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3

이제 우리는 ‘성읍’(city)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창세기의 이 부분 전체가 역사 형식(historical form)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적 의미(sense of the letter)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가인이 성읍을 세우고 그것을 에녹이라 불렀던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문자적 의미로부터 그들은 또한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했음에도 이미 그 땅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말입니다. 역사적 연속(historical series)에는 이러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태고인들(most ancient people)은 모든 것을 ‘표상적 유형들’(representative types) 아래 ‘역사 형식’(form of a history)으로 배열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에게 지극히 즐거운 일이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We have now seen what a “city” signifies. But as all this part of Genesis is put into a historical form, to those who are in the sense of the letter it must seem that a city was built by Cain, and was called Enoch, although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they must also suppose that the land was already populous, notwithstanding that Cain was only the firstborn of Adam; the historical series has this in it. But as we observed above, the most ancient people were accustomed to arrange all things in the form of a history, under representative types, and this was to them delightful in the highest degree, for it made all things seem to be alive.

 

해설

AC.403은 창세기 4장을 읽는 데서만 중요한 번호가 아니라,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부 전체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중요한 해석 원리입니다. 앞의 AC.402에서는 ‘성읍’이 실제 성읍 자체보다 교리적인 것 또는 이단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창세기 본문은 마치 실제 인물들이 태어나고, 성읍을 세우고, 그 성읍에 이름을 붙인 것처럼 역사 이야기의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AC.403은 바로 그 질문에 답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창세기의 이 부분 전체가 역사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문자적 의미만을 따라 읽으면 가인이 실제로 성읍을 세우고 그 이름을 에녹이라 불렀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이 그렇게 보이도록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역사 형식을 문자 그대로만 밀어붙일 때 생깁니다. 스베덴보리는 가인이 아담의 장자에 불과한데도 이미 성읍을 세울 만큼 많은 사람이 땅에 살고 있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난점이 생긴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스베덴보리의 관심은 단순히 ‘가인의 아내는 어디에서 왔는가?’ 같은 역사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실제 사건들의 연대기적 기록만을 목적으로 쓰인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의 답은 그렇지 않다는 쪽입니다. 창세기 초반의 이 부분은 영적인 실재를 역사적인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역사적 연속’(historical series)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가인이 태어나고, 아벨을 죽이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일련의 이야기는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연속된 역사처럼 전개됩니다. 그러나 그 속뜻에서는 교회의 상태들이 서로 이어지고, 하나의 교리적 상태가 다음 상태를 산출하며, 사랑과 신앙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쇠퇴하는지가 하나의 영적 연속으로 펼쳐집니다. 문자적 역사 형식은 그 영적 연속을 담는 외적 그릇인 셈입니다.

 

스베덴보리는 그 이유를 태고인들의 사고방식에서 찾습니다. 태고인들은 ‘모든 것을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하는 데 익숙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표상적 유형들’(representative types)이란 자연적인 인물, 장소, 사건, 사물 등을 통하여 영적이고 천적인 실재를 나타내는 형식을 말합니다. 곧 추상적인 교리나 영적 상태를 직접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 사람과 장소와 사건의 형태로 살아 있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태고교회의 퍼셉션적 성격과도 잘 연결됩니다. 태고인들은 영적인 것을 자연적인 것과 분리된 추상 개념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자연계의 모든 것 속에서 영적인 의미를 느끼고 보았으며, 자연적인 형상들을 통해 천적이고 영적인 실재를 지각하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영적 진리를 이야기와 인물과 장소의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단순한 문학적 장식이 아니라 매우 자연스러운 사고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방식이 그들에게 ‘지극히 즐거운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AC.403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적 진리를 단지 추상적인 명제와 정의로만 전달하면 개념으로 머물 수 있지만, 그것을 사람과 사건과 장소의 형식으로 표현하면 진리가 움직이고 관계를 맺으며 살아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가인과 아벨, 에덴과 놋, 에녹과 성읍은 단순한 추상어가 아니라 영적 상태들이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이야기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창세기 초반의 서술은 일종의 ‘살아 있는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앙이 체어리티에서 분리되면 교리적 오류가 파생된다’고 한 문장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의 얼굴 앞에서 나가고, 놋 땅에 거하고, 에녹을 낳고, 성읍을 쌓는 이야기로 펼쳐 보여 줍니다. 그러면 하나의 교리적 명제가 인간의 선택과 관계와 결과를 가진 살아 있는 서사가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403을 근거로 ‘창세기 초반은 역사적 의미가 전혀 없고 순전히 만들어 낸 이야기다’라고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이번 번호에서 스베덴보리가 직접 강조하는 것은 ‘역사 형식’과 ‘표상적 유형들’입니다. 그의 관심은 문자적 형식 뒤에 있는 속뜻을 밝히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번호에서 우리가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이 부분을 단순한 문자적 연대기로만 읽지 않고, 영적인 실재를 역사 형식 아래 배열한 말씀으로 읽는다’는 정도입니다.

 

또한 ‘역사 형식’이라고 해서 내용이 임의적이거나 무질서하게 꾸며졌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스베덴보리가 ‘역사적 연속’이라고 부른 것처럼, 사건들의 순서와 관계 자체가 영적 상태들의 질서와 진행을 담고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보다 먼저 나오고, 아벨을 죽인 뒤 놋 땅에 거하며, 그 뒤 에녹과 성읍이 나오는 순서는 임의적인 배열이 아닙니다. 각각이 앞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이어지는 영적 연속을 표현합니다.

 

이 점은 AC.399-402의 흐름을 다시 보면 더욱 분명해집니다. 가인이라는 분열에서 에녹이라는 새로운 분열이 산출되고, 그것이 가르침으로 형성되며, 다시 성읍이라는 교리적 전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만일 이것을 추상적인 교리 설명으로만 기록했다면 매우 건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은 그것을 출생과 이름과 성읍 건설이라는 이야기로 표현했습니다. 바로 이렇게 함으로써 영적 변화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따라서 AC.403은 우리가 창세기 초반을 읽는 태도에도 중요한 기준을 줍니다. 문자적 이야기를 무시하고 곧바로 속뜻으로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이야기의 흐름을 충분히 따라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역사 형식 자체가 속뜻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 나오고, 누가 누구를 낳고, 어디로 이동하며, 무엇을 세우고, 무엇이라 이름하는지가 모두 영적 연속을 담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동시에 문자적 이야기에서만 멈추어서도 안 됩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말씀의 깊이는 그 역사 형식 안에 교회의 상태, 인간의 거듭남, 사랑과 신앙의 관계, 선과 진리의 질서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적 의미와 속뜻은 경쟁하는 두 층위라기보다, 외적 형식과 그 안에 담긴 내적 생명의 관계로 보는 것이 좋습니다.

 

AC.403의 마지막 표현, ‘모든 것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말은 우리가 왜 말씀의 표상과 상응을 공부하는지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상응을 공부하는 목적은 단어마다 뜻을 붙여 놓는 일종의 암호 해독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말씀 속 인물과 사건과 장소가 영적 실재와 연결되면서 다시 살아 움직이도록 보는 데 있습니다. ‘가인 = 신앙’, ‘아벨 = 체어리티’, ‘성읍 = 교리’라고 대응표만 외운다면 아직 태고인들이 느꼈던 그 생명성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 관계들이 하나의 살아 있는 영적 서사로 움직이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AC.403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하나의 중요한 안내문입니다. 태고인들은 영적 실재를 ‘표상적 유형들’ 아래 ‘역사 형식’으로 배열했고, 그 방식은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습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은 단순한 이름과 지명이 아니라 교회의 상태와 인간 마음의 변화를 살아 있는 역사처럼 보여 주는 표상적 형식입니다.

 

결국 AC.403이 말하는 것은 ‘역사를 버리고 상징만 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의 역사적 형식이 왜 그렇게 구성되었는지를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그 형식 안에서 영적 실재가 인물과 사건과 장소를 통하여 살아 움직입니다. 가인의 성읍도 바로 그렇게 읽어야 합니다. 단순히 고대의 한 사람이 세운 도시가 아니라, 체어리티에서 분리된 신앙이 어떻게 가르침을 낳고 교리적 세계를 형성해 갔는지를 살아 있는 역사 형식으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태고인들이 즐겨 사용했던 표상적 서술 방식이며, 스베덴보리가 창세기 초반의 속뜻을 읽는 기본 관점입니다. (AC.403 해설)

 

 

 

AC.404, 창4:18, ‘가인의 계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 최초의 이단에서 파생된 여러 이단들’

에녹이 이랏을 낳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And unto Enoch was born Irad; and Irad begat Mehujael, and Mehujael begat Methusael, and Methusael begat Lamech. (창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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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02, 창4:17, ‘성읍은 왜 교리를 의미하는가? - 거룩한 예루살렘에서 가인의 성읍까지’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 (창4:17) AC.402가인이 ‘쌓은 성읍’(city that was built)이 그 이단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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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5 심화

1. ‘태고 시대’

 

AC.45에는 ‘태고 시대’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처음 읽는 독자라면 이 말을 듣고 자연스럽게 석기 시대, 동굴 생활, 돌도구, 사냥과 채집 같은 모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곧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원시적인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이해와 의지의 상태를 동물로 표현할 만큼 깊은 영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려면 먼저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사용하는 ‘태고 시대’와 현대의 역사학·고고학에서 사용하는 시대 구분을 그대로 같은 것으로 놓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대의 선사시대 구분은 주로 도구, 생활 방식, 유물과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반면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에서 태고 시대를 말할 때 스베덴보리의 주된 관심은 그러한 기술사적 분류가 아니라 ‘태고교회’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입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 사람들은 영적으로 깊었다’는 말을 ‘석기 시대에 살았던 모든 사람이 높은 영적 상태에 있었다’는 주장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AC.45도 그런 역사학적 주장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와 관련하여 설명하는 사람들의 내적 상태와 표현 방식입니다. 이 둘을 구별해 두면 현대 고고학과 스베덴보리의 설명을 불필요하게 정면충돌시키지 않고 그의 글이 실제로 무엇을 말하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 사람들에게 특별히 돌리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퍼셉션’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사람이 무엇이 선하고 참인지 교리와 지식을 통해 배우고 양심에 따라 판단하는 방식과는 다른 내적인 지각을 가리킵니다. AC를 계속 읽으면 태고교회와 퍼셉션의 관계가 훨씬 자세하게 설명됩니다. 따라서 AC.45의 ‘태고 시대 사람들’이라는 표현도 그러한 전체 문맥 안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동물들을 가지고 이해와 의지에 속한 것을 표현했다는 말은 무엇일까요? AC.45가 직접 말하는 것은 태고 시대 사람들이 그렇게 ‘상징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며, 그와 같은 표현이 이후 선지서들과 구약 말씀 전체에도 계속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그들의 구체적인 언어생활이나 의사소통 방식을 상상하여 복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추상어가 없어서 동물 그림으로 말했던 원시인들’이라는 뜻도 아니고, 반대로 모든 태고교회 사람이 오늘날의 신학자보다 더 많은 교리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식의 양’과 ‘영적 상태의 깊이’를 같은 척도로 재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인은 자연과학, 역사, 언어, 기술에 관해 과거 사람이 알지 못했던 엄청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그만큼 더 깊은 퍼셉션을 가지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반대로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의 높은 영적 상태를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현대 과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도 아닙니다. 두 종류의 ‘앎’을 구별해야 합니다.

 

이 구별은 앞으로 AC를 읽는 데 상당히 중요합니다. 스베덴보리는 인류의 역사를 단순히 ‘옛날에는 무지했고 오늘날은 발전했다’는 한 방향으로만 보지 않습니다. 자연적인 지식과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의 내적 상태가 주님을 향해 얼마나 열려 있는가는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의 저술에서 태고교회가 높은 상태로 묘사되는 것을 현대의 기술 발전에 대한 부정으로 읽을 필요도 없습니다.

 

또 하나 주의할 것은 태고교회를 낭만적인 ‘완전무결한 황금시대’로 만드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이하와 AC의 설명을 따라가면 바로 그 태고교회 안에서도 인간의 proprium이 강해지고 질서가 무너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따라서 ‘태고 시대=모든 사람이 완전했던 시대’라는 식으로 이해하면 이후의 설명과 맞지 않습니다. 스베덴보리가 높이 평가하는 것은 특별히 태고교회의 초기 상태와 그들에게 있었던 천적인 성질과 퍼셉션이지, 아주 먼 옛날이라는 시간 자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AC.45에서 ‘태고 시대’를 만났을 때 ‘석기 시대와 어떻게 맞지?’라는 질문에 너무 오래 붙잡힐 필요는 없습니다. 먼저 이렇게 구별하면 충분합니다. 현대 역사학의 시대 구분은 인간의 외적인 생활과 물질문화를 중심으로 하고, 스베덴보리가 여기서 말하는 태고 시대는 태고교회와 관련된 인간의 영적 상태를 중심으로 합니다. 두 설명은 애초에 같은 질문에 답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 이해하고 나면 AC.45의 문장도 훨씬 자연스럽게 읽힙니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려는 것은 ‘원시인들이 놀랍게도 고등 신학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태고교회의 사람들이 인간의 이해와 의지에 속한 내적인 것들을 동물들을 통해 표현했으며, 그러한 상징적 표현이 이후 말씀에도 이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자연의 형상과 인간의 내적 상태 사이의 관계를 오늘날과는 다르게 지각했던 태고교회의 영적 상태가 놓여 있습니다.

 

 

 

AC.45, 창1:24-25, ‘짐승으로 드러나는 마음 : 애정과 욕정의 질서화’

24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25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가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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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And to rule in the day, and in the night, and to distinguish between the light and the darkness; and God saw that it was good And the evening and the morning were the fourth day. (창1:18, 19)

 

AC.38

‘낮’(day)은 선을, ‘밤’(night)은 악을 뜻하며, 그래서 선(goods)을 가리켜서는 ‘낮의 일’(works of the day)이라 하고, 악(evils)을 가리켜서는 ‘밤의 일’(works of the night)이라 합니다. 또한 ‘빛’(light)은 진리를, ‘어둠’(darkness)은 거짓을 뜻합니다. 주님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By the “day” is meant good, by the “night,” evil; and therefore goods are called works of the day, but evils works of the night; by the “light” is meant truth, and by the “darkness” falsity, as the Lord says: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요3:19, 21) Men loved darkness rather than light. He that doeth truth cometh to the light (John 3:19, 21).

 

해설

 

AC.38은 매우 짧지만, 창세기 1장의 속뜻을 읽는 데 중요한 네 가지 대응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한 비유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언어가 지닌 영적 의미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선한 것들은 ‘낮의 일’, 악한 것들은 ‘밤의 일’이라고 합니다.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여기서 먼저 ‘왜 낮은 선이고 밤은 악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AC.38은 그 이유를 길게 설명하지 않고 대응 자체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자연적인 낮에는 빛이 있어 사물들이 드러나고 활동할 수 있으며, 밤에는 어둠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자연적 모습이 그 영적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빛’은 진리에, ‘어둠’은 거짓에 대응합니다. 진리는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볼 수 있게 하지만, 거짓은 그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앞의 AC.37에서는 아침·낮·저녁·밤의 교대를 영적·천적 상태의 교대에 비유했는데, 이번 AC.38에서는 곧바로 ‘밤은 악’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앞의 ‘밤’과 여기의 ‘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말씀의 상응을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사전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같은 자연적 대상이나 상태도 문맥에 따라 강조되는 영적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AC.37에서는 하루와 한 해의 변화가 ‘교대와 다양함’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고, AC.38에서는 ‘낮과 밤’, ‘빛과 어둠’의 대조를 통해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의 구별을 보여 줍니다. 따라서 AC.37의 모든 ‘밤’을 곧 악이라고 읽거나, 반대로 AC.38의 밤을 단순한 상태 변화 정도로 약화해서도 안 됩니다. 각각 그 글이 말하는 문맥을 따라가야 합니다.

 

스베덴보리가 요3:19, 21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다고 말씀하시고, 반대로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빛과 어둠이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진리와 거짓, 그리고 그것을 사랑하고 행하는 인간의 삶과 관계된다는 것이 잘 드러납니다.

 

특히 요3장의 말씀에는 ‘행위’가 함께 등장합니다. 사람들이 어둠을 사랑하는 이유는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이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빛으로 나오는데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입니다. 그러므로 AC.38이 선을 ‘낮의 일’, 악을 ‘밤의 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선과 악이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추상적인 개념이 아님을 이해하게 해 줍니다. 사람이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진리로 받아들이는지는 결국 삶과 행위에도 관계됩니다.

 

그렇다고 ‘행위만 보면 그 사람의 내적 상태를 모두 알 수 있다’고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AC.38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주려는 글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에서 왜 선과 악을 낮과 밤으로, 진리와 거짓을 빛과 어둠으로 표현하는지를 밝히는 글입니다. 따라서 이 대응은 먼저 다른 사람을 분류하는 도구가 아니라 말씀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살피는 데 사용해야 합니다.

 

또한 ‘빛=진리’라는 대응도 중요합니다. 진리를 단지 많이 아는 것과 그 진리를 받아들여 사는 것은 구별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진리가 삶에서 행해질 때에야 비로소 빛이 된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AC.38에서 빛은 진리 자체를 뜻합니다. 다만 요3장의 인용이 보여 주듯 사람은 그 빛을 사랑하여 그쪽으로 나올 수도 있고, 자기의 악한 행위 때문에 빛보다 어둠을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빛이 빛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사람이 그 빛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입니다.

 

이렇게 보면 창1:18의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라는 표현도 단순히 자연계의 밝음과 어둠을 나누는 이야기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거듭남의 과정에서는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서로 구별되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무엇이 진리인지 거짓인지 분별되지 않는다면 사람은 어느 쪽을 따라 살아야 하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AC.38은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네 가지 대응만 간결하게 제시합니다. ‘낮은 선, 밤은 악, 빛은 진리, 어둠은 거짓.’ 그러나 이 짧은 대응을 붙들고 창세기 1장을 다시 읽으면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셨다’는 말씀이 인간 안에서 선과 악, 진리와 거짓이 분명히 구별되어 가는 거듭남의 이야기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심화

1. 넷째 날 요약, 정리

 

AC.38, 심화 1, 넷째 날 요약, 정리

AC.38.심화1. 넷째 날 요약, 정리 창1:14-19의 넷째 날에 해당하는 AC.30-38을 여기까지 읽고 나면 여러 내용이 한꺼번에 등장해서 조금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해와 달과 별, 사랑과 신앙,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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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9, 창1:20,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AC.39-41)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들은 생물을 번성하게 하라 땅 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And God said, Let the waters cause to creep forth the creeping thing, the living soul; and let fowl fly above the earth upon the f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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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7, 창1:14-17,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

14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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