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4:13)

 

AC.384

이로부터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합니다(4:19,23-24). Hence it appears that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 in Cain; but that all the good of charity afterwards perished is evident from what is said of Lamech (verses 19, 2324).

 

19라멕이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4:19, 23-24)

 

해설

AC.384는 바로 앞 AC.383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짧은 설명입니다. AC.383에서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라는 말을 어떤 내적 고통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에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결론짓습니다. 이것은 가인을 선한 사람으로 평가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가인은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체어리티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마침내 아벨을 죽이는 ’, 곧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자기 악 때문에 내적인 고통을 느끼고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 안의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상태는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의 어떤 이라는 제한된 표현을 그대로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에게 선이 있었다고 일반적으로 말하지 않고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합니다. 즉 악이 크게 지배하고 있었지만 선에 반응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AC.383에서 보았듯이 가인은 자기 상태 때문에 내적 고통을 느꼈고, 자기가 악 가운데 있음을 어느 정도 고백했습니다. 만일 선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그러한 내적 고통과 인정조차 일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그 작은 반응 가능성이 이번 번호에서 말하는 아직 남아 있던 선의 어떤 입니다.

 

이 점은 가인에 관한 지금까지의 설명을 지나치게 단순화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가인은 ’, 아벨은 이라는 식으로 두 사람을 단순한 도덕적 인물 유형으로 나누는 것이 스베덴보리의 해석은 아닙니다. 가인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라는 교리와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상태를 표상합니다. 그 상태가 매우 심각하게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선의 가능성이 한순간에 완전히 없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가 시작되고, 신앙이 체어리티를 지배하고,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며, 그 결과 선과 진리의 방향을 잃어 가는 과정 가운데에서도 아직 선의 어떤 잔여가 남아 있었던 단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AC.384의 후반부는 곧바로 더 어두운 방향을 예고합니다. ‘이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라멕에 관하여 말한 것에서 분명하다고 합니다. 즉 가인에게 남아 있던 선의 어떤 것이 계속 보존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가인으로 시작된 신앙과 체어리티의 분리는 후대로 내려가면서 더욱 심화되었고, 마침내 라멕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체어리티의 선이 완전히 소멸됩니다. 그러므로 AC.384는 가인의 상태를 설명하는 동시에 창4 후반부의 라멕을 미리 바라보게 하는 연결 문장입니다.

 

스베덴보리가 특별히 창4:19,23-24를 가리키는 것도 이 흐름 때문입니다. 4:19에서는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는 일이 나오고, 23-24절에서는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그리고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라는 라멕의 말이 나옵니다. 이 구절들의 구체적인 속뜻은 해당 번호에서 자세히 살펴보아야 하므로 지금 미리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4에서 중요한 것은 스베덴보리 자신이 이 구절들을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된후대의 상태를 보여 주는 근거로 미리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으로 이어지는 과정은 단순히 악한 개인들의 계보가 아닙니다. 하나의 영적 원리가 세대를 거치며 어디까지 진행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교리적 계보입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구별이 있었고, 그 구별이 분리가 되었으며, 분리된 신앙이 체어리티 위에 서려고 했고, 마침내 체어리티를 소멸시켰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단계에서는 자기 악에 대한 어떤 내적 고통과 인정이 가능할 만큼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습니다. 그 뒤 그 원리가 더욱 악화되어 라멕에 이르면 그것마저 소멸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중요하게 구별했던 체어리티의 소멸이라는 표현을 좀 더 세밀하게 읽게 합니다. 앞 번호들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는 것은 체어리티를 소멸시켰다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AC.384에서는 다시 가인에게 아직 선의 어떤 것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두 진술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가인으로 표상되는 교리에서 체어리티가 신앙의 본질과 주도 원리로서 배척되고 소멸되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상태에 속한 사람들 안에서 선에 속한 모든 흔적과 반응 가능성이 그 순간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교리적 원리의 소멸과 사람 안에 남아 있는 선의 어떤 것을 구별하여 보고 있습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가인의 를 이해할 때도 중요해질 것입니다. 만일 가인 안에 선에 속한 모든 것이 이미 완전히 소멸되어 아무것도 보존할 것이 없었다면, 왜 주님께서 가인을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표를 주어 아무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는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AC.384는 아직 그 답을 본격적으로 설명하지 않지만, 적어도 가인의 상태 안에 아직 보존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가인의 는 단순히 악인을 보호하시는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선의 어떤 을 곧바로 리메인스라고 단정하는 것은 아직 조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번 번호에서 remain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단지 something of good still remained라고 말합니다. 더 넓은 AC의 가르침과 연결하여 리메인스와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는 있지만, AC.384 자체가 이것을 전문적 의미의 리메인스라고 명시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원문이 말하는 만큼, 선에 속한 무엇인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고 두는 것이 가장 안전합니다.

 

목회적으로도 이 짧은 번호에는 중요한 통찰이 있습니다. 사람의 상태가 크게 무너져 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사람 안에 선에 반응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쉽게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근거로 다른 사람의 내면을 우리가 판정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가인조차 자기 악 때문에 어떤 내적 고통을 느끼고 그것을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사람의 외적인 상태만 보고 그의 내면에 남아 있는 모든 가능성을 우리가 판단할 수 없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의 내면을 아시고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실 수 있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결국 AC.384는 가인의 이야기에 매우 중요한 미세한 차이를 넣습니다. 가인은 체어리티를 소멸시키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아직 선의 어떤 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악을 어느 정도 인정하게 하는 내적 고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상태가 계속 악화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체어리티의 모든 선이 소멸됩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는 가인의 타락을 단번에 완성된 상태로 보지 않고 하나의 진행 과정으로 보게 하며, 동시에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존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이후 가인의 와 연결하여 바라볼 준비를 하게 합니다.

 

 

 

AC.385, 창4:14,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 남아 있는 것을 위협하는 악과 거짓’ (A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Behold thou hast cast me out this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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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83, 창4:13,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 악을 인정하게 한 내적 고통과 절망’ (AC.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And Cain said unto Jehovah, Mine iniquity is greater than can be taken away. (창4:13) AC.38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Cain said unto Jehovah)는 어떤 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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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낯섭니다. 신앙과 체어리티는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그것들에게 폭력을 가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영적인 폭력을 뜻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앙이 없거나 체어리티가 부족한 상태보다 더 심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진리를 아직 알지 못하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자신의 악과 거짓에 맞추어 왜곡하는 것은 다릅니다. 또한 체어리티를 충분히 행하지 못하는 것과 체어리티 자체를 자기 욕망에 방해되는 것으로 여기며 배척하는 것도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가인 계열의 처음을 보면 이 차이가 잘 드러납니다. 가인의 처음 문제는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고, 마침내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에 AC.330에서는 그것이 보존됩니다.

 

그러나 그 분리가 계속되면서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에서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가 생겨났으며,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이제 AC.334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이 가해졌다고 합니다. 단순한 상실에서 적극적인 훼손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을 잘 알지 못한다면 그 사람에게 체어리티의 진리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잘 알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이웃을 해치고, 더 나아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말씀을 비틀어 이것이 오히려 주님의 뜻이다라고 한다면 상태가 달라집니다. 이제 진리는 악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거꾸로 사용됩니다.

 

신앙의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어떤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진리를 알면서 그것을 의도적으로 거짓에 봉사하게 만드는 것은 다릅니다. 말씀의 진리를 자기 권력과 명예, 자기 사랑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면 외적으로는 신앙의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진리를 본래의 목적과 반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폭력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질서의 전도입니다. 본래 진리는 인간의 악을 드러내고 선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의 악이 오히려 진리를 붙잡아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하면 질서가 뒤집힙니다. 진리가 악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악이 진리를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같습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로 인도하고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가인으로 표상되는 상태에서는 신앙이 체어리티와 분리되고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려 합니다. 그 질서가 계속 뒤집히면 처음에는 분리였던 것이 나중에는 체어리티의 소멸과 신앙의 왜곡, 그리고 마침내 선과 진리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진행될 수 있습니다.

 

4:23의 라멕의 말은 바로 이러한 종말의 상태를 표상적으로 묘사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C.334의 개요에서는 사람과 소년 각각의 세부 의미를 미리 모두 확정하기보다, 이 말씀이 교회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을 파괴하는 상태와 관련된다는 큰 그림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스베덴보리가 이를 극도의 모독이라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모독은 단순히 거룩한 것을 모르는 상태가 아닙니다. 거룩한 것을 알고 인정하면서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고, 거룩하지 않은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는 데서 문제가 더욱 심각해집니다.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 proprium을 섬기는 수단으로 뒤집히는 것입니다.

 

교회 차원에서도 이 구별은 중요합니다. 체어리티가 약한 것과 체어리티를 신앙에 방해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다릅니다. 진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권력과 명예와 이익을 지키기 위해 왜곡하는 것도 다릅니다. 특히 사람의 악을 드러내고 돌이키게 해야 할 말씀이 오히려 그 악을 정당화하는 도구가 된다면 진리의 본래 기능이 뒤집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화를 다른 교회나 사람을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 사람은 진리에 폭력을 가한다고 다른 사람의 내면을 쉽게 판정하기보다, 먼저 내 안에서 진리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는 진리를 통하여 나 자신을 고치고 있는가, 아니면 진리를 이용하여 나 자신을 변호하고 있는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특히 AC와 말씀의 속뜻을 공부하는 사람에게도 이것은 중요한 경고입니다. 진리를 많이 안다는 사실이 자동으로 그 진리를 올바르게 사용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르카나에 관한 지식을 통하여 proprium을 더 분명히 보고 주님 앞에서 낮아지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보다 깊이 안다는 우월감을 강화한다면 진리의 목적이 조금씩 뒤집히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개인적 적용을 곧바로 AC.334가 말하는 극도의 모독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34는 라멕으로 표상되는 매우 깊은 종말의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그 원리를 통하여 자기 안에서 같은 방향의 작은 시작을 미리 살피고 피할 수 있습니다. 작은 자기 합리화 하나가 곧 라멕의 극단적 상태라는 뜻이 아니라, 질서가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를 분별하는 데 이 말씀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을 압축하면 분리에서 폭력으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앙과 체어리티를 갈라놓았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를 계속 허용하면서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진리가 왜곡되었으며, 마침내 신앙에 속한 것마저 사라지고 선과 진리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AC.334의 경고는 그래서 매우 실제적입니다. 진리를 모르는 것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알고 있는 진리를 자기 악과 자기 사랑을 위해 사용하는 것을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진리는 우리의 proprium을 섬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악에서 돌이켜 선으로 이끌기 위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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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 심화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로운 교회가 이전 교회적 상태가 조금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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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심화

1.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로운 교회가 이전 교회적 상태가 조금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극도의 모독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왜 새로운 교회는 이렇게 이전 상태의 가장 어두운 종말과 맞닿아 나타날까요?

 

먼저 이것을 주님께서 이전 교회를 일부러 타락시키신 뒤 새로운 교회를 세우신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타락과 왜곡은 인간이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진리를 거절하고 자신의 proprium을 따르는 데서 생깁니다. 주님께서는 선과 진리를 끊임없이 공급하시지만, 인간의 자유를 파괴하면서까지 그것을 받아들이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한 교회적 상태 안에 아직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께서 그것을 버리시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보존하시고 이끄신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계속해서 선과 진리를 거부하고 왜곡하며, 마침내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까지 가하는 상태에 이르면 그 교회적 상태는 더 이상 본래의 교회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이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실패한 상태를 강제로 수리하여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과는 다릅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시면서도 교회의 생명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마련하십니다. 인간의 한 상태가 끝나는 것과 주님의 구원의 섭리가 끝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입니다.

 

이 점에서 AC.330의 가인의 표를 다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가인에게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을 때, 그것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수 있도록 보존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보존은 가인에서 이어지는 모든 상태가 반드시 올바르게 회복될 것이라는 보장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라멕에 이르러 그 계열은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고, AC.33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폭력을 가하는 상태에까지 이릅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바로 그 종말의 때에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특정한 한 교리적 계열의 성공에 매여 있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 한 상태가 자유의 오용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구원의 길 자체까지 인간이 소멸시킬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가 문자적으로 라멕의 아내들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렇다면  교회가 라멕의 악에서 생겨난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초기의 가족과 계보는 속뜻에서 교회와 교리의 상태 관계를 표상합니다. 따라서 라멕의 악이 변하여 새 교회가 되었다고 읽기보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의 상태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이 말씀의 계보 안에서 함께 묘사된다고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새로운 교회가 홍수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와 같다는 뜻도 아닙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교회는 아직 홍수 이전의 문맥 안에 있습니다. 노아의 교회는 이후 태고교회의 종말과 더 큰 거듭남 질서의 전환 속에서 다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해서 모두 동일한 역사적 교회 시대를 가리킨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왜 말씀은 새로운 교회의 출현을 굳이 가장 어두운 종말과 함께 묘사할까요? 그것은 인간의 실패와 주님의 섭리를 동시에 보여 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을 정도로 선과 진리를 소멸시키고 모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에도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가장 어두워져야 주님이 역사하신다는 법칙을 만들자는 뜻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역사하십니다. 오히려 인간이 그 역사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한 상태가 끝에 이르렀을 때, 주님의 섭리가 그 종말 너머에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우리가 뒤늦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C.334 가장 어두운 는 절망의 증거라기보다 인간의 종말이 주님의 종말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자리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이 모두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른 상태에서도 주님의 뜻은 변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다시 선과 진리가 결합되고, 체어리티와 신앙이 살아 있는 교회적 상태가 일어날 수 있도록 계속 섭리하십니다.

 

이것이 AC.334가 교회의 종말을 말하면서도 동시에 희망을 품고 있는 이유입니다. 이전 교회의 내적 생명은 끝날 수 있지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섭리는 끝나지 않습니다. 인간이 만든 가장 깊은 어둠보다 주님의 구원의 뜻이 더 멀리 갑니다.

 

 

 

AC.334 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 심화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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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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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said unto his wives, Adah and Zillah, Hear my voice, ye wives of Lamech, and with your ears perceive my speech, for I have slain a man to my wounding, and a little one to my hurt. 24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 하였더라 If Cain shall be avenged sevenfold, truly Lamech seventy and sevenfold. (4:23-24)

 

AC.334

교회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을 일어났으며, 이는 극도의 모독이었습니다. (23-24) That this church arose when everything of faith and charity was extinguished, and had violence done to it, which was in the highest degree sacrilegious, is described. (verses 2324)

 

해설

AC.334는 바로 앞 AC.333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말에서 그때가 어떤 때였는지를 밝혀 줍니다. AC.333에서는 아다와 씰라로 의미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의 천적인 것들은 야발, 영적인 것들은 유발, 자연적인 것들은 두발가인으로 의미된다고 했습니다. 이제 AC.334는 이 새로운 교회가 이전 상태가 어느 정도 쇠퇴했을 때가 아니라,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져 극도의 모독에 이르렀을 때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의 AC.332와 직접 이어집니다. 가인으로 표상된 상태에는 처음에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기는 했어도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질 수 있도록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리된 상태가 계속 파생되고 변질되면서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상태에 이릅니다. AC.334는 그 종말을 더욱 강한 표현으로 묘사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었을 뿐 아니라, 그것들에 폭력까지 가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폭력이 가해졌다는 말은 단순히 신앙과 체어리티가 부족해졌다는 뜻보다 훨씬 강합니다.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이미 알려진 선과 진리를 거슬러 그것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것은 같은 상태가 아닙니다. AC.334가 말하는 폭력은 바로 후자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교회의 생명에 속한 것을 단순히 잃어버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거슬러 파괴하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 상태를 극도의 모독이라고 부릅니다. 모독은 거룩한 것을 전혀 모르는 상태와는 다릅니다. 거룩한 것에 속한 것을 알고 받아들였으면서도 그것을 악과 거짓에 결합시키거나 거룩하지 않은 목적에 사용하는 것이 훨씬 심각한 영적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AC.334는 아직 모독의 전체 교리를 상세히 설명하는 번호는 아니지만, 라멕으로 표상되는 종말이 단순한 무지나 결핍보다 훨씬 깊은 상태였다는 점은 분명히 보여 줍니다.

 

4:23의 라멕의 말도 이 종말을 표상적으로 묘사합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AC.334의 개요 단계에서는 각 표현의 세부 상응을 미리 모두 풀기보다, 이 말씀이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극도의 상태를 묘사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각 말의 구체적인 의미는 이후 해당 절의 상세 해설에서 더 분명하게 설명됩니다.

 

이어지는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칠 배이리로다역시 가인에서 라멕으로 갈수록 상태가 얼마나 더 깊이 타락했는지를 보여 주는 문맥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AC.334 자체는 칠십칠 의 세부 상응을 설명하는 번호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라멕의 상태가 가인의 처음 상태보다 훨씬 더 깊은 종말에 이르렀다는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흐름을 보면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점진적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는 데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리는 예배에 나타났고, 체어리티가 소멸되었으며,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에서 여러 파생된 이단적 상태들이 생겨났고, 라멕에 이르러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AC.334에서는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 폭력을 가하는 극도의 모독까지 묘사됩니다.

 

그런데 AC.334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종말 자체가 아니라 문장의 주어입니다. ‘ 교회는 일어났다.곧 바로 이러한 종말의 때에 AC.333에서 말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른 상태가 인간 편에서는 완전한 끝처럼 보이지만, 주님의 섭리에서는 그것이 교회의 모든 가능성의 끝은 아닙니다.

 

여기서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가 라멕의 타락이 개선되어 생긴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악이 충분히 발전하면 선으로 바뀐다는 구조가 아닙니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한 교리적, 교회적 상태가 종말에 이른 때,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전 상태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을 구별하면서도 둘이 같은 시점에 말씀 안에서 나란히 묘사된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이후 AC 전체에서 반복해서 만나게 될 교회의 종말과 새로운 교회의 시작이라는 질서를 미리 보여 줍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선과 진리를 더 이상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서 주님의 뜻과 섭리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시면서도 교회의 생명이 인류 가운데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섭리하십니다.

 

다만 이것을 이전 교회가 타락하면 주님께서 곧바로 다른 조직이나 교단을 세우신다는 식으로 외적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교회의 핵심은 조직의 이름보다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실제로 결합되어 있는 교회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일어난다는 것은 무엇보다 주님께서 다시 선과 진리가 결합될 수 있는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마련하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AC.334는 그래서 매우 어두우면서 동시에 희망적인 글입니다. 인간은 신앙과 체어리티를 분리할 뿐 아니라 그것들을 소멸시키고, 심지어 거룩한 것에 폭력을 가하는 데까지 이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종말이 주님의 섭리의 종말은 아닙니다. 바로 그 가장 어두운 때에도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적 생명을 일으키실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러므로 AC.333AC.334를 함께 읽으면 한 가지 중요한 질서가 보입니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밝은 선언 뒤에는 이전 상태의 극심한 종말이 있었고, 그 종말 뒤에는 다시 주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눈에 끝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주님의 구원의 역사는 끝나지 않습니다.

 

심화

1.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일어나는가?

 

AC.334 심화 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 심화1. 왜 새 교회는 이전 교회의 ‘가장 어두운 때’에 일어나는가? AC.334에서 매우 인상적인 것은 새로운 교회가 이전 교회적 상태가 조금 쇠퇴했을 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신앙과 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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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 심화 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 심화2.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AC.334의 ‘신앙과 체어리티에 속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그것들에 폭력이 가해졌다’는 표현은 처음 읽으면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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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5, 창4:25, ‘셋’(Seth)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And the man knew his wife again, and she bare a 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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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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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 일어날  있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바로 다음 AC.333에서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는 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한 교회적 상태에서 신앙마저 완전히 소멸되었다면,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나타난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교리적 계열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것과 주님의 교회 전체가 끝났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AC.332가 말하는 라멕의 상태는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교리적 계열의 마지막을 나타냅니다. 그 안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더 이상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주님께서 더 이상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AC.333은 바로 이 점을 보여 줍니다. 라멕으로 표상되는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른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그 새로운 교회를 표상하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그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라멕이 좋아져서 다시 교회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가 끝난 자리에서 다른 교회적 상태가 새롭게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인간의 한 교리적 계열의 성공 여부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어떤 상태가 자유의 오용과 왜곡 때문에 종말에 이를 수는 있지만,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그 상태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이 하나의 길을 막더라도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 다른 방식으로 구원의 길을 계속 마련하십니다.

 

이 점에서 AC.330 가인의 와도 연결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보존된 것은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보존이 가인으로부터 이어지는 모든 교리적 상태가 반드시 끝까지 살아 있는 신앙을 유지한다는 보장은 아니었습니다. 라멕에서 그 한 계열은 결국 신앙마저 잃었습니다.

 

그렇다고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33은 오히려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즉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하나의 계열에만 매여 있지 않습니다.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르더라도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 자체가 소멸되지 않도록 계속 역사하십니다.

 

여기서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도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는 아직 홍수 이전의 문맥 안에 있습니다. 반면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는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 인간의 거듭남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더 큰 전환과 연결됩니다.

 

따라서 스베덴보리가 어떤 곳에서 새로운 교회라고 말할 때마다 반드시 인류 역사의 새로운 대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앞의 상태와 구별되는 새로운 교회적 형성이 일어났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AC.333의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이 점은 창4의 계보를 단순한 시간표로 읽지 않는 데도 중요합니다. 라멕,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단순히 나쁜 아버지와 좋은 자녀들처럼 읽으면 속뜻의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중심은 개별 인물의 도덕적 성격이 아니라 교회와 교리의 상태가 어떻게 끝나고 새롭게 형성되는가에 있습니다.

 

AC.333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새로운 교회의 성격이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통하여 묘사된다는 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들이 각각 교회의 천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종말 가운데서 새로 일어난 교회에도 다시 교회에 속한 여러 차원의 것들이 존재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것을 태고교회 최초의 순수한 상태가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천적인 ’, ‘영적인 ’, ‘자연적인 이라는 말을 사용하더라도 그것들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했는지는 이어지는 AC에서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AC.333은 우선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그 교회 안에 이러한 것들이 있었다는 큰 틀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라멕과 아다와 씰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말과  시작입니다. 라멕은 한 교리적 계열의 끝을 나타내고, 아다와 씰라는 그 끝의 자리에서 새롭게 일어난 교회를 나타냅니다. 인간의 한 상태는 끝날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끝을 새로운 시작의 자리로 삼으실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 교회를 바라볼 때에도 중요합니다. 어떤 교회적 형식이나 제도가 쇠퇴한다고 해서 곧 주님의 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외적인 조직이 계속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내적인 교회적 생명이 살아 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의 교회는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이 실제로 결합되는 곳에서 새롭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AC.333은 라멕의 종말을 절망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인간 편에서는 한 계열이 신앙에 속한 것까지 잃었지만,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십니다. 인간이 종말을 만들 수는 있어도 주님의 섭리 자체를 종말시키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AC.332에서 AC.333으로 넘어갈 때 가장 깊이 붙들어야 할 아르카나입니다.

 

 

 

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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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And Adah bare Jabal; he was the father of the dweller in tents, and of cattle. 21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And his brother’s name was Jubal; he was the father of everyone that playeth upon the harp and organ.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 And Zillah, she also bare Tubal-Cain, an instructor of every artificer in brass and iron; and the sister of Tubal-Cain was Naamah. (4:19-22)

 

AC.333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는데, 아다와 씰라(Adah and Zillah) 이를 의미하며,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Jabal), 유발(Jubal), 두발가인(Tubal-Cain)으로 성격을 있습니다. 야발 교회의 천적인 것들을, 유발 영적인 것들을, 두발가인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합니다. (19-22) A new church then arose, which is meant by Adah and Zillah, and is described by their sons Jabal, Jubal, and Tubal Cain; the celestial things of the church by Jabal, the spiritual by Jubal, and the natural by Tubal-Cain. (verses 1922)

 

해설

AC.333은 가인 계열의 이야기를 읽다가 상당히 뜻밖의 전환을 만나는 글입니다. 바로 앞 AC.332에서는 가인으로부터 생겨난 여러 이단들이 계속 변질되어 오다가 마지막 라멕에 이르렀고, 그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가인으로 표상된 그 교리적 계열은 완전히 종말에 이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AC.333에서 스베덴보리는 그때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교회를 아다와 씰라라고 합니다.

 

여기서 먼저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가인으로 시작된 분리된 신앙의 계열이 원래의 태고교회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라멕에 이른 그 교리적 상태는 이미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은 종말에 도달했습니다. 그러나 한 교리적 계열이 종말에 이른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와 섭리까지 함께 종말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종말 가운데서도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아다와 씰라는 바로 그러한 새로운 교회를 표상합니다.

 

이 점은 앞의 AC.330-332와 함께 읽을 때 더욱 선명해집니다. AC.330에서는 장차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될 것이므로 신앙에 속한 것이 보존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AC.332에서는 가인으로부터 이어진 한 교리적 계열이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게 됩니다. 그렇다고 주님의 섭리가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AC.333은 오히려 바로 그 종말 가운데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음을 보여 줍니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 새로운 교회가 아다와 씰라라는 두 여자로 표상된다는 점입니다. 말씀에서 여자는 교회를 표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AC.333의 단계에서는 아다와 씰라 각각의 세부적인 의미를 너무 앞서 정리하기보다, 우선 두 사람이 함께 새로운 교회를 의미한다는 큰 틀을 붙드는 것이 좋습니다. 그 교회의 보다 구체적인 상태와 당시의 상황은 이어지는 번호에서 더 자세히 설명됩니다.

 

또한 이 새로운 교회의 성격은 그들의 아들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통하여 묘사됩니다. 스베덴보리는 야발은 교회의 천적인 것들, 유발은 영적인 것들, 두발가인은 자연적인 것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 새로운 교회 안에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 차원에 해당하는 것들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천적인 것들은 주님 사랑과 선에 관계된 것들, ‘영적인 것들은 신앙과 진리에 관계된 것들, ‘자연적인 것들은 그것들이 외적 삶과 형식 안에서 나타나는 차원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AC.333 한 번호만으로 이 셋의 구체적인 성격이나 상호 관계를 모두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후 AC에서 야발, 유발, 두발가인이 각각 무엇을 더 구체적으로 표상하는지가 자세히 전개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AC.333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라멕의 종말 뒤에 새로운 교회가 일어났고, 교회 안에 다시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나타났다는 큰 구조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한 교리적 계열의 실패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인간 편에서는 한 상태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새로운 시작을 마련하십니다.

 

여기서 새로운 교회라는 말을 곧 홍수 이후의 고대교회와 동일시해서도 안 됩니다. 아다와 씰라로 표상되는 교회는 아직 창4의 홍수 이전 문맥 안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교회입니다. 이후 노아로 표상되는 고대교회는 태고교회의 종말 이후 인간의 거듭남 질서 자체가 달라지는 더 큰 전환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같은 새로운 교회라는 표현이라도 그 범위와 의미를 문맥에 따라 구별해야 합니다.

 

또한 AC.333라멕이라는 악한 사람이 있었는데 아들들은 갑자기 좋은 사람들이 되었다는 식으로 읽으면 속뜻의 중심을 놓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추적하는 것은 개별 인물의 도덕성보다 교회와 교리의 상태 변화입니다. 라멕은 한 교리적 계열의 종말을 표상하고, 아다와 씰라는 그 종말 가운데 새롭게 일어난 교회를, 그들의 아들들은 그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을 표상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다시 한번 단순한 가족사가 아니라 교회적 상태의 계승과 변화를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힙니다. ‘낳았다는 말은 속뜻에서 한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가 파생되고 전개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다와 씰라가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낳았다는 것은 그 새로운 교회 안에서 여러 교회적 요소들이 형성되고 나타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AC.333은 절망의 끝에서 시작되는 글입니다.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지만, 거기서 모든 것이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새로운 교회를 일으키시고, 그 안에서 다시 교회의 천적, 영적, 자연적인 것들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인간의 한 계열은 종말에 이를 수 있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 종말을 새로운 시작을 위한 자리로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어떤 교회적 형식이나 한 시대의 신앙 구조가 쇠퇴한다고 해서 주님의 교회와 구원의 역사가 끝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만든 형식의 종말 가운데서도 보존할 것을 보존하시고 새롭게 일으킬 것을 일으키십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형식을 붙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금 어떤 선과 진리, 어떤 체어리티와 신앙의 질서를 새롭게 일으키고 계시는지를 살피는 것입니다.

 

AC.333의 가장 큰 메시지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라멕의 종말아다와 씰라의 새로운 교회가 맞닿아 있습니다. 인간의 종말이 곧 주님의 종말은 아닙니다. 인간 편에서 더 이어 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에도 주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새로운 교회적 상태를 일으키실 수 있습니다.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 일어날 있는가?

 

AC.333 심화 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3 심화1. 라멕에서 신앙마저 사라졌는데 어떻게 곧바로 ‘새로운 교회’가 일어날 수 있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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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4, 창4:23-24, 신앙과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모독이 극에 이르렀을 때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목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으로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And Lame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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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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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AC.332에서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곧이어 등장하는 아다와 씰라, 그리고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후의 AC를 읽다 보면 이들이 단순히 악과 거짓만을 표상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가인 계열은 이미 라멕에서 끝난  같은데   뒤에 유용해 보이는 것들이 다시 나타나는가?

 

여기서 먼저 구별해야 할 것은 내적인 교회의 생명이 소멸되었다는 것과  계열에서 모든 외적인 것까지 즉시 쓸모없어졌다는 것이 같지 않다는 점입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내적으로 종말에 이를 수 있어도 그 안에서 형성된 지식과 기술, 예배와 교리의 외적 형식 가운데 후대에 사용될 수 있는 것들이 남을 수 있습니다.

 

라멕에서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이후에 나타나는 모든 것이 악이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인간 사회와 교회의 쇠퇴 가운데서도 후대에 쓸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이후 야발, 유발, 두발가인을 설명하는 AC에서는 천적인 것, 영적인 것, 자연적인 것과 관련된 여러 외적 형식과 기능이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용한 외적인 것이 나타났다는 사실과 가인으로 시작된 교회적 상태가 다시 본래의 생명을 회복했다는 것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라멕에서 신앙의 내적 생명이 종말에 이르렀다는 설명은 그대로 유지됩니다. 그 이후에 유용한 것들이 나타난다고 해서 가인 계열이 다시 태고교회의 순수한 천적 상태로 돌아간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줍니다. 내적인 것이 약해지거나 사라진 뒤에도 외적인 지식과 기술, 형식은 한동안 남을 수 있고 오히려 크게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나중에 올바른 내적 생명과 결합될 때 좋은 쓰임에 사용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의 종말도 모든 외적 종교 활동이 한순간에 사라진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의 본질적인 생명인 선과 진리, 체어리티와 신앙의 결합이 더 이상 그 교회적 상태 안에서 유지되지 못할 때 내적으로는 종말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배 형식과 교리적 지식과 여러 유용한 외적 요소는 계속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4와 창5를 읽을 때에도 가인 계열은 악한 사람들,  계열은 선한 사람들이라는 단순한 두 혈통의 대립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의 중심 관심은 각각의 계보가 표상하는 교회적 상태와 그 변화에 있습니다. 5의 계보 역시 언제까지나 동일하게 순수한 상태로 유지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태고교회 전체는 결국 쇠퇴하고 종말을 향해 갑니다.

 

그러므로 홍수 역시 단순히 악한 가인 혈통은 멸망하고 선한  혈통은 살아남았다는 구조로 읽는 것은 스베덴보리의 속뜻과 맞지 않습니다. 노아는 단순한  계열의 착한 생존자라기보다 새로운 교회적 상태, 곧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거듭나는 영적 교회의 시작을 표상합니다.

 

후속 AC 전체에서 보면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는 인간의 의지 자체가 깊이 부패하면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이해와 진리를 통하여 새로운 의지가 형성되며 체어리티로 나아가는 새로운 거듭남의 질서를 마련하십니다. 노아는 바로 그 전환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보면 아다와 씰라 계열에서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한 교회적 상태가 종말을 향하고 있다고 해서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주님께서 버리시는 것은 아닙니다. 보존할 수 있는 것은 보존하시고, 후대의 교회와 인간 사회에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쓰임을 위해 남겨 두십니다.

 

따라서 이 심화가 보여 주는 중요한 원리는 종말 가운데서의 보존입니다. 내적 생명이 쇠퇴해도 모든 외적인 유용성이 즉시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의 섭리는 쇠퇴한 것 가운데서조차 후대에 사용할 수 있는 것을 건져 보존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다와 씰라, 야발과 유발과 두발가인을 만나면서 우리는 가인 계열이 다시 살아났구나라고 보기보다, ‘내적인 교회적 생명이 종말을 향하는 가운데서도 주님께서는 어떤 외적인 것들을 보존하여 이후의 쓰임을 준비하시는가?라는 질문으로 읽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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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습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과 두 번호 뒤인 AC.332에서는 라멕에 이르러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시면서까지 신앙을 보존하신 섭리가 결국 실패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가인의 를 가인 계열 전체가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도록 보장하신 약속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330에서 보존된 것은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상태 자체가 아닙니다. 장차 인간을 다시 체어리티로 인도하는 데 필요할 신앙에 속한 것이 완전히 소멸하지 않도록 보존된 것입니다.

 

따라서 보존 강제와 다릅니다. 주님께서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셨다고 해서 가인으로 표상되는 사람들이 그 신앙을 반드시 올바르게 사용하도록 강제하신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그 진리를 받아들여 선과 결합할 수도 있고, 계속 분리하고 왜곡하여 마침내 그것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그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입니다. 가인에게는 아직 신앙에 속한 것이 있었지만, 그 상태가 계속 체어리티와 분리된 채 여러 형태로 변질되면서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 특정 교리적 계열이 주님께서 보존하신 가능성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AC.330 AC.332는 오히려 인간의 자유와 주님의 섭리가 함께 작용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의 길을 보존하시지만 인간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설 수 있는 수단은 마련하시되 그 수단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인간의 자유 가운데 두십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라멕의 상태를 인류 전체의 상태와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AC.332가 말하는 것은 가인으로부터 파생된 그 교리적 계열의 종말입니다. 라멕 안에 신앙에 속한 것이 남지 않았다고 해서 당시 모든 사람에게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흐름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후속 AC 전체를 보면 주님의 섭리는 훨씬 더 긴 시야에서 움직입니다. 태고교회의 천적 질서가 마침내 지속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를 때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노아로 표상되는 새로운 교회를 준비하십니다. 그 새로운 영적 교회에서는 이전의 천적 인간과 달리 진리와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인도되는 질서가 중심이 됩니다.

 

이런 더 넓은 문맥에서 보면 AC.330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심어지게  이라는 말은 가인 계열 하나의 미래만을 말하는 것으로 좁혀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에게 신앙을 통한 체어리티의 길 자체가 사라지지 않도록 섭리하십니다. 한 특정 계열이 그 가능성을 잃어버려도 주님의 전체적인 구원의 질서가 함께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가인의  라멕에서 신앙이 남지 않음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신앙에 속한 것을 보존하여 구원의 길을 남겨 두시는 섭리를 보여 주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자유 안에서 그 보존된 것을 끝까지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주님의 섭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원리를 줍니다. 주님의 섭리는 어떤 한 사람이나 한 교회적 계열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전체 계획이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구원의 길 자체는 계속 보존하십니다. 어떤 교회가 종말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교회와 구원의 역사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라멕은 주님의 계획의 실패를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니라 인간이 주어진 가능성을 얼마나 멀리 거절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반대로 이후 노아를 향해 나아가는 흐름은 인간의 실패보다 더 넓은 주님의 섭리를 보여 줍니다. 한 계열에서 신앙마저 사라질 수 있지만, 주님께서는 리메인스를 보존하시고 다시 신앙을 통하여 체어리티로 나아갈 새로운 길을 준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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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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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심화

1.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체어리티보다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을 사랑에서 분리하고 그것을 주된 것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그 길의 마지막인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신앙을 높이려 했는데 오히려 신앙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역설은 선과 진리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과 진리는 서로 결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진리는 선이 무엇인지 보여 주고 선으로 인도하며, 선은 진리를 받아들여 삶이 되게 합니다. 따라서 진리가 선에서 분리되면 처음에는 여전히 진리의 지식과 형식을 가지고 있을 수 있지만, 그 진리가 자기 목적을 잃게 됩니다.

 

신앙과 체어리티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진리는 체어리티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무엇이 참된지를 알고 믿는 것은 그 진리에 따라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신앙을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무엇을 믿는가 자체만을 신앙의 본질로 만들면, 진리는 점차 삶과의 연결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교리도 남아 있고 성경에 관한 지식도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을 매우 강하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리가 삶의 선을 향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proprium은 그 진리를 자기 생각과 욕망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때 진리 자체가 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용하는 사랑과 목적이 달라지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진리 때문에 자기 생각을 고치기보다, 자기 생각을 지키기 위해 진리를 해석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더 이상 자신을 비추는 빛이 아니라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됩니다. 신앙의 언어는 남아 있지만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생명은 점점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과정은 매우 역설적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이 중요하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그 말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고, 더 나아가 체어리티보다 자신을 높이는 순간 질서가 뒤집힙니다. 그리고 그 분리가 계속되면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지키려 했던 신앙 자체마저 변질됩니다.

 

이것은 진리가 선에서 생명을 받는다는 스베덴보리의 기본 질서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신앙의 지식이 아무리 정확해도 그것이 주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고 삶 안에서 선과 결합되지 않는다면, 그 지식만으로는 살아 있는 신앙을 이루지 못합니다. 신앙의 생명은 체어리티와의 결합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AC.332를 다른 교회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말씀으로 사용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서도 아는 것이 사는 것보다 앞설 수 있고, 교리적 확신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질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을 더 잘 믿기 위해 배운 진리가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과 자기 의를 지키는 도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말씀의 속뜻과 상응을 공부하는 우리에게 이 경고는 더욱 중요합니다. AC에 관한 지식이 많아지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속뜻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해서 그 자체로 신앙의 생명이 깊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진리를 통하여 자신의 악을 더 분명하게 보고, 주님 앞에서 더욱 겸손해지며, 이웃을 더욱 지혜롭게 사랑하고 실제 쓰임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AC.325부터 AC.332까지 이어 보면 그 흐름은 분명합니다. 사랑에서 신앙이 분리되고,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나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신앙이 체어리티보다 높아지며, 마침내 체어리티가 소멸됩니다. 이어 교리가 왜곡되고, 그 왜곡된 상태가 확장되어 여러 파생 교리를 낳고, 마지막 라멕에서는 신앙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됩니다.

 

결국 라멕은 신앙을 버린 사람의 단순한 표상이 아닙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높이고 신앙을 그 생명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래서 AC.332의 가장 무거운 질문은 나는 신앙을 얼마나 강하게 붙들고 있는가?만이 아니라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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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2, 창4:18, 라멕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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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4:18)

 

AC.332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 역시 각각 이름들로 불렸으며, 마지막이 라멕(Lamech)인데,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18) The heresies that sprang from this one are also called by their names, in the last of which, called Lamech, there was nothing of faith remaining. (verse 18)

 

해설

AC.332는 앞의 AC.331에서 말한 이단의 확장이 계속되어 마침내 어디에 이르는지를 보여 줍니다. AC.331에서 에녹은 가인으로 표상된 이단, 곧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의 교리가 더욱 확장된 상태를 나타냈습니다. 이제 창4:18에는 에녹에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 라멕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나타납니다. 문자적으로는 한 집안의 계보이지만, 스베덴보리의 속뜻에서는 하나의 교리적, 교회적 상태에서 여러 파생된 상태들이 생겨나며 점차 변질되어 가는 과정을 나타냅니다.

 

AC.332가 먼저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이단에서 생겨난 여러 이단들입니다. 처음의 근본적인 문제는 하나였습니다. 사랑에서 신앙을 분리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분리가 한 번 일어나고 계속 유지되면 그것이 한 형태로만 머물지 않고 여러 파생된 교리적 상태들을 낳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4낳고, 낳고, 낳았다는 계보의 언어는 속뜻에서 단순한 혈통의 계승만이 아니라 교리와 교회의 상태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어지는 영적 계승을 보여 줍니다.

 

여기에서 이단이라는 말을 오늘날 특정 교단을 정죄하는 의미로 곧바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AC.324부터의 문맥에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핵심은 본래 하나였던 사랑과 신앙이 분리되면서 생겨난 교리적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 이단들이 생겨났다는 말은 단순히 교파의 수가 늘어났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의 영적 분리에서 여러 변형된 교리적 상태들이 파생되었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정확합니다.

 

이 점에서 창4의 계보는 하나의 점진적인 변질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 가인은 신앙 자체를 없앤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을 사랑과 체어리티에서 분리하여 그것을 주된 것으로 높이려는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초기에는 아직 신앙에 속한 어떤 것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것이 AC.330에서 가인이 를 받아 보존되는 이유와도 연결됩니다. 이후 체어리티가 신앙을 통하여 다시 심어져야 했기 때문에 신앙 자체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소멸되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보존되었다고 해서 분리된 신앙의 상태 자체가 승인된 것은 아닙니다. 가인으로 표상되는 신앙이 계속 체어리티와 결합되지 않은 채 전개되면 그 상태 역시 점차 변질될 수 있습니다. AC.331의 에녹은 그 첫 확장이고, AC.332에서는 다시 이랏, 므후야엘, 므드사엘을 거쳐 라멕에 이릅니다. 각각의 이름은 앞의 상태에서 파생된 또 다른 교리적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AC.332에서 가장 무거운 말이 나옵니다. ‘ 마지막이 라멕인데, 안에는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출발점은 신앙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정작 신앙에 속한 것마저 잃어버립니다. 이것은 창4의 가인 계열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설입니다. 체어리티보다 신앙을 앞세워 신앙을 지키려 했지만, 신앙을 그 생명인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한 결과 마침내 신앙 자체의 성질도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단지 어떤 교리를 알고 그것을 옳다고 인정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참된 신앙은 체어리티와 결합되어야 합니다. 진리는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진리가 되고, 신앙은 삶의 선과 결합될 때 살아 있는 신앙이 됩니다. 따라서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계속 분리되어 있다면 처음에는 여전히 신앙의 지식과 형식을 유지할 수 있어도, 그 상태가 계속 진행되면서 신앙을 신앙답게 하는 내적 생명을 잃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신앙에 속한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는 말을 그 시대의 모든 사람에게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32는 가인에서 파생되어 라멕에 이른 특정한 교리적 계열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곧바로 당시 인류 전체에서 신앙이 완전히 사라졌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4와 창5, 그리고 이후 노아로 이어지는 전체 흐름을 함께 보면 주님께서 다른 방식으로 교회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과정이 계속 나타납니다.

 

이 점은 AC.330가인의 와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신앙을 보존하셨다는 것은 가인 계열의 모든 후손이 반드시 끝까지 참된 신앙을 유지하도록 강제하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유 가운데 주님께서 보존하신 진리를 받아들이고 선과 결합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그것을 계속 왜곡하여 잃을 수도 있습니다. 라멕은 바로 후자의 길이 끝까지 진행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가인에서 라멕까지의 흐름은 단순히 이단이 여러 이단으로 갈라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더 깊게는 신앙과 체어리티의 질서가 한 번 무너진 뒤 그 분리가 계속될 때 어떠한 영적 붕괴가 일어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사랑과 신앙의 분리였고, 이어 그 분리가 예배에 나타났으며, 사람들의 상태가 악해지고 체어리티가 소멸되고 교리가 왜곡되었습니다. 그 왜곡이 계속 확대되자 마침내 처음에 그렇게 높였던 신앙 자체에 속한 것마저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창4의 계보 전체를 단순한 절망의 이야기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섭리는 특정한 한 계열의 성공이나 실패에 매이지 않습니다. 가인 계열이 라멕에서 신앙마저 잃는 상태에 이르더라도 주님의 구원의 질서가 함께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후의 말씀에서는 그 종말 가운데서도 어떤 것들이 보존되고, 또 새로운 교회적 상태가 어떻게 준비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따라서 AC.332는 우리에게 매우 엄중하면서도 단순한 질문을 던집니다. ‘내가 붙들고 있는 신앙은 무엇과 결합되어 있는가?신앙을 많이 말하고 진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만으로 그 신앙이 살아 있다고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그 진리가 악을 죄로 여기고 피하게 하며, 이웃의 참된 유익을 구하게 하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선과 결합될 때 신앙은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채 자신만을 높이기 시작하면, 끝에는 체어리티뿐 아니라 신앙 자체까지 잃을 수 있다는 것이 라멕에 이른 가인 계열의 무거운 경고입니다.

 

심화

1. 분리된 신앙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 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 심화1. 왜 ‘분리된 신앙’은 결국 신앙 자체까지 잃게 되는가? AC.332에서 특별히 깊이 생각할 부분은 하나의 역설입니다. 가인의 출발점은 신앙을 없애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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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 심화 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2.심화2. 가인의 표로 신앙을 보존하신 주님의 섭리는 라멕에서 실패한 것인가? AC.330에서는 주님께서 가인에게 표를 주어 신앙이 침해받지 않도록 보존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도 분명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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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라멕에서 신앙이 사라졌는데 아다와 씰라의 계열에서는 유용한 것들이 나타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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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있는가?

 

AC.332 심화 4, ‘가인 계열’ 이야기와 현 기독교, 개신교 생명 주기의 오버랩

AC.332 심화4. 가인 계열의 생명 주기는 오늘날 기독교와 어떻게 겹쳐 보일 수 있는가? 가인 계열을 따라 읽다 보면 오늘날 기독교, 특히 개신교의 모습이 겹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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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3, 창4:19-22, 아다와 씰라, 야발, 유발, 두발가인

19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And Lamech took unto him two wives; the name of the one was Adah, and the name of the other Zillah. 20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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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31, 창4:17, 에녹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And Cain knew his wife, and she conceived and bare Enoch; and he was building a city, and 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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