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6:28은 문자로만 읽으면 위생 규정처럼 보입니다. 속죄제 고기를 토기에 삶았으면 그 그릇을 깨뜨리고, 유기에 삶았으면 그릇을 닦아 물로 씻으라고 합니다. 왜 하나는 아예 깨뜨려 버리고 다른 하나는 씻어서 다시 사용할 수 있게 했을까요?
놀랍게도 이 구절에는 스베덴보리의 매우 직접적인 해설이 있습니다. ‘아르카나코엘레스티아’(Arcana Coelestia, 1749-1756, AC) 10105(출29:31)는 레6:28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토기는 ‘선과결합하지않는거짓’을 의미하고, 유기는 ‘그안에선이있는교리적인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속죄제와 속건제의 고기를 그 안에서 삶는 것은 악과 거기에서 나오는 거짓으로부터 정결하게 되기 위한 준비를 의미한다고 밝힙니다.
이 설명에 따르면 왜 두 그릇의 처리가 달랐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선과 결합하지 않는 거짓은 씻어서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깨뜨려야 합니다. 거짓 자체를 조금 깨끗하게 만들어 계속 가지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거짓은 버려야 합니다. 반면 유기가 나타내는 것은 선이 들어 있는 교리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버려야 할 것이 아니라 잘못 붙어 있는 것을 제거하고 정결하게 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차이는 거듭남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모든 과거의 생각과 종교적 지식을 다 버려야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똑같이 처리하지 않으십니다. 악과 결합되어 진리를 완전히 왜곡시키는 거짓은 깨뜨리십니다. 그러나 불완전하게 이해했을 뿐 그 안에 선을 향한 마음이 있고 진리를 받을 수 있는 교리는 씻고 바로잡아 사용하십니다.
AC.10105는 ‘삶는다’는 것 자체도 설명합니다. 고기를 삶는 것은 선을 삶에 사용하기 위해 교리의 진리들을 통해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며, 물은 진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유기를 ‘닦고물로씻는것’은 단순한 세척이 아니라 교리적인 것을 진리로 정결하게 하여 선한 삶에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드는 매우 아름다운 표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잘못 알고 있던 교리가 있다고 합시다. 그 안에 완전히 거짓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러나 표현이 불완전하거나 이해가 부족했을 뿐 그 중심에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선이 있었다면 모든 것을 파괴할 필요는 없습니다. 말씀의 물로 씻고, 거짓된 부분을 제거하고, 더 밝은 진리 안에서 다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토기와 유기의 차이는 사람을 판단하는 데도 조심성을 줍니다. 어떤 사람의 신앙 이해가 잘못되어 있다고 해서 그 사람 안의 모든 것을 ‘토기’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만이 그 안에 선이 있는지 아십니다. 선과 결합할 수 없는 거짓은 깨뜨리시지만, 선을 품고 있으면서 아직 불완전한 이해는 진리를 통해 정결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레6:28은 거듭남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분별’의 과정임을 보여 줍니다. 무엇을 버려야 하고 무엇을 씻어야 하는지 구별하는 것입니다. 악과 결합된 거짓은 깨뜨리되, 선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진리로 씻어 보존합니다. 토기는 깨뜨리고 유기는 물로 씻으라는 짧은 한 절 안에 ‘주님께서우리의생각과교리를어떻게정결하게하시는가’라는 놀라운 아르카나가 숨어 있습니다. (SWC.레6심화5)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4:8)
AC.368
‘들’(field)이교리를상징하며,따라서신앙과체어리티의교리에속한모든것을상징한다는것은말씀에서분명합니다.예레미야에서,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consequently whatever belongs to the doctrine of faith and charity, is evident from the Word, as in Jeremiah:
여기서‘들’(field)은교리를상징하고,‘재산’(possessions)과‘보물’(treasures)은신앙의영적부요함,곧신앙의교리에속한것들을뜻합니다.같은예레미야에서, In this passage “field” signifies doctrine; “possessions” and “treasures” denote the spiritual riches of faith, or the things that belong to the doctrine of faith. In the same:
이는교회와그신앙을다루는말씀입니다.교리는그안에씨가있기때문에‘들’(field)이라합니다.같은에스겔에서, treating of the church and of its faith; for doctrine is called a “field” from the seed in it.In the same:
여기서‘들’(field)은교리를,‘나무들’(trees)은지식을,‘농부들’(husbandmen)은예배하는사람들을상징합니다.시편에서, where the “field” signifies doctrine, “trees” knowledges, and “husbandmen” worshipers.In David:
여기서밭이즐거워할수도없고숲의나무들이노래할수도없다는것은아주분명합니다.그러므로이는사람안에있는것들,곧신앙의지식들을뜻합니다.예레미야에서, where it is perfectly evident that the field cannot exult, nor the trees of the forest sing; but things that are in man, which are the knowledges of faith.In Jeremiah:
여기에서도땅이나들의채소가슬퍼할수있는것이아니며,이표현들이황폐함의상태에있는사람안의어떤것들을가리킨다는것은분명합니다.이와비슷한말씀이이사야에도있습니다. where it is also evident that neither the land nor the herbs of the field can mourn; but that the expressions relate to something in man while in a state of vastation.A similar passage occurs in Isaiah:
주님께서도시대의완성에관하여예언하시면서신앙의교리를‘들’(field)이라하십니다. The Lord also in his prediction concerning the consummation of the age calls the doctrine of faith a “field:”
여기서‘들’(field)은참된것이든거짓된것이든신앙의교리를뜻합니다.‘들’(field)이교리를상징하므로,신앙의씨를받는것은사람이든교회든세계든또한‘들’(field)이라합니다. where by a “field” is meant the doctrine of faith, both true and false.As a “field” signifies doctrine, whoever receives a seed of faith, whether a man, the church, or the world, is also called a “field.”
해설
AC.368은 바로 앞 AC.367에서 남겨 둔 한 가지를 집중적으로 확증합니다. AC.367에서는 체어리티가 신앙의 ‘형제’라는 것을 주로 설명했다면, 이제 AC.368에서는 ‘들(field)’이 교리를 상징하며, 더 구체적으로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교리에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씀 여러 곳을 통해 보여 줍니다. 이것은 창4:8의 ‘그들이들에있을때에’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일이 ‘들’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속뜻에서 분리된 신앙이 교리의 영역에서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왜 ‘들’이 교리를 상징할까요? AC.368은 그 이유를 매우 간결하게 보여 줍니다. 들은 씨가 뿌려지는 곳입니다. 에스겔의 말씀을 인용한 뒤 스베덴보리는 ‘교리는그안에씨가있기때문에들이라한다’고 설명합니다. 자연계에서 들이 씨를 받아 싹이 나고 자라 열매를 맺는 곳이라면, 영적으로 교리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진리가 받아들여지고 자라는 영역입니다. 따라서 ‘들=교리’라는 상응은 단순히 임의로 정해진 상징어가 아니라, 씨와 들의 관계를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서 창1에서 살펴본 ‘씨’의 의미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는 사람 안에 심기는 씨와 같고, 그 씨가 받아들여져 자랄 수 있는 곳이 필요합니다. AC.368에서는 바로 그 씨가 있는 곳이라는 점 때문에 교리를 ‘들’이라 합니다. 따라서 교리는 단순히 머릿속에 정리된 신학 명제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참된 교리는 주님에게서 오는 진리를 받아 보존하고, 그것이 신앙과 체어리티의 삶으로 자라도록 하는 밭과 같은 역할을 합니다.
예레미야의 ‘들의나의산’에 관한 말씀에서 ‘들’은 교리를 상징하고, ‘재산’과 ‘보물’은 신앙의 영적 부요함, 곧 신앙의 교리에 속한 것들을 뜻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인 재산과 보물의 언어가 말씀의 속뜻에서는 사람이 주님에게서 받은 영적인 부요함을 나타낼 수 있음을 봅니다. 교회가 가진 참된 부요함은 건물이나 재산이나 외적인 세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받은 선과 진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이 교리 안에 받아들여지고 보존될 때 교리는 영적 보물을 품은 ‘들’이 됩니다.
반대로 교리가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신앙의 교리가 없어진 시온이 ‘밭같이갈아엎어질것’이라는 렘26:18과 미3:12을 인용합니다. 들이 씨와 열매로 풍성할 수도 있고 황무지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교리 역시 참된 진리를 품을 수도 있고 진리를 잃어 황폐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들’이라는 상응 자체가 언제나 좋은 교리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AC.368마지막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두사람이밭에있으매한사람은데려가고한사람은버려둠을당할것’이라는 말씀을 설명하면서, 스베덴보리는 ‘들’이 참된 것이든 거짓된 것이든 신앙의 교리를 뜻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리’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자동으로 참된 것은 아닙니다. 교리는 씨를 품는 들이지만, 어떤 씨를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는 교리가 있는가 하면, 거짓을 신앙의 진리처럼 체계화하는 교리도 있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가인의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AC.362에서 가인이라 하는 사람들은 신앙을 사랑보다 더 본질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자기 사랑과 거기서 나온 판타지로 그것을 계속 확증했습니다. 그 결과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이 ‘들’에 있었다는 것은 단순한 장소 설명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가 교리의 문제로 들어갔음을 보여 줍니다.
요엘의 말씀은 ‘들’의 황폐함을 더욱 풍성한 상응으로 보여 줍니다. ‘밭이황무하고’, ‘곡식이진하여’, ‘새포도주가말랐고’, ‘기름이다하였으며’, ‘밭의모든나무가다시들었다’고 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들’을 교리, ‘나무들’을 지식, ‘농부들’을 예배하는 사람들로 설명합니다. 자연적인 농경의 황폐함을 묘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교리와 그 안의 지식들이 생명을 잃고 그것을 가지고 예배하는 사람들까지 황폐해지는 상태가 묘사됩니다. 교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단지 몇 가지 신학 명제가 잘못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믿으며 어떻게 예배하는가 하는 전체 질서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시96:12의 ‘밭과그가운데에있는모든것은즐거워할지로다그때숲의모든나무들이노래하리로다’라는 말씀과 사55:12의 ‘들의모든나무가손뼉을칠것이며’라는 말씀은 말씀의 속뜻이 왜 필요한지를 매우 알기 쉽게 보여 줍니다. 자연적인 밭이 실제로 즐거워할 수 없고 나무가 노래하거나 손뼉 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표현은 사람 안에 있는 살아 있는 영적 실재를 가리킵니다. 스베덴보리는 시편의 경우 그것을 ‘신앙의지식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말씀은 자연계의 사물들을 통하여 인간의 내적인 것과 천국적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렘12:4의 ‘땅이슬퍼하며온지방의채소가마른다’는 말씀은 황폐함(vastation)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땅이나 풀이 실제로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의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 황폐해지는 상태가 자연계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이처럼 같은 ‘들’과 그 안의 식물들이 어떤 곳에서는 기뻐하고 노래하며, 다른 곳에서는 마르고 황폐해지는 것은 교리와 지식이 그 안에 무엇을 받아들이고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 시대의 완성에 관하여 ‘그때에두사람이밭에있으매한사람은데려가고한사람은버려둠을당할것이요’라고 하신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인용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밭’을 신앙의 교리라고 설명하면서 특별히 ‘참된것이든거짓된것이든’이라고 덧붙입니다. 두 사람이 모두 같은 ‘밭’에 있다는 외적 사실만으로 그들의 내적 상태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교리에 속해 있고 말씀을 알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해서 모두 같은 영적 상태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사람이 그 진리를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것이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삶이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AC.368마지막에는 ‘들’의 의미가 한 단계 더 넓어집니다. 들이 교리를 상징하는 이유가 그 안에 씨가 있기 때문이라면, 신앙의 씨를 받는 것 역시 ‘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사람이든 교회든 세계든 신앙의 씨를 받는 것은 ‘들’이라 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에서 상응의 의미가 단순한 단어 대응보다 훨씬 유기적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들’은 교리를 뜻하지만, 더 넓게는 주님에게서 오는 신앙의 씨가 받아들여지고 자랄 수 있는 수용의 영역까지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 마음 역시 주님의 말씀이 심기는 하나의 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단지 많은 씨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많이 읽고, 많은 교리를 알고, AC의 많은 아르카나를 이해한다고 해도 그것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다면 바로 그 ‘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교리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자기 의와 우월감을 확증하는 수단이 되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며 사랑을 잃게 한다면 진리를 담아야 할 들이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장소로 변한 것입니다.
반대로 참된 교리는 아벨을 살립니다. 진리가 우리를 주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고, 자기 악을 보게 하며, 이웃을 더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을 행하게 한다면 그 교리는 좋은 씨가 자라는 들이 됩니다. 그러므로 AC.368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는올바른교리를알고있는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알고있는교리는내안에서무엇을자라게하고있는가?’까지 나아갑니다. 신앙의 들에서 체어리티가 살아 있는가, 아니면 신앙이라는 이름 아래 체어리티가 밀려나고 있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교리의 궁극적인 쓰임은 그 자체를 높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사람 안에서 결합되어 살아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열매를 맺게 하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에녹’(Enoch)이라하는교회는태고교회에계시되고그교회가퍼셉션한것들로부터교리를형성한것으로묘사됩니다.이교리는당시에는쓸모가없었지만후대의쓰임을위해보존되었습니다.이것을가리켜‘에녹이더이상있지아니하였으니,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기때문이라’(Enochwasnomore, becauseGodtookhim)고한것입니다.(22-24절)The church called “Enoch” is described as framing doctrine from what was revealed to and perceived by the most ancient church, which doctrine, although of no use at that time, was preserved for the use of posterity.This is signified by its being said that “Enochwasnomore, becauseGodtookhim.” (verses 22–24)
AC.464는 앞의 AC.463에서 일곱 번째 교회로 제시된 ‘에녹’이 다른 교회들과 구별되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줍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는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그 교회가 퍼셉션한 것들을 모아 ‘교리’로 형성하였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에녹이 새로운 진리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태고교회가 주님으로부터 계시받고 퍼셉션을 통해 알았던 것들을 일정한 교리 형태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상태와 이후 교회의 상태가 달라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태고교회는 무엇이 선이고 참인지를 교리로 배워서 아는 교회가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안에서 그것을 퍼셉션하던 천적 교회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퍼셉션이 살아 있던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이미 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따로 교리 형태로 정리하여 배우는 일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AC.464가 에녹이 형성한 교리가 ‘당시에는쓸모가없었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는 ‘후대의쓰임을위해’ 보존되었습니다. 이 짧은 표현 안에는 교회의 상태가 앞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사실이 들어 있습니다. 태고교회와 같은 퍼셉션이 계속 유지된다면 별도의 교리가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그것이 사라져 갈 때에는 이전에 퍼셉션으로 알았던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보존하고 전달할 필요가 생깁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가 한 일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퍼셉션으로 받아들였던 것들을 교리 형태로 남김으로써 후대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교리’는 퍼셉션을 대신하여 에녹이 만들어 낸 인간적인 사상이 아닙니다. 그 근원은 여전히 주님으로부터 태고교회에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들입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교회의 상태가 달라짐에 따라, 이전에는 내적으로 직접 퍼셉션하던 것이 이제는 가르치고 배우며 보존할 수 있는 형태로 옮겨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에녹은 태고교회의 퍼셉션과 이후 교회가 사용할 교리 사이에 놓인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 줍니다.
이와 연결되는 말씀이 ‘하나님이그를데려가시므로세상에있지아니하였더라’입니다. 장 개요에서 스베덴보리는 이 말씀을 에녹이라는 교회가 형성한 교리가 ‘후대의쓰임을위해보존되었다’는 뜻으로 설명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이그를데려가셨다’는 말씀은 장 개요의 속뜻으로는 에녹이라는 교회의 역할과 그 교리가 보존된 일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의 보다 구체적인 의미는 뒤의 본문 해설에서 다시 자세히 다루어집니다.
AC.464에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주님께서 한 교회의 상태가 변해 가는 가운데서도 다음 시대에 필요한 것을 미리 보존하신다는 점입니다. 태고교회의 퍼셉션은 계속 같은 방식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들에게 계시되고 퍼셉션된 것이 함께 사라지도록 두지 않으셨습니다. 에녹이라 하는 교회를 통하여 그것을 교리 형태로 보존하여 후대의 쓰임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에녹의 이야기는 단순히 한 교회의 상태만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가 달라질 때에도 진리가 다음 세대에 전달될 길을 마련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함께 보여 줍니다. (AC.464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