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6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땅’(ground)의 의미에서 분명합니다. ‘땅’은 순수한 의미에서는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앞에서 보여 준 것처럼 교회가 고백하는 모든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말의 의미는 반드시 다루는 주제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신앙을 잘못 고백하는 자들, 곧 분열 또는 이단을 고백하는 자들도 역시 ‘땅’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여기서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은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That to be “cast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is to be separated from all the truth of the church is evident from the signification of “ground,” which, in the genuine sense, is the church, or the man of the church, and therefore whatever the church professes, as shown above. The meaning of a word necessarily varies with the subject treated of, and therefore even those who wrongly profess faith, that is who profess a schism or heresy, are also called “ground.” Here however to be “driven out from the faces of the ground” signifies to be no longer in the truth of the church.

 

해설

AC.386은 바로 앞 AC.385에서 ‘지면에서 쫓겨나는 것’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 해석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 출발점은 ‘땅’의 의미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땅’이 순수한 의미에서는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을 의미하며, 따라서 교회가 고백하고 가르치는 것들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장소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속뜻에서는 교회의 진리가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 더 이상 그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번 번호에서 특히 주목할 문장은 ‘어떤 말의 의미는 반드시 다루는 주제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의 상응을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땅은 언제나 교회다’, ‘물은 언제나 진리다’, ‘빛은 언제나 신앙이다’라는 식으로 하나의 자연적 대상에 하나의 영적 의미를 기계적으로 대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상응의 중심은 있지만, 실제 본문에서 그 의미가 어떻게 나타나는지는 그 단어가 놓여 있는 전체 문맥과 현재 다루고 있는 영적 상태에 따라 결정됩니다.

 

바로 ‘땅’이 좋은 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순수한 의미에서 ‘땅’을 교회 또는 교회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곳이며, 교회의 사람 역시 선과 진리가 심어지는 하나의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앞의 AC.377에서도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안에 선들과 진리들이 심어지면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이 심어지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땅이라는 상응의 중심에는 ‘무엇인가가 심어지고 받아들여지는 곳’이라는 개념이 놓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가인의 분열이나 이단도 ‘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바로 이번 번호에서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신앙을 잘못 고백하는 자들, 곧 분열 또는 이단을 고백하는 자들도 하나의 ‘땅’이라고 불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 역시 어떤 교리적 원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배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땅’이라는 단어 자체가 언제나 선한 교회를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그 땅에 심어져 있으며, 어떤 교리가 그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80-381에서 ‘땅을 간다’는 표현이 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었는지도 설명해 줍니다. 일반적으로 땅을 가는 것은 좋은 씨를 심고 열매를 얻기 위한 긍정적인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문맥의 ‘땅’은 이미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한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땅을 간다는 것은 선과 진리를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분열된 교리를 계속 배양하고 확증하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땅’과 ‘경작’이라는 이미지도 현재 다루는 주제가 무엇인가에 따라 속뜻의 성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상응의 의미가 문맥에 따라 아무렇게나 바뀐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균형입니다. 만일 상응의 의미가 아무런 질서 없이 매번 달라진다면 말씀의 내적 의미를 객관적으로 읽을 수 없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그런 임의성이 아닙니다. ‘땅’에는 여전히 교회, 교회의 사람, 그리고 그 사람 안에 받아들여지는 교리와 같은 일관된 의미망이 있습니다. 다만 그 교회나 사람이 주님의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는 상태인지, 아니면 그것을 왜곡하여 분열과 이단을 받아들인 상태인지에 따라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응은 고정된 낱말사전도 아니지만 무제한적인 상징 놀이도 아닙니다. 말씀 전체의 의미망과 현재의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이 원리는 AC를 읽는 데 실제로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번호에서 ‘땅=교회’라고 배웠다고 해서 이후 모든 ‘땅’을 무조건 ‘교회’라는 한 단어로 바꾸어 읽으면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놓칠 수 있습니다. 이번 번호에서처럼 ‘교회의 사람’, ‘교회가 고백하는 것’, 심지어 왜곡된 교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까지 그 의미가 확장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상응어를 만날 때 ‘이 단어는 무엇을 뜻하는가?’만 묻기보다 ‘왜 바로 이 문맥에서 이 의미로 사용되는가?’를 함께 물어야 합니다.

 

이제 이러한 원리를 현재 구절에 적용하면 ‘지면에서 쫓겨난다’는 의미가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마지막에 다시 ‘여기서는’이라고 범위를 한정합니다. 여기서 그것은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가인은 단순히 자신이 살던 토지에서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마침내 교회의 진리 안에 있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점에서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된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교단이나 외적인 교회 조직에서 제명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속뜻에서 교회는 사람 안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살아갈 때 그 사람 안에 교회가 있습니다. 반대로 외적으로는 여전히 교회에 속해 있고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며 교리를 고백하더라도,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 진리를 삶에서 거부한다면 내적으로는 교회의 진리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가인의 추방은 바로 이러한 내적인 분리를 보여 줍니다.

 

또한 여기서도 주님께서 먼저 가인을 진리 밖으로 내던지셨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앞에서 ‘저주’가 선에서 돌아선 상태를 의미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가인은 자신이 받아들이고 확증한 분열 때문에 더 이상 교회의 진리 안에 있지 않게 됩니다. 진리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면 진리의 생명을 잃고, 결국 무엇이 진리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나아갑니다. AC.382의 ‘피하며 유리함’과 이번 번호의 ‘교회의 진리에서 분리됨’은 같은 영적 쇠퇴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결국 AC.386은 짧은 번호이지만 두 가지를 동시에 가르칩니다. 하나는 가인의 ‘지면에서 쫓겨남’이 교회의 모든 진리에서 분리되는 상태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씀의 상응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원리입니다. 같은 단어라도 다루는 주제에 따라 의미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으므로, 상응을 기계적인 일대일 대응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변화도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일관된 상응 질서와 현재의 문맥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AC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상응어의 뜻을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그 상응이 지금 이 문맥에서 왜 그렇게 나타나는지를 함께 이해하는 것입니다.

 

 

 

AC.387, 창4:14, ‘주의 얼굴을 뵈옵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주님의 자비에서 나오는 신앙의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창4:14) AC.387‘주의 얼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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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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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는 그 분열로 말미암아 그가 돌아서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 입을 벌려’(which hath opened its mouth)는 그 이단이 그들에게 가르쳤음을 의미합니다. ‘네 아우의 피들을 네 손에서 받아들였은즉’(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은 그것이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의미합니다.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signifies that through the schism he had become averte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signifies that the heresy taught them;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signifies that it did violence to charity, and extinguished it.

 

해설

AC.378은 창4:11의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바로 앞 AC.377에서 ‘땅’은 사람 안에 자리 잡은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고, 그 안에 선과 진리가 심어지면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며 악과 거짓이 심어지면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AC.378의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도 외적인 토지가 가인을 저주한다는 뜻이 아니라,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시킨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림으로써 생긴 영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를 ‘그 분열로 말미암아 그가 돌아서게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은 누가 누구에게서 돌아섰느냐입니다. 주님께서 가인을 미워하여 그에게서 돌아서신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고 하며, 마침내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 소멸시킨 그 분열로 말미암아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것입니다. 말씀의 문자에서는 여호와께서 ‘저주’를 선언하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뜻에서는 인간 자신의 악과 거짓이 그를 주님에게서 돌아서게 한 상태가 드러납니다. 주님의 사랑과 자비가 저주로 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 사랑과 자비를 받아들이는 질서에서 스스로 돌아선 것입니다.

 

이것은 스베덴보리에게서 ‘저주’를 이해하는 중요한 원리이기도 합니다. 생명과 모든 선의 근원이신 주님에게서 돌아서는 것 자체가 저주의 상태입니다. 주님께서 생명을 거두어 인간을 저주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악과 거짓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생명과 선이 흘러오는 질서에 등을 돌립니다. 햇빛은 계속 비치지만 사람이 스스로 등을 돌리면 얼굴이 어두워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어둠이 태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태양을 등진 상태에서 생긴 것처럼, 여기서 ‘저주’도 주님의 사랑이 반대로 변한 결과라기보다 가인의 분열이 가져온 영적 결과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땅이 그 입을 벌렸다’는 것은 ‘그 이단이 그들에게 가르쳤음’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뜻밖입니다. 땅이 입을 벌려 피를 받아들였다는 문자적 장면을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가르침의 이미지로 읽습니다. 바로 앞에서 땅은 사람 안의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땅에 ‘입’이 있습니다. 입은 말하고 가르치는 기능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분열이 단순히 내면에 잠재된 생각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하나의 교리로 표현되고 가르쳐졌다는 것입니다. 가인의 상태는 더 이상 개인적인 마음의 흔들림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원리가 교리로 형성되고 전달되는 단계에 이르렀습니다.

 

이 점은 AC.370의 마지막 문장 ‘그들의 교리는 이와 같이 되었습니다’와 직접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 사이의 질서가 뒤바뀌었습니다. 이어 신앙이 체어리티를 섬기는 것을 거부했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결국 완전히 배척했습니다. 이제 그 상태가 ‘땅이 입을 벌린다’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즉 분리된 신앙이 하나의 가르침이 되어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악과 거짓이 개인의 내적 상태에서 교리로 조직되고 가르쳐질 때 그 영향은 한 사람에게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AC.377에서 사람이 그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형성된다고 한 설명과도 바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네 아우의 피들을 네 손에서 받아들였은즉’은 그 이단이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다시 ‘피들’이 복수형으로 나타납니다. AC.374에서 이미 그 이유가 설명되었습니다. 사랑에서 모든 선하고 거룩한 것들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미움에서는 모든 불의하고 가증한 것들이 흘러나오기 때문에 ‘피들’이라고 복수형으로 표현됩니다. 따라서 아벨의 ‘피들’은 단지 체어리티라는 하나의 추상적 원리가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체어리티와 함께 있어야 할 여러 선한 것들이 폭력을 당하고 소멸되는 상태를 포함합니다.

 

특히 ‘네 손에서’라는 표현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AC.378 자체에서는 ‘손’의 상응을 별도로 풀지 않으므로 여기서 그 의미를 앞질러 자세히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 전체에서는 체어리티의 소멸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가인의 분열과 이단이 실제로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한 결과라는 점이 분명합니다. 스베덴보리는 ‘did violence to charity, and extinguished it’이라고 아주 강하게 표현합니다. 단순히 체어리티를 덜 중요하게 여긴 정도가 아니라 마침내 그것을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AC.378의 세 표현은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을 보여 줍니다. 먼저 ‘땅에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상태입니다. 그다음 ‘땅이 입을 벌린다’는 것은 그 분열이 이단적 교리가 되어 가르쳐지는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땅이 ‘아우의 피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교리가 실제로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여 그것을 소멸시킨 결과입니다. 분열이 내면의 상태에 머물지 않고 교리가 되고, 그 교리가 삶과 교회의 사랑을 파괴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이단’ 역시 오늘날 특정 교파를 정죄하는 말로 성급하게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가인의 이단이 무엇인지는 이미 문맥 안에서 분명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것을 지배해야 한다고 하고, 마침내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AC.378은 다른 사람의 교리를 ‘이단’이라고 판정하기 위한 도구이기 전에 우리 자신의 신앙을 살피게 합니다. 내가 붙드는 진리가 실제로 이웃을 사랑하고 선을 행하는 삶으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신앙의 정확성을 주장하면서 체어리티를 부차적인 것으로 밀어내고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결국 AC.378의 ‘저주’는 주님께서 가인을 버리셨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는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주님의 질서에서 돌아선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분열은 입을 벌려 하나의 가르침이 되었으며, 마침내 아벨의 피들을 받아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주님은 계속 말씀하시고 가인을 부르시지만, 가인의 교리는 점점 더 주님의 질서에서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그 신앙이 주님에게서 오는 체어리티와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자기가 서 있는 땅 자체를 분열의 땅으로 만들지만,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 있는 신앙은 선과 진리가 함께 자라나는 주님의 밭이 됩니다.

 

 

 

AC.379, 창4:11, ‘체어리티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 의지가 실제 사람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창4:11) AC.379이러한 것들이 의미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으로부터 분명하며, ‘저주를 받는 것’(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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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7, 창4:10,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 무엇이 심어지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집니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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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7

여기서 ‘땅’(ground)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것은 ‘밭’(field)이 교리를 의미한다는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밭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땅’은 분열을 의미합니다.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 안에 심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들과 진리들로부터는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로부터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단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다루고 있는 구절에서도 ‘땅’이라는 말은 사람 안에 있는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됩니다. That the “ground” here signifies a schism or heresy, is evident from the fact that a “field” signifies doctrine, and therefore the “ground,” having the field in it, is a schism. Man himself is the “ground,” and also the “field,” because these things are inseminated in him, for man is man from what is inseminated in him, a good and true man from goods and truths, an evil and false man from evils and falsities. He who is in any particular doctrine or heresy is named from it, and so in the passage before us the term “ground” is used to denote a schism or heresy in man.

 

해설

AC.377은 AC.373에서 짧게 제시했던 ‘땅(ground)은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한다’는 해석을 설명합니다. 창4:10에서 아벨의 피들이 ‘땅에서부터’ 주님께 부르짖는다고 했습니다. 앞의 AC.374-376에서 ‘피들’은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을, 그 ‘부르짖음’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설명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피들이 부르짖어 올라오는 ‘땅’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땅을 단순히 악이 벌어진 장소로 보지 않고 ‘분열 또는 이단’으로 해석합니다. 이것은 가인이 표상하는 것이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하여 하나의 교리적 원리로 만든 상태라는 지금까지의 흐름과 정확히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의 첫 논리는 ‘밭’이 교리를 의미하므로 밭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땅’은 분열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앞의 AC.368에서 ‘들’ 또는 ‘밭’이 교리를 의미한다고 이미 설명했습니다. 밭은 씨가 뿌려지고 자라나는 곳입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씨는 선과 진리에 속한 것들이며, 그것들이 사람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조직되는 교리적 영역이 밭으로 표상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밭을 품고 있는 더 근원적인 ‘땅’으로 시선이 옮겨갑니다. 가인의 문맥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가 본래의 결합에서 갈라지고 그 분리가 하나의 교리로 굳어졌으므로, 그 땅은 ‘분열 또는 이단’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AC.377의 설명은 여기서 한 단계 더 깊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이번 번호의 핵심 문장입니다. 교리는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추상적인 명제들의 집합만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 또는 악과 거짓이 실제로 심어지고 자라는 장소는 사람 자신입니다. 따라서 말씀에서 땅과 밭이 교회와 교리의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그러한 것들이 인간 안에서 받아들여지고 그의 생명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무엇인가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생각하고 사랑하고 의도하며, 마침내 삶으로 내보내는 살아 있는 땅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사람은 자기 안에 심어진 것에 따라 그런 사람이 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선들과 진리들로부터는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악들과 거짓들로부터는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많은 지식을 접하면 그 지식대로 자동적으로 사람이 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심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가 인간의 내면에 받아들여져 그의 생각과 의지와 삶의 일부가 되는 것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단순히 기억 속에 알고 있는 것과 그 진리를 인정하고 사랑하여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거짓을 잠깐 듣거나 잘못 이해했다고 해서 곧바로 그 사람이 ‘거짓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확증하며 그에 따라 살아갈 때 그것이 점차 그의 영적 성질을 형성합니다.

 

이 점에서 ‘심어진 것’이라는 표현은 인간의 자유와도 연결해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모든 생각과 감정이 곧바로 그 사람 자신인 것은 아닙니다. 여러 선한 생각과 악한 생각,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이 인간에게 제시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으로 인정하며 의지와 행동으로 확증하느냐입니다. 그러므로 AC.377을 ‘나쁜 생각이 한 번 들어오면 악한 사람이 된다’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람이 어떤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삶으로 만들고, 어떤 악과 거짓을 거부하거나 받아들여 굳히느냐에 따라 그의 내적 성질이 형성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과 진리의 실제 근원은 인간 자신이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인간은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땅’입니다.

 

이것은 가인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돌아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의 문제는 어느 날 갑자기 아벨을 죽였다는 한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신앙을 체어리티와 구별하고, 이어 둘을 분리하며,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해야 한다는 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점차 하나의 교리가 되었고, 결국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을 거부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즉 하나의 거짓된 원리가 사람 안에 심어지고 확증되면서 그의 교리와 삶을 형성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의 피들이 부르짖는 ‘땅’은 단순한 흙이 아니라 그러한 분열이 자리 잡은 인간의 내적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문장인 ‘어떤 특정한 교리나 이단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이름을 얻게 된다’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받아들이고 확증하여 살아가는 교리적 성질에 따라 영적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래서 이 문맥에서는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 또는 이단을 ‘땅’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어떤 교단이나 종파에 붙이는 제도적 낙인으로 먼저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스베덴보리가 다루는 핵심은 살아 있는 전체 질서에서 어떤 진리를 떼어 내어 독립시키고, 그것을 다른 진리나 선과 대립시키며 절대화하는 영적·교리적 분열입니다. 가인의 경우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신앙이 홀로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고 만든 것이 바로 그 분열입니다.

 

이 때문에 AC.377은 교리의 중요성을 매우 깊은 차원에서 보여 줍니다. 교리는 단지 시험을 보기 위해 외우는 신학적 명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무엇을 참되다고 받아들이느냐는 결국 그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영향을 줍니다. 그렇다고 ‘올바른 교리만 머리로 정확히 알면 선한 사람이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신앙은 체어리티를 섬겨야 하고, 진리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가 삶에서 분리되면 가인의 문제가 다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선을 추구한다고 하면서 진리를 무시하면 무엇이 참된 선인지를 분별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땅’에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가 함께 심어지고 결합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사람 자신이 땅이며 또한 밭이다’라는 말은 말씀을 읽는 우리의 태도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의 땅과 밭을 고대에 있었던 어떤 교회나 사람들의 상태로만 읽으면 우리는 그 말씀의 바깥에 서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내가 바로 그 땅이고 밭이라면 질문이 달라집니다. ‘지금 내 안에는 무엇이 심어지고 있는가? 내가 반복하여 받아들이고 확증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내가 붙드는 신앙의 진리는 실제로 체어리티와 결합되고 있는가? 아니면 어떤 진리를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됩니다. 말씀의 속뜻은 이렇게 역사적 표상에서 현재 인간의 거듭남으로 들어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희망도 줍니다. 사람이 ‘땅’이라는 것은 악과 거짓만 심어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선과 진리도 심어질 수 있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주님께서 끊임없이 선과 진리를 인간에게 주시고 심으시며, 인간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거듭남은 사람이라는 땅이 자기 안의 악과 거짓을 주님의 도움으로 거부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여 그것들이 자라고 결합하도록 하는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나는 원래 어떤 땅인가?’라는 고정된 자기 규정보다 ‘나는 지금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주님께서 내 안에 심으시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입니다.

 

결국 AC.377에서 ‘땅’이 분열 또는 이단을 의미하는 이유는 그 분열과 이단이 추상적인 교리책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심어지고 그 사람의 영적 상태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 안에 받아들여진 선과 진리로부터 선하고 참된 사람이 되고, 받아들이고 확증한 악과 거짓으로부터 악하고 거짓된 사람이 됩니다. 가인의 ‘땅’은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열이 심어져 하나의 교리가 된 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의 피들이 바로 그 땅에서부터 부르짖습니다. 체어리티에 가해진 폭력은 가인의 교리와 분리된 삶 밖에서 우연히 생긴 사건이 아니라, 그 분열이 사람 안에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은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AC.378, 창4:11,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 분열로 말미암아 주님에게서 돌아선 가인’ (AC.378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And now cursed art thou from the ground, which hath opened its mouth to receive thy brother’s bloods from thy hand. (창4:11) AC.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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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6, 창4:10, ‘피들이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 체어리티에 가한 폭력이 드러내는 죄책’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창4:10) AC.376이로부터 ‘피들이 부르짖는 것’(crying of bloods)은 죄책의 고발을 의미한다는 것이 따라 나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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