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

‘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그것들은 자연의 가장 바깥 차원에 있기 때문에 거기에 숫자들이 적용될 수밖에 없다는 점만 말해 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시간들과 척도들이 말씀에 사용될 때에는 언제나 날들과 해들의 숫자들뿐 아니라 척도의 숫자들까지도, 그 숫자의 의미에 따라 시간과 척도에서 추상된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테면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은 거룩하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위에서 설명하였습니다. 또한 희년은 마흔아홉째 해마다 선포하여 쉰째 해에 지키도록 하였고, 이스라엘의 지파들은 열둘이었으며 주님의 사도들도 같은 수였고, 장로들은 일흔이었으며 주님의 제자들도 그와 같은 수였습니다. 이 밖에도 많은 경우에 숫자들은 그것들이 적용된 대상에서 추상된 고유한 의미를 가지며, 이처럼 추상될 때 그 숫자들이 의미하는 것은 상태들입니다. That by “days” and “year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needs no further explication, except to say that in the world there must needs be times and measures, to which numbers may be applied because they are in the ultimates of nature; but whenever they are applied in the Word, the numbers of the days and years, and also of the measures, have a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imes and measures, in accordance with the signification of the number; as where it is said that there are six days of labor, and that the seventh is holy, of which above; that the jubilee should be proclaimed every forty-ninth year, and should be celebrated in the fiftieth; that the tribes of Israel were twelve, and the apostles of the Lord the same; that there were seventy elders, and as many disciples of the Lord; and so in many other instances where the numbers have a special signification 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and when thus abstracted, then it is states that are signified by the numbers.

 

해설

AC.493은 앞의 AC.487에서 시작된 말씀의 숫자에 관한 설명을 한 단계 더 분명하게 합니다. 핵심은 ‘말씀에 숫자가 나오면 시간이나 수량은 아무 의미가 없고 오직 상징적인 뜻만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자연계에서는 시간과 척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정합니다. 자연계는 ‘자연의 가장 바깥 차원’(ultimates of nature)에 있기 때문에 날과 해, 길이와 수량처럼 측정할 수 있는 형태가 필요하고, 거기에 숫자가 붙습니다. 문제는 말씀이 그 자연적인 숫자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그 안에 더 깊은 의미를 담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AC.493에서 중요한 표현은 ‘적용된 대상에서 추상된’(abstractedly from the things to which they are applied)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일곱’이라는 숫자가 날에 붙으면 일곱 날이 되고, 해에 붙으면 일곱 해가 되며, 어떤 사람이나 사물의 수에 붙으면 일곱 사람 또는 일곱 사물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의 속뜻에서는 그 외적인 대상에서 숫자를 추상하여 그 숫자 자체가 나타내는 영적인 의미를 봅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그렇게 추상되었을 때 숫자가 궁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은 ‘상태들’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때문에 말씀에서 어떤 숫자가 반복되는 것은 우연한 수치의 일치로만 볼 수 없습니다.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하는 것, 마흔아홉째 해 뒤에 쉰째 해를 희년으로 지키는 것, 이스라엘의 지파가 열둘이고 주님의 사도도 열둘인 것, 장로가 일흔이고 주님께서 보내신 제자들도 일흔인 것은 서로 전혀 다른 역사적 사건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숫자가 서로 다른 대상에 적용되면서도 그 숫자에 고유한 영적 의미를 유지하기 때문에, 말씀 전체 안에서 일정한 질서와 상응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숫자의 의미를 기계적인 암호 풀이로 바꾸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7은 언제나 이것, 12는 언제나 저것’이라는 식으로 숫자 하나에 하나의 한국어 뜻을 붙이는 방식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숫자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습니다. 숫자는 고유한 기본 의미를 지니지만, 실제로 어떤 상태를 나타내는지는 그 숫자가 사용된 문맥과 대상에 따라 살펴야 합니다. 특히 AC.487이 말했듯이 800이나 930 같은 합성된 큰 숫자에는 여러 상태와 그 변화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단순한 숫자 하나처럼 곧바로 풀어서는 안 됩니다.

 

이 원리는 창5의 긴 연수들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합니다. ‘아담이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말씀에서 930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으로는 연수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그 숫자를 자연적인 ‘930년’이라는 시간 단위에서 추상하여 그 안에 담긴 교회의 상태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AC.492가 ‘날들과 해들’을 시대와 상태로 설명한 데 이어 AC.493은 그 상태가 말씀의 숫자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이 글은 우리가 왜 창5의 숫자들을 성급하게 하나씩 해독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AC.487에서 800과 930을 비롯한 뒤의 숫자들에는 너무 많은 상태 변화가 들어 있어 여기서 하나하나 설명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독자에게 필요한 것은 먼저 각 숫자의 암호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숫자가 자연적인 시간과 척도를 통하여 영적인 상태를 표현한다는 원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결국 AC.493은 자연계와 영계가 서로 무관한 두 세계가 아니라 상응을 통하여 연결되어 있음을 숫자의 경우를 통해 보여 줍니다. 자연계에서는 상태가 시간과 척도와 수량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말씀은 바로 그 자연적인 형식을 사용하여 영적인 상태를 담아냅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 기록된 숫자를 무시할 수도 없고, 반대로 문자적인 수량에만 붙잡혀서도 안 됩니다. 문자에 있는 숫자를 존중하면서 그 숫자를 통해 주님께서 어떤 영적 상태와 질서를 나타내시는지를 살피는 것, 이것이 AC.493이 제시하는 말씀의 숫자를 읽는 기본 원리입니다. (AC.493 해설)

 

 

 

창5:5, AC.494, ‘퍼셉션의 죽음과 유전적 악의 누적’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4그가 ‘죽었다’(died)는 것이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은 ‘죽다’(die)라는 말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곧

bygrace.kr

 

창5:5, AC.492, ‘사라진 퍼셉션을 의미하는 사람의 죽음’(AC.492-495)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And all the days that man lived were nine hundred and thirty years, and he died. (창5:5)

 

AC.492

여기서 ‘날들’(days)과 ‘해들’(years)은 위에서와 같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하며, ‘사람이 죽음’(man’s dying)은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By “days” and “years” are he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as above; by “man’s dying” is signified that such perception no longer existed.

 

해설

AC.492는 창5:5의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라는 말씀의 속뜻을 아주 간결하게 밝힙니다. 앞의 AC.486-488에서 ‘날들’과 ‘해들’이 단순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교회의 시대와 상태를 의미한다고 설명했다면, 이제 ‘죽었더라’ 역시 한 개인의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 교회를 특징짓던 특정한 내적 상태의 종결을 의미한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특히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단순히 ‘교회가 없어졌다’고 하지 않고 ‘그러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창5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을 구별하는 핵심적인 특징이 퍼셉션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의 AC.483과 AC.491에서 보았듯이 이 교회들은 선과 진리를 내적으로 퍼셉션했으며, 각각의 교회는 그 퍼셉션의 어떠함에 따라 서로 구별되었습니다. 따라서 한 교회의 ‘죽음’은 그 교회를 그 교회 되게 하던 고유한 퍼셉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창5의 반복되는 ‘죽었더라’를 읽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사람이 오랜 세월을 살다가 죽고 다음 세대로 넘어가는 족보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한 교회의 상태가 일정한 과정을 거친 뒤 끝나고 다른 교회적 상태로 넘어가는 역사가 펼쳐집니다. 그러므로 ‘낳았으며’가 교회의 계승과 그 안에서 산출된 선과 진리를 보여 준다면, ‘죽었더라’는 그 교회의 고유한 퍼셉션이 마침내 소멸한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음’을 곧바로 모든 선과 진리의 완전한 소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한 교회의 특정한 퍼셉션이 끝났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에 관한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앞의 AC.491이 태고교회를 ‘다른 모든 후대 교회들의 으뜸이며 어버이인 교회’라고 한 것처럼, 한 교회의 상태가 끝나면서도 그로부터 이어지는 것이 다음 교회에 전달됩니다. 창5의 ‘낳음’과 ‘죽음’이 함께 기록되는 것은 바로 이 계승과 변화의 두 측면을 보여 줍니다.

 

이 점에서 ‘죽음’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육체가 살아 있느냐 죽었느냐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말씀은 사람과 교회 안에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생명이 살아 있는지를 묻습니다. 태고교회의 경우 그 생명의 대표적인 형태가 퍼셉션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퍼셉션이 사라졌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지식이나 특별한 능력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교회를 특징짓던 주님과의 내적 교통 방식이 더 이상 이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 짧은 글은 앞으로 창5에서 반복될 ‘죽었더라’를 단순한 족보의 마침표가 아니라 교회의 상태 변화로 읽도록 준비시킵니다. 교회에는 시작과 성장뿐 아니라 쇠퇴와 종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변화 가운데서도 주님은 다음 교회를 준비하시고 선과 진리가 완전히 끊어지지 않도록 보존하십니다. 그러므로 창5의 계보는 교회들이 단순히 생겨났다 사라지는 기록이라기보다, 한 상태가 끝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 다음 상태를 이어 가시는 섭리의 역사로 읽을 수 있습니다. (AC.492 해설)

 

 

 

창5:5, AC.493, ‘시간과 척도를 넘어 상태를 나타내는 말씀의 숫자’

그는 구백삼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창5:5) AC.493‘날들’(days)과 ‘해들’(years)이 시대들과 상태들을 의미한다는 것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세상에서는 시간들과 척도들이 반드시 있

bygrace.kr

 

창5:4, AC.491, ‘교회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는 아들들과 딸들’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91이 장에서 ‘아들들’(sons)과 ‘딸들’(daughters)(4, 7, 10, 13, 16, 19, 26, 30절)도 같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떠한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

‘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서는, That “days” signify states in general, and “years” states in special, appears from the Word, as in Ezekiel:

 

네 날이 가까웠고 네 연한이 찼도다 (겔22:4) Thou hast caused thy days to draw near, and art come even unto thy years, (Ezek. 22:4)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가증한 일을 행하고 자기 죄의 분량을 채우는 자들에 관한 말씀으로, 그들의 일반적인 상태에 대해서는 ‘날들’이라 하고 특별한 상태에 대해서는 ‘해들’이라 합니다. 이와 같이 시편에서는, speaking of those who commit abominations, and fill up the measure of their sins, of whose state in general are predicated “days,” and in special “years.” So in David:

 

주께서 왕에게 장수하게 하사 그의 나이가 여러 대에 미치게 하시리이다 (시61:6) Thou shalt add days to the days of the king, and his years a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Ps. 61:6)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주님과 그분의 나라에 관한 말씀으로, 여기서도 ‘날들’과 ‘해들’은 그분의 나라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speaking of the Lord and of his kingdom, where also “days” and “years” signify the state of his kingdom. Again:

 

내가 옛날 곧 지나간 세월을 생각하였사오며 (시77:5) I have considered the “days of old,” the years of the ages, (Ps. 77:5)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옛날’(days of old)은 태고교회의 상태들을, ‘지나간 세월’(years of the ages)은 고대교회의 상태들을 의미합니다. 이사야에서는, where “days of old” signify states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years of the ages,” states of the ancient church. In Isaiah:

 

이는 내 원수 갚는 날이 내 마음에 있고 내가 구속할 해가 왔으나 (사63:4) The day of vengeance is in my heart, and the year of my redeemed is come, (Isa. 63:4)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지막 때에 관한 말씀으로, ‘원수 갚는 날’(day of vengeance)은 정죄의 상태를, ‘구속할 해’(year of the redeemed)는 복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 speaking of the last times, where the “day of vengeance” signifies a state of damnation, and the “year of the redeemed” a state of blessedness. Again: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사61:2) To proclaim the acceptable year of the Lord, and the day of vengeance of our God; to comfort all that mourn, (Isa. 61:2)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도 ‘날’과 ‘해’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where both “days” and “years” signify states. In Jeremiah: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애5:21) Renew our days as of old, (Lam. 5:21)

 

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where state is plainly meant.

 

[2] 요엘에서는, In Joel:

 

1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 (욜2:1, 2) The day of Jehovah cometh, for it is nigh at hand, a day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a day of cloud and of obscurity; there hath not been ever the like, neither shall be after it, even to the years of generation and generation, (Joel 2:1–2)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날’은 각 사람에게는 개별적으로, 모든 사람에게는 일반적으로 어둠과 캄캄함, 구름과 흑암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스가랴에서는, where “day” signifies a state of darkness and of thick darkness, of cloud and of obscurity, with each one in particular, and with all in general. In Zechariah:

 

9내가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거하리라 10그 날에 너희가 각각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리라 (슥3:9, 10) I will remove the iniquity of that land in one day; in that day shall ye cry a man to his companion under the vine, and under the fig tree. (Zech. 3:9–10)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슥14:7) It shall be one day which is known to Jehovah, not day nor night, and it shall come to pass tha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Zech. 14:7)

 

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neither day nor night) 날이 있으며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라’(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고 하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의 말씀에서도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where it is plain that state is meant, for it is said that there shall be a day that is “neither day nor night, at evening time it shall be light.” The same appears from expressions in the Decalogue: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오직 온전하고 공정한 저울추를 두며 온전하고 공정한 되를 둘 것이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네 날이 길리라 (신5:16; 25:15) Hono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prolonged, and that it may be well with thee upon the ground, (Deut. 5:16; 25:15)

 

여기서 ‘날들이 길어진다’(days prolonged)는 것은 생명의 기간이 길어진다는 뜻이 아니라 행복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where to have the “days prolonged” does not signify length of life, but a happy state.

 

[3] 문자적 의미에서는 ‘날’이 시간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천사들은 시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시간을 구별해 주는 해와 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날들과 해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오직 상태와 그 변화만을 압니다. 그러므로 내적 의미 안에 있는 천사들 앞에서는 물질과 공간과 시간에 속한 모든 것이 사라집니다. 에스겔의 다음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서 그러한 것들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In the literal sense it must needs appear as if “day” signifies time, but in the internal sense it signifies stat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do not know what time is, for they have no sun and moon that distinguish times; consequently they do not know what days and years are, but only what states are and the changes thereof; and therefore before the angels, who are in the internal sense, everything relating to matter, space, and time disappears, as in the literal sense of this passage in Ezekiel:

 

그날이 가깝도다 여호와의 날이 가깝도다 구름의 날일 것이요 여러 나라들의 때이리로다 (겔30:3) The day is near, even the day of Jehovah is near, a day of cloud; it shall be the time of the nations, (Ezek. 30:3)

 

여기서 ‘구름의 날’(day of cloud)은 구름, 곧 거짓을 의미하고, ‘여러 나라들의 날’(day of the nations)은 여러 나라들, 곧 악을 의미하며, ‘여호와의 날’(day of Jehovah)은 황폐를 의미합니다. 또한 요엘에서는, where a “day of cloud” signifies a cloud, or falsity; the “day of the nations” signifies the nations, or wickedness; the “day of Jehovah” signifies vastation. and of this in Joel:

 

슬프다 그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욜1:15) Alas for the day! For the day of Jehovah is at hand, and as vastation shall it come, (Joel 1:15)

 

라고 하였습니다. 시간이라는 관념이 제거되면 그 시간에 존재했던 것들의 ‘상태’라는 관념이 남습니다. 이 장에서 그토록 자주 언급되는 ‘날들’과 ‘해들’도 이와 같습니다. When the notion of time is removed, there remains the notion of the state of the things which existed at that time. The case is the same with regard to the “days” and “years” that are so often mentioned in this chapter.

 

해설

AC.488은 왜 창5의 ‘날들’과 ‘해들’을 단순한 시간으로 읽지 않고 교회의 상태로 읽어야 하는지를 말씀의 여러 본문을 통해 입증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가 문자에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 표현 안에 천국에서 받아들여지는 더 깊은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문자에서는 ‘날’과 ‘해’이지만, 내적 의미에서는 그것들이 ‘상태와 상태의 변화’가 됩니다.

 

첫째, 인용된 말씀들을 보면 ‘날’이 단순한 24시간을 뜻한다고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여호와의 날’, ‘보복의 날’, ‘구속할 해’,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닌 한 날’과 같은 표현에서 중요한 것은 달력상의 어느 날짜가 아니라 그때 나타나는 영적 상태입니다. 특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며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다’는 표현은 문자적 시간의 틀만으로는 그 의미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습니다. ‘날’이 상태를 나타낸다는 원리를 적용할 때 그 말씀의 속뜻이 열립니다.

 

둘째, AC.488은 ‘날들’과 ‘해들’의 관계를 다시 확인합니다. ‘날들’은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은 그 안의 특별한 상태들을 나타냅니다. 시77:5의 ‘옛날’과 ‘지나간 세월’을 각각 태고교회와 고대교회의 상태로 설명하는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따라서 창5에서 한 교회의 ‘모든 날들’이 언급되고 그 안에 구체적인 ‘해들’이 기록되는 것은, 한 교회의 전체적인 상태와 그 안에서 일어난 보다 세부적인 상태 변화들을 함께 나타내는 것입니다.

 

셋째, 이 글의 가장 중요한 설명은 [3]에 있습니다. 천사들은 우리와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생각하지 않으며 ‘상태와 그 변화’를 지각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천사들이 아무런 순서나 변화를 경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는 분명히 있지만 그것을 지상의 해와 달, 날과 해라는 물리적 시간 단위로 측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문자가 천국에 이르면 시간에 속한 관념은 벗겨지고, 그 시간 동안 일어난 영적 실재, 곧 상태와 그 변화가 남습니다.

 

이것은 ‘상응’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 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는 우리의 삶이 시간의 연속 안에서 펼쳐집니다. 기쁨의 때, 시험의 때, 무지의 때, 깨달음의 때가 모두 ‘언제’라는 시간 속에서 경험됩니다. 그러나 그 시간 자체가 우리의 영적 삶의 본질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시간 동안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입니다. 그래서 문자에서는 시간으로 표현된 것이 천국에서는 그 시간에 담긴 상태로 지각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를 창5에 적용하면 800년이나 930년이라는 숫자를 바라보는 관점도 달라집니다. AC.487이 이 숫자들 안에 교회의 수많은 상태 변화가 들어 있다고 설명했다면, AC.488은 왜 그러한 해석이 가능한지를 천사들의 말씀 이해 방식에서 설명합니다. 문자에서는 수백 년이라는 시간이 보이지만, 시간의 관념이 제거되면 그 시간에 해당하는 교회의 상태와 그 변화가 남는 것입니다. 따라서 창5의 긴 연수들은 속뜻에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어떤 상태들을 거쳐 갔는지를 담는 그릇이 됩니다.

 

그러므로 ‘천사들은 시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문장을 ‘천국에는 아무런 변화나 순서도 없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488 자체가 천사들은 ‘상태와 그 변화’를 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지상에서는 변화의 연속을 주로 시간으로 경험하지만, 천국에서는 그것이 사랑과 신앙, 지혜와 행복 등 내적 상태의 변화로 경험되는 것입니다. 시간은 사라져도 삶의 변화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이라는 외적 틀을 벗고 그 안에 있던 영적 실재가 드러나는 셈입니다.

 

결국 AC.488은 창5의 연수를 해석하는 문제를 넘어 말씀의 속뜻 자체가 어떤 차원의 언어인지를 보여 줍니다. 문자에는 사람과 장소와 시간과 숫자가 기록되어 있지만, 천사들은 그 안에서 선과 진리, 사랑과 신앙, 그리고 상태와 그 변화를 지각합니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관념이 제거되면 그 시간에 존재했던 것들의 상태라는 관념이 남는다’는 마지막 설명은 이 글 전체를 압축합니다. 창5의 ‘날들’과 ‘해들’을 상태로 읽는 것은 숫자를 임의로 상징화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지상적 표현 안에 담긴 천국의 실재를 읽는 일입니다. (AC.488 해설)

 

 

 

창5:4, AC.489, ‘교회가 낳는 아들들과 딸들, 진리와 선’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9‘아들들과 딸들’(sons and daughters)이 그들이 퍼셉션한 진리들과 선들을 의미하며, 특히 ‘아들들’(sons)은 진리들을, ‘딸

bygrace.kr

 

창5:4, AC.487, ‘날들과 해들에 기록된 교회의 상태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7

‘날들’(days)이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1장에서 보여 주었습니다. 거기서 창조의 ‘날들’은 다른 어떤 것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말씀에서는 모든 시간을 ‘날들’이라 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인데, 이는 이 구절과 뒤이어 나오는 구절들(5, 8, 11, 14, 17, 20, 23, 27, 31절)에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상태들도 일반적으로 ‘날들’에 의해 의미됩니다. 그리고 ‘해들’(years)이 덧붙여질 때에는 그 해들의 시기들에 의해 상태들의 어떠함이 의미되며, 따라서 특별한 상태들이 의미됩니다. 태고인들은 숫자들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로 교회와 관련된 여러 가지 것들을 의미했습니다. 이를테면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숫자들과, 이것들과 다른 숫자들을 조합하여 만든 많은 수들이 있었고, 그것들로 교회의 상태들을 묘사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들은 설명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한 아르카나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상태를 헤아리고 기록한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은 말씀의 많은 곳, 특히 예언서들에도 나타납니다. 유대교회의 의식에도 시간과 측량에 관한 숫자들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희생 제사와 소제와 봉헌물과 그 밖의 것들에 관한 숫자들이 그러하며, 그것들은 적용되는 바에 따라 어디에서나 거룩한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여기 ‘팔백’이라는 수와 다음 절의 ‘구백삼십’, 그리고 이어지는 여러 구절의 연수에 담겨 있는 것들, 곧 각 교회의 일반적인 상태에 적용된 그 교회의 상태 변화들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 이 저작의 뒤에서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둘’까지의 단순한 숫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 줄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의 의미를 알기 전에는 조합된 숫자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That by “days” are signified times and states in general, was shown in the first chapter, where the “days” of creation have no other signification. In the Word it is very usual to call all time “days,” as is manifestly the case in the present verse, and in those which follow (5, 8, 11, 14, 17, 20, 23, 27, 31); and therefore the states of the times in general are likewise signified by “days”; and when “years” are added, then by the seasons of the years are signified the qualities of the states, thus states in special. The most ancient people had their numbers, by which they signified various things relating to the church, as the numbers “three,” “seven,” “ten,” “twelve,” and many that were compounded of these and others, whereby they described the states of the church; wherefore these numbers contain arcana which would require much time to explain. It was an account or reckoning of the states of the church. The same thing occurs in many parts of the Word, especially the prophetical. In the rites of the Jewish church also there were numbers, both of times and measures, as for instance in regard to the sacrifices, meat offerings, oblations, and other things, which everywhere signify holy things, according to their application. The things here involved, therefore, in the number “eight hundred,” and in the next verse, in the number “nine hundred and thirty,” and in the numbers of years in the verses following—namely, the changes of state of their church as applied to their own general state—are too many to be recounted. In a future part of this work, of the Lord’s Divine mercy we shall take occasion to show what the simple numbers up to “twelve” signify, for until the signification of these is known, it would be impossible to apprehend the signification of the compound numbers.

 

해설

AC.487은 앞의 AC.482와 AC.486에서 제시한 원리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날들’은 교회의 상태를 일반적으로 나타내고, ‘해들’은 그 일반적인 상태 안에 들어 있는 특별한 상태와 그 어떠함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창5에 반복되는 ‘그의 모든 날은 몇 년이었다’는 표현은 속뜻에서 단순한 수명 계산이 아니라 한 교회가 존속하는 동안 겪은 전체적인 상태와 그 안의 여러 변화를 묘사하는 언어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첫 근거로 창1의 창조의 ‘날들’을 듭니다. 창조의 여섯 날이 거듭남의 연속적인 상태들을 의미했던 것처럼, 창5의 날들도 단순히 24시간 단위의 날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것은 창1과 창5가 서로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서도 중요합니다. 창1에서 한 사람 또는 교회가 주님에 의해 거듭나는 상태들이 ‘날들’로 묘사되었다면, 창5에서는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이 거쳐 간 상태들이 다시 시간의 언어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AC.487은 여기서 숫자 자체의 의미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태고인들은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단순한 숫자들로 교회에 속한 여러 상태를 표현했고, 이 숫자들을 서로 조합하여 더 복잡한 상태들도 나타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창5의 800이나 930과 같은 큰 숫자를 곧바로 하나의 간단한 상응으로 바꾸어 ‘800은 이것, 930은 저것’이라고 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여러 단순한 수가 결합된 숫자이며, 그 안에는 각 교회가 겪은 복합적인 상태 변화가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 자신도 여기서 800과 930의 의미를 하나하나 풀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포함된 교회의 상태 변화가 ‘너무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말씀의 숫자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절제의 원칙을 보여 줍니다. 숫자에 속뜻이 있다는 사실과 우리가 그 숫자의 모든 의미를 곧바로 해독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먼저 셋, 일곱, 열, 열둘과 같은 기본적인 숫자의 의미와 그것들이 말씀 전체에서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알아야 조합된 숫자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가 유대교회의 희생 제사와 소제와 봉헌물 등의 숫자를 함께 언급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말씀에서 숫자는 단순한 계산상의 장식물이 아니라, 그것이 적용되는 대상과 문맥에 따라 거룩한 것들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제물의 수, 기간, 측량 등이 예배의 영적 실재를 표상했던 것처럼, 창5의 연수 역시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내적 상태를 표현합니다. 숫자의 의미는 숫자만 떼어 내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무엇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특히 ‘그것은 교회의 상태를 헤아리고 기록한 것이었다’는 설명은 창5의 족보를 바라보는 관점을 크게 바꾸어 놓습니다. 문자에서는 아담이 몇 살에 셋을 낳았고 이후 몇 년을 더 살았으며 모두 몇 세에 죽었는지를 계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속뜻에서는 한 교회가 어떤 상태에서 시작하여 어떤 변화들을 거쳤으며 그 전체적인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헤아리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5의 숫자들은 사람의 나이를 세는 계산표라기보다 교회의 상태를 기록하는 영적 언어인 셈입니다.

 

이 점은 앞의 AC.483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셋, 에노스, 게난, 마할랄렐 등의 이름들이 각각 서로 다른 교회를 나타내고 그 교회들이 주로 퍼셉션의 차이로 구별되었다면, 각 이름 옆에 기록된 연수는 그 서로 다른 교회들의 상태와 그 상태의 변화를 표현합니다. 따라서 창5에서는 ‘이름’과 ‘숫자’를 따로 떼어 읽을 수 없습니다. 이름은 어떤 교회인지를 보여 주고, 숫자는 그 교회의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묘사합니다.

 

결국 AC.487은 창5의 기이하게 긴 수명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 매우 중요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중요한 질문은 ‘고대 사람들이 정말 800년, 900년을 살 수 있었는가?’에 머물지 않습니다. 말씀 안에서 주님께서 왜 바로 그 숫자들을 사용하셨으며, 그것들을 통해 교회의 어떤 상태와 변화를 나타내셨는가가 핵심입니다. 아직 그 모든 숫자의 아르카나를 우리가 풀어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창5의 숫자들이 무의미한 장식도 아니고 단순한 연대 자료만도 아니라는 것, 그것들이 태고교회와 그 후대 교회들의 상태 변화를 담아내는 말씀의 정교한 언어라는 사실을 AC.487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AC.487 해설)

 

 

 

창5:4, AC.488, ‘천사들에게 시간은 상태와 그 변화’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5:4) AC.488‘날들’(days)이 일반적인 상태를, ‘해들’(years)이 특별한 상태를 의미한다는 것은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에스

bygrace.kr

 

창5:4, AC.486, '날들과 해들, 아들들과 딸들의 의미'(AC.486-491)

아담은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And the days of man after he begat Seth were eight hundred years, and he begat sons and daughters. (창5:3) AC.486‘날들’(days)은 일반적인 시간과 상태를 의미하

bygrace.kr

 

Posted by bygracetistor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