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67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에게는 말씀의 속뜻을 아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속뜻 안에는 이전에는 누구에게도 알려진 적이 없었고, 다른 삶의 본성(the nature of the other life)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결코 없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가 들어 있습니다. 이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바로 삶을 향하고 있고,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안에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로 하여금 여러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게 하시고, 기간 동안 제가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는 일이 이제 허락되었습니다. As of the Lords Divine mercy it has been given me to know the internal meaning of the Word, in which are contained deepest arcana that have not before come to anyones knowledge, nor can come unless the nature of the other life is known (for very many things of the Words internal sense have regard to, describe, and involve those of that life), I am permitted to disclose what I have heard and seen during some years in which it has been granted me to be in the company of spirits and angels.

 

해설

AC.67은 창2의 본문 해설로 들어가기 전에 놓인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스베덴보리는 여기서 곧바로 창2의 속뜻을 설명하지 않고, 자신이 이제부터 무엇을 밝히려 하는지 먼저 말합니다. 그것은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이며, 특히 그 가운데 매우 많은 것은 다른 ’, 곧 사후에도 계속되는 영적 삶의 본성을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따라서 AC.67은 창2의 첫 해설이라기보다, 앞으로 이어질 AC.67-72의 영계에 관한 증언을 여는 서문에 가깝습니다.

 

첫 문장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라는 표현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을 알게 된 일을 자신의 학문이나 추론의 성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자신에게 허락된일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문장에서도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었던 일과 그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는 일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AC.67의 처음과 끝이 모두 인간의 성취보다 주님의 허락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가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본성을 연결하는 이유도 본문 안에 분명히 제시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그 삶을 향하고’, 그 삶에 속한 것들을 묘사하며’, 또한 그것들을 그 안에 포함하고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것은 단순히 사후세계를 많이 알면 성경 해석에 도움이 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말씀의 속뜻 자체가 영적 세계와 인간의 영원한 삶에 관계되는 것들을 품고 있으므로, 그 세계의 본성을 전혀 모른다면 속뜻의 많은 부분 역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을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사후세계에 관한 책이다라고까지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메인 해설에는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후 세계를 바라보며 기록된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AC.67의 직접 진술은 그보다 신중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에 속한 매우 많은 것들이 다른 삶을 향하고 그것을 묘사하며 포함한다고 말합니다. 말씀의 속뜻은 이후 주님과 그분의 나라, 교회, 인간의 거듭남과 천국의 질서 등 훨씬 넓고 깊은 내용을 펼쳐 보일 것이므로, AC.67에서는 원문이 정한 범위를 그대로 지키는 편이 좋습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베덴보리가 자신이 듣고 보았던 것들을 밝히겠다고 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다른 삶의 본성을 철학적 추론으로 재구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으며, 그 기간 동안 듣고 본 것을 밝히겠다고 합니다. 바로 다음 AC.68부터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사람들이 보일 반응까지 예상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AC.67은 앞으로 이어질 영계에 관한 기록을 어떤 성격의 글로 읽어야 하는지를 미리 알려 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AC.67 하나만으로 스베덴보리의 영적 경험 전체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를 확정해서도 안 됩니다. 현재 메인 해설에는 공간을 이동한 것이 아니라 인식과 지각의 차원이 열렸다고 단정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번호 자체는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그가 여러 해 동안 영들과 천사들과 함께 있도록 허락되었고 그 가운데서 듣고 보았다고 말하는 데까지 따라가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 경험의 구체적인 성격은 이어지는 번호들과 다른 관련 저작을 통해 점차 확인해야 합니다.

 

결국 AC.67의 무게는 말씀의 속뜻과 영계에 관한 증언을 처음부터 서로 연결해 놓는 데 있습니다. 앞으로 창2의 속뜻을 읽는 독자는 단지 자연계의 사건과 인간 심리만을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려 해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만나게 됩니다. 동시에 스베덴보리는 자신이 그 다른 삶을 알게 된 것도, 그것을 이제 밝히게 된 것도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주님의 신적 자비와 허락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이 두 축, 말씀의 속뜻과 다른 삶의 관계주님의 허락 아래 주어진 증언AC.67 이후를 읽는 출발점입니다. (AC.67 해설)

 

심화

1. 다른 삶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AC.67 심화 1, ‘다른 삶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AC.67 심화1. ‘다른 삶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AC.67을 처음 읽는 독자는 거의 즉시 한 가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속뜻 안에 들어 있는 가장 깊은 아르카나는 ‘다른 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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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6, 창1, 말씀의 네 가지 스타일 : 태고교회, 역사, 예언, 시편

AC.66말씀에는 전반적으로 네 가지 서로 다른 스타일이 있습니다. 첫째는 태고교회의 스타일입니다. 그들의 표현 방식은 이 땅의 것과 세상의 것을 말할 때, 그것들이 표상하는 영적이고 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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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 있는 관계를 말합니다. 자연계의 어떤 것이 단지 우연히 영적인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기능과 쓰임을 통하여 영적인 것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상응은 사람이 임의로 정하는 상징과 다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개인적으로 장미를 어머니의 사랑과 연결하여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매우 의미 있는 상징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상응은 개인의 연상이나 취향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있는 질서에서 나옵니다.

 

사람 자신도 상응을 이해하는 중요한 예가 됩니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의 정서를 드러내고, 말은 생각을 표현하며, 행동은 의지를 밖으로 나타냅니다. 미소가 기쁨을 나타내고 눈물이 슬픔을 나타내는 것처럼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표현합니다. 물론 이러한 예만으로 스베덴보리의 상응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나타낼 있다는 기본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말씀의 속뜻도 이러한 관계와 깊이 연결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빛, , , , 나무, , , 길과 같은 자연적인 것들은 단순히 사전식으로 하나의 숨은 뜻을 부여받은 암호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들의 성질과 기능, 그리고 말씀 전체에서의 쓰임과 문맥을 따라 영적인 것과의 관계를 밝힙니다. 그러므로 상응을 공부한다는 것은 빛은 무조건 이것, 물은 무조건 저것이라는 식으로 상응표를 외우는 일이 아닙니다. 각각의 표현이 어떤 문맥에서 어떤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표상상응은 서로 밀접하지만 완전히 같은 말로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나 사건, 의식이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낼 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표상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면 상응은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그러한 표상과 의미가 가능하게 하는 질서 있는 관계를 가리키는 데 더 적합합니다. 따라서 성경의 어떤 것이 영적인 것을 표상하고 의미할 수 있는 것은 단순한 언어유희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에 상응의 질서가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을 현실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에 자의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비가 왔으니 주님께서 나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보내셨다거나, 우연히 어떤 동물을 보았으니 그것이 내 미래를 예고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상응과 다릅니다. 상응은 점술이나 징조 해석의 도구가 아닙니다. 특히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스베덴보리 자신이 말씀 전체의 연결과 영적 질서 안에서 어떻게 그 상응을 밝히는지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응의 관계는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연결에서 끝나지 않으며, 궁극적으로 모든 선과 진리의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의 문자에서 속뜻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단어의 숨은 뜻은 무엇인가?를 알아맞히는 일이 아닙니다. 외적인 표현을 통하여 그 안의 영적인 질서를 보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의 근원이신 주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AC.1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주님을 가리킨다고 한 것과 연결됩니다.

 

AC.4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안에 품고 있다고 선언합니다. 앞으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를 하나씩 해설하면서 우리는 상응이 실제 말씀 해석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AC.4에서는 상응의 모든 체계를 미리 완성하려 하기보다, 말씀의 자연적인 표현과 안의 영적인 사이에는 임의적이지 않은 질서 있는 관계가 있다는 기본 원리를 붙드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AC.4 심화 2)

 

 

 

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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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 심화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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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도 어느 정도 비슷한 방식을 경험합니다. 국기가 한 나라를 나타내고, 왕관이 왕권을 나타내며, 결혼반지가 부부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말씀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표상은 사람이 임의로 의미를 부여한 상징보다 훨씬 깊은 개념입니다.

 

성경에서 어떤 인물이나 장소, 사물이나 행위가 표상한다고 할 때에는 그 외적인 것이 말씀 안에서 더 내적인 영적 실재를 나타내는 역할을 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구약의 제사는 문자적으로는 실제로 행해진 종교의식이지만, 스베덴보리는 그 제사들이 주님과 주님께 속한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표상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제사라는 외적인 의식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표상적 기능을 합니다.

 

이 점에서 표상과 단순한 비유는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유는 어떤 것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다른 것을 끌어와 비교하는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표상은 단지 설명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문학적 장치가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과 장소와 사건들이 실제로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표상하도록 말씀 안에 배열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이집트와 가나안, 성막과 성전, 제사와 절기 같은 것들이 문자적 의미를 가지면서 동시에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것이 표상적 의미를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그 문자적 이야기나 역사적 차원을 곧바로 부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상한다는 말의 핵심은 외적인 것 안에 그것이 나타내는 더 내적인 것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따라서 말씀을 속뜻으로 읽는 것은 문자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자 안에서 그 문자가 나타내고 있는 영적인 것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AC.3에서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몸과 영혼의 관계에 비유한 것과도 연결됩니다.

 

그래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단순히 겉으로 보이는 사건에만 머물지 않고 영적인 것을 표상할 수 있습니다. 에덴동산과 그 안의 나무와 강, 뱀과 열매 같은 것들도 이후 AC의 해설을 따라가면 각각 태고교회와 인간의 내적 상태에 관한 것을 표상하고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임의로 이것은 이것을 상징한다고 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전체의 질서와 스베덴보리가 밝히는 상응과 속뜻의 연결을 따라 그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AC.4 마지막에서 스베덴보리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인간의 새로운 창조, 곧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안에 품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문장이 앞으로 AC에서 표상이라는 말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창조의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이 단지 자연계의 대상들로만 머물지 않고 인간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에 관한 영적인 것들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표상을 이해할 때 가장 먼저 붙들 것은 외적인 것이 내적인 것을 나타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표상이 자의적인 상징 놀이가 아니라 말씀 안에 있는 영적 질서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각각의 표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나타내는지는 해당 문맥에서 하나씩 확인해 가야 합니다. (AC.4 심화 1)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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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서문, ‘창세기는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말한다’

AC.4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그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첫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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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심화

1. 속 사람(internal man)

 

AC.3에서 스베덴보리는 인간에게 사람(internal man) 사람(external man)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표현은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 전체에서 매우 자주 만나게 되므로 처음 등장하는 이 자리에서 기본적인 뜻을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사람을 단순히 마음속의 , 사람밖으로 보이는 라고 이해하면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구별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몸으로 행동하고 말하며 자연계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겉 사람과 관계하고,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사랑은 속 사람과 관계한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의 구별은 단순히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의 구별보다 깊습니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지 않는 생각과 욕망도 많이 있지만, 그것이 단지 마음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두 속 사람에 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연적인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에서 생각하고 원하는 것 역시 내면에서 일어나지만 여전히 겉 사람의 질서에 속할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은 사람이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주님에 의해 형성되고 열리는 내적인 인간과 관계합니다. 사람은 속 사람을 통하여 주님에게서 오는 선과 진리를 받아들이며, 거듭남에서는 이 속 사람과 겉 사람의 관계가 매우 중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내적인 것을 통하여 외적인 것을 질서 있게 하시며, 사람이 받은 진리와 선이 실제 삶에 나타나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거듭남은 단지 겉으로 보이는 행동을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사람의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주님의 질서 아래 서로 연결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면 AC.3에서 왜 속 사람과 겉 사람이 말씀의 비유로 사용되는지도 더 분명해집니다. 스베덴보리는 속 사람이 살아 있으며 겉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 속 사람과 분리된 겉 사람은 죽은 몸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씀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말씀의 문자만을 그 안의 내적인 것과 분리하여 보면 영혼 없는 몸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은 좋은 것이고 사람은 나쁜 이라는 대립이 아닙니다. 몸이 영혼과 결합하여 살아 있는 인간을 이루듯이, 겉 사람도 속 사람과 올바르게 연결될 때 인간의 삶에서 필요한 쓰임을 수행합니다.

 

따라서 사람을 단순히 양심, 진심, 속마음, 또는 인간의 가장 깊은 중심 하나와 곧바로 동일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AC를 계속 읽다 보면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내적인 것 자체도 여러 방식으로 구별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AC.3에서는 우선 사람은 자연적인 사람보다 내적인 인간이며, 주님에게서 오는 영적인 것들을 받아들이고 사람을 질서 있게 하는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정도를 붙들면 충분합니다.

 

이렇게 보면 AC.3의 비유도 단순한 몸과 마음의 비유보다 훨씬 깊어집니다. 사람의 겉 사람이 속 사람과 분리되어서는 참으로 살아 있을 수 없듯이, 말씀의 겉 글자 역시 그 안의 내적인 생명과 분리되어서는 살아 있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앞선 AC.2에서 보았듯이 그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근원은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입니다. (AC.3 심화 1)

 

 

 

AC.3, 서문, ‘문자는 몸이고, 속뜻은 생명이다’

AC.3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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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단지 생명을 주시는 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은 말씀에 왜 생명이 있는지를 설명하는 가운데 등장하지만, 동시에 스베덴보리가 주님과 생명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보여 주는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이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가 주님을 생명 자체라고 할 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처럼 생명을 받아 가지고 계신 존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생명의 근원이 주님 자신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피조물은 스스로 생명의 근원이 될 수 없으며, 살아 있다는 것 자체를 주님에게 의존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생명이 있지만 주님은 생명 자체이십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AC.2에서는 이 깊은 주제를 인간 생명의 구조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 꺼낸 것이 아니라 말씀의 생명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꺼냅니다. 스베덴보리는 말씀의 생명이 그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는 데서 온다고 합니다. 말씀의 가장 깊은 생명과 주님을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이어 그분을 내적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은 살아 있지 않다고까지 말합니다.

 

여기서 주님을 가리킨다는 것을 모든 구절에서 문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찾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2 자체가 나름의 방식으로(in its own way) 주님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구약의 어떤 본문은 문자적으로 인물의 생애를 말하고, 어떤 본문은 전쟁이나 율법이나 족보를 말합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그 외적인 것 안에 있는 내적인 것이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향하기 때문에 그것이 살아 있고 신성한 말씀이라고 설명합니다.

 

생명 자체라는 표현은 이후 스베덴보리의 저작을 읽으면서 훨씬 더 깊어질 주제입니다. 인간이 주님에게서 생명을 받는다는 것, 그 생명을 마치 자기 자신의 것처럼 느끼도록 허락받는다는 것, 생명이 어떻게 인간에게 유입되는가 하는 문제들은 이후 각각의 문맥에서 더 자세히 살펴야 합니다. AC.2 한 번호에서 그 전체 교리를 미리 완성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AC.2에서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이해하는 가장 안전한 출발점은 이것입니다. 말씀에는 그 자체로 독립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의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내적으로 바라보고 그분을 가리키기 때문에 생명이 있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말씀에 생명을 더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생명의 근원 자체이시며, 바로 그분을 향하는 내적인 것이 말씀을 살아 있고 신성한 말씀 되게 합니다. (AC.2 심화 2)

 

 

 

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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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 심화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의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는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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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심화

1.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

 

AC.2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in general and in particular)는 얼핏 보면 단순한 강조처럼 보이지만, 앞으로 아르카나 코엘레스티아를 읽는 데 매우 중요한 표현입니다. 더구나 이 표현은 AC.1에도 이미 등장했고, AC.2에서는 가장 작은 세부적인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하나에 이르기까지도라는 말이 뒤따르면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렇다면 스베덴보리가 굳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전체적으로는 말씀이 전체적인 흐름과 내용에서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와 종교적인 믿음 등에 관계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스베덴보리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개별적으로나라고 덧붙입니다. 말씀의 큰 이야기와 중심 주제만 내적인 것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이루는 개별적인 것들에도 내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AC.2에서는 이것을 더욱 강화하여 가장 작은 세부적인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미하고 품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앞으로 AC의 해설 방식이 왜 그토록 세밀한지를 이해하게 해 줍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한 장 전체가 어떤 내적 주제를 다룬다고 해서 몇몇 중요한 구절만 속뜻을 가지고 나머지는 그 이야기를 이어 주는 장식이나 배경이라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스베덴보리는 인물과 장소, 행동과 사물, 숫자와 방향, 반복되는 표현들까지 하나씩 살핍니다. 그렇게 하는 근거가 바로 말씀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내적인 것을 품고 있다는 그의 확신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개별적으로를 각 단어 하나에 언제나 하나의 고정된 상응 뜻을 기계적으로 대입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AC를 읽어 가면 같은 말도 문맥과 연결 관계에 따라 그 의미가 드러나는 방식을 세심하게 살펴야 한다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작은 세부에까지 속뜻이 있다는 것과 모든 단어를 고정된 상응 사전으로 해독할 있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전자는 AC.2가 직접 선언하는 말씀의 성격이고, 후자는 우리가 그 선언을 잘못 사용하면서 만들어 낼 수 있는 해석 방식입니다.

 

그리고 AC.2에서는 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가 특별히 주님과 연결됩니다. 말씀 안의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 생명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는 생명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표현의 궁극적인 초점은 단순히 성경의 모든 단어에는 숨은 뜻이 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내적인 것들이 각기 그 나름의 방식으로 주님을 향하고 있기 때문에 말씀 전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라는 표현은 AC의 방대한 세부 해설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말씀의 전체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그 이야기를 이루는 개별적인 것들까지 내적인 것을 품고 있으며, 그것들은 궁극적으로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킵니다. 바로 이 확신 때문에 스베덴보리는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말씀을 큰 주제만 요약하지 않고 가장 세밀한 표현들까지 따라가며 해설합니다. (AC.2 심화 1)

 

 

 

AC.2 심화 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 심화2.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e itself) AC.2에서 스베덴보리는 주님을 단지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the Lord, who is the very l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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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2, 서문, ‘말씀의 생명은 주님에게서 온다’

AC.2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아직도 말씀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아니 가장 작은 세부적인 것 하나하나, 가장 미세한 점 하나에 이르기까지도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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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4. 신적 진리(Divine Truth) 무엇인가?

 

AC.1 해설을 읽다가 신적 진리(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 있습니다. 먼저 분명히 할 것은 AC.1 원문 자체에는 Divine Truth라는 표현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말씀의 내적인 것과 그 근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해설에 사용된 스베덴보리의 중요한 신학 용어입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AC.1 어떤 단어를 신적 진리라고 번역한 것인가?가 아니라 해설에서 말한 신적 진리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스베덴보리에게 신적 진리는 단순히 인간이 알고 있는 옳은 정보나 참된 명제를 뜻하지 않습니다. 그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진리입니다. 인간은 수많은 사실과 진리를 알 수 있지만, 신적이라는 말이 붙을 때에는 그 출처가 인간의 지식이나 추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적 진리는 말씀과도 깊이 연결되고, 인간에게 빛을 주며 선으로 인도하는 주님의 역사와 연결됩니다.

 

그러나 진리는 인간의 이해 속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사람을 변화시키기 시작할 비로소 신적 진리가 된다고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신적 진리가 신적인 것은 인간에게 어떤 효과를 일으켰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근원 자체가 주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 근원은 주님께 있습니다.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그 신적 진리를 자신의 이해와 삶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입니다.

 

이 점은 AC.1과도 잘 연결됩니다. 스베덴보리는 구약의 외적 의식과 규례와 역사처럼 보이는 것들 안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것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주님과 주님의 천국과 교회 등에 관계한다고 선언합니다. 이때 말씀을 단순한 인간의 종교 문헌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오는 것으로 이해하기 위해 신적 진리라는 개념은 앞으로 매우 중요해집니다. 다만 AC.1 자체가 아직 그 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 의미를 미리 지나치게 확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따라서 AC.1과 관련하여 신적 진리를 기억할 때에는 우선 두 가지만 붙들면 충분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참인 정보를 뜻하는 말이 아니며, 그 근원이 주님께 있는 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AC를 읽으면서 말씀과 주님, 선과 진리, 신적 유입에 관한 설명이 쌓이면 신적 진리라는 말의 깊이도 점차 더 분명해질 것입니다. (AC.1 심화 4)

 

 

 

AC.1, 서문, ‘말씀 안에 담긴 하늘의 비밀들’

AC.1구약의 말씀을 단순히 겉 글자로만 보아서는, 그 안에 하늘의 깊은 비밀들이 들어 있으며,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전체적으로나 개별적으로나 주님과 주님의 천국, 교회, 종교적인 믿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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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심화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AC.1 해설과 심화 2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스베덴보리의 원어에서는 층위가 무엇인가?’라는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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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2. 층위 무엇인가?

 

AC.1 해설에서 층위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말씀의 겉 글자와 그 안의 내적인 것이 단순히 같은 평면에 놓인 두 가지 설명이 아니라는 점을 쉽게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스베덴보리에게 층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스베덴보리의 저작 전체에서 서로 다른 단계와 질서의 구별은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겉 사람과 속 사람, 지상과 천국을 단순히 같은 종류의 것이 조금 더 높아지거나 낮아진 것으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후기 저작에서는 연속적 단계와 불연속적 단계의 구별도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층위라는 한국어는 스베덴보리의 세계를 설명할 때 유용한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AC.1 원문 자체가 층위라는 전문 개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AC.1은 외적인 것들 안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적인 것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AC.1 해설에서 사용한 층위는 우선 이 차이를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기 위한 해설어입니다. 이것을 곧바로 스베덴보리의 단계 교리 전체와 동일시하거나, AC.1이 이미 자연적·영적·천적 단계의 완성된 구조를 설명하고 있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구별은 오히려 층위라는 말을 더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해 줍니다. 말씀의 문자와 내적인 것을 완전히 분리된 두 책처럼 생각할 필요도 없고, 반대로 속뜻을 문자적 의미의 조금 더 깊은 해석 정도로만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의 말씀 안에서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어떻게 관계하는지는 이후 AC를 읽으면서 스베덴보리가 실제로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는지를 따라가야 합니다.

 

따라서 AC.1에서 층위라는 표현은 하나의 유용한 안내어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다만 그 단어 자체를 AC.1 원문의 전문용어로 생각하지 않고, 글자에서 보이는 외적인 것과 안에 존재하는 내적인 것을 구별하여 이해하기 위한 해설상의 표현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선을 그어 두면 앞으로 스베덴보리의 실제 단계 교리가 등장할 때 그 개념과도 혼동하지 않고 연결할 수 있습니다. (AC.1 심화 2)

 

 

 

AC.1 심화 3, AC.1의 ‘층위’에 직접 대응하는 원어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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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1 심화 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 심화1. ‘religious belief’를 왜 ‘종교적인 믿음’으로 번역하는가? AC.1에서 ‘religious belief’는 말씀의 내적인 것들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열거하는 가운데 등장합니다. 스베덴보리는 그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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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6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인 여섯 (days), 여섯 시기(periods) 전반적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The six days, or periods, which are so many successive states of the regeneration of man, are in general as follows.

 

해설

AC.6은 창세기 1장을 스베덴보리가 어떻게 읽는지를 처음으로 분명하게 선언하는 문장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첫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창조의 과정이 이어지지만, 스베덴보리는 이 여섯 날을 사람의 거듭남의 연속적 상태들이라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 이어지는 빛, 궁창, 땅과 식물, 두 광명체, 물고기와 새, 짐승과 사람의 창조는 단지 자연계의 창조 순서를 설명하는 것으로만 읽히지 않고, 사람이 거듭나는 동안 그 내면에서 차례로 일어나는 상태들의 변화로 읽히게 됩니다. AC.6은 아직 그 여섯 상태 각각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곧 이어지는 AC.7-13에서 하나씩 밝혀집니다. 여기서는 먼저 독자에게 여섯 날을 여섯 거듭남의 상태로 읽으라는 가장 기본적인 해석의 문을 열어 줍니다.

 

특히 스베덴보리가 날들(days)이라고만 하지 않고 곧바로 또는 시기들(or periods)이라고 덧붙인 점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창세기의 은 단순히 일정한 길이의 자연적 시간을 가리키는 데 머물지 않고, 거듭남 가운데 사람이 지나가는 하나의 상태와 그 상태가 지속되는 시기를 가리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이라는 순서는 단순한 달력상의 시간 순서가 아니라 거듭남의 상태가 차례로 전개되는 질서를 보여 줍니다. AC.6이 특별히 연속적 상태들(successive states)이라고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거듭남은 하나의 동일한 상태가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앞의 상태에서 다음 상태로 변화하면서 진행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연속적 상태들을 곧바로 사람이 반드시 여섯 단계를 한 번씩 정확히 통과해야 하는 고정된 도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AC.6은 아직 그런 세부적인 문제를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의 전반적으로(in general)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지금부터 설명할 여섯 상태가 거듭남의 전체 과정을 전반적으로 보여 주는 개요임을 먼저 밝힙니다. 따라서 AC.7-13에서 설명되는 여섯 상태는 거듭남의 큰 질서를 보여 주는 것이며, 각 상태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수많은 세부 과정까지 이 짧은 개요에 모두 담겨 있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AC.6은 세밀한 거듭남의 단계표를 제시하는 문장이 아니라, 창세기 1장의 여섯 날 전체를 거듭남이라는 하나의 큰 관점에서 바라보게 하는 선언입니다.

 

이 때문에 AC.6은 짧지만 창1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독자가 이 한 문장을 받아들이면 창세기 1장의 풍경이 달라집니다. 빛이 생기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지, 물 가운데 궁창이 생기고 위의 물과 아래의 물이 나뉘는 것은 사람 안에서 어떤 상태를 뜻하는지, 땅이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내는 것은 무엇인지, 해와 달과 별이 나타나고 살아 움직이는 생물들이 등장하며 마침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새롭게 묻게 됩니다. AC.6은 아직 그 질문들에 답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모든 것을 읽는 첫 열쇠를 건넵니다. 창조의 여섯 날은 사람의 거듭남의 여섯 연속적 상태이며, 이제 AC.7부터 그 상태들이 차례로 열리기 시작합니다. (AC.6 해설)

 

 

 

AC.7, 창1 개요, ‘혼돈과 흑암 위에 먼저 움직이시는 주님의 자비: 거듭남의 출발점’

AC.7첫 번째 상태는 앞서는 상태로서, 유아기부터의 상태와 거듭남 바로 직전의 상태를 모두 포함합니다. 이 상태를 ‘혼돈’(void), ‘공허’(emptiness), 그리고 ‘흑암’(thick darkness)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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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린 영계의 증언’

AC.5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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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4

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는 동안에는, 안에 이러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없습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장들에서 문자적 의미로 발견할 있는 것은 세상의 창조와, 낙원이라 불리는 에덴동산과, 처음 창조된 사람으로서의 아담에 관한 것뿐입니다. 누가 밖의 것을 생각하겠습니까? 그러나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내용들이 지금까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아르카나(arcana) 품고 있다는 사실이 충분히 입증될 것입니다. 실제로 창세기 1장은 속뜻으로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새로운 창조, 그의 거듭남을 다루며,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the Most Ancient Church) 다룹니다. 그리고 방식은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안에 품고 있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을 정도입니다. While the mind cleaves to the literal sense alone, no one can possibly see that such things are contained within it. Thus in these first chapters of Genesis, nothing is discoverable from the sense of the letter other than that the creation of the world is treated of, and the garden of Eden which is called paradise, and Adam as the first created man. Who supposes anything else? But it will be sufficiently established in the following pages that these matters contain arcana which have never yet been revealed; and in fact that the first chapter of Genesis in the internal sense treats in general of the new creation of man, or of his regeneration, and specifically of the most ancient church; and this in such a manner that there is not the least expression which does not represent, signify, and enfold within it these things.

 

해설

AC.4는 앞선 AC.1-3에서 제시한 말씀에 관한 원리를 실제 성경 본문에 처음 적용합니다. AC.1에서는 구약의 겉 글자 안에 하늘의 깊은 아르카나가 있다고 했고, AC.2에서는 말씀의 가장 작은 세부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이 생명 그 자체이신 주님을 가리키기 때문에 말씀에 생명이 있다고 했습니다. AC.3에서는 이러한 내적인 생명과 분리된 문자를 영혼 없는 몸에 비유했습니다. 이제 AC.4에서는 독자가 실제로 읽게 될 창세기의 첫 장들을 가리키며, 앞에서 말한 원리가 바로 이 본문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처음 밝힙니다.

 

스베덴보리는 먼저 문자적 의미에서 독자가 실제로 무엇을 볼 수 있는지를 인정합니다. 창세기의 첫 장들을 문자적으로 읽으면 세상의 창조와 에덴동산, 그리고 처음 창조된 사람으로서의 아담이 보입니다. 그래서 누가 밖의 것을 생각하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적 의미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오직 문자적 의미에만 붙들려 있으면 그 안에 있는 다른 것들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는 점입니다. AC.3에서 문자와 내적인 생명의 관계를 몸과 영혼에 비유했던 것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창세기 1장에 대한 AC의 첫 번째 결정적인 해석이 제시됩니다. 창세기 1장은 속뜻으로 일반적으로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 그의 거듭남을 다루며, 구체적으로는 태고교회를 다룬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빛과 어둠, 물과 궁창, 땅과 바다, 식물과 광명체, 동물과 사람, 그리고 여섯 날의 질서가 하나씩 해설되면서 이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따라서 AC.4에서는 그 세부 내용을 미리 설명하기보다, 창조 이야기가 속뜻에서는 인간의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는 큰 방향을 정확히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일반적으로구체적으로의 구별도 중요합니다. 창세기 1장의 속뜻은 한 인간이 어떻게 새롭게 창조되는가, 곧 어떻게 거듭나는가를 보여 주는 동시에, 구체적으로는 스베덴보리가 태고교회라고 부르는 교회의 상태를 다룹니다. 따라서 앞으로 창세기 1장을 읽을 때 개인의 거듭남과 교회의 상태 가운데 하나만 선택할 필요가 없습니다. 스베덴보리 자신이 AC.4에서 두 방향을 함께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태고교회가 정확히 어떤 교회이며 그 상태가 어떠했는지는 이후 해당 번호들의 설명을 따라가면서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마지막 문장은 앞으로 AC 전체의 해설 방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입니다. 창세기 1장은 대략적으로만 거듭남을 상징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가장 작은 표현 하나까지도 이러한 것들을 표상하고, 의미하며, 안에 품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AC.2에서 말씀의 모든 것이 가장 미세한 것에 이르기까지 영적이고 천적인 것들을 품고 있다고 한 선언이 창세기 1장에 직접 적용된 것입니다. 따라서 이후 스베덴보리가 단어 하나와 표현 하나까지 세밀하게 해설하는 것은 부수적인 관심 때문이 아니라, 말씀의 개별적인 것들에도 속뜻이 있다는 그의 말씀 이해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마지막 표현 때문에 표상상응이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생깁니다. AC.4 원문에는 실제로 표상하고(represent), 의미하며(signify), 안에 품는다(enfold)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앞으로 AC를 읽으면 자연적인 사람과 사물과 사건이 어떻게 영적인 것을 표상하고 의미할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만나게 됩니다. 그 관계를 이해하는 데 표상상응은 매우 중요한 개념이 됩니다. 다만 AC.4 자체는 아직 그 두 개념의 전체 교리를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여기서는 그 질문을 심화로 넘기고 본문에서는 창세기 1장의 가장 작은 표현까지도 거듭남과 태고교회에 관한 것을 품고 있다는 선언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따라서 AC.4AC 서문에서 하나의 중요한 경계선입니다. 앞의 세 번호가 말씀에는 속뜻과 생명이 있다는 원리를 세웠다면, 이제 AC.4는 그 원리를 창세기 1장에 직접 적용하여 창조 이야기는 속뜻으로 인간의 새로운 창조, 거듭남과 태고교회를 다룬다고 밝힙니다. 그리고 스베덴보리는 이것을 단순히 선언하고 끝내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페이지들에서 충분히 입증될 이라고 합니다. 이제부터 펼쳐질 창세기 1장의 세밀한 해설 자체가 바로 그 입증 과정입니다. (AC.4 해설)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 심화 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AC.4 심화1. ‘표상’(表象, representative) ‘표상’(表象, representative)이란 눈에 보이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 사건이나 행위가 그 자체를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더 내적인 것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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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 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AC.4 심화2. ‘상응’(相應, correspondence) ‘상응’(correspondence)은 스베덴보리의 말씀 이해와 천국 이해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자연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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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5, 서문, ‘주님의 신적 자비로 열린 영계의 증언’

AC.5이것이 참으로 그러하다는 사실은 주님으로부터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미리 말씀드릴 것은, 주님의 신적 자비로 말미암아 저는 이제 수년 동안 끊임없이, 중단됨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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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3, 서문, ‘문자는 몸이고, 속뜻은 생명이다’

AC.3이러한 생명이 없다면, 문자로서의 말씀은 죽은 것입니다. 이 점은 기독교 세계에 알려져 있듯이, 인간이 속 사람(internal man)과 겉 사람(external ma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과 같습니다. 속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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