄는 천국의 질서가 세워집니다. 따라서 체어리티의 주도권은 진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본래의 목적 안에 두는 것입니다.

 

AC.367의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하신 눅8:21의 말씀도 같은 질서를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는 ‘듣는 것’을 신앙에, ‘행하는 것’을 체어리티에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은 서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마7에서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따라서 참된 ‘형제 관계’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들은 진리가 체어리티의 삶으로 나타날 때 이루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형제의 언약’은 진리를 듣는 것과 그 진리를 행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삶입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 ‘형제’라는 말의 의미도 새롭게 보여 줍니다. 같은 교리를 고백하고 같은 교회에 속했다고 해서 자동으로 영적 형제 관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초대교회에서 서로를 형제라 부른 깊은 이유는 체어리티에 있었습니다.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고, 말씀을 듣고 행하며, 서로의 쓰임을 위하여 살아갈 때 신앙의 형제 관계가 실제가 됩니다. 따라서 교회의 참된 연합 역시 단순한 교리적 동일성만이 아니라 진리와 체어리티가 함께 살아 있는 데서 이루어집니다.

 

AC.368은 AC.366에서 ‘들’이 교리를 상징한다고 한 것을 말씀의 여러 구절을 통해 더욱 자세히 확증합니다. 씨를 뿌리는 들, 좋은 씨와 가라지가 함께 있는 들, 밭에 감추인 보화 등 말씀에서 ‘들’은 단순한 농경지가 아니라 진리와 선이 심기고 자라며 열매 맺는 교리적 영역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장소가 왜 ‘들’이어야 했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싸움이 바로 교리의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본래 인간을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이유도 결국 그 진리가 삶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교리가 그 목적을 잃고 자기 정당화나 우월성을 위한 체계가 되면, 같은 ‘들’이 오히려 체어리티를 죽이는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리의 참됨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얼마나 정교한가만으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를 살리고, 인간이 실제 선과 쓰임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들’은 생명의 씨앗이 자라는 장소인 동시에, 그 질서가 뒤집히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소가 될 수도 있습니다.

 

AC.369는 지금까지의 설명을 하나로 모아 창4:8의 결론을 밝힙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고, 아벨은 체어리티이며, 둘은 본래 형제이고, 들은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둘 다 교회의 교리 안에서 나왔음에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뜻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체어리티의 소멸이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방식으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먼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세웁니다. 그러면 체어리티는 신앙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구원의 본질은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 자체에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러한 전제가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이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데까지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AC.369는 스베덴보리 당시 기독교의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직접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특정 교파나 종교개혁의 표어를 공격하는 것으로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영적 질서입니다. 실제로 입술로는 ‘사랑이 없는 신앙은 구원하지 못한다’고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구원하는 본질은 오직 신앙이라고 전제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교리와 삶에서 점차 주변으로 밀려날 수 있습니다. 바로 그 내적 모순을 가인의 상태가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59-369 전체를 보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결코 갑작스럽지 않습니다. AC.338에서 시작된 작은 구별이 사랑과 신앙의 분리가 되고, AC.346-358에서 그 분리가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로 나타났으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와 내적인 것들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번 구간에서는 주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주도권을 가지려 하고, 그 질서의 전도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지며, 마침내 교리의 들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 분리 → 죽은 행위 → 죽은 예배 → 분노 → 내적인 것들의 변화 →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하나의 긴 흐름이 창4:8에서 절정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구간에는 심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매우 중요한 자비의 메시지도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여호와께서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하셨고, 죄가 아직 문에 있을 때 경고하셨으며, 선을 행하면 다시 얼굴을 들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악의 길로 상당히 깊이 들어갔어도 주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 선으로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변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상태입니다. 주님의 얼굴은 여전히 인간을 향하고 있지만, 가인은 그 얼굴을 받아들이는 대신 자기 사랑과 분리된 신앙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거듭남의 과정에서도 매우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우리 안에도 어떤 진리를 다른 모든 것보다 높이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고, 내가 옳다는 확신 때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교리를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진리를 변호한다는 이유로 체어리티를 희생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는 말씀과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우리에게도 들려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진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자유를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이웃을 지혜롭게 사랑할 것인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가인의 이야기는 더욱 조심스러운 자기 점검을 요구합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상응을 이해하며 스베덴보리의 아르카나를 많이 배운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 때문에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진리를 안다’는 생각이 자라나고,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을 쉽게 판단하거나 그 안에 있는 선과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게 된다면 바로 우리가 공부하는 ‘교리의 들’에서 아벨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참된 교리는 사람을 높이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하게 하고,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게 하며,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게 하는 진리여야 합니다.

 

결국 AC.359-369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옳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내가 가진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를 묻습니다. 내가 알고 믿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따뜻해지고 있는지, 아니면 많은 빛은 있지만 열이 없는 ‘겨울의 빛’이 되어 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고 자기 형제로 받아들이며, 체어리티 안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이번 AC.359-369는 앞의 AC.346-358에서 나타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결정적인 구간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처음에는 여전히 행위하고 예배하며 진리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가 계속되면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하고, 교리적으로 그 질서를 정당화하며, 마침내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이 과정을 거꾸로 돌리는 일입니다. 진리가 다시 선을 섬기고,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며, 우리가 듣는 말씀을 실제로 행하고,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이 이웃을 향한 쓰임으로 나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결국 우리 안에서 매일 일어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에 관한 말씀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가인과 아벨이 형제로 함께 사는 것입니다. 신앙의 빛이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고, 진리가 선을 섬기며, 아는 것과 원하는 것과 행하는 것이 주님 안에서 점차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거듭남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그 질서가 회복될 때 우리의 신앙은 더 이상 모든 것을 얼어붙게 하는 ‘겨울의 빛’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의 열을 품고 이웃을 살리는 살아 있는 빛이 됩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59,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 양심을 통한 주님의 부르심 (AC.359-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y is thine anger kindled? And why are thy faces fallen? (창4:6) AC.359‘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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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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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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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2, 창4:7,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2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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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3, 창4:7,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3‘가인’(Cain)이라 불린 신앙의 교리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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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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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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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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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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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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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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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61, 창4:7,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1-365)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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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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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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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이어서 성찬 있습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9-06(D1)

 

2667, 4, 창4.4, 2026-09-06(D1)-주일예배(창4,6-8, AC.359-369, 성찬),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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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30, 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한 분 하나님께’, 찬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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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라는 말씀은, 신앙과 체어리티가 둘 다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지라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고,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킬 수밖에 없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경우와 같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하면서도, 바로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그 전제 자체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From this then it follows that the words “Cain rose up against his brother Abel, and slew him,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ogether,” denote that while both faith and charity were from the doctrine of faith, yet faith separate from love could not but disregard and thereby extinguish charity; as is the case at the present day with those who maintain that faith alone saves, without a work of charity, for in this very supposition they extinguish charity, although they know and confess with their lips that faith is not saving unless there is love.

 

해설

AC.369는 앞의 여러 단락에서 하나씩 설명해 온 상응을 창4:8의 한 장면 안에 다시 모아 줍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형제’는 본래 서로 결합되어야 하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들’은 교리, 곧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라는 말씀은 단순히 한 형제가 다른 형제를 죽인 사건을 넘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특별히 눈여겨볼 것은 스베덴보리가 ‘신앙과 체어리티가 둘 다 신앙의 교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처음부터 전혀 관계없는 두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AC.367에서 이미 보았듯이 둘은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형제입니다. 참된 교리 안에는 신앙도 있고 체어리티도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선을 행하는 것은 본래 하나의 교회적 삶 안에서 함께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되어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구원의 원리로 세울 때 시작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먼저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disregard)고 합니다. 처음부터 ‘체어리티는 필요 없다’고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것만이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을 구원의 본질적인 것으로 세우고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는 순간 이미 질서가 뒤집히기 시작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참된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덧붙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신앙에 생명을 주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의 깊은 의미입니다.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것은 단순히 체어리티의 위치를 조금 낮추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로 말미암아 결국 체어리티를 소멸시킨다’고 말합니다.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구원하는 신앙으로 세워지면, 사람이 실제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사는가는 구원의 본질에서 점차 밀려나게 됩니다. 입술로는 사랑과 선한 삶이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교리의 구조 자체가 그것들을 구원의 본질에서 제외한다면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점점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AC.369 후반은 스베덴보리 당시의 기독교를 향한 매우 직접적인 비판으로 이어집니다. 그는 ‘체어리티의 행위가 없어도 오직 신앙만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인의 상태와 연결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비판하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오히려 앞에서 계속 보았듯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이며 둘 다 교회의 자손입니다. 문제는 ‘신앙만으로’라는 분리입니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떼어 내어 그것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만드는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과 분리됩니다.

 

더욱 날카로운 것은 그들이 체어리티의 필요성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들도 ‘사랑이 없으면 신앙이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입술로 고백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교리적으로는 ‘사랑도 중요합니다’, ‘선한 삶도 필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구원은 오직 신앙만으로 받는다’고 전제한다면, 사랑과 체어리티는 결국 구원의 본질 밖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 내적인 모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교파의 교리 문구를 공격하기 위한 설명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은 하나의 역사적 교리 논쟁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려는 영적 경향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나는 오직 신앙만을 주장하지 않으니 가인과 관계없다’고 쉽게 지나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아는 것, 올바른 교리를 고백하는 것, AC의 속뜻을 이해하는 것을 실제 사랑과 삶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한다면 같은 질서의 전도가 우리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많이 알고,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 자체가 영적 생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러한 지식 때문에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높은 진리를 알고 있다고 여기고, 그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실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된다면 바로 그 교리의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높은 진리라 할지라도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지 않고 살립니다. 진리를 알수록 주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더 분명히 보게 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된다면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에게서 생명을 받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배우며, 둘은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됩니다.

 

따라서 AC.369에서 가장 무서운 말은 어쩌면 ‘죽였다’보다 그 앞의 ‘중요하지 않게 여겼다’일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의 소멸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사랑보다 신앙을 조금 더 본질적인 것으로 여기고, 다음에는 체어리티를 신앙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는 체어리티가 없어도 신앙 자체가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AC.338부터 이어져 온 가인의 길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먼저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구별되고, 점차 사랑에서 분리되고, 체어리티 없는 행위와 예배를 낳으며,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고,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소멸시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당신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만을 묻지 않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신앙 안에서 아벨은 살아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내가 믿고 고백하는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 아니면 입술로는 체어리티를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그것을 신앙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참된 신앙은 자기 형제를 죽이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함께 살며,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궁극적인 근원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모든 선과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이십니다.

 

 

 

AC.370, 창4: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 체어리티를 완전히 거부하게 된 신앙’ (AC.370-3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And Jehovah said unto Cain, Where is Abel thy brother? And he said, I know not, am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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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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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

‘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합니다. 예레미야에서,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들에 있는 나의 산아 네 온 영토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네 재산과 네 모든 보물과 산당들로 노략을 당하게 하리니 (렘17:3) O my mountain in the field, I will give thy possessions [facultates] and all thy treasures for a spoil. (Jer. 17:3)

 

여기서 ‘들’(field)은 교리를 상징하고, ‘재산’(possessions)과 ‘보물’(treasures)은 신앙의 영적 부요함, 곧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같은 예레미야에서, In this passage “field” 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 and “treasures” 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레바논의 눈이 어찌 들의 바위를 떠나겠으며 먼 곳에서 흘러내리는 찬물이 어찌 마르겠느냐 (렘18:14) Shall the snow of Lebanon fail from the rock of my field? (Jer. 18:14)

 

신앙의 교리가 없어진 시온에 관해서는 ‘밭같이 갈아엎어질 것’(plowed like a field)이라고 선언합니다(렘26:18; 미3:12). It is declared concerning Zion, when destitute of the doctrine of faith, that she shall be “plowed like a field.” (Jer. 26:18, Micah 3:12)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의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시온은 밭 같이 경작지가 될 것이며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이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렘26:18)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 (미3:12)

 

에스겔에서, In Ezekiel:

 

또 그 땅의 종자를 꺾어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물 가에 심더니 (겔17:5) He took of the seed of the land, and set it in a field of sowing, (Ezek. 17:5)

 

이는 교회와 그 신앙을 다루는 말씀입니다. 교리는 그 안에 씨가 있기 때문에 ‘들’(field)이라 합니다. 같은 에스겔에서,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 “field” from the seed in it. In the same:

 

들의 모든 나무가 나 여호와는 높은 나무를 낮추고 낮은 나무를 높이며 푸른 나무를 말리고 마른 나무를 무성하게 하는 줄 알리라 나 여호와는 말하고 이루느니라 하라 (겔17:24) And let all the trees of the field know that I Jehovah bring down the high tree. (Ezek. 17:24)

 

요엘에서, In Joel:

 

10밭이 황무하고 토지가 마르니 곡식이 떨어지며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도다 11농부들아 너희는 부끄러워할지어다 밭의 소산이 다 없어졌음이로다 12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으니 (욜1:10-12) The field is laid waste, the ground mourneth, for the corn is wasted, the new wine is dried up, the oil languisheth, the husbandmen are ashamed, the harvest of the field is perished, all the trees of the field are withered, (Joel 1:10–12)

 

여기서 ‘들’(field)은 교리를, ‘나무들’(trees)은 지식을, ‘농부들’(husbandmen)은 예배하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시편에서, where the “field” signifies doctrine, “trees” knowledges, and “husbandmen” worshipers. In David: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시96:12) The field shall exult and all that is therein; then shall all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Ps. 96:12)

 

여기서 밭이 즐거워할 수도 없고 숲의 나무들이 노래할 수도 없다는 것은 아주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는 사람 안에 있는 것들, 곧 신앙의 지식들을 뜻합니다. 예레미야에서,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 In Jeremiah:

 

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렘12:4)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4)

 

여기에서도 땅이나 들의 채소가 슬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이 표현들이 황폐함의 상태에 있는 사람 안의 어떤 것들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이 이사야에도 있습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 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사55:12) The mountains and the hills shall break forth before you into singing, and all the trees of the field shall clap their hands. (Isa. 55:12)

 

주님께서도 시대의 완성에 관하여 예언하시면서 신앙의 교리를 ‘들’(field)이라 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 “field:”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마24:40; 눅17:36) Then shall two be in the field, the one shall be taken and the other left, (Matt. 24:40; Luke 17:36)

 

여기서 ‘들’(field)은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신앙의 교리를 뜻합니다. ‘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므로, 신앙의 씨를 받는 것은 사람이든 교회든 세계든 또한 ‘들’(field)이라 합니다. where by a “field” 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 As a “field” 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 “field.”

 

해설

AC.368은 바로 앞 AC.367에서 남겨 둔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확증합니다. AC.367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것을 주로 설명했다면, 이제 AC.368에서는 ‘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씀 여러 곳을 통해 보여 줍니다. 이것은 창4:8의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일이 ‘들’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속뜻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왜 ‘들’이 교리를 상징할까요? AC.368은 그 이유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들은 씨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에스겔의 말씀을 인용한 뒤 스베덴보리는 ‘교리는 그 안에 씨가 있기 때문에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에서 들이 씨를 받아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는 곳이라면, 영적으로 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자라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들=교리’라는 상응은 단순히 임의로 정해진 상징어가 아니라, 씨와 들의 관계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창1에서 살펴본 ‘씨’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사람 안에 심기는 씨와 같고, 그 씨가 받아들여져 자랄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AC.368에서는 바로 그 씨가 있는 곳이라는 점 때문에 교리를 ‘들’이라 합니다. 따라서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정리된 신학 명제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 보존하고, 그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자라도록 하는 밭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예레미야의 ‘들의 나의 산’에 관한 말씀에서 ‘들’은 교리를 상징하고, ‘재산’과 ‘보물’은 신앙의 영적 부요함, 곧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인 재산과 보물의 언어가 말씀의 속뜻에서는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영적인 부요함을 나타낼 수 있음을 봅니다. 교회가 가진 참된 부요함은 건물이나 재산이나 외적인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교리 안에 받아들여지고 보존될 때 교리는 영적 보물을 품은 ‘들’이 됩니다.

 

반대로 교리가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교리가 없어진 시온이 ‘밭같이 갈아엎어질 것’이라는 렘26:18과 미3:12을 인용합니다. 들이 씨와 열매로 풍성할 수도 있고 황무지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교리 역시 참된 진리를 품을 수도 있고 진리를 잃어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들’이라는 상응 자체가 언제나 좋은 교리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368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스베덴보리는 ‘들’이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자동으로 참된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씨를 품는 들이지만, 어떤 씨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리가 있는가 하면, 거짓을 신앙의 진리처럼 체계화하는 교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AC.362에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로 그것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이 ‘들’에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장소 설명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교리의 문제로 들어갔음을 보여 줍니다.

 

요엘의 말씀은 ‘들’의 황폐함을 더욱 풍성한 상응으로 보여 줍니다. ‘밭이 황무하고’, ‘곡식이 진하여’, ‘새 포도주가 말랐고’, ‘기름이 다하였으며’, ‘밭의 모든 나무가 다 시들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들’을 교리, ‘나무들’을 지식, ‘농부들’을 예배하는 사람들로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농경의 황폐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교리와 그 안의 지식들이 생명을 잃고 그것을 가지고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황폐해지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교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단지 몇 가지 신학 명제가 잘못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예배하는가 하는 전체 질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시96:12의 ‘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노래하리로다’라는 말씀과 사55:12의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라는 말씀은 말씀의 속뜻이 왜 필요한지를 매우 알기 쉽게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밭이 실제로 즐거워할 수 없고 나무가 노래하거나 손뼉 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사람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영적 실재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편의 경우 그것을 ‘신앙의 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말씀은 자연계의 사물들을 통하여 인간의 내적인 것과 천국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렘12:4의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른다’는 말씀은 황폐함(vastation)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땅이나 풀이 실제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가 자연계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들’과 그 안의 식물들이 어떤 곳에서는 기뻐하고 노래하며, 다른 곳에서는 마르고 황폐해지는 것은 교리와 지식이 그 안에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시대의 완성에 관하여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밭’을 신앙의 교리라고 설명하면서 특별히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이라고 덧붙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같은 ‘밭’에 있다는 외적 사실만으로 그들의 내적 상태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리에 속해 있고 말씀을 알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영적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삶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68 마지막에는 ‘들’의 의미가 한 단계 더 넓어집니다. 들이 교리를 상징하는 이유가 그 안에 씨가 있기 때문이라면, 신앙의 씨를 받는 것 역시 ‘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든 교회든 세계든 신앙의 씨를 받는 것은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상응의 의미가 단순한 단어 대응보다 훨씬 유기적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들’은 교리를 뜻하지만, 더 넓게는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의 씨가 받아들여지고 자랄 수 있는 수용의 영역까지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마음 역시 주님의 말씀이 심기는 하나의 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지 많은 씨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은 교리를 알고, AC의 많은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다면 바로 그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자기 의와 우월감을 확증하는 수단이 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사랑을 잃게 한다면 진리를 담아야 할 들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장소로 변한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교리는 아벨을 살립니다. 진리가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고, 자기 악을 보게 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교리는 좋은 씨가 자라는 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68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 올바른 교리를 알고 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알고 있는 교리는 내 안에서 무엇을 자라게 하고 있는가?’까지 나아갑니다. 신앙의 들에서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체어리티가 밀려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교리의 궁극적인 쓰임은 그 자체를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AC.369, 창4:8, 가인이 아벨을 죽이다 - 체어리티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 신앙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9그러므로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 그들이 함께 들에 있을 때에’(Cain r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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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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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

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brother)라는 것과, ‘들’(field)이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만큼은 예외입니다.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brother)라는 것은 신앙의 본성 또는 본질 자체로부터 누구에게나 분명합니다. 이 형제 관계는 에서와 야곱으로 표상되었으며, 장자권과 그에 따른 주도권을 둘러싼 그들의 다툼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또한 유다가 다말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창38:28-30), It is unnecessary to confirm these things by similar passages from the Word, except so far as to prove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and that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That charity is the “brother” of faith is evident to everyone from the nature or essence of faith. This brotherhood was represented by Esau and Jacob, and was the ground of their dispute about the birthright and the consequent dominion. It was also represented by Pharez and Zarah, the sons of Tamar by Judah (Gen. 38:28, 29, 30);

 

28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29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30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 (창38:28-30)

 

그리고 에브라임과 므낫세(창48:13-14)로도 표상되었습니다. and by Ephraim and Manasseh (Gen. 48:13, 14);

 

13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14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창48:13-14)

 

이 두 경우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다른 경우들에서도 장자권과 그에 따른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이 있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둘 다 교회의 자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 장 1절의 가인처럼 ‘사람’(man)이라 하고, 체어리티는 사19:2, 렘13:14 및 다른 곳들에서처럼 ‘형제’(brother)라 합니다. and in both of these, as well as in other similar cases, there is a dispute about the primogeniture and the consequent dominion. For both faith and charity are the offspring of the church. Faith is called a “man,” as was Cain, in verse 1 of this chapter, and charity is called a “brother,” as in Isa. 19:2; Jer. 13:14; and other places.

 

내가 애굽인을 격동하여 애굽인을 치리니 그들이 각기 형제를 치며 각기 이웃을 칠 것이요 성읍이 성읍을 치며 나라가 나라를 칠 것이며 (사19:2)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13:14)

 

신앙과 체어리티의 결합은 ‘형제의 언약’(the covenant of brethren)이라 합니다(암1:9). The union of faith and charity is called “the covenant of brethren.” (Amos 1:9)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두로의 서너 가지 죄로 말미암아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그 형제의 계약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로잡은 자를 에돔에 넘겼음이라 (암1:9)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야곱과 에서가 상징하는 것도 가인과 아벨이 상징하는 것과 비슷했습니다. 야곱 역시 자기 형 에서를 밀어내려 했는데, 이는 호세아에서도 분명합니다. Similar to the signification of Cain and Abel was that of Jacob and Esau, as just said; in that Jacob also was desirous of supplanting his brother Esau, as is evident also in Hosea:

 

2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3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호12:2-3) To visit upon Jacob his ways, according to his doings will he recompense him; he supplanted his brother in the womb. (Hos. 12:2–3)

 

그러나 에서, 곧 에서로 표상된 체어리티가 마침내 주도권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아버지 이삭의 예언에서 나타납니다. But that Esau, or the charity represented by Esau, should nevertheless at length have the dominion, appears from the prophetic prediction of their father Isaac: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하였더라 (창27:40) By thy sword shalt thou live, and shalt serve thy brother; and it shall come to pass, when thou hast the dominion, that thou shalt break his yoke from off thy neck. (Gen. 27:40)

 

또는 같은 의미로, 이방인의 교회, 곧 새 교회는 에서로 표상되고 유대교회는 야곱으로 표상됩니다. 이런 이유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이 자주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방인의 교회, 곧 초대교회에서는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형제라 불렀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도 주님께서는 형제라 하십니다(눅8:21). Or what is the same,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new church, is represented by Esau, and the Jewish church is represented by Jacob; and this is the reason for its being so often said that the Jews should acknowledge the gentiles as brethren; and in the church of the gentiles, or primitive church, all were called brethren, from charity. Such as hear the Word and do it are likewise called brethren by the Lord (Luke 8: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시니라 (눅8:21)

 

듣는 사람은 신앙을 가진 사람이고, 행하는 사람은 체어리티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듣기만 하는 사람, 곧 신앙이 있다고 말하면서 행하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해 체어리티가 없는 사람은 형제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하시기 때문입니다(마7:24, 26). those who hear are such as have faith; those who do are such as have charity; but those who hear, or say that they have faith, and do not, or have not charity, are not brethren, for the Lord likens them unto fools (Matt. 7:24, 26).

 

24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6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4, 26)

 

해설

AC.367은 직전 AC.366에서 아벨을 거듭 ‘가인의 아우’, 곧 ‘형제’라고 부른 이유를 말씀 전체의 표상을 통해 확증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은 체어리티를 상징하지만,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적대하는 두 원리가 아닙니다. 둘은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서로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와 아무 관계도 없는 어떤 것을 제거했다는 뜻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형제’라는 표현은 가인과 아벨 이야기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형제 관계가 가인과 아벨에게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에 반복된다고 설명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에서와 야곱입니다. 두 사람은 한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이지만 장자권을 둘러싸고 다툽니다. 야곱은 에서의 장자권을 얻으려 하고 결국 아버지 이삭의 축복까지 대신 받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가족 간의 재산이나 상속 문제로만 보지 않고,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무엇이 먼저이며 무엇이 주도권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 영적 질서의 문제로 읽습니다.

 

이 때문에 AC.367은 에서와 야곱뿐 아니라 다말이 유다에게서 낳은 베레스와 세라, 그리고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까지 언급합니다. 이 이야기들에서도 누가 먼저 태어나며 누가 장자의 위치와 축복을 얻는가 하는 문제가 반복됩니다. 자연적인 관점에서는 단지 가족 계보에서 벌어진 특이한 사건들처럼 보이지만, 스베덴보리에게 말씀에서 반복되는 ‘장자권’과 ‘주도권’의 문제는 교회 안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의 질서와 깊이 연결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모두 교회의 자손이기 때문에, 어느 것이 장자의 자리에 있으며 어느 것이 다른 것을 이끄느냐 하는 문제가 이렇게 여러 형제 이야기를 통해 표상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로 이해하여 ‘체어리티가 먼저 생기고 그다음 신앙이 생긴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홍수 이후의 영적 인간에게서는 사람이 먼저 말씀의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거듭남이 시작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경험상 진리와 신앙이 먼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선이며, 신앙이 궁극적으로 향하는 곳은 체어리티입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진리는 의지 안으로 들어가 선과 결합하고, 마침내 선이 진리를 이끄는 질서가 형성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장자권과 주도권은 단순히 ‘무엇이 시간적으로 먼저 나타났는가?’보다 ‘무엇이 궁극적으로 다른 것에 생명을 주고 그것을 이끄는가?’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AC.367은 바로 앞 AC.365의 설명과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거기서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를 불꽃에, 신앙을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에 비유했습니다. 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오듯이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나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어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려 하면 그것은 불꽃의 열이 없는 ‘겨울의 빛’과 같아집니다. 빛은 있으나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이 없기 때문에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습니다. AC.367에서 반복되는 장자권의 다툼도 결국 이와 같은 질서의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야곱과 에서가 가인과 아벨과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야곱 역시 자기 형 에서를 밀어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호12:2-3을 인용하여 야곱이 모태에서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다는 말씀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야곱이 영원히 에서를 지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삭의 예언에는 에서가 마침내 그 멍에를 자기 목에서 떨쳐버릴 것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에서로 표상되는 체어리티가 마침내 주도권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읽습니다. 신앙이 먼저 앞에 서고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 두려 할 수 있지만, 주님의 질서에서는 결국 체어리티가 신앙을 이끄는 위치에 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에서를 ‘이방인의 교회, 곧 새 교회’, 야곱을 ‘유대교회’와 연결합니다. 이것 역시 단순히 어느 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씀 안에서 이방인들은 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를 표상하는 경우가 있고, 유대교회는 진리와 교회의 외적인 것들을 맡아 보존한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형제’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씀들이 나오며, 초대교회에서도 사람들을 체어리티로 말미암아 ‘형제’라 불렀다고 스베덴보리는 설명합니다. 교회의 참된 형제 관계는 단순히 같은 조직에 속하거나 같은 교리 문장을 말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 안에서 서로 결합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AC.367의 마지막에서 주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등장하면서 이 모든 설명이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로 들어옵니다. 주님께서는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눅8:21).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듣는 것’을 신앙과, ‘행하는 것’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말씀을 듣고 진리라고 인정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들은 말씀이 삶으로 들어가 행함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형제가 된다는 것은 바로 진리를 듣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사는 것이 하나의 삶 안에서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7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고, 듣고도 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것은 행위로 신앙의 공로를 보충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63에서 이미 보았듯이 참된 ‘행함’은 단순한 외적 행동이 아니라 선을 의도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선의 궁극적인 근원은 사람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한다’는 것은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가 체어리티가 되어 의지와 삶 안에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형제’라는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아벨은 가인의 경쟁자가 아니었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앞의 AC.361과 AC.365에서 보았듯이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도 체어리티도 모두 교회의 자손이며, 둘이 결합할 때 비로소 살아 있는 교회가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자기 형제인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그 위에 서서 주도권을 가지려 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질서가 끝까지 진행되었을 때 가인은 마침내 자기 형제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AC.367은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여러 형제 이야기를 설명하는 단락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 에서와 야곱, 베레스와 세라,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관통하는 하나의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내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로 함께 살고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 체어리티를 밀어내고 그 위에 서려 하는가?’ 많은 진리를 알고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신앙은 자기 형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습니다. 체어리티 안에서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의 인도를 받아 삶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형제’라 하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AC.367의 중심입니다.

 

 

 

AC.368, 창4:8, ‘들’은 왜 교리를 상징하는가? - 신앙의 씨가 뿌려지는 곳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따라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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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 (AC.366-369)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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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창4:8)

 

AC.366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고’(Cain spake to Abel)는 시간의 간격을 상징합니다. ‘가인’(Cain)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을, ‘아벨’(Abel)은 신앙의 형제인 체어리티를 상징하며, 이런 이유로 여기서는 아벨을 두 번이나 가인의 ‘아우’(brother)라고 부릅니다. ‘들’(field)은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합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는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상징합니다. “Cain spake to Abel” signifies an interval of time. “Cain,” as before stated, signifies faith separated from love; and “Abel” charity, the brother of faith, on which account he is here twice called his “brother.” A “field” signifies whatever is of doctrine.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and slew him” signifies that separated faith extinguished charity.

 

해설

AC.366에서 마침내 창4의 결정적인 사건, 곧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장면에 이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AC.338부터 이어진 설명을 따라왔다면, 이 사건이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 안에서 살아 있던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기 시작했고, 그 구별이 점차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나왔습니다. 이어 체어리티가 떠나면서 가인의 분노가 일어나고 안색이 변했으며, 마침내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주도권을 가지려 했습니다. 이제 그 과정의 마지막 단계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는 말씀으로 나타납니다. 곧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킨 것’입니다.

 

먼저 매우 흥미로운 것은 ‘가인이 아벨에게 말하였고’(Cain spake to Abel)를 스베덴보리가 ‘시간의 간격’(an interval of time)이라고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개역개정 창4:8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라고 되어 있지만, 무엇을 말했는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도 여기서 그 대화의 내용을 추측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표현이 하나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넘어가기까지 일정한 시간이 있었음을 나타낸다고 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흐름에서 상당히 중요합니다. 가인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상태에 즉시 도달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AC.346에서는 이미 ‘세월이 지난 후에’가 시간의 진행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AC.359-365에서는 가인이 분노하고 안색이 변한 뒤에도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며, 선을 행하면 얼굴을 들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경고하십니다. 체어리티 역시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죽음은 최초의 작은 구별이 생긴 바로 그 순간 일어난 일이 아니라, 신앙이 사랑과 체어리티로부터 점차 멀어져 마침내 그것을 완전히 배척하기에 이른 결과입니다.

 

이 점은 영적으로도 중요합니다. 인간의 내면에서 어떤 악이 완성되는 과정 역시 대개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하나의 생각이나 애정으로 나타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확증하면서 점차 의지의 일부가 되며, 마침내 삶으로 굳어집니다. 물론 AC.366 자체가 이러한 거듭남의 심리적 단계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은 아니므로 지나치게 확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가인의 상태가 시간의 진행을 거쳐 아벨을 소멸시키는 단계까지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음으로 스베덴보리는 다시 ‘가인’과 ‘아벨’의 의미를 확인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faith separated from love)이고, 아벨은 ‘신앙의 형제인 체어리티’(charity, the brother of faith)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표현은 ‘신앙의 형제’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 때문에 이 절에서 아벨을 두 번이나 가인의 ‘아우’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 AC.361-365와 매우 깊이 연결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아벨은 가인의 적이 아니라 ‘아우’입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할 때, 비로소 참된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신앙이 자기의 적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본래 자기와 하나를 이루어야 할 ‘형제’를 제거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이 사건의 비극성이 있습니다.

 

더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체어리티가 사라지면, 신앙 자체도 결국 생명을 잃습니다. AC.365의 비유를 빌리면,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것은 빛이 자기에게 생명을 주는 불꽃의 열을 제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빛은 잠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교리도 있고, 종교적 지식도 있고, 예배도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겨울의 빛’입니다. 체어리티라는 열이 사라졌으므로 그 안에서는 결국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그리고 AC.366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중요한 상응이 ‘들’(field)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들은 교리에 속한 모든 것(whatever is of doctrine)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아무 곳에서나 일어난 것이 아니라 ‘들’에서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속뜻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충돌이 바로 ‘교리에 속한 것들’ 가운데서 일어난 것입니다.

 

이 대목은 앞의 AC.362를 떠올리게 합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어떤 것을 붙잡아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그들을 부풀게 하자 모든 것이 자기 생각과 일치하고 그것을 확증하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의 교리적 입장이 삶의 질서를 뒤집었습니다. 이제 AC.366에서는 바로 그 교리의 영역인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입니다.

 

그러므로 ‘들’은 교리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리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는 교리 안에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어떻게 세워져 있느냐입니다. 교리가 신앙을 체어리티와 결합시키고, 진리를 선으로 인도하며, 사람을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끈다면 그 교리는 생명을 섬깁니다. 그러나 교리가 신앙을 사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무엇을 믿느냐’를 ‘어떻게 사느냐’와 떼어 놓으며,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면 바로 그 ‘들’에서 아벨이 죽을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가인의 이야기는 교회의 역사에서도 반복될 수 있고, 개인의 신앙생활에서도 반복될 수 있습니다. 어떤 교리적 문제를 붙들고 그것이 너무 중요해진 나머지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이웃을 미워하고, 정죄하고, 체어리티를 버린다면 외적으로는 ‘진리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내적으로는 가인이 아벨을 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진리가 체어리티와 분리될 때 진리의 올바른 질서가 무너진다는 뜻입니다.

 

특히 앞서 AC.362에서 살펴본 ‘이단’의 형성과 연결하면 더욱 선명합니다. 이단은 반드시 처음부터 완전한 거짓을 선택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신앙 항목을 전체보다 앞세워 ‘주된 것’으로 만드는 데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이 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마침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이 들에서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죽였다는 이야기를 넘어, 교리 안에서 신앙이 체어리티를 배제하는 비극적인 교회적 상태를 묘사합니다.

 

여기서 ‘소멸시켰다’(extinguished)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체어리티가 약해졌다거나 뒤로 밀려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고 합니다. 이것은 가인의 상태가 이제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AC.361에서는 체어리티가 아직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AC.364에서는 죄가 아직 ‘문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AC.366에서는 그 문턱을 넘어섭니다. 체어리티를 지배하려던 신앙이 마침내 체어리티를 제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59-366의 흐름은 매우 엄중합니다. 얼굴이 떨어졌을 때, 곧 안색이 변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죄가 문에 있을 때에도 경고하셨습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했습니다. 아직 돌아설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계속 자기의 주도권을 고집하면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갑니다. 악은 처음부터 완성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여 받아들이고 확증할수록 점차 자기 것이 되고 결국 삶의 질서 자체를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앞서 우리가 살펴본 ‘가인의 진행 과정’이 이제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이 하나의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 구별 자체가 곧 악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을 ‘그 자체로 어떤 것’으로 여기면서 사랑으로부터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체어리티 없는 행위가 나타났고,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나타났으며, 체어리티가 떠나자 분노와 내적 상태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어 신앙은 체어리티보다 위에 서려고 했고, 자기 사랑과 환상으로 자신의 입장을 확증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교리의 ‘들’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킵니다.

 

‘구별 → 분리 → 죽은 행위 → 죽은 예배 → 분노와 내적 상태의 변화 → 체어리티에 대한 지배 → 체어리티의 소멸.’

 

이 흐름을 보면 왜 처음의 ‘구별’과 이후의 ‘분리’를 정확히 구별해야 하는지도 다시 분명해집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구별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진리에 속하고, 체어리티는 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별된 것이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지면서 하나의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눈의 빛과 몸의 열이 다르다고 해서 생명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읽어 온 창4의 속뜻을 매우 실제적인 질문으로 돌려놓습니다. ‘나는 가인인가, 아벨인가?’라고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누어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안의 신앙이 체어리티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진리가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끌고 있는지, 아니면 그 진리를 가지고 이웃을 판단하고 있는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교리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더욱 살아 있게 하는지, 아니면 그 교리를 지키기 위해 체어리티를 희생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를 읽는 우리에게 이 말씀은 더욱 조심스럽게 다가옵니다. 말씀의 속뜻을 알고, 기존의 성경 해석과 다른 깊은 의미를 발견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가인의 위험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것을 알고, 저 사람들은 모른다’는 자기 사랑이 들어오면, 매우 높은 진리조차 겨울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진리를 가지고 다른 교회나 다른 그리스도인을 낮추고 체어리티를 잃는다면,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바로 그 일을 우리 안에서 반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리는 언제나 아벨을 살려야 합니다. 진리는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무기가 아니라 체어리티가 더욱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비추는 빛이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함께 주님의 뜻을 이루는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둘이 올바른 질서 안에서 하나가 될 때, 신앙은 더 이상 겨울의 빛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따뜻한 빛이 됩니다.

 

결국 AC.366에서 아벨의 죽음은 육체적인 죽음의 장면을 넘어 ‘체어리티가 교회 안에서 소멸되는 상태’를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떼어내고, 신앙을 사랑보다 높이며, 그 신앙을 자기 사랑으로 확증하는 작은 질서의 전도가 계속될 때, 마침내 일어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인에게 미리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아직 죄가 문에 있을 때, 아직 아벨이 살아 있을 때, 아직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고 있을 때, 돌아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AC.366은 지금까지의 가인 이야기에 하나의 무거운 마침표를 찍습니다.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였다’는 것은 결국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체어리티를 잃으면 체어리티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AC.365에서 보았듯이 신앙 자신도 생명의 열을 잃습니다. 아벨을 죽인 가인은 결국 자기 신앙의 생명까지 죽이는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AC.367, 창4:8, 신앙과 체어리티는 형제입니다 - 장자권과 주도권의 속뜻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7이러한 것들은 말씀의 비슷한 구절들로 확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체어리티가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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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5, 창4:7,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겨울의 빛과 같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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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5

셋째로,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고 하였는데, 이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뜻하며, 이것은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것(the principal of faith)이기 때문인데, 이는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꽃은 열과 빛의 본질적인 것으로, 열과 빛은 불꽃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리된 상태의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빛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빛은 있지만 그것은 겨울의 빛이며,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게 됩니다. In the third place it is said, “Un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by which is signified that charity is desirous to abide with faith, but cannot do so because faith wishes to rule over it, which is contrary to order. So long as faith seeks to have the dominion, it is not faith, and only becomes faith when charity rules; for charity is the principal of faith, as was shown above. Charity may be compared to flame, which is the essential of heat and light, for heat and light are from it; and faith in a state of separation may be compared to light that is without the heat of flame, when indeed there is light, but it is the light of winter in which everything becomes torpid and dies.

 

해설

AC.365는 창4:7의 마지막 말씀,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의 속뜻을 본격적으로 설명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매우 선명하게 결론짓습니다. 앞의 AC.361에서는 이 말씀이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개괄했고, AC.363에서는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며,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까지 말합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과 아벨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선언입니다.

 

먼저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에 해당하는 ‘Unto thee is his desire’를 스베덴보리는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머물기를 원하는 것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에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담겨 있습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밀어내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 하지도 않고 신앙과 경쟁하려 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본래 신앙과 체어리티는 서로 분리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엇이 참되고 선한지를 가르치고, 체어리티는 그 진리를 사랑하고 삶으로 행하게 합니다. 둘은 한 생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문제는 가인이 그 관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는 말씀을 스베덴보리는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는 상태로 읽습니다. 여기서 가인의 근본적인 질서 전도가 드러납니다. 가인은 체어리티 자체가 필요 없다고 처음부터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를 인정하되 그것을 신앙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신앙을 첫째로 세우고, 사랑과 체어리티를 그 뒤에 따라오는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것이 ‘질서에 어긋난다’(contrary to order)고 단언합니다.

 

이 ‘질서’가 무엇인지는 앞의 글들을 통해 이미 드러났습니다. 사랑에서 체어리티가 나오고, 체어리티 안에서 신앙이 생명을 얻습니다. AC.362에서는 체어리티를 ‘사랑의 자손’(the offspring of love)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는 ‘사랑 → 체어리티 → 살아 있는 신앙’입니다. 신앙이 이 질서에서 벗어나 자기 스스로 첫째가 되려 하면 그 순간 신앙은 자기 생명의 근원에서 떨어져 나갑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길입니다.

 

그래서 AC.365의 ‘신앙이 주도권을 가지려 하는 동안에는 신앙이 아니다’라는 표현은 매우 강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신앙은 조금 부족한 신앙이다’라거나 ‘불완전한 신앙이다’라고 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아니다’(it is not faith)라고 합니다. 그리고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 비로소 신앙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 신앙의 정체성이 단순히 어떤 교리를 참이라고 인정하는 데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체어리티를 섬기는 진리라야 비로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여기서 ‘체어리티는 신앙의 본질적인 것(the principal of faith)’이라는 표현도 중요합니다. ‘principal’을 단순히 ‘중요한 요소’ 정도로 이해하면 약합니다. 체어리티는 신앙에 부가되는 여러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하나라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중심적이고 본질적인 것입니다. 따라서 체어리티를 제거하고도 신앙 자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가인의 오류입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이름은 신앙일 수 있어도 그 안에 신앙의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추상적인 설명을 스베덴보리는 아주 아름다운 자연의 비유로 풀어냅니다. ‘체어리티는 불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불꽃에서 열과 빛이 나옵니다. 여기서 불꽃은 근원이며, 열과 빛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불꽃에서 열을 떼어내고 빛만 남긴다면 겉으로는 여전히 밝아 보일 수 있지만, 생명을 살리는 따뜻함은 사라집니다.

 

이 비유에서 체어리티와 신앙의 관계가 아주 선명해집니다. 체어리티는 불꽃과 같고, 신앙은 그 불꽃에서 나오는 빛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에는 빛이 있습니다. 진리를 보고 이해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빛이 살아 있는 빛이 되려면 불꽃의 열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곧 진리를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이해하는 것과 그 진리에 따라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불꽃의 열이 없는 빛’과 같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그런 상태에도 ‘실제로 빛은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분리된 신앙이라고 해서 아무런 진리도 없고,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알 수도 있고, 교리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도 있으며, 매우 논리적인 신학 체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빛은 있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빛에 열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겨울의 빛’(the light of winter)이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가인의 신앙을 설명하는 데 대단히 적절합니다. 겨울에도 태양은 빛납니다. 사물을 볼 수도 있고 길을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에는 생명을 일으키는 따뜻함이 없습니다. 땅은 얼어 있고 나무는 굳어 있으며 씨앗은 싹트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굳어지고 죽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48-349와도 놀랍도록 정확하게 연결됩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죽은 행위’였고, 내적인 것이 없는 외적 예배는 ‘죽은 예배’였습니다. 이제 AC.365에서는 왜 그것들이 죽을 수밖에 없는지를 ‘겨울의 빛’으로 보여 줍니다. 빛은 있는데 열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지식과 교리는 있는데 체어리티의 사랑이 없습니다. 그러니 행위에도 생명이 없고 예배에도 생명이 없습니다.

 

이 비유를 조금 더 깊이 보면 ‘빛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겨울의 문제는 빛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열이 없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베덴보리는 신앙이나 진리, 교리를 낮추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들이 본래의 생명을 되찾기를 원합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면 겨울의 빛은 생명을 살리는 빛이 됩니다. 진리가 사랑과 결합하고, 이해가 의지와 결합하며, 아는 것이 삶과 결합될 때 신앙은 비로소 본래의 기능을 합니다.

 

따라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말도 ‘사랑만 있으면 진리는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불꽃에는 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빛도 있습니다. 참된 체어리티는 진리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리와 함께 있습니다. 선은 진리를 통하여 어떻게 선을 행해야 하는지를 알고, 진리는 선 안에서 생명을 얻습니다. 문제는 둘 가운데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올바른 질서 안에서 결합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에서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AC.362의 이단에 관한 설명도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이라는 참된 것을 붙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의 참된 것을 질서 밖으로 끌어내어 첫째 자리에 놓자, 그 진리 자체가 생명의 근원에서 분리되었습니다. 빛을 붙잡았지만, 불꽃에서 떼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환상이 그 빛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밝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점점 더 추운 겨울의 빛이 되어 갔습니다.

 

이 점은 오늘날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빛’을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교리를 공부하고, AC를 읽고, 상응과 속뜻을 이해하고, 신학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상당히 정확하게 분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빛 때문에 이웃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을 판단하고 낮추며,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미워하게 된다면 그 빛에는 열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밝아 보여도 그것은 ‘겨울의 빛’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체어리티가 주도한다는 것은 진리를 적게 알고 대충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깊이 진리를 배우되 ‘이 진리가 나를 어떻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끄는가?’를 끊임없이 묻는 것입니다. AC를 읽는 목적도 AC에 관한 지식을 많이 축적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됩니다. 그 진리를 통하여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며, 실제 삶에서 더 선한 쓰임을 행하게 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진리의 빛에는 체어리티의 열이 함께 있게 됩니다.

 

이제 AC.361-365 전체를 돌아보면 흐름이 아주 선명해졌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은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고, 자기 사랑으로 그것을 확증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체어리티가 주도하는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마음의 문 앞에 있게 되지만,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 악을 물리칩니다. 그리고 이제 AC.365에서는 체어리티가 주도할 때에야 신앙이 참으로 신앙이 된다고 결론짓습니다.

 

그래서 가인과 아벨의 문제는 결국 ‘신앙이냐 체어리티냐’의 양자택일이 아닙니다. ‘신앙과 체어리티가 어떤 질서로 결합되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아벨은 가인을 없애려 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 위에 서려고 할 때 둘의 결합은 깨집니다. 그리고 그 결합이 깨지면 신앙은 불꽃에서 떨어져 나온 겨울의 빛처럼 되어, 결국 그 안의 모든 것을 굳게 하고 죽게 합니다.

 

그러므로 AC.365의 겨울빛 비유는 창4의 가인 이야기를 아주 간결하게 압축합니다. ‘빛이 있는가?’만 물어서는 안 됩니다. ‘그 빛에 열이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그 진리가 내 안에서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따뜻함으로 살아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체어리티의 불꽃에서 나오는 빛이라야 살아 있는 신앙의 빛이기 때문입니다.  

 

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 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5.심화 1. 왜 신앙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주도해야 하는가? - 겨울의 빛과 살아 있는 신앙 AC.361-365를 따라오면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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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6, 창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죽이다 -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다’(AC.366-3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And Cain spake to Abel his brother; and it came to pass when they were in the field, that Cain rose up against Abel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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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4, 창4:7,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 악을 물리치는 것은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7) AC.364 둘째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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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If thou doest well, is there not an uplifting? And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and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창4:7)

 

AC.361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에서 ‘낯을 듦’은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체어리티가 네게 있음을 상징합니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는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체어리티가 없고, 오히려 악이 있음을 상징합니다.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는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네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 있을 수 없음을 상징합니다. “If thou doest well, an uplifting” signifies that if thou art well disposed, thou hast charity; “if thou doest not well, sin lieth at the door” signifies that if thou art not well disposed, thou hast no charity, but evil. “To thee is his desire, and thou rulest over him” signifies that charity is desirous to be with thee, but cannot because thou desirest to rule over it.

 

해설

AC.361은 창4:7의 속뜻을 한 문장 안에 압축하여 제시하는 개요입니다. 그런데 이 절은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상당히 익숙합니다. ‘선을 행하면 낯을 들 것이고, 선을 행하지 않으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으며, 죄가 너를 원하지만 너는 죄를 다스려야 한다’는 일종의 도덕적 권면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가인과 아벨, 곧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에 관한 말씀으로 읽습니다. 특히 마지막의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를 죄와 인간의 싸움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함께할 수 없는 상태’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네가 선을 행하면’에 해당하는 ‘if thou doest well’을 스베덴보리는 단순히 외적으로 착한 일을 한다는 뜻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설명은 ‘if thou art well disposed’, 곧 ‘네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더 정확하게는 내적 성향과 애정이 선을 향하고 있다면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다시 앞의 AC.346-358과 연결됩니다. 가인도 행위가 있었고, 제물도 드렸습니다. 문제는 외적 행위의 유무가 아니라 그 행위가 어떤 내적인 것에서 나오는가였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라야 살아 있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행한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으로 옳은 행동을 하는 것보다 그 행위의 내적 근원인 체어리티가 그 사람 안에 있다는 뜻입니다.

 

이때 ‘an uplifting’, 곧 ‘들어 올림’은 바로 앞의 ‘얼굴이 떨어졌다’와 정반대입니다. AC.358에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짐’은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한 것을 뜻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들어 올림’은 그 반대 상태입니다. 선한 애정이 있고, 체어리티가 있다면 얼굴이 다시 들립니다. 이것은 단순히 ‘떳떳하게 고개를 들 수 있다’는 심리적 표현을 넘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다시 올바른 질서에 놓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창4:6-7에는 아주 아름다운 대조가 있습니다.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네가 선을 행하면 들어 올림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미 떨어진 얼굴도 다시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은 아직 돌이킬 수 있습니다. 체어리티로 돌아온다면 그의 내적인 것들도 회복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 두시는 말씀입니다.

 

반대로 ‘네가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는 체어리티가 없으면 악이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도 스베덴보리는 선과 악의 기준을 체어리티와 연결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자리를 중립 상태가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악이 차지합니다. 이것은 가인에게 특히 중요합니다. 그는 ‘신앙이 있기 때문에 체어리티는 없어도 된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러한 중간지대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체어리티가 없으면서도 신앙만으로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자리는 없습니다. 체어리티를 배제하면, 결국 악이 ‘문에’ 놓이게 됩니다.

 

‘문’이라는 표현도 이후 AC에서 더 자세히 풀리겠지만, 이 개요만 보더라도 아직 악이 완전히 실행된 상태라기보다 바로 들어오려는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강합니다. 실제 이야기에서도 가인은 아직 아벨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분노가 일어났고 내적인 것들이 변했지만, 체어리티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행위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악이 ‘문에’ 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AC.359-361은 주님께서 악이 완전히 행위가 되기 전에 인간에게 경고하시고 돌이킬 길을 열어 두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AC.361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마지막입니다. 개역개정의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를 우리는 자연스럽게 ‘죄가 너를 지배하려 하지만 네가 죄를 이겨야 한다’는 뜻으로 읽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속뜻에서 전혀 다른 장면을 봅니다. 여기서 ‘그’는 체어리티를 가리키며, ‘그의 소원은 네게 있다’는 것은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앞의 아벨과 가인의 관계를 생각하면 매우 깊은 뜻이 됩니다. 아벨, 곧 체어리티는 가인, 곧 신앙을 버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다시 말하면 문제는 체어리티가 신앙을 배척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체어리티와 신앙은 본래 함께 있어야 하는 ‘형제’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통하여 생명을 얻고, 체어리티는 신앙의 진리를 통하여 무엇이 선인지 알고 행합니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질서에서는 둘이 서로 분리될 이유가 없습니다.

 

문제는 이어지는 ‘너는 그를 다스릴지니라’에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네가 체어리티를 지배하려 하기 때문에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풀이합니다. 여기서 ‘너’, 곧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체어리티와 함께 있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자기 아래에 두려 합니다. ‘신앙이 먼저이고, 체어리티는 그 신앙에 종속되어야 한다’, ‘교리를 올바르게 믿는 것이 본질이고, 사랑과 삶은 그다음이다’라는 질서입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단순한 ‘분리’보다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완전히 없애기 전에 먼저 그것을 ‘지배’하려 합니다. 체어리티를 신앙 아래에 놓고 신앙이 주인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에게 이것은 질서의 전도입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지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를 섬기고 체어리티로 인도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가 앞서 AC.342-344에서 보았듯이 신앙의 목적은 체어리티입니다. 목적이 수단을 지배해야지 수단이 목적을 지배해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서 AC.361은 앞으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을 이해하는 결정적인 열쇠가 됩니다. 아벨 살해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사랑으로부터 구별됩니다. 그다음 신앙이 사랑에서 분리됩니다. 이어서 분리된 신앙에서 죽은 행위와 죽은 예배가 생깁니다.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고 자기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합니다. 그리고 이제 체어리티가 자신과 함께 있기를 원함에도 그것을 자기 아래에 두고 지배하려 합니다. 그 지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다음 단계에서 마침내 아벨을 죽입니다. 즉 체어리티 자체를 소멸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라는 말씀은 생각보다 매우 애틋한 표현입니다. 아벨은 아직 가인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체어리티는 여전히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께서도 가인에게 말씀하시며, 돌아올 길을 열어 두십니다. 문제는 가인이 체어리티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 ‘위에’ 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둘러싼 창4 전체의 비극이 응축됩니다.

 

오늘날의 신앙생활에도 이 말씀은 매우 직접적입니다. 우리는 체어리티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가인의 질서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랑도 중요하지요. 선행도 해야지요.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믿는 교리가 옳다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사랑과 삶을 교리 아래의 부속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베덴보리의 관점에서 참된 질서는 그 반대입니다. 진리는 선을 위하여 있고, 신앙은 체어리티를 위하여 있으며, 우리가 아는 것은 결국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고 살아갈 것인가를 섬기기 위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AC.361의 핵심은 ‘선을 행하라’는 단순한 도덕 명령보다 훨씬 깊습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에게 본래의 질서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애정을 회복하여 체어리티가 다시 있게 하라. 그러면 떨어진 얼굴이 들릴 것이다. 체어리티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니 그것을 지배하려 하지 말라.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 하지 말고, 다시 체어리티와 하나가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가인에게 주어진 마지막 회복의 초대처럼 읽힙니다. 아직 아벨은 살아 있습니다. 아직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아직 죄는 ‘문에’ 있을 뿐입니다. 아직 떨어진 얼굴은 다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때 여호와께서 말씀하십니다. 이후의 비극을 알고 있는 우리는 그래서 이 구절을 더욱 무겁게 읽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가인이 아벨을 죽이기 전에 이미 그에게 체어리티로 돌아갈 길을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AC.362, 창4:6,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가인의 교리’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2 여기서는 ‘가인’(Cain)이라 하는 신앙의 교리가 묘사됩니다. 이 교리는 신앙을 사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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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60, 창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 다시 확인되는 양심의 딕테이트’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4:6) AC.360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Jehovah said unto Cain)가 양심이 말해 주었음을 뜻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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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2026/08/30)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1, ‘홀로 한 분 하나님께’, 찬91, ‘슬픈 마음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두 번째, 3절로 5절, AC 글 번호로는 346번에서 358번입니다. 먼저 본문입니다.

 

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3-5)

 

제목은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

 

이며, 다음은 오늘 범위인 AC.346-358 요약입니다.

 

AC.346-358은 앞의 AC.338-345에서 밝혀진 ‘가인’과 ‘아벨’, 곧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이제 실제 ‘행위와 예배’에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보여 줍니다. 창4:3-5의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드리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으며,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는 말씀을 하나씩 풀면서, 스베덴보리는 예배의 참된 성질이 외적인 형식이나 제물 자체에 있지 않고 그것이 어떤 내적 사랑에서 나오는가에 있음을 밝힙니다. 그리고 그 차이가 마침내 가인의 ‘분함’과 ‘안색이 변함’으로 이어지면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인간의 내적인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46-347에서 먼저 주목할 것은 ‘세월이 지난 후에’, 원문으로는 ‘날들의 끝에’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연적인 시간이 흘렀다는 것만이 아니라, 앞에서 시작된 가인의 분리가 점차 진행되어 이제 그 결과가 행위와 예배로 나타날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스베덴보리는 가인으로 표상된 교리가 처음부터 완전히 타락해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처음에는 ‘단순함’이 있었고, 신앙도 후대처럼 사랑에서 멀리 분리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처음의 작은 구별이 점차 분리가 되고, 그 분리가 굳어져 하나의 교리와 삶의 방식이 됩니다. 이것은 참된 교리도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상태에 따라 본래의 사랑과 목적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중요한 경고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타락이라기보다 점진적인 과정입니다. 처음에는 사랑 안에 있던 신앙을 ‘그 자체로 하나의 것’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앙은 사랑 없이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여기게 되고, 마침내 그 신앙으로부터 행위와 예배까지 만들어 냅니다. 이 흐름은 ‘내적 분리에서 행위로, 행위에서 예배로’ 이어집니다. 그래서 AC.346의 가인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땅을 경작하고, 소산을 거두며, 심지어 그것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립니다. 문제는 종교적 행위가 없다는 데 있지 않고, 그 행위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체어리티가 그 안에 없다는 데 있습니다.

 

AC.348은 이것을 ‘땅의 소산’이라는 표현을 통해 더욱 깊이 설명합니다. ‘땅의 소산’은 여기서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하며,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행위를 ‘죽은 행위’라고 부릅니다. 체어리티 없는 신앙도 얼마든지 외적인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배하고, 봉사하고, 헌금하고, 종교적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직 겉 사람에게만 속하고 속 사람의 사랑과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영적인 생명은 없습니다. 그래서 렘12장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라는 말씀이 가인의 상태를 잘 보여 줍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가까이하고 외적으로는 열매까지 맺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행위의 뿌리가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뿌리와 열매’의 관계가 매우 중요합니다. 행위는 그 사람의 내적인 사랑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외적으로 무엇을 했느냐만으로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같은 봉사와 헌신이라도 자기 의와 명예, 인정과 보상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따라 전혀 다른 열매가 됩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37:31의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를 인용하면서 ‘위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살아 있는 행위는 속 사람 안에 주님께서 심으신 선이 겉 사람의 실제 삶과 쓰임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AC.349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외적인 예배와 내적인 예배의 관계를 밝힙니다. 외적인 것은 그 자체로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라 내적인 것들로부터 생명을 얻으며, 궁극적으로는 그 내적인 것들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제사나 기도나 찬송이나 예배라는 외적인 형식 자체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사랑과 체어리티가 있을 때 외적인 예배도 생명을 얻습니다. 이것이 가인의 제물이 외적으로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물이면서도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문제는 제물을 드렸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제물이 어디에서 나왔느냐에 있습니다.

 

AC.350-354에서는 이제 아벨의 제물이 가인의 제물과 대조됩니다. ‘아벨’은 체어리티를, ‘양 떼의 처음 난 것’, 곧 ‘양의 첫 새끼’는 거룩한 것을, ‘기름진 것’은 천적인 것 자체를 나타내며, 이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제물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주님께서 동물 제물을 곡식 제물보다 좋아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는 것은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과 체어리티에 기초한 모든 예배가 주님을 기쁘시게 했다는 뜻입니다. 제물의 종류가 아니라 예배의 내적 생명이 핵심입니다.

 

특히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은 아벨의 예배가 자기에게서 나온 선을 주님께 내놓는 예배가 아니라, 모든 거룩함과 모든 선이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인정하는 예배임을 보여 줍니다. ‘처음 난 것’이 주님께 속한다는 것은 선의 시작과 근원이 주님께 있다는 것이며, ‘기름’이 천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것은 그 선의 가장 내적인 생명이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내가 주님께 무엇을 드리는가?’보다 ‘내가 드리는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이 누구인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아벨의 제물 안에는 바로 이 질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의 대비를 ‘신앙 대 체어리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문제 삼는 것은 신앙 자체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입니다. 아벨이 상징하는 체어리티는 신앙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에 생명을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를 향하고,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두 제물의 대비는 ‘신앙의 예배와 사랑의 예배’라는 단순한 대립보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죽은 신앙의 예배’와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살아 있는 예배’의 대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AC.355부터 말씀의 초점은 제물 자체에서 ‘그 결과 가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로 옮겨갑니다.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라는 창4:5의 말씀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을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뿐 아니라 ‘그러한 분리가 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교리’로까지 설명합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 사이에 작은 간격이 있었지만 이제는 ‘신앙은 체어리티와 분리되어도 참된 신앙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교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가인에게 분노가 일어나고 그의 내적인 것들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AC.356은 지금까지의 논리를 다시 확인합니다. 가인은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이며, 받아들여지지 않은 제물은 그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예배입니다. 이것은 이후의 ‘분함’과 ‘안색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한 전제입니다. 잘못된 신앙과 예배의 질서는 단순히 머릿속의 교리 문제에 머물지 않습니다. 결국 인간의 애정과 내적인 것들을 변화시킵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다시 결합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진리의 문제는 곧 사랑의 문제로 깊어집니다.

 

AC.357의 ‘가인이 몹시 분하여’는 바로 그 변화를 보여 줍니다. 체어리티가 떠날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단순히 가인이라는 한 개인이 제물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기분이 상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고 체어리티가 받아들여지는 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신앙이 본래 체어리티를 섬겨야 할 자기 위치를 잊고 스스로 주된 것이 되려 할 때, 체어리티는 형제가 아니라 경쟁자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후 아벨을 죽이는 사건의 씨앗이 이미 드러납니다.

 

AC.358의 ‘안색이 변하니’, 문자적으로는 ‘얼굴이 떨어졌다’는 표현은 그 결과 인간의 내적인 것들이 변했다는 뜻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얼굴은 단순한 외모가 아니라 내적인 것들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태고교회 사람들은 속과 겉이 일치했기 때문에 마음의 애정과 상태가 얼굴에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의 얼굴이 떨어졌다는 것은 화난 표정 하나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가 떠남으로써 그의 내적인 상태 전체가 변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 말씀에서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비추신다’는 표현입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주님의 자비를 나타내며, 주님께서 얼굴을 들어 인간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그 자비로 인간에게 체어리티를 주시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가인의 ‘얼굴이 떨어짐’은 주님의 자비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변한 것은 주님이 아니라 가인입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는 변함없이 인간을 향하지만, 인간이 체어리티에서 떠나 자기 사랑과 분리된 신앙으로 향할 때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그의 내적인 상태가 변합니다.

 

따라서 AC.346-358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는 ‘외적인 것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입니다. 가인에게도 행위가 있었고 예배가 있었으며 제물이 있었습니다. 아벨에게도 행위와 예배와 제물이 있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둘 다 여호와께 예배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에서 나왔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에서 나왔습니다. 외적인 행위와 예배는 그 자체로 살아 있지 않으며, 속 사람의 사랑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을 때 비로소 살아 있게 됩니다. 이것이 가인의 ‘땅의 소산’과 아벨의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가르는 본질적인 차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신앙과 예배에도 매우 직접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예배드리는가?’, ‘나는 봉사하는가?’, ‘나는 말씀을 공부하고 가르치는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진리를 많이 알고 정확한 교리를 고백하며 종교적 활동을 열심히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의와 인정 욕구, 교리적 우월성, 다른 사람을 판단하려는 마음에서 나온다면 외적인 종교생활은 풍성해도 그 안의 생명은 약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작은 행위라도 주님에게서 받은 선을 이웃에게 돌려주는 체어리티에서 나온다면 그것은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 살아 있는 행위가 됩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가인의 타락 과정이 다시 한번 ‘점진적’이라는 사실입니다. AC.338에서 시작된 작은 분리가 AC.346-358에 이르면 하나의 분명한 연쇄를 이루게 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사랑에서 따로 바라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구별이 분리가 됩니다. 분리된 신앙에서 체어리티 없는 행위가 생깁니다. 그 행위에서 체어리티 없는 예배가 생깁니다. 그 예배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내적인 것들 자체가 변합니다. 이후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은 갑자기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이미 이 과정 속에서 준비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AC.346-358의 중심은 단순히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는가?’라는 질문에 있지 않습니다. 더 깊은 질문은 ‘무엇이 행위와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입니다. 그 답은 체어리티이며, 더 궁극적으로는 체어리티를 통하여 인간에게 유입되는 주님의 생명입니다. 외적인 것은 내적인 것에서 생명을 받고, 내적인 것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습니다. 따라서 참된 예배는 외적인 종교 행위를 정교하게 만드는 데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선이 속 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흘러나와 실제 삶과 예배를 하나로 만들 때 이루어집니다.

 

결국 AC.346-358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무엇을 주님께 드리고 있는가?’보다 ‘내가 드리는 것은 어디에서 나오고 있는가?’입니다. 가인도 제물을 드렸고 아벨도 제물을 드렸지만, 두 예배의 내적 근원은 달랐습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행위와 예배까지 만들어 낼 수 있지만 그 안에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이 없다면 결국 죽은 열매가 됩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나오는 행위와 예배는 모든 거룩함과 선이 주님께 속한다는 것을 인정하며, 주님에게서 받은 생명을 다시 이웃을 향한 선과 쓰임으로 나타냅니다. 이것이 아벨의 살아 있는 예배입니다.

 

따라서 이번 구간은 앞의 AC.338-345에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를 한 단계 더 깊게 보여 줍니다. 앞 구간이 ‘가인과 아벨은 무엇인가?’를 밝혔다면, AC.346-358은 ‘그 둘의 차이가 실제 삶과 예배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보여 줍니다.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으면 행위도 살아 있고 예배도 살아 있으며 인간의 얼굴, 곧 내적인 것들에도 주님의 자비가 비칩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리와 행위와 예배의 외형은 남아 있어도 그 생명은 점차 사라지고, 마침내 인간의 내적인 것들까지 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루시는 거듭남은 우리가 가진 신앙과 진리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살아 있는 행위와 예배가 되게 하시는 과정이며, 그때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 하나의 예배가 되어 갑니다.

 

 

이상 요약을 마치고, 아래는 AC 본문, 해설 및 심화입니다.

 

 

AC.346, 창4:3, ‘체어리티 없는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는 나올 수 있습니다’(AC.346-349)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And at the end of days it came to pass that Cain brought of the fruit of the ground an offering to Jehovah. (창4:3) AC.346 ‘날들의 끝에’(end of days)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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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 ‘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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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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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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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0, 창4:4, ‘왜 주님께서는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는가 - 체어리티에 기초한 참된 예배’(AC.350-3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And Abel, he also brought of the firstlings of his flock, and of the fat thereof; and 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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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1, 창4:4, ‘체어리티란? - 이웃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는 사랑’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1 ‘아벨’(Abel)이 체어리티를 상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체어리티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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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2, 창4:4, ‘왜 장자가 거룩했는가 - 모든 사랑은 주님에게서 옵니다’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2 ‘양의 첫 새끼’(firstlings of the flock, ‘양 떼의 처음 난 것’)는 오직 주님께만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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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3, 창4:4, 아벨이 드린 ‘기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3 ‘기름’(fat)은 천적인 것 자체를 상징하며, 이것 역시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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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4, 창4:4, ‘주님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신 이유 - 체어리티에 기초한 예배’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4:4) AC.35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돌아보셨다’(Jehovah looked to Abel, and to his offer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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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5, 창4:5,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한 이유 - 체어리티가 떠날 때 내면에 일어나는 변화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But to Cain and his offering he looked not; and Cain’s anger was kindled exceedingly, and his faces fell. (창4:5) AC.355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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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6, 창4:5, ‘가인의 제물을 돌아보지 않으신 이유 -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의 예배’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6 ‘가인’(Cain)이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 또는 그러한 분리를 인정하는 교리를 상징한다는 것과, ‘그의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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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7, 창4:5, ‘가인의 분노는 무엇을 뜻하는가 - 자기 사랑과 체어리티의 떠남’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7 ‘가인의 분노가 타올랐다’(Cain’s anger was kindled)는 것이 체어리티가 떠났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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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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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AC 리딩 본문 전체는 여기까지이고, 이 가운데 필수 리딩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AC.349, 창4:3, ‘제물이 예배를 뜻하는 이유 - 외적 예배는 내적인 것으로부터 생명을 얻습니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9 ‘제물’(offering)이 예배를 뜻한다는 것은 유대교회의 표상들에서 분명합니다. 그 교회에서는 온갖 종류의 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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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창4:5, ‘가인의 안색이 변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얼굴에 나타나는 내적 상태’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4:5) AC.358 ‘안색이 변했다’(faces falling)는 것이 내적인 것들이 변했음을 상징한다는 것은 ‘얼굴’(face)과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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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58, 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AC.358.심화 1. ‘여호와께서 그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신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얼굴과 체어리티’(민6:26; 시4: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민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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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한결같은 교회 변일국 목사

설교

2026-08-30(D1)

 

2666, 3, 창4.3, 2026-08-30(D1)-주일예배(창4,3-5, AC.346-358), ‘가인과 아벨의 제물 - 무엇이 예배를 살아 있게 하는가’.pdf
1.07MB

 

 

 

주일예배(2026/09/06, 창4:6-8, AC.359-369), ‘체어리티는 신앙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 오늘(2026/09/06)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2, ‘다 함께 주를 경배하세’, 찬230, ‘우리의 참되신 구주시니’, 찬92, ‘위에 계신 나의 친구’입니다. 오늘은 창4 절별 주석 그 세 번째, 6절로 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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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6/08/23, 창4:1-2, AC.338-345), ‘가인과 아벨, 사랑에서 분리되기 시작한 신앙과 체어리티

※ 오늘(2026/08/23) 부를 찬송은 순서대로 찬10, ‘전능왕 오셔서’, 찬90, ‘주 예수 내가 알기 전’입니다. 오늘부터 창4 절별 주석을 시작, 오늘은 그 첫 번째, 1절로 2절, AC 글 번호로는 338번에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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