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

‘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그 자체로 죽은 행위입니다. 그것들은 오직 겉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관하여 예레미야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That by the “fruit of the ground” are meant the works of faith without charity, appears also from what follows; for the works of faith devoid of charity are works of no faith, being in themselves dead, for they are solely of the external man. Of such it is written in Jeremiah:

 

1여호와여 내가 주와 변론할 때에는 주께서 의로우시니이다 그러나 내가 주께 질문하옵나니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함은 무슨 까닭이니이까 2주께서 그들을 심으시므로 그들이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었거늘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 4언제까지 이 땅이 슬퍼하며 온 지방의 채소가 마르리이까 짐승과 새들도 멸절하게 되었사오니 이는 이 땅 주민이 악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그가 우리의 나중 일을 보지 못하리라 함이니이다 (렘12:1-2, 4) Wherefore doth the way of the wicked prosper? Thou hast planted them, they also have taken root; they have gone on, they also bear fruit; thou art near in their mouth, and far from their reins; how long shall the land mourn, and the herb of every field wither? (Jer. 12:1–2, 4)

 

‘입에는 가까우나 마음에는 멀다’(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는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하며, 그들에 관하여 ‘땅이 슬퍼한다’(the land mourns)고 말합니다. 같은 선지서에서는 그러한 행위를 ‘행위의 열매’(fruit of works)라고 부릅니다. “Near in the mouth, but far from the reins” denotes those who are of faith separated from charity, concerning whom it is said that “the land mourns.” In the same prophet such works are called the “fruit of works”:

 

9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10나 여호와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고 각각 그의 행위와 그의 행실대로 보응하나니 (렘17:9, 10) The heart is deceitful [supplantativum] above all things, and it is desperate, who can know it? I Jehovah search the heart, I try the reins, even to give to every man according to his ways, and according to the fruit of his works. (Jer. 17:9–10)

 

미가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In Micah:

 

그 땅은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리로다 (미7:13) The land shall be desolate because of them that dwell therein, for the fruit of their works. (Micah 7:13)

 

그러한 ‘열매’(fruit)는 열매가 아니며, 그러한 ‘행위’(work)는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열매와 뿌리가 모두 멸망하는 것을 아모스에서는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That such “fruit” is no fruit, or that the “work” is dead, and that both fruit and root perish, is thus declared in Amos:

 

내가 아모리 사람을 그들 앞에서 멸하였나니 그 키는 백향목 높이와 같고 강하기는 상수리나무 같으나 내가 그 위의 열매와 그 아래의 뿌리를 진멸하였느니라 (암2:9) I destroyed the Amorite before them, whose height was like the height of the cedars, and he was strong as the oaks; yet I destroyed his fruit from above, and his roots from beneath. (Amos 2:9)

 

시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And in David:

 

왕이 그들의 후손을 땅에서 멸함이여 그들의 자손을 사람 중에서 끊으리로다 (시21:10) Their fruit shalt thou destroy from the earth, and their seed from the sons of man. (Ps. 21:10)

 

그러나 체어리티의 행위는 살아 있으며, 그것들에 관하여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는다’(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고 선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But the works of charity are living, and of them it is declared that they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as in Isaiah: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은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 (사37:31) The remnant that is escaped of the house of Judah shall again take root downward, and bear fruit upward. (Isa. 37:31)

 

‘위로 열매를 맺는다’(bear fruit upward)는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열매를 같은 선지서에서는 ‘아름답고 영화로운 열매’(fruit of excellence)라고 부릅니다. To “bear fruit upward” is to act from charity. Such fruit is called the “fruit of excellence,” in the same prophet:

 

그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사4:2) In that day shall the shoot of Jehovah be beautiful and glorious, and the fruit of the earth excellent and comely for them that are escaped of Israel. (Isa. 4:2)

 

그것은 또한 ‘구원의 열매’(fruit of salvation)이며, 같은 선지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부릅니다. It is also the “fruit of salvation,” and is so called by the same prophet:

 

하늘이여 위로부터 공의를 뿌리며 구름이여 의를 부을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싹트게 하고 공의도 함께 움 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 (사45:8) Drop down, ye heavens, from above, and let the skies pour down righteousness; let the earth open, and let them bring forth the fruit of salvation, and let righteousness spring up together; I Jehovah will create it. (Isa. 45:8)

 

해설

AC.348은 앞의 AC.346에서 간략하게 밝힌 가인의 ‘땅의 소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AC.346에서는 그것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고 했고, 이제 AC.348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한 행위를 ‘신앙이 없는 행위’이며 ‘그 자체로 죽은 행위’라고 단언합니다. 이것은 상당히 강한 표현입니다. 가인에게 행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인은 땅을 경작하고 소산을 거두어 여호와께 제물로 드립니다. 외적으로 보면 행위도 있고 예배도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묻는 것은 행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그 행위 안에 어떤 생명이 있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으로부터 나온 행위는 겉으로 아무리 종교적이고 선해 보여도 신앙의 참된 생명이 없기 때문에 ‘죽은 행위’라고 하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그것들은 오직 겉 사람에게만 속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외적인 행위 자체가 나쁘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체어리티는 결국 자연계의 실제 삶에서 말과 행동과 쓰임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굶주린 사람을 먹이고, 어려운 사람을 돕고, 자기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예배하고 봉사하는 일은 모두 겉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그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과 결합되어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는 외적인 형태만 있을 뿐 그것을 안에서 살아 있게 하는 사랑의 생명이 없습니다. 따라서 AC.348의 ‘겉 사람에게만 속한다’는 말은 외적 행동을 낮추는 말이 아니라, 외적 행동이 내적 생명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렘12:1-2, 4가 첫 번째 증거로 인용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도 ‘뿌리가 박히고 장성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외적으로만 보면 생명과 번영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곧이어 ‘그들의 입은 주께 가까우나 그들의 마음은 머니이다’라는 결정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라고 설명합니다. 입으로는 주님을 말할 수 있고, 신앙을 고백할 수 있으며, 외적인 종교 행위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이 이웃을 향한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지 않다면 입에 있는 신앙과 내적인 생명 사이에는 거리가 생깁니다. 따라서 ‘열매를 맺는다’는 표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열매가 살아 있는 선의 열매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내적 상태에서 그 열매가 나왔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어지는 렘17:9-10과 미7:13도 같은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심장을 살피며 폐부를 시험’하시고 각 사람에게 그의 길과 ‘행위의 열매’에 따라 갚으십니다. 미가에서도 땅이 ‘그 주민의 행위의 열매로 말미암아’ 황폐하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열매’라는 말이 나온다고 해서 언제나 자동으로 좋은 행위를 뜻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악과 거짓에서도 그것에 맞는 행위가 나오며, 말씀은 그것 역시 ‘행위의 열매’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열매라는 외적 명칭이 아니라 그 열매의 질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땅의 소산’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소산이 있다는 것만으로 그것이 주님께 받아들여지는 살아 있는 열매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암2:9과 시21:10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러한 열매가 결국 멸망한다고 설명합니다. 특히 아모스에서는 ‘위의 열매’와 ‘아래의 뿌리’가 함께 언급됩니다. 여기서 AC.348이 직접 강조하는 것은 체어리티가 없는 행위는 참된 의미에서 살아 있는 열매가 아니며 결국 그 열매와 뿌리가 함께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뿌리와 열매의 이미지를 통해 행위에는 그것을 낳는 근원이 있다는 점도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번호에서 뿌리를 특정한 영적 기능과 일대일로 대응시켜 지나치게 세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베덴보리의 논지는 훨씬 단순하고 강합니다.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오는 행위는 외적인 모양을 가지고 한동안 자라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 영적인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48은 죽은 행위를 설명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37:31부터는 정반대의 열매, 곧 살아 있는 체어리티의 행위로 전환합니다.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으리니’라는 말씀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위로 열매를 맺는 것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이라고 매우 명확하게 풀이합니다. 이것이 AC.348 전체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된 열매는 단순히 외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체어리티로부터’ 행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의 땅의 소산과 이사야의 ‘위로 맺는 열매’는 둘 다 겉으로는 열매이지만 영적으로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는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에서 나온 죽은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체어리티로부터 나온 살아 있는 행위입니다.

 

사4:2와 사45:8은 이 살아 있는 열매의 성질을 더욱 밝힙니다. 이사야는 그것을 ‘아름답고 영화로운’ 열매라고 하고, 이어 ‘구원의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특히 사45:8의 마지막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는 말씀은 체어리티로부터 행한다는 것이 인간이 자기 힘으로 선한 마음을 만들어 선행한다는 뜻이 아님을 분명하게 해 줍니다. 모든 참된 선과 체어리티의 근원은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선을 주시고 인간은 그것을 자유롭게 받아 삶으로 행합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행위의 생명은 인간 자신의 공로나 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옵니다. 인간은 마치 자기에게서 행하는 것처럼 선을 행하지만, 그 선의 근원은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스베덴보리가 반복해서 가르치는 질서입니다.

 

이 점에서 AC.348은 ‘행위’를 평가하는 매우 섬세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단순히 ‘행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좋은 신앙인이다’라고 말하지도 않고, 반대로 ‘행위는 중요하지 않고 신앙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와 행위가 하나의 살아 있는 질서 안에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진리는 사람이 무엇이 선인지 알도록 하고 체어리티를 향하게 하며, 주님께서 주시는 체어리티는 실제 삶에서 행위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따라서 참된 행위는 신앙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결합하여 밖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반대로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도 외적인 행위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스베덴보리는 그것을 ‘죽은 행위’라고 합니다.

 

이것은 종교적인 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배, 헌금, 봉사, 구제, 전도, 설교, 성경 공부와 같은 일은 모두 귀한 쓰임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348은 그 외적인 모양만 보고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같은 행위라도 자기 의와 명예와 인정,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의식에서 행할 수도 있고, 주님께 받은 것을 이웃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려는 체어리티에서 행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내적 동기를 완전히 알 수 없으므로 이 말씀을 타인의 행위를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나는 왜 이것을 하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이 일이 정말 이웃의 참된 유익을 향하고 있는가?’를 자신에게 묻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특히 AC.348은 앞의 AC.344-346과 함께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44에서는 신앙에 관한 모든 지식과 교리의 목적이 체어리티라고 했습니다. AC.345에서는 사랑에서 분리된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니라고 했고, AC.346에서는 그러한 신앙에서도 행위와 예배가 나올 수 있음을 보았습니다. 이제 AC.348은 그 행위의 영적 성질을 밝힙니다. 체어리티와 분리된 신앙에서 나온 행위는 아무리 열매처럼 보여도 죽은 행위이고, 체어리티에서 나온 행위는 살아 있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창4에서 문제 되는 것은 ‘가인이 아무 열매도 맺지 못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에게도 ‘땅의 소산’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 열매에 체어리티의 생명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AC.348은 ‘열매의 생명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압축할 수 있습니다. 답은 열매의 크기나 외형이나 사람들의 평가가 아니라, 그것이 체어리티로부터 나오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체어리티의 근원은 다시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선이 사람 안에서 신앙의 진리와 결합되고 실제 삶의 쓰임으로 나타날 때 행위는 살아 있는 열매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번호는 우리에게 단순히 ‘더 많은 선행을 하라’고 말하기보다 ‘네 행위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고 묻습니다. 가인의 ‘땅의 소산’과 이사야의 ‘위로 맺는 열매’는 겉으로 모두 열매이지만 그 생명은 전혀 다릅니다. 바로 그 차이를 분별하는 것이 AC.348의 핵심입니다.

 

 

 

AC.348, 창4:3, 가인의 ‘땅의 소산’ - 체어리티 없는 죽은 행위와 살아 있는 열매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8‘땅의 소산’(fruit of the ground)이 체어리티가 없는 신앙의 행위를 뜻한다는 것은 이어지는 내용에서도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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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47, 창4:3, ‘세월이 지난 후에 - 신앙이 사랑에서 점점 멀어질 때’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4:3) AC.347‘세월이 지난 후에’(end of days, ‘날들의 끝에’)가 ‘시간이 흐른 뒤’를 뜻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분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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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 심화

1.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겉 사람에 속할까?

 

AC.40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걸리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영문은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입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면, 앞의 이성적인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다는 뜻인가?’

 

먼저 문장 자체가 무엇을 분명하게 말하는지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라는 두 가지를 말한 뒤 ‘the latter’, 곧 ‘후자’가 속 사람에 속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후자’는 ‘intellectual things’, 곧 ‘지적인 것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AC.40이 직접 말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

 

그러나 여기서 곧바로 반대편 명제까지 만들어 ‘그러므로 이성적인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AC.40은 그렇게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짧은 문장이지만 AC를 읽을 때 상당히 중요한 원칙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가 어떤 것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빈자리를 대칭적으로 채워 넣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스베덴보리는 ‘새들’이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고 하면서 그 가운데 특별히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였을까요?

 

AC.40의 문맥에서 먼저 분명한 것은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과 ‘새들’ 사이의 차이입니다. 물에서 번성하는 것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합니다. 반면 새들은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물고기와 새의 차이를 통해 단순히 기억 속에 저장된 지식과, 그것을 넘어서 생각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더 높은 능력이 구별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구절 하나를 외우고 있다는 것과 그 구절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하고 이해하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앞의 것은 기억 지식으로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뒤의 것은 이성적·지적인 활동과 관계됩니다. 물론 이것은 AC.40의 대응을 이해하기 위한 쉬운 예이지, rational과 intellectual을 각각 이렇게 정의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특히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는 말은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인간의 참된 영적 이해는 단순히 외부에서 정보를 많이 축적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은 필요하지만, 기억에 저장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곧 속 사람의 지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AC.40은 적어도 이 둘의 층위가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서 ‘rational’과 ‘intellectual’의 차이를 현대 심리학의 두 가지 사고 기능처럼 간단히 정의하려고 하면 오히려 조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rational은 논리적으로 계산하는 능력이고 intellectual은 마음 깊이 진리를 직관하는 능력이다’라고 고정하면 이해하기는 쉬워 보이지만, AC.40은 그런 정의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rational은 겉 사람과 속 사람 사이의 중간 영역이다’라고 이번 한 문장만으로 확정하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후 여러 글에서 인간의 rational과 intellectual,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를 훨씬 더 세밀하게 다룹니다. 그 전체 설명을 따라가야 두 용어의 관계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AC.40에서는 먼저 본문이 말하는 만큼을 정확하게 붙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나타냅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새’가 왜 물고기와 함께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지도 조금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람 안에는 단순히 기억에 저장된 지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생각하고 이해하는 더 높은 차원의 활동도 있습니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이러한 인간의 여러 능력도 살아 있는 질서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문장은 앞으로 AC를 계속 읽게 만드는 작은 예고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성적인 것은 정확히 어디에 속하는가?’, ‘이성적인 것과 지적인 것은 정확히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에 AC.40 한 문장으로 성급하게 답을 만들어 넣기보다, 스베덴보리가 뒤에서 인간의 내적 구조를 더 펼쳐 보일 때까지 따라가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면 답은 간단합니다.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고 했으므로 이성적인 것들은 곧 겉 사람에 속한다는 뜻인가?’

 

AC.40만 놓고 보면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이 명시적으로 말하는 것은 후자, 곧 ‘지적인 것들이 속 사람에 속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성적인 것의 정확한 위치와 역할은 더 넓은 AC의 설명 속에서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처럼 본문이 말하는 것과 우리가 거기서 추론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 AC를 오래 읽어 가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때로는 조금 덜 설명하는 것이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말한 것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길이 됩니다.

 

 

 

AC.40, 창1:20, ‘지식과 지성이 살아나는 순간 : 물고기와 새로 나타나는 거듭난 생명’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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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2. ‘속 사람’(internal man)은 영혼이나 마음과 같은 말인가?

AC.64는 창세기 1장의 속뜻이 인간의 거듭남을 다루며,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처음 AC를 읽는 독자에게는 매우 자연스러운 질문이 생깁니다. ‘속 사람’(internal man)이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영혼’과 같은 것일까요? 아니면 ‘마음’이라는 뜻일까요?

 

먼저 ‘속 사람’을 단순히 몸 안에 들어 있는 보이지 않는 또 하나의 사람으로 상상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말할 때 이것은 육체의 안쪽과 바깥쪽이라는 공간적 구별이 아닙니다. 인간의 생명과 의식에 서로 구별되는 내적이고 외적인 차원이 있음을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그렇다고 ‘속 사람 = 영혼’이라고 바로 등식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영혼’이라는 말은 문맥에 따라 인간의 생명 자체나 사후에도 사는 인간을 가리키는 등 여러 의미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반면 ‘속 사람’은 ‘겉 사람’과 짝을 이루어 인간 안의 내적 차원을 설명하는 특정한 용어입니다. 따라서 두 말이 관련될 수는 있어도 언제나 서로 바꾸어 쓸 수 있는 동의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속 사람 = 마음’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마음’이라고 하면 생각, 감정, 의지 등을 매우 넓게 포함하여 말합니다. 그런데 AC에서는 겉 사람에게도 생각과 욕망과 판단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감정이라고 해서 모두 자동으로 ‘속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눈에 안 보이는 정신 활동 = 속 사람’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너무 넓어집니다.

 

AC.64에서 특별히 주의할 것은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표현입니다. 이것을 보고 ‘그렇다면 주님의 생명은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들어가는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별개의 질문입니다. AC 다른 곳에서 주님에게서 오는 생명과 선과 진리가 사람 안으로 유입되는 질서를 설명할 때와, 여기서 사람이 거듭남 가운데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때는 관점이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속 사람이 먼저 열리고 그다음 겉 사람이 바뀐다’ 또는 반대로 ‘겉 사람이 먼저 거듭난 다음 속 사람이 바뀐다’는 한 줄짜리 공식으로 AC.64를 정리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이 문장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말하는 것은 창1에서 다룬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진행과 주님의 유입 질서가 어떻게 함께 성립하는지는 관련 글들을 더 읽으면서 구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현 단계에서 속 사람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가장 안전하게는 ‘겉 사람과 구별되는 인간의 내적 차원’이라고 잡아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겉 사람은 자연계와 감각을 통하여 관계하는 인간의 외적 차원이고, 속 사람은 그보다 내적인 인간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이 정의도 앞으로 AC가 속 사람과 겉 사람을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점차 풍성해져야 합니다.

 

이것은 처음에는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한 문장으로 딱 정의해 주면 편한데 왜 이렇게 여지를 남기는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C의 중요한 용어들은 뒤로 갈수록 여러 문맥에서 점점 더 구체적으로 설명됩니다. 처음 등장한 자리에서 우리가 너무 완성된 정의를 만들어 버리면 오히려 나중의 본문을 그 정의에 억지로 맞추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속 사람은 언제나 선하고 주님과 직접 연결되어 있으며 겉 사람은 세상적이고 악하다’고 처음부터 단정해 버리면 이후의 설명을 읽기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내적’이라는 말 자체가 자동으로 ‘선하다’를 뜻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인간의 내적이고 외적인 모든 것을 어떻게 질서 안으로 이끄시는가입니다.

 

AC.64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도 바로 거듭남을 설명하기 위해서입니다.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은 단순히 사람의 외적인 생활 습관 몇 가지가 개선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 자체가 주님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그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속 사람은 영혼인가, 마음인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겠습니다. 속 사람은 영혼이나 마음과 관련될 수 있지만 그 어느 한 단어와 단순히 동일시하기보다, AC에서 겉 사람과 구별하여 인간의 내적 차원을 가리키는 고유한 용어로 익혀 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그 정확한 구조와 기능은 앞으로 관련 AC들이 설명할 때 하나씩 더해 가는 편이 스베덴보리의 글을 가장 안전하게 따라가는 방법입니다.

 

 

 

AC.64 심화 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

AC.64 심화3. 스베덴보리는 왜 ‘성경’보다 ‘말씀’(the Word)이라고 하는가?AC를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성경’이라는 말보다 ‘the Word’, 곧 ‘말씀’이라는 표현을 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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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 심화 1. ‘아르카나’(arcana)란 무엇인가? AC.64에서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너무나 많은 ‘아르카나’(arcana)가 있어서 수많은 책으로도 그것들을 모두 펼쳐 내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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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1:24, 25)

 

AC.47

이 말씀들 안에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앞 절에서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을 낼 것이라고 말한 반면, 다음 절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the wild animal of the earth, the beast)을 만드셨다고 말하는 데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는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이후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되어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이런 이유로 여기 다른 순서가 나오는 것이며,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되는 것입니다. That these words contain arcana relating to regeneration, is evident also from its being said in the foregoing verse that the earth should bring forth “the living soul, the beast, and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whereas in the following verse the order is changed, and it said that God made “the wild animal of the earth,” and likewise “the beast”; for at first, and afterwards until he becomes celestial, man brings forth as of himself; and thus regeneration begins from the external man, and proceeds to the internal; therefore here there is another order, and external things are mentioned first.

 

해설

AC.47은 아주 짧지만 창1:24-25의 문장을 얼마나 세밀하게 읽어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글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주목하는 것은 새로운 단어나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라 ‘순서의 변화’입니다. 24절에서는 땅이 ‘생물, 가축, 땅의 짐승’을 내라고 하지만, 25절에서는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 가축’을 만드셨다고 하여 앞에서와 순서가 달라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작은 차이 안에도 거듭남에 관한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정도의 어순 차이에 정말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AC.47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지금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을 단순히 자연계 창조의 순서를 기록한 문장으로만 읽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을 담은 말씀으로 읽고 있습니다. 따라서 같은 대상들이 왜 다른 순서로 언급되는가도 그에게는 설명되어야 할 말씀의 일부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설명의 중심은 ‘사람이 처음에는, 그리고 이후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는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실제로 영적 생명과 선을 자기 자신에게서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의 AC.39-43에서 이미 모든 참된 선과 진리와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을 반복하여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AC.47을 그 흐름과 분리해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이라고 말할까요? AC.47은 그 이유나 작동 방식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거듭남의 과정에서 그렇게 산출하며, 바로 그 때문에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고 말합니다. 여기서는 이 두 진술을 스베덴보리가 직접 연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오해를 피해야 합니다.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한다’는 말을 ‘사람이 외적인 행동을 반복하면 그것이 차츰 속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하나의 심리적 훈련 공식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실제 삶의 순종과 행함은 거듭남에서 중요합니다. 바로 앞의 AC.44도 말씀을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을 분리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47 자체는 ‘행동 → 습관 → 애정 → 속 사람’이라는 단계나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또 ‘겉 사람에서 속 사람으로’라는 말을 주님께서 겉 사람에서 일을 시작하여 점차 속 사람으로 들어가신다는 공간적 이동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 거듭나는 사람이 경험하고 산출하는 질서를 설명하면서 겉 사람과 속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 및 주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거듭나게 하시는가는 AC가 진행되면서 훨씬 더 세밀하게 설명되므로, 이 한 문장에 그 모든 메커니즘을 미리 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면 24절과 25절의 순서 변화가 왜 중요할까요? 24절에서는 ‘땅’이 무엇인가를 내는 장면이 먼저 제시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사람이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하는 상태와 연결합니다. 반면 25절에서는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 만드시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AC.47이 특별히 설명하는 것은 단순히 ‘땅이 하다가 하나님이 하신다’는 주어 변화만이 아니라, 그와 함께 언급되는 것들의 순서도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순서에서 ‘겉에 속한 것들이 먼저 언급된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현재 단계에서 가장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뒤바뀐 순서는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진행되는 질서를 표현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각각의 ‘땅의 짐승’과 ‘가축’을 다시 세분하여 ‘이것은 외적 행동, 이것은 습관, 이것은 길들여진 애정’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런 세부 대응을 우리가 만들어 넣기보다, 그가 직접 밝힌 ‘외적인 것들이 먼저 언급된다’는 설명을 그대로 중심에 두는 편이 좋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과 ‘실제로 자기에게서’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은 생각하고 선택하고 행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에서는 ‘내가 생각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행한다’고 경험합니다. 그러나 앞선 AC의 흐름에 따르면 그 안에 참으로 살아 있는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입니다. AC.47은 이 둘을 서로 지워 버리지 않습니다.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영적 생명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는 사람이 거듭남의 과정에서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한다는 표현으로 그 상태를 말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매우 중요해질 주제입니다. 다만 AC.47 하나만으로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유입, 섭리, 공로 없음의 관계를 모두 완성된 교리로 설명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 글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것은 그보다 작지만 분명한 단서입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 사람에게는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행하는 상태가 있으며, 그 과정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현재 제목처럼 이것을 곧바로 ‘자기에서 주님으로 옮겨가는 방향’이라고 요약하는 것도 조금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모든 생명과 선의 근원이 주님이라는 것은 이미 앞에서 분명해졌지만, AC.47이 설명하는 순서 변화 자체의 직접적인 의미는 ‘자기에서 주님으로 주체가 이동한다’기보다 ‘거듭남이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간다’는 데 있습니다. 그 차이를 지켜 주어야 이 짧은 글이 말하는 아르카나가 오히려 더 선명해집니다.

 

AC.47은 동시에 말씀을 읽는 스베덴보리의 방식을 잘 보여 줍니다. 우리 눈에는 같은 것을 조금 다른 순서로 쓴 문체상의 변화처럼 보이는 것도, 그는 거듭남의 질서와 연결하여 읽습니다. 물론 여기서 곧바로 ‘성경의 모든 어순 변화에는 반드시 별개의 속뜻이 있다’고 일반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AC.47이 직접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창1:24-25의 순서 변화에 거듭남의 아르카나가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글의 핵심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처음부터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선의 근원을 온전히 지각하는 천적 인간의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천적 인간이 되기까지 ‘마치 자기에게서인 듯’ 산출합니다. 그래서 거듭남은 겉 사람에서 시작하여 속 사람으로 나아가며, 창1:24와 25의 미묘한 순서 변화가 바로 그 질서를 표현합니다. AC.47은 단어 하나뿐 아니라 배열의 변화까지도 거듭남의 관점에서 읽어 내면서, 창세기 창조 이야기가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창조를 얼마나 세밀하게 담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AC.48, 창1:24-25, ‘거듭남의 다섯 번째 상태, 여섯 번째 상태'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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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6, 창1:24-25, ‘짐승'(beasts), 사람의 애정(affections)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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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0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하고, ‘새들’(birds)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하는데, 이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합니다. ‘물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곧 ‘물고기들’(fishes)이 기억 지식을 뜻한다는 사실은 이사야를 보면 분명합니다. By the “creeping things which the waters bring forth” are signified the memory-knowledge which belong to the external man; by “birds” in general, rational and intellectual things, of which the latter belong to the internal man. That the “creeping things of the waters,” or “fishes,” signify memory-knowledges is plain from Isaiah:

 

2내가 왔어도 사람이 없었으며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었음은 어찌 됨이냐 내 손이 어찌 짧아 구속하지 못하겠느냐 내게 어찌 건질 능력이 없겠느냐 보라 내가 꾸짖어 바다를 마르게 하며 강들을 사막이 되게 하며 물이 없어졌으므로 그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갈하여 죽으리라 3내가 흑암으로 하늘을 입히며 굵은 베로 덮느니라 (사50:2, 3) I came and there was no man; at my rebuke I dry up the sea, I make the rivers a wilderness; their fish shall stink because there is no water and shall die for thirst; I clothe the heavens with blackness (Isa. 50:2–3).

 

[2] 그러나 이 의미는 에스겔을 보면 더 분명한데, 거기서 주님은 새 성전, 곧 일반적으로는 새 교회를, 그리고 교회에 속한 사람인 거듭난 사람을 묘사하십니다.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But it is still plainer from Ezekiel, where the Lord describes the new temple, or a new church in general, and the man of the church, or a regenerate person; for everyone who is regenerate is a temple of the Lord: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겔47:8-10) The Lord Jehovih said unto me, These waters that shall issue to the boundary toward the east, and shall come toward the sea, being led into the sea, and the waters shall be healed;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every living soul that shall creep forth, whithersoever the water of the rivers shall come, shall live, and there shall be exceeding much fish, because those waters shall come thither, and they shall heal, and everything shall live whither the river cometh;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fishers shall stand upon it from En-gedi 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hall they be; their fish shall be according to its kind, as the fish of the great sea, exceeding many (Ezek. 47:8–10).

 

여기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의 어부들’(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과 ‘그물 치는 것’(spreading of nets)은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뜻합니다. “Fishers from En-gedi unto En-eglaim,” with the “spreading of nets,” signify those who shall instruct the natural man in the truths of faith.

 

[3] ‘새들’(birds)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도 선지자들을 보면 분명합니다. 이사야에 보면, That “birds” signify things rational and intellectual is evident from the prophets; as in Isaiah: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사46:11) Calling a bird from the east, the man of my counsel from a distant land (Isa. 46:11).

 

예레미야에서도 And in Jeremiah: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렘4:25) I beheld and lo there was no man, and all the birds of the heavens were fled (Jer. 4:25).

 

에스겔서에서는 In Ezekiel:

 

22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23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겔17:22, 23) I will plant a shoot of a lofty cedar, and it shall lift up a branch, and shall bear fruit, and be a magnificent cedar; and under it shall dwell every fowl of every wing, in the shadow of the branches thereof shall they dwell (Ezek. 17:22–23).

 

그리고 호세아에서는 새 교회, 곧 거듭난 사람에 대해 말하면서, And in Hosea, speaking of a new church, or of a regenerate man:

 

그날에는 내가 그들을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그들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호2:18) And in that day will I make a covenant for them with the wild beast of the field, and with the fowls of heaven, and with the moving thing of the ground (Hos. 2:18).

 

여기서 ‘들짐승’(wild beast)이 실제 짐승을 뜻하지 않고, ‘새’(bird)도 실제 새를 뜻하지 않는다는 점은, 주님께서 그것들과 ‘새 언약을 맺는다’(make a new covenant)고 하는 것만 봐도 누구나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That “wild beast” does not signify wild beast, nor “bird” bird, must be evident to everyone, for the Lord is said to “make a new covenant” with them.

 

해설

AC.40은 다섯째 날에 등장하는 두 종류의 생물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물들이 번성하게 하는 것들’, 곧 물속에서 돌아다니는 것들과 물고기들은 겉 사람에 속한 ‘기억 지식’을 뜻하고,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고 덧붙입니다.

 

여기서 먼저 ‘기억 지식’이라는 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외부로부터 배우고 기억 속에 받아들이는 지식들을 가리킵니다. 성경을 읽어 알게 된 내용, 교리를 배우면서 얻은 지식, 자연계와 삶을 통해 습득한 여러 사실 등이 모두 겉 사람의 기억에 들어옵니다. AC.40은 이러한 기억 지식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섯째 날에는 그것들이 ‘생물’로 표현되기 시작합니다.

 

이 점은 바로 앞의 AC.39와 연결해서 읽어야 합니다. AC.39에서는 사람이 아직 자기가 선을 행하고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할 때 그에게 있는 것들이 식물처럼 ‘생명이 없는 것들’에 비유되지만,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믿기 시작하면 ‘생물’에 비유된다고 했습니다. AC.40은 이제 그 생물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물고기는 기억 지식에, 새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에 대응합니다.

 

그런데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당연히 ‘왜 물고기가 기억 지식을 뜻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AC.40은 그 이유를 추상적인 설명으로 풀기보다 말씀의 여러 구절을 제시하여 그 대응을 보여 줍니다. 먼저 사50:2-3에서 바다와 강의 물이 없어지자 물고기들이 악취를 내며 목말라 죽는 장면을 인용합니다. 이 구절은 물고기가 단순히 자연계의 물고기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인간의 내적·영적 상태와 관계된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에스겔의 새 성전 환상이 이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 준다고 합니다. 겔47:8-10에서는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이 바다에 이르자 물이 되살아나고 고기가 심히 많아집니다. 그리고 어부들이 서서 그물을 칩니다. AC.40은 여기서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의 어부들’과 ‘그물 치는 것’이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칠 사람들’을 뜻한다고 직접 설명합니다.

 

이것이 왜 물고기와 기억 지식의 관계를 보여 주는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연적인 사람을 신앙의 진리로 가르치려면 그 진리들이 자연적 차원에서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AC.40은 바로 이러한 겉 사람의 기억 지식들을 물고기로 나타냅니다. 따라서 겔47장의 풍성한 물고기와 어부들은 단순한 어업의 번성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 교회와 거듭난 사람 안에서 자연적인 사람이 신앙의 진리로 가르침받는 상태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인용됩니다.

 

여기서 ‘새 성전’과 ‘새 교회’와 ‘거듭난 사람’이 함께 언급되는 것도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교회’를 단지 외적인 종교 조직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교회를 이루는 선과 진리가 한 사람 안에 받아들여질 때 그 사람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교회의 모습을 갖습니다. 그래서 AC.40은 새 성전을 ‘일반적으로는 새 교회’, 그리고 ‘교회에 속한 사람, 곧 거듭난 사람’과 연결합니다. 이어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주님의 성전’이라고 그 이유까지 직접 밝힙니다.

 

AC.40의 두 번째 중심은 ‘새들’입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 역시 자신의 생각만으로 제시하지 않고 선지서의 여러 구절을 인용합니다.

 

사46:11의 ‘동쪽에서 부르는 날짐승’, 렘4:25의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겔17:22-23의 백향목 아래 깃드는 ‘각종 새’가 그 예입니다. AC.40이 이 구절들을 연이어 제시하는 목적은 각 구절의 모든 세부 속뜻을 여기서 설명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번 글의 초점은 ‘새’가 말씀에서 단순히 자연계의 새만을 의미하지 않고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데 있습니다.

 

특히 렘4:25의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다’는 표현은 이런 독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문자 그대로만 읽으면 사람이 없어지자 새들까지 날아간 광경이지만,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선지서의 표현 안에 인간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AC.40에서는 그 가운데 ‘새들’이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뜻한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마지막으로 호2:18을 인용하는 이유도 중요합니다. 거기서는 주님께서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과 더불어 언약을 맺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스베덴보리는 바로 이 표현을 근거로 ‘들짐승’이 단순히 들짐승을, ‘새’가 단순히 새를 뜻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동물들과 영적인 의미의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이 본문의 궁극적인 뜻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은 스베덴보리가 말씀의 속뜻을 읽는 방법을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도 중요합니다. 그는 문자적 의미를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에 관한 더 깊은 의미가 들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여러 선지서에서 물고기와 새가 어떤 문맥에 놓이는지를 비교하면서 그 영적 의미를 밝혀 갑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할 것도 있습니다. ‘물고기 = 기억 지식’, ‘새 = 이성적·지적인 것들’이라는 대응을 알았다고 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모든 물고기와 모든 새를 문맥과 상관없이 기계적으로 같은 뜻으로 바꾸어 읽어서는 안 됩니다. AC.40 자체도 여러 말씀을 함께 제시하면서 그 문맥 안에서 대응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상응은 단어를 암호처럼 치환하는 작업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연결 속에서 살펴야 합니다.

 

또 하나 처음 읽는 독자가 궁금해할 수 있는 것은 ‘이성적인 것’과 ‘지적인 것’이 무엇이 다르기에 스베덴보리가 ‘그 가운데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고 따로 말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AC.40은 여기서 그 차이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번 본문만으로 둘을 억지로 명확하게 정의하기보다, 적어도 새가 인간의 단순한 기억 지식보다 높은 이성적·지적 영역을 나타내며 그중 지적인 것이 속 사람에 속한다는 정도를 먼저 붙드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문제는 별도로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다섯째 날의 첫 장면이 조금 더 선명해집니다. 앞에서는 사람이 진리와 선을 배우고 행하면서도 그것을 자기에게서 나온 것으로 여겼다면, 이제 사랑과 신앙으로 살아나면서 겉 사람의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것들도 살아 있는 영적 질서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조 이야기에서는 물속에 생물들이 번성하고 하늘에는 새들이 날기 시작합니다.

 

AC.40의 핵심은 지식을 버리고 이성을 억누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듭남이 진행되면서 인간에게 있는 기억 지식과 이성적·지적인 능력들이 어떤 영적 의미를 갖는지를 보여 줍니다. 물고기는 겉 사람의 기억 지식을, 새는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다섯째 날에 생물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제 이러한 것들도 앞의 AC.39에서 말한 ‘살아나는’ 상태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심화

1.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겉 사람에 속할까?

 

AC.40, 심화 1,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겉 사람에 속할까?

AC.40.심화1. ‘지적인 것들은 속 사람에 속한다’면 이성적인 것은 겉 사람에 속할까? AC.40에는 처음 읽으면 조금 걸리는 문장이 있습니다. ‘‘새들’은 일반적으로 이성적이고 지적인 것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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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1, 창1:20, ‘참된 생명의 근원 : 주님에게서 오는 것만이 살아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창1:20) AC.41 사람의 본성(own, proprium)에 속한 것은 그 자체로는 생명이 없으며, 그것을 눈으로 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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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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